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서신

계시록 기록 당시의 역사적 배경

하나님아들 2024. 5. 23. 14:08

 4. 계시록 기록 당시의 역사적 배경

 

   1. 정치적 배경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유럽과 아시아는 지상최대의 제국이었던 로마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로마는 처음에는 자신들이 정복한 정복지에 대해 유화정책을 실시하여 대부분의 문화와 종교를 인정, 흡수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A.D 64년 로마의 대 화재 사건이 발생했을 때 네로는 화재의 원인을 로마정부에 비협조적이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린 후 기독교와 연류 된 모든 사람을 투옥시키고, 그 대부분을 원형극장인 콜로세움에서 처참하게 죽였으며, 때로는 십자가형을 통해서 무참한 학살을 감행하였다.

 

이렇듯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보잘것없이 여겼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로마의 통치자인 황제를 신격화하는 최대의 교만을 보였다. 이러한 교만은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큘라(A.D37-41)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사상적 측면에까지 확산시키기 위해서 황제 숭배를 지시했으며 자신의 흉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안치하려고까지 했으나 정적(政敵)들에게 살해당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칼리큘라 이 후에는 황제 숭배를 종용하는 어리석은 정책이 거의 실시되지 않다가 도미티안 황제 때에 이르러 다시 이러한 폭정이 재현되었다. A.D 79년 베스비우스(Vesuvius)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큘레니움(Herculaneum)이 파괴되고 A.D 81년의 로마 화재 사건과 괴질(怪疾)로 인하여 페허가 되다시피 한 국내의 혼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악하고 정치욕이 강했던 도미티안은 법령을 발하여 자기 자신을 신으로 지칭하라 하고, 지방장관 전원에게 정부의 공문 고시의 첫머리에는 반드시 우리들의 주시며 신이신 도미시안 황제의 명령에 따라…… 라는 서두로 시달하라고 통고하였다.

 

구두 또는 서면으로 그에게 말하는 자는 주요, 또한 신이라는 호칭으로 시작해야만 한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 이외의 신()을 섬기는 집단과 개인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처벌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아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장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이에 요한은 교회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는 외부의 가혹한 박해로 인해 성도들이 낙담과 좌절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도록 권면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였다.

(호크마 주석 신약10 p181-182)

 

   2. 사회적 배경

 

계시록의 사회적 배경은 주로 로마 영토인 소아시아 지역의 이오니아 해안 도시인듯 하다. 그곳에서는 각종 종교 의식들이 성행하였는데 이 종교 의식들은 모두 기독교회의 윤리 및 신학과 배치(背馳)되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기독교회의 우상숭배 거부, 유일신론(唯一神論)의 주장, 그리고 그것을 옹호하는 엄격한 도덕법전은 줄곧 저들의 적개심을 야기 시켰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회의 급성장으로 저들은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신상(神像)을 만드는 장인(匠人)들과 제물용 짐승 거래자들의 생계수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19:21,23-41)

 

기독교인들은 비록 실제로 정부를 전복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비애국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종교, 사회, 정치상의 상위성(相違性)으로 기독교회에 압력이 미치게 되자 교회는 여기에 반발하게 되었으며, 교회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계시록의 기록자는 그의 신상(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1:9) 때문에 추방된 것이 분명하ek. (이 재만  분해식 요한계시록 강해 P48-49)

 

   3. 종교적 배경

 

사도요한 당시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종교적 상황은 기독교와 유대교, 기독교와 이방 종교, 기독교의 내부의 상황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1) 기독교와 유대교

초대교회 초창기에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는 조그마한 교제의 틈이 있었으나 A.D 70년 로마의 장군 티투스(Titus)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부터 기독교와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를 잃은 유대교는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사실 그 당시 교회와 유대교의 회당은 각각의 제도와 형태를 갖추고 발전해가고 있었다.이러한 외적 정황과 더불어 기독교와 유대교를 결별하게 만드는 내적 요소를 지적한다면 그것은 율법의 준수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교리(3:22,2:16)였다. 이는 전통 유대주의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 사이에 회복할 수 없는 거리감을 조성하게 하였다. 교회에 대한 유대주의자들의 적대 감정은 결국 성도들로 하여금 유대주의자들을 사단의 회”(3:9)로 정죄하게 하였다.

 

   (2) 기독교와 이방종교

초대교회는 숫적으로 놀라운 성장을 계속하였지만, 외적으로 유대교 외에 이교 사상과 이방 종교들과의 정면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A.D 1세기경 로마 제국의 각 도시들에는 애니미즘(Animism)같은 원시 종교와 밀의 종교들(The mystery religions) 및 각종 주술 숭배와 점성술 그리고 여러 가지의 철학적 종교들 등 수많은 이교사상과 종교들이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교 사상과 종교에 속해 있었던 이방인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를 멸시하고 대적하였다.

 

   (3) 교회 내부의 상황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 언급된 대로 교회 자체 내에는 신앙 퇴보의 징조가 나타났다. 교회는 열화처럼 번져갔던 처음 열심과 사랑(2:4)을 상실해 갔으며, 더욱이 이교 사상의 영향으로(발람의 교훈, 이세벨 용납 계2:14, 20) 타락된 생활이 일반 성도에게까지 만연하게 되었다. 성숙한 신앙은 경건한 생활을 동반한다. 반대로 도덕적 방종은 내적인 배교(背敎)를 불러들인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정황에서 성도들에게 순수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심판 주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도록 경고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였다. (호크마 주석 신약 10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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