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독 론
강의안 -
서충원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목 차 -
1. 서론
1. 1. 기독론의 관점
1. 2. 기독론의 의의
2.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의 성육신
2. 1. 계시로서의 성육신의 의미
2. 2. 그리스고 계시의 유일무이성
2. 3. 성육신에서의 계시의 한계
2. 4. 상승기독론 비판을 위한 교리사 고찰(종교개혁까지의 기독론)
2. 5.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탐구
2. 6. 슐라이에르마허의 기독론(상승 기독론)
2. 7. 바르트의 기독론
2. 8. 상승 기독론 비판
3. 그리스도의 부활과 계시
3. 1.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서의 계시의 한계
3. 2. 계시로서의 부활
3. 3. 부활과 기독론의 상관성
3. 4. 부활의 계시와 선재
3. 5. 부활의 계시와 하나님의 아들되심
3. 6.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의 의의
3. 7. 부활과 삼위일체 교리의 상관성
3. 8.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
3. 9.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
4. 종말론적 계시로서의 그리스도의 계시
4. 1. 계시의 의미
4. 2. 그리스도 이전의 계시와 그리스도 계시와의 상관성
4. 3. 왜 그리스도 계시가 유일무이한가?
4. 4. 구약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부활의 계시와의 차이
4. 5. 종말 예언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 계시
4. 6. 창조의 종말을 가져오는 그리스도 계시.
5. 그리스도의 부활과 새창조
5. 1.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 지닌 새창조로서의 의미
5. 2. 신성의 충만이 피조물로서의 몸에 나타남
5. 3. 부활의 구원론적 의미
5. 4.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
5. 5. 부활 계시의 이중적 국면
6.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창조의 종말
6. 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종말론적 이해
6. 2. 신화(deification)에 대한 비판
7. 육체의 그리스도
7. 1.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불연속성
7. 2.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연속성
7. 3.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종말의 의미
7. 4.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조적 연속성과 차이
7. 5. 창조의 회복으로서의 그리스도 부활
7. 6. 육체의 인성이 지닌 종말론적 의미
7. 7.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탐구의 의의와 문제점
7. 8.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서 찾을 수 있는가?
1. 서 론
1.1 기독론의 성격
기독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구원론적인 질문과 상관될 때 추상적 사변을 벗어날 수 있다. 복음이 제시하는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개인으로서가 아니고 피조물이요, 죄인인 인간을 위해 그가 행하신 일이 무엇이고 그 결과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기독론의 초점이다. 종교개혁은 그리스도를 신인(神人)양성이라는 인격의 의미에서 이해해온 전통적인 강조점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했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를 원한(pro me)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면으로 보자면 하나님 중심의 그리스도 이해를 인간 중심으로 바꾼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성경 자체가 그리스도를 말씀할 때 그리스도 자신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신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 주, 인자 등등 그의 명칭이나 신분 역시 구원과 연관해서 그가 무슨 일을 행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의미를 무시하고서 그 자체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것은 성경의 노선과 그리 부합되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넘어서 하나님 자신으로 선재하시며 그 자체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성경의 관심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있다.
구원의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해야 한다. 종교개혁에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회복한 것은 단지 구원론에 있어서의 성경적 진리의 회복만이 아니고, 기독론에 있어서도 성경적 관점을 회복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신칭의의 교훈이 기초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이기에 그렇다. 그리스도는 그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율법의 행위로는 이룰 수도 없는 놀라운 구원을 가져오셨다는 것은 구원 진리의 기초이다. 따라서 이것을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가져온 구원에 동참한다는 구원론이 성립하게 된다. 기독론에서 다루는 그리스도는 특별히 그의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구원을 성취하신 분으로 구원사역에 있어서 집중 조명되고 다른 측면은 이와 연관해서 다루어지는 것이 성경적 진리의 초점을 놓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것은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을 따라 이해해야 한다. 복음을 따른다 함은 단지 복음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로써 그리스도에 관한 명제를 구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복음의 메시지의 기본적 중심을 따라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복음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죄인의 구원을 위해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이루신 분이다. 그런데 그의 구원은 단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종말론적 구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구원을 가져 오셨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종말론적 구원이 나타났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창조 이후로 역사 속에서, 특히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구원을 베풀어 오셨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제까지 역사 속에서 나타난 구원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구원, 즉 종말론적 구원이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도들의 복음 선포의 중심이고, 특별히 바울의 복음의 중심이다.
1.2 기독론의 의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이 복음의 핵심이다. 조직신학은 이 그리스도 안의 구원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이다. 조직신학은 서론, 신론에서부터 시작되지 않고 구원론, 구원론의 기초로서의 기독론, 기독-구원론에 근거하여 교회론, 종말론, 신론, 인간론을 다루게 된다. 먼저 신론을 다루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구원의 빛과 그 전망 아래서 신론을 전개한다. 기독론․구원론은 모든 신학 분야에 새로운 정초를 가져다 준다.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사실은 인간론을 밝혀준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에서 인간의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가 드러난다. 사실상 인간론은 구원론을 전제로 하고 이해할 때 비로소 기독교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신학에 대한 기독론적 정초가 필요하다. 실천신학․교회사․구약학 같은 경우에 이 기독론적 정초가 분명치 못할 때 기독교 신학의 특징을 상실할 수 있다. TEXT에 대한 충실, 본문의 왜곡에 대한 경계가 기독론적인 해석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서철원 교수가 지적했듯이 구약해석은 기독론적이어야 한다. 문법적, 역사적 해석은 신학적, 복음적 해석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한 개인이 아니라 구원자이며, 구원자란 모든 영역에 대한 새로운 전환과 새로운 지평을 가져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기독론은 단지 그리스도가 누구시냐, 구원이 무엇이냐를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고 모든 신학을 결정짓고 그 기초를 제공해 준다. 그리스도 이해는 기독론의 문제만이 아니라 조직신학, 모든 신학, 신앙의 실천의 기초이다.
2.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성육신
2.1. 계시로서의 성육신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창조를 가져오시기 위해서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새 창조, 종말론적 구원은 이전 것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이 새로움은 어떤 새로움인가?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시기 전에 계셨고 그것도 하늘에 계셨다. 그는 말씀이며(요1:1) 그가 세계를 창조하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갈4:4).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고(요3:13) 위로부터 오시는 분이다(요3:31). 그가 낳기 이전부터 계셨고 하늘에서, 위에서, 보내심을 받아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물론 그의 선재와 하나님 되심,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들에서 단지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읽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것, 그가 보냄을 받았다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늘에 속한 것을 말씀하시고, 하늘에 속한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가 오신 것은 하늘에 속한 것을 이 땅에 속한 자들에게 가져다 주시기 위함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오심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늘에 속한 것의 계시, 하나님 자신의 계시라는데 가장 근본적인 의미가 놓여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것이 나타났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나타났다(요1:14).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요1:18). 하나님이 오셨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사실상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 땅에 있는 인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이 주어져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기도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 전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새로운 것은 이 땅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이 땅에는 없는 것, 하늘에만 있는 것,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비로소 처음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이 열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늘에 속한 영광, 하나님의 썩지 아니 할 영광이 계시되고 그것을 피조물들이 보고 경배하며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 여기에 비로소 그리스도가 오심의 새로움이 있다. 그래서 그를 빛으로 표현한다. 그는 하늘에 속한 빛이다. 그것은 창조의 빛이 아닌 창조주 자신의 빛(요1:4 ; 마4:16 참조)이다.
2.2. 그리스도의 계시의 유일무이성
그리스도의 오심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하늘과 땅의 질적 차이, 하나님과 세계의 근본적 구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피조적 한계를 지닌다. 인간은 하나님을 죄 때문만이 아니라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요3:5). 육으로서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는 하나님을 보고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 이전에도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안 적이 있다고들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에 관한 완전한 신지식이 있었는데 그가 타락했기 때문에 그것을 상실했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에 관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는다. 그는 흙에 속한 자로서 하늘에 속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전15:44 이하). 또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 영광을 계시하셨고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등 선지자들에게 그 영광을 계시하셨고 또 그의 뜻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가 있었던 것으로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간접적으로 계시된 것이다. 모세가 본 하나님의 영광은 없어질 것이었다(고후3:7). 구약 선지자들의 vision이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하지 않다. 구약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과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 사이에 구속사적인 차이를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된 것은 비로소 처음 있는 일이고, 그 이전의 영광은 이것과 비교할 때 그림자의 의미를 지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聖肉身)은 이런 의미에서 역사상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고, 이전의 있던 것과 연속선상에 놓을 수 없다. 이전에 나타나지 않던 하나님의 영광,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또 하늘의 일을 알리신 것이다. 성육신의 결정적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있다. 요한복음 1장의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우선 그는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신 그가 자신을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성육신 이전의 하나님의 계시의 사실들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의미를 약화시키거나, 그 유일성을 축소시켜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자기 계시라는 사실이 결정으로 중요하다.
2.3. 성육신에서의 계시의 한계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고, 나사렛 사람이고, 목수의 아들이다.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아직까지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오히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비해 작아 보이고,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오셨다는 것,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알 수 없는 비밀이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의 주장에 대해 그들은 걸려 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늘에서 오셨다는 것, 그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처음으로 계시되었다는 것이 복음서의 주장이고, 요한복음의 주장이다. 육신으로 오신 그에게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사실상 육신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육체를 따라’ 그를 볼 때(고후5:16) 그는 인간일 뿐이고, 단지 뛰어난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주장을 신성모독이라 여겼고, 그와 같은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다’(요1:14).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였고, 그에게서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다.
2.4. 상승 기독론 비판을 위한 교리사 고찰 (종교개혁까지의 기독론)
상승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출발하지 않고, 즉 그를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연적 출생에서 시작한 인간으로 이해하고 거기서부터 그가 구원자로 성장했다고 본다. 이런 상승 기독론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이다. 우리가 상승 기독론을 이해하기 위해 기독론의 역사를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교리사를 볼 때, 처음의 신학적인 이슈는 기독론의 문제였다. 삼위일체(三位一體)논쟁이 신학사에서 처음 등장한 가장 중요한 논쟁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냐, 피조물이냐에 대한 논쟁, 즉 기독론에 대한 논쟁이다. 삼위일체 교의를 통해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한 본질임이, 즉 그가 하나님이심이 증명됨으로 그의 신성이 확고하게 교회의 신앙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온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통해 기독론의 기초가 분명히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교회의 출발로부터 그리스도가 누구신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다. 그리스도를 누구로 인정하는냐 하는 것이 기독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시금석이기에 그러하다. 중세 기간 중에는 특별히 기독론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없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기독론에 있어서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새로운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하려 했는데 그것은 구원론의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본질에 관한 질문보다는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어떻게 구원을 베푸셨는가 하는 구원론적 질문 안에서 그리스도를 접근했다. 바로 그리스도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자, 즉 구원자로 제시했다. 이것은 복음의 관심 방향에 부합하며, 적합한 그리스도의 이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제까지 삼위일체론 이나 양성론은 이단들의 잘못된 기독론에 대한 적절한 방어였으나, 복음의 내용을 드러내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는 복음이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상(像)에 부합하게 그리스도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직분, 삼중직에 대한 논의 역시 구원론적인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2.5.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탐구
초기 기독교나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신성, 신적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물론 인성을 갖고 있었고 또 그가 구속 사역을 이루신 것도 인성을 입으신 성육신이 아니라면 안되는 것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는 다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써 이해되었고, 이것은 그의 신인(神人)양성 중 신성에 대한 강조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전통에 맞서 새로운 기독론이 출현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우리와 같은 역사적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개념적인 본질로서의 인간의 특성을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반면, 새로운 기독론은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인간으로서 그의 삶과 사상 등을 역사적 관심으로 찾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그리스도의 이해는 18세기 계몽주의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계몽주의는 모든 것을 이성의 판단 아래 두고 이성에 의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거부하는 합리주의를 표방한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요소, 종교적인 요소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거부하였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모든 초자연적 기적과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모두 부정하였다. 계몽주의적 이성을 갖고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경을 더 이상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의 책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역사적 문헌으로 이해하고 그 안에 기록된 모든 초자연적인 요소는 신화로 간주하여 모두 제거하고, 오직 역사적인 것만을 인정하고자 한다. 이렇게 성경을 볼 때, 대부분 서신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관한 복음은 더 이상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역사적 측면에서 기록한 복음서만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복음서 안에서도 기적과 같은 모든 초자연적인 요소는 신화와 만들어낸 이야기로 제거되었다. 이런 성경 연구로부터 그리스도는 더 이상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구원자가 아니고 갈릴리에서 활동한 한 인간일 뿐이다. 전통적인 교의에서 제시해온 그리스도는 신성에 강조를 두었다면, 이제 성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이들은 이 신성에 대한 기록을 신화로 거부하고 오직 인간으로만 이해했다. 역사비평학을 통한 그리스도 이해는 그리스도를 주로 종교적으로 뛰어나고,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물, 그리고 위대한 도덕적 원리를 제시한 교사로 제시했다. 학자들이 복음서 연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재구성했는데 사실상 이렇게 재구성 된 그리스도의 모습은 당시의 세계관 속에서 이상화된 인간상을 그리스도에게서 투사한 것임이 결국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을 밝힌 것은 슈바이쩌이다. 그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것은 복음서의 예수상이 아니라 당시 인간상의 투사로 비판하면서 그리스도는 종교적, 도덕적 위인이 아니라 종말의 선포자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종결짓게 만든 획기적인 이해로 복음서의 그리스도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잘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역시 그리스도를 인간으로만 이해했다.
2.6. 슐라이에르마허의 기독론 (상승 기독론)
이런 신약학의 방법론과 결론을 수용하면서 그것을 조직신학적으로 제시한 것이 슐라이에르마허이다. 그는 18, 19세기 역사비판학적인 그리스도 이해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거기에 신학적인 요소를 부가하였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인간으로 우리와 다름없는 자연적 인간이다. 즉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것을 갖고 있었다. 바로 남다른 신의식이다. 그가 보여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전적인 순종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하나인 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가 가진 신의식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가능케 했고 이것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칭하게 했으며, 이후에 그를 다른 사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도 그는 여전히 인간으로써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인간으로써 모든 인간의 원형이 된다. 그의 신의식과 거기에서 비롯된 뛰어난 도덕성은 모든 사람이 지향할 목표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구원과 영생에 대한 이해 역시 전통적인 이해처럼 초자연적인 생명이 부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신의식이 성장해서 이 땅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인간성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상승 기독론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남과 다른 종교성으로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 오른 자이다.
2.7. 바르트의 기독론
바르트는 이런 슐라이에르마허를 비롯한 17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한 것으로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에게 성경은 역사책이거나 종교 도덕문헌을 넘어서 하나님의 계시이다. 종교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성경으로부터 이해할 때 그리스도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는 구원을 위해서 성육신하신 자이다. 따라서 그는 슐라이에르마허와 같이 그리스도를 단지 인간으로, 뛰어난 종교적 인간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과거 전통적인 교의에서처럼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또 그 안에서의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것이 그를 신정통주의로 부르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기독론의 유형에서 본다면 상승 기독론이 아니라 하강 기독론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즉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전통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과연 그리스도를 하늘에 선재해 계시다가 이 땅에 구원을 위해 성육신한 것으로 믿고 고백하는가? 이 사실에 있어서 전통적 교의를 그대로 수용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 대신에 ‘계시’를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인간으로서의 종교적의식 대신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은 절대타자(絶對他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그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기 때문에 그 계시가 인간에게 다 이해될 수 없고 여전히 그는 비밀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하게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그가 인정하지만 그 계시가 우리에게, 성경을 믿는 믿음으로도 그 실체에 있어서는 다 알려질 수 없다고 주장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은 여전히 암호와 비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물자체는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칸트의 경고에 그도 다른 현대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충실히 따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했고 성육신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알 수 없는 자이고 그리스도가 선재한 하늘은 땅에 있는 인간을 넘어선 영역이어서 전통적인 기독론이 이해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오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역사비판학에서 보는 대로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보면서(인간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 다른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적인 진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타자로 인간이 될 수 없고 우리에게 계시될 수 없다는 전제 아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없고 단지 초월자 하나님과 역사적 예수만이 남을 뿐이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은 그에게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가 전통적인 교의를 다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을 보고 그를 전통주의 분류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를 오해하는 것이고, 이것은 위험하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치 않고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부정하고 있다.
2.8. 상승 기독론 비판
밑으로부터 위로의 기독론, 상승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그의 보내심을 인정치 않고 역사적 예수로부터 출발해서 그리스도의 의미(구원을 위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 인간의 합리적 판단에 근거해서 그의 선재와 성육신은 단지 그의 인간성의 탁월성에 대한 신학적 해석으로 돌리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과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인정치 못한다. 그의 선재와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의 성육신의 의미를 인정치 않을 때 그리스도의 계시와 구원의 의미는 상대화 될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많은 사람 중에 뛰어난 종교성을 가진 위인, 성자이거나 기껏해야 최고의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 없이 기독교는 유일한 계시와 구원의 종교일 수 없다. 그런데 그가 이렇지 않고 그가, 즉 육체로 볼 때 전혀 다른 사람과 다름없는 그가 사실상 단순한 육체가 아니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님이 영광이 유일하게 그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하고 있고, 여기에서 세계사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전적인 유일성, 새로움이 있다는 말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상승 기독론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린다는데 첫 번째 문제가 있다. 이것은 양자 기독론의 고대 이단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 볼 때 인간이 변화되어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종말론적 구원을 가져올 자로 전혀 적합하지 못하다. 이에 따른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계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신지식을 인정치 않음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초월적인 것,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내재적 가능성에 속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의 유일한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인간은 그의 영적 존재적 특성으로 신과의 교통 가능성이 있고, 신의식이 있어 굳이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계시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신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가 간과되고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무한한 차이를 깨뜨리고 육체로 오셔서 그 영광을 계시하신 그리스도의 계시적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안에서만 하늘의 하나님이 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인간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알리셨다는 것을 말씀한다.
3. 그리스도의 부활과 계시
3.1.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서의 계시의 한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자로 이해된다. 하나님은 그의 보이지 않는 존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이미 그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것을 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속에서 우리는 그의 신성, 신성의 계시를 보게 된다. 그의 말씀과 사역에 나타난 권위와 능력, 그의 인격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자로써 그를 보여준다.
그러나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 육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서는 아직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그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아직 가리워져있고, 단지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따른 신앙으로 보지 못하고 고백할 뿐이다(마16:16 이하). 그의 그리스도되심은 아직 비밀에 속한 것이다(메시아 비밀). 그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영접치 않는다(요1:10,11). 그 이유는 영접치 않는 사람 속에 생명이 없음도 문제이나 아직까지 육체 안의 그리스도에게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 있지 않은데도 원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인지, 그는 단지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그의 육체 속에서는 분명히 볼 수 없다.
3.2. 계시로서의 부활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온 자인지 분명히 드러나게 된 것은 그의 부활하심에서이다. 그의 부활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광이다. 그의 부활에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여기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닌 하늘에 속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고전15:42이하에 육체의 생명과 부활의 생명을 대조시키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썩을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적 생명으로의 부활이며, 이는 흙에 속한 아담, 흙으로 지음 받아 생령(living soul)이된 아담과 같은 존재가 아닌 하늘에 속한 존재의 나타남이다(고전 15:45-47).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땅에 새로운 차원을 계시한 것이다. 즉 흙에 속한, 땅에 속한, 창조에 속한(히9:11) 사람들에게 하늘에 속한, 창조에 속하지 않은 새로운 차원을 보여준 것이다. 부활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계시로, 하늘에 속한 것의 계시로 이해하는 것은 그 중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도 그가 비록 종의 형체를 입고 계셨지만(빌2:7)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그가 성육신 이전의 영광은 충분히 드러내신 것이 아니다(요17:5). 계시되었으나 아직은 육체라는 한계 안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의 부활하심에서 남김없이 그 영광이 드러났다. 이 부활하심에서 그가 종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에로 올리운 것은 다시 성육신 이전의 선재 상태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 선재와 연속선상에 있지만 그와 다른 것으로 선재 때와는 달리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속을 이루시고 다시 원래의 하나님 자리로 돌아간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은 오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육신과 연속선상에 있다. 성육신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시작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것의 객관적 성취이다. 성육신에서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온전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하나님 되심의 증거만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영광이신 분, 하늘에 속한 분임이 피조물된 우리에게 계시된다는데 결정적 의미가 있다. 그 영광은 그야말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이다(롬 1:23). 그것은 땅에 속한, 육체에 속한 인간이 볼 수 없는 그런 차원에 있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하늘에 속한 것, 썩지 아니할 것, 아담은 알 수 없는 것을 전적으로 새로이 계시하셨다.
3.3 부활과 기독론의 상관성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고백, 기독론적 진술들은 다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하고 특별히 기독론적 진술은 부활에 기초한다.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 주 등 모든 진술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고 그에게서 이 땅에서는 보지 못한,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영광을 체험하면서 성립되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후4:6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다메섹도상에서 만난 경험에 관계해서 이해할 수 있다(김세윤, 바울복음의 기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것은 없어질 피조물의 영광이 아니라 없어지지 아니할 영광이다(고후3:11).
3.4. 부활의 계시와 선재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것은 피조물의 썩어질 영광이 아니라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 하늘에 속한 영광이 나타나고 보게되었다 이 나타난 것, 그의 영광스런 모습에서 그가 누구신가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그의 영광이 하늘에 속한 것이라면 즉,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는 피조물과 다르다는 것, 그는 하늘에 속한 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신 자이다. 그의 영광은 결코 땅에서 난 것과 혼동될 수도 비교될 수도 없는 그런 하늘에 속한 것이다. 여기서 그 영광을 지닌 자는 하늘에서 난 자, 하늘에 속한 자, 하늘에서 온 자임이 나타나게 된다. 즉, 그의 부활의 영광의 경험은 그의 근원을, 그의 본질적 존재를 드러내 준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증거한다(빌2:5이하; 갈4:4; 요1:15; 요3:13,31)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다(요1:1)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게 되었는가? 물론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그의 선재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세례요한이 계시를 통해 알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가 선재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지 못했고 단지 하나님의 계시로 그 사실만을 믿었을 뿐이고 그는 그의 영광스런 형상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서 하늘로부터 온 그 영광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영광을 본 자는 하늘에 속한 영광을 보게 되고 여기에서 그가 하늘에서 온 자임을, 그가 육체를 입고 오기 전부터 하나님의 영광 속에 계신 자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도들이 선재를 말씀할 때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존재에 있어서는 선재가 앞서나 인식에 있어서는 부활을 통해 선재로 나아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동일하기에 그러하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기독론적 고백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체험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써 태어나 부활에 이른 것이라고 보는 양자론적 기독론의 입장에서 선재의 사실을 부활로부터 나온 신화적 진술로 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선재하셨고 그가 보내심을 받아 성육신 하셨고 다시 올리우셨다. 그러나 선재의 사실을 아는 것은 부활하심에서라고 보아야 한다. 이제 선재에 대한 이해는 단지 믿음의 고백만이 아니고 부활의 영광에서 보여지는 계시이고 부활을 봄으로써 선재를 확신있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선재와 부활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부활은 선재로의 복귀가 아니다. 부활은 선재 당시에 나타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영광, 썩지 아니할 하늘에 속한 영광의 계시이다.
3.5. 부활의 계시와 하나님의 아들되심
부활은 그의 하늘로부터 오심, 그의 선재를 증명할 뿐 아니라 그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한다. 그의 부활의 영광은 바로 그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난 독생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요1:18). 그의 얼굴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다(고후4:6) 그것은 천사들의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다(히1장). 모든 피조물은 다 썩어질 것이나 그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히 1:10-12). 이것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된 것이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것(롬1:4)에서 부활의 의미가 드러난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육체로 계실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영원 전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요1:18; 갈4:4). 그러나 선재 당시는 물론이고 육체로 오셔서 그 영광을 계시할 때에도 그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보여주지 않았다. 그의 육체의 형상은 종의 형상으로 그 종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과 동일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부활하심으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고 알게 된 것이다. 그가 부활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승귀(昇貴)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오류이다. 그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그것이 감추었던 비밀이였는데 이제 그의 부활하심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의 고백은 다 부활에 기초하는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부활 없이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됨은 추상적이다. 물론 그의 성육신에서 이미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나타났다(요1:14) 그러나 부활에서 온전히 남김없이 이 사실이 계시되었다.
3.6.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서 그의 선재를 그의 신성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이라면 보이지 않고 썩지 않는 그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되는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단지 그분 자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계시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의미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다(딤전1:17; 딤전6:16).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으로 아버지를 계시하셨다. 이것을 골1:15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형상이란 그것이 실체를 보여주어서 그것을 보면 실체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써 하나님 자신을 보여 줌을 의미한다. 요14:10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이 바로 형상의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조금도 남김없이 온전히 나타나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할 수 있는가 그가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하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을 조금도 다르지 않게, 유사한 것이 아니라 똑같게 나타내 보이신다. 그가 하나님이 아닌 자로 하나님을 계시하신다면 그를 보고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본 자가 곧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다 나타내실 수 있고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3.7. 부활과 삼위일체 교리의 상관성
삼위일체 진리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삼위일체의 일체의 교리의 주된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것이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우선 그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에게서 하나님이 온전히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계시로서의 그리스도를 넘어서 계실 수 밖에 없다. 설사 그리스도를 보고 하나님을 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아닌 매개된 지식이며 따라서 그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넘어서 하나님 자체의 지식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다(고후4:4-6). 이 점에서 그는 어떠한 다른 계시와 구별된다. 다른 계시들은 그 계시와 하나님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 그 계시들은 다 인간의 인식 능력에 맞게 조정되어 주어진 것이어서 거기에 나타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주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 계시들을 통해 알려지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 계신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다르다. 그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고 그를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그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다르지 않다.
물론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고 그리스도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낳은 아버지이시고 그리스도는 그의 영원한 아들이다. 이것은 위격의 구별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별되는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시다. 같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성자가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계시하심을 의미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렇게 계시의 관점에서 이해함이 옳다. 계시를 떠나 영원한 하나님 안의 삼위일체에 관한 논의는 사변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삼위일체 진리가 나타난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부터이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서이다. 삼위일체에 관한 진리를 타락 이전 아담이 갖고 있었다는 것은 사변이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외 부활의 의미를 왜곡시킨다. 물론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부터 삼위일체이다. 이것을 내재적 삼위일체라 한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의 사실이 계시된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스도의 부활에서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이 나타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계시이심이 드러나게 된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삼위일체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추상해서 하나님 자체의 본질로서의 삼위일체를 말하고자 하는 시도는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삼위일체의 진리를 확고하게 붙들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설명할 수도 없이 그저 믿어야 하는 교리가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하셨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3.8.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셨다. 즉 하나님의 계시로 이 땅에 오셨고, 부활하셔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때 우선은 성육신 이후 우리가 보도록 계시하신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의 형상이심은 우리에게 계시하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기 보다 이미 그분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영원부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agent라 할 수 있다. 창조와 이스라엘 역사에서의 계시도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히1:3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본체의 형상이라 할 때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보여진 그 영광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고 이것은 그의 본래적 소임이다. 빌2:6에 그가 하나님의 본체(μορφη)라 할 때 이것 역시 골1:15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셨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계시되지 않았기에 그의 형상됨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성육신에서 그리고 그의 부활에서 그가 하나님의 형상됨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그가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을 알리신 것은 성육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갖고있는 기능, 직무가 바로 하나님을 알리시고 보여 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일컫는 것이다(리더보스-하나님의 형상참조, 서철원교수-학위논문 참조)
3.9.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때도 하나님의 계시라는 의미와 거의 같다. 히1:1-3에서 “만유의 후사이시고 모든 만물을 지으신 그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셨다” 라고 한다. 이미 이전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지막에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본체의 형상이시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수단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심은 하나님이 자신을 그 안에서 계시하심을 의미한다. 그 안의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 창조주로서의 계시이다. 요1:1 이하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할 때 이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영원부터 하나님의 계시자이심을 보여준다. 그는 물론 이 땅에 오심으로 비로소 우리에게 말씀으로 자신을 온전히 나타내셨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남김없이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영원부터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남김없이 말씀하신 것은 그가 본래 말씀이시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일반적인 말씀과 다르다. 구약 선지자에게 주어진 말씀과도 구별된다. 그는 이 모든 말씀의 근원이며 말씀 자체이시다. 그리고 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뜻은 하나도 남김없이 알리워진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하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말씀이다. 말씀과 하나님은 불가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됨은 그의 하나님의 형상됨,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알리워진 것이다. 요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두 가지를 본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원부터 하나님의 계시자이신 그리스도요 둘째는 그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비로소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영광을 남김없이 계시하고 그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말씀하심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두 말씀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 오심에서의 말씀에서 존재와 인식의 차이를 본다. 존재에 있어서는 영원한 말씀이 앞서고 그리스도 오심에서는 말씀이 뒤따르나 인식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사실, 그 안에서 모든 날의 마지막에 말씀하신 사실(히1:2)로부터 그를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요1:1) 이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사실에서 유리된 하나님의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 이해는 전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로써 적합치 못하고 사변에 빠질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 오신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계시된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계신 그리스도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될 때 곧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4. 종말론적 계시로서의 그리스도 계시
4.1. 계시의 의미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때 계시란 말은 바울이(롬16:26)에서 비밀의 계시라고 말할 때 그 계시란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즉 여기서 계시된 것은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이제 나타난 그 비밀이다(롬16:25,26). 이것은 이 계시가 주어지기까지 전혀 그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임을 함축한다. 그 계시의 내용인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자신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인간에게는 전혀 보여질 수 없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요1:14), 그의 부활하심으로(딤후1:10) 그 비밀에 속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시되었다. 이런 의미로 계시를 이해할 때 보통 일반계시, 특별계시를 구분할 때의 의미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구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일반계시, 특별계시라 할 때 계시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속성을 알리신다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αποκαλυψις(계시)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영광을 처음으로 드러내시는 유일회적 사건을 지시하고 있다.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4.2. 그리스도 이전 계시와 그리스도 계시와의 상관성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창조 이래 하나님의 다양한 계시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스도가 오시기전에 사람들에게 이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다. 특별히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셨다.(히1:1,2)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심은 창조 안에서, 구약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계시한 것에 관련을 맺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시기에 앞서 이미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알리셨고 이러한 계시들을 통해 그리스도 안의 계시를 준비하셨다. 그 이전의 계시 없이 그리스도 안의 자기계시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런 면에서 역사를 갖는다. 창조 이래 역사적 과정 전체가 사실상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라고 이해할 수 있고 그리스도 계시는 이러한 계시의 역사의 정점으로 계시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이전의 계시와 분리시키게 되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오심 이전부터 자신의 영광을 창조 안에, 역사 안에 이스라엘 안에 알리셨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자신을 직접적으로 계시하셨다는 것을 같은 차원의 계시로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분명 창조 안에, 그리고 구속역사 안에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셨고 여기서 바로 보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은 이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하나님 지식이다. 해와 달과 자연을 통해서 보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차원이 다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나타난 기적과 영광의 임재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부활에서 나타난 영광이 다 같은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차원이 다르다. 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의 관한 것이 알려져도 하늘에 있는 것이 아직 그 실체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하늘에 있는 것, 하나님 자신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 아들되신 그리스도에게서만이 나타날 수 있다. 하늘에 대해 이 땅에서 말할 수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것을 직접 보고 듣고 아는 존재가 와서 그것을 직접 알리기까지 아직 하늘은 감추인 것이고 비밀이었다.
4.3. 왜 그리스도 계시가 유일무이한가?
하늘과 땅의 차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에서 보아야 이 계시의 새로움이 이해된다. 그리스도 이전의 계시는 아무리 계시라 하더라도 그 차이의 한계 내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감추인 것이다.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은 설사 계시되었다 해도 그 실체는 알 수 없다. 그것을 넘어서 계신다. 그런데 그리스도 계시의 특별함은 이 차이를 뚫고 하늘에 있는 것을 땅에 속한 피조물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깊은 것을 피조물에게 보이시고 알리심이다. 기독교 신앙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근본적 차이를 기본적 고백으로 삼는다. 하나님은 결코 피조물이 아니고 피조물 안에 그 실체가 나타나 있지 않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따라서 이런 고백에 따라 모든 범신론은 정죄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신비주의, 하나님의 이 세상 안에 내재한다는 범신론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적 차이의 신앙에 의해 부정된다. 그런데 그리스도 계시는 범신론의 주장에서나 있을 수 있는 그런 주장,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나타나 보이신다는 것, 그가 땅에 들어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 계시의 새로움이고 유일무이함이다. 구약의 창조 신앙을 폐기하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그렇게 근본적으로 새로운 의미로 하나님의 새로운 행동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계시는 결코 범신론적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를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구약시대에 있었던 그 하나님만을 말하지 않고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것,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그 실체를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말한다.
4.4. 구약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부활의 계시와의 차이
그리스도 계시가 구약의 하나님의 임재나 현현 환상과 어떻게 다른가? 사실 구약에 보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거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든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보았다든지, 다니엘의 세 친구가 사람의 아들의 형상을 풀무불 속에서 보았다든지 하는 신현을 보게 되고 이스라엘 회중에 임한 영광의 임재와 시내산에서 모세가 본 하나님의 영광을 읽게 된다. 그리고 이사야가 환상 중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다니엘, 에스겔등이 하늘이 열리고 거기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대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지상에 있는 인간으로 하늘에 있는 것을 보고 경험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늘에 있는 것을 계시해 준 것이 최종적이고 가장 완전한 것으로 생각한다 해도 이미 이전부터 하늘로부터 계시가 주어졌고 하늘에 관한 것을 거의 직접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하늘에 있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지 아니할 영광을 계시하신 것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가? 사도 바울이나 요한이 본 하나님의 영광(그리스도의 영광)이나 선지자들이 체험한 것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 구약에선 하나님을 직접 보았고 신약에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본 것이 다른 것인가? 이것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리스도 안의 계시는 단지 하늘에 있는 것을 알리시는 차원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자가 이 땅에 오셨다는 데 있다. 단지 하늘에 있는 것을 알리신 것이 아니고 이 땅에, 그가 지은 피조물 가운데 오셔서 그 영광을 알리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에 오셨다는 것, 그리하여 그 영광을 계시하셨다는 것에 근본적인 새로움이 있다. 물론 이전의 계시가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아니라는 점,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서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나타났다는 것도 앞선 영광의 계시와의 차이이지만 그 하늘에 있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가 하늘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여기 이 땅에 피조물 안에 나타난 것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 이것은 창조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이전의 계시는 그저 하나님에 관해서 알려 주었다. 그 계시가 창조 전체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그 영광을 계시한 것과 이 땅에 오셔서 그 영광을 계시한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하늘에서 계시한 것은 피조물 전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영광이, 썩지아니할 영광이 피조물들에게 이 땅에 와서 계시된다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을 폐기하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셔서 그가 피조물 가운데 계시다는 것, 그가 함께 하면서 그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신다는 것, 그리하여 피조물 전체는 창조이래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계시가 지닌 전적 새로움이다. 하늘이 계시된다는 것도 새로움이고 더욱이 그 하늘에 속한 자가 여기에, 땅에 와서 계시된다는 것이 또한 새로움이다.
4.5. 종말예언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계시
이처럼 하나님이 하늘에서 오셔서 그 영광을 계시하시는 것을 종말론적 계시라 할 수 있다. 종말론적 계시라 함은 우선 그것이 구약예언에서 종말에 있을 계시에 관한 예언의 성취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예언했고 그날에 여호와께서 오셔서 그 영광을 계시하시고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을 베푸실 것을 예언했다. 종말에 나타날 많은 사건들 중 결정적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심이다. 그의 오심은 곧 그의 영광의 계시를 의미한다. 사40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예언하고 있는데 신약 기록자들은 이 예언의 성취를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구약의 예언에는 명시적이지 못한데 이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는 단번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고 성육신에서 부활, 재림에 이르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무튼 종말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 그것도 그가 오심으로 그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종말의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오셔서 백성들 중에서 함께 계시면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실(사40:9-11), 따라서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지속되면서 특별한 방식으로 하늘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 영광을 이 땅에 계시하고 그가 피조물들과 함께 계신다는 의미에는 이전의 사건과 유비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종말에 있을 것으로 예언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이 종말이 드러났고 그 종말론적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구약 선지자들은 아직 그 종말론적 오심과 종말론적 계시에 참여하고 있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멀리서 증거하고 예언하고 약속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계시의 관점에서 보면 선지자들은 계시를 본 자들이 아니라 그 계시를 알았으나 보지 못하고 미리 약속하고 증거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특별한 위치이다.
4.6. 창조의 종말을 가져오는 그리스도계시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시가 종말론적 계시라 할 때 보다 근본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오심, 그의 계시가 창조전체에 대한 종말론적 새로운 의미를 가져온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오심이고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이다. 이것은 피조물로서는 감당할 수 없고 창조전체의 존재를 뒤흔드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단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는 인식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전체가 그의 오심으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그런 것이다. 여기에 창조의 종말이 나타난다. 창조는 더 이상 그 이전과 같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창조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없게 되고 이전의 질서는 더 이상 그의 영광 앞에 지속될 수 없게 된다. 종말에 나타날 심판과 파국은 바로 그의 영광의 계시와 관계된다. 그의 영광의 계시가 창조의 종말을 가져온다. 물론 이 창조의 종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 그의 부활이 종말의 계시이다. 이미 창조의 종말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부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는 이전에 창조의 지속을 전제로한 하나님의 계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계시자체가 종말론적 심판의 구원을 가져오고 창조의 종말과 새창조를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의 계시로서 하늘에 있는 비밀,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는 것만이 아니다. 이 땅에 있는 것,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뒤바꾸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단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만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시작된 것이고 여기에 그리스도의 계시(부활)의 유일무이성이 있다.
5. 그리스도의 부활과 새창조
5.1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 지닌 새창조로서의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계시되었다. 그런데 또한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임과 동시에 새창조의 계시이기도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계시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즉 창조의 종말과 새창조를 가져온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새창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처음창조가 사라지고 새창조가 나타나는 새창조의 시작이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처음으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새로운 피조물인가? 그가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면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살려주는 영)으로 부활하셨고(고전 15:45) 그 영은 몸을 지닌 영이다.(몸과 육의 구별) 기독교 부활 신앙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신체의 부활이다. 이 신체의 부활이 왜 중요한가? 여기에 지상에서의 생애와의 연속성이 있는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육체로 인간으로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셨다. 물론 우리와 달리 죄 없는 육체로 오셨다. 그가 그 흠 없는 육체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속을 이루셨다. 그리고 살아나실 때 새로운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셨다. 그 몸은 인간의 몸이면서 지상에서의 몸과 달리 썩어질 육의 몸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이다. 이 신령한 몸은 그것이 썩지 않는다는 것을 단순히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난 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육체는 있을 때 입었던 몸처럼 아담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즉 흙에서 난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난 몸이다(고전 15:47, 여기 둘째 아담이 하늘에서 나셨다는 것은 성육신 사건을 지시함이 아니라 부활사건을 지시함에 주의해야 한다. 성육신에서 입은 몸은 하늘에서 난 몸이 아니라 땅에서 난 몸이다). 그는 그의 부활의 몸을 통해 하늘에 속한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런데 이 부활의 몸의 출현은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이면서 또한 새창조의 계시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에 계시되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된 인간이 썩지 아니할 영광을 비추는 그런 신령한 하늘에 속한 존재로 변화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해서 입으신 육체는 인간의 육체이며 이것은 피조물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피조물로서의 인성이다. 그리고 그 피조물로서의 인성이 그의 부활로 인해 썩지 아니할 영광에로 변화되었다. 피조물에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인성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인성은 육체의 인성이 아닌 신령한 인성이고 이것은 하늘에서 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하면 우리의 인성과 같은 상태의 지상에서의 죽을 수 있는 인성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만이 아니고 그리그도의 인성에는 두 가지 상태가 있다. 즉 우리와 같은 낮은 인성과 부활의 상태의 영화로운 인성이 있다. 이 인성은 처음창조 받은 아담의 인성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하늘에서 난 둘째 사람’이고 이것 역시 창조된 것이지만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왜 그 썩지 아니할 인성인데 창조된 것이라 하는가 그것은 육체로서의 인성의 변화이기에 그러하다. 육체의 인성이 아담의 인성이며 이것이 창조된 것이라면 그의 부활의 인성 역시 신성이 아니라 창조된 것이고 단지 이전 창조와 구별되는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피조물로서의 창조된 것이고, 이것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5.2. 신성의 충만이 피조물로서의 몸에 나타남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이 특별하고 유일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몸이면서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을 비추는 몸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아담의 몸이다. 그는 부활하심으로 신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으로 계신다. 그는 신성과 인성을 여전히 갖고 계신다. 그런데 그의 인성은 육체의 인성과 달리 썩지 아니할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시는 인성이다. 육체의 인성은 아직 썩지 아니할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지 못하다. 그 육체는 썩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썩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에 썩지 아니할 영광이 그 몸에 그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인간의 몸이 썩지 아니할 영광으로 변화된 것이다. 인간의 몸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게 되고 인간의 몸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신성의 충만이 몸으로 거하게 되었다(골 2:9). 이 구절에서 육체로 거한다고 해서는 안된다. 원문의 somatikos는 신체(body)라고 번역해야 맞다. 그의 육체(flesh)는 썩어질 것으로 신성이 육체에 거할 수는 없다. 그의 부활의 몸이 변화된 몸으로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남김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광을 처음으로 드러냈다는 것만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의 몸이 변화되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참으로 기적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질적인 차이 때문에 그러하다. 그것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과 썩어질 세상으로 표현한다. 썩지 아니함은 피조물의 썩어짐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창조주되심, 그의 하나님되심이며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썩어질 영광이고 그것은 타락 이전부터 그러하다(벧전 1:24).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롬 1:23)은 피조물의 썩어질 영광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그의 신성과 영광을 계시하셨지만(롬 1:20), 그렇다고 해서 이 피조물들 속에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속에 계시지 않고 그의 처소는 하늘이다(행 7:48-49). 모든 창조물 안에 하나님이 내재하시고(시 139) 모든 만물이 그의 뜻대로 움직이고 모든 것이 그의 주권 아래 있다는 의미에서 만물 안에 그가 계시지만(행 17:27) 썩어질 피조물 속에서 그를 발견하려 하거나 거기서 하나님을 숭배하면 우상숭배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의 창조신앙이다. 따라서 다른 종교가 가진 범신론을 거부한다. 다른 종교는 다 범신론적이다. 피조물 안에 신성이 내재하고 있다고 보고 피조물을 통해서 신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독교의 창조신앙은 아무리 이 세상 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가 있다 해도 이 세계는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과 구별되는 썩어질 영광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는 이런 창조신앙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 하늘에 계시고 썩지 아니할 영광 중에 있어서 땅의 모든 썩어질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이 썩어질 피조물 중 한 사람에게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갖게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된 새 피조물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남김없이 나타난 것이다. 그가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신성이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인성 안에서 그 피조적인 인성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 것이다. 피조물 안에 하나님이 그대로 나타나신다는 것, 이것은 범신론의 생각이라면 범신론에서나 주장할 수 있는 일이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피조적인 인간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구약의 창조신앙 속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새창조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 안에 거하신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방식인데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피조물 안에 나타나고 피조물이 신적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어디까지가 인성이고 어디까지가 신성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이 인성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런 인성의 변화, 피조물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 그 만을 위해서라면 이런 인성의 변화,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런 변화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의 변화는 그에게만 일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다른 피조물들을 위한 것이다. 다른 피조물의 경우에 창조주 하나님과 구별되어 결코 썩지 아니할 영광에 이를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고 그것으로 신적 영광으로 변화되심으로 다른 피조물들에게 그 영광으로 변화되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는 새창조의 시작이다. 즉 다른 새창조의 후속이 있다는 얘기다. 그는 부활의 첫열매이고(고전 15:20),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다른 피조물들이, 다른 사람들이 그의 부활에 참여하여 썩어질 피조물에서 썩지 아니할 피조물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인성으로 새롭게 되셨다. 여기서 하늘과 땅,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놓인 엄청난 간격에 다리가 생기게 된다. 이전에는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새창조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에 참여하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온 세계를 위한 종말론적 새로움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된 새창조는 모든 피조물 위에 새로운 차원을 약속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 오셨고 인간은 하늘에 오르게 되었고 하늘에 속한 영광과 그 형상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었다. 이전에 피조물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남김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창조 시작부터, 타락 이전부터 흙에 속한 자요 하늘에 속한 자가 아니다(고전 15:45-47). 따라서 그는 그 인간성 전체가 땅에 속한 유한성, 피조적 제한성 속에 있었다. 그의 인식에 있어서 그러하고 그의 존재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하나님과 닮은 자이고 그래서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이며 흙에 속한 자이다. 그가 영혼(soul)으로서 그러하다. 그는 아직 하나님의 영광을 입지 못했고 그것을 볼 수도 없었다. 인간이 태양을 볼 수 없듯이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아담의 형상을 입으시고 오셔서 죽으시고 살아나실 때 그 몸으로 살아나셨지만 아담과 달리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나타나셨고, 그렇게 변화되셨고 우리를 그 변화에 동참케 하신다. 이제는 아담에 속한 자로 다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는 다른 존재, 새로운 인간이 된다. 아담은 창조 때 흙에 속한 자로 지음 받았지만 이제는 하늘에 속한 자로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다.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되는데 그것은 썩어질 아담의 하나님의 형상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겉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과 몸 전체에 결국이 새로운 변화를 입는다. 흙으로 창조된 처음 인간도 영화롭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인간은 모든 면에서 처음 사람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올리워진 그런 존재이다. 단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구별된다고 말해서만은 안된다. 개혁신앙은 영화된 상태를 처음창조의 상태와 구별해서 말하면서도 그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과 다르다는 것을 애써 강조하고 그리하여 로마 카톨릭의 신화(deification)의 개념을 부정한다. 물론 부활을 통해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처음 피조물의 상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그 다름의 이유가 바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저 처음에 비해 좀 높여주고 하나님은 여전히 저 높이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구별되면서도 그의 썩지 아니할 영광에 참여하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그가 인성에 그 하나님이심을 드러냈고, 그 그리스도의 변화된 인성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과 다른 별도의 높은 영광이 아닌 그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이전에는 갖지 못했는데 여기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신화는 아니지만 신적 영광에의 참여이다. 이것은 처음 창조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처음 피조된 아담에게는 하늘의 요소가 없었다. 그런데 새창조된 사람에게는 하늘의 요소, 썩지 아니할 요소가 새로이 추가된 것이고 이것이 결정적이다. 따라서 새창조를 처음창조의 회복이라고 보는 것은 새창조의 진리를 다 드러내 주지 못한다. 처음창조에는 없었던 것, 전혀 새로운 것이 나타났고 주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고 첫 사람 아담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다.
5.4.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썩지 아니할 영광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에 나타난다. 모든 피조물들은 처음창조에서 썩어질 것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그것이 변화되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된다.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된 자들이 썩지 아니할 나라를 상속받는다(고전 15:50, 벧전 1:4). 이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실 뿐 아니라 그가 만드신 새로 만드신 새창조 안에 거하신다. 임마누엘이 비로소 성취된다(계 21).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닌 종말론적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지 죽은 자가 살아나는 초자연적 기적,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피조물을 이제 사라지게 하고 그것 대신에 새로운 피조물을 주시는 그런 전 우주적 사건이다. 종말론적 사건이다.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이 계시되면서 그 종말론적 계시로 인해 창조질서에 새로운 요소가 들어오고 이것이 처음창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고 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종말론적 계시의 의미라 했다. 그런데 그 종말론적 계시가 가장 먼저 변화를 시작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에게 이다. 그의 인간성에 그 일을 시작했고, 이전의 육체 즉 처음창조가 아닌 새창조의 실재를 주었다. 이것은 단지 계시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에 나타날 그 엄청난 변화의 시작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창조와 처음창조의 구분이 아주 뚜렷하게 된다. 땅의 영광과 하늘의 영광이 다르다(고전 15:40).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영광은 하늘의 영광이고 새창조의 영광은 하늘의 영광이다. 이것은 인간의 영광, 창조의 영광과 다르다. 같은 하나님의 창조이나 하나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나 하나는 그렇지 못하다(고후 4:6). 이전에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구별이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창조와 처음창조의 구별로 의미가 바뀐다. 처음창조는 썩어질 영광이라면 새창조는 썩지 아니할 영광이다. 없어질 영광은 이제 길이 있을 영광 앞에서 더 이상 영광되지 못하다(고후 3:10-11).
5.5. 부활 계시의 이중적 국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계시되는 것을 둘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계시이고 하나는 새창조의 계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나는 썩지 아니할 영광은 결코 피조물의 영광이 아니고 따라서 이것은 창조주 자신의 영광임이 드러난다. 여기서 그의 하나님의 아들되심, 그의 선재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부활에서 나타난 영광은 단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이 인간의 몸으로서 드러내는 것이고 그 몸은 단지 영광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고 실제로 그 영광을 지니고 있다. 즉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닌 그런 상태로 변화되었다. 여기서 그의 인성의 변화가 나타난다. 그의 신성이 부활에서 계시될 뿐 아니라 그의 인성이 새롭게 됨으로써 앞으로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해 계시하실 새창조를 여기서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부활이라는 하나의 사태에서 그의 신성이 계시되고 새창조가 계시된다. 그리고 이제 그의 신성의 계시마저도 이전에 알고 있었던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물론 부분적으로 알려졌지만 온전하게 알리워지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 새롭게 계시되는 측면을 가지는데 즉 그가 그의 피조물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초월이 내재에로 강조점이 이동된다. 아무튼 그의 하나님 자신의 계시는 인성의 변화를 통해서 새창조의 계시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새창조의 계시는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부활에서 하나님은 이전에 알지 못한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고 창조도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물론 하나님 자신은 변하는 것 없이 그의 영광이 온전히 알려지는 것이고 창조는 변화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 이전에는 초월하신 하나님이었는데 이제 우리 안에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새롭게 나타나시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된 새창조는 종말론적 구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마지막 날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즉 창조와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새로운 변화와 구원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이 오심으로 창조가 새로워지고(사 11, 35, 40), 이스라엘에 구원이 나타난다는 것, 이것은 물론 구약 선지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존재하는 새하늘과 새땅의 현실, 썩지 아니할 영광에로의 변화로 명시적으로 이해된 것은 아니나, 암시적으로 내포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종말론적 구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은 이것이 처음창조의 종말과 함께 처음창조를 넘어서서 도래하는 새창조이기에 그러하다. 이제까지 아담의 창조 이래 모든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는 다 창조의 회복의 범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는 창조가 아닌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닌 새창조의 나타남을 보게 된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이고 유일무이한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 나타났다는 것, 이것이 피조물 안에 실현되었다는 것, 처음창조가 전 우주적이라면 그와 마찬가지로 전 우주적으로 처음창조가 아닌 새창조를 드러내신 것이다. 이것이 종말론적 새창조이다.
6.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창조의 종말
6.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종말론적 이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은 종말론적 구원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부활과 연합되어 우리에게 피조물에게 종말론적 구원을 가져온 것이다. 즉 처음창조의 종말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육체의 죽음이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담당하는 죽음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즉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즉 저주가 그리스도에게 내려지고 그가 그 저주를 짊어짐으로 육체가 십자가의 형벌의 죽음을 당했다(갈 3:13). 그로 인해 죄인인 자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론적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없이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오직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써만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 진노, 저주, 죽음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그의 육체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은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 하나님으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에 육체로 오셨고 그래서 그 육체가 죽으신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육체에의 참여는 단지 속죄양으로서의 필요조건일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피조적인 인간, 창조의 한 부분이 되신 것에 의미가 있다. 그가 피조물 중의 하나가 되셨다는 것, 그리고 그 피조물로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다른 인간과의 연대, 다른 피조물과의 연대가 중요하고 바로 그런 연대를 갖고 죽으셨다. 그는 흠없는 육체를 지니고 있고 동정녀 탄생으로 다른 죄인과 구별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여전히 그가 한 인간의 육체로 피조물로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육체로 죽으셨다. 그리고 신령한 존재로 살아나셨다. 육체로 죽으시고 영으로 사셨다(고전 15:42-44, 딤전 3:16, 벧전 3:18). 그의 육체의 죽음은 그의 영으로의 부활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그의 육체의 죽음의 의미가 놓여 있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의 다시 삶을 위한 죽음, 썩을 것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가 썩어질 육체에서 썩지 아니할 영광의 존재로 변화된 것은 죽음 없이 바로 올리운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썩지 아니할 영(하늘의 영광의 몸)으로서 변화를 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많은 열매, 보다 큰 영광에 상태에 이르기 위해 그의 죽음이 필요하다. 여기에 처음창조와 새창조의 관계가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처음창조의 실재이다. 이것은 흙에 속한 것이고 썩어질 것이다. 이것은 아직 하늘에 속한 영광에 이르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이제 그 처음창조가 죽음으로 사라지고 새창조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새창조를 위한 창조의 종말이다. 그 창조의 종말이 있어야 새창조가 올 것이기 때문에 그 육체로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은 여기에서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 외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진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심에서 모든 의미가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그와 함께 그 육체의 죽음을 통해 오히려 육체보다 더 나은, 엄청나게 차원을 달리하는 높은 영광의 몸을 가져오시기 위해서라고 하는 사실에서 다른 의미가 나타난다.
여기서 성육신의 의미도 나타난다. 성육신이 단지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육체를 입으신 것으로 이해하면 온전치 못하다. 그의 육체를 입으심은 죄에서의 구속과 함께 그 육체가 변화되어 영광스런 몸이 되기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목표로 해서이다. 육체로 오심, 육체의 죽음은 단지 죄와 형벌의 관계에서만 설명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해서 설명되어야 하다. 그리고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십자가는 이 과정 중에 부활 새창조를 가져오기 위한 창조의 종말이라는 것이다. 그의 부활은 단지 창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하늘에 속한 영광의 실재로 피조물이 변화된 것만이 아니고 우선 십자가를 통해 창조의 종말을 거치고 철저한 종말 이후에 창조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속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6.2. 신화(deification)에 대한 비판
창조가 새창조로, 땅에 속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의 참여로 변화할 때 이 창조의 종말을 거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은 육체가 후광을 입듯이 그렇게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 부활은 철저하게 육체를 죽이고 완전히 제거하는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 어떤 피조물도 당한 적이 없는 그런 심판을 통해서 죽고, 하나님의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으로, 생명의 능력으로 그 죽음을 정복하고 살리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인간의 몸이 신적 영광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 몸 안에 있는 어떤 내적인 가능성에서 그런 신적 영광에로 상승한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의 몸이 그 존재가 말살되다시피 할 정도로 죽고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났다는 것, 여기서 어떤 범신론적 신비주의적 사고는 끼어 들 자리가 없다. 인간 안에 어떤 신성이 내재하고 있어 그것이 싹을 틔워서 신적 영광에로 올리운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전적으로 흙에 속한 존재였고 그것이 철저한 죽음을 맛보고 이제 새로운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의 높임, 그리고 이에 따른 인간의 영화에 대해서 신화(deification)로 해석하는 것이 비판받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 신화의 논리는 피조물인 인간 안에 신적 씨앗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는 위험이 있고, 육체의 죽음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이 죽으심을 위함이라는 것, 이것이 부활의 영광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죄와 그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육체의 죽음 없이 그로 인한 철저한 육체의 폐기와 종말 없이 새창조는 나타나지 않고, 그래서 인간의 죄와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의 가르침을 약화시키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강조하고 인간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육체가 종말을 경험하지 않고(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심판의 의미에서) 새창조에 들어가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의 참여를 강조하는 자들은 설사 육체의 죽음을 말해도 그것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의 죽음과 연결해서가 아니라 신비주의적, 금욕주의적 자아부정의 의미로 해석하고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종교적, 신비주의적으로 왜곡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어야 그것이 철저한 육체의 죽음, 창조의 종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모든 육체부정은 육체부정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육체의 긍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오심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과정으로서 이해되고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죄에 대한 형벌리라는 소극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결국 육체가 아닌 영적 실재를 드러내는 의미를 지니게 되고 그 영광스런 변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할 때 그것은 단지 죄에 대한 구속에만 그 의미가 한정되고 영광스런 변화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죄와 사망에서의 구속을 위한 죽음이 결국 새창조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에의 참여를 위한 준비가 된 것이다.
7. 육체의 그리스도
7.1.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불연속성
그리스도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셨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아나셨다(고전 15:42-44). 그는 땅에 속한, 흙에 속한, 아담에 속한 자로서 죽고 하늘에 속한 자로서, 하늘에서 난 자로 살아나셨다(고전 15:47). 그리스도는 아담과 다르지만 또한 부활하신 상태와 육체의 상태가 다르다. 육체는 비하의 상태 낮은 몸이고 영광의 몸은 높아지신 몸이다. 하나는 땅에서 났고 하나는 하늘에서 났다. 둘다 인간이지만 그 근원을 달리하는 인간이다. 이것이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이의 불연속성이다. 하늘과 땅의 질적인 차이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상태를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는 인성이 계속되고 있으나 그것은 처음 땅에 계셨을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성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영광, 썩지 아니할 영광이 그 안에 그대로 나타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성이라는 것, 이것은 결코 아담의 인성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7.2.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연속성
그러나 또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 그의 인성과 이전 육체의 몸, 아담적인 인성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은 죽었던 몸이 살아난 것이다. 동일한 몸이 죽고 동일한 몸이 살아났다. 성육신하셔서 살다가 죽은 그 육체의 몸은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하늘에서 난 새로운 몸으로 그가 입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고 그 부활의 몸은 그가 마리아에게서 취하고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갈릴리에서 활동하시고 십자가에 죽은 그 몸이다. 이 두 몸 사이에 영광이 엄청난 차이가 나지만 동일성, 연속성이 있다. 만일 이 동일성, 연속성이 없다면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닐 것이다. 십자가에 죽어 장사된 그 시체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더 이상 그 시체가 없고 무덤에 비게 된 사실은 그 육체의 몸과 부활의 몸 사이에 동일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는 표현에서는 분명하다(15:42). 이 앞에 식물의 파종과 성장에 부활을 비교하고 있는데 씨가 죽고 다시 살아 새로운 형체를 얻는 것이 죽은 자의 부활이 유비될 수 있다고 한다(고전 15:35-37). 씨와 나무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그 형태가 그렇고 그 구성이 그렇다. 그러나 씨와 나무는 같은 것이다. 씨가 죽고 다시 살아 그 생명이 나무가 된 것이다. 콩에서 콩나무가 나고 팥에서 팥나무가 난다. 팥과 팥나무는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으로 살아난다.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그러하다 그 부활의 영광은 육체의 영광과는 다르다. 역시 예수라는 역사적 한 인물이 그 부활에서 나타난 것이지 별개의 사람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다.
7.3.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종말의 의미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육체의 죽음, 심판, 종말을 의미한다. 여기서 처음창조, 아담에 속한 몸이 사라져 없어진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몸으로 입혀진다.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더 이상 육체의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한 종말과 사라짐이다. 어떤 자연적인 죽음보다도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폐기와 종말이다. 그러나 이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져온 종말이 육체의 폐기에 그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것은 그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주어진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근본적인 육체의 종말이 왔지만 그러나 부활은 이 죽었던 몸을 다시 일으켰고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부활할 때 이 부활은 죽었던 그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십자가로 종말을 맞이했던 그 몸이 이제 새로운 생명을 입고 나타났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이 새로운 몸으로의 변화를 위한 것이다. 육체를 벗고 신령한 몸으로 입기 위해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죽음과 삶을 경험하는 주체는 동일하고 연속적이다. 씨가 심기우고 죽을 때 완전히 썩어 없어지나 거기부터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이 그렇게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죽은 예수가 살아난 그리스도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7.4.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조적 연속성과 차이
그런데 육체의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이에는 단지 주체가 동일하고 연속적인 것만은 아니다. 연속성은 그의 인간성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인간성, 아담의 몸으로 죽으셨고 살아나실 때 그 인간성,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즉 그 부활에 나타난 인간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그리고 지상에 사실 때 갖고 있었던 그 인간성, 그 몸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도 신체적인 구조가 동일하고 또 인간을 구성하는 지정의의 인격이 그대로 구비된 완전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갈릴리에서 활동하고 십자가에 죽은 그 그리스도의 몸과 인격적 특성과 동일하다. 그 동일한 구조의 몸으로서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하된 것이다. 변화된 것은 썩어질 몸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된 것이지 구조자체를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니다. 만일 구조자체가 바뀌었다면 그것은 인간의 몸이 아닐 것이다. 보통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 사건을 드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이 이전의 몸과 같은 구조와 기능을 갖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사람의 부활의 몸은 썩지 아니할 죽지 않을 몸이다, 여기서는 이미 죽음의 가능성마저 제거된 것이다. 아담의 타락이전의 몸은 아직 죽지 않았고 죽음의 씨가 들어와 있지 않지만 죽을 수 있는 몸이었고 또 그래서 죽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몸은 더 이상 죽을 수 없는 썩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몸이다(롬 6:9). 여기에 불연속성이 있다. 하늘에서 온 생명의 그 썩지 아니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썩지 아니할 몸이어도 역시 인간의 몸이고 그 인간의 몸은 죽음 이전의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기능을 하는 그런 동일한 인간의 몸이다. 보통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체의 부활(육체부활 표현은 정확하지 못하다)이라 할 때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성육신을 위해서 잠시 빌린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부활 후에도 역시 계속되는데, 그 양상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어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의 몸은 죄를 짓지 아니한 몸이지만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히 죄로부터 자유로운 몸이다. 물론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유혹을 받았고 따라서 죄를 지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죄를 지을 수 없는 몸이라면 그는 인간의 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 이후에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그런 인간으로서 살아나셨다. 이런 면에서 그의 썩지 아니할 몸으로의 변화를 말할 수 있다. 썩을 몸으로서의 육체는 죽을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육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되어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지배할 수 없는 그런 인간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인간으로서 그렇게 된 것이다. 죽음이나 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가 원래 하나님께 있는 것이나 새로운 인간으로서 그는 그런 존재의 특성을 갖게 되었다.
7.5. 창조의 회복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
죄와 죽음에서부터의 완전한 자유는 그가 아담의 몸과의 차이를 말해준다. 이전의 아담은 아직 죽음이 없고 죄가 없었지만 죄에서부터의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난 죄와 죽음에서의 자유는 전혀 죄와 죽음의 가능성이 없는 그런 자유이다,. 즉 아담과의 불연속성, 지상의 그리스도와의 불연속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동시에 아담에게 주어진 생명, 그 의의 회복이기도 하다, 아담은 처음에 죽음이 없는 자 죄가 없는 자였으나 그가 범죄하므로 죄와 죽음이 인간의 삶에 들어오게 되었고 창조의 선함과 아름다움, 그 영광을 상실하게 되었다. 죄와 죽음은 창조에 없었던, 창조 안으로 침입해 온 요소이다. 모든 사람이 이 죄와 죽음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리스도는 이 죄와 죽음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그가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지배, 권세를 깨뜨리시고 생명을 회복하셨다. 이 생명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생명인 동시에 또한 육체를 지배하는 죽음을 제거하고 몸을 다시 살리는, 이전의 창조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비로소 아담이 잃었던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은 이전 지상에서의 육체의 생명의 회복이며 살아남이며 다시 말해서 아담에게 있었던 타락 이전 창조의 인간의 완전성을 회복함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드러내신 몸은 아담의 몸과 다른 별개의 몸이 아니라 같은 몸으로 그 완전성을 온전히 회복하신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이 단지 아담의 처음창조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앞에서 이미 말 한대로 그의 몸은 썩어질 육의 몸이 아니고, 아담과 같은 차원의 몸이 아니다.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으로 높여진 몸이고 하늘에서 난 몸이다. 그러나 이 새창조의 시작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은 처음창조 받은 아담과 별개의 몸이 아니라 그것은 온전하게 회복시킨, 타락으로 인해 들어온 이질적 요소인 죄와 죽음을 제거하고 처음창조에 있었던 영광을 다시 찾은 그런 몸이다. 처음창조에 죄가 들어오고 죽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더 이상 가치를 지닐 수 없기에 이것을 다 없애버리고 하늘에서 별개의 몸을 가져 온 것이 아니라 그 죄와 죽음 아래 종노릇하던 몸(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었으나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심)을 그 죽음과 죄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살려내고 그것을 하늘의 영광에로 올리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아담이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구원이 나타난다. 구원으로서의 새창조는 처음창조를 넘어서면서 또한 처음창조의 회복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담에게 없었던 하늘에 속한 새창조의 요소를 지니면서 또한 아담의 완전성의 온전한 회복이다.
7.6. 육체의 인성이 지닌 종말론의 의미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처음창조함을 받은 아담과 연속적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바로 아담의 몸을 입고 오심이고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의 상태를 온전히 회복하신 것이다. 그의 죽음에서부터 벗어나서 생명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살아 계실 때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그 때의 완전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가 부활 이전과 다른 것은 육체의 불완전함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완전성에 있어서, 선한 것은 그대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어떤 완전성도 폐기되는 것이 없고 온전히 회복되어지고 더욱더 완전하게 실현된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육체의 그리스도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이땅에 인성으로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은 그의 부활을 통해 완벽하게 실현된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의미있다.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상태는 부활의 영광 중에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씨앗으로서 장차 나타날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그의 사랑, 그의 능력, 그의 정의, 그의 지혜 등, 우리가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는 그 뛰어난 인간성은 부활의 그리스도의 인성과 다른 것이 아니고 부활의 그리스도에게서 그것이 온전히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육체를 따라 아는 그리스도(고후 5:16)와 영을 따라 아는 그리스도 사이에 분리는 없다. 물론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 그 육체로 나타났기에 그를 있는 그대로 보면 결코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구자유주의)이 그리스도를 이해함에 있어 역사적 예수로만 이해하려 할 때 역사적 예수도 바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그의 십자가 부활에서 그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영을 따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 속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해야 바르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와 다른 분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는 가난한 자와 함께 식사하시고 병자들을 고치고 분노에 싸우는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전 인간적인 면모가 없이 영광 중에 계시는 신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이시고 부활하셔서 영광의 주로 올리우셨으나 지상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셨고 불의와 싸우셨던 것과 같은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 계신 인성의 그리스도이시고 복음서에서 보는 인성은 그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을 따라 이해하는 것은 신성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고 그의 인성, 온전한 인성, 인간성이 가장 완전하게 실현된 인성의 측면에서 이해함이요, 따라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우리와 같은 인성, 육체의 인성을 입으신 그를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 단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능력 권세만이 연속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땅에 계실 때에 보여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가 부활 속에서 더 분명하게 계시된 것은 분명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있어서 연속성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육체의 인성, 그의 지상에서의 삶과 인격, 모든 인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부활의 인성을 우리가 분명히 보지 못하지만 지금 그리스도가 어떤 인성으로 계시는지 복음서 속에서의 그의 삶과 행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단지 지상에 계셨을 때는 그가 우리와 같이 배고프고 피곤하고 연약하여 고통당하는 그런 인성이셨지만 이제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하여 그런 모든 죽음의 흔적을, 고통과 부정적인 요소들을 다 극복하고 인성의 모든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몰트만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이런 인성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그의 신학이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 점에서는 타당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예수 그리스도의 길, 대한기독교 출판사).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단지 신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점에서만 지상에서의 상태와 연속을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인성이 그대로 계속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7.7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탐구의 의의와 문제점
자유주의 신학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특별히 역사적 예수에게서 그리스도의 본래성을 찾으려 했다는 사실을 앞서 살펴보았다.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신성,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 그리고 그의 초자연적 구원에 있어서의 구원자로서의 존재가 강조되었는데, 18, 19세기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그의 역사성이 강조되었다. 그의 신성에 관한 성경의 진술은 신화로 치부되고 인간예수, 사람의 아들 예수만이 본질적인 예수로 이해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물론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 그리고 그의 초자연적 기원, 선재를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이미 벗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자유주의 신학의 공헌은 그리스도의 인간성, 그의 육체로의 존재, 역사성을 바라보게 한 점에 있다. 이것은 단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성경에 나온 사실을 다시 주목하게 한 점에서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강조에 대해서도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하나님으로서의 그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역시 대속적인 구원 사역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오히려 그리스도의 인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의미있는 것이 된다. 십자가 이전 공관복음의 그리스도는 이전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역사성,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만 이해되고 사실 공관복음이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 이해를 위해 별로 중요성을 갖고 있지 못했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성의 연속성에서 볼 때 공관복음의 역사적 예수는 구속사적, 종말론적 중요성을 갖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바로 역사적 예수의 완성이기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를 떠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질 수 없다.
자유주의 신학의 잘못은 역사적 예수와 우리 인간, 역사적인 우리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을 찾는다는 것에 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하나의 모범의 의미를 벗어나지 못한다. 스승, 뛰어난 인간의 모범일 뿐이다. 그의 인성에 우리는 감화를 받고 그처럼 되고자 하는 그런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이 공관복음서를 읽는 방식이었고 거기서 만들어진 것이 역사적 예수 상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는 이런 의미로 우리에게 직접 올 수 없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종말론적 구원의 능력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써 종말론적 구원을 성취하시고 그 구원의 효능을 우리에게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과 새창조를 가져오는 구원자가 되신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의 위대한 인격이나 행적에서 감화를 받고 그를 따르려 하는 것은 복음 자체가 요구하는 방향에 부합하지 않는다. 성경이 그리스도를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제공할 때도 십자가와 부활을 거치지 않고 직접 역사적 예수에게 이르는 길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자 함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지닌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자유주의자들처럼 그리스도의 역사성에만 주목하다든지, 혹은 복음서에 나오는 기적을 베푸시는 능력에 주목한다든지 하는 것은 종말론적 구원을 가져오시는 그리스도를 간과하거나 그 의미를 축소시키게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아니라 그의 역사적인 삶도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전통적으로 서신서에서 제공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복음서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서로 하나되지 못한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리스도의 부활이지만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도 분명히 드러나지 못하고 또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생이 우리를 위해 주는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로 드러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창조의 종말과 새창조의 시작으로 이해하고 거기서 종말론적 구원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할 때 그리스도의 육체의 삶은 새창조 이전의 창조로서 이해되고, 그 창조로서 부활의 빛 아래서 종말론적 의미를 얻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새창조는 창조의 종말이며 완성이기에, 그의 육체의 종말이며 완성이기에, 부활은 역사적 삶이 가진 그 의미와 한계를 보여주고 또한 그 역사적 삶은 부활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 드러내준다. 이에 십자가와 부활이 왔기 때문에 그것에 이르는 준비과정으로서의 역사적 예수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은 십자가와 부활이 지니는 추상화, 영성화의 위험을 막아주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구체적 역사적 삶을 위한 의미를 드러내 준다.
7.8 하나님나라의 현재를 그리스도 지상사역에서 찾을 수 있는가?
공관복음서를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활동하신 것이기에 여기에 이미 새창조의 실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아직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종말론적 구원이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종말론적 구원이 계시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처음창조의 종말이고 그의 부활이 새창조이기에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셨을 때는 아직 새창조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에서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하나님이 계시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지만(비록 육체로 희미하게나마) 그의 종말론적 구원사역과 그로 인한 새창조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사실상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 속에서 아직 미래의 일로 남아 있다. 물론 요즘 신약학에서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 이미 하나님나라가 현재하고 있고 또한 아직 아니의 미완료로 미래의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새창조의 의미에서 즉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이 피조물 가운데 나타난다는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 하나님 나라는 아직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을 하나님 나라라 할 수 있으나(autobasileia) 하나님 나라가 피조물 가운데 드러나고 있지 못했기에 즉 여전히 사람들에게 새창조가 나타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 나라는 아직 아니의 현실이다. 귀신을 쫓아내고 즉 병든 자를 고치고 천국이 선포되는 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 그것의 표징을 보여주나 아직 하나님나라의 실재는 감추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의 새로운 창조사역에서 비로소 나타난 것이라 보아야 한다. 따라서 공관서에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여 있다는 것은 너무 문자적으로 강조하여 이미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심에서 즉 역사적 예수에게서 새창조와 하나님 나라를 찾으려는 많은 시도(개혁신학자들을 비롯한 복음주의자들 역시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를 역사적인 차원, ‘육체의 차원’에로 떨어뜨리는 문제가 있다. 전통적으로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서신서를 통해 본 교리적인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신성의 존재, 대속적 구원자의 상에 가리워져 그 본래적인 면모를 가리우게 되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복음서의 역사적 예수상을 본래적인 핵심으로 삼고 서신서의 케리그마를 비신신화시키고자 했다. 이에 대해 모든의 복음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그대로 따르면서 그러나 전통적인 신학과는 달리 복음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미있게 다룬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모든 초점이 맞추었던 것을 이제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으로 옮겨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미 종말의 시작이라 볼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해서 이뤄지는 이전과 이후의 구분을 결코 폐기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는 아무리 그리스도의 사역이라 해도 새창조가 출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직 육체로 계셨고, 처음창조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까지는 새창조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새창조란 단순히 깨어진 창조를 회복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렇게 보면 이미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서 그가 병을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건강케 한 것에서 창조의 회복이 나타났고 그런 의미에서 새창조가 시작되었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새창조는 이런 정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것, 즉 하늘에 속한 영광이 피조물 가운데 나타나고 썩어질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사건이 새창조이다. 물론 새창조 안에 창조의 회복이 포괄되지만 창조의 회복이 새창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속죄의 구원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서의 구원, 즉 종말론적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사역에서 행하신 구원 행위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서의 구원 사역은 장차 십자가와 부활로 드러낸 종말론적 구원을 예표하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종말론적 구원은 이 지상의 사역에 나타난 구원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 있다. 공관복음서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 자체 안에서 종말론적 구원이 나타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종말론적 구원의 빛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이 이것과 깊게 관련되고 있고 또 이 지상사역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실재를 간접적으로 비춰주기 때문에 그러하다. 공관복음에서,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에서 종말론적인 구원, 새창조를 미리 찾는 것은 구속사의 과정의 분명한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그렇게 할 때 구원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다. 육체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의미있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처럼 그의 인간성이 우리에게 본이 되기에 그런 것은 아니고 또 어떤 복음주의자들처럼 이미 그의 지상사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나타내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 새창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타난다. 이점에서 전통적인 기독론, 구원론의 방향이 옳다. 그러나 전통적인 입장은 역사적 예수의 종말론적 의미를 제대로 숙고하여 교의 안에 수용하지 못하고 인성,신성의 구분 아래서 이해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이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타났지만 그것은 이미 육체의 사역에서 준비되었고, 또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의 구체적 양상은 지상의 사역에서 직접적인 것은 아니나 간접적으로 알리워졌다. 서신서만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이 영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사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역사적 구체적 현실의 구원은 단지 육체적인 것으로 평가절하되기 쉽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은 이미 역사상에 나타난 구원을 포괄한다. 즉 그리스도안의 새창조는 창조의 회복, 질병의 자유, 가난한 자의 회복 등을 포함한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의 인성이 육체의 인성과 연속적이고 그것을 회복하고 완성한다는 원리를 적용하여 지상사역을 평가할 수 있다.
강의안 -
서충원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 목 차 -
1. 서론
1. 1. 기독론의 관점
1. 2. 기독론의 의의
2.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의 성육신
2. 1. 계시로서의 성육신의 의미
2. 2. 그리스고 계시의 유일무이성
2. 3. 성육신에서의 계시의 한계
2. 4. 상승기독론 비판을 위한 교리사 고찰(종교개혁까지의 기독론)
2. 5.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탐구
2. 6. 슐라이에르마허의 기독론(상승 기독론)
2. 7. 바르트의 기독론
2. 8. 상승 기독론 비판
3. 그리스도의 부활과 계시
3. 1.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서의 계시의 한계
3. 2. 계시로서의 부활
3. 3. 부활과 기독론의 상관성
3. 4. 부활의 계시와 선재
3. 5. 부활의 계시와 하나님의 아들되심
3. 6.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의 의의
3. 7. 부활과 삼위일체 교리의 상관성
3. 8.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
3. 9.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
4. 종말론적 계시로서의 그리스도의 계시
4. 1. 계시의 의미
4. 2. 그리스도 이전의 계시와 그리스도 계시와의 상관성
4. 3. 왜 그리스도 계시가 유일무이한가?
4. 4. 구약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부활의 계시와의 차이
4. 5. 종말 예언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 계시
4. 6. 창조의 종말을 가져오는 그리스도 계시.
5. 그리스도의 부활과 새창조
5. 1.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 지닌 새창조로서의 의미
5. 2. 신성의 충만이 피조물로서의 몸에 나타남
5. 3. 부활의 구원론적 의미
5. 4.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
5. 5. 부활 계시의 이중적 국면
6.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창조의 종말
6. 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종말론적 이해
6. 2. 신화(deification)에 대한 비판
7. 육체의 그리스도
7. 1.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불연속성
7. 2.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연속성
7. 3.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종말의 의미
7. 4.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조적 연속성과 차이
7. 5. 창조의 회복으로서의 그리스도 부활
7. 6. 육체의 인성이 지닌 종말론적 의미
7. 7.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탐구의 의의와 문제점
7. 8.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서 찾을 수 있는가?
1. 서 론
1.1 기독론의 성격
기독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구원론적인 질문과 상관될 때 추상적 사변을 벗어날 수 있다. 복음이 제시하는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개인으로서가 아니고 피조물이요, 죄인인 인간을 위해 그가 행하신 일이 무엇이고 그 결과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기독론의 초점이다. 종교개혁은 그리스도를 신인(神人)양성이라는 인격의 의미에서 이해해온 전통적인 강조점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했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를 원한(pro me)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면으로 보자면 하나님 중심의 그리스도 이해를 인간 중심으로 바꾼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성경 자체가 그리스도를 말씀할 때 그리스도 자신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신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 주, 인자 등등 그의 명칭이나 신분 역시 구원과 연관해서 그가 무슨 일을 행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의미를 무시하고서 그 자체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것은 성경의 노선과 그리 부합되지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넘어서 하나님 자신으로 선재하시며 그 자체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성경의 관심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에 집중되어 있다.
구원의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해야 한다. 종교개혁에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회복한 것은 단지 구원론에 있어서의 성경적 진리의 회복만이 아니고, 기독론에 있어서도 성경적 관점을 회복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신칭의의 교훈이 기초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이기에 그렇다. 그리스도는 그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율법의 행위로는 이룰 수도 없는 놀라운 구원을 가져오셨다는 것은 구원 진리의 기초이다. 따라서 이것을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가져온 구원에 동참한다는 구원론이 성립하게 된다. 기독론에서 다루는 그리스도는 특별히 그의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구원을 성취하신 분으로 구원사역에 있어서 집중 조명되고 다른 측면은 이와 연관해서 다루어지는 것이 성경적 진리의 초점을 놓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것은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을 따라 이해해야 한다. 복음을 따른다 함은 단지 복음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로써 그리스도에 관한 명제를 구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복음의 메시지의 기본적 중심을 따라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복음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죄인의 구원을 위해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을 이루신 분이다. 그런데 그의 구원은 단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종말론적 구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구원을 가져 오셨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종말론적 구원이 나타났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창조 이후로 역사 속에서, 특히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구원을 베풀어 오셨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제까지 역사 속에서 나타난 구원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구원, 즉 종말론적 구원이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도들의 복음 선포의 중심이고, 특별히 바울의 복음의 중심이다.
1.2 기독론의 의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이 복음의 핵심이다. 조직신학은 이 그리스도 안의 구원에 대한 체계적인 진술이다. 조직신학은 서론, 신론에서부터 시작되지 않고 구원론, 구원론의 기초로서의 기독론, 기독-구원론에 근거하여 교회론, 종말론, 신론, 인간론을 다루게 된다. 먼저 신론을 다루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구원의 빛과 그 전망 아래서 신론을 전개한다. 기독론․구원론은 모든 신학 분야에 새로운 정초를 가져다 준다.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는 사실은 인간론을 밝혀준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원의 빛에서 인간의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가 드러난다. 사실상 인간론은 구원론을 전제로 하고 이해할 때 비로소 기독교 신학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신학에 대한 기독론적 정초가 필요하다. 실천신학․교회사․구약학 같은 경우에 이 기독론적 정초가 분명치 못할 때 기독교 신학의 특징을 상실할 수 있다. TEXT에 대한 충실, 본문의 왜곡에 대한 경계가 기독론적인 해석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서철원 교수가 지적했듯이 구약해석은 기독론적이어야 한다. 문법적, 역사적 해석은 신학적, 복음적 해석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한 개인이 아니라 구원자이며, 구원자란 모든 영역에 대한 새로운 전환과 새로운 지평을 가져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기독론은 단지 그리스도가 누구시냐, 구원이 무엇이냐를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고 모든 신학을 결정짓고 그 기초를 제공해 준다. 그리스도 이해는 기독론의 문제만이 아니라 조직신학, 모든 신학, 신앙의 실천의 기초이다.
2.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성육신
2.1. 계시로서의 성육신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창조를 가져오시기 위해서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새 창조, 종말론적 구원은 이전 것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이 새로움은 어떤 새로움인가?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시기 전에 계셨고 그것도 하늘에 계셨다. 그는 말씀이며(요1:1) 그가 세계를 창조하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갈4:4).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고(요3:13) 위로부터 오시는 분이다(요3:31). 그가 낳기 이전부터 계셨고 하늘에서, 위에서, 보내심을 받아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물론 그의 선재와 하나님 되심,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들에서 단지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읽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것, 그가 보냄을 받았다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늘에 속한 것을 말씀하시고, 하늘에 속한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그가 오신 것은 하늘에 속한 것을 이 땅에 속한 자들에게 가져다 주시기 위함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오심이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늘에 속한 것의 계시, 하나님 자신의 계시라는데 가장 근본적인 의미가 놓여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것이 나타났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나타났다(요1:14).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요1:18). 하나님이 오셨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사실상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다. 땅에 있는 인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알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이 주어져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광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기도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 전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새로운 것은 이 땅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이 땅에는 없는 것, 하늘에만 있는 것,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비로소 처음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이 열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늘에 속한 영광, 하나님의 썩지 아니 할 영광이 계시되고 그것을 피조물들이 보고 경배하며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 여기에 비로소 그리스도가 오심의 새로움이 있다. 그래서 그를 빛으로 표현한다. 그는 하늘에 속한 빛이다. 그것은 창조의 빛이 아닌 창조주 자신의 빛(요1:4 ; 마4:16 참조)이다.
2.2. 그리스도의 계시의 유일무이성
그리스도의 오심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하늘과 땅의 질적 차이, 하나님과 세계의 근본적 구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피조적 한계를 지닌다. 인간은 하나님을 죄 때문만이 아니라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요3:5). 육으로서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볼 수도 없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에는 하나님을 보고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 이전에도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안 적이 있다고들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에 관한 완전한 신지식이 있었는데 그가 타락했기 때문에 그것을 상실했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에 관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는다. 그는 흙에 속한 자로서 하늘에 속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전15:44 이하). 또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 영광을 계시하셨고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등 선지자들에게 그 영광을 계시하셨고 또 그의 뜻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가 있었던 것으로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간접적으로 계시된 것이다. 모세가 본 하나님의 영광은 없어질 것이었다(고후3:7). 구약 선지자들의 vision이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하지 않다. 구약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과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 사이에 구속사적인 차이를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된 것은 비로소 처음 있는 일이고, 그 이전의 영광은 이것과 비교할 때 그림자의 의미를 지닌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聖肉身)은 이런 의미에서 역사상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고, 이전의 있던 것과 연속선상에 놓을 수 없다. 이전에 나타나지 않던 하나님의 영광,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또 하늘의 일을 알리신 것이다. 성육신의 결정적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있다. 요한복음 1장의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우선 그는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이신 그가 자신을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성육신 이전의 하나님의 계시의 사실들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의미를 약화시키거나, 그 유일성을 축소시켜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자기 계시라는 사실이 결정으로 중요하다.
2.3. 성육신에서의 계시의 한계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다. 그는 평범한 인간이고, 나사렛 사람이고, 목수의 아들이다.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아직까지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오히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비해 작아 보이고,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오셨다는 것,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알 수 없는 비밀이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의 주장에 대해 그들은 걸려 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늘에서 오셨다는 것, 그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 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처음으로 계시되었다는 것이 복음서의 주장이고, 요한복음의 주장이다. 육신으로 오신 그에게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사실상 육신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육체를 따라’ 그를 볼 때(고후5:16) 그는 인간일 뿐이고, 단지 뛰어난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주장을 신성모독이라 여겼고, 그와 같은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다’(요1:14).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였고, 그에게서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다.
2.4. 상승 기독론 비판을 위한 교리사 고찰 (종교개혁까지의 기독론)
상승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출발하지 않고, 즉 그를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연적 출생에서 시작한 인간으로 이해하고 거기서부터 그가 구원자로 성장했다고 본다. 이런 상승 기독론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이다. 우리가 상승 기독론을 이해하기 위해 기독론의 역사를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교리사를 볼 때, 처음의 신학적인 이슈는 기독론의 문제였다. 삼위일체(三位一體)논쟁이 신학사에서 처음 등장한 가장 중요한 논쟁인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냐, 피조물이냐에 대한 논쟁, 즉 기독론에 대한 논쟁이다. 삼위일체 교의를 통해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한 본질임이, 즉 그가 하나님이심이 증명됨으로 그의 신성이 확고하게 교회의 신앙 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온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통해 기독론의 기초가 분명히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교회의 출발로부터 그리스도가 누구신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로 등장했다. 그리스도를 누구로 인정하는냐 하는 것이 기독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시금석이기에 그러하다. 중세 기간 중에는 특별히 기독론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없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기독론에 있어서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새로운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하려 했는데 그것은 구원론의 맥락에서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본질에 관한 질문보다는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어떻게 구원을 베푸셨는가 하는 구원론적 질문 안에서 그리스도를 접근했다. 바로 그리스도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자, 즉 구원자로 제시했다. 이것은 복음의 관심 방향에 부합하며, 적합한 그리스도의 이해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제까지 삼위일체론 이나 양성론은 이단들의 잘못된 기독론에 대한 적절한 방어였으나, 복음의 내용을 드러내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는 복음이 제시하는 그리스도의 상(像)에 부합하게 그리스도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직분, 삼중직에 대한 논의 역시 구원론적인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2.5.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탐구
초기 기독교나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의 신성, 신적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물론 인성을 갖고 있었고 또 그가 구속 사역을 이루신 것도 인성을 입으신 성육신이 아니라면 안되는 것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는 다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써 이해되었고, 이것은 그의 신인(神人)양성 중 신성에 대한 강조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전통에 맞서 새로운 기독론이 출현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우리와 같은 역사적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개념적인 본질로서의 인간의 특성을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반면, 새로운 기독론은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인간으로서 그의 삶과 사상 등을 역사적 관심으로 찾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그리스도의 이해는 18세기 계몽주의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계몽주의는 모든 것을 이성의 판단 아래 두고 이성에 의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것은 거부하는 합리주의를 표방한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요소, 종교적인 요소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거부하였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모든 초자연적 기적과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가르침을 모두 부정하였다. 계몽주의적 이성을 갖고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경을 더 이상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의 책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역사적 문헌으로 이해하고 그 안에 기록된 모든 초자연적인 요소는 신화로 간주하여 모두 제거하고, 오직 역사적인 것만을 인정하고자 한다. 이렇게 성경을 볼 때, 대부분 서신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에 관한 복음은 더 이상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역사적 측면에서 기록한 복음서만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복음서 안에서도 기적과 같은 모든 초자연적인 요소는 신화와 만들어낸 이야기로 제거되었다. 이런 성경 연구로부터 그리스도는 더 이상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구원자가 아니고 갈릴리에서 활동한 한 인간일 뿐이다. 전통적인 교의에서 제시해온 그리스도는 신성에 강조를 두었다면, 이제 성경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이들은 이 신성에 대한 기록을 신화로 거부하고 오직 인간으로만 이해했다. 역사비평학을 통한 그리스도 이해는 그리스도를 주로 종교적으로 뛰어나고,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물, 그리고 위대한 도덕적 원리를 제시한 교사로 제시했다. 학자들이 복음서 연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재구성했는데 사실상 이렇게 재구성 된 그리스도의 모습은 당시의 세계관 속에서 이상화된 인간상을 그리스도에게서 투사한 것임이 결국 드러나게 되었다. 이것을 밝힌 것은 슈바이쩌이다. 그는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것은 복음서의 예수상이 아니라 당시 인간상의 투사로 비판하면서 그리스도는 종교적, 도덕적 위인이 아니라 종말의 선포자로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종결짓게 만든 획기적인 이해로 복음서의 그리스도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잘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역시 그리스도를 인간으로만 이해했다.
2.6. 슐라이에르마허의 기독론 (상승 기독론)
이런 신약학의 방법론과 결론을 수용하면서 그것을 조직신학적으로 제시한 것이 슐라이에르마허이다. 그는 18, 19세기 역사비판학적인 그리스도 이해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거기에 신학적인 요소를 부가하였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인간으로 우리와 다름없는 자연적 인간이다. 즉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것을 갖고 있었다. 바로 남다른 신의식이다. 그가 보여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전적인 순종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하나인 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는 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가 가진 신의식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가능케 했고 이것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칭하게 했으며, 이후에 그를 다른 사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도 그는 여전히 인간으로써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인간으로써 모든 인간의 원형이 된다. 그의 신의식과 거기에서 비롯된 뛰어난 도덕성은 모든 사람이 지향할 목표이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구원과 영생에 대한 이해 역시 전통적인 이해처럼 초자연적인 생명이 부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신의식이 성장해서 이 땅에서 보다 고차원적인 인간성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상승 기독론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남과 다른 종교성으로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 오른 자이다.
2.7. 바르트의 기독론
바르트는 이런 슐라이에르마허를 비롯한 17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한 것으로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에게 성경은 역사책이거나 종교 도덕문헌을 넘어서 하나님의 계시이다. 종교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성경으로부터 이해할 때 그리스도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는 구원을 위해서 성육신하신 자이다. 따라서 그는 슐라이에르마허와 같이 그리스도를 단지 인간으로, 뛰어난 종교적 인간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과거 전통적인 교의에서처럼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또 그 안에서의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것이 그를 신정통주의로 부르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기독론의 유형에서 본다면 상승 기독론이 아니라 하강 기독론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즉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전통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과연 그리스도를 하늘에 선재해 계시다가 이 땅에 구원을 위해 성육신한 것으로 믿고 고백하는가? 이 사실에 있어서 전통적 교의를 그대로 수용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 대신에 ‘계시’를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인간으로서의 종교적의식 대신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은 절대타자(絶對他者)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그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기 때문에 그 계시가 인간에게 다 이해될 수 없고 여전히 그는 비밀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일하게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그가 인정하지만 그 계시가 우리에게, 성경을 믿는 믿음으로도 그 실체에 있어서는 다 알려질 수 없다고 주장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은 여전히 암호와 비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물자체는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칸트의 경고에 그도 다른 현대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충실히 따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했고 성육신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알 수 없는 자이고 그리스도가 선재한 하늘은 땅에 있는 인간을 넘어선 영역이어서 전통적인 기독론이 이해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오셨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역사비판학에서 보는 대로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보면서(인간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다), 다른 그리스도에 관한 신학적인 진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타자로 인간이 될 수 없고 우리에게 계시될 수 없다는 전제 아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없고 단지 초월자 하나님과 역사적 예수만이 남을 뿐이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은 그에게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가 전통적인 교의를 다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을 보고 그를 전통주의 분류시키고자 하는 것은 그를 오해하는 것이고, 이것은 위험하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치 않고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부정하고 있다.
2.8. 상승 기독론 비판
밑으로부터 위로의 기독론, 상승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그의 보내심을 인정치 않고 역사적 예수로부터 출발해서 그리스도의 의미(구원을 위한 의미)를 찾고자 한다. 인간의 합리적 판단에 근거해서 그의 선재와 성육신은 단지 그의 인간성의 탁월성에 대한 신학적 해석으로 돌리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심과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인정치 못한다. 그의 선재와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의 성육신의 의미를 인정치 않을 때 그리스도의 계시와 구원의 의미는 상대화 될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많은 사람 중에 뛰어난 종교성을 가진 위인, 성자이거나 기껏해야 최고의 인간일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 없이 기독교는 유일한 계시와 구원의 종교일 수 없다. 그런데 그가 이렇지 않고 그가, 즉 육체로 볼 때 전혀 다른 사람과 다름없는 그가 사실상 단순한 육체가 아니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님이 영광이 유일하게 그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하고 있고, 여기에서 세계사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전적인 유일성, 새로움이 있다는 말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상승 기독론의 문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린다는데 첫 번째 문제가 있다. 이것은 양자 기독론의 고대 이단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 볼 때 인간이 변화되어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종말론적 구원을 가져올 자로 전혀 적합하지 못하다. 이에 따른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계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신지식을 인정치 않음이다. 이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전혀 초월적인 것,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내재적 가능성에 속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안의 유일한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인간은 그의 영적 존재적 특성으로 신과의 교통 가능성이 있고, 신의식이 있어 굳이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계시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신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가 간과되고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무한한 차이를 깨뜨리고 육체로 오셔서 그 영광을 계시하신 그리스도의 계시적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안에서만 하늘의 하나님이 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인간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을 알리셨다는 것을 말씀한다.
3. 그리스도의 부활과 계시
3.1.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에서의 계시의 한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자로 이해된다. 하나님은 그의 보이지 않는 존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이미 그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것을 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속에서 우리는 그의 신성, 신성의 계시를 보게 된다. 그의 말씀과 사역에 나타난 권위와 능력, 그의 인격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자로써 그를 보여준다.
그러나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 육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서는 아직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그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아직 가리워져있고, 단지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따른 신앙으로 보지 못하고 고백할 뿐이다(마16:16 이하). 그의 그리스도되심은 아직 비밀에 속한 것이다(메시아 비밀). 그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 오셨으나 사람들은 그를 영접치 않는다(요1:10,11). 그 이유는 영접치 않는 사람 속에 생명이 없음도 문제이나 아직까지 육체 안의 그리스도에게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 있지 않은데도 원인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인지, 그는 단지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그의 육체 속에서는 분명히 볼 수 없다.
3.2. 계시로서의 부활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온 자인지 분명히 드러나게 된 것은 그의 부활하심에서이다. 그의 부활의 영광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광이다. 그의 부활에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여기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닌 하늘에 속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고전15:42이하에 육체의 생명과 부활의 생명을 대조시키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썩을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적 생명으로의 부활이며, 이는 흙에 속한 아담, 흙으로 지음 받아 생령(living soul)이된 아담과 같은 존재가 아닌 하늘에 속한 존재의 나타남이다(고전 15:45-47).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땅에 새로운 차원을 계시한 것이다. 즉 흙에 속한, 땅에 속한, 창조에 속한(히9:11) 사람들에게 하늘에 속한, 창조에 속하지 않은 새로운 차원을 보여준 것이다. 부활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계시로, 하늘에 속한 것의 계시로 이해하는 것은 그 중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도 그가 비록 종의 형체를 입고 계셨지만(빌2:7)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는 그가 성육신 이전의 영광은 충분히 드러내신 것이 아니다(요17:5). 계시되었으나 아직은 육체라는 한계 안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의 부활하심에서 남김없이 그 영광이 드러났다. 이 부활하심에서 그가 종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에로 올리운 것은 다시 성육신 이전의 선재 상태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 선재와 연속선상에 있지만 그와 다른 것으로 선재 때와는 달리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속을 이루시고 다시 원래의 하나님 자리로 돌아간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은 오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육신과 연속선상에 있다. 성육신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시작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것의 객관적 성취이다. 성육신에서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온전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하나님 되심의 증거만이 아니고 그 하나님의 영광이신 분, 하늘에 속한 분임이 피조물된 우리에게 계시된다는데 결정적 의미가 있다. 그 영광은 그야말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이다(롬 1:23). 그것은 땅에 속한, 육체에 속한 인간이 볼 수 없는 그런 차원에 있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하늘에 속한 것, 썩지 아니할 것, 아담은 알 수 없는 것을 전적으로 새로이 계시하셨다.
3.3 부활과 기독론의 상관성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고백, 기독론적 진술들은 다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하고 특별히 기독론적 진술은 부활에 기초한다.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 주 등 모든 진술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고 그에게서 이 땅에서는 보지 못한,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영광을 체험하면서 성립되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후4:6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다메섹도상에서 만난 경험에 관계해서 이해할 수 있다(김세윤, 바울복음의 기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것은 없어질 피조물의 영광이 아니라 없어지지 아니할 영광이다(고후3:11).
3.4. 부활의 계시와 선재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것은 피조물의 썩어질 영광이 아니라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 하늘에 속한 영광이 나타나고 보게되었다 이 나타난 것, 그의 영광스런 모습에서 그가 누구신가 하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그의 영광이 하늘에 속한 것이라면 즉,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는 피조물과 다르다는 것, 그는 하늘에 속한 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신 자이다. 그의 영광은 결코 땅에서 난 것과 혼동될 수도 비교될 수도 없는 그런 하늘에 속한 것이다. 여기서 그 영광을 지닌 자는 하늘에서 난 자, 하늘에 속한 자, 하늘에서 온 자임이 나타나게 된다. 즉, 그의 부활의 영광의 경험은 그의 근원을, 그의 본질적 존재를 드러내 준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선재를 증거한다(빌2:5이하; 갈4:4; 요1:15; 요3:13,31)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다(요1:1)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게 되었는가? 물론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그의 선재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세례요한이 계시를 통해 알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가 선재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지 못했고 단지 하나님의 계시로 그 사실만을 믿었을 뿐이고 그는 그의 영광스런 형상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서 하늘로부터 온 그 영광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영광을 본 자는 하늘에 속한 영광을 보게 되고 여기에서 그가 하늘에서 온 자임을, 그가 육체를 입고 오기 전부터 하나님의 영광 속에 계신 자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사도들이 선재를 말씀할 때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존재에 있어서는 선재가 앞서나 인식에 있어서는 부활을 통해 선재로 나아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선재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동일하기에 그러하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선재에 관한 기독론적 고백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체험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써 태어나 부활에 이른 것이라고 보는 양자론적 기독론의 입장에서 선재의 사실을 부활로부터 나온 신화적 진술로 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선재하셨고 그가 보내심을 받아 성육신 하셨고 다시 올리우셨다. 그러나 선재의 사실을 아는 것은 부활하심에서라고 보아야 한다. 이제 선재에 대한 이해는 단지 믿음의 고백만이 아니고 부활의 영광에서 보여지는 계시이고 부활을 봄으로써 선재를 확신있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선재와 부활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부활은 선재로의 복귀가 아니다. 부활은 선재 당시에 나타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영광, 썩지 아니할 하늘에 속한 영광의 계시이다.
3.5. 부활의 계시와 하나님의 아들되심
부활은 그의 하늘로부터 오심, 그의 선재를 증명할 뿐 아니라 그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한다. 그의 부활의 영광은 바로 그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난 독생하신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요1:18). 그의 얼굴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다(고후4:6) 그것은 천사들의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다(히1장). 모든 피조물은 다 썩어질 것이나 그는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다(히 1:10-12). 이것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된 것이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것(롬1:4)에서 부활의 의미가 드러난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육체로 계실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영원 전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요1:18; 갈4:4). 그러나 선재 당시는 물론이고 육체로 오셔서 그 영광을 계시할 때에도 그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분명히 보여주지 않았다. 그의 육체의 형상은 종의 형상으로 그 종의 형상을 하나님의 형상과 동일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부활하심으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고 알게 된 것이다. 그가 부활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승귀(昇貴)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오류이다. 그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그것이 감추었던 비밀이였는데 이제 그의 부활하심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의 고백은 다 부활에 기초하는 것이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부활 없이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됨은 추상적이다. 물론 그의 성육신에서 이미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나타났다(요1:14) 그러나 부활에서 온전히 남김없이 이 사실이 계시되었다.
3.6.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서 그의 선재를 그의 신성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이라면 보이지 않고 썩지 않는 그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되는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단지 그분 자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계시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결정적인 의미이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다(딤전1:17; 딤전6:16).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으로 아버지를 계시하셨다. 이것을 골1:15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형상이란 그것이 실체를 보여주어서 그것을 보면 실체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써 하나님 자신을 보여 줌을 의미한다. 요14:10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는 것이 바로 형상의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조금도 남김없이 온전히 나타나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할 수 있는가 그가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하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을 조금도 다르지 않게, 유사한 것이 아니라 똑같게 나타내 보이신다. 그가 하나님이 아닌 자로 하나님을 계시하신다면 그를 보고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본 자가 곧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다 나타내실 수 있고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3.7. 부활과 삼위일체 교리의 상관성
삼위일체 진리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삼위일체의 일체의 교리의 주된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것이다. 왜 이것이 중요한가? 우선 그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에게서 하나님이 온전히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계시로서의 그리스도를 넘어서 계실 수 밖에 없다. 설사 그리스도를 보고 하나님을 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아닌 매개된 지식이며 따라서 그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넘어서 하나님 자체의 지식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볼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다(고후4:4-6). 이 점에서 그는 어떠한 다른 계시와 구별된다. 다른 계시들은 그 계시와 하나님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 그 계시들은 다 인간의 인식 능력에 맞게 조정되어 주어진 것이어서 거기에 나타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주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 계시들을 통해 알려지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 계신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다르다. 그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계시이고 그를 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그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다르지 않다.
물론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고 그리스도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하나님은 아들을 낳은 아버지이시고 그리스도는 그의 영원한 아들이다. 이것은 위격의 구별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별되는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시다. 같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성자가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계시하심을 의미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렇게 계시의 관점에서 이해함이 옳다. 계시를 떠나 영원한 하나님 안의 삼위일체에 관한 논의는 사변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삼위일체 진리가 나타난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부터이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서이다. 삼위일체에 관한 진리를 타락 이전 아담이 갖고 있었다는 것은 사변이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외 부활의 의미를 왜곡시킨다. 물론 삼위일체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부터 삼위일체이다. 이것을 내재적 삼위일체라 한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의 사실이 계시된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 그리스도의 부활에서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이 나타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계시이심이 드러나게 된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삼위일체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추상해서 하나님 자체의 본질로서의 삼위일체를 말하고자 하는 시도는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삼위일체의 진리를 확고하게 붙들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설명할 수도 없이 그저 믿어야 하는 교리가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계시하셨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3.8.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셨다. 즉 하나님의 계시로 이 땅에 오셨고, 부활하셔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때 우선은 성육신 이후 우리가 보도록 계시하신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하나님의 형상이심은 우리에게 계시하심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기 보다 이미 그분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영원부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agent라 할 수 있다. 창조와 이스라엘 역사에서의 계시도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히1:3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본체의 형상이라 할 때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보여진 그 영광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고 이것은 그의 본래적 소임이다. 빌2:6에 그가 하나님의 본체(μορφη)라 할 때 이것 역시 골1:15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셨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계시되지 않았기에 그의 형상됨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성육신에서 그리고 그의 부활에서 그가 하나님의 형상됨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그가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을 알리신 것은 성육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갖고있는 기능, 직무가 바로 하나님을 알리시고 보여 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일컫는 것이다(리더보스-하나님의 형상참조, 서철원교수-학위논문 참조)
3.9.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때도 하나님의 계시라는 의미와 거의 같다. 히1:1-3에서 “만유의 후사이시고 모든 만물을 지으신 그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셨다” 라고 한다. 이미 이전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지막에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본체의 형상이시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수단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하심은 하나님이 자신을 그 안에서 계시하심을 의미한다. 그 안의 계시는 하나님의 형상, 창조주로서의 계시이다. 요1:1 이하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할 때 이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영원부터 하나님의 계시자이심을 보여준다. 그는 물론 이 땅에 오심으로 비로소 우리에게 말씀으로 자신을 온전히 나타내셨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남김없이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영원부터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남김없이 말씀하신 것은 그가 본래 말씀이시기에 그러하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일반적인 말씀과 다르다. 구약 선지자에게 주어진 말씀과도 구별된다. 그는 이 모든 말씀의 근원이며 말씀 자체이시다. 그리고 이 말씀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뜻은 하나도 남김없이 알리워진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러하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말씀이다. 말씀과 하나님은 불가분리이다. 하나님의 말씀됨은 그의 하나님의 형상됨,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알리워진 것이다. 요1:14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두 가지를 본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원부터 하나님의 계시자이신 그리스도요 둘째는 그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비로소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영광을 남김없이 계시하고 그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말씀하심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두 말씀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 오심에서의 말씀에서 존재와 인식의 차이를 본다. 존재에 있어서는 영원한 말씀이 앞서고 그리스도 오심에서는 말씀이 뒤따르나 인식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사실, 그 안에서 모든 날의 마지막에 말씀하신 사실(히1:2)로부터 그를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요1:1) 이해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계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사실에서 유리된 하나님의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 이해는 전혀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로써 적합치 못하고 사변에 빠질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 오신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계시된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계신 그리스도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될 때 곧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4. 종말론적 계시로서의 그리스도 계시
4.1. 계시의 의미
그리스도께서 성육신을 통해, 그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때 계시란 말은 바울이(롬16:26)에서 비밀의 계시라고 말할 때 그 계시란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즉 여기서 계시된 것은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이제 나타난 그 비밀이다(롬16:25,26). 이것은 이 계시가 주어지기까지 전혀 그 실체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임을 함축한다. 그 계시의 내용인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자신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인간에게는 전혀 보여질 수 없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요1:14), 그의 부활하심으로(딤후1:10) 그 비밀에 속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계시되었다. 이런 의미로 계시를 이해할 때 보통 일반계시, 특별계시를 구분할 때의 의미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구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일반계시, 특별계시라 할 때 계시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속성을 알리신다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αποκαλυψις(계시)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영광을 처음으로 드러내시는 유일회적 사건을 지시하고 있다.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4.2. 그리스도 이전 계시와 그리스도 계시와의 상관성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창조 이래 하나님의 다양한 계시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스도가 오시기전에 사람들에게 이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다. 특별히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여러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셨다.(히1:1,2)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심은 창조 안에서, 구약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계시한 것에 관련을 맺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시기에 앞서 이미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알리셨고 이러한 계시들을 통해 그리스도 안의 계시를 준비하셨다. 그 이전의 계시 없이 그리스도 안의 자기계시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런 면에서 역사를 갖는다. 창조 이래 역사적 과정 전체가 사실상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라고 이해할 수 있고 그리스도 계시는 이러한 계시의 역사의 정점으로 계시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이전의 계시와 분리시키게 되면 그리스도의 계시를 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오심 이전부터 자신의 영광을 창조 안에, 역사 안에 이스라엘 안에 알리셨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자신을 직접적으로 계시하셨다는 것을 같은 차원의 계시로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분명 창조 안에, 그리고 구속역사 안에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셨고 여기서 바로 보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은 이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하나님 지식이다. 해와 달과 자연을 통해서 보게 되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차원이 다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나타난 기적과 영광의 임재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부활에서 나타난 영광이 다 같은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차원이 다르다. 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의 관한 것이 알려져도 하늘에 있는 것이 아직 그 실체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하늘에 있는 것, 하나님 자신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 아들되신 그리스도에게서만이 나타날 수 있다. 하늘에 대해 이 땅에서 말할 수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것을 직접 보고 듣고 아는 존재가 와서 그것을 직접 알리기까지 아직 하늘은 감추인 것이고 비밀이었다.
4.3. 왜 그리스도 계시가 유일무이한가?
하늘과 땅의 차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에서 보아야 이 계시의 새로움이 이해된다. 그리스도 이전의 계시는 아무리 계시라 하더라도 그 차이의 한계 내의 계시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감추인 것이다.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은 설사 계시되었다 해도 그 실체는 알 수 없다. 그것을 넘어서 계신다. 그런데 그리스도 계시의 특별함은 이 차이를 뚫고 하늘에 있는 것을 땅에 속한 피조물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깊은 것을 피조물에게 보이시고 알리심이다. 기독교 신앙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근본적 차이를 기본적 고백으로 삼는다. 하나님은 결코 피조물이 아니고 피조물 안에 그 실체가 나타나 있지 않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따라서 이런 고백에 따라 모든 범신론은 정죄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신비주의, 하나님의 이 세상 안에 내재한다는 범신론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적 차이의 신앙에 의해 부정된다. 그런데 그리스도 계시는 범신론의 주장에서나 있을 수 있는 그런 주장,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나타나 보이신다는 것, 그가 땅에 들어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 계시의 새로움이고 유일무이함이다. 구약의 창조 신앙을 폐기하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그렇게 근본적으로 새로운 의미로 하나님의 새로운 행동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계시는 결코 범신론적으로 하나님과 피조물의 차이를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구약시대에 있었던 그 하나님만을 말하지 않고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것,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그 실체를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말한다.
4.4. 구약의 계시와 그리스도의 부활의 계시와의 차이
그리스도 계시가 구약의 하나님의 임재나 현현 환상과 어떻게 다른가? 사실 구약에 보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거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든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보았다든지, 다니엘의 세 친구가 사람의 아들의 형상을 풀무불 속에서 보았다든지 하는 신현을 보게 되고 이스라엘 회중에 임한 영광의 임재와 시내산에서 모세가 본 하나님의 영광을 읽게 된다. 그리고 이사야가 환상 중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다니엘, 에스겔등이 하늘이 열리고 거기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대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지상에 있는 인간으로 하늘에 있는 것을 보고 경험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늘에 있는 것을 계시해 준 것이 최종적이고 가장 완전한 것으로 생각한다 해도 이미 이전부터 하늘로부터 계시가 주어졌고 하늘에 관한 것을 거의 직접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오셔서 하늘에 있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썩지 아니할 영광을 계시하신 것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가? 사도 바울이나 요한이 본 하나님의 영광(그리스도의 영광)이나 선지자들이 체험한 것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 구약에선 하나님을 직접 보았고 신약에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본 것이 다른 것인가? 이것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리스도 안의 계시는 단지 하늘에 있는 것을 알리시는 차원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자가 이 땅에 오셨다는 데 있다. 단지 하늘에 있는 것을 알리신 것이 아니고 이 땅에, 그가 지은 피조물 가운데 오셔서 그 영광을 알리신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에 오셨다는 것, 그리하여 그 영광을 계시하셨다는 것에 근본적인 새로움이 있다. 물론 이전의 계시가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아니라는 점,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서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나타났다는 것도 앞선 영광의 계시와의 차이이지만 그 하늘에 있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가 하늘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여기 이 땅에 피조물 안에 나타난 것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 이것은 창조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이전의 계시는 그저 하나님에 관해서 알려 주었다. 그 계시가 창조 전체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그 영광을 계시한 것과 이 땅에 오셔서 그 영광을 계시한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하늘에서 계시한 것은 피조물 전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영광이, 썩지아니할 영광이 피조물들에게 이 땅에 와서 계시된다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을 폐기하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셔서 그가 피조물 가운데 계시다는 것, 그가 함께 하면서 그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신다는 것, 그리하여 피조물 전체는 창조이래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계시가 지닌 전적 새로움이다. 하늘이 계시된다는 것도 새로움이고 더욱이 그 하늘에 속한 자가 여기에, 땅에 와서 계시된다는 것이 또한 새로움이다.
4.5. 종말예언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계시
이처럼 하나님이 하늘에서 오셔서 그 영광을 계시하시는 것을 종말론적 계시라 할 수 있다. 종말론적 계시라 함은 우선 그것이 구약예언에서 종말에 있을 계시에 관한 예언의 성취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날을 예언했고 그날에 여호와께서 오셔서 그 영광을 계시하시고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을 베푸실 것을 예언했다. 종말에 나타날 많은 사건들 중 결정적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심이다. 그의 오심은 곧 그의 영광의 계시를 의미한다. 사40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예언하고 있는데 신약 기록자들은 이 예언의 성취를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구약의 예언에는 명시적이지 못한데 이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는 단번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고 성육신에서 부활, 재림에 이르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아무튼 종말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 그것도 그가 오심으로 그 영광을 나타낸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종말의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오셔서 백성들 중에서 함께 계시면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실(사40:9-11), 따라서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지속되면서 특별한 방식으로 하늘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 영광을 이 땅에 계시하고 그가 피조물들과 함께 계신다는 의미에는 이전의 사건과 유비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이것은 종말에 있을 것으로 예언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이 종말이 드러났고 그 종말론적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구약 선지자들은 아직 그 종말론적 오심과 종말론적 계시에 참여하고 있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멀리서 증거하고 예언하고 약속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계시의 관점에서 보면 선지자들은 계시를 본 자들이 아니라 그 계시를 알았으나 보지 못하고 미리 약속하고 증거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특별한 위치이다.
4.6. 창조의 종말을 가져오는 그리스도계시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시가 종말론적 계시라 할 때 보다 근본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오심, 그의 계시가 창조전체에 대한 종말론적 새로운 의미를 가져온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오심이고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이다. 이것은 피조물로서는 감당할 수 없고 창조전체의 존재를 뒤흔드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단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는 인식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전체가 그의 오심으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그런 것이다. 여기에 창조의 종말이 나타난다. 창조는 더 이상 그 이전과 같을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창조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지탱할 수 없게 되고 이전의 질서는 더 이상 그의 영광 앞에 지속될 수 없게 된다. 종말에 나타날 심판과 파국은 바로 그의 영광의 계시와 관계된다. 그의 영광의 계시가 창조의 종말을 가져온다. 물론 이 창조의 종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 그의 부활이 종말의 계시이다. 이미 창조의 종말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부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는 이전에 창조의 지속을 전제로한 하나님의 계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계시자체가 종말론적 심판의 구원을 가져오고 창조의 종말과 새창조를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의 계시로서 하늘에 있는 비밀,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는 것만이 아니다. 이 땅에 있는 것,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뒤바꾸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단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만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시작된 것이고 여기에 그리스도의 계시(부활)의 유일무이성이 있다.
5. 그리스도의 부활과 새창조
5.1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이 지닌 새창조로서의 의미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계시되었다. 그런데 또한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임과 동시에 새창조의 계시이기도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계시가 종말론적 의미를 지닌다고 했다. 즉 창조의 종말과 새창조를 가져온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새창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처음창조가 사라지고 새창조가 나타나는 새창조의 시작이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처음으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새로운 피조물인가? 그가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면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살려주는 영)으로 부활하셨고(고전 15:45) 그 영은 몸을 지닌 영이다.(몸과 육의 구별) 기독교 부활 신앙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신체의 부활이다. 이 신체의 부활이 왜 중요한가? 여기에 지상에서의 생애와의 연속성이 있는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육체로 인간으로 우리와 같은 육체로 오셨다. 물론 우리와 달리 죄 없는 육체로 오셨다. 그가 그 흠 없는 육체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속을 이루셨다. 그리고 살아나실 때 새로운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셨다. 그 몸은 인간의 몸이면서 지상에서의 몸과 달리 썩어질 육의 몸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이다. 이 신령한 몸은 그것이 썩지 않는다는 것을 단순히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난 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육체는 있을 때 입었던 몸처럼 아담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즉 흙에서 난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난 몸이다(고전 15:47, 여기 둘째 아담이 하늘에서 나셨다는 것은 성육신 사건을 지시함이 아니라 부활사건을 지시함에 주의해야 한다. 성육신에서 입은 몸은 하늘에서 난 몸이 아니라 땅에서 난 몸이다). 그는 그의 부활의 몸을 통해 하늘에 속한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런데 이 부활의 몸의 출현은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이면서 또한 새창조의 계시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이 어디에 계시되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피조물된 인간이 썩지 아니할 영광을 비추는 그런 신령한 하늘에 속한 존재로 변화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해서 입으신 육체는 인간의 육체이며 이것은 피조물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피조물로서의 인성이다. 그리고 그 피조물로서의 인성이 그의 부활로 인해 썩지 아니할 영광에로 변화되었다. 피조물에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인성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인성은 육체의 인성이 아닌 신령한 인성이고 이것은 하늘에서 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하면 우리의 인성과 같은 상태의 지상에서의 죽을 수 있는 인성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만이 아니고 그리그도의 인성에는 두 가지 상태가 있다. 즉 우리와 같은 낮은 인성과 부활의 상태의 영화로운 인성이 있다. 이 인성은 처음창조 받은 아담의 인성이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하늘에서 난 둘째 사람’이고 이것 역시 창조된 것이지만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왜 그 썩지 아니할 인성인데 창조된 것이라 하는가 그것은 육체로서의 인성의 변화이기에 그러하다. 육체의 인성이 아담의 인성이며 이것이 창조된 것이라면 그의 부활의 인성 역시 신성이 아니라 창조된 것이고 단지 이전 창조와 구별되는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피조물로서의 창조된 것이고, 이것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5.2. 신성의 충만이 피조물로서의 몸에 나타남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이 특별하고 유일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몸이면서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을 비추는 몸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아담의 몸이다. 그는 부활하심으로 신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으로 계신다. 그는 신성과 인성을 여전히 갖고 계신다. 그런데 그의 인성은 육체의 인성과 달리 썩지 아니할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시는 인성이다. 육체의 인성은 아직 썩지 아니할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지 못하다. 그 육체는 썩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썩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에 썩지 아니할 영광이 그 몸에 그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인간의 몸이 썩지 아니할 영광으로 변화된 것이다. 인간의 몸에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게 되고 인간의 몸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신성의 충만이 몸으로 거하게 되었다(골 2:9). 이 구절에서 육체로 거한다고 해서는 안된다. 원문의 somatikos는 신체(body)라고 번역해야 맞다. 그의 육체(flesh)는 썩어질 것으로 신성이 육체에 거할 수는 없다. 그의 부활의 몸이 변화된 몸으로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남김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영광을 처음으로 드러냈다는 것만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의 몸이 변화되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참으로 기적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피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질적인 차이 때문에 그러하다. 그것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과 썩어질 세상으로 표현한다. 썩지 아니함은 피조물의 썩어짐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창조주되심, 그의 하나님되심이며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썩어질 영광이고 그것은 타락 이전부터 그러하다(벧전 1:24).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롬 1:23)은 피조물의 썩어질 영광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그의 신성과 영광을 계시하셨지만(롬 1:20), 그렇다고 해서 이 피조물들 속에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속에 계시지 않고 그의 처소는 하늘이다(행 7:48-49). 모든 창조물 안에 하나님이 내재하시고(시 139) 모든 만물이 그의 뜻대로 움직이고 모든 것이 그의 주권 아래 있다는 의미에서 만물 안에 그가 계시지만(행 17:27) 썩어질 피조물 속에서 그를 발견하려 하거나 거기서 하나님을 숭배하면 우상숭배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의 창조신앙이다. 따라서 다른 종교가 가진 범신론을 거부한다. 다른 종교는 다 범신론적이다. 피조물 안에 신성이 내재하고 있다고 보고 피조물을 통해서 신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독교의 창조신앙은 아무리 이 세상 안에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가 있다 해도 이 세계는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과 구별되는 썩어질 영광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는 이런 창조신앙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 하늘에 계시고 썩지 아니할 영광 중에 있어서 땅의 모든 썩어질 피조물들과 구별되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이 썩어질 피조물 중 한 사람에게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갖게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된 새 피조물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남김없이 나타난 것이다. 그가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신성이기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인성 안에서 그 피조적인 인성이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 것이다. 피조물 안에 하나님이 그대로 나타나신다는 것, 이것은 범신론의 생각이라면 범신론에서나 주장할 수 있는 일이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피조적인 인간 속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구약의 창조신앙 속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새창조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 안에 거하신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방식인데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바로 피조물 안에 나타나고 피조물이 신적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어디까지가 인성이고 어디까지가 신성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성이 인성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런 인성의 변화, 피조물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 그 만을 위해서라면 이런 인성의 변화,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런 변화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의 변화는 그에게만 일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다른 피조물들을 위한 것이다. 다른 피조물의 경우에 창조주 하나님과 구별되어 결코 썩지 아니할 영광에 이를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고 그것으로 신적 영광으로 변화되심으로 다른 피조물들에게 그 영광으로 변화되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는 새창조의 시작이다. 즉 다른 새창조의 후속이 있다는 얘기다. 그는 부활의 첫열매이고(고전 15:20),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다른 피조물들이, 다른 사람들이 그의 부활에 참여하여 썩어질 피조물에서 썩지 아니할 피조물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인성으로 새롭게 되셨다. 여기서 하늘과 땅,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놓인 엄청난 간격에 다리가 생기게 된다. 이전에는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접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새창조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에 참여하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져온 온 세계를 위한 종말론적 새로움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된 새창조는 모든 피조물 위에 새로운 차원을 약속하고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 오셨고 인간은 하늘에 오르게 되었고 하늘에 속한 영광과 그 형상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었다. 이전에 피조물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남김없이 나타나게 되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창조 시작부터, 타락 이전부터 흙에 속한 자요 하늘에 속한 자가 아니다(고전 15:45-47). 따라서 그는 그 인간성 전체가 땅에 속한 유한성, 피조적 제한성 속에 있었다. 그의 인식에 있어서 그러하고 그의 존재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하나님과 닮은 자이고 그래서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이며 흙에 속한 자이다. 그가 영혼(soul)으로서 그러하다. 그는 아직 하나님의 영광을 입지 못했고 그것을 볼 수도 없었다. 인간이 태양을 볼 수 없듯이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아담의 형상을 입으시고 오셔서 죽으시고 살아나실 때 그 몸으로 살아나셨지만 아담과 달리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 나타나셨고, 그렇게 변화되셨고 우리를 그 변화에 동참케 하신다. 이제는 아담에 속한 자로 다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는 다른 존재, 새로운 인간이 된다. 아담은 창조 때 흙에 속한 자로 지음 받았지만 이제는 하늘에 속한 자로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다.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되는데 그것은 썩어질 아담의 하나님의 형상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겉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과 몸 전체에 결국이 새로운 변화를 입는다. 흙으로 창조된 처음 인간도 영화롭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음 받은 인간은 모든 면에서 처음 사람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올리워진 그런 존재이다. 단지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구별된다고 말해서만은 안된다. 개혁신앙은 영화된 상태를 처음창조의 상태와 구별해서 말하면서도 그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과 다르다는 것을 애써 강조하고 그리하여 로마 카톨릭의 신화(deification)의 개념을 부정한다. 물론 부활을 통해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처음 피조물의 상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그 다름의 이유가 바로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저 처음에 비해 좀 높여주고 하나님은 여전히 저 높이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구별되면서도 그의 썩지 아니할 영광에 참여하는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그가 인성에 그 하나님이심을 드러냈고, 그 그리스도의 변화된 인성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과 다른 별도의 높은 영광이 아닌 그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이전에는 갖지 못했는데 여기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신화는 아니지만 신적 영광에의 참여이다. 이것은 처음 창조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처음 피조된 아담에게는 하늘의 요소가 없었다. 그런데 새창조된 사람에게는 하늘의 요소, 썩지 아니할 요소가 새로이 추가된 것이고 이것이 결정적이다. 따라서 새창조를 처음창조의 회복이라고 보는 것은 새창조의 진리를 다 드러내 주지 못한다. 처음창조에는 없었던 것, 전혀 새로운 것이 나타났고 주어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처음 나타난 것이고 첫 사람 아담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다.
5.4. 부활의 종말론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썩지 아니할 영광이 사람들에게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에 나타난다. 모든 피조물들은 처음창조에서 썩어질 것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그것이 변화되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된다.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된 자들이 썩지 아니할 나라를 상속받는다(고전 15:50, 벧전 1:4). 이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실 뿐 아니라 그가 만드신 새로 만드신 새창조 안에 거하신다. 임마누엘이 비로소 성취된다(계 21).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지닌 종말론적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단지 죽은 자가 살아나는 초자연적 기적, 하나님의 능력의 증거가 아니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피조물을 이제 사라지게 하고 그것 대신에 새로운 피조물을 주시는 그런 전 우주적 사건이다. 종말론적 사건이다.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이 계시되면서 그 종말론적 계시로 인해 창조질서에 새로운 요소가 들어오고 이것이 처음창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고 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종말론적 계시의 의미라 했다. 그런데 그 종말론적 계시가 가장 먼저 변화를 시작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에게 이다. 그의 인간성에 그 일을 시작했고, 이전의 육체 즉 처음창조가 아닌 새창조의 실재를 주었다. 이것은 단지 계시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에 나타날 그 엄청난 변화의 시작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창조와 처음창조의 구분이 아주 뚜렷하게 된다. 땅의 영광과 하늘의 영광이 다르다(고전 15:40).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영광은 하늘의 영광이고 새창조의 영광은 하늘의 영광이다. 이것은 인간의 영광, 창조의 영광과 다르다. 같은 하나님의 창조이나 하나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나 하나는 그렇지 못하다(고후 4:6). 이전에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구별이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창조와 처음창조의 구별로 의미가 바뀐다. 처음창조는 썩어질 영광이라면 새창조는 썩지 아니할 영광이다. 없어질 영광은 이제 길이 있을 영광 앞에서 더 이상 영광되지 못하다(고후 3:10-11).
5.5. 부활 계시의 이중적 국면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계시되는 것을 둘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계시이고 하나는 새창조의 계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나는 썩지 아니할 영광은 결코 피조물의 영광이 아니고 따라서 이것은 창조주 자신의 영광임이 드러난다. 여기서 그의 하나님의 아들되심, 그의 선재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부활에서 나타난 영광은 단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이 인간의 몸으로서 드러내는 것이고 그 몸은 단지 영광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고 실제로 그 영광을 지니고 있다. 즉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닌 그런 상태로 변화되었다. 여기서 그의 인성의 변화가 나타난다. 그의 신성이 부활에서 계시될 뿐 아니라 그의 인성이 새롭게 됨으로써 앞으로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해 계시하실 새창조를 여기서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부활이라는 하나의 사태에서 그의 신성이 계시되고 새창조가 계시된다. 그리고 이제 그의 신성의 계시마저도 이전에 알고 있었던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물론 부분적으로 알려졌지만 온전하게 알리워지지 않는 그런 하나님이 새롭게 계시되는 측면을 가지는데 즉 그가 그의 피조물 안에 계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초월이 내재에로 강조점이 이동된다. 아무튼 그의 하나님 자신의 계시는 인성의 변화를 통해서 새창조의 계시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새창조의 계시는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부활에서 하나님은 이전에 알지 못한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나고 창조도 이전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물론 하나님 자신은 변하는 것 없이 그의 영광이 온전히 알려지는 것이고 창조는 변화되는 것이지만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 이전에는 초월하신 하나님이었는데 이제 우리 안에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새롭게 나타나시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된 새창조는 종말론적 구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마지막 날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즉 창조와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새로운 변화와 구원이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이 오심으로 창조가 새로워지고(사 11, 35, 40), 이스라엘에 구원이 나타난다는 것, 이것은 물론 구약 선지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존재하는 새하늘과 새땅의 현실, 썩지 아니할 영광에로의 변화로 명시적으로 이해된 것은 아니나, 암시적으로 내포한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종말론적 구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은 이것이 처음창조의 종말과 함께 처음창조를 넘어서서 도래하는 새창조이기에 그러하다. 이제까지 아담의 창조 이래 모든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는 다 창조의 회복의 범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는 창조가 아닌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닌 새창조의 나타남을 보게 된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이고 유일무이한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이 나타났다는 것, 이것이 피조물 안에 실현되었다는 것, 처음창조가 전 우주적이라면 그와 마찬가지로 전 우주적으로 처음창조가 아닌 새창조를 드러내신 것이다. 이것이 종말론적 새창조이다.
6.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창조의 종말
6.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종말론적 이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은 종말론적 구원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부활과 연합되어 우리에게 피조물에게 종말론적 구원을 가져온 것이다. 즉 처음창조의 종말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육체의 죽음이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담당하는 죽음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즉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즉 저주가 그리스도에게 내려지고 그가 그 저주를 짊어짐으로 육체가 십자가의 형벌의 죽음을 당했다(갈 3:13). 그로 인해 죄인인 자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론적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 없이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오직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써만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 진노, 저주, 죽음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그의 육체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은 대속적인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 하나님으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에 육체로 오셨고 그래서 그 육체가 죽으신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육체에의 참여는 단지 속죄양으로서의 필요조건일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피조적인 인간, 창조의 한 부분이 되신 것에 의미가 있다. 그가 피조물 중의 하나가 되셨다는 것, 그리고 그 피조물로서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다른 인간과의 연대, 다른 피조물과의 연대가 중요하고 바로 그런 연대를 갖고 죽으셨다. 그는 흠없는 육체를 지니고 있고 동정녀 탄생으로 다른 죄인과 구별되는 존재일 뿐 아니라 여전히 그가 한 인간의 육체로 피조물로서, 육체로 오셨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육체로 죽으셨다. 그리고 신령한 존재로 살아나셨다. 육체로 죽으시고 영으로 사셨다(고전 15:42-44, 딤전 3:16, 벧전 3:18). 그의 육체의 죽음은 그의 영으로의 부활과 함께 이해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그의 육체의 죽음의 의미가 놓여 있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의 다시 삶을 위한 죽음, 썩을 것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가 썩어질 육체에서 썩지 아니할 영광의 존재로 변화된 것은 죽음 없이 바로 올리운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썩지 아니할 영(하늘의 영광의 몸)으로서 변화를 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많은 열매, 보다 큰 영광에 상태에 이르기 위해 그의 죽음이 필요하다. 여기에 처음창조와 새창조의 관계가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처음창조의 실재이다. 이것은 흙에 속한 것이고 썩어질 것이다. 이것은 아직 하늘에 속한 영광에 이르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이제 그 처음창조가 죽음으로 사라지고 새창조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새창조를 위한 창조의 종말이다. 그 창조의 종말이 있어야 새창조가 올 것이기 때문에 그 육체로 죽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은 여기에서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 외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진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심에서 모든 의미가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그와 함께 그 육체의 죽음을 통해 오히려 육체보다 더 나은, 엄청나게 차원을 달리하는 높은 영광의 몸을 가져오시기 위해서라고 하는 사실에서 다른 의미가 나타난다.
여기서 성육신의 의미도 나타난다. 성육신이 단지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육체를 입으신 것으로 이해하면 온전치 못하다. 그의 육체를 입으심은 죄에서의 구속과 함께 그 육체가 변화되어 영광스런 몸이 되기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목표로 해서이다. 육체로 오심, 육체의 죽음은 단지 죄와 형벌의 관계에서만 설명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해서 설명되어야 하다. 그리고 그의 성육신과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십자가는 이 과정 중에 부활 새창조를 가져오기 위한 창조의 종말이라는 것이다. 그의 부활은 단지 창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하늘에 속한 영광의 실재로 피조물이 변화된 것만이 아니고 우선 십자가를 통해 창조의 종말을 거치고 철저한 종말 이후에 창조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속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6.2. 신화(deification)에 대한 비판
창조가 새창조로, 땅에 속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의 참여로 변화할 때 이 창조의 종말을 거친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은 육체가 후광을 입듯이 그렇게 점진적으로 변화되어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 부활은 철저하게 육체를 죽이고 완전히 제거하는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 어떤 피조물도 당한 적이 없는 그런 심판을 통해서 죽고, 하나님의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으로, 생명의 능력으로 그 죽음을 정복하고 살리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인간의 몸이 신적 영광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 몸 안에 있는 어떤 내적인 가능성에서 그런 신적 영광에로 상승한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의 몸이 그 존재가 말살되다시피 할 정도로 죽고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로 살아났다는 것, 여기서 어떤 범신론적 신비주의적 사고는 끼어 들 자리가 없다. 인간 안에 어떤 신성이 내재하고 있어 그것이 싹을 틔워서 신적 영광에로 올리운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전적으로 흙에 속한 존재였고 그것이 철저한 죽음을 맛보고 이제 새로운 창조의 능력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의 높임, 그리고 이에 따른 인간의 영화에 대해서 신화(deification)로 해석하는 것이 비판받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 신화의 논리는 피조물인 인간 안에 신적 씨앗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는 위험이 있고, 육체의 죽음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그리스도의 오심은 바로 이 죽으심을 위함이라는 것, 이것이 부활의 영광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말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죄와 그에 대한 심판으로서의 육체의 죽음 없이 그로 인한 철저한 육체의 폐기와 종말 없이 새창조는 나타나지 않고, 그래서 인간의 죄와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의 가르침을 약화시키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강조하고 인간이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육체가 종말을 경험하지 않고(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심판의 의미에서) 새창조에 들어가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의 참여를 강조하는 자들은 설사 육체의 죽음을 말해도 그것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의 죽음과 연결해서가 아니라 신비주의적, 금욕주의적 자아부정의 의미로 해석하고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종교적, 신비주의적으로 왜곡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되어야 그것이 철저한 육체의 죽음, 창조의 종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모든 육체부정은 육체부정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육체의 긍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오심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과정으로서 이해되고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지 죄에 대한 형벌리라는 소극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결국 육체가 아닌 영적 실재를 드러내는 의미를 지니게 되고 그 영광스런 변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할 때 그것은 단지 죄에 대한 구속에만 그 의미가 한정되고 영광스런 변화와는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죄와 사망에서의 구속을 위한 죽음이 결국 새창조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에의 참여를 위한 준비가 된 것이다.
7. 육체의 그리스도
7.1.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불연속성
그리스도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셨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아나셨다(고전 15:42-44). 그는 땅에 속한, 흙에 속한, 아담에 속한 자로서 죽고 하늘에 속한 자로서, 하늘에서 난 자로 살아나셨다(고전 15:47). 그리스도는 아담과 다르지만 또한 부활하신 상태와 육체의 상태가 다르다. 육체는 비하의 상태 낮은 몸이고 영광의 몸은 높아지신 몸이다. 하나는 땅에서 났고 하나는 하늘에서 났다. 둘다 인간이지만 그 근원을 달리하는 인간이다. 이것이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이의 불연속성이다. 하늘과 땅의 질적인 차이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있어서 이 두 가지 상태를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는 인성이 계속되고 있으나 그것은 처음 땅에 계셨을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성이라는 사실, 하나님의 영광, 썩지 아니할 영광이 그 안에 그대로 나타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성이라는 것, 이것은 결코 아담의 인성에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7.2.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연속성
그러나 또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 그의 인성과 이전 육체의 몸, 아담적인 인성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은 죽었던 몸이 살아난 것이다. 동일한 몸이 죽고 동일한 몸이 살아났다. 성육신하셔서 살다가 죽은 그 육체의 몸은 완전히 없어져 버리고 하늘에서 난 새로운 몸으로 그가 입으신 것이 아니라, 그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고 그 부활의 몸은 그가 마리아에게서 취하고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갈릴리에서 활동하시고 십자가에 죽은 그 몸이다. 이 두 몸 사이에 영광이 엄청난 차이가 나지만 동일성, 연속성이 있다. 만일 이 동일성, 연속성이 없다면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닐 것이다. 십자가에 죽어 장사된 그 시체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더 이상 그 시체가 없고 무덤에 비게 된 사실은 그 육체의 몸과 부활의 몸 사이에 동일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는 표현에서는 분명하다(15:42). 이 앞에 식물의 파종과 성장에 부활을 비교하고 있는데 씨가 죽고 다시 살아 새로운 형체를 얻는 것이 죽은 자의 부활이 유비될 수 있다고 한다(고전 15:35-37). 씨와 나무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그 형태가 그렇고 그 구성이 그렇다. 그러나 씨와 나무는 같은 것이다. 씨가 죽고 다시 살아 그 생명이 나무가 된 것이다. 콩에서 콩나무가 나고 팥에서 팥나무가 난다. 팥과 팥나무는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으로 살아난다.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그러하다 그 부활의 영광은 육체의 영광과는 다르다. 역시 예수라는 역사적 한 인물이 그 부활에서 나타난 것이지 별개의 사람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다.
7.3.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종말의 의미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육체의 죽음, 심판, 종말을 의미한다. 여기서 처음창조, 아담에 속한 몸이 사라져 없어진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몸으로 입혀진다.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더 이상 육체의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한 종말과 사라짐이다. 어떤 자연적인 죽음보다도 근본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폐기와 종말이다. 그러나 이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져온 종말이 육체의 폐기에 그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것은 그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주어진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근본적인 육체의 종말이 왔지만 그러나 부활은 이 죽었던 몸을 다시 일으켰고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썩지 아니할 것으로 부활할 때 이 부활은 죽었던 그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십자가로 종말을 맞이했던 그 몸이 이제 새로운 생명을 입고 나타났다. 그의 육체의 죽음은 이 새로운 몸으로의 변화를 위한 것이다. 육체를 벗고 신령한 몸으로 입기 위해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죽음과 삶을 경험하는 주체는 동일하고 연속적이다. 씨가 심기우고 죽을 때 완전히 썩어 없어지나 거기부터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이 그렇게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고 죽은 예수가 살아난 그리스도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7.4. 육체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이의 구조적 연속성과 차이
그런데 육체의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이에는 단지 주체가 동일하고 연속적인 것만은 아니다. 연속성은 그의 인간성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인간성, 아담의 몸으로 죽으셨고 살아나실 때 그 인간성, 그 몸으로 부활하셨다. 즉 그 부활에 나타난 인간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그리고 지상에 사실 때 갖고 있었던 그 인간성, 그 몸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도 신체적인 구조가 동일하고 또 인간을 구성하는 지정의의 인격이 그대로 구비된 완전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갈릴리에서 활동하고 십자가에 죽은 그 그리스도의 몸과 인격적 특성과 동일하다. 그 동일한 구조의 몸으로서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하된 것이다. 변화된 것은 썩어질 몸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된 것이지 구조자체를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니다. 만일 구조자체가 바뀌었다면 그것은 인간의 몸이 아닐 것이다. 보통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신 사건을 드는데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이 이전의 몸과 같은 구조와 기능을 갖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사람의 부활의 몸은 썩지 아니할 죽지 않을 몸이다, 여기서는 이미 죽음의 가능성마저 제거된 것이다. 아담의 타락이전의 몸은 아직 죽지 않았고 죽음의 씨가 들어와 있지 않지만 죽을 수 있는 몸이었고 또 그래서 죽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몸은 더 이상 죽을 수 없는 썩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몸이다(롬 6:9). 여기에 불연속성이 있다. 하늘에서 온 생명의 그 썩지 아니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썩지 아니할 몸이어도 역시 인간의 몸이고 그 인간의 몸은 죽음 이전의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기능을 하는 그런 동일한 인간의 몸이다. 보통 그리스도의 부활을 신체의 부활(육체부활 표현은 정확하지 못하다)이라 할 때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성육신을 위해서 잠시 빌린 것이 아니라 그것은 부활 후에도 역시 계속되는데, 그 양상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어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의 몸은 죄를 짓지 아니한 몸이지만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히 죄로부터 자유로운 몸이다. 물론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유혹을 받았고 따라서 죄를 지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죄를 지을 수 없는 몸이라면 그는 인간의 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 이후에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그런 인간으로서 살아나셨다. 이런 면에서 그의 썩지 아니할 몸으로의 변화를 말할 수 있다. 썩을 몸으로서의 육체는 죽을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는 육체라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되어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지배할 수 없는 그런 인간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인간으로서 그렇게 된 것이다. 죽음이나 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가 원래 하나님께 있는 것이나 새로운 인간으로서 그는 그런 존재의 특성을 갖게 되었다.
7.5. 창조의 회복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
죄와 죽음에서부터의 완전한 자유는 그가 아담의 몸과의 차이를 말해준다. 이전의 아담은 아직 죽음이 없고 죄가 없었지만 죄에서부터의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난 죄와 죽음에서의 자유는 전혀 죄와 죽음의 가능성이 없는 그런 자유이다,. 즉 아담과의 불연속성, 지상의 그리스도와의 불연속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동시에 아담에게 주어진 생명, 그 의의 회복이기도 하다, 아담은 처음에 죽음이 없는 자 죄가 없는 자였으나 그가 범죄하므로 죄와 죽음이 인간의 삶에 들어오게 되었고 창조의 선함과 아름다움, 그 영광을 상실하게 되었다. 죄와 죽음은 창조에 없었던, 창조 안으로 침입해 온 요소이다. 모든 사람이 이 죄와 죽음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리스도는 이 죄와 죽음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리고 그가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지배, 권세를 깨뜨리시고 생명을 회복하셨다. 이 생명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생명인 동시에 또한 육체를 지배하는 죽음을 제거하고 몸을 다시 살리는, 이전의 창조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비로소 아담이 잃었던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은 이전 지상에서의 육체의 생명의 회복이며 살아남이며 다시 말해서 아담에게 있었던 타락 이전 창조의 인간의 완전성을 회복함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드러내신 몸은 아담의 몸과 다른 별개의 몸이 아니라 같은 몸으로 그 완전성을 온전히 회복하신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이 단지 아담의 처음창조의 상황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앞에서 이미 말 한대로 그의 몸은 썩어질 육의 몸이 아니고, 아담과 같은 차원의 몸이 아니다.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으로 높여진 몸이고 하늘에서 난 몸이다. 그러나 이 새창조의 시작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은 처음창조 받은 아담과 별개의 몸이 아니라 그것은 온전하게 회복시킨, 타락으로 인해 들어온 이질적 요소인 죄와 죽음을 제거하고 처음창조에 있었던 영광을 다시 찾은 그런 몸이다. 처음창조에 죄가 들어오고 죽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더 이상 가치를 지닐 수 없기에 이것을 다 없애버리고 하늘에서 별개의 몸을 가져 온 것이 아니라 그 죄와 죽음 아래 종노릇하던 몸(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었으나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심)을 그 죽음과 죄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살려내고 그것을 하늘의 영광에로 올리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아담이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구원이 나타난다. 구원으로서의 새창조는 처음창조를 넘어서면서 또한 처음창조의 회복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담에게 없었던 하늘에 속한 새창조의 요소를 지니면서 또한 아담의 완전성의 온전한 회복이다.
7.6. 육체의 인성이 지닌 종말론의 의미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처음창조함을 받은 아담과 연속적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바로 아담의 몸을 입고 오심이고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의 상태를 온전히 회복하신 것이다. 그의 죽음에서부터 벗어나서 생명을 다시 찾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살아 계실 때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그 때의 완전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가 부활 이전과 다른 것은 육체의 불완전함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완전성에 있어서, 선한 것은 그대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에게 있었던 어떤 완전성도 폐기되는 것이 없고 온전히 회복되어지고 더욱더 완전하게 실현된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육체의 그리스도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이땅에 인성으로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은 그의 부활을 통해 완벽하게 실현된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의미있다.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상태는 부활의 영광 중에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씨앗으로서 장차 나타날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그의 사랑, 그의 능력, 그의 정의, 그의 지혜 등, 우리가 복음서에서 찾을 수 있는 그 뛰어난 인간성은 부활의 그리스도의 인성과 다른 것이 아니고 부활의 그리스도에게서 그것이 온전히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육체를 따라 아는 그리스도(고후 5:16)와 영을 따라 아는 그리스도 사이에 분리는 없다. 물론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 그 육체로 나타났기에 그를 있는 그대로 보면 결코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구자유주의)이 그리스도를 이해함에 있어 역사적 예수로만 이해하려 할 때 역사적 예수도 바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그의 십자가 부활에서 그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영을 따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 속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해야 바르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와 다른 분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는 가난한 자와 함께 식사하시고 병자들을 고치고 분노에 싸우는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이전 인간적인 면모가 없이 영광 중에 계시는 신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그는 영광의 하나님이시고 부활하셔서 영광의 주로 올리우셨으나 지상에서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셨고 불의와 싸우셨던 것과 같은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 계신 인성의 그리스도이시고 복음서에서 보는 인성은 그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영을 따라 이해하는 것은 신성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고 그의 인성, 온전한 인성, 인간성이 가장 완전하게 실현된 인성의 측면에서 이해함이요, 따라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우리와 같은 인성, 육체의 인성을 입으신 그를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 단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능력 권세만이 연속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이땅에 계실 때에 보여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가 부활 속에서 더 분명하게 계시된 것은 분명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있어서 연속성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육체의 인성, 그의 지상에서의 삶과 인격, 모든 인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부활의 인성을 우리가 분명히 보지 못하지만 지금 그리스도가 어떤 인성으로 계시는지 복음서 속에서의 그의 삶과 행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단지 지상에 계셨을 때는 그가 우리와 같이 배고프고 피곤하고 연약하여 고통당하는 그런 인성이셨지만 이제 썩지 아니할 몸으로 부활하여 그런 모든 죽음의 흔적을, 고통과 부정적인 요소들을 다 극복하고 인성의 모든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몰트만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이런 인성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그의 신학이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 점에서는 타당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예수 그리스도의 길, 대한기독교 출판사).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단지 신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점에서만 지상에서의 상태와 연속을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인성이 그대로 계속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7.7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탐구의 의의와 문제점
자유주의 신학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특별히 역사적 예수에게서 그리스도의 본래성을 찾으려 했다는 사실을 앞서 살펴보았다. 이전에는 그리스도의 신성, 그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 그리고 그의 초자연적 구원에 있어서의 구원자로서의 존재가 강조되었는데, 18, 19세기에 들어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그의 역사성이 강조되었다. 그의 신성에 관한 성경의 진술은 신화로 치부되고 인간예수, 사람의 아들 예수만이 본질적인 예수로 이해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물론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 그리고 그의 초자연적 기원, 선재를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이미 벗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자유주의 신학의 공헌은 그리스도의 인간성, 그의 육체로의 존재, 역사성을 바라보게 한 점에 있다. 이것은 단지 역사적 예수에 관한 성경에 나온 사실을 다시 주목하게 한 점에서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강조에 대해서도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지 하나님으로서의 그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역시 대속적인 구원 사역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오히려 그리스도의 인성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역사성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의미있는 것이 된다. 십자가 이전 공관복음의 그리스도는 이전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역사성,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만 이해되고 사실 공관복음이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 이해를 위해 별로 중요성을 갖고 있지 못했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성의 연속성에서 볼 때 공관복음의 역사적 예수는 구속사적, 종말론적 중요성을 갖게 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바로 역사적 예수의 완성이기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를 떠나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질 수 없다.
자유주의 신학의 잘못은 역사적 예수와 우리 인간, 역사적인 우리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을 찾는다는 것에 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역사성은 하나의 모범의 의미를 벗어나지 못한다. 스승, 뛰어난 인간의 모범일 뿐이다. 그의 인성에 우리는 감화를 받고 그처럼 되고자 하는 그런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이 공관복음서를 읽는 방식이었고 거기서 만들어진 것이 역사적 예수 상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는 이런 의미로 우리에게 직접 올 수 없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종말론적 구원의 능력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써 종말론적 구원을 성취하시고 그 구원의 효능을 우리에게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과 새창조를 가져오는 구원자가 되신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의 위대한 인격이나 행적에서 감화를 받고 그를 따르려 하는 것은 복음 자체가 요구하는 방향에 부합하지 않는다. 성경이 그리스도를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제공할 때도 십자가와 부활을 거치지 않고 직접 역사적 예수에게 이르는 길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와 부활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자 함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지닌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자유주의자들처럼 그리스도의 역사성에만 주목하다든지, 혹은 복음서에 나오는 기적을 베푸시는 능력에 주목한다든지 하는 것은 종말론적 구원을 가져오시는 그리스도를 간과하거나 그 의미를 축소시키게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아니라 그의 역사적인 삶도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전통적으로 서신서에서 제공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복음서에서 제시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서로 하나되지 못한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그리스도의 부활이지만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도 분명히 드러나지 못하고 또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생이 우리를 위해 주는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로 드러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창조의 종말과 새창조의 시작으로 이해하고 거기서 종말론적 구원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할 때 그리스도의 육체의 삶은 새창조 이전의 창조로서 이해되고, 그 창조로서 부활의 빛 아래서 종말론적 의미를 얻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새창조는 창조의 종말이며 완성이기에, 그의 육체의 종말이며 완성이기에, 부활은 역사적 삶이 가진 그 의미와 한계를 보여주고 또한 그 역사적 삶은 부활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 드러내준다. 이에 십자가와 부활이 왔기 때문에 그것에 이르는 준비과정으로서의 역사적 예수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은 십자가와 부활이 지니는 추상화, 영성화의 위험을 막아주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구체적 역사적 삶을 위한 의미를 드러내 준다.
7.8 하나님나라의 현재를 그리스도 지상사역에서 찾을 수 있는가?
공관복음서를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활동하신 것이기에 여기에 이미 새창조의 실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아직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종말론적 구원이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종말론적 구원이 계시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처음창조의 종말이고 그의 부활이 새창조이기에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계셨을 때는 아직 새창조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에서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하나님이 계시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지만(비록 육체로 희미하게나마) 그의 종말론적 구원사역과 그로 인한 새창조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사실상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그리스도의 육체로 오심 속에서 아직 미래의 일로 남아 있다. 물론 요즘 신약학에서 말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 이미 하나님나라가 현재하고 있고 또한 아직 아니의 미완료로 미래의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새창조의 의미에서 즉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영광이 피조물 가운데 나타난다는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 하나님 나라는 아직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을 하나님 나라라 할 수 있으나(autobasileia) 하나님 나라가 피조물 가운데 드러나고 있지 못했기에 즉 여전히 사람들에게 새창조가 나타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 나라는 아직 아니의 현실이다. 귀신을 쫓아내고 즉 병든 자를 고치고 천국이 선포되는 것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 그것의 표징을 보여주나 아직 하나님나라의 실재는 감추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의 새로운 창조사역에서 비로소 나타난 것이라 보아야 한다. 따라서 공관서에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여 있다는 것은 너무 문자적으로 강조하여 이미 그리스도의 성육신 하심에서 즉 역사적 예수에게서 새창조와 하나님 나라를 찾으려는 많은 시도(개혁신학자들을 비롯한 복음주의자들 역시 그런 시도를 하고 있다)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의 의미를 역사적인 차원, ‘육체의 차원’에로 떨어뜨리는 문제가 있다. 전통적으로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서신서를 통해 본 교리적인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신성의 존재, 대속적 구원자의 상에 가리워져 그 본래적인 면모를 가리우게 되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복음서의 역사적 예수상을 본래적인 핵심으로 삼고 서신서의 케리그마를 비신신화시키고자 했다. 이에 대해 모든의 복음주의자들은 전통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그대로 따르면서 그러나 전통적인 신학과는 달리 복음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미있게 다룬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모든 초점이 맞추었던 것을 이제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으로 옮겨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이미 종말의 시작이라 볼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해서 이뤄지는 이전과 이후의 구분을 결코 폐기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전에는 아무리 그리스도의 사역이라 해도 새창조가 출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직 육체로 계셨고, 처음창조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까지는 새창조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새창조란 단순히 깨어진 창조를 회복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렇게 보면 이미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서 그가 병을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건강케 한 것에서 창조의 회복이 나타났고 그런 의미에서 새창조가 시작되었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새창조는 이런 정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것, 즉 하늘에 속한 영광이 피조물 가운데 나타나고 썩어질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사건이 새창조이다. 물론 새창조 안에 창조의 회복이 포괄되지만 창조의 회복이 새창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속죄의 구원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서의 구원, 즉 종말론적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사역에서 행하신 구원 행위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에서의 구원 사역은 장차 십자가와 부활로 드러낸 종말론적 구원을 예표하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종말론적 구원은 이 지상의 사역에 나타난 구원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 있다. 공관복음서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 자체 안에서 종말론적 구원이 나타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종말론적 구원의 빛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이 이것과 깊게 관련되고 있고 또 이 지상사역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실재를 간접적으로 비춰주기 때문에 그러하다. 공관복음에서,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에서 종말론적인 구원, 새창조를 미리 찾는 것은 구속사의 과정의 분명한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그렇게 할 때 구원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다. 육체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의미있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처럼 그의 인간성이 우리에게 본이 되기에 그런 것은 아니고 또 어떤 복음주의자들처럼 이미 그의 지상사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나타내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 새창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타난다. 이점에서 전통적인 기독론, 구원론의 방향이 옳다. 그러나 전통적인 입장은 역사적 예수의 종말론적 의미를 제대로 숙고하여 교의 안에 수용하지 못하고 인성,신성의 구분 아래서 이해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이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타났지만 그것은 이미 육체의 사역에서 준비되었고, 또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의 구체적 양상은 지상의 사역에서 직접적인 것은 아니나 간접적으로 알리워졌다. 서신서만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이 영적이고 내면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사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역사적 구체적 현실의 구원은 단지 육체적인 것으로 평가절하되기 쉽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은 이미 역사상에 나타난 구원을 포괄한다. 즉 그리스도안의 새창조는 창조의 회복, 질병의 자유, 가난한 자의 회복 등을 포함한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의 인성이 육체의 인성과 연속적이고 그것을 회복하고 완성한다는 원리를 적용하여 지상사역을 평가할 수 있다.
출처 : 행복충전소 †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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