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healing)와 치료(cure, treatment)란 용어는 그 엄밀한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주 섞여 사용되고 있다. 주된 까닭은 아마도 병(病)과 관련된 용어 사이의 미세한 어감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의학적 용어가 서구과학의 근대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영어에서 병과 관련된 몇가지 용어를 먼저 살펴보자. Sickness, Illness, Disease와 같은 용어들인데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Sickness는 가장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써 우리가 흔히 “아프다” “앓는다”라고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즉, 마음이 아플 수도 있고 물리적인 신체의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는, 전인적인 인간이 느끼는 주관적, 객관적 고통 또는 불편함을 통털어서 칭하는 단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이 Sickness란 용어는 Illness와 Disease를 다 포함한다.
“편하지 않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질병(illness) 이란 단어는 정상, 안녕(well-ness)과 반대되는 용어이다. 이는 구체적인 치료(cure, treatment)의 대상으로서의 질병인 Disease와는 그 의미가 구별된다. 즉, illness는 주관적 경험이 내포되어 있으며 타인, 사회. 문화등 주위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존재론적인 가치의식이 개입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흔히들 Illness를 사회적 질병, Disease를 생리학적 질병이라고도 부른다. 치료(Cure)란 용어는 Disease를 다루는 과정과 그로 인해 기대되는 효과를 말하며, 치유는 인간을 원래의 안녕well-ness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 때, 치유는 치료를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질병의 치료가 치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혀와 입 안에 종양이 자라는 설암/구강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는 두 환자의 예를 들어보자.
한 환자는 수술과 항암제 치료를 받고서 성공적으로 암세포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환자는 아주 심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게 된다. 말을 할 수 없게 된 현실을 비관하고 추하게 변한 얼굴 모습에 자괴감을 느낀 나머지 가족과 친구들도 멀리하고 혼자 외로움 속으로 파고 든다.
똑같은 암을 가진 다른 환자는 불행하게도 치료에 실패하고 만다. 암은 계속 재발되고 확산되었고 수년간 참아내기 힘든 치료과정을 반복해야했다. 그러나 한 번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버리지 않았다. 그 환자가 죽은 후, 그와 함께 고통을 나누었던 가족, 친지, 친구들 그리고 병원 관계자들은 그가 죽기 며칠 전 힘들여 쓴 것으로 보이는 감사와 위로의 편지를 받고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다.
한 사람은 치료되었으나 치유되지 못했고, 다른 한 사람은 치료엔 실패했으나 치유엔 성공한 것이다.
또 다른 예화는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가복음 17장 12-19절엔 예수가 문둥병자 열명을 치료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열명 중 한 사람 만이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었다고 한다. 예수는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묻고서 돌아온 이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한다. 10명이 치료를 받았으나 오직 한 사람 만이 치유된 것이다.
위 복음서 내용은 또한 1세기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사회적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당시 명예와 수치는 지고한 사회/문화적 핵심 가치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질병(Disease)은 신체 기관의 이상이며 적절한 생의학적 처리(treatment)에 의해 고쳐질(cure)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는 원인을 규명하고 치료하는 의미에서의 질병(disease)이란 개념이 없었다. “아프고” “앓는” 모든 일들이 사회, 문화적으로 규정되어 있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서가 말하는 병자들을 생리적 질병에 시달리는 오늘날의 병자들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복음서의 병자들은 당시 사회/문화적 특히 종교적으로 ‘수치 (부정함)’라는 멍에를 지고 있는 사람들을 칭한다. 그러므로 복음서가 주목하는 것은 병(disease)을 뛰어 넘어 인간에게 가해지는 비정상적인 사회적, 종교적 제한이라는 질병(Illness)이다. 치유의 본질은 인간의 삶을 해치는 아픔 (Sickness)으로부터 (그 원인이 생리적인 병disease든 사회/문화적인 병illness이든 관계없이) 개인적, 사회적 의미를 되돌려 주려는 시도인 것이다.
예수가 치유한 많은 병자들 중 당장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이 거의 없었음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굳이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친 (마태복음 12장 10-14) 이유는 무엇일까? 손마른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다음날 고쳐 준대도 달라질 게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예수는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쳤다.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어떻게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게 할 일을 일부러 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예수가 ‘수치 (부정한 자)’의 낙인이 찍힌 개인의 치료를 통한 회복에만 몰두했더라면 그 사회는 여전히 수많은 ‘수치’와 ‘부정함’을 만들어 낼 것이다. 결국 그 낙인을 찍은 사회/종교적 질병을 치유하지 않고선 참 생명을 이야기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굳이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친것 아닐까? 예수의 많은 치유 이야기들과 안식일을 대하는 관점 그리고 성전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치유가 곧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치유의 의미를 올바로 인식하고 있는가? 혹시나 병(Disease) 을 치료하는 은사에 열광하면서 한 편으론 사회적/종교적 질병(Illness)의 치유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도리어 질병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물론 우리는 치료와 치유,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관심은 치유가 되어야 한다. 기도, 명상, 대중 집회등을 이용한 치료의 효과는 다른 종교나 뉴에이지 같은 컬트, 또는 단순한 식생활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히 기대되는 현상이며, 기독교라고 해서 특별히 우월하다는 증거도 없다. 그러나 치유의 과정과 효과에는 그 어떤 종교나 컬트와 구별되는 기독교 만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점이다. 부흥회나 기도회에서 병이 나았다는 사람들 이야기 보다, 그들의 삶이 치료 전과 후에 과연 어떻게 변화되었는 지가 더 궁금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상처입은 생명의 의미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예수가 행한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질병 치유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치료되지 않았거나 치료될 수 없는 자들 그리고 관계성의 상처(illness)로 고통받는 자들을 치유하는 은사를 받은 진정한 치유자(Healer)를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