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라
시 119편은 시편 중 가장 긴 편이며 성경장수로도 가장 긴 장이다. 그리고 기록한 연대와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지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맛본 성도의 저작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내용을 분해하면 1~8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행복이고 9~16은 죄를 범하는 일에서 보호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17~24은 박해 중에 사모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25~32은 쇠약해진 영혼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기 위해 기도함이고 33~40은 말씀을 지킬 수 있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함이고 41~48은 담대하게 말씀을 고백할 수 있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을 구함이고 49-56은 고생중의 위안의 말씀이고 57-64은 회개하고 말씀을 지키고 은혜를 구함이고 65-72은 고통을 당해 보고서야 말씀의 중요성을 깨달음이고 73~80은 괴로운 중에서도 성실하신 하나님께 인자와 긍휼을 구함이고 81~88은 박해 중에 피곤해진 영혼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가지고 구원을 기도함이고 89~96은 영원불변 한 말씀으로 말미암아 참고 구원을 기도함이고 97~104은 말씀을 묵상하여 그 맛을 알고 지혜를 얻은 증거이고 105~112은 위험 중에 말씀의 빛으로 보호되고 일생동안 이를 기업으로 함이고 113~120은 하나님은 악인을 제거하시며 말씀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가지는 의인을 붙드심이고 121~128은 말씀을 사모하고 계명을 사모하는 종이 학대에서 구원하기 위한 기도이고 129~136은 빛을 주시는 말씀 따라 자기의 행보를 조정해 주시기 위한 기도이고 137~144은 가장 깨끗한 말씀을 사랑하고 이를 잊어버린 자를 위해 슬퍼함이고 145~152은 악인이 가까이 온 때, 하나님의 가까움을 생각하고 조석으로 말씀을 묵상함이고 153~160은 말씀 사랑을 아뢰고 환난에서의 구원을 기도함이고 161~168은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박해 중에도 평안 있고 실족치 않는다는 것이고 169~176은 기도를 들으시고 말씀대로 도와주심을 기도함으로 되어 있다.
그럼 8절씩 22구절로 된 본편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행복.<시 119: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무거운 멍에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고 이를 지켜 행복하게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럼 주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왜 복된가?
1. 여호와의 법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1절 하반에,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인생의 안전한 살길이니 만큼 그것을 길에 비유하여 ‘법에 행하는 자’라고 한 것이다. 기차가 신호를 지키며 레일 위를 달리고 자동차가 차선을 지켜 달릴 때 아전 운행이 되는 것이고 사람들은 항상 좌측 통행과 육교를 건너며 횡단보도의 신호를 보고 바로 건너가야 안전한 것처럼 피조물인 인간은 조물주 하나님의 법에 순종해야 복 받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6절에,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신호등을 보고 길을 바로 건너갈 때 안전한 것처럼 주의 계명을 마음에 두고 살피는 자는 실패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교통사고는 법을 무시하고 주의하지 않는데서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실패하고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주의 말씀을 주의 깊게 새김질하지 않고 예사롭게 행동하기 때문인 것이다.
2. 주가 행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4,5절에,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라고 하셨다. 사실 인간은 연약하므로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자를 도우시는가? 그것은 악을 떠나고 주 만 바라보는 자인 것이다. 2,3절에,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전심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자에게 능력을 주사 행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대하 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전심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자에게 능력을 주사 행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대하 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능력을 받으면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빌 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보니 1절 초두에 “행위가 완전하여”라는 말은 완전무결한 행동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2절의 말씀대로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느라고 주를 바라보며 노력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3. 체험적인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7절 상반에,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라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보고 비로소 얻는 경험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은 믿고 행해 본 다음에라야 더욱 기묘한 내용이 깨달아지는 것이다. 나는 엘리사가 기도하니 아람군인들이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을 보긴 했지만 내가 실제로 기도해 보기 전에는 몰랐었다. 한번은 다급한 나머지 기도했더니 잡으러 왔던 다섯 사람이 나를 보아도 보지 못한 것을 체험한 다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한 것과 그가 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확실히 깨달아 믿게 되었다.
4. 말씀을 지킬 때에 기쁨이 충만해지기 때문이다.
7절에,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고 하였다. 성경을 연구하고 순종하여 체험적인 지식을 얻게 되면 마음에 기쁨이 샘솟듯이 되는 것이다.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전하고 지키는 일은 고역(苦役)이 아닌 것이다. 도리어 최고의 기쁨과 축복과 안전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다(마 11:29, 30).
5. 주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8절에,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말렉 사람을 멸할 때 짐승가지도 남기지 말고 멸하라고 하셨지만 사울은 제 멋대로 가치 없고 낮은 것만 진멸 하고 기름진 것은 남겨 놓았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고 하셨다(삼상 15장).
그러므로 자기 생각을 버리고 말씀에 순종해야 주께서 버리지 않고 붙들어 일하시는 것이다. 베드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 자기 기술, 자기 경험을 다 버리고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했다. 여기서 주님은 그를 사람을 취하는 사도로 세워 일생 그와 함께 역사 하셨던 것이었다.
물을 떠나 고기가 혹시 산다 해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네
예수여 예수여 내 중심에 오소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Ⅱ.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시 119:9~16>
9~16까지의 큰 뜻은 죄를 범하는 일에서 우리들을 보호하는 말씀의 성결케 하는 능력을 말해 주고 있다. 이 중 9절 상반에 말씀 곧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라는 본문을 그대로 제목삼아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11절에,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고 했다. 범죄 하지 아니하고 새 사람이 되어 살려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 두어야 하는 것이다. 배가 불러야 적과 싸울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가득 차야 죄와 더불어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청년 곧 연령이 젊은 사람, 또는 신앙이 어린 사람은 죄악의 유혹을 받기 쉽다. 이런 여러 가지 죄악을 뿌리치고 깨끗하게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삼가는 길 이외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려면 그 말씀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2절에,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했고 15, 6절은,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고 하였다. 이 말은 배운 말씀을 묵상하여 그 맛을 알게 되면 기쁨이 충만해지고 잊을 수 없게 되어 진다.는 것이다.
특히 14절에,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고 한 표현은 사람은 없어지는 재물이지만 누구나 그것을 즐거워하고 잘 간직하는 것처럼 없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재물 이상으로 즐거워하고 마음에 간직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에 말씀을 간직해 두면 그 말씀 때문에 유혹을 막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요1서 2:14 하반에 보니,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말씀은 히 4:12과 같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며 렘 23:29의 여호와의 말씀은 불같으며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은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날선 말씀을 낮고 계시기 때문에 마귀가 와서 “돌을 떡 되게 하라”는 불법적인 유혹을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이기셨으며 또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했을 때도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이기셨으며 또 마귀가 높은 산으로 주님을 데려가서 천하만국을 보이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을 때도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내리 쳤더니 대적 마귀가 물러가고 만 것이었다.
2. 전심으로 주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10절에,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그렇다! 죄를 짓지 않겠다고 소극적으로 피한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 부르짖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새벽에 부르짖어야 은혜를 받는 것이다. 잠 8:18 하반에,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간절히’라는 말은 각주에 ‘새벽에’라고 했으니 새벽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말이다. 새벽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의 능력을 받아 죄를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대하 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셨다. 마귀는 휴전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 끝 날까지 기도로 능력을 받아 죄를 이기는 사람이 되자. 어떤 세력이라도 기도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여왕 마리아는 죤 낙스의 기도를 가리켜 “그 사람의 기도는 10만의 군대보다 강하다”고 그를 무서워했다고 한다. 내 맘이 약하여 늘 넘어지오니 주 예수 힘주사 굳세게 하소서.
3. 입으로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13절에, “주의 입에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라고 했다. 묵상하고 배운 말씀, 기도하고 능력 받아 말씀을 전파하는 자가 되어야겠다. 말씀을 공개적으로 전하는 자는 주의 영광을 위해 범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가나안 농군학교교장 김용기 장로님은 어느 곳으로 가나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자란 것을 공개하고 전도한다는 것이다 한번은 전국 새마을지도자 강습회의 강사가 되어 소개를 받아 강단에 서자마자 “함께 기도합세다!”하고는 이어 “천지만물을 지으시며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 각 나라의 한계를 정하사 땅 위에 살게 하시는 주님! 대한민국을 축복하시고 이 중에서 새마을 지도자로 세우신 이들을 축복하사 예수를 믿어 새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네다! 아멘!” 했으나 혼자서 하는 것 같았다. 이어 “애국가 봉창을 합세다!”하고 부르기 시작하니 하는 수 없이 합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절을 부르고 2절을 부르니 소리가 작아지고 3절 4절 할 때는 전혀 가사를 모르는 것 같았고 후렴만 따라 하는 것이었다. 마친 다음 장로님이 호통을 쳤다. “애국가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새마을 지도자의 자격이 있갔소!”하고 강단을 내리쳤더니 모두 고개를 푹 숙여 유구무언이 되고 말더란 것이다. 첫 시간을 마치고 약 10분간 쉬고 두 번째 시간이 시작되었다. 장로님이 단상에 오르니 기도하자고 하기 전에 모두가 눈을 감고 있었기에 기도를 했고 애국가를 봉창하자고 했더니 4절까지 종이에 적어 보면서 함께 복창하더란 것이다. 또 장로님은 신자들에게 죄를 짓지 않으려거든 예수 믿는 것을 어디서나 나타내라는 것이다.
우린 자나 깨나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뜻을 배우고 마음에 간직하자. 그리고 주께 부르짖어 능력을 받아 말씀을 어느 장소에서든지 빈부귀천 유무식을 막론하고 힘 있게 전하는 사람이 되자. 이런 사람에게 주께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므로(마 28:19, 20) 범죄 하지 않고 사는 깨끗한 주의 백성 삼아 주시는 것이다.
Ⅲ. 말씀과 나그네 인생 <시 119:17~24>
이 시편을 기록한 성도는 19절을 보니 자기를 이 땅의 “객” 곧 손이라고 했다. ‘객’이란 말은 외국인을 뜻한다. 그는 땅의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이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손님 노릇을 하고 있다. 그들이 비록 외국에 살고 있으나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고국에 있다. 이처럼 시인은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그는 장차 돌아갈 고국을 잊지 않았다. 이 시인 뿐 아니라 많은 성도들이 이 세상보다 높은 세계를 그리워하여 참 만족을 거기서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의 일시적인 시민은 될 수 있으나 영원한 시민은 아니란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른 동물, 식물들은 다 이 자연에게 적응하지만 사람만은 객이란 생각 곧 나그네란 개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조물주 하나님께서 인생에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며 특히 신자인 우리를 구속하사 내세천국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전 3:11, 눅 12:32). 그럼 나그네 인생인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본문에서 살펴 은혜를 받자.
1. 나그네 성도는 말씀을 보고 삶의 방향을 찾아야 한다.
19절에 보니,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라고 했다. 여행자에겐 여러 가지 생활의 필수품을 갖추어야 하지만 그 중에도 식량과 물, 그리고 지도와 방향을 알리는 나침반과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천성을 향해 가는 나그네 신자인 우리는 영혼의 양식과 생명수인 성경말씀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성경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덮은 책은 종이뭉치의 불과한 것이지 책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은 열어서 읽어야 하고 그 뜻을 이해하고 마음에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암 8:11~13에 보니,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정통으로 풀이해 주는 말씀을 바로 듣고 마음에 간직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또 지도와 방향을 가리켜 주는 나침반이고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필요하듯이 하늘가는 길을 가리켜 주는 성경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밀림지대를 통과하거나 사막을 여행하는 자에겐 위의 세 가지가 없으면 방향감각을 상실하여 유리방황 중에 식량과 물이 떨어져 죽는다는 것이다. 특히 캄캄한 밤중에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이나 하늘을 나르는 비행기엔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인 것이다. 이처럼 죄악으로 어두운 밤중 같은 세상에서 말씀의 안내가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소경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안내자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잠시 후에 이를 모르는 영적 소경이기 때문에 성경의 안내를 받아야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2. 나그네 성도는 삶의 목적이 오직 말씀을 지키려는데 일념해야 한다.
17절에 보니,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고 했다. 여기 시인은 주가 긍휼히 여겨 후대하여 살게 해 주신다면 일생을 주의 말씀을 지키고 살겠습니다. 고 다짐하고 있다.
우리의 이때까지 살아온 지난날을 회고해 보면 삼상 7:12의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와주심”으로 된 것뿐이다. 지은 죄를 짓밟아 가루를 내어 흩어 버리고 우리의 영혼을 지옥 불덩이에 던져 넣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우리지만 합 3:2의 말씀대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며 또 시 30:5에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는 자비에 따라 은혜의 삶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 116:12의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감격된 마음과 벧전 4:2,3의 말씀과 같이 불신 때에 지은 죄를 “지나간 때”로 족한 줄 알고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사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 말씀대로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또 19절 끝에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라고 기도해야겠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의 말씀의 뜻을 이해하려고 마음이 타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곧 20절의 말씀대로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절로 나서 되는 대로 살다가 절로 죽어 없어지는 무가치한 존재는 아니다. 시 31:15에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란 말씀대로 주께서 이 시대에 대한민국에 남자와 여자로, 아무개 가문에, 특히 부름 받아 아무개 교회서 훈련받으라고 보냄을 받은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물주 하나님이 이 시대에 필요해서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받은 달란트대로 충성을 하다가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야 하는 것이다. 결코 죄만 짓는 골칫덩어리 인생이 되지 말라. 또 무의미한 식물인간처럼 무기력한 소극적인 인생이 되지 말라. 또 밥만 축내는 기생충 같은 무익한 존재도 되지 말자. 오직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나그네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의 지도를 받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생을 보내는 보람 있고 알찬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자. 바울 사도와 같이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하는 일생이 되도록 하자(딤후 4:6~8).
3. 나그네 성도는 원수의 훼방과 멸시를 받으나 주께서 지키심을 확신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21절의 말씀대로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교만”한 “자를 주께서 꾸짖으시며” “저주를 받게”하시기 때문이다. 벧전 5:5에도 “주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하셨다. 둘째는 22절의 말씀대로 “주 증거를 지키”는 자의 기도를 들으사 원수의 “훼방과 멸시를” 제거해 주시기 대문이요 셋째는 23절의 말씀대로 권세 자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성도들을 “훼방”할지라도 주의 종들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므로 그것을 잊어버리게 되며 또 시 1:3의 말씀과 같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해지는 약속을 믿기 때문이요. 넷째는 24절의 말씀대로 성도는 고난 중에도 “주의 증거”가 “즐거움이” 되고 “모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주를 위해 당하는 고난은 슬프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위로와 기쁨이 되는 것이고 또 말씀은 고난 중에 참는 인내와 주께 맡기는 신앙적 여유를 가르쳐 주는 모사가 되는 것이다.
Ⅳ. 환란 중에서도 간직할 말씀 <시 119:25~32>
여기 영감 받아 말씀을 기록한 성도는 심한 환난 중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환란 중이었지만 말씀을 사모했고 그 앞에 회개했으며 그 뜻을 묵상하며 그 말씀 따라 달음박질하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환란 중에서도 간직할 말씀’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그럼 왜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해야 되는가?
1. 곤고할 때 부르짖으면 말씀으로 영혼을 소성시켜 주시고 굳게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25절에,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고 했고 28절은,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라고 하셨다.
‘진토(塵土)’란 찌꺼기 흙 또는 시궁창 같은 더러운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란 뜻은 죄로 타락한 자기 영혼의 더러움을 탄식하는 말인 것이다. 여기 성도는 선을 행하고 싶었으나 악이 속에 있어서 원치 않는 죄를 범한 자기의 영혼에 대해 탄식했다. 시 22:15은 “사망의 진토”라고 했다. 마치 롬 7:24의 말씀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죄와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바울사도의 탄식과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죄 때문에 환난이 온 줄 알고 주께 죄를 자복하고 부르짖는 사람에겐 그 영혼을 죄와 사망의 진토에서 소성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25절 하반에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고 부르짖은 것이었다. 그럼 왜 하나님의 말씀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진토에 빠진 자를 소성시켜 주시는가? 그것은 히 4:12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환난 중에 부르짖는 자의 영혼을 굳게 세워 주시는 것이다. 28절에,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라고 하셨다. 여기 “영혼의 눌림”이란 환난과 곤고로 인하여 시달림을 의미한다(박윤선). 또 녹사오니“란 말은 불이 붙은 양초가 녹아내리듯이 환난의 괴로움을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기도하면 주께서 그 시달린 심령을 살려 주실 뿐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사망 길에 빠진 몸이 캄캄한데 헤매며
부르짖는 나의 애원 들으소서
내 주여 주여 나를 돌아보사 고이 품어 주시고
험한 풍파 지나도록 나를 숨겨 주소서.
2. 죄를 고백하여 말씀을 배우면 주의 기이함을 묵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26, 7절에, “내가 나의 행위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라고 했고 29,30절에는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라고 한 말씀이 그런 뜻이다.
그렇다! 주의 말씀은 시 12:6의 말씀과 같이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이 순결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깨달으려면 더러운 죄를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를 준비하는 목사 전도사는 날마다 자기를 살펴 회개해야 되고 이 말씀을 듣는 교우 여러분들도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더러운 구정물통에 깨끗한 식수를 담을 수 없고 그 그릇을 비우고 씻고 깨끗하게 한 다음이라야 받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깨달아지면 주의 기이함을 묵상하게 되는 것이다. ‘기이’하다는 뜻은 주님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은 예수님의 구원을 증거하는 책인 것이다(요 5:39, 눅 24:27). 그러므로 이 구원의 즐거움을 가져야 모든 환난의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참을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욥기서를 환난을 참으면 배나 축복을 받는다는 교훈이라고 하나 그것은 지엽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실은 욥에게 세상축복 곧 자식 재물 종 건강 사랑 친구 등을 다 뺏아 고독하게 만들어 영원한 예수님을 믿어 영생 복락을 누리게 하기 위해 섭리 중 환난을 준 것이었다. 그러므로 욥 19:25에,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고 고통 중에도 희열에 넘쳐 부르짖은 것이었다. ‘나의 구속자’란 말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죄 없는 예수께서 십자가로서 속죄의 죽음을 당하신 것을 말함이고 ‘살아계시니’란 말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고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는 말은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예수님을 회개하고 믿은 다음 땅에 복을 배나 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환난 당한 성도는 죄를 회개하여 말씀을 배우며 주의 기이한 구원을 묵상 곧 소망하므로 위로 받고 참기를 바란다.
3. 주의 말씀에 밀접하면 은혜로 행하게 되어 수치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31절에,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수치를 당케 마소서”라고 했고 29절 하반에는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라고 했다.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란 말은 주관적으로는 주의 말씀을 가까이 몸에 붙인 것을 말하고 객관적으로는 주의 말씀에 사로잡힌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의 법을 은혜로이 베푸소서.’라는 말은 억지로 되는 고행이 아니고 은혜로 깨달아지며 즐거움으로 행하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 마 11:29, 30을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다. 짐을 들기 싫어서 멀찍이 들면 무겁지만 일하기가 기뻐서 짐을 몸에 딱 붙이고 들면 가볍게 올라가는 것처럼 은혜 받아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을 순종하면 결코 고행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곧 시 1:2,3의 말씀처럼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해지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란 중에 실패하지 않고 승리하려면 주의 말씀에 밀접 되어 은혜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마음이 넓어지며 말씀을 향해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32절에,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고 했다. 여기 ‘마음이 넓어진다.’는 말은 넓은 지혜를 얻는다는 뜻이고 ‘계명의 길로 달려’간다는 말은 열심 충성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환난 중에도 말씀을 간직하는 자는 마음이 넓어지며 충성된 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좁은 두뇌를 가진 인생의 주관적 지식의 산물이 아니고 우주만물을 창조하시며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대주재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주전 1500년에서 주후 100년 곧 1600년이나 걸쳐서 기록했고 또 편집된 방대한 여호와의 책인 것이다. 이 안에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는 폭넓은 문학적인 표현이 있고(사 1:2) 별과 별 사이에 사람이 왕래한다는 우주여행시대를 내다보고 말한 차원 높은 대목도 있다(욜 1:4). 그러나 그보다도 성경은 아담으로부터 오고 오는 세대에 걸쳐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록된 폭넓은 여호와의 책인 것이다. 그러므로 토착화란 말은 좁은 머리에 소유자가 하는 말이다. 기독교는 세계를 상대하는 종교인 것이다. 롬 3:29에,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고 했고 마 28:19,20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했고 막 16:15은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모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고 행 1:8은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다. 그러므로 말씀의 은혜를 받으면 자기중심의 좁은 자가 아니라 세계복음화를 위해 달려가는 폭넓은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Ⅴ.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119:33~40>
33절에서 40절까지의 요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면 그것을 지키기로 힘쓰겠다는 것과 또 그것을 실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35절 상반에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또 36절 하반엔 “탐욕으로 행치 말게 하소서” 또 37절 하반에,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또 38절 하반에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또 40절 하반에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란 구절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실행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실 이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실행하게 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란 것이다(박윤선). 그리고 말씀을 바르게 실행하기 위해선 바로 깨달아야 된다고 33,4절에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그럼 왜 주의 도를 주께로부터 배워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1. 주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33~35절에,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라고 하셨다.
우린 세상공부를 하나의 지적만족을 채우는 정도로 그쳐서는 안되고 배운바를 실사회에 나가서 활용하는 자가 되어야 배운 보람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면 실생활에 실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본문을 기록한 성도는 어떤 사람을 선생으로 모시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는 선생이 도어 주시기를 소원했다. 사실 우리가 성경학자나 여러 권위 있는 책들을 통해서 또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서 배운다고 하지만 결국은 성령님의 감동이 아니고 바로 배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 성령님의 역사로 배워야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곧 나의 생의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고 ‘전심’ 곧 일편단심 충성 되이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① 주의 말씀은 차원 높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 55:8~9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셨다. ②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히 12:9에,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③ 축복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수 8:34에,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말씀을 바로 배워 바로 지키는 자가 되어야겠다.
우리가 만일 말씀을 지키지 않고 배우기만 한다면 이는 기초 없이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와 같고 하반신이 자라지 않고 머리만 큰 괴물과 같은 자요 헤롯왕의 어용학자들처럼 미가서를 통해 예수님 나실 장소 곧 베들레헴을 알기는 했지만 찾아가지 아니하므로 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격이 되어 성경이 예언한 예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영혼이 되어 지고 마는 것이며 성경을 안다고 자랑한 결과는 헤롯왕을 충동질하여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의 남자들을 몰살시키는 비극을 초래한 원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지적 신앙은 자신과 남에게 화를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를 빚어내는 것이다. 고등비평가 곧 신신학자들은 소위 합리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취사선택하는 자들이니 이들이 바로 기독교의 대원수임을 알고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린 다시 한 번 성경을 배우는 목적 곧 설교 듣는 목적을 재확인해야겠다. 곧 말씀을 지키기 위해 배우고 듣는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그러나 이것은 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깨닫게 해야 되고 또 즐거움으로 행하게 해 주셔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주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가르쳐 주옵소서 아기같이 어리고 미련하고 둔하니 가르쳐 주옵소서 미련하고 둔하니 가르쳐 주옵소서
2. 주님을 두려워 섬기게 하기 위해서이다.
38절에 보니,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라고 하셨다. 우리는 주의 피로 구속받은 주의 종들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두려워 섬겨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신조여야겠다. 그러므로 지혜자 솔로몬은 전 12:13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주를 경외하는 신앙이 있어야 36절의 말씀처럼 ‘탐욕으로 향치’ 않게 되는 것이고 37절의 말씀대로 ‘내 눈을 돌이켜 허탈한 것을 보지’않고 되는 것이다. 분명히 허탈한 것을 보고 탐욕으로 내려가는 것은 주를 경외하는 신앙이 부족함으로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아구까지 채우니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이었다. 우리도 심령 속에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야 새 사람으로 변화가 되는 것이다. 청년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과 자기의 정욕을 이긴 것은 그 속에 소년 때의 꿈으로 계시 받은 말씀이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형들의 곡식 단이 자기의 곡식 단에게 절하는 것과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한다는 계시에 대한 확신이 그 마음에 넘쳐 있었기 때문에 감히 죄악이 그를 침범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38절의 말씀대로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곧 가득 채워 주셔서 흔들리지 않게 해 달라고 해야겠다. 예수님은 말씀을 속에 가득 채워 있었기 때문에 마귀가 시험해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의 검으로 이기신 것이었다.
3. 대적들의 훼방을 떠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39절에 보니,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라고 하셨다.
내 잘못으로 말미암아 주의 종교가 훼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럴 때는 변명말고 솔직히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된다. 그러나 어떤 때는 까닭 없이 대적들이 훼방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주 앞에 충성하는데도 오해하고 거짓으로 모함하는 일이 있다. 이럴 때 “저 거짓을 말하는 입술을 침묵케 하소서”라고 기도해야겠지만 주의 선하신 말씀따라 꾸준히 충성하게 되면 훼방 자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벧전 2:12에,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 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말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로마제국이 300년 동안 기독교신자들을 맹렬하게 핍박했지만 마침내 그들 스스로가 항복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맞아들인 것은 신자들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며 내세심판을 믿고 죄를 떠나며 일편단심 선행하는 일에 감동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윤선 목사는 후배들에게 “한 우물을 깊이 파시오 그러면 옆에 것이 무너집니다!” 곧 “한 가지 일에 묵묵히 충성하면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들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맺는 말
이 시편을 기록한 성도는 주께서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행하게 하시며 주를 경외하게 하시며 원수의 훼방을 막아 주시기 때문에 그는 40절의 말씀처럼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겠”다고 했고 끝으로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곧 주님의 말씀으로 생명을 얻어 구원의 즐거움으로 순종케 하소서 라고 했다.
Ⅵ.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시 119:41~48(43)>
여기의 성도는 진리의 말씀이 자기의 마음 속에 차지 못해 허전함을 느꼈기 때문에 43절에 보니,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 성도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어야 남에게 때에 알맞은 말로 위로도 하고 책망도 하고 가르칠 수도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의 규례’ 곧 말씀이 가까이 있어야 자기 자신이 지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주의 규례를 바란다.’고 했다. 이 사실을 41~48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43절 상반에 있는 말씀 곧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는 본문을 그대로 제목삼아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여기 41~48의 본문을 보니 진리의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 자가 받을 다섯 가지의 유익을 말하고 있다.
1. 약속의 말씀따라 구해 주시므로 훼방자에게 대답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는 것이다.
41,2절에,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이니이다.”란 말씀이 그런 뜻이다. 여기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이란 말은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에 속한 것이지 사람의 노력과 공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주의 말씀대로’ 곧 약속대로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훼방하는 자’의 입을 막아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 신자들의 구원이 완전히 성취될 때 주를 믿는다는 일이 헛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남으로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과 같이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하고 말씀을 떠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요 6:68). 우리는 구원이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고 가까이 해야겠다.
2. 진리의 말씀을 내 입에 주시면 자신이 끝까지 지킬 뿐 아니라 후대들에게도 전하여 영원토록 지키게 하는 유익이 있다는 것이다.
44절에,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는 말씀이 그런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늘 입에 두고 자신이 지킬 뿐 아니라 자녀들에게 계속 전해야겠다. 부산 동일교회의 김부흥 집사님은 아이들이 집을 나갈라치면 “아무개야 알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라고 시작하면 “압니다. 그 다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란 거지요!” “그래 하나님의 말씀이다이! 꼭 지켜야 된다이!” 하고 가르친다. 아이들이 처음엔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지만 장성하면서 그 말이 골수에 박혀 신앙생활을 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린 주의 말씀을 다음 세대가 바로 받을 수 있도록 입으로 늘 가르쳐야겠다. 그러므로 딤후 2:2에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하셨고 사 59:21엔,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3. 말씀 안에 살면 자유로이 행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는 것이다.
45절에,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라고 했다. 사람들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얽매이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실은 그 반대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궤도와 같아서 사람이 그것을 따라가면 안전하기 때문에 도리어 거기엔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박윤선). 예를 들면 우리가 믿기 전에는 집안사람 중에 눈병이 생길까봐서 못 한 개도 마음놓고 치지 못했으며 심하게는 통시귀신이 노할까봐 변소하나도 제대로 옮기지 못했으며 이사 결혼 등도 일일이 점쟁이에게 물어서 결정을 하는 미신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믿은 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 얼마나 쉽고 자유로운지 경험한 바 그대로인 것이다.
마 11:28~30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셨고 요 8:32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4. 말씀이 입에 있는 자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권세자 앞에서도 담대히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는 것이다.
46절에,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사오며”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과 입에 가득 채워 있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청년은 느부갓네살 왕 앞에서 우상숭배는 옳지 않다고 죽음을 각오하고 담대하게 말했으며 그로 인해 평소보다 칠 배나 뜨거운 풀무 불에 던짐을 당했지만 던진 사람이 타 죽었지 그들은 주의 보호로 타지 않았기 때문에 ‘수치를 당치 아니한’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믿고 담대해야겠다. 종이 한 장은 찢어지기 쉽지만 벽에 붙으면 뚫지도 못하고 찢지도 못하는 것처럼 말씀을 믿으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하게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5. 말씀을 가진 자는 그것을 즐거워하며 환영하며 사모하게 되는 유익이 있다는 것이다.
47, 8절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고 하였다. 여기 ‘손을 든다’는 말은 주의 계명을 원하며 사랑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좋아 그 뜻을 연구하는 즐거움을 가진다는 것이다. 나는 말씀을 연구하는 즐거움을 가진 행복한 분을 한 분 잘 알고 있다. 그분은 일곱 살에 예수를 믿었고 팔십 육 세에 별세한 오종덕 목사님이신데 그는 하루에 세 시간만 자고 그 외에는 일편단심 성경연구에 힘쓰며 가르치기를 힘쓰고 즐거워한 생활을 보냈다. 그야말로 행복에 젖은 사람이었다.
Ⅶ. 유일한 소망인 하나님의 말씀 <시 119:49~56>
여기 본문을 보니 이 시편을 기록한 성도는 원수에게 박해를 받는 환란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위안을 얻었으며 그 말씀을 엄수했다(49~51). 심하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자들을 인하여 상심이 된 때에도 그는 오직 말씀으로 위안을 받았으며 긴 환난의 밤에도 이 말씀을 유일한 소망으로 알고 지켰다. 참으로 그에게 있어서 보배로운 소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었다(박윤선). 그래서 본문을 가지고 ‘유일한 소망인 하나님의 말씀’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그럼 왜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는 것인가?
1. 주께서 하신 말씀을 주께서 기억하시기 때문이다.
49절에,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라고 했다.
유한하고 잊음이 많고 자주 변하는 사람의 말이라면 우리는 그 말에 기대를 걸 수 없지마는 무한하시고 잊음이 없고 변하지 아니하시는 분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 안심하고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시인은 ‘주의 종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하사’이루어 주옵소서 하고 기도한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주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신 말씀의 신실함을 재확인하고 말씀의 토대 위에 굳게 서길 바란다. 민 23:19,20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고 하셨다. 여기 ‘식언치 않으시고’라는 말씀은 무책임한 말을 안 한다, 결코 말에 부도를 내지 않는다는 뜻이요. ‘후회가 없으시도다.’라는 말씀은 완전무결한 분이시기 때문에 실언을 않는다는 뜻이요. ‘돌이킬 수 없도다’라는 말씀은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을 인간편의 부족이 있다 해도 절대 취소하는 일이 없다는 확실한 말씀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51절의 말씀과 같이 불신의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는 신자가 되어야겠다. 주가 주신 약속 위에 굳게 서 영원토록 주를 찬송하리라 소리 높여 주께 영광 돌리며 약속 믿고 굳게 서리라 굳게 서리 영원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리 굳게 서리 그 말씀 소망 위에 서리라.
2.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살려주시기 때문이다.
50절에,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고 했다. 그렇다! 대개의 경우 환난을 당해서 구주를 믿는 일이 많다. 질병을 고치기 위해서, 부모 형제 자식 친구 등의 죽음으로 인생의 허무를 깨닫는데서, 사업의 실패로 생활의 위협을 받는데서, 연애결혼 등의 실패로 마음의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서, 그밖에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번민 고통 곧 사람이 어디서 오며,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서 주께 돌아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어 위로를 받는 자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주의 말씀이 평소에도 나를 살리셨음으로 곧 영적 생명의 희열과 용기와 삶의 힘을 주시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험을 가진 자들은 환난 많은 세상이지만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54절에,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내 주 예수 지난 죄는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니
할렐루야 내 주 예수 지난 죄는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3. 말씀의 신실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2절에,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를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는 말씀이 그런 뜻이다. ‘옛 규례’란 말은 오래 전부터 참된 것으로 드러나 있고 견고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뜻이다.(박윤선). 그러므로 신자는 현재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났다 할지라도 낙심할 것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백년 천년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례를 들면 행7:6~7에,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고 한 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4대 후 요셉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이민했으며 4백 년 동안 애굽 사람을 섬기다가 모세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나왔으며 나중후계자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증명이 된다. 그러므로 환난의 밤 모든 것을 잊어버린 밤에도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켜야겠다. 55절에,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고 했다. 그렇다! 환난의 밤에 또한 대부분의 사람이 말씀을 잊어버리는 그런 밤에도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는 자야말로 복 있는 자가 아닐 수 없다. 행 28:22을 보면,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을 우리가 앎이라”고 했으니 언제나 이렇게 평안한 것이 아니고 일정말엽이나 공산치하에서 있었던 박해도 있음을 각오해야겠다. 그럴 때 원수들이 성경 찬송가책을 뺐어 가기도 많은 성구와 찬송가를 기억해 둔다면 신앙절개를 지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는 성경 찬송가책은 뺏어 가도 마음속에 기억한 것은 뺏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실한 주의 말씀을 평화로울 때 많이 배워 심령창고에 가득 채우는 사람이 되자. 한편 이렇게 역사적으로도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에게 형벌이 내릴 것을 아는 성도는 치를 떨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53절에,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에게 가지는 성도의 의분인 동시에 그들이 받을 형벌을 생각하고 심히 두려워하다 심사를 말하는 것이다. 소돔 고모라성이 불타기 전에 어른의 경고를 농담으로 알다가 타 죽은 롯의 사위들, 또 뒤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본 롯과 그의 딸들이 얼마나 놀랐겠는가를 생각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떨며 순종하는 자가 되자.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원수에게 뺏길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만은 마음 속 깊이 간직하는 자가 되어야겠다. 56절에,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고 이것만이 영원한 구원이요 상급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립 피이 브리스(1874)란 성도는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이란 찬송가를 지었는데 2절에, “귀한 그 말씀 내 노래 제목이 되도다 모든 사람을 복 주는 생명의 말씀을 값도 없이 받아 생명 길을 가니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샘 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샘이로다.”고 했다.
Ⅷ. 변절(變節)하지 말고 말씀을 지키자 <시 119:57~64>
61절 상반에, “악인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라는 말은 자기를 죽이려고 이중 삼중으로 포위를 당한 곤란한 처지를 뜻하는 것이고 62절 중간에 “밤중”이란 말은 환란의 밤을 뜻하는 것이다. 또 61절 하반에,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란 말은 동산 부동산을 원수에게 빼앗겼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암시이다. 19세기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대부흥사 무디 선생은 집이 불에 탔을 때 가족들이 우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이 타버렸지만 말씀은 남아 있다!”고 위로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62절에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란 말은 말씀의 단맛에 사로잡혀 환란의 고통 중에도 주께 감사한다는 뜻이다.
이 시간은 57~64까지의 말씀을 통해 “환란 중에도 변절하지 말고 말씀을 지키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그럼 왜 환란이 와도 변절하지 말고 말씀을 지켜야 하는가?
1. 하나님의 말씀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57절에,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했다. 여기 ‘분깃’이란 산업 또는 소득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분깃’란 말은 하나님의 소유는 모두 나의 것이란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의 아버지시요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소유를 상속하는 자들이다. 롬 8:17상반에, “자녀이면 후사 곧 상속자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나라에 가서 상속을 누릴 때까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시며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이르는 길은 영감으로 기록한 말씀의 길로 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하셨다. 비행기는 항로를, 배는 해로를, 자동차는 도로를, 기차는 선로를 통해 가는 것처럼 천국에 가는 길은 성경 말씀을 통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천국은 성경에 명시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은혜 곧 그의 긍휼로 말미암아 가는 것이기 때문에 58절에,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워야하고 배운 바를 확신하고 그의 공로를 힘입어야겠다.
-죄를 지은 까닭에 저의 맘이 곤하니
안된 것을 고치고 쉬게 하여 줍소서
천국 가고 싶으나 저의 공로 없으니
예수공로 입어서 감당하게 합소서
(새찬송가 113:2).
2.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통수단으로 자동차, 기차, 배, 비행기 등을 이용한다. 회사 측에서 알뜰히 정비하고 운행에 각별히 조심을 하지만 기후관계로 또는 실수로 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 때론 수해로 도로가 파헤쳐지고 선로가 파괴되는 일도 있어 운행이 정지되기도 한다. 그럴 때는 즉시 고쳐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는 완전을 목표하고 살아가지만 성화되어 가는 과정에 놓여 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또는 연약하여 범죄 하는 일이 있다. 이럴 때 말씀을 생각하고 돌이켜야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변절하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59,60절에,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고 한 것이다. 죄는 지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 지었다면 결코 마음속에 오래 머물러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가 틈을 타서 걷잡을 수 없이 내리막길로 가게 하기 때문이다. 잠 18:13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주시고
사랑하는 그의 제자 가슴에 안고
부드러운 사랑으로 품어주셨네
어저께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한결같은 주 예수님 찬미합시다.
세상지나고 변할지라도
영원불변 주 예수 찬미합시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약하다. 더욱이 혼자는 더하다. 그러므로 출 18:18에, “혼자 할 수 없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약한 사람이지만 뭉치면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 18:20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다. 특히 환란 중에는 신앙의 동지가 있어야 한다. 서로 기도하고 위로하고 격려해야 주를 위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환란을 당한 성도도 63절에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고 하였다.
나는 일본 신사참배 반대로 6,7년 옥고를 겪으신 전봉성(全鳳成) 목사님을 몇 해 전부터 알고 사귀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의 말을 들으니 일본 형사에게 구속되어 가는데 미국선교사 한부선 목사님도 다른 형사에게 잡혀가면서 큰 소리로 “전조사님! 예수 위해 죽읍시다!”고 외치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춥고 배고프고 고문을 당할 때마다 “예수 위해 죽읍시다!”라는 말 때문에 용기를 얻어 견뎌 냈다는 것이다. 우린 주를 위해 고난을 견딘 사람과 사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 뿐 아니라 환란을 견디려면 말씀을 끝없이 배워야 하는 것이다. 64절에,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라는 말이 그런 뜻이다. 역시 전봉성 목사가 하신 말씀이다. 한부선 선교사는 감방 벽에 나무 조각 같은 것으로 “환란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 등을 새겨 다른 사람이 들어 와서 읽고 힘을 얻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같은 수난성도 원신(元信) 목사가 반월공단 사리중앙교회에 시무했는데 몇 해전 그 교회서 한부선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사경회를 열고 은혜를 받은 때였다. 아들 원순철 목사가 한부선 목사에게 “목사님! 75년간 우리나라에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애숭이 목사에게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즉시 “성경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딱딱하지만 교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교파가 많지만 장로교에서 순교자가 제일 많이 나왔습니다!”고 하더란 것이다. 오늘 수십만이 모인다는 교회의 구역장들을 세뇌시켜 “우리교회 나오면 부자 됩니다. 병이 낫습니다. 사업에 성공합니다. 3개월만 나와 보십시오”라고 전도한다는 것이다. 다니다가 딴 교회로 가려면 “다른 교회가면 망합니다!”고 하니 겁이 나서 가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일시적인 세상 복, 없어질 물질, 썩어질 육체, 이렇게 땅에 복만 말하는 것이 기독교일까? “예수 믿으면 죗값으로 저주받아 지옥 갈 영혼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건강도 주시고 사업도 잘되게 하시고 자녀의 복도 주시지만 때론 세상에 정붙이지 못하도록 땅에 것 거두어 갈 때도 있습니다. 먼저 영혼 구원받고 마지막날에 육신도 부활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위해 고생이 되어도 참읍시다”고 해야 이것이 바른 전도인 것이다.
Ⅸ. 고난 중 말씀을 배우고 지키자. <119:65~72>
여기 믿음의 시인은 고난을 당하는 중 하나님이 자기에게 선하게 대우하심을 깨닫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지키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시지마는 범죄자를 회개시키며 미완성의 인간을 완전케 하시려고 고난을 성화되게 하는 방편으로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이 올 때 나의 지은 죄가 무엇인가를 살펴 즉시 회개해야 하고 또 죄가 없는데도 당하는 고난이라면 연단의 목적으로 주신 줄 알고 낙심말고 기도하며 지혜를 얻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될 것이다. 이 시간은 65~72의 본문으로 ‘고난 중 말씀을 배우고 지키자’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교훈을 받고자 한다.
1. 왜 고난 중에도 말씀을 배우며 지켜야 하는가?
1) 믿는 자를 선대해 주시기 때문이다.
65절에,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고 하셨다. 우리 중 혹 범죄 하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절대 성결하신 하나님 앞에선 자랑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 64:6에 보니,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를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하셨다. 때론 몰라서 죄를 짓고 어떤 때는 알면서도 연약하므로 범죄 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위를 볼 때 짓밟아 가루를 만들어 지옥 밑바닥으로 내던져 버려도 할 말이 없지만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선대까지 해 주시니 이 선대의 은혜 무엇으로 보답해야 옳은가! 자식이 부모 은공을 보답하는 길은 그저 배우고 순종하는 길 밖에 없는 것처럼 ‘주의 종’은 그저 감사하고 배우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겠다.
2) 천천 금은보다 낫기 때문이다.
72절에,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고 하셨다. ‘천천 금은’이란 막대한 땅의 보화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거기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이다. 그 당시 그가 가진 성경은 모세 5경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높이 평가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은 ‘주의 입’에서 나온 직접 영감 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보다 더 완전한 신구약 성경을 갖고 있으면서 ‘천천 금은보다’ 못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지나 않았는지 반성해 봐야겠다. 사실 영감으로 기록된 영혼을 살리는 위력 있는 것이니 ‘천천 금은’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도 말씀만은 굳게 붙들고 배우며 지켜야겠다.
2. 어떻게 배우며 지킬 것인가?
1) 믿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66절에,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하셨다. 그렇다! 만일 성경을 지적으로만 배울 대 이는 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 곧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 곧 물위에 기름이 뜨듯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고 배워야겠다. 히 11:3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참 지식은 믿음이 앞서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으로 성경을 배우는 자에겐 더 큰 믿음을 얻어 살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딤후 3:14에,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하셨다.
2) 선행하면서 배워야 되는 것이다.
68절에,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하셨다. ‘주’는 절대 성결하사 그에겐 악이 없다. 과연 예수님은 죄 없이 나시고 죄를 범치 않으시고 죄 없는 분이 죄인들을 대신하사 죽으셨기 때문에 죄의 삯은 사망이란 반대로 그는 다시 살아나신 것이었다. 그가 세상에 계실 때 행 1:1에 보니, “행하시며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그가 영감을 주어 기록된 성경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행하도록 가르치기에 합당한 것이다. 딤후 3:16, 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겠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나를 주의 말씀으로 가르치사 선하게 만드시고 선을 행케 하소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전심으로 배우고 지켜야겠다.
69절에,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거 하였다.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킨다는 말은 앞에 말 곧 ‘고민한 자’의 반대로 겸손한 자가 되는 것이고 ‘거짓을’만드는 자의 반대로 진실해야 하는 것이고 남을 ‘치려’는 자가 아니요 억울해도 참는 마음으로 일편단심 주를 바라보고 그 말씀을 지키는 마음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전심으로 주의 말씀을 배우는 자에게 주께서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대하 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셨다.
3. 말씀을 배우고 지키는 자가 받는 유익은 무엇인가?
1) 고난이 유익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67절,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 했고 71절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는 말씀이 그런 뜻이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다’는 곧 곁길로 갔다는 것이다. 죄란 곁길로 가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편하고 안락할 때 하나님을 멀리하기 쉽다. 육에 속하고 세상 것만 좋아하고 거기에 주저앉기 쉽다. 그러나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곧 매맞은 다음엔 곁길로 가던 것 바로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탕자가 흉년을 겪고서야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것처럼 인생의 여러 가지 고난을 맛보고서야 주를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요즘 나름대로 한국교회를 진단하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대개가 고난을 겪었으며 지극히 선한 성도들이 고난을 받고 살아 왔는데 요즘 교인들은 왜 땅에 축복만을 구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 얼마나 차원 높은 신앙고백인가! 나는 종종 나환자들이 모인 교회에 가서 은혜를 받곤 한다. 그것은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주님 문둥병 되게 하사 예수 믿게 하심을 감사합니다.”라고 시작하는 기도에 은혜를 받는 것이다. 이야말로 불행으로 보이는 고난이 믿는 자에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었다는 고백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떤 성도는 기도응답으로 두통이 나았는데 죄스러운 생각이 자주 일어나자 “주여 내게 다시 두통을 주옵소서.”라고 했다고 하니 이는 고난이 평안한 것보다 얼마나 주를 가까이 하게 하는가를 알게 하는 기도가 아닐 수 없다.
2) 영원한 주의 말씀으로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70절에, “저희 마음은 살져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고 했다.
우리가 만일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난뿐이라면 일생을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또 이것을 견뎠다고 하면 기독교는 고행주의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결코 기독교는 고행이 아니라 즐거움의 종교인 것이다. 이 즐거움은 성경을 통해서 오는 구원의 즐거움이요 말씀을 깨닫고 기뻐하는 영혼의 즐거움인 것이다. 여기 ‘저희 마음은 살져 지방같’다는 말은 불신자의 교만한 마음 세상 것으로 가득 찬 부와 육의 일시적인 쾌락의 만족을 말한다. 그러나 신자의 즐거움은 이런 것보다 말씀을 통해 받는 영원한 즐거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J.S. 밀은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배고픈 인가니 되는 것이 바람직하고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불만이 가득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우린 예수 믿고 말씀을 지키고 산다고 핍박과 박해를 받아 의식주 생활의 위협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색하고 즐거워하는 참 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Ⅹ. 괴로울 때 말씀을 묵상하라 <시 119:73~80>
여기 본문은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창조주시요 그 인격은 의로우셔서 사람을 함부로 괴롭히지 않으시며 괴롭히시는 이유는 의로 교육하시기 위해 사랑으로 징계하시는 것이요 그리고 고난이 너무 오래 계속되면 정신이 쇠약해지므로 주님의 긍휼을 바라보고 기도했으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소망 중에 참았더니 마침내 교만한 원수들을 하나님이 실패케 하셨으며 결과적으로는 주를 섬기는 성도들이 나 때문에 기뻐했고 또 내 잘못으로 내 곁을 떠났던 성도들이 돌아와 다시 교제를 나누게 되는 기쁨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도 온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결코 실패가 없음을 나는 확신한다고 고백한 시편인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으로 ‘괴로울 때 말씀을 묵상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그럼 왜 괴로울 때 말씀을 묵상해야 되는가?
1. 말씀을 묵상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를 만드셨고 또 세우셨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73절에,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으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시다. 특히 만물 중 인생을 신묘막측하게 지으신 분이시다. 결코 인간을 무의미하게 또는 아무 목적 없이 지으신 분은 아니시다. 그 중에 신자는 영혼이 새로 지음 받은 자요 특별한 주님의 소유로 택함을 받은 자요 또 그 가운데 주의 몸 된 교회의 일군 곧 목사, 장로, 전도사, 권사, 집사, 교사, 찬양대원 등으로 세워 주셨다. 그러므로 주께서 새로 지으시고 세우신 주의 종들을 환란 중에 내버리는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괴로울 때 약속한 축복의 말씀을 묵상하고 소망 중에 살아야겠다. 많은 말씀 중 민 23:19~21에 보니,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 도다”고 하셨으니 범죄 하여 매를 맞는 중에도 이런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실망하지 말아야겠다.
2. 말씀을 묵상하면 고통 중에서도 말씀대로 긍휼을 베푸시는 주의 사랑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 시인은 자기에게 내린 징계의 고난이 하나님의 정확한 판단아래 된 것을 고백하고 있다. 75절에,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 이니이다.”고 했다. 우린 때로 “왜 하나님이 내게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불만을 토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판단은 의로운 것이다. 그렇다! 고난이 자기에게 합당한 줄 알아야 진정한 회개가 나오는 것이고 그 말씀을 따라 주님의 위로와 긍휼을 원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76, 7절에,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나로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 이니이다.”고 했다. 사실 범죄로 말미암아 매맞는 죄인이 감히 하나님께 어떻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용서를 비오니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나로 살게 하소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은 고통 중에도 영감 되어 시 30:5에 말하기를,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했고 하박국은 3:2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올때 내 죗값으로 마땅히 당한 줄 알고 불만대신 감사하면서 회개해야하고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주께 부르짖어 용서받음으로 사죄의 ‘즐거움’을 맛보는 신자가 되어야겠다.
3. 말씀을 묵상하면 성도들을 괴롭히는 교만한 자들이 반드시 실패하는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78절에, “교만한 자가 무고히 나를 엎드려뜨렸으니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소서 나는 주의 법도를 묵상하리이다.”고 했다.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예수 믿는 자들을 아무 연고도 없이 싫어한다. 이런 자들인데 신자의 조그마한 약점이라도 하나 붙들었다면 물고 늘어지는 것은 뻔 한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비록 신자가 잘못함으로 불신자들을 인생 막대기로 징계하는 도구로 쓰시지만 그들이 지나치게 교만히 굴면 주께서 그들을 또한 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보고 침 뱉으면 자기 얼굴에 떨어진다는 속담대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신자를 괴롭히면 반드시 그들에게 형벌을 내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불신자가 교만하게 덤빌 때 그들을 상대할 것이 아니라 교만한 자를 꺾으시는 주께 부르짖어야겠다. 그러면 징계 중에도 긍휼을 베푸사 매를 거두어 주시며 원수를 주께서 부끄럽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괴롭히는 바로와 그 백성을 치셨으며 지나치게 교만한 하만을 자기 술수에 넘어가게 만들어 죽여 버리고 말지 않았던가!
4. 말씀을 묵상하면 말씀중심으로 사는 성도들이 함께 기뻐하기 때문이다.
74절에,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고 했다. 이는 괴로웠던 시험이 지났음을 보고 동료 성도들이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 속에는 그가 괴로울 때 자기가 친히 당한 것처럼 생각한 사랑 많은 성도들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또 79절에, “주를 경외하는 자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의 증거를 알리이다”고 했는데 이는 자기의 잘못으로 일단 곁을 떠난 자들이 회개한 자기를 보고 기뻐서 찾아온 것을 말한다. 여기 본문을 어떤 사람은 다윗이 우리아를 죽이는 더러운 죄를 범했을 대 그가 비록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그에게서 멀리 떠났는데 그 때문에 다윗은 마음이 답답했다. 그러나 그가 징계를 맞고 회개하니 정직한 그들이 심히 그리워진 것이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주를 경외하는 자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라고 한 것이었다. 우린 이 대목에서 내가 이 대목에서 내가 범죄 함으로 신실한 성도들의 마음이 나를 멀리 떠나가지 않도록 해야겠고 또한 범죄 했으면 철저히 회개하여 용서를 받음으로 귀한 성도들의 발이 다시 내 곁을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5. 말씀을 묵상하고 살면 실패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80절에, “내 마음으로 주의 율례에 완전케 하사 나로 수치를 당치 않게 하소서”라고 했다. 이 말은 주의 말씀이 신자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으면 실패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성경 주석가 매튜 헨리는 이 대목을 해석하기를 “내 마음으로 완전케 하사 나로 창피하기 짝이 없는 죄에 빠지지 말게 하시며 하나님의 법도에서 멀리 떠나지 말게 하시고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내 마음으로 완전케 하사 나로 은총의 보좌에 담대하게 나아오게 하시며 심판 날에 흠 없이 얼굴을 들 수 있게 하소서”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전한 말씀을 자나 깨나 묵상하고 마음에 가득 채워야겠다. 그러면 불의와 타협하지 않게 되고 꿋꿋하게 승리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문어집안과 멸치 집안에 혼담이 있었다. 문어 집안은 좋다고 했으나 멸치 집안에서 강력하게 반대함으로 혼담이 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유는 “우리는 대대토록 뼈대 있는 집안인데 뼈가 곧 성경교리를 바로 배워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자손만대토록 주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겠다.
Ⅺ. 핍박 중에도 구원의 말씀을 바라보고 살자. <시 119:81~88>
기독교 2천년 사는 피의 기록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4세기에 걸친 초대교회의 박해, 중세 종교개혁시대의 수난 18세기 구라파로부터의 청교도들의 추방, 일제 말 신사참배거부로 인한 탄압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행 14:22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고 또 28:22엔,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날부터 그 나라 갈 때까지 고난을 각오하고 살아야겠다. 이 시간은 여기의 본문을 가지고 ‘핍박 중에도 구원의 말씀을 바라보고 살자’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교훈을 나누고자 한다.
1. 핍박 자가 가진 특징은 어떤 것인가?
전쟁에 이기려면 적을 잘 알아야 되는 것처럼 신령한 전투에 승리자가 되려면 핍박 자들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85~97에 보니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다.
1) 그들은 교만한 자들이다.
85절 상반에,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라고 하였다. 그들은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이니만큼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아니하는 최고의 교만 자들이다. 최근 북한 공산괴뢰 집단의 괴수 김일성은 오만하게도 자칭 그들 부자를 성부 성자라면서 1700만 북한 주민들에게 호칭하라고 강요한다고 하니 그들의 끝이 다되어 감을 보여 주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박해자들은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주께서 때가 되면 반드시 그들을 꺾고야 말 것이다.
2) 고의적으로 괴롭히는 자들이다.
85절 하반에,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고 했다.
이는 핍박자들이 교활하고 악독하여 비밀리에 짐승을 잡으려고 덫을 놓은 것과 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일제 말 악독한 일본인들이 조선의 신자 중 목사, 장로, 권사, 집사까지를 전부 멸하기 위해 땅을 파서 지하실에 쇠 의자를 만들어 거기 앉으면 전기가 통하여 죽도록 마든 다음, 일자를 1945년 8월 17일로 정했지만 이틀 전에 해방이 되므로 그들의 계획이 수포화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3) 거짓으로 죄를 덮어씌우는 자들이다.
86절 가운데 보면, “저희가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니”라는 말이 그런 뜻이다. 로마의 황제 네로가 로마시가지에 불을 지르고는 기독 신자들의 소행이라고 거짓말을 퍼뜨려 잡아 가두고 짐승의 밥으로 또는 불살라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고민 중 자살로 영육이 망하고 말았다.
4) 신자들을 세상에서 없애려는 자들이다.
87절 상반에 보니, “저희가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라고 했다. 핍박자들은 신자들을 땅에서 완전히 제거하려고 덤벼든다. 그러나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 보존되는 것이다. 아합 왕의 박해 때 엘리야가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고 했지만 주께서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고 하셨다. 그렇다! 땅은 온유한 자가 차지하는 것이지 포악한 자가 차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 성경을 없애려는 자들이다.
87절 하반에, “나의 주의 법도를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라는 말은 핍박 중에도 말씀을 지키는 절개를 변치 않았다는 말인 동시에 핍박 자들이 성경을 없애려고 압력을 가한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허사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불같으며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기 때문이다(렘 23:29). 일본이 우리나라를 삼키고 말과 글을 없애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한민족의 글도 없애기가 힘들겠거든 영감 된 여호와의 책을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말씀을 붙잡고 살도록 하자.
2. 구원의 말씀을 바라보고 살자.
81~84에,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내가 연기 중의 가죽병 같이 되었으나 오히려 주의 율례를 잊지 아니하나이다.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를 주께서 언제나 국문하시리이까.”라고 했다. 이는 영육 간 피곤하여 주께 애원하는 기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위로부터 오는 도움을 갈망하면서 “주여 내 영혼이 피곤하오며 내 눈이 피곤하나이다. 그러므로 주의 구원과 주의 말씀을 내게 베푸사 소망 중 위안을 얻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이었다.
특히 83절에, “내가 연기 중의 가죽병 같이 되었”다는 말은 핍박 때문에 가죽 병이 연기로 거슬러 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싹 말라서 오그라든 것처럼 주리고 목마르고 영양실조로 앙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핍박 때문에 장미처럼 불그스레한 건강한 모습이 사라지고 꽃이 시든 것처럼 혈색이 없어지고 얼굴은 주름살로 가득 찼다는 것이다. 일제 말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다가 구사일생 격으로 해방이 되어 출옥한 성도들의 얼굴 모습이 흡사 그러했다.
그러나 여기의 성도는 이런 어려운 중에도 83절 하반에 보니, “오히려 주의 율례를 잊지 아니하니이다.”라고 했다.
그럼 주의 율례 곧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을 우리에게 약속하셨기에 잊지 않고 지켰는가?
1) 영혼구원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마 10:28상반에 보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의 육체는 핍박받는 고난이 아니더라도 병들고 늙고 때론 사고로 불구가 되고 마침내는 죽고 썩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왕 병들고 늙고 죽어 썩는 몸이라면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바울 같은 지혜 자가 되어야겠다(골 1:24). 그 뿐 아니라 육체의 고난은 땅에 속한 우리의 영혼을 거룩한 천국으로 향해 성화되게 하는 필수방편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도는 “주여 내게 노하소서!”라고 기도했다는 말을 들어 보았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 곳에 서게 합소서
그 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갑니다.
다시금 기도하오니 내 주여 인도합소서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합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2) 육체부활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인류는 누구를 막론하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형벌의 죽음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죽어도 다시 살 수 있었다. 이유는 그는 죄가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예수님이 약속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다(요11:25,6). 사도 바울은 이 부활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희열에 넘쳐 소리 높이 외쳤다. 그렇다! 수난 성도들이 비록 가죽병 같이 찌그러졌다 할지라도 장차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이 소망 때문에 육체가 망가지는 고난도 달게 참은 것이었다.
3) 영원한 상급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주를 위해 전폭을 바친 바울은 임종이 가까워지니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하였다(딤후 4:6~8). 고마운 것은 우리가 잘못한 것 주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며 행위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도 그것은 상이 되게 하시니 이 또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 상도 매우 귀하고 부활도 귀하다 저 천사 내려 보내사 내 영혼 올리리-
맺는 말
88절에,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로 소성케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증거를 내가 지키리이다.”고 하셨다. 이는 말씀하신대로 인자하신 하나님이 믿는 자를 환난에서 건져 주셨으니 계속 그 은혜에 감격하여 말씀을 지키겠다는 서약인 것이다. 고난의 때도 변절하지 않고 지키고 거기서 건짐을 받은 뒤는 더욱 감격하여 계속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Ⅻ.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 <시 119:89-96>
이 대목은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신 말씀을 믿고 고난 중에 참으면서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는 내용이다. 특히 여기에 성도는 지음 받은 천지만물이 오늘까지 변동이 없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있는 것을 들어 하나님의 소유인 택한 백성이 보호는 틀림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시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인가?
1)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이 영원하시고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89절에서 90절 상반에 보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라는 말씀이 그런 뜻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영감으로 주신 기록계시인 성경의 원저작자 하나님은 영원자존자이신 여호와이시다(출 3:14, 5).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다(히 13:8). 그러므로 그는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신 분이시다. 따라서 하신 구원의 말씀은 반드시 실행하시는 분이시요 그가 택한 백성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돌이킬 수 없는 신실한 말씀인 것이다(민 23:19, 20).
2) 말씀으로 지으신 천지 만물이 처음에 만들어진 그대로 오늘도 있기 때문이다.
90절 하반에서 91절에 보니,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고 하였다. 이 넓은 우주공간에 지구, 달, 태양,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이 처음에 만들어진 그대로 그 위치에서 돌아가므로 춘하추동 사시절이 생기며 오곡백과가 맺어 인류와 동물이 먹고살아 간다. 사람은 사람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각기 종류대로 존재의 일정성을 지니고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전능하사(말씀으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이 결코 입에 붙은 말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지으신 절대자시요 불변자시요 그가 영감으로 주신 성경말씀은 영원히 신실하신 말씀으로 믿고 살아야겠다.
2.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使役)은 어떤 것인가?
여기의 본문은 다섯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1) 말씀을 즐거워하는 자는 망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
92절에,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고 하였다. 여기 성도는 고난 중에 있었다. 너무 그 고난이 심하여 멸망할 뻔했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이 끝이 났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은 가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믿었다. 그는 그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 구원의 즐거움이 그 심령에 가득 채워졌다. 순간 그를 둘러싼 고독 슬픔 무서운 사망의 공포는 안개가 걷히듯 사라져갔다. 그렇다! 절망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 자에게 성경은 어느 때라도 즐거운 동무가 되어 줄 뿐 아니라 우리를 멸망의 고난 중에서 건져 주시는 것이다.
-널리 울리고 퍼지는 생명의 말씀은
맘에 용서와 평안을 골고루 주나니
다만 예수 말씀 들어 복을 받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샘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샘이로다
2) 주의 말씀을 영원히 잊지 않는 자를 주께서 살려 주신다는 것이다.
93절에,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고 한 말이 그런 뜻이다. 이 말은 내가 주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결심이 내포된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는 어떤 때에라도 말씀을 버리지 않아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말씀을 멀리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주께서도 우리를 잊지 않고 살려 주시는 것이다. 보라! 말씀을 지키겠다고 일편단심 충성한 엘리야를 흉년 때 까마귀를 통해 먹여 주셨으며 말씀을 믿고 엘리야를 대접한 사르밧 과부와 아들도 흉년 중에 이적으로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으로 먹여 살려 주시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예수님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곧 말씀에 순종함으로 산다고 하셨다(마4:4).
3) 주의 것인 줄 아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94절에,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를 찾았나이다.”고 하였다. 그렇다! 자기가 주의 지음을 받은 피조자임을 아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 것이다. 사 43:1에 약속하시기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렸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 ‘내 것이라’는 말씀은 나의 소유이니 아무도 손을 대지 말라는 선포인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가!
4) 주의 증거를 생각하는 자를 주께서 악인의 손에서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95절에, “악인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를 생각하겠나이다.”고 하였다. 여기의 성도는 그의 적들의 완악함을 탄식하여 말하기를 ‘악인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나이다.’고 했다. 이는 그 악인이 매우 잔인하여 성도의 파멸을 겨냥하고 불행에 몰아넣으려고 모든 기회를 엿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의 성도는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주의 증거를 생각했다. 그렇다! 주님은 인간의 수단을 버리고 전적으로 주의 말씀을 생각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하 16:9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였다.
5)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96절에,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는 말씀이 그런 뜻이다.
이 말씀을 나는 문맥을 따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악인들이 완전한 계획아래 성도를 멸하려고 하지만 사람들 보기에는 미련하게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을 당해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를 주께서 폭 넓게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박윤선 박사는 이 대목을 해석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범위는 넓어서(96절) 하늘 땅, 만물에 미치고 또 시간적으로는 대대에 이른다(89, 90절). 이런 위대한 통치권을 누가 대적하여 이길 수 있으랴!”고 했다(시편 주석 P1046). 그렇다! 땅위에 완전한 것이 없고 다 끝이 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자!
ⅩⅢ. 주의 말씀을 사랑하자. <시 119:97~104>
이 대목은 믿음의 시인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묵상하므로 원수를 이기는 지혜를 얻었으며 명철을 자랑하는 스승보다 더 지혜로워졌으며 경험 많은 노인보다 더 지혜로워졌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을 지켜 떠나지 않았으며 모든 거짓된 행위를 미워하고 악에서 떠났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어찌 그리 좋은지 자기 입에 꿀보다 더 달더라고 고백하는 내용이다. 97절에,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고 하신 말씀을 중심하여 ‘주의 말씀을 사랑하자’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교훈을 나누고자 한다.
1. 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해야 하는가?
여기 본문은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해하려고 꾀하는 원수보다 더 지혜롭게 해 주시기 때문이란 것이다.
98절에,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바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라고 했다. 여기 ‘원수보다 지혜롭게’ 한다는 말은 원수를 이긴다는 뜻이다. 우리가 알기는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들을 해하려는 원수들은 다 보통이 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짜내는 이성적인 지혜보다 인간적인 권력은 한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보기엔 미련한 것 같지만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기 때문에 그들보다 지혜로우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들보다 강한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년 다윗이 완전 무장한 블레셋 장군 거인 골리앗을 대항하기 위해 물맷돌 다섯 개를 들고 나타난 것은 누가 보아도 바보스럽고 무모한 짓이었지만 사람 생각과는 달리 원수를 이긴 것은 주의 말씀이 그를 지혜롭게 했으며 강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둠으로 원수를 이기는 지혜 자가 되자.
2)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학식이 풍부한 스승보다 더 지혜로워지기 때문인 것이다.
99절에,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어릴 때는 부모와 스승에게 배워야 하기 때문에 어른들보다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을 사랑하고 배우는 자는 그 스승보다 나아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친히 스승이 되셔서 감동과 책망과 교훈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비록 스승의 자리에 앉아 입으로는 지혜를 말하나 성경연구에 태만하고 권위 의식만 가지고 자신의 영광과 수입만을 생각하는 직업적인 종교인들은 은혜가 메말랐기 때문에 말글을 배웠으나 되글도 못써 먹는 어리석은 자요 반면에 비록 환경이 좋지 못해 세상공부는 덜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착실히 연구하는 사람은 은혜가 풍부하기 때문에 되 글을 배웠으나 말글로 써 먹는 지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승보다 지혜로워지려거든 참 스승이신 하나님이 영감을 주어 기록한 성경을 사랑하고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경험이 풍부한 노인보다 더 지혜롭게 해주시기 때문인 것이다.
100절에,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고 했다. 이 말은 70노인이나 80노인 보다 낫다는 의미만 아니라 가령 아담 때부터 오늘까지 살았다는 몇 천 년 늙은 사람보다도 낫다는 뜻이다<박윤선>. 왜냐하면 하나님 뿐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최고령자이신 예수님에게서 말씀을 배우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33세에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연세는 지금도 계속되는 1985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험 많은 노인들보다 지혜로워지려거든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여기의 본문은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1) 죄악을 미워하고 떠나야 되는 것이다.
101절에,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라고 했고 104절에도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 5:4에,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하셨다. 그렇다!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은 실제에 있어서 부덕과 죄악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죄를 계속 짓는 자는 주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란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려면 죄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믿지 않고 아내와 의논하여 하갈을 첩으로 맞아들이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이 그 죄악을 정리하기까지 13년간이나 끊어진 것을 우리는 경고의 교훈으로 받아야겠다(창 16:16~17:1 참조).
2) 주님의 말씀을 지켜 떠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102절에,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고 했다. 그렇다! 사랑하는 자의 마음은 그 사랑하는 대상에게 사로잡히는 것이다. 결코 이론적으로만 말씀을 접촉하지 않고 전 인격을 기울여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성도는 97절 끝에, “종일 묵상하나이다.” 98절 상반엔,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한다고 했고 100절 상반엔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라고 했고 101절 상반에도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라는 말로 표현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103절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고 하였다. 이는 마음의 기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의 생활의 행복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는 자에게 만사형통의 약속을 주셨다. 시 1:23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였다. 일제 말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시다가 투옥된 한상동 목사를 형사 5, 6인이 둘러 몽둥이로 죽으라고 두둘겨 팼다. 고문한 형사들이 지쳐 짜증을 내지만 매 맞은 한 목사는 육체의 아픔은 말할 수 없었으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므로 누리는 마음의 평안함을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평안이었다는 간증을 들었다.
ⅩⅣ. 주의 말씀은 신자의 영원한 기업이다.
<시 119:105-112>
이 대목의 시인은 원수들이 올무를 놓아 넘어뜨리려는 위기일발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사후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기업을 바라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주 앞에 헌물을 드리며 천국 길의 등불과 빛이 되는 말씀을 배우고 끝까지 따르겠다고 마음에 작정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주의 말씀은 신자의 영원한 기업이다’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교훈을 나누고자 한다.
1. 왜 주의 말씀은 신자의 영원한 기업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주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는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은행에 예금한 부자가 발행하는 수표는 현금과 맞먹는 것처럼 내세 영원한 기업을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이 영감으로 주신 말씀의 증거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혹 인간 부자는 한도가 있어서 부도를 낼 수가 있지만 하나님은 부요하시고 무한하시고 자비하시기 때문에 믿는 자와 약속한 내세기업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믿음의 시인은 111절에 말하기를,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고 한 것이다.
‘영원한 기업’이란 흔들리지 않는 천국의 부동산을 의미하는 것이다. 땅위에서 인간이 누리는 기업은 경영부실로 또는 천재지변 등으로 도산할 위험이 있지만 천국의 기업은 절대 도산이란 것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영원한 기업은 히 12:28에 보니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은 변하지 않으신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후 1:22에 말씀하시기를,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하셨고, 롬 8:15엔,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셨고 17절엔,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하고 세 번이나 강조하셨다. ‘후사’(後嗣)란 말은 뒤를 이을 자 곧 상속자란 뜻이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주께서 우리로 양자 삼아 영원한 기업의 상속자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 나라 갈 때까지 이 언약은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도 이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12절에 말하기를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고 했고 106절엔,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고 했고 109절 하반엔, “주의 법은 잊지 아니하나이다.”고 했고 110절 끝에도 “나는 주의 법도에서 떠나지 아니하나이다.”고 했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험악하여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2. 영원한 기업을 받을 자는 땅 위에서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
107절 상반에,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라고 했고 109절 상반엔,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라고 했고 110절 상반에도, “악인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라고 했다. 만일 이 시편이 다윗의 작품이라면 그와 죽음사이는 한 발자국의 거리밖에 안 될 만큼 밀착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울왕의 박해, 아들 압살롬의 반역 등이 그것이다. 109절의 고백대로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었다.
그러나 악인의 박해 아니고도 이런 죽음의 위험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다. 뜻하지 않는 천재지변, 고혈압, 심장마비 같은 급한 질병,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등이다. 어느 익살맞은 친구 “아무개, 하마트면 나무코트 입을 뻔 했데이!”라는 말처럼 우리 앞엔 내가 들어가야 할 나무코트(관) 한 개가 항상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겠다.
그럼 왜 이런 죽음의 위기가 땅위엔 그칠 사이가 없는가? 그것은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한 죄값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하려는 동시에 신자에겐 내세본향을 그리워하게 만들기 위해 땅위에 뿌리를 박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로 되는 것이다.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빛나고 높은 저 곳을 날마다 바라봅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곳에 서게 합소서
그 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그런데 여기 믿음의 시인은 땅위에서 당하는 고난 중에도 기쁨이 충만했었다. 111절에,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고 했고 108절엔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했다. ‘낙헌제’는 구원의 즐거움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인데 ‘내 입에 낙헌제’한 말은 즐거움의 찬송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이러고 보니 기독교는 결코 고행의 종교가 아니라 고난 중에도 구원의 즐거움이 충만한 종교인 것이다.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내 주 예수 지난 죄는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천국이니
할렐루야 내 주 예수 지난 죄는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렇다! 앞서 잘 믿는 족장 선지 사도 교부 종교개혁자들 그밖에 많은 수난 성도들은 한 결 같이 땅위에선 고난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억지로 고난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구원의 즐거움과 내세의 부활과 상급을 바라보고 참고 간 분들이었다. 아브라함은 부활의 확신으로 독자 이삭도 아낌없이 바쳤으며 모세도 애굽의 임금이 되어 잠시 누리는 땅위에 부귀영화보다 영원한 내세상급을 바라보고 고난을 참았으며 바울은 롬 8:17, 8절에 말하기를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다. 그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 당한 수난의 기록을 보니 존경심이 생기는 동시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고후 11:23, 28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주가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감당했으며 구원의 즐거움으로 찬송하면서 당해낼 수 있었다고 했다(고전 15:10).
3. 하늘가는 길은 발의 등이요 길에 빛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하셨다. 롬 13:12에 보니 지금은 영적 도덕적으로 심히 어두운 “밤이 깊”어진 때이다. 그러므로 캄캄한 밤중에는 등불이 있어야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등불이 무엇인가? 그것은 주의 말씀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벧후 1:19 상반에,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기 본문에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했는데 이는 등은 발 앞에만 비추어 주는 것, 빛은 먼 곳까지 밝혀 주는 것 곧 주의 말씀은 현재와 미래를 비추어 주는 하늘가는 안내자란 것이다. 그러므로 106절에 등불과 같은 말씀을 믿고 ‘굳게’ 지킨다고 하였다. 그렇다! 주의 말씀은 성령의 기름으로 계속 불타오르는 등이다. 이것은 마치 성소의 있는 꺼지지 않는 등과 같으며 이스라엘백성의 앞길을 인도해 주기 위해 비추어진 불기둥과 같은 것이었다. 등불이 꺼진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고 오직 등불을 밝힌 다섯 처녀만이 신랑을 영접했다. 그러므로 기름과 등 곧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 자를 주께서 데리러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든 것 잃어버릴지라도 영원한 기업의 보증수표와 같은 말씀만은 굳게 지키고 살자. 얼마 전 부산 실업전문대학에서 왕복비행기표가 왔다. 그러나 주민등록증을 분실했기 때문에 아무리 사정해도 탈 수가 없었다. 하늘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의 증표를 가져야 갈 수 있는 것이다.
[출처] 제7부,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라|작성자 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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