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 문서설의 역사
스피노자는 1670년에 Tractatus Theoligico-Potitcus에서 오경이 모세에 의해 쓰여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써 3인칭 “그”를 제시하였다. 모세가 썼다면 “나”라고 했어야만 했다. 또한 모세는 신명기 33장에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기록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에스라가 오경을 마지막으로 편집한 자라고 스피노자는 주장하였다. 이 제안이 그의 생전에는 거의 무시되었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그라프, 쿠에넨, 벨하우젠에 의해 문서설을 결정짓는데 괄목할 만한 기여를 하였다).
1. 초기의 연구진행
오경이 다양한 문서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창세기 1장에는 엘로힘(하나님)만이 나타나고, 2장에는 여호와로 언급되어진다. 『모세가 창세기를 만들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원래의 메모들에 대한 추측들』에서 그는 두 가지의 다른 기사를 제공하는 두 개의 다른 기록들을 자료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아이히혼(Johann Gottfried Eichhorn)이 1780-1783년에 출판한『구약서론』(Einleitnng)으로 넘어가서 창세기 전체와 출애굽기의 첫 두장(모세가 불붙는 가시덤불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한데까지)을 여호와 문서(J)와 엘로힘 문서(E)로 나누었다. 그는 서로 다른 “평행기사들”과 “중복들”(예;홍수에 대한 “두 기사”)을 두 가지의 자료로 연결시키고 각각의 특징들을 분리시켜 내었다. 처음에는 모세가 이 “모세 이전”의 기록된 자료들을 편집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지만, 후에는 그의 『구약서론』에서 오경이 모세 시대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면 그 당시 점점 유행해 가던 견해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J-E의 구분이 오경 전체에 미치게 되었다.
다음에 더 베테(Wilhelm M.L. De Wette)의 신명기 연구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과 『서론』에서 그는 오경 중 그 어느 것도 다윗 이전의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명기는 열왕기하 22장에 따르면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의 모든 표식이 담겨 있다고 하였다. 왕과 제사장이 함께 수도밖에 있는 모든 예배처와 희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곳을 폐쇄할 목적으로 뭉치게 되었다. 예배를 중앙으로 집중시키는 것은 모든 왕국의 부분들을 더 가깝게 정치적으로 뭉치게 하는 것이며, 경건한 자들의 모든 헌금을 예루실렘 제사장들의 금고에 쏟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부의 캠페인을 위해 된 것이며, 그것을 발견한 것은 어떤 심리적 충격을 주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 책의 연대를 621년(요시야 종교개혁 연대), 혹은 바로 직전으로 고정을 해준다. 이리하여 D문서가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기원에 있어서 J나 E와는 전혀 별개이며 “여호와가 선택할 도시”라는 언급(12장)을 통해 정부의 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다. 이리하여 오경의 자료가 세 가지 문서로 구성이 되었다 ― E(가장 초기의 것), J, 그리고 D(7세기문서).
오경의 단편 설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로마 카톨릭 신부였던 게데스(Alexander Geddes)였다. 게데스는 많은 파편들이 솔로몬 시대에 토라로 편집이 되었으며 그들 중에 어떤 것은 모세 시대의 것이었거나, 혹은 그 이전 시대의 것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에발트는 『창세기의 구성』에서 창세기의 본질적 기초는 모세 때의 것은 아닐지 몰라도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아이히혼이 주장한 바 히브리어 텍스트에 있는 반복과 표제들을 다른 저자의 작품이라는 이론을 비판하면서 초기 아람의 작품들(저자의 통일성이 불문시 되는 것) 이 셈 문장의 중심적인 특징인 이 반복 표제를 사용하였음을 강조하였다. 그의 책『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모세가 개인적으로 십계명(출 20장)과 가장 오래된 법들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창세기 14장과 민수기 33장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초기의 자료들도 사사 시대에 살았던 익명의 한 유다 족속에 의해 만들어진 언약의 책에 추가되었다. 솔로몬 시대에 기원의 책(a Book of Origins)이 E 문서의 대부분 자료를 포함하여 어떤 익명의 레위인에 쓰여졌다. 세 번째 보충이 된 것이 모세의 전기형식으로 9세기(엘리야 시대)에 만들어 졌다. 그 후에 선지자 해설자가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웃시야 시대(8세기 중엽)에 한 유다 지파 사람이 나타나 여러 곳에서 “야웨”라는 이름을 등장시키고 최종의 편집자로서 모든 자료를 재구성하였다. 에발트가 1840년에 쓴 작품은 실제적으로 보충이론으로부터 결정체이론(the crystallization theory)으로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것은 각 시대의 편집자가 모세의 자료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작품에 여기저기 뜯어 붙인 것으로 보지 않고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으로 보는 수정을 가져왔다.
위에 언급된 보충 이론 자들 중 두 번째 인물은 볼릭(Friederich Bleek)이다. 그는 1822년 문서 분석을 여호수아서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종래의 다섯 권으로 된 오경 개념을 떠나 육경(Hwxateuch)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모세의 전통은 그 최종적인 기록 형태에 있어서 육경으로 나타난다고 그는 주장한다. 1836년 그는 창세기 연구를 통해 그 중 몇 문단은 진정으로 모세의 것으로 인정해 주었다. 통일왕조(약 10세기) 때에 어떤 익명의 편집자가 창세기의 가장 초기 형태를 수집함으로써 첫 번째 보충이 시작되었다고, 두 번째 보충은 요시야 왕 시대(약 B.C. 630년, 혹은 620년)에 신명기를 편집한 익명의 사람에 의해 이루어 졌는데 그가 여호수아서를 육경의 형태로 만들게 되었다. 블릭은 후에 구약 서론을 출판하고 그 재판을(1865년)영어로 번역하여 내어놓았다(1869년). 이 작품에서 그는 그 당시 문학 비평이 지니고 있던 극단적인 이론들을 비판하였으나 전체적인 문서주의자의 접근법에 대해서는 지혜롭지도 않고 정당치도 않게 많은 양보를 하였다.
프란츠 딜리취(Franz Delizsch)는 에발트나 블릭보다는 훨씬 더 보수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1852년에 출간된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그는 오경 중에서 텍스트 자체가 모세의 저작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모세의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다. 나머지 율법들은 진정한 모세의 전통을 제시하는 것이나 가나안 정복시기까지 제사장들에 의해 명문화되지 않았다. E 문서 중 모세의 것이 아닌 부분은 언약의 책을(출 20:23-23:33) 다 모은 엘리에셀(아론의 세째 아들)에 의해 아마 편집되었을 것이다. 조금 후에 다른 편집자가 신명기를 포함하여 여기에다 보충을 하였다. 델리취는 구약성경 중 거의 전 권에 걸쳐 훌륭한 주석을 만들어 내었다.
1853년에는 후벨트(Hermann Hupfeld)분수령적인 작품 『창세기의 자료』(Die Quellen der Genesis)가 나왔다. 이것은 “문서설의 역사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알려졌다. 그는 먼저 E 문서를 철저하게 분석한 결과 두 개의 구별된 문서가 있음을 알았다. 그 중 하나는 E2로서 문체, 어휘, 주제에 있어서 J와 너무 흡사하며, J에서 발견되는 자료들에 대한 암시들을 종종 하고 있는 것으로서 엘로힘 기자의 작품 중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바는 E 를 구분하는 것이 후벨트에 독창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이전에 예나의 일겐(Kari David Ilgen of Jena)이 창세기는 17개의 다른 문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두 명의 엘로힘 저자와 한 명의 여호와 저자가 있다고 1798년에 발표하였다. 후펠트는 문서설에 있어서 새로운 흥미를 학자들에게 불어넣었다.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이 기본문서인 E1이다. 1866년 그라프가 누구보다도 먼저 논쟁을 제기하였다. 그라프는 그의 선생 류스(Eduard Reuss)와 같이 오경에 있는 이 제사규례가 신명기 보다 (B.C.621)더 후에 생긴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D가 J와 E의 법들을 반영하긴 하지만, P의 율법 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P의 규례들을 포로 시대 때의 것으로 여겨야 한다(B.C. 587-539). 물론 P에 있는 역사적인 부분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아주 오래된 것이다. 이리하여 그라프가 만든 “문서들”의 순서는 역사적인 내용을 담은 P, E, J, D와 율법적인 P의 순으로 되었다. 그는 E가 J에 의해 추
가되었으며, 요시야 시대에 E-J가 D의 저자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한다.
2. 문서설의 네 문서 요약 소개
① J 는 남조 유다에서 어느 익명의 저자에 의해 B.C. 850년 경에 쓰여졌다. 그는 개인의 전기에 특히 관심이 깊었으며 한 인물, 인물의 개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가끔 신인 동형적으로 그린다(즉, 마치 그분의 몸, 신체 각 부가 있고 또 인간처럼 정서가 있는 것으로 묘사함). 또한 그는 선지자처럼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에 관심을 가지나 제사나 의식에는 거의 흥미가 없다.
② E 는 이스라엘의 북조에서 무명의 저자에 의해 B.C. 750년에 쓰여졌다. 그는 설화체에 있어서는 J 보다 좀더 객관적이며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약간 관심이 적다. 오히려 그는 구체적인 것들(혹은, 이름들의 기원, 이스라엘 문화에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관습들)에 더 집착하였다. 창세기에서 E 는 의식과 예배에 관심을 나타내며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것으로 서술한다(J처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신인 동형적 접촉을 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 E 는 모세를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자로 높여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신인 동형적인 양태로 교통하였음을 소개하고 있다. 약 B.C. 650년에 무명의 편집자가 J와 E를 결합하여 J-E 를 만들었다.
③ D는 요시야 왕이 B.C. 621년에 부흥을 일으킬 때 대제사장 힐기야의 지도를 따라 공격적인 개혁의 프로그램으로써 만들어졌다. 그 목적은 유다 왕국에 있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높은 곳”(high places)에 있는 그들의 지방성소(신당)를 그들의 모든 제사와 종교적 헌물들을 예루살렘 성전에 바치도록 하는데 있었다. 이 문서는 예언자들, 특히 예레미야의 영향을 강하게 입고 있다. 이 신명기 학파의 사람들이 후에 여호수아서,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들을 제기하였다.
④ P 는 에스겔의 성결법전(레 17-26장 : 약 570년, H로 알려져 있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 에스라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편집이 되었고 에스라는 가장 후대의 제사문서를 율법에 첨가시켰다. P는 이스라엘 신정정치의 기원과 조직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 또한 족보와 제사제도, 희생의 세부사항들과 기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3. 문서설의 변증법적 발전 개요
① 아스트룩은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것이 다른 자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J와 로 구 분했고, 이 아이디어가 아이히혼에 의해 더 체계화되었다(J보다 E가 더 이전 것임).
② 더 베테는 D가 요시야 시대에 만들어 졌다고 했다(B.C. 621).
③ 후펠트는 E를 초기의 E1(혹은 P)과 후대의 E2(J를 더 닮은 것임)로 구분을 하고 문서들의 순 서를 P E J D로 만들었다.
④ 그라프는 P의 율법적 부분이 가장 후대의 것으로서 포로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역사적 부분은 좀더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여긴다. 그의 문서 순서는 J1 E D P2 이다.
⑤ 벨하우젠은 문서설을 완전히 다듬고 J E D P 를 체계적이고 진화론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
문서설의 발전과정에서 모순과 역전이 있었음을 관찰해 보자.
⑴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것이 다른 저자를 가리키는 것인데(아스트룩, 아이히혼), 각 저자는 자 신의 관심, 문체, 어휘를 가지고 있다.
⑵ 동일한 하나님의 이름(엘로힘)이 또 다른 저자를 가리킨다(후펠트). 어떤 E 구절들은 그 관심, 문체, 혹은 어휘에 있어서 J와 다르지 않은 것도 있다.
⑶ 관심과 문체에 있어서 J와 가장 다른 그 엘로힘 저자는(P) 가장 초기의 것임이 틀림없다(야훼
가 엘로힘 보다는 후대의 이름이다).
⑷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P가 가장 초기의 것이 아니다. 가장 후대의 것이다(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히브리 종교가 원시적인 다신론에서부터 제사장 중심의 유일신으로 발전했다는 진화 론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⑸ J 는 물론 E 보다 후대의 것이다(그라프까지의 모든 비평가들). 그러나 J는 실제적으로 E 보 다 앞선다(쿠에넨과 벨하우젠).
벨하우젠의 가설을 가장 철두철미하게 반박한 학자는 프린스톤의 그린(William Henry Green)인데, 그의 Unity of the Book of Genesis(New York: Scribner, 1895)와 Higher Criticism of the Pentateuch(New York: Scrobner, 1896)는 두 책 모두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나왔다. 그는 풍부하고 섬세하게 제시된 가설이 성경 텍스트의 실제적인 자료와 얼마나 상충되며 또한 비평적인 기준들이 얼마나 비논리적이며 자체 모순을 안고 있는지 드러내었다.
20세기의 오경 고등비평
아이스펠트(Otto Eissfeldt)는 그의 책 <육경의 개요(Hexateuchsynopse,1922)>에서 스멘드(Julius Smend)가 <육경의 기원에 대한 연구(Die Erzåhlung des Hexateuchs auf ihre Qullen untersucht,1912)>에서 명명한 J1 과 다소 유사한 기본자료 L을 J에서 발견해내었다고 생각하였다.이 L을 가나안의 생활양식에 완전히 적대적인 유목민적,레갑인(Rechbite)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그는 L이 엘리야 시대(약 B.C. 860)에 등장하였고 사사들과 사무엘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결론지었다. L과 약간 유사한 것이 새로운 문서인 K(겐 족속,즉 Kenite를 가르킴)이다. 이것은 모세의 생애중 어떤 부분을 중심으로 쓰였으며 이스라엘과 겐 족속과의 관계를 다룬다.이것은 모르겐스테론(Julius Morgenstern, The Oldest Document of the Hexateuch,1927)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그는 이것이 열왕기상 15:9-15에 있는 아사왕의 종교개혁에 기초가 되었다고 가정하였다.(약 B.C.890)
1.하나님의 이름이 문서의 기준으로서 정당한가?
이미 1893년에 클로스터만(August Klostermann, Der Penateuch)은 맛소라 히브리어 성경이 하나님의 이름을 전승하는데 있어서 무오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문서의 자료를 찾아낼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MT와 LXX의 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했던 요하네스(Joannes Dahse,"Textkritische Bedenken gegen den Ausgangspunkt der Pentateuchkritik"<오경비평의 초기 전제에 대한 본문 비평적 의심들>, 1903)에서 LXX이 180회 이상이나 야웨를 데오스(하나님)로서, 엘로힘(하나님)을 퀴리오스(주)로 표현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MT가 이름을 전승함에 있어서 문서설주의자들이 시도한 바와 같이 아주 미묘하고 정확한 자료의 구분을 하는데 기초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무오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에서는 위너(Harold M. Wiener)가 LXX인과 MT사이의 동일한 차이점을 1909년에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많은 구절들 중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자료구분을 한다는 것은 비실제적이고 무모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레이든 대학 교수 후계자 어드만스 (B.D. Eerdmands)는 70인역의 통계에서 제시된 이 논점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분리된 문서들을 찾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였다. 레위기의 의식들 중 많은 것들이 모세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더구나 문학비평의 관점에서 볼 때 창세기 전설들의 근본적 통일성이 그라프-벨하우젠 학파들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다. 그러므로 어드만스는 문서설 학파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그라프-쿠에넨-벨하우젠의 이론의 정당성을 부인하였다.
노르웨이의 학자 모빙켈(Sigmund Mowinckel)은 양식 비평에서 J-E의 문서설을 공격하였다. 그는 E가 북조 이스라엘에서 나온 것임도 부인하였다. E는 가끔 여호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출애굽기 3:14이 새로운 하나님의 이름으로써 야웨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구절은 여호와가 히브리인들에게 이미 알려졌음을 전제한다고 말했다.
올브라잇(W.F. Albriht)은 하나님의 이름이 기준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말을 하였다. 예를 들면, 사무엘서부터 열왕기까지 보다 오경이 편집상의 차이가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받아들여진 텍스트에서 흠이나 불일치되는 점을 발견할 때마다 또 다른 자료와 문서를 계속 찾아내는 것과 가정적인 분석을 계속 넓혀 가는 것에 대해 많은 경고들이 이미 있었다. 문학적-역사적 문제에 대해 이렇게 주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항상 의심을 사게 되고 비합리적이 된다고 말했다.
2. J, E, P가 분리된 문서로 출발했다는 점을 반박함
헤르만 궁켈(Herman Gunkel)은 양식비평을 이렇게 정리한다.
⑴ 옛 시대의 문학사를 정확하게 구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기록된 문서들의 발전과정을 일관성 있게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텍스트 자체의 자료들이 상충되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그라프-벨하우젠의 가설이 제시한 가상적 문서들에 대해 우리는 알 도리가 없다).
⑵ 오경문학에 대한 유일한 실제적 접근은 문서설주의자들의 분석 비평적 관심이 아니라 종합적 창의적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원래의 자료들이 구전 상태에 속해 있었던 여러 종류들의 양식들을 찾고 포로기 혹은 그 후기로 가정되는 최종적 기록형태의 시기까지 있었던 이 구전의 단위들이 각각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3)종교 사학파(relionsgeschichtliche Schule)의 방법론을 실습하는 자로서 궁켈은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이방의 인근 국이 믿고 표현한 그 종교와 문헌들의 현상중 대조가 되는 것들을 연구했고 그는 애굽과 메소포타미아의 자료들을 통하여 이 다른 형태들이 어떤 생활의 상황에서 나왔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계속적인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발전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창세기는 그 대부분에 있어서 사가들을 집대성한 것이며 이 모든 것들이 후대에 기록된 형태로 최종 마무리될 때까지 상당히 유동적인 구전을 통해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의 책이 기록된 형태를 갖춘 것은 포로 시대 이후였다고 하는 궁켈의 가정은 히브리인들이 모세 시대 이후로 고도의 언어 능력을 갖춘 백성이었다는 산적된 증거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책이 기록된 형태를 갖춘 것은 포로 시대였다고 하는 궁켈의 가정은 히브리인들이 모세 시대 이후로 고도의 언어능력을 갖춘 백성이었다는 산적된 증거를 도외시하는 것이다. 사실 고고학에 의해 여태까지 발견된 히브리어 파편 중 최초의 것은 게제르 월력(Gezer Calendar, 약 B.C. 925)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인근국가에서는 그보다 이미 수세기 전에 모든 종류의 문학작품을 기록된 형태로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반도에 있는 터어키 옥(玉)을 채집하던 셈계의 가난한 광부들도 B.C. 1500년 경에 이미 초서체의 알파벳 비문을 가지고 있었다. 가나안 땅 북부에 툭 튀어나온 우가릿에서도 알파벳으로 된 그들의 이방 종교의 경전을 갖고 있었다.
1931년 코펜하겐의 페더슨(Johannes Pedersen)은 『구약성경의 구성』(Die Auffassung uom Alten Testament)이란 책에서 문서설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다.
① 여호와와 이브람 사이의 대화, 소돔과 관련된 주기(싸이클), 야곱과 에서의 설화,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와 같은 J와 E의 이야기들은 포로 후 시대까지 현재의 기록된 형태를 갖추지 못했지만 아주 옛날의 것들이다(즉, 이 범주에 있는 J와 E의 구성 요소들은 문서설 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850, 750년 보다 훨씬 더 고대의 것이며 또한 제사적 문서만큼이나 후대의 것이다).
② 일반적으로 J와 E를 구분하는 것은 고대 셈계의 설화에 서양의 관점을 억지로 집어넣고 이스라엘인들의 심리적 작용에 무리를 가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③ D 문서를 문서설 주의자들과 같이 엣 요소와 새 요소로 엄격하게 구별할 수가 없다. 이와 반대로 신명기에 편만한 반―가나안적 경향은 신명기가 포로 후 시대의 산물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이는 포로 귀환 후에 비로소 D가 그리는 바와 같은 독자적 이스라엘 공동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명기가 요시야 통치 때 편집되었다는 성을 버리게 한다.
④ P 문서로 말하자면 그 체계적 배열과 어투의 스타일에서 그것이 포로 후기의 작품임을 명백히 알 수 있지만 많은 율법적 규례들에 있어서 포로 이전의 상황들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사회적 법들의 경우는 다욱 그러하다. 우리는 벨하우젠이 모세의 자료에서 분리시키려고 하던 B.C. 850년 문서와 B.C. 750년 문서를 만들어낼 수 없다. 단지 우리는 토라의 최초 단위가 출애굽기 1-15장에 있는 모세의 진실과 유월절 전설이었다고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3. J가 E보다 앞선다는 가설에 대한 반박
1920년 『신명기와 십계명』이란 책에서 켄너트(R.F. Kennett)는 J가 아니라 E가 가장 최초의 기록된 문서였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B.C. 650년에 북조 이스라엘의 혼혈백성들에게 의해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J는 그 얼이 후에 요시야의 종교개혁과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정당성을 지닌다는 곳에 대한 반박으로 남부 헤브론에서 쓰였다고 했다. 그 연대는 615년이었다. 이 J는 아마 예레미야 8:8에 예레미야가 언급한 바가 있는 “그러나 보라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이 썼도다”라는 문서를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4. E가 J 후대의 문서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했다는 가설에 대한 반박
폴 볼츠(Paul Volz)와 루돌프(Wilhelm Rudolph)는 1933년 『해설자로서의 엘로히스트:오경 비평에 있어서 하나의 오류?』란 표제로 공저를 내었다. E의 단락들을 세심히 재검토한 후 그들은 독립된, 그리고 일관성 있는 E 문서라는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들은 단지 J의 일부이거나 혹은 보충일 뿐이다. 볼츠는 J와 E를 구분하지 말 것과 구 보충가설과 유사한 것으로 돌아갈 것을 제의하였다. 창세기에서는 우리는 단 한 명의 이야기 기록자(J)를 만날 뿐이며, E는 자기 내용 몇 개를 삽입했을지도 모를 후대의 J편집자일 뿐이다. P는 아무런 이야기도 만들지 않았으며, 그는 단지 법규들의 기록자요, 창세기 1, 17장과 같은 교리적 부분을 편집했을 뿐이다.
5. 신명기는 요시야 시대 것이라는 가설에 대한 반박
다 베데(De Wette)가 신명기를 힐기야가 성전에서 발견하고 요시야 왕게게 B.C. 621년에 봉독한 책이라고 주장한 후 신명기의 요시야 시대설은 모든 하우젠 학파에 의해 “현대 학문연구의 확실한 결과” 중 가장 확고한 것으로 여겨졌다. 벨하우젠 역시 그의 『서문』(Prolegomea)에서 선언하였다. “신명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과학적 결과를 올바로 평가하는 모든 학자들은 신명기가 발견된 것과 같은 때에 구성되었으며 그것이 갈대아인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한 세대 전에 있었던 요시야 종교개혁의 규칙을 만들었다.”
6. 신명기의 초기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
1919년 케겔(Martin Kegel)은 『요시야의 종교개혁』(Die Kultusreformation des Josias)을 쓰고 신명기 연대를 621년으로 잡은 것이 건전하지 않다고 하였다.
1924년 에딘베라의 웰치(Adam C. Welch)는 B.C. 7세기에 “단일성소에 대한 율법”을 공포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 널리 유행된 상황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불가능함을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D 안에 있는 율법 규정 중 많은 것들이 후대 유대의 왕정정치에 어울리기에는 너무나 원시적이라고 말했다.
로빈슨의 논문에서는 히브리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들어갈 때 신명기와 언약의 책(출 20-23장)을 포함한 핵심적 율법들을 소유한 조직된 공동체였음을 주장하였다. 모세 율법의 다양한 지역적 전통들이 통일왕조를 세우는 문턱에서 사무엘에 의해 종합되었다(참조, 삼상 10:25). 이 배경은 사경(四經)의 배후 자료들이 다양한 요소를 가지며 연속성이 없는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해 준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예루살렘의 카우프만이 P가 D보다 앞선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D와 그리고 그와 상관된 문학만이 중앙화 사상의 영향력을 명백히 가지고 있다. 히스기야 시대에 이 아이디어가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요시야는 그것의 최종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유대주의는 중앙성전과 선택된 도시의 이미지로 받게 된다. 이 당시에 발전된 제사장 법규들이 이주된 아이디어를 침묵으로 외면해 버렸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7. 신명기의 후대설을 지지하는 비평가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다 흩어져 정착한 후에 모든 남자들이 그들의 가정과 농토를 버려두고 1년에 세 차례 이상씩이나 수 일 혹은 수 주 동안 단지 몇 개의 중앙성전에서 거행되는 종교예식에 참석하도록 법관들이 법을 만들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신명기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지도 하의 유대인 남은 자들이 땅에 새로 정착한 후 신명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만약 신명기가 히브리인들이 그 땅에 새로 정착하고 아직 다함께 모여 살고 있을 그때를 명백히 그르치고 있다면 이 구체적 규례들은 신명기 자체가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그 때와 배경<신1:1-4>,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부 직전에 모압 평지에 모여 있을 때<약 B.C. 1400년>에 쓰여졌다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을 여기에서 지적해 두고 싶다. 그러나 휄셔는 이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휄서의 이 결론에 대해 페더슨은 전체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신명기에 편 만한 반가나안 성향은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시대의 반외국정신을 가르치고 있다(그러나 페더슨 역시 이와 같은 반가나안 정신이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 즉 철저하게 썪은 가나안인들의 문화가 하나님의 심판 하에 놓일 그때를 가리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오경 비평과 벨하우젠 가설에 대한 20세기 학계의 동향을 이렇게 특징지을 수 있을까? 최저선에서 살펴볼 때 이 시대는 19세기의 문서이론이 세워둔 산뜻하고 짜임새 있는 구조를 붕괴시키는 시대였다. 그라프―벨하우젠 체제를 지탱해 주던 대부분의 기둥들이 거의 다 무너지고 그것으로는 오경의 자료(데이타)를 만족스럽게 설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벨하우젠을 공박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모세 책의 기원에 대한 보수주의의 견해를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문서설을 지탱하고 있던 요새들을 무너뜨렸지만 오히려 그들의 선배들이 가지고 있던 입장보다 더욱 비논리적인 입장보다 더욱 비논리적인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주위에 있던 인근나라들과 그 당시 사람들은 모세보다 훨씬 이전에 그들의 종교적 신조들을 기록으로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의 학자들은 히브리인들이 B.C. 500년 혹은 그 후대까지 그들의 신앙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것을 기꺼이 믿고자하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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