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요한계시록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은 새 창조의 계시이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종말에 관한 책이 아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요한계시록을 세상의 종말을 말하고 있는 책으로 읽고 있다면 그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신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 이루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예언이다. 요한계시록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종말을 말하고 있는 점서가 아니라 그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는 지를 계시하고 있다.
계시란 무엇인가. 감추인 것을 열어 보임이다. 요한계시록은 우리 모두에게 감춰있던 영과 생명의 실상을 열어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그 열린 책은 도리어 닫힌 책이 되어 있다. 이는 사람들이 욕심의 눈으로 그 책을 읽으며, 들으며,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이 영과 생명을 지향하지 아니하고 육과 생존을 지향하고 있으면 계시는 점(占)이 되고 만다. 오늘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요한계시록은 종말론(에스카톨로지) 이란 이름으로 읽고 있는 이들이 많거니와 이런 일은 요한계시록을 점서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론은 생명을 사망으로 바꾸고 있다. 그런즉 영성은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에 달렸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묻기를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였다. 예수 대답하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셨다. 우리의 성경 읽기의 알파는 성경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느냐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오메가는 그 기록을 어떻게 읽고, 듣고, 말하며, 마음에 새기며 자신의 실존이 되게 하느냐 인 것이다. 우리의 성경읽기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 온전한 짝을 이루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느냐를 아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곤혹스럽게 한다. 이는 요한계시록이 징조로 계시되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징조로 보여 진 새 창조의 복음이다. 그런즉 징조와 새 창조가 요한계시록을 읽는 알파와 오메가다.
예수 말씀하시되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다. 그런즉 그의 계시는 영과 생명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점으로 오해하기도 하고 또 점을 예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예언과 점의 차이를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영과 생명의 예언과 육과 생존의 점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 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언은 육신의 첫 사람이 영의 둘째 사람으로 새롭게 지어지는 그 실존을 증거 한다. 그러나 점은 점치는 자와 점침을 받는 자의 실존과는 상관없는 길흉화복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으며, 들으며, 마음에 새기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이 우리의 실존이 되게 하려 함이지 세상의 종말을 미리 알아 이득을 보려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서 이루어지는 자신의 새로운 실존과는 상관없이 미래에 복을 얻겠다고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을 점서로 읽는 것이다.
요한은 우리의 실존적 시간(카이로스)을 좇아서 우리 안에 무엇이 새롭게 창조될 것인지를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점치는 자들은 우리의 흘러가는 시간(크로노스)을 좇아서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아내려 한다. 그런즉 우리가 어느 시간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계시록은 예언이 되기도 하고 점이되기도 한다. 성경에는 분명하게 두 가지 시간이 제시되어 있다. 영의 소욕을 좇아 사는 자의 시간인 카이로스와 육신의 소욕을 좇아 사는 자의 시간인 크로노스이다. 크로노스는 우리의 처음의 때이며, 카이로스는 우리의 나중의 때이다. 처음의 때에 사는 자에게는 요한계시록은 점서이며, 나중의 때에 사는 자에게는 요한계시록은 예언서이며 징조서이다. 예언이나 징조는 모든 사람에게 나중의 때 안으로 들어와서 영과 생명 안에서 새롭게 지어지도록 하는 복음이다.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새로운 실존이 창조 되는 지를 예언하며 증거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알파와 오메가에 대하여, 처음과 나중에 대하여, 시작과 끝에 대하여 예언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시는 알파에서 오메가에 이르기까지 일관 되고 있다.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의 계시의 일관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임재는 처음에서 나중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이다. 처음과 나중은 하나님의 임재의 역동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온전하다.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온전성 이다. 그런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그의 일관된 계시와 그의 역동적 임재와 그의 온전한 일하심 속에서 풍성하고 온전한 실존으로 지어져 간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그들 안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자녀의 실존을 온전하게 이룰 것을 믿는다. 그런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이름과 실존이 하나 되는 예언의 삶을 산다. 예언이 성취되지 않으면 그 예언은 그들 안에서 실패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이름에 맞는 실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면 그들이 가진 예언과 이름과 기도는 모두 헛 것이다. 육신의 첫 사람이 영의 둘째 사람이 되는 역동적, 초월적 실존이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가진 예언과 이름과 기도는 그들에게 점(占)으로 작동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단순히 예언이나 이름을 받은 자가 아니라 그 예언이나 이름의 실존을 이루는 자이다. 요한은 이름과 실존이 하나인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 하였다.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을 받은 자는 자기의 육신의 생각을 떠나 하나님의 영의 생각 안으로 들어온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은 자는 자기의 믿음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으로 들어와서 그 증거의 실존을 이룬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름이 주어졌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로 실존을 이루는 자 하나님의 자녀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 안에 소원을 두시고 이루고자 하는 그 영과 생명을 증거하고 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그 마음을 닮게 하는 그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에 관한 기록이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이 곧 생명이요, 거룩이요,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세기를 잘못 읽으면 요한계시록 또한 잘못 읽게 된다. 창세기는 알파요, 처음이요, 시작이며, 요한계시록은 오메가요, 나중이요, 끝이다.
우리가 창세기를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첫 창조에도 처음과 나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이 일이 분명하게 이해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를 그릇되게 읽고 있다. 성경은 창조와 만듦(온전케 함)을 구분 사용하고 있다. 창조는 알파요, 온전케 함은 오메가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알파는 ‘바라’(창조하다)로, 오메가는 ‘아사’(만들다, 완성하다)로 계시되고 있다. 없는 것을 있게 하는 것이 ‘바라’요, 있게 된 것을 다시 온전케 하는 것이 ‘아사’다. ‘바라’는 헬라어로는 ‘크티조’이며 ‘아사’는 ‘포이에오’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와 일하심을 좇아서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새롭게 읽어 보면 그 기록을 두고 있어 왔던 수많은 추측과 억설은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모든 성경은 징조서이다. 징조를 보여 주며 징조를 해석한 책이며 또 해석할 징조가 풍성히 담겨져 있다. 이는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의 일을 성경이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의 계시를 알파와 오메가로 나누어 보면 알파는 1~2절이요, 오메가는 3~31절이다. 기록된바, “근원 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 하시니라.” 하였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대하여 수많은 추측과 억설을 주장해 오고 있다. 알파에 속한 것은 오메가에서 완성되기까지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처하여 있다. 혼돈은 질서가 올 알파요, 공허는 충만이 올 알파요, 흑암은 빛이 올 알파다. 혼돈에 질서가 오고, 공허에 충만이 오고, 흑암에 빛이 오면 오메가다. 알파는 오메가를 위하여 있고 오메가는 알파를 온전케 하면서 둘이 하나를 이룬다. 하나님의 첫 창조에 알파와 오메가가 있었듯이 하나님의 새 창조에도 알파와 오메가가 있다.
하나님의 첫 창조가 알파인데 그 첫 창조에 처음과 나중이 있고 시작과 끝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새 창조가 오메가인데 그 새 창조에 처음과 나중이 있고 시작과 끝이 있다.
첫 창조에서는 만물이 먼저 창조 되고 사람이 나중에 창조 되었다. 그러나 새 창조에서는 사람이 먼저 새롭게 지어지고 그 후에 만물이 새롭게 된다. 이순서는 바뀌지 아니하며 바꿀 수도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창조 하셨으며 또 어떻게 새롭게 창조하고 계신 지를 창세기의 기록을 좇아서 살펴보자. 기록된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모양과 같이(베짤메누 키드무테누)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 안에서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여자와 남자를 창조 하셨다.”(창1:26~27)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또 그를 새롭게 지으신다 . 하나님은 육신의 첫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에게서 영의 새 사람을 지으신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도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 있다. 하나님은 2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만들자’(나아쉐 아담) 하셨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온전하게 지으실 지 먼저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계시의 알파이며 모든 사람에게 주신 예언이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의 처음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제 ‘하나님의 모양과 같이’ 사람을 새롭게 만드시는 일이 오메가이다.
‘베짤메누’는 우리의 형상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형상 안에서’ 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마음이 가진 생명이요, 거룩이요, 사랑이다. 곧 그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사람이 그의 마음 안에서 그의 마음을 닮도록 하셨다. 즉 ‘우리의 모양과 같이’ 사람을 만들자 하셨다. 이와 같이 알파의 계시는 오메가의 실존을 이루기 위하여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닮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새롭게 지으시는 예정이 곧 ‘베짤메누 키드무테누’ 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토기장이에 비유하고 있다. 토기장이는 흙을 떠다가 체로 처서 고운 가루(아파르)를 만든 후 청정한 물로 반죽하여 그 마음에 원하는 형상을 좇아서 그릇을 빚는다. 그런 후 그 빚어진 그릇의 형상을 그늘에 말려서 불가마에 넣어 구워낸 다음 자신이 원하는 용도 대로 사용한다. 이 토기장이의 일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을 징조하고 있다.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일을 징조하고 있다. 토기장이도 그 중 하나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어 그늘에 말리는 데까지가 알파요, 오메가는 그 빚어진 형상을 불가마에 넣어 구워내고 자신이 원하는 용도에 쓰는 일이다. 그러나 잘 보라, 처음의 일에도 시작과 끝이 있고 나중 일에도 시작과 끝이 있다.
토기장이가 토기의 원료인 흙이나 물을 창조하지는 못했을지라도 흙가루와 물로 토기를 빚은 것은 없던 것을 있게 하였으니 하나님의 ‘바라’를 징조하고 있다. 그가 빚어진 토기의 형상을 불에 구워 새로운 그릇이 되게 하였으니 하나님의 ‘아사’를 징조 하고 있다. 처음 것과 나중 것은 모든 점에서 같은 형상을 가졌으나 나중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다. 처음 것은 토기장이가 그 마음의 형상을 좇아 빚어졌고 나중 것은 그 형상 안에서 전혀 새로운 물질로 변했다. 이 일은 육신의 첫 사람이 어떻게 영의 둘째 사람으로 새롭게 지어지는 지를 가리켜 보이는 징조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의 모양과 같이 지어져 가는 지는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그가 만물을 다스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그를 다스리신다. 이 다스림은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그의 마음 안에 계실 때 가능하다. 이와 같이 사람도 모든 생물 안에서 다스리며 그들이 또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에 참여케 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모든 생물의 새로운 다스림의 관계성을 좇아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신 온전한 다스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그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다. 그럼에도 그는 어느 누구 위에 군림하지 않으셨다. 그는 늘 그의 다스림을 받는 자들 ‘안(in)’에서 섬기는 자로 계셨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실 때 ‘그들 안에서 다스리라’(reign in them) 하셨다. 그러나 첫 사람은 욕심을 좇아 살면서 계속 ‘만물 위에 군림하고’(reign over them) 있다. 사람의 다스림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하나 되게 한다. 힘이나 권세로 군림하는 것은 억압과 압제일 뿐 그것으로는 둘이 하나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둘째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닮게 되고 또 그의 다스림을 받는 자 안에서 섬기는 자로 있으며 하나 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말할 때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영어 등은 ‘안으로’ 라는 전치사가 있어서 그 동사와 함께 사용되고 있으므로 믿는 자가 어디에 거하고 있는지 분명하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believe in God)는 것은 믿는 자가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 들어와서 그의 생명과 사랑과 거룩을 본받아 그와 같이 되고 또 그와 하나 된다. 하나님의 모양과 같이 된 자는 하나 됨의 다스림을 피조물 안에서 행한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셨다.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신 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마음 안에 거하라는 징조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아담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좇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지 말라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아담에게 징조를 주셨고 또 그 징조가 무엇인지 알게 하셨으나 그는 욕심을 좇아서 하나님의 마음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사야는 새 창조의 알파와 오메가에 대하여 두 가지 길을 말하고 있다. 알파는 광야에서 야웨(실존)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요, 오메가는 우리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대로(大路)를 곧게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유일하고 고유한 실존이 되는 것이 야웨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요, 오메가는 그 실존을 이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사랑의 대로(大路)를 걸으며 대동(大同)을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그 모두 안에 있는 온전하고 풍성한 대동(大同)의 새 창조를 이루신다.
오늘날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으며 들으며 마음에 새기는 것은 요한을 통하여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이 우리의 실존이 되게 하려 함에 있다. 즉 요한에게 온 계시가 우리에게 온 계시가 되게 하고 요한이 산 그 증인의 삶이 우리의 증인의 삶이 되게 함에 있다.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졌듯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그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이다. 우리에게 말씀은 알파요, 증거는 오메가이며, 말씀은 징조이며, 증거는 실존이다. 이 둘이 온전한 하나를 이루는 것이 새 창조이다.
요한계시록은 징조로 계시된 새 창조의 복음이다. 징조는 알파요 실존은 오메가다. 징조와 실존을 혼동하면 미혹에 빠진다. 요한계시록은 특별히 그러하다. 요한계시록은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의 일을 숫자와 상징으로 열어 보이고 있다. 보이지 아니하는 일을 계시 하려고 많은 숫자와 상징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에 미혹되어 그 징조를 실상으로 붙들고 있다. 숫자와 상징들은 영과 생명 안에서 해석되어야 할 징조들임을 잊으면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점서가 되고 거치는 반석이 된다. 징조와 예언은 처음이요, 실상과 실존은 나중이다. 처음은 나중을 위하여 있고 나중은 처음을 온전케 한다.
모든 성경은 영과 생명 안에서 통짜로 읽어야 한다. 이리 저리 쪼개고 나누어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과 생명은 사라지고 얻는 것은 육과 욕심과 사람의 생각과 길 뿐이다. 이는 마치 산 사람을 해부하는 것과 같다. 해부된 사람에게서 생명은 사라지고 더 이상 함께 거할 수 없는 죽은 육체만 남는다. 만일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영과 생명을 읽지 아니하고 육과 생존을 읽고 있다면 즉시 읽기를 그쳐야 한다. 이는 우리가 새 생명의 책을 사망의 책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점서로 읽고 있는 그것에서 떠나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새 창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우리 안에 영과 생명으로 드러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새롭게 창조될 수 없다. 종교도, 도덕도, 윤리도, 수양도, 사회정의도, 교리도, 그 무엇도 새 창조에는 무용하다. 그 모든 것은 첫 사람에게나 유용할 뿐이다. 이런 세상 가치에 집착하면 할수록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에게서 더욱 멀어져만 간다.
교리를 들어 말해 보자. 그것이 교의라 불리든, 신조라 불리든, 신념이라 불리든, 전통이라 불리든, 다른 무엇으로 불리든 상관이 없다. 교리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 속한 종교인을 만들 뿐이다. 교리는 깨달았다는 사람의 지혜와 지식과 생각과 상상과 욕심을 좇아서 만들어 진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의 계시를 순결한 마음으로 받지 아니하고 사유 과정을 통해서 사람의 지식으로 만든 것이다. 교리는 지식에 불과하다. 지식은 지식을 낳을 뿐 생명을 낳을 수 없다. 생명만이 생명을 낳는다. 생명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생명을 낳을 수 없다. 아무리 교리가 생명을 잘 정의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의 지식일 뿐이다. 어느 누가 사람은 이러하다 정의 했다하자 그것은 다만 정의일 뿐이지 그것이 사람을 낳는 것이 아니다. 사람만이 사람을 낳고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을 낳는다.
교리는 생명을 말해보고자 나왔지만 그냥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침내 생명의 계시 위에 군림 하게 되었다. 생명의 계시가 교리에 질식당하는 것이 오늘날 종교인들이 처한 상황이다. 교리는 왕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교리를 섬기는 종이 된 지 오래다. 오늘날 수많은 교파와 교리가 각기 자기가 진리를 좇는다고 주장하며 싸우고 있지만 정작 생명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그들의 교리가 옳다 한들 무엇 하겠는가. 교리에는 생명이 없다. 무덤에 묻어야 할 시체다. 오늘날 사람들이 무덤에 묻어야 할 것들을 붙들고 있어서 그 송장 썩는 냄새가 온 땅에 진동하고 있다.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의 실존으로 지어지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계시에로 돌이켜야 한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온전히 새롭게 읽어 보고자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이 처음 것들을 낡아지고 지나가게 하신 것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나중을 있게 하려 하심이다. 나중은 새로움이요, 영원함이지 종말이 아니다. 부활의 실존에겐 종말은 없다.
이 글은 인자의 기도를 좇아서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영과 생명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다. 이 글이 조금이라도 안내가 되었다면 그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그 안에 풍성하고 온전하게 드러나도록 날마다 새롭게 읽어야 한다. 영과 생명 안에서 자신의 두 발로 서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것은 자신 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므로 그는 역시 사람의 지식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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