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상식 이야기!!

성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24. 11. 22. 23:48

성경이란 무엇인가?

 

 

 

 

Ⅰ. 여호와의 책이다.<사 34:16>

 

성경을 영어로 바이블(Bible)이라고 하는데 뜻은 책 중의 책이란 말이다.

영국의 어느 유명한 신자 한 분이 사위에게 ‘서재에 가서 책 한 권을 가져오게!’라고 했다. 사위가 ‘무슨 책을 갖다 드릴까요?’라고 반문을 했더니 큰 소리로 ‘책이라면 으레 성경으로 알아야 될 게 아닌가!’라고 나무래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과연 성경은 책 중의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사람의 책이 아니고 본문의 말씀대로 여호와의 책이기 때문이다. 그럼 ‘여호와의 책’이란 어떤 책인가?

 

1. 여호와의 책은 택함을 받고 중생하고 계시의 정신을 받은 자만이 듣고 읽고 연구하고 은혜 받을 수 있는 책이다. (啓示性)

 

본문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한 “너희는”라는 말이 바로 그 뜻이다.

 

“너희는”곧 택함을 받은 “너희는”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요 15, 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셨고 요 13:18엔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택함을 받은 자만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자연계시가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특별계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 135:4의 말씀과 같이 “특별한 소유로 택함”을 받은 자만이 특별계시인 이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읽을 수 있고 연구할 수 있고 은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히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라고 하셨다. 이 뜻은 성경의 원 저작자이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의 계시하신 말씀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 인류는 대표자 시조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다 함께 엡 2:1의 말씀대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영적으로 죽은 사람과의 교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롬 3:9-11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을 자도 없고”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죽은 인간의 교제의 가능성은 인간이 영적으로 살아나는 길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죽은 인간은 스스로 살아날 수가 없고 오직 생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만이 살릴 수 있는 권능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 19:25~26에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다.

 

과연 하나님이신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이 성령을 보내사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려주셨다. 엡 2:1에,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부활 곧 중생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살아 계신 주님과의 교제가 가능해지며 그의 말씀을 듣고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께서 종종 “귀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이 그런 뜻이었다.

 

또 엡 1:17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산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의 눈이 아무리 시력이 좋다고 할지라도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오직 빛이 환하게 비추어 줌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태양 빛이지만 진흙은 굳어지고 얼음은 녹는 것과 같다. 행 16:13~14에 보면 바울일행이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그 중에 오직 한 사람 “두아디라성의 자주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고 하셨다. 이 말은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시를 마음에 받는 자만이 듣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의 책은 택함을 받은 ‘너희’, 거듭난 ‘너희’만이 들을 수 있고 배울 수 있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는 것이다.

 

2. 여호와의 책은 없애려야 없앨 수 없는 영원한 책이다. (永遠性)

 

왜냐하면 이 책은 사람의 책이 아니고 여호와의 책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했다. 여호와는 출 3:14,5에 보면 “여호와 나는 스스로 있는 자 곧 영원한 이름이라”고 하셨으니 그는 영원자존자(永遠自尊者)란 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책이란 것은 그가 성경기자들 곧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의 신으로 감동시켜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 책은 영원한 책이란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분이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영원한 책이란 말이다. 예를 들면 성경 중 로마서는 바울사도의 기록이다. 그러나 롬 16:22에 보면 대서자는 더디오였다. 그러나 바울의 저서임이 틀림이 없는 것은 바울이 불러주는 대로 더디오가 대신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을 감동시켜 기록하게 하셨으니 실상은 바울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딤후 3:16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고 하셨다.

 

그리고 여호와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사 오셨으니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히 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바로 여호와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말씀도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 24:35에 그가 말씀하시기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 성경은 사람의 책이 아니고 하나님의 책이기 때문에 영원히 없앨 수 없는 권위 있는 책인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성경을 말살해 보려고 시대마다 정치가의 권력으로 심하게는 교권자의 손으로 성경을 없이해 보려고 불태우고 성도를 가두고 죽이고 했지만 도리어 그들이 땅 위에서 사라졌지 성경은 불꽃을 건드리면 더 번져가듯이 현재는 1,820여 방언으로 번역되어 1초 동안에 신구약 성경이 한 권씩 찍혀 나오는 영원한 책인 것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1976년도의 성경 발행 수는 1200만 부가 넘었다.

 

이 사실은 성경이 사람의 책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이 기록한 여호와의 책이란 증거인 것이다.

 

죄악 세상 풍파 맹렬하여도 영원한 그 말씀 날 붙드시네

이 세상은 쉬지 않고 변하나 성경 말씀은 영원토록 변찮네

그 말씀 내가 믿고 거기 굳게 서겠네

그 말씀 의지하면 나의 강한 성 되네

큰 폭풍 내게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 말씀 굳게 믿고 나의 소망 삼겠네

죄악세상풍파 맹렬하여도 주의 말씀 나를 붙드시겠네

헛된 세상 쉬지 않고 변하나 성경 말씀은 영원토록 변찮네

(새찬송가 663장 1~2절)

 

17세기 불란서의 계몽철학자이며 무신론자인 볼테르는 맹렬한 기독교의 반대자였다. 그가 호언장담하기를 ‘앞으로 백년 뒤에는 기독교는 땅 위에서 없어질 것이고 성경은 고고학의 한 자료가 되고 말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병들어 죽게 되었다. 의사에게 ‘나를 6개월만 더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고 나중엔 성직자를 찾았지만 동료 무신론자들의 방해로 끝내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나는 지옥으로 간다. 지옥으로 간다.’고 되뇌면서 공포에 싸여 죽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떠난 25년 후는 그의 큰 저택이 성경을 모아두는 창고가 되고 말았으니 이 어찌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영감 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보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하였다(벧전 1:24~25). 곧 예수님과 그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뜻이다.

 

3. 여호와의 책은 자세히 읽고 자세한 설명을 들어야 뜨거운 은혜를 받는 책이 된다는 것이다(精密性).

 

그러므로 본문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했다.

행 17:11~12에 보면 베뢰아 교회가 부흥한 것은 교인들이 날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진리가 그러한가. 라고 성경을 자세히 상고하므로 믿는 자가 많아졌다고 하였다.

 

성경은, 때로 반대하기 위해 자세히 읽는 자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시대 로마의 장성 중 문학의 소질이 있는 웰레스 대장은 기독교를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키게 하려고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소설을 쓰기 위해 신약 4복음서를 자세히 읽었다. 그러는 중 변화되어 도리어 기독교를 옹호하는 글을 쓰고 말았으니 그것이 유명한 벤허라는 소설이다. 오늘도 이 책은 천로역정 다음가는 책으로써 세계 각 국의 말로 번역되어 계속 출판되어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주고 있다. 이렇게 주님을 반대하기 위해 성경을 읽어도 변화가 일어나겠거든 하물며 믿음으로 자세히 읽는 자에게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을 자세히 풀므로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당신의 일을 하게 하셨다. 눅 24:27에 보니 “이에 모세와 및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 바 자기의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하셨다. 이것을 보니 성경기록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의 구원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통해서 당신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린 구약성경을 이스라엘의 역사 정도로, 또는 교회 어린이 학교의 이야기꺼리 정도로, 또는 신약성경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에 예화꺼리 정도로 설명하는데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인물, 사건, 종교행사, 특히 흠 없는 동물제사 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속죄 주를 자세히 설명해야 뜨거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신구약 66권의 성경은 분명히 구약 39권의 예언이 신약 27권에 이루어진 내용의 책이다. 그러므로 27권의 책은 39권의 책이 있으므로 생겨진 책이기 때문에 신약을 바로 알려면 먼저 구약을 바로 알아야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삼구(39)가 없는 27이 어디 있겠는가? 란 말이다. 그러므로 신약 27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려면 구약 39권에 수록된 예수 그리스도를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기초가 약한 마포구의 아우 아파트는 건축한 지 얼마 안 되어 무너졌다. 이처럼 기독교의 기초가 되는 구약성경을 무시하면 불원장래 기독교는 모래 위에 세운 집처럼 붕괴하고 말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권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요 10:34~35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께서 시 82:6에, “신”이란 말씀 한마디를 인용하시면서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고 하신 것이었다. 이는 구약의 축자영감 곧 글 마디마디가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아니 글 한자뿐만 아니라 마 5:18에 보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린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바울이 전해 주는 말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마음에 뜨겁게 역사가 일어난 것같이 신구약 성경 마디마디를 아멘아멘 하고 받아들여 은혜 받은 무디 같이 되자(살전 2:13 참조).

 

4. 여호와의 책은 하나도 빠진 것이 없는 완전무결한 책이다(完全性).

 

본문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한 다음에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라고 하였다. 이것이 여호와의 책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요 21:25에 보면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가 부족할 줄 아노라”고 한 것을 보니 성경은 예수님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심이 증거 되는 것으로 만족했지 사사건건 다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비록 성경은 신구약 66권뿐이지만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허술하게 미비 된 곳은 하나도 없는 완전무결한 책이었다.

 

실례를 들면 사 20:1에, “앗수르 왕 사르곤”이란 말이 있는데 역사가들이 저술한 책에는 빠져 있었다. 그래서 모든 역사학자 들이 “성경은 역사상에 실재하지 않았던 사람을 삽입한 믿을 수 없는 책이다”라고 비판의 화살을 퍼부었다. 마치 애꾸눈만 가지고 사는 원숭이 세계에 두 눈 가진 정상인 원숭이가 들어갔더니 도리어 병신이라고 놀림감이 된 것처럼 자기들이 빠뜨려 놓고는 성경을 잘 못했다고 해왔다. 그러나 1932년 중동 니느웨 북방에서 봇다라는 고고학자로 말미암아 지하에서 사르곤왕의 일기책과 일용품들이 발굴되므로 도리어 그들의 책을 고치게 된 일이 있었다. 현재 이 발굴된 증거품들이 미국 시카고 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니 성경은 역사적으로 빠진 것이 없는 책임이 분명하다.

 

또 한 가지는 과학의 첨단을 걷는 우주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여호수아 때 태양이 종일 중천에 머문 일과 또 히스기야 때 태양의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갔던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의 우주여행을 위해 우주정거장을 설치하려고 전자계산기로 시일을 계산하는 중 이 우주가 시작한 후 만 하루가 없어진 것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것을 찾기 위해 과학자들이 애를 쓰다가 마침내 그 원인을 성경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미국 메러랜드 주 그린벨트 우주연구소에서 발견한 것인데 전자계산기에 첫 번 나타난 것이 23시 20분간이고 두 번째 나타난 것이 40분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없어진 첫 번째 시간을 수 10:12~14에 여호수아가 아얄론 골짜기에서 아모리 사람들을 칠 대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했다는 사실에서 23시 20분간임을 밝혀내었고, 두 번째 없어진 시간은 왕하 20:8~11에서 히스기야 왕에게 병 낫게 하는 징조로 일영표(日影表) 위에 10도의 그림자가 뒤로 물러갔다가 원점(原點)으로 돌아서기까지가 정확한 40분간임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문제는 성경을 모르는 과학자가 성경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진리를 발견했다는 점이라 하겠다. 이렇게 성경은 과학에 비추어 봐도 빠지는 것이 없는 완전한 책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택한 전 인류를 죄악에서 속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진행과 결과는 빠짐없이 성사되는 것을 약속하는 완전한 책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 19:7 상반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라고 하셨고, 빌 1:6엔,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하셨다.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받고 살아가는 주의 자녀임을 잊지 말자.

 

5. 여호와의 책은 서로 서로 짝이 맞는 책이다(統一性).

 

신구약 성경은 주전 1,500년경에 모세가 쓴 5경을 위시하여 주후 100년 사도 요한이 쓴 계시록에 이르기까지를 셈하면 약 1,600년 걸려서 완성된 책이다.

그러므로 각 저자의 형편은 각이(各異)했다. 시대가 달랐고 지식수준이 달랐으며 신분의 고하와 직분의 차이가 있어서 서로 만나서 의논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마치 단일기자가 쓴 것같이 서로 짝이 맞게 기록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각 시대 각 저자에게 한결 같으신 성령님이 감동하사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구원사상은 물론 도덕, 윤리 면에도 신구약은 통일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은 성경으로서 푼다는 성경해석의 원리를 확립해야 되고 이 난절 해석에 있어서도 조급하게 굴지 말고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해석이 될 때까지 참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럼 성경의 통일성을 두 가지의 원리로 생각해 보자.

 

1) 구원사상이 통일되어 있다.

 

혹은 말하기를 “구약시대는 율법을 행하므로 구원을 받게 되어 있고 신약시대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고 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구약 때도 신약 때도 오직 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통일성 있는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요 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하셨다. 그리고 히 9:22 끝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구약 때는 앞으로 오실 완전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그 그림자가 되는 흠 없는 소, 양, 비둘기를 잡아 피 부리는 제사를 드렸으니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이었으며, 신약은 구약의 예언대로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에 속죄의 죽음을 죽으시므로 그를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니 신구약은 구원사상이 통일되어 있는, 다시 말하면 인류 구속의 총 제목으로 통일되어 있는 책이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2) 신구약 성도의 생활원리도 통일되어 있다.

 

혹은 말하기를 “구약시대의 신앙생활과 신약시대의 신앙생활은 다르다”고는 하지만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이 사상이 신구약에 통일된 것이라면 그 열매인 윤리와 도덕도 같은 것이라야 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여기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구약 때의 성도 중엔 첩을 둔 자가 많았다. 아브라함, 야곱, 다윗, 솔로몬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신약 때는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다. 실례를 들면 세례 요한은 헤롯왕이 동생의 아내를 뺏어 첩을 삼은데 대하여 책망하므로 옥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는 목 베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구약 때는 첩을 두고 살아도 괜찮았지만 신약 때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대로 신구약의 신앙생활의 원리는 서로 짝이 맞는 통일된 글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때는 허락하지만 신약 때는 금했다고 하는 해석은 성경의 통일성을 모르는 무식한 자의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분명히 구약 때도 금하고 있었던 도덕률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 19:4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라고 하였다. 본래는 한 남자와 한 여자 곧 일부일처의 이상적 혼인 제도를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제도가 붕괴되었음을 탄식하고 구약 때는 죄짓는 대로 내버려두었다는 의미에서 8절에 보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구약 때에 신자들에게 첩을 두는 것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으로 한 일을 징계하기 위한 묵인이었던 것이었다. 과연 첩을 둔 그들의 가정에 평안함이 없었고 이복형제의 불화 갈등은 분명히 하나님의 징계였다. 이런 의미에서 신구약은 구원사상만 통일된 책뿐만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인 윤리와 도덕 면에도 통일되었음을 알고 구약을 오해하지 말 것이며 서로 작이 맞도록 되어 있는 성경을 고루 읽고 배우므로 원리 해석을 바로 파악하고 믿어야 하겠다.

 

6. 여호와의 책은 그의 명하신 말씀이 수록된 절대성을 가지는 책이다(絶對性).

 

본문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라고 한 다음에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호와의 명령이 수록된 책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라도 이 말씀을 가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계 22:18-19은 경고하기를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소위 통일교의 교주 문선명은 성경에 3이란 수는 중요하다. 3위 일체 하나님, 그리스도의 3일 만에 부활 등을 들면서 성경도 구약 신약 두 부분으로서는 부족하고 제3경이 나와야겠는데 그것을 자기가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완성되면 성경은 완벽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가감하는 자를 저주하겠다고 했으니 그의 영은 불쌍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가감할 수 없는 여호와의 명하신 말씀은 한마디도 헛되지 않고 주의 뜻을 이루시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 55:11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린 주의 말씀은 절대성을 갖고 있음을 알고 내 생각, 내 지각에 넘치는 말씀이라도 믿음으로 순종하여 복 받도록 하자.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밤새껏 허탕을 친 베드로를 보시고 “깊은데 가서 그물을 던져라”는 말씀은 상식 밖의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하고 던졌더니 너무 많이 잡혀 자기 배에만 채울 뿐 아니라 다른 친구의 배에도 가득 실어 줄 수가 있었다.

 

그렇다. 오늘도 우리가 주의 말씀을 어려운 중에서도 또는 내 머리로 이해가 안가는 일이 있어도 복종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복을 받을 것이고 그 복이 넘쳐서 남에게까지 풍성하게 나눠주게 될 것이다.

 

우린 다시 한 번 말씀의 절대성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할 종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눅 1:37에,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신신학의 거두 칼 발트는 성경 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영항(永恒) 세계에선 완전하다. 그러나 역사세계에 들어와서는 불완전해질 수 있다”고 끝을 흐리게 말하였다.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지만 범죄 한 역사세계의 인간을 통해 기록할 때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불신앙적인 말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당신의 말씀을 비록 역사계의 인간이 부족한 것이 있을지라도 성령의 감화와 능력으로 붙들어 완전기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믿는 것이 바른 성경관인 것이다.

 

물통에 바른 막대기를 집어넣으면 분명히 바로 들어갔지만 광선의 작용으로 우리의 눈에는 짧게 옆으로 비뚤어지게 보이긴 하지만 실은 바른 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이 세계에 들어 왔으나 그릇되게 보는 것뿐이지 절대적인 바른 말이 이 세상에 들어왔으니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책 곧 성경인 것이다.

 

아무튼 군대는 상관에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의 군병된 신자는 최고 사령관이신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자이시기 때문이다.

 

7. 여호와의 책은 그의 신이 모으신 것 곧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읽고 듣는 자에게 감동을 주는 책이다(感動性).

 

본문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바진 것이 없고 그 작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라고 하신 다음에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고 하셨는데 바로 이 말이 읽고 듣는 자에게 감동을 준다는 말인 것이다.

 

말씀을 읽고 들으므로 감동을 받아 새 사람이 된 사건은 너무 많기 때문에 그 실례를 일일이 말할 수 없으나 그 중 하나만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에 어느 성경학교 여자 기숙사에 강도가 침입하여 여학생들을 위협하고 좋은 물건들을 빼앗아 가는데 한 여학생이 도적에게 ‘선생님! 이것도 가져가십시오.’하면서 자크 달린 작은 성경을 주었다. 도적이 집에 와서 그것을 열어 보았더니 성경책이었다. 무심코 연다고 연 것이 에베소서였고 문뜩 눈이 가는 곳은 4:28이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는 대목을 읽게 되었다. 그는 순간 기분이 좋지 않아 책을 덮고 방에 내던지고 말았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읽은 그 말을 아무리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도록 역사하셨다. 그는 마침내 신경쇠약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고 이웃 사람의 권고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서쪽을 달리던 말이 방향만 동쪽으로 바꾸면 동쪽도 잘 달릴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나중 되었다가 먼저 되는 사람이 되어 주의 축복으로 목사가 되었다. 그는 결혼하여 북해도 삿포로에서 목회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사모님이 방을 소제하는 중 서재에서 옛날에 자기가 갖고 있던 자크 달린 성경을 보게 되었다. 아마 헌 책방을 거쳐 남편의 손에 들어온 줄 알고 저녁식사를 하면서 물어 보았다. 남편은 고개를 숙이면서 자기의 과거를 간증했다.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충성을 다짐했다고 했다.

 

딤후 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다.

 

Ⅱ. 가라사대란 책이다.

 

성경은 모든 책들 중에 가장 귀한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영어로 ‘바이블’이라 하는데 이는 책 중의 채이란 뜻이다. 결코 성경을 고전 중의 하나로 보지 말 것이며 다른 책들과 비교하지 말아야겠다. 왜냐하면 다른 책들은 땅에 사람들의 주관적 지식의 산물이지만 성경은 하늘에서 온 영감 된 객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변홍규 박사는 “성경을 다른 책들과 비교하지 말라. 비교하는 것은 위험하다. 다른 책들은 땅에서 말하고 성경은 하늘에서 말한다.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라.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유래는 초자연이요 지속은 영원 적이요 가치는 형용할 수 없고 범위는 무한하며 저작은 하나님이 하시고 운필은 사람이 했으며 능력은 인생을 중생시키며 도리는 확실한 관계는 모든 인간에게요 영감은 전체적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 신자는 성경의 영감과 권위를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을 잃게 된다. 성경의 영감을 부인한 결과 영국에선 자연신주의가 생겼는데 이는 성경의 하나님의 계시임을 부인함이요 프랑스에선 배교주의가 생겼는데 이는 종교를 반대함이요 독일에선 인지주의가 생겼는데 이는 이적을 부인함이요 미국에선 세속주의가 생겼는데 향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건전한 신앙을 가지려면 성경의 영감을 믿어야한다”고 했다(성서개론 P.20, 1).

 

그렇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라사대란 책이다. 그래서 ⌈가라사대란 책⌋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구약 39권은 성부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라사대” “여호와가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특히 구약 39권인 성부의 말씀은 범죄자의 사망과(창 2:16~17)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가 나시고 십자가로서 구원하실 것을 허락하시고(창 3:15)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약속하셨다. 그 중 민 23:19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안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부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리스도를 확신해야 하겠다.

 

2. 신약 4복음서는 성자 예수님이 가라사대란 말씀이다.

 

그러므로 4복음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란 말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인 4복음은 구약 39권에 예언대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유에 탄생하시고(눅 2:6~10) 십자가상에서 속죄로 구원을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막 10:45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고 요 19:30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하셨다.

 

이렇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사람이 되실 뿐 아니라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려 지옥고까지 겪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우리도 끝까지 예수님만 사랑해야 한다. 엡 6:24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 찌어다”라고 하셨다.

 

3. 서신 23권은 성령님이 가라사대란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가라사대란 말이 많다. 그리고 성령의 말씀인 서신은 성도에게 권능을 주사 그리스도를 땅 끝까지 증거하게 하시고 신자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 1:8에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당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롬 8:26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하셨고 빌 1:1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령을 힘입어 살며 내세영광을 바라보며 살자.

 

맺는 말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가라사대란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만이 절대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된다. 결코 교황 가라사대, 신부 가라사대, 교권자 가라사대, 목사 가라사대가 아니다. 여호와 가라사대, 예수님 가라사대, 성령이 가라사대란 말씀만 전하고 확신과 사랑과 소망 중에 살아가자.

 

Ⅲ. 영육의 두 흐름을 말하는 책이다.

 

신구약 66권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구원받는 영의 계통과 멸망 받는 육의 계통을 말한다. 왜 영육의 두 흐름이 있는가? 그것은 창세전에 벌써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버리시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롬 9:10~13에,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하셨다.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성부 하나님이 택한 자와 버림받을 자를 정하셨다.

 

엡 1:3~5에 보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셨다.

 

‘창세 전’이니 나기도 전, 믿기도 전에 벌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결코 믿은 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믿기 전에는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어두워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결코 믿은 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믿기 전에는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어두워서 하나님의 자녀란 의식과 권세가 없음으로 몰라서 마귀를 하나님인 줄 알고 그 앞에 종노릇한 것뿐이다. 믿은 다음 하나님의 자녀란 분명한 의식과 권세가 생겨 미신을 타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타락하여 마귀의 자녀가 될 수 없고 마귀의 자녀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마귀는 영원히 합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도 마찬가지이다. 이 영육의 두 흐름은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2. 성자 하나님은 택한 자의 구주이시며 버림받은 자의 구주는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은 마 1:21에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하셨으니 택한 자의 구주란 말이다. 요 13:18에,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고 하셨고 요 6:44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고 요 6:39엔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라”고 하셨다.

 

과연 주님은 택자 베드로를 위해서는 눅 22:31~32에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지만 버리기로 정해 놓은 유다를 위해서는 기도 없이 탄식만 하셨다. 곧 마 26:24에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인류의 최후 상태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마 25:46에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으니 영육의 두 흐름은 영원한 것이다.

 

3. 성령 하나님이 택자에게 그리스도의 씨를 심어 영생으로 인도하고 버린 자는 상관하지 않는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께서 택해 놓은 사람을 때가 되면 썩지 아니할 그리스도의 씨를 심어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벧전 1:23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하셨다. 박씨의 아들이 박가가 되고 김씨의 아들이 김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 3:6~7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하신다. 그러나 육에 속한 자는 그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이기 때문이다. 같은 물이지만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면 더욱 썩어 들어가고 산 나무에 주면 파릇파릇 생기를 내면서 자라가며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빌 1:6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하셨다. 마귀의 자식인 가룟 유대에게 마귀가 들어가니 그리스도를 팔아넘기는 반역을 하게 되었고 다른 제자들에겐 성령에게 거듭나게 했더니 주를 위해 고난 중에도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며 순교까지 하게 되었다. 이는 육에 속한 자는 지옥으로 가고 영에 속한 자는 영생으로 가는 두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맺는 말

 

끝 날에 심판하사 영에 속한 자들은 신천신지 무궁세계 영생의 축복을 주시고 육에 속한 자들은 무서운 성 밖인 지옥으로 가게 한다. 이렇게 영육의 두 흐름은 영원으로 합할 수 없다.

 

Ⅳ. 돌이킬 수 없는 축복의 말씀이다.<민 23:19-20>

 

애굽을 치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땅을 지나게 되자 발락 왕이 물질과 명예로 발람을 꾀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했으나 그가 영감 되어 말하는 가운데 19~20절에 보니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라고 하였다. 타락한 그는 나중 모압이 망할 때 함께 칼에 죽임을 당했지만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는 말씀대로 범죄 한 선지자는 망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시간은 ‘돌이킬 수 없는 축복의 말씀’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하나님은 택자 구원에 대해 식언치 않으신다.

 

19절 상반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라고 하셨다. 이는 ‘말을 먹어 치워 버리지 않는다.’ ‘말을 해 놓고 안했다고 잡아떼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말의 부도를 내지 않는다.’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19절 하반에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하셨다.

 

그럼 왜 하나님은 하신 말씀을 식언치 않으시는 것인가? 그것은 19절 상반의 말씀과 같이 “인생이 아니시”며 “인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인생은 누구나 말에 실수가 있다. 그러므로 약 3:2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말에 실수가 없는 분은 인류역사상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었다. 요 7:45, 6에 보니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고 한 말이 증거 된다. 그러니 예수님은 성경말씀대로 완전한 하나님이시오 완전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식언이 없는 것이다.

 

그는 택자의 구주로 오신 분이시며(마 1:21) 택자를 끝까지 사랑하사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요13;1), 요 14:18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고 마 28:20에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고 마 18:20에는 “두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고 요 6:39에서는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마 24:35에는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토대로 굳게 서야겠다.

 

2. 하나님은 택자 구원에 대해 후회가 없으시다.

 

19절 상반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하셨다. “후회가 없으시도다.”란 말씀은 구원의 예정과 진행에 대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러지 말걸’하고 혀를 찬다든지 한탄을 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혹은 말하기를 “창 6:6에,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기도 하고 또 마 26:24에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은 멸망 받을 자에 대한 탄식을 묘사한 것이지 택자 곧 구원받은 자에게 대한 탄식은 아닌 것이다.

 

물론 신자를 위해 탄식할 때가 있다. 그것은 롬 8:26에 보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셨다. 이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셨다. 이 탄식은 결코 구원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기도를 바로 할 줄 모르는 우리를 돕기 위해 탄식하시면서 성령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구원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롬 11:29에 밝히시기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과 역사는 변치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구원은 후회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요 6:44에 보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다.

 

3. 하나님은 택자 구원에 대한 축복을 결코 취소하지 않으신다.

 

20절에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라고 하였다. 그럼 왜 하나님의 축복은 취소할 수 없는가? 그것은

 

1) ‘축복의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결코 택자를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21절 상반에 보니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라고 하셨다. 야곱은 영안이 밝아 아브라함 가문에 약속하신 ‘네 자손’ 곧 그리스도(갈 3:16)를 귀히 보고 형의 장자 권을 빼앗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공로를 보시고 그의 허물을 가려 주신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우리에게 도덕적인 흠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공로를 진심으로 믿기만 한다면 허물의 가림을 받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공로를 믿기만 하면 결코 저주를 받지 않는 것이다.

 

2)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축복을 …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롬 8:33~35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하셨고 38, 9엔 “내가 확신하노니……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셨다.

 

3)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신 돌이킬 수 없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롬 9:13에,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하셨다. 이는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대의 하신 말씀이요 창세전에 예정하신 것이란 말이다. 전 3:14상반에,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는 확고부동한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 행 5:38, 9에 말한 바와 같이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는 말 그대로인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를 흔들 수 없듯이, 택자는 창세전부터 예정하신 돌이킬 수 없는 축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흔들어 지옥으로 떨어뜨릴 수 없는 것이다.

 

Ⅴ. 살아 있는 말씀이다.<히 4:12>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되어 기록된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지(意志)요 동작이요 능력이요 표현인 것이다.

 

창세기 1장은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어라!’하시니 빛이 나타났고 ‘하늘과 땅이 나누이라!’ 하시니 궁창이 생겼고 ‘물과 땅이 나누이라!’ 하시니 바다와 육지가 생겨났고 ‘초목이 있어라!’하시니 오곡백과가 생겨났으며 ‘해와 달과 별들아 있어라!’하시니 그대로 나타났고 ‘물에, 공중에 생물이 있어라!’ 하시니 하늘엔 새가 날고 물엔 고기가 놀게 됐으며 ‘짐승아 있어라!’하시니 여러 종류의 동물이 생겨났으며 마지막으로 인간을 흙의 요소로 신묘막측하게 지으사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권능이 크신 하나님이신가!

 

특히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사 오신 그리스도는 이 능력의 화신(化身)이었다. 그는 하나님도 되시고 사람도 되시는 능력과 사랑의 주님이시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창조주시오 구속주이시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바로 능력이요 사랑의 결정체(結晶體)였었다.

 

그러므로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니 죽었던 청년이 소생했으며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시니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송장이 살아 무덤에서 나왔다. 이는 주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사랑의 결과로 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대주재 하나님이었던 것이었다.

 

오늘도 인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을 때에 대답하신 말씀이 잘 밝혀 주고 있다. 곧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지금도 바람 불고 비가 오며 흉년지고 풍년 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이요 엄동설한 지나고 봄이 돌아올 때 새움이 트고 새싹이 나는 것도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땅에 숨은 씨앗들아 올라오라!’고 하시는 말씀에 머리를 내밀고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대로 믿는 자가 적어진 것 같다. 다니는 자 중에 십자가의 원수가 있다는 말과 같이 과학지식의 발달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이성으로 판단해서 믿으려는 합리주의 신학자들이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해 왔다. 그 중에 한두 가지 예를 들면 ‘성경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다!’는 말 등이다. 이 말은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는 사람의 말도 마귀의 말도 심하게는 짐승의 말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바울이 “겉옷을 가져오라!” 또 마귀가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한 말이라든지 나귀가 발람을 보고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란 말들은 분명히 사람과 마귀와 짐승의 말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왜냐하면 책을 쓰는 사람들이 흔히 남의 말을 많이 인용하기도 하지마는 그 책 전체는 분명히 저자 자신의 글인 것이다. 그러므로 속지 말아야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완전무결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마귀가 말한 것, 짐승이 말한 것을 사람은 모르는 것이었다. 오직 성령님이 아시고 여기 소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비로소 알게 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무식하고 미련한 인간이 영감된 기록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이러니저러니 하고 헐뜯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소행이 아닐 수 없다.

 

또 ‘기록한 말씀은 전할 때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시지, 전하지 않을 때는 죽은 문자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말로 도전해온다.

 

우린 이 말을 들을 때 읽는 것과 전하는 일에 게을리 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말은 오만불손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獨自的信任性)을 부인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전하든 말든 그 권위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의 예언한 때는 사람이 믿든 말든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은 인간뿐만 아니라 생물이면 다 받는 형벌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 앞에 겸손해야 하고 이 말씀에 복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합리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만일 이런 식으로 성경을 따지고 나간다면 끝에 가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흔히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뭣! 아무 것도 없는 중에 만물을 창조했다고! 누가 봤다 더냐?”

“아니 경수가 끊어진지 오래된 사라 할머니가 아들을 낳았다고? 그것은 생리학적으로 맞지도 않은 말이야!” “뭣! 홍해가 갈라져 길이 생겨 이스라엘 대중 200만 명이 무사히 지나갔다고? 웃기지 마시오!” “뭣! 엘리야는 바람을 타고 예수는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갔다고? 그건 만유인력을 모르는 무식한 소리건만!” “뭣! 사나이를 모르는 처녀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고? 이건 생식과정을 무시하는 도깨비 같은 소리건만!” “뭣!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아이와 여자 외에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에 거두었다고? 그건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의 인격에 감화를 받은 한 아이가 도시락 바칠 때 모든 사람들도 감동이 되어 가지고 있던 도시락을 내어놓고 갈라 먹은 것이 그렇다는 거야!” “뭣! 예수가 바다 위를 걸었다고? 그건 풍랑을 만나 파선 직전의 제자들을 보고 답답하여 바닷가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배멀미를 하고 있는 제자들의 눈엔 흡사 바다 위를 걸어오는 것 같아서 한 말이야!” “이런 케케묵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좀 고상하게 예수님은 훌륭한 도덕을 가르친 선생님이시다. 우리는 그 분을 존경하고 본받도록 하자. 이렇게 나와야 대화가 될 것 아닌가?”라고 합리적으로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것이 현대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학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보다 하나님보다 인간의 머리를 높이는 과대망상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제 멋대로 말씀을 빼고 보태는 자들에게 사정없이 저주하고 있다. 계 22:18~19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의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셨다.

 

나는 합리주의 신앙을 양파(속칭 다마네기) 신앙이라고 불러 본다. 왜냐하면 양파를 벗기고 또 벗기면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양파신자는 알맹이 없는 신자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이런 신자는 결코 되지 말자. 무디 선생처럼 신구약 성경 마디마디를 아멘아멘 하고 받는 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장로교 신조 제1조에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즉 신앙과 본문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고 했으니 성경의 절대성을 믿지 않는 자는 장로교 교인의 자격이 없는 자일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무자격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적인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서서 신앙생활 하도록 힘써 나가야 할 것이다.

 

과연 예로부터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 말씀의 토대 위에 굳게 서서 승리해 왔다. 그러므로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기독교가 다시금 새로운 힘을 발견한 데는 이 성경이다. 우리의 가진 이 오랜 성경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젊고 건전하게 만들었다!”라고 했으며 시 19:7~10에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하게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씀을 믿어야겠다. 여기에서 삶의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동지사 대학 총장 니히지마 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창 1:1의 말씀을 통하여 확신의 사람이 되었으며 마틴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롬 1:17의 말씀으로 부패한 로마교와 인연을 끊고 종교개혁에 성공을 했으며 윌리암 구퍼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란 롬 3:25 의 말씀으로 절망 속에서 소망을 얻었으며 어거스틴은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롬 13:11~14의 말씀을 단숨에 읽고 새 사람이 되었으며 리빙스톤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행 16:31의 말씀을 확신하고 아프리카 선교에 성공을 했으며 아브라함 링컨은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는 출 14:13의 말씀을 믿음으로 불리해진 전세를 승리로 이끌어 노예해방을 성공시켰으며 한상동 목사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마 28:20의 말씀을 믿음으로 일제의 모진 고문을 이겨 낼 수 있었으며 칼빈은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란 롬 8:18의 말씀을 믿음으로, 일곱 가지의 중병을 앓으면서도 목회 정치 저서에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바울은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힘으로 전도에 대성공을 했었다. 그러므로 말씀의 신앙으로 돌아가야 하겠다.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끝으로 히 4:12의 말씀을 생각하므로 은혜와 힘을 얻고자 한다. 거기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는데 이 중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란 말은 두 가지의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1) “살았고”란 말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은 살았다는 말이고 또 살아 있기 때문에 힘이 있다는 말이다.

힘은 능력이요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위력으로 죄인의 굳은 심령을 파괴시키며 복음을 받도록 여가하고도 남는 것이다.

 

2) “살았고”란 이 말씀은 지금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지금도 변함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 선생은 성경을 읽고 들을 때마다 “방금 하늘에서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는다!”고 하였으니 이는 성경을 바로 깨닫고 하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외에 다른 말에 귀를 기울이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는 기독교의 대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다 같이 말씀의 신앙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Ⅵ. 성경의 특성은 어떤 것인가?<시 19:7~14>

 

시 19편을 보면 1~6절까지는 천체 곧 해와 달과 별들의 세계의 영광과 그 혜택을 말하고 7~14절까지는 성경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이는 위대한 천지의 창조주만이 범죄 타락한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특별게시인 성경을 줄 수 있다는 의미의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주신 성경의 별명을 율법, 증거, 교훈, 계명, 경외하는 도, 규례 등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책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성경의 특성에 대해 생각고자 한다.

 

1. 죽은 영혼을 소성 시키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

 

7절 상반에,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라고 하셨다.

여기 “여호와의 율법”이란 말은 성경을 뜻한다. 성경에 대개 율법이라 할 때 모세 5경을 말하지만 한편 성경 전체를 가리켜 율법이라고 하기도 한다. 실례를 들면 요 10:34-35에 보면 예수께서 시 82:6을 인용하사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 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고 하신 것은 모세 5경인 율법이 아니고 성경을 율법이라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완전하며”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한 효능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말씀이기 때문에 범죄하고 깨어진 인류의 속 사람 영혼을 소성 곧 완전히 살려준다는 것이다. 인류는 누구를 막론하고 시조 아담의 원죄로 영혼이 죽은 자들이다.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불행을 말한다. 이 단절(斷切)은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지옥까지의 버림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영혼이 성경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어거스틴은 어느 날 “책을 펴라!”는 천래의 음성을 듣고 즉시 롬13:13~4의 말씀 곧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이을 도모하지 말라”는 대목을 단숨에 읽고 불량청년이 새 사람이 되었다. 세상의 유명한 책들을 일고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구원에 이르는 회개 곧 하나님을 떠난 일 곧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죄를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성경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영혼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2.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해 준다.

 

7절 하반에,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증거”는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진리의 책이란 말이요 “확실”하다는 말은 참되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두한자로 지혜롭게”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주 앞에 미련한 자인 줄 알고 겸손하게 마음을 여는 자에게 참된 말씀인 성경은 지혜의 근본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 11:25에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고 하셨다. 만일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수박 겉 핥기요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나아만은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집 앞에 왔으나 종을 통해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말에 격분하여 돌아가려고 했지만 종의 말을 듣고 자기 생각을 버리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완전히 순종했더니 어린애 살 같이 깨끗해 졌다. 우린 주 앞에 어른스러운 태도를 버리고 어린애 같이 마음을 열고 단순한 믿음으로 말씀을 받도록 하자.

 

3. 정직하게 행하게 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다.

 

8절 상반에,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라고 하셨다. ‘정직하다’는 말은 바르다, 곧다. 라는 뜻이다. 이 바른 말씀으로 죄인의 마음을 찔러 쪼개므로 우리의 심령을 고쳐 주사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죄 문제를 경하게 다루기 쉽다. 그래서 12, 13절은 여기에 대해 거듭 말씀하고 있다. 곧 “자기의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속담에 ‘사람마다 제 잘난 맛으로 산다.’고 자기 자랑은 많이 해도 허물을 잘 모르고 지나는 일이 많다. 동급이라도 바둑을 두는 사람보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두 급 앞을 더 보듯이 다른 사람이 내 허물을 아는데 있어서 나보다 자세한 방면이 있다. 그 보다도 하나님은 나의 모든 허물을 환히 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으로 찔림을 받아 숨은 죄악을 회개하여 용서받고 기쁨을 갖도록 하자.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옳지 않고 바르지 못한 일에서는 결코 기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어느 성도는 낮에 화를 냈더니 밤에 어머니가 아팠고 위해서 기도하는데 기도가 잘 되지 않아 낮에 지은 죄를 철저히 회개했더니 기도문이 열리고 마음에 기쁨이 오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연약하여 죄를 지었으면 결코 그냥 지나지 말고 회개하여 사죄의 기쁨을 얻도록 하자. 행 3:19에,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하셨다.

 

4. 순결하게 살므로 영안을 밝게 한다.

 

8절 하반에,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 곧 깨끗한 것이다. 돼지는 구정물을 먹지만 양은 깨끗한 물을 마시고 산다. 이처럼 하나님의 양인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순결한 말씀만을 먹고사는 것이다. 이 순결한 말씀은 자신을 깨끗이 해야 받을 수 있다. 어찌 더러운 구정물통에 깨끗한 음료수를 담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순결한 신앙생활을 해야 영안이 밝아지는 것이다. 스밋트란 소경 성도는 ‘나 행한 것 죄 뿐이니’란 찬송가 가사 2,3절에 ‘내어둔 눈 밝히시니 참 기쁘고 고마우나 그 보다 더 원하오니 정결한 맘 주옵소서.…… 정결한 맘 그 속에서 신령한 것 비치오니 이러한 맘 얻었으면 눈까지도 밝으리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깨끗한 심형을 원하고 있으며 영안이 밝아지기를 원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죄사함을 받고 기쁨을 누리는 것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방심하다가 죄를 짓고 영안이 어두워 망신한 자도 있음을 알고 언제나 순결을 힘써야겠다.

 

5. 여호와를 경외하며 정결한 생활을 하게 한다.

 

9절 상반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라고 하셨다. 성경은 읽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섬기게 하는 목적으로 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라고 한 것이다. 소독약이 있는 곳에 병균이 있을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시간은 성령님이 함께 하심으로 정결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 정결히 영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앞 절의 말씀같이 주의 말씀으로 영안이 밝아진 사람은 교만하기 쉽다. 이것은 신앙의 교만이라 해야 할까?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해야 된다. 이것이 순결하고 밝은 영안을 유지시키는 비결인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지식은 교만에 빠지며 나중에는 억지로 성경을 푸는 이단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자신을 처서 복종시키는 자라야 밝은 영안을 계속 유지하는 복을 받는 것이다.

 

6. 심판을 바라보고 의롭게 살게 한다.

 

9절 하반에,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라고 하셨다. 여기 ‘규례’란 말은 심판이란 뜻이고 ‘확실’하다는 말은 참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미리 주신 말씀 곧 성경은 끝 날에 심판하시는 말씀과 동일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벧전 4:17에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성경 말씀 앞에 날마다 심판 받으면서 살자. 이 심판은 ‘확실’ 곧 참되기 때문에 말씀이 가라고 할 때 가고 멈추라는 곳에 멈추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요 12:48 하반에,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셨다. 심판의 말씀을 미리 다 말씀하시고 끝 날에 심판하시는 것은 마치 학생에게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준 뒤에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박윤선)

 

그리고 시험 준비가 다 된 학생은 도리어 시험 시간을 기다리듯이 말씀으로 사는 자는 심판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10절에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이렇게 사모하는 이유는 이 말씀으로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으며 영원한 영광에까지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 위에 사는 동안 11절의 말씀과 같이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곧 위험경고를 받아 악에서 떠날 것이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곧(장래의 큰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노아 때 여덟 식구를 제하고 전 인류가 망한 것은 순결하지 못해서 벌 받은 것이었다. 만일 우리 세대가 재앙으로 망했다면 후시대 사람들이 노아 때처럼 순결하지 못해서 망했다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각오를 하고 말씀으로 경고를 받아 악에서 떠나야 되고 장래의 상을 바라보고 고난을 참으며 의롭게 살아야겠다. 혹은 말하기를 “세상이 악한데 어찌 나만 의롭게 살라고 하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여호와의 확실한 규례 곧 심판의 말씀은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고 하셨다(계 22:11).

 

Ⅶ. 성경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범죄 타락하여 전적 무능해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택한 선지자들을 통해 B.C. 1500년에서 400년에 이르는 1100년간 39권의 구약을 기록하게 하셨으며 그런 다음 A.D. 65년에서 95년 사이에 사도들을 택하사 27권의 신약을 기록하게 하셨다. 그 뿐 아니라 섭리 중 이 신구약을 편집까지 해 주셨다. 그러므로 사 34:16 초두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고 하셨고 끝에 가서 ‘여호와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고 하셨다. 그럼 1600년이나 걸려서 많은 저자들을 감동시켜 기록하시고 친히 편집까지 하사 인류에게 주신 성경이란 대체 무엇인가?

 

성(聖)은 히브리어로 ‘코테쓰’인데 이는 ‘구별한다.’ ‘세속을 떠나 하나님과 관계된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예수께서 가라사대’ ‘성령이 가라사대’라고 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은 속된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감동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마디마디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결코 성경을 하나의 고전(古典)으로 고대의 신화 곧 꾸민 이야기로 유대와 애굽과 중동지방의 역사적인 문서로, 윤리도덕을 가르치는 교양서적 정도로 알면 하등 유익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배우고 전하고 들어야 영육 간에 축복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전 2:13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 하느니라”고 하셨다.

 

특히 성경은 구별된 세속을 떠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더러운 구정물통에 깨끗한 물을 담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시 119:29에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라고 하셨다.

 

떠 경(經)이란 말은 헬라어로 ‘카논’인데 이는 척도(尺度), 규범 표준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장로교헌법 신조 제1조에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즉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고 명하시고 있다.

 

그리고 요즘의 성서란 말을 많이 쓰고 있다. 일본번역이 그렇게 1977년도에 발간된 한글판 공동번역도 성서라고 했다. 그러나 딤후 3:16에 ‘성경’이라고 번역했으니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우린 성서라 말고 성경이라고 부름이 합당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삼구 27의 성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신앙생활을 바로 해야겠다. 우리가 같은 기독교라 하지만 천주교와 성공회와 합할 수 없는 것은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66권외에도 많은 외경을 성경으로 받기 때문이다. 특히 16세기 루터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을 한 근본 동기는 당시 베드로 대성당을 지으면서 면죄부(免罪符=죄사함 받는 부적)을 매매했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신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죄 받는다고 했는데 헌금을 거두기 위해 그런 짓을 했으니 어찌 바른 신앙양심을 가진 자들이 그 속에 머물러 있겠는가!

 

또 현대자유주의 신신학자들과도 합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은 성경을 전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고 일부 그릇된 점이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글자 하나하나 아니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그들의 주장은 받을 수 없는 것이다(마 5:18, 눅 16:17, 요 10:34~5, 마 24:35 등).

 

그렇다! 성경은 성경이기 때문에 사람의 이성판단으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벧후 1:20~21에,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하셨고 완전무결한 성경이기 과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딤후 3:16, 7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고 시 119:9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고 했고 133절에서는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라고 하셨다.

 

흔히 말하기를 “같은 민족인데 어찌 합할 수 없겠는가!”라고 남북통일을 간단히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사상이 하나가 되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같은 기독교라면서 왜 합할 수 없는가? 라고 하지만 근본이 되는 성경관이 다르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진리로 하나 되게 하옵소서 라고 하셨다(요 17:21~22참조).

 

Ⅷ. 성경은 예언은 왜 성취되는가?

 

성경에 기록된 예언들이 이루어진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을 안겨 준다.

 

첫째, 성경은 정확무오하다는 것, 곧 거짓이 없는 진실한 책이란 확신을 갖게 하며, 둘째, 예언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며, 셋째, 예언 성취로 나타난 사건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며, 넷째,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예언도 앞으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게 하며, 다섯째, 특히 성경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내세소망에 관한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성경에 성취된 예언들이 많지만 다음 다섯 가지만 들어 말하고자 한다.

 

1. 애굽(이집트)에 관한 예언

 

겔 29:2에, “인자야 너는 애굽왕 바로와 온 애굽으로 낯을 향하고 쳐서 예언하라”고 하셨고 특히 15절에, “나라 중에 지극히 미약한 나라가 되어 다시는 열국 위에 스스로 높이지 못하리니 내가 그들을 감하여 다시는 열국을 다스리지 못하게 할 것임이라”고 하셨다. 여기 “쳐서 예언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빼신 이스라엘 백성 특히 요셉으로 말미암아 7년 대흉년에서 구원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죗값으로 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인이나 단체 특히 국가적인 권력으로 ‘주의 백성을 박해하면 반드시 화를 받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말씀은 “나라 중에 미약한 나라가 될”것이라고 하셨는데 과연 후에 쇠약해졌고 오늘까지 약소민족으로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2. 여리고성에 대한 예언

 

수 6:26에,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고 하셨다. 이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재건되지 않는 이유도 하나님의 백성의 진로를 방해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여호수아를 통해 예언한 것이었다. 과연 이 예언은 그로부터 오백 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에 이루어졌다. 곧 왕상 16:34에 보니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저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고 하셨다.

 

3. 바벨론 성에 대한 예언

 

사 13:19~22에, 열국의 영광이요 갈대아 사람의 자랑하는 노리개가 된 바벨론이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리니 그 곳에 처할 자가 없겠고 거할 사람이 대대에 없을 것이며 아라비아 사람도 거기 장막을 치지 아니하며 목자들도 그곳에 그 양떼를 쉬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오직 들짐승들이 거기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 가옥에 충만하며 타조가 거기 깃들이며 들 양이 거기서 뛸것이요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이 역시 이스라엘의 범죄로 그들을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사용하셨지만(삼하 7:14) 나중 교만해져서 성전기명으로 망령되게 술을 마시다가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곧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니 말씀대로 망하고 말 것이었다. 그리고 이사야를 통해 예언을 주시던 때는 주전 712년이요 이것이 이루어진 것은 주전 538년이었다. 과연 후에 바벨론 성은 완전히 들짐승의 소굴이 되었고 사람들이 거기에 장막을 치고 살 수 없게 되었으니 여호와의 예언 그대로인 것이다.

 

우린 이런 말씀에서 과거에 일본이 한국 기독교 신자들을 괴롭히며 예배당 종을 빼앗아 무기를 만들다가 망한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안면방해가 안 되도록 해야겠지만 은은히 울려 퍼지는 새벽 종소리를 소음이라고 금하려는 것은 지나친 일이니 속히 시정되기를 바란다.

 

4.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

 

창 15:13~16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고 하셨다.

 

과연 이 예언대로 아브라함의 증손자 중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 13년의 고생 끝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7년 대흉년에서 구원하기 위해 애굽으로 옮기게 했고 4백년을 그 땅에서 지냈으며 나중 고난을 받다가 하나님이 모세를 시켜 애굽에 열 재앙이 내리게 하시고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만을 건너게 하였고 40년의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그 백성을 돌아오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범죄 하면 세계 각 국으로 흩어지게 하리라고 하셨다. 신 28:64에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라고 하셨다. 이 예언은 주전 1500년경에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인데 후에 이스라엘 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며 남국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게 망했고 북국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게 망했다(왕하 25:8~11, 17:6). 그리고 70년 후에 메대 파사의 연합군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돌아 왔으나 500년이 지난 주후 70년엔 로마군에 의하여 예루살렘은 완전히 망하여 유대인은 세계 각 국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역사가의 말에 의하면 그 때 희생된 유대인의 수가 110만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거의 2000년간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설움을 받다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일의 히틀러의 탄압으로 600만의 유대인이 희생되기도 했다. 전쟁 후 이스라엘이 2500여 년만에 독립을 하긴 했으나 오늘까지도 유대민족이 대다수는 이스라엘 본국보다도 다른 여러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그대로임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말씀에서 믿는 자의 범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알고 범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범죄 했으면 철두철미하게 회개하여 용서받아야겠다.

 

5.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에 대하여

 

삼구 27의 신구약 성경의 줄거리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하셨다(요 5:39).

 

과연 주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에게 나셨으며(마 1:18~23)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살아 나셨으며(고전 15:3~4) 성경대로 승천하셨고 성경대로 다시 오실 주님이신 것이다(마 26:64).

 

권위 있는 성경학자의 말에 의하면 구약에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예언이 456번인데 다 이뤄졌고 신구약에 재림에 관한 예언은 1518번이라고 한다. 초림의 대한 예언들이 성취되었다면 재림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그럼 왜 성경의 예언은 이루어져야만 되는가?

 

그것은 “확실한 예언”이며 21절엔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벧후 1:19, 21).

 

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증거는 무엇인가?

 

칼빈 선생은 “성경은 예외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그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께 로서만 나왔기 때문이며 인간적인 혼합이 없기 때문이다”고 했고 특히 딤후 3:16을 가지고 설교 할 때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부단히 강조했었다고 한다.

 

그럼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가?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감동을 주사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성부 하나님이 증거 하셨다.

 

구약 39권은 성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감동시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기자들의 깊은 사색의 산물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단도직입적이요 직설적인 말씀으로 나타나 있다. 렘 1:9하반에,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하셨다. 이는 선지자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란 뜻이다.

 

그들은 결코 자기들이 조작한 말을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할 때만 말하고 있었다. 호 1;1 하반에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셨고 사 51:16 초두에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라고 하셨고 사 59:21 하반에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만을 기록했다. 렘 30:2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네게 이른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고 하셨다. 그 밖에 출 17:14, 34:37, 민 33:2, 렘 25:13 등에도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기록한 책을 여호와의 책이라고 했다. 사 34:16 초두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고 했다. 이는 자기들의 주관적 지식의 산물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성경을 여호와의 책이라고 강조한 것이었다.

 

2. 성자 하나님이 증거 하셨다.

 

예수님은 성경을 자세히 읽으셨고 자세히 설명하셨다. 눅 24:27에, “이에 모세와 및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하셨다. 그는 성경은 한 자도 일점일획도 없앨 수 없다고 그 권위를 인정하셨다. 요 10:35 초두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고 하셨는데 이는 시 82:6의 ‘신’이라는 말 한마디를 인용하시고 하신 말씀이었다. 또 마 5:18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는 치열한 논쟁이 있을 때마다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을 무기로 사용하사 성경의 절대권위를 주장하셨다(마 4:4, 7, 10).

 

특히 마 19:4~6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창 2:24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하신 말씀인 것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뜻은 창세기의 기자가 모세지마는 이 말이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세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기 때문에 그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히 13:8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인 4복음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특히 마 24:35에 “처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3. 성령 하나님이 증거 하셨다.

 

사도행전에서 요한계시록까지는 성령 하나님이 사도들을 감동시켜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에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사도들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다. 딤후 3:16 초두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이었다. 또 벧후 1:21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고 했는데 여기 “예언”은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말하는 것도 영감을 받아서 한 것이기 때문에 구약성경과 동등한 권위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갈 1:8에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확신에 넘쳐 있었으며 살전 2:13엔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고 한 말은 자기들이 한 말이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특히 계 22:18, 9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한 말씀을 보니 성경은 전체가 그들 자신의 말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맺는 말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영감을 주어서 기록하게 한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만일 성경기자들이 자기들이 기록한 책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짓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하나님의 명대로 기록했다고 하면 수천 년이 지나오면서 그 허위가 폭로되었을 것이고 성경이 전 세계 1100 방언으로 번역되어 우리의 손에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세계성서공회 연합회의 발표에 의하면 1978년도 한 해에 50여 나라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반포한 성경수가 505,232,066부라고 했으니 이미 성경을 가진 신자들의 것과 합한다면 엄청난 수가 엄청난 수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1초 동안에 한 권씩 찍혀 나오는 영원불멸의 여호와의 책인 것이다. 특히 근대 고고학자들의 발굴은 성경의 진실성을 더욱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말씀을 주신 하나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 3위 일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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