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말씀 : 시편 42:1-11
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시42:5,11,43:
5). 다음 ‘절망의 이유’에 대한 글을 읽고 서로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첫째 눈앞에 있는 암담한 현실을 놓고 낙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간 상태이거나 혹은 억류를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를 볼 때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며 빈정거리고 야유합니다. 그런데 소망이 별로 안 보입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누구라도 자꾸 절망이 돼 불안해지지 않겠습니까?
둘째 현실 앞에서 무능한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학자가 동일 저자의 시편 42, 43편에서 ‘나’ 1인칭 대명사를 51번이나 쓰고 있는 반면에 ‘하나님’은 겨우 21번밖에 쓰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갇혀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무능한 자신을 볼 때마다 낙망하지 아니할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셋째 과거와 현재를 자꾸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소에 드나들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은혜를 받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았는데, 지금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비방을 듣고 있고,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비참한 신세를 하는 것입니다(시42:4). 한때는 화려했는데 지금은 너무나 초라한 신세라고 한다면 누구나 다 마음에 낙망이 생기고 절망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를 꼭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2. 다음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아라’ 글을 읽고 서로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팔레스타인은 건기가 되면 비가 오지 않습니다. 유대광야는 파란색 잡초 하나 없는 거칠고 메마른 땅이 장장 100km에 걸쳐 끝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물을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사슴 한 마리가 목이 말라 물을 찾느라고 온 사방을 누비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사슴에게 물을 찾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끝까지 물을 찾아 사방으로 뛰어다닐 것입니다. “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이 낙망을 벗어 버리고 일어설 수가 있겠다.” 저자가 그렇게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죽음이다.” 하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단순히 감정이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42:2)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 얼마나 깊은 신뢰가 담긴 표현입니까? 절망하는 자가 하나님을 찾을 때는 그것은 실존적 갈망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갈망할 수 있는지,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면, 아주 기본적인 공식이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너무나 잘 알면서도 실천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낙망할 때 잘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알면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복하여 들어야 합니다.
3.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아라.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 글을 읽고 서로 의 견을 나누어 보시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설교를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한 주에도 몇 번씩 설교를 들을 수 있기에 그 귀함을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지혜를 줍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다귀들이 생명을 얻어 일어납니다.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을 절박한 심정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법칙입니다. “오늘 은혜를 받아야만 한다.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 못하면 나는 살 수 없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도 설교를 좀 더 잘 듣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앞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습니다. 얼마나 분주하고 힘들게 수고를 하는지, 주일예배와 애찬 1시간 반도 드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러한 것은 벗어 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은혜를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삽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한번 읽어서, 잘 모르면 어떻게 하든지, 이 말씀의 뜻을 알기 위해 요약문에 메모도 하고, 나눔 시간에 의견을 제시하고, 목사님에게 물어보고, 애를 쓰면서 배우려고 합니다. 이것이 물을 찾는 사슴처럼 절박한 마음입니다. 낙심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사모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덜 급한 사람입니다.
4. 다음 두 번째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의 주먹을 가지고 두드리는 것’ 글을 읽 고 서로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한두 번 적당히 기도하고서 내 판단대로라는 생각은 말도 안 됩니다. 어린 아들이 죽어갈 때, 다윗은 일주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범해서 이 씨앗을 얻었지만, 이 생명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제가 잘못한 것입니다.” 자식을 낳지 못해 오랫동안 상처를 받아 오면서 가슴에 한이 맺힌 한나는 여호와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얼마나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았던지, 제사장 엘리가 술에 취했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예수님께서 땀이 핏방울처럼 보이기까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눅22:44).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것은 이런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이런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덜 급한 것입니다. 기도는 인내하는 것입니다(애3:25-26). 조급함을 가지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5. 다음 세 번째 ‘믿음의 공동체에다 나 자신을 맡기는 것’ 글을 읽고 서로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우리가 지금 주일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이 자리가 청아비전교회 공동체입니다. 3부 예배에 소그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함께 둘러앉는 것 또한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그 외에도 모든 모임이 공동체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몇 사람 성도들의 모임, 이것이 공동체입니다. 낙심되어 하나님을 갈급하며 찾기를 원합니까? 교회공동체에다 자기를 맡기십시오. 가슴이 무너지는 일을 만나면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혼자서는 기도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클수록,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야겠다는 갈증이 클수록 공동체에다가, 자기를 맡겨야 합니다. 형제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자매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그들의 간증을 듣는 중에, 또는 그들이 함께 자기를 위해 중보하는 중에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배를 등한히 하거나 교회공동체 모임을 우습게 여긴다면, 아직도 급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내가 낙망이 될 때마다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나를 맡기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사람 만나기 싫지만, 자꾸 믿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기 문제를 이야기하고 기도를 부탁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 만나기 싫어하도록 만듭니다. 입을 열지 않도록 합니다. 피하게 합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있게 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기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러다 보면 나중에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생깁니다. 자기도 모르게 귀신에게 사로잡혀 버립니다. 치유될 소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악화하여 버립니다. 성령에게 끌려가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 믿음의 형제들에게 의탁합니다. 성도들이 모이는 거룩한 예배에 더 열심히 참석합니다.
6. 다음 ‘낙망한 자에게 주시는 약속’ 글을 읽고 서로 의견을 나누어 보시오.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급함으로 찾는 자에게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십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42:5),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11).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로 사모하고, 공동체에 자기를 맡기며 사모했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는 예전 개역 한글에는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낙망이 되고 눈앞이 캄캄해지면 고개가 자꾸 숙여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중에는 땅만 쳐다보게 되고 그것도 지치면 눈을 감아 버리게 됩니다. 한 마디로 소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 얼굴을 들게 만듭니다. 하늘을 보게합니다. 소망을 갖게 하시고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얼굴을 들게 하실 뿐만 아니라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나를 낙망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불안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신 하나님, 내 현실을 변화시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찬송이 터지는 것입니다.
솔직히 밥맛도 없어지고 잠도 못 이룰 정도로 고민하고 낙망하고 있을 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입니까?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쨌든 나중 일입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어려운 상황을 놓고 “아버지” 부르는 하나님이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왜 믿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이 말씀이 천국에 가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찾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안식과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낙망 중에 이런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면 도대체 예수 믿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하셨습니다(시50:15). 그렇다면 그 약속이 내 삶에 나타나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내가 낙망할 때 믿음이 아무 소용 없더라. 예수를 아무리 불러봐도 소용이 없더라”라고 한다면, “내가 과연 어려울 때 사슴이 시냇물을 찼듯이 하나님을 찾았는가? 내가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는가? 어떻게 기도했나? 어떻게 교회공동체에 나 자신을 맡겼는가?” 자성해야 합니다. 적당히 믿으면 신앙에 재미가 없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나아갈 때 체험되는 것입니다.
7. 다음 예화를 읽고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한 믿음의 가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들 둘, 딸 하나가 있었는데 생활이 그렇게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었지만, 큰아들이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곧잘 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도 잘 안 가려고 하고,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손님이 와도 인사를 할 줄 모르는 등 이상한 행동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은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를 위해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시험 보다가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 후 부터는 점점 더 악화하였습니다. 날마다 할 일 없이 스마트폰만 보고 방안에 처박혀서 꼼짝달싹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서른이 다 되었는데 전혀 제구실하지 못하는 폐인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 부모는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밤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렇게 십수 년 동안이나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은데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불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만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막노동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직장에도 나가게 되었고 중매로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좋지 않은 병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인 줄 알면서도, 기가 막히게 믿음이 좋은 자매가 시집을 온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혼한 지 삼 년 정도 되었는데 그 아이가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지금 예전에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이 거짓말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깨끗하게 치유 받아서 정상적으로 잘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믿음 생활까지 잘하고 있습니다. 그 가정에 보배 같은 며느리가 들어와서 날마다 웃음꽃이 핍니다. 생활은 어렵지만 천국입니다.
한창 아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부모가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며 기도할 때, 주변에서 “믿음이 좋아도 별수 없네. 기도한다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집안 꼴은 저 모양이니 별수 없구나.” 빈정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역시 기도하니까 다르네, 기도하는 사람은 다르긴 달라.” 이 일은 쉽게 된 것이 아닙니다. 무려 십 오 년 이상 기다려서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6).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 말씀대로 하는 자에게 주시는 응답입니다.
① 내 영혼이 어찌하여 낙망하는가 하나님을 바라라. 첫 번째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은혜받아야 산다. 이러한 사모함으로 말씀을 받게 하옵소서.
② 두 번째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의 주목을 가지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보일 정도로 기도하신 예수님과 같이 간절히 기도하게 하옵소서. 조급함을 버리고 인내로 기도하게 하옵소서.
③ 세 번째 믿음의 공동체에다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시다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은 공동체에 나를 맡기게 만듭니다. 믿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기 문제를 이야기하고 기도를 부탁합니다. 교회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맡기게 하옵소서.
④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반드시 내가 너를 건지리라고 하셨습니다. 낙망한자에게 주시는 이 약속이 내 삶에 나타나는 증거를 갖도록 절박한 심정으로 항상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옵소서.
⑤ 하나님 이 시간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으오니, 영육 간의 가난을 벗게 하여주시옵소서. 질병을 고쳐 주시옵소서. 자녀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오히려 문제를 통해서 체험하고 문제를 통해서 만나고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 속에 흠뻑 젖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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