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독 론
이 승 구 교수
기독론 제1강 과목소개
1. 주경신학 (EXEGTLCAL THEOLOGY)성경신학과 다르다
2. 조직신학 (Systematci Thealogy = Ftogmetilo)
조직신학은 주경신학바로 다음작업이다. 어떤사람들은 “신탁은 필요없다 성경을 가지고오라”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까지도 자기 머리속에는 신탁체계가 다들어 있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은 누구신가 ? 예수님은 누구신가등)
3. 역사신학 (Historical Thealogy)
4. 실천신학 (Praetical Thealogy)이는 신학의 영광이다.
1) 서론 (lntoduction)
2) 신론 (Thealogy proper)
3) 인간론 (A기 Thoparogy)
4) 기독론 (chistelogy)
5) 구원론 (sotoialogy)
6) 교회론 (ealeriology)
7) 종말론 (exchatology)
제 2강 예수의 선포와 도전 그의 사역
들어가기 전에 다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
1. alexandia에서 많이 사용하던 사고방식이다:
Chrdstology from a bote 위로부터의 시탁 (기독론)
2. antioch 에서 많이 사용하던 사고 방식이다 :
christoloty from below 아래로부터의 신탁(기독론)
3. 차이 :
1) 1번은 신자들이 취급하는 방법이고 2번은 자연인들이 취급(접근하는)방법이다.
2) 제자들은 어떤의미에서 2번 입장인지로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줄 완전히 알고 예수를 따른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딸라 다니면서 보고 듣고 가르침을 받다가 보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줄 깨달았던 것이다.
3)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3번을 좋아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위로부터의 신학, 곧 로고스로부 터 씨작하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고 공관복음서를 좋아한다. (이들이 요한복음서를 좋 아하지 않는 이유는 요한복음이 A 90년 이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믿을수 없다는 것이다.)
4) 현대 젊은이들로 2번을 좋아한다(그래야 자기들의 지설이 충족되는 것 같다) 이 방법은 예 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단정하지 말고, 예수가 어떤 사람 이였나를 검토해 보고 만나보 고 말하자는 것이다. 이들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 입장과 같다.
4.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1번이다. 하지만 본 강좌에서는 21번의 입장에서 공부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예수의 성육신에서 시작하지 않고 (1번 입장이라면 예수의 50육신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심에서 출발 (기독론을)해야한다 ) 예수의 선포에서 부터 공부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2번을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방법으로 공부해 보자는 것일 뿌닝다.)
예수의 첫번째 선포는 막 1:115의 하나님의 나라였다.
MK 1:15 보자 (처음외침)
1)“때가 찼고”(크로노스:연대기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역대기를 ‘크로니컬“1라 부른다) 단어는 크로노스인데 뜻은 카이로스 (KLCPO'S: 질적인 시간으로써 하나님의 깊이 생각해 놓은 시간을 말한다)이다 (*단어도 KLCPO'S로 되어 있는데....? 옮긴이)
2)“하나님의 나라”가 가가이 왔느니
(1)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하나님 나라)
(2) 마 4:17에는 “천국(天國)이 가까왔느니라”고 되어있다.
① 천국 (βασιλεια του Ουρανων)
나라 하늘
② 여기서 ”하늘“나라는 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③ ’하나님‘을 말한다. 다음의 예를 보자
a 눅 15:18...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으니
b 단 4:26....하나님이 다스리는 줄.....
(3)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는 같은 것이다. 다만 마태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마태 복음을 썼기 때문에 그들의 관습에 의해서 ”하늘“(천국)이라고 했을 것이고, 마가는 이방 인을 상대로 썼을 것이므로 ”하나님이다“(하늘이라하면 하나님을 뜻하는 것인줄 이방인들 을 잘 모르다)라고 했을 것이다.
3)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천국복음)을 전하려 오셨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나 라에 대해서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또는 사람들이 벌써 하나님 나 라에 대해서 선이해(알고있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4)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 구약에서는 ”말쿠트“라고 하는데 이는 ”통치“(rale of god)를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표현들을 보면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다‘라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의자에 앉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좌에 앉는다‘라는 말은 ’왕이 보좌에 앉는다‘는 말이며, 이는 그가 ”통치“하심을 나타내는 말인것이다. 구약 에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통치를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하실 날을 기다려 왔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역사의 종국이 되면 특별한 의미의 통치를 시작할 것 ‘이라고 보았다. 유대인들은 종말에 대해서 ”두 세대“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자신들은 이 세대에 살고 있는데 얼마 안 있으면 오늘 세대가 올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 세대에 서도 하나님이 통치하시지만 오늘 세대에서는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보았 다.)
The Age to come
This Age ꠑ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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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은 어떠한가? mtlif 보자 ”나라에 임하옵시며....“이는 아 직 그 나라가 임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 즉 아직 도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았다는 것)에서는 예수의 생각과 유대인의 생각은 같다. 그러나 예수는 다른 한편에 서 (마4:10)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다(그런데 여기 ”가까이 왔다“에 주의는 너무 기울여 예수의 가르침을 아주 잘못 이해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아베르트 슈바이처이다. 그는 말하 기를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온다고 선포했다“고 한다.:
코너를 돌아가기 직전 상태에서
5초전 상태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고 본다.(5초 후면 온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으므로 눅9:51대로 죽기로 굳게 결심했다는 것이다.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올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ㅅ 죽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 몸을 찢겨 걸고 넘어가고 말았다 고 보았었다. 이것은 슈바이처 박시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논문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 게 한가지 수헌을 한것이 잇다면, 종말론에 대해서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게 한것이다)그렇 다면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마12:28을 보자
”내가.....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 예수는 이미 여기 와 있다고 했다.
2) 한국 사람들은 죽으면 간다고 한다.
3) 다미 선교회 등의 사람들은 앞으로 온다고 한다 (유대인, 슈바이처)
4) 적용 : 우리가 가지고 잇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버리자 (바꾸어라)
그렇다 예수에게 새롭게 온 계시자 여러개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대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대 중간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이다. 겹쳐 있는 부분이 바로 ” 종말“이라 부르는 것이다 (Eschaton)
초림 재림 오는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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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 재림하실때 하나님의 나라는
결정적으로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의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과거에 유리는 이 세대 끝에 예수께서 재 검하실 한 날을 종말이라 불렀다. 그러나 예수는 이 세대 안에서 벌써 종말이 시작 되었다 고 한다. (마12:28)이 외에도 많은 근거가 있다.
1) 행2:17에 베드로는 요엘선지자의 ”말세“(마지막 )개념을 오순절에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 다.
2) 히1:1에도 기자는 ”이 모든날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잇다. 이 개념은 행2:17 말세와 정확 히 같다.
3) 자세한 것은 보스의 ”바울의 종말론“참고 (1장)
또 눅 17:20을 보자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여기서 예수의 정 확한 의도는
1) 현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볼수 없게 임한다는 것인 이나라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나라 (spiraual kiugdon)라는 것이다.
2) 그러나 장차에 잇어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때(권능으로 임하는때)가 있 다.
3) 그러면 “영적인나라”라고 했다고 해서 없는것인가? 영혼이 안보인다고 해서 없는가?아니 다 어디에 있는가?“...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1) 지금 영적의 나라를 이야기 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영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나라는“우리 심령에 있다”고 할수 있다.
2) 그러나 이 해석의 한가지 단점은 지금 예수께서 이야기 하고 잇는 대상이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에 그들 심령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리 없다. 그래서 “우리 심령안에”라기 보다 “너희 가운데”(in the midst of you)또는 “~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이다.
3) 오늘 ”너희 중에“(among you,셋이상일때)라고 보아야 한다.
유대인들: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이 있는 곳에 예수님의 인격이 있는곳에 임하여 온 다는 것이다.
4) 또 in the reach of you”너희 들이 닿는 그곳에“
5) origen은 예수 ”그 자신이 왕국이다“라고 했다.
(άυτο βασιλεια): 이는 좋은 표현이다.
마 11:11보라 ”하나님의 나라는 침소를 당하나니...“
1) 당하나니 :형태는 수동태이데 뜻은 능동의 뜻을 가지는 중간태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침 소를 한다“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 (이떼부터 예수의 사역이 사직 되었다.)이후부터 하나 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침소한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다)그러며 침소해 오는 나라에 대해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한는가에 다라 그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 다(자신의 운명좌우)
이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주요한가에 대해서 가르쳐주기 위해 예수는 비유를 사용하셨다. (마 13: )
1)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은니...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 니라 “
(1) ”천국은“하였으므로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이다.
(2) 자기 소유다 보라 귀하다.
2) 마 13:45 ”천국은 마치 죽은 지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 라”
(1) 그 사람은 진주전뭄ㄴ 장사이므로 자기 모든것은 팔아서 샀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 할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진주를 모르니까
(2) 자기 권소유 보다 귀하다.
D-day V-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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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림 재림:이날은 consummatin(극치,절정)이 라고 하자, 완성이라고 하면 지금 와 있는 하나님 나라가 미완성이 라는 의미를 주기 때문에 좋지 않 다.
개혁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 하나는 언약이다. 이 언약에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데 하 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잇다. 이나라는 예수에게서 이루어졌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음 두 비유가 쓰였다.
1)겨자씨 비유 (마 13:31 - 32)
2) 누룩비유 (마11:33)이 비유들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다. 오스카쿨만은 유럽인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그점을 하나님의 나라게 적묘했다. 그래서 예 수께서 사단을 결정적으로 이기시고 승리하신 날을”d-day"라 하고 그가 다시 재건하셔서 극치,절정에 다르게 할 날은 "r-day“라 했다 (d-day는 로즈망의 상륙작전을 말한다) 예수 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신 후 시험을 보았다 (그들이 이해하고 잇는가를 물어 보았다. (마 16:13-17) - 마16장은 공상애 마지막 부분니다.
1) 사람들을 나를 누구라 하느냐? 14절 보면 아무도 예수를 바로 인식하는자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재차 묻는다.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절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게신 하나님 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
(1) 그리스도 (xpcotos= messiah )그 당시 예수의 모습을 보고 메시야가 말하는 것은 혁명적인 것이 었다 (선언) 왜냐하면 메시야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와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영과 스럽게 나타나야 하는데 예수를 보니 영광은 고사하고 자꾸 죽으려고만 한다. 자기들 생각에는 메시야 개념에 안 맞지만 petu은 messiah라 고 백한다. 그가 3년은 함께 다녀 봄으로써 ”이 사람이 누구냐?“라 고민하며서 나름 데로 내린 결론이 ”이 사람은 메시야 이다!“라 는 것이다.
(2)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해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예수의 신성을 지시해 준다. 즉 성자의 아 버지 되신 분께서 알려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이루는가?바로 예수가 이룬것이다 여기에는 2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하게 ’신중심적‘(theo-contric)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언더라인 하던지 점을 찍던지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자는 일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다 (베드로의 고백의 핵심이 이것이다)그러므로 인간이 하나 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간은 기껏해야 그의 백성의 종노릇 역확 을 할 뿐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역동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dynamic) 역동적이란 말은 힘을 가지고 움직여 나간다는 것으로 정적이고 정지된 것이 아니다. 눅10:18은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성격을 잘 보여준다. “사단이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느니 라”이 말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역사해 나갈때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이락 하셨 다. (아래 견해를 잘못)
(1) 나라는 윤리적 공동체가 아니다. (리출)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2중적으로 임한다는 사실.
(2) 나라는 칸트의 목적의 왕 국도아니다.
사람은 수단으로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서 대우하라-칸트)
(3) 슈바이처 :철저하게 마개에 온다.
(4) C.H.Dadd:실현된 종말론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임하였으니 더이상 올것이 없다 (플라톤주의적으로 기독교를 해석)우리가 죽으면 의 면전에 선다. 이것을 예수는 강도에게 낙원에 있으니라 하셨다. (낙원= 파라다이스)천국이라고는 하지 말라.
제3강 그리스도의 양성론 (Two natures of chrst)
1.문제제기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 (vere Deus)이면서, 동시에 참인간 (vere Homo)이라는 것을 어 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을 이해하려다 잘못된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로, 왜 이것을 우리가 이해해야만 하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잇는가 ? 그것은 우리 가 이런 논쟁을 살펴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다가 보면 나는 옳다고 주장하는데 - 성격 근거 제시하면서 까지 - 다른 사람들은 잘못되었다고 나를 정죄하는 결과에 가지 이르게 된다. 그 러므로 우리 선배님들의 논쟁을 통하여 잘못된 사상들을 우리가 살펴 보는것은 무엇보다도 중 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하겟다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예수의 참하나님의 되심과 예수의 참인간되심에 잇어서 어느것이 먼저 의문시 되었 을까? 그것은 말할 나위없이 신성에 관한 것이었다.
2. 예수의 신성 (참하나님 되심)에 대한 회의
예수가 참하나님일까?라는 신성에 의문을 처음 제기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엇다. 여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잇는데 하나는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 (JEW-ISH CHRISTIANS;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과 다른하나는 갈라디아의 대적자를 같이 예수믿고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자들 (JEUDAIGER;쥬다이저)이다. 이런 두부류의 사람들 중의 일까를 살펴보자
A. 에비온주의자들 (Ebionites)
이 명칭의 유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이 파를 이끈 지도자의 이름 (에버온)을 따라 서 붙여진 것인지, 아니면 에ql온(가난이란뜻)이란 뜻에 따라서 붙여진 것인지 알수 없다. (이들은 예수님처럼 따라 살려고 한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한 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결점들은 자신들이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인데,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될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정령 탄생을 부인 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냥 인자 (단순한 한 사람0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신실한 사람이 엇다. 그는 보통인간이었지만 뛰어난 까닭에 하나님께서 메시야라고 택정하자고 생각하여 세례를 받으실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어떤이는 λογος)메시야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성의 상태 가 계속되다가 십자가에서 죽기직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기도는 이미 하나님의 영이 떠난 상태가 생각한다.- 에 하나님의 영이 떠났다고 생각했 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은 죽을수 없고 λογος도 죽을수 없음 인간 예수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들이 주장하는 설명을 양자설, 수양론(ADOPTIONISM = 어듀션 리즘)이라 한다. 이런 양지설을 주장한 자들은 바울서신을 일부인용하며, BAUL OF SANOSOAA도 양자설 주장 이들은 바로 유대주의적 이단이었다.
B.ARIUS
1)목사 (장로라고 할수 있다)
2) ARIUS를 따르는 자들을 ARIANSM이라함
3)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헬리적 이단이었다.
4) 영원속에서 성부는 로고스를 낳으셨다.
5) 성경적 근거로서는 골 1:65 ; 행 2:36.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
그때는 아버지만 아심.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두번째 집단은 아리우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희랍철학을 많이 받았는데, 희랍철학에 의하면 절대적 하나님은 이세상과ㅏ 직접접촉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사이에 중간 존재가 있어야 되겠다고 이들은 생각 하게 되 었다. 즉 희랍사실에 나타나는 λογος개념과 성경에서 나타나는 λογος개념을 절충시켜서 하나 님과 사람사이에 λογος를 두어서 하나님께서 영원속에서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λογος를 ’낳 으셨다‘라고 주장하게 된것이다. 여기서 ’낳으셨다‘는 표현은 우리가 - 사용하는 경우는 성부 가 성자를 낳으셨다는 뜻으로 부자의 관계성을 설명하며, 통치권의 정당성을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다 - 하는 의미와는 달리 그들은 성부 창조자가 성자 에수를 피조햇다는 개념으로 (창 조개념)사용하고있다. 이들의 주장을 다르게 말한다면, 성부만 존재하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 다.
성경적 근거로서는 ’낳으셨다‘는 말을 주장하기 위해 골 1:15’...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자니”이며 만드셨다‘는 말을 주장하기 위해 행 2:36“...되게 하셨느니라”를 긎거로서 사 용한다. 즉 예전에는 아니였는데 하나님이 영원전에 되게 하신 일이 잇었다 이들이 이러한 주 장을 급하지 않는 또 하나님의 이유는 별수께서 자신을 하나님 보다 좀 열등한 표현을 쓴 성 경구절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 “그때는 아버지만 아심”등)그래서 그들이 자신들 의 해석이야말로 진정한 성경의 해석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C. 콘스탄틴의 니케야 종교회의의 결정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위의 두 견해가 콘스탙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보니 (325) 교회가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래서 문제를 삼아 NICEA(영, 나이시야)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여기에서의 결정은 예수는 제2의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 보다 못한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3. 예수의 인성 부인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정죄를 받자 에수의 신성을 강조하려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Docetism(도케티즘-도깨비-유령)이었다. 하나님이 인간예수로 보엿을 뿐이며 실제로 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때 마리아는 아무런 역활도 하지 않고 도관 역활만 했다는 것이다. (도관설; ‘관’ 역활만 했다는 것)이런식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았는데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A. Gnosticism주의
영지주의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그들은 영적인 지식을 주장하는 자들인데, 에수께서 인 간에게 행하신 가장 귀중한 일은 인간 마음속에 있는 영혼의 불꽃에 스파크를 일으켜 저 위의 세계로 갈수 있는 점을 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느니라 성구 인용)그래서 이들은 2c 후반 영지주의의 영향하에서 나타난 도바복음을 애호한다. 이들에 대해서 이그나티우스가 싸웠다.
B. Marcion
마르시온은 누라복음과 바울서신 일부만 인정하는 자로서 구약 하나님(창조의 신, 못한 하 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참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누었던 자이다. 여기의 참 한나님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마르시옹에 대해서 터툴리안이 싸웠다.
C. Apollinarius(아다나 시우드의 절친한 친구)
아리우스가 예수의 신성을 반대하여 정죄받자 아폴리나리우스는 역시 아리우스가 잘못되었 음을 인정하여 예수는 참 사람이면서 참 하나님임을 말했다. 그러나 그가 이해한 예수는 요 1:14 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란 말로서 설명하는데, 곧 예수 = 말씀 + 육신 (λογος + σάρξ) 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세계의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 인식 - 사람은 σώμα(몸) + Ψυχή (혼)+πυνΰμα(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예수님을 적용시켜 예수님도 σώμα + ψυχή 로 이 루어져 있다. 다만 πυνεΰμα 자리에만 λογος 가 들어가서 몸 + 혼 + 로고스로 이루어져 있다 고 생각하게 된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해석이야말로 참으로 잘 해석했다고 보았다. (예수 양성가운데 한성=신성만 강조하고 맘)그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요1:14 때문과 당시 인간관 때문이지만, 그가 하나님으로 성육신한 이상 그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여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πυνεΰμα 자리에 λογος 가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아타나시우스의 유명한 명인에 의해서 일축된다;“취하시지 않으신 것은 구 원되지 않는다”예수가 몸과 혼만 취하고 영을 취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몸과 혼만 구원할수 잇 고 영은 구원할수 없는 것이다.
D. 콘스탄티노를 회의의 결정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들의 주장은 381년 Constantinople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아폴리나리우스야 말로 커다란 이단이 되었다.
E. 요약
1. 예수의 인성 부인
1) 그노시스 주의
2) 마르시온
3) 아폴리 나라우스
4) 결론
(1) 이들은 예수의 양성가운데 신성만 강조하고 말았다.
4. 신성과 인성 동시주장 - Hypostatic Union
= 위격적 연합
이제 신성을 부인하던 자들도 일단 정죄되고, 인성을 부인하던 자들도 이단으로 정죄었으 므로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이가? 아니다 여기에 새로운 한 견해를 가진 자들이 나왔는데 이들 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하나만을 주장하지 않고 이둘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했는데 바 로 Nestorius와 Eutyches였다.
A. 네스토리우스
네스토리우스는 경건한 자였고 설교도 매우 잘하는 사라이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들의 황 제가 428년에 수장으로 불렀다. 부름을 받고 온 네스토리우스는 이 도시에 와서 사람들이 예 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θεοτόκος”라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θεο= 테오스에서 나온말,
τοκος는 낳은자라는 말), 이것은 마리아는 하나님은 낳은자라는 말인데 그가 듣기에 좋지 않 았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말하기 보다 Χριστο ταυς(그리스도를 낳는자)라 부르는 것이 좋겠 다고 말했다. 아니면 θεο τοκος와 안드로포코스(인간을 낳는자)라고 동시에 사용하면 용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원래 이말은 그가 직접한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잇는 목사님이 “우리가 어 떻게 마리아에 대해서 θεο τοκος라고 부를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갖고 부정적인 견해를 피 력하자 네스토리우스가 자기 아내의 목사님의 편을 들어 줌으로써 초대교회의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에 대해서 Cyril of Alexandria가 말하기를 ”너희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나누려고 하는자“이다 라고 말했다. 사실 그들은 에수안에 신적인격과 인적인격이 있다고 네스트리안 (네스토리우스가 이런 생각을 가졌는지는 모른다)들은 생각했다.
이 견해는 431년 에베소 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B. 유티케스(Eutyches)- 수도원장
유티케스는 네스트리우스와는 달리 예수그리스도는 동정녀 탄생 이전에는 분면히 신과 인 간의 성질이 있었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 후에는 하나의 성질이 되어야 하지 않겎느냐라고 생각을 하여 인성이 신성에 흡수(신성이 강함으로)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예수의 몸도 자연히 신적인 몸이 되고 말았다. 결국에는 예수의 몸에는 한 성질만이 남게 되는데 이 를 Monophysitism(피지니즘)= 단성론이라고 부른다. 이 주장은 초대교회에 상당히 오래 인식 되어졌고 중국에까지 왔었다. (경교)
C. 요약 (신성과 인성의 관계 = 위격적 연합)
(1)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안에 신적인격, 인적인격이었다.
(2) 유티케스는 예수안에는 한 성질 밖에 없다(흡수)
(3) 결론 : 431년 예배는 공회의에서 이단 정죄
5. 우리의 입장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의 위격적 연합에 대한 잘못된 주장이 나오자 451년 Chalcedon공 회에서는 아래의 결론을 내렸다. (유티케스의 단성론에 반대)
(1) Without Confusion(컨퓨션) : 혼합되지 않음
(2) Without Change:변하지 않음
(3) Without devision: 나누어지지 않음
(4) Without Separation: 분열되지 않음
둘이 합쳐지나 혼합, 변질, 나눔 자지않는다 이렇게 하여 기독론은 정립 되어졌던 것이다.
제 4강 양성론 Ⅱ
예수는 양성(one person in tow nature 한인격, 두 성질)을 가지셨다. 7C에 황제 헬라크리 우스가 단성론자 (유티케스, 이디오피아 곱틱교회등)들과 교회를 합쳐 보려고 생각했다. 그러 자 다음 문제가 생겼다.
1) 예수는 의지가 하나인가 ? 둘인가 ?
2) μονος + θελειυ = μονοθήταε에서 유래하여 Mono lhelitism이 되었다.(이는 단성론의 한 형태로서 예수에게는 한가지 의지만 있을 뿐이다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두가지 의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 한가지만 잇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3) 681년 코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예수에게는 두의지가 있다고 결정되었다. 왜냐하면 “의지” 는 person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질(nature)에 속한것이기 때문이다. nature가 신성과 인 성이 있다면 의지도 신성의 의지와 인성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4) 성경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
(1) 여기서 주체는 로고스로서(divine nature : 신성) 삼위일체중 제2위인 λογος께서 인간 성을 취하신 것이다. 이때에는 human nature(인간성=영,육을 취한 온전한 인간성)을 취하심
(2) 성육신 하기 이전의 로고스는 λογος ά σαρκος이다. 곧 싸르코스가 없는 로고스(육체가 없는 로고스)라는 것이다. 이때에는 divine nature밖에 없었다. 그러나(1)에서와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Human nature로 취하신 것이다.
(3) 그래서 예수에게는 두성질(신성과 인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인격-성질=nature가 아님-divine nature의 인격이다(human nature을 취하셨다는 것이
personality를 취했다는 말이 아님
인간의 어떤 사람은 예수(사람)가 human nature(인간성)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성 은 반드시 어떤 인격 가운데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personality(퍼즈낼리티=인 격)을 가졌으므로 그 personality속에 human nature도 잇으므로 결국 예수는 로고스 + 인격성을 가진 인간이신 예수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예수가 두 인격이 있다는 Nestorian이 되고 만다.
현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하려도 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성을 취하셨 으나 personality가 없는 human nature이다. 인간성 자체로서는 인격이 없다는 말이 다. (=Anhypostasia=안 히포스타시아=인격을 가지지 않음)을 가지고 계시고, 성자 예 수는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의 인간성은 (비록 그 자체로서는 가 없으나)로고스의 personality안에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인간성(human nature)은 나의 인격(personalty)안에 구현(드러나)되어 있 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인간성은 로고스의 인격안에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만약 이렇 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면 예수가 신성으로 있다가(이래 신적 인격이 있음)인간으로 태어나 한 사람(예수)의 인격을 취하셨다고 주장하게 된다. 우 리가 주일학교때부터 생각해 온 것이 이것인데 예수만 인간의 인격이 따로 있다고 보 았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면 예수는 두 인격을 가지게 되고 우리로 Nestorian이 되 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온전한 인간성을 취하셨지만 를 취하신 것이 아니엿고, 그 러나 그의 인간성은 안에서 발견되어 진다고 믿는 것이다. 성격이 또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의 인격은 하나이다. (=하나의 인격)
5) 요약: person이라하면 2가지를 가지고 dlT어야 한다.
첫째는 인간이면 인간의 nature(성질)-신이면 신의 nature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이 nature를 구현(나타냄)할 individuality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의 경 우에 있어서 보면, 예수는 분명히 human nature(인성)는 온전한 것을 가지고 잇다. 그 런데 인성자체-신성을 관계시키지 말고-를 구현할 individuality는 없다. 그렇다고 인 간이 아닌가 ?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human nature가 로고스의 individualitydptj 때문이다.(로고스안에서 발견되다). 로고스는 분명히 divine nature를 가지고 잇고 여 기에 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다가 human nature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 예수의 personality는 하나이다.
(2) 예수가 가진 nature는 둘이다.(divine,human)
(3) 예수의 personality의 성질은 divine nature의 personality이다.
(4) 예수계서 human nature를 취하신 것은 인간의 personality를 취하셧다는 말이 아니 다.
(5) 로고스자체는 삼위일체중 제2위로서 분명히 personality를 자기고 잇고, divine nature을 가지고 있다.
(6) 예수가 human nature를 취하고 그것을 구현할(나타냄)individuality는 로고스이다.
(7) 그러므로 성육신후 로고스의 성격은
a. 신성을 가진 하나의 인격
b. divine individuality
c. human nature
(8) 삼위일체는
a. 성격, 성자, 성령이 각각 인격이다.
b. 각각 individuality가 있다
c. 로고스만은 특별히 human nature를 더 가지고 있다.
6) 루터란에서는
(1) Communi catio idiomatum
교류 속성
(2) 신성에게 속한 모든 것은 인성에게 속하고, 인성에게 속한 모든것도 역시 신성에게 속한다.
(3) 그래서 신성이 어느곳에나 있을수 잇으므로(편재) 인성도 어디에나 있을수 잇다. 그 런 까닭에 성만찬을 공제설(성찬을 하는 떡과 포도주에 예수의 몸과 피가 실제로 그 속에 공제(함께)한다고 보는 견해로 주장하게 된것이다. 어느 교회든지 예수의 인성 이 있는것이다. 즉, 인성도 편재할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7) (4) 개혁파가 주장하는 한가지 뚜렷한 원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이 말은 거꾸로 말하면 “신은 결코 인간이 될수 없고 인간은 결코 신이 될수 없다”는 말 이다. 신성은 영원히 신성이고 인성은 영원히 인성이다. 신성이 인성을 입는것이 아 니고 인성이 신성을 입는 것이 아니다.
(5) 우리도 속성교류란 말을 사용하지만 루터란과 같이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 는 의미는 “신성의 속성을 인성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신성과 인성이 합하여진 한인격(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그의 인격에 적용하면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그러나 인성을 바꾸어 말하면, 인성을그의 인격에 적용하면, 그분은 피곤하시고 좋으시고 주무시고 배고프셨다(그러 나 신성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르는 것이 있었다고 말할수 있다 “그날과 그 때는 ... 아들도 모르고”(마 24:36)라고 하신 것은 신성의 입장에서는 알지만 인성 (메시야)의 입장에서는 모른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거나 거짓 말이 아니다. 신은 죽지 않는것이면 인간은 죽는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엇다가 부 활하셨지만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난것은 아니다.
8) 신성규라는 학우가 교수님께 질문하기를 “이런것은 다 교리적인 체계를 세우려고 하는 것 이 아니냐?”하는 물음에 “예수님이 어떤분이신가를 알기 위해서 공부한다”고 대답하자 그 러면 “신성과 인성이 있다고만 하면 되지 안느냐?”고 말하자 학우들 웃음, 이에 대해 교수 님은 우리가 다 그렇게 믿기로 해놓고서 설교할때 다른 말 하니까 성령으로서 막는 것이라 고 했다. 잘못이 터 커지면 이단으로 빠지고 만다.
9) cf. 롬 8:3
“율법에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며 할수 없는 그것을 ”
(1) 율법에 할려고 하는 (이루려고 하는 )무엇이 있다 ?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이다. 그래서 율법이 좋은 것이다.
(2) 그런데 왜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육신 때문이다. 이 육신은 몸이 아니라 영육을 포함 한 부패성 = 부패한 인간성으로 대부분 쓰인다.
(3) 이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할수 없는, 이룰수 없는 그것을 (율법 그 자체로는 괜찮지 만 부패함 때문)“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모양으로 보 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죄 있는 육신의 모야으로 보내어”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면 “죄 있는 육 신의 모양으로”란 예수가 죄를 가지신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말이 아니다. 이말은,
Έν όμοιωματι σαρκός άμαρτιάς
모양으로 육체 죄
“죄 있는 육신의 비탄 아래로“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όμοιωματι이다. 이 단어가 아니였다면 예수는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셨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바율이 말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경우에는 다 죄된 몸이지만, 예수의 경우에는 죄된 몸이 아 니라 겉으로 보기에만 죄된 모습을 보이는 (그것과 비슷하게)것이다.
이것은 성육신이 어떻게 나타났는가에 대한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다른 모든 경우와는 달리 오직 그의 경우에만 죄되지 않을 상황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 다는 것이다.
(5)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예수가 인간의 부패성을 말하는 σαρκός 를 취하셨으므로 그는 바로 죄에 대한 인간성을 취하신 것이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 나 성령은 όμοιωματι로 오셨지 σαρκός άμαρτιας로 오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6) 예수는 죄성을 가지지 않으셨지만 (신성)아담 이후에 부패한 인간이 가질수 있는 ‘인 간성의 모든 연약한 상황 가운데로 오셨다는 말이다(인성). 이런 의미에서 철저히 인성과 신성이 있다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가령,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
“ 아버지와 창세전에 가졌던 영화로서 ”
이는 다 신성의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목마르다”이는 인성의 측면에서 하는 말인 것이다.
10) 참고로 예수의 (“하나님의 인간성”)
(1) 신성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간다.
(2) 인성은 마리아의 자궁속에 잉태한 순간부터 시작되어 영원히 계속된다.
(3)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는 (계획) - 그가 성육신하심 계획이 영원전부터 있었 다. 이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성을 영원전부터 자기 자신안에 품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
(4) 그러나 이런 견해가 잘못 발전된 경우가 있다. Barth Theology가 발전하면서 여러번 계기 중 - 그중 하나가 “하나님의 인간성”이란 책을 쓴 때(35년경)였다. Barth는 (3) 과 동일한 내용을 말한다. 이점에서는 우리와 같은데 Barth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서는 영원전부터 인간성을 품으셨으니까 인간을 창조하셔야 하고 창조된 인간이 잘못 되었을때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인간은 구원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5) 그렇지만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 비록 영원전부터 인간성을 품었지만 (품을수 있지만) 그말이 반드시 인간을 창조해야 한다거나 인간이 잘못되었을때 반드시 구원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주하신 분이시므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아 도 되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그의 탁상공론에서 만약 그런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될 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6) 끝으로 예수의 성육신할때 입은 인간의 연약함은 예수가 부활하실때 벗어버렸다. 그러 나 인간의 연약함을 벗어버렸다는 말이 인성을 벗어버렸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영원 토록 인간이신 것이다. 우리가 부활하때 취하는 인성이 바로 예수의 연약성을 벗어버 린후에 가지고 있는 인성이다.
제 5 강 양성근Ⅲ (예수의 명칭)
1. 예수의 명칭
1)messiah(Χριστος)
(1) 직임적인 명칭이다.
① 이 명칭(messiah)은 반드시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② 기본적인 의미는 마시야(messiah)로서 “보냄을 받은 자”이고, messiah의 수동태 분사로 서는 “기름부음을 받은자(Χριστος)”로서 임명하고 선언하는 의미가 가장 먼저 들어 있 는 것이다.(임직)
(2) 거룩성이 따른다.
구약에는 messiah가 많은데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부음을 했다.
① 이렇게 많은 기름부음을 받은자(메시야)를 많이 두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지를 우리 가 찾아야 한다.
우선 삼상 24:6,10을 보라.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여기서 사울은 메시야였다. 다 윗이 사울을 죽이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였기 때문이다. 기 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이 그에게 붙게 되고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한 자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다른 의미가 전혀 없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구별한자에 게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② 신약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은자는 예수뿐이고, 넓은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기름부음을 받았다(고후 1:21=우리=너희+바울+함께한 자)
눅 5:11을 보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왜 이런말을 하는가? 그는 죄인임을 깨달았고 동시에 자기 앞에 서 있는 예 수를 거룩한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③ 요약하면,
첫째로, 메시야는 직무에로 부름을 받은자(임직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음)이고,
둘째로, 2차적으로 그 기름부음의 받음의 의미는 거룩하게 했다는 것이고
셋째로, 거룩이라는 의미는 다른것이 아니라 ‘구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3) 성신을 주신다(직무를 감당케 하기 위해)
① 삼상 16:1-3,13을 보면 기름부음을 받으면 본질적으로 성령(여호와의 신)이 전달되어져 서 그 직임을 감당케 한다.
②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성신이 충만하신 분이셨다.
③ 그러면 과거(구약)에는 왜 많은 메시야(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있었는가?
이를 통해서 <시사하는 바>이런 직무를 대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자가 일 괄것이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이를 (왕, 선지자, 제사 장)의 통치를 받으면서 이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왕이, 선지자가 제사장이 우리 가운 데 임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④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기름부음을 받은자(메시야)로 쓴 것이다(마4:18,19). 예수가 메시야로 났다는 생각에 대해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로, 창2:36을 보면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 라..........”라고 되어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겅의 문자성에 근거해서 예수가 전 에는 주와 그리스도(메시야)가 아이였는데, 행 2:21절과 부활한 후에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양자설(Adoptionism)이다.
둘째로, 우리의 견해는 예수가 이미 주와 그리스도였는데 십자가와 부활사건 이후로 확 연하게 선언하셨다는 것이다. 롬 1:3-4을 보라.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셨으니....”
셋째로, 예수는 그 이전에(십자가와 부활)도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신 것이다. 그는 이미 메시야였지만(고난받은 메시야) 이때부터 보좌에 앉으신 메시야로 확연하게 선언, 드러나는 것이다.
2) Son of man ; (중간기) 메시야 사상의 발전의 중간기간동안 이스라엘은 2가지 메시야를 기 다려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메시야가 다윗적인 메시야이다.
(1) 다윗적인 메시야(=성격은 인간적인 인물, 정치적인 메시야)
① 집회서 47:11-12. 제1 아카비서 2:57
② 솔로몬의 시편 17:21에는 “메시야는 다윗의 아들이다”라고 했으며 그래서 메시야는 인 간이며, 뛰어난 정치가라고 생각했다.
(2) 아론적인 메시야(제사장적 메시야)
① 이들의 제사장적인 메시야 사상을
② 쿰란공동체에서는 더 발전시켰다.
(3) 인자같은 메시야(단 7: )
① 큰 짐승 넷은 짐승의 나라를 말하고
② 하나님의 보좌가 보이고
③ 인자같은 이가 보인다. 여기서 ‘인자’(Son of man)은 단순히 “사람”이란 뜻으로서 마 치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인자야’-‘사람아’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또 예수님도 안 식일이 사람(인자)를 위하여 있다고 말씀하셨다.
④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거의 네 왕국이 짐승적인 성격의 나라임에 비해서 이 인자 (사람)가 세우시는 나라는 사람의 성격을 지닌 나라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인자같은 이’의 메시야를 기다려 온 것이었다.
⑤ 이 인자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였고, 이 인자가 세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였 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타나면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⑥ 이 세 메시야중 다윗적인 메시야를 제일 기대해왔고, 인자같은메시야를 가장 기대치 않 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와서 자신들의 제 문제를 해결해 줄것이라 고 믿었기 때문이다.
(4) 인자같은 메시야 그리스도
① 예수는 그들이 제일 기대를 하지 않는 인자같은 메시야로 오셨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자신을 지칭할때는 ‘인자’(=영,the Son of man, 헬)로서 반드시 관사를 사용하고 있다.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그 인자’ 또는 ‘그 사람의 아들’”이다.
② 예수가 ‘인자’로서 오신 이유는 그가 하늘 구름을 타고와서 하나님의 권세가 영광과 나 라(=하나님의 나라)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9단 7:13-14) 그의 백성에게 주기 위해서 (단 7:18) 먼저 해야될 일이 사 53: 에 나타난 주의 종의 고난받는 사역을 감당해야 하 기 때문이다.
③ 이사야서에는 주의 종의 고난받는 노래가 4편 있다.
제 1 노래;
제 2 노래;
제 3 노래;
제 4 노래; 사 52:13-53:12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여기서 고난받는 종이 자신들(백 성들)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살펴보면, ‘여호와의 성도들이 고난을 받는다’고 복수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어떤 경우에는 복수로 말하고 어떤 때는 단수로 말하는가? 그것은 한사람 안에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내포적 대 신”사상을 말해주고 있다. 즉 모든 사람이 고난을 받을것을 자신안에 포함해서 자신이 혼자서 다 받아버리는 것이다.
④ 그러므로 예수는 고난받는 주의 종의 사역을 다 감당하고 난 후에 비로서 영광받는 인 자(그사람의 아들)로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이다.
3) Son of God
(1) peter의 신앙고백
① 마 16:16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 다. 베드로는 여기서 두가지 고백을 했다.
② 하나는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야)라고 고백한 것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예수가 자기 생전에 메시야(그리스도)라는 의식을 가졌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베드로와 같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 하는 것을 받아주기는 했지만 자신은 한번도 메시야(그리스도)라고 말한적이 없기 때문 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오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Son of man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자신을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로 보았다.
③ 또 다른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한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 들’이라는 고백만으로 신성을 지칭한다고 할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자체만으로 신성을 지칭한다고 할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 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이 여러 방면에 다양하게 사용 되었기 때문이다.
천사(창 6:1-4,욥 1:6,2:1), 아담(눅 3:38), 이스라엘 백성(신 14:1-2, 렘 3:19-20, 호 1:10),왕(삼하 7:14);솔로몬-그의 후계자-다윗자손 메시야)
그러나 peter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것이 아니라 정말 신성을 가 졌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참고로 사도요한이 요 1:14에서 “.... 아버지의 독생자....”라고 말한것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과 구별되어지는 의미 에서 신성을 말한 것이다. peter의 고백도 이와 같은 차원이었다.)
④ 그런데 peter가 이렇게 위대한 고백 2가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이해하지 못했 던것은 그가 예수는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는 알았지만, 인성을 가지신 고난받 는 종의 사역을 감당할 자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마 16:21의 사건이 벌어 지게 되는 것이다.(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지 않을것이 고난받는 메시야의 사역이었 다.)
⑤ 예수는 고난받는 주의 종의 사역을 감당하고 나서 그후에 인자(하나님의 아들, 그 사람 의 아들, 신성)로서 하늘 구름을 타고와서 나라와 민족과 권세(=하나님의 나라)를 주실 것이다. 그때에는 모든 백성이 지구상에 있는 단 한 사람의 인간도 예외없이 그를 섬 기게 될 것이며(단 7:14,18,22,27. 9:27) 새 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질 것이다.
(2) 결론:지금까지의 결론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서 성경적으로 증명한 것.
① 당신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에 대한 성경적인 뒷받침들이다. 예수는 메시야로서 곧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②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비록 받아 들여질수 없었지만 예수께서 그것을 증명해 주 신 것이다.
③ 구약성경에도 메시야가 하나님이라고 밝히 말해주지는 않고 잇는데 (메시야=기름부음을 받은자=왕, 제사장, 선지자), 바로 예수께서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④ 예수의 주장은 ‘고난받는 종’과 ‘메시야’와 ‘인자’에 대해서 컴바인해주고 이런 사람 (고난 받는 종, 메시야, 인자)이 곧 하나님이어야(하나님의 아들)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필요로 하고 계셨던 것이다.
제 5 강 양성근 Ⅲ(개념공부)
우리는 지금 예수가 하나님이면서 사람이라는 진리를 배우고 있다. 예수가 ‘사람이면서 하나님이다’라는 진리는 이미 결정되어 잇고 또 교회사를 통해서 그 진리가 드러낫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사람이라면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만들어낸 생각이 kenosis이론이다. 즉 예수님이 인간이라 면 신성의 속성을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비우시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모른다’는 말등을 할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1. The Dinosis theory(=kenotic theory케스틱이든)의 여러 형태-루터파의 이론들이다.
Kenosis theory은 17세기에 맨처음 나왔다. 어떤식으로 나왔냐 하면 Luther파의 속성교류 이론인데 예수의 3년 지상사역중에는 신성의 사용을 잠깐 미루어 두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루터파의 튀빙겐파(Tubingen Schole의 주장)
여기서 발전한 이론이 본격적인 Kenosis theory인데 로고스가 성육신 하셨을때 실제로 신 성에 속한 모든 속성들을 비우셨다(=안가지셨다)는 것이다. -denuded(누드,옷을 안입음을 생 각=내용물 없는 깡통)
1) G. Thomasius(1802-75, 토마시우스)-독일에서 나타난 학파
(1) 신성의 일부만 비웠다. 그 비운것은 상태적인 속성 전지(omniscience),전능
(ommipitence) 루터파에 따르면 신성의 모든 속성은 인성에도 있다. 그러나 구연사 역중에만은 신성의 사용을 미루어 두었다는 것이다.
19-20세기 사람들은 거의가 케노시스 이존이다. 왜냐하면 우리보수주의 자들이 너무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니까 그들은 예수의 진정한 인성을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렇 게 잘못 된 방향으로 흐른 것이다. 편재(ommpresence)등의 속성이다라고 했다.
(2)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들인 진리, 사랑, 거룩등은 비울수 없엇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신)이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3) 랑게(신학자)도 이 부류의 학자다. 랑게는 G.Tjomasius와 비슷한 형태의 kinosis theory를 주장한다. 자신의 인성에 맞추기 위해서 신성중 절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 고, 상대적인 속성만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2) U.F.Gass(독일)
“die Lehre von der person christ"(1854년 출판).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가르 침”
이 사람의 주장은 모든 신적인 속성들을 다 비우셨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계시 는 동안에는 그의 영원한 의식들과 우주적인 기능들은 안가지셨다.(실제로 성자는 영원한 성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제한적인 인간의 영혼의 의식이엇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 영혼의 자리에 로고스가 들어온 것이란 주장이다. 이것이 그가 본래는 예수의 참된 인성을 설명하는 것이다골 보았다.(신성을 가지셨는데 신성에 관한 속성은 다 비우셨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죄를 범할수는 있지 않았겠는가까지 생각이 미 치게 된다.(아포리나리우스의 견해와 비슷)
3) Martensen(덴마크)
이 사람은 중재신학의 대표자인데, 이 사람의 주장은 예수님은 2가지 의식을 가지고 있었 다. 하나는 창세전에 가졌던 삼위일체의 제 2위로서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창조자, 섭리 자), 또 하나의 의식은 모든 신적인 능력들을 폐위해 버린 로고스로서 자신을 인간성하고 결합을 시켜버린 의식(창조자로 섭리자로도 아니고 다만 장차 언젠가는 내가 하나님으로 서 다스리라는 의식만 있었다)을 가지고 있었다. 이둘이 교차적으로 갖이 있었다고 주장 한다.
4) Charles Gore(1853-1932,영국)
이 사람은 옥스포드의 주교로서 제직을 마친자엿는데 이 사람의 주장은 성육신하신 기간에 는 신성이 자기활동을 중단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제한되고 인간적인 의식가운 데 계셨으므로 ‘모르는 일’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구약은 영감되 었다’고 본것은 자신의 위치를 제한되고 인간적인 수준에 한정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까 닭에 우리가 성서를 비판할수 있다골 보았다(예수님의 구약에 대한 영감의 태도가 성서 비 판학의 근거를 바련해준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수는 이스라엘에 살던 유대인들이 가질 수 있었던 의식을 가질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아무 잘못고 가질수 없는 의식을 가진 예수라면 진정한 성육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2. Kenosis theory의 성서적 근거(라고 보는 구절들
빌 2:5-8 “....오히려 자기를 비어....”
“비어”(Έκένωσεν ← κενόω)라는 단어에 근거하여 예수께서 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신성에 속한 모든 속성을 부분적으로 또는 모두 비우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3. Kenosis theory의 비판
G.Thomasius의 상대적 속성만 비웠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두 질문을 할수 있다. 하나는 빌 2:5-8의 해석이 주석적으로 옳은가 하는 것이고(신약해석학적 문제), 다른 하나는 그리 스도의 양성론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하는 것이다.
1) 양성론의 교의학적인 문제
첫째, 만약 3년기간동안 예수가 신성의 일부(상대적 속성)을 비웠다면 그는 3년동안만은 참 하나님이 아니게 되고 그러면 결국 영원히 참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말 3:6(나 여호와는 변역치 아니하나니), 약 1:7(변함도 없으시고-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최전하는 그 림자도 없으시니라) 때문이다.(신이 불변하다는 사상은 희랍철학파 주장)
Martensen과 열심히 싸웠던 희랍적인 개념이라고 하면서 우리도 희랍철학에 영향을 받았 다골 비웃는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에 인간이 죄 지을수도 있는데 하나 님이 오히려 변화시는 분이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성서적인것 같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Thomasius의 이론은 하나님의 불변성 에 문제를 가져오고 만다.
둘째, 만약 예수의 3년 사역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빠져 나온 것이라면 거기에는 이것은 잘못이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가 성육신 하셨을때에도 삼위일체는 여전히 삼위로 계신다. 예수는 시간과 영원을 동시에 가 지고 계시는 분이다. 오리겐은 최초로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셧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의 영원한 출생)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표현은 영원전에 예수가 하나님. 여기서 생 물학적인 출생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자가 신성 속성을 잠시 그만 둔다면 이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하신 관계는 끊어지고 만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오시고 성 경에게로 나오시는데 (‘나오신다’는 표현은 성부가 또는 성자가 성령을 ‘보낸신다’는 성경 의 말을 신적작용어로 바꾼 것이다) 이 나오심은 한번만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나오 시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신성의 속성 3년동안 잠시 일부를 비우셨다면 성령의 나오심에 문제사 생기고 만다. 결국 Thomasius의 이론은 삼위일체, 성자, 성령 모두에게 문제를 가 지고 오게 한다.
2) 빌 2:5-8의 주석학적 문제
빌 2:5-8중 7절의 “비워”(Έκένωσεν)이란 말이 무엇을 비웠다는 말인가?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본체를 비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됨을비웠다는 것으로 보인다(문맥상).
칼빈은 예수가 하나님의 신성을 버릴 수 없다. 만약 버린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는 완성을 버린것이 아니라 잠시동안 감추어 두시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하나님이심 을 감춘것이 아니라 때때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셔야 했다.(예, 기적앨 행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과의 독특한 과녜를 나타내셨다.=아버지여 하고 부르는 경우=기로운 자들에게 나타내 심을 감사하나이다 등).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인성이 신성을 가지고 있으나 완전히 없애버 린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예수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신성이 아니라 엄위와 영예같은 것이다. 가장 쉽게 말한다면 사복경찰과 같고, 신적 용어도 표현한다면(예수의 은익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으로 나타나면 사람들이 감당을 못함으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도 록 은익하고 나타난 것이다.
NIC 주석의 뮐러(빌립보서 주석)의 입장이다. 뮐러도 칼빈과 같은 입장이다. 여기서 “비웠다는 것은 은유적인 의미로서 예수가 종의 형체를 자신에게 취하심으로서 자신을 비우 신 것이다. 그가 성육신할때 하나님의 형체는(그에게) 그냥 남아 있고-그것을 비운것이 아 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주님이시요 세상의 통치자이시다. - 다만 인간성의 한 부분이 한 측면으로서 종의 형체를 받아들이신 것이다. 라이프마틴 이라는 사람도 ”카르멘 크리스 티“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서 빌 2:4-9을 주석하기를 ..........읽어보라.......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ICC주석에서조차도 이 본문을 하나님의 신성을 비우실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빌 2:5-9 본문으로 Kenosis theory를 만들어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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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쓰여진 자유주의 주석이다(빌립보서를 빈센트)
(1) 뮐러는 남아공Stellenbosch unicersity에서 교수 한사람 화란의 자유대학에서 공부를 해서 L이었다. 화란서 공부할때 NIC주석 편집자였던 스톤하우스(지금은 F.F.Burce가 편집자)가 뮐러를 알았다. (뮐러는 빌 2: 이 본문으로 박사논문을 썼는데)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 주석을 누구에서 맡길까 하다가 뮐러가 생각이 나서 그에게 맡겼다.
(3) Extra Calministicum(개혁주의 신학의 독특한 주장)
이 말의 뜻은 “칼빈주의 신학의 밖에서”를 강조한다. 이것은 루터파신학에서 말하는 견해와 대조된다. 예수님의 몸이 위, 안에, 아래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고 개혁파에 서는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이라면 인성을 말하는 것으로 떡 바같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단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진 분이시고 또 영 원히 가지신 분이다. 그가 인간의 몸으로 있을때에도 그의 밖에서는 예수의 신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한순간도 그는 이 우주를 붙들지 않고 계신적이 없었다.)
어떤분의 문학적인 표현에 의하면 “보라, 여기 하나님이 계신다. 그는 자신의 발 걸음을 옮길때마다 사람들이 거기에 걸려 넘어질까 떨리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보이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이시다.” 누구에 대해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이 땅에 살아계셨던 예수에 대해서 하고 있다.
루터파와 칼빈파의 차이는 이것이다. 루터파에서는 예수의 몸안에만 로고스가 있 어야 된다고 본다. 칼빈파에서는 몸 안에뿐 아니라 예수의 몸 밖에서도 로고스 ( ㉠ 루터파에서는 성찬식의 떡이 있다면 위, 안에, 아래에 예수님의 몸이 있다고 본다 ㉡ 그렇기 때문에 성찬설이 공제설이 될수밖에 없다.) 가 계시고 성자가 사역(세상을 붙 드시고 계심)하고 있다고 본다. 칼빈주의자는 예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고 계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찬설로 영감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기간 중에도 그의 신성은 편재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가 영원히 하나님이시면서 영 원히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성부, 성자,성령의 순환 관계를 살펴보라. 우리는 이 관계를 절대로 알수 없다. 그러나 이 분들이 세상에 내주셨을때부터 그것이 있는 것이다.(이것이 우리 인 식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성육신이 중요 또는 능력을 주어서 사역을 감당케 한다.
성 부
내 아버지↗↙보내신다 ↘보내신다
성 자 ⇄ 성 령
성령을 주어서
① ‘보내신다’는 말을 신학적 용어로 ‘나오신다’고 표현
②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라 부른것은 또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으셨다‘한 것은 생물학적으로 출생했다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삼위일체 안에 서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한번도 제자들을 싸잡아 ’우리 아버지‘라 부른적이 없다. 또 통치권의 정당성 때문이다.
③ 예수도 하나님이시지만 성령 없이다 모든사역을 성취하실수 없다. 그러나 성경을 한량없이 주심(요, )이나, 물붓듯이 부음(행 10:38)등을 통해서 사역케 하심은 삼위일체의 순환관계때문이다.
④ 이 모든 신학적 용어는 예수께서 성육신한신후 사용하신 용어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 관계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라 한다. 곧 역사 가운데 서 나타난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다. (econonicul trinety)
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본래 이런 관계로 계셨음을 의미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역사 가운데서 나타나기만 하신 경륜적 삼위일체뿐이라면 ‘하나님은 발전해 나가시 는 분’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전에 이미 삼위의 관계가 서로 작문하고 계셨 다고 보는데-결론적 삼위일체를 통해서 추측-이것을 본체론적 삼위일체라 한 다.(Ontological trimilty) 본체론적 삼위일체가 없었다면 경륜적 삼위일체로 나 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경륜적 삼위일체가 본체론적이라고 본체론 적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이것은 그럴듯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경륜적 삼위일체가 없이는 본체론 삼위일체가 없다는 말이므로 옳지 못한 말이다. 역사적 과정이 없으면 본체론적 삼위일체가 없는것은 잘못이다.
참고) 예수의 구속사역은 신인의 사역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인성의 죽 음이었다. 신성은 죽임을 당하실수가 없다. ‘하나님은 불변성의 하나님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등은 몰트만의 이런 내용은 잘못이다.
참고) 인성은 영원하시게 만들었다(인성은 불멸)-하나님이 그렇게 만든것. 여육 전체의 불멸설이다. 영혼 불멸설. 자체는 희랍의 플라톤적이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냐(the Son of the eterny)
이 문제 따라서 예수 (아들, 성자)의 영원성을 신성을 더 나아가서는 삼위일체를 인정하느냐 부인하느냐가 알려있다. (세르베투스)라는 사람은 ‘아들의 영원성’에 걸려서 이단으로 정죄되어(예수의 영원한 아들되심, 영원한 신성을 부인) 처형되 었다. 그가 처형되기전 칼빈은그에게 말한다. ‘세르메투스야 너는 예수가 하나 님의 영원하신 아들입니다. 이 말한마디만 하라 그러면 화형틀에서 내려줄수 있 다’ 했으나 그는 최후까지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했다.(하나님은 영원하신데 아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성의 영원성 부인, 아들의 영원성 부인, 결국 삼위일체 부인=성립 안된다). 이 사람은 그전부터 루터와 칼빈에 걸 려 있어서 유럽 어디에든지 가면 잡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네바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전부터 칼빈과 논쟁하려다 도망가고 도망가고 했다. 그는 칼빈에 대 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 단자는 불태워 죽이다니..... 하면서.....
제 6강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
기독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이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을 하셨는가? 이다.9워필드 기독론 참조, the pesson and work of chist)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에서는 당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양성론(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인간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두 상태론(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상태와 높아지심의 상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잉카네이션(성육신)은 그의 신적인 엄위를 제쳐놓고 자기가 종의 형태로서 인간의 형태를 취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전에도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영화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합의하고 잇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예수님의 참된 인간성을 취급하지 않은 도세틱(.Docetic)한 사람들이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약성서의 기독론을 요한적인 관점에서(로고스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복음서가 공관복음서의 예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요한의 관점에서 예수를 보는 우리는 잘못된 것이고 공관복음의 괸점에서 예수는 보는 자기들은 옳다는 것이다.(모리스의 신약의 십자가와 레이몬드의 책을 참고하면 요한복음의 예수와 공관복음의 예수가 같음을 알수 있다). 참고로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있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없으며 바울로 전혀 무관심핟.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동정녀탄생을 꼭 믿을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우리에게 반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전통적으로는 마태복음이 먼저 쓰였다고 보나, 대개의 학자들은 마가복음 우선설(Markan pronity)를 주장한다. 누가복음을 보면 1,2장에 동정녀 탄생이 기록되어 잇는데 영국 신학자 빈센트 테일러는 원누가 복음을 구장부터 쓰게 되었고 1,2은 나주엥 동정녀 탄생에 관심있는 어떤 사람이 편집하여 지금의 하나의 누가복음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원래 양식사연구는 독일에서 발생한 방법인데 이 삶은 영국으로 가져와서 작업란 대표자이다.(빈센트 테일러는 독일 신학자보다는 보수적이나 우리보다는 자유주의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직접 목격한 자는 마리아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눅 1:-2:의 증거를 사도적인 중언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자체가 증거한다. 눅 1:1이하를 보라. 여기의 데오빌로가 진짜인물인자 아닌지는 잘 알수 엇다. 또 문학적인 기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한것은, 가정된 것은) 그가 예수 믿는자였고 기독교에 대해서 베스바가 있는 사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확실히 해주기 위해서 이 글을 썼다는 것이다.
누가 이전에 글을 쓸(예수에 관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누군가 그런 글들을 보았을때에 필요해서 그 모든 자료들을 자세히 미루어 살피게 하며 기록을 남기게 했을 것이며 또 성령이 누가가 마리아와 대담하며 그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많으며 그래서 우리에게 전하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눅 2:21을 보라. 8일째 이름을 예수라 했으며 4일째 결례를 했다. 히 12:2-6에 의한 것으로서 날자는 난지 40일*7-33)여자는 80일 동안 부정하다(예수양피 8일로 7일이 부정함으로 8일째 뺀것)
로빈슨은 “신에게 솔직히”란 책에서 우리는 솔직해샤 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저위에 계시지 않는다(이 말은 우리도 인정한다).
①하나님은 물리적으로 저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②하나님은 형이상학적(Metaphcreicl)으로 저위에 계신 분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이다. 솔직히 초월적인 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불트만,본훼퍼, 폴 틸리히 등)
☼마 1:18-19을 보자
(1)가만히 끊고자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요셉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은 모르고 잉태되어 있는 사실만 안다. 이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다.
①여자에세 해를 안끼치고 조속히 일을 종결시키려는 것.
②김홍전 박사는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함부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의 도구로서 동정녀인데도 아이를 낳는다. 여기엔 신적인 어떤일이 가미된 것인데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 ③로빈슨은 “하나님의 인간적인 얼굴”이란 책에서 성육신이 불법적인 관계(혼외정사)에서 이루어졌다. 근거로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실 수 있다고 한다.
☼마 1:23을 보자. “처녀가 잉태하여........”
............ 이 단어는 본문에서는 처녀라고 마태가 기록했으나, 이사야 원문에서는 젊은여자이다. 단어를 젊은 여자라고 번역한다해서 다 자유주의라고 몰아 붙여서는 안된다. 그러면 이사야 7:14로 가보자
사 7:14...........................................................
여기에서 낳은 아이는 누구인가?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지금 아하스에게 말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아이는 아하스 때에 태어날 아이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히스기야이고 그 아이의 어머니는 젊은여자인 것이다. M.T에는 꼭 동정녀가 아니다. LXX에서는 동정녀라 했다. 마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처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일부러 .......(처녀)를 썼다. 만약 마태가 이것을 인용 안했더라면 우리는 결코 사 7:14에서 ........를 처녀라고 말할 수 없을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적 문맥에서는 히스기야를 가르키나 거기에 숨겨진 뜻은 임마누엘되신 예수였던 것이다.
☼요 1:1,14을 보자
①우리가운데 거하시매 : 이 말은 우리 가운데 장막(텐트)를 치시며란 말이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성막을 중심으로 텐트를 친 것으로 연상한다.
②요 1서 2:29과 3:9을 보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낳앗다고 말하고 잇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늘로부터 낳아짐)과 우리의 낳음을 연결해5서 사용하고 있다. 예수가 낳아진 것처럼 우리도 낳아렸다. 즉 요한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암시(가정)하고 있다.
☼ 바울도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말은 하지 않았으나 바울이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말하자면 바울의 글은 누가보다 훨씬 전에 쓰여졌는데 그때에는 그것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 사람이 없었고, 논쟁거리가 되지 않았으므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또 바울이 동정녀 탄생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갈 4:4을 보면(“여자에세 나게 하시고”)말씀이 육신을 취하엿다는 기본적인 생각은 이엇다는 것이다. 즉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을 취하심.
개혁신학의 중요한 원리 하나가 있다. 그것은 Fin nitum non Capox Intiniti"유한은 무한을 받을 수 없다. 는 것이다. 예수의 인간성이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을 받을수 없다. 따라서 무한은 위한(예수) 밖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ㅐ 하늘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인간성을 취하셨다는 말이다. (성자로서 성육신 하셨다는 말이다.) 성자의 지위를 거절하시면서 성육신하신것. Cui deus name. 그렇다면 왜 성육신 하셨을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중세에 안셈은 중세의 봉건제도를 속죄와 관련하여 설명했다.
모든 존재의 제일 밑은 물질이고 맨 위에는 하나님이었다고 보았다. 당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은 해방시키려면 그사람에 해당하는 속상을 해야 하는데, 사람과 물질뿐 아니라 모든 존재 전체에 다 적용하여 ①인간이 잘못했으므로 인간이 죽야 하며 (인간이 잘못했기 때문에 양을 바치면 안되며, 또 죄있는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함으로 죄없는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②죄가 없는 인간이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죄인만 속죄해 줄수 없으므로 모든 사람을 속죄해 주려면 그가 하나님이셔야 했다. (안셂은 머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기도로 생각했다ㅒ/
김홍전 박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더 나은 상태로 가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어떤 조건(더 나은 상태로 가기 위한)을 주셨는데 그것이 선악과였다.
선악과에 독이 있는것이 아니였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이 말에는 순종하면 생명을 주리라(살리라)는 말이 함유되어 있다.(더 나은 상태). 만약 인간이 불순종하ㅡ여 죽었는데 하나님은 그 상탤고 그냥 두어도 되었다. 그러나 은혜를 베푸시어서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메이셨다(이것은 언약이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인간(성육신)이 되어야 했는가? 아담이 마땅히 순종해야 되는데 못했으므로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간으로서 마땅히 순종하여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순종을 예수가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인간이 되셔서 사람이 드려야 할 순종을 예수가 이루신 것이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충족하실수 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충족하셨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 했다.
인간이 타락 안했어도 성육신 하셨을까? 없다.
그런데 과거에 신학자들은 예수가 죄오 상관 없이도 성육신하실 가능성이 잇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다.
①Rupert of Bertz. Alexader of Hales둔수스코트
눅 19:10, 요 3:16, 요일 3:8, 갈 4:4 보라 김홍전 박사의 책
특히 요일 3:8을 보면 마귀가 이 세상안에서 무슨을 을 일크켰는데 예수가 그것을 파괴하려고 나타나셨다고 되어 있다. (참고, 영계의 창조는 언제 창조했는지 알수 없다. 1장에 보면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으므로 1장과 3장 사이에 어떤일이 벌어졌던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성육신 하셔야만 한다는 참의가 들어있기 때문에 좋지 않다. 요약하면 성육신 사건의 독특성은 무한이 유한안에 들어온 사건이다. 그러나 시간안에 갇힌 이야기가 아니며, 시간적인 존재가 되어버렷다는 것도 아니다. 영원성과 시간성이 같이 갖는 존재이다.
(아담이 순종해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불순종함으로 죽었다. 하나님은 이 죽은 상태로 놔 두어도 된다. 그런데 은혜를 베푸셔서 순종의 길을 대신 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 때문에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이다. 의는 예수 자체가 의이다. 그러나 의에 대한 보상이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이 영생이다)
opera ad dxtra sunt non divisa(어거스틴이 쓴 용어) : 하나님이 밖으로 하는 사역을 나눌수 없다. 이 안으로 하는 사역은 나눈다. 성부께서 성자를 낳는다든지 생명을 내보낸다든지 등)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동방괴 그리이스 신의 개념을 보면 신들이 여자와 관계해서 아이를 낳는다. 이것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성육신을 잘 받아들였다. 그러나 현대에 사는 우리가 누가 이런 탁설을 받아들일까? 라고 자유주의자 학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배제한다.
엡 1:4, 창세전 하나님은 모든계획을 이 세상이 있기전에 하신것이지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 수유하는것이 아니다.
(어, 이 친구를 보라. 나는 그렇게 생각안했는데.........)
가지가 나와 있다. (사단잠는일, 속상설)
하나님에 대해 마귀가 이 세상에서 어떤일을 했는데 이에 대해서 예수가 승리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은헤언약이 예수에게는 행위의 언약이다. 예수는 성육신으로 값비싼 댓가를 치루셨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히브리서 9:11-15부터 시작해 봅시다(한번 읽어 봅시다.)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을 묘사하는데 그 표현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신것에 대해서 “큰대제사장”이란 말을 사용한다. 여기에 쓰고 있는 표현을 보자.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 창조에 속하지 않은” 이 말은 하나님의 장막-성막-을 생각하며 하는 말이다. 성막에서 대제사장(제사장)이 사역을 하는것과 비슷한 사역을 예수깨서 하셨는데 그것을 어디에서 이루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사람이 만든 성막에서 했는데 예수께서는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 성막에서 사역을 하셨다.
그러면 그곳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12절을 보자 “염소나 황소의 피로 아니하고(이 말은 옛날 장막에서는 염소와 황소의 피로 했다는 말)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의 ‘영원한 속죄’란 그리스도의 속죄의 성격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 한번 이루신 것의 효과가 영원한 것을 말한다. (다시 속죄제사는 할 필요없음을 말함)-영 단번에 이루신 속죄이다.
예수의 죽음의 본래적인 의미는 죄를 씻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3-14을 보라. “염소와...영원한 성령으로...그리스도의 피가.....깨끗케 하고......” 여기에 보면 피를 흘려 그리스도의 속죄를 이루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는 피흘림 가운데 이루심. 또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하나님에게 자신을 드리신 그 일이 자신의 능력으로 들려진 거이라기 보다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려졌다는 것이다. 성령안에서 이루어진 사건, 영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사람들은 영적인 사건이라 하면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영적이란 말을 현실적이란 말과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사상).
이 사건이 영적인 사건이라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때에 “아, 이 사건이 우리를 위한 속죄의 사건이다”라고 생각한 사람은 당시에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성경을 안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상한 생각을 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그것이 우리의 죄를 싯기 위한 사건이다’라는 말이 나중에 나오고, 또 히브리에서는 ‘우리죄를 위한 희생적 사건이다’라는 말이 나온다(자유주의 사람들은 예수가 맨처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앗는데 구약이라고 하는 배경-이스라엘의 제사라고 하는 배경-속에서 이해하여 아 우리가 매번 양들을 죽였는데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서 그(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그렇게 안했는데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비록 그런 표현이 후대에 일어났다 할지라도 그 사건이 일어났을때 이미 그 쇼ㅏ고에 대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을때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그 의미를 못 깨달았어도 하나님이 보실때는 의미가 있는 것이엇다. 우리의 육체를 따라 판단했을때에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것임을 깨달을 수 없었으나 성령을 따라 판단했을때에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레서 그것이 영적인 사건인 것이다.
이 사건은 분명히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고 그 사건안에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건도 믿어야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사건이 들어잇는 의미로 믿어야 한다. 이 의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들로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계시)다. 즉 사건 그 자체도 계시이고 그 사건에 대한 해석도 우리에게 계시로 나타난 것이다(이 둘이 다 중요하다). 이 두가지가 같이 일어난 사건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첫째로 예수께서는 죽어야 하셨다. 히브리서에서는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라고 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구약배경을 잘 알고 있듯이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구약에서 왜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동물의 피를 들여야 했는가? 이것을 이해할 때 만이 예수께서 왜 죽으셔야했는가를 알수 있다.
구약의 입장에서 구약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잘 모른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도 잘 모른다. 단지 하나 아는 것은 자신들이 매번 와서 양과 염고, 송아지로 제사지내는데 그때 그 동물에게 안수하여 죄를 전가하여 그 동물을 죽이는데, 이러한 사건에 통찰하면서 ‘내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할 죄다’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처럼 ‘장차 누군가 나를 위해 죽어주실분이 올 것이다’라는 것을 믿어야 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양, 염소, 송아지의 피를 사람들의 죄를 씻는 효과가 전혀없다. 그 피안에 죄를 씻는 효과가 없기 때문에 매년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장차 올 원형에 대한 모형이다(원형==장차 앞으로 나타날 실제사건). 그래서 당시의 구약 백성들의 죄를 속할 수 있었다면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속한것이 아니라 이 자아차 일어날 사건이 영향력을 주어서 속죄를 한 것이다. 장차 일어날 사건은 당시 사람들은 몰랐지만 신약의 밖은및 아래서 보면-히브리서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십자가 사건인 것이다. 이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면서 매년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 구약의 백성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건을 이해하도록 준비하는 독특한 사건이었다. 이 희생제사를 가졌던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4가 사건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 그가 피를 흘려야 했는가? 이것이 에수가 죽으셔야 햇던 한가지 이유였다.
둘째로, 예수께서 죽으셔야 했던 또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 (디아데케))라는 말은 ‘언약’과 ‘유언’이란 2가지 뜻이 있다. ‘유언’은 살아서 하나 죽어야 그 효과가 있다. 15-16을 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은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자신이 죽음으로서 분명히 하셨다.
셋째로, 창세기의 가르침인데,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계약을 맺을때 동물을 쪼개어 놓고 그 사이로 당사자가 지나가면 된다. 창 15:9이하를 보자(새는 원래 쪼개재 않는 것이다. 만약 모세의 율법에 새를 쪼갠다 할지라도-쪼개지 않는다. 레위기 1-5장을 보라. 여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나는 풀무 ‘타는 횃불’..‘지나갔다’ 이런 표현은 언약체결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만약 언약을 어기면 이와같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는데 하나님은 언약을 어길리가 없고 인간이 어겼는데, 이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3가지 의미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죽으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풍성한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면 at-one-ment.‘하나되기 위해서 이다’.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3가지 의미의 죽으심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것이다.(이것은 어/던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나주에 붙여진 이야기가 아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 일어낫을때 그 의미가 덧붙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못 깨달은 것은 육체대로 판단했기 때문이여고 나중에 성령께서 깨닫게 하셨을때에는 알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왜? 이런 구속이 일어나야 했는가? 왜? 우리를 하나되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다을 기본적으로 크고 넓은 곳에서 찾아야 한다. ‘죄인들에 대한 성자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이다’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이 보다 더 기본적인 대답은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에 의해서 이 일을 이루신 것’ 이라고 해야 한다. 사 53:10을 보자.
이 사건을 정말 메시야 사건에 대한 예언이라고 생각한다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으시기를 원하사.....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원하셨고 성취하시기를 원하셨다(이런 뜻은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 있다). 골 1:19-20보자. 온 세상이 ‘하나되게 하는 일’(통일의 신학)은 기뻐하셨는데 그 주체가 하나님이시다.
이때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자의적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때는 이렇게 하시고, 또 다른때에는 저렇게 하시는- 변덕이 많으신 것처럼-일로서 구속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어ㅢ 구속사건(십자가) 이 정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도 인간의 죄를 속할 수 있었는데(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 그의 자의적인 뜻으로 십자가 통해 구원하시고 하셨다고 생각하는 자(Noninalism;명복론=이름뿐)들이 있다.(대표자 Dius Scotus)
또 한사람 소시누스는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형태의 피흘림이 꼭 필요햇겠는가를 부인한다(하나님의 의가 이런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본다.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도덕적 정당성)이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슈거그로티우스이다.(알미니안의 대표자). 이 사람은 하나님의 법이란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인데 그것은 어떤때는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기도 하지만 어떤때는 ‘그래 그런 내가 용서해 주지’라고 하실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바꾸어 표현하면 어떤 사람의 죄를 갚지 아니하고도
1)사탄에게 지불했다.;사람이 범죄함으로 사탄에게 속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대속물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오리겐의 이야기에는 ‘내가 많은 사람의 영혼으 ㄹ네게 주라. 그러면 성자를 너에게 주겠다’고 하여 바꾸었는데 사탄이 생각지 못한 사실 하나가 거룩한 성자를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엇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영혼도 놓치고 성자도 ‘부활하심으로서’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하나님과 사탄사이의 협상-바겐세일-).
그레고리 닛사도 이런 이야기를 했으며 Rufinu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Rufinu는 낚시 이론를 펴내는데 하나님이 마귀를 잡기 위해서 미끼(예수)를 놓았는데 마귀는 이것을 먹어야 되겟다 싶어 먹었다. 먹고나서 목에 걸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성경 구절로는 욥 41:1을 근거로 든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이 낚시 하셨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오래 지지되었던 이론이엇고 안셈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이론이었다(사탄에게 주었다는 것).
2)리카피츠레이션(총괄갱신)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역사적으로 파괴시켜 놓은 과정을 예수께서 거꾸로 회복시킨 것으로 이야기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사탄과 투징하며 승리하신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크리스투스 빅토리 이시고 그의 십자가 사건은 총괄갱신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해가 섞여질 가능성이 있다. 첫째로, 예수께서 죽으셔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 총괄갱신에 의하면 신앙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에게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들은 (공통적으로0십자가 사건의 절대적 필요성을 부인하는 공통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은 어떠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필연적인데 그러나 Dius Scotus가 말하는 자의적인 결정때문에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칼빈의 말대로 죄를 다른 수단으,로 용서하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죄에 대하여서는 벌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그것은 요구함으로 하나님은 이 사건을 일으키셔야만 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에게 꼭 부과되어진 것은 아니다(기독교강요 12:1, 제 2권). 그래서 ‘가정적인 필연성’이란 말을 쓰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결정하셨으면 그것은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결구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이 죄에 대한 처절한 형벌을 요구한다’고 보는 것이다.(전통적인 견해)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으로 인한 속죄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여러가지 이해-십자가의 핵심
1. 교회안에 맨 처음 있었던 이론으로서 ran son to satan the '이다. 'ran son‘이란 말은 “대속물”(막 10:45)로서 다른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지불하는 물건이다. 문제는 “대속물”을 누구에게 지불했는가에 있다. 불멸성을 주어서 그들의 윤리적인 변혁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가 하신일은 아담의 불순종에 반대해서 자신이 순종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고 모든것을 새롭게 하신 역할을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십자가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아니고-승리자에게서 볼수 있듯이 사단과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신 사건이 십자가의 부활사건이다.-다만 강조점이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부활에 있다(부활의 강조는 동방교회 전통). 근본적인 승리는 십자가 보다도 부활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오해의 여지는 모든것을 총괄갱신 한다면 보편적 구원이 여기에 시사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서 말하기를 슐라이어마허는 이레니우사,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했으나 사실은 이레니우스의 글은 모든 사람은 다 구원얻는다라는 말은 없다. 다만 총괄갱신이란 말속에 보편구원이 함의되어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전통적인 견해인데 ‘대속물’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침범힜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당연히 돌려드려야 영예를 안드렸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자로는 아셈이다. 그런데 안셂은 하나니에 대해서도-사단과 같이- 만족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나쁜것은 아니지만 몇가지 교정을 해야할 필요가 있는것 같다. 즉 리카피츠레이션 Theory -sat-isfaction theoy를 합친것이 우리의 입장인 것이다. (총괄갱신+하나님에 대한 만족)
3. 이제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즉 도덕적인 영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대표자로서 피터 아브레드이다.(이 사람은 안셈과 대접되는 사람으로서 12세기 사람인데 당시엔 신학자들은 혼자살았다. 그런데 가가 가정교사로 잇던 집의 여인과 사랑에 빠져서 아이를 낳는다. 그래서 할수 없이 아이는 고아원으로 헬레스아드(여인)은 수녀원으로, 자기는 수도원으로 간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강조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이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성경과는 멀다. 구사사의 객관적인 의미를 다 앗아 버린다(사람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이것과 비슷한 견해가 모범설 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신앙과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응분의 벌을 내려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 근거로는 벧전 2:21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그렇게 말하라. 과연 베드로서 전체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 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 1서 2:6을 근거로 든다.
4. 또하나 이와 비슷한 견해는 통치이론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세상의 도덕적인 통치자로서 그의 도덕적인 통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의 도덕적 통치자로서 의로운자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목적인데 여기에 귀착시킨 오류가 잇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도덕적 통치자로서 일하셨다면 구약의 백성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잇겠는가 라는 것이다.(과거에 적용되어질 수 없는 난점을 가지고 있다. 즉 일관적-신구약-인 구원사역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5. 우리의 입장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과 이세상으 도덕적인 통치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세상에서 돌아가신것은 대리형벌을 받으신 것이다(히브리서의 희생제물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어야 할 대신에 그가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3:25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사건에는 2가지가 들어있다.
롬 3:25을 보자
①피로 구속을 이룬다는 것
②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그러므로 그 사건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믿음과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 믿음이 없으면 객관적으로 나와 관계가 없다.
③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야기는 하나님이 눈감아 주셨다고 오해하면 안된다. 그전-구약-에는 하나님이 벌하지 않는것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자기-하나님-의로움을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서 감히 참아보실 수 없는 아주 의로운 분이구나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
④또 하나는 자기를 믿는 자들로 의롭다 하려는 것, 즉 우리의 칭의의 사건의 결과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2가지 의미가 있는데 과거의 하나님도 참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것이고, 또 이 사건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의로와지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죽으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셨다. 이 화목제물을 전통적으로 Propitiatin(하나님을 유화히키는 것)으로 번역한다. 즉 사람이 잘못했으니가 그 잘못에 대해서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림으로서 하나님 마음을 무마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반대 의견들이 있다. ‘하나님이 뇌물을 잡수시고 봐주는 분이신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propitiation으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으로 번역하여 죄를 덮고 부패한 것을 깨끗케 하는 (씻음,깨끗게 함, 보상함의 의미가 있다). 분으로 보면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대한 화내심을 무마시키기 위해 화목제물을 드림에 대해서 이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화내는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오류는 정말로 죄에 대해서는 화를 내시는 하나님이심을 모른 ㄴ것이다.(희생제물을 필요로 할 정도로 화를 내시는 하나님이시다). .....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죽어야 할 대신에 그분이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화내심을 진정시키는 것, 바꾸어 표현하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구속의 범위=속죄의 범위
그리스도의 구속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전통적으로는 3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이것은 만인 구원론은 아니로 만인 구속론-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이다. 이들은 알미니안들의 주장인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믿으면 구원).
이와 비슷한 견해가 가정적 만인 구원론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피는 만인을 위해서 흘린 것이다. 그것이 실제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 학파의 아미로. ).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려 주셨다. 그러나 실제로 구원얻는 사람들은 그 피를 적용시켜 주는 자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피가 효과없이 흘려진 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점이 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일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일 사이에 과연 일치가 있겠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보면 제한된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다(알미니안이나 아미로나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 따라서 결과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흘리신 피도 결국 이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사실은 알미나안과 아미로는 인정하지 않고 우리만 인정하는 사실이다.‘Cimted atonement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궁극적으로 구원얻는자들을 위한 사건,피흘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만약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위해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려
주셨는데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헛된 피가 아니겠는가?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피가 능력이 없겟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는 구원얻을 사람들을 위해서 흘려준것이가 보는 것이다.
여기서 좀더 발전해서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대상자가 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전에 계획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한사람 더하거나 빼지 않고 구원을 받음-예정론이 여기서 나옴).
알미니안 주의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바르트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이런말을 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려주시지 않앗느냐?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자기 자신을 차단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구원을 못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교리- 이것이 성경적이라면-에 문제가 생긴다.
R.T.Kendall(복음주의자, Wm ch에서 로이드존스주입자로서 설교한 사람. 미국인 ,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 논문 1949년까지의 영국의 칼빈주의란 제목으로 에서 1981년 출판)
내용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칼빈을 모해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제한 속죄를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그렇게 생각지 안항ㅆ다는 것이다. 이분은 칼빈이 성경을 보기를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려 주셨는데, 예수그리스도가 승천하셔서 중보기도를 하실때에는 오직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하신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요즘 이렇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제임스 토렌스(아버딘 대학 조직신학교수)는 개혁주의 전통적인 견해는 보편 속죄론이다.라고 썼다. 칼빈도 그렇게 이야기 했다.
(자유토론)
(1)에수의 십자가의 피-성령-작정된 사람에게 적용시킴.
믿음으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성령)에게서 남.
(2)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타락
위의 두가지 견해는 종국적으로 모든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잘못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맥속에서 “모든”“세상”이런 낱말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예를 들면 ‘모든’이란 말은 이세상의 모든- 전 인류 50억-을 뜻하는 것인지 모든 계급, 유태인과 이방인은 구별하지 않은모든이란 뜻인지 분별해야 한다.
(3)하나님의 뜻에는 교훈적인 뜻이 있다. 가령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 그러나 또 한가지는 아담에게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했는데 아담이 먹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깜짝 놀라겠는가? ‘어? 너 왜 그것 따먹었니?’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선약과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가지가 조화되어야 한다.
제 8 강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의 성질
그리스도의 전체의 삶은 고난이었다. 수난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럴때에는 ‘마지막 일주일’을 염두해 둔 것같은 인상을 주나 사실은 수난이라 표현해도 그 삶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시험. 믿지 않음. 핍박함. 외롭게 사셨다는 것. 그의 영혼의 고통) 전승하신 분께서 우리가운데 종의 모습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 수난이요, 고난이다. 마 4; 의 사탄의 유혹이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졈 고난받지 않고 메시야가 되라는 것이다. 메시야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고난은 *표에서 나타나 있다. 이것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죄를 담당하려 오셨다는 것이다. 그가 결국 어떤 죽음을 죽어야 할 것을 알고 살으셨다. 그레서 예수는 ‘중보자적 죄의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가장 그의 영혼의 고통이엇다. 이것이 그가 거룩한 분으로서 거룩치 않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 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런 예수의 수난의 삶을 살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성경에는 두가지로 말하고 있다..첫째는 하나님께서 메시야의 예언의 대표구절인 사 53:6과 10을 보라. 이런 의미에서 수동적으로 수난받으셨다. 그러나 이것만 잇는것이 아니라 예수는 고난받을때 있어서 저극적인 순종이 있으셨다. 수난이란 받는 것을 말하는데 적극적으로 수난의 삶을 사셧다는 것이다. 예수의 삶은 적극적인 것이고 죽음은 소극적-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삶과 죽음 모두다 수동적이며, 동시에 적극적으로 받으신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받으신 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 십자가에서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응 ㄹ이루시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것이다.(그분 자신이 의이지만)
하나님이 아담에게-행위언약- 요구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어 의를 이루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지만 스스로는 인간에게 매잉게 하셨다. 그래서 그의 대한 보상으로서 생명을 주시겟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바로 이루신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심으로서 그 자신이 생명을 얻으신 것이다(그는 생명의 근원. 그러므로 생명을 얻으실 필요가 없지만). 살려 주는 영이 되기 위해서였다. (고전 15;46절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가 이 과정을 통해서 살려주는 영의 근거가 되신 것) 이 원리는 벌써 하나님에게 잇었던 것이다.
예수는 수동적 수난과 능동적 순종을 다 받으셨다. 우리의 죄책에 대한 형벌을 다 받으셨다. 이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갈 4:4을 읽어보아야 한다.
“때가차매.........여자에게 나게 하시고(동정녀 탄생)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입법자가 율법아래 날 수 없는 일. 이것도 수난의 한 형태. 그더 율법아래 나야 할 필요가 있으셨는데 그 이유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은 속량(예수가 율법아래 나서 하나님의 율법을 다 이루심으로서 속량하심)하시고....:”그래서 우리위해 의 이루심. 그가 우리를 의를 이루신 것이다(그리스됴ㅗ 안이 우리의 의)
루터:‘우리는 빈손을 가지고 잇는 거지들이다“ 이제까지는 그의 삶의 중요성을 살펴 보앗다. 이제 파시마그나 (수난의 극치=십자가)에 대해서 살펴 보자.
예수의 죽음은 어떤 죽음이었나? 예수의 삶 전체는 ..............이다. 하나님이 의도하는 마땅히 이루어져야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예수는 가지고 있었다. ( 에 대한 인식, 이것은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 있다. ‘때’의 신학)
요 10:11 선한 목자는 목숨을 버린다. 사람들은 이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선한 내가 선한 목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라고 ㅡ이식하면서 말하고 있다. 또 15절을 따라 17,18도 마찬가지.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요 17:19에서는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란 표현은 쓴다. 성화가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 드럴려고 구별(거룩의 의미)하셨나이다. 라는 것이다. 대제사장적 기도이다. 우리 주님의 죽음은 이렇게 준비되어진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예수의 죽음어ㅢ 성격을 살펴보자.
1. 저주받은 죽음이다. 바울이 잘 인식하고 있다(갈 3:13)에서 신 21:23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또는 저주가 되셨다(소크라테스는 죽을때 의연하게 독배를 마셨다. 그런데 주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하는데,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놓친 것은 우리 주님의 죽음이 한사람 예수의 죽음이 아니다는 것이다. 온 세상의 죄가-저주-그위에 얹혀진 죽음이엇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문학적으로 표현하기를 그 저주가 얼마나 심각한지 하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얼굴을 돌리셨다고 했다;온 세서이 어두워짐으로 암시적으로 생각했다.)
이온 모리스는 신약성서를 유심히 보념 예수의 십자가 질때 육체의 고통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했다. 후대의 순교자들과 비교해 보면.......오히려 예수는 육체적 고통보다 영혼의 고통 곧 영혼의 절규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에서 볼수 있다 어떤 이는 이것을 시 22:1을 암송하신것이다라고 하고....맨 뒷줄에 가면 하나님이 나를 분명히 구원할 것이니까 내가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나이다 라고까지 할려고 햇는데 기운이 없어서 1절만 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좀더 좋은 해석은 예수의 저주받은 죽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가 중보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는 의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삼위일체의 한분이시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얀관되면 삼위일체의 한분이시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연관되어있다는 의식을 못가진 상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갖지 못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절망이 있지 아니하다. 절망이 있다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알베르토슈바이저는 예수가 두번 절망했다고 보았다. 한번은 하나님 나라가 곧 올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까 ‘내가 천상으로 올라가서 죽으면 오리라’고 생각하여 굳게 결심(눅 )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셧다는 것이다.(예수 사역의 전환점이라고 본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렷는데도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으므로 절망했다고 한다.
예수의 죽음은 첫째, 죽음(육신과 영혼의 분리)와 둘째, 영원한 죽음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사도신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지옥에 내려가시고” 이 말이 우리 사도신경에는 삭제했다. 그래서 문제가 안되는데 아칠레이안 폼의 사도신조에 (390년경나옴)사도신경은 여러번 변천이 있엇다. 어떤 사람들은 12사도가 한마디씩 해서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했으며-이렇게 주장하면 사람들이 따를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로렌스 박사’가 밝혀내엇다. 이 사람은 또 교황과 관련된 그 근처의 땅을 콘스탄틴 대제가 교황에게 중ㅅ다고 하는 문서가 옛날에는 잇엇는데 15세기에 연구해 보니가 위조문서라고 밝혀진 것이다. 즉 사람들이 경건한 허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오히려 교회를 해치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Agreileian fornon에 보면 ‘지옥에 내려가다’(descendid in inferne)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하데스(음부로 내려가셨다.)란 뜻이 있고, 또 lower part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셨다란 뜻이 있다. 음부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죽는 사람이 있는 상태, 있는 곳, 무덤을 가르쳐서 사용된다. 그래서 Rufinus는 장사지낸바 되사 와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심.
그러면 성경 벧 3:18이하를 한번 보자.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천주교에서는 ‘옥’을 .inferne(연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Limbus patrum(조상들의 연옥)이라 한다. 예수께서 죽으셔서 조상들(연옥에 있는)을 다 풀어 주셨다고 한다.
또 루터파에서는 옥에 가셔서 승리를 선포하셨다고 본다.( 약오르자롱) 동시에 그 사람들에게 정죄를 선언하셨다고 본다. 이것에 대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상태라고 보는데 있다. 또 케주도라는 말은 대개 복음을 선포하는데 사용하는 말이다.
영국교회에서는 예수의 영혼이 낙원에 가서는 (구약 성도들은 낙원에 있으리라)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알선 하셨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해석은 좋으나 문맥상 적합치 않다는 단점이 잏ㅆ다. (20을 보라. 낙원에 갔다는 말이 없다.)
객혁파에서는 이 지옥 강하의 교리를 은유적(metaphor)으로 본다.(칼빈) 예수가 진짜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 아니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이 지옥의 고통을 당한 것이엇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칼빈의 개혁파 사람들이 본다. 예수의 죽음은-신체적 죽음과 동시에-영원한 죽음을 당하셨다. 이 영원한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지옥의 고통을 받아야 하는 고통인 것이다. 이에서 벧전 3:19절을 해석하기를 ‘영으로’하셨으므로 노아의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노아를 통해서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앗기 때문에 지금 그들이 옥 (지옥)에 있다는 것이다(선포는 그에 했고 그렇다 지금은 옥에 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그리스도의 영의 선포를 들었으므로 제 2의 기회는 없는 것이다.
벧전 3:18의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시고(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심.....”이란 말은 육체는 죽었고 영은 살았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의 살아나심은 영과 육이 다 살아나셨다. 성경에서 육체;와 영의 대조를 하는 것을 롬 1:3 보자. “육신-육체적으로는 다윗....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이것은 영으로 부활했다는 말이 아니고(영적인 측면에서 말하면 )이란 뜻이다. 그는 영적인 측면에서 부활했다는 말이다.
다시 고후 5:16을 보자. ‘우리가 이제부터 아무도 육체로 알지 아니하는도다“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 사람은 판단하는 길은 육체로 판단하는 일,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영으로 판단하는 길이 있다.
그러므로 벧전 3:18은 육체적인 판단으로는 그가 죽었지만 영적인 판단으로는 그가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4:6과 관련해서 보면 육체로 죽은 자들로 보는자가 있고 다른 하나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뜻으로보는 자들이 있다. 위의 벧전 3:18-19과 관련해서 설명하려는 자들은 전자-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시고-를 취하고 따로 해석하는 자들은 후자-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취한다. 모든 학자들은 다 여기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장사지내심의 의미
예수의 장사되심은 일반 사람들과 같이 장사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수 없을까 해서 ‘그가 우리를 무덤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죽음의 쏘는 것을 다 극복하시고 무덤에 들어가심으로서 우리가 두려움없이 무덤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다. 또 하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점점 성화하나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없다. 그렇지만 ‘하늘에 있는 영’을 가르켜서 ‘온전케 된 영’이라는 표현을 한다(히). 이는 죽음이 ‘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추론은 자명한 추론이다.
믿는자들의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가? (칼빈 기독교 강요와 N. Harper ‘현대 기독교 교육’을 참고하라). 로마 카톨릭에서는 안믿는 사람의 자녀들은 다 지옥감으로 빨리 영세;를 주어야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유아람보를 만들엇다. 루터파에서는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per verbum’이란 용어를 쓴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 속에 갇혀 있는듯한 인상을 준다. 한편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개혁파에서는 말씀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언제나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Cum Ver bo'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특이한 사람들-어린아이. 정신이상자 등-은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고난과 죽음의 의미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는데 오늘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뭏슨 의미가 잇는가를 살펴보자.
1.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가 받아야 할 과거, 현재, 미래의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으셨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옥 형벌까지도 받으셧다. (살아가다가 잘 안되면 무슨 죄 때문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마라) 징계와 형벌은 다르다.
징계:잘못한 양에 비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형벌:잘못된 죄악의 상당한 벌을 내리시는 것.
비롯 불신자들에게까지 그 당대 그 시간에 형벌을 다 내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계는 끝나고 마는 것.
2.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셧다. 그 의가 우리의 의가 된 것이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원죄를 씻어준 사건이고 예수 믿은 다음 부터는 내가 뭘 향해서 얻어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고 못 내면 못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의를 ‘더러는 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도 이와 비슷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공적에 하나님이 보상하신다고 하는 생각이다. 우리의 종교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에게 뭘해드릴 수 있다는 사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를 이루셨으므로 감사해서 살아가려는 사상과는 차이가 있다. 상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잘못이다(공리주의). 상을 준다는 성경의 표현을 애서 부인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의 삶이 감사해서 사는 삶이고 무엇을 바라기 위해서 사는 삶은 아니다. 상을 주면 더 감사하는 것이고 안 주어도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상이 무엇인가?(권성수, 상, 박사논문)
3. 예수가 고난의 삶을 사셨다. 이는 우리도 고난의 삶을 살게 하는 실천적인 의미를 준다. 우리는 예수 믿어서 그를 따라가야 하는데 잘된다는데 목표를 두고잇다. 물론 잘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잘된다는 기준을 세속적 가치에 두고 있다는데 있다.(적용:신학생때부터 규모를 줄이고........)
10. The State of Exaltation)(승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높아지심이란 말은 사용치 않는다. 신성은 그런일이 잇을수 없다. 이와관련해서 마 28:19을 기억해야 한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예수는 그 전에는”를 가지지 않는가 아니다. 성자로서 그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성자는 하늘을떠나지 아니하시고 성육신하셨고 고난사역 하셨고, 이루셨다. 그것은 Extra calvin sticum(칼빈주의 신학의 “밖에서”
그러면 마 28:14의 권세는 인성도 그와같은 권세가 주어졋다는 것이다(성자는 원래 가지고 계셨다). 메시아로서 사역을 이루셨으므로 메시아로서 사역을 이루신 분한테 그런 권세를 주셨다는 말.
God the Son(성자-christ-messiah). 신성으로 새로운 것을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다. 그분이 결국 따져 보니가 성자이셨던 것이었다.
부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 부활이전 : 율법아래 있는 상태(갈 4:4)-율법과 형벌적인 관계아래 있었던 상태=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상태이다. 적극적 순종(positive obedience)와 소극적 순종(passive obedicince) 통해서. 즉 소극적 순종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 할 형벌을 다 받으셨다. 심지어 지옥의 고통을 다 받으셨다. 그리고 적극적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셨다. 이는 그가 율법아래 있는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 의로운 관계 가운데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이다ㅖ 그래서 예수는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고 우리위해(죄인) 생명을 얻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굉장한 영예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분은 인간의 모든죄를 다 짊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공적인 선언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죄인이라 해서 죽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인이라 살리셨다.
또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모범적 합의를 주고있다. 예수가 부활했으므로 우리로 장차 부활(영화롭게 될것)할 것이라고 보증해 주고 적중해 준다. 그러므로 부활의 첫 열매(이는 그런일이 많이 있는것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럴뿐만 아니라 보증물이라고 말한다. (보증, 확신)
또 장차 그럴것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영적인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다는 의미가 덧붙여 지는 것이다.(롬 6:4)
우리도 죽어야지 살아난다-이것이 나중에 죽은자 가운에서 살아난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죽고 부활하여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것위해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살린 세 사람 ;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도 살렸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죽었다. 예수의 삶은 한 번 살아서 영원히 사는 것이었다.
2. 삶의 특성 :고전 15;42-44
①썩을 것으로 심고-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지(죽지 아니한 몸)
②욕된것으로 심고-영광드러운 것으로 살고(욕된몸이 아님)
③약한것으로 심고-강한것으로 살고(약한몸이 아님)
④육의 몸-신령한 몸으로 살고(Spiritural bady)
예수의 몸은 못박힌 몸으로 다시 사신 것이다. 여기에는 Identity, Continuity가 있다. 그러나 Discontinuity(불연속성=다른점)이 있다. 그렇지만 다른점이 있다해도 예수를 우리가 예수를 우리가 알아볼수 없을 정도의 사람은 아니다. 예를 들면,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를 몰랐으나 나중엔 예수를 알아 보았다.
예수는 타락한 인간이 아니지만 타락한 인간들이 처한 모든 연약함을 다 가지시는 인간성과 가지는 묘약성을 다 가지셨다. 그런데 이제 부활한 강한몸은 이 연약성이 제거전 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부활후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활한 영적인 몸이란 ‘영에서 완전히 적응되어진 몸이다(adapted to the spirit). 이것은 우리의 몸이 아주 종요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부활은 누가 일으키셨는가?
성경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일으키셨다고 한다.
①출 6:4;갈 1:1-하나님 성부가 하심.
②요 11:25;요 10:18-예수 스스로사 살아나심(나는 부활이요, 생명)
③롬 8:11-성령이 예수님을 살림.
그러므로 삼위가 살리신 것이다. 그래서 고대 교부들이 사용한 말
opera ad extra sunt indivis
부활 ;삼위일체가 안으로 하는 사역은 나눌 수 있다. 밖으로 하는 사역을 나눌 수 없다.(부활도 밖에서 일어난 사건)
부활에 대한잘못된 가르침들
①제자들의 거짓말-이를 위해 제자들이 생명 걸까?
②기절설-십자가에서 기절해 있었다.(무덤에서 살아나셨다)
;뼈를꺽지 않음;물과 피가 나옴-십자가형하면 그 결과로 물, 피를 분리됨-십자가의 고통으로 파열(정확무,과학적 증명);누가 그들을 옮겼을까? 기절한 자가 무슨 힘으로 옮기며
장정들이 있는데 어떻게 했을까?
③환상설-너무나 예수를 사랑하여(여자들이) 예수가 환상으로 보엿다는 것이다.
④신화다-불트만은 부활은 사실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밝혀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배후에는 칸트의 사사이 잇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칸트의 사상: 이상계
현상계-사실의 세계. 여기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는다. 이 현상의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이 예수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의미는 사실의 세계안에서는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이상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불트만의 말은 시, 공간에서는 부활이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흘만에 부활한 것이 아니다. 주일 아침에 케리그마를 선포할때 부활했다고 본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선포되었을 때)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활의 역사성이 부인된다.
승천
승천은 부활사건을 완성하는데 필연적 사건이다. 그의 인간성이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것이며 그의 삶의 조건이 바뀐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 사건과 희생제사때 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는 사건과 관련시키고 있다. 즉 예수님도 피를 가지고 라는 성소로 가셨다고 한다(자신의 희생제물).
둘째, 이것이 가지는 또하나의 의미는 승천이 신자들의 하늘에 올라감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승천은 나중에 잘 발전되어진 교회론에 의하면 그가 우리의 머리이기때문에 우리 가 이미 하늘에 잇는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이다(엡 2:6) 함께 일으키사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심)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나중에 앉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앉힘) 바울은 다른말로 너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지라. 너희는 위에 속한 자니라(골 3:1)
우리가 가진 왕직은 회복시켜주는 의미이다. 보좌에 앉는다는 말은 왕이 앉으며-이는 통치하신다는 말이다. 오른편에[ 앉는다는 말은 여예의 자리를 말하는 것] 이고 같이 앉는 다는 말은 함께 통치한다는 말이다.
성경 자체가 신인 동형론적인 표현을 쓴다. 시 110:1-성경이 표현 쓰기 때문에 우리로 쓰는 것이다.
하나님 우편에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쉬운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사역을 하신다. 그는 성자로서 계속 사역해 왔다(그분이 지상에서 인간으로서 메시야 사역을 하실때에도). 그러나 이제는 그의 인간성도 그 통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인간성은 우리의 인간성이다(여기까지는 맞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서서 그가 우리의 인간성을 가지므로 우리도 그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하면 안된다. 그러면 인간을 신화한다.
또하나, 멜기세덱 반차로 쫓아 제사장으로 계신다.
-그가 제사장으로 계신다는 말은 지금도 제사드린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의 제사는 영 단번에 드림으로 완성했다. 다시 드릴 필요 없다.
-그러면 제사장으로 계신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이루신 것을 적용하시는 일을 계속 하신다(하나님 앞에서). 이것은 우리는 중보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더 바른 생각은 적법한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서 다 이루었습니다 라는 의로운 주장을 계속하신다는 것이다. (마귀가 참소하면 예수가 변증)-내가 이사람 위해서
-루터파에서는 중보기도를 ‘내가 목소리를 내어 우리 위해 진짜 중보기도를 하신다’고 한다.
루터가 십자가 사건과 관련해서 누구위해 못박히었다. 밧세바 범한 다윗을 위해서 부인한 베드로 위해서 한눈 팔고 있는 우리 위해서 그 자가 죽었다는 주장은 하나님우편에서 하고 계신다.
선지자로서도 일한다.
이것은 하나님 우편에서 행하신다.
재림의 의미는?
이것은 중보자로서의 특권에 속한다. 재림에 대한 3가지 기본적 표현
(1) 오심(παροΰσια;그의 현존하심)-우리앞에 와 계심. 그러나 이 말을 가지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이미 예수가 함께 하심으로 다시 오시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
(2) 살후 1:7 나타나심(άποκαλυψις)-에수의 게시 (1)과 (2)를 나누면 안된다. 한 사건의 다른 측면이지 두 사건이 아니다. 세대주의자들은 나눈다.
(3) 살후 7:8 신현(Έπιφανεια);영광스럽게 나타나심. 이 세가지는 한 사건의 다른 측면이지 각각 나누면 안된다.
조지 엘른 래르‘마지막에 될 일들’ 참고
부제 ;편싱도를 위한 종말론
공중재림7년의 나타나심의 견해사 잘못을 지적한다.
(참고)
다윗,사울 왕으로 기름부음, 그 후에 바로 왕의 사역하는것이 아니라 얼마의 기간이 있다가 와이 되었다.
예수가 오실때 (세례 받은때부터) 메시야로서의 사역은 다 이룬다음(마 28:19)에 하늘에 오르셔서 왕직을 감당하신다. 3년 사역에서 왕직을 감당하셨다. =희연하게
성령론, 오순절이전에 세상에 계셔서 사람들은 하나님 백성으로 받드셨다.
휴거
살전 4:16
예수님이 오실때 하나님이 오신다고 하셨다. 호령과 천사장과 함께 하나님 나팔, 죽은자 부활, 그후 우리가 변화-끌려올때, 저희와 다함께
공중에서 영접하기 위해서:헬라어 용법(어떤분이 손님이 오면 마중나가서 맞이해 다시 집으로 온다(집으로 모셔오기 위해 마중나감). 행 28:15을 보면 그 용례가 나온다. ‘맞으러 오니’가 살전 4:16 영접하시리니와 용어가 같다.
휴거의 목적은 맞아서 내려오는 것이다. 거기서 7년 산다.
휴거소설 오류 2개;휴거되는 시간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1시, 다른 사람은 3시 4시 아니다. 동시에 일어난다. ;휴거때를 안다-10;28-모른다.
(부활의 몸) 요 20:17 나를 만지지 말라;부활체와 관련해서 제일 어려운 문제 나온다.
(1) f.f. Bruce:방문설
(2)모리스:나를 마지막인것처럼 붙들지 말아라. 내가 어느정도까지는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좋은 것이다) 나를 다시 볼기회가 있을 것이다.
(3) 마리아에게 ‘네가 이제는 옛날의 관계에서는 나를 관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했다는 말. 새로운 관계에서 접촉해야 한다. 그때는 내가 승천한 후에 50년의 삶 안에서 신앙으로 나와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는 것이다.(해리슨)
(4)네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해서 온 것 아니다. 나하고 영원히 있기 위해서 온 것처럼 생각지 말라 한동안 너희를 떨어져 잇을것이다 라는 이해를 가진자도 잇다.
예수의 영혼 문제
예수의 죽은후 영혼은 어디에 계셨는가?
(1) 분리되어 잇지만 육신과 같이 있었다. 예수의 신성은 하늘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예수의 육체와 같이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무덤에 신성이 있어서 그의 육신이 살아났던 것이다.(이것은 하나의 근거ㅖ
(2)예수의 영혼도 낙원에 계시다가 오셨다. 지지구절이 눅 24;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이다...예수가 살린 3명도 낙원갓다왔다. 두가지 다 괜찮다는 학설.
예수 영혼이 죽었다(저주받음). 우리의 영혼이 죽었다. 그러나 영혼이 있다. 다만 활동하지 않을 뿐이다.
예수가 음부에 내려갔다고는 할수 있다. 죽은 상태를 음부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에 내려갔다고 할수 없다. 그런데 육은 죽어 없어진다. 그러나 영은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죽음이란 관게(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존재의 몇절이 아님). 예수의 영혼과 신성은 다르다.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왕되심-그리스도의 3중직
기독론이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고 어떤일을 하셨는가?
사역에 있어서 낮아지심의 상태-높아지심의 상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왕직, 선지자직 제사장직을 해주심(칼빈때부터 이렇게 해서-물론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선지자직:하나님 말씀을 잘 알아서 우리를 가르치신다.
제사장직:우리를 거룩케 하심.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일중 제일 중요한 일은 죄를 사해주는 일 곧 그의 사역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십자가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이미 구약시대에도 선지자로서 우리 안에서 역활을 해주셨다. 가령 벧전 3:18-그리스도의 영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노아를 통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그가 성육신 하기 전에도 선지자로서 사역을 감당했음을 말하 것이다.
과거의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저들안에서 말하엿다고 까지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이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선지자 역할을 감당하셨고, 또 이셋상에 오신 후에도 선지자 역할을 했고, 승천하신 후에도 선지자 역할을 계속하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늘에 오르신 후에 그 역할을 계속하기 위해 그분은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이다. (요 17:13이하) 다른 보혜사를 보내셨다.(이 일은 잘 안다)
이제 우리가 살펴 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직이다. 사실 그리스도가 이세상에 오실때부터 왕이셨다. 마태복음에서는 그가 나시면서부터 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그는 이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렇다면 그가 이세상에 오심으로서 새로운 왕이 되는가? 시 103을 보면 영원하신 왕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시 103:109;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만유를 통치하시는 도다. 이것은 여호와의 통치, 권능의 왕국을 말하는데 성자께서는 성육신하시기 전에도 이 권능의 왕국에서 통치를 해오고 계셨다. 그런데 이세상에 오셔서 또 왕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인데 그 의미는 영원번부터 행사하시는 왕직이 아니라 중보자로서 왕권을 행사하신다는 왕직이다(중보적 왕권0
그리스도의 3중직이란 우리를 위해서 영원전부터 행하시는 메시야로서의 사역이며, 이 메시야(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잘 알려 주기 위해서 3직(왕, 제사장, 선지자)에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이 3직의 기름부으심은 장차 한 몸에 3직분을 행하실 어떤 분이 오실 것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 것이었다. 예수께서 바로 그분이시며 그 직분을 행하시는 분이셧다. 그런데 우리는 ‘중보적 왕권’에 대해서는 별로 잘 알지 못했다. 우리가 최근(한국에)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ㅇ뎨수의 가르침은 은혜의 왕국(중보적 왕권 혹은 통치)를 말한다. 중보적 왕권은 두가지를 포함한다.
그중에 하나가 은혜의 왕국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은 은혜로 오는 나라이다. 하나님이 으녜로 우리 가운데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즉 신자들의 마음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통치하시는 중보적 왕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것은 눈에 버이지 않으며, 영적인나라이다. 그러면 누가 실질적으로 통치하는가? 성령을 통해서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그 은혜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매일 매일 성령에 복종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은혜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근거해서 세우신 나라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온다”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오셨다. 그런데 만약 그가 구속을 이루지 않으셨더라면 그 나라에 들아올 사람은 한 사람도 없데 된다-이 유혹이 바로 사탄의 유혹이다. 이것 메시야로서의 사역-고난과 죽음-을 감당치 않고 메시야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다. 메시야의 권세, 온 세상이 그렇게 햇다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나라에 들어올 백서은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구속의 사건이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잇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은 떨어질수 없다. 하나님 나라(은헤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근거하여 이세상에 오는 것이다. 예수가 구속 사건을 이루기 전에도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라고 한 것은 장차 자신이 이루실 구속사건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성취하는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다. 엄밀한 으미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건ㅇ 근거하여서 이땅위에 하나니므이 나라의 백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은헤의 왕국이라 하는 것이다. 은혜의 왕국이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의 백성이 되어 가지고 기꺼이 순종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권능의 왕국과 은혜의 왕국의 차이점이다. 권능의 왕국에서는 그 누구라도 하나니믜 통치 아래 있지 않을 존재가 없을 것이다(심지어 사랑까지도)
적용: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알수 잇는지는 내가 정말 스스로 쭈님께 복종해 나가는 것이 잇느가? 없느가?에 잇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의 나라라는 것은 영적인 왕국이라 햇던 것이다. 그것은 신자들의 내면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생각햇던 것보다 지상적이고 외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 로마 카톨릭처럼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대신하는 것도 아니다는 말이다. 이 나라에는 중생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잇다. 그래서 예수는 중생과 하나님 나라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잇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다’ 여기서 볼수 없다는 이야기는 눈으로 볼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는 것이다. 또 산상수훈에서 그 나라의 백성의 특징이 어떤것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잇는데 그것도 이렇게 행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잇다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 너희가 이러이러한 사람들이다. 백성된 너희가 복된것은 (복되도다가 맨 처음에 나온다) 하나님 나라며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면에서 미래적이다. 은혜의 왕국이라는 것은 언제나 현재적ㄴ이면서 미래적이다. 현재성은 지나번에 배웠다. 미래적인 면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성경은 어떤 변화(적변적인)가 함께 올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힘에 의해서만 오는 것이지 인간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앞당겨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을 한다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서의 노릇을 한다)하나님 자신의 권능에 의해서만 오는 것이다.
살전 5:2-3. 여기의 강조점은 해산 고통이 언제 임할지 모른다는 것이다.(이것을 사변적으로 생각하여 여자가 10달차면 해산하니까 예수의 재림도 언제쯤 될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그것처럼 갑자기 임하여 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갑자기 임하여 올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벧전 3:10에서시사해 주고 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이러한 것이 일어날 것인데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냐에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권능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의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올 것이라는 시사를 마 19:28을 보면,‘이 세상이 새롭게 되어’-이 말은 온 세상이 중생한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 날이 언제냐 하면 하나님의 미래적 왕권(권능의 왕권)이 우리에게 도입해 들어온 때이다. 사실은 그 중생의 성취가 바로 우리의 중생이다. 그래서 이것을 베드로후서의 말씀과 연관시켜 보면 그 일을 통해서 온세상이 중생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잇다(현존하는 세상을 고쳐나갈 것인지, 완전히 몰아내고 전혀 새로운 세상을 도입할 것이지 모른다). 여기에는 (연속성)새롭게 됨이 있는 것이다.
넷째로, 은혜의 왕국의 특성은 교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은혜의 나라(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가장 연관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는 가장 중시하도록 세우신 기관이 교회이다. 증시 :나타내 보임)
다섯째로, 이 은혜의 왕국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끝이 없다. 시 89:36=37 그 나라는
사 9:7 영원토록
단 2:44 영원히 망하지 아니함
벧후 1:11 영원한 나라
그 나라가 자원해서 모두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로고스의 영원한 왕권에 대해서 고넌 15:24을 들어 다르게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왕국은 그가 통치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9 즉 은혜으이 왕국까지도 넘겨주는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예수는 성자로서의 영원전부터 왕권도 예수는 가지지 않을것을 가졋지만 이제 그의 구속에 근거하여 새로운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이다. (새로운 측며녜 마 28:19.
한가지 변화는 그의 구속 이전에는 신성만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지만 그가 메시야로서의 구속 사역을 다 마치신 다음에는 예수의 신성뿐 아니라 그의 인성까지도 그런 권세를 가진 것으로 높여졌다는 것이다. 그 권세를 가지신 것을 다른 말로 하면 권능의 왕국의 왕권도 가지신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은혜의 왕국에서의 왕이실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왕국을 돕기 위해서 권능의 왕국의 왕권도 가지신 것이다. 모든 세상의 통치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실뿐만 아니라 온 세상 우주 위에서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것이다. 은혜의 왕국에서는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겨 나간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들이 주님을 섬기지 않을수 없다(섭리적이고 왕권이라고도 볼수 있다). 이세상에 주님만을 안섬기는 사람들조차도 결국은 은혜의 옹국에 있는 사람들은 보조하기 위해서(돕기 위해서) 주님께 복종하고야 마는 상황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모든것은 다 이루셨다. (빌 2:9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종말론적으로 그렇게 될것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금도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주님의 일을 이루는 가운데 돕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흥미로운 사실이다. 결국 예수의 관심은 은혜의 왕국에 있다. 이 은혜의 왕국은 제대로 통치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이 이 은혜의 왕국을 돕는 것이다. (돕는 일이라 방해하는 일까지도) 그렇기 때문에 이 은혜의 왕국을 위해서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자기의 발앞에 복종시키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은혜의 왕국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명확하게 들어날때가 되면 그때에는 비로서 모든것이 그리스도의 발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고 이 권능의 왕국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것이다. 결국은 은혜의 왕국이 모든 것을 포괄(권능의 왕국까지)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영광의 왕국이라 하며 최종적인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게 드러날 것이며 이땅에 인간을 만든 하나님의 뜻이 잘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땅 위에 왕으로 세우신 원래의 왕권이 회목이 회복되는 것이다(사람들이 제대로 그 일은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선지자. 제사장, 와으이 직분을 행하셨다. 그런데 왜 그것을 행해야 하느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때 인간으로 하여금 이런 직분을 행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을 잘 알고(선지자 직분) 다른 존재들에게 하나님을 잘 알도록 가르쳐야 하고, 거룩성을 유지해야 하고 (제사장직) 또,이세상의 모든것들을 통치해 나가야 했다(왕직),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못했고 예수는 그것을 햇다. 글새 우리는 그의 행하심을 통해서 3중지을 행할 수 잇는 존재로 회목되어진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지는 때가 그리스도의 권능의 왕국이 아버지께 바쳐지는 날이며 그때에야 이 직분은 그리스도 앞에서 수행할 수 잇는 것이다.
한가지 더, 예수가 우리위해 기도해 주시는 것.
벧전 2:5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중보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과연 어떤 것인가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잇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거룩한 제사를 드릴 제사장이 될지니라’
여기 제사장은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으로서 직무를 행한다는 말이다. 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이다. 즉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할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면 그 일 자체가 하나님이 받음직한 일이 아니고(이 일들은 문제 투성이다).
이 일은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이루신 이로 싸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에 인용된 글의 의미이다. 이런 사역을 주님께서 하늘에거 행하시는 것이다. 하늘에서 행하시는 이 중보사역은 왕으로서 행사하시는 사역과 뗄레야 뗄수가 없다-우리를 통치하시는 그분이 이 일은 해 나가시는 것을 잊지 말라.
질문;영광의 왕국에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고전 15;24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하신다는 것이다. 메시야의 왕국=중보으이 왕국을 아버지께 드린다. 즉메시야로서의 사역이 다하여지면 중보라는 없어지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에는 메시야가 필요없고, 하나님에 의해서 은혜의 왕국이 다스려진다. 그런데 세대주의 자들은 이것을 나누어 중보의 왕국을 천년왕극으로 보라-의미가 없다.)
고전 3;22 다 우리를 위한 것-그리스도-하나님의 것-우리는-그리스도의 왕국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왕노릇한다는 것은 섬김으로서 관리.
예수님이 신인으로 가지신 권능의 왕국의 왕권은 넘겨주시지만 이 은혜의 왕국은 영원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근본적으로는 은혜의 왕국은 포괄적이다) 은혜의 왕국과 영광의 왕국은 같다. 다만 은혜의 왕국이 더 포괄적일 뿐이다. ]
이 승 구 교수
기독론 제1강 과목소개
1. 주경신학 (EXEGTLCAL THEOLOGY)성경신학과 다르다
2. 조직신학 (Systematci Thealogy = Ftogmetilo)
조직신학은 주경신학바로 다음작업이다. 어떤사람들은 “신탁은 필요없다 성경을 가지고오라”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까지도 자기 머리속에는 신탁체계가 다들어 있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은 누구신가 ? 예수님은 누구신가등)
3. 역사신학 (Historical Thealogy)
4. 실천신학 (Praetical Thealogy)이는 신학의 영광이다.
1) 서론 (lntoduction)
2) 신론 (Thealogy proper)
3) 인간론 (A기 Thoparogy)
4) 기독론 (chistelogy)
5) 구원론 (sotoialogy)
6) 교회론 (ealeriology)
7) 종말론 (exchatology)
제 2강 예수의 선포와 도전 그의 사역
들어가기 전에 다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
1. alexandia에서 많이 사용하던 사고방식이다:
Chrdstology from a bote 위로부터의 시탁 (기독론)
2. antioch 에서 많이 사용하던 사고 방식이다 :
christoloty from below 아래로부터의 신탁(기독론)
3. 차이 :
1) 1번은 신자들이 취급하는 방법이고 2번은 자연인들이 취급(접근하는)방법이다.
2) 제자들은 어떤의미에서 2번 입장인지로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줄 완전히 알고 예수를 따른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딸라 다니면서 보고 듣고 가르침을 받다가 보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줄 깨달았던 것이다.
3)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3번을 좋아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위로부터의 신학, 곧 로고스로부 터 씨작하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고 공관복음서를 좋아한다. (이들이 요한복음서를 좋 아하지 않는 이유는 요한복음이 A 90년 이후에 쓰여졌기 때문에 믿을수 없다는 것이다.)
4) 현대 젊은이들로 2번을 좋아한다(그래야 자기들의 지설이 충족되는 것 같다) 이 방법은 예 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단정하지 말고, 예수가 어떤 사람 이였나를 검토해 보고 만나보 고 말하자는 것이다. 이들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 입장과 같다.
4.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1번이다. 하지만 본 강좌에서는 21번의 입장에서 공부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예수의 성육신에서 시작하지 않고 (1번 입장이라면 예수의 50육신 곧 말씀이 육신이 되심에서 출발 (기독론을)해야한다 ) 예수의 선포에서 부터 공부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2번을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방법으로 공부해 보자는 것일 뿌닝다.)
예수의 첫번째 선포는 막 1:115의 하나님의 나라였다.
MK 1:15 보자 (처음외침)
1)“때가 찼고”(크로노스:연대기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역대기를 ‘크로니컬“1라 부른다) 단어는 크로노스인데 뜻은 카이로스 (KLCPO'S: 질적인 시간으로써 하나님의 깊이 생각해 놓은 시간을 말한다)이다 (*단어도 KLCPO'S로 되어 있는데....? 옮긴이)
2)“하나님의 나라”가 가가이 왔느니
(1)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하나님 나라)
(2) 마 4:17에는 “천국(天國)이 가까왔느니라”고 되어있다.
① 천국 (βασιλεια του Ουρανων)
나라 하늘
② 여기서 ”하늘“나라는 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③ ’하나님‘을 말한다. 다음의 예를 보자
a 눅 15:18...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으니
b 단 4:26....하나님이 다스리는 줄.....
(3)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는 같은 것이다. 다만 마태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마태 복음을 썼기 때문에 그들의 관습에 의해서 ”하늘“(천국)이라고 했을 것이고, 마가는 이방 인을 상대로 썼을 것이므로 ”하나님이다“(하늘이라하면 하나님을 뜻하는 것인줄 이방인들 을 잘 모르다)라고 했을 것이다.
3)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천국복음)을 전하려 오셨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의 나 라에 대해서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이 또는 사람들이 벌써 하나님 나 라에 대해서 선이해(알고있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4)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 구약에서는 ”말쿠트“라고 하는데 이는 ”통치“(rale of god)를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표현들을 보면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다‘라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은 영이심으로 의자에 앉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좌에 앉는다‘라는 말은 ’왕이 보좌에 앉는다‘는 말이며, 이는 그가 ”통치“하심을 나타내는 말인것이다. 구약 에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통치를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하실 날을 기다려 왔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역사의 종국이 되면 특별한 의미의 통치를 시작할 것 ‘이라고 보았다. 유대인들은 종말에 대해서 ”두 세대“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자신들은 이 세대에 살고 있는데 얼마 안 있으면 오늘 세대가 올 것이라고 보았다. (물론 이 세대에 서도 하나님이 통치하시지만 오늘 세대에서는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보았 다.)
The Age to come
This Age ꠑ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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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은 어떠한가? mtlif 보자 ”나라에 임하옵시며....“이는 아 직 그 나라가 임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 즉 아직 도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았다는 것)에서는 예수의 생각과 유대인의 생각은 같다. 그러나 예수는 다른 한편에 서 (마4:10)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다(그런데 여기 ”가까이 왔다“에 주의는 너무 기울여 예수의 가르침을 아주 잘못 이해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아베르트 슈바이처이다. 그는 말하 기를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온다고 선포했다“고 한다.:
코너를 돌아가기 직전 상태에서
5초전 상태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고 본다.(5초 후면 온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으므로 눅9:51대로 죽기로 굳게 결심했다는 것이다.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올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ㅅ 죽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오지 않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 몸을 찢겨 걸고 넘어가고 말았다 고 보았었다. 이것은 슈바이처 박시의 ”역사적 예수의 탐구“논문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 게 한가지 수헌을 한것이 잇다면, 종말론에 대해서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게 한것이다)그렇 다면 예수께서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마12:28을 보자
”내가.....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 예수는 이미 여기 와 있다고 했다.
2) 한국 사람들은 죽으면 간다고 한다.
3) 다미 선교회 등의 사람들은 앞으로 온다고 한다 (유대인, 슈바이처)
4) 적용 : 우리가 가지고 잇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버리자 (바꾸어라)
그렇다 예수에게 새롭게 온 계시자 여러개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대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대 중간에 이미 와 있다는 것이다. 겹쳐 있는 부분이 바로 ” 종말“이라 부르는 것이다 (Eschaton)
초림 재림 오는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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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 재림하실때 하나님의 나라는
결정적으로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의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과거에 유리는 이 세대 끝에 예수께서 재 검하실 한 날을 종말이라 불렀다. 그러나 예수는 이 세대 안에서 벌써 종말이 시작 되었다 고 한다. (마12:28)이 외에도 많은 근거가 있다.
1) 행2:17에 베드로는 요엘선지자의 ”말세“(마지막 )개념을 오순절에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 다.
2) 히1:1에도 기자는 ”이 모든날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잇다. 이 개념은 행2:17 말세와 정확 히 같다.
3) 자세한 것은 보스의 ”바울의 종말론“참고 (1장)
또 눅 17:20을 보자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여기서 예수의 정 확한 의도는
1) 현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볼수 없게 임한다는 것인 이나라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나라 (spiraual kiugdon)라는 것이다.
2) 그러나 장차에 잇어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때(권능으로 임하는때)가 있 다.
3) 그러면 “영적인나라”라고 했다고 해서 없는것인가? 영혼이 안보인다고 해서 없는가?아니 다 어디에 있는가?“...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1) 지금 영적의 나라를 이야기 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영혼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나라는“우리 심령에 있다”고 할수 있다.
2) 그러나 이 해석의 한가지 단점은 지금 예수께서 이야기 하고 잇는 대상이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에 그들 심령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을리 없다. 그래서 “우리 심령안에”라기 보다 “너희 가운데”(in the midst of you)또는 “~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이다.
3) 오늘 ”너희 중에“(among you,셋이상일때)라고 보아야 한다.
유대인들: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이 있는 곳에 예수님의 인격이 있는곳에 임하여 온 다는 것이다.
4) 또 in the reach of you”너희 들이 닿는 그곳에“
5) origen은 예수 ”그 자신이 왕국이다“라고 했다.
(άυτο βασιλεια): 이는 좋은 표현이다.
마 11:11보라 ”하나님의 나라는 침소를 당하나니...“
1) 당하나니 :형태는 수동태이데 뜻은 능동의 뜻을 가지는 중간태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침 소를 한다“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 (이떼부터 예수의 사역이 사직 되었다.)이후부터 하나 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침소한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다)그러며 침소해 오는 나라에 대해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한는가에 다라 그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한 다(자신의 운명좌우)
이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주요한가에 대해서 가르쳐주기 위해 예수는 비유를 사용하셨다. (마 13: )
1)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은니...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 니라 “
(1) ”천국은“하였으므로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이다.
(2) 자기 소유다 보라 귀하다.
2) 마 13:45 ”천국은 마치 죽은 지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 라”
(1) 그 사람은 진주전뭄ㄴ 장사이므로 자기 모든것은 팔아서 샀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 할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진주를 모르니까
(2) 자기 권소유 보다 귀하다.
D-day V-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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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림 재림:이날은 consummatin(극치,절정)이 라고 하자, 완성이라고 하면 지금 와 있는 하나님 나라가 미완성이 라는 의미를 주기 때문에 좋지 않 다.
개혁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 하나는 언약이다. 이 언약에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데 하 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잇다. 이나라는 예수에게서 이루어졌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음 두 비유가 쓰였다.
1)겨자씨 비유 (마 13:31 - 32)
2) 누룩비유 (마11:33)이 비유들은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것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다. 오스카쿨만은 유럽인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그점을 하나님의 나라게 적묘했다. 그래서 예 수께서 사단을 결정적으로 이기시고 승리하신 날을”d-day"라 하고 그가 다시 재건하셔서 극치,절정에 다르게 할 날은 "r-day“라 했다 (d-day는 로즈망의 상륙작전을 말한다) 예수 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신 후 시험을 보았다 (그들이 이해하고 잇는가를 물어 보았다. (마 16:13-17) - 마16장은 공상애 마지막 부분니다.
1) 사람들을 나를 누구라 하느냐? 14절 보면 아무도 예수를 바로 인식하는자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재차 묻는다.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절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게신 하나님 의 아들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
(1) 그리스도 (xpcotos= messiah )그 당시 예수의 모습을 보고 메시야가 말하는 것은 혁명적인 것이 었다 (선언) 왜냐하면 메시야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와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영과 스럽게 나타나야 하는데 예수를 보니 영광은 고사하고 자꾸 죽으려고만 한다. 자기들 생각에는 메시야 개념에 안 맞지만 petu은 messiah라 고 백한다. 그가 3년은 함께 다녀 봄으로써 ”이 사람이 누구냐?“라 고민하며서 나름 데로 내린 결론이 ”이 사람은 메시야 이다!“라 는 것이다.
(2)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해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예수의 신성을 지시해 준다. 즉 성자의 아 버지 되신 분께서 알려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가 이루는가?바로 예수가 이룬것이다 여기에는 2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하게 ’신중심적‘(theo-contric)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는 언더라인 하던지 점을 찍던지 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자는 일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다 (베드로의 고백의 핵심이 이것이다)그러므로 인간이 하나 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간은 기껏해야 그의 백성의 종노릇 역확 을 할 뿐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역동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dynamic) 역동적이란 말은 힘을 가지고 움직여 나간다는 것으로 정적이고 정지된 것이 아니다. 눅10:18은 하나님 나라의 역동적성격을 잘 보여준다. “사단이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느니 라”이 말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역사해 나갈때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이락 하셨 다. (아래 견해를 잘못)
(1) 나라는 윤리적 공동체가 아니다. (리출)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2중적으로 임한다는 사실.
(2) 나라는 칸트의 목적의 왕 국도아니다.
사람은 수단으로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서 대우하라-칸트)
(3) 슈바이처 :철저하게 마개에 온다.
(4) C.H.Dadd:실현된 종말론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임하였으니 더이상 올것이 없다 (플라톤주의적으로 기독교를 해석)우리가 죽으면 의 면전에 선다. 이것을 예수는 강도에게 낙원에 있으니라 하셨다. (낙원= 파라다이스)천국이라고는 하지 말라.
제3강 그리스도의 양성론 (Two natures of chrst)
1.문제제기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 (vere Deus)이면서, 동시에 참인간 (vere Homo)이라는 것을 어 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을 이해하려다 잘못된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로, 왜 이것을 우리가 이해해야만 하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잇는가 ? 그것은 우리 가 이런 논쟁을 살펴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다가 보면 나는 옳다고 주장하는데 - 성격 근거 제시하면서 까지 - 다른 사람들은 잘못되었다고 나를 정죄하는 결과에 가지 이르게 된다. 그 러므로 우리 선배님들의 논쟁을 통하여 잘못된 사상들을 우리가 살펴 보는것은 무엇보다도 중 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하겟다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 예수의 참하나님의 되심과 예수의 참인간되심에 잇어서 어느것이 먼저 의문시 되었 을까? 그것은 말할 나위없이 신성에 관한 것이었다.
2. 예수의 신성 (참하나님 되심)에 대한 회의
예수가 참하나님일까?라는 신성에 의문을 처음 제기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엇다. 여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잇는데 하나는 유대주의적 그리스도인 (JEW-ISH CHRISTIANS;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과 다른하나는 갈라디아의 대적자를 같이 예수믿고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자들 (JEUDAIGER;쥬다이저)이다. 이런 두부류의 사람들 중의 일까를 살펴보자
A. 에비온주의자들 (Ebionites)
이 명칭의 유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이 파를 이끈 지도자의 이름 (에버온)을 따라 서 붙여진 것인지, 아니면 에ql온(가난이란뜻)이란 뜻에 따라서 붙여진 것인지 알수 없다. (이들은 예수님처럼 따라 살려고 한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노력한 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결점들은 자신들이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인데,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될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정령 탄생을 부인 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냥 인자 (단순한 한 사람0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신실한 사람이 엇다. 그는 보통인간이었지만 뛰어난 까닭에 하나님께서 메시야라고 택정하자고 생각하여 세례를 받으실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어떤이는 λογος)메시야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신성의 상태 가 계속되다가 십자가에서 죽기직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기도는 이미 하나님의 영이 떠난 상태가 생각한다.- 에 하나님의 영이 떠났다고 생각했 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은 죽을수 없고 λογος도 죽을수 없음 인간 예수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들이 주장하는 설명을 양자설, 수양론(ADOPTIONISM = 어듀션 리즘)이라 한다. 이런 양지설을 주장한 자들은 바울서신을 일부인용하며, BAUL OF SANOSOAA도 양자설 주장 이들은 바로 유대주의적 이단이었다.
B.ARIUS
1)목사 (장로라고 할수 있다)
2) ARIUS를 따르는 자들을 ARIANSM이라함
3)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헬리적 이단이었다.
4) 영원속에서 성부는 로고스를 낳으셨다.
5) 성경적 근거로서는 골 1:65 ; 행 2:36.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
그때는 아버지만 아심.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두번째 집단은 아리우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였다.
알렉산드리아의 희랍철학을 많이 받았는데, 희랍철학에 의하면 절대적 하나님은 이세상과ㅏ 직접접촉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사이에 중간 존재가 있어야 되겠다고 이들은 생각 하게 되 었다. 즉 희랍사실에 나타나는 λογος개념과 성경에서 나타나는 λογος개념을 절충시켜서 하나 님과 사람사이에 λογος를 두어서 하나님께서 영원속에서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λογος를 ’낳 으셨다‘라고 주장하게 된것이다. 여기서 ’낳으셨다‘는 표현은 우리가 - 사용하는 경우는 성부 가 성자를 낳으셨다는 뜻으로 부자의 관계성을 설명하며, 통치권의 정당성을 위해 사용하는 개념이다 - 하는 의미와는 달리 그들은 성부 창조자가 성자 에수를 피조햇다는 개념으로 (창 조개념)사용하고있다. 이들의 주장을 다르게 말한다면, 성부만 존재하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 다.
성경적 근거로서는 ’낳으셨다‘는 말을 주장하기 위해 골 1:15’...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자니”이며 만드셨다‘는 말을 주장하기 위해 행 2:36“...되게 하셨느니라”를 긎거로서 사 용한다. 즉 예전에는 아니였는데 하나님이 영원전에 되게 하신 일이 잇었다 이들이 이러한 주 장을 급하지 않는 또 하나님의 이유는 별수께서 자신을 하나님 보다 좀 열등한 표현을 쓴 성 경구절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 “그때는 아버지만 아심”등)그래서 그들이 자신들 의 해석이야말로 진정한 성경의 해석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C. 콘스탄틴의 니케야 종교회의의 결정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위의 두 견해가 콘스탙틴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보니 (325) 교회가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래서 문제를 삼아 NICEA(영, 나이시야)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여기에서의 결정은 예수는 제2의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 보다 못한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3. 예수의 인성 부인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정죄를 받자 에수의 신성을 강조하려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Docetism(도케티즘-도깨비-유령)이었다. 하나님이 인간예수로 보엿을 뿐이며 실제로 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때 마리아는 아무런 역활도 하지 않고 도관 역활만 했다는 것이다. (도관설; ‘관’ 역활만 했다는 것)이런식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았는데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A. Gnosticism주의
영지주의는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그들은 영적인 지식을 주장하는 자들인데, 에수께서 인 간에게 행하신 가장 귀중한 일은 인간 마음속에 있는 영혼의 불꽃에 스파크를 일으켜 저 위의 세계로 갈수 있는 점을 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느니라 성구 인용)그래서 이들은 2c 후반 영지주의의 영향하에서 나타난 도바복음을 애호한다. 이들에 대해서 이그나티우스가 싸웠다.
B. Marcion
마르시온은 누라복음과 바울서신 일부만 인정하는 자로서 구약 하나님(창조의 신, 못한 하 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참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누었던 자이다. 여기의 참 한나님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마르시옹에 대해서 터툴리안이 싸웠다.
C. Apollinarius(아다나 시우드의 절친한 친구)
아리우스가 예수의 신성을 반대하여 정죄받자 아폴리나리우스는 역시 아리우스가 잘못되었 음을 인정하여 예수는 참 사람이면서 참 하나님임을 말했다. 그러나 그가 이해한 예수는 요 1:14 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란 말로서 설명하는데, 곧 예수 = 말씀 + 육신 (λογος + σάρξ) 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세계의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 인식 - 사람은 σώμα(몸) + Ψυχή (혼)+πυνΰμα(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예수님을 적용시켜 예수님도 σώμα + ψυχή 로 이 루어져 있다. 다만 πυνεΰμα 자리에만 λογος 가 들어가서 몸 + 혼 + 로고스로 이루어져 있다 고 생각하게 된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해석이야말로 참으로 잘 해석했다고 보았다. (예수 양성가운데 한성=신성만 강조하고 맘)그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요1:14 때문과 당시 인간관 때문이지만, 그가 하나님으로 성육신한 이상 그의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여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πυνεΰμα 자리에 λογος 가 들어가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아타나시우스의 유명한 명인에 의해서 일축된다;“취하시지 않으신 것은 구 원되지 않는다”예수가 몸과 혼만 취하고 영을 취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몸과 혼만 구원할수 잇 고 영은 구원할수 없는 것이다.
D. 콘스탄티노를 회의의 결정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들의 주장은 381년 Constantinople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아폴리나리우스야 말로 커다란 이단이 되었다.
E. 요약
1. 예수의 인성 부인
1) 그노시스 주의
2) 마르시온
3) 아폴리 나라우스
4) 결론
(1) 이들은 예수의 양성가운데 신성만 강조하고 말았다.
4. 신성과 인성 동시주장 - Hypostatic Union
= 위격적 연합
이제 신성을 부인하던 자들도 일단 정죄되고, 인성을 부인하던 자들도 이단으로 정죄었으 므로 문제는 다 해결된 것이가? 아니다 여기에 새로운 한 견해를 가진 자들이 나왔는데 이들 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 하나만을 주장하지 않고 이둘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했는데 바 로 Nestorius와 Eutyches였다.
A. 네스토리우스
네스토리우스는 경건한 자였고 설교도 매우 잘하는 사라이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들의 황 제가 428년에 수장으로 불렀다. 부름을 받고 온 네스토리우스는 이 도시에 와서 사람들이 예 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θεοτόκος”라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다. (θεο= 테오스에서 나온말,
τοκος는 낳은자라는 말), 이것은 마리아는 하나님은 낳은자라는 말인데 그가 듣기에 좋지 않 았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말하기 보다 Χριστο ταυς(그리스도를 낳는자)라 부르는 것이 좋겠 다고 말했다. 아니면 θεο τοκος와 안드로포코스(인간을 낳는자)라고 동시에 사용하면 용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원래 이말은 그가 직접한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잇는 목사님이 “우리가 어 떻게 마리아에 대해서 θεο τοκος라고 부를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갖고 부정적인 견해를 피 력하자 네스토리우스가 자기 아내의 목사님의 편을 들어 줌으로써 초대교회의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에 대해서 Cyril of Alexandria가 말하기를 ”너희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나누려고 하는자“이다 라고 말했다. 사실 그들은 에수안에 신적인격과 인적인격이 있다고 네스트리안 (네스토리우스가 이런 생각을 가졌는지는 모른다)들은 생각했다.
이 견해는 431년 에베소 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B. 유티케스(Eutyches)- 수도원장
유티케스는 네스트리우스와는 달리 예수그리스도는 동정녀 탄생 이전에는 분면히 신과 인 간의 성질이 있었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 후에는 하나의 성질이 되어야 하지 않겎느냐라고 생각을 하여 인성이 신성에 흡수(신성이 강함으로)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예수의 몸도 자연히 신적인 몸이 되고 말았다. 결국에는 예수의 몸에는 한 성질만이 남게 되는데 이 를 Monophysitism(피지니즘)= 단성론이라고 부른다. 이 주장은 초대교회에 상당히 오래 인식 되어졌고 중국에까지 왔었다. (경교)
C. 요약 (신성과 인성의 관계 = 위격적 연합)
(1)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안에 신적인격, 인적인격이었다.
(2) 유티케스는 예수안에는 한 성질 밖에 없다(흡수)
(3) 결론 : 431년 예배는 공회의에서 이단 정죄
5. 우리의 입장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의 위격적 연합에 대한 잘못된 주장이 나오자 451년 Chalcedon공 회에서는 아래의 결론을 내렸다. (유티케스의 단성론에 반대)
(1) Without Confusion(컨퓨션) : 혼합되지 않음
(2) Without Change:변하지 않음
(3) Without devision: 나누어지지 않음
(4) Without Separation: 분열되지 않음
둘이 합쳐지나 혼합, 변질, 나눔 자지않는다 이렇게 하여 기독론은 정립 되어졌던 것이다.
제 4강 양성론 Ⅱ
예수는 양성(one person in tow nature 한인격, 두 성질)을 가지셨다. 7C에 황제 헬라크리 우스가 단성론자 (유티케스, 이디오피아 곱틱교회등)들과 교회를 합쳐 보려고 생각했다. 그러 자 다음 문제가 생겼다.
1) 예수는 의지가 하나인가 ? 둘인가 ?
2) μονος + θελειυ = μονοθήταε에서 유래하여 Mono lhelitism이 되었다.(이는 단성론의 한 형태로서 예수에게는 한가지 의지만 있을 뿐이다는 것이다. 비록 처음에는 두가지 의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에 한가지만 잇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했다) 그러나,
3) 681년 코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예수에게는 두의지가 있다고 결정되었다. 왜냐하면 “의지” 는 person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성질(nature)에 속한것이기 때문이다. nature가 신성과 인 성이 있다면 의지도 신성의 의지와 인성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4) 성경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
(1) 여기서 주체는 로고스로서(divine nature : 신성) 삼위일체중 제2위인 λογος께서 인간 성을 취하신 것이다. 이때에는 human nature(인간성=영,육을 취한 온전한 인간성)을 취하심
(2) 성육신 하기 이전의 로고스는 λογος ά σαρκος이다. 곧 싸르코스가 없는 로고스(육체가 없는 로고스)라는 것이다. 이때에는 divine nature밖에 없었다. 그러나(1)에서와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Human nature로 취하신 것이다.
(3) 그래서 예수에게는 두성질(신성과 인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지고 계신 인격-성질=nature가 아님-divine nature의 인격이다(human nature을 취하셨다는 것이
personality를 취했다는 말이 아님
인간의 어떤 사람은 예수(사람)가 human nature(인간성)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성 은 반드시 어떤 인격 가운데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personality(퍼즈낼리티=인 격)을 가졌으므로 그 personality속에 human nature도 잇으므로 결국 예수는 로고스 + 인격성을 가진 인간이신 예수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예수가 두 인격이 있다는 Nestorian이 되고 만다.
현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하려도 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성을 취하셨 으나 personality가 없는 human nature이다. 인간성 자체로서는 인격이 없다는 말이 다. (=Anhypostasia=안 히포스타시아=인격을 가지지 않음)을 가지고 계시고, 성자 예 수는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의 인간성은 (비록 그 자체로서는 가 없으나)로고스의 personality안에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인간성(human nature)은 나의 인격(personalty)안에 구현(드러나)되어 있 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인간성은 로고스의 인격안에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만약 이렇 게 생각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면 예수가 신성으로 있다가(이래 신적 인격이 있음)인간으로 태어나 한 사람(예수)의 인격을 취하셨다고 주장하게 된다. 우 리가 주일학교때부터 생각해 온 것이 이것인데 예수만 인간의 인격이 따로 있다고 보 았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면 예수는 두 인격을 가지게 되고 우리로 Nestorian이 되 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온전한 인간성을 취하셨지만 를 취하신 것이 아니엿고, 그 러나 그의 인간성은 안에서 발견되어 진다고 믿는 것이다. 성격이 또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의 인격은 하나이다. (=하나의 인격)
5) 요약: person이라하면 2가지를 가지고 dlT어야 한다.
첫째는 인간이면 인간의 nature(성질)-신이면 신의 nature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이 nature를 구현(나타냄)할 individuality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의 경 우에 있어서 보면, 예수는 분명히 human nature(인성)는 온전한 것을 가지고 잇다. 그 런데 인성자체-신성을 관계시키지 말고-를 구현할 individuality는 없다. 그렇다고 인 간이 아닌가 ?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human nature가 로고스의 individualitydptj 때문이다.(로고스안에서 발견되다). 로고스는 분명히 divine nature를 가지고 잇고 여 기에 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다가 human nature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1) 예수의 personality는 하나이다.
(2) 예수가 가진 nature는 둘이다.(divine,human)
(3) 예수의 personality의 성질은 divine nature의 personality이다.
(4) 예수계서 human nature를 취하신 것은 인간의 personality를 취하셧다는 말이 아니 다.
(5) 로고스자체는 삼위일체중 제2위로서 분명히 personality를 자기고 잇고, divine nature을 가지고 있다.
(6) 예수가 human nature를 취하고 그것을 구현할(나타냄)individuality는 로고스이다.
(7) 그러므로 성육신후 로고스의 성격은
a. 신성을 가진 하나의 인격
b. divine individuality
c. human nature
(8) 삼위일체는
a. 성격, 성자, 성령이 각각 인격이다.
b. 각각 individuality가 있다
c. 로고스만은 특별히 human nature를 더 가지고 있다.
6) 루터란에서는
(1) Communi catio idiomatum
교류 속성
(2) 신성에게 속한 모든 것은 인성에게 속하고, 인성에게 속한 모든것도 역시 신성에게 속한다.
(3) 그래서 신성이 어느곳에나 있을수 잇으므로(편재) 인성도 어디에나 있을수 잇다. 그 런 까닭에 성만찬을 공제설(성찬을 하는 떡과 포도주에 예수의 몸과 피가 실제로 그 속에 공제(함께)한다고 보는 견해로 주장하게 된것이다. 어느 교회든지 예수의 인성 이 있는것이다. 즉, 인성도 편재할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7) (4) 개혁파가 주장하는 한가지 뚜렷한 원리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이 말은 거꾸로 말하면 “신은 결코 인간이 될수 없고 인간은 결코 신이 될수 없다”는 말 이다. 신성은 영원히 신성이고 인성은 영원히 인성이다. 신성이 인성을 입는것이 아 니고 인성이 신성을 입는 것이 아니다.
(5) 우리도 속성교류란 말을 사용하지만 루터란과 같이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 는 의미는 “신성의 속성을 인성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신성과 인성이 합하여진 한인격(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그의 인격에 적용하면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그러나 인성을 바꾸어 말하면, 인성을그의 인격에 적용하면, 그분은 피곤하시고 좋으시고 주무시고 배고프셨다(그러 나 신성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르는 것이 있었다고 말할수 있다 “그날과 그 때는 ... 아들도 모르고”(마 24:36)라고 하신 것은 신성의 입장에서는 알지만 인성 (메시야)의 입장에서는 모른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거나 거짓 말이 아니다. 신은 죽지 않는것이면 인간은 죽는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엇다가 부 활하셨지만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난것은 아니다.
8) 신성규라는 학우가 교수님께 질문하기를 “이런것은 다 교리적인 체계를 세우려고 하는 것 이 아니냐?”하는 물음에 “예수님이 어떤분이신가를 알기 위해서 공부한다”고 대답하자 그 러면 “신성과 인성이 있다고만 하면 되지 안느냐?”고 말하자 학우들 웃음, 이에 대해 교수 님은 우리가 다 그렇게 믿기로 해놓고서 설교할때 다른 말 하니까 성령으로서 막는 것이라 고 했다. 잘못이 터 커지면 이단으로 빠지고 만다.
9) cf. 롬 8:3
“율법에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며 할수 없는 그것을 ”
(1) 율법에 할려고 하는 (이루려고 하는 )무엇이 있다 ?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이다. 그래서 율법이 좋은 것이다.
(2) 그런데 왜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육신 때문이다. 이 육신은 몸이 아니라 영육을 포함 한 부패성 = 부패한 인간성으로 대부분 쓰인다.
(3) 이 인간의 부패성 때문에 할수 없는, 이룰수 없는 그것을 (율법 그 자체로는 괜찮지 만 부패함 때문)“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모양으로 보 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죄 있는 육신의 모야으로 보내어”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면 “죄 있는 육 신의 모양으로”란 예수가 죄를 가지신 육신을 가지고 오셨다는 말이 아니다. 이말은,
Έν όμοιωματι σαρκός άμαρτιάς
모양으로 육체 죄
“죄 있는 육신의 비탄 아래로“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όμοιωματι이다. 이 단어가 아니였다면 예수는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셨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바율이 말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경우에는 다 죄된 몸이지만, 예수의 경우에는 죄된 몸이 아 니라 겉으로 보기에만 죄된 모습을 보이는 (그것과 비슷하게)것이다.
이것은 성육신이 어떻게 나타났는가에 대한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다른 모든 경우와는 달리 오직 그의 경우에만 죄되지 않을 상황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 다는 것이다.
(5)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예수가 인간의 부패성을 말하는 σαρκός 를 취하셨으므로 그는 바로 죄에 대한 인간성을 취하신 것이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 나 성령은 όμοιωματι로 오셨지 σαρκός άμαρτιας로 오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6) 예수는 죄성을 가지지 않으셨지만 (신성)아담 이후에 부패한 인간이 가질수 있는 ‘인 간성의 모든 연약한 상황 가운데로 오셨다는 말이다(인성). 이런 의미에서 철저히 인성과 신성이 있다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가령,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
“ 아버지와 창세전에 가졌던 영화로서 ”
이는 다 신성의 측면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목마르다”이는 인성의 측면에서 하는 말인 것이다.
10) 참고로 예수의 (“하나님의 인간성”)
(1) 신성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간다.
(2) 인성은 마리아의 자궁속에 잉태한 순간부터 시작되어 영원히 계속된다.
(3)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는 (계획) - 그가 성육신하심 계획이 영원전부터 있었 다. 이런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성을 영원전부터 자기 자신안에 품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
(4) 그러나 이런 견해가 잘못 발전된 경우가 있다. Barth Theology가 발전하면서 여러번 계기 중 - 그중 하나가 “하나님의 인간성”이란 책을 쓴 때(35년경)였다. Barth는 (3) 과 동일한 내용을 말한다. 이점에서는 우리와 같은데 Barth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서는 영원전부터 인간성을 품으셨으니까 인간을 창조하셔야 하고 창조된 인간이 잘못 되었을때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인간은 구원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5) 그렇지만 우리는 생각이 다르다. 비록 영원전부터 인간성을 품었지만 (품을수 있지만) 그말이 반드시 인간을 창조해야 한다거나 인간이 잘못되었을때 반드시 구원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주하신 분이시므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아 도 되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그의 탁상공론에서 만약 그런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될 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6) 끝으로 예수의 성육신할때 입은 인간의 연약함은 예수가 부활하실때 벗어버렸다. 그러 나 인간의 연약함을 벗어버렸다는 말이 인성을 벗어버렸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영원 토록 인간이신 것이다. 우리가 부활하때 취하는 인성이 바로 예수의 연약성을 벗어버 린후에 가지고 있는 인성이다.
제 5 강 양성근Ⅲ (예수의 명칭)
1. 예수의 명칭
1)messiah(Χριστος)
(1) 직임적인 명칭이다.
① 이 명칭(messiah)은 반드시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② 기본적인 의미는 마시야(messiah)로서 “보냄을 받은 자”이고, messiah의 수동태 분사로 서는 “기름부음을 받은자(Χριστος)”로서 임명하고 선언하는 의미가 가장 먼저 들어 있 는 것이다.(임직)
(2) 거룩성이 따른다.
구약에는 messiah가 많은데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부음을 했다.
① 이렇게 많은 기름부음을 받은자(메시야)를 많이 두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지를 우리 가 찾아야 한다.
우선 삼상 24:6,10을 보라.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여기서 사울은 메시야였다. 다 윗이 사울을 죽이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였기 때문이다. 기 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이 그에게 붙게 되고 하나님을 위해서 구별한 자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다른 의미가 전혀 없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구별한자에 게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② 신약에서는 기름부음을 받은자는 예수뿐이고, 넓은 의미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기름부음을 받았다(고후 1:21=우리=너희+바울+함께한 자)
눅 5:11을 보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왜 이런말을 하는가? 그는 죄인임을 깨달았고 동시에 자기 앞에 서 있는 예 수를 거룩한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이다.
③ 요약하면,
첫째로, 메시야는 직무에로 부름을 받은자(임직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음)이고,
둘째로, 2차적으로 그 기름부음의 받음의 의미는 거룩하게 했다는 것이고
셋째로, 거룩이라는 의미는 다른것이 아니라 ‘구별’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3) 성신을 주신다(직무를 감당케 하기 위해)
① 삼상 16:1-3,13을 보면 기름부음을 받으면 본질적으로 성령(여호와의 신)이 전달되어져 서 그 직임을 감당케 한다.
②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성신이 충만하신 분이셨다.
③ 그러면 과거(구약)에는 왜 많은 메시야(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있었는가?
이를 통해서 <시사하는 바>이런 직무를 대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자가 일 괄것이다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이를 (왕, 선지자, 제사 장)의 통치를 받으면서 이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왕이, 선지자가 제사장이 우리 가운 데 임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④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기름부음을 받은자(메시야)로 쓴 것이다(마4:18,19). 예수가 메시야로 났다는 생각에 대해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로, 창2:36을 보면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 라..........”라고 되어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겅의 문자성에 근거해서 예수가 전 에는 주와 그리스도(메시야)가 아이였는데, 행 2:21절과 부활한 후에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양자설(Adoptionism)이다.
둘째로, 우리의 견해는 예수가 이미 주와 그리스도였는데 십자가와 부활사건 이후로 확 연하게 선언하셨다는 것이다. 롬 1:3-4을 보라.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셨으니....”
셋째로, 예수는 그 이전에(십자가와 부활)도 하나님의 아들이셨는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능력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신 것이다. 그는 이미 메시야였지만(고난받은 메시야) 이때부터 보좌에 앉으신 메시야로 확연하게 선언, 드러나는 것이다.
2) Son of man ; (중간기) 메시야 사상의 발전의 중간기간동안 이스라엘은 2가지 메시야를 기 다려 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메시야가 다윗적인 메시야이다.
(1) 다윗적인 메시야(=성격은 인간적인 인물, 정치적인 메시야)
① 집회서 47:11-12. 제1 아카비서 2:57
② 솔로몬의 시편 17:21에는 “메시야는 다윗의 아들이다”라고 했으며 그래서 메시야는 인 간이며, 뛰어난 정치가라고 생각했다.
(2) 아론적인 메시야(제사장적 메시야)
① 이들의 제사장적인 메시야 사상을
② 쿰란공동체에서는 더 발전시켰다.
(3) 인자같은 메시야(단 7: )
① 큰 짐승 넷은 짐승의 나라를 말하고
② 하나님의 보좌가 보이고
③ 인자같은 이가 보인다. 여기서 ‘인자’(Son of man)은 단순히 “사람”이란 뜻으로서 마 치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인자야’-‘사람아’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또 예수님도 안 식일이 사람(인자)를 위하여 있다고 말씀하셨다.
④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거의 네 왕국이 짐승적인 성격의 나라임에 비해서 이 인자 (사람)가 세우시는 나라는 사람의 성격을 지닌 나라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인자같은 이’의 메시야를 기다려 온 것이었다.
⑤ 이 인자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였고, 이 인자가 세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였 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타나면 자신들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⑥ 이 세 메시야중 다윗적인 메시야를 제일 기대해왔고, 인자같은메시야를 가장 기대치 않 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와서 자신들의 제 문제를 해결해 줄것이라 고 믿었기 때문이다.
(4) 인자같은 메시야 그리스도
① 예수는 그들이 제일 기대를 하지 않는 인자같은 메시야로 오셨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자신을 지칭할때는 ‘인자’(=영,the Son of man, 헬)로서 반드시 관사를 사용하고 있다.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그 인자’ 또는 ‘그 사람의 아들’”이다.
② 예수가 ‘인자’로서 오신 이유는 그가 하늘 구름을 타고와서 하나님의 권세가 영광과 나 라(=하나님의 나라)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9단 7:13-14) 그의 백성에게 주기 위해서 (단 7:18) 먼저 해야될 일이 사 53: 에 나타난 주의 종의 고난받는 사역을 감당해야 하 기 때문이다.
③ 이사야서에는 주의 종의 고난받는 노래가 4편 있다.
제 1 노래;
제 2 노래;
제 3 노래;
제 4 노래; 사 52:13-53:12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여기서 고난받는 종이 자신들(백 성들)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살펴보면, ‘여호와의 성도들이 고난을 받는다’고 복수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어떤 경우에는 복수로 말하고 어떤 때는 단수로 말하는가? 그것은 한사람 안에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는 “내포적 대 신”사상을 말해주고 있다. 즉 모든 사람이 고난을 받을것을 자신안에 포함해서 자신이 혼자서 다 받아버리는 것이다.
④ 그러므로 예수는 고난받는 주의 종의 사역을 다 감당하고 난 후에 비로서 영광받는 인 자(그사람의 아들)로서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이다.
3) Son of God
(1) peter의 신앙고백
① 마 16:16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 다. 베드로는 여기서 두가지 고백을 했다.
② 하나는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야)라고 고백한 것이다.
사람들은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예수가 자기 생전에 메시야(그리스도)라는 의식을 가졌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베드로와 같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 하는 것을 받아주기는 했지만 자신은 한번도 메시야(그리스도)라고 말한적이 없기 때문 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라고 오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Son of man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자신을 메시야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로 보았다.
③ 또 다른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한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 들’이라는 고백만으로 신성을 지칭한다고 할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자체만으로 신성을 지칭한다고 할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 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이 여러 방면에 다양하게 사용 되었기 때문이다.
천사(창 6:1-4,욥 1:6,2:1), 아담(눅 3:38), 이스라엘 백성(신 14:1-2, 렘 3:19-20, 호 1:10),왕(삼하 7:14);솔로몬-그의 후계자-다윗자손 메시야)
그러나 peter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것이 아니라 정말 신성을 가 졌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참고로 사도요한이 요 1:14에서 “.... 아버지의 독생자....”라고 말한것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과 구별되어지는 의미 에서 신성을 말한 것이다. peter의 고백도 이와 같은 차원이었다.)
④ 그런데 peter가 이렇게 위대한 고백 2가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이해하지 못했 던것은 그가 예수는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는 알았지만, 인성을 가지신 고난받 는 종의 사역을 감당할 자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마 16:21의 사건이 벌어 지게 되는 것이다.(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지 않을것이 고난받는 메시야의 사역이었 다.)
⑤ 예수는 고난받는 주의 종의 사역을 감당하고 나서 그후에 인자(하나님의 아들, 그 사람 의 아들, 신성)로서 하늘 구름을 타고와서 나라와 민족과 권세(=하나님의 나라)를 주실 것이다. 그때에는 모든 백성이 지구상에 있는 단 한 사람의 인간도 예외없이 그를 섬 기게 될 것이며(단 7:14,18,22,27. 9:27) 새 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질 것이다.
(2) 결론:지금까지의 결론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서 성경적으로 증명한 것.
① 당신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에 대한 성경적인 뒷받침들이다. 예수는 메시야로서 곧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②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비록 받아 들여질수 없었지만 예수께서 그것을 증명해 주 신 것이다.
③ 구약성경에도 메시야가 하나님이라고 밝히 말해주지는 않고 잇는데 (메시야=기름부음을 받은자=왕, 제사장, 선지자), 바로 예수께서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④ 예수의 주장은 ‘고난받는 종’과 ‘메시야’와 ‘인자’에 대해서 컴바인해주고 이런 사람 (고난 받는 종, 메시야, 인자)이 곧 하나님이어야(하나님의 아들)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필요로 하고 계셨던 것이다.
제 5 강 양성근 Ⅲ(개념공부)
우리는 지금 예수가 하나님이면서 사람이라는 진리를 배우고 있다. 예수가 ‘사람이면서 하나님이다’라는 진리는 이미 결정되어 잇고 또 교회사를 통해서 그 진리가 드러낫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만약 그가 사람이라면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만들어낸 생각이 kenosis이론이다. 즉 예수님이 인간이라 면 신성의 속성을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비우시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모른다’는 말등을 할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1. The Dinosis theory(=kenotic theory케스틱이든)의 여러 형태-루터파의 이론들이다.
Kenosis theory은 17세기에 맨처음 나왔다. 어떤식으로 나왔냐 하면 Luther파의 속성교류 이론인데 예수의 3년 지상사역중에는 신성의 사용을 잠깐 미루어 두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루터파의 튀빙겐파(Tubingen Schole의 주장)
여기서 발전한 이론이 본격적인 Kenosis theory인데 로고스가 성육신 하셨을때 실제로 신 성에 속한 모든 속성들을 비우셨다(=안가지셨다)는 것이다. -denuded(누드,옷을 안입음을 생 각=내용물 없는 깡통)
1) G. Thomasius(1802-75, 토마시우스)-독일에서 나타난 학파
(1) 신성의 일부만 비웠다. 그 비운것은 상태적인 속성 전지(omniscience),전능
(ommipitence) 루터파에 따르면 신성의 모든 속성은 인성에도 있다. 그러나 구연사 역중에만은 신성의 사용을 미루어 두었다는 것이다.
19-20세기 사람들은 거의가 케노시스 이존이다. 왜냐하면 우리보수주의 자들이 너무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니까 그들은 예수의 진정한 인성을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이렇 게 잘못 된 방향으로 흐른 것이다. 편재(ommpresence)등의 속성이다라고 했다.
(2)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들인 진리, 사랑, 거룩등은 비울수 없엇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으면 하나님(신)이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3) 랑게(신학자)도 이 부류의 학자다. 랑게는 G.Tjomasius와 비슷한 형태의 kinosis theory를 주장한다. 자신의 인성에 맞추기 위해서 신성중 절대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 고, 상대적인 속성만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2) U.F.Gass(독일)
“die Lehre von der person christ"(1854년 출판).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가르 침”
이 사람의 주장은 모든 신적인 속성들을 다 비우셨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계시 는 동안에는 그의 영원한 의식들과 우주적인 기능들은 안가지셨다.(실제로 성자는 영원한 성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제한적인 인간의 영혼의 의식이엇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 영혼의 자리에 로고스가 들어온 것이란 주장이다. 이것이 그가 본래는 예수의 참된 인성을 설명하는 것이다골 보았다.(신성을 가지셨는데 신성에 관한 속성은 다 비우셨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죄를 범할수는 있지 않았겠는가까지 생각이 미 치게 된다.(아포리나리우스의 견해와 비슷)
3) Martensen(덴마크)
이 사람은 중재신학의 대표자인데, 이 사람의 주장은 예수님은 2가지 의식을 가지고 있었 다. 하나는 창세전에 가졌던 삼위일체의 제 2위로서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창조자, 섭리 자), 또 하나의 의식은 모든 신적인 능력들을 폐위해 버린 로고스로서 자신을 인간성하고 결합을 시켜버린 의식(창조자로 섭리자로도 아니고 다만 장차 언젠가는 내가 하나님으로 서 다스리라는 의식만 있었다)을 가지고 있었다. 이둘이 교차적으로 갖이 있었다고 주장 한다.
4) Charles Gore(1853-1932,영국)
이 사람은 옥스포드의 주교로서 제직을 마친자엿는데 이 사람의 주장은 성육신하신 기간에 는 신성이 자기활동을 중단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제한되고 인간적인 의식가운 데 계셨으므로 ‘모르는 일’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구약은 영감되 었다’고 본것은 자신의 위치를 제한되고 인간적인 수준에 한정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까 닭에 우리가 성서를 비판할수 있다골 보았다(예수님의 구약에 대한 영감의 태도가 성서 비 판학의 근거를 바련해준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예수는 이스라엘에 살던 유대인들이 가질 수 있었던 의식을 가질수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아무 잘못고 가질수 없는 의식을 가진 예수라면 진정한 성육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2. Kenosis theory의 성서적 근거(라고 보는 구절들
빌 2:5-8 “....오히려 자기를 비어....”
“비어”(Έκένωσεν ← κενόω)라는 단어에 근거하여 예수께서 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신성에 속한 모든 속성을 부분적으로 또는 모두 비우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3. Kenosis theory의 비판
G.Thomasius의 상대적 속성만 비웠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두 질문을 할수 있다. 하나는 빌 2:5-8의 해석이 주석적으로 옳은가 하는 것이고(신약해석학적 문제), 다른 하나는 그리 스도의 양성론에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하는 것이다.
1) 양성론의 교의학적인 문제
첫째, 만약 3년기간동안 예수가 신성의 일부(상대적 속성)을 비웠다면 그는 3년동안만은 참 하나님이 아니게 되고 그러면 결국 영원히 참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말 3:6(나 여호와는 변역치 아니하나니), 약 1:7(변함도 없으시고-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최전하는 그 림자도 없으시니라) 때문이다.(신이 불변하다는 사상은 희랍철학파 주장)
Martensen과 열심히 싸웠던 희랍적인 개념이라고 하면서 우리도 희랍철학에 영향을 받았 다골 비웃는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에 인간이 죄 지을수도 있는데 하나 님이 오히려 변화시는 분이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성서적인것 같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Thomasius의 이론은 하나님의 불변성 에 문제를 가져오고 만다.
둘째, 만약 예수의 3년 사역이 삼위일체 하나님에게서 빠져 나온 것이라면 거기에는 이것은 잘못이다. 삼위일체는 성부, 성자, 성령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가 성육신 하셨을때에도 삼위일체는 여전히 삼위로 계신다. 예수는 시간과 영원을 동시에 가 지고 계시는 분이다. 오리겐은 최초로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셧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의 영원한 출생)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표현은 영원전에 예수가 하나님. 여기서 생 물학적인 출생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자가 신성 속성을 잠시 그만 둔다면 이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하신 관계는 끊어지고 만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령은 성부에게서 나오시고 성 경에게로 나오시는데 (‘나오신다’는 표현은 성부가 또는 성자가 성령을 ‘보낸신다’는 성경 의 말을 신적작용어로 바꾼 것이다) 이 나오심은 한번만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나오 시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신성의 속성 3년동안 잠시 일부를 비우셨다면 성령의 나오심에 문제사 생기고 만다. 결국 Thomasius의 이론은 삼위일체, 성자, 성령 모두에게 문제를 가 지고 오게 한다.
2) 빌 2:5-8의 주석학적 문제
빌 2:5-8중 7절의 “비워”(Έκένωσεν)이란 말이 무엇을 비웠다는 말인가?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본체를 비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됨을비웠다는 것으로 보인다(문맥상).
칼빈은 예수가 하나님의 신성을 버릴 수 없다. 만약 버린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는 완성을 버린것이 아니라 잠시동안 감추어 두시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하나님이심 을 감춘것이 아니라 때때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셔야 했다.(예, 기적앨 행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과의 독특한 과녜를 나타내셨다.=아버지여 하고 부르는 경우=기로운 자들에게 나타내 심을 감사하나이다 등).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인성이 신성을 가지고 있으나 완전히 없애버 린 것은 아니다는 말이다. 예수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신성이 아니라 엄위와 영예같은 것이다. 가장 쉽게 말한다면 사복경찰과 같고, 신적 용어도 표현한다면(예수의 은익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으로 나타나면 사람들이 감당을 못함으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도 록 은익하고 나타난 것이다.
NIC 주석의 뮐러(빌립보서 주석)의 입장이다. 뮐러도 칼빈과 같은 입장이다. 여기서 “비웠다는 것은 은유적인 의미로서 예수가 종의 형체를 자신에게 취하심으로서 자신을 비우 신 것이다. 그가 성육신할때 하나님의 형체는(그에게) 그냥 남아 있고-그것을 비운것이 아 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주님이시요 세상의 통치자이시다. - 다만 인간성의 한 부분이 한 측면으로서 종의 형체를 받아들이신 것이다. 라이프마틴 이라는 사람도 ”카르멘 크리스 티“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서 빌 2:4-9을 주석하기를 ..........읽어보라.......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ICC주석에서조차도 이 본문을 하나님의 신성을 비우실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빌 2:5-9 본문으로 Kenosis theory를 만들어 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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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쓰여진 자유주의 주석이다(빌립보서를 빈센트)
(1) 뮐러는 남아공Stellenbosch unicersity에서 교수 한사람 화란의 자유대학에서 공부를 해서 L이었다. 화란서 공부할때 NIC주석 편집자였던 스톤하우스(지금은 F.F.Burce가 편집자)가 뮐러를 알았다. (뮐러는 빌 2: 이 본문으로 박사논문을 썼는데)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 주석을 누구에서 맡길까 하다가 뮐러가 생각이 나서 그에게 맡겼다.
(3) Extra Calministicum(개혁주의 신학의 독특한 주장)
이 말의 뜻은 “칼빈주의 신학의 밖에서”를 강조한다. 이것은 루터파신학에서 말하는 견해와 대조된다. 예수님의 몸이 위, 안에, 아래에 동시에 있을 수 없다고 개혁파에 서는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이라면 인성을 말하는 것으로 떡 바같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단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진 분이시고 또 영 원히 가지신 분이다. 그가 인간의 몸으로 있을때에도 그의 밖에서는 예수의 신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한순간도 그는 이 우주를 붙들지 않고 계신적이 없었다.)
어떤분의 문학적인 표현에 의하면 “보라, 여기 하나님이 계신다. 그는 자신의 발 걸음을 옮길때마다 사람들이 거기에 걸려 넘어질까 떨리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보이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이시다.” 누구에 대해서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이 땅에 살아계셨던 예수에 대해서 하고 있다.
루터파와 칼빈파의 차이는 이것이다. 루터파에서는 예수의 몸안에만 로고스가 있 어야 된다고 본다. 칼빈파에서는 몸 안에뿐 아니라 예수의 몸 밖에서도 로고스 ( ㉠ 루터파에서는 성찬식의 떡이 있다면 위, 안에, 아래에 예수님의 몸이 있다고 본다 ㉡ 그렇기 때문에 성찬설이 공제설이 될수밖에 없다.) 가 계시고 성자가 사역(세상을 붙 드시고 계심)하고 있다고 본다. 칼빈주의자는 예수께서 영적으로 임재하고 계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찬설로 영감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기간 중에도 그의 신성은 편재하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가 영원히 하나님이시면서 영 원히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참고로 성부, 성자,성령의 순환 관계를 살펴보라. 우리는 이 관계를 절대로 알수 없다. 그러나 이 분들이 세상에 내주셨을때부터 그것이 있는 것이다.(이것이 우리 인 식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성육신이 중요 또는 능력을 주어서 사역을 감당케 한다.
성 부
내 아버지↗↙보내신다 ↘보내신다
성 자 ⇄ 성 령
성령을 주어서
① ‘보내신다’는 말을 신학적 용어로 ‘나오신다’고 표현
②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라 부른것은 또는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으셨다‘한 것은 생물학적으로 출생했다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독특한 관계-삼위일체 안에 서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한번도 제자들을 싸잡아 ’우리 아버지‘라 부른적이 없다. 또 통치권의 정당성 때문이다.
③ 예수도 하나님이시지만 성령 없이다 모든사역을 성취하실수 없다. 그러나 성경을 한량없이 주심(요, )이나, 물붓듯이 부음(행 10:38)등을 통해서 사역케 하심은 삼위일체의 순환관계때문이다.
④ 이 모든 신학적 용어는 예수께서 성육신한신후 사용하신 용어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 관계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라 한다. 곧 역사 가운데 서 나타난 삼위일체를 말하는 것이다. (econonicul trinety)
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본래 이런 관계로 계셨음을 의미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역사 가운데서 나타나기만 하신 경륜적 삼위일체뿐이라면 ‘하나님은 발전해 나가시 는 분’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전에 이미 삼위의 관계가 서로 작문하고 계셨 다고 보는데-결론적 삼위일체를 통해서 추측-이것을 본체론적 삼위일체라 한 다.(Ontological trimilty) 본체론적 삼위일체가 없었다면 경륜적 삼위일체로 나 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경륜적 삼위일체가 본체론적이라고 본체론 적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이것은 그럴듯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경륜적 삼위일체가 없이는 본체론 삼위일체가 없다는 말이므로 옳지 못한 말이다. 역사적 과정이 없으면 본체론적 삼위일체가 없는것은 잘못이다.
참고) 예수의 구속사역은 신인의 사역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인성의 죽 음이었다. 신성은 죽임을 당하실수가 없다. ‘하나님은 불변성의 하나님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등은 몰트만의 이런 내용은 잘못이다.
참고) 인성은 영원하시게 만들었다(인성은 불멸)-하나님이 그렇게 만든것. 여육 전체의 불멸설이다. 영혼 불멸설. 자체는 희랍의 플라톤적이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냐(the Son of the eterny)
이 문제 따라서 예수 (아들, 성자)의 영원성을 신성을 더 나아가서는 삼위일체를 인정하느냐 부인하느냐가 알려있다. (세르베투스)라는 사람은 ‘아들의 영원성’에 걸려서 이단으로 정죄되어(예수의 영원한 아들되심, 영원한 신성을 부인) 처형되 었다. 그가 처형되기전 칼빈은그에게 말한다. ‘세르메투스야 너는 예수가 하나 님의 영원하신 아들입니다. 이 말한마디만 하라 그러면 화형틀에서 내려줄수 있 다’ 했으나 그는 최후까지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했다.(하나님은 영원하신데 아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성의 영원성 부인, 아들의 영원성 부인, 결국 삼위일체 부인=성립 안된다). 이 사람은 그전부터 루터와 칼빈에 걸 려 있어서 유럽 어디에든지 가면 잡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네바에 나타났던 것이다. 그전부터 칼빈과 논쟁하려다 도망가고 도망가고 했다. 그는 칼빈에 대 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이 단자는 불태워 죽이다니..... 하면서.....
제 6강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
기독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이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을 하셨는가? 이다.9워필드 기독론 참조, the pesson and work of chist)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에서는 당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양성론(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인간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두 상태론(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상태와 높아지심의 상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잉카네이션(성육신)은 그의 신적인 엄위를 제쳐놓고 자기가 종의 형태로서 인간의 형태를 취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전에도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영화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합의하고 잇다.
자유주의 학자들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예수님의 참된 인간성을 취급하지 않은 도세틱(.Docetic)한 사람들이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약성서의 기독론을 요한적인 관점에서(로고스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복음서가 공관복음서의 예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요한의 관점에서 예수를 보는 우리는 잘못된 것이고 공관복음의 괸점에서 예수는 보는 자기들은 옳다는 것이다.(모리스의 신약의 십자가와 레이몬드의 책을 참고하면 요한복음의 예수와 공관복음의 예수가 같음을 알수 있다). 참고로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있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없으며 바울로 전혀 무관심핟.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동정녀탄생을 꼭 믿을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우리에게 반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전통적으로는 마태복음이 먼저 쓰였다고 보나, 대개의 학자들은 마가복음 우선설(Markan pronity)를 주장한다. 누가복음을 보면 1,2장에 동정녀 탄생이 기록되어 잇는데 영국 신학자 빈센트 테일러는 원누가 복음을 구장부터 쓰게 되었고 1,2은 나주엥 동정녀 탄생에 관심있는 어떤 사람이 편집하여 지금의 하나의 누가복음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원래 양식사연구는 독일에서 발생한 방법인데 이 삶은 영국으로 가져와서 작업란 대표자이다.(빈센트 테일러는 독일 신학자보다는 보수적이나 우리보다는 자유주의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직접 목격한 자는 마리아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눅 1:-2:의 증거를 사도적인 중언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자체가 증거한다. 눅 1:1이하를 보라. 여기의 데오빌로가 진짜인물인자 아닌지는 잘 알수 엇다. 또 문학적인 기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한것은, 가정된 것은) 그가 예수 믿는자였고 기독교에 대해서 베스바가 있는 사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확실히 해주기 위해서 이 글을 썼다는 것이다.
누가 이전에 글을 쓸(예수에 관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누군가 그런 글들을 보았을때에 필요해서 그 모든 자료들을 자세히 미루어 살피게 하며 기록을 남기게 했을 것이며 또 성령이 누가가 마리아와 대담하며 그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많으며 그래서 우리에게 전하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눅 2:21을 보라. 8일째 이름을 예수라 했으며 4일째 결례를 했다. 히 12:2-6에 의한 것으로서 날자는 난지 40일*7-33)여자는 80일 동안 부정하다(예수양피 8일로 7일이 부정함으로 8일째 뺀것)
로빈슨은 “신에게 솔직히”란 책에서 우리는 솔직해샤 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저위에 계시지 않는다(이 말은 우리도 인정한다).
①하나님은 물리적으로 저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②하나님은 형이상학적(Metaphcreicl)으로 저위에 계신 분이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이다. 솔직히 초월적인 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우리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불트만,본훼퍼, 폴 틸리히 등)
☼마 1:18-19을 보자
(1)가만히 끊고자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요셉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은 모르고 잉태되어 있는 사실만 안다. 이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다.
①여자에세 해를 안끼치고 조속히 일을 종결시키려는 것.
②김홍전 박사는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함부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의 도구로서 동정녀인데도 아이를 낳는다. 여기엔 신적인 어떤일이 가미된 것인데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 ③로빈슨은 “하나님의 인간적인 얼굴”이란 책에서 성육신이 불법적인 관계(혼외정사)에서 이루어졌다. 근거로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실 수 있다고 한다.
☼마 1:23을 보자. “처녀가 잉태하여........”
............ 이 단어는 본문에서는 처녀라고 마태가 기록했으나, 이사야 원문에서는 젊은여자이다. 단어를 젊은 여자라고 번역한다해서 다 자유주의라고 몰아 붙여서는 안된다. 그러면 이사야 7:14로 가보자
사 7:14...........................................................
여기에서 낳은 아이는 누구인가?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지금 아하스에게 말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아이는 아하스 때에 태어날 아이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히스기야이고 그 아이의 어머니는 젊은여자인 것이다. M.T에는 꼭 동정녀가 아니다. LXX에서는 동정녀라 했다. 마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처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일부러 .......(처녀)를 썼다. 만약 마태가 이것을 인용 안했더라면 우리는 결코 사 7:14에서 ........를 처녀라고 말할 수 없을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적 문맥에서는 히스기야를 가르키나 거기에 숨겨진 뜻은 임마누엘되신 예수였던 것이다.
☼요 1:1,14을 보자
①우리가운데 거하시매 : 이 말은 우리 가운데 장막(텐트)를 치시며란 말이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성막을 중심으로 텐트를 친 것으로 연상한다.
②요 1서 2:29과 3:9을 보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낳앗다고 말하고 잇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늘로부터 낳아짐)과 우리의 낳음을 연결해5서 사용하고 있다. 예수가 낳아진 것처럼 우리도 낳아렸다. 즉 요한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암시(가정)하고 있다.
☼ 바울도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 말은 하지 않았으나 바울이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말하자면 바울의 글은 누가보다 훨씬 전에 쓰여졌는데 그때에는 그것 (동정녀 탄생)을 부인한 사람이 없었고, 논쟁거리가 되지 않았으므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또 바울이 동정녀 탄생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갈 4:4을 보면(“여자에세 나게 하시고”)말씀이 육신을 취하엿다는 기본적인 생각은 이엇다는 것이다. 즉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을 취하심.
개혁신학의 중요한 원리 하나가 있다. 그것은 Fin nitum non Capox Intiniti"유한은 무한을 받을 수 없다. 는 것이다. 예수의 인간성이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을 받을수 없다. 따라서 무한은 위한(예수) 밖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ㅐ 하늘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인간성을 취하셨다는 말이다. (성자로서 성육신 하셨다는 말이다.) 성자의 지위를 거절하시면서 성육신하신것. Cui deus name. 그렇다면 왜 성육신 하셨을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중세에 안셈은 중세의 봉건제도를 속죄와 관련하여 설명했다.
모든 존재의 제일 밑은 물질이고 맨 위에는 하나님이었다고 보았다. 당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은 해방시키려면 그사람에 해당하는 속상을 해야 하는데, 사람과 물질뿐 아니라 모든 존재 전체에 다 적용하여 ①인간이 잘못했으므로 인간이 죽야 하며 (인간이 잘못했기 때문에 양을 바치면 안되며, 또 죄있는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함으로 죄없는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②죄가 없는 인간이다 할지라도 한 사람의 죄인만 속죄해 줄수 없으므로 모든 사람을 속죄해 주려면 그가 하나님이셔야 했다. (안셂은 머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기도로 생각했다ㅒ/
김홍전 박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더 나은 상태로 가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어떤 조건(더 나은 상태로 가기 위한)을 주셨는데 그것이 선악과였다.
선악과에 독이 있는것이 아니였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이 말에는 순종하면 생명을 주리라(살리라)는 말이 함유되어 있다.(더 나은 상태). 만약 인간이 불순종하ㅡ여 죽었는데 하나님은 그 상탤고 그냥 두어도 되었다. 그러나 은혜를 베푸시어서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메이셨다(이것은 언약이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왜 인간(성육신)이 되어야 했는가? 아담이 마땅히 순종해야 되는데 못했으므로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인간으로서 마땅히 순종하여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할 순종을 예수가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인간이 되셔서 사람이 드려야 할 순종을 예수가 이루신 것이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충족하실수 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자충족하셨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 했다.
인간이 타락 안했어도 성육신 하셨을까? 없다.
그런데 과거에 신학자들은 예수가 죄오 상관 없이도 성육신하실 가능성이 잇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했다.
①Rupert of Bertz. Alexader of Hales둔수스코트
눅 19:10, 요 3:16, 요일 3:8, 갈 4:4 보라 김홍전 박사의 책
특히 요일 3:8을 보면 마귀가 이 세상안에서 무슨을 을 일크켰는데 예수가 그것을 파괴하려고 나타나셨다고 되어 있다. (참고, 영계의 창조는 언제 창조했는지 알수 없다. 1장에 보면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으므로 1장과 3장 사이에 어떤일이 벌어졌던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성육신 하셔야만 한다는 참의가 들어있기 때문에 좋지 않다. 요약하면 성육신 사건의 독특성은 무한이 유한안에 들어온 사건이다. 그러나 시간안에 갇힌 이야기가 아니며, 시간적인 존재가 되어버렷다는 것도 아니다. 영원성과 시간성이 같이 갖는 존재이다.
(아담이 순종해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불순종함으로 죽었다. 하나님은 이 죽은 상태로 놔 두어도 된다. 그런데 은혜를 베푸셔서 순종의 길을 대신 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 때문에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이다. 의는 예수 자체가 의이다. 그러나 의에 대한 보상이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것이 영생이다)
opera ad dxtra sunt non divisa(어거스틴이 쓴 용어) : 하나님이 밖으로 하는 사역을 나눌수 없다. 이 안으로 하는 사역은 나눈다. 성부께서 성자를 낳는다든지 생명을 내보낸다든지 등)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동방괴 그리이스 신의 개념을 보면 신들이 여자와 관계해서 아이를 낳는다. 이것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성육신을 잘 받아들였다. 그러나 현대에 사는 우리가 누가 이런 탁설을 받아들일까? 라고 자유주의자 학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배제한다.
엡 1:4, 창세전 하나님은 모든계획을 이 세상이 있기전에 하신것이지 어떤 사건이 일어난 후에 수유하는것이 아니다.
(어, 이 친구를 보라. 나는 그렇게 생각안했는데.........)
가지가 나와 있다. (사단잠는일, 속상설)
하나님에 대해 마귀가 이 세상에서 어떤일을 했는데 이에 대해서 예수가 승리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은헤언약이 예수에게는 행위의 언약이다. 예수는 성육신으로 값비싼 댓가를 치루셨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히브리서 9:11-15부터 시작해 봅시다(한번 읽어 봅시다.)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을 묘사하는데 그 표현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신것에 대해서 “큰대제사장”이란 말을 사용한다. 여기에 쓰고 있는 표현을 보자.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 창조에 속하지 않은” 이 말은 하나님의 장막-성막-을 생각하며 하는 말이다. 성막에서 대제사장(제사장)이 사역을 하는것과 비슷한 사역을 예수깨서 하셨는데 그것을 어디에서 이루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사람이 만든 성막에서 했는데 예수께서는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 성막에서 사역을 하셨다.
그러면 그곳에서 무엇을 하셨는가? 12절을 보자 “염소나 황소의 피로 아니하고(이 말은 옛날 장막에서는 염소와 황소의 피로 했다는 말)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의 ‘영원한 속죄’란 그리스도의 속죄의 성격의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 한번 이루신 것의 효과가 영원한 것을 말한다. (다시 속죄제사는 할 필요없음을 말함)-영 단번에 이루신 속죄이다.
예수의 죽음의 본래적인 의미는 죄를 씻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3-14을 보라. “염소와...영원한 성령으로...그리스도의 피가.....깨끗케 하고......” 여기에 보면 피를 흘려 그리스도의 속죄를 이루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는 피흘림 가운데 이루심. 또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하나님에게 자신을 드리신 그 일이 자신의 능력으로 들려진 거이라기 보다 영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드려졌다는 것이다. 성령안에서 이루어진 사건, 영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사람들은 영적인 사건이라 하면 현실적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영적이란 말을 현실적이란 말과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사상).
이 사건이 영적인 사건이라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때에 “아, 이 사건이 우리를 위한 속죄의 사건이다”라고 생각한 사람은 당시에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성경을 안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상한 생각을 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그것이 우리의 죄를 싯기 위한 사건이다’라는 말이 나중에 나오고, 또 히브리에서는 ‘우리죄를 위한 희생적 사건이다’라는 말이 나온다(자유주의 사람들은 예수가 맨처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앗는데 구약이라고 하는 배경-이스라엘의 제사라고 하는 배경-속에서 이해하여 아 우리가 매번 양들을 죽였는데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로서 그(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그렇게 안했는데 우리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비록 그런 표현이 후대에 일어났다 할지라도 그 사건이 일어났을때 이미 그 쇼ㅏ고에 대한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셨을때 제자들이나 사람들이 그 의미를 못 깨달았어도 하나님이 보실때는 의미가 있는 것이엇다. 우리의 육체를 따라 판단했을때에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것임을 깨달을 수 없었으나 성령을 따라 판단했을때에는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레서 그것이 영적인 사건인 것이다.
이 사건은 분명히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고 그 사건안에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사건도 믿어야 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사건이 들어잇는 의미로 믿어야 한다. 이 의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도들로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진(계시)다. 즉 사건 그 자체도 계시이고 그 사건에 대한 해석도 우리에게 계시로 나타난 것이다(이 둘이 다 중요하다). 이 두가지가 같이 일어난 사건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첫째로 예수께서는 죽어야 하셨다. 히브리서에서는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라고 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구약배경을 잘 알고 있듯이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구약에서 왜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 동물의 피를 들여야 했는가? 이것을 이해할 때 만이 예수께서 왜 죽으셔야했는가를 알수 있다.
구약의 입장에서 구약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잘 모른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도 잘 모른다. 단지 하나 아는 것은 자신들이 매번 와서 양과 염고, 송아지로 제사지내는데 그때 그 동물에게 안수하여 죄를 전가하여 그 동물을 죽이는데, 이러한 사건에 통찰하면서 ‘내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할 죄다’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처럼 ‘장차 누군가 나를 위해 죽어주실분이 올 것이다’라는 것을 믿어야 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양, 염소, 송아지의 피를 사람들의 죄를 씻는 효과가 전혀없다. 그 피안에 죄를 씻는 효과가 없기 때문에 매년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말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장차 올 원형에 대한 모형이다(원형==장차 앞으로 나타날 실제사건). 그래서 당시의 구약 백성들의 죄를 속할 수 있었다면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속한것이 아니라 이 자아차 일어날 사건이 영향력을 주어서 속죄를 한 것이다. 장차 일어날 사건은 당시 사람들은 몰랐지만 신약의 밖은및 아래서 보면-히브리서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십자가 사건인 것이다. 이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면서 매년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이 구약의 백성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건을 이해하도록 준비하는 독특한 사건이었다. 이 희생제사를 가졌던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4가 사건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 그가 피를 흘려야 했는가? 이것이 에수가 죽으셔야 햇던 한가지 이유였다.
둘째로, 예수께서 죽으셔야 했던 또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 (디아데케))라는 말은 ‘언약’과 ‘유언’이란 2가지 뜻이 있다. ‘유언’은 살아서 하나 죽어야 그 효과가 있다. 15-16을 보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은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자신이 죽음으로서 분명히 하셨다.
셋째로, 창세기의 가르침인데,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계약을 맺을때 동물을 쪼개어 놓고 그 사이로 당사자가 지나가면 된다. 창 15:9이하를 보자(새는 원래 쪼개재 않는 것이다. 만약 모세의 율법에 새를 쪼갠다 할지라도-쪼개지 않는다. 레위기 1-5장을 보라. 여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나는 풀무 ‘타는 횃불’..‘지나갔다’ 이런 표현은 언약체결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만약 언약을 어기면 이와같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약이 맺어졌는데 하나님은 언약을 어길리가 없고 인간이 어겼는데, 이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3가지 의미때문에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죽으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풍성한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면 at-one-ment.‘하나되기 위해서 이다’.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3가지 의미의 죽으심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신 것이다.(이것은 어/던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나주에 붙여진 이야기가 아니다. 그 십자가 사건이 일어낫을때 그 의미가 덧붙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못 깨달은 것은 육체대로 판단했기 때문이여고 나중에 성령께서 깨닫게 하셨을때에는 알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왜? 이런 구속이 일어나야 했는가? 왜? 우리를 하나되게 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다을 기본적으로 크고 넓은 곳에서 찾아야 한다. ‘죄인들에 대한 성자의 불쌍히 여기심 때문이다’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이 보다 더 기본적인 대답은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에 의해서 이 일을 이루신 것’ 이라고 해야 한다. 사 53:10을 보자.
이 사건을 정말 메시야 사건에 대한 예언이라고 생각한다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으시기를 원하사.....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원하셨고 성취하시기를 원하셨다(이런 뜻은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 있다). 골 1:19-20보자. 온 세상이 ‘하나되게 하는 일’(통일의 신학)은 기뻐하셨는데 그 주체가 하나님이시다.
이때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그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자의적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때는 이렇게 하시고, 또 다른때에는 저렇게 하시는- 변덕이 많으신 것처럼-일로서 구속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어ㅢ 구속사건(십자가) 이 정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도 인간의 죄를 속할 수 있었는데(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말) 그의 자의적인 뜻으로 십자가 통해 구원하시고 하셨다고 생각하는 자(Noninalism;명복론=이름뿐)들이 있다.(대표자 Dius Scotus)
또 한사람 소시누스는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형태의 피흘림이 꼭 필요햇겠는가를 부인한다(하나님의 의가 이런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본다.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도덕적 정당성)이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슈거그로티우스이다.(알미니안의 대표자). 이 사람은 하나님의 법이란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는 것인데 그것은 어떤때는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기도 하지만 어떤때는 ‘그래 그런 내가 용서해 주지’라고 하실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바꾸어 표현하면 어떤 사람의 죄를 갚지 아니하고도
1)사탄에게 지불했다.;사람이 범죄함으로 사탄에게 속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대속물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오리겐의 이야기에는 ‘내가 많은 사람의 영혼으 ㄹ네게 주라. 그러면 성자를 너에게 주겠다’고 하여 바꾸었는데 사탄이 생각지 못한 사실 하나가 거룩한 성자를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이엇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영혼도 놓치고 성자도 ‘부활하심으로서’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하나님과 사탄사이의 협상-바겐세일-).
그레고리 닛사도 이런 이야기를 했으며 Rufinu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Rufinu는 낚시 이론를 펴내는데 하나님이 마귀를 잡기 위해서 미끼(예수)를 놓았는데 마귀는 이것을 먹어야 되겟다 싶어 먹었다. 먹고나서 목에 걸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성경 구절로는 욥 41:1을 근거로 든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이 낚시 하셨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의 오래 지지되었던 이론이엇고 안셈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이론이었다(사탄에게 주었다는 것).
2)리카피츠레이션(총괄갱신)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역사적으로 파괴시켜 놓은 과정을 예수께서 거꾸로 회복시킨 것으로 이야기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사탄과 투징하며 승리하신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크리스투스 빅토리 이시고 그의 십자가 사건은 총괄갱신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해가 섞여질 가능성이 있다. 첫째로, 예수께서 죽으셔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 총괄갱신에 의하면 신앙으로 그와 연합하는 사람에게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들은 (공통적으로0십자가 사건의 절대적 필요성을 부인하는 공통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입장은 어떠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필연적인데 그러나 Dius Scotus가 말하는 자의적인 결정때문에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칼빈의 말대로 죄를 다른 수단으,로 용서하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죄에 대하여서는 벌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그것은 요구함으로 하나님은 이 사건을 일으키셔야만 하셨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에게 꼭 부과되어진 것은 아니다(기독교강요 12:1, 제 2권). 그래서 ‘가정적인 필연성’이란 말을 쓰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결정하셨으면 그것은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결구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이 죄에 대한 처절한 형벌을 요구한다’고 보는 것이다.(전통적인 견해)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으로 인한 속죄는 처음부터 철저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여러가지 이해-십자가의 핵심
1. 교회안에 맨 처음 있었던 이론으로서 ran son to satan the '이다. 'ran son‘이란 말은 “대속물”(막 10:45)로서 다른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지불하는 물건이다. 문제는 “대속물”을 누구에게 지불했는가에 있다. 불멸성을 주어서 그들의 윤리적인 변혁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가 하신일은 아담의 불순종에 반대해서 자신이 순종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고 모든것을 새롭게 하신 역할을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꼭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십자가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이아니고-승리자에게서 볼수 있듯이 사단과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신 사건이 십자가의 부활사건이다.-다만 강조점이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부활에 있다(부활의 강조는 동방교회 전통). 근본적인 승리는 십자가 보다도 부활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오해의 여지는 모든것을 총괄갱신 한다면 보편적 구원이 여기에 시사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서 말하기를 슐라이어마허는 이레니우사,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했으나 사실은 이레니우스의 글은 모든 사람은 다 구원얻는다라는 말은 없다. 다만 총괄갱신이란 말속에 보편구원이 함의되어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전통적인 견해인데 ‘대속물’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침범힜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당연히 돌려드려야 영예를 안드렸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자로는 아셈이다. 그런데 안셂은 하나니에 대해서도-사단과 같이- 만족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나쁜것은 아니지만 몇가지 교정을 해야할 필요가 있는것 같다. 즉 리카피츠레이션 Theory -sat-isfaction theoy를 합친것이 우리의 입장인 것이다. (총괄갱신+하나님에 대한 만족)
3. 이제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죽으신 것이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즉 도덕적인 영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대표자로서 피터 아브레드이다.(이 사람은 안셈과 대접되는 사람으로서 12세기 사람인데 당시엔 신학자들은 혼자살았다. 그런데 가가 가정교사로 잇던 집의 여인과 사랑에 빠져서 아이를 낳는다. 그래서 할수 없이 아이는 고아원으로 헬레스아드(여인)은 수녀원으로, 자기는 수도원으로 간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강조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랑이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성경과는 멀다. 구사사의 객관적인 의미를 다 앗아 버린다(사람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이것과 비슷한 견해가 모범설 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신앙과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응분의 벌을 내려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성경 근거로는 벧전 2:21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그렇게 말하라. 과연 베드로서 전체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 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 1서 2:6을 근거로 든다.
4. 또하나 이와 비슷한 견해는 통치이론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세상의 도덕적인 통치자로서 그의 도덕적인 통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요구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세상의 도덕적 통치자로서 의로운자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목적인데 여기에 귀착시킨 오류가 잇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도덕적 통치자로서 일하셨다면 구약의 백성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잇겠는가 라는 것이다.(과거에 적용되어질 수 없는 난점을 가지고 있다. 즉 일관적-신구약-인 구원사역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5. 우리의 입장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과 이세상으 도덕적인 통치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세상에서 돌아가신것은 대리형벌을 받으신 것이다(히브리서의 희생제물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죽어야 할 대신에 그가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3:25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사건에는 2가지가 들어있다.
롬 3:25을 보자
①피로 구속을 이룬다는 것
②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그러므로 그 사건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믿음과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 믿음이 없으면 객관적으로 나와 관계가 없다.
③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야기는 하나님이 눈감아 주셨다고 오해하면 안된다. 그전-구약-에는 하나님이 벌하지 않는것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자기-하나님-의로움을 나타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서 감히 참아보실 수 없는 아주 의로운 분이구나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이다.
④또 하나는 자기를 믿는 자들로 의롭다 하려는 것, 즉 우리의 칭의의 사건의 결과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2가지 의미가 있는데 과거의 하나님도 참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신 것이고, 또 이 사건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의로와지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죽으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셨다. 이 화목제물을 전통적으로 Propitiatin(하나님을 유화히키는 것)으로 번역한다. 즉 사람이 잘못했으니가 그 잘못에 대해서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림으로서 하나님 마음을 무마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반대 의견들이 있다. ‘하나님이 뇌물을 잡수시고 봐주는 분이신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propitiation으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으로 번역하여 죄를 덮고 부패한 것을 깨끗케 하는 (씻음,깨끗게 함, 보상함의 의미가 있다). 분으로 보면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에 대한 화내심을 무마시키기 위해 화목제물을 드림에 대해서 이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화내는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오류는 정말로 죄에 대해서는 화를 내시는 하나님이심을 모른 ㄴ것이다.(희생제물을 필요로 할 정도로 화를 내시는 하나님이시다). .....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죽어야 할 대신에 그분이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화내심을 진정시키는 것, 바꾸어 표현하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구속의 범위=속죄의 범위
그리스도의 구속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전통적으로는 3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이것은 만인 구원론은 아니로 만인 구속론-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이다. 이들은 알미니안들의 주장인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믿으면 구원).
이와 비슷한 견해가 가정적 만인 구원론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피는 만인을 위해서 흘린 것이다. 그것이 실제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 학파의 아미로. ).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려 주셨다. 그러나 실제로 구원얻는 사람들은 그 피를 적용시켜 주는 자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피가 효과없이 흘려진 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점이 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일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일 사이에 과연 일치가 있겠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보면 제한된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다(알미니안이나 아미로나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 따라서 결과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흘리신 피도 결국 이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사실은 알미나안과 아미로는 인정하지 않고 우리만 인정하는 사실이다.‘Cimted atonement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궁극적으로 구원얻는자들을 위한 사건,피흘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만약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위해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려
주셨는데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헛된 피가 아니겠는가?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피가 능력이 없겟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는 구원얻을 사람들을 위해서 흘려준것이가 보는 것이다.
여기서 좀더 발전해서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대상자가 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전에 계획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한사람 더하거나 빼지 않고 구원을 받음-예정론이 여기서 나옴).
알미니안 주의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바르트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이런말을 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려주시지 않앗느냐?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자기 자신을 차단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구원을 못얻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교리- 이것이 성경적이라면-에 문제가 생긴다.
R.T.Kendall(복음주의자, Wm ch에서 로이드존스주입자로서 설교한 사람. 미국인 ,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 논문 1949년까지의 영국의 칼빈주의란 제목으로 에서 1981년 출판)
내용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칼빈을 모해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제한 속죄를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그렇게 생각지 안항ㅆ다는 것이다. 이분은 칼빈이 성경을 보기를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려 주셨는데, 예수그리스도가 승천하셔서 중보기도를 하실때에는 오직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해서 하신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요즘 이렇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제임스 토렌스(아버딘 대학 조직신학교수)는 개혁주의 전통적인 견해는 보편 속죄론이다.라고 썼다. 칼빈도 그렇게 이야기 했다.
(자유토론)
(1)에수의 십자가의 피-성령-작정된 사람에게 적용시킴.
믿음으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성령)에게서 남.
(2)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타락
위의 두가지 견해는 종국적으로 모든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잘못이다).
그러나 우리는 문맥속에서 “모든”“세상”이런 낱말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예를 들면 ‘모든’이란 말은 이세상의 모든- 전 인류 50억-을 뜻하는 것인지 모든 계급, 유태인과 이방인은 구별하지 않은모든이란 뜻인지 분별해야 한다.
(3)하나님의 뜻에는 교훈적인 뜻이 있다. 가령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 그러나 또 한가지는 아담에게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했는데 아담이 먹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깜짝 놀라겠는가? ‘어? 너 왜 그것 따먹었니?’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선약과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가지가 조화되어야 한다.
제 8 강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의 성질
그리스도의 전체의 삶은 고난이었다. 수난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럴때에는 ‘마지막 일주일’을 염두해 둔 것같은 인상을 주나 사실은 수난이라 표현해도 그 삶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시험. 믿지 않음. 핍박함. 외롭게 사셨다는 것. 그의 영혼의 고통) 전승하신 분께서 우리가운데 종의 모습을 가지고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것이 수난이요, 고난이다. 마 4; 의 사탄의 유혹이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졈 고난받지 않고 메시야가 되라는 것이다. 메시야가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고난은 *표에서 나타나 있다. 이것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죄를 담당하려 오셨다는 것이다. 그가 결국 어떤 죽음을 죽어야 할 것을 알고 살으셨다. 그레서 예수는 ‘중보자적 죄의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가장 그의 영혼의 고통이엇다. 이것이 그가 거룩한 분으로서 거룩치 않은 이 세상에서 사는 것 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런 예수의 수난의 삶을 살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성경에는 두가지로 말하고 있다..첫째는 하나님께서 메시야의 예언의 대표구절인 사 53:6과 10을 보라. 이런 의미에서 수동적으로 수난받으셨다. 그러나 이것만 잇는것이 아니라 예수는 고난받을때 있어서 저극적인 순종이 있으셨다. 수난이란 받는 것을 말하는데 적극적으로 수난의 삶을 사셧다는 것이다. 예수의 삶은 적극적인 것이고 죽음은 소극적-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삶과 죽음 모두다 수동적이며, 동시에 적극적으로 받으신 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받으신 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 십자가에서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응 ㄹ이루시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것이다.(그분 자신이 의이지만)
하나님이 아담에게-행위언약- 요구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어 의를 이루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지만 스스로는 인간에게 매잉게 하셨다. 그래서 그의 대한 보상으로서 생명을 주시겟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바로 이루신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심으로서 그 자신이 생명을 얻으신 것이다(그는 생명의 근원. 그러므로 생명을 얻으실 필요가 없지만). 살려 주는 영이 되기 위해서였다. (고전 15;46절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가 이 과정을 통해서 살려주는 영의 근거가 되신 것) 이 원리는 벌써 하나님에게 잇었던 것이다.
예수는 수동적 수난과 능동적 순종을 다 받으셨다. 우리의 죄책에 대한 형벌을 다 받으셨다. 이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갈 4:4을 읽어보아야 한다.
“때가차매.........여자에게 나게 하시고(동정녀 탄생)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입법자가 율법아래 날 수 없는 일. 이것도 수난의 한 형태. 그더 율법아래 나야 할 필요가 있으셨는데 그 이유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은 속량(예수가 율법아래 나서 하나님의 율법을 다 이루심으로서 속량하심)하시고....:”그래서 우리위해 의 이루심. 그가 우리를 의를 이루신 것이다(그리스됴ㅗ 안이 우리의 의)
루터:‘우리는 빈손을 가지고 잇는 거지들이다“ 이제까지는 그의 삶의 중요성을 살펴 보앗다. 이제 파시마그나 (수난의 극치=십자가)에 대해서 살펴 보자.
예수의 죽음은 어떤 죽음이었나? 예수의 삶 전체는 ..............이다. 하나님이 의도하는 마땅히 이루어져야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예수는 가지고 있었다. ( 에 대한 인식, 이것은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 있다. ‘때’의 신학)
요 10:11 선한 목자는 목숨을 버린다. 사람들은 이말이 무슨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선한 내가 선한 목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라고 ㅡ이식하면서 말하고 있다. 또 15절을 따라 17,18도 마찬가지.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요 17:19에서는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란 표현은 쓴다. 성화가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 드럴려고 구별(거룩의 의미)하셨나이다. 라는 것이다. 대제사장적 기도이다. 우리 주님의 죽음은 이렇게 준비되어진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예수의 죽음어ㅢ 성격을 살펴보자.
1. 저주받은 죽음이다. 바울이 잘 인식하고 있다(갈 3:13)에서 신 21:23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또는 저주가 되셨다(소크라테스는 죽을때 의연하게 독배를 마셨다. 그런데 주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하는데, 이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놓친 것은 우리 주님의 죽음이 한사람 예수의 죽음이 아니다는 것이다. 온 세상의 죄가-저주-그위에 얹혀진 죽음이엇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문학적으로 표현하기를 그 저주가 얼마나 심각한지 하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얼굴을 돌리셨다고 했다;온 세서이 어두워짐으로 암시적으로 생각했다.)
이온 모리스는 신약성서를 유심히 보념 예수의 십자가 질때 육체의 고통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했다. 후대의 순교자들과 비교해 보면.......오히려 예수는 육체적 고통보다 영혼의 고통 곧 영혼의 절규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에서 볼수 있다 어떤 이는 이것을 시 22:1을 암송하신것이다라고 하고....맨 뒷줄에 가면 하나님이 나를 분명히 구원할 것이니까 내가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나이다 라고까지 할려고 햇는데 기운이 없어서 1절만 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좀더 좋은 해석은 예수의 저주받은 죽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가 중보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는 의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삼위일체의 한분이시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얀관되면 삼위일체의 한분이시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연관되어있다는 의식을 못가진 상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갖지 못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절망이 있지 아니하다. 절망이 있다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알베르토슈바이저는 예수가 두번 절망했다고 보았다. 한번은 하나님 나라가 곧 올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까 ‘내가 천상으로 올라가서 죽으면 오리라’고 생각하여 굳게 결심(눅 )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셧다는 것이다.(예수 사역의 전환점이라고 본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렷는데도 하나님의 나라가 오지 않으므로 절망했다고 한다.
예수의 죽음은 첫째, 죽음(육신과 영혼의 분리)와 둘째, 영원한 죽음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사도신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지옥에 내려가시고” 이 말이 우리 사도신경에는 삭제했다. 그래서 문제가 안되는데 아칠레이안 폼의 사도신조에 (390년경나옴)사도신경은 여러번 변천이 있엇다. 어떤 사람들은 12사도가 한마디씩 해서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했으며-이렇게 주장하면 사람들이 따를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로렌스 박사’가 밝혀내엇다. 이 사람은 또 교황과 관련된 그 근처의 땅을 콘스탄틴 대제가 교황에게 중ㅅ다고 하는 문서가 옛날에는 잇엇는데 15세기에 연구해 보니가 위조문서라고 밝혀진 것이다. 즉 사람들이 경건한 허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오히려 교회를 해치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Agreileian fornon에 보면 ‘지옥에 내려가다’(descendid in inferne)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하데스(음부로 내려가셨다.)란 뜻이 있고, 또 lower part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셨다란 뜻이 있다. 음부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죽는 사람이 있는 상태, 있는 곳, 무덤을 가르쳐서 사용된다. 그래서 Rufinus는 장사지낸바 되사 와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낮은 부분으로 내려가심.
그러면 성경 벧 3:18이하를 한번 보자.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천주교에서는 ‘옥’을 .inferne(연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Limbus patrum(조상들의 연옥)이라 한다. 예수께서 죽으셔서 조상들(연옥에 있는)을 다 풀어 주셨다고 한다.
또 루터파에서는 옥에 가셔서 승리를 선포하셨다고 본다.( 약오르자롱) 동시에 그 사람들에게 정죄를 선언하셨다고 본다. 이것에 대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상태라고 보는데 있다. 또 케주도라는 말은 대개 복음을 선포하는데 사용하는 말이다.
영국교회에서는 예수의 영혼이 낙원에 가서는 (구약 성도들은 낙원에 있으리라)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알선 하셨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해석은 좋으나 문맥상 적합치 않다는 단점이 잏ㅆ다. (20을 보라. 낙원에 갔다는 말이 없다.)
객혁파에서는 이 지옥 강하의 교리를 은유적(metaphor)으로 본다.(칼빈) 예수가 진짜 지옥에 내려가신 것이 아니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이 지옥의 고통을 당한 것이엇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고(칼빈의 개혁파 사람들이 본다. 예수의 죽음은-신체적 죽음과 동시에-영원한 죽음을 당하셨다. 이 영원한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지옥의 고통을 받아야 하는 고통인 것이다. 이에서 벧전 3:19절을 해석하기를 ‘영으로’하셨으므로 노아의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노아를 통해서 선포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앗기 때문에 지금 그들이 옥 (지옥)에 있다는 것이다(선포는 그에 했고 그렇다 지금은 옥에 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그리스도의 영의 선포를 들었으므로 제 2의 기회는 없는 것이다.
벧전 3:18의 “..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시고(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심.....”이란 말은 육체는 죽었고 영은 살았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의 살아나심은 영과 육이 다 살아나셨다. 성경에서 육체;와 영의 대조를 하는 것을 롬 1:3 보자. “육신-육체적으로는 다윗....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이것은 영으로 부활했다는 말이 아니고(영적인 측면에서 말하면 )이란 뜻이다. 그는 영적인 측면에서 부활했다는 말이다.
다시 고후 5:16을 보자. ‘우리가 이제부터 아무도 육체로 알지 아니하는도다“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 사람은 판단하는 길은 육체로 판단하는 일,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영으로 판단하는 길이 있다.
그러므로 벧전 3:18은 육체적인 판단으로는 그가 죽었지만 영적인 판단으로는 그가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4:6과 관련해서 보면 육체로 죽은 자들로 보는자가 있고 다른 하나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라는 뜻으로보는 자들이 있다. 위의 벧전 3:18-19과 관련해서 설명하려는 자들은 전자-육체;로는 죽음을 당하시고-를 취하고 따로 해석하는 자들은 후자-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취한다. 모든 학자들은 다 여기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장사지내심의 의미
예수의 장사되심은 일반 사람들과 같이 장사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수 없을까 해서 ‘그가 우리를 무덤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죽음의 쏘는 것을 다 극복하시고 무덤에 들어가심으로서 우리가 두려움없이 무덤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다. 또 하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는 점점 성화하나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없다. 그렇지만 ‘하늘에 있는 영’을 가르켜서 ‘온전케 된 영’이라는 표현을 한다(히). 이는 죽음이 ‘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추론은 자명한 추론이다.
믿는자들의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가? (칼빈 기독교 강요와 N. Harper ‘현대 기독교 교육’을 참고하라). 로마 카톨릭에서는 안믿는 사람의 자녀들은 다 지옥감으로 빨리 영세;를 주어야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유아람보를 만들엇다. 루터파에서는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per verbum’이란 용어를 쓴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 속에 갇혀 있는듯한 인상을 준다. 한편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개혁파에서는 말씀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언제나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구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Cum Ver bo'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특이한 사람들-어린아이. 정신이상자 등-은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고난과 죽음의 의미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는데 오늘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뭏슨 의미가 잇는가를 살펴보자.
1.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가 받아야 할 과거, 현재, 미래의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으셨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옥 형벌까지도 받으셧다. (살아가다가 잘 안되면 무슨 죄 때문인가?라는 생각을 하지 마라) 징계와 형벌은 다르다.
징계:잘못한 양에 비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형벌:잘못된 죄악의 상당한 벌을 내리시는 것.
비롯 불신자들에게까지 그 당대 그 시간에 형벌을 다 내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계는 끝나고 마는 것.
2.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셧다. 그 의가 우리의 의가 된 것이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원죄를 씻어준 사건이고 예수 믿은 다음 부터는 내가 뭘 향해서 얻어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고 못 내면 못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의를 ‘더러는 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도 이와 비슷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공적에 하나님이 보상하신다고 하는 생각이다. 우리의 종교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에게 뭘해드릴 수 있다는 사상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를 이루셨으므로 감사해서 살아가려는 사상과는 차이가 있다. 상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 잘못이다(공리주의). 상을 준다는 성경의 표현을 애서 부인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의 삶이 감사해서 사는 삶이고 무엇을 바라기 위해서 사는 삶은 아니다. 상을 주면 더 감사하는 것이고 안 주어도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상이 무엇인가?(권성수, 상, 박사논문)
3. 예수가 고난의 삶을 사셨다. 이는 우리도 고난의 삶을 살게 하는 실천적인 의미를 준다. 우리는 예수 믿어서 그를 따라가야 하는데 잘된다는데 목표를 두고잇다. 물론 잘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잘된다는 기준을 세속적 가치에 두고 있다는데 있다.(적용:신학생때부터 규모를 줄이고........)
10. The State of Exaltation)(승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높아지심이란 말은 사용치 않는다. 신성은 그런일이 잇을수 없다. 이와관련해서 마 28:19을 기억해야 한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예수는 그 전에는”를 가지지 않는가 아니다. 성자로서 그 권세를 가지고 계셨다. 성자는 하늘을떠나지 아니하시고 성육신하셨고 고난사역 하셨고, 이루셨다. 그것은 Extra calvin sticum(칼빈주의 신학의 “밖에서”
그러면 마 28:14의 권세는 인성도 그와같은 권세가 주어졋다는 것이다(성자는 원래 가지고 계셨다). 메시아로서 사역을 이루셨으므로 메시아로서 사역을 이루신 분한테 그런 권세를 주셨다는 말.
God the Son(성자-christ-messiah). 신성으로 새로운 것을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다. 그분이 결국 따져 보니가 성자이셨던 것이었다.
부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 부활이전 : 율법아래 있는 상태(갈 4:4)-율법과 형벌적인 관계아래 있었던 상태=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상태이다. 적극적 순종(positive obedience)와 소극적 순종(passive obedicince) 통해서. 즉 소극적 순종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 할 형벌을 다 받으셨다. 심지어 지옥의 고통을 다 받으셨다. 그리고 적극적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셨다. 이는 그가 율법아래 있는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 의로운 관계 가운데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이다ㅖ 그래서 예수는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고 우리위해(죄인) 생명을 얻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굉장한 영예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분은 인간의 모든죄를 다 짊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공적인 선언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죄인이라 해서 죽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인이라 살리셨다.
또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모범적 합의를 주고있다. 예수가 부활했으므로 우리로 장차 부활(영화롭게 될것)할 것이라고 보증해 주고 적중해 준다. 그러므로 부활의 첫 열매(이는 그런일이 많이 있는것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럴뿐만 아니라 보증물이라고 말한다. (보증, 확신)
또 장차 그럴것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영적인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다는 의미가 덧붙여 지는 것이다.(롬 6:4)
우리도 죽어야지 살아난다-이것이 나중에 죽은자 가운에서 살아난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죽고 부활하여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것위해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살린 세 사람 ;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나사로도 살렸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죽었다. 예수의 삶은 한 번 살아서 영원히 사는 것이었다.
2. 삶의 특성 :고전 15;42-44
①썩을 것으로 심고-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지(죽지 아니한 몸)
②욕된것으로 심고-영광드러운 것으로 살고(욕된몸이 아님)
③약한것으로 심고-강한것으로 살고(약한몸이 아님)
④육의 몸-신령한 몸으로 살고(Spiritural bady)
예수의 몸은 못박힌 몸으로 다시 사신 것이다. 여기에는 Identity, Continuity가 있다. 그러나 Discontinuity(불연속성=다른점)이 있다. 그렇지만 다른점이 있다해도 예수를 우리가 예수를 우리가 알아볼수 없을 정도의 사람은 아니다. 예를 들면,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처음에는 예수를 몰랐으나 나중엔 예수를 알아 보았다.
예수는 타락한 인간이 아니지만 타락한 인간들이 처한 모든 연약함을 다 가지시는 인간성과 가지는 묘약성을 다 가지셨다. 그런데 이제 부활한 강한몸은 이 연약성이 제거전 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부활후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활한 영적인 몸이란 ‘영에서 완전히 적응되어진 몸이다(adapted to the spirit). 이것은 우리의 몸이 아주 종요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부활은 누가 일으키셨는가?
성경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일으키셨다고 한다.
①출 6:4;갈 1:1-하나님 성부가 하심.
②요 11:25;요 10:18-예수 스스로사 살아나심(나는 부활이요, 생명)
③롬 8:11-성령이 예수님을 살림.
그러므로 삼위가 살리신 것이다. 그래서 고대 교부들이 사용한 말
opera ad extra sunt indivis
부활 ;삼위일체가 안으로 하는 사역은 나눌 수 있다. 밖으로 하는 사역을 나눌 수 없다.(부활도 밖에서 일어난 사건)
부활에 대한잘못된 가르침들
①제자들의 거짓말-이를 위해 제자들이 생명 걸까?
②기절설-십자가에서 기절해 있었다.(무덤에서 살아나셨다)
;뼈를꺽지 않음;물과 피가 나옴-십자가형하면 그 결과로 물, 피를 분리됨-십자가의 고통으로 파열(정확무,과학적 증명);누가 그들을 옮겼을까? 기절한 자가 무슨 힘으로 옮기며
장정들이 있는데 어떻게 했을까?
③환상설-너무나 예수를 사랑하여(여자들이) 예수가 환상으로 보엿다는 것이다.
④신화다-불트만은 부활은 사실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밝혀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배후에는 칸트의 사사이 잇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칸트의 사상: 이상계
현상계-사실의 세계. 여기서는 의미가 밝혀지지 않는다. 이 현상의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이 예수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의 의미는 사실의 세계안에서는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이상계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불트만의 말은 시, 공간에서는 부활이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사흘만에 부활한 것이 아니다. 주일 아침에 케리그마를 선포할때 부활했다고 본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선포되었을 때)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활의 역사성이 부인된다.
승천
승천은 부활사건을 완성하는데 필연적 사건이다. 그의 인간성이 공간적으로 이동하는 것이며 그의 삶의 조건이 바뀐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히브리서 기자는 십자가 사건과 희생제사때 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는 사건과 관련시키고 있다. 즉 예수님도 피를 가지고 라는 성소로 가셨다고 한다(자신의 희생제물).
둘째, 이것이 가지는 또하나의 의미는 승천이 신자들의 하늘에 올라감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승천은 나중에 잘 발전되어진 교회론에 의하면 그가 우리의 머리이기때문에 우리 가 이미 하늘에 잇는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이다(엡 2:6) 함께 일으키사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심)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나중에 앉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앉힘) 바울은 다른말로 너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지라. 너희는 위에 속한 자니라(골 3:1)
우리가 가진 왕직은 회복시켜주는 의미이다. 보좌에 앉는다는 말은 왕이 앉으며-이는 통치하신다는 말이다. 오른편에[ 앉는다는 말은 여예의 자리를 말하는 것] 이고 같이 앉는 다는 말은 함께 통치한다는 말이다.
성경 자체가 신인 동형론적인 표현을 쓴다. 시 110:1-성경이 표현 쓰기 때문에 우리로 쓰는 것이다.
하나님 우편에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쉬운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사역을 하신다. 그는 성자로서 계속 사역해 왔다(그분이 지상에서 인간으로서 메시야 사역을 하실때에도). 그러나 이제는 그의 인간성도 그 통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인간성은 우리의 인간성이다(여기까지는 맞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서서 그가 우리의 인간성을 가지므로 우리도 그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하면 안된다. 그러면 인간을 신화한다.
또하나, 멜기세덱 반차로 쫓아 제사장으로 계신다.
-그가 제사장으로 계신다는 말은 지금도 제사드린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의 제사는 영 단번에 드림으로 완성했다. 다시 드릴 필요 없다.
-그러면 제사장으로 계신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이루신 것을 적용하시는 일을 계속 하신다(하나님 앞에서). 이것은 우리는 중보기도를 한다고 하는데 더 바른 생각은 적법한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서 다 이루었습니다 라는 의로운 주장을 계속하신다는 것이다. (마귀가 참소하면 예수가 변증)-내가 이사람 위해서
-루터파에서는 중보기도를 ‘내가 목소리를 내어 우리 위해 진짜 중보기도를 하신다’고 한다.
루터가 십자가 사건과 관련해서 누구위해 못박히었다. 밧세바 범한 다윗을 위해서 부인한 베드로 위해서 한눈 팔고 있는 우리 위해서 그 자가 죽었다는 주장은 하나님우편에서 하고 계신다.
선지자로서도 일한다.
이것은 하나님 우편에서 행하신다.
재림의 의미는?
이것은 중보자로서의 특권에 속한다. 재림에 대한 3가지 기본적 표현
(1) 오심(παροΰσια;그의 현존하심)-우리앞에 와 계심. 그러나 이 말을 가지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이미 예수가 함께 하심으로 다시 오시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
(2) 살후 1:7 나타나심(άποκαλυψις)-에수의 게시 (1)과 (2)를 나누면 안된다. 한 사건의 다른 측면이지 두 사건이 아니다. 세대주의자들은 나눈다.
(3) 살후 7:8 신현(Έπιφανεια);영광스럽게 나타나심. 이 세가지는 한 사건의 다른 측면이지 각각 나누면 안된다.
조지 엘른 래르‘마지막에 될 일들’ 참고
부제 ;편싱도를 위한 종말론
공중재림7년의 나타나심의 견해사 잘못을 지적한다.
(참고)
다윗,사울 왕으로 기름부음, 그 후에 바로 왕의 사역하는것이 아니라 얼마의 기간이 있다가 와이 되었다.
예수가 오실때 (세례 받은때부터) 메시야로서의 사역은 다 이룬다음(마 28:19)에 하늘에 오르셔서 왕직을 감당하신다. 3년 사역에서 왕직을 감당하셨다. =희연하게
성령론, 오순절이전에 세상에 계셔서 사람들은 하나님 백성으로 받드셨다.
휴거
살전 4:16
예수님이 오실때 하나님이 오신다고 하셨다. 호령과 천사장과 함께 하나님 나팔, 죽은자 부활, 그후 우리가 변화-끌려올때, 저희와 다함께
공중에서 영접하기 위해서:헬라어 용법(어떤분이 손님이 오면 마중나가서 맞이해 다시 집으로 온다(집으로 모셔오기 위해 마중나감). 행 28:15을 보면 그 용례가 나온다. ‘맞으러 오니’가 살전 4:16 영접하시리니와 용어가 같다.
휴거의 목적은 맞아서 내려오는 것이다. 거기서 7년 산다.
휴거소설 오류 2개;휴거되는 시간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1시, 다른 사람은 3시 4시 아니다. 동시에 일어난다. ;휴거때를 안다-10;28-모른다.
(부활의 몸) 요 20:17 나를 만지지 말라;부활체와 관련해서 제일 어려운 문제 나온다.
(1) f.f. Bruce:방문설
(2)모리스:나를 마지막인것처럼 붙들지 말아라. 내가 어느정도까지는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좋은 것이다) 나를 다시 볼기회가 있을 것이다.
(3) 마리아에게 ‘네가 이제는 옛날의 관계에서는 나를 관련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영화롭게 되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했다는 말. 새로운 관계에서 접촉해야 한다. 그때는 내가 승천한 후에 50년의 삶 안에서 신앙으로 나와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는 것이다.(해리슨)
(4)네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해서 온 것 아니다. 나하고 영원히 있기 위해서 온 것처럼 생각지 말라 한동안 너희를 떨어져 잇을것이다 라는 이해를 가진자도 잇다.
예수의 영혼 문제
예수의 죽은후 영혼은 어디에 계셨는가?
(1) 분리되어 잇지만 육신과 같이 있었다. 예수의 신성은 하늘에 계시면서도 동시에 예수의 육체와 같이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의 무덤에 신성이 있어서 그의 육신이 살아났던 것이다.(이것은 하나의 근거ㅖ
(2)예수의 영혼도 낙원에 계시다가 오셨다. 지지구절이 눅 24;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이다...예수가 살린 3명도 낙원갓다왔다. 두가지 다 괜찮다는 학설.
예수 영혼이 죽었다(저주받음). 우리의 영혼이 죽었다. 그러나 영혼이 있다. 다만 활동하지 않을 뿐이다.
예수가 음부에 내려갔다고는 할수 있다. 죽은 상태를 음부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에 내려갔다고 할수 없다. 그런데 육은 죽어 없어진다. 그러나 영은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죽음이란 관게(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존재의 몇절이 아님). 예수의 영혼과 신성은 다르다.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왕되심-그리스도의 3중직
기독론이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고 어떤일을 하셨는가?
사역에 있어서 낮아지심의 상태-높아지심의 상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왕직, 선지자직 제사장직을 해주심(칼빈때부터 이렇게 해서-물론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
선지자직:하나님 말씀을 잘 알아서 우리를 가르치신다.
제사장직:우리를 거룩케 하심. 우리를 거룩케 하시는 일중 제일 중요한 일은 죄를 사해주는 일 곧 그의 사역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십자가 사건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이미 구약시대에도 선지자로서 우리 안에서 역활을 해주셨다. 가령 벧전 3:18-그리스도의 영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노아를 통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그가 성육신 하기 전에도 선지자로서 사역을 감당했음을 말하 것이다.
과거의 구약의 선지자들이 자신의 역할을 감당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저들안에서 말하엿다고 까지 베드로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이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선지자 역할을 감당하셨고, 또 이셋상에 오신 후에도 선지자 역할을 했고, 승천하신 후에도 선지자 역할을 계속하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늘에 오르신 후에 그 역할을 계속하기 위해 그분은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이다. (요 17:13이하) 다른 보혜사를 보내셨다.(이 일은 잘 안다)
이제 우리가 살펴 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직이다. 사실 그리스도가 이세상에 오실때부터 왕이셨다. 마태복음에서는 그가 나시면서부터 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그는 이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렇다면 그가 이세상에 오심으로서 새로운 왕이 되는가? 시 103을 보면 영원하신 왕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시 103:109;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만유를 통치하시는 도다. 이것은 여호와의 통치, 권능의 왕국을 말하는데 성자께서는 성육신하시기 전에도 이 권능의 왕국에서 통치를 해오고 계셨다. 그런데 이세상에 오셔서 또 왕권을 행사하신다는 것인데 그 의미는 영원번부터 행사하시는 왕직이 아니라 중보자로서 왕권을 행사하신다는 왕직이다(중보적 왕권0
그리스도의 3중직이란 우리를 위해서 영원전부터 행하시는 메시야로서의 사역이며, 이 메시야(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잘 알려 주기 위해서 3직(왕, 제사장, 선지자)에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이 3직의 기름부으심은 장차 한 몸에 3직분을 행하실 어떤 분이 오실 것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 것이었다. 예수께서 바로 그분이시며 그 직분을 행하시는 분이셧다. 그런데 우리는 ‘중보적 왕권’에 대해서는 별로 잘 알지 못했다. 우리가 최근(한국에)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ㅇ뎨수의 가르침은 은혜의 왕국(중보적 왕권 혹은 통치)를 말한다. 중보적 왕권은 두가지를 포함한다.
그중에 하나가 은혜의 왕국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은 은혜로 오는 나라이다. 하나님이 으녜로 우리 가운데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즉 신자들의 마음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통치하시는 중보적 왕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것은 눈에 버이지 않으며, 영적인나라이다. 그러면 누가 실질적으로 통치하는가? 성령을 통해서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그 은혜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매일 매일 성령에 복종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 은혜의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근거해서 세우신 나라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온다”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오셨다. 그런데 만약 그가 구속을 이루지 않으셨더라면 그 나라에 들아올 사람은 한 사람도 없데 된다-이 유혹이 바로 사탄의 유혹이다. 이것 메시야로서의 사역-고난과 죽음-을 감당치 않고 메시야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다. 메시야의 권세, 온 세상이 그렇게 햇다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소유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나라에 들어올 백서은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구속의 사건이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잇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은 떨어질수 없다. 하나님 나라(은헤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 근거하여 이세상에 오는 것이다. 예수가 구속 사건을 이루기 전에도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라고 한 것은 장차 자신이 이루실 구속사건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성취하는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다. 엄밀한 으미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건ㅇ 근거하여서 이땅위에 하나니므이 나라의 백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은헤의 왕국이라 하는 것이다. 은혜의 왕국이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의 백성이 되어 가지고 기꺼이 순종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권능의 왕국과 은혜의 왕국의 차이점이다. 권능의 왕국에서는 그 누구라도 하나니믜 통치 아래 있지 않을 존재가 없을 것이다(심지어 사랑까지도)
적용: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알수 잇는지는 내가 정말 스스로 쭈님께 복종해 나가는 것이 잇느가? 없느가?에 잇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의 나라라는 것은 영적인 왕국이라 햇던 것이다. 그것은 신자들의 내면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생각햇던 것보다 지상적이고 외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 로마 카톨릭처럼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대신하는 것도 아니다는 말이다. 이 나라에는 중생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잇다. 그래서 예수는 중생과 하나님 나라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잇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다’ 여기서 볼수 없다는 이야기는 눈으로 볼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는 것이다. 또 산상수훈에서 그 나라의 백성의 특징이 어떤것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잇는데 그것도 이렇게 행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잇다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 너희가 이러이러한 사람들이다. 백성된 너희가 복된것은 (복되도다가 맨 처음에 나온다) 하나님 나라며 백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인 면에서 미래적이다. 은혜의 왕국이라는 것은 언제나 현재적ㄴ이면서 미래적이다. 현재성은 지나번에 배웠다. 미래적인 면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성경은 어떤 변화(적변적인)가 함께 올 것이다. 하나님 자신의 힘에 의해서만 오는 것이지 인간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앞당겨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을 한다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서의 노릇을 한다)하나님 자신의 권능에 의해서만 오는 것이다.
살전 5:2-3. 여기의 강조점은 해산 고통이 언제 임할지 모른다는 것이다.(이것을 사변적으로 생각하여 여자가 10달차면 해산하니까 예수의 재림도 언제쯤 될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그것처럼 갑자기 임하여 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갑자기 임하여 올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벧전 3:10에서시사해 주고 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이러한 것이 일어날 것인데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냐에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권능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시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의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올 것이라는 시사를 마 19:28을 보면,‘이 세상이 새롭게 되어’-이 말은 온 세상이 중생한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 날이 언제냐 하면 하나님의 미래적 왕권(권능의 왕권)이 우리에게 도입해 들어온 때이다. 사실은 그 중생의 성취가 바로 우리의 중생이다. 그래서 이것을 베드로후서의 말씀과 연관시켜 보면 그 일을 통해서 온세상이 중생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잇다(현존하는 세상을 고쳐나갈 것인지, 완전히 몰아내고 전혀 새로운 세상을 도입할 것이지 모른다). 여기에는 (연속성)새롭게 됨이 있는 것이다.
넷째로, 은혜의 왕국의 특성은 교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은혜의 나라(하나님 나라)는 아니지만 가장 연관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는 가장 중시하도록 세우신 기관이 교회이다. 증시 :나타내 보임)
다섯째로, 이 은혜의 왕국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끝이 없다. 시 89:36=37 그 나라는
사 9:7 영원토록
단 2:44 영원히 망하지 아니함
벧후 1:11 영원한 나라
그 나라가 자원해서 모두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로고스의 영원한 왕권에 대해서 고넌 15:24을 들어 다르게 설명했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왕국은 그가 통치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9 즉 은혜으이 왕국까지도 넘겨주는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예수는 성자로서의 영원전부터 왕권도 예수는 가지지 않을것을 가졋지만 이제 그의 구속에 근거하여 새로운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이다. (새로운 측며녜 마 28:19.
한가지 변화는 그의 구속 이전에는 신성만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지만 그가 메시야로서의 구속 사역을 다 마치신 다음에는 예수의 신성뿐 아니라 그의 인성까지도 그런 권세를 가진 것으로 높여졌다는 것이다. 그 권세를 가지신 것을 다른 말로 하면 권능의 왕국의 왕권도 가지신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 은혜의 왕국에서의 왕이실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왕국을 돕기 위해서 권능의 왕국의 왕권도 가지신 것이다. 모든 세상의 통치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실뿐만 아니라 온 세상 우주 위에서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것이다. 은혜의 왕국에서는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겨 나간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들이 주님을 섬기지 않을수 없다(섭리적이고 왕권이라고도 볼수 있다). 이세상에 주님만을 안섬기는 사람들조차도 결국은 은혜의 옹국에 있는 사람들은 보조하기 위해서(돕기 위해서) 주님께 복종하고야 마는 상황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모든것은 다 이루셨다. (빌 2:9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종말론적으로 그렇게 될것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금도 그렇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주님의 일을 이루는 가운데 돕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흥미로운 사실이다. 결국 예수의 관심은 은혜의 왕국에 있다. 이 은혜의 왕국은 제대로 통치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이 이 은혜의 왕국을 돕는 것이다. (돕는 일이라 방해하는 일까지도) 그렇기 때문에 이 은혜의 왕국을 위해서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자기의 발앞에 복종시키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 은혜의 왕국이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명확하게 들어날때가 되면 그때에는 비로서 모든것이 그리스도의 발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고 이 권능의 왕국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것이다. 결국은 은혜의 왕국이 모든 것을 포괄(권능의 왕국까지)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영광의 왕국이라 하며 최종적인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찬란하게 드러날 것이며 이땅에 인간을 만든 하나님의 뜻이 잘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땅 위에 왕으로 세우신 원래의 왕권이 회목이 회복되는 것이다(사람들이 제대로 그 일은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선지자. 제사장, 와으이 직분을 행하셨다. 그런데 왜 그것을 행해야 하느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때 인간으로 하여금 이런 직분을 행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을 잘 알고(선지자 직분) 다른 존재들에게 하나님을 잘 알도록 가르쳐야 하고, 거룩성을 유지해야 하고 (제사장직) 또,이세상의 모든것들을 통치해 나가야 했다(왕직),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못했고 예수는 그것을 햇다. 글새 우리는 그의 행하심을 통해서 3중지을 행할 수 잇는 존재로 회목되어진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회복되어지는 때가 그리스도의 권능의 왕국이 아버지께 바쳐지는 날이며 그때에야 이 직분은 그리스도 앞에서 수행할 수 잇는 것이다.
한가지 더, 예수가 우리위해 기도해 주시는 것.
벧전 2:5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중보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과연 어떤 것인가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잇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거룩한 제사를 드릴 제사장이 될지니라’
여기 제사장은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으로서 직무를 행한다는 말이다. 제사장의 직무는 하나님을 섬기는 직무이다. 즉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할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면 그 일 자체가 하나님이 받음직한 일이 아니고(이 일들은 문제 투성이다).
이 일은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이루신 이로 싸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에 인용된 글의 의미이다. 이런 사역을 주님께서 하늘에거 행하시는 것이다. 하늘에서 행하시는 이 중보사역은 왕으로서 행사하시는 사역과 뗄레야 뗄수가 없다-우리를 통치하시는 그분이 이 일은 해 나가시는 것을 잊지 말라.
질문;영광의 왕국에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고전 15;24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하신다는 것이다. 메시야의 왕국=중보으이 왕국을 아버지께 드린다. 즉메시야로서의 사역이 다하여지면 중보라는 없어지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에는 메시야가 필요없고, 하나님에 의해서 은혜의 왕국이 다스려진다. 그런데 세대주의 자들은 이것을 나누어 중보의 왕국을 천년왕극으로 보라-의미가 없다.)
고전 3;22 다 우리를 위한 것-그리스도-하나님의 것-우리는-그리스도의 왕국은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왕노릇한다는 것은 섬김으로서 관리.
예수님이 신인으로 가지신 권능의 왕국의 왕권은 넘겨주시지만 이 은혜의 왕국은 영원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근본적으로는 은혜의 왕국은 포괄적이다) 은혜의 왕국과 영광의 왕국은 같다. 다만 은혜의 왕국이 더 포괄적일 뿐이다. ]
출처 : 행복충전소 †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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