제정사
고전 11:23-26
주의 만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전 11:23-26에 나타나는 바울의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3절에서 바울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문구를 해석하는 데에 논쟁이 있다. 즉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한 것과 같은 신비한 계시인지, 아니면 바울이 하나의 전통 -제자들 사이에서 구두로 전해 오는- 을 알고 있었는지. 이러한 논쟁은 그리 중요한 역할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유일하게 바울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 짧은 바울의 표현은 그 상황의 실존적 성격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포함하고 있다. 즉 이 식사는 보통 식사와는 다른 것이며 예수는 이 식사 후 잡히셔서 십자가로 향하게 되며 이것은 죄에서부터 구원의 역사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곧 진정한 양이신 예수께서 모두를 위해서 단 한 번 희생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이미 고전 5:7에서 예수의 죽음을 유월절 희생의 양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울은 신령한 음식과 음료가 얼마나 속된 음식 및 음료와 혼동 될 수 있는 가를 지적하기 위해서 "주님의 떡과 잔 (27절)"이라는 두드러진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 음식과 음료는 오직 주님 자신이 그에 효력을 끼치기 때문에 신령한 성격을 띄우고 있고 그래서 주님의 몸과 피와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기 현시를 계산에 두지 아니하고 따라서 주님의 만찬을 축하하고 있지 않는 예배 자는 누구나 성만찬에 적절하지 못하게 처신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가서 그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짖는다. 이것이 바울이 그의 기록에서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는 바울의 기록은 "이리하여 지금 높이 우신 그분은 그의 죽음에서 그가 단번에 우리에게 주셨던 것을 주님의 만찬에서 계속하여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잔은 아버지에 의해서 예수에게 계획되어진 신의 뜻이었으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희생의 잔"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의 만찬은 희생적인 식사, 주님의 희생적인 삶을 부어 주는 데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의 희생적 제공, 즉 세상에서 그의 몸이었던 것에 직접적으로 향하는 제공 안으로의 참여를 포함하고 있다. 이리하여 바울은 역사적 예수의 희생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책임적 존재를 말하며 그리스도의 재림 대망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서 Wiederholungsbefehl이 두 번씩이나 나타나고 있다. 곧 성만찬에 거행될 때마다 예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되셨다는 것이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억"이라는 것은 단순한 회상(R ckerinnerung)의 의미가 아니라 오늘에 있어서의 Vergegenw rtigung을 의미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가(14:22-24)와 마태(26:26-28)
마태와 마가의 주의 만찬 제정 기사는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학자들은 마가의 기술을 마태가 따랐을 것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둘 사이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마태 26:28에 추가된 "죄의 용서"부분이다.
마가와 마태의 기사에 나타나는 단어인 "언약"은 출 24:8에 근거하고 있다. 마가와 마태에 나타나는 성만찬 제정에 관한 모든 기사는 예수가 그의 언약과 관련된 그 자신의 피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언약은 주되심에 관련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 자신과 그의 백성 사이에 세우신 것에 대한 복종인 것이다. 또한 언약의 피는 그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언약을 효과 있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마가와 마태에서 발견되는 대명사 "나"에 대한 강조는 예수의 새 언약과 옛 계약 사이의 비교에 관련되는 것이다. 즉 마가와 마태는 예수의 말씀이 새 언약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잘못 이해 되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곧 잔 그 자체도 또는 물질적인 피도 이 언약을 효과 있게 하는 힘이 없으며, 십자가도 주님의 만찬 그 어느 것도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존재 형태 또는 새로운 하늘의 뜻을 보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마술이나 마법을 가르치려 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예수의 희생적인 삶과 연결시켜야만 한다. 즉 마가 14:24에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이라는 구절은 희생적인 의미를 가진 언어인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주는 삶(Selbst-Hingabe)에 기인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많은 사람"이란 단지 몇 명만이 아닌 모든 인간들을 위한 것임을 의미한다. 또한 마가 14:25에 나타나는 "포도의 열매"에 관한 언급은 세상의 종말에 있을 메시아의 식사를 예견한 것이며 이것은 동시에 현재적 종말을 암시하고 있다.
이 마가와 마태의 기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라는 사실이다.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는 새로운 모세로서,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로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써 (히 9:12) 새로운 완전한 계약 (히 9:26)을 맺은 것이다. 잔 속에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상에서 흘릴 예수 자신의 피였다. 이 피는 새로운 언약을 맺는 희생의 피였던 것이다.
누가 22:15-20
누가의 성만찬 제정 기사는 일반적으로 15-18절과 19-20절 두 부분이 합쳐진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누가는 독특하게 두 개의 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빵 전의 잔과 빵 후의 잔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누가가 성만찬을 유월절 식사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잔은 유월절 식사에서 사용되는 네 개의 잔 중 두 개를 언급하는 것이다. 19-20절에서 "너희를 위해 주는"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를 회상(Anamnesis)하면서 성만찬을 반복하라는 명령이며, 그리고 잔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예수의 피안에서 이루어진 새 언약과 관련된다. 이 누가의 기사에서 바울과 같이 회상으로서의 만찬을 반복하라는 명령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희망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또한 만찬을 하나님 나라에서의 메시아적 축제로 보고 있다.
종교 개혁시대의 성만찬이해
예수에서 시작된 성만찬은 초대 교회를 지나 종교개혁 전까지는 그리 큰 신학적 문제없이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을 발단으로 해서 로마 카톨릭과 개혁자와의 사이에서 성만찬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성만찬의 현장에 예수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느냐"이었다.
로마 카톨릭교회
로마 카톨릭교회가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성만찬에 대한 입장은 집례자인 사제가 빵과 포도주에 대한 축성(Konsekration)을 하는 순간에 이 빵과 포도주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해석 - 즉 화체설(Transsubstantiationslehre) - 이다. 로마교회는 이를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믿게 되었고 변할수 없는 교리로서 오랫동안 지속시켜 왔기에 지금도 동.서방교회에 정착되어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받으신 육체가 실제적으로 그 현장의 Elemente(빵과 포도주) 속에서 변화하여 성도에게 전달됨을 강조하면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들은 예배나 기도회, 그리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에서 분리시켰다. 이 화체설은 1215년 이노센스(Innozenz) 3세 교황 밑에서 행해진 공의회에서 확고한 교리로 확정되었다. 이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사제와 희생물이 그리스도 자신과 동일하며, 그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제단의 성례 안에 실제 포함되어 있으며, 신적 능력에 의해 그 빵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본질 변화한다." 이에 덧붙여서 공의회는 정당하게 서품 된 사제만이 성체 성사를 축성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당시에 신자의 영성체가 너무나도 드물어졌기 때문에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곧 부활절 때 성체 성사를 받지 않으면 안됨을 교회법으로 정하였다.
이 화체설은 1551넌 10월 11일 트렌트 공의회 13회기의 제 4장에서 다시 한번 명확히 공포되었다: "제4장 실체 변화에 대하여; 우리의 속죄주 그리스도는 빵의 형태 아래 봉헌된 것을 참으로 그의 몸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언제나 확신되어 온 것을 이제 이 성스런 공의회는 새로이 선언한다. 즉 빵과 포도주의 축성에 의하여 빵의 실체 전부가 우리 주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 변화하고 또 포도주의 실체 전부가 그의 피의 실체로 변화한다고 거룩한 카톨릭 교회는 이 변화를 실체 변화라고 부른다." 트렌트 공의회가 이상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한 가르침을 곡해하는 해석에서 지키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그것은 루터가 명백히 실체변화라는 가르침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가 이 전통적인 가르침을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루터의 성만찬 이해
일반적으로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대부분은 성찬이 희생 제사(Opfer)라는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몹시 반대하였다.
루터는 1520년에 저술한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 제도와 신학을 반박하고 있다. 여기서 루터는 성만찬에 관해서 로마 교회가 세 가지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신자에게 떡만을 허락하고 포도주를 주지 않는 것이다. 루터는 고전 11장 25절의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것은 일반 신도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으로 포도주를 일반 신도들에게 주지 않는 것은 성례전을 변질시키는 것이고 다 함께 참여함으로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되므로 잔을 허락하지 않는 것은 죄에 속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둘째는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의 과오를 지적했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은 마술적인 것이라고 표현한다. 루터는 An den christlichen Adel에서 화체설은 신조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의 설(Meinung)일 뿐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셋째로 카톨릭 교회가 성만찬을 희생 제사로 해석함을 지적한다. 루터는 성만찬이 희생 제사(Opfer)도 인간이 행하는 선업(gutes Werk)도 아니고 만찬이며, 그리스도가 이 만찬을 제정한 것은 믿는 자를 위로하는 신앙을 우리 마음에 불러일으키기 위하여서라도 역설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그리스도가 실제로 성찬에 현존(Realpr senz)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을 카톨릭과 같이 문자대로 믿었으나 카톨릭과는 다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가 성찬 시에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 안에, 함께 그리고 아래에서 (in, mit und unter dem Brot und Wein)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소유한?quot;. 이런 루터의 표현은 보통 Konsubstantiaionslehre라 불리지만 루터 자신은 이 용어를 사용치를 않고 있다. 루터는 성만찬과 하나님의 말씀을 연관시키고 있다. 그는 대 요리문답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단순한 빵과 포도주에서 구별시켜 주는 것은 말씀이고, 말씀이 외적인 요소(Elemente)와 결합할 때 그것은 성례전이 된다. 말씀으로 인하여 그 요소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짓말하실 수도 없고 속이실 수도 없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무소부재(Ubiquit t)를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우편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몸이 이 영광을 나눠 가짐으로 하려는가? 무소부재 역시 나눠 가지시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고 통치하시는 곳에 그리스도도 역시 육체적으로 임재 하신 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신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그의 기독론이 뒷받침되어서,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존재하는 곳에는 육적으로도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의 이론은 빵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성찬은 절대적 효과가 있어서, 악한 자들이 성찬을 받거나 집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나 신앙 없이 받아진 그리스도의 몸은 독약이며 죽음이다라고 주장되고 있다.
루터는 성찬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 "이것을 통하여 죄 사함을 얻고, 새 사람을 강화시키고 영양을 주며, 우리들의 신앙이 새로워지고 강화시켜 주는 양식과 자양물"이라고 하였고, 죽음에 대항하는 힘을 얻고 영생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능력과 유익을 받을 수 있는 자는 "이 말씀을 듣고 믿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쯔빙글리의 성만찬 이해
쯔빙글리의 성만찬론은 기념설 또는 상징설로 불려진다. 곧 "빵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한 희생제사에서 드려진 몸과 피의 표징들이다. 이 표징들은 몸과 피가 이렇게 드려진다는 것을 상징하며, 그리고 우리에게 구속사역을 회상시켜준다"는 것이다. 그의 성찬론의 중점은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 구속의 감사, 영적 연합에 있다.
쯔빙글리는 1523년의 저서 67개 논조에 대한 해설에서 "미사는 희생제사가 될 수가 없으며 단지 그리스도의 희생을 되새기는 회상(Wiederged chtnis)이며 구속에 대한 확신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서 그는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부인하고 빵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는 견지하였으나, 육체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은 부인하고, 믿음 안에서 영적 참여를 가르쳤다.
그가 이같이 주장하는 배경에는 성만찬 제정의 말씀에서 "est(ist)"라는 단어를 "significat(bedeutet)"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쯔빙글리는 성서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출애굽기의 "일곱 염소는 칠 년의 풍년이다" 또는 요한 복음의 "나는 포도나무이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등의 표현에서의 "이다"는 "의미한다"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표상은 성찬에 계시지 않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지리적 관념을 가지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지상의 성찬의 자리에 동시에 계실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후에 그의 신성으로만 편재하시며 그의 인성으로는 하늘의 일정한 장소에 제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쯔빙글리에게 있어서는 세례가 내적인 거듭남의 표시와 상징이듯이 성찬도 역시 한 표시이며 상징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서 그는 성만찬을 그리스도와 그리고 믿는 그리스도인들과의 공동 식사(Gemeinschaftmahl)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성찬에 있어서 참여자의 신앙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리스도는 본질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성찬에 임재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임재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임재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사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Eucharistie)를" 행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임재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쯔빙글리는 "das Essen des Glaubens", "geistige Speise"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진정으로 임재 한다고 믿는 바 그러한 임재 없이는 영적 교제(Kommunion)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조악하고 육체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종교적이고, 신앙적이고, 경건한 마음에 의한 영적인 방법에 의해서 먹히운다고 믿는다."
쯔빙글리는 1525년 4월에 Z rich에서 미사를 폐지하고 대신 성찬예배로 대치하였다. 이 예식은 청년들에게는 목요일에, 중년층은 24일에 노년들에게는 부활절 주일에 행하였는데, 이때 누룩이 섞이지 않은 빵과 포도주를 나무그릇에 담아 행하였다. 그는 1년에 네 차례-부활절, 오순절, 가을에 한 번, 크리스마스-성찬식을 행하도록 제안하였다.
Marburg회의
루터 파와 쯔빙글리 파의 양쪽의 신학적 이견을 조정하기 위해서 필립의 주선으로 자신의 성에서 1529년 10월 1일에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15개 조문에서 14항까지는 커다란 문제없이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15항인 성만찬에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이 회답은 끝을 맺었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표현하기를 "우리는 서로 다른 영을 가졌다"고 하였다.
칼빈의 성만찬 이해와 실제
종교개혁의 제 2세대인 칼빈의 성찬론은 다른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카톨릭의 비성서적인 성찬론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하였고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찬 논쟁을 거치면서 양자를 조화하려는 마틴 부처의 영향을 받아서 소위 "영적 임재설"로 정착하게 되었다.
성례전
먼저 칼빈은 성례전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외형적인 표로 확인하는 증거이며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례는 약속에 대한 인장이며, 언약의 표징이다. 그는 로마 카톨릭과는 달리 성례전에 참여하기 전에 무엇보다도 설교를 통해서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칼빈은 "설교를 들을 때 비로소 보이는 표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고 하였고 복음이 선행하지 않는 성례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이 성례전에는 반드시 성령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성례전이 정말로 자체의 직책을 수행하려면 내적 선생인 성령이 와서 마음을 감동시켜야 하며, 이 성례전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 없는 성례전은 아무리 거창하게 거행되어도 신앙을 북돋아 줄 수 없는 것이다.
성만찬
그러므로 빵과 포도주는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되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이며,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계속해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서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상징하는 표징"이라고 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으로서 빵을 받을 때 빵이 신체에 영양과 생명을 주어 신체를 유지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의 영혼에 힘과 생명을 주는 유일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성찬의 중요한 기능은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며(요한 6: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한 6:54) 선언하신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약속에 대한 인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은 그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고 칼빈은 설명한다. 그는 또한 성서 주석에서 "성찬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려고 준비된 기념물"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1542년의 제네바 신앙 문답서 제 362문에서 성찬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표이며 표시이다. 즉 이러한 예전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선언하고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성찬의 목적과 효과
성찬 제정의 목적에 대해 칼빈은 "주님이 그의 몸과 피를 주셔서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양육되도록 보장하기 위해서 이를 제정하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도록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며 더 나가서는 "주께서는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평화와 화목을 권장하며 고취하는 방법으로 성찬을 제공하셨다"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성찬은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자라며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의도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받으신 고난이 모두 우리를 살리기 위하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는 일생 동안 끊임없이 이 빵에 의해서 자라고 힘을 얻고 보존되므로 그 살리는 일이 영원하다는 확신도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칼빈은 성찬의 효과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구속과 의와 성화와 영생과 그 밖의 모든 은혜들이다"고 말한다. 또한 칼빈은 신자간의 일치의 효과가 있음을 설명한다. 즉 "주께서는 성찬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들에게 주셔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며 우리도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데, 주께는 한 몸이 있을 뿐이며 우리를 모두 그 몸에 참여하게 하시므로, 이 참여에 의해서 우리가 모두 한 몸이 될 필요가 있다. 성찬에서 제시되는 빵은 이 단결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성찬에 있어서 말씀과 믿음과 성령
칼빈은 우선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가 성찬에서 받는 은혜에는 모두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성례를 마술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면서 "믿음과 관계없이 받아들인 성례는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받는다"고 표현한다. 또한 성령이 동반하지를 않으면 성례는 유익이 없게 된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며,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이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며,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를 들어오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며, 성령의 능력이 우리와 멀리 계신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속에 들어와 영의 양식이 되도록 결합시킴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칼빈은 불신자의 성찬 참여를 반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임재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적으로 임재 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따라서 화체설을 반대하며, 쯔빙글리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편재 설도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반면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성만찬에 임재 함을 말한다. 그는 "성찬에 대한 소고"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 거룩한 의식의 효과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하며 이적 적인 능력으로 그것이 효력을 발생하게 된다고 주장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안에 참예의 띠가 된다"고 주장해야 한다.
성만찬 실제
칼빈은 "성찬을 자주,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집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1537년 제네바의 소 의회의 대표로서 제네바에 있어서 교회와 예배의 조직에 대한 문서에서 성만찬을 자주 - 일주일에 한 번씩 - 집행하기를 주장했었으나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Stra burg에서는 월 1회씩 성찬식을 집행하였다. 그는 1541년에 재차 제네바의 소 의회에 성만찬을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씩 행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다시금 거절되었고 이에 대해 의회는 일년에 4회의 성만찬 집행을 결정하였다.자료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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