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시대적 부응(副應)
Ⅰ. 타락한 시대일수록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살자.<시편 12:1~8>
시편 12편은 이스라엘의 둘째 왕 다윗이 환란 중에 영감을 받아 읊은 시편이다. 다윗의 일생 중 두 가지의 큰 환란을 들 수 있는데 하나는 사울왕의 박해요, 또 하나는 압살롬의 반역이었다. 그럼 왜 다윗의 환란 받은 때를 타락한 시대라고 하는가?
그것은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소년 다윗이 믿음으로 적장 거인 골리앗을 죽여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했건만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므로 사울 왕이 시기하고 격분하여 충신이요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사위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니 악한 시대라는 것이고 또 아비를 죽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불효막심한 압살롬과 합세 반역하기 때문에 타락한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8절에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 도다”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성도 다윗은 이런 타락한 시대에도 여호와의 말씀을 의지하고 살아감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 시간은 ‘타락한 시대일수록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살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받고자 한다.
1. 타락한 사회상을 살펴보자
성경은 후대에 신자들을 교훈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니(롬 15:4) 결코 그 당시의 것으로만 보지 말아야 하고 또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며 빛이 어두움을 밝혀 주듯이 범죄 타락한 인간이 시대진단을 바로 할 수 없으며 오직 진리의 빛인 성경만이 세상을 바로 진단하고 인간들을 바르게 삶의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다. 그럼 성경은 이 시대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가?
1) 경건한 자를 끊어 버리는 시대라고 했다.
1절에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로소이다.”라고 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과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은 자가 있을 땐 복이 내렸지만 없어지면 화를 받고 했다. 보라! 엘리사가 있을 때 아람군대가 침입을 못했으며 의인 롯이 소돔을 떠남과 동시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리고 보니 경건한 자, 충실한 자의 존재 가치를 백만 대군보다 낫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핵폭탄, 중성자탄이 아니라 경건한 자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한 시대는 이런 보배 같은 존재를 몰라보고 죽이거나 추방을 하고 도리어 없어도 될 사람, 있으나 마나 하는 존재들로 가득 찼으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아는 성도는 “여호와여 도우소서.”하고 깊은 탄식으로 주께 기도하는 것이다.
‘12편’하고 〔 〕안에 ‘영장으로 스미닛에 맞춘 노래’란 것은 영장은 지휘자요 스미닛은 낮은 음으로 작곡된 것을 탄식하면서 노래한다는 뜻이다. ‘얕은 물은 소리가 나도 깊은 물은 소리 없이 흘러간다.’는 말처럼 진정한 성도는 비 성장으로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라 내용 깊이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인류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2) 거짓말하는 시대라고 했다.
타락한 시대의 특징은 거짓말이다. 2절 상반에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라고 했다. 인간은 시조 아담이 마귀의 거짓말에 속았기 때문에 그의 후손인 인류도 만물보다 거짓된 인간이 되고만 것이었다(렘 17:9). 그래서 피차 속이고 속히는 악순환 속에 살아가는 것이 인간사회인 것이다.
3) 아첨하는 시대라고 했다.
2절 하반에,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 도다”라고 했다. “아첨하는 입술”은 달콤하고 미끈미끈한 말, 감언이설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상대방의 유익을 도모한 친절이 아니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 악용하는 것을 말한다. “두 마음으로 말하는 도다”라는 말은 아첨 자가 그렇게 말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에게 입 맞추며 “주여 안녕하십니까?”하고 잡아 주는 배신자 유다 같은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류의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도 있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어느 원로 목사님에게 ‘이런 배신자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런 것들 속에서 살아간다네!’하고 태연하더란 것이다.
4)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시대라고 했다.
4절에,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고 했다. 여기 “우리의 혀” “우리의 입술” “우리의 것”이라고 반복하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을 몰라보는 교만한 말이고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란 말은 누가 우리의 행동을 막으며 간섭할 자가 있겠는가? 라고 심판 주를 무시하는 망발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의로운 재판장을 믿지 아니하며 이 세계를 지배하시는 자를 믿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무책임한 말을 함부로 뇌까리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마 12:36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고 경고하셨다.
5) 성도를 핍박하는 시대라고 했다.
5절 상반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이란 말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성도들이 핍박받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성도들이 땅 위에서 박해를 받으니 가난할 수밖에 없고 의인이 매장을 당하고 악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니 탄식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실한 성도들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행 28:2에,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을 우리가 앎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성도는 악한 시대의 조류를 따라 사는 자가 아니고 악한 세상과는 반대로 투쟁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 성도의 맛이 있는 것이다. 은어는 오염된 하류에서 안일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세찬 물살을 헤치고 거슬러 올라가 상류에서 살기 때문에 깨끗할 뿐 아니라 맛도 수박같이 향내가 난다는 것이다.
2.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살자.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경건한 자를 끊어버리며 거짓말이 판을 치며 아첨하고 배신하는 자가 많으며 멋대로 지껄이고 성도를 괴롭히는 악한 세상이다. 그러나 밤이 깊어 가면 아침이 가까워지는 징조인 것처럼 세상이 극도로 악해지면 하나님의 바른 심판이 임박했다는 경고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한 중에 살았던 다윗은 여호와의 영감 된 말씀을 굳게 믿고 동요하지 않았다.
그럼 그가 어떤 내용의 말씀을 받았는가?
첫째, 3절에,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의 특징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곧 엡 6:17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이다. 그럼 왜 그들을 끊겠다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그들이 1절의 말씀과 같이 경건한 자를 끊었고 충실한 자를 없앴기에 별로 영육 간 하나님에게서 끊어 지옥에 보내시겠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란 중에 죽음이 온다 할지라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해야겠다(마 10:28).
둘째는. 5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는 말씀을 받은 것이었다.
이 말씀은 때가 되면 눌린 자에게 자유를, 탄식하여 기도하는 자들에게 응답을 위급한 자에게 안전한 지대로 피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인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더 안전한 곳 영생도 약속하셨다. 그것이 7절이다. 곧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복종 하시리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성도가 환란 중에 세상을 떠나는 것은 사람보기에 비극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려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축복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말씀에서 진리를 바로 파악해야 하겠다. 그것은 이 세상과 천국은 행복의 차이는 극심하지만 구원의 안전성은 그곳이나 이곳이나 마찬가지란 것이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식 때문이다.
내 주와 맺는 언약은 영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험악하여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셋째로, 다윗은 계시로 받은 여호와의 말씀의 완전성을 강조하면서 세상이 아무리 악해도 자기의 그 말씀 위에 서서 살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 말씀이 6절이다. 곧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하였다. 나는 흙 도가니에 은을 녹여 각종 빼지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실감이 난다. 한번만 녹여도 찌꺼기가 없어지는데 일곱 번이나 반복했으니 털끝만치도 찌꺼기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불순한 것이 호리도 섞여 있지 않는 완전무결한 말씀이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복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타락한 세상에서 이 완전무결한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살아야겠다.
Ⅱ.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자
장로교의 근본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경(1643. 7. 1~1649. 2. 12) 중 소요리 문답서(1647. 11. 5 완성) 1문에서 3문까지가 사람의 제1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 한다고 밝히고 있다.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1문답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영화’란 말은 이름이 귀하게 되어 빛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최고로 존귀한 분으로 섬기며 그 이름을 빛나게 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 것은 하나님이 영화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영화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는 착하지만 자녀들이 범죄 하면 부모가 욕을 듣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말은 내가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 드릴 터이니 영광을 받으소서. 라는 뜻이다. 그럼 이 일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되는가?
① 그것은 인간의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이시기 때문이다.
요리문답 제1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에 대해 성경의 지지는 많다. 사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고, 욥 36:24은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고 하셨으며, 롬 11:36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이 라고 하셨으며, 고전 10:31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다.
사실 우리가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시는지 우리의 존재목적을 바로 깨달아야 될 것이다.
만일 내가 먹기 위해서만 산다면 이는 인간 이하인 짐승과 같은 생활이요 또한 살기 위해서만 먹는다고 한다면 이는 꺾인 나뭇가지에 물을 주는 거나 다름이 없는 생활일 것이다. 왜냐하면 살기 위해 먹고 마셔도 마침내는 죽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음을 받은 인생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조물주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세상 만물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존재 목적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 12:13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하셨다.
②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전 6:19~20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으며, 롬 14:7~8에는,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고 했다.
전 인류는 하나님 앞에 범죄 했기 때문에 롬 3:10~12의의 말씀과 같이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게 되어졌으며 또 롬 3:23의 말씀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그 마음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마귀에게 귀를 기울이며 진리를 배반하는데 이르게 되어졌다.
그러나 고마운 것은 이런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며 거듭나게 하시며 믿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에서 신자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성령님의 새롭게 하시는 중생의 은혜로 거듭난 심령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 지음을 받은 중생한 인격자이고 의식자인 신자를 통하여 당신이 계시하신 뜻을 이해하기를 바라며 만물과는 다르게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봉사를 통하여 당신과 교제를 나누면서 영광을 돌리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인 우리들은 엡 1:6의 말씀과 같이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는가?
만일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두 가지의 불행한 결과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① 더러움에 그대로 내어버림을 받는다. 롬 1:19~28까지를 보면, 자연계시 곧 사람의 마음과 지으신 만물을 통해서 당신을 계시하사 알게 하셨지마는 인생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에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부모가 자식에게 간섭하는 것은 사랑하는 까닭이요 간섭하지 않고 죄짓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까닭인 것이다. 하나님이 내버리시면 그 사람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롬 3:16~17에,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게”되고 말 것이다.
②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하면 내버려두실 뿐 아니라 가끔 섭리적 곧 부분적인 심판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한편 지나친 악인 곧 당신의 영광을 도적 하는 오만불손한 자에게는 결코 용서치 않는 것이다. 성경에 보니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버러지로 그를 먹어 죽게 한 것을 볼 수 있다(행 12:21~23).
또한 동양사에 보면 은나라의 무을 왕은 가죽 주머니 속에 짐승의 피를 담아 공중에 높이 달고 활을 쏘아 피가 떨어지게 하고는 “내가 하나님을 쏘아 죽였다”고 오만불손한 소리를 했다. 그 후 사냥하러 갔다가 갑자기 벼락에 맞아 죽고 말았다고 한다.
몇 해 전, 진주 어느 곳에서 비가 계속 내리니 어떤 농부가 논에서 일하고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하늘을 보고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우르릉! 쾅! 쾅!” 소리가 났다. 놀라 엎드린 다음 뒤돌아보았더니 그 자의 몸이 벼락에 맞아 산산조각이 되어 지고 있었더란 것이다(정순국 목사 증언).
그러므로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도록 하자. 벧전 5:5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야 어찌 살겠는가! 그러므로 시 115:1에,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라고 해야겠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 당시 유명한 여류 작가인 스토우 부인을 대통령이 초청, 백악관에서 만났다. 링컨은 “부인을 만나니 매우 반갑습니다. 나는 부인의 저서 ⌈검둥이의 설움⌋이라는 책을 읽고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훌륭하게 쓰셨습니까.”라고 칭찬을 했다.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받을 칭찬이 아닙니다. 오직 영광은 주께 돌릴 것뿐입니다”고 한 다음 “각하께서는 어쩌면 그렇게 남북전쟁에 대승리를 거두시고 금일에 이와 같은 평화로운 국가를 만드셨습니까? 각하의 공이야말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고 하였다. 대통령도 깜짝 놀라면서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하나님의 종 일 뿐입니다. 내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영광은 오직 주께 돌려야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흑노 해방은 부인의 저서로 말미암아 사상계몽을 받았고 거기에 따라 대통령의 정치적인 활동으로 승리적 성과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다 같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으니 우리가 본받아야할 일이다.
3)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가?
① 마음을 다해 섬겨야 한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그것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 지음을 받은 중생자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하면 인격이 없는 만물과는 달리 인격자인 의식 있는 마음의 봉사를 통해서 최고의 영광으로 삼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마음을 다하여 섬기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위치는 마음에 두기 때문에 마음은 인간의 종교적 초점으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더불어 일하시는 장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먼저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삼상 16:7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이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주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마음에 없는 말과 행동 곧 외식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리새교인들의 외식을 가장 미워하고 책망하셨다. 우리가 구원 얻는 것도 마음에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롬 10:9~10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셨다.
② 말과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첫째, 말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
출 20:7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지 말라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이름에 욕이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겠다.
로마교에서는 성명회(聖名會)라는 것이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욕설을 하면 성명회에서 징계처분을 한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하나님께 대하여 욕설을 하면 시벌한다고 하니 잘하는 일인 줄 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욕하는 것도 국가원수에 대한 모독죄로 고발을 당하겠거든 하물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욕하는 자를 어찌 그냥 둘 수 있겠는가!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정을 초월하고 일했다고 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교인 중에 영감으로 된 성경을 가지고 농담하기를 산양우는 소리를 듣고 “그는 아름다운 시편을 노래하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3개월 동안 제네바에서 추방한 일도 있었고, 또 예배 중에 하품을 크게 한다고 책벌을 했으며 카스델리오란 학자가 구약 아가서를 연애서라 함으로 제네바대학에서 주간 직을 해임 추방시켰으며, 미가엘 세르웨트란 학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의 오류’라는 글을 씀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라고 규정하고 사형에 처한 일까지 있다. 이런 일이 매우 가혹한 것 같지만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대단했던가를 알 수 있다. 오늘처럼 해이(解弛)해져가는 교계에 제2의 칼빈 제3의 칼빈이 속출되기를 나는 진심으로 기대한다.
물론 우리 중에 직접 하나님을 욕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럽고 누추한 말을 하게 된다면 예수를 믿어도 별 수 없다고 비방의 대상이 되어지니 주께 영광은 고사하고 욕이 돌아가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엡 4:29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하셨다.
둘째, 행실을 선하게 가져야겠다.
마 5:16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으며 벧전 2:12에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마호메트 교도들은 하루 다섯 번씩 그들의 회당을 돌면서 “알라는 거룩하시다 알라는 거룩하시다”고 외치면서 돈다고 한다. 성경적인 것이 아니므로 본받을 것까지는 못되지만 아무튼 우리의 행동에 따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시고 멸시를 받으시기도 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비록 부모가 범죄 한 일이 없지마는 자녀들이 범죄 했을 때 죄 없는 부모가 욕을 듣는 것 같이, 하나님을 절대 거룩하시지마는 섬기는 우리가 범죄 하면 욕을 듣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인 곧 불신자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짐으로 우리를 오해하여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힘써야 되겠다.
특히 어느 때의 행동보다도 경건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겠다. 우리나라의 교회는 대부분 예배시간이 시장마당과 같은 분위기를 왕왕 볼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아이들이 우고 떠들며 수군수군하며 예사로이 출입을 하므로 엄숙한 맛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일을 삼아야겠다. 로마교는 예배의식을 엄숙히 가짐으로 성당에 들어가면 마음이 절로 거룩해진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점을 본받아야겠다.
4)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어떤 축복을 받는가?
① 소원성취의 축복을 받는다.
부모를 기쁘게 하는 자녀의 소원은 잘 들어 주지마는 부모를 괴롭히는 자녀의 소원은 들어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여기에 관한 성구가 많으나 두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시 37:4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에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고 하셨고, 요일 3:21~22엔,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고 그 형통함을 보시는 하나님이 또한 기뻐하시니 믿는 자는 항상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부르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시 35:27~28에서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고 하셨다.
② 영원토록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사람의 제1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니라.”고 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이 영원토록 즐거움을 주신다는 말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극락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시 43:4에,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한없는 즐거움을 주사 누리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이 즐거움은 일시적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다. 순경 때만 아니라 역경 때도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인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바울과 실라는 예수님 때문에 매맞고 헐벗고 굶주리고 쇠고랑을 차고 깊은 옥에 갇혔지만 그들 마음에 가질 즐거움을 빼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밤중쯤 되어 즐거움을 견디다 못하여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고 말았다(행 16:25).
또한 스데반이 가진 즐거움을 원수들이 빼지는 못했다. 그는 예수님 때문에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즐거움이 얼굴에까지 나타남으로 그의 얼굴이 천사와 같이 평화로웠으며 숨지면서도 여유 만만하여 원수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를 빌었으며 자기 영혼을 주께 부탁하면서 천국에 간 사실은 신자의 즐거움이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지상에서 누리는 부귀영화에 참 만족이 없다는 사실을 성경과 역사를 통해서 듣고 알고 있다. 솔로몬이 기록한 전도서에는 “헛되다”는 말이 37번이나 연발되어 있다. 중국의 진시왕은 주전 3세기에 만리장성을 쌓고 전국들을 진압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부귀영화를 실컷 누렸지마는 만족이 없었다. 그는 명령을 내려 패전국들의 무기를 모두 거두어 불에 녹여서 12개의 금속제 신상을 만들어 수호신으로 대궐 주위에 세우며 수도 변두리에 270개의 작은 궁궐을 지어 놓고도 자객을 피하기 위하여 그는 같은 궁궐에 계속 이틀 밤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즐거움을 주시는 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며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영광을 돌리고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으로 살아가자.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15:11).
Ⅲ. 복 있는 사람은……<시 1:1~3>
세상에 행복의 조건들이 많다. 돈, 명예, 권세, 지식, 사랑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속이고 속히는 악순환의 반복으로 비참한 일생을 마치는 것이 인생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영감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결코 인생을 속이지 않는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1. 죄를 떠나야 복된 말씀을 받을 수 있다.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하셨다.
성경은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된 말씀을 받는 비결은 하나님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죄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시 5:4~6에, “주의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적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 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라고 하셨다. 그렇다! 깨끗한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손에 가진 더러운 것을 버려야 하고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하는 것이다. 더러운 구정물통에 어떻게 맑은 물을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오늘 성경을 가진 자는 많아도 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 곧 글을 글대로 나는 나대로, 물에 기름이 떠돌 듯이 성경은 성경대로 설교자는 설교자대로 되고 마는 일이 부지기수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다는 아니지만 설교할 때 원고에 사로잡혀 책 읽듯이 하므로 늙은이의 자장가 소리와 같고 심하게는 부흥사들 중엔 속이는 야바우꾼, 과장하는 약장수, 외식하는 배우, 굿하는 무당같이 보인다는 것은 웬 말일까?
한마디로 하면 그 속에 말씀이 저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요 그 말씀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 왜 그 속에 말씀이 없는가? 죄를 품고 있으니 그 속에 말씀이 들어가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다. 왜 능력이 없는가?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말씀을 믿지 않고 인간 생각으로 첩을 두어 범죄하니 14년간이나 여호와의 음성이 끊어지고 말았다(창 16:16, 17:1).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 이상의 괴로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죄를 끊어야겠다. 잠 28:1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깊은 바다에서 주의 말씀대로 고기가 잡혔을 때 언덕에 서신 저 분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고 깨달았으며 또 흩어져 놀고 있는 고기떼들을 불러 모아 자기의 그물 속에 들어가게 하신 것을 보니 저 분이 바로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대주자 하나님이시며 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바다 속의 내용을 뚫고 보시는 것을 보니 저 분이 바로 내 마음 속에 죄도 환히 아시는 전지하신 심판 주이심을 알고 두려움으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회개하게 된 것이었다. 이 고백을 받은 주님, 이어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일약 전도자로 등용한 것이었다. 그 후 3년의 훈련과정을 거쳐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루에 3천명이나 회개시키는 능력 있는 말씀의 설교자가 된 것이었다.
말씀의 복을 받을 자 누군가? 그것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 곧 죄를 떠나는 자인 것이다.
2. 성경을 좋아하고 새김질하는 자라야 복을 받을 수 있다.
2절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셨다.
‘여호와의 율법’이라고 했으니 성경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자를 말한다. 또 ‘묵상’한다는 말은 연구적인 태도로 조용히 새김질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주야’라는 말은 말씀의 단 맛에 끌려서 그것을 더듬느라고 시간가는 줄 모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칼 막스는 매우 가난한 중에 생활했다. 손님이 그의 집을 찾아올 때면 의자가 부서질까 겁이 났다고 하며 때론 이웃집에서 음식을 얻어먹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아침이면 커피를 마신 후 7시부터 연구를 시작하여 점심때까지, 점심 후 다시 시작하여 오후 여섯시까지, 또 저녁 먹은 후 한 시간 가족들과 지낸 다음 밤 2시에서 3시까지 저술에 힘을 써서 마침내는 ⌈자본론⌋이란 거작을 세상에 발표하여 오늘의 공산주의 이론을 세워 많은 사라에게 영향을 끼쳤다. 물론 그의 ⌈자본론⌋은 잘못된 사고에 근거한 것이지만 그가 얼마나 자기의 일에 몰두하여 대작을 이루었는가 하는 점을 우리는 배워야 하겠다.
또 ‘즐거워’한다는 말은 그것을 속으로 깊이 사랑한다는 말이요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지킨다는 말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율법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무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또 하라, 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화를 받고 지켜야 축복을 받는다는 의무적인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오직 즐거움으로 좋아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주님이 율법을 이루셨다는 뜻은 주님의 피 공로를 상징하여 드리던 모든 제사제도가 십자가의 공로로 끝이 났다는 뜻으로 구약시대의 의식적인 율법의 폐지를 말하는 것이고 또 율법을 완전히 행하지 못한 인류의 죗값을 대신하셨다는 말은 그 형벌 저주를 대신하셨다는 말이지 결코 율법의 교훈에서는 해방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된 감격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움으로 도덕적인 율법을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축복이 있다는 말인 것이다.
3. 어떤 축복을 받는가?
3절에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하셨다.
이것을 넷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1)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고갈함이 없는 복을 받는다.
본래는 롬 7:24의 말씀과 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죄와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던 사람이었지만 성경의 증거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수의 근원을 만나게 되었으니 다신 영혼이 목마르는 일이 없는 축복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복을 받는다.
우린 말씀과 전하는 곳에 사람이 잘 모이지 않기 때문에 선배들이 하지 않던 소위 요즘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려고 하지 말자. 별 방법을 모색하려고 하지 말자. 별 방법을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반드시 열매 맺을 것을 믿고 선배들이 남겨 놓은 경건한 방법대로 해 나가자. 갈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다.
겨울에 앙상하게 말라죽은 것 같이 보이는 나무도 봄이 오면 싹이 트고 잎이 자라 꽃이 피고 여름엔 청청하고 가을엔 열매가 달리는 것이다.
평소에 성경을 사모하고 애독한 루터에게 마침내는 그 마음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날이 오고 말았다. 그는 학생시절 도서관에서 라틴어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했다. 그 후 신부로서 사명을 띠고 로마에 갔다. 그 때 나이가 30이었다. 그가 많은 신부들과 같이 스칼라상타라는 계단을 무릎을 꿇고 올라가는 도중이었다. 28층계로 된 이 계단을 한번 오르면 15년간의 죄가 사해진다는 것이었다. 그가 반쯤 올라갔을 때였다. 성경말씀 곧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롬 1:17의 말씀이 강하게 역사 했다. 그만 일어서서 뛰어 내리고 말았다. 동시에 진리가 아닌 천주교와 이별하고 신교란 열매가 맺은 것이었다.
3) 언제나 푸른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으니”란 말은 영원한 푸른 복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이기 때문에 꺾어진 돌 감람나무 가지와 같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영원한 푸른 나무와 같은 분이시다. 그러므로 눅 23:31에,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라고 하셨다. 이 말은 푸른 나무인 나에게도 십자가를 지는 불같은 고초를 당하겠거든 마른 나무인 죄인들이야 말할 것이 무엇인가란 뜻이다. 그러므로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으니”란 축복은 율법인 성경을 통해 예수를 믿는 구원받는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푸른 복 곧 싱싱한 복, 영원한 복, 산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4) 범사가 성공하는 축복을 받는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씀이 그 뜻이다. 혹은 말하기를 “성경만 보면 시대에 뒤떨어져 낙오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성경은 수천 년 전의 고전에 불과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날이 진보하는 새 시대에 새로운 서적을 읽을 것이지 어찌 수천 년 전의 옛 책을 보고 앉아 있으란 말이냐? 란 것이다. 그러나 철학을 연구하는 자 중에 지금도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를 연구해야 하며 동양도덕을 연구하는 자 중에 지금도 공자, 맹자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역사성을 무시하고 새로운 것에만 치중하는 자는 약한 기초 위에 고층건물을 올리는 것과 같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끝끝내 옛 것을 무시한다면 그는 이 땅을 밝고 살 자격이 없는 자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은 옛 땅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진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옛 책임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진리 자체는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다. 두 레일 위를 기차가 잘 달려가듯이 구약과 신약을 신앙과 생활의 레일로 삼고 사는 자는 천국 가는 바른 길이기 때문에 가는 길은 형통한 성공뿐이요 결코 실패는 없는 것이다.
우리 다 함께 죄악을 떠나며 말씀을 즐거움으로 순종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게 주야 연구함으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는 축복을 받자.
[출처] 제1부, 성경의 시대적 부응(副應)|작성자 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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