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서신

요한일서 = 계시록까지

하나님아들 2024. 3. 26. 00:12

요한일서 =  계시록까지

내용 목차  

1장: 신자의 삶은 빛의 삶

2장: 형제 사랑은 빛 안에 사는 증거

3장: 형제 사랑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4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5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요한일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이 점에 대하여 초대 교회의 전통은 일치한다. 저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목격자로 소개한다(1:1). 특히, 본서신에는 말씀, 빛, 영생, 사랑, 새 계명 등 요한복음과 매우 비슷한 단어들이 많다. 요한일서의 저작 시기는 아마 주후 85년 내지 90년경 혹은 그 이후일 것이다. 초대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그의 생애의 후년에 에베소에 거주하며 사역하였다.

요한일서의 특징적 주제는 형제 사랑이다. 이와 더불어, 사도 요한은 우리가 미혹의 영을 분별할 것과 중생(重生)한 자가 의를 행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바울 서신들에서는 칭의(稱義)의 교리가 많이 나오고, 요한의 글들에서는 중생(重生)의 교리가 많이 나온다.

 

1장: 신자의 삶은 빛의 삶

1-4절, 사도 요한의 전하는 내용과 목적

[1,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사도 요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가 전파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신가? 요한은 그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표현한다. '있는'이라는 원어(엔, 미완료과거)는 '있었던'이라는 뜻이다. '태초'는 우주의 시작을 가리킨다. '태초부터 있었던 자'라는 말씀은 우주가 시작될 때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자라는 뜻으로 신적 존재를 가리킨다.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1-4)고 증거하였다. 원문에서, 여기에서도 '계시니라'는 말이 요한일서 본문의 '있는'이라는 말과 동일하다(엔, 미완료과거).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말씀'(로고스)이라고 불리우는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시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으로 증거되는 분이시다. 우주의 시작 때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그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때 존재하고 계셨을 수 없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은 하나님과 구별되시면서도 그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나 있다.

사도 요한은 2절에서 그를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라고 표현하였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특히 죄로 인하여 죽은 모든 인생들에게 참 생명이 되시는 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는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 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요 14:6), 또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누렸다고 말씀하셨다(요 17:5). 또 요한은 본서신 끝부분에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증거하였다(요일 5:20).

사도 요한이 전파한 내용은 확실하고 믿을 만하였는가? 이 점에 관해 요한은 자신이 이 신적인 인물에 대한 목격자이며 증인임을 고백한다. 그는 1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였고, 2절에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하였고, 3절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이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 요한은 자신이 전파하는 분에 대하여 자기 눈으로 보았고 들었다고 반복하여 증거한 것이다. 이런 증인의 증거를 우리가 무시할 것인가? 이러한 목격자적 증인의 증거를 우리가 무시해도 되는가?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확실함이 있다. 기독교 복음은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 위에 근거하고 있다. 그 증언들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복음 진리의 확실성을 확증한다.

[3, 4]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하는 자들과 받는 자들이 서로 교제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성도들의 사귐, 성도의 교제가 전도의 목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의 회이다. 우리는 이러한 교제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교제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확장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들의 진정한 교제는 이 세상에 가장 복된 일이다. 그것은 천국에서도 나눌 교제이다.

그런데 본문은 성도의 교제가 단순히 인간들의 교제가 아님을 증거한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이것이 구원이다. 인생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그를 알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 전도의 일차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표현하였다(고전 1: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참 교제를 나누어야 하겠다. 거기에는 항상 찬송과 감사와 기도와 권면의 말씀이 넘칠 것이다.

사도 요한은 덧붙여 그가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피차간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기쁨'이라는 구절은 전통사본에는 '너희의 기쁨'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교훈을 주고 받음으로써 피차간에 기쁨이 충만케 된다. 성도의 기쁨의 이유는 그가 받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 백성 됨의 구원 때문이다. 이것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신 뜻이다. 우리의 기쁨은 구원의 기쁨이며, 우리가 구원의 진리로 서로 권면하고 권면을 받을 때 우리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는 한 훌륭한 인간 예수를 추앙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며 따르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의 확실함을 깨닫자. 우리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본 증인들의 증언들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주목하고 손으로 만져본 자들의 진실하고 확실한 증언들 위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바는 사람의 상상력으로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진실한 증인들이 증거한 역사적 사실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성경에서 확인하고 확신하자.

셋째로, 우리는 성도의 교제의 본질을 알자.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의 회이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이다. 우리의 사랑의 교제는 먹고 마시고 노는 세상적, 육신적, 물질적 교제가 아니고 믿음과 소망 안에서의 교제이다. 거기에는 찬송이 있고 말씀의 권면이 있고 기도가 있다. 그리고 이 교제 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의 충만함이 있다.


5-10절, 빛 가운데 행하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듣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소식(message, 앙겔리아)은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빛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덕의 완전한 영광을 나타낼 것이지만, 특히 지식과 도덕성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무지는 어두움이다. 또 죄악과 거짓은 어두움이다. 그러나 지식이 빛이요 의와 선과 진실이 빛이다. 하나님께는 지식과 의와 선과 진실이 충만하시다.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우리도 빛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빛 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며 교통하는 자들은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서는 안되고 빛 가운데 교제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빛의 교제이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있을 수 없다. 빛이 오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없는 곳에만 어두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 머물러 살고 있으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를 믿고 행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시편 5:4에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말씀했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이라는 원어(엔 토 스코테이 페리파토멘)는 '어두움 가운데 계속, 상습적으로, 머물러 행하면'이라는 뜻이다.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나 반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빛 가운데 행하면, 즉 우리가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애쓰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함과 교통함을 누릴 것이다. 시편 15편에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시 15:1, 2).

뿐만 아니라, 이렇게 우리에게 진실함이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원어(카다리제이)는 '깨끗하게 하시느니라'는 현재형이다. 주께서는 이미 믿는 이들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고 또 빛의 교제에 거리낌이 되는 그들의 연약과 부족을 날마다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셨다(요 15:2).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며 구원받은 성도 속에도 죄악성이 있기 때문에, 만일 누가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들어온 것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버리기를 결심함으로써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죄성에 민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죄에 떨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신자는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써 빛의 삶을 계속해야 한다. 죄의 인정과 고백은 진실함에서만 가능하며 우리는 죄의 고백과 죄 씻음을 통해 의롭고 거룩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그 앞에 고백하는 것을 원하신다. 만일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면, 그는 그의 약속에 대해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죄사함에 대해 이렇게 약속하셨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죄한 적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이미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들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겠는가? 그는 하나님의 진리와 상관 없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또 현재에도 우리 속에 부족하고 연약한 죄악성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은 우리에게 몇 가지의 진리와 교훈을 준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빛은 특히 지식과 도덕성 즉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가리킨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 된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빛의 교제이다. 특히 그것은 의와 선과 진실이 있는 교제,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하는 가운데서의 교제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일진대, 우리는 항상 진리의 지식을 사모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힘써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삶을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이 아닐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항상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때 우리의 모든 죄는 다 씻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곧 빛의 교제는 모든 죄를 씻음 받는 일이 필요한 교제이며, 빛의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솔직히 인정하는 자이다. 그러나 자신이 범죄한 적이 없다든지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자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 속에 없는 자이다.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이 자녀들이 되자.

 

  

2장: 형제 사랑은 빛 안에 사는 증거

1-6절,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사도 요한은 본서신에서 그가 편지를 쓰는 교인들을 '자녀들아'(2:12, 28; 3:7; 4:4; 5:21)라고 자주 불렀고 본절에서도 '나의 자녀들아'라고 친근히 불렀다. 그의 말투를 보면 그는 나이가 많이 든 듯하며 교인들에 대한 사랑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본서신에서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도 여러 번 불렀다(2:7; 3:2; 4:1, 7, 11).

본절에서 사도 요한은 본서신을 쓰는 목적을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 그는 1:4에서는 "우리가 이것[서신]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하였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신 주요한 목적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 함이다. 죄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다. 죄 짓지 않는 삶, 죄 없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때때로 넘어지고 범죄하는 자이므로, 사도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우리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변호자가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 앞에서'라는 원어(프로스 톤 파테라)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라는 뜻이며, '대언자'라는 원어(파라클레토스)는 '변호자'라는 뜻이다. 범죄하는 문제는 성도의 현실적 문제요 그 대책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 현재적 효험이다. 구주 예수께서는 죄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현재적 변호자가 되신다.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해 계속 변호하시는 것은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한 '유화 제물'이셨다. '화목 제물'이라는 원어(힐라스모스)는 '유화(宥和) 제물' (propitia -tion), 즉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제거시키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유화'라는 것이 성경적 속죄 개념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만 위할 뿐 아니고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유화 제물이 되셨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 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사도 요한은 본서신의 앞부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로서 빛 가운데 행하여야 할 것과 그 첫번째 증거로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었다(1:5-10). 이제 그는 주의 계명들을 행하는 일에 대해 강조한다. 그것도 빛 가운데 행하는 일이다. 본절은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면 주를 아는 자임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의 계명들은 곧 하나님의 계명들이다. 그것들은 구약 성경이며 그 요약은 십계명이고 그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주를 아는 자요, 주를 안다고 말하면서 주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자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이냐, 모르는 자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같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 곧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가 하나님을 아는 자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이다.

[5, 6]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속에 온전케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계명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명기 6:4, 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과거에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육신적 쾌락을 사랑했던 우리들은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지킬 때 성취된다. 주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하셨다(요 14:21, 23).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주 안에 있음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과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의 생각과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며 주의 특권을 함께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주께서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버림을 받고 불태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장). 우리가 정말 주 안에 있다면 우리는 주의 행하시는 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는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무엇보다 우리는 죄 짓지 않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것이 사도가 서신을 쓴 목적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무엇보다 우리가 죄 안짓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유화 제물이시며 그것에 근거하여 그는 현재 우리의 변호자가 되신다.

셋째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될 때 우리는 주를 아는 자요 주를 사랑하는 자요 주 안에 거하는 자임이 증거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요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일 것이며 우리는 주 안에 거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일진대, 우리는 죄를 멀리 하고 오직 주의 계명들을 힘써 지키는 자들이 되자.

7-11절, 형제 사랑과 빛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형제들아'라고 되어 있다. 3절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말하였었다. 그는 이제 본절에서 그가 말한 계명은 어떤 새 계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이 처음부터 가졌던 옛 계명, 그들이 처음부터 들었던 말씀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십계명을 의미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혹은 본절의 옛 계명이라는 말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가리켰을지도 모른다(요일 3:22, 23; 요이 5, 6).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사도 요한은 그들에게 새 계명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남겨두신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 계명은 주님 자신에게와 우리에게 참된 계명이다. 요한복음 13:1에 보면, 주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주께서는 친히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쓰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였다(엡 5:2, 25).

또 이 새 계명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실천하고 있었던 터이었다. 사도행전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물질적 유무상통으로 드러난 서로 사랑함은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의 표시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때에 무지와 죄악이 우리를 지배하였었다. 그러나 참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 왔다.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가 우리에게 찾아 왔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다.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렇게 구원받은 증거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새 계명은 진실한 성도들에게 참된 것이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 형제를 미워한다'는 말은 형제를 계속 미워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성도는 거짓된 구원과 헛된 확신을 조심해야 한다. 비록 사람이 자신이 빛 가운데 있다, 하나님을 안다, 구원을 받았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가 받았다는 구원은 거짓된 구원이요 그의 확신은 헛된 확신이다. 그는 구원받은 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 고백과 구원의 확신은 그의 실제적인 삶, 특히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통해 확증되어야 한다.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형제 사랑은 빛의 증거요 구원의 증거이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들어왔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가진 자이다. 그는 자기 속에 걸림돌 혹은 걸려 넘어질 원인이 없다. '거리낌'이라는 원어(스칸달론)는 '걸림돌, 걸려 넘어질 원인 혹은 이유'라는 뜻이다. 빛은 우리의 길을 밝게 비춘다.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자신의 행위의 잘잘못을 밝히 본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은 잘못된 것을 시인하고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한 바른 삶만을 추구한다.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반면에, 형제 미움은 어두움의 증거요 구원받지 못한 증거이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두운 가운데 있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자이다. 사람이 어두운 길을 갈 때 그 길에 위험한 물건이 놓여 있는지 어떤지 잘 모르는 것과 같이,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갈 곳'이라는 원어(푸 휘파게이)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라는 뜻이다. 그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이다. 어두움 가운데, 즉 무지와 죄악들 가운데 사는 자들이 갈 곳은 오직 한곳, 곧 지옥뿐이다. 만일 그가 그의 갈 곳이 지옥인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그의 길을 돌이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1절까지는 하나님의 계명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임을 증거한 후에, 형제 사랑이 빛과 어두움을 구별하는 잣대가 됨을 증거하였다. 형제 사랑은 다른 말로 참 구원과 거짓 구원, 참된 구원의 확신과 헛된 구원의 확신을 구별하는 표준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일진대, 우리가 참으로 빛의 자녀들일진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는 모든 죄에서 떠나야 한다.


12-17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2-14]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을 교인들을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로 구별하여 언급한다. 그것은 그들의 연령을 따라 구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신앙적 상태를 따라 구별한 것 같다. 교인들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믿음의 기본적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다 성도들의 과거의 체험들이며 그 증거들이다.

첫째로, 자녀들 혹은 아이들은 믿은 지 얼마 안되는 교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요한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었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본적 상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보혈(寶血)로 죄씻음을 받았다. 사람은 세례 의식을 통해서나 천주교회의 신부(神父)에게 하는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해서나 마리아를 통해서 죄씻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씻음을 받는다. 성도는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이다.

둘째로, 아비들은 믿은 지 오래된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아마 연령적으로도 나이가 든 자들이었을지 모른다. 요한은 그들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참된 신앙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신앙 생활은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이다. 참되시고 유일하신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요 17:3). 신앙 생활은 그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며 그와 동행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도의 신앙 여정은 바로 그 하나님을 점점 더 아는 과정과도 같다.

셋째로, 청년들은 믿음이 강하여 주를 위해 일할 만한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그들은 악한 자를 이기었다. 악한 자는 사탄과 악령들과 그의 종들이다. 청년들이 그들을 이긴 방법은 그들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셨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 강해지라고 교훈한다.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에베소서 6:10, 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또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엡 6: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사도 요한은 앞에서 언급한 믿음의 기본에 근거하여 성도들에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라는 뜻인 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 가운데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 38; 신 6:4, 5). 또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을 전심 전력으로 사랑하려면 우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집이나 돈이나 직장은 우리가 감사하게 사용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애착을 두어서는 안된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교훈 안에서 그들을 사랑할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우리 속에 없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실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하는 것들이며, 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육신의 정욕 즉 쾌락과 음란으로 더러워져 있고, 안목의 정욕 즉 눈으로 보는 육신적 아름다움의 추구로 더러워져 있다. 그러나 실상 육신적 아름다움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못된다. 그래서 잠언에는 말씀하기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잠 31:30). 또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생의 자랑 즉 명예나 권세 등 이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추구하는 것으로 더러워져 있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헛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천국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헛되고 죄악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추구하며 살 수 없다.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참으로 이 세상의 것들은 지나가고 만다. 또 세상과 함께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도 다 지나가고 만다. 그래서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헛됨을 반복적으로 증거하기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하였다(전 1:2). 전도서에는 헛되다는 말(헤벨)이 38번이나 사용되었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감 가운데 외치기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하였다(사 40:6-8). 본절에서 요한도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든 성경 말씀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만 새 하늘과 새 땅, 곧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7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정리한다. 첫째로, 우리는 신앙의 기본을 갖추었는지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죄씻음을 받았는가? 우리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는가? 둘째로,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도 영적인 청년들이 요구된다. 주 안에서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자들, 그래서 악한 자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 요구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헛되고 죄악됨을 깨닫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며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18-23절,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남

[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쓰던 당시를 마지막 때 곧 말세(末世)라고 보았다. 그 까닭은 예언된 대로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대적하는 이단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종말의 징조들로서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전쟁들, 지진들, 기근들, 악한 질병들, 바른 신앙의 핍박 등을 예언하셨다. 그 중의 하나가 적그리스도들의 출현에 대한 예언이었다. 마태복음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요한은 주의 말씀이 이미 그 당시에 실현되고 있음을 보고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말의 징조들은 이미 사도 시대 말기에 나타났다. 그래서 성도들은 종말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종말의 징조들은 지난 2천년 역사 중에 17세기 종교개혁시대에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 가장 큰 징조는 로마 천주교회의 교황이 바른 진리를 대적하고 참된 신자들을 핍박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황을 성경이 예언한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20세기를 지나서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이 더욱 많이 이루어짐을 보고 느낀다. 우리는 특히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많은 개신교회들의 배교(背敎)와 타락을, 그리고 다수의 사이비 기독교 종파들의 나타남을 보았고, 또 1, 2차 세계대전을 지나 이제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의식은 지난 2천년 동안 교회 속에 항상 있어 왔지만, 오늘 이 시대는 참으로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때인 것 같다.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을 확인하면서 종말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당황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고 주께서 예언하신 바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주의 재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단자들은 처음에 교회에 속해 있었으나 어느날 교회를 떠나갔다. 교회 역사상 이단의 초기 형태는 분파적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전체적으로 부패하여 배교적이게 된 때가 있었다. 17세기 종교개혁 때가 그러하였다. 성경적 진리를 깨닫고 믿었던 참된 성도들은 소수파가 되어 교회에서 정죄되고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에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었다. 21세기의 상황은 더욱 그렇게 되고 있다. 세계 교회는 전체적으로 부패하여져 있다. 경건한 선조들이 가졌던 성경적인 신앙, 바른 신앙, 보수 신앙, 옛신앙은 오늘날 소수파가 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들은 다양성을 좋아하며 넓은 길을 가고 있다.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을 책망하는 목소리는 극단적 입장이라고 무시와 배척을 당한다. 포용주의의 시대의 유일한 악은 비타협적 보수 신앙의 입장뿐이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신앙은 항상 비타협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과 달리, 초기의 이단들은 분파적이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나간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처음부터 참된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참으로 교회에 속한 자들이었다면 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참된 성도들과 함께 거하였을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한 몸이지만(고전 12:13, 27), 외형적 교회 속에는 참된 신자들 뿐만 아니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섞여 있다.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섞여 있었던 것과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으며 주의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은 자들이었지만, 가룟 유다는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요(요 6:64), 돈궤에서 돈을 훔치는 도적이요(요 12:6), 예수님의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한 몸이지만, 이단은 그렇지 않다. 실상 그들은 처음부터 소속이 달랐다. 그들은 믿지 않은 자들이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요 천국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20, 21]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구원받은 성도는 거룩하신 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곧 성령을 받았다. 성령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영이시므로 그는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신다. 요한은 성도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편지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알기 때문에 한다고 말한다. 그가 또 이단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든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그가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깨닫고 믿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단에 대해 논하며 이단을 배격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2, 23]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우리가 적그리스도들 혹은 이단들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 성경은 그것을 두 가지 면에서 말한다. 첫째는 교리적인 면이고, 둘째는 윤리적인 면이다. 베드로후서 2:1-3,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교리적으로, 이단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한다. 윤리적으로, 이단은 음란하고 탐욕적이다.

특히 그들은 교리적으로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본문은 그들을 거짓말 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과연 이단의 정체는 거짓말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거짓말 중에서도 큰 거짓말이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요한은 말하기를,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못하다고 하였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적그리스도적 이단은 로마 천주교회이다. 천주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믿고 따르지 않고, 교황의 무오(無誤)한 권위를 믿고 마리아를 거의 신적 존재로 추앙하고 찬미하고 그에게 기도한다. 이 점에 있어서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참 뜻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완전함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믿지 않고 공적으로 그것을 부정하고 정죄한다. 또 그들은 신부들이 집행하는 미사가 그리스도께서 계속 죽으시는 의식이라고 말하고 또 예수를 믿는 자들도 '작은 죄'가 있으면 연옥(煉獄)에 들어가 불의 시련을 통과한 후에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이루신 속죄 사역의 완전성을 부인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천주교회보다도 더 심각한 적그리스도적 이단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인하는 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적 행위들과 특히 그의 진노와 심판을 부정한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그의 기적들과 대속(代贖)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부정한다. 그것은 실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적 사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18절부터 23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 종말의 징조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왔다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많은 적그리스도들과 이단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20세기에 인류가 경험했던 그 참혹했던 1, 2차 세계 대전에 대해서 알고 있고, 현재 3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 앞에 서 있다. 우리가 사는 현 시대는 참으로 마지막 때의 마지막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종말 의식을 가지자.

둘째로, 우리는 말세의 한 징조로서 나타나는 이단들의 소속을 바로 알자. 많은 이단들이 한 때 교회 안에 있었다가 분리되어 나간 자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계 교회가 전체적으로 배교적이게 되었으므로 이단들이 건전한 교회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천주교회가 기독교의 한 중요한 파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고 있다. 또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대 교단들의 목사 양성원인 신학교들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단들이 교회 밖에 나가 있든지 교회 안에 있든지 간에 그들은 참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단의 소속을 바로 알자.

셋째로, 우리는 이단들의 정체를 알고 그들을 분별해야 한다. 이단들은 교리적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며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자들이다. 우리는 그 두 면을 생각하며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교리적 지식을 가지고 이단들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천주교회의 사상이 적그리스도적이며 이단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 2천년 역사상 가장 불신앙적이고 파괴적인 적그리스도적 이단 사상인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우리는 윤리적으로도 이단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을 항상 구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이 부패해진다면 우리는 이단들을 분별할 수 없고 배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단들의 정체를 알고 그들을 분별하고 배격해야 한다.


24-29절, 주 안에 거하라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처음부터 들은 것'은 교회가 사도들을 통해 들은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내용이요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일이 되고 저를 믿음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고(요 3:16)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 1:12)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엡 2:8). 이것은 교회가 처음부터 들은 바이었다.

사도 요한은 이 내용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말했다.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는 것은 그것을 믿고 보수(保守)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전통적 신앙,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깨닫고 굳게 믿고 붙들어야 한다. 그 신앙이 옛 신앙이며 보수 신앙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할' 것이라고 말했다. 즉 하나님과의 영적 신비적 연합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합으로 대속의 은택들을 누리게 되며,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게 된다. 이러한 연합은 성도의 정상적 생활이다. 그런데 성도가 이러한 정상적 생활을 하려면, 사도적 복음 진리의 내용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보수해야 한다.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관한 것이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로 인한 죄씻음은 영생을 가져올 것이다. 이 영생은 현재 충만히 누리고 있지 못하지만, 이미 받았고 장차 충만히 경험하며 누리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11:25,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6]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사도는 성도를 미혹케 하는 적그리스도들의 나타남으로 인해 그들에 관해 말함으로써 성도를 조심시키려 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들, 즉 이단자들은 속이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죄씻음과 영생의 복음을 부정하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불신앙은 결국 사람을 죄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게 하기 때문에 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은 성령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고린도후서 1:21, 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께서 완전하시고 참되신 교사이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간 교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인간 교사들을 주셨다.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에베소서 4:11, 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교사이신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을 배우고 깨닫고 확신할 수 있다. 또 그의 진리는 참되고 거짓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한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는 교회가 처음부터 배운 내용과 일치한다. 성령님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라는 말씀은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동일하다. 성도들은 처음부터 사도들을 통해 듣고 배운 복음 진리, 곧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그 동일한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야 하며, 그것이 주 안에 거하는 표시이다.

[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우리가 주 안에 거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주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요한복음 15:1-7,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거기에서나 여기에서나,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은 믿음과 경건과 순종의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렇게 주 안에 거하게 되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담대함을 얻고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림 소망은 우리의 최대의 소망이다. 그때 우리는 영광의 부활과 천국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거기에 있다. 성도들의 성실한 신앙 생활의 목표는 바로 그날 주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그러나 그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른 믿음과 순종을 가지지 못했던 자들이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사도 요한은 첨가하여 우리가 주의 의로우심을 안다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도 알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중생(重生)의 증거가 있다. 여기에 신앙과 행위의 일치된 증거가 있다. 중생한 자는 바른 신앙, 역사적 신앙, 옛신앙을 가질 뿐만 아니라,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삶을 산다. 다시 말해, 중생의 증거는 바른 믿음과 의로운 삶이다.


결론적으로, 24절부터 29절까지에서 우리는 두어 가지 교훈을 정리한다. 첫째로, 우리는 교회가 사도들에게서 처음부터 들은 바,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파악하고 보수해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생의 약속이 있다. 거짓 교사들과 이단들이 왜곡시키려는 것이 바로 그 신앙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바로 그 신앙이다. 우리는 그 내용을 믿고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은 실상 우리가 중생했을 때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중생의 증거는 바른 믿음과 의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바른 말씀을 붙들고 믿고 그것을 순종함으로써 주 안에 거함을 확실히 증거해야 한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할 때만 우리는 주의 재림의 날에 담대함을 얻을 수 있다. 참된 믿음과 순종이 없는 자는 그날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들은 다 주의 재림을 영광 가운데 맞이하게 될 것이다.

 

 


 

3장: 형제 사랑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1-6절, 죄를 짓지 말라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전에 죄인이요 사망 아래 있던 사람이었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하심으로써 구원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이것은 큰 복이며 큰 특권이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의 이 복과 이 특권을 알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얻은 의도, 영생도, 하나님의 자녀 됨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았더라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복, 곧 성도들이 받아 누리고 있는 구원의 복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하나님의 자녀들의 장래의 영광의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나타내심이 될 때 즉 그가 다시 오실 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와 같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영광의 모습을 보듯이, 우리도 그와 같을 것이다. 빌립보서 3:20, 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의 재림과 그때 이루어질 영광스런 몸의 구속(救贖)과 변화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로마서 8:23-25,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사도 요한은 성도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고 말한다. 직설법이 더 무게가 있다. 그것은 자신을 깨끗게 하지 않는 자는 이런 소망이 없는 자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들이라면 죄를 짓지 말고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천국을 소망하는 자는 천국 백성답게 산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 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의인답게 산다. 영생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영생할 자답게 죄와 상관 없이 산다.

[4, 5]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더욱이, 죄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다. 불법(不法)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반대하고 거부하고 어기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육신(成肉身)하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함이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이루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범죄치 말아야 한다.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범죄치 않아야 한다. 본절에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라는 원어(우크 하마르타네이)는 현재 시제로서 '범죄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범죄하는 자마다'라는 원어(파스 호 하마르타논)도 현재 시제로서 '범죄하고 있는 자마다'라는 뜻이다. 구원받은 자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만일 누가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일 것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법적이고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적이고 체험적이다. 구원받은 자는 실제로 심령과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에서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본문은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장차 영광스런 주의 형상을 본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재림과 그때 일어날 영광스런 몸의 변화를 소망할진대 우리는 지금 모든 불결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이 바로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는 우리의 더러운 죄 때문에 십자가의 참혹한 고난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깨끗게 하는 대속(代贖)의 죽음이 되셨다. 그렇게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주를 믿고 주 안에 거하는 자가 되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죄 가운데 살 수가 있겠는가?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마땅히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의와 거룩을 행해야 한다.


7-12절,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7, 8]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는 누구에게든지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팎에는 성도를 속이고 잘못 인도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잘못된 교훈을 하고 잘못된 행동의 본을 보인다. 사도 요한의 논조를 보면, 그들은 죄를 짓는 자들이며 죄 짓는 일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허용하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한은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지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한다.

죄를 짓는 자가 마귀에게 속한다는 원어의 뜻은 죄를 짓는 자들의 근원과 소속을 나타낸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자요 인간을 범죄케 한 자이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인간을 속여 범죄케 함으로써 죽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살인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성육신(成肉身)을 가리킨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가 육신으로 오셨다. 그가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말씀은 중생(重生) 곧 거듭남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며(요 3:3, 5) 그 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곧 그를 믿는 것이다(요 1:12, 13).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곧 중생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원어(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는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가진다. 즉 '계속적으로 죄를 행하고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생한 자도 간혹 아니 자주 실수하고 범죄한다. 그러나 그는 계속적으로 죄를 행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죄 가운데 거하지는 않는다.

사도 요한이 본서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성도가 죄 안 짓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한 자라도 간혹 혹은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탄식어린 고백을 하기를,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하였다(롬 7:21-25). 그러나 중생한 자는 계속 죄를 행하는 자가 될 수는 없다.

사도 요한은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이유를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고 했다. '하나님의 씨'는 새 생명의 원리를 가리킨다. 중생할 때 심기우는 이 생명의 원리는 범죄할 수 없는 원리요, 의만을 지향하는 원리이다. 중생한 영혼 속에는 이 생명의 원리가 심기웠다. 그럼으로써 중생한 영혼은 그 지배적 성향에 거룩한 변화를 얻었다. 전에는 무지(無知)와 부도덕이 그것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과 도덕성이 그것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도 간혹 혹은 자주 넘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법적으로 완전히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 또한 실제적으로도 즉시 즉시 일어나 죄를 회개하고 의를 행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러므로'라는 원어는 '이 점에서'라는 뜻이다. '이 점'이란 성도가 죄를 짓느냐, 안짓느냐 하는 점을 가리킨다. 계속적으로 죄 가운데 사느냐 아니면 즉시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려고 결심하고 노력하느냐 하는 이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드러난다. 사도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누구든지 의를 행치 않거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한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근원과 소속을 증거한다.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에, 성도는 모름지기 죄 안짓는 생활을 힘써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죄를 짓고 산다면 우리가 어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울 수 있겠는가?

[11, 12]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한은 옛날 가인의 예를 들면서 우리가 가인같이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는 악을 행치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잘 증거하는 표가 된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2절까지는 앞부분에 이어서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할 이유를 증거한다. 앞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이며 장차 영광스런 모습을 입을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죄의 대속 혹은 죄의 없이함을 받았기 때문에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본문에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더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났고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은 다른 말로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계속 범죄치 않는다. 그는 혹 넘어질 수 있으나 곧 일어나 회개하고 죄를 버린다. 그는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마음과 입술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행위로 증거되는 차이점이다.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한마디로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일진대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하고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3-18절, 사랑은 생명에 들어온 표임

[13-15]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도 요한은 세상이 신자들을 미워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미움은 사망의 표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들을 미워하고 또 서로 미워한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현상이다. 미움은 사망의 표요 세상의 표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서로 미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영생의 구원을 얻은 자들이 아니고 사망에 거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사랑은 생명의 표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증거한다. 형제 사랑은 영생의 구원을 얻은 표이다. 그러나 형제 사랑이 없는 자는 아직도 사망에 거하는 자일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한다. 물론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살인이다. 예를 들어, 비행기 자살 폭탄 테러는 극악한 살인 행위이다. 혁명이나 폭력 시위가 정당화 될 수 없듯이, 테러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사회의 개량과 개선은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비폭력적 시위는 정당한 의사 표현 방식이며 사회 개선을 위해 유익하지만, 무질서한 폭력적 방법은 사회의 개량보다는 악화를 가져오기 쉽다. 또 침략 전쟁도 역시 극악한 살인 행위이며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물론 테러와 침략에 대한 응징과 보복은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보다 더 큰 현대적 죄악은 태아 살해의 행위 즉 낙태 혹은 인공유산이다. 사람의 생명은 임신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분명하다. 시작된 생명을 살해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임신된 생명은 반드시 출산되어야 옳다. 오늘날 한국이나 세계에서 낙태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현대적 죄악일 것이다. 이런 행위들은 다 살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뿐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똑같이 살인에 해당한다. 살인한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인의 죄를 다 회개하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 사랑의 방법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우선 주님의 모범을 따라 형제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즉 참된 사랑은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15:13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확증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가장 큰 사랑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17, 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도 요한은 또한 세상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돕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가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참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목숨까지 형제를 위해 버리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재물로 궁핍한 형제를 구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목숨은 물질보다 더 귀중하다. 그러므로 희생적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한 우리라면 우리는 우리의 물질로 구제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결론적으로, 13절부터 18절까지는 우리에게 형제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교훈한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요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우리는 이로써 우리 자신이 사망에서 옳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 수 있다. 사랑의 구체적 방법은, 첫째로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요, 둘째로 세상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돕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19-24절, 순종과 담대함

본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순종할 때 첫째 우리 자신이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고, 둘째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고, 셋째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넷째 우리가 주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고 증거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이로써'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대로 진실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진실하게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게 된다고 증거한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도 진리에 대하여 자주 말했다. 1:6에서는 진리를 행함에 대하여, 1:8과 2:4에서는 진리가 우리 속에 있음에 대하여, 2:21에서는 진리를 앎에 대하여 말했다. 그가 말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내용인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가리키는 줄 안다. 그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한 자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진실한 형제 사랑은 진리에 속한 증거이다. 미움은 세상에 속한 자, 사망 아래 있는 자, 비진리에 속한 자, 사탄에게 속한 자의 표이지만, 사랑은 교회에 속한 자, 생명 안에 있는 자, 진리에 속한 자, 하나님에게 속한 자의 표이다.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가 진실하게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할 것이라고 증거한다. '굳세게 한다'는 원어(페이도)는 '확신케 한다, 평안케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확신케 하고 그 진리와 그 구원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는 것을 가리키는 줄 안다. 사람은 죄를 지을 때 두려움을 가진다. 창세기 3:10에 보면,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한 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에 숨었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이사야 57: 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행할 때 두려움 대신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20, 21]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원문에는 20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는 이유를 보인다. 즉 그 이유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으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을 수 없지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러나 우리는 범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담력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때 실제적으로, 더욱 담력을 얻는 것이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사도 요한은 순종의 또 하나의 결과로서 기도의 응답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 8). 예수께서는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가르쳐 주시면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다(마 7:12). 이것은, 우리가 기도와 간구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원하고 기대한다면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범죄하면서 그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계명을 두 마디로 요약한다. 첫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요, 둘째는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선언하신 가장 긴급하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엇보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또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의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모든 계명을 요약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요한복음 13:34, 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마지막으로 우리가 계명을 순종할 때,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안다고 증거한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주님과의 영적 연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가서 2:16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연합과 일체를 신랑이 신부에게 속하고 신부가 신랑에게 속한다는 말로써 표현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이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영적 연합을 나타낸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 영적 연합을 포도나무의 비유로 강조하셨다.

요한복음 15:1-8,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주님과의 영적 일체는 곧 구원의 사실 혹은 중생(重生)의 사실을 가리킨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켰다. 그러나 죄인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을 때 혹은 그의 죽었던 영이 다시 살리심을 받을 때 즉 중생할 때, 그는 주님과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된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는 우리 속에 오신 성령님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며(롬 8:9; 갈 4:6) 그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은 곧 주께서 우리 속에 계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3:5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 되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더욱 확인되고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확인되고 확증된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순종의 행위는 우리가 받은 구원을 증거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9절부터 24절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을 다시 한번 더 깨닫는다. 그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며 형제를 사랑함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정말 중생한 자라면,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순종할 때 우리는 자신이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고 기도의 응답을 얻고 또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단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우리가 범죄치 않고 의를 행하며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순종의 삶을 통해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고 풍성한 기도의 응답을 체험해야 한다.

 

 

 

 

4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1-6절, 영들을 시험하라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우리는 영들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영은 정신이다. 그것은 사상이다. 그것은 신앙 사상, 교리 사상이다. 그것은 그의 말과 교훈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사람들의 사상과 가르침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야 한다. '하나님께 속하였나'라는 원어는 '하나님께로서 나왔는가'라는 뜻이다. 즉 어떤 사상, 어떤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나온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교훈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많은 거짓 선지자들, 거짓 목사들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 사상과 아무 교훈이나 따라간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넘어가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들, 정신들, 사상들, 말과 교훈들을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2, 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분별하는 기준을 말해 주었다.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시인하며 고백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란 요한복음 1:14에 증거된 그의 성육신(成肉身)을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의 '말씀'은 요한복음 1:1에 증거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을 가리킨다.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고 때가 되어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독특한 인격자이시다. 요한은 본서신 5:20에서도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기를,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 혹은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영, 혹은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영이며,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영 곧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영이다.

성육신의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이며 단지 그 교리뿐 아니라 성경의 근본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며 거짓된 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 적그리스도의 영 곧 거짓 목사들이 세상에 올 것이라고 예언하신 대로(마 24:5, 11, 24) 그들이 사도 요한의 당시에 벌써 세상에 있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그 당시를 이미 말세가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고 말세 의식을 가졌다.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서 나왔다. 즉 그들은 중생(重生)하였다. 또 그들은 저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되지 않았고 그들을 배격하고 이겼다. 왜냐하면 성도들 안에 계신 이, 즉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이, 즉 사탄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요 1:13),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목사들은 사탄의 사자들이다.

고린도후서 11:4, 13-15,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義)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갈라디아서 1:6-8,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오늘날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적그리스도의 영 즉 이단과 거짓된 사상들은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등 수많은 사이비 종파들과 천주교회와 자유주의 등이며, 교회연합운동(에큐메니칼운동)과 신복음주의와 은사주의 등도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부패시키고 혼란시키는 거짓된 사상들이다.

[5, 6]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저 거짓 교사들은 세상에 속했고 세상에서 나온 고로 세상에 속한 말 혹은 세상에서 나온 말을 하며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는다.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교회에 다니기도 하며 종교 의식을 행할 수도 있으며 또 심지어 세례를 받을 수도 있고 교회의 직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말 곧 바른 교훈, 정통 교리, 역사적 기독교를 듣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하나님께서 심으시지 않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5:12-14,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그러나 '우리' 곧 주의 사도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즉 중생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우리의 말 곧 바른 말, 정통 교리, 역사적 기독교 교리을 듣는다. 이로써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은 구별된다. 진리의 영은 주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바른 복음 진리의 말, 곧 전통적 정통 교리를 듣고 믿고 인정하고 고백하지만, 미혹의 영은 우리의 바른 말과 정통 교리를 듣지 않고 인정치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는지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정신들, 사상들, 말과 교훈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하나님께 속한 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아무 정신, 아무 사상, 아무 교훈이나 따라가는 것은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영들을 분별하는 기준은 하나님이 주신 바른 복음 진리이다. 그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가 있다. 우리는 어떤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이해와 지식의 부족으로 잘못 알 수도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성경의 근본적 진리들과 교리들에 있어서는 바른 이해와 지식을 가져야 한다. 진리의 영은 중생한 자들, 곧 참 교회의 회원들, 양들, 알곡들의 영이며 그들은 바른 말, 곧 정통 교리와 역사적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미혹의 영은 중생치 못한 자들, 즉 적그리스도들, 거짓 선지자들, 거짓된 목사와 교사들, 형식적 교인들, 가라지들, 쭉정이들, 위선자들, 염소들의 영이며 그들은 바른 말, 곧 정통 교리와 역사적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셋째로, 우리는 진실히 예수 믿고 중생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바른 말씀, 정통 교리, 성경의 근본 교리들과 역사적 기독교를 다 믿고 하나님의 교훈대로 겸손하게, 성실하게 순종하며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7-11절, 서로 사랑함이 마땅함

[7, 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함을 계속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세속적, 육신적 사랑이 아니고 천적인 거룩한 사랑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즉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까닭 없는 미움과 부정당한 싸움은 마귀에게 속한 성질이며 행위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러한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표, 즉 중생(重生)한 표요 하나님을 아는 표이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일에서 밝히 나타났다. 본절은 하나님께 독생자가 계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과, 그가 그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 독생자가 계시다(요 1:18; 3:16). '독생자'는 외아들을 가리킨다.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아들을 스스로 낳으셨다. 그 외아들은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시다(요 1:1; 골 2:9).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는 시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적이다. 그는 사람으로 탄생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 그는 요한복음에 증거된 대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요 17:5). 하나님께는 영원하신 외아들이 계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은 두 가지 뜻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으로 보내셨다는 의미 즉 성육신(成肉身)의 의미이며, 둘째는 십자가에 죽게 내어주셨다는 의미이다. 성육신은 신비 중의 신비요, 기적 중의 기적이다. 어떻게 영원하신 독생자께서 유한한 사람의 본질을 취하실 수 있으셨는지? 신적 본질을 가지신 그가 어떻게 인간의 본질을 취하셔서 그 둘이 한 인격 안에 신비롭게 결합되셨는지? 교회의 정통적 신조들이 표현하는 대로, 그의 신성과 그의 인성은 혼합됨이나 분리됨이 없이 한 인격 안에서 신비롭게 결합되셨다. 그는 이제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시며 영원히 그러하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는 죽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기 위해 세상에 보내셨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언제 죽었었는가?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엡 2:1).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죽음에서부터 살아나기 위해 메시아의 대속(代贖)의 죽음이 필요하였다. 그는 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려주시기 위함이었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본절은 앞절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그 사실에서 우리는 참 사랑을 발견한다.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같은 사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주셨다. '화목제'라는 원어(힐라스모스)는 '유화제물'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불붙은 진노를 누그러지게 하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유화제물'이는 말(힐라스모스, 힐라스테리온)은 성경적 용어이며 성경적 개념이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한 9, 10절에서 '우리 . . . 우리 . . . 우리 . . . '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제한성을 암시한다.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이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다 죄인이었고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의 뿌리 깊은 죄성과 연약성은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1만 달란트 빚진 것 같은 우리의 큰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마 18:23-35).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큰 구원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형제의 부족과 실수와 연약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1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발견한다. 첫째로, 우리는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까닭 없는 미움과 부정당한 싸움은 마귀에게 속한 성질이며 행위이지만, 우리가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나타낸다. 참 사랑은 중생했다는 표시이며 하나님을 안다는 표시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으신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셨다.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려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려고, 독생자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속죄 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죽었던 영혼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 살았고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한 자들이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큰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을진대,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12-16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

본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증거한다.

[12, 1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요 4:24)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디모데전서 6:16,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하나님은 물질적 형체를 갖지 않으신 영이시므로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증거하기를,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특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며,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영적 일체는 하나님의 인격의 아름다운 덕을 가져오고 능력과 평강을 누리게 하며 기도의 응답을 얻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이렇게 복된 하나님과의 영적 일체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그 사랑이 이론적으로나 법적으로만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도 우리 속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칭의(稱義)로 이루어지는 것뿐이 아니고 또한 성화(聖化)로도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칭의가 구원이지만, 그것이 성화의 과정에서 더욱 구원답게 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도 요한은 3:24에서도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성령의 감동과 감화, 성령의 역사하심, 성령의 일깨우심,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심을 느끼며 체험하게 된다.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기독교 복음의 확실성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보았고 증거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누가복음 24:46-48,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사도행전 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누구든지 복음에 증거된 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 진리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로마서 10:9, 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신자의 참된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일체가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가 복음에 증거된 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믿은 것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 것이요 믿은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시다(요 3:16; 롬 5:8). 사도는 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다시 반복하기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자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이다. 진정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은 참 신앙고백의 증거일 뿐 아니라, 구원의 증거 즉 하나님과의 영적 일체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6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고 성도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영적 일체의 두 가지 증거에 대해 말한다. 그 첫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이요, 그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바른 신앙고백이 있고 서로 사랑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됨은 그의 성령을 통해, 즉 성령의 감동과 감화, 역사하심, 일깨우심, 위로와 격려를 통해 느끼며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로, 여러분은 예수님을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가? 참된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표시이다. 둘째로, 여러분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가? 또 서로 사랑하고자 하는가?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진실히 믿고 그의 명령대로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미움은 구원받지 못한 표시이며 사랑은 구원받은 표시이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자.


17-21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본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증거한다. 본문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증거한다.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로써'라는 말은 앞절에서 말한 대로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함으로, 즉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믿고 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영적 일체성을 누림으로써라는 뜻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표가 된다.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사랑'은 원문에 '그 사랑'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은 법적인 구원인 칭의(稱義)뿐 아니라 새 생활로 나타나는 구원인 성화(聖化)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는 성화까지가 하나님의 뜻이다. 영화(榮化)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다.

이렇게 형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 13:8) 사랑 안에서는 담대함이 있다. 이것은 또한 심판날에 가질 담대함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왜 이런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가? 그 이유는,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즉 주께서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죽기까지 형제를 사랑하면, 주께서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영광 가운데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를 믿고 그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는 이 소망의 담대함을 가질 것이다. 디모데후서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어린아기는 엄마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그 품 안에서 편안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 가면 울 것이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왜냐하면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형벌'이라는 원어(콜라시스)는 '고통'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그 뜻이 본문에 더 적절하다.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은 자는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을 소유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며, 거기에는 두려움과 고통이 없고 평안과 기쁨이 넘친다.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전통본문에는 "우리가 그를 사랑함은 . . . "이라고 되어 있다.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의무이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참으로 안다면, 우리는 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것이다.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기본적인 일이며 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 형제'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를 가리킨다. 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인가? 요한은 말하기를, 그가 본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한 자가 그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절의 '이 계명'은 후반부의 말씀,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는 말씀을 가리킨다. 이 계명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 거기에서 '나의 계명과 '내 말'이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리킨다. 주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


결론적으로, 17절부터 21절까지를 요약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는 것과, 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성경 전체와 더불어 우리에게 두 가지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 교훈을 강조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같이 비천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되며 또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며 그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또 진실히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5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1-5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본문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중생한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중생한 자들 즉 주 안에서 형제된 자들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한다.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이것은 요한복음 1:12, 13에 증거된 바이기도 하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또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 중생(重生)의 도리를 증거하실 때 증거하신 바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내신 이'라는 말은 '낳으신 이'라는 뜻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가리킨다. 우리를 낳으신 이, 즉 우리를 중생시키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한다. '그에게서 난 자'는 우리와 똑같이 중생한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한 식구이며 한 형제들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은 세상에서 육신의 형제를 다 사랑한다. 육신의 형제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요 그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다. 육신의 형제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영적 형제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의 자녀가 된 형제들은 세상에서의 육신의 가족보다 더 귀하다. 육신의 부모가 나으신 형제들도 귀하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나으신 형제들은 얼마나 더 귀한 것인가!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원문에는, 본문이 "이로써 우리가 아노니"라고 시작된다. '이로써'는 앞절의 내용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또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는 것이 이치이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안다고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해야 할 줄을 안다' 혹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 사랑함은 하나님 사랑과 그 계명 지킬 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또 사도 요한은 그의 계명들이 무겁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중생치 않았을 때 곧 죄의 종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가 심히 무거웠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한 후에는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심겨졌고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므로 우리는 비록 연약함이 있어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즐거이 지킨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롬 8:4, 14).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다(마 11:29, 30).

[4, 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호티)이 있다. 이것은 그의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닌 이유를 증거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세력을 이긴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말했고(요일 3:9) 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하나님께로서 나왔고] 또 저희를[적그리스도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말했다(요일 4:4). 우리 속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또한 그의 생명 원리가 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어주셨다.

로마서 6:14, 18, 22,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고린도전서 15:54-57,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히브리서 2:14, 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사도 요한은 덧붙여서 말하기를,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부활을 소망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로써 마귀와 그 세력은 성도 앞에 완전히, 영원히 패배하고 말았다. 이 귀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 안에 다 내포되어 있다. 죄는 죽음과 불행을 가져왔으나 의는 생명과 영원한 행복과 영광을 가져왔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5:1, 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결론적으로, 1절부터 5절까지에서 우리는 우선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로, 여러분은 중생했는가? 중생의 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진실히 믿고 있는가? 둘째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과 그의 구원 사역을 아는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여러분은 참으로 온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어주신 하나님을 알며 그를 사랑하는가?

무엇보다, 본문이 가르치는 주된 교훈은, 만일 우리가 거듭나는 은혜를 얻었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또한 중생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육신의 형제들도 사랑하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낳으신 영적 형제들을 더욱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 아래 지는 자들이 아니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100퍼센트의 완전한 의를 얻으며 우리는 그 의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은혜로 얻는다. 여러분은 주께서 구원하신 자들, 곧 하나님의 가족들인 영적 형제들을 참으로 사랑하는가?


6-10절, 물과 피와 성령의 증거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가리킨 것 같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물과 피를 흘리셨다. 요한복음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초대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이셨다.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때가 되어 인간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요 1:14).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말대로,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계속 그리고 영원히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말씀은 물과 피라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킬 뿐 아니라, 또한 상징적 의미도 가짐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물은 죄씻음을, 피는 속죄의 죽음을 가리킬 것이다. 이 둘은 기독교 복음의 근본적 내용이다. 이 둘은 세례와 성찬의 의식으로 표현되는 것들이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까닭은 속죄의 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우리의 죄씻음을 위해 속죄 제물로 죽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씻음의 근거가 되었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신다. 즉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참되시며 그 분께서 증거하시는 내용 또한 참되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 14,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오늘날도 진리의 성령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신다.

[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다. 곧 성령과 물과 피이다. 성령과 물과 피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또한 그 셋의 증거는 하나이다. 그 셋은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증거의 요지이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우리는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매일 신문의 뉴스들이 그러하며 법정의 판결도 많은 부분 사람의 진실한 증거에 의존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상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될 것이고 의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사람들의 증거를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확실하고 믿을 만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자기 아들에 관해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실상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이다. 성령의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들 속에서 자기 아들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해 그리고 그의 속죄 사역에 대해 증거하셨다. 성령과 물과 피도 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 증거한다.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다. '증거가 있다'는 원어는 '그 증거가 있다'는 말이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를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즉 하나님의 증거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6절부터 10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오셨고 성령께서 그것을 증거하심을 말했다. 성령과 물과 피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속죄 사역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자. 하나님의 증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 곧 그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것이며, 또한 그의 속죄 사역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증거, 성경의 증거를 받아들이고 확신하자.


11-13절, 영생을 주심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과 그 영원한 생명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 좀더 설명한다. '증거'라는 원어는 '그 증거'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증거의 내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그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첫번째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본래 영생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첫 명령을 어느 기간 동안 잘 지켰었더라면 영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명령을 어겼고 하나님의 경고하신대로 죽게 되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시편 49: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러나 인간 속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싶어하는 강렬한 소원이 있다. 특히 죽음의 문턱에 선 자들에게는 좀더 살고싶은 강한 소원이 있다. 병약하여 죽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자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인간의 영원한 생명은 어디로부터 가능한가? 생명의 원천이신 창조주 외에는 아무도 인간에게 영생을 줄 수 없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실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약속하셨다. "또 그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음을 증거하였다. 디모데후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디도서 1:1, 2,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영생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진리의 중심이다.

이 영생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영생은 어떤 영생인가? 이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삶이다. 죽지 않는 삶이다. 그러나 그 삶은 병약하거나 불행스런 삶이 아니다. 그런 삶이 영원하다는 것은 복이 아니고 저주일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은 강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이다. 고린도전서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영생의 가치는 얼마나 큰지! 이 영생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인생은 어리석고 무지하여 이 영생을 세상의 썩어질 것과 바꾸기를 잘한다. 마치 옛날의 아프리카 어린 아이들이 다이아몬드를 사탕과 바꾸어 먹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하나님의 증거의 두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 요한은 본서신 서두에서도 그 사실을 증거하였다. 1:1,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한이 말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즉 이 세상에 나타났고 사도들에 의해 증거된 그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가리켰다. 요한은 본서신 끝부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생'이라고 증거하였다(요일 5:20).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요한이 쓴 요한복음에서도 밝히 드러나 있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47, 4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25,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4: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본래부터 영원한 생명이 있으셨지만, 그가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정당하게 영생을 주실 수 있게 되었다.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는 영생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사도 바울은 특히 이 사실을 그의 로마서에서 잘 증거하였다.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2, 13]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본절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영생,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영생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있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지만,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참 믿음은 영생을 얻는 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이 되고 영생이 된다는 것은 신약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바이지만,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풍성히 증거한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6:53, 5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17: 2, 3,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결론적으로, 11절부터 13절까지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은 명료하고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약속하셨다. 이 약속된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우리는 이 영생의 가치를 깨닫자. 우리는 어리석게 세상의 것들과 영생을 바꾸지 말자!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진대, 우리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고 감사하자. 또 이 영생의 기쁜 소식을 만인에게 증거하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영생의 길일진대, 우리는 예수님을 참되고 바르게 믿고 확신하며 그만을 따르고 그의 모든 말씀에 절대복종하자.


14-17절, 기도의 응답

14절부터 17절까지는 성도의 특권으로서 기도의 응답에 대해 말씀하고 범죄하는 형제에 대해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사도 요한은 성도의 담대함 즉 확신에 대해 말씀한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에 관한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의 한 부분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고 성경 전체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 가운데 우리의 필요를 위해 모든 성경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읽고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성경에 귀를 막는 자가 있다면 그의 기도는 헛될 것이지만, 성경에 귀를 기울이는 자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 잠언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보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것이다. 이사야 1:15, 16,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라." 이사야 59:1, 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며 순종하며 기도해야 하며, 그때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그의 뜻에 맞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의 뜻대로 구한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믿음 또한 중요하다. 우리가 기도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또한 간구한 기도의 응답을 믿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의 효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을 그가 들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또한 믿자.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6, 1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사도 요한은 기도의 응답에 대해 말한 후 범죄하는 형제를 위해 기도할 것에 대해 또한 가르쳤다. 이 때 그는 죄를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며, 다른 하나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라고 하였다. 죄의 값은 죽음인데(롬 6:23)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영생을 얻은 후에 실수로나 연약성 때문에 범하는 죄를 가리킬 것이다. 사도는 앞에서 중생한 자가 범죄치 않는다고 말씀했으면서 여기에서는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중생한 자가 범죄치 않는다는 말씀은 중생한 자가 계속 죄 가운데서 생활할 수 없다는 뜻이며, 중생한 자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중생한 자도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그는 그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즉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이다. 그는 그 실수와 연약 때문에 구원과 영생을 상실하고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형제가 그런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러면 그는 회개하고 영생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로서 가질 수 없는 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은 죄이다. 그런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령의 일을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대적하며 양심의 감동을 극도로 억압하는 죄로 생각된다. 교회 안에서 이런 죄가 있어서 안되겠지만, 종종 이단자들 속에서 이런 류의 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단의 죄는 실수나 무지나 연약의 죄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다 아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무지해서가 아니고 순전히 고의적이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진리를 대항하고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의 뱀과 같이 확신차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이런 이단과 배교의 죄는 너무 크고 두려운 것이어서 실상 그런 자들을 형제로 여길 수도 없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제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14절부터 17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하고 그 뜻대로 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의 응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응답을 믿는 것도 중요하다. 셋째로, 우리는 교우 중에 누가 범죄하는 일을 보거든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대항하고 부정하고 왜곡시키는 이단자와 배교자에 대해 우리가 기도할 자신이 없지만, 주를 진실히 믿고 따르고자 하는 형제에 대해서는, 비록 그가 실수와 연약으로 범죄하였을 때라도, 그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말고 그를 끝까지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그에게 회개함을 주시고 그가 영생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18-21절, 바른 지식과 삶

본문은 중생(重生)에 대한 바른 지식과 거기에 합당한 삶에 대해 증거한다. 본문에는 '우리가 알고 있다'는 말(오이다멘)이 세 번 나온다('우리가 아노라. . . . 또 아는 것은 . . . 또 아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얻은 중생(重生)의 성격과 근원과 방편을 나타낸다. 중생의 성격은 범죄치 않는 것이요, 중생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요, 중생의 방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 본문은 우리가 중생에 합당하게 자신을 죄와 우상으로부터 지켜야 할 것을 가르친다.

[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첫번째로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생의 성격을 보인다. 이 진리는 본서신 3:6, 9. 10에서 언급된 바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중생한 성도의 실제적인 생활을 가리키는 말씀으로서 중생한 자는 계속 범죄하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중생한 자는 그 영혼 속에 새 생명의 원리가 심기워졌기 때문에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중생한 자 속에 심기운 새 생명은 하나님만을 향하고 의(義)만을 향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범죄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이며 죽거나 없어질 수도 없는 원리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생명이다. 신학자들은 중생의 이러한 성격을 '영혼의 지배적 성향의 변화'라고 말한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옛날 영어성경의 본문과 같이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며"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중생한 자의 합당한 삶을 증거한다. 중생한 자는 범죄하지 않지만, 중생한 자는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중생한 자는 범죄치 않는다고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된다. 그는 항상 자신을 지키며 범죄치 않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는 점도 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한 것들이 많다. 이것은 중생한 자에게도 똑같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1에서 이런 죄악들을 경계해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또 그는 고린도후서 7:1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죄악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두번째로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사실이다. '속한다'는 원어(에크 . . . 에이미)는 일차적으로 '께로부터 나온다 혹은 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중생의 근원을 나타낸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혹은 '사악함 속에'(옛날 영어성경) 처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이다. 중생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어두움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어 살려 건져내는 구원 사건이다. 온 세상은 이 두 세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의 세계와 죄악된 세계가 그 두 세계이다.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세번째로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참된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생의 방편을 나타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중생을 얻는다.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믿는 것이 곧 중생의 증거요 그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 곧 구원이다.

사도 요한은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증거한다. 여기에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명확한 한 증거가 있다. 그는 신적인 존재로 높임을 받는 정도가 아니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또 그는 우리에게 영생이 되시고 친히 영생을 주시는 구주이시다.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사도 요한은 끝으로 중생에 합당한 생활의 한 면으로서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교훈을 남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근본적 요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우상은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죄악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우상숭배를 제거해야 한다. 현대인은 인간이나 인간의 지식과 과학이나, 돈이나, 육신의 쾌락 등을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 대신에 높이고 가치 있게 여긴다. 이것들은 다 일종의 우상이다. 중생한 성도들은 이런 우상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런 것들을 멀리하지 않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중생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알게 되었다. 중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일이며 이렇게 중생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 즉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가 중생한 자로서 또한 자신을 죄로부터 지켜야 하고 우상으로부터 지켜야 함을 교훈한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신의 죄악된 일들을 다 버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 대신에 높임을 받는 모든 것을 다 배척하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그의 뜻만을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의의 길이요 영생의 길이다.

 

 

 

 

 

 

 

요한이서

 

 

내용 목차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요한이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이 점에 대하여 초대 교회의 전통은 분명하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264년경 사망), 및 키프리안(258년 사망)은 본서신을 사도 요한의 서신으로 인용하였다. 본서신은 아마 주후 85-9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는 '진리 안에서 행함'이다. 아울러 본서신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교리를 저버린 이단에 대해 경계해야 할 것을 밝히 교훈하였다(7-11절).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1-3절, 문안 인사

본문은 문안 인사인데, 그 가운데 진리 안에서의 성도의 사랑과 교제에 대한 귀한 사실이 증거되어 있다.

[1, 2]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한다. '장로'라는 말은 나이 든 노인을 암시하는 말로서 사도라는 말보다 더 친근감이 있는 표현일 것이다. 본서신은 사도 요한의 노년에 쓴 것 같다. 사도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자신을 장로라고 불렀다(벧전 5:1).

본서신의 수신자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다. 구원은 곧 하나님의 택하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어떤 이들은 '택하심을 입은 부녀'라는 표현을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부녀'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4절에 '너의'라는 단수 인칭대명사와 5절의 '부녀여'라는 단수 호격 명사와 13절의 '네'와 '네게'라는 단수 인칭대명사들은 한 교회를 가리키는 말로서는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여성도와 그의 자녀들은 하나의 작은 교회를 형성한다고도 볼 수 있다.

본문에는 '진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1절의 '내가 참으로'라는 말도 영어성경들처럼 '내가 진리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도는 자신을 '진리 안에' 있는 자로 표현하며 다른 성도들을 '진리를 아는 자들'로 표현한다. 또 그는 이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며 영원히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6에서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바울은 에베소서 1:13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들'로 표현하였다. 진리의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그를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는다는 약속이다.

성도는 진리를 아는 자들이며 이 진리가 그들 속에 있는 자들이다. 이 진리는 그들 속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실 것이다. 그의 진리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는 것이 곧 구원이며 영생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이 진리 안에서, 이 진리 때문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사도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을 '내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또 그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한다'고 말하며, 그 까닭은 '우리 안에 거하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진리가 우리를 사랑의 줄로 묶었다. 진리가 우리를 한가족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였다. 교회는 세상의 이익 집단과 다르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이다. 비록 우리가 서로 다른 집에 살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대가족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그의 형제요 자매이다(마 12:50). 성도의 사랑의 교제에 교회의 교회다운 점이 있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그들에게 기원할 때에도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진리로 구원을 얻었고 사랑으로 그 진리를 실천한다. 우리가 진리를 우리 속에 굳게 붙잡고 믿고 확신할 때 그리고 그 진리 때문에 구원받은 다른 이들을 힘써 사랑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더욱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진리, 우리가 믿은 진리를 가장 귀히 여기며 확신하고 사랑하고 널리 전파하자. 그 진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경 말씀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와 동일하게 진리를 받고 진리로 구원받은 다른 이들을 사랑하자. 우리의 사랑의 이유는 오직 진리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 자들이 된 것이다. 천국은 성도들이 참된 사랑으로 사랑하며 영원히 살 곳이다.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세상에서도 서로 사랑해야 하고, 서로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진리와 사랑 안에 거할 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더욱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생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받아 누릴 가장 귀한 복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자들이 되자.


4-6절, 진리 안에서 행함

본문은 신자가 진리 안에서 행함을 보고 기뻐하는 사도 요한의 기쁨을 증거하면서 우리 모두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가 될 것을 교훈한다. 또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또 다른 말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진리와 사랑은 모든 성도에게 필수적인 두 요소이다.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본서신은 앞에서 말한 대로 사도 요한이 믿는 여성도에게 보낸 개인적 서신이다. 그러나 그 여성도와 그의 자녀들은 작은 가정 교회를 이룬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본서신의 교훈은 한 개인적 가정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시대,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교훈이다.

그 여성도의 자녀들 중에는 진리대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의 모든 자녀들이 다 잘 믿은 것 같지는 않다. '너의 자녀 중에'라는 말은 그 자녀들 중 일부가 잘 믿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부모가 잘 믿는다고 자녀들이 자동적으로 잘 믿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진리에 행한다는 말은 진리 안에서 행한다, 진리대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이란 10계명과 성경의 모든 말씀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십계명대로,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을 뜻한다.

사도는 그 여성도의 자녀들 중 어떤 이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마음의 태도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지도록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지 안 행하는지를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도는 그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 심히 기뻐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 죄인들의 심령 속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큰 기쁨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심히 큰 기쁨이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이 주 예수님을 믿는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큰 기쁨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자신의 기쁨과 자랑이라고 자주 표현하였다(빌 4:1; 살전 2:19, 20). 더욱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 진리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보는 것은 목사와 성도들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전파된 말씀을 거역하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슬픔이 되지만(빌 3:18), 그것을 받아 그대로 사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이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사도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강조는 언제나 필요하고 유익하다. 본서신에 나타난 대로, 그 여성도가 처한 형편은 이단자들의 미혹이 있는 형편이었다. 이단과 오류가 교회 안팎과 성도들 주위에 많이 들어와 있을 때 성도들은 사랑이 식어지기 쉬울 것이다. 주께서도 당신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다(마 24:12).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진리를 굳게 붙들고 보수하며 이단과 오류를 배격하는 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 간에는 서로 사랑하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성도에게 새삼스런 계명이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믿기 시작할 때부터 배운 기본적인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새 계명으로 남겨 주셨고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의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3:34, 35). 참 교회는 예수 믿어 구원받은 후 서로 사랑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사도 요한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의 필수적인 두 요소를 강조한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들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려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십계명을 범하거나 성경 말씀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계명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우리가 믿기 시작할 때부터 들은 바와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행하라'는 말은 '사랑으로 행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다. 계명을 순종함과 서로 사랑함, 진리 안에서 행함과 서로 사랑함은 별개의 일이 아니고 둘 다 필요하다. 그것은 둘 다 필수적이다. 여기에 사도 요한의 강조점이 있다.


결론적으로, 4절부터 6절까지는 우리에게 몇 가지 기본적 사실을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즉 진리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를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어야 한다.

둘째로, 진리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힘써 읽고 배우며 그대로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이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다.

셋째로, 진리대로 행하는 것은 또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내용이 사랑이다. 주께서는 인간 관계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서로 사랑하라는 한 마디로 요약하셨다. 우리는 계명을 순종함과 서로 사랑함을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고 둘 다 지켜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둘 다 지켜야 한다. 이단 사설이 난무하는 말세에 우리는 성경적 신앙의 옛길을 보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심령의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오류와 악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하지만, 믿고 순종하는 이들 간에는 진실한 성도의 교제와 사랑을 힘써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7-13절, 미혹하는 자를 물리치라

본문은 미혹하는 자 곧 이단의 정체를 말하고 우리가 바른 교훈 안에 거하고 이단자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말한다.

[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미혹하는 자는 속이는 자라는 뜻으로 이단자를 가리킨다. 이단은 마귀의 활동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그 말씀을 빼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것이다(갈 1:8, 9; 딤후 2:17, 18). 벌써 사도 시대에 많은 이단자들이 교회 안팎에 나타났다. 사도는 이제 그들의 정체에 대해 언급한다.

본절에 언급된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임하심을'이라는 원어는 현재분사이지만 요한일서 4:2, 3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라고 불리우신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다(요 1:1). 그가 때가 되어 사람이 되신 것이었다.

본래 신적 인격 즉 하나님이셨던 그가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렇다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두 인격이 아니시다. 그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본래 신적 인격이셨던 그가 인간의 본질을 취하셨다. 그럼으로써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 되셨다. 신성과 인성, 신적 본질과 인적 본질이 결합되셨으나 두 분이 아니고 한 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1문답은 진술하기를,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救贖者)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지만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분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시다"라고 하였다. 이 지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요 성경적 지식이다. 이 지식을 버린 목사들은 다 미혹하는 이단들이다.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우리의 일한 것'이란 사도들이 행한 전도의 일과 그로 인해 받은 구원을 가리킬 것이다. 전통사본에는,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않고 온전한 상을 얻도록 하라"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에 '온전한 상'은 전도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을 뜻한다. 고린도전서 3:5-8,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사도 요한은 편지를 받는 그 여성도와 그의 자녀들이 이단에 미혹되지 않고 믿음을 지킴으로 자신의 전도 사역이 헛되지 않고 마지막 날에 주께 상을 얻는 일이 되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지내쳐'라는 말이 전통사본에는 '이탈하여' 혹은 '범죄하여'라는 말(파라바이노)로 되어 있다.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은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 즉 성육신의 교리 안에 거하지 않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 혹은 교리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구주이시기 때문에 그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를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가질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을 둘 다 영접하고 섬기는 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를 부정하는 자이다. 요한일서에서도 사도는 이 점을 강조하였다. 요한일서 2:22, 23,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이단을 분별하고 그리스도의 바른 교리 안에 거해야 한다.

[10, 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이 교훈[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교리]을 가지지 않은 자'는 이단자를 가리킨다. 사도는 '이런 자는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말한다. 이단들은 사탄에게 속하기 때문에 참 교회가 그들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로마서 16:17, 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오늘날 교회의 현실에 적용해보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이단은 교황을 머리로 한 로마 천주교회의 사상과 조직체이다. 또한 현 시대에 가장 심각한 이단은 기독교계 전체를 부패시킨 자유주의 신학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용납하는 자유주의 혹은 포용주의 교회들은 잘못이다. 또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배격하지 않는 교회연합운동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들과 성도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배격해야 하고 그들을 용납하는 교회들을 책망해야 한다.

[12, 13]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분명한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미혹하는 자들인 이단을 분별해야 한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바른 교리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다 믿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파악하고 그 안에 거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신앙을 이탈한 한 것이 사탄의 미혹이다. 셋째로, 우리는 미혹하는 이단자들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집에 들이거나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악한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요한삼서


 

내용 목차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쓴 개인적 성격의 편지로서 원문 신약성경 중 가장 짧은 책이다. 본서신은 주후 85-9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도 요한이서와 같이 '진리 안에서 행함'이다. 또 본서신은 사도 요한에게 반항적인 말을 하고 복음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영접하는 자들을 핍박하기까지 했던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을 언급하면서 그런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1-4절, 사도의 간구와 기쁨

본문은 가이오에 대한 사도 요한의 간구와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다.

[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그의 나이가 많음을 보이는 것 같다. 또 요한은 가이오를 '사랑하는 가이오' 또는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참으로'라는 말은 '진리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2절과 5절에서도 그는 가이오를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성도들은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자들이다. 모범적 교회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교회이다. 참 사랑의 성격은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에 잘 증거되어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사도 요한은 가이오의 영혼이 잘되는 것에 근거하여 그를 위해 간구한다. 영혼이 잘되는 것은 성도에게 가장 귀한 부분이다. 영혼이 잘된다는 말은 믿음으로 바로 사는 것을 말한다. 성도에게는 믿음이 견고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죄와 불결함을 버리고 천국을 소망하며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사는 것보다 더 복된 삶이 없다.

그것이 에녹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며(창 5:22) 노아같이 의롭고 완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창 6:9). 노아는 하나님의 명하시는 대로 다 준행하였다(창 6:22). 그것이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요 특히 범죄치 않으려고 애쓴 삶이다(창 39:9-12). 그것이 신명기 28장에 말씀한 대로 순종의 삶이요, 시편 1편에 말씀한 대로 악을 버리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의 삶이다. 그것이 잠언 3장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삶이다. 그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며(요 6:27), 바울이 말한 대로 육체를 위해 심지 않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의 삶이다(갈 6: 8).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그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기를 간구한다. '범사'는 그의 생활의 모든 부분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가정과 자녀들의 문제, 직장과 사업의 문제, 젊은이들의 학업, 취업, 결혼 등의 문제 등을 다 포함한다. 성도가 영적 생활을 잘하면 우리는 그의 범사가 복되고 형통하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범죄치 않으려고 애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범사에 형통한 삶을 주셨다(창 39:23).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가 얻을 자녀의 복, 물질의 복, 건강의 복 등에 대해 말하였다. 또 시편 1편도 우리가 악을 버리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우리의 모든 일들에 형통함을 누리게 될 것을 말하였다. 범사에 잘됨은 확실히 영혼의 잘됨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도가 믿음의 생활을 바르게 잘하는 것이 복된 삶의 길이다.

사도 요한은 또한 가이오가 강건하기를 간구한다. 건강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신명기 28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 여러 가지의 질병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강을 주실 것이다. 잠언 3:7, 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물론 모든 질병이 다 죄의 징벌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의 인격 훈련을 위해 주시는 질병도 있는 것 같다(고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얼만큼 건강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신다. 그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3, 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사도 요한에게 온 형제들은 가이오에게 있는 진리에 대해 증거하였다. 즉 그가 진리를 받아들였고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진리를 주셨다.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인 복음이다. 이제 우리는 이 진리 안에서 살므로 다른 이들이 우리의 삶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진리 안에서의 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이다. 만일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일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믿는 자라면, 우리는 교만을 다 버리고 음란과 불결함을 다 버리고 미움과 다툼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형제들로부터 듣고 심히 기뻐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말한다. 성도들이 성경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목사에게 큰 기쁨이요 성도들 상호간에도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의 진리를 읽고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믿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의 영혼이 잘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보다 더 귀하고 기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참된 교회의 모습대로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의 냉랭한 마음에 참된 사랑이 불붙어 오르기를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잘되는 일에 힘쓰자. 즉 영적 생활에 힘쓰자. 그것은 경건의 생활, 믿음의 생활, 순종 생활, 성결 생활이다. 사람은 밥만 먹고 돈만 벌고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에게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복을 주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알고 믿는 것 같지만, 그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 모순된 삶을 살지 말고 진리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며 사는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5-8절, 가이오의 선행

본문은 사도 요한이 성도들과 주의 종들에 대한 가이오의 신실하고 선한 행위에 대해 칭찬하고 격려하는 내용이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가이오는 형제들과 나그네들에게 신실하게 행하였다.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이라는 원어는 '형제들에게와 나그네들에게'라고 되어 있다. '형제들'은 주의 종들을 포함하여 성도들을 가리키는 일반적 명칭이며, '나그네들'은 아마 순회전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가이오는 다른 성도들에게나 주의 종들에게나 순회전도자들에게나 모든 일에 있어서 신실하게, 참되게, 믿을 만하게 행동하였다. 우리는 가이오의 선행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도 참되고 신실한 일, 믿을 만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6]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가이오의 영접을 받고 사랑을 입은 성도들과 종들은 교회 앞에서 그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가이오의 행위는 참으로 믿음 안에서의 행위이었고 사랑의 행위이었다. 그것은 교회 앞에서 엄숙히 증거된 행위이었다. 그것은 가식이나 위선이 아니었다. 저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이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이었다. 거기에는 진실만이 있고 거짓이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이제 사도는 가이오가 현재 잘하고 있지만 저희를 전송할 때도 '하나님께 합당하게' 전송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합당하게'라는 말은 우리가 다른 성도를 대할 때나 주의 종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외모를 따라 인간에게 대하듯 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듯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종들에게 교훈하기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고 하였다(골 3:23).

[7]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가이오가 저 순회전도자들을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로 영접하고 전송하는 것이 옳은 까닭은 저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댓가 없이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은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혹은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참된 전도자들은 물질적 댓가를 기대하지 않고 일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삯군이 아니다. 전도 사역, 말씀 사역은 장사가 아니다. 주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셨다(마 10:8). 물론 그는 또한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부언하기도 하셨다(마 10:10).

[8]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들이 참된 전도자들과 주의 종들을 영접하는 것은 마땅하다. 주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성도들이 전도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저들로 하여금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다. 우리는 직접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지 못할지라도 기도와 헌금으로써 그리고 기회 있을 때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와 예절로써 그들을 전송함으로써 진리를 위한 수고에 동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주의 종들이나 다른 성도들에게 신실하게, 즉 참되고 진실하고 믿음직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 있는 믿음은 진실하고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둘째로, 우리는 주의 종들이나 다른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대하듯이 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 존중함과 예절과 서로 복종함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셋째로, 우리는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진리로 죄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 그러나 성도들은 비록 자신들이 전임 사역자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헌신한 참된 전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존경과 예절과 복종으로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또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과 기쁘심을 돌리는 일이 될 것이다.


9-12절,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

본문은 디오드레베의 교만과 악함에 대해 지적하고 데메드리오의 진실한 믿음과 선함에 대해 증거하면서 우리가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할 것을 교훈한다.

[9, 10]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의 악함에 대해 몇 가지로 지적하고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그를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사람 속에는 교만과 명예심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인간의 죄악성의 본질적 요소이다. 마귀는 교만함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교만과 명예심을 여지 없이 정죄하신다. 교만한 자는 멸망의 문 앞에 서 있는 자이다. 회개치 않으면 그는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물리치신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높이신다(마 23:11, 12).

둘째로,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가 악한 말로 자기와 동료 사역자들을 부당하게 비난하였다고 증거한다. '망령되이 폄론하다'는 말은 '부당하게 비난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른 성도에 대해 정당한 비난도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7:1). 하물며 부당한 비난이야 더더욱 합당치 않다. 그것도, 진실한 복음 사역자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은 매우 악한 일이다. 주께서는 선한 자는 그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하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또 잠언 12:18은 말하기를,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하였다. 야고보서에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자라고 말씀했다(약 3:2).

셋째로, 사도 요한은 그가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 즉 주의 종들을 영접하지 않았고 심지어 영접하려 하는 자들을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을 배척한 참으로 악한 행동이었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10:40). 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교회 안에 다른 양들을 밀뜨리는 염소들에 대해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다(겔 34:21). '유위부족하여'라는 말은 '오히려 부족하여'라는 뜻이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사람에게는 모방하는 심리가 있다. 선한 일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기도 하지만, 악한 일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기도 한다. 성도는 죄에서 구원을 받은 자로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한 본과 영향을 주는 악한 것들은 무엇이든지 끊어버려야 한다. 내가 세상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한 행실을 보인다면 세상 친구를 끊어버릴 것이 없지만, 반대로 세상 친구가 나에게 악한 본과 영향을 준다면 그 친구를 끊어버려야 한다. 고린도전서 15:33,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내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나 컴퓨터 인터넷을 유익한 문화적 도구로서 절제 있게 사용한다면 그것을 끊어버릴 필요가 없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것들로 나의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더럽히고 자극한다면 성도는 그것을 끊어버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은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관계하지도 말아야 한다.

악과 선의 근원과 소속이 다르듯이, 악을 행하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의 근원과 소속이 다르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며 하나님께 속한다. 성도의 선행은 그가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이다. 사람이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며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요한일서 3:9, 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다른 한편, 데메드리오의 진실한 믿음과 선함에 대해 말한다. 그는 데메드리오가 모든 사람에게 증거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데메드리오의 믿음과 선함에 대해 증거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또 데메드리오가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다고 말한다. 진리에게 증거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진실한 믿음과 행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덧붙여 그는 우리도 그에 대해 진심으로 증거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데메드리오는 진실한 믿음과 선행을 가진 성도임이 여러 모로 증거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기쁘고 복된 증거이다. 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복된 증거를 가지게 되기를!


13-15절, 마치는 인사

[13-15]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면대하여 말하리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

사도 요한은 성도들과 속히 만나 얼굴을 맞대고 말하기를 원하였다. 참된 성도의 교제는 얼마나 사모할 만한 것인지! 그는 또 평강을 기원한다. 근심과 불안정의 요소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평강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큰 복이다. 그는 또 여러 친구들의 문안을 언급하며 가이오도 그곳의 친구들에게 일일이 문안해 줄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고 생각을 낮추고 참된 사랑을 가지고 서로 교제하고 서로에게 평강을 기원하고 문안하자.


결론적으로, 9절부터 15절까지에서 우리는 전혀 대조되는 두 인물에 대해 들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악한 말로 복음 사역자들을 부당하게 비난하고 그들을 영접하지 않고 영접하려는 자를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한 자이었다. 그러나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또 사도 요한 일행에게도 증거를 받은 진실한 믿음과 선함을 구비한 자이었다. 우리도 그 둘 중의 어느 하나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 악한 것은 끊어버려야 한다.

마태복음 5:28-30,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그러므로 악한 친구는 멀리하고 악한 물건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 속에는 악한 성질과 성향이 있다. 그것들이 우리를 실수와 연약과 범죄의 자리로 이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자극하고 충동하는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고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범죄한 일들과 본성의 죄악성을 진실히 회개하고 그것들을 다 버리고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의와 선의 열매를 맺기를 결심해야 한다.

 

 

 

 

 

 


유다서

 

내용 목차

1장: 진리를 위한 싸움

 

 

 

본서신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이다. '야고보의 형제'라는 표현은 둘 중의 하나를 가리킬 것이다. 첫째는 열두 사도 중에 야고보와 친족 관계에 있는 유다를 가리킬지 모른다. 한글성경 누가복음 6:16은 그를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번역했다. '아들'이라는 말은 작은 글씨로 첨가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야고보의'라는 말만 있다. 옛날 영어성경은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번역했다. 둘째는 그 표현이 예수님의 동생들 중 한 사람인 유다를 가리킬지 모른다. 마가복음 6:3은 예수님의 동생들 중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 등을 언급한다. 유다는 17절에서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자신을 사도들과 구별시키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사도가 아닌 유다일지 모른다. 또 그가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표현한 것은 야고보가 당시에 잘 알려진 인물임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이었으므로(행 15:13; 갈 1:19; 2:9) 그의 동생 유다가 본서신의 저자이었다면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세기 경에 벌써 허마와 폴리갑은 본서신을 인용하였다. 초대 교회는 본서신을 영감된 책으로 받아들였다. 만일 본서신의 저자가 사도가 아니고 예수님의 동생 유다이었다면, 본서신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경우와 같이 다른 사도적 인물의 인정과 권위에 의해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그 인물이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마가복음은 사도 베드로의 인정과 권위에 의해 그리고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의 인정과 권위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본서신이 모세의 승천이나 에녹서 같은 가경서(假經書)를 인용했으므로 영감된 책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지만, 본서신의 9절과 14절에 인용된 말들은 구전(口傳)에서 인용되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므로 반드시 가경서를 인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과 거짓 교사들에 대항하여 '진리를 위해 싸우라'는 것이다(3절). 유다는 또한 이단들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였다(4-19절). 본서신의 교훈은 말세를 당하여 배교와 타협과 혼란이 극심한 오늘날 매우 적절하고 요긴하다. 오늘날 주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진리를 위해 이단들을 대항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

 

 


 

1장: 진리를 위한 싸움

1-2절, 문안 인사

[1, 2]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유다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부른다. '야고보의 형제'라는 말은 그 야고보가 당시에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신앙과 순종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하나의 좋은 모범 정도가 아니고 신앙의 대상이요 순종의 대상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주님'이셨다. 그에게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고 초대 교회의 모든 이들에게 그러하였고 그 후 시대에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신앙과 순종의 대상이시다. 우리는 그를 하나님과 구주로 믿고 의지하며 그에게 절대적 순종과 헌신을 바친다.

유다는 편지를 받을 성도들을 세 마디로 표현한다. 첫째로, 그는 그들을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전도의 말씀에서 죄인을 부르시는 외적인 부르심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회개하고 주께로 나오게 하시는 효력 있는 부르심을 의미한다. 둘째로, 그는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거룩해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사랑을 얻고'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거룩해지고'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 셋째로, 그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원어(예수 크리스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다.

유다는 이런 성도들에게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많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랑을 입은 자들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주시는 평강을 소유하고 누리는 자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 약하고 세상은 너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과 사랑은 우리에게 날마다 시간마다 더욱 많이 요구되는 것이다.

3-4절, 편지를 쓰는 목적

[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다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받은 구원에 대해 성도들에게 몇 마디 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권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다음 절에 말한 대로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받은 구원에 대해 도전하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단들이 도전하고 부정하는 우리의 구원은 몇몇 사람들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며 우리가 믿는 바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이다.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라는 원어는 '우리의 공통적 구원'이라는 뜻이며, '믿음의 도'라는 원어는 단순히 '믿음'이라는 말로서 여기에서는 믿는 마음가짐보다는 믿음의 내용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내용은 단번에 확정된 것이며 시대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갈 1:7-9).

기독교 진리는 확정되었고 고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단번에 이루어졌고 그의 십자가 속죄 사역도 단번에 이루어졌고 그의 부활도 단번에 이루어졌고 우리의 사죄(赦罪)와 칭의(稱義)도 법적으로는 단번에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이 기독교 신앙 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 외에 다른 예수가 없으며,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고, 성경적 예수와 성경적 복음을 믿고 고백하게 하는 영 외에 다른 성령이 없다.

그런데 이 불변적 진리를 부정하고 혼잡케 하는 이단들이 교회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한 싸움이다(빌 1:7; 딤전 1:18; 딤후 4:7).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우선, 우리는 이단에 대해 침묵하거나 이단을 포용하거나 이단과 협력하거나 이단과 연합하여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이단을 분별하고 그것을 반박하고 비평하며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것을 조심하도록 경계하고 그것과 교제하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롬 16:17; 고후 6:14-17; 엡 5:11; 딛 3:10; 요이 7-11).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하고 상대방에 대해 잘못 표현하거나 잘못 정죄하는 실수를 하지 않고 정확하고 정직한 말만 하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갈 6:1; 딤후 2:24-26).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본절은 이단에 대해 몇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로, 이단은 교회 안으로 가만히 들어온다. 이단은 '내가 이단이다'라고 말하면서 들어오지 않는다. 이단은 마치 자신이 이단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처신하면서 교회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이단을 분별할 수 있다. 교회가 영적으로 잠들면 이단이 많이 들어올 것이다.

둘째로, 이단은 옛적부터 정죄를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되었다'는 말은 '정죄를 받기로 미리 작정되었다'는 뜻이다. 이단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다. 그들은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고 만세 전부터 정죄를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셋째로, 이단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이단은 불경건하다.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믿었더라면 이단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이단은 정욕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여 방종에 떨어지는 교훈을 하면 그는 진리에 위배되며 이단적이다. 셋째, 이단은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전통사본에 '홀로 하나이신 주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 증거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일부라도 부정하는 것이 이단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구원과 단번에 주신 믿음의 진리를 귀중하게 여기고 이단을 분별하여 힘써 싸워야 함을 배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여러 곳에서 보이는 대로 이단에 대해 침묵하거나 이단을 포용하거나 이단과 협력하거나 연합하여 활동하지 말고 이단을 분별하고 반박하고 비평하고 이단과 교제를 단절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단을 경계하게 하고 이단과 분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항상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고 또 정확하고 정직한 말을 하고 잘못된 비평이나 정죄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5-10절, 이단들의 죄악과 심판

[5]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유다는 겸손하게 권면한다. 그는 자신의 권면의 말이 성도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이지만,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한다. 이것이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른 태도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5장에서 비슷하게 썼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유다는 거짓 교사들 곧 이단자들의 죄악과 심판을 역사상 몇 가지 사실들에 비교한다. 첫째로, 그는 이단자들의 죄악과 심판을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멸망한 이스라엘의 선조들에 비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기 백성을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항할 때 그들을 광야에서 다 멸망시키셨다. 이와 같이 교회에 속한 것 같은 이단자들도,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교회에 소속하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둘째로, 유다는 이단자들을 자기 위치를 떠난 천사들에 비교한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은 사탄과 악령들을 가리킬 것이다. 물론 모든 악한 천사들이 다 지금 흑암에 결박되어 있지 않지만, 그 중 일부분이 그러한 것일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후서 2:4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고 하였다. 사탄과 악령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위치, 즉 하나님을 섬기는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지키지 않고 교만함으로 타락하게 되었다고 보인다(딤전 3:6). 하나님께서는 악한 천사들의 일부는 이 세상에서 현재 활동하도록 허락하셨으나, 그 나머지는 이미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섬기도록 만드셨던 천사들이라도 타락할 때 이렇게 벌하셨듯이, 그는 이단자들도 지옥에 던지실 것이다.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셋째로, 유다는 이단자들을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과 심판에 비교한다. 옛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은 심히 음란하므로 마침내 유황불비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였다.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라는 원어는 '이 사람들과 같은 모양으로'라는 뜻으로 이단자들을 가리킨다. '다른 색을 따라'라는 말은 정상적인 남녀 관계를 벗어난 변태적 관계 즉 동성애를 가리킬 것이다. 성적인 타락의 극단적 형태가 동성애이다. 성경은 그것을 '가증한 일'이라고 표현하였다(레 18:22).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극도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비를 내려 완전히 멸망시키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단자들은 같은 죄 때문에 같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이단자들의 죄악은 앞에서 언급한 세 경우와 비슷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인 것처럼 처신한다. '꿈꾸는 이 사람들'이라는 말은 그들이 꿈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다고 선전함을 암시한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들은 육체를 더럽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음란한 자들이다. 4절에서도 유다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꾼다고 지적하였다. 이단의 한 특징은 도덕적 부패이다. 참된 신앙과 도덕적 삶은 같이간다. 참된 신앙을 저버린 자가 도덕적으로 부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로 그들은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권위와 영광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합법적인 권위를 가리킬 것이다. 이단자들은 교회의 합법적인 교훈과 치리에 복종치 않는다. 물론 우리가 사람의 종이 될 필요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합법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성경이 밝히 가르친 바이다. 만일 교인들이 교회의 합법적인 교훈과 권위에 복종치 않는다면, 교회는 이단을 막아낼 수 없고 분파의 죄악과 혼란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누가 교회의 교훈과 치리에 불복종하려 한다면 그는 그 이유를 성경에 근거하여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교훈과 치리의 권위에 대해 여러 곳에서 밝히 증거한다. 마태복음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9, 10]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유다는 이단자들이 교회의 합법적 권위자들을 함부로 비난하는 잘못에 대해 지적하면서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해 마귀와 변론한 일을 언급한다. 이것은 구약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옛날부터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이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유다는 천사장 미가엘이라도 마귀에 대하여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였는데 저 이단자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고 비난한다고 지적한다. 이단자들은 교회의 합법적 권위자들을 함부로 비난하였다. 그것은 매우 악한 일이었다.

또 그들은 육신적 죄악성으로 인하여 멸망을 당하고 있다. '본능으로 아는 그것'이라는 말은 인간의 육신이 가진 본능적 감정과 욕망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성 없는 짐승이 가진 것과 비슷하다. 인간이 단지 그런 것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것보다 고상한 영혼의 생각과 감정과 소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증거들 중의 하나이다. 인간의 가치는 육신적 감정보다 이런 정신적 요소에 있다. 그렇지만, 저 이단자들은 결국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저들은 그 육신의 죄악된 감정과 욕망 때문에 마침내 멸망을 당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10절까지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악한 예들만을 보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으나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광야에서 멸망을 당했던 이스라엘의 선조들,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나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던지운 천사들, 간음을 행함과 동성애의 극한 죄악 때문에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 등은 육체를 더럽히며 하나님이 교회에 합법적으로 주신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을 훼방하는 저 이단자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저들은 다 지옥의 형벌을 받을 자들이다. 우리는 이 악한 예들을 통해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겸손히 우리의 위치를 지키고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권위자들을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비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성경적 교훈과 치리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또 우리는 음란으로 육체를 더럽히지 말고 거룩함과 정결함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11-19절, 이단들의 죄악과 심판(계속)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유다는 이단자들을 역사상 세 명의 인물에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화가 있을 것을 선포한다. 첫째로, 이단자들은 가인의 길을 가고 있었다. 가인은 동생을 미워하여 마침내 그를 죽였다. 이와 같이 이단자들은 마음 속에 미움을 가득히 품고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둘째로, 이단자들은 발람의 어그러진 길을 가고 있었다. 발람은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행하다가 큰 책망을 받았다. 이와 같이 이단자들 속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셋째로, 이단자들은 고라의 패역을 따르고 있었다. 고라는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인도자 모세를 대적하다가 하나님의 큰 벌을 받았다. 땅이 갈라져 그들을 산 채로 삼켰다. 저 악한 자들과 같이, 이단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화가 있다.

[12]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유다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이단자들에 대해 평가한다. 첫째로, 이단자들은 애찬의 암초이다. 암초는 배를 파선시키는 무서운 원인이다. 배는 교회를 상징한다. 이단자들은 교회의 사랑의 식탁 교제에 기탄 없이 참여하지만 실상 교회를 파괴시키는 무서운 요소이다. 둘째로, 이단자들은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이다. 목자는 양을 기르는 자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지만(요 10:11), 이단자들은 양을 기르지 않고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이다. 셋째로, 이단자들은 바람에 밀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다. 구름은 비를 기대하게 하는 것이지만, 물 없는 구름은 그 기대를 무너뜨린다. 비는 생명의 은혜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단자들에게는 그런 비가 없다. 그들은 세상 풍조에 밀려다니는 물 없는 구름에 불과하다. 넷째로, 이단자들은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다. 열매는 의와 선과 영혼의 구원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단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므로 그들에게는 그런 열매가 없다.

[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다섯째로, 이단자들은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다. 그들은 거짓과 미움과 탐욕, 음란과 강포의 말과 행위로써 인격의 수치를 드러낸다. 여섯째로, 이단자들은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다.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은 지옥을 가리킨다. 이단자들이 마지막으로 갈 곳은 지옥밖에 없다. 주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마 23:33).

[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한 말씀이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이단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사람들'이라는 말은 원문에 '이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다. '수만의 거룩한 자'는 아마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재림의 주께서 죽은 성도들의 영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며 그들이 다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다.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주의 재림의 목적은 악인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본절은 '경건치 않은'이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한다. 불경건은 실제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인데, 그것은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다. 불경건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항하는 강퍅한 말들을 하게 한다. 이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재림의 주께서는 오셔서 이런 불경건한 자들을 다 심판하고 정죄하실 것이다.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利)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유다는 이단자들의 죄악상을 다시 증거한다. 그들의 죄는 앞에서 언급한 그러한 불경건이며 하나님을 거스려 하는 모든 강퍅한 말들이다. 그래서 유다는 그들을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만을 토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또 그들은 그 정욕대로 행하는 음란한 자들이다. 또 그들은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는 교만한 자들이다. 또 그들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 아첨하는 말을 하는 삯꾼들이다. 탐심은 하나님 대신에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이러한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익을 위해 아첨의 말을 하게 만든다.

[17-19]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유다는 사도의 말을 인용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자신을 사도들과 구별하는 듯하다. 유다가 인용한 내용은 사도 베드로가 그의 두번째 서신에서 한 말씀이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벧후 3:3). 유다서는 베드로후서가 사도의 글이라는 것을 증거한 가장 오래된 증거이다. '당을 짓는 것'은 교회를 분리하고 분열하는 행위이다. 이단은 교회의 일치와 화평을 깨뜨리는 자이다. '육에 속한 자'라는 원어(프쉬키코스)말은 '육욕적인 자, 호색적인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단의 음란한 특성을 증거한다. 그들 속에는 성령께서 계시지 않다.


결론적으로, 11절부터 19절까지는 우리에게 이단자들의 죄악상과 그들에 대한 평가와 그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 증거한다. 이단자들의 죄악은 서너 가지이다. 첫째로, 그들은 교만하다. 이 교만은 미움과 분열로 나타난다. 그들은 가인과 같이 형제를 미워하고 고라와 같이 하나님의 세우신 지도자를 대항하고 대적한다. 그들은 원망하고 불만을 토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롱하는 자들이며 당을 지어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이다. 둘째로, 그들은 탐욕적이다. 그들은 불의의 삯을 위해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갔고 물질적 이익을 위해 아첨하는 말을 한다. 셋째로, 그들은 정욕적이다. 그들은 육욕적이며 호색적이며 음란하다.

또 이단자들은 여러 가지 표현으로 평가된다. 이단자들은 교회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물 없는 구름이요,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만 드러내는 자요, 영원한 흑암에 던지울 별들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이단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영원한 흑암의 처소인 지옥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를 받을 것이다.

본문이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그것은 우리가 이단자들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이단자들처럼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단자들처럼 탐욕적이지 말고 자족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단자들처럼 음란하지 말고 성결한 삶을 지켜야 한다.


20-23절, 권면

본문에서 유다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할 일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일에 대해 몇 가지 권면을 한다.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유다는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할 일에 대해 권면한다. 첫째로, 그는 우리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립하라고 권면한다. 유다는 성도의 믿음을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참된 믿음의 성격을 나타낸다. 성도의 믿음은 세상적인 일이 아니다. 성도의 믿음은 세상적 가치를 구하는 일이거나 세상적 욕심이나 목적을 가지는 일이 아니다. 성도의 믿음은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다. 그것은 세상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은 죄를 버리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거룩한 일이다. 그것은 지옥에 들어갈 자들이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일이다. 믿음은 지극히 거룩한 덕이다.

이 믿음은 성도에게 필수적인 덕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 만일 성도인 우리가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없는 자일 것이다. 성도의 인격은 믿음 위에 건립된 인격이다. 우리는 아름답고 튼튼한 집을 짓듯이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립해야 한다.

둘째로, 유다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기도는 믿음의 증거이다. 믿는 자는 기도하게 된다. 믿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다. 우리는 기도하되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성령으로'라는 말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라는 뜻이다.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은 보혜사 곧 우리의 위로자이시다. 그는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의 기도 생활도 도우신다. 그러므로 기도가 잘 안될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힘입어 기도해야 한다.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셋째로, 유다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고 권면한다. 자기를 지키라는 말은 이단 사상과 부도덕한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라는 뜻이다. 유다는 이단들에 대해 많이 말했다. 그는 본서신의 초두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우리는 이단 사상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이 이단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도덕적인 죄들도 마찬가지다. 성도는 모든 종류의 도덕적 불결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지키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힙입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확실하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사탄과 악한 영들의 활동이 아무리 크고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악과 싸워야 하며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로마서 8:31, 3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넷째로, 유다는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권면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구원을 받음을 나타낸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도, 진행도, 완성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되는 것밖에 없다. 우리의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도 주의 긍휼로 이루어졌고, 우리의 성화(聖化)도 주의 긍휼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며, 우리의 영광의 구원의 완성도 주의 긍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면서 영생을 향해 달려가야 하고, 끝까지 그러해야 한다.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유다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일들에 대해서도 몇 가지 권면한다. 첫째로, 그는 어떤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권면한다. 전통사본에는 '의심하는'이라는 말(디아크리노메노이)이 '구별하면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구별해야 함을 나타낸다. 우리는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를 구별해야 하고, 확고히 믿는 자들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이 연약하여 의심하거나 범죄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둘째로, 유다는 다른 자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보다 잘못이 심한 경우를 가리키는 것 같다. 전통사본에는 '두려움으로 구원하라'고 되어 있고 또 본절의 후반부는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면서'라고 되어 있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자신을 더럽힌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24-25절, 송영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또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넘어지지 않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또 우리로 그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큰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진행과 완성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시작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보자."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전통사본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없고 또 '하나이신'이라는 말 다음에 '지혜로우신'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깨달은 모든 성도의 마땅한 일이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이다.


결론적으로, 20절부터 25절까지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위해 행해야 할 일 몇 가지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해야 할 일 몇 가지를 권면한다.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행해야 할 일에 대해서,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립해야 한다. 우리는 참된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힘써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힘입어서 교리적 이단 사상과 윤리적 부패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영생에 이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도, 진행도, 완성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밖에 없다.

그 다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해야 할 일에 대해서,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의심하는 자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부족과 연약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온전케 되기를 위해 권면하고 또 기다려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범죄한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듯이 구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더러운 옷이라도 싫어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을 교리적, 도덕적 오류로부터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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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김효성 목사)

 

내용 목차

 

1장: 신자의 삶은 빛의 삶

2장: 형제 사랑은 빛 안에 사는 증거

3장: 형제 사랑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4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5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요한일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이 점에 대하여 초대 교회의 전통은 일치한다. 저자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목격자로 소개한다(1:1). 특히, 본서신에는 말씀, 빛, 영생, 사랑, 새 계명 등 요한복음과 매우 비슷한 단어들이 많다. 요한일서의 저작 시기는 아마 주후 85년 내지 90년경 혹은 그 이후일 것이다. 초대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그의 생애의 후년에 에베소에 거주하며 사역하였다.

요한일서의 특징적 주제는 형제 사랑이다. 이와 더불어, 사도 요한은 우리가 미혹의 영을 분별할 것과 중생(重生)한 자가 의를 행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바울 서신들에서는 칭의(稱義)의 교리가 많이 나오고, 요한의 글들에서는 중생(重生)의 교리가 많이 나온다.


 

 


 

1장: 신자의 삶은 빛의 삶

1-4절, 사도 요한의 전하는 내용과 목적

[1,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사도 요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가 전파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떠한 분이신가? 요한은 그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표현한다. '있는'이라는 원어(엔, 미완료과거)는 '있었던'이라는 뜻이다. '태초'는 우주의 시작을 가리킨다. '태초부터 있었던 자'라는 말씀은 우주가 시작될 때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자라는 뜻으로 신적 존재를 가리킨다.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1:1-4)고 증거하였다. 원문에서, 여기에서도 '계시니라'는 말이 요한일서 본문의 '있는'이라는 말과 동일하다(엔, 미완료과거).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말씀'(로고스)이라고 불리우는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시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으로 증거되는 분이시다. 우주의 시작 때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던 그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때 존재하고 계셨을 수 없다.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은 하나님과 구별되시면서도 그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한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나 있다.

사도 요한은 2절에서 그를 '영원한 생명'이라고 표현하였고 또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되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라고 표현하였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분,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특히 죄로 인하여 죽은 모든 인생들에게 참 생명이 되시는 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는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요 1: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는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요 14:6), 또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누렸다고 말씀하셨다(요 17:5). 또 요한은 본서신 끝부분에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증거하였다(요일 5:20).

사도 요한이 전파한 내용은 확실하고 믿을 만하였는가? 이 점에 관해 요한은 자신이 이 신적인 인물에 대한 목격자이며 증인임을 고백한다. 그는 1절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였고, 2절에서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라고 하였고, 3절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이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 요한은 자신이 전파하는 분에 대하여 자기 눈으로 보았고 들었다고 반복하여 증거한 것이다. 이런 증인의 증거를 우리가 무시할 것인가? 이러한 목격자적 증인의 증거를 우리가 무시해도 되는가? 여기에 기독교 복음의 확실함이 있다. 기독교 복음은 증인들의 진실한 증언들 위에 근거하고 있다. 그 증언들은 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복음 진리의 확실성을 확증한다.

[3, 4]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하는 자들과 받는 자들이 서로 교제하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성도들의 사귐, 성도의 교제가 전도의 목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의 회이다. 우리는 이러한 교제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장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교제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확장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들의 진정한 교제는 이 세상에 가장 복된 일이다. 그것은 천국에서도 나눌 교제이다.

그런데 본문은 성도의 교제가 단순히 인간들의 교제가 아님을 증거한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이것이 구원이다. 인생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와 그를 알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 전도의 일차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표현하였다(고전 1: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참 교제를 나누어야 하겠다. 거기에는 항상 찬송과 감사와 기도와 권면의 말씀이 넘칠 것이다.

사도 요한은 덧붙여 그가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피차간에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기쁨'이라는 구절은 전통사본에는 '너희의 기쁨'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으로 교훈을 주고 받음으로써 피차간에 기쁨이 충만케 된다. 성도의 기쁨의 이유는 그가 받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 백성 됨의 구원 때문이다. 이것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신 뜻이다. 우리의 기쁨은 구원의 기쁨이며, 우리가 구원의 진리로 서로 권면하고 권면을 받을 때 우리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는 한 훌륭한 인간 예수를 추앙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며 따르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의 확실함을 깨닫자. 우리는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을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본 증인들의 증언들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눈으로 보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주목하고 손으로 만져본 자들의 진실하고 확실한 증언들 위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바는 사람의 상상력으로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진실한 증인들이 증거한 역사적 사실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성경에서 확인하고 확신하자.

셋째로, 우리는 성도의 교제의 본질을 알자.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의 회이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이다. 우리의 사랑의 교제는 먹고 마시고 노는 세상적, 육신적, 물질적 교제가 아니고 믿음과 소망 안에서의 교제이다. 거기에는 찬송이 있고 말씀의 권면이 있고 기도가 있다. 그리고 이 교제 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의 충만함이 있다.


5-10절, 빛 가운데 행하라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듣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소식(message, 앙겔리아)은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빛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덕의 완전한 영광을 나타낼 것이지만, 특히 지식과 도덕성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무지는 어두움이다. 또 죄악과 거짓은 어두움이다. 그러나 지식이 빛이요 의와 선과 진실이 빛이다. 하나님께는 지식과 의와 선과 진실이 충만하시다.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우리도 빛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빛 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며 교통하는 자들은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서는 안되고 빛 가운데 교제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빛의 교제이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있을 수 없다. 빛이 오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이 없는 곳에만 어두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 머물러 살고 있으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를 믿고 행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시편 5:4에는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말씀했다. '어두움 가운데 행하면'이라는 원어(엔 토 스코테이 페리파토멘)는 '어두움 가운데 계속, 상습적으로, 머물러 행하면'이라는 뜻이다.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나 반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빛 가운데 행하면, 즉 우리가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자 애쓰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함과 교통함을 누릴 것이다. 시편 15편에는 이렇게 말씀하였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시 15:1, 2).

뿐만 아니라, 이렇게 우리에게 진실함이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원어(카다리제이)는 '깨끗하게 하시느니라'는 현재형이다. 주께서는 이미 믿는 이들의 죄를 깨끗하게 하셨고 또 빛의 교제에 거리낌이 되는 그들의 연약과 부족을 날마다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셨다(요 15:2).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며 구원받은 성도 속에도 죄악성이 있기 때문에, 만일 누가 자신이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에 들어온 것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고 버리기를 결심함으로써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죄성에 민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죄에 떨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신자는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함으로써 빛의 삶을 계속해야 한다. 죄의 인정과 고백은 진실함에서만 가능하며 우리는 죄의 고백과 죄 씻음을 통해 의롭고 거룩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그 앞에 고백하는 것을 원하신다. 만일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면, 그는 그의 약속에 대해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죄사함에 대해 이렇게 약속하셨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죄한 적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이미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들었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겠는가? 그는 하나님의 진리와 상관 없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또 현재에도 우리 속에 부족하고 연약한 죄악성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히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은 우리에게 몇 가지의 진리와 교훈을 준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빛이시라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다. 빛은 특히 지식과 도덕성 즉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가리킨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 된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빛의 교제이다. 특히 그것은 의와 선과 진실이 있는 교제, 의와 선과 진실을 행하는 가운데서의 교제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일진대, 우리는 항상 진리의 지식을 사모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힘써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삶을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이 아닐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항상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때 우리의 모든 죄는 다 씻음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곧 빛의 교제는 모든 죄를 씻음 받는 일이 필요한 교제이며, 빛의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솔직히 인정하는 자이다. 그러나 자신이 범죄한 적이 없다든지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자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 속에 없는 자이다.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이 자녀들이 되자.

 

 

 

 

2장: 형제 사랑은 빛 안에 사는 증거

1-6절,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사도 요한은 본서신에서 그가 편지를 쓰는 교인들을 '자녀들아'(2:12, 28; 3:7; 4:4; 5:21)라고 자주 불렀고 본절에서도 '나의 자녀들아'라고 친근히 불렀다. 그의 말투를 보면 그는 나이가 많이 든 듯하며 교인들에 대한 사랑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본서신에서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도 여러 번 불렀다(2:7; 3:2; 4:1, 7, 11).

본절에서 사도 요한은 본서신을 쓰는 목적을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다. 그는 1:4에서는 "우리가 이것[서신]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하였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신 주요한 목적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 함이다. 죄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주된 관심이다. 죄 짓지 않는 삶, 죄 없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었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때때로 넘어지고 범죄하는 자이므로, 사도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우리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변호자가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 앞에서'라는 원어(프로스 톤 파테라)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라는 뜻이며, '대언자'라는 원어(파라클레토스)는 '변호자'라는 뜻이다. 범죄하는 문제는 성도의 현실적 문제요 그 대책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 현재적 효험이다. 구주 예수께서는 죄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현재적 변호자가 되신다.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해 계속 변호하시는 것은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한 '유화 제물'이셨다. '화목 제물'이라는 원어(힐라스모스)는 '유화(宥和) 제물' (propitia -tion), 즉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제거시키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유화'라는 것이 성경적 속죄 개념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만 위할 뿐 아니고 온 세상의 죄를 위하여 유화 제물이 되셨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 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사도 요한은 본서신의 앞부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로서 빛 가운데 행하여야 할 것과 그 첫번째 증거로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었다(1:5-10). 이제 그는 주의 계명들을 행하는 일에 대해 강조한다. 그것도 빛 가운데 행하는 일이다. 본절은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면 주를 아는 자임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의 계명들은 곧 하나님의 계명들이다. 그것들은 구약 성경이며 그 요약은 십계명이고 그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주를 아는 자요, 주를 안다고 말하면서 주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자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이냐, 모르는 자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같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 곧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가 하나님을 아는 자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이다.

[5, 6]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속에 온전케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계명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명기 6:4, 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과거에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육신적 쾌락을 사랑했던 우리들은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지킬 때 성취된다. 주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하셨다(요 14:21, 23).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가 주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주 안에 있음이 증거된다고 말한다.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과의 영적 연합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의 생각과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며 주의 특권을 함께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주께서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주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버림을 받고 불태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장). 우리가 정말 주 안에 있다면 우리는 주의 행하시는 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는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무엇보다 우리는 죄 짓지 않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그것이 사도가 서신을 쓴 목적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무엇보다 우리가 죄 안짓는 생활을 하는 것이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유화 제물이시며 그것에 근거하여 그는 현재 우리의 변호자가 되신다.

셋째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가 될 때 우리는 주를 아는 자요 주를 사랑하는 자요 주 안에 거하는 자임이 증거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요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일 것이며 우리는 주 안에 거하는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일진대, 우리는 죄를 멀리 하고 오직 주의 계명들을 힘써 지키는 자들이 되자.


7-11절, 형제 사랑과 빛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형제들아'라고 되어 있다. 3절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말하였었다. 그는 이제 본절에서 그가 말한 계명은 어떤 새 계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이 처음부터 가졌던 옛 계명, 그들이 처음부터 들었던 말씀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십계명을 의미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혹은 본절의 옛 계명이라는 말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가리켰을지도 모른다(요일 3:22, 23; 요이 5, 6).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사도 요한은 그들에게 새 계명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남겨두신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 계명은 주님 자신에게와 우리에게 참된 계명이다. 요한복음 13:1에 보면, 주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주께서는 친히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에서 쓰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였다(엡 5:2, 25).

또 이 새 계명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실천하고 있었던 터이었다. 사도행전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물질적 유무상통으로 드러난 서로 사랑함은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의 표시이었다. 우리는 과거에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때에 무지와 죄악이 우리를 지배하였었다. 그러나 참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 왔다.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가 우리에게 찾아 왔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다.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렇게 구원받은 증거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새 계명은 진실한 성도들에게 참된 것이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 형제를 미워한다'는 말은 형제를 계속 미워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성도는 거짓된 구원과 헛된 확신을 조심해야 한다. 비록 사람이 자신이 빛 가운데 있다, 하나님을 안다, 구원을 받았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이다. 그가 받았다는 구원은 거짓된 구원이요 그의 확신은 헛된 확신이다. 그는 구원받은 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 고백과 구원의 확신은 그의 실제적인 삶, 특히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통해 확증되어야 한다.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형제 사랑은 빛의 증거요 구원의 증거이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들어왔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가진 자이다. 그는 자기 속에 걸림돌 혹은 걸려 넘어질 원인이 없다. '거리낌'이라는 원어(스칸달론)는 '걸림돌, 걸려 넘어질 원인 혹은 이유'라는 뜻이다. 빛은 우리의 길을 밝게 비춘다.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자신의 행위의 잘잘못을 밝히 본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은 잘못된 것을 시인하고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한 바른 삶만을 추구한다.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반면에, 형제 미움은 어두움의 증거요 구원받지 못한 증거이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두운 가운데 있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자이다. 사람이 어두운 길을 갈 때 그 길에 위험한 물건이 놓여 있는지 어떤지 잘 모르는 것과 같이,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갈 곳'이라는 원어(푸 휘파게이)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라는 뜻이다. 그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이다. 어두움 가운데, 즉 무지와 죄악들 가운데 사는 자들이 갈 곳은 오직 한곳, 곧 지옥뿐이다. 만일 그가 그의 갈 곳이 지옥인 것을 알았더라면, 그는 그의 길을 돌이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1절까지는 하나님의 계명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임을 증거한 후에, 형제 사랑이 빛과 어두움을 구별하는 잣대가 됨을 증거하였다. 형제 사랑은 다른 말로 참 구원과 거짓 구원, 참된 구원의 확신과 헛된 구원의 확신을 구별하는 표준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일진대, 우리가 참으로 빛의 자녀들일진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는 모든 죄에서 떠나야 한다.


12-17절,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2-14]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을 교인들을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로 구별하여 언급한다. 그것은 그들의 연령을 따라 구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신앙적 상태를 따라 구별한 것 같다. 교인들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믿음의 기본적 사실을 나타낸다. 이것들은 다 성도들의 과거의 체험들이며 그 증거들이다.

첫째로, 자녀들 혹은 아이들은 믿은 지 얼마 안되는 교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요한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었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본적 상태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보혈(寶血)로 죄씻음을 받았다. 사람은 세례 의식을 통해서나 천주교회의 신부(神父)에게 하는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해서나 마리아를 통해서 죄씻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씻음을 받는다. 성도는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이다.

둘째로, 아비들은 믿은 지 오래된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아마 연령적으로도 나이가 든 자들이었을지 모른다. 요한은 그들을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자들이라고 묘사한다. 참된 신앙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신앙 생활은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이다. 참되시고 유일하신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요 17:3). 신앙 생활은 그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며 그와 동행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도의 신앙 여정은 바로 그 하나님을 점점 더 아는 과정과도 같다.

셋째로, 청년들은 믿음이 강하여 주를 위해 일할 만한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그들은 악한 자를 이기었다. 악한 자는 사탄과 악령들과 그의 종들이다. 청년들이 그들을 이긴 방법은 그들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셨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 강해지라고 교훈한다. 고린도전서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에베소서 6:10, 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또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무기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다(엡 6: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사도 요한은 앞에서 언급한 믿음의 기본에 근거하여 성도들에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 우리는 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라는 뜻인 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 가운데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 38; 신 6:4, 5). 또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을 전심 전력으로 사랑하려면 우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집이나 돈이나 직장은 우리가 감사하게 사용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애착을 두어서는 안된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교훈 안에서 그들을 사랑할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우리 속에 없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실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하는 것들이며, 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육신의 정욕 즉 쾌락과 음란으로 더러워져 있고, 안목의 정욕 즉 눈으로 보는 육신적 아름다움의 추구로 더러워져 있다. 그러나 실상 육신적 아름다움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못된다. 그래서 잠언에는 말씀하기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잠 31:30). 또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생의 자랑 즉 명예나 권세 등 이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추구하는 것으로 더러워져 있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헛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사랑하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천국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헛되고 죄악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추구하며 살 수 없다.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참으로 이 세상의 것들은 지나가고 만다. 또 세상과 함께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도 다 지나가고 만다. 그래서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헛됨을 반복적으로 증거하기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하였다(전 1:2). 전도서에는 헛되다는 말(헤벨)이 38번이나 사용되었다. 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감 가운데 외치기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하였다(사 40:6-8). 본절에서 요한도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모든 성경 말씀을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만 새 하늘과 새 땅, 곧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7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정리한다. 첫째로, 우리는 신앙의 기본을 갖추었는지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죄씻음을 받았는가? 우리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는가? 둘째로,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도 영적인 청년들이 요구된다. 주 안에서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자들, 그래서 악한 자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 요구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헛되고 죄악됨을 깨닫고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다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이며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18-23절,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남

[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사도 요한은 이 편지를 쓰던 당시를 마지막 때 곧 말세(末世)라고 보았다. 그 까닭은 예언된 대로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대적하는 이단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종말의 징조들로서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전쟁들, 지진들, 기근들, 악한 질병들, 바른 신앙의 핍박 등을 예언하셨다. 그 중의 하나가 적그리스도들의 출현에 대한 예언이었다. 마태복음 24: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요한은 주의 말씀이 이미 그 당시에 실현되고 있음을 보고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말의 징조들은 이미 사도 시대 말기에 나타났다. 그래서 성도들은 종말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종말의 징조들은 지난 2천년 역사 중에 17세기 종교개혁시대에도 어느 정도 있었다. 그 가장 큰 징조는 로마 천주교회의 교황이 바른 진리를 대적하고 참된 신자들을 핍박한 일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황을 성경이 예언한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20세기를 지나서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이 더욱 많이 이루어짐을 보고 느낀다. 우리는 특히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많은 개신교회들의 배교(背敎)와 타락을, 그리고 다수의 사이비 기독교 종파들의 나타남을 보았고, 또 1, 2차 세계대전을 지나 이제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의식은 지난 2천년 동안 교회 속에 항상 있어 왔지만, 오늘 이 시대는 참으로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때인 것 같다. 우리는 종말의 징조들을 확인하면서 종말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당황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 아니고 주께서 예언하신 바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주의 재림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단자들은 처음에 교회에 속해 있었으나 어느날 교회를 떠나갔다. 교회 역사상 이단의 초기 형태는 분파적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전체적으로 부패하여 배교적이게 된 때가 있었다. 17세기 종교개혁 때가 그러하였다. 성경적 진리를 깨닫고 믿었던 참된 성도들은 소수파가 되어 교회에서 정죄되고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에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었다. 21세기의 상황은 더욱 그렇게 되고 있다. 세계 교회는 전체적으로 부패하여져 있다. 경건한 선조들이 가졌던 성경적인 신앙, 바른 신앙, 보수 신앙, 옛신앙은 오늘날 소수파가 되어 있다. 오늘날 교회들은 다양성을 좋아하며 넓은 길을 가고 있다.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을 책망하는 목소리는 극단적 입장이라고 무시와 배척을 당한다. 포용주의의 시대의 유일한 악은 비타협적 보수 신앙의 입장뿐이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신앙은 항상 비타협적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과 달리, 초기의 이단들은 분파적이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나간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처음부터 참된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만일 그들이 참으로 교회에 속한 자들이었다면 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참된 성도들과 함께 거하였을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한 몸이지만(고전 12:13, 27), 외형적 교회 속에는 참된 신자들 뿐만 아니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도 섞여 있다.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섞여 있었던 것과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으며 주의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은 자들이었지만, 가룟 유다는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요(요 6:64), 돈궤에서 돈을 훔치는 도적이요(요 12:6), 예수님의 말씀으로 죄씻음을 받지 못한 자이었다(요 13:10).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한 몸이지만, 이단은 그렇지 않다. 실상 그들은 처음부터 소속이 달랐다. 그들은 믿지 않은 자들이요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요 천국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20, 21]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구원받은 성도는 거룩하신 자 곧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곧 성령을 받았다. 성령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영이시므로 그는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신다. 요한은 성도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편지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알기 때문에 한다고 말한다. 그가 또 이단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든 거짓이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며 그가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깨닫고 믿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단에 대해 논하며 이단을 배격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2, 23]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우리가 적그리스도들 혹은 이단들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 성경은 그것을 두 가지 면에서 말한다. 첫째는 교리적인 면이고, 둘째는 윤리적인 면이다. 베드로후서 2:1-3,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교리적으로, 이단은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들을 부정한다. 윤리적으로, 이단은 음란하고 탐욕적이다.

특히 그들은 교리적으로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본문은 그들을 거짓말 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과연 이단의 정체는 거짓말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거짓말 중에서도 큰 거짓말이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요한은 말하기를,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못하다고 하였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적그리스도적 이단은 로마 천주교회이다. 천주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 믿고 따르지 않고, 교황의 무오(無誤)한 권위를 믿고 마리아를 거의 신적 존재로 추앙하고 찬미하고 그에게 기도한다. 이 점에 있어서 천주교회는 하나님의 참 뜻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완전함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믿지 않고 공적으로 그것을 부정하고 정죄한다. 또 그들은 신부들이 집행하는 미사가 그리스도께서 계속 죽으시는 의식이라고 말하고 또 예수를 믿는 자들도 '작은 죄'가 있으면 연옥(煉獄)에 들어가 불의 시련을 통과한 후에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 점에 있어서 천주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이루신 속죄 사역의 완전성을 부인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천주교회보다도 더 심각한 적그리스도적 이단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역사적 기독교의 근본 교리들을 부인하는 사상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적 행위들과 특히 그의 진노와 심판을 부정한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그의 기적들과 대속(代贖)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부정한다. 그것은 실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적 사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18절부터 23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 종말의 징조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왔다는 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많은 적그리스도들과 이단들이 나타났다. 우리는 20세기에 인류가 경험했던 그 참혹했던 1, 2차 세계 대전에 대해서 알고 있고, 현재 3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 앞에 서 있다. 우리가 사는 현 시대는 참으로 마지막 때의 마지막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종말 의식을 가지자.

둘째로, 우리는 말세의 한 징조로서 나타나는 이단들의 소속을 바로 알자. 많은 이단들이 한 때 교회 안에 있었다가 분리되어 나간 자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계 교회가 전체적으로 배교적이게 되었으므로 이단들이 건전한 교회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천주교회가 기독교의 한 중요한 파인 것처럼 잘못 인식하고 있다. 또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대 교단들의 목사 양성원인 신학교들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단들이 교회 밖에 나가 있든지 교회 안에 있든지 간에 그들은 참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단의 소속을 바로 알자.

셋째로, 우리는 이단들의 정체를 알고 그들을 분별해야 한다. 이단들은 교리적으로 거짓말 하는 자들이며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자들이다. 우리는 그 두 면을 생각하며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교리적 지식을 가지고 이단들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천주교회의 사상이 적그리스도적이며 이단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또 특히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기독교 2천년 역사상 가장 불신앙적이고 파괴적인 적그리스도적 이단 사상인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우리는 윤리적으로도 이단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을 항상 구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이 부패해진다면 우리는 이단들을 분별할 수 없고 배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단들의 정체를 알고 그들을 분별하고 배격해야 한다.


24-29절, 주 안에 거하라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처음부터 들은 것'은 교회가 사도들을 통해 들은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내용이요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일이 되고 저를 믿음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고(요 3:16)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 1:12)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엡 2:8). 이것은 교회가 처음부터 들은 바이었다.

사도 요한은 이 내용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말했다.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는 것은 그것을 믿고 보수(保守)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전통적 신앙,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깨닫고 굳게 믿고 붙들어야 한다. 그 신앙이 옛 신앙이며 보수 신앙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할' 것이라고 말했다. 즉 하나님과의 영적 신비적 연합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합으로 대속의 은택들을 누리게 되며,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 거하게 된다. 이러한 연합은 성도의 정상적 생활이다. 그런데 성도가 이러한 정상적 생활을 하려면, 사도적 복음 진리의 내용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보수해야 한다.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에 관한 것이다. 죄는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로 인한 죄씻음은 영생을 가져올 것이다. 이 영생은 현재 충만히 누리고 있지 못하지만, 이미 받았고 장차 충만히 경험하며 누리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11:25,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6]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사도는 성도를 미혹케 하는 적그리스도들의 나타남으로 인해 그들에 관해 말함으로써 성도를 조심시키려 하고 있다. 적그리스도들, 즉 이단자들은 속이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죄씻음과 영생의 복음을 부정하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부정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불신앙은 결국 사람을 죄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게 하기 때문에 극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은 성령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고린도후서 1:21, 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께서 완전하시고 참되신 교사이시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간 교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인간 교사들을 주셨다. 고린도전서 12: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에베소서 4:11, 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교사이신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을 배우고 깨닫고 확신할 수 있다. 또 그의 진리는 참되고 거짓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한다.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는 교회가 처음부터 배운 내용과 일치한다. 성령님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라는 말씀은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동일하다. 성도들은 처음부터 사도들을 통해 듣고 배운 복음 진리, 곧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그 동일한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지켜야 하며, 그것이 주 안에 거하는 표시이다.

[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우리가 주 안에 거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것은 주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하신 말씀과 동일하다. 요한복음 15:1-7,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거기에서나 여기에서나, '주 안에 거한다'는 말은 믿음과 경건과 순종의 삶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이렇게 주 안에 거하게 되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 담대함을 얻고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림 소망은 우리의 최대의 소망이다. 그때 우리는 영광의 부활과 천국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거기에 있다. 성도들의 성실한 신앙 생활의 목표는 바로 그날 주 앞에 담대히 서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그러나 그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른 믿음과 순종을 가지지 못했던 자들이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사도 요한은 첨가하여 우리가 주의 의로우심을 안다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도 알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중생(重生)의 증거가 있다. 여기에 신앙과 행위의 일치된 증거가 있다. 중생한 자는 바른 신앙, 역사적 신앙, 옛신앙을 가질 뿐만 아니라,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삶을 산다. 다시 말해, 중생의 증거는 바른 믿음과 의로운 삶이다.


결론적으로, 24절부터 29절까지에서 우리는 두어 가지 교훈을 정리한다. 첫째로, 우리는 교회가 사도들에게서 처음부터 들은 바, 즉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파악하고 보수해야 한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생의 약속이 있다. 거짓 교사들과 이단들이 왜곡시키려는 것이 바로 그 신앙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바로 그 신앙이다. 우리는 그 내용을 믿고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은 실상 우리가 중생했을 때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중생의 증거는 바른 믿음과 의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바른 말씀을 붙들고 믿고 그것을 순종함으로써 주 안에 거함을 확실히 증거해야 한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할 때만 우리는 주의 재림의 날에 담대함을 얻을 수 있다. 참된 믿음과 순종이 없는 자는 그날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들은 다 주의 재림을 영광 가운데 맞이하게 될 것이다.

 

 


 

3장: 형제 사랑은 생명에 들어간 증거

1-6절, 죄를 짓지 말라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전에 죄인이요 사망 아래 있던 사람이었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하심으로써 구원을 받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이것은 큰 복이며 큰 특권이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의 이 복과 이 특권을 알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얻은 의도, 영생도, 하나님의 자녀 됨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았더라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복, 곧 성도들이 받아 누리고 있는 구원의 복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하나님의 자녀들의 장래의 영광의 모습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나타내심이 될 때 즉 그가 다시 오실 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그때 그와 같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영광의 모습을 보듯이, 우리도 그와 같을 것이다. 빌립보서 3:20, 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의 재림과 그때 이루어질 영광스런 몸의 구속(救贖)과 변화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 로마서 8:23-25,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사도 요한은 성도가 이런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고 말한다. 직설법이 더 무게가 있다. 그것은 자신을 깨끗게 하지 않는 자는 이런 소망이 없는 자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들이라면 죄를 짓지 말고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천국을 소망하는 자는 천국 백성답게 산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 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의인답게 산다. 영생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는 영생할 자답게 죄와 상관 없이 산다.

[4, 5]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더욱이, 죄라고 하는 것은 곧 불법이다. 불법(不法)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반대하고 거부하고 어기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육신(成肉身)하신 목적은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함이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셨다.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이루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범죄치 말아야 한다.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범죄치 않아야 한다. 본절에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라는 원어(우크 하마르타네이)는 현재 시제로서 '범죄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범죄하는 자마다'라는 원어(파스 호 하마르타논)도 현재 시제로서 '범죄하고 있는 자마다'라는 뜻이다. 구원받은 자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만일 누가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일 것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법적이고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적이고 체험적이다. 구원받은 자는 실제로 심령과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에서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본문은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장차 영광스런 주의 형상을 본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재림과 그때 일어날 영광스런 몸의 변화를 소망할진대 우리는 지금 모든 불결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주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이 바로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는 우리의 더러운 죄 때문에 십자가의 참혹한 고난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깨끗게 하는 대속(代贖)의 죽음이 되셨다. 그렇게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주를 믿고 주 안에 거하는 자가 되었다고 하면서 어떻게 죄 가운데 살 수가 있겠는가?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마땅히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의와 거룩을 행해야 한다.


7-12절,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7, 8]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는 누구에게든지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팎에는 성도를 속이고 잘못 인도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잘못된 교훈을 하고 잘못된 행동의 본을 보인다. 사도 요한의 논조를 보면, 그들은 죄를 짓는 자들이며 죄 짓는 일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허용하는 자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한은 의를 행하는 자는 의롭지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한다.

죄를 짓는 자가 마귀에게 속한다는 원어의 뜻은 죄를 짓는 자들의 근원과 소속을 나타낸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한 자요 인간을 범죄케 한 자이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인간을 속여 범죄케 함으로써 죽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살인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성육신(成肉身)을 가리킨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가 육신으로 오셨다. 그가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께로서 났다는 말씀은 중생(重生) 곧 거듭남을 가리킨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며(요 3:3, 5) 그 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곧 그를 믿는 것이다(요 1:12, 13).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곧 중생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원어(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는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가진다. 즉 '계속적으로 죄를 행하고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생한 자도 간혹 아니 자주 실수하고 범죄한다. 그러나 그는 계속적으로 죄를 행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죄 가운데 거하지는 않는다.

사도 요한이 본서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성도가 죄 안 짓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한 자라도 간혹 혹은 자주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탄식어린 고백을 하기를,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하였다(롬 7:21-25). 그러나 중생한 자는 계속 죄를 행하는 자가 될 수는 없다.

사도 요한은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이유를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라고 했다. '하나님의 씨'는 새 생명의 원리를 가리킨다. 중생할 때 심기우는 이 생명의 원리는 범죄할 수 없는 원리요, 의만을 지향하는 원리이다. 중생한 영혼 속에는 이 생명의 원리가 심기웠다. 그럼으로써 중생한 영혼은 그 지배적 성향에 거룩한 변화를 얻었다. 전에는 무지(無知)와 부도덕이 그것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과 도덕성이 그것을 지배한다. 그러므로 중생한 자도 간혹 혹은 자주 넘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법적으로 완전히 거룩하게 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 또한 실제적으로도 즉시 즉시 일어나 죄를 회개하고 의를 행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다.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러므로'라는 원어는 '이 점에서'라는 뜻이다. '이 점'이란 성도가 죄를 짓느냐, 안짓느냐 하는 점을 가리킨다. 계속적으로 죄 가운데 사느냐 아니면 즉시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려고 결심하고 노력하느냐 하는 이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드러난다. 사도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누구든지 의를 행치 않거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한다. 사람의 행위는 그의 근원과 소속을 증거한다.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에, 성도는 모름지기 죄 안짓는 생활을 힘써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계속 죄를 짓고 산다면 우리가 어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울 수 있겠는가?

[11, 12]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한은 옛날 가인의 예를 들면서 우리가 가인같이 형제를 미워하고 죽이는 악을 행치 말고 서로 사랑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잘 증거하는 표가 된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2절까지는 앞부분에 이어서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할 이유를 증거한다. 앞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자녀이며 장차 영광스런 모습을 입을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죄의 대속 혹은 죄의 없이함을 받았기 때문에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 본문에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더해진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났고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은 다른 말로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계속 범죄치 않는다. 그는 혹 넘어질 수 있으나 곧 일어나 회개하고 죄를 버린다. 그는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마음과 입술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행위로 증거되는 차이점이다.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한마디로 우리가 범죄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일진대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하고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3-18절, 사랑은 생명에 들어온 표임

[13-15]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사도 요한은 세상이 신자들을 미워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미움은 사망의 표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죄와 사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들을 미워하고 또 서로 미워한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현상이다. 미움은 사망의 표요 세상의 표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서로 미워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영생의 구원을 얻은 자들이 아니고 사망에 거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사랑은 생명의 표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고 증거한다. 형제 사랑은 영생의 구원을 얻은 표이다. 그러나 형제 사랑이 없는 자는 아직도 사망에 거하는 자일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그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한다. 물론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살인이다. 예를 들어, 비행기 자살 폭탄 테러는 극악한 살인 행위이다. 혁명이나 폭력 시위가 정당화 될 수 없듯이, 테러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사회의 개량과 개선은 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비폭력적 시위는 정당한 의사 표현 방식이며 사회 개선을 위해 유익하지만, 무질서한 폭력적 방법은 사회의 개량보다는 악화를 가져오기 쉽다. 또 침략 전쟁도 역시 극악한 살인 행위이며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물론 테러와 침략에 대한 응징과 보복은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쟁보다 더 큰 현대적 죄악은 태아 살해의 행위 즉 낙태 혹은 인공유산이다. 사람의 생명은 임신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분명하다. 시작된 생명을 살해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임신된 생명은 반드시 출산되어야 옳다. 오늘날 한국이나 세계에서 낙태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현대적 죄악일 것이다. 이런 행위들은 다 살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뿐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똑같이 살인에 해당한다. 살인한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인의 죄를 다 회개하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 사랑의 방법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우선 주님의 모범을 따라 형제를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즉 참된 사랑은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요한복음 15:13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확증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가장 큰 사랑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17, 18]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도 요한은 또한 세상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돕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우리가 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참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목숨까지 형제를 위해 버리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재물로 궁핍한 형제를 구제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목숨은 물질보다 더 귀중하다. 그러므로 희생적으로 사랑하기로 결심한 우리라면 우리는 우리의 물질로 구제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결론적으로, 13절부터 18절까지는 우리에게 형제들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교훈한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요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우리는 이로써 우리 자신이 사망에서 옳겨 생명에 들어간 줄을 알 수 있다. 사랑의 구체적 방법은, 첫째로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요, 둘째로 세상 재물을 가지고 궁핍한 형제를 돕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19-24절, 순종과 담대함

본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순종할 때 첫째 우리 자신이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고, 둘째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고, 셋째 기도의 응답을 받으며, 넷째 우리가 주님과 영적으로 연합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고 증거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이로써'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대로 진실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진실하게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가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게 된다고 증거한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도 진리에 대하여 자주 말했다. 1:6에서는 진리를 행함에 대하여, 1:8과 2:4에서는 진리가 우리 속에 있음에 대하여, 2:21에서는 진리를 앎에 대하여 말했다. 그가 말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내용인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가리키는 줄 안다. 그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진리에 속한 자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진실한 형제 사랑은 진리에 속한 증거이다. 미움은 세상에 속한 자, 사망 아래 있는 자, 비진리에 속한 자, 사탄에게 속한 자의 표이지만, 사랑은 교회에 속한 자, 생명 안에 있는 자, 진리에 속한 자, 하나님에게 속한 자의 표이다.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가 진실하게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할 것이라고 증거한다. '굳세게 한다'는 원어(페이도)는 '확신케 한다, 평안케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 자신의 구원에 관하여 확신케 하고 그 진리와 그 구원 안에서 평안함을 누리는 것을 가리키는 줄 안다. 사람은 죄를 지을 때 두려움을 가진다. 창세기 3:10에 보면, 첫 사람 아담은 범죄한 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에 숨었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이사야 57: 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행할 때 두려움 대신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20, 21]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원문에는 20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는 이유를 보인다. 즉 그 이유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으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을 수 없지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러나 우리는 범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담력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때 실제적으로, 더욱 담력을 얻는 것이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사도 요한은 순종의 또 하나의 결과로서 기도의 응답에 대해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 8). 예수께서는 기도의 응답에 대해 가르쳐 주시면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다(마 7:12). 이것은, 우리가 기도와 간구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원하고 기대한다면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더욱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범죄하면서 그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계명을 두 마디로 요약한다. 첫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이요, 둘째는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에게 선언하신 가장 긴급하고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엇보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또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의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모든 계명을 요약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요한복음 13:34, 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마지막으로 우리가 계명을 순종할 때,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안다고 증거한다.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주님과의 영적 연합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가서 2:16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연합과 일체를 신랑이 신부에게 속하고 신부가 신랑에게 속한다는 말로써 표현하였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이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영적 연합을 나타낸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 영적 연합을 포도나무의 비유로 강조하셨다.

요한복음 15:1-8,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주님과의 영적 일체는 곧 구원의 사실 혹은 중생(重生)의 사실을 가리킨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켰다. 그러나 죄인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을 때 혹은 그의 죽었던 영이 다시 살리심을 받을 때 즉 중생할 때, 그는 주님과 영적으로, 신비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된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는 우리 속에 오신 성령님이시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며(롬 8:9; 갈 4:6) 그가 우리 안에 계신 것은 곧 주께서 우리 속에 계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3:5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 되었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더욱 확인되고 확증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확인되고 확증된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순종의 행위는 우리가 받은 구원을 증거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9절부터 24절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의 핵심을 다시 한번 더 깨닫는다. 그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않고 의를 행하며 형제를 사랑함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정말 중생한 자라면,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순종할 때 우리는 자신이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고 기도의 응답을 얻고 또 우리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단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우리가 범죄치 않고 의를 행하며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순종의 삶을 통해 확신과 평안과 담대함을 얻고 풍성한 기도의 응답을 체험해야 한다.

 

 

 

 

4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1-6절, 영들을 시험하라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우리는 영들을 다 믿지 말아야 한다. 영은 정신이다. 그것은 사상이다. 그것은 신앙 사상, 교리 사상이다. 그것은 그의 말과 교훈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사람들의 사상과 가르침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해야 한다. '하나님께 속하였나'라는 원어는 '하나님께로서 나왔는가'라는 뜻이다. 즉 어떤 사상, 어떤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나온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교훈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많은 거짓 선지자들, 거짓 목사들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 사상과 아무 교훈이나 따라간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넘어가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들, 정신들, 사상들, 말과 교훈들을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2, 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을 분별하는 기준을 말해 주었다.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시인하며 고백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이란 요한복음 1:14에 증거된 그의 성육신(成肉身)을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의 '말씀'은 요한복음 1:1에 증거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을 가리킨다.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시고 때가 되어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람이신 독특한 인격자이시다. 요한은 본서신 5:20에서도 그의 신성(神性)을 증거하기를,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영, 혹은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하지 않는 영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영, 혹은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영이며,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영 곧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영이다.

성육신의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이며 단지 그 교리뿐 아니라 성경의 근본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며 거짓된 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의 근본 교리들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 적그리스도의 영 곧 거짓 목사들이 세상에 올 것이라고 예언하신 대로(마 24:5, 11, 24) 그들이 사도 요한의 당시에 벌써 세상에 있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그 당시를 이미 말세가 시작된 것으로 이해하고 말세 의식을 가졌다.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하였고 원어의 뜻대로 하나님께로서 나왔다. 즉 그들은 중생(重生)하였다. 또 그들은 저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되지 않았고 그들을 배격하고 이겼다. 왜냐하면 성도들 안에 계신 이, 즉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이, 즉 사탄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요 1:13),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목사들은 사탄의 사자들이다.

고린도후서 11:4, 13-15,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義)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갈라디아서 1:6-8,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오늘날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적그리스도의 영 즉 이단과 거짓된 사상들은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안식교, 통일교 등 수많은 사이비 종파들과 천주교회와 자유주의 등이며, 교회연합운동(에큐메니칼운동)과 신복음주의와 은사주의 등도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부패시키고 혼란시키는 거짓된 사상들이다.

[5, 6]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저 거짓 교사들은 세상에 속했고 세상에서 나온 고로 세상에 속한 말 혹은 세상에서 나온 말을 하며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는다.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교회에 다니기도 하며 종교 의식을 행할 수도 있으며 또 심지어 세례를 받을 수도 있고 교회의 직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말 곧 바른 교훈, 정통 교리, 역사적 기독교를 듣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하나님께서 심으시지 않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걸려 넘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5:12-14,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그러나 '우리' 곧 주의 사도들,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즉 중생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우리의 말 곧 바른 말, 정통 교리, 역사적 기독교 교리을 듣는다. 이로써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은 구별된다. 진리의 영은 주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바른 복음 진리의 말, 곧 전통적 정통 교리를 듣고 믿고 인정하고 고백하지만, 미혹의 영은 우리의 바른 말과 정통 교리를 듣지 않고 인정치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는지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정신들, 사상들, 말과 교훈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하나님께 속한 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고 분별해야 한다. 아무 정신, 아무 사상, 아무 교훈이나 따라가는 것은 사탄의 시험에 빠지는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가 영들을 분별하는 기준은 하나님이 주신 바른 복음 진리이다. 그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진리가 있다. 우리는 어떤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이해와 지식의 부족으로 잘못 알 수도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성경의 근본적 진리들과 교리들에 있어서는 바른 이해와 지식을 가져야 한다. 진리의 영은 중생한 자들, 곧 참 교회의 회원들, 양들, 알곡들의 영이며 그들은 바른 말, 곧 정통 교리와 역사적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미혹의 영은 중생치 못한 자들, 즉 적그리스도들, 거짓 선지자들, 거짓된 목사와 교사들, 형식적 교인들, 가라지들, 쭉정이들, 위선자들, 염소들의 영이며 그들은 바른 말, 곧 정통 교리와 역사적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셋째로, 우리는 진실히 예수 믿고 중생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바른 말씀, 정통 교리, 성경의 근본 교리들과 역사적 기독교를 다 믿고 하나님의 교훈대로 겸손하게, 성실하게 순종하며 나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7-11절, 서로 사랑함이 마땅함

[7, 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함을 계속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세속적, 육신적 사랑이 아니고 천적인 거룩한 사랑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 즉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까닭 없는 미움과 부정당한 싸움은 마귀에게 속한 성질이며 행위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러한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표, 즉 중생(重生)한 표요 하나님을 아는 표이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일에서 밝히 나타났다. 본절은 하나님께 독생자가 계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과, 그가 그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 독생자가 계시다(요 1:18; 3:16). '독생자'는 외아들을 가리킨다.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아들을 스스로 낳으셨다. 그 외아들은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이시다(요 1:1; 골 2:9).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는 시간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적이다. 그는 사람으로 탄생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 그는 요한복음에 증거된 대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요 17:5). 하나님께는 영원하신 외아들이 계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세상에 보내셨다는 말씀은 두 가지 뜻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으로 보내셨다는 의미 즉 성육신(成肉身)의 의미이며, 둘째는 십자가에 죽게 내어주셨다는 의미이다. 성육신은 신비 중의 신비요, 기적 중의 기적이다. 어떻게 영원하신 독생자께서 유한한 사람의 본질을 취하실 수 있으셨는지? 신적 본질을 가지신 그가 어떻게 인간의 본질을 취하셔서 그 둘이 한 인격 안에 신비롭게 결합되셨는지? 교회의 정통적 신조들이 표현하는 대로, 그의 신성과 그의 인성은 혼합됨이나 분리됨이 없이 한 인격 안에서 신비롭게 결합되셨다. 그는 이제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시며 영원히 그러하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는 죽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기 위해 세상에 보내셨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언제 죽었었는가?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었다(엡 2:1).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죽음에서부터 살아나기 위해 메시아의 대속(代贖)의 죽음이 필요하였다. 그는 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려주시기 위함이었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본절은 앞절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그 사실에서 우리는 참 사랑을 발견한다.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 같은 사랑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주셨다. '화목제'라는 원어(힐라스모스)는 '유화제물'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불붙은 진노를 누그러지게 하는 제물이라는 뜻이다. '유화제물'이는 말(힐라스모스, 힐라스테리온)은 성경적 용어이며 성경적 개념이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한 9, 10절에서 '우리 . . . 우리 . . . 우리 . . . '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제한성을 암시한다.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이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다 죄인이었고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의 뿌리 깊은 죄성과 연약성은 지옥 형벌을 받기에 합당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1만 달란트 빚진 것 같은 우리의 큰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마 18:23-35).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큰 구원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형제의 부족과 실수와 연약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사랑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1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발견한다. 첫째로, 우리는 거룩한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까닭 없는 미움과 부정당한 싸움은 마귀에게 속한 성질이며 행위이지만, 우리가 거룩한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요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나타낸다. 참 사랑은 중생했다는 표시이며 하나님을 안다는 표시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으신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셨다. 죄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시려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려고, 독생자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속죄 제물이 되셨다. 우리의 죽었던 영혼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 살았고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한 자들이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큰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었을진대,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12-16절,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

본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증거한다.

[12, 13]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요 4:24)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디모데전서 6:16,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하나님은 물질적 형체를 갖지 않으신 영이시므로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증거하기를,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특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며,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영적 일체는 하나님의 인격의 아름다운 덕을 가져오고 능력과 평강을 누리게 하며 기도의 응답을 얻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이렇게 복된 하나님과의 영적 일체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그 사랑이 이론적으로나 법적으로만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도 우리 속에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칭의(稱義)로 이루어지는 것뿐이 아니고 또한 성화(聖化)로도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게 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주신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칭의가 구원이지만, 그것이 성화의 과정에서 더욱 구원답게 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도 요한은 3:24에서도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성령의 감동과 감화, 성령의 역사하심, 성령의 일깨우심,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계심을 느끼며 체험하게 된다.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기독교 복음의 확실성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보았고 증거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누가복음 24:46-48,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요한복음 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사도행전 5: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누구든지 복음에 증거된 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기본적 진리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로마서 10:9, 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신자의 참된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증거이다. 그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일체가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우리가 복음에 증거된 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주로 믿은 것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 것이요 믿은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시다(요 3:16; 롬 5:8). 사도는 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다시 반복하기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자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이다. 진정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랑의 실천은 참 신앙고백의 증거일 뿐 아니라, 구원의 증거 즉 하나님과의 영적 일체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6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거하시고 성도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영적 일체의 두 가지 증거에 대해 말한다. 그 첫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이요, 그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바른 신앙고백이 있고 서로 사랑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됨은 그의 성령을 통해, 즉 성령의 감동과 감화, 역사하심, 일깨우심, 위로와 격려를 통해 느끼며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로, 여러분은 예수님을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가? 참된 신앙고백은 구원받은 표시이다. 둘째로, 여러분은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가? 또 서로 사랑하고자 하는가?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진실히 믿고 그의 명령대로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미움은 구원받지 못한 표시이며 사랑은 구원받은 표시이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자.


17-21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본문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증거한다. 본문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을 증거한다.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이로써'라는 말은 앞절에서 말한 대로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함으로, 즉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믿고 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영적 일체성을 누림으로써라는 뜻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표가 된다. 요한복음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 '사랑'은 원문에 '그 사랑'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은 법적인 구원인 칭의(稱義)뿐 아니라 새 생활로 나타나는 구원인 성화(聖化)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세상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는 성화까지가 하나님의 뜻이다. 영화(榮化)는 미래에 이루어질 일이다.

이렇게 형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롬 13:8) 사랑 안에서는 담대함이 있다. 이것은 또한 심판날에 가질 담대함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왜 이런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가? 그 이유는,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기 때문이다.' 즉 주께서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죽기까지 형제를 사랑하면, 주께서 죽으신 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영광 가운데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를 믿고 그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는 이 소망의 담대함을 가질 것이다. 디모데후서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어린아기는 엄마의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그 품 안에서 편안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 가면 울 것이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 왜냐하면 두려움에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형벌'이라는 원어(콜라시스)는 '고통'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그 뜻이 본문에 더 적절하다.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은 자는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을 소유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자이며, 거기에는 두려움과 고통이 없고 평안과 기쁨이 넘친다.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전통본문에는 "우리가 그를 사랑함은 . . . "이라고 되어 있다.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의무이다. 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마태복음 22:37,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먼저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참으로 안다면, 우리는 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것이다.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에게 기본적인 일이며 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 형제'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를 가리킨다. 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인가? 요한은 말하기를, 그가 본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한 자가 그가 보지 못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본절의 '이 계명'은 후반부의 말씀,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는 말씀을 가리킨다. 이 계명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 거기에서 '나의 계명과 '내 말'이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가리킨다. 주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


결론적으로, 17절부터 21절까지를 요약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는 것과, 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성경 전체와 더불어 우리에게 두 가지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 교훈을 강조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같이 비천한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되며 또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며 그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또 진실히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5장: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1-5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

본문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즉 중생한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중생한 자들 즉 주 안에서 형제된 자들을 사랑한다는 것과, 이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한다.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이것은 요한복음 1:12, 13에 증거된 바이기도 하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또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대로 주께서 중생(重生)의 도리를 증거하실 때 증거하신 바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내신 이'라는 말은 '낳으신 이'라는 뜻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가리킨다. 우리를 낳으신 이, 즉 우리를 중생시키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나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한다. '그에게서 난 자'는 우리와 똑같이 중생한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한 식구이며 한 형제들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은 세상에서 육신의 형제를 다 사랑한다. 육신의 형제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요 그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다. 육신의 형제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영적 형제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의 자녀가 된 형제들은 세상에서의 육신의 가족보다 더 귀하다. 육신의 부모가 나으신 형제들도 귀하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나으신 형제들은 얼마나 더 귀한 것인가!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원문에는, 본문이 "이로써 우리가 아노니"라고 시작된다. '이로써'는 앞절의 내용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또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는 것이 이치이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이치가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안다고 사도는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해야 할 줄을 안다' 혹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 사랑함은 하나님 사랑과 그 계명 지킬 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게 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또 사도 요한은 그의 계명들이 무겁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중생치 않았을 때 곧 죄의 종 되었을 때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가 심히 무거웠다. 그러나 우리가 중생한 후에는 하나님의 씨가 우리 속에 심겨졌고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므로 우리는 비록 연약함이 있어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법을 즐거이 지킨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롬 8:4, 14).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다(마 11:29, 30).

[4, 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호티)이 있다. 이것은 그의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닌 이유를 증거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망과 마귀의 세력을 이긴다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고 말했고(요일 3:9) 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하나님께로서 나왔고] 또 저희를[적그리스도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말했다(요일 4:4). 우리 속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고 또한 그의 생명 원리가 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어주셨다.

로마서 6:14, 18, 22,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고린도전서 15:54-57,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히브리서 2:14, 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사도 요한은 덧붙여서 말하기를,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영생을 얻었고 부활을 소망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로써 마귀와 그 세력은 성도 앞에 완전히, 영원히 패배하고 말았다. 이 귀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복음 진리 안에 다 내포되어 있다. 죄는 죽음과 불행을 가져왔으나 의는 생명과 영원한 행복과 영광을 가져왔다.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5:1, 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결론적으로, 1절부터 5절까지에서 우리는 우선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로, 여러분은 중생했는가? 중생의 표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진실히 믿고 있는가? 둘째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과 그의 구원 사역을 아는 자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여러분은 참으로 온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어주신 하나님을 알며 그를 사랑하는가?

무엇보다, 본문이 가르치는 주된 교훈은, 만일 우리가 거듭나는 은혜를 얻었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또한 중생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육신의 형제들도 사랑하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낳으신 영적 형제들을 더욱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 아래 지는 자들이 아니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100퍼센트의 완전한 의를 얻으며 우리는 그 의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은혜로 얻는다. 여러분은 주께서 구원하신 자들, 곧 하나님의 가족들인 영적 형제들을 참으로 사랑하는가?


6-10절, 물과 피와 성령의 증거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가리킨 것 같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물과 피를 흘리셨다. 요한복음 19: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초대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하는 이단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이셨다.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때가 되어 인간의 본질을 취하여 사람이 되셨다(요 1:14).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말대로, 그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계속 그리고 영원히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말씀은 물과 피라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킬 뿐 아니라, 또한 상징적 의미도 가짐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물은 죄씻음을, 피는 속죄의 죽음을 가리킬 것이다. 이 둘은 기독교 복음의 근본적 내용이다. 이 둘은 세례와 성찬의 의식으로 표현되는 것들이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까닭은 속죄의 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그는 우리의 죄씻음을 위해 속죄 제물로 죽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씻음의 근거가 되었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7]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신다. 즉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참되시며 그 분께서 증거하시는 내용 또한 참되다.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 14,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오늘날도 진리의 성령께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신다.

[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다. 곧 성령과 물과 피이다. 성령과 물과 피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또한 그 셋의 증거는 하나이다. 그 셋은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증거의 요지이다.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우리는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매일 신문의 뉴스들이 그러하며 법정의 판결도 많은 부분 사람의 진실한 증거에 의존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상 생활은 지극히 불안정될 것이고 의심으로 가득 찰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이 사람들의 증거를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확실하고 믿을 만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친 음성으로 자기 아들에 관해 증거하셨다. 마태복음 3: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실상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이다. 성령의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모든 말씀들 속에서 자기 아들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해 그리고 그의 속죄 사역에 대해 증거하셨다. 성령과 물과 피도 다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 증거한다.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그 증거가 있다. '증거가 있다'는 원어는 '그 증거가 있다'는 말이다. '그 증거'는 하나님의 증거를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즉 하나님의 증거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6절부터 10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오셨고 성령께서 그것을 증거하심을 말했다. 성령과 물과 피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속죄 사역에 대한 증거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자. 하나님의 증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 곧 그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것이며, 또한 그의 속죄 사역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증거, 성경의 증거를 받아들이고 확신하자.


11-13절, 영생을 주심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것과 그 영원한 생명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 좀더 설명한다. '증거'라는 원어는 '그 증거'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증거의 내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그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첫번째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본래 영생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첫 명령을 어느 기간 동안 잘 지켰었더라면 영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명령을 어겼고 하나님의 경고하신대로 죽게 되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시편 49: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그러나 인간 속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싶어하는 강렬한 소원이 있다. 특히 죽음의 문턱에 선 자들에게는 좀더 살고싶은 강한 소원이 있다. 병약하여 죽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자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인간의 영원한 생명은 어디로부터 가능한가? 생명의 원천이신 창조주 외에는 아무도 인간에게 영생을 줄 수 없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부활과 영생을 주실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약속하셨다. "또 그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요한일서 2: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음을 증거하였다. 디모데후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디도서 1:1, 2,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영생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진리의 중심이다.

이 영생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영생은 어떤 영생인가? 이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삶이다. 죽지 않는 삶이다. 그러나 그 삶은 병약하거나 불행스런 삶이 아니다. 그런 삶이 영원하다는 것은 복이 아니고 저주일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은 강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이다. 고린도전서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영생의 가치는 얼마나 큰지! 이 영생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인생은 어리석고 무지하여 이 영생을 세상의 썩어질 것과 바꾸기를 잘한다. 마치 옛날의 아프리카 어린 아이들이 다이아몬드를 사탕과 바꾸어 먹었듯이 말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다(요 6:27).

하나님의 증거의 두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 요한은 본서신 서두에서도 그 사실을 증거하였다. 1:1, 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한이 말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즉 이 세상에 나타났고 사도들에 의해 증거된 그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가리켰다. 요한은 본서신 끝부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생'이라고 증거하였다(요일 5:20).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요한이 쓴 요한복음에서도 밝히 드러나 있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6:47, 4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25, 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4: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본래부터 영원한 생명이 있으셨지만, 그가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정당하게 영생을 주실 수 있게 되었다. 죄의 값은 죽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는 영생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롭고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 사도 바울은 특히 이 사실을 그의 로마서에서 잘 증거하였다.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2, 13]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본절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영생, 그의 아들 안에 있는 영생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있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지만,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참 믿음은 영생을 얻는 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이 되고 영생이 된다는 것은 신약성경 전체가 증거하는 바이지만,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풍성히 증거한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6:53, 5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17: 2, 3,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결론적으로, 11절부터 13절까지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은 명료하고 확실하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을 약속하셨다. 이 약속된 생명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우리는 이 영생의 가치를 깨닫자. 우리는 어리석게 세상의 것들과 영생을 바꾸지 말자!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진대, 우리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확신하고 감사하자. 또 이 영생의 기쁜 소식을 만인에게 증거하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영생의 길일진대, 우리는 예수님을 참되고 바르게 믿고 확신하며 그만을 따르고 그의 모든 말씀에 절대복종하자.


14-17절, 기도의 응답

14절부터 17절까지는 성도의 특권으로서 기도의 응답에 대해 말씀하고 범죄하는 형제에 대해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사도 요한은 성도의 담대함 즉 확신에 대해 말씀한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에 관한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의 한 부분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고 성경 전체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 가운데 우리의 필요를 위해 모든 성경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읽고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성경에 귀를 막는 자가 있다면 그의 기도는 헛될 것이지만, 성경에 귀를 기울이는 자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 잠언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무엇보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것이다. 이사야 1:15, 16,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라." 이사야 59:1, 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며 순종하며 기도해야 하며, 그때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그의 뜻에 맞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의 뜻대로 구한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믿음 또한 중요하다. 우리가 기도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리는 또한 간구한 기도의 응답을 믿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도의 효력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 것을 그가 들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또한 믿자. 마가복음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받는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6, 1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사도 요한은 기도의 응답에 대해 말한 후 범죄하는 형제를 위해 기도할 것에 대해 또한 가르쳤다. 이 때 그는 죄를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이며, 다른 하나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라고 하였다. 죄의 값은 죽음인데(롬 6:23)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는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영생을 얻은 후에 실수로나 연약성 때문에 범하는 죄를 가리킬 것이다. 사도는 앞에서 중생한 자가 범죄치 않는다고 말씀했으면서 여기에서는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중생한 자가 범죄치 않는다는 말씀은 중생한 자가 계속 죄 가운데서 생활할 수 없다는 뜻이며, 중생한 자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중생한 자도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그는 그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즉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이다. 그는 그 실수와 연약 때문에 구원과 영생을 상실하고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형제가 그런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그러면 그는 회개하고 영생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로서 가질 수 없는 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언급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은 죄이다. 그런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령의 일을 고의적으로 방해하고 대적하며 양심의 감동을 극도로 억압하는 죄로 생각된다. 교회 안에서 이런 죄가 있어서 안되겠지만, 종종 이단자들 속에서 이런 류의 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단의 죄는 실수나 무지나 연약의 죄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다 아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무지해서가 아니고 순전히 고의적이다. 그들은 고의적으로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진리를 대항하고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의 뱀과 같이 확신차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이런 이단과 배교의 죄는 너무 크고 두려운 것이어서 실상 그런 자들을 형제로 여길 수도 없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이제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14절부터 17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하고 그 뜻대로 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의 응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응답을 믿는 것도 중요하다. 셋째로, 우리는 교우 중에 누가 범죄하는 일을 보거든 그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고의적으로 대항하고 부정하고 왜곡시키는 이단자와 배교자에 대해 우리가 기도할 자신이 없지만, 주를 진실히 믿고 따르고자 하는 형제에 대해서는, 비록 그가 실수와 연약으로 범죄하였을 때라도, 그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말고 그를 끝까지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그에게 회개함을 주시고 그가 영생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18-21절, 바른 지식과 삶

본문은 중생(重生)에 대한 바른 지식과 거기에 합당한 삶에 대해 증거한다. 본문에는 '우리가 알고 있다'는 말(오이다멘)이 세 번 나온다('우리가 아노라. . . . 또 아는 것은 . . . 또 아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얻은 중생(重生)의 성격과 근원과 방편을 나타낸다. 중생의 성격은 범죄치 않는 것이요, 중생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요, 중생의 방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 본문은 우리가 중생에 합당하게 자신을 죄와 우상으로부터 지켜야 할 것을 가르친다.

[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첫번째로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생의 성격을 보인다. 이 진리는 본서신 3:6, 9. 10에서 언급된 바이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것은 중생한 성도의 실제적인 생활을 가리키는 말씀으로서 중생한 자는 계속 범죄하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중생한 자는 그 영혼 속에 새 생명의 원리가 심기워졌기 때문에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중생한 자 속에 심기운 새 생명은 하나님만을 향하고 의(義)만을 향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범죄할 수 없는 새 생명의 원리이며 죽거나 없어질 수도 없는 원리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생명이다. 신학자들은 중생의 이러한 성격을 '영혼의 지배적 성향의 변화'라고 말한다.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옛날 영어성경의 본문과 같이 "그러나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자신을 지키며"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중생한 자의 합당한 삶을 증거한다. 중생한 자는 범죄하지 않지만, 중생한 자는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중생한 자는 범죄치 않는다고 자신을 방임해서는 안된다. 그는 항상 자신을 지키며 범죄치 않기 위해 힘써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한다는 점도 있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한 것들이 많다. 이것은 중생한 자에게도 똑같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1에서 이런 죄악들을 경계해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또 그는 고린도후서 7:1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했다. 우리는 이러한 죄악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두번째로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사실이다. '속한다'는 원어(에크 . . . 에이미)는 일차적으로 '께로부터 나온다 혹은 난다'는 뜻이다. 이것은 중생의 근원을 나타낸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하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혹은 '사악함 속에'(옛날 영어성경) 처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이다. 중생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어두움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어 살려 건져내는 구원 사건이다. 온 세상은 이 두 세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의 세계와 죄악된 세계가 그 두 세계이다.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세번째로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참된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생의 방편을 나타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중생을 얻는다.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믿는 것이 곧 중생의 증거요 그를 믿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 곧 구원이다.

사도 요한은 또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고 증거한다. 여기에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대한 명확한 한 증거가 있다. 그는 신적인 존재로 높임을 받는 정도가 아니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또 그는 우리에게 영생이 되시고 친히 영생을 주시는 구주이시다.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사도 요한은 끝으로 중생에 합당한 생활의 한 면으로서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는 교훈을 남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근본적 요소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며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우상은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높임을 받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죄악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우상숭배를 제거해야 한다. 현대인은 인간이나 인간의 지식과 과학이나, 돈이나, 육신의 쾌락 등을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 대신에 높이고 가치 있게 여긴다. 이것들은 다 일종의 우상이다. 중생한 성도들은 이런 우상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런 것들을 멀리하지 않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중생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알게 되었다. 중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일이며 이렇게 중생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 즉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본문은 우리가 중생한 자로서 또한 자신을 죄로부터 지켜야 하고 우상으로부터 지켜야 함을 교훈한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신의 죄악된 일들을 다 버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처럼 혹은 하나님 대신에 높임을 받는 모든 것을 다 배척하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그의 뜻만을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의의 길이요 영생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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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001년 10월 21일(초판)


(김효성 목사)


내용 목차

 

야고보서 서론

1장: 시험을 참음

2장: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3장: 말에 온전한 자

4장: 탐욕, 비방, 자랑을 버릴 것

5장: 인내와 기도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등과 더불어 전통적으로 '공동 서신'으로 불리웠던 본서신은 2세기의 옛 수리아어역에 포함되어 있었고, 비록 로마와 칼타고에서는 오랫 동안 의문시되었으나, 예루살렘과 수리아에서는 일찍부터 인정되었던 것 같다. 3, 4세기에 유명했던 오리겐, 예루살렘의 시릴, 나지안스의 그레고리, 아다나시우스, 제롬, 어거스틴 등은 본서신을 일찍부터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본서신의 저자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었던 것 같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본서의 저자는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만 부르고 사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2) 만일 본서신이 사도의 저작이었다면, 역사상 그 정경성이 의문시 되지 않았을 것이다. (3)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 중요한 세 명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일찍 순교하였으므로(주후 44년경) 본서신의 저자일 수 없을 것이다. (4)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과 거의 동등한 권위를 가진 지도적 인물이었다(행 12:17; 15:13, 19; 갈 1:19; 2:9).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주후 63년경에 순교하였다고 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대제사장 아나누스의 명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하며,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림을 당한 다음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고 한다.

아마, 본서신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주후 49년경) 이전에, 그러니까 주후 45년에서 48년 사이의 어느 때에 쓰였을 것이다. 본서신을 받은 자들은 동방의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적 행위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믿는 믿음의 의를 구별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강조하였으나, 본서신의 저자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구별하면서 '사람이 믿음만으로가 아니고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표현하였다. 야고보의 표현 자체는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으나 성경의 복음 진리나 야고보의 의도는 분명하다. 바울도 산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남을 분명히 가르쳤다(갈 5:6; 살전 1:3; 롬 6장).

 

 


 

1장: 시험을 참음

1절, 문안 인사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모시고 순종할 것을 고백한 것이다. '주'라는 말은 '하나님'과 같은 의미와 권위를 가진 명칭이다.

본서신의 저자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 하나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이든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일 것이다. 저자가 자신을 '사도'라고 표현하지 않고 있다는 점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력한 사도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아마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본서신을 썼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행적은 성경에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그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자신의 기적적으로 나온 사실을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전하라고 말했었다(행 12:17). 또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모인 교회 회의에서 야고보의 발언은 결론을 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행 15:13-21).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 사도는 그를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부르면서 사도들과 같은 권위를 가진 인물로 언급했고(1:19)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표현했고(2:9) 또한 예루살렘에서 온 어떤 이들을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라고 표현하였다(2:12).

만일 저자가 예수님의 동생이었다면, 그가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을 단순히 혈육의 형인 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님 곧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고 고백한 것이며 그에 대한 자신의 순종을 고백한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그의 형이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에게 주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는 수리아와 소아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온 세계에 흩어져 사는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2-4절,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

[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형제'라는 말은 본서신에 19번 사용되었다. 이 말은 신약 성경에 346회 사용되었고 사도행전에만 57회 사용되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라는 말(30회)보다도 더 빈번히 사용되었다. 이것은 매우 친근한 명칭이다. 우리는 모두 주 안에서 형제들이다.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말은 성도에게 닥쳐오는 시험이 다양함을 보인다. 어떤 때는 친구의 배신과 비난과 따돌림, 마음의 상함, 정신적 위협과 압박이 있다. 어떤 때는 물질적 손실, 부도, 파산, 실직이 있다. 어떤 때는 육체적 질병과 사고, 핍박과 매맞음, 또 옥에 갇힘 등이 있다. 어떤 때는 가족들의 질병과 사고와 죽음, 남편이나 아내의 외도, 이혼, 자녀들의 탈선이 있고, 어떤 때는 교인들의 불완전, 교회의 분열이 있고, 국가적인 핍박, 전쟁, 경제 공황이 있다. 성도들이 당하는 시험은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을 불평하거나 마지못해 당하지 말고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 그 이유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하고 구비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인격자가 되기 때문이다. 로마서 5:3, 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온전한 인격자가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써야 할 성화의 목표이다. 신앙의 인격은 시험과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성숙케 된다.


5-8절, 지혜가 부족하면 구하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성도가 시험을 잘 참고 잘 대처하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현실에 잘 적용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지혜 있는 자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대처하여 나간다. 만일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여 얻을 수 있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 또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신대 우리는 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얻기를 주저하겠는가?

[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지혜를 구하면서 의심하는 자를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비유하였고 또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의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의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듯이(왕상 3:10), 우리가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들어주실 것도 분명하다(요일 5:14).


9-11절, 성도의 자랑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낮은 형제'는 사회적 신분에 있어서나 경제 생활에 있어서 낮고 가난한 성도들을 가리킨다. '자기의 높음'이란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의 시민이 된 사실을 가리킨다. 흔히 성도에게 닥치는 큰 시험거리는 물질 문제이지만, 성도들은 세상의 것들이 헛되다는 것과 주 예수님 안에서 얻은 구원과 복이 지극히 크고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며 즐거워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10, 11]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부한 형제'는 세상적으로 부요한 성도들을 가리킨다. '자기의 낮아짐'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적 부요의 헛됨을 인정하고 낮은 형제들과 교제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믿기 전에 가치 있게 여겼던 세상의 것들이 풀의 마름같이 시들고 아름다운 꽃의 떨어짐같이 없어지는 것임을 깨달았고 그래서 거기에 더 이상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성도의 가치는 오직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천국 기업이요 영원히 죽지 않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1절까지의 요지는 본문의 말씀 그대로 세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성도에게 닥치는 시험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한 인격자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만일 우리에게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여 얻어야 한다. 구할 때 우리는 의심치 말고 믿음으로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지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들 가운데 낮은 형제들은 자신들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들은 자신들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한다. 왜 그러해야 하는가? 성도들은 세상의 것들이 다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하나님의 자녀됨과 천국과 영생과 부활만이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2-18절, 시험의 원인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장에서 '시험'이라는 말(페이라스모스)은 '시련'이라는 말(도키미온)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환난과 고난의 시험을 잘 참으면 온전한 인격자가 되므로(3, 4절) 복되다.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이라는 말(도키모스)은 '시험을 받은'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시험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시험이다. 그것을 잘 통과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음이 증명될 것이다.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이란 영생을 가리킨다. 면류관이란 승리한 자에게 주는 영광스런 상을 의미한다. 영생은 행위의 댓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인데 왜 상이라고 표현되었는가? 그것은 시험들을 통과하고 승리하는 믿음의 삶의 결과라는 뜻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것은 또한 승리적인 믿음의 삶의 결과이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승리할 것을 말씀한다. 로마서 8:35, 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성경은 또한 영생이 이러한 정상적인 승리적 신앙 생활의 결과라고 표현한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므로 영생의 영광을 얻을 자들은 세상에서 시험을 잘 참아야 한다.

[13, 14]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그러나'라는 뜻의 말(메데이스)이 있다. 시험의 원인은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의 주권 진리에서 보면 모든 일들의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악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본문은 시험의 원인이 각 사람의 욕심이라고 말씀한다. 각 사람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될 때 시험에 떨어진다고 말씀한다. 예를 들어, 남에게서 비난을 받는 것이 시험이 되는 것은 자존심 혹은 명예에 대한 욕심 때문이며, 물질적 파산이 시험이 되는 것은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이며, 몸의 질병이 시험이 되는 것은 이생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욕심들이 없다면 그것들이 시험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과 처분과 보응을 믿는다면,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을 믿는다면, 또 삶의 최고의 목표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확신한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시험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시험은 자신의 욕심에서 오는 것이다.

[15, 16]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심에서 죄가 생긴다. 물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등이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의 죄를 낳는다. 또 그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장성한다'는 원어(아포텔레오)는 '끝까지 마친다'는 뜻이다. 즉 죄가 죄로 끝마치고 사람이 그 죄를 끝까지 회개치 않는다면 죽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영육의 죽음 곧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또 이와 같이 사람의 시험이 욕심에서 나는 것이므로 '속지 말라'고 말씀한다. 그것은 자신이 시험받는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뜻이다.

[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천지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므로 천지 만물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셨으므로 사람이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는데 쓰이는 지혜와 능력은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이다. 사람이 발전시킨 음악과 미술, 그리고 문학과 과학 등도 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들이다. 이것들은 다 위로부터 즉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왔다. 여기의 '빛'은 무지와 부도덕과 구별되는 지식과 의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 중에서 한 첫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나으신 자들이다. '첫열매'란 중생(重生)의 구원을 가리킨다. 그것은 천국과 부활에 비해 볼 때 첫열매에 해당한다. 로마서 8:23,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영광스럽고 완전하고 충만한 추수는 아직 미래에 있다.

또 앞으로 올 새 세계를 생각할 때도 성도들의 구원은 첫열매와 같다. 장차 만물이 새로워지고 회복될 것이다. 사도행전 3:21, "만유를 회복하실 때." 로마서 8:20, 21,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21:1, 5,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천국과 부활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를 중생시키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된 것이었다. 에베소서 1:4, 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은 몇 가지의 실제적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시험에 지지 말고 잘 참고 이겨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자! 둘째로, 사람의 시험의 원인은 자신 속에 있는 욕심이므로, 우리는 쾌락과 물질과 명예 등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모든 욕심을 버림으로써 어떤 시험에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의 첫열매로 구원하신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천국만 바람으로써 모든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19-27절,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너희가 알거니와'(이스테)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그러므로'(호스테)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중생된 사람이 되었으므로'라는 뜻이다. 본문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라'고 교훈한다. 이것은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을 다 믿으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듣는 말 중에는 참된 내용도 있지만, 거짓된 것이나 불확실한 것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말을 속히 듣고 이해하고 그 내용들을 잘 분별해야 할 것이다. 듣지 않고서는 참된 것을 믿을 수 없고 또 참되지 않은 것을 반대할 수도 없다.

또 본문은 우리가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교훈한다. 구약성경 잠언에는 입술을 제어하는 자가 지혜가 있고 말을 아끼는 자가 지식이 있다고 가르쳤다(잠 10:19; 17:27). 우리는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만을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짓말이나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말이나 형제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악한 비난의 말을 해서는 안된다. 잠언 6:16-19,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11:11-13,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또 본문은 우리가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교훈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전혀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지만, 금방 화를 내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이 옳지 않은 일, 상식이나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보고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화를 내더라도 많이 생각하고 오래 참은 후에 내라는 것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에 대해 잠언에는 많은 말씀으로 교훈했다. 잠언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언 14:17,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잠언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할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화를 낼 때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화를 낼 때 남을 미워하기 쉬우며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원리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행동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화내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우리가 말하기를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하기 때문에 즉 우리가 거짓과 사악과 미움에 떨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법적으로 죄씻음을 받고 중생한 자들이 되었다면,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려야 한다. 이것이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특징은 죄를 버리고 실제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구원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도'(道)라는 것은 '말씀'을 가리킨다. 그것은 복음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것은 '너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 곧 '구원의 말씀'(행 13:26)이다. 이 말씀은 구약 시대의 율법이 돌비에 새겨졌던 것과 달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심긴 말씀'이다. 고린도전서 15:1, 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고린도후서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우리는 이 구원의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온유함은 어린이같이 순진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을 말하며 이것은 바른 믿음의 태도이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앙하고 거부하고 대항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유한 마음을 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성도에게 기본적이다. 그러나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그러나'라는 말(데)이 있다. 복음의 말씀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기본적이지만,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참 믿음이 행함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강조한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실상 믿지 않는 자이니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말씀을 행하는 자는 그 행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증거한다. 여기에서 행함은 우선 앞에서 언급한 대로 덕스러운 말을 하고 덕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 예컨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나게 성급히 화를 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23, 24]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 버리거니와.

말씀은 거울과 같다. 말씀을 듣는 것은 거울로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마치 거울로 자신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그 얼굴을 씻지 않고 잊어버리고 사는 자와 같다. 그러나 거울은 단지 보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본 후에 더러운 것을 씻으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듣기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들은 후에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실천할 것은 실천하라고 주신 것이다.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 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복음을 묘사한 말씀이다. 복음은 온전한 법이다. 여기에 율법 혹은 법이라는 말은 '원리'를 가리킨다. 이것은 로마서 8:2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씀에서의 '법'이라는 뜻과 같다. 복음은 완전한 법이다. 구약의 율법은 불완전한 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던 제사 제도나 성막 혹은 성전은 신약 시대에 다 폐지되었다. 그러나 신약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가 이루신 의로 말미암아 완전한 구원의 원리로 주어졌다.

복음은 또한 '자유하게 하는 원리'이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바울 사도는 그 서신에서 복음의 유일성과 복음 안에 있는 자유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를 밝히 증거하였다. 그 자유는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율법 제도와 율법 체계, 그리고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자유이었다.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바울 사도는 로마서 7:6에서도 증거하기를,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 율법의 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라는 구절에서 '있는 자'라는 원어(파라메이나스)는 '그 안에 거하는 자'라는 뜻이다. 다시 번역하면, '자유의 온전한 법을 들여다 보고 그 안에 거하는 자'이다. 복음 진리를 믿고 묵상하며 그 안에 거하는 참된 성도는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고 실행하는 자이다. 즉 참된 신앙은 행위를 동반한다는 뜻이다. 믿음을 많이 강조한 바울 사도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안됨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로마서 6:1, 2, 15,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야고보는 또 말씀을 실행하는 자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가 범죄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다(히 12장). 그러나 의와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다. 신명기 28장에 계시된 복의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말씀을 순종할 때 받을 수 있는 복이다. 거기에는 건강의 복, 자녀의 복, 재물의 복, 평안의 복, 존귀의 복, 승리의 복 등이 포함된다.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는 다시 경건과 행위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가 예를 든 행위는 말에 대한 것이다. 누가 자신이 경건하고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않아서 조심스런 말을 하지 않고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그의 경건은 헛것이다. 그가 정말 경건하고 믿음이 있는 자라면, 그는 자신의 언어 생활부터 고쳐야 한다. 그는 진실한 말,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한다. 그의 말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는 또 참된 경건이 어떤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 지에 대해 첨가하여 말한다. 그는 두 가지를 예로 든다. 하나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구제와 봉사를 포함한 사랑의 관심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불쌍한 교우나 이웃을 돌아볼 줄 모른다면, 또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 불경건하고 죄악되고 음란한 유행과 풍조를 배격하지 못하고 따르고 있다면, 그의 경건과 믿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참된 경건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19절부터 27절까지의 내용은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복음 신앙은 기본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말씀, 지금 우리의 마음에 심긴 복음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는 자유의 온전한 법인 이 복음 진리 안에 거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요 그의 경건은 헛것이다. 그러나 행하는 자는 복되다. 셋째로, 우리가 행해야 할 행위는 무엇인가? 본문이 특히 강조하는 바는 선하고 의로운 말과 행동이다. 우리는 말하기를 더디 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여야 한다. 또 우리는 성내기를 더디 하고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2장: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1-13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원문을 직역하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서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지 말라." '영광의 우리 주'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바울 사도도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증거한 적이 있다(고전 2:8). 영광은 본래 하나님께 속한 속성이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구원적 믿음이요 복음적 믿음이다. 이런 믿음에 대한 언급은 야고보서가 구약적이지 않고 신약적임을 나타낸다.

야고보는 우리가 영광의 주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그 교훈은 존귀하신 영광의 주님께서 낮고 비천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증거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다(빌 2:5-8). 주님의 비하(卑下)의 사실을 깨닫는 자라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을 것이다. 영광의 주님은 낮고 비천한 인생의 모습을 취하셨었기 때문이다.

[2, 3]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원문에는 2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교훈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당시에 교회 안에 이런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당(쉬나고게) 즉 예배당에서 교인들은 금반지를 끼고 좋은 옷을 입은 부자에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친절히 대하지만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든지 하라고 불친절하게 대하였다. 그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였다.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교인을 경제적인 척도에서 구별하는 것은 악한 일이었다. 그것은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일이었다. 사람의 소유한 돈의 많고 적음이 그의 인격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부자가 아니셨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부자가 아니었다. 바울 사도도 부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인격자들이었다. 사람의 가치성은 그의 내면적인 덕성 즉 그의 경건과 믿음, 그의 의와 선과 진실의 덕성을 가지고 판단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보이는 가치 판단의 기준이다. 세상은 무지해서 사람의 가치를 잘못 판단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배운 교인들은 바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사람을 외모로 즉 그의 소유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무지하고 악한 일이다.

[5, 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 . .

5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은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증거한다. 그 이유는 네 가지로 표현되었다. 첫째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세상의 가난한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잘 믿는다.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 그러나 가난한 자들의 다수는 하나님과 천국을 보화로 삼아 믿음에 부요한 자들이 되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셨다고 증거하였다(28절).

[6, 7] . . . .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둘째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부자들이 오히려 성도들을 압제하고 훼방하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성도들을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그들은 성도들의 아름다운 이름, 즉 성도,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백성, 천국의 시민 등의 이름을 비난하고 욕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보통 성도들에게 그런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부자들을 우대하고 가난한 자들을 천대하는 것은 모순된 행동인 것이다.

[8, 9]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셋째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최고의 법을 어기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최고한 법'이라는 원어(노모스 바실리코스)는 '왕의 법'이라는 뜻으로서 율법들 중에서 가장 귀한 법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율법들 중에서 가장 귀한 법은 사랑의 법이다. 그 첫째는 우리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그 둘째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면 우리는 이 귀한 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10, 11]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원문에는 10절의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만 거친다 하더라도 모두 범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11절의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의 율법만 범해도 모두 범한 자가 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모든 율법이 다 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법을 범해도 하나님의 법을 범한 것이다.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넷째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율법'이란 신약의 복음을 가리킨다(1:25). 그것은 우리에게 죄와 지옥 형벌과 율법 멍에에서 건져내어 자유를 주는 새로운 법이요 원리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에 근거한 죄씻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혜로 된 것이요 우리가 값없이 받은 것이다. 우리는 이 대속의 복음에 근거하여 장차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큰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라면 우리는 그런 자답게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외모로 취하겠는가? 어떻게 가난한 자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멸시하고 천대할 수 있겠는가?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왜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로서 장차 그 긍휼에 의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면 우리도 마땅히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에게도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의 공의의 심판을 이기고 우리를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이웃에 대해, 특히 가난한 자들에 대해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교훈이며, 그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며, 둘째로 부자는 성도들을 압제하고 훼방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최고의 법을 어기는 죄가 되기 때문이며, 넷째로 우리는 자유의 법으로 심판을 받을 자답게, 즉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자.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긍휼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되, 특히 가난한 자들에 대해 그렇게 하고 결코 그들을 멸시하거나 천대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자.


14-26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여기의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1절)을 말한다. 그것은 말로는 구원적 믿음 곧 복음 신앙과 같다. '행함'이라는 원어(에르가)는 '행위들'이라는 말로서 믿음과 순종의 행위들 또는 선한 행위들을 가리킨다. '그 믿음' 즉 행함이 없는 그 믿음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즉 그러한 믿음은 구원적 믿음이 아니다. 구원적 믿음은 행위로 증거되는 믿음 즉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15, 16]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야고보는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구체적 예를 든다. 그것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를 돕는 행위이다.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웃의 영혼의 필요한 것만 채워주지 말고 몸의 필요한 것도 주어야 함을 보인다. 즉 우리는 이웃에게 죄사함과 영생과 내세의 천국만 전하지 말고 그에게 밥과 옷도 주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선행과 구제의 행위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 행위가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와 같이'라는 말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유익이 없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 능히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듯이'라는 뜻이다. '그 자체가'라는 원어(카드 헤아우텐)는 '그 자체만으로는'이라는 뜻이다. 본절을 직역하면 '이와 같이 또한 그 믿음이 만일 행함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라.' 야고보는 선한 행위들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18, 19]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 보면 '너의 행위들로 네 믿음을'이라고 되어 있다. 믿음과 행위는 분리될 수 없다.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믿는 각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선한 행위로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 믿음은 바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단지 지식에 멈춘다면 그것은 귀신들이 가진 정도의 믿음에 불과하며 귀신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할진대 그런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지 않겠는가?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헛된 것이다.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허탄한'이라는 원어(케노스)는 '어리석은'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헤 피스티스 코리스 톤 에르곤)은 야고보가 본서에서 강력히 반박하고 정죄하는 믿음이다. '헛 것'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죽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17절의 내용의 반복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다음의 두 가지 사실로 예증한다.

[21, 22]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첫번째 예증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사건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었다. 그의 순종의 행위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가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가서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하게 순종했었다. 즉 아브라함이 의인이라는 사실은 그의 순종의 행위로 증명된 것이었다. 22절을 다시 번역하면, "네가 보거니와 그 믿음이 그의 행위들과 함께 일하고 그 행위들로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이다.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표현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에 대해 분명하게 강조하였던 바울 사도의 표현과 다른 것은 사실이다(롬 3:22, 28, 30).

[23, 24]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성경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은 그의 순종의 행위로 인해 확고히 되고 성취되었으며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리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21절에 이어 두번째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라고 표현한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 곧 죽은 믿음으로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두번째 예증으로서 야고보는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군들을 숨겨주고 피하게 한 것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구약 성경 여호수아 2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에서 기생 라합의 믿음은 위험을 무릅쓴 그의 선한 행위에서 나타났다. 야고보는 또 다시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21절과 24절에 이어 세번째로 사용한 표현이다.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의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 혹은 영혼이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 사람은 영육이 합해 있어야 산 존재가 되는 것이며 영이 떠나면 죽은 몸이 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이 죽은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이것은 17절과 20절(전통 사본)에 이어 세 번째로 사용한 표현이다.

야고보가 21절과 24절과 25절에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명확히 강조한 바울 사도의 교훈과 충돌하거나 모순되는가?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상호간에 모순이나 충돌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우선, 바울 사도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복음 진리를 어둡게 하였던 천주교회의 배교적 상황 속에서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다시 한 번 더 깨닫고 확신했던 진리이기 때문에, 개신교회의 신앙을 바르게 받은 자라면 누구도 그 진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와 야고보의 표면적 차이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義)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를 구별하면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구별하면서 '사람이 믿음으로만 아니고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표현한 것이었다. 물론 야고보의 표현 자체는 바울의 복음 진리와 충돌하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나, 그의 의도는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 바울 사도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강조했을 때 결코 죽은 믿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고 산 믿음을 의미하였다. 로마서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결론적으로, 14절부터 26절까지의 요점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내용은 17절과 20절과 26절에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이 강조된 내용이 주는 실제적 교훈은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지 말고 산 믿음이 되어 행함으로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라합과 같은 믿음의 행위,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의 행위, 특히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들에게 선을 베풀고 구제하는 행위를 말한다. 성경의 요점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선과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고 산 믿음, 참 믿음, 구원적 믿음인지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과연 그렇다면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선행과 구제를 힘쓰자.

 

 


 

3장: 말에 온전한 자

1-12절, 말에 온전한 자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선생의 일 곧 가르치는 일은 귀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예수님의 사역이고 사도들의 사역이다.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세상의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일이다. 그러나 선생이 되는 데는 책임과 위험성도 따르므로 야고보는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성도들에게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렇다. 선생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 지식과 신앙 인격이 잘 갖추어진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들이 말이나 행실에 실수가 없이 그 직분을 잘 감당할 것이다.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어서 많이 선생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고 특히 말에 실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수긍할 만한 말씀이다. 세상에 완전한 자는 없다. 성경 역사에도 그렇다. 심지어 모범적이었던 노아도, 아브라함도, 다윗도 흠과 실수와 부족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말에 실수가 없다면 우리는 온전한 인격자로 여김을 받을 것이다. 사람의 인격의 온전함은 말에서 증거된다. 여기에 혀의 중요성이 있다. 우리가 혀로 남에 대한 오해의 말이나 잘못된 비난의 말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바른 말, 덕스러운 말만 한다면, 우리는 상당히 성숙한 인격자일 것이다.

온전한 말을 하는 혀는 그의 온 몸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상, 말은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온전한 말은 온전한 인격의 표현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하셨다(마 12:34-37).

[3-5] 우리가 말(馬)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야고보는 혀의 중요성을 말의 재갈이나 배의 키에 비교한다. 말은 힘이 센 동물이지만, 사람은 말의 입에 재갈 즉 쇠토막을 물려 자기 뜻대로 그것을 이끌고 사용한다. 큰 배도 배 밑에 달려 있는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된다. 또 야고보는 혀를 불에 비교한다.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운다. 이와 같이, 사람의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큰 것을 자랑하며 큰 일을 행한다. 잠언 10:20,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잠언 12:18,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良藥) 같으니라." 잠언 21:28, "확실한 증인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不義)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본문은 혀의 악함을 증거한다. 앞절에서도 말했지만, 혀는 불과 같다. 그것은 좋은 용도의 불보다 산불이나 건물의 화재처럼 나쁜 결과를 주는 불과 같다. 그래서 야고보는 혀를 또한 불의(不義)의 세계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우리의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 즉 우리의 삶의 과정을 허물어뜨린다. 사람은 자기가 쌓은 선을 잘못된 말, 악한 말로 다 허물어 버릴 수 있다.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는 말은 '그것 즉 혀가 지옥불에 사루어지리로다'라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7, 8]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원문에는 7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혀가 불의의 세계인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혀가 길들여지지 않고 남을 죽이는 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여러 종류의 짐승들과 새들와 벌레들 혹은 기는 것들과 해물들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다. 우리는 개나 소나 말이나 비둘기나 뱀이나 물개 등이 어떻게 길들여지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혀는 사람이 길들일 수가 없다. 그것은 '다루기 힘든' 악이다. '쉬지 아니하는'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다루기 힘든, 제어할 수 없는, 길들일 수 없는'이라는 뜻의 말(아카타스케토스)로 되어 있다. 혀는 또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 사람의 혀는 이렇게 심히 악하다. 그래서 바울은 죄악된 인생을 묘사하기를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라고 했다(롬 3:13, 14).

[9, 10]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혀의 악함은 성도에게서도 종종 보인다. 그것은 이중적인 모순된 언어 생활에서 나타난다. 성도는 자신의 혀로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한다. 전통 사본에는 '주 아버지' 대신에 '하나님 아버지'(톤 데온 카이 파테라)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성도는 그 동일한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한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이중적이고 모순되다. 이것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일이다.

[11, 12]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야고보는 자연의 이치를 들어 악한 말이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는 것을 말한다. 샘은 단 물과 쓴 물을 함께 낼 수 없다. 과일나무는 같은 종류의 열매만 맺지 한 과일나무가 다른 열매를 맺지 않는다.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어떤 샘도 짠 물과 단 물을 함께 내지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성도의 언어 생활은 확실히 달라야 한다. 성도가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난 바 되었고 그 마음이 깨끗케 되고 새롭게 되었을진대 그는 구원받은 자다운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의 언어 생활에 대해 많이 말씀하지만, 특히 바울의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몇 구절 인용해볼 수 있다. 에베소서 4:25, 29, 31,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에베소서 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결론적으로, 1절부터 12절까지는 우리에게 두 가지 실제적 교훈을 준다. 첫째는 우리가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가르치는 직분은 귀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책임과 위험성이 따른다. 잘못 가르치거나 잘못 본을 보인다면, 하나님께 큰 책망과 벌을 받을 것이다. 말의 실수가 사람의 실수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인데, 가르치는 일은 이런 실수를 할 위험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고, 성경 지식과 신앙 인격에 있어서 상당히 자란 자들이 이 직분을 구하고 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말에 온전한 자가 되라는 것이다. 본문은 작은 지체인 혀가 온 몸을 다스린다고 말한다. 또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듯이, 혀가 온 몸을 더럽히고 우리의 삶의 과정을 불사르고 허물어뜨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 본문은 우리의 혀가 얼마나 악한지, 그것이 얼마나 길들지 않고 이중적이고 모순된 일을 행하는지 지적한다. 그러므로 말에 온전한 자가 온전한 자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의 목표는 무엇보다 말의 온전함에 있어야 하겠다. 우리의 성화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말의 온전함에 있어야 하겠다. 말의 실수는 우리의 인격의 부족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인격자가 된다면 우리의 말도 의롭고 깨끗하고 진실하고 선하고 덕스럽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하겠다.


13-18절, 두 종류의 지혜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본절은 참 지혜가 단순히 이론이 아니고 행위로 표현되되 선함과 온유함으로 표현된다고 증거한다. 참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요 성령의 열매로 맺혀지는 지혜이다. 성경에는 성령의 열매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기록되어 있다(갈 5:22, 23). 또 전도서 8:1에는 말씀하기를,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라고 했다. 참된 지혜는 선함과 온유함으로 표현되는 지혜이다.

[14, 15]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마음 속에 온유함 대신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자는 참된 지혜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지혜가 있는 것처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진리를 거스려 거짓말하거나 속이지 말아야 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 곧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다. '세상적'이라는 표현은 죄악된 세상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세상적 지혜는 어떤 점에서는 성도의 지혜보다 더 나아 보인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셨다(눅 16:8). '정욕적'이라는 원어(프쉬키코스)는 '육욕적'이라는 말로서 육신의 죄악된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따르는 것이라는 뜻이다. '마귀적'이라는 말(다이모니오데스)은 '귀신들 혹은 악령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뜻이다.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마음 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 '요란'이라는 원어(아카타스타시아)는 '혼란, 무질서'를 가리킨다. 시기와 다툼이라는 마음의 악이 혼란과 무질서와 모든 악한 일들이라는 현실로 표현된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가 아니다.

[17, 18]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세상적 지혜와는 대조적으로, 위로부터 난 지혜, 곧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어떠한가? 첫째로, 신적 지혜는 성결하다. 그것은 경건하고 도덕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거룩이요 또한 의(義)이다. 둘째로, 신적 지혜는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는 육신적 죄성에서 나오는 것들로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 등'을 열거하였고, 이와 대조하여 성령의 열매들로 '사랑과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 등'을 열거하였다(갈 5:19-23). 셋째로, 신적 지혜는 편벽과 거짓이 없다. 그것은 공정하고 진실하다. 출애굽기 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레위기 19:35, 36,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다시 말해, 신적 지혜의 특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함이다.

잠언은 지혜의 삶을 가르치는 책이다(잠 1:2-6). 거기에서 강조하는 지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대로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2: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잠언 2:20,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잠언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언의 모든 말씀은 결국 야고보서 본문이 가르치는 '위로부터 난 지혜'와 동일하다.


결론적으로, 야고보서 3:13-18의 내용은 두 종류의 지혜를 가르친다. 마음 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고 혼란과 무질서와 온갖 악으로 표현되는 것은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 지혜'이다. 그러나 그와 대조되는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함이 가득하며 편벽과 거짓이 없다. 우리는 세상적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지혜를 구하여 가져야 하겠다. 참된 지혜의 내용은 성결과 의와 선과 진실이다. 잠언 3:13-18,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우리는 참된 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께 구하여 얻음으로써 참으로 지혜로운 성도가 되자!

 

 


 

4장: 탐욕, 비방, 자랑을 버릴 것

1-10절, 세상과 벗이 되지 말라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성도들 간에도 싸움과 다툼이 있다.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다. '정욕'이라는 원어(헤도네)는 '쾌락, 욕망'을 의미한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운다'는 말은 신자의 본성 속에 선악 간의 싸움이 있음을 나타낸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그것을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대립으로 말씀하였다(갈 5:16, 17). 베드로전서 2:11에는 "영혼(프쉬케)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했다. 여기에 '영혼'이라고 한 말은 중생한 영혼의 지배적 성향을 가리키며, 그 성향은 범죄할 수 없는 원리이며 경건과 의와 선만을 지향하는 성질이다.

욕심은 이 세상 중심적인 것이다. 천국을 바라는 자는 이 세상의 욕심을 버릴 수 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성도는 자신을 비움으로써 그 선물을 감사히 거저 받는다. 성도의 순종 생활은 댓가성 순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응답하는 감사의 순종이다. 신자가 영적인 눈이 어두워 이 세상적인 이기심과 명예심 등의 욕심을 가진다면 싸움과 다툼이 생길 것이나, 각 사람이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인정하고 모든 욕심을 버린다면 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2, 3]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시기하여도'라는 원어는 '가지려 하여도'라고 번역할 수 있다. 성도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부족함이 조금도 없다. 주께서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고 또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라고 하셨다(마 7:7, 8). 단지 성도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은 얻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성도에게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칼을 달라고 한다고 그것을 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 주시고 해가 되는 것은 주지 않으실 것이다.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전통 사본에는 '간음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이여'라고 되어 있다. '간음한다'는 말은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다 적절하다. 육신적으로 간음하는 것은 육신적 욕망을 따라 행하는 육체 사랑이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영적으로 간음한다는 것은 우상숭배, 세상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 등 하나님 대신 무엇을 더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5).

간음하는 자들은 세상과 벗된 것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과 원수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진노와 심판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아야 하며 그것은 세상의 욕망을 다 버림으로써만 가능하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불행한 길이다.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모든 신자들 속에는 성령님이 내주(內住)하신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 대신 세상의 것을 사랑할 때 우리를 향해 시기하신다. 출애굽기 20:4, 5,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것은 세상 사랑, 명예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천국만을 사랑하라는 요구이다. 이것은 거룩한 시기심이다. 우리는 참으로 세상의 욕망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따라야 한다.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더욱 큰 은혜'란 세상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 욕심을 극복하여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하는 은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편에서도 성실해야 한다. 우리는 우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교만과 욕망은 친구이다. 교만은 명예욕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7-10]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또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해야 한다. 우리가 마귀를 물리칠 때 마귀는 우리를 피하여 떠나며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 하실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더 많이 더 자주 읽고 기도하기를 힘쓰므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죄인들은 손을 깨끗이 해야 하고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려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마음을 성결케 해야 한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우리는 세상적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과 천국만 바라고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과거를 슬퍼하고 애통해야 한다. 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가 모든 세상적 욕심을 버리고 세상과 벗이 되지 말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 것을 교훈한다. 욕심은 싸움과 다툼의 원인이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 탐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세상 사랑과 세상 욕심을 극복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아 세상적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천국만 바라며 살아가자!


11-12절, 피차 비방하지 말라

[11, 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본문은 성도들 상호간의 사사로운 비난을 금하신 말씀이다. 성도들은 피차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다(마 7:1-5).

우리가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은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율법이 가르치는 사랑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가 있고 흠과 부족이 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상대방의 흠과 부족을 찾아 비난하기 시작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며 서로 큰 상처만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사랑은 용서와 이해와 관용을 동반한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둘째로, 우리가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율법의 준행자이지 판단자나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다. 그가 율법을 주셨고 모든 사람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것이다. 그가 어떤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실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들을 그들의 죄에 대해 공의로 판단하셔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내리실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죄씻음과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겸손히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 사사로이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진리의 교훈은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교회적인, 공적인 판단과 비평의 사역을 금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종이며 교회의 파수꾼 된 목사들은 교회의 성결과 건덕(健德)을 위해 필요할 때 판단과 비평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역은 교회의 권징의 행위로 표현되기도 한다. 참된 목사들은 설교시에 교인들이나 교회의 잘못과 악을 지적하고 고치게 해야 한다. 오류와 악을 책망하고 바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주신 목적이기도 하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했다(딤후 3:16). 예레미야서에 보면,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거짓된 평강을 설교하였었다. 그러나 백성에게 진정한 평강은 없었고 있을 수 없었다(렘 8:11). 왜냐하면 죄를 회개함이 없이는 참된 평강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참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선언하였었다.

특히, 구약 시대에 선지자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거짓 선지자들을 혹독히 책망하였듯이(렘 23장; 겔 34장), 신약 시대에도 초대 교회 때부터 거짓 교사들과 목사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들이 필요하였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기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다(갈 1:6-10).

또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말씀하기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라고 하였다(고후 11:4, 13-15).

베드로 사도도 거짓 선생들에 대해 성도들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그는 베드로후서에 쓰기를,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하였다(벧후 2:1-3).

유다도 유다서에서 분명하게 쓰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라고 하였다(유 3, 4).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역사상 찾아볼 수 없게 심히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배격하지 않고 포용하고 교리적 순결성과 교회적 순결성을 강조하지 않고 인본적인 연합과 일치만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히 두려운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의 죄악에 대해 책망하고 외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로마서 14장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종들의 판단과 비평의 사역을 반대한다. 거기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라고 말씀했다(롬 14:1-4). 그러나 그 말씀은 성경에 명백히 가르치지 않은 문제, 즉 성경에 명백히 명하지도 혹은 금하지도 않은 문제에 대하여 개인의 견해와 확신의 자유를 허용하는 말씀인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본문 다음에 언급된 대로 날과 절기에 관한 것과 먹는 음식에 관한 것이 그러하다(5, 6절).

그러나 성경은 다른 여러 곳들에서 명백한 오류와 죄악에 대해서는 판단할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서 16:17, 18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말씀했고,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에서는,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말씀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이 가르친 바와 같이 우리는 피차 사사로이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결점을 찾아 그를 비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히려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주려고 해야 하며,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본문의 말씀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종들이 성도들과 교회의 성결과 건덕(健德)을 위해 하는 교회적인, 공적인 판단과 비평의 사역이 성경에 위배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오히려 주의 참된 종들이 그런 사역을 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는 대다수의 주의 종들이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지적하고 책망하지 않고 침묵하는 데 있다. 오늘날에는 교회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일들에 대해 지적하고 책망하고 비판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요청된다. 목사의 이런 사역을 위해 기도해야 할 책임이 신실한 성도들과 교회들에게 있다. 영적으로 혼탁해져가는 시대에 하나님의 참되고 온전한 뜻이 성실히 다 선포되기를 기도하자.


13-17절, 헛된 계획과 자랑을 버리라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 중에'라는 말은 이 교훈이 당시의 교인들에게 주신 것이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님을 보인다. 물론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 교훈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님을 알며 섬긴다는 자들인데 바르게 살지 못하므로 그들에게 이런 교훈을 주신 것이었다. 당시의 교인들 중에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헛된 계획이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계획은 다 헛되다.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존재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것이지, 내일 무슨 일이 우리에게 생길지 아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원문에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는 말 다음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생명이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안개'라는 원어(아트미스)는 '수증기, 김, 연기' 등의 뜻이다. 수증기가 공중에 올라갈 때는 무엇이 있는 것 같지만, 잠시 후에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이, 인간은 살아 있을 때는 존재하는 것 같지만, 죽으면 땅에 묻히며 그 존재를 대할 수 없게 된다.

시편 39편도 인생의 삶의 제한적임과 덧없고 허무함을 잘 증거하였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4-6).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본절은 성도가 마땅히 가져야 할 인생관을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며 그의 뜻대로 이것 혹은 저것을 하겠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주의 뜻이면'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가 살기도 하고'라는 말씀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증거한다. 인간의 생명의 시작 곧 출산이나 생명의 끝마침 곧 죽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창세기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민수기 16:22, "모든 육체의 생명['영들']의 하나님이여." 욥기 12:10,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사도행전 17:25,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 다니엘 5:23,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2:20,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래서 시편 127편에는 성도에게 주신 자녀를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것 저것을 하리라'는 말씀은 성도의 모든 활동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증거한다.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언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며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원하고 힘써야 한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헛된 계획은 말로 표현되든지 안되든지 간에 헛된 자랑이 된다. 헛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권자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 보장 없는 일을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다. 우리는 하루 동안에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므로 성도가 헛된 계획을 하고 헛된 자랑을 하는 것은 다 악한 일이다.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본절에서 '선'은 문맥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삶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것이 인생의 바른 삶인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런 바른 생활 원리, 행동 원리를 알고도 그대로 살지 않는 것, 곧 헛된 계획을 세우고 헛된 자랑을 하는 것은 죄가 된다. 그것은 불신앙과 불경건, 교만과 인본주의의 죄이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은 우리에게 두 가지 실제적 교훈을 준다. 첫째는, 우리가 세상에서 헛된 계획과 헛된 자랑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계획과 자랑은 주권자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경건과 불신앙이며, 불확실한 미래를 마치 자기가 관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의 죄악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의 뜻 안에서 살아가며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본주의요 바른 신앙의 태도이다. 우리는 세상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 성도답게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야 하겠다.

 

 


 

5장: 인내와 기도

1-6절, 부자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

[1-3]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본문의 부자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고 교회 안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당시의 부자들은 말과 행실, 이론과 실제,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았고 거리가 있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고생과 재난과 불행이 임할 것을 경고하면서 울고 통곡하라고 교훈한다. '고생'이라는 원어(탈라이포리아)는 '재난, 불행' 등을 가리킨다. 야고보가 교훈한 통곡은 회개의 통곡이다. 죄인들이 회개해야 할 때 눈물로 회개치 않으면 망하고 만다.

본문은 부자들의 잘못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그들은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3절). 그들이 쌓아놓은 재물과 부는 썩었고 그들의 옷들은 좀 먹었고 금과 은은 녹이 슬었다. 그 녹은 그들의 잘못을 증거하고 불같이 그들의 살을 먹을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 저축은 필요하고 좋으나 정도껏 해야지 지나치면 악이 된다. 저축은 기본적 생활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전도와 구제를 위해 돈을 잘 써야 한다. 지금은 말세이다. 세상은 끝나가고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다가오고 있다. 돈은 선한 일에 사용되어야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지, 자기를 위해 쌓아놓고만 있으면 책망받을 죄가 된다. 물질적 부요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고 신앙의 해이와 배반을 가져오며 결국 성도를 타락하게 한다. 그러므로 기본적 생활을 위한 것 외의 물질은 저축만 해놓지 말고 선하게 써야 한다. 전도와 구제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둘째로, 부자들의 경제 생활에는 불의함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밭에서 추수한 품군들에게 정당한 인건비를 지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품군들에게 돈을 주는 것을 지체했거나 돈을 떼어먹으려 했다. 일꾼들에게 무슨 일이든지 시켰으면 인건비를 지체치 말고 즉시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이 주어야 하고, 만일 외상으로 시키려 했으면 미리 약속했어야 했고 만일 줄 돈이 부족했으면 일 시키는 것을 연기했어야 했다. 인건비를 받지 못한 품군들의 우는 소리가 하나님께 들려졌다. 하나님은 억울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5, 6]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셋째로,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요로 사치하고 연락하였다. 사치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집이나 옷이나 자동차나 가구나 신발 등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에 적용된다. 연락은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것 이상으로 육신의 욕망과 쾌락을 구하는 것이다. 오락이나 운동이 나쁘지 않지만, 거기에 빠지면 나쁘다. 사치와 연락은 죄악이다. 부자들은 사치와 연락으로 그들의 마음을 살찌게 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두려움과 조심함을 가지지 못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 생활에 대해서도 판단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치하거나 연락해서는 안된다.

넷째로, 부자들은 또한 옳은 자들을 정죄하고 죽였다. 저 옳은 자들은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여기에 부요함이 악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이 더욱 드러난다. 부자들의 부요함은 그들을 사치와 연락에 빠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옳은 자들을 정죄하고 죽이게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악하게 사용되었는가! 우리는 물질적 부요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이런 죄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돈을 사랑함은 일만악의 뿌리이다(딤전 6:10).


7-11절, 인내에 대하여

[7, 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부자들의 불경건하고 방탕하고 불의하고 의인을 핍박하는 환경 속에서도 이 교훈을 받으라는 뜻이다. '형제들아'라는 말은 악한 부자들과 대조하여 순종하는 진실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기본적 진리이며 그리스도인들의 확실한 첫번째 소망이다. 현실은 악할지라도 성도는 주의 재림하시기까지 오래 참아야 한다. 마치 농부가 열매를 바라면서 파종할 이른 비와 결심케 할 늦은 비를 참고 기다리는 것과 같이, 우리는 오래 참고 마음을 굳게 하고 기다려야 한다. 주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이다.

재림의 임박 의식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하고 유익하다. 만일 이런 의식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해이해질 것이다. 곧 오시려는 것은 실상 하나님의 심정이다. 주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은 단지 모든 택한 자들을 다 구원하시기 위함일 뿐이다.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또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 서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면서 현실의 어려운 문제들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현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고난도 그가 주셨고 악한 현실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겸손케 하시기 위해, 즉 우리의 유익을 위해 고난의 현실을 주셔서 우리를 단련시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원망하지 말자. 우리는 모든 현실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원망하는 것도 죄가 된다. 심판자 하나님께서 문밖에 서 계시니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그의 의롭고 완전한 판단에 맡기자.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그들은 백성에게 배척을 받았었다. 그들은 돌에 맞기도 하였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이 없고 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많은 고난 중에도 오래 참았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본이 된다. 우리도 참된 믿음 안에서 현실의 여러 가지 고난을 오래 참는 자들이 되자.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인내하는 자는 복되다. 성경에서 인내의 한 대표적 예는 욥이다. 욥은 재물의 심히 큰 손실과 자녀들의 죽음과 자신의 건강의 상실이라는 감당키 어려운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인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욥의 후년에 같은 수만큼의 자녀와 배갑절의 재물을 복으로 주셨다.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을 고난 가운데 영영히 버려두시는 자가 아니다. 그는 자비와 긍휼이 지극히 풍성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돌아보시고 지키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 중에 혹시 악한 부자들이 있으면 회개해야 한다. 말세에 재물을 쌓는 것이나 불의로 재물을 모으는 것이나 사치하고 연락하는 것이나 의인을 정죄하고 죽이는 것 등은 다 악한 일들이다. 이런 일을 하는 악한 부자들이 있다면 회개하자.

둘째로, 우리는 잘못된 물질 생활을 버리고 바른 물질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물질을 쌓아놓기만 하지 말고 또 불의하게 돈을 모으거나 사치하고 연락하지 말고, 의롭고 정당하게 돈을 벌고 근검절약하게 그것을 쓰며 특히 전도와 구제의 선한 일들에 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오래 참아야 한다. 마음을 굳게 하고 서로 원망하지 말고 앞서 갔던 선지자들을 기억하면서 오래 참자. 하나님은 결코 성도를 버리지 않으시고 현세와 내세에 지키시고 도우신다.


12절, 맹세하지 말라

[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맹세는 맹세하는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자신의 주장이나 약속의 참됨을 판단하시고 증거하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본절의 뜻은 하나님의 이름 외에 하늘이나 땅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로 쉽게 맹세하고 쉽게 변경하는 당시의 잘못된 풍조를 정죄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하고, 또 그 외의 경우에는 자신의 가부(可否)의 의사를 표현하면 된다.

합법적인 맹세는 오늘날도 여전히 정당하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맹세하였음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26:63, 64,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고린도후서 1: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1: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2, "하나님의 이름만이 사람이 맹세해야 할 이름이며, 맹세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스럽고 두려운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되이 혹은 경솔히 맹세하는 것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죄악되며 매우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중대한 일들에서 맹세는 구약 아래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약 아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증되므로, 합법적 맹세는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될 때 그러한 일들에서 행해져야 한다."

매튜 풀, "모든 맹세가 금지된 것이 아니고, 일상적 일에서 거짓되고 성급하고 헛된 맹세, 정당한 이유가 없고 습관적이고 빈번한 맹세가 금지된 것이다."


13절, 기도할 때와 찬송할 때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는 기도할 때이다. 그 때 우리는 예배당이나 산이나 기도의 골방이나 어디든지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근심하거나 고민하거나 염려하거나 낙심하거나 방황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한다.

우리에게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찬송할 때이다. 삶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의 건강도, 의식주도, 가정도, 사회적 환경도,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모든 복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자신을 높이거나 자랑하거나 축하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여야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14-18절,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

본문은 성도들이 병들었을 때 해야 할 일을 교훈한다. 그것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름을 바르며 죄를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성도들이 병들면 먼저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을 청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장로들'은 오늘날 교회의 목사와 치리 장로들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목사는 설교와 치리의 책임을 겸한 자이고 치리 장로는 치리의 책임만을 가진 자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는 교인들을 돌아보는 목자요 감독자요 인도자이다(행 20:28). 그들의 첫번째 직무는 교인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든 이들은 목사와 장로들을 청해야 하며 그들은 병든 이들을 심방해야 한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사도 시대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 6:12, 13,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기름은 아마 그 당시에 의약품으로 사용되었든지 아니면 단순히 성령의 은혜와 능력의 상징물로 사용되었다. 우리는 병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되 의술과 약품을 하나님의 치료의 도구로 인정하며 사용한다.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목사와 장로들은 병든 교인들을 방문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사랑이요 사랑의 교제이다. 병의 치료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병을 주신 이도 치료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병의 원인을 정확히 아시며 또 그것의 완전한 치료 방법도 아신다. 그가 원하시면 우리의 병은 깨끗하게 치료될 것이다.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죄와 병이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물론 욥의 경우와 같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신명기 28장에 증거된 대로, 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과 용서가 병 치료의 시작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몸이 병들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겸손히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자신을 성찰하고 생각나는 우리의 죄와 부족을 고백해야 한다.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죄의 고백은, 물론 공개적이지 않는 것이 유익할 때도 있지만, 때때로 공개적일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고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기도 한다. 특히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고자 할 때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거리끼는 죄악들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그런 후 우리는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해야 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의인의 간구'라는 원어(데에시스 디카이우 엔에르구메네)는 '의인의 힘 있는 기도, 의인의 열렬한 기도'라는 뜻이다. 의인은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를 가리킨다. 성도들의 힘 있는, 열렬한, 간절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병 치료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범사에 기도는 능력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통로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지정된 방법이다.

[17, 18]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야고보는 기도 응답의 예로 엘리야 선지자를 들었다. 엘리야는 우리와 다른 어떤 초인적(超人的)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능력의 역사는 단지 그의 기도 생활에 있었다. 그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때 3년 6개월간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 그가 다시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늘이 비를 주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19, 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병자 방문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병자를 방문하여 위하여 기도할 때 때로는 진리를 떠났던 자들을 돌이키게 한다. 이 일은 참으로 귀하다.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도 귀하지만, 죄인의 영혼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더욱 귀하다. 그것은 한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는 것이다. 그것은 한 죄인의 많은 죄를 덮어주는 일이다. 심방과 기도를 통해 육신의 병뿐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은 몇 가지이다. 첫째는 우리가 하늘로나 땅으로나 다른 어떤 피조물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경솔하게 맹세하지 말라는 뜻이다. 둘째는 우리가 고난 당할 때 기도하고 즐거울 때 찬송하라는 것이다. 셋째는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병든 자는 교회의 장로들(목사와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되 죄를 고백하면서 병 낫기를 위해 간절히, 힘을 쏟아 기도해야 한다. 이 때 하나님의 응답과 도우심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다른 이의 육신의 병만 고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성도들 가운데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난 자를 돌아서게 하는 것은 더욱 귀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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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서


2002년 4월 21일 (초판)


(김효성 목사)


내용 목차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요한이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이 점에 대하여 초대 교회의 전통은 분명하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264년경 사망), 및 키프리안(258년 사망)은 본서신을 사도 요한의 서신으로 인용하였다. 본서신은 아마 주후 85-9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는 '진리 안에서 행함'이다. 아울러 본서신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교리를 저버린 이단에 대해 경계해야 할 것을 밝히 교훈하였다(7-11절).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1-3절, 문안 인사

본문은 문안 인사인데, 그 가운데 진리 안에서의 성도의 사랑과 교제에 대한 귀한 사실이 증거되어 있다.

[1, 2]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한다. '장로'라는 말은 나이 든 노인을 암시하는 말로서 사도라는 말보다 더 친근감이 있는 표현일 것이다. 본서신은 사도 요한의 노년에 쓴 것 같다. 사도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자신을 장로라고 불렀다(벧전 5:1).

본서신의 수신자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이다. 구원은 곧 하나님의 택하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어떤 이들은 '택하심을 입은 부녀'라는 표현을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부녀'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4절에 '너의'라는 단수 인칭대명사와 5절의 '부녀여'라는 단수 호격 명사와 13절의 '네'와 '네게'라는 단수 인칭대명사들은 한 교회를 가리키는 말로서는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여성도와 그의 자녀들은 하나의 작은 교회를 형성한다고도 볼 수 있다.

본문에는 '진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1절의 '내가 참으로'라는 말도 영어성경들처럼 '내가 진리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도는 자신을 '진리 안에' 있는 자로 표현하며 다른 성도들을 '진리를 아는 자들'로 표현한다. 또 그는 이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며 영원히 그러하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6에서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셨고 요한복음 17:17에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또 바울은 에베소서 1:13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들'로 표현하였다. 진리의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그를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는다는 약속이다.

성도는 진리를 아는 자들이며 이 진리가 그들 속에 있는 자들이다. 이 진리는 그들 속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 이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실 것이다. 그의 진리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는 것이 곧 구원이며 영생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이 진리 안에서, 이 진리 때문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사도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을 '내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또 그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한다'고 말하며, 그 까닭은 '우리 안에 거하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 때문'이라고 말한다. 진리가 우리를 사랑의 줄로 묶었다. 진리가 우리를 한가족과 같은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였다. 교회는 세상의 이익 집단과 다르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정이다. 비록 우리가 서로 다른 집에 살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대가족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그의 형제요 자매이다(마 12:50). 성도의 사랑의 교제에 교회의 교회다운 점이 있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그들에게 기원할 때에도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진리로 구원을 얻었고 사랑으로 그 진리를 실천한다. 우리가 진리를 우리 속에 굳게 붙잡고 믿고 확신할 때 그리고 그 진리 때문에 구원받은 다른 이들을 힘써 사랑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더욱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진리, 우리가 믿은 진리를 가장 귀히 여기며 확신하고 사랑하고 널리 전파하자. 그 진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경 말씀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와 동일하게 진리를 받고 진리로 구원받은 다른 이들을 사랑하자. 우리의 사랑의 이유는 오직 진리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다.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 자들이 된 것이다. 천국은 성도들이 참된 사랑으로 사랑하며 영원히 살 곳이다. 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세상에서도 서로 사랑해야 하고, 서로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진리와 사랑 안에 거할 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더욱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생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받아 누릴 가장 귀한 복이다. 우리가 바로 그런 자들이 되자.


4-6절, 진리 안에서 행함

본문은 신자가 진리 안에서 행함을 보고 기뻐하는 사도 요한의 기쁨을 증거하면서 우리 모두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가 될 것을 교훈한다. 또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또 다른 말로 서로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진리와 사랑은 모든 성도에게 필수적인 두 요소이다.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본서신은 앞에서 말한 대로 사도 요한이 믿는 여성도에게 보낸 개인적 서신이다. 그러나 그 여성도와 그의 자녀들은 작은 가정 교회를 이룬다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본서신의 교훈은 한 개인적 가정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시대,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교훈이다.

그 여성도의 자녀들 중에는 진리대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의 모든 자녀들이 다 잘 믿은 것 같지는 않다. '너의 자녀 중에'라는 말은 그 자녀들 중 일부가 잘 믿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부모가 잘 믿는다고 자녀들이 자동적으로 잘 믿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진리에 행한다는 말은 진리 안에서 행한다, 진리대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이란 10계명과 성경의 모든 말씀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신 십계명대로,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을 뜻한다.

사도는 그 여성도의 자녀들 중 어떤 이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마음의 태도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보여지도록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지 안 행하는지를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도는 그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 심히 기뻐하였다고 말한다. 그렇다. 죄인들의 심령 속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큰 기쁨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심히 큰 기쁨이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이 주 예수님을 믿는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큰 기쁨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자신의 기쁨과 자랑이라고 자주 표현하였다(빌 4:1; 살전 2:19, 20). 더욱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 진리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보는 것은 목사와 성도들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전파된 말씀을 거역하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슬픔이 되지만(빌 3:18), 그것을 받아 그대로 사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기쁨이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사도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라는 강조는 언제나 필요하고 유익하다. 본서신에 나타난 대로, 그 여성도가 처한 형편은 이단자들의 미혹이 있는 형편이었다. 이단과 오류가 교회 안팎과 성도들 주위에 많이 들어와 있을 때 성도들은 사랑이 식어지기 쉬울 것이다. 주께서도 당신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셨다(마 24:12).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진리를 굳게 붙들고 보수하며 이단과 오류를 배격하는 일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 간에는 서로 사랑하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성도에게 새삼스런 계명이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믿기 시작할 때부터 배운 기본적인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새 계명으로 남겨 주셨고 또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의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3:34, 35). 참 교회는 예수 믿어 구원받은 후 서로 사랑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사도 요한은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의 필수적인 두 요소를 강조한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들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거스려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십계명을 범하거나 성경 말씀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거역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계명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우리가 믿기 시작할 때부터 들은 바와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행하라'는 말은 '사랑으로 행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다. 계명을 순종함과 서로 사랑함, 진리 안에서 행함과 서로 사랑함은 별개의 일이 아니고 둘 다 필요하다. 그것은 둘 다 필수적이다. 여기에 사도 요한의 강조점이 있다.


결론적으로, 4절부터 6절까지는 우리에게 몇 가지 기본적 사실을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즉 진리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를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어야 한다.

둘째로, 진리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힘써 읽고 배우며 그대로 실천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이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다.

셋째로, 진리대로 행하는 것은 또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내용이 사랑이다. 주께서는 인간 관계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서로 사랑하라는 한 마디로 요약하셨다. 우리는 계명을 순종함과 서로 사랑함을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고 둘 다 지켜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진리와 사랑을 둘 다 지켜야 한다. 이단 사설이 난무하는 말세에 우리는 성경적 신앙의 옛길을 보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심령의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오류와 악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하지만, 믿고 순종하는 이들 간에는 진실한 성도의 교제와 사랑을 힘써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7-13절, 미혹하는 자를 물리치라

본문은 미혹하는 자 곧 이단의 정체를 말하고 우리가 바른 교훈 안에 거하고 이단자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말한다.

[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미혹하는 자는 속이는 자라는 뜻으로 이단자를 가리킨다. 이단은 마귀의 활동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거나 그 말씀을 빼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것이다(갈 1:8, 9; 딤후 2:17, 18). 벌써 사도 시대에 많은 이단자들이 교회 안팎에 나타났다. 사도는 이제 그들의 정체에 대해 언급한다.

본절에 언급된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임하심을'이라는 원어는 현재분사이지만 요한일서 4:2, 3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라고 불리우신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다(요 1:1). 그가 때가 되어 사람이 되신 것이었다.

본래 신적 인격 즉 하나님이셨던 그가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렇다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두 인격이 아니시다. 그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본래 신적 인격이셨던 그가 인간의 본질을 취하셨다. 그럼으로써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 되셨다. 신성과 인성, 신적 본질과 인적 본질이 결합되셨으나 두 분이 아니고 한 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1문답은 진술하기를,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救贖者)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시지만 사람이 되셨고 그래서 두 구별된 본질들에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며 한 분이셨고 영원히 계속 그러하시다"라고 하였다. 이 지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이요 성경적 지식이다. 이 지식을 버린 목사들은 다 미혹하는 이단들이다.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우리의 일한 것'이란 사도들이 행한 전도의 일과 그로 인해 받은 구원을 가리킬 것이다. 전통사본에는,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않고 온전한 상을 얻도록 하라"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여기에 '온전한 상'은 전도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을 뜻한다. 고린도전서 3:5-8,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사도 요한은 편지를 받는 그 여성도와 그의 자녀들이 이단에 미혹되지 않고 믿음을 지킴으로 자신의 전도 사역이 헛되지 않고 마지막 날에 주께 상을 얻는 일이 되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지내쳐'라는 말이 전통사본에는 '이탈하여' 혹은 '범죄하여'라는 말(파라바이노)로 되어 있다.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단은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 즉 성육신의 교리 안에 거하지 않는 자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바른 교훈 혹은 교리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구주이시기 때문에 그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를 거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가질 때, 우리는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을 둘 다 영접하고 섬기는 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를 부정하는 자이다. 요한일서에서도 사도는 이 점을 강조하였다. 요한일서 2:22, 23,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이단을 분별하고 그리스도의 바른 교리 안에 거해야 한다.

[10, 11]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이 교훈[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교리]을 가지지 않은 자'는 이단자를 가리킨다. 사도는 '이런 자는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말한다. 이단들은 사탄에게 속하기 때문에 참 교회가 그들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로마서 16:17, 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디도서 3: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오늘날 교회의 현실에 적용해보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이단은 교황을 머리로 한 로마 천주교회의 사상과 조직체이다. 또한 현 시대에 가장 심각한 이단은 기독교계 전체를 부패시킨 자유주의 신학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용납하는 자유주의 혹은 포용주의 교회들은 잘못이다. 또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회를 배격하지 않는 교회연합운동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들과 성도들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배격해야 하고 그들을 용납하는 교회들을 책망해야 한다.

[12, 13]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분명한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미혹하는 자들인 이단을 분별해야 한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둘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바른 교리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을 다 믿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파악하고 그 안에 거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 신앙을 이탈한 한 것이 사탄의 미혹이다. 셋째로, 우리는 미혹하는 이단자들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집에 들이거나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의 악한 일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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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001년 10월 21일 (초판)


(김효성 목사)

내용 목차

 

베드로전서 서론

1장: 믿음의 시련

2장: 성도의 특권과 의무

3장: 선행에 힘쓸 것

4장: 그리스도인다운 생활

5장: 장로들에게 주는 교훈

 

 

 


 

본서신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이며(1:1) 그가 불러주는 내용을 필기한 사람은 실루아노이다(5:12). 역사상 베드로전서를 가장 일찌기 인용한 책은 베드로후서이다(벧후 3:1). 2세기의 폴리갑과 이레니우스, 3세기의 터툴리안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등은 본서신을 인용하였고, 특히 이레니우스는 본서신을 인용하면서 베드로전서라고 언급하였다.

본서신을 받은 자들은 '흩어진 나그네'인데, 그들은 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2:9, 10). 본서신의 저작 시기는 아마 바울의 옥중 서신보다 후 그리고 베드로의 순교 이전, 즉 주후 65년경일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본서신은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는 책이다(1:6, 7; 2:18-21; 3:14, 16, 17; 4:12-19; 5:8-10).

 

 


 

1장: 믿음의 시련

1-2절, 문안 인사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도 그가 항상 데리고 다니시던 세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막 5:37; 9:2; 14:33).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한다. 사도는 주 예수께서 친히 불러 세우신 자들로서 12제자들과 바울에게 해당되었다(눅 6:13; 롬 1:1). 열두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고 나아가 전도하며 권능을 받아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쳤던 자들이었다(마 10:1; 막 3:14, 15).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성도들에게 편지하였다. 위의 지역들은 소아시아의 지역들로서 오늘날 터어키 지역에 해당한다. 성도들을 '나그네'라고 부른 것은 우리의 본향이 천국이기 때문이다(히 11:13-16). 역대상 29:15에 보면, 다윗은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고백했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묘사하였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미리 아심'이라는 말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것을 미리 아셨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그런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증거한다(엡 1:4, 5, 11).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

둘째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의 피뿌림을 얻은 자들이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그를 따르게 된 자들이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미워하며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린 자들이다(눅 9:23; 14:26, 33). 그들은 오직 주님만 따르며 그의 말씀만 따르는 자들이다. 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뿌림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다.

셋째로, 성도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의 사역은 일차적으로 교회 창설 시기에 있었던 방언과 예언과 병고침 등의 초자연적 은사들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에 있었다. 죄인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는다. 이로써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고 죄악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 특히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의 관계를 나타낸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구별되시지만, 신적 본질 즉 신성(神性)에 있어서는 동일하시다. 이것이 성경이 밝히 계시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우리들의 거듭남 곧 중생(重生)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혜로 된 것이다. 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중생의 근거를 나타낸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즉 대리적 형벌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영원한 새 생명이 우리 속에 심어진 것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모든 사실을 확증하고 보증하였다. 하나님의 선택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도, 성령의 중생케 하심도 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의 결과이었다.

성도는 거듭난즉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죄의 결과는 죽음과 멸망이었고 거기에는 두려움과 절망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죄씻음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성도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은 산 소망인 것이다.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세상의 것들은 다 썩고 더러워지고 낡아진다. 그래서 시편 102편에는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라고 말씀했다(시 102:26). 또 이사야 40장에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라고 말씀했다(사 40:6, 7). 그러나 성도들을 위해 하늘에 간직된 기업 즉 천국은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성도들은 그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상속자들인 것이다(롬 8:17).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앞절에 말씀한 천국 기업은 본절에서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라고 표현되었다. '말세에 나타낸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시에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성도들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천국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더불어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 놀라운 구원 곧 천국을 얻기 위해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요 10:27, 28). 바울 사도도 말하기를, "이를[이 복음을]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했다(딤후 1:12).

[6, 7]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구원이 이와 같이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이 확실히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을 당하며 잠깐 근심하게도 되지만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다. 없어질 순금도 용광로 속에서 제련함으로써 나온다. 우리의 믿음의 시련은 금의 제련보다 더 귀하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환난과 시험을 통해 신앙 인격의 단련을 받아 거룩하고 겸손하고 믿음 있는 자가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한 열매들을 많이 맺게 되므로 장차 예수님의 재림시에 '잘했다'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로마서 5장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줄 앎이로다"라고 했다(롬 5:3, 4).


결론적으로, 1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셔서 천국을 얻게 하시며 세상에서 믿음으로 보호하심을 입게 하신다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여기에 해당하는 참된 성도들인지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구원을 받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는가? 또 그의 속죄의 피뿌림을 받았는가? 속죄 신앙은 성도의 기본적 신앙이며 생명선이다. 이 질문에 분명한 대답이 없다면,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에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속죄 신앙이 분명히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며,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의 선택과 대속(代贖)과 중생과 구원과 보호와 천국을 감사하고 찬송하며 그 은혜에 억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하는 양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힘써 살아야 한다. 산 소망을 굳게 가지자. 천국을 확신하자. 천국을 즐거워하자. 또 이 확신과 즐거움 속에서 현실의 고난과 시험을 기쁘게 맞자. 그 속에서 믿음의 단련을 받자.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장차 칭찬을 받을 만한 선한 열매들을 이 세상에서도 많이 맺는 자들이 되자.


8-12절,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가 편지하고 있는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성도들은 참으로 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였다. 그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를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로 가능하였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고 하셨다(요 15:26, 27).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목격했던 동료들의 증거를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요 20:29). 또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진술하기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요 20:30, 31).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였다. 사랑은 상대방의 가치를 알 때 생긴다. 사람들은 돈의 가치를 알 때 돈을 사랑한다. 그러나 돈의 헛됨을 알 때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의 영혼들의 가치를 알 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치를 알 때 그를 사랑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음을 알 때,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교제와 대화로 표현된다. 사람은 누구를 사랑할 때 그와 교제하고 그와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또 사랑은 봉사와 수고로 표현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하고 돈을 쓰는 것은 아깝지 않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그의 일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하고 물질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특히 기쁨으로 표현된다. 사랑하면 기쁨이 생긴다. 그래서 사랑하면 얼굴이 예뻐진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쁨이 생겨서 그런 것이다. 기쁨이 있는 얼굴은 예뻐 보이지만, 근심과 슬픔이 가득하면 미워 보이기 마련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주를 기뻐하였다. 익명의 찬송 작가는 이렇게 썼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찬송가 85장).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의 목표는 영혼의 구원이다. 우리의 영혼은 죄로 인하여 죽었었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그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해야 하며 그래야 구원을 얻고 영원한 나라에 확실히 들어갈 것이다.

[10, 11]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베드로는 이 구원이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은혜요 그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였던 바임을 증거한다. 또 그들 속에서 역사하셨던 그리스도의 영이 그가 장차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였으므로 선지자들은 그것이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연구하였다고 증거한다.

베드로 사도가 구약 선지자들 속에 역사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신성(神性)을 가지신 분이시므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전, 즉 구약 시대에도 선지자들 속에 역사하실 수 있었고 또 역사하셨다.

구약의 선지자들 속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영이 그가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셨다는 것은 구약 성경 이사야 53:5, 6과 시편 16:10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사야 53:5, 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시편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또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때와 시기를 연구했다는 것은 다니엘 9:24-26을 예로 들 수 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7x70)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성밖에 둘러판 못]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이 70이레의 기한에 관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라는 말씀은 음력으로 69이레(7이레+62이레) 즉 483년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예루살렘성의 중건을 허락받았던(느 2:5, 6) 느헤미야의 때 즉 바사왕 아닥사스다 20년(느 1:1)인 주전 445년으로부터 계산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이 된다고 본다.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신약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드러났다. 예수께서는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서 나타나셨다. 또 이 사실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 전도자들이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전파한 바이었다. 또 하늘의 천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보기를 원한 바이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자들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8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믿고 사랑하며 기뻐했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언되셨던 분이심을 증거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셨다. 예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다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택하신 많은 죄인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믿고 사랑하며 그를 기뻐하였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자들 중에 속하였다.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준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었는가? 우리는 그를 믿고 구원을 받았는가?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과 교제하기를 좋아하고 그를 위해 봉사하기를 좋아하고 있는가? 셋째로, 우리는 특히 그를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가?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그를 기뻐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자신을 점검하고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일에 분발하자!


13-25절, 거룩과 사랑을 권면함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았으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야 한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는 말은 나태하고 해이하거나 정신 없이 살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태도를 가지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는, 4절에 말씀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며 5절에 말씀한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우리의 몸의 부활과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을 가리킨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과 주께서 주실 이 영광스런 구원을 온전히 바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소망의 내용을 조금 바라거나 일시적으로만 바라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끝까지 바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거기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 성도의 소망은 그것뿐이다. 우리는 그것만을 바라는 자들이다. 히브리서 6:11, 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4-16]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순종하는 자녀들처럼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전에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알지 못했던 때 좇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을 본 삼지 말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모든 면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불순종적이고 불결한 삶을 살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거룩은 세상의 더러운 죄악들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상태를 말한다. 우리의 생각도 말도 행위도 다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친히 말씀하셨다(레 11:45).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가 사람들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섬기는 자들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나그네와 같은 세상 생활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향은 영광의 천국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불순종과 불결의 죄악들만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의와 거룩과 선과 진실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8, 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너희가 알거니와'라는 말은 복음 지식과 신앙은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이고 기본적임을 가리킨다. 속죄 신앙 없으면 구원받는 참 신앙이 없는 것이다. 복음의 기본적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속(救贖)하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은과 금으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것은 1억원이나 100억원이나 1조원으로도 살 수 없는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 즉 참된 신성(神性)을 가지신 그 분의 보배로운 피값으로만 가능하였다. 이렇게 귀한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부터 예정된 분이시다. '미리 알리신 바 된'이라는 원어는 '예정된'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세에 우리를 위해 나타내신 바 되셨다. '이 말세'는 신약 시대를 가리킨다. 신약 시대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시대로 표현되었다. 구약 4천년의 역사가 지나고 이제 마지막 시대가 온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는 예정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참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속 사역을 이루신 시대이다.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셔서 부활의 영광을 주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땅에 있는 사람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전통 사본에는 본절의 시작 부분이 '너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순종함으로'라고 되어 있다. '진리'는 복음을 가리킨다. 진리를 순종한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복음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일이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된다. 그 결과, 우리의 죄악된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고 그 깨끗해진 마음으로 거짓이 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마음으로'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깨끗한 마음으로'라고 되어 있다. 성도들은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다운 삶이다. 예수께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된 새 계명을 주셨다. 참 성도들은 이미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있겠지만, 우리는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명심하자.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은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영원히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 '항상 있는'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영원히 있는'이라고 되어 있다. 중생의 새 생명은 죽지 않는 생명이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 된 생명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실제로 거룩한 순종과 뜨거운 사랑으로 계속 나타나는 생명이다.

[24, 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전한 복음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든 육체와 그 모든 영광과 비교된다.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지듯이, 모든 육체는 풀과 같이 쇠하여지고 그 모든 영광은 오래지 않아 풀의 꽃과 같이 다 떨어질 것이다. 구약 전도서의 증거한 말씀대로,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다 헛되다. 풀같이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 꽃과 같이 떨어지지 않을 사람의 영광이 무엇인가? 그러나 모든 육체와 그 모든 영광에 대조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쇠하여지고 없어지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은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의 새 생명도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다. 따라서 여기에 근거한 성도들의 거룩하고 사랑하는 삶은 결코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실제적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받을 은혜 곧 영광스런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실하게, 충만하게 소망해야 한다. 이 소망은 우리가 조금 가지거나 일시적으로 가지는 소망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 소망을 온전히, 충만히, 끝까지 가져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순종하는 자녀들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모든 행실 즉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조상 때로부터 물려받은 망령된 행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거룩한 삶을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 복음 진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으로 거듭남을 얻었으므로 우리는 사랑이 변하거나 식어지지 말고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


 

 


 

2장: 성도의 특권과 의무

1-10절,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모든 . . . 모든 . . . 모든 . . .'이라는 표현은 '온갖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은 악한 생각과 뜻을 가리킨다. '궤휼'은 거짓과 속임을 가리킨다. '외식'은 겉으로 선하게 보이나 속에는 악독한 것이요, '시기'는 다른 사람의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를 괜히 깍아내리고 미워하는 것이다. '비방'은 다른 사람에 대해 정당하지 않게, 왜곡되게, 악하게 비난하거나 평론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은 성도들이 이런 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옛사람의 성질들이며 마귀적인 성질들이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이런 죄성들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이런 악들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마땅히 이런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2]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아이들은 엄마의 젖을 사모한다. 아기들은 엄마의 젖맛을 알기 때문에 배가 고플 때 그 젖을 못빨면 마구 울어댄다. 아기들은 아프거나 몸이 안좋으면 젖을 잘 안먹으려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정상적이면 엄마의 젖을 사모할 것이다. 갓난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아기들은 이렇게 엄마의 젖을 잘 먹을 때 건강하게 잘 자라게 된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는 말(토 로기콘 아돌론 갈라)은 '거짓 없는, 순수한 말씀의 젖'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젖에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단 사설들, 인본주의적 생각들이나 말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흥미만을 위주한 예화나 이야기들 등과 구별시킨 말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성경의 바른 교훈을 늘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할 이유는 자라기 위해서이다.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장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씀했다(13-16절). 히브리서 5장에는 신앙 안에서 어린 아이와 장성한 자를 구별하였다(13, 14절). 우리는 주 안에서 자라야 한다. 그런데 신앙 성장의 정상적 방법은 순수한 성경 말씀을 섭취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들에는 없다.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노력하고 행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로, 중생(重生)과 칭의(稱義)의 구원은 우리가 이미 받았다. 에베소서 2: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둘째로, 영화(榮化)의 구원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베드로전서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얻었나니." 로마서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다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12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이미 받은 구원, 장차 영화롭게 완성될 구원을 현실 가운데서 다 드러내라는 것이다. 즉 온전한 경건 생활과 도덕 생활을 하라, 의와 선과 진실을 다 행하라는 뜻인 것이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법적으로 이미 얻은 의(義)를 실제로 우리의 인격과 삶에서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성화 과정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순수한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거룩한 신앙 인격으로 점점 자라 가는 것이다.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주의 인자하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가리킨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긍휼과 은혜와 인자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진대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의로운 자, 죄 없는 자, 도덕적으로 온전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마땅한 것이다.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셨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의로운 자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불경건하고 악한 사람들은 자기 동류들이나 좋아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시고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보배이시다. 또한 그는 보배로운 산 돌이시다. '산 돌'이란 그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시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심을 뜻한다. 그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본문은 우리도 산 돌같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 되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할 것을 말씀한다. '신령한 집'이라는 단수명사(오이코스 프뉴마티코스)는 성도들이 모여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교회를 돌들로 지은 건물에 비유한 것이다. '신령한' 집이라는 말은 교회가 단순히 물질적인 건물이나 육체들의 집합체가 아니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 곧 성령의 전인 것을 나타낸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신약 시대의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 속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신령한 집이다. 에베소서 2:21, 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신약 교회는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온 세계의 모든 성도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교회이다. 지금도 이 영적 교회의 건축 소리가 온 세계 곳곳에서 요란하게 들려지고 있다. 이 영적 건축, 즉 한 명의 영혼 구원을 통해 벽돌 한 장이 쌓여가는 이 건축은 물질적 예배당 건축보다 수천배 더 큰 의미가 있고 더 중요한 건축이다. 우리 모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이 영적 건축, 곧 전도의 일을 크게 여기고 이 일에 힘써야 한다.

또 본문은 지어진 이 신령한 집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제사장'이라는 원어(히에라튜마)는 '제사장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들을 드려야 한다. 그 신령한 제사란 우리의 의롭고 착하고 거룩한 삶, 헌신과 봉사의 삶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든 악독과 속임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므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 것이다.

[6-8]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시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그러나 그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버린 돌,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신다. 많은 이들이 그 돌에 부딪혀 넘어졌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열심히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중적이다. 그가 창세 전에 어떤 이들을 영생으로 선택하셨으나, 다른 이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정하셨다. 죄 가운데서 멸망받을 자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왠 은혜요 왠 사랑인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받은 것은 인생에게 가장 큰 복이다.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특권들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족속이 되었다. 선택받은 증거는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회개와 순종이다.

둘째로,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왕 같은'이라는 원어(바실레이오스)는 '높은 특권을 가진'이라는 뜻이다. 성도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는 높은 특권이 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셋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다. 세상 나라는 부정과 불법으로 가득한 나라, 속이고 속으며 죽이고 죽는 나라, 음란하고 부도덕한 나라, 슬픔과 탄식과 고통이 가득한 나라, 죽음과 절망의 나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의의 나라, 진리의 나라, 사랑의 나라, 평강의 나라, 기쁨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이다. 성도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이다.

넷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세상이 다 하나님의 소유이지만, 우리는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하나님의 것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셨던지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귀한 보배들이 되었다. 또 하나님의 것은 아무도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이 안전하게 보장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특권을 동반한 구원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기이한 빛'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식과 의와 생명을 가리킨다. 심히 무지하고 불경건했던 우리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죄악들 가운데 깊이 파묻혀 살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값없이 완전한 의(義)를 얻게 되었고, 죽음과 영원한 멸망의 그늘진 세상에 살던 우리가 영원한 생명, 다시 죽지 않고 죽을 수도 없는 생명을 은혜로 얻게 된 것이다. 이 지식과 의와 생명은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기이한 빛'이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구원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그 기이한 은혜와 사랑과 의와 지혜와 능력을 마땅히 찬송하며 증거하고 선전해야 할 것이다.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긍휼도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얻은 자가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송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0절까지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귀한 진리들과 교훈들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모든 악독과 모든 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다 옛사람에 속한 것들이며 마귀의 그리고 마귀와 함께 지옥에 던지울 죄인들의 성질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갓난아니들같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순수한 성경 말씀을 사모하여 열심히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셋째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신앙 인격에 있어서 자라가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어린 아이와 철부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영적으로 장성한 자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교회는 영적인 건물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로 이루어지는 신령한 집, 곧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 우리는 이 영적 성전 건축 곧 전도의 일을 외적 예배당 공사보다 더 크게 여기고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이 성전에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들을 드릴 거룩한 제사장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경건하고 거룩한 헌신과 봉사의 삶을 가리킨다.

여섯째로, 우리는 성도의 특권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일곱째로, 우리는 심히 무지하고 불경건하며 심히 죄악되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빛, 곧 참 지식과 의와 생명을 인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찬송하고 증거하며 선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11-12절, 육신적 욕망을 제어하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명이 끝날 때 하나님 앞에서 선악 간에 판단을 받아 내세에서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고 인간에게는 돌아갈 영원한 처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인생은 내세를 준비할 것이다. 내세의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 가운데 정신 없이 살지 않고 죄를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믿는 자답게, 성도답게 사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육신적 욕망들은 바로 죄악된 욕망들이다. 거기에서 음란과 방탕이 나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죄짓지 않고 바르게 살기를 힘써야 마땅하다.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선하게 살므로써 그들에게 바른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그릇되이 비방하는 일이 많다. 심지어 하나님의 귀한 종 바울은 교인들을 교묘하게 궤계로 자기 사람을 삼는다는 비난을 받았었다(고후 12:16). 구약의 느헤미야도 예루살렘성을 건축하여 바사왕 아닥사스다를 모반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었다(느 6:6). 그러나 그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착한 종들이었다. 성도들이 악한 세상 속에서 선을 행하면 그것이 세상에 빛이 되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날 그들이 깨닫고 성도들에게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들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가르쳐주셨다(마 5:16).


13-17절, 인간의 제도에 순복하라

[13, 14]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선한 삶은 여러 면에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가 왕과 그의 보낸 방백들 즉 관리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를 위하여'라는 원어(디아 톤 퀴리온)는 '주님 때문에'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세속 사회의 질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뜻 때문에 인간의 제도들에 순종해야 한다.

로마서 13:1-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원문에는 "왜냐하면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무지하고 잘못된 말들로 성도들을 비난하기를 좋아하지만, 성도가 범사에 선하게 처신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성도에게 아무런 바난할 말이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직 선행에 힘써야 한다.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성도는 죄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완전한 의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것은 로마서 7장과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된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귀한 자유를 악을 가리우는 일, 즉 악을 변명하고 정당화시키는 일에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도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가르쳤다. 로마서 6:17, 18, 22,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 . .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7]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성도들의 선한 삶은 세상에서의 인간 관계에서 나타난다. '뭇사람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존중해야 할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이기 때문이며, 또 주께서 피흘려 사신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만일 주께서 그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셨다면, 우리는 그를 얼마나 존중해야 하겠는가?

또 베드로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공경하라고 교훈했다. 왕을 공경하라는 교훈은 사실상 10계명 중 제5계명 즉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 속에는 가정에서 부모님에 대한 공경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장로들에 대한 존경, 이웃의 노인들에 대한 공경, 학교에서 선생들에 대한 존경, 직장에서 상사들에 대한 존경, 나라에서 대통령이나 관리들에 대한 존경 등을 포함한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다.

18-25절, 종들은 주인에게 순복하라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사환들'이라는 원어(오이케타이)는 '집안의 종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구원받은 종들에게도 선한 삶을 교훈한다. 그것은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범사에 두려워함으로'라는 원어는 '모든 두려움으로, 온전히 두려워함으로'라는 뜻이다. 종들은 주인들을 조금 두려워하지 말고 범사에 두려워하고 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한다. 종들은 또한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에게만 순종할 것이 아니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

[19, 20]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는 말하기를, 종이 어떤 잘못이 있어서 주인에게 매를 맞으면 칭찬받을 것이 없지만, 그가 선하게 행함에도 불구하고 애매히 고난을 받고 그 고난과 슬픔을 잘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라는 말은 '이렇게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나의 고난과 슬픔을 다 보고 계시고 다 판단하고 계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종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잘 참는 것은 미덕(美德)이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성도들은 이런 고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런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이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그것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가야 할 길이다.

[22-24]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 구주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셨으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고 오직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그는 마침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다.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고칠 수 없는 죄의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은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전통사본에는 "너희가 길 잃은 양들과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에게 돌아왔느니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과거에 길 잃은 양들이었다.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방황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것이 참된 회개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와 감독이 되셨다. 우리는 그의 인도, 그의 간섭, 그의 보호, 그의 돌보심을 받게 되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결론적으로, 11절부터 25절까지의 요점은 우리가 죄악된 육신적 욕망들을 제어하고 오직 선행을 힘쓰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 될 것이다. 성도들의 선한 삶은, 구체적으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복하는 것,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것, 종들이 주인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에게만 아니고 까다로운 자에게도 순종하는 것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받는 삶의 본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선을 행하다가 고난과 핍박도 받을 각오를 하면서 선행을 힘쓰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3장: 선행에 힘쓰라

1-6절, 아내들에 대한 교훈

본문은 아내 된 자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교훈한 말씀이다.

[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道)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순복하라'는 원어(휘포탓소)는 2장에서 사용된 말과 동일하다. 13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18절, "사환들[종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순복하라'는 말은 '순종하라'는 말이나 '복종하라'는 말과 뜻이 다르지 않다. 성경은 아내 된 자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순종하며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에베소서 5:22, 2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골로새서 3:18,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그러므로 아내들의 마땅한 의무이다. 거기에는 어떤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중요한 한 목적은 복음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 즉 불신 남편이라도 아내의 말로가 아니고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아내들의 말로 구원하기 힘든 남편들이 그의 행위로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뜻이다. 말로 안되면 행위로 보여주어야 한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이웃 사람들을 말로 구원하기 어려울 때 우리의 선한 행위로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게 힘써야 할 것이다.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남편을 구원시킬 아내의 행위는 무슨 행위를 말하는가? 그것은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가리킨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남편을 두려워함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2:17,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아내들은 자기 남편을 주인과 같이 생각하여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정결한'이라는 원어(하그노스)는 '순결한, 정숙한, 단정한, 흠 없는' 등의 뜻이다. 모든 도덕 생활에서 순결하고 흠이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음란한 세상 속에서 성적으로 순결하고 단정한 것을 가리킨다.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본문은 여성도들이 외적인 단장에 치중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한다. 예를 들어, 머리를 꾸미고 금은 보석의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를 차고 값비싼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 같은 단장에 힘쓰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를 꾸민다'는 원어(엠플로케 트리콘)는 '머리를 땋는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이런 단장이 죄악되므로 성도들이 이런 단장을 전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닌 줄 안다. 머리가 부시시 한 것보다 자주 감고 깨끗하게 단장하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또 금은 보석이나 아름다운 옷이 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것들일 것이다.

이 말씀은, 성도의 단장이 외적인 것들에 치중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성도는 외적인 단장을 크게 여겨서는 안된다. 이런 것들의 가치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우리는 그것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는 천국과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여성도의 단장은 내면적이어야 한다. '마음의 숨은 사람'은 사람의 내면적 인격성을 가리킨다. 여성도의 내면적 인격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안정한'이라는 원어(헤쉬키오스)는 '조용한, 평온한'이라는 뜻이다. 여성도들은 특히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몸은 세월이 갈수록 쇠하여지지만, 이러한 고상한 인격성은 그 성질상 썩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단장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 단장, 곧 고상한 인격성이 가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인 것이다.

[5, 6]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베드로의 교훈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성도의 이러한 덕은 예전부터 경건한 여성도들이 가졌던 덕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변하는 인간 도덕과 풍습에 따라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성들은 다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였고 이러한 덕으로 자신들을 단장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었다. 그는 자기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이것은 남편에 대한 그의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오늘날도 만일 여성도들이 사라처럼 선을 행하고 놀라며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라의 딸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은 아내 된 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본문은 세 가지 가량의 내용을 강조한다. 첫째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자기 남편이 좋은 사람이든지 그렇지 못한 자든지 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아내로서의 마땅한 의무이다. 둘째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심지어 말 없이 선한 행위로 감동과 영향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복음 진리를 믿지 않는 남편들일지라도 자기 아내들의 두려워하며 순결하고 단정한 행위를 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내들 즉 여성도들은 머리를 꾸미거나 장신구를 걸치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는 등의 외적인 단장을 힘쓰지 말고, 온유하고 조용한 순종의 내면적 덕으로 단장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하고 또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이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고 소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적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부유한 자들이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7절, 남편들에 대한 교훈

[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남편들에 대한 교훈이다. 첫째로, 본문은 남편들이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라고 말씀했다. 무슨 지식을 말하는가? 그것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 같다. 결혼은 남녀가 결합하여 한 몸과 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의 시작이다. 결혼의 목적은 첫째로 남자가 외롭지 않도록 돕는 아내와 더불어 살게 하기 위함이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둘째는 자녀 출산을 위함이다. 창세기 1:27, 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셋째는 음행의 방지를 위함이다. 고린도전서 7:1, 2,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결혼의 의무는 사랑과 순종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에베소서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은 아내들을 자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알고 사랑해야 하며, 특히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의 몸을 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무조건적으로,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아내들은 남편들의 따뜻한 한 마디의 말과 얼굴 표정과 행위에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낀다.

성(性)에 대한 바른 지식도 필요하다. 인간의 성은 본래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고 더더욱 더럽게 여겨질 것도 아니었다. 성은 아름다운 것이다. 창세기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그러나 성은 단지 부부 관계에서만 사용되어야 할 사랑의 도구이며, 그렇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는 음란의 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음란의 죄는 미워하고 배격해야 하지만, 부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은 권장해야 할 일이다. 성경은 부부 관계를 결코 더러운 일이나 부끄러운 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건전한 부부 관계가 없을 때 음행의 죄에 떨어지기 쉽다고 교훈한다(고전 7:5). 성은 정상적 부부의 사랑에 중요한 한 요소이다.

둘째로, 본문은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히 여기라고 말씀했다. 창세기 2장에 증거된 대로, 아내는 남편의 갈빗대이며, 남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마땅히 아끼고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본절에서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로서 두 가지 사실을 더 언급했다. 첫째는 아내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저들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는 것이다. 여성들은 대체로 남성들보다 몸이 연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예민하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에 남자들만 아니고 여자들도 참여할 것이다. 이런 연약한 아내들이 남편들과 자녀들을 위해 노동과 같이 힘든 집안 일을 하며 늙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그들을 울리지 말고 외롭게 하지 말고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고, 그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또 아내들은 생명의 은혜, 즉 영생과 천국을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들이다. 아내들은 세상에서만 아는 관계가 아니고 천국에까지 같이 갈 반려자들인 것이다. 물론 천국에서는 부부로서의 짝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내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영원한 동료들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시편 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셋째로, 본문은 남편들이 이렇게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고 그들을 귀히 여길 때 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말씀했다. 부부 사이가 좋아야 기도도 잘 되지, 부부가 서로 다투고 나면 기도의 문이 막힌다. 왜냐하면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의 기도의 문을 가로막는다. 요한일서 3:21, 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의 도덕 생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성도들은 가정에서부터, 결혼한 이들은 부부 사이에서부터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게 행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남편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해야 한다. 남편들은 결혼의 의미와 목적, 결혼한 이들의 의무, 그리고 성 등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아내들과 동거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 이유는 아내들이 남편들의 갈빗대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아내들은 더 연약한 그릇이며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남편들은 연약한 아내들을 귀히 여기며 보호하며 또 영원한 천국에서도 함께 교제할 동료로서 그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셋째로, 이렇게 할 때 남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넘친 부부 관계는 신앙 생활에 유익하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 자주 다투면 신앙 생활에도 해가 된다.


8-12절, 선한 마음을 가지라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더 교훈하고 그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계속 좀더 교훈하도록 감동하셨다.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는 요약하면 '다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를 향해 선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첫째로,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원어(호모프론)는 '생각을 같이하여, 같은 생각을 하며'라는 뜻이다. 교회의 일치와 단합은 생각의 일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모스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바울도 교회 안의 생각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12:15, 16,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라는 원어(토 아우토 에이스 알렐루스 프로눈테스)도 '서로 생각을 같이하며'라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같은 마음으로'라는 원어(엔 토 아우토 노이)도 '같은 생각으로'라는 뜻이다. 빌립보서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원어(토 아우토 프로네테)나 '한 마음을 품어'라는 원어(토 헨 프로눈테스)도 각각 '생각을 같이하여,' '하나의 생각을 품어'라는 뜻이다.

우리의 생각이 같아야 우리의 말도 우리의 행동도 같아질 수 있을 것이다. 분열은 생각의 다름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사심과 사욕을 버리고 상대방을 바르게 이해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생각을 같이하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둘째로, '체휼하며'라는 원어(쉼파테스)는 '같은 감정을 가지며, 동정심(同情心)을 가지며'라는 뜻이다. 사람은 지정의의 요소를 가진 존재인데, 생각이 첫째로 중요하지만, 또한 감정도 중요하다. 느낌이 같은 것이 좋다. 어떤 이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싫어하면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성도들이 어떤 일에 대해 좋아하는 감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같은 것이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위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생각을 같이하고 감정도 같이하려고 힘써야 하겠다.

셋째로, '형제를 사랑하며'라는 말씀은 성도의 기본적이고 가장 고상하고 포괄적인 덕이다.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친히 새 계명을 주셨다. 바울은 사랑의 성격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주께서는 우리가 이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넷째로, '불쌍히 여기며'라는 원어(유스플랑크노스)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며, 불쌍히 여기며'라는 뜻이다. 상대방의 부족과 연약에 대해 멸시하고 배척하는 마음이 아니고 가능한 한 그를 이해하려 하고 불쌍히 여기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리킨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가 처한 환경과 받은 교육에 따라 인격이 형성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부족과 결함을 볼 때 이해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도 이런 태도에 대해 많이 교훈하였다. 에베소서 4:31, 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12-15,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다섯째로, '겸손하며'라는 원어(타페이노프론)는 '겸손한 생각을 하며'라는 뜻이다. 전통사본의 본문(필로프론)은 '친절한 생각을 가지며, 예절을 갖추며'라는 뜻이다. 겸손한 생각과 친절한 생각, 그리고 예절 있는 태도는 서로 거리가 멀지 않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 주께서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 친절한 생각을 가지며 예절을 갖추기를 원하신다.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섯째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는 교훈은 우리 주님 자신의 교훈이다. 마태복음 5:44의 전통사본에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되어 있다.

바울도 로마서 12장에서 같은 교훈을 하였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7-21절).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복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그 복이란 죄사함과 구원의 복이며, 그 결과로 얻는 평안의 복이며, 또 최종적으로 누릴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의 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 구원의 복을 깨닫고 귀히 여기고 감사하며 또 서로에게 이 복을 빌어야 할 것이다. 이 복을 상실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부족한 믿음의 형제라 하더라도 이 복에서 제외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해 축복해야 할 것이다.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성도는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곧 천국의 날들 보기를 원한다. 인간 세상에 죽음은 죄 때문에 왔고 그것은 어둡고 슬픈 사실이며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고 천국의 복된 날들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모든 일들을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구원의 은혜를 받고 이런 놀라운 약속의 세계를 바랄진대, 거기에 합당한 자들답게 이 세상도 살아야 할 것이다. 즉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악한 말'이란 남에게 해를 주는 말, 즉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남의 명예에 손상을 주는 말을 가리킨다. 물론 불결하고 더럽고 음란한 말도 악한 말에 포함된다. 성도는 그런 악한 말을 그쳐야 마땅하다.

또 그 입술로 궤휼 즉 속임과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21:8에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했고, 또 요한계시록 22:15에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했다.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성도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한다.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 즉 마음에 평안과 기쁨, 격려와 위로를 주는 것이다. 또 성도는 서로 간의 화평을 구하며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즉 성도는 악과 거짓을 버리고 선과 화평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행실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과 돌보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가 연약할 때 격려하시고, 낙심할 때 위로하시고, 위험할 때 지키시고 도우시며, 범죄할 때 근심하시고 책망하시는 그의 관심과 돌보심이다. 또 주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신다. 의인이 감사할 때나 회개할 때나 무엇을 간구할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와 간구를 잘 들어주신다. 그러나 주의 낯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신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악한 행위들을 보시고 판단하시고 기억하시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긍휼이 풍성하시지만, 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엄위하시고 두려우시다.


결론적으로, 8절로 12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을 같이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이것이 교회의 참된 일치와 단합의 모습이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되, 특별히 부드러운 마음과 친절한 생각을 가져야 하겠다. 이것이 사랑의 참된 표현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야 하겠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교훈들이며 이것이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으로 단합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3-17절, 선을 행하며 고난을 받으라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너희가 선을 본받는 자들이라면'이다. 예수 믿는 자들은 선을 본받는 자들, 곧 선하게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선하게 살면, 양심이 있는 자들은 그런 우리를 잘 해치지 않을 것이다.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그러나 우리가 선하게 살지라도 항상 평안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가 선하고 의롭게 살아도 우리를 핍박하고 해치려 하는 악한 자들이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복 있는 자'라고 말한다(원문 직역). 주께서도 마태복음 5:10에서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다. 성도가 의롭고 선하게 살다가 당하는 고난은 화가 아니고 복이다. 자신이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지만, 의롭고 선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복된 일이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의롭고 선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할 때 처신해야 할 바를 몇 가지 교훈한다. 첫째, '저희의 위협함을 두려워 말고 근심치 말라.' '저희의 두려워함'이라는 원어는 '저희의 위협함'이라는 뜻이다. 또 '소동치 말고'라는 원어는 '근심치 말고'라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현세와 내세의 확실한 약속과 보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의 위협을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근심하고 염려할 것도 없다.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둘째, '너희 마음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거룩하게 구별하라.'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는 원문은 전통사본에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혹은 주님을 하나님으로] 거룩하게 구별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주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성도의 행동의 이유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혹은 주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셋째,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자에게 대답할 바를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하라.'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이다. 이러한 소망에 관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으로 택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셨기 때문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천국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바를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하라는 것은 우리의 우리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연약성과 죄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 우리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넷째, '선한 양심을 가지라.'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낸다. 마태복음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우리가 사악과 거짓과 음탕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위는 악하고 거짓되고 음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과 진실과 거룩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는 선하고 진실하고 거룩한 말과 행위를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너희가 선한 양심을 가짐으로써, 저들이 '너희를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할 때'(전통사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에게 그릇된 비난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성도가 선한 양심을 가지고 끝까지 선하게 말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마침내 핍박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성도가 악을 행한다고 비난했던 저들의 악한 비난이 마침내 거짓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난 중에도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고난이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당하셨다. 바울과 기타 사도들도 이런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은 요약하면, 첫째로 성도가 선과 의를 행하다가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 복 있는 자이며 그렇게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둘째로, 성도가 이런 고난을 당할 때 대처할 방법에 대해 말씀한다.

첫째, 핍박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치 말아야 한다.

둘째, 오직 하나님을 주님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우리의 소망의 이유에 대한 대답을 항상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예비해야 한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것이라는 소망의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셨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회 있는 대로 다른 이들에게 간증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선하게 처신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다운 행동이다. 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바울도 동일한 교훈을 주었다. 로마서 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8-22절,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한 번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전통사본)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한 번'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다(히 10:10, 12, 14). 그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화목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즉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심이었다.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 본절과 다음절(19절)은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육체와 영을 인간 예수님의 육체와 영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것 같다. 영이 살리심을 받으려면 영도 죽임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지만, 본문은 단순히 육체와 영을 대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육체는 예수님의 인성, 즉 인간으로서의 그의 영육을 가리키고,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킨다고 본다. 즉 예수께서 인간으로는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원문에는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셔서 전파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옥에 있는 영들'은 다음 절에 말씀한 대로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 당한 자들의 영들이다.

본절은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왜 저 영들에게 가셨고 또 무엇을 전파하셨는가?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께서 죽으신 후 구약 성도들이 거하고 있던 '림보'('지옥의 변두리'라는 뜻)에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이끌어 천국에 들여보내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문이 죽은 악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능성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16:26).

루터교회는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직전 혹은 직후에) 지옥의 영들에게 가셔서 승리의 영광을 선포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 전에 지옥에서 승리적 행진을 하신다는 것은 적당한 생각이 아닐 것이고, 부활 후에 가셨다면 영으로 가셨다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것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의 승리의 선포 사건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바빙크, 크레다너스).

그러나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정통적 성경학자들은 본절을 그리스도께서 지금 지옥에 있는 저 영들에게 노아 시대에 성령으로 가셔서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마 이 마지막 해석이 가장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셨었다. 그는 사람들이 음란하고 강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20년간 심판을 유보하셨다. 그 동안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노아의 8식구들 외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었다. 오늘날도 그러한 줄 안다. 예수님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다가 마침내 멸망할 자들은 그 수가 많으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다가 영생에 이를 자들은 그 수가 적다고 말씀하셨다(마 7:13, 14).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로 그 수에 들어 있기를 원하며 그 수에 든 것을 감사한다.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의 물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는 세례에 비교할 수 있다. 세례는 죄씻음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물론 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부족하고 연약할 때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세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응답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본절은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증거한다. 고난의 주께서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천국에 올리우셨고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신다. 모든 선한 천사들은 그에게 순복하고 있다. 그것은 주께서 누리시는 우주적 왕권, 영계와 물질계에 행사하시는 왕권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18절부터 22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사셔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셔서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선을 행하면서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셋째로, 우리는 노아 시대나 소돔 고모라 시대보다 더 악하고 음란한 이 세상과 세상의 풍조를 배격하고 노아와 그의 식구들같이 오직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며 순종하며 살아가자!


 

 


 

4장: 그리스도인다운 생활

1-6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로 대리적 고난, 곧 대속의 고난을 받으셨으므로(3:18) 우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고 교훈한다. 즉 우리도 선을 위해 고난받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3:17에서, 베드로 사도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미 말씀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심으로 죄와 상관 없는 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를 버리고 오직 의와 선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받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하심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죄를 만드는 원인자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사람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갈라디아서 5:16, 17,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12:1, 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는 이방인의 뜻을 좇아 죄악된 생활을 한 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의 삶에 이끌리고 거기에 빠져 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지난 날의 죄악된 삶으로 족하다. 그 죄악된 삶도 부끄러운 것뿐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죄의 낙을 누리며 살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죄악된 삶에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성경은 경고하기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했다(롬 8:13). 성도에게도 죄의 충동은 있으나 더 이상 죄에 빠져서는 안된다. 지나간 때가 족하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성도가 세상 친구들과 같이 극한 방탕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를 이상히 여기며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친구들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 . . 이 세상 친구 없어도 예수는 나의 친구니 불의한 일을 버리고 예수를 위해 삽시다"(찬송가 359장). "세월이 흘러 가는데 이 나그네 된 나는 괴로운 세월 가는 것 금할 길 아주 없네. 요단강가에 섰는데 내 친구 건너 가네 저 건너편에 빛난 곳 내 눈에 희미하다. . . .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내 고향 찾아가리"(534장).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예수님은 마지막 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심판주이시다. 디모데후서 4:1, 2,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의인과 악인은 마지막 날 다 부활하여(요 5:29; 행 24:15)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때 그들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심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들의 죄들을 다 직접적으로 고백하게 될 것이다.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은 육신의 죽음으로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장차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 죽은 자들에게도 그들이 살아 있었을 때 복음이 전파되었다. 비록 그들이 죽었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 영이 영생의 생명이므로 살아 있다. 그것은 육체로는 사람들이 받는 것처럼 심판을 받아 죽었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즉 구원받게 하려 함이다. '사람처럼'이라는 원어(카타 안드로푸스)는 '사람들을 따라'라는 말로서 '사람들이 받는 것처럼'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처럼'이라는 원어(카타 데온)는 '하나님을 따라'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은 몇 가지의 내용을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을 위해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3:17).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남은 날들을 사람의 정욕을 좇아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야 한다. 성도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삶이 지나간 때로 족한 줄 알아야 한다. 성도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더 이상 죄악된 삶에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날 모든 사람들은, 산 자와 죽은 자, 의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다 심판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죄를 직접 고백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장차 임할 그 날을 두려워하며 오늘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겠다.


7-11절, 근신, 사랑, 대접, 봉사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 세상의 만물은 시작과 끝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신 때가 시작이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심판하시는 때가 끝이다. 예수께서는 '추수 때' 곧 세상 끝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마 13:30, 39).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세상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다.

이 세상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신지 4천년이 지난 신약시대의 초에 사도들은 그 때 벌써 세상 종말이 왔다고 말하였다. 고린도전서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신약시대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시대이다.

이 세상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올바른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본문은 그러한 삶을 서너 가지로 증거하였다. 첫째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근신하지 못하는 삶이란 세상의 일과 쾌락에 빠져 있는 삶이다. 만일 직장이나 사업의 일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없는 삶이라면, 만일 육신적 취미와 쾌락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근신하지 못하는 삶이다. 술취하고 방탕한 삶도 그러하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삶이다. 우리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세월을 아껴야 한다. 에베소서 5:16, 17,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특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삶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은혜의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또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깨닫고 그것을 기억하게 된다. 또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부족과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을 간구하여 얻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세상 만물의 종말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함으로써 인간의 올바른 길, 특히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의 종말이 가까움을 생각하면서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이것은 주께서 친히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순종하는 일이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주께서도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써 서로 용서해야 할 것을 친히 본으로 보여 주셨다. 바울 사도도 참된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딘다고 증거하였다(고전 13:7).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셋째로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표현으로, 우리는 서로 원망 없이 대접해야 한다. 대접한다는 말은 서로를 향해 마음으로나 말로 너그럽게 대하는 것을 말하며 상대방이 아프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시간으로나 물질로 돕는 것을 말할 것이다. 성도가 서로 대접하는 것은 받을 것을 예상하고 베푸는 것이 아니고 그냥 베푸는 것이다. 그렇게 대접하는 자는 계산적이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을 위하지 않을 때라도 속상해 하지 않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을 것이다.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재능과 건강과 재물을 주셨다. 우리가 처한 가정 환경이나 사회 환경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다.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의 것인양 우리 마음대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것들을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서로의 유익, 곧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그것들을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드리는 심정으로 서로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지고 말하는 것처럼 하고 봉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범사에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것이다. 영광과 권능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영원히 하나님께만 있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1절까지에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세상의 종말이 가까움을 느끼면서 힘써야 할 삶에 대해 몇 가지로 교훈하였다. 첫째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 일과 육신의 쾌락에 너무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월을 아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는 경건한 생활을 힘쓰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힘써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뜨겁게 열심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과 연약을 용서함으로써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셋째로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표현으로, 우리는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해야 한다. 받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으로, 말로, 시간으로, 물질로 서로를 향해 너그럽게 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재능과 지식, 건강과 시간, 물질을 가지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섬겨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


12-19절, 성도의 고난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성도들에게는 시련하는 고난들이 있다. 그것들은 마치 금광석을 제련하는 용광로의 불과 같은 고통스런 시련들이다. 용광로에 넣어진 금광석에서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마침내 순금이 나오듯이, 성도들이 당하는 불시험들은 성도들의 죄악성과 죄악된 습관들, 그리고 불성실하고 게으른 연약성을 다 제거하고 마침내 좋은 인격, 즉 경건하고 거룩하며 충성되고 의롭고 선하고 온유 겸손하고 진실한 인격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런 불시험들을 당할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성도들에게 닥친 고난들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든지, 아니면 순수한 시련의 고난들이든지 간에,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들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정상적인 일이다.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은 2천년 전 십자가 위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들은 성도들에게 남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셨고 의로우셨으나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의롭고 선하게 살지라도 이것과 비슷한 고난을 당한다.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마태복음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물론 성도의 고난은 우리의 죄성을 제압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의의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인 줄 알고 즐거워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즉 그가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지나가고 있다. 기쁨도 슬픔도 지나간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슬픔이 나뉘게 될 것이다. 그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자들이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소유한 자들이다. 성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현실의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우리는 복이 있는 자들이다. 베드로는 그 이유로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한다. 또 전통사본에는 그 다음에 '그는 그들에게 비난을 받으셨으나 너희에게는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그들 위에 계심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임이 확인된 자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욕할 때 그들 위에 계신 성령에 대해서도 비난하고 욕한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과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고 섬기며 그에게 영광돌렸다. 성도들은 확실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성도들처럼 복된 자들이 누구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된 자들처럼 복된 자들이 누구인가?

[15,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도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도들은 살인하거나 도적질하거나 악을 행하거나 남의 일의 참견자가 되어서 고난을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당할 때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 이름으로'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이 점에서'(엔 토 메레이 투토)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다고 하는 점에서 혹은 그 점 때문에'라는 뜻이다.

[17, 18]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베드로는 하나님의 집 곧 교회 안에서 심판이 시작될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고난을 가리킨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성도들의 고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나 정죄의 심판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의 심판이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혹은 형식적인 교회 속에는 참된 성도가 아닌 자들도 섞여 있어서 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참 성도에게는 단지 하나님의 징계나 단련이 있을 뿐이다. 그 징계나 단련은 성도 속에 남아 있는 죄성과 악한 습관과 연약성을 조금씩 제거시킨다.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나 성도들에게 먼저 이와 같은 엄한 징계와 단련의 심판이 있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임할 마지막 날의 심판은 얼마나 더 엄중하겠는가? 성도들은 현재 하나님의 엄한 징계와 훈련의 고난을 체험하며 살므로써 오히려 미래에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로부터 자유를 얻지만, 악인들은 현재 평안할지라도 장차 영원한 형벌의 멸망을 얻을 것이니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또한 의인들이 어렵게, 겨우 구원을 얻는다면, 경건치 않은 자들과 죄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겨우'라는 원어(몰리스)는 '어렵게 혹은 겨우'라는 뜻인데, 의인들이 고난과 훈련을 받으면서 구원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표현된 말이다.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이라는 표현은 앞절들에서 언급한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12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13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것'(14절),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것'(16절) 등과 같이 성도의 고난을 표현하는 말이다. 성도의 고난은 아무리 불 같은 시험일지라도 성도를 단련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다.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고난 중에서 성도가 취해야 할 또 하나의 태도는, 끝까지 선을 행하는 자로서 처신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부탁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신실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주권자이시므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큰 소리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셨다(누가복음 23:46).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 본다.

첫째로,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을 시련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다. 선을 행하면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고난의 현실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성도들의 고난은 남아 있는 죄악된 성질과 습관, 및 연약성을 제거하여 좋은 인격을 만드는 시련의 의미가 있다. 또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의미가 있다. 특히, 성도들이 믿음 때문에 당하거나 의롭고 선하게 살면서 당하는 고난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다.

셋째로, 성도들은 고난을 당할 때 우선 그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고난을 통해 순금과 같이 단련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성도들은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한 고난받는 성도들은 끝까지 선하게 살면서 자기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5장: 장로들에게 주는 교훈

1-4절, 장로들에 대한 권면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본절에서 '너희'와 '장로들'은 구별된다. '너희'는 일반 성도들을 가리키고, '장로들'은 그들 가운데서 감독자로 세움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자신을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증거한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었다(요 21:15, 16, 17). 또 사도들은 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들이었다. 또 그들은 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기도 하였고(행 1:21, 22; 2:32; 3:15; 5:30-32 등) 또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자들이었다. 진실한 모든 성도들이 다 그 영광에 참여할 자들이다.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장로의 본분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일이다. 그 양 무리는 하나님의 양 무리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성실하게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양 무리를 치는 목양(牧羊)의 일은 교회의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는 일이다. 목양 혹은 목회는 담임목사에게만 맡겨진 일이 아니고 장로들에게도 맡겨진 일이다. 그것이 장로의 직분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감독 혹은 장로라고 부르는 직분에는 교회 헌법이 표현한 대로 두 반이 있다. 하나는 설교와 치리의 일을 겸하여 가진 목사요 다른 하나는 치리의 일만을 행하는 장로이다. 디모데전서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본절의 교훈은 목사와 장로 모두에게 주신 교훈이다.

본절은 장로들이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칠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세 가지로 교훈하였다. 첫째는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고 하였다. '부득이함으로'라는 원어(아낭카스토스)는 '억지로, 의무감 때문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선한 일이라도 억지로, 마지못해서,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한 일들 중에 가장 귀한 일인 이 목양의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장로들은 이 직무를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수행해야 한다.

둘째는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하라고 하였다. 목사나 장로들은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이익을 구해서는 안된다. 봉사는 항상 순수하고 깨끗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들은 가능하면 교회 재정에 직접 관계하지 말고 또 만일 재정에 관계할 때는 돈 계산에 있어서 정확하고 깨끗해야 한다. '즐거운 뜻으로'라는 원어(프로뒤모스)는 '준비된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장로의 직분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동기와 준비된 마음이 필요하다.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셋째는 맡겨진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교훈하였다. 사람이 교인들의 대표자가 되고 인도하는 직분을 가질 때 다른 이들에 대해 높은 마음을 가지고 권위 의식을 가지고 대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악덕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점에 대해 벌써 교훈하여두셨다. 마태복음 20:25-27,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장로들은 일반 교인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가지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목자장은 예수님이시다.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의 날에 그는 충성된 종들에게 영광의 상급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시다(히 11:6). 주께서 마지막 날 복음의 일꾼들,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실 영광은 시들지 않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현재 목사와 장로들은 주께서 주신 직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힘들고 어려운 점들이 많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바라며 또 우리는 부족 투성이이지만 감히 그의 상 주심을 기대하며 충성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충성해야 할 것이다.


5-6절,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는 장로들에 대한 권면과 더불어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을 하였다.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은 일반 교인들에게도 적절한 교훈이다. 베드로는 젊은이들에게 세 가지의 권면을 하였다. 첫째는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받아야 할 교훈이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특히 젊은이들은 대체로 아직 인생의 고난들을 많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만하기 쉬운 때에 있다. 고난의 환경은 대체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양약(良藥)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둘째는 서로에게 순복하라고 하였다. 전통사본에는 '다 서로에게 순복하라'고 되어 있다. 바울 사도도 에베소서 5:21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교훈하였다. 또 빌립보서 2:3에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교훈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된 우리 모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복종하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며 그러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일치단합된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셋째는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하였다. '허리를 동이라'는 원어(엥콤보오마이)는 '(허리를 동이는) 옷을 입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잠언의 말씀대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이다. 겸손한 자는 자신이 부족한 사람인 것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깨닫는 자이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장로들에게 순복할 수 있고 또 서로에게 순복할 수 있을 것이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권자이시다. 그가 세우면 세워질 것이고 그가 파하면 파해질 것이다. 그가 높이면 높아질 것이고 그가 낮추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시편 75:6, 7,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그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높이 들어 쓰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들을 결코 쓰지 않으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고,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과 준비된 마음으로 하고, 맡겨진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교훈하였다. 목사들과 장로들은 이 교훈을 명심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젊은이들에게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서로에게 순복하고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교훈하였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모든 교인들에게 필요하다. 겸손한 순종의 마음가짐은 우리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교회 전체를 위해 필요하고 유익한 마음가짐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사랑 가운데서 일치단합된 모습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7-14절,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염려거리가 아주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도들도 예외는 아니다. 인생에게는 심리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염려거리가 항상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며 친히 우리를 돌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며 날마다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모든 염려를 다 그에게 맡겨버려야 한다.

[8, 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본절은 마귀 혹은 사탄의 존재를 증거한다. 마귀는 실제로 존재하는 영이다. 마귀의 성격은 대적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고 성도들을 대적한다. 그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대적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불신앙에 떨어지고 낙심하고 좌절하며 서로 미워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마귀는 악하다. 그는 우는 사자같이 성도들을 삼키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한다. 그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줌으로써 그들을 넘어뜨리려고 한다. 어떤 때는 질병으로, 또 어떤 때는 가난으로, 또 다른 때는 가정적, 사회적 환난으로 성도들을 시험한다. 마귀는 매우 활동적이다. 그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공격할 대상을 찾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은 예를 들면 우리가 게으르거나 욕심을 품거나 세상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 근신하고 깨어서 믿음을 굳게 하고 도리어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야고보서 4:7, 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우리가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려면, 성경 읽기와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검이다. 예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물리치셨다(마 4:4, 7, 10).

[10, 11]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성도들은 세상에서 마귀의 시험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은혜가 풍성하시고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셨고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그것이 바로 영광스런 천국이며 거기에서의 영생 복락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원한 천국에 비교해 볼 때, 성도들이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은 '잠간 고난'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무리 길어도 100년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천국과 영생은 영원하고 영광스럽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후서 4장에서 증거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를 남김 없이, 실패함 없이 다 이루신다.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셔서 활동하게 하셨다. 이렇게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 분명하다. 과연 그러하다.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든든한 보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그 부르심 앞에서 성실하자.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실루아노는 또한 바울의 협력전도자이었던 실라를 가리키는 것 같다(행 15:22; 고후 1:19; 살전 1:1; 살후 1:1). 원문에는 '너희에게'라는 말이 '신실한'에 걸려 있다. 실루아노는 베드로전서가 보내졌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의 성도들에게(벧전 1:1) 신실한 형제로 인정받고 있었고 베드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또 그는 지금 베드로를 위해 이 서신을 대필(代筆)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루아노는 바울의 협력자이었던 동시에 또한 베드로의 협력자가 되었다. 그는 바울이 전한 복음과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잘 증거하는 인물이 된 셈이다.

베드로는 또한 자신이 증거하고 권면한 내용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였다. 또 전통사본에는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는 구절이 '너희에 그 안에 굳게 선'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수식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성도들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굳게 서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 가운데서도 그는 또 그 은혜의 말씀으로 그들을 권면하고 격려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는 하나님의 말씀들도 또 듣고 또 음미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13, 14]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아마 로마의 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영적으로, 로마는 세상과 인본주의의 상징인 바벨론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세력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모여 하나님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또한 마가에 대한 언급도 앞절에서 실로아노에 대한 언급과 같이 초대교회의 동일한 신앙과 사랑의 교제를 나타내는 것 같다. 마가는 바울에게도 협력자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베드로에게도 그러하였고 본절에서 '나의 아들'이라고 불리웠다. 진정한 기독교는 일치된 진리와 신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진리와 이 신앙을 확인하고 확신하고 이 진리와 신앙 안에서 일치된 기독교를 확증하고 혹은 회복시키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고 후대에 전수시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4절까지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교훈과 진리를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모든 염려를 그에게 맡겨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는 그 분이시고 우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짐을 그에게, 오직 그에게만 맡겨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오직 염려 대신 감사의 기도를 그에게 올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대적자이며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해야 한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마귀를 대적하자.

셋째로, 우리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작정하셨다. 그 일은 실패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직 그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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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삼서


 (김효성 목사)

내용 목차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쓴 개인적 성격의 편지로서 원문 신약성경 중 가장 짧은 책이다. 본서신은 주후 85-9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도 요한이서와 같이 '진리 안에서 행함'이다. 또 본서신은 사도 요한에게 반항적인 말을 하고 복음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영접하는 자들을 핍박하기까지 했던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을 언급하면서 그런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1-4절, 사도의 간구와 기쁨

본문은 가이오에 대한 사도 요한의 간구와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다.

[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그의 나이가 많음을 보이는 것 같다. 또 요한은 가이오를 '사랑하는 가이오' 또는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참으로'라는 말은 '진리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2절과 5절에서도 그는 가이오를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성도들은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자들이다. 모범적 교회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교회이다. 참 사랑의 성격은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에 잘 증거되어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사도 요한은 가이오의 영혼이 잘되는 것에 근거하여 그를 위해 간구한다. 영혼이 잘되는 것은 성도에게 가장 귀한 부분이다. 영혼이 잘된다는 말은 믿음으로 바로 사는 것을 말한다. 성도에게는 믿음이 견고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죄와 불결함을 버리고 천국을 소망하며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사는 것보다 더 복된 삶이 없다.

그것이 에녹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며(창 5:22) 노아같이 의롭고 완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창 6:9). 노아는 하나님의 명하시는 대로 다 준행하였다(창 6:22). 그것이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요 특히 범죄치 않으려고 애쓴 삶이다(창 39:9-12). 그것이 신명기 28장에 말씀한 대로 순종의 삶이요, 시편 1편에 말씀한 대로 악을 버리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의 삶이다. 그것이 잠언 3장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삶이다. 그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며(요 6:27), 바울이 말한 대로 육체를 위해 심지 않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의 삶이다(갈 6: 8).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그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기를 간구한다. '범사'는 그의 생활의 모든 부분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가정과 자녀들의 문제, 직장과 사업의 문제, 젊은이들의 학업, 취업, 결혼 등의 문제 등을 다 포함한다. 성도가 영적 생활을 잘하면 우리는 그의 범사가 복되고 형통하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범죄치 않으려고 애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범사에 형통한 삶을 주셨다(창 39:23).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가 얻을 자녀의 복, 물질의 복, 건강의 복 등에 대해 말하였다. 또 시편 1편도 우리가 악을 버리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우리의 모든 일들에 형통함을 누리게 될 것을 말하였다. 범사에 잘됨은 확실히 영혼의 잘됨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도가 믿음의 생활을 바르게 잘하는 것이 복된 삶의 길이다.

사도 요한은 또한 가이오가 강건하기를 간구한다. 건강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신명기 28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 여러 가지의 질병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강을 주실 것이다. 잠언 3:7, 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물론 모든 질병이 다 죄의 징벌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의 인격 훈련을 위해 주시는 질병도 있는 것 같다(고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얼만큼 건강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신다. 그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3, 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사도 요한에게 온 형제들은 가이오에게 있는 진리에 대해 증거하였다. 즉 그가 진리를 받아들였고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진리를 주셨다.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인 복음이다. 이제 우리는 이 진리 안에서 살므로 다른 이들이 우리의 삶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진리 안에서의 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이다. 만일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일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믿는 자라면, 우리는 교만을 다 버리고 음란과 불결함을 다 버리고 미움과 다툼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형제들로부터 듣고 심히 기뻐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말한다. 성도들이 성경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목사에게 큰 기쁨이요 성도들 상호간에도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의 진리를 읽고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믿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의 영혼이 잘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보다 더 귀하고 기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참된 교회의 모습대로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의 냉랭한 마음에 참된 사랑이 불붙어 오르기를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잘되는 일에 힘쓰자. 즉 영적 생활에 힘쓰자. 그것은 경건의 생활, 믿음의 생활, 순종 생활, 성결 생활이다. 사람은 밥만 먹고 돈만 벌고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에게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복을 주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알고 믿는 것 같지만, 그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 모순된 삶을 살지 말고 진리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며 사는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5-8절, 가이오의 선행

본문은 사도 요한이 성도들과 주의 종들에 대한 가이오의 신실하고 선한 행위에 대해 칭찬하고 격려하는 내용이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가이오는 형제들과 나그네들에게 신실하게 행하였다.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이라는 원어는 '형제들에게와 나그네들에게'라고 되어 있다. '형제들'은 주의 종들을 포함하여 성도들을 가리키는 일반적 명칭이며, '나그네들'은 아마 순회전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가이오는 다른 성도들에게나 주의 종들에게나 순회전도자들에게나 모든 일에 있어서 신실하게, 참되게, 믿을 만하게 행동하였다. 우리는 가이오의 선행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도 참되고 신실한 일, 믿을 만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6]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가이오의 영접을 받고 사랑을 입은 성도들과 종들은 교회 앞에서 그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가이오의 행위는 참으로 믿음 안에서의 행위이었고 사랑의 행위이었다. 그것은 교회 앞에서 엄숙히 증거된 행위이었다. 그것은 가식이나 위선이 아니었다. 저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이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이었다. 거기에는 진실만이 있고 거짓이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이제 사도는 가이오가 현재 잘하고 있지만 저희를 전송할 때도 '하나님께 합당하게' 전송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합당하게'라는 말은 우리가 다른 성도를 대할 때나 주의 종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외모를 따라 인간에게 대하듯 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듯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종들에게 교훈하기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고 하였다(골 3:23).

[7]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가이오가 저 순회전도자들을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로 영접하고 전송하는 것이 옳은 까닭은 저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댓가 없이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은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혹은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참된 전도자들은 물질적 댓가를 기대하지 않고 일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삯군이 아니다. 전도 사역, 말씀 사역은 장사가 아니다. 주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셨다(마 10:8). 물론 그는 또한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부언하기도 하셨다(마 10:10).

[8]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들이 참된 전도자들과 주의 종들을 영접하는 것은 마땅하다. 주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성도들이 전도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저들로 하여금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다. 우리는 직접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지 못할지라도 기도와 헌금으로써 그리고 기회 있을 때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와 예절로써 그들을 전송함으로써 진리를 위한 수고에 동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주의 종들이나 다른 성도들에게 신실하게, 즉 참되고 진실하고 믿음직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 있는 믿음은 진실하고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둘째로, 우리는 주의 종들이나 다른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대하듯이 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 존중함과 예절과 서로 복종함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셋째로, 우리는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진리로 죄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 그러나 성도들은 비록 자신들이 전임 사역자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헌신한 참된 전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존경과 예절과 복종으로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또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과 기쁘심을 돌리는 일이 될 것이다.


9-12절,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

본문은 디오드레베의 교만과 악함에 대해 지적하고 데메드리오의 진실한 믿음과 선함에 대해 증거하면서 우리가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할 것을 교훈한다.

[9, 10]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의 악함에 대해 몇 가지로 지적하고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그를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사람 속에는 교만과 명예심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인간의 죄악성의 본질적 요소이다. 마귀는 교만함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교만과 명예심을 여지 없이 정죄하신다. 교만한 자는 멸망의 문 앞에 서 있는 자이다. 회개치 않으면 그는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물리치신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높이신다(마 23:11, 12).

둘째로,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가 악한 말로 자기와 동료 사역자들을 부당하게 비난하였다고 증거한다. '망령되이 폄론하다'는 말은 '부당하게 비난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른 성도에 대해 정당한 비난도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7:1). 하물며 부당한 비난이야 더더욱 합당치 않다. 그것도, 진실한 복음 사역자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은 매우 악한 일이다. 주께서는 선한 자는 그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하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또 잠언 12:18은 말하기를,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하였다. 야고보서에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자라고 말씀했다(약 3:2).

셋째로, 사도 요한은 그가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 즉 주의 종들을 영접하지 않았고 심지어 영접하려 하는 자들을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을 배척한 참으로 악한 행동이었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10:40). 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교회 안에 다른 양들을 밀뜨리는 염소들에 대해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다(겔 34:21). '유위부족하여'라는 말은 '오히려 부족하여'라는 뜻이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사람에게는 모방하는 심리가 있다. 선한 일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기도 하지만, 악한 일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기도 한다. 성도는 죄에서 구원을 받은 자로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한 본과 영향을 주는 악한 것들은 무엇이든지 끊어버려야 한다. 내가 세상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한 행실을 보인다면 세상 친구를 끊어버릴 것이 없지만, 반대로 세상 친구가 나에게 악한 본과 영향을 준다면 그 친구를 끊어버려야 한다. 고린도전서 15:33,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내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나 컴퓨터 인터넷을 유익한 문화적 도구로서 절제 있게 사용한다면 그것을 끊어버릴 필요가 없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것들로 나의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더럽히고 자극한다면 성도는 그것을 끊어버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은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관계하지도 말아야 한다.

악과 선의 근원과 소속이 다르듯이, 악을 행하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의 근원과 소속이 다르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며 하나님께 속한다. 성도의 선행은 그가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이다. 사람이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며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요한일서 3:9, 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다른 한편, 데메드리오의 진실한 믿음과 선함에 대해 말한다. 그는 데메드리오가 모든 사람에게 증거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데메드리오의 믿음과 선함에 대해 증거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또 데메드리오가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다고 말한다. 진리에게 증거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진실한 믿음과 행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덧붙여 그는 우리도 그에 대해 진심으로 증거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데메드리오는 진실한 믿음과 선행을 가진 성도임이 여러 모로 증거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기쁘고 복된 증거이다. 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복된 증거를 가지게 되기를!


13-15절, 마치는 인사

[13-15]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면대하여 말하리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

사도 요한은 성도들과 속히 만나 얼굴을 맞대고 말하기를 원하였다. 참된 성도의 교제는 얼마나 사모할 만한 것인지! 그는 또 평강을 기원한다. 근심과 불안정의 요소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평강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큰 복이다. 그는 또 여러 친구들의 문안을 언급하며 가이오도 그곳의 친구들에게 일일이 문안해 줄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고 생각을 낮추고 참된 사랑을 가지고 서로 교제하고 서로에게 평강을 기원하고 문안하자.


결론적으로, 9절부터 15절까지에서 우리는 전혀 대조되는 두 인물에 대해 들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악한 말로 복음 사역자들을 부당하게 비난하고 그들을 영접하지 않고 영접하려는 자를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한 자이었다. 그러나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또 사도 요한 일행에게도 증거를 받은 진실한 믿음과 선함을 구비한 자이었다. 우리도 그 둘 중의 어느 하나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 악한 것은 끊어버려야 한다.

마태복음 5:28-30,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그러므로 악한 친구는 멀리하고 악한 물건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 속에는 악한 성질과 성향이 있다. 그것들이 우리를 실수와 연약과 범죄의 자리로 이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자극하고 충동하는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고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범죄한 일들과 본성의 죄악성을 진실히 회개하고 그것들을 다 버리고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의와 선의 열매를 맺기를 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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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2001년 10월 21일 (초판)(김효성 목사)
내용 목차
1장: 신앙의 성숙
2장: 거짓 선생들
3장: 주의 날
본서신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이다(벧후 1:1). 본서신을 인용한 가장 오래된 증거물은 신약성경 유다서이다(유 17, 18). 본서신과 베드로전서와의 문체의 차이점은, 베드로전서에서 실루아노를 대서자로 사용한 것과 달리 본서신에서 베드로 자신이 이것을 썼거나 다른 대서자를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룸비는 적절히 말하기를, "거짓 교사들을 경고하고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는 위조자가 고의적으로 그런 사도의 이름을 가지며 또 자기가 주장할 수도 없는 체험을 내세운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문제이다"라고 하였다. 본서신의 저작 시기는 베드로전서가 기록된 후, 즉 주후 66년 내지 67년경일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는 이단에 대한 경고이다. 본서신에는 거짓 교사들과 거짓 교훈에 대한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 있다. 유다서와 비교할 때, 본서신에 언급된 거짓 교사들은 미래적인 반면, 유다서에 언급된 거짓 교사들은 현재적이다.

 1장: 신앙의 성숙 1-2절, 문안 인사
[1, 2]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불렀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며 그에게 절대 복종하는 자임을 고백한 것이며, '사도'라는 말은 예수님께 사명을 받아 파송된 자임을 증거한 것이다. 그가 예수께 받은 사명이란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널리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원어는 근래의 권위 있는 한 영어성경(NASV)처럼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뜻일 것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을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로 고백한다.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神性)은 그에게 돌려지는 신적 속성들, 그가 행하신 신적 사역들, 그리고 그가 받으시는 신적 영광 등에서도 충분히 증거되지만, 무엇보다 첫째로 그에게 돌려지는 신적 명칭들에서 증거된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거나 주님이라고 부르는 구절들이 다 여기에 해당하지만, 특히 그를 '하나님'이라고 직접적으로 부른 구절들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디도서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요한일서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란 신성을 가지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대속(代贖)의 의(義)를 가리킨다. '의를 힘입어'라는 말은 '의 안에서' 또는 '의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그 의(義) 안에서 시작되고 견고케 된다.
베드로는 본서신을 받는 성도들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성도들의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이다. 세상의 금은 보화로는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없으나 참된 믿음으로는 그것을 얻을 수 있다. 마가복음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성도의 믿음은 참으로 보배이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말은 참된 믿음이 모든 성도들에게, 남녀 노소, 빈부 귀천, 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이 동일하게 보배로움을 증거한다. 보배로운 성도의 믿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공통적이다. 디도서 1:4, "같은[공동적]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을 더 많이 얻기를 기원하였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 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더욱 많이 누리게 될 것이다.

3-4절, 구원의 내용과 목적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이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증거한다. '신기한'이라는 원어(데이오스)는 '신적인'이라는 뜻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혼들을 다시 살게 하는 것은 아무 인간도 할 수 없는 일이요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신적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참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또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참된 경건을 허락하셨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그의 이름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그와 교통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왔다. 베드로는 구원의 하나님을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루어졌다. 독생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 '덕으로써'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곧 그의 긍휼과 사랑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베드로는 우리의 구원을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라고 표현한다. '이로써'라는 본절의 초두의 말은 앞절에 언급한 '영광과 덕으로써'라는 말을 가리킨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내용, 즉 영생과 천국과 부활의 소망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이 영광스런 구원을 소망으로 주셨고 약속하셨다. 로마서 8:23, 24,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신의 성품'이라는 말(데이아 퓌시스)은 '신적인 성품'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구원받기 전의 상태와 대조된다. 베드로는 사람의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구하는 삶으로 표현하였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고 의롭게 창조되었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 사람은 정욕적이게 되었고 세상의 썩어질 것을 구하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본성이 회복되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 구원의 목적은 법적으로는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는 구원의 내용과 목적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성도가 받은 구원은 영원한 생명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다. 그것은 영광의 부활과 천국에서의 복된 삶을 포함한다. 이것은 세상의 금은 보화로 살 수 없는 보화들이다. 둘째로, 성도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적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신적인 성품이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함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는 법적으로 완전하게 다 이루어졌고 장차 영화롭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죄악되고 허무한 옛 생활 방식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며 성경 말씀과 성령의 인도로 거룩하고 선한 삶을 힘써야 한다.


5-11절, 힘써야 할 일곱 가지 내용과 그 이유

[5-7]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더욱 힘써'라는 원어는 '모든 열심을 보이라'는 뜻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다음 일곱 가지의 내용을 공급하는 일에 모든 열심을 보이라고 교훈한다.

첫째는 덕이다. 덕은 선한 인품을 가리킨다. 참된 믿음에는 선한 인품이 필요하다. 믿음이 인격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이든지 아니면 심히 부족하고 결함이 있는 믿음일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선한 인품, 덕스러운 인품을 갖추도록 힘써야 한다.

둘째는 지식이다. 우리의 믿음은 덕 뿐만 아니라, 지식도 필요하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은 자는 성경 말씀을 주야로 읽고 듣고 배우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암송하기를 힘써야 한다.

셋째는 절제이다. 절제는 우리의 지식에 있어서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지극히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또 그 지식은 전적으로 성경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밝히 계시된 것 만큼만 하나님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또한 절제는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에 있어서도 필요하다. 비록 죄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너무 육신적 즐거움에 빠지지 않는 절제가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는 절제의 생활을 힘써야 한다.

넷째는 인내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고난 중에서 오래 참고 인내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때에도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다. 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때도 인내가 필요하다. 바울은 증거하기를, "사랑은 오래 참고 . . .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 .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하였다(고전 13:4, 7). 참된 믿음의 걸음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다섯째는 경건이다. 경건은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며 두려워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태도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하나님과 항상 교제하고 그와 동행하기를 원하는 자는 경건한 자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경건은 모든 신자에게 필요하다.

여섯째는 형제 우애이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우리가 서로 같은 생각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하고 상대에 대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친절한 생각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벧전 3: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며 살기를 원하신다. 로마서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마지막으로 일곱째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라는 말(아가페)은 '형제 우애'라는 말(필라델피아)보다 더 강한 뜻을 가진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사랑, 즉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고 우리에게 용서를 비는 형제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령하셨다(마 5:44; 18:22).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8, 9]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만일 우리에게 위와 같은 것들이 있으면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지식에 있어서 무기력하거나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겠지만,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내세와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고 하나님께서 그의 옛 죄들을 깨끗케 해주셨음을 잊어버린 자와 같다. '게으르지'라는 원어(아르고스)는 '비활동적인, 빈약한, 무기력한'이라는 뜻이 있다.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다시 강조하기를,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한다. '부르심과 택하심'은 우리의 구원을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얻은 증거는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회개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일곱 가지의 내용, 즉 믿음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공급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더욱 힘써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할 이유로 다음의 두 가지를 언급했다. 첫째는 우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본절 후반부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순종의 행위를 통해 믿음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승리의 비결은 계속 순종하기를 힘쓰는데 있다.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어 우리가 더욱 힘써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할 두번째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같이 행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즉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구원은 순종 생활 속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범죄함은 성도에게서 구원의 확신을 빼앗아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처럼, 그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시 51:12).


결론적으로, 1절부터 11절까지는 구원의 내용과 목적, 그리고 이를 위해 성도가 자신의 믿음에 더하여야 할 일곱 가지 내용과 그것을 힘써야 할 두 가지 이유를 계시한다. 첫째로, 성도의 구원의 내용은 참된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다. 둘째로, 성도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적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신적인 성품이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함을 가리킨다. 셋째로, 이 목적을 위해 성도가 자신의 믿음에 더하여야 할 일곱 가지 내용은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이다. 넷째로, 성도가 이것을 힘써야 할 이유는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의 걸음에서 실패치 않고 영원한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을 더하기를 더욱 힘쓰자.


12-21절,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두 가지 증거

[12, 13]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우리는 성경 진리들을 이미 알고 있어도 그것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읽고 또 읽어야 하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집에서 복습하듯이 복습하고 또 복습해야 한다.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라는 말은 살아 있을 동안을 가리킨다. '장막'은 육체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장막 혹은 천막이 영구적인 집이 되지 못하고 또 그 용도도 이동하는 것이듯이 우리의 육체도 영구적이지 못하고 늙고 쇠하여 마침내 한 번은 죽을 것이며 땅에 묻히면 썩을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죽기 전에 유익한 모든 교훈을 다 함으로써 성도들을 일깨우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라는 말은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거기에 보면, 주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라고 기록되어 있다(요 21:18, 19). 베드로는 자신의 장막을 벗어날 것 곧 자신의 죽음이 임박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러기 때문에 더욱 성도들을 교훈하였다.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유언적 내용이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은 후에도 성도들에게 필요한 때 이 진리가 생각나게 하려고 힘써 교훈하였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있고 우리에게 성경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성경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늘 바로 깨닫고 충만한 은혜와 유익을 얻어야 할 것이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베드로는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증거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뒤에 2장에 나타난 대로 이단들이 주님을 부인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바로 아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란 그의 신적 능력을 가리킨다. 앞에 1절에서 우리가 생각한 대로, 예수님은 '우리 하나님과 구주'이시다.

또 '그의 강림하심'이라는 말은 그가 본래 하늘에 계신 신적 존재이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요한이 요한복음 서두에서 밝히 증거한 바이다. 요한복음 1:1, 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 예수께서도 친히 증거하시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요 3:13).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그의 크신 영광을 친히 본 자라고 증거하였다. 신약성경에 증거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 즉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虛構)나 문예 창작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진실한 증거들이요 사실적 보도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사실들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요한일서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17, 18]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자신이 친히 보았던 주의 크신 위엄과 영광에 대해 증거한다. 그것은 마태복음 17장에 기록된 대로 그와 다른 두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주께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친히 음성으로 그에 대해 증거하여 주신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내용이었다. 이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얻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베드로의 첫번째 증거이었다.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베드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두번째 증거를 말한다. 그는 그것을 '더 확실한 예언'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그의 첫번째 증거 즉 그가 친히 보았던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증거를 가리킨다. 성경책은 인간의 그 어떠한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의 책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셨다. 성경 말씀은 어두운 곳을 비취는 등불과 같다. 어두운 밤에 불빛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할 것인가? 성경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어두운 죄악 세상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구주에 대해 바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라는 말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할 때 바른 깨달음이 생기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디모데후서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죄의 복음을 바로 깨달을 때까지 성경책을 가까이 하며 읽어 나가야 할 것이다.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베드로는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지만 그것을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주관적인 해석을 주의하라는 뜻이다. '먼저 알 것은'이라는 표현은 이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함을 보인다. 성경이 중요한 만큼 그것을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다. 건전한 성경 해석의 방법은 우선 문법적으로, 문맥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서 해석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성경을 전체적 통일성이 있게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므로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구하면서 연구해야 할 것이다.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우리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 참된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주어진 적이 없고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 곧 참 선지자들이 말한 것이다. 바울 사도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증거하였다(딤후 3:16).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하고 자기의 주관대로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21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이미 아는 진리도 계속 다시 기억하고 복습해야 한다. 그것이 베드로가 편지를 한 목적이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이 사람의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친히 본 바요 구약성경이 확실히 예언한 바임을 확실히 알고 믿고 확신해야 하겠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할 수 있고 이단 사설에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진리가 마치 샛별이 떠오르듯이 밝히 깨달아질 때까지 성경을 경건하게 읽고 묵상하되 성경을 사사로이,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2장: 거짓 선생들 1-9절, 거짓 선생들의 교훈과 결말
[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광에 대한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구약 교회에는 역사상 거짓 선지자들이 빈번히 나타났었다.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자이지만, 거짓 선지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이다. 거짓말들의 근원은 사탄이다. 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참과 거짓, 그리고 진리와 이단의 구별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그들 속에 빛이 없음이니라]."
신약 교회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예언이며 이 예언은 역사상 성취되었다. 예수께서도 예언하시기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라고 하셨다(마 24:24).
거짓 선생 곧 이단자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르치는 자이다. 즉 이단 사상은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와 아주 다르다. 그것은 사람에게 멸망을 준다. 왜냐하면 이단의 본질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곳에 생명과 구원이 없다.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한일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부정하고 속죄의 주님 자신을 부정한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요한일서 4:1-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이단자들은 결국 다른 예수를 전하는 자들이다. 고린도후서 11:3, 4,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그들은 실상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다. 고린도후서 11:13-15,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본절은 또한 거짓 선생들의 결말이 멸망이며 그 멸망이 임박하다는 것도 증거한다. 마태복음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요한계시록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거짓 선생들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호색함 혹은 음란함이다. 본장의 뒷부분에도 이런 특징이 계속 언급되어 있다. 10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14절,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18절,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이단자들의 이런 부도덕함으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음란함은 인간의 양심에도 거스리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전한다는 자들이 거룩과 의(義)를 저버리고 음란함에 거한다면 구원의 진리는 여지 없이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이단자들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며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운동을 방해하는 하나님의 원수들이다.

[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거짓 선생들의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탐심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지 않는 자들은 대체로 이 세상을 유일한 가치로 여길 것이다. 이단자들이 그러하다. 저희는 이 세상의 물질적 이익을 구하는 자들이며 이를 위해서는 말을 지어내기도 한다. 저들은 진리의 사람들이 아니다.

본절은 거짓 선생들의 결말에 대해 다시 증거한다. 저들이 받을 심판과 멸망은 옛날부터 지체하지 않고 잠자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과 저들에게 임할 멸망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베드로 사도는 거짓 선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다는 것을 몇 가지 사실들을 들어 증거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들을 지옥에 던져 넣으신 사실이다. 본절과 다음절에서 '용서치'라고 번역된 말(페도마이)은 '아끼지'라고 번역되어야 더 좋을 것이다. 또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라는 구절은 전통 사본에는 '어두움의 사슬로 묶어 지옥에 던져'라고 되어 있다. 범죄한 천사들 중 일부분은 지금도 어두운 지옥에 갇히어 있고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생들도 지옥에 던지실 것이다.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둘째로, 거짓 선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은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에서도 증거된다. 노아는 의를 전파하는 자(디카이오쉬네스 케뤽스)이었다. 음란하고 강포한 그 시대에 노아는 아내를 사랑하고 가정의 거룩을 지킨 자이었음에 틀림 없었고 또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유하고 겸손하게 순종한 인격자이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의를 말과 행실로 증거한 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 불경건한 당시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홍수를 내려 멸망시키셨다. 불경건한 자들이란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자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생들에게도 멸망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베드로 사도는 거짓 선생들의 심판과 멸망의 확실성을 증거하는 세번째 내용으로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을 든다. '멸망하기로 정하여'라는 원어는 '뒤집어 엎어 정죄하여'라는 뜻이다. 창세기 19:24, 25,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이 사건은 후세에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 본이 된다.

[7, 8]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극도로 문란해진 성 도덕에서 나타났었다. 그것은 동성애라는 것으로 나타났다(창 19장). 인간 사회의 도덕적 부패는 음란 곧 성적인 타락으로 나타난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러했고 가나안 7족속들이 그러했다(레 18장). 가나안 7족속들에게는 근신상간, 동성애, 짐승과의 음란 등의 악들이 있었다. 이런 악들은 오늘날도 세계 곳곳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옛날 소돔과 고모라에 대하여 가지셨고 가나안 7족속들에 대해 가지셨던 진노와 심판이 오늘날 지구에도 쌓여지고 있고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살고자 했던 의로운 롯은 그 음란한 사회 속에서 심적으로 큰 고통을 당하였었다. 오늘날도 성도들이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 롯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다. 특히 현대 사회와 현대 문명은 이전의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욱 음란한 사회이며 음란한 문명이다. 현대 사회는 성경이 예언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대심판을 준비하고 있다. 성도들은 이런 음란한 사회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음란할지라도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 곧 노아와 같고 롯과 같은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의 영혼들은 지옥에 던지우고 수감되어 마지막 심판날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거짓 선생들도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9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거짓 선생들 즉 이단자들을 분별해야 한다.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가? 오직 신구약 성경이 분별의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성경의 바른 지식이 필요하고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개요에 대한 바른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에 관한 교리들이다. 우리는 새 것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거짓 선생들의 특징들인 호색과 탐심을 경계해야 한다. 이 세상이 성적으로 문란할지라도 성도는 거룩함과 절제를 가져야 하고 지켜야 한다. 또 이 세상이 물질 만능을 믿는 세상일지라도 성도는 돈을 사랑치 말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사는 자이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과 소돔과 고모라 시대의 유황불 심판은 역사적 사건들이었다. 불경건하고 음란했던 저들을 심판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날도 변함이 없으시다. 이 세상은 결국 불경건과 음란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모든 종류의 악에서 떠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10-22절, 거짓 선생들의 특징들

앞부분에서도 거짓 선생들의 특징들이 언급되었으나 본문에서는 그것들이 좀더 많이 증거된다.

[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거짓 선생들의 첫번째 특징은 성적인 부패 즉 음란이다. 저들은 육체의 감정을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한다. 음란이 더러운 까닭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부부 관계의 법을 벗어난 죄이기 때문이다. 모든 죄는 자신을 더럽히고 결국 자신과 세상을 불행케 만든다.

거짓 선생들의 두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멸시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합법적 권위를 가진 다스리는 자들[치리자들]을 세우셨다. 그들이 목사와 장로들이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의 참된 목사들과 장로들을 멸시하고 건방지고 그들을 비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담대하다'는 원어(톨메테스)는 '건방지다, 주제 넘게 행하다'는 뜻이다.

물론 교인들이 목사들과 장로들을 전혀 비평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목사들과 장로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부족들과 실수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들을 지적하는 것은 정당할 수 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들을 비평하는 것을 극히 조심해야 한다. 아니, 그들을 자주 비평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비평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이며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종들이기 때문에 저들을 비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명예에 손상이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의 종들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교훈을 받고 인도함을 받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종들을 비난하는 것은 교회에 덕과 유익이 되지 않는다. 그런 비난은 교회를 건설하는 대신에 그것을 파괴시킨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들에 대한 비난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11-13]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저 거짓 선생들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였다. 그만큼 남을 비난한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거짓 선생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비난한다. 그들의 비난은 이치에 맞는 정당한 비평이 아니다.

그들의 결말은 앞부분(3절)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다시 언급된다. 그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해 난 짐승과 같으며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할 자들이다. 또 불의의 보응을 받을 자들이다.

거짓 선생들의 정욕적 행위는 또한 육체적 쾌락을 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저들은 다른 사람들이 땀 흘려 일하는 낮에 육신적 쾌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다. 저들은 술과 춤과 음행을 즐기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야말로 거룩한 교회 안에서 점과 흠이다. 저들은 선생들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마귀적이요 세상적이요 죄악된 자들이다.

[14-16]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또 다시 거짓 선생들의 음란함이 언급된다. 저들은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않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 즉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연약한 자들을 유혹한다.

음란한 세상 속에서 또 거짓 선생들의 음란한 유혹에 대처하여, 성도들은 건전한 부부 관계를 지켜야 한다. 고린도전서 7:1-5,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거짓 선생들의 세번째 특징은 물질적 탐욕이다. 저들은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다. 반복하여 탐심을 품으므로 그들의 마음은 탐욕에 연단되었다. 저들은 바른 길을 저버리고 곁길로 간 자들이며 마치 옛날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가다가 말 못하는 나귀가 하나님의 시킴을 받아 말로 책망했던 발람 선지자의 길을 좇는 자들이다. 베드로는 물질적 탐심과 세상적 명예심을 따라 간 발람의 행위를 '미친 것'이라고 표현한다. 또한 그는 저 거짓 선생들을 '저주의 자식'이라고 말함으로써 저들의 결말이 어떠할 것을 다시 한 번 더 분명히 증거하였다.

[17-19]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거짓 선생들은 '물 없는 샘'과 같아서 그 속에 참된 생명수 샘물과 진리의 말씀이 없다. 저들은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에 불과하다. 저들을 위해 캄캄한 어두움이 영원히 예비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향해 내리실 영원한 지옥 형벌이다.

거짓 선생들의 음란한 특징이 다시 언급된다. 저들은 허영의 부풀린 말을 하면서 미혹한데 행하는 자들에게서 참으로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 '겨우'라는 원어는 전통 사본에는 '참으로'라는 말(온토스)이다. 저희가 그들에게 자유를 약속하지만, 저희 자신이 부패(프도라, 혹은 '멸망')의 종들이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

[20-22]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사람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더러움 가운데 떨어져 산다면, 그의 형편은 주를 알기 전보다 더 나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저 거짓 선생들은 바로 그런 자들이다. 그것은 마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고 돼지가 씻은 후에 더러운 구덩이에 누운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10절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거짓 선생들의 특징들은 첫째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것, 곧 음란이다. 저들은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고 낮에 연락을 즐기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연약한 사람들을 유혹한다. 둘째로, 저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정당하게 세우신 목사들과 장로들을 멸시하고 비난한다. 저들은 건방지고 알지 못하는 것을 비난한다. 셋째로, 저들은 탐욕적이다. 저들은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저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거짓 선생들의 결말은 멸망이요 저주요 캄캄한 어두움의 처소 즉 지옥이다.

우리는 말세에 나타날 거짓 선생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거짓 선생들의 사상적 오류들과 윤리적 문제점들을 분별하고 저들을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더러운 정욕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거룩한 자들이 하나님의 평강과 형통의 복을 받아 누릴 것이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목사들과 장로들을 멸시하거나 비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5:19,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탐심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면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딤전 6:7, 8).

3장: 주의 날 1-7절,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자들
[1, 2]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 사도가 두 개의 편지를 쓴 목적은 성도들의 진실하고 순진한 마음을 일깨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 함이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 가지로 표현하였다. 첫째는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둘째는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이다. 그것은 신약성경을 가리킨다. 그가 쓰고 있는 본서신도 그 중에 하나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가 나타나 있다.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항상 읽고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그의 진리와 교훈과 뜻이 풍성히 거하여 그것을 행함으로 그에게 영광이 되기를 원하신다.
[3, 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는 말세에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불신앙적 선생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재림의 진리를 비웃고 조롱한다. 앞장에서도 언급한 바대로, 음란은 거짓 선생들의 한 특징이다. 또 저들은 주의 재림의 약속을 부정하며 말하기를 조상들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한다. 예언된 종말적 대변혁의 징조들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출현은 이러한 성경 예언의 성취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고 공공연히 부인한다. 자유주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는 비극을 너머서라는 그의 책에서 말하기를,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자들은 사탄의 종들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뜨리려고 불신앙과 이단을 전파한다. 교회의 역사상 끊임 없이 일어났던 배교 운동들의 은밀한 사령탑에는 가장 우두머리에 사탄이 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불신앙적 사상들을 분별하고 대항해야 한다.
[5-7]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베드로는 주의 재림을 부정하는 이단자들을 두 가지 점을 들어 반박한다. 첫째로, 그는 하늘과 땅이 옛적부터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을 그의 말씀으로 다 창조하셨다.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이라는 말씀은 '땅이 물에서부터 그리고 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라는 말로서 창세기 1:9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둘째로, 베드로는 옛 세상이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음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심히 죄악되었던 당시의 온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킨 사건을 가리킨다. 이것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사건이었다. 창세기 6:13,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홍수 심판을 세상에 내리셨다. 6절에 '이로 말미암아'라는 원어의 뜻은 '이것들로 말미암아'인데, 여기에 '이것들'이란 '말씀과 물'을 가리킬 것이다.
베드로는 이제 현재의 하늘과 땅도 하나님의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보존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 가운데 밝히 증거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신실함을 깨닫는다면, 미래의 마지막 불 심판의 경고를 믿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 불신앙적 선생들은 이 모든 사실을 고의로 잊으려 한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믿자.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믿고 그 모든 약속들을 의심치 말자.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고 간절히 소망하자.
결론적으로, 1절부터 7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분명한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항상 신구약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또 그 말씀의 능력과 신실함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 베드로가 편지들을 쓴 목적이요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다. 우리는 성경을 늘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여 은혜 충만한 생활을 하고 또 그 말씀이 다 이루어질 줄 확신하고 소망하고 또 그 말씀을 힘써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둘째로, 우리는 말세에 나타나는 불신앙자들의 말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특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성육신(成肉身), 그의 속죄와 부활, 그의 재림을 부정하는 무서운 이단 사상이다. 우리는 이런 이단 사상을 배격하고 이런 이단자들을 교회 안에 용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 기독교회는 배교와 타협으로 심히 혼란 중에 처해 있다. 한국에서도 장로교회 중 기장과 예장통합은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고 있으며 감리교회에서 기감이 그러하고 침례교회에서 기침이 그러하다. 또 보수적 교단들은 이런 자유주의적 교단들을 책망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교류하고 협력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들의 타협이요 혼란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바라며 또 하나님의 마지막 불 심판을 믿고 두려워하자. 데살로니가후서 1:7-10, ". . .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불로]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우리는 성경의 모든 교훈과 약속들을 다 믿고 다 소망하자. 특히 성도의 최대의 소망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고 소망하자!
8-13절, 주의 날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님'은 재림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매튜 풀은 다음과 같이 잘 주석하였다. "인간은 시간에 종속되고 시간에 의해 측정되지만, 하나님께는 과거와 미래가 없고 모든 일이 현재이며 시간의 길고 짧음도 없다. 하나님께는 천년이, 아니 창세 이후의 수천년이 단지 하루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재림의 지연을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원하심의 잣대로 판단해야 한다."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주의 재림이 더딘 것 같음은 실상 더딘 것이 아니고 그가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셔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넓게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가리킨다. 그들은 현재 세상에 살고 있는 자들이나 장차 출생할 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모든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다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주의 재림의 날은 비록 더딘 것 같지만 밤에 도적같이 갑작스럽게 올 것이다. 마태복음 24:42, 4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1, 2,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주의 재림의 날에 이루어질 일들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의 재림의 날에는 현재의 하늘과 땅이 불타 없어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하늘은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은 뜨거운 불에 풀어질 것이다.' '체질'이라는 원어(스토이케이아)는 '원소들'을 가리킨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불타 버릴 것이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에는 인류가 이루어 놓은 모든 문명의 일들이 분명히 포함된다. '드러나리로다'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불타 버리리라'는 말(카타카에세타이)이다.

[11, 12]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베드로는 계속하여 주의 재림의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땅의 원소들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불에 타서 풀어질 것이라고 증거한다. 주의 재림의 날은 한마디로 심판의 날이다. 죄와 저주로 더러워진 현재의 세상은 다 불타 버릴 것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 앞에서 성도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라고 질문한다. 원문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에 있어서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라고 되어 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라는 원어(복수형)는 매튜 풀의 주석대로 '계속적인 거룩의 삶'과 '하나님께 대한 온갖 종류의 의무 수행'을 암시한다. 성도들은 주의 재림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계속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고 또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일들에 성실해야 한다.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주의 재림의 날에 이루어질 다른 하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요한계시록 21:5-7,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천국은 의의 거하는 세계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현재의 세상은 죄인들이 거하는 죄가 충만한 세상이지만, 오는 세상인 천국은 의인들만 거하는 의로 충만한 세계이다. 거기에는 죄인들이 들어갈 수 없다. 그 곳은 죄의 더러움과 저주와 허무함이 전혀 없는 완전히 새로워진 세계이다.


결론적으로, 8절부터 13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배운다. 첫째로, 주의 재림의 날은 더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사람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주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이요 그 날은 마침내 밤에 도적과 같이 갑자기 올 것이다.

둘째로, 주의 재림의 날에는 현재의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불타 없어질 것이요,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이다. 죄악된 세상은 다 불타 버리고 죄가 전혀 없는 새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죄인들은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셋째로,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의 재림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거룩한 삶과 경건한 삶에 성실해야 마땅하다. 우리는 멸망할 세상에 속한 자들처럼 살지 말고, 영원한 천국에 속한 자들답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14-18절, 온전한 성화를 위해 힘쓰라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베드로는 본장에서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거듭 불렀다(1, 8, 14, 17절). 이것은 성도들을 향한 그의 사랑을 잘 드러낸다. 주의 참된 종들은 주의 백성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교훈하려 한다. 또 주의 참된 백성들은 주의 종들을 사랑하며 그 입의 교훈을 성심으로 받고 따라 순종하려 할 것이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완전한 성결(聖潔)을 위해 힘쓰라고 당부하면서 방금 전에 말한 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언급한다. "너희가 이것들을 바라보나니." 즉, 우리가 주의 재림과 의의 천국을 생각할 때 마땅히 완전한 성결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타 없어질 세상에 속하여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의(義)만 가득한 천국에 속한 자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흠 없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죄 없는 상태, 흠과 점이 없는 완전한 성결의 상태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의 목표이었다. 에베소서 1:4, 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완전한 성결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목표이었다. 에베소서 5:26, 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한 완전한 성결은 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은 마땅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 완전한 거룩의 상태로 주님 앞에 서기를 힘써야 하는가?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주의 재림의 때이지만, 현재도 그것이 우리의 목표이어야 할 것이다. 완전한 성결은 성도의 신앙 생활의 목표이어야 한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그러나 우리 자신도 완전한 성결을 위해 힘써야 한다.

[15, 16]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는 9절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아직 회개치 않은 택한 자들에게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그런 후, 그는 바울을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도 이런 일들 곧 주의 재림과 불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그의 서신들에서 썼음을 언급한다.

특히 베드로는 바울의 모든 편지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짐을 암시한다. '그 모든 편지에도'라는 그의 표현은 바울 서신이 벌써 그 당시에 많이 쓰여졌고 알려졌고 아마도 수집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다른 성경과 같이'라는 그의 표현은 그가 바울 서신들을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했음을 보인다. 여기에 사도들의 글들의 권위가 있다. 사도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주의 특별 계시의 전달자들이었고 주께로부터 특별한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글들은 기록된 즉시 성경으로 간주되었다.

단지, 베드로는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바울 서신들의 어떤 어려운 부분들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멸망에 이르지 않기를 조심시켰다. '억지로 푼다'는 원어(스트레블로오)는 '왜곡시키다, 변개시키다'는 뜻이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복음 진리와 다른 것을 말하고 정로(正路)에서 이탈하게 하는 것은 멸망할 큰 죄가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바르게 취급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려운 부분은 억지로 해석하지 말고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경의 전체적 대의(大義)를 잘 파악하고, 모든 성경을 거기에 조화시켜 해석하고 풀어야 할 것이다.

[17, 18]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무법한 이단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믿음의 확신에서 이탈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또 그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자라가야 할 것을 부탁하였다. 우리는 복음 진리를 확신하고 그 지식 안에서 점점 더 자라가야 한다. 바울도 말하기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하였다(엡 4:13-15).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온전한 성화를 위해 힘쓰라고 교훈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이것을 예정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것을 이루셨다. 완전한 성결은 법적으로는 이미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성실한 노력으로 우리의 실제적 인격과 삶 속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완전한 성결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목표이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본문은 주의 오래 참으심이 택자들의 구원이 될 것을 알고 우리가 인내할 것과, 성경을 왜곡시키는 큰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과, 믿음의 확신에서 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 할 것을 교훈한다. 이런 것들도 다 성도들의 완전 성화의 요소들이다. 우리는 주 앞에서 흠과 점이 없이 나타나기를 힘쓰자. 우리는 완전 성화를 향해 달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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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김효성 목사) 내용 목차
1장: 진리를 위한 싸움
본서신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이다. '야고보의 형제'라는 표현은 둘 중의 하나를 가리킬 것이다. 첫째는 열두 사도 중에 야고보와 친족 관계에 있는 유다를 가리킬지 모른다. 한글성경 누가복음 6:16은 그를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번역했다. '아들'이라는 말은 작은 글씨로 첨가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야고보의'라는 말만 있다. 옛날 영어성경은 '야고보의 형제 유다'라고 번역했다. 둘째는 그 표현이 예수님의 동생들 중 한 사람인 유다를 가리킬지 모른다. 마가복음 6:3은 예수님의 동생들 중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 등을 언급한다. 유다는 17절에서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자신을 사도들과 구별시키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는 사도가 아닌 유다일지 모른다. 또 그가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표현한 것은 야고보가 당시에 잘 알려진 인물임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이었으므로(행 15:13; 갈 1:19; 2:9) 그의 동생 유다가 본서신의 저자이었다면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세기 경에 벌써 허마와 폴리갑은 본서신을 인용하였다. 초대 교회는 본서신을 영감된 책으로 받아들였다. 만일 본서신의 저자가 사도가 아니고 예수님의 동생 유다이었다면, 본서신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경우와 같이 다른 사도적 인물의 인정과 권위에 의해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그 인물이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마가복음은 사도 베드로의 인정과 권위에 의해 그리고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의 인정과 권위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본서신이 모세의 승천이나 에녹서 같은 가경서(假經書)를 인용했으므로 영감된 책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있지만, 본서신의 9절과 14절에 인용된 말들은 구전(口傳)에서 인용되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므로 반드시 가경서를 인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과 거짓 교사들에 대항하여 '진리를 위해 싸우라'는 것이다(3절). 유다는 또한 이단들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였다(4-19절). 본서신의 교훈은 말세를 당하여 배교와 타협과 혼란이 극심한 오늘날 매우 적절하고 요긴하다. 오늘날 주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진리를 위해 이단들을 대항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

 1장: 진리를 위한 싸움 1-2절, 문안 인사
[1, 2]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유다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라고 부른다. '야고보의 형제'라는 말은 그 야고보가 당시에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신앙과 순종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하나의 좋은 모범 정도가 아니고 신앙의 대상이요 순종의 대상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에게 '주님'이셨다. 그에게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고 초대 교회의 모든 이들에게 그러하였고 그 후 시대에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신앙과 순종의 대상이시다. 우리는 그를 하나님과 구주로 믿고 의지하며 그에게 절대적 순종과 헌신을 바친다.

유다는 편지를 받을 성도들을 세 마디로 표현한다. 첫째로, 그는 그들을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전도의 말씀에서 죄인을 부르시는 외적인 부르심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회개하고 주께로 나오게 하시는 효력 있는 부르심을 의미한다. 둘째로, 그는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거룩해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사랑을 얻고'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거룩해지고'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 셋째로, 그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원어(예수 크리스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다.

유다는 이런 성도들에게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많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랑을 입은 자들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주시는 평강을 소유하고 누리는 자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너무 약하고 세상은 너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과 사랑은 우리에게 날마다 시간마다 더욱 많이 요구되는 것이다.

3-4절, 편지를 쓰는 목적

[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유다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받은 구원에 대해 성도들에게 몇 마디 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권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다음 절에 말한 대로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받은 구원에 대해 도전하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단들이 도전하고 부정하는 우리의 구원은 몇몇 사람들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며 우리가 믿는 바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이다.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라는 원어는 '우리의 공통적 구원'이라는 뜻이며, '믿음의 도'라는 원어는 단순히 '믿음'이라는 말로서 여기에서는 믿는 마음가짐보다는 믿음의 내용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내용은 단번에 확정된 것이며 시대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다(갈 1:7-9).

기독교 진리는 확정되었고 고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단번에 이루어졌고 그의 십자가 속죄 사역도 단번에 이루어졌고 그의 부활도 단번에 이루어졌고 우리의 사죄(赦罪)와 칭의(稱義)도 법적으로는 단번에 완전하게 이루어졌다. 이 기독교 신앙 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님 외에 다른 예수가 없으며,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고, 성경적 예수와 성경적 복음을 믿고 고백하게 하는 영 외에 다른 성령이 없다.

그런데 이 불변적 진리를 부정하고 혼잡케 하는 이단들이 교회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한 싸움이다(빌 1:7; 딤전 1:18; 딤후 4:7).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우선, 우리는 이단에 대해 침묵하거나 이단을 포용하거나 이단과 협력하거나 이단과 연합하여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이단을 분별하고 그것을 반박하고 비평하며 다른 이들로 하여금 그것을 조심하도록 경계하고 그것과 교제하지 말고 그것으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롬 16:17; 고후 6:14-17; 엡 5:11; 딛 3:10; 요이 7-11).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하고 상대방에 대해 잘못 표현하거나 잘못 정죄하는 실수를 하지 않고 정확하고 정직한 말만 하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갈 6:1; 딤후 2:24-26).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본절은 이단에 대해 몇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로, 이단은 교회 안으로 가만히 들어온다. 이단은 '내가 이단이다'라고 말하면서 들어오지 않는다. 이단은 마치 자신이 이단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처신하면서 교회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이단을 분별할 수 있다. 교회가 영적으로 잠들면 이단이 많이 들어올 것이다.

둘째로, 이단은 옛적부터 정죄를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되었다'는 말은 '정죄를 받기로 미리 작정되었다'는 뜻이다. 이단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다. 그들은 구원받은 자들이 아니고 만세 전부터 정죄를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셋째로, 이단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 이단은 불경건하다.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믿었더라면 이단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이단은 정욕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하여 방종에 떨어지는 교훈을 하면 그는 진리에 위배되며 이단적이다. 셋째, 이단은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전통사본에 '홀로 하나이신 주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다. 성경에 증거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일부라도 부정하는 것이 이단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주신 구원과 단번에 주신 믿음의 진리를 귀중하게 여기고 이단을 분별하여 힘써 싸워야 함을 배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이 여러 곳에서 보이는 대로 이단에 대해 침묵하거나 이단을 포용하거나 이단과 협력하거나 연합하여 활동하지 말고 이단을 분별하고 반박하고 비평하고 이단과 교제를 단절하고 다른 이들에게 이단을 경계하게 하고 이단과 분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항상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고 또 정확하고 정직한 말을 하고 잘못된 비평이나 정죄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5-10절, 이단들의 죄악과 심판

[5]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유다는 겸손하게 권면한다. 그는 자신의 권면의 말이 성도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이지만,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한다. 이것이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바른 태도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5장에서 비슷하게 썼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유다는 거짓 교사들 곧 이단자들의 죄악과 심판을 역사상 몇 가지 사실들에 비교한다. 첫째로, 그는 이단자들의 죄악과 심판을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에서 멸망한 이스라엘의 선조들에 비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기 백성을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대항할 때 그들을 광야에서 다 멸망시키셨다. 이와 같이 교회에 속한 것 같은 이단자들도,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교회에 소속하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둘째로, 유다는 이단자들을 자기 위치를 떠난 천사들에 비교한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은 사탄과 악령들을 가리킬 것이다. 물론 모든 악한 천사들이 다 지금 흑암에 결박되어 있지 않지만, 그 중 일부분이 그러한 것일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후서 2:4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라고 하였다. 사탄과 악령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위치, 즉 하나님을 섬기는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지키지 않고 교만함으로 타락하게 되었다고 보인다(딤전 3:6). 하나님께서는 악한 천사들의 일부는 이 세상에서 현재 활동하도록 허락하셨으나, 그 나머지는 이미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섬기도록 만드셨던 천사들이라도 타락할 때 이렇게 벌하셨듯이, 그는 이단자들도 지옥에 던지실 것이다.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셋째로, 유다는 이단자들을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과 심판에 비교한다. 옛날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은 심히 음란하므로 마침내 유황불비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였다.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라는 원어는 '이 사람들과 같은 모양으로'라는 뜻으로 이단자들을 가리킨다. '다른 색을 따라'라는 말은 정상적인 남녀 관계를 벗어난 변태적 관계 즉 동성애를 가리킬 것이다. 성적인 타락의 극단적 형태가 동성애이다. 성경은 그것을 '가증한 일'이라고 표현하였다(레 18:22).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극도로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비를 내려 완전히 멸망시키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단자들은 같은 죄 때문에 같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이단자들의 죄악은 앞에서 언급한 세 경우와 비슷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인 것처럼 처신한다. '꿈꾸는 이 사람들'이라는 말은 그들이 꿈으로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다고 선전함을 암시한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고 마귀의 종들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들은 육체를 더럽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음란한 자들이다. 4절에서도 유다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꾼다고 지적하였다. 이단의 한 특징은 도덕적 부패이다. 참된 신앙과 도덕적 삶은 같이간다. 참된 신앙을 저버린 자가 도덕적으로 부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로 그들은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권위와 영광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합법적인 권위를 가리킬 것이다. 이단자들은 교회의 합법적인 교훈과 치리에 복종치 않는다. 물론 우리가 사람의 종이 될 필요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합법적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성경이 밝히 가르친 바이다. 만일 교인들이 교회의 합법적인 교훈과 권위에 복종치 않는다면, 교회는 이단을 막아낼 수 없고 분파의 죄악과 혼란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누가 교회의 교훈과 치리에 불복종하려 한다면 그는 그 이유를 성경에 근거하여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교훈과 치리의 권위에 대해 여러 곳에서 밝히 증거한다. 마태복음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9, 10]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유다는 이단자들이 교회의 합법적 권위자들을 함부로 비난하는 잘못에 대해 지적하면서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해 마귀와 변론한 일을 언급한다. 이것은 구약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옛날부터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내용이었다. 성령의 감동 가운데 유다는 천사장 미가엘이라도 마귀에 대하여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하였는데 저 이단자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고 비난한다고 지적한다. 이단자들은 교회의 합법적 권위자들을 함부로 비난하였다. 그것은 매우 악한 일이었다.

또 그들은 육신적 죄악성으로 인하여 멸망을 당하고 있다. '본능으로 아는 그것'이라는 말은 인간의 육신이 가진 본능적 감정과 욕망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성 없는 짐승이 가진 것과 비슷하다. 인간이 단지 그런 것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것보다 고상한 영혼의 생각과 감정과 소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증거들 중의 하나이다. 인간의 가치는 육신적 감정보다 이런 정신적 요소에 있다. 그렇지만, 저 이단자들은 결국 육체적인 것을 추구하는 자들인 것이다. 저들은 그 육신의 죄악된 감정과 욕망 때문에 마침내 멸망을 당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10절까지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악한 예들만을 보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으나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광야에서 멸망을 당했던 이스라엘의 선조들, 자기 위치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나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던지운 천사들, 간음을 행함과 동성애의 극한 죄악 때문에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 등은 육체를 더럽히며 하나님이 교회에 합법적으로 주신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을 훼방하는 저 이단자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저들은 다 지옥의 형벌을 받을 자들이다. 우리는 이 악한 예들을 통해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겸손히 우리의 위치를 지키고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권위자들을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비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성경적 교훈과 치리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 또 우리는 음란으로 육체를 더럽히지 말고 거룩함과 정결함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11-19절, 이단들의 죄악과 심판(계속)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유다는 이단자들을 역사상 세 명의 인물에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화가 있을 것을 선포한다. 첫째로, 이단자들은 가인의 길을 가고 있었다. 가인은 동생을 미워하여 마침내 그를 죽였다. 이와 같이 이단자들은 마음 속에 미움을 가득히 품고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둘째로, 이단자들은 발람의 어그러진 길을 가고 있었다. 발람은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행하다가 큰 책망을 받았다. 이와 같이 이단자들 속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셋째로, 이단자들은 고라의 패역을 따르고 있었다. 고라는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인도자 모세를 대적하다가 하나님의 큰 벌을 받았다. 땅이 갈라져 그들을 산 채로 삼켰다. 저 악한 자들과 같이, 이단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화가 있다.

[12]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유다는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이단자들에 대해 평가한다. 첫째로, 이단자들은 애찬의 암초이다. 암초는 배를 파선시키는 무서운 원인이다. 배는 교회를 상징한다. 이단자들은 교회의 사랑의 식탁 교제에 기탄 없이 참여하지만 실상 교회를 파괴시키는 무서운 요소이다. 둘째로, 이단자들은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이다. 목자는 양을 기르는 자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지만(요 10:11), 이단자들은 양을 기르지 않고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이다. 셋째로, 이단자들은 바람에 밀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다. 구름은 비를 기대하게 하는 것이지만, 물 없는 구름은 그 기대를 무너뜨린다. 비는 생명의 은혜를 상징한다. 그러나 이단자들에게는 그런 비가 없다. 그들은 세상 풍조에 밀려다니는 물 없는 구름에 불과하다. 넷째로, 이단자들은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다. 열매는 의와 선과 영혼의 구원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단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므로 그들에게는 그런 열매가 없다.

[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다섯째로, 이단자들은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다. 그들은 거짓과 미움과 탐욕, 음란과 강포의 말과 행위로써 인격의 수치를 드러낸다. 여섯째로, 이단자들은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다.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은 지옥을 가리킨다. 이단자들이 마지막으로 갈 곳은 지옥밖에 없다. 주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마 23:33).

[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한 말씀이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 이단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사람들'이라는 말은 원문에 '이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다. '수만의 거룩한 자'는 아마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재림의 주께서 죽은 성도들의 영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며 그들이 다 부활할 것이라고 말했다.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주의 재림의 목적은 악인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본절은 '경건치 않은'이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한다. 불경건은 실제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인데, 그것은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이다. 불경건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항하는 강퍅한 말들을 하게 한다. 이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재림의 주께서는 오셔서 이런 불경건한 자들을 다 심판하고 정죄하실 것이다.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利)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유다는 이단자들의 죄악상을 다시 증거한다. 그들의 죄는 앞에서 언급한 그러한 불경건이며 하나님을 거스려 하는 모든 강퍅한 말들이다. 그래서 유다는 그들을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만을 토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또 그들은 그 정욕대로 행하는 음란한 자들이다. 또 그들은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는 교만한 자들이다. 또 그들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 아첨하는 말을 하는 삯꾼들이다. 탐심은 하나님 대신에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이다. 이러한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익을 위해 아첨의 말을 하게 만든다.

[17-19]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유다는 사도의 말을 인용하는데, 여기에서 그는 자신을 사도들과 구별하는 듯하다. 유다가 인용한 내용은 사도 베드로가 그의 두번째 서신에서 한 말씀이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벧후 3:3). 유다서는 베드로후서가 사도의 글이라는 것을 증거한 가장 오래된 증거이다. '당을 짓는 것'은 교회를 분리하고 분열하는 행위이다. 이단은 교회의 일치와 화평을 깨뜨리는 자이다. '육에 속한 자'라는 원어(프쉬키코스)말은 '육욕적인 자, 호색적인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단의 음란한 특성을 증거한다. 그들 속에는 성령께서 계시지 않다.


결론적으로, 11절부터 19절까지는 우리에게 이단자들의 죄악상과 그들에 대한 평가와 그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 증거한다. 이단자들의 죄악은 서너 가지이다. 첫째로, 그들은 교만하다. 이 교만은 미움과 분열로 나타난다. 그들은 가인과 같이 형제를 미워하고 고라와 같이 하나님의 세우신 지도자를 대항하고 대적한다. 그들은 원망하고 불만을 토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롱하는 자들이며 당을 지어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이다. 둘째로, 그들은 탐욕적이다. 그들은 불의의 삯을 위해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갔고 물질적 이익을 위해 아첨하는 말을 한다. 셋째로, 그들은 정욕적이다. 그들은 육욕적이며 호색적이며 음란하다.

또 이단자들은 여러 가지 표현으로 평가된다. 이단자들은 교회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물 없는 구름이요,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만 드러내는 자요, 영원한 흑암에 던지울 별들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이단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영원한 흑암의 처소인 지옥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를 받을 것이다.

본문이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그것은 우리가 이단자들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이단자들처럼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단자들처럼 탐욕적이지 말고 자족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단자들처럼 음란하지 말고 성결한 삶을 지켜야 한다.


20-23절, 권면

본문에서 유다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할 일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일에 대해 몇 가지 권면을 한다.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유다는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할 일에 대해 권면한다. 첫째로, 그는 우리가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립하라고 권면한다. 유다는 성도의 믿음을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참된 믿음의 성격을 나타낸다. 성도의 믿음은 세상적인 일이 아니다. 성도의 믿음은 세상적 가치를 구하는 일이거나 세상적 욕심이나 목적을 가지는 일이 아니다. 성도의 믿음은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다. 그것은 세상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다. 그것은 죄를 버리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거룩한 일이다. 그것은 지옥에 들어갈 자들이 구원을 받아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일이다. 믿음은 지극히 거룩한 덕이다.

이 믿음은 성도에게 필수적인 덕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 만일 성도인 우리가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없는 자일 것이다. 성도의 인격은 믿음 위에 건립된 인격이다. 우리는 아름답고 튼튼한 집을 짓듯이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립해야 한다.

둘째로, 유다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기도는 믿음의 증거이다. 믿는 자는 기도하게 된다. 믿음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다. 우리는 기도하되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성령으로'라는 말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라는 뜻이다.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은 보혜사 곧 우리의 위로자이시다. 그는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의 기도 생활도 도우신다. 그러므로 기도가 잘 안될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힘입어 기도해야 한다.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셋째로, 유다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고 권면한다. 자기를 지키라는 말은 이단 사상과 부도덕한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라는 뜻이다. 유다는 이단들에 대해 많이 말했다. 그는 본서신의 초두에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우리는 이단 사상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이 이단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도덕적인 죄들도 마찬가지다. 성도는 모든 종류의 도덕적 불결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지키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힙입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확실하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죄씻음과 영생의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사탄과 악한 영들의 활동이 아무리 크고 강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악과 싸워야 하며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로마서 8:31, 3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넷째로, 유다는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권면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구원을 받음을 나타낸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도, 진행도, 완성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로 되는 것밖에 없다. 우리의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도 주의 긍휼로 이루어졌고, 우리의 성화(聖化)도 주의 긍휼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지며, 우리의 영광의 구원의 완성도 주의 긍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면서 영생을 향해 달려가야 하고, 끝까지 그러해야 한다.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유다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일들에 대해서도 몇 가지 권면한다. 첫째로, 그는 어떤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권면한다. 전통사본에는 '의심하는'이라는 말(디아크리노메노이)이 '구별하면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을 구별해야 함을 나타낸다. 우리는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를 구별해야 하고, 확고히 믿는 자들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이 연약하여 의심하거나 범죄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둘째로, 유다는 다른 자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보다 잘못이 심한 경우를 가리키는 것 같다. 전통사본에는 '두려움으로 구원하라'고 되어 있고 또 본절의 후반부는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면서'라고 되어 있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자신을 더럽힌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24-25절, 송영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또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넘어지지 않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또 우리로 그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큰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의 시작과 진행과 완성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시작자]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완성자]인 예수를 바라보자."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전통사본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없고 또 '하나이신'이라는 말 다음에 '지혜로우신'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깨달은 모든 성도의 마땅한 일이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이다.


결론적으로, 20절부터 25절까지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위해 행해야 할 일 몇 가지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해야 할 일 몇 가지를 권면한다.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행해야 할 일에 대해서,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 자신을 건립해야 한다. 우리는 참된 신앙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의 감동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힘써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 사랑을 힘입어서 교리적 이단 사상과 윤리적 부패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영생에 이르도록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도, 진행도, 완성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밖에 없다.

그 다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행해야 할 일에 대해서,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들을 의심하는 자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부족과 연약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온전케 되기를 위해 권면하고 또 기다려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범죄한 어떤 이들은 불에서 끌어내듯이 구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더러운 옷이라도 싫어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을 교리적, 도덕적 오류로부터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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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2003년 1월 17일 (초판) (김효성 목사)
내용 목차
요한계시록 서론
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2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1)
3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2)
4장: 하늘 보좌의 광경
5장: 어린양
6장: 일곱 인
7장: 흰옷 입은 무리
8장: 일곱 나팔 (1)
9장: 일곱 나팔 (2)
10장: 작은 책을 먹음
11장: 두 증인
12장: 사탄이 내어쫓김
13장: 두 짐승
14장: 구속받은 성도들
15장: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
16장: 일곱 대접
17장: 큰 음녀
18장: 바벨론의 멸망
19장: 백마 탄 자의 심판
20장: 천년왕국과 대심판
21장: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성
22장: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라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요한 사도이다. 주후 2, 3세기의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히폴리투스 등은 본서를 요한 사도의 저작으로 인용하였고 서방교회에서는 일찍부터 본서가 요한 사도의 저작으로 인정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오랫 동안 논란되었으나, 주후 2, 3세기의 순교자 저스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등은 본서를 요한 사도의 저작으로 인용하였고, 특히 수리아의 가장 위대한 교부 에브라임 시루스는 계시록을 반복해서 정경으로 그리고 요한 사도의 저작으로 인용하였다.
요한계시록의 저작 시기에 관하여, 어떤 이들은 로마의 네로 황제 때인 주후 68년 혹은 69년경으로 보지만, 다른 이들은 도미시안 황제 때인 주후 95년 혹은 96년경으로 본다. 유세비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이레니우스 등에 의하면, 요한 사도는 도미시안 황제의 통치 제15년에 밧모섬에 유배되었고(주후 95년) 도미시안 통치 말기에(주후 96년) 그 섬에서 이 계시를 보았고 도미시안이 죽은 후 네르바 황제(주후 96-98년)의 통치 초기에 에베소로 돌아와 트라얀 황제(주후 98-117년) 때까지 에베소에 머물렀다.
요한계시록의 특징적 주제는 종말 예언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 사건들, 특히 앞으로 있을 대환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 심판, 부활 및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예언이다. 이것은 순종하는 성도들에게는 믿음과 인내로 대환난을 잘 견디고 마귀와 세상의 악에 지거나 타협치 말고 주의 재림을 맞이하게 하려고 주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지만, 거역하는 악인들에게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이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2~3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 4장: 하늘 보좌의 광경, 5장: 어린양, 6장: 첫째 인~여섯째 인, 7장: 흰옷 입은 무리들, 8장: 일곱째 인, 첫째 나팔~넷째 나팔, 9장: 다섯째 나팔~여섯째 나팔, 10장: 작은 책, 11장: 두 증인, 일곱째 나팔, 12장: 사탄이 내어쫓김, 13장: 두 짐승, 14장: 구속받은 성도들(14만 4천명), 15장: 승리자의 노래, 16장: 일곱 대접, 17장: 큰 음녀, 18장: 바벨론의 멸망, 19장: 하늘의 찬송, 백마 탄 자의 심판(그리스도의 재림), 20장: 천년왕국과 대심판, 21장: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22장: 재림의 확실한 약속 등이다.

1장: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요한계시록의 주된 내용은 종말 예언이다. 요한계시록 1장은 이 책의 내용과, 요한 사도의 기원과 송영, 그리고 요한이 계시를 받은 경위 등을 기록한다.
1-3절, 계시의 성격
본문은 본서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원천, 주체, 내용, 목적, 천적 전달자, 인간적 전달자, 방법, 계시와 성도의 관계, 계시의 복됨 등을 증거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이다. 요한계시록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계시란,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첫째로, 계시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이 계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의 뜻을 계시하여 주셨다. 히브리서 1:1, 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사실상, 진리는 하나님께서만 계시하실 수 있다. 구원의 진리도, 종말 사건들의 진리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라는 말씀에서와 같이, 성경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자주 구별되신다. 여기에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비가 있다. 성경은 삼위(三位)의 구별을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혹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영으로 표현한다. 신성(神性)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구별되신다. 그 두 분의 인격적 관계는 신비에 속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인성(人性)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구별되신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사람이시기 때문에 사람이신(딤전 2:5) 그는 하나님과 구별되신다. 예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한 인격이시며 하나님과 인간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는 역시 신비에 속한다.
이렇게 삼위의 구별이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고 그들의 관계성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까닭은 성경이 그의 신성에 대해 충만히 증거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요일 5:20) 혹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딛 2:13)으로 불리우셨다. 그는 갈릴리 바다 속에 있는 한 물고기의 입 속의 은전 한 세겔을 보셨다(마 17:29). 또 그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5병 2어, 죽은 자들을 살리심 등). 또 그는 하나님과 나란히 영광과 찬송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셨다(계 5:13).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구별되면서도 신적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하나이심을 증거한다. 즉 성경은 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다.
둘째로, 계시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계시의 내용을 하나님께 받아 알려주셨다. 사도 바울이 받은 구원의 복음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며(갈 1:12), 요한 사도가 받은 종말 예언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계 1:1).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의 신적 권위성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한다.
셋째로, 계시의 내용은 '반드시 속히 될 일들'이다. 이것은 미래의 일들, 특히 종말 사건들이다. 그것들 속에는 대환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마지막 심판, 죽은 자들의 부활, 새 하늘과 새 땅 등이 포함된다. '반드시'라는 말은 계시된 내용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종말 예언의 내용은 진실하고 확실하다. 또 '속히'라는 말은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다. 이 계시의 내용들은 반드시 속히 될 일들이다. 이 말씀을 주신 지 2000년이 지났다. 교회는 이 말씀대로 때가 가까움을 의식하며 살아왔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알 수 없으므로 항상 종말 의식을 가져야 한다. 사람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일이 더딘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의 일을 속히 이루실 것이다.
넷째로, 계시의 목적은 '그 종들에게 보이시기 위함'이다. '그 종들'은 주의 사도들과 모든 제자들을 가리킨다. 로마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유다서 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종이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우리를 위한 책이다.
다섯째로, 계시의 천적 전달자는 천사이며, 여섯째로, 계시의 인적 전달자는 그의 종 요한이다. 요한계시록 22: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일곱째로, 계시의 방법은 상징으로 나타내심이다. '지시하신'이라는 원어(세마이노)는 '상징으로 나타내다'는 뜻이다. 이것은 본서의 내용이 증거하는 바이다. 요한계시록은 종말 사건들에 대한 상징적 예언의 책이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본절은 계속하여 계시의 기술자와 그 내용과 그것의 충분함을 증거한다. 첫째로, 계시의 기술자는 요한 자신이다. 요한은 자기가 받은 계시를 책으로 기록하였다. 둘째로,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주께서 친히 증거하신 진리이며, 요한 사도가 본 바이었다. 본서에는 '본다'는 동사(에이돈)가 57회나 사용되었고, 그 중에 '또 내가 보니'라는 표현(카이 에이돈)이 32회나 나온다. 요한 사도는 많은 상징적 내용들을 환상 중에 보았다. 셋째로, '다 증거하였다'는 말씀은 요한이 기록한 본서가 하나님의 계시를 원만하고 충분하게 기록하였음을 증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충족한 말씀이다. 그 말씀은 우리를 온전케 하고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준비되게 한다(딤후 3:16, 17). 그러므로 이 책에 무엇을 가감해서는 안된다(계 22:18, 19).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본절은 계시와 성도의 관계, 계시의 복됨, 그리고 계시된 내용의 긴급성을 증거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읽고 듣고 지켜야 한다. 옛날에는 한 사람이 읽고 나머지 사람들은 들었다. 그래서 읽는 자(단수명사)와 듣는 자들(복수명사)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감사하게도 모든 성도들이 마음껏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성경책을 많이 읽고 듣고 지켜야 한다. 지킨다는 말은 말씀을 보수(保守)하고 실천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하나도 버리지 말고 다 보수하고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다. 특히 계시록을 통한 복은 환난을 대비함과 인내와 위로의 복이고(13:10; 14:12) 또한 성도가 환난과 죄악을 이겨 마침내 천국과 영생을 누리는 복이다(22:5, 17). 계시의 책인 성경은 그것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 참으로 복되다.
셋째로, 계시된 내용은 긴급한 일들이다. "[마지막] 때가 가깝다." 성도에게는 항상 종말 의식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지구의 종말이 가깝다. 본서와 성경 다른 곳들에 예언된 세상 종말의 징조들, 예를 들어 거짓 목사들의 나타남, 교회들의 배교(背敎), 전쟁, 기근, 전염병, 지진, 핍박, 세계 복음화 등이 이미 많이 나타나 있다. 자연계에도 이상 징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자원의 고갈, 환경의 오염, 생태계의 파괴, 오존층의 파괴, 지구 온난화 현상 등이 그러하다. 세상의 종말과 주의 재림의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므로 진실한 성도들은 이 계시의 책에 주목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려운 책이므로 너무 주관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덮어두어서는 안될 중요한 책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이것은 신적 권위로 인쳐진 말씀이다. 둘째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종말 예언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이 책은 미래의 역사에 대한 지도책과 같다. 이 책은 미래를 향해 가는 모든 성도의 지침서이다. 셋째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렇게 이 책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들은 복되다. 그들은 이 책을 통해 장차 올 대환난을 대비할 믿음과 인내와 위로를 얻을 것이며, 마귀와 세상과 죄악을 이기고 마침내 천국과 영생에 들어가는 복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의 말씀을 받고 열심히 읽고 듣고 지키자.
4-8절, 문안과 송영 4-8절에는 요한 사도의 문안 인사와 송영이 기록되어 있다.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요한 사도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였다. 종말 예언의 계시인 본서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형태로 되어 있다. 여기에 아시아는 소아시아, 지금의 터어키 지역을 가리킨다. 요한은 먼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였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영원 자존(永遠自存)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 보좌 앞에 일곱 영들은 성령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여러 신들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 충만한 위엄과 능력을 상징한다. 요한계시록 5:6, "[어린양의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시편 139: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그가 충성된 증인, 그의 부활, 땅의 임금들의 머리되심을 언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충성된 증인이셨다. 증인이라는 헬라어(말투스)는 순교자라는 뜻도 가진다. 참 증인은 죽기까지 진리를 증거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증거하신 충성된 증인이셨다. 또한 그는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땅의 왕들의 머리가 되셨다. 그는 모든 교회의 우두머리인 동시에 온 세계의 왕들과 정치가들의 우두머리이시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
요한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그들에게 있기를 기원하였다. 은혜와 평강은 성도에게 참으로 요긴한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이다. 우리는 은혜를 받아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더 잘 믿을 수 있고 또 죄 안짓고 바르게 살 수 있다.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서 누리는 마음의 평안과 환경적 안전이다. 평강 속에는 모든 좋은 것이 다 들어 있다.
본절 중간부터는 예수께 대한 송영이 나온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다수의 전통사본들은 '해방하시고' 대신에 '씻으시고'라고 되어 있다. 뜻은 비슷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소식의 내용이다. 이것이 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쁜 소식의 내용이다. 죄가 인생의 근본 문제이다. 범죄한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죽는다. 영원히 멸망한다. 지옥에 던지운다. 그러므로 죄씻음을 받아야 한다.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죄씻음의 구원, 이것이 예수께서 주시는 구원이다.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은 구원받은자의 특권을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고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었다. 하나님과 성도들 간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우리도 요한과 함께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자.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약속이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것은 계시록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승천시 구름이 그를 가리웠듯이 그의 재림시에도 구름과 함께 오실 것이다. 구름은 그의 영광의 신비를 부분적으로 가리울 것이다. 그의 재림은 각인의 눈이 볼 수 있는 사건일 것이다. 그리고 심판주의 나타나심 앞에 어떤 이들은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후회와 공포의 부르짖음을 할 것이다. '그러하리라, 아멘'이라는 마지막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어구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것을 소망하지 않는다. 이 땅의 것들은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다 불탈 것이다. 그것들은 다 불 심판을 위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의 기대는 전적으로 거기에 있다. 그가 다시 오시면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본절은 다시 하나님의 영원 자존성을 증거한다. '주 하나님'이라는 말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신약적 표현이다. 구약의 여호와는 신약성경에서 '주'라고 번역되어 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끝 글자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시다. 시작은 창조요 끝은 심판이다. 그는 창조의 하나님이시요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창조의 사건을 기록한 창세기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말을 예언한 계시록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곧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모든 피조물은 다 제한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는 제한성이 없다.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여기에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의 질적 차이성이 있다. 이러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인생과 역사의 모든 해답이 있다.


결론적으로, 4절부터 8절까지에서 우리는 많은 진리와 교훈을 발견한다. 첫째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자. 그는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분을 믿고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소망하자. 그는 충성된 증인이시고 그는 부활하셔서 만왕의 왕이 되셨다. 그는 장차 하늘로부터 내려오실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의 것을 소망하지 말고 그의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대망하자.

셋째로, 우리는 성도의 특권을 감사한 마음으로 누리자. 우리는 주의 사랑 가운데 죄씻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고 제사장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씻음을 받은 자답게 거룩하게 살고 하나님의 제사장답게 담대하게,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9-11절, 계시를 받은 경위

9-11절은 요한 사도가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 그 계시 받은 경위를 말한다.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요한은 자신을 성도들의 형제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노사도의 겸손한 인품을 나타낸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 성도들은 직분자들을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존경해야 한다. 요한은 자신을 또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성도들에게는 예수 믿기 때문에 받는 환난, 고통, 오해, 멸시, 핍박이 있다. 우리는 다 그 환난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의 나라와 참음에도 동참하는 자들이다. 환난이 있지만, 그의 나라도 있다. 참으면 영광도 있다(딤후 2:12). 십자가의 낮아지심 뒤에는 부활과 승천의 높아지심도 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이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라는 말씀은 2절에 언급한 대로 요한이 받은 계시의 내용을 의미한다. 초대교회의 역사 기록에 보면, 요한 사도는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였었다. 그러나 그 고난의 밧모섬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는 장소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시를 위해 그를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게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항상 모든 일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요한 사도는 주의 날에 계시를 받았다. 그는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하여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날도 주일이었고(요 20:19, 26),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도 주일이었다(행 2:1; 레 23:15, 16). 신약의 주일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토요 안식일 대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식일로 구별하여 주신 날이다.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요한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 요한 사도가 본 내용을 책에 기록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계시 진리를 더 잘 보관하고 전파하고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에 더 굳게 서고 더 큰 위로를 얻게 하기 위함이셨다. 여기에 성경의 필요성과 목적이 있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과 온전함을 위해 성경책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에 주목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12-16절, 예수님의 영광스럽고 엄위하신 모습

12-16절은 요한이 본 일곱 금촛대와 촛대 사이에 서신 영광스럽고 엄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묘사한다.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요한 사도가 본 첫번째 내용은 일곱 금촛대이었다. 그것은 일곱 교회를 가리켰다. 이 책의 주된 관심은 교회이다. 성경은 교회를 위해 주신 책이다. 하나님의 뜻은 참된 교회의 설립과 성장과 완성에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참된 교회의 건립을 위해 협력할 것이다.

[13-15]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요한 사도가 본 두 번째 내용은 일곱 금촛대 사이에 계신 인자 같은 이이었다. 그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 분명하다. 그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는 것은 그의 대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영광과 엄위함을 나타낸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은 것은 그의 죄 없는 순결성을 나타낸다. 그의 눈이 불꽃 같은 것은 그의 깊고 철저한 통찰력을 나타낸다. 그의 발이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것은 그의 심판의 강한 힘을 나타낸다. 그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와 같은 것은 그의 권위 있는 말씀들을 나타낸다.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는 것은 그가 교회의 목사를 붙드시고 보호하시고 사용하심을 나타낸다.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쪼개는 그의 예리한 말씀을 나타낸다. 그의 얼굴이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은 것은 그의 크신 영광을 나타낸다. 부활, 승천하시고 장차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엄위하시고 영화로우시다. 그 영광의 주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종말의 사건들을 홀로 주장하시는 분이시다.


17-20절, 주께서 하신 말씀

17-20절은 영광의 주께서 요한에게 친히 하신 말씀을 기록한다.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 앞에 엎드러졌다. 사람들 중에 그의 신적 영광을 보고 살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자신을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본질과 본체에 있어서 아버지와 하나이심을 증거한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가 바로 처음과 나중, 곧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장하시는 참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한 기본적 진리이다.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그는 이제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이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 열쇠는 주권(主權)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과 심판의 주인이시다.

[19, 20]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네 본 것'은 일곱 금촛대와 그 가운데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음성이며, '이제 있는 일'은 사도 시대의 교회들의 일들을 가리키고 '장차 될 일'은 교회 역사상 되어질 일들과 주님 재림 직전의 일들과 인류의 최종 상태에 대한 것들이다.

일곱 교회와 일곱 별의 '일곱'은 땅 위에 있는 교회들 전체를 대표한 듯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하였는데, 이 사자는 교회의 목사를 가리킨다. '일곱 별의 비밀'이라고 한 것은 역사상 어떤 교회의 목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므로 '비밀'이라고 표현한 듯하다. 여하튼, 교회의 목사들은 주의 오른손에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너무 염려하거나 너무 낙심해서는 안된다. 주께서는 일곱 교회들 사이에 다니시며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오른 손에 붙들고 보호하시고 자유로이 사용하신다.


결론적으로, 9절부터 20절까지에서 우리는 두어 가지 진리와 교훈을 깨닫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깨닫자. 우리는 그의 성결과 위엄, 그의 불꽃 같은 눈길, 권위 있는 말씀들을 깨닫자.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성격도 깨닫자. 첫째, 우리는 교회의 존귀함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교회를 금촛대로 보여주신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금처럼 귀한 존재임을 뜻한다.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이 입는 옷의 흉패와 견대에 있는 12보석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들이 심히 존귀함을 나타낸다. 주께서는 바로 이런 귀한 교회들 사이에 거니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다.

둘째, 우리는 교회의 사명을 깨달아야 한다. 촛대는 어두운 곳에 빛을 발하는 것이 사명이듯이, 교회의 사명은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이 빛은 전도와 선행을 가리킨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셋째,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의 도구임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의 목사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별들이다. 그가 그들을 붙드시고 보호하시고 사용하실 것이다. 혹은 그가 그들 중 어떤 이들을 버리실 수도 있다. 교회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도구이다. 여기에 교회의 영광도 있지만 교회의 책임과 의무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쓰임 받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2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1)

요한계시록 2장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들의 목사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그것은 첫 사랑의 회복, 죽도록 할 충성, 순결성 등을 강조한다.


1-7절,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모든 편지는 그 교회의 사자, 즉 감독자,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에게 보내졌다. 목사는 교회를 인도하는 자이다. 마치 목자가 양무리를 인도하듯이, 목사는 하나님의 양무리인 교회를 인도한다. 장로들은 이 일에 목사와 함께한다. 그러므로 목사가 바로 서면 교회는 바로 설 것이고, 목사가 잘못되면 교회에는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 예수께서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신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신다. 그는 세우실 능력도, 폐하실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므로 자신의 원하시는 바를 다 이루신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 앞에 잠잠해야 한다. 우리는 고요히 그를 의지해야 한다.

[2, 3]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전지하신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 목사의 선한 행위들을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주께서는 그의 믿음의 수고와 인내를 아신다. 때때로 성도들은 목사의 중심을 모를지라도 주께서는 아신다. 특히 에베소 교회의 목사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하였고 자칭 사도라 하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내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은 많은 원수들과 싸워야 하는 힘든 일이요 낙심하기 쉬운 일이지만, 그는 이 일을 잘 수행하고 잘 참고 피곤하지 않았다. '게으르지 않다'는 원어는 '피곤하지 않다'는 뜻이다.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나 주께서는 에베소 교회 목사의 현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책망하신다. 그것은 처음 사랑을 버린 일이었다. 그가 처음 사명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주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의 복음 진리를 전하고 지키는 일을 위하여 수고하고 참고 성실하였으나, 지금은 처음에 가졌던 그 사랑과 그 열심과 그 성실함을 버렸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지금 주를 진실히 사랑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의 일을 바르게 수행할 수 없다.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께서는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물론 근본적인 회개는 사람의 일생에 한번만 있다. 하나님 없이 죄 가운데서 방황하며 살던 사람이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가 그것이다. 그것은 단회적 성격의 회개이다. 이것은 '생명 얻는 회개'(행 11:18)이다. 아직도 회개한 적이 없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회개치 않는 자는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눅 13:3, 5). 그러나 이미 이런 회개를 한 자도 어떤 구체적 죄 가운데 빠졌을 때 그 죄로부터 돌이켜야 한다. 이러한 각개적 회개는 반복적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그 은혜는 죄인 속에 반드시 회개와 믿음을 일으킴으로써 구원하는 은혜인 것이다.

주께서는 그에게 만일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네게 임하여 그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고 말씀하셨다. 촛대를 옮기는 것은 교회를 폐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던 평양 교회, 그러나 신사참배를 가결했던 그 교회를 폐하신 것과 같다. 그것은 무서운 경고이다.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그러나 에베소 교회의 목사에게 선한 점도 있었다. 그것은 그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이었다. 니골라당은 14, 15절에 있는 대로 우상숭배와 음행을 허용하였다. 그들은 복음의 자유를 왜곡하고 남용하였던 것 같다. 주의 참된 종들은 이단들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주 예수님의 말씀은 곧 성령의 말씀이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교회들에게, 즉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사자들과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 모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신다. 이긴다는 말은 죄와 사탄과 세상을 이긴다는 말이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된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을 먹는 것은 영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지는 자, 곧 죄에 지고 사탄과 세상에 지는 자는 영생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요한일서 5:4,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는 영생을 얻고 이기는 자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편에서 성실히 노력하는 것을 통해 된다. 진실히 믿는 자는 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7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래 참으면서 선행과 수고를 힘쓰자. 사람들은 우리의 중심을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세고 계신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피곤해지지 말고 선을 행하고 진리를 위해 수고하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처음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신앙 생활에는 과거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신앙 생활에는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 뒤로 물러나 있으면 책망을 피할 수 없다.

셋째로, 우리는 범죄한 일이 있으면 즉시 깨닫고 회개하기를 힘써야 한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우리를 버리실지도 모른다.


8-11절,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에 대한 묘사는 그 목사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된다. '처음이요 나중이신'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온 세상과 인간을 주관하신다. 그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또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인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시다. 그는 죽음을 주관하신다. 비록 우리가 그를 위하여 죽는다 할지라도 그는 우리를 영광의 부활체로 다시 살리실 수 있고 참으로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세상과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참된 성도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신다.

[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會)라.

주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목사의 환난과 궁핍을 아셨다. 주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환난과 궁핍을 경험할 것이다.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히브리서 10: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비록 서머나 교회의 목사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라고 평가하셨다. 인생의 참된 부요는 물질적인 데 있지 않고 영적인 데 있다. 물질적인 가치는 일시적이지만, 영적인 가치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만 소망하며 유일한 위로로 삼고 하나님의 뜻만 행하며 사는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이다.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가 되라고 교훈하셨다(눅 12:21). 또 물질적으로 가난한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부요한 경우가 많다. 야고보서 2: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받았다. 구약교회는 매우 타락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또 주의 제자들과 성도들을 핍박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15,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그러나 실상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사탄의 회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어떻게 참된 교회에 속하겠는가? 그들은 분명히 사탄의 회에 속한 자들이다.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아야 했다. 고난은 기껏해야 우리의 육신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고린도후서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서머나 교회에는 장차 10일 동안의 환난이 있을 것이며 마귀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었다. 그 교회의 목사가 견고히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 시험과 환난이 있을 것이었다. 10일 동안의 환난은 서머나 교회에게 닥칠 문자적으로 10일 간의 박해이든지 혹은 상징적으로 어떤 제한된 기간을 가리킬 것이다.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과 고난은 영속적이지 않고 지나가는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과 인내와 충성을 가져야 한다.

예수께서는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다. 충성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참된 충성은 죽음을 통해 증명될 것이다. 아니, 참 충성은 죽기 전까지는 증명될 수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순교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확실한 표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 곧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위한 순교와 충성만이 의미가 있다.

주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는 종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생명의 면류관은 면류관의 종류라기보다 생명의 영광 혹은 영광스러운 생명이라는 뜻일 것이다. 죽기까지 참된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는 자는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 충성치 않는 자에게는 영생이 보장되지 않는다. 주님을 배반하고 떠난 자에게는 영생의 영광이 약속되지 않는다.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께서는 성령을 통해 서머나 교회의 목사에게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교회들에게 말씀하신다. 주의 참된 종들과 성도들은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성경책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을 읽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는 자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성경을 읽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께서는 또한 우리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이기는 자는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충성하며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둘째 사망의 해는 지옥 형벌을 말한다. 요한계시록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대해 충성치 않고 순종치 않는 자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구원은 반드시 믿음과 인내와 충성과 순종의 삶을 수반한다.


결론적으로, 8절부터 11절까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구하지 말고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구하자.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물질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물질적 부요는 일시적 가치를 가질 뿐이지만, 영적 부요는 영원한 가치를 가진다. 영생은 백년 동안의 세상 생활과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가지고도 바꿀 수 없는 보화이시다. 성도의 참 믿음은 세상의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환난과 순교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죽도록 충성하자. 충성은 참 믿음의 증거이다. 그것은 이기는 자가 되는 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다가 죽으면 우리는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세상은 단지 우리의 육신적 목숨만을 위협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은 자들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죽도록 충성하자.


12-17절,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로 묘사되었다.'좌우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든지 혹은 심판의 칼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과 같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예수께서 자신을 좌우에 날선 예리한 칼을 갖고 계신 자로 묘사하신 것은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영적 전쟁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개인의 신앙 생활과 교회의 진리 운동은 영적 전쟁과 같다. 마귀와 불신앙과 비진리를 대항하여 싸울 이 전쟁에서 우리의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주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사용하셨듯이 오늘날 우리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

[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버가모는 사탄의 위가 있는 곳이었다. 버가모는 우상숭배의 총본부와 같았다. 거기에는 제우스 신의 신전과 아테네 여신의 신전과 디오니소스 신의 신전 외에, 특히 뱀 모양의 의술의 신 에스큘라피우스 신의 신전이 있었고, 또한 로마 황제 아구스도를 숭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황제 숭배는 초대 교회 시대에 보편적인 한 풍조이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교회를 혼란시켰고 성도들을 미혹하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에 굳게 선 자이었다. 전통사본에는 "내가 네 행위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아노니"라고 되어 있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행위가 어떠한 지 다 아신다.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주의 이름을 굳게 잡았고 주의 충성된 증인 혹은 순교자 안디바가 죽임을 당했을 때에도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자는 순교자 못지 않게 충성된 믿음의 사람이다.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그러한 사람이었고 주께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칭찬하셨다.

[14, 15]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책망도 하셨다. 우리에게 칭찬거리가 있으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칭찬도 하실 것이지만, 우리에게 책망거리가 있으면 그가 우리에게 책망도 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하신 책망은 그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발람의 교훈은 발람이 발락에게 이스라엘을 미혹하는 한 방책을 일러준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게 하고 그 신들에게 제사한 제물을 함께 먹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진노하셨다(민 25:1-3). 그것은 발람의 간교한 조언에 의한 것이었다(민 31:16). 이와 비슷한 교훈이 버가모 교회 안에 들어온 니골라 당의 교훈이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의 목사는 그런 자들을 용납하고 있었다.

오늘날도 교회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교회가 경계해야 할 우상숭배는 천주교회의 마리아 숭배와, 자유주의 신학의 인간 숭배와, 종교다원주의의 이방 종교 관용이다. 우상숭배의 용납은 하나님께 책망 받을 큰 잘못이다. 오늘날 교회는 또한 음행을 경계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심히 음란한 사회이다. 현대 문화는 심히 음란하다. 오늘날 교회에는 심지어 동성애를 용납하는 경향까지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인들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께 큰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목사는 바른 교훈을 전하고 가르치며 교인들을 그 교훈대로 살도록 지도하고 관리해야 한다.

[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께서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교회 안에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는 자들을 용납하는 것은 교회의 목사가 회개할 죄이었다. 만일 목사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주께서 그 교회에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교회가 권징을 회피하면 주께서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주께서는 교인들 중 죄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직접 징벌을 내리실 것이다. 주께서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신다는 말씀을 보면 주의 입의 칼은 심판의 칼인 것처럼 보인다. 주님의 직접적 개입은 목사에게 큰 수치가 될 것이다. 그의 목회는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물을 짓는 것과 같은 목회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상급은 크게 감소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직접 개입하시기 전에 그는 교인들을 바르게 관리하고 필요할 때 적절히 권징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만나는 하늘 나라의 양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시편 78:24, 25,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장차 주님과 누릴 사랑의 식탁 교제를 가리킬 것이다.

또 흰 돌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옛 시대에 흰 돌은 운동 경기에서 이길 때에나, 재판에서 무죄 판결시에나, 큰 잔치에 입장할 때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과연 장차 우리가 받을 흰 돌은 그런 의미들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그 흰 돌은 세상에서의 영적 싸움에 승리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無罪) 혹은 의롭다 하심의 판결을 받을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며, 영광의 천국 잔치에 참여할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 흰 돌 위에는 새 이름이 기록될 것인데, 그것은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새 이름은 천국에서 사용될 우리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새 이름은 천국 백성으로서 우리가 누릴 복된 신분과 영광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7절까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 분명한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버가모 교회의 목사처럼 사탄의 위가 있는 곳, 죽음의 위협이 있는 곳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장차 임할 대환난 시대에 대비하여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상숭배와 음행의 악을 포용하지 않아야 한다. 오늘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이다. 우리는 이 어두운 시대에 교리적인 혹은 윤리적인 악을 분별하고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악을 정죄하면서 악을 용납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며 주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8-29절,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주님의 눈이 불꽃 같다고 한 것은 그의 통찰력의 날카로움을 나타내며 그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한 것은 그의 심판의 엄위함을 나타낸다. 주께서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에게 이런 모습으로 표현된 것은 주께서 그 목사의 문제점을 통찰하시고 그가 포용한 악에 대해 심판하실 것을 암시한다. 오늘날도 주께서는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도 보시며 우리의 행위도 판단하실 것이다.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것보다 많도다.

주께서는 먼저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가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하셨다. 그 목사는 주께 칭찬들을 일을 많이 하였다. 그는 주를 위해 많은 일을 하였고 주를 사랑하였고 믿었고 섬겼고 인내하였다. 이것들은 다 좋은 점들이었다. 우리도 주를 위해 일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고 주를 참으로 사랑하고 믿고 섬기는 자 되기를 원하며 또 환난 중에 오래 참는 자 되기를 원한다. 더욱이,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나중의 행위가 처음의 것들보다 많았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자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꾸준히 주를 믿고 섬겼으며 점점 더 열심히 주를 믿고 섬겼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그러나 진실히 주를 믿고 섬기는 자에게도 문제점이 있었다. 그의 문제점은 버가모 교회 목사의 문제점과 같이 잘못된 자를 포용하는 데 있었다. 그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였다. 다수의 사본들에는 여자라는 말이 '네 아내'라고 되어 있다.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의 아내는 자칭 선지자로 자처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치 옛날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처럼 우상숭배의 사람이었다. 그 여자는 주의 종들을 가르쳐 꾀어 음행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함으로써 우상숭배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는 이 죄악을 용납하고 있었다. 오늘날 성경을 믿는 많은 주의 종들도 포용주의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많은 목사들이 이단적 자유주의 신학들과 천주교회를 포용하거나 심지어 동성애 같은 악을 포용하고 있다. 주께서는 동일하게 그들에 대해서도 책망하실 것이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주께서는 그 여자에게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주께서는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들은 그 기회에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음행과 부도덕을 회개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구원받지 못한 자이었을 것이다. 교회 속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도 회개치 않은 죄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자들을 보면 낙심할 것이 아니고, 힘써 권면해야 하고 또 우리 자신을 성찰하여 그런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33, 34,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22, 23]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주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 사모에게 징벌을 선언하셨다. 첫번째 징계는 그를 침상에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병상에 눕게 하심을 가리킬 것이다. 두 번째 징계는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징계는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공의의 징벌이다.

이로써 모든 교회는 주께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게 될 것이다. 죄는 마음의 은밀한 곳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간의 그 은밀한 마음과 뜻을 살피시고 판단하시고 징벌하신다. 주 앞에는 비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모든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오늘날에도 공의로운 징계의 채찍을 드실 것이다.

[24, 25]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감사하게도 두아디라 교회에는 그 여자의 교훈을 받지 않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으셨다. 그는 그들에게 단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의 재림의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셨다. 오늘날에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안에 사탄의 은밀한 활동들이 많은 줄 안다. 현 시대는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주께서 남겨두신 신실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에 속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끝까지 속죄 신앙과 의와 선과 진실을 보존하고 실천하기를 원한다.

[26-29]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심판의 권세이다. 요한계시록 12:5에는 예수님 자신이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로 묘사되어 있다. 이 권세를 주께서는 성도들에게도 어느 정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고린도전서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또 주께서 약속하신 새벽별은 주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요한계시록 끝부분에서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표현하셨다(계 22:16).


결론적으로, 18절부터 29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끝까지 가짐으로써 처음 믿었을 때보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자라고 풍성해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뒤로 물러나는 자가 되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는 신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악한 자의 악을 용납하는 자가 되지 말자. 작은 악의 포용은 우리를 부패시키고 우리 교회를 부패시키고 나아가 만국 교회를 부패시킨다. 그러므로 악을 용납하지 말고 단호히 배격하자.

셋째로, 우리는 처음 믿을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굳게 붙잡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요동하지 말고 성경에 밝히 계시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지키자.


 

 

 

 

3장: 일곱 교회들에 주신 교훈(2)

요한계시록 3장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들의 목사들에게 주신 교훈이다. 그것은 신앙과 행위의 온전함, 바른 신앙의 보수, 확신 등을 강조한다.


1-6절, 사데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본절은 성령께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됨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고 계신 자이시다. 성령을 일곱 영으로 말한 것은 그의 완전한 지혜와 지식과 통찰력을 나타낸다. 주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 곧 그 영과 본질적으로 일체가 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통찰력은 완전하시고 충만하시다.

주께서는 사데 교회의 목사의 행위를 아셨고 그의 행위에 근거하여 그를 판단하셨다. 주께서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혹은 불완전한 말만 듣고 그를 판단하지 않으셨고 그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셨다. 사람의 행위가 중요하다. 사람의 행위는 마음과 인격의 표현이다. 사람의 말은 자기의 마음을 어느 정도 감출 수 있고 심지어 위선적일 수도 있으나, 사람의 행위는 그의 마음과 인격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사람의 마음도 판단하시지만, 특히 행위에 근거하여 사람을 판단하신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다.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그와 그의 교회가 사람들의 보기에 매우 활동적이었고 또 그렇게 알려져 있었다는 뜻이다. 활동적이라는 것이 한 단체가 건전하다는 표는 아니다. 공산주의자들도 매우 열심이 있고 이방 종교인들이나 이단 종파자들도 그러하다. 열심이 진리의 표시는 아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이냐, 어떤 성질의 열심이냐가 중요하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이었다. 죽었다는 말은 영적 의미이다. 그는 육신적으로는 건강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영적으로는 죽었다고 간주되었다. 그의 활동은 참된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위들은 위선적이었다. 참된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헛되다. 그의 믿음은 생명 있는 믿음이 아니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서에는 말했다.

[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이 말씀을 보면, 사데 교회의 목사는 아직 완전히 죽은 상태는 아닌 것 같다. 그에게 남은 바가 있었다. 그것은 복음 신앙의 뿌리요 연약한 생명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죽을 처지에 있었다. 그 남은 것을 그냥 내버려두면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목사는 그것을 굳게 붙잡아야 했다.

그가 그렇게 해야 했던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행위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행위의 온전함은 경건과 거룩, 의, 선, 진실을 가리키고, 행위의 결함은 도덕적 흠과 점과 부족 곧 죄를 가리킨다. 사데 교회의 목사에게는 행위의 온전함이 없었다.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성도가 받고 들은 것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진리이다. 생각한다는 말은 기억한다는 말이다. 과거의 기억은 유익하다. 특히 구원의 기억이 그러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405장).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회개케 하셨고 예수 믿게 하셨는지 기억하고 회개해야 한다.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기억은 오늘과 내일 신앙 생활에 힘이 된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셔도 그 목사가 일깨지 않으면 주께서 도적같이 그에게 임하실 것이며 직접 개입하실 것이다.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보통 교인들의 영적 상태는 목사의 영적 상태에 따라가지만, 이 경우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예외이었다. 사데 교회의 목사는 영적으로 죽은 자이었으나, 그 교회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주와 함께 다닐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합당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흰옷은 순결을 의미한다.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흰옷이며 의롭다 하심을 얻는 참 믿음 곧 속죄 신앙이 흰옷이다. 또 이 의 안에서 바른 믿음을 지키고 선행에 힘쓰는 것이 성도들의 흰옷이다. 그러나 흰옷을 입은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많은 이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죄악의 낙을 누렸다. 노아 시대에도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는 다 멸망을 당했다.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은 적다.

[5, 6]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우리는 흰옷 입은 목사, 흰옷 입은 직분자들, 흰옷 입은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흰옷 입은 무리의 수에 들어야 한다. 성도가 구원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고 또 그 의 안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 흰옷이다. 그러나 죄를 짓는 자는 흰옷을 더럽히는 자요 영적으로 죽어 가는 자이다.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 흰옷 입은 자와 흰옷을 더럽히는 자, 둘 중의 하나이다.

흰옷 입은 자들의 구원은 확실하다. 주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지우지 아니하고 그것들을 하나님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이다. '이름을 흐린다'는 말은 이름을 지워버린다는 뜻이다. 주님만 바라고 죄를 대항하고 의를 행하는 자들의 구원은 확실하여 주께서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버리지 않으신다. 그러나 반대로 흰옷을 더럽히는 자들 곧 범죄하는 자들의 구원은 보장될 수 없다. 사람이 죄 가운데 살면서 구원을 말하는 것은 헛된 소망이다.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주의 뜻을 따른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1절부터 6절까지에서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믿는다는 떠들석한 외적 모양이나 평판만 가지지 말고 참 믿음과 선한 행위의 실질을 가져야 할 것이다. 둘째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파악하고 굳게 보수해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기본을 보수하고 그것에 합당한 행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흰옷 입은 자가 되는 것이요 흰옷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참으로 믿는 자들은 이기는 자들이 될 것이다.


7-13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 이가 가라사대.

주 예수께서는 거룩하시고 죄가 없으시다. 히브리서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또 그는 진실하시다. 그에게는 작은 거짓도 없으시다. 이와 같이 거룩과 진실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주님의 속성이다. 주께 대한 이러한 묘사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의 인격이 그러하였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는 진실한 주의 종이었다.

주께서는 또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시고 문을 여시는 분이시다. 열쇠는 주권(主權)을 가리키고 그 문은 천국문을 가리킨다. 천국문을 열 권세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죄인들은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열린 문을 주셨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닫을 수 없는 문이었다. 열린 문은 천국의 확실한 보장을 가리킨다. 천국 문을 열고 닫을 권세는 오직 주 예수께 있다. 주께서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주께서 닫으시면 열 자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 공로를 믿고 주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는 자들을 위해 주께서는 천국 문을 여신다. 주께서는 저들의 구원을 보장하신다. 요한복음 10:27, 28,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주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열린 문을 주신 이유는, 그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8절 중간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열린 문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인간 편에서 볼 때 그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수하고 실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는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주의 말씀을 지켰고 주의 이름을 부인치 않았다. 그리고 그 댓가는 열린 문, 곧 천국의 확실한 보장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힘 없음을 핑게치 말자. 우리는 작은 능력, 보잘 것 없는 힘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래서 두렵고 떨릴지라도, 힘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의 이름을 배반하거나 부인하지 말자. 신앙의 순결성과 절개를 지키자. 그것은 깨끗한 신앙 생활을 말한다. 그것은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경건하게 살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 세속의 죄악된 풍조에 물들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교회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작은 힘으로도 주를 진실하게 믿고 따르자.

[9]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주께서는 유대인들의 모임을 사탄의 모임이라고 부르신다. 구약교회인 유대인들의 모임은 부패되고 타락하여 사탄의 모임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였고 그의 교회를 핍박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2:15, 16,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러나 주께서는 그 유대인들 중 몇 사람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 앞에 굴복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신실한 목사에게 내리시는 보상이었다. 주께서는 자신이 그 목사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 일로 증거하실 것이다. 주의 성도들과 종들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살아계심과 그들을 사랑하시고 위하심을 종종 현실 속에서 이렇게 나타내신다.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또 주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 한가지 더 복된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주께서 친히 그를 지키어 장차 온 세상에 임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시험의 때는 대환난의 때를 가리키는 것 같다. 물론 그것은 그 목사가 대환난을 겪지 않고 하늘로 올리우는 것을 뜻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성도들이 대환난을 통과할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29,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요한계시록 7:14, ". . .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에게는 시험과 환난의 때를 면하는 은혜가 예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옛날 애굽의 10가지 재앙 중에 그 재앙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고센땅과 같은 은혜일 것이다.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주께서는 단지 한가지를 그 목사에게 요구하셨다. 그것은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의 보수를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신앙을 굳게 잡아야 한다. 그것이 장차 우리가 받을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죄하고 회개치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장차 받을 면류관을 빼앗길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고 우리에게 예비된 천국의 영광을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과 성도들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주께로부터 받은 말씀 안에 굳게 서고 유일한 복음인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

[12, 13]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참된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들과 같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집이다. 에베소서 2:21, 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주께서는 이기는 자들에게 세 가지 이름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울 것을 암시한다. 둘째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다. 그것은 그들이 새 예루살렘 성의 백성, 곧 천국 백성으로 불리울 것을 암시한다. 셋째는 주의 새 이름이다. 그것은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불리울 것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3절까지에서 우리는 한가지 분명한 교훈을 받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이미 가진 복음 신앙을 굳게 잡으라는 것이다. 가진 능력이 크든지 적든지, 우리는 주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목사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말씀을 지켰고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들도 사도들과 선지자들로부터 받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잘 파악하고 끝까지 지키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보수 신앙이나 옛신앙은 바로 그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간직하자.


14-22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에게 주신 교훈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아멘은 진실이라는 뜻이다. 주님은 진실하시다. 또한 그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하셨고 그의 모든 말씀과 진리에 대하여 참되게 증거하셨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으시다. 주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에게 이렇게 자신을 표현하신 것은 그에게 확신과 충성을 요구하시는 뜻이 있어 보인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주께 충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께서는 우리 모두에게도 확신과 충성을 요구하신다.

또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표현하셨다. 고대의 헬라 철학자들은 우주의 근본 혹은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주의 근본이 되신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말씀=예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1:16, "만물이 그에게[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철학과 사상들의 질문들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대답이시다.

[15, 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차거나 덥다는 것은 주님과 주의 복음과 주의 일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주님과 주의 복음을 거절하거나 대항하지는 않았으나 주님과 주의 복음과 주의 일을 위해 열심을 가지지도 않았던 것 같다. 주께서는 이런 미지근한 태도보다는 오히려 분명한 태도를 원하신다. 믿으려거든 확실히 믿고 믿지 않으려거든 확실히 믿지 말라, 너는 믿는 것인가, 믿지 않는 것인가 확실한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다.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에 있는 것은 믿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고, 오히려 참된 믿음에 더욱 해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믿는 자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이런 미지근한 태도를 미워하시고 그런 태도를 가진 자들을 물리쳐 버리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미지근한 태도는 일종의 위선이다. 주께서는 거짓과 위선을 가장 미워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확신과 진지함을 원하신다.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 즉 교인 수나 재정에 있어서, 부요했던 것 같다. 그 교회 목사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고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네가 가난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외적으로는 부요하였으나 내적으로는 빈곤하였다. 그는 자신의 곤고함과 가련함과 가난함과 눈멂과 벌거벗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의 목사의 경우와 정반대이었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는 외적으로는 빈곤하였으나 내적으로는 부요하였다(계 2:9).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사는 외적으로는 부요하였으나 내적으로는 빈곤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부요를 크게 여기시지 않고 우리의 내적인 부요를 크게 여기신다(눅 12:21).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 곧 확신을 가리킬 것이다. 베드로전서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안약은 영적 세계, 하나님의 세계, 진리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성령의 지혜와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이 모든 처방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살 수 있다. 주님에게서 산다는 말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나타낸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들을 사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보화를 몽땅 다 주어야 살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내가 나를 부인하고 그에게 그것들을 요청할 때 그는 값없이 은혜로 그것들을 내게 주신다. 이사야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책망과 권면, 회개의 촉구는 다 주의 사랑에서 나온다. 주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많은 부족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오래 참고 또 책망하시는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버려두시거나 아니면 벌써 쳐서 데려가셨을 것이다. 부모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매를 때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충고한다. 만일 우리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종에게 열심을 품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 12:5, 6,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을 문밖으로 쫓아낸 이 불쌍한 종은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해야 하였다. 교회의 목사인 그는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못했다. 주께서는 그의 몸을 성전 삼지 못하시고 그를 떠나 계시다. 그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경우이었다. 회개한 자는 주님과 즐거운 식탁 교제, 즉 교제의 회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21, 22]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께서는 우리가 이기는 생활을 할 때 심판날에 주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 아들로서의 특권을 누림을 뜻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14절부터 22절까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해야 한다. 라오디게아 목사의 문제는 미지근한 데 있었다. 그에게는 확신이 없었음에 틀림 없다. 그는 주님을 불신앙하거나 의심하고 있었다. 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세상적 가치관과 열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그는 이러한 미지근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과 그 복음 진리를 확신하고 주의 의 안에서 의만을 행해야 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잘못을 행했을 때 우리의 잘못을 즉시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그때 주께서는 우리와 참된 교제의 식탁을 나누실 것이다.

 

 

 

 

4장: 하늘 보좌의 광경

1-11절, 하늘 보좌의 광경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것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교회의 휴거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중에 천상의 광경을 보게 된 경위를 말하는 것뿐이다.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이라는 표현은 이미 1:19에서 언급된 바이었다. 거기에 보면,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네 본 것'이란 일곱 금촛대 사이에 계시며 일곱 별을 오른손에 잡고 계신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이며, '이제 있는 일'이란 일곱 교회의 사자의 영적 상태이며, '장차 될 일'이란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종말 사건들이다. 이제 이 장차 될 일, 즉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기 위하여 사도 요한은 먼저 천상의 영광을 보게 된 것이다.

[2, 3]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사도 요한은 하늘에 올리워서 첫째로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보좌에 앉으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다음 장 1절(5:1)에 그의 오른손에 책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은 이 사실을 더욱 확실케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그의 본체는 아무도 볼 수 없으나 때때로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습은 여전히 상징적으로 묘사되었다. 그의 모습은 네 가지 단어로 묘사되었다. 벽옥과 홍보석과 무지개와 녹보석이 그것이다. 벽옥은 하나님의 성결의 영광을 나타내고, 홍보석은 그의 공의와 심판의 영광을 나타내며, 무지개는 그의 약속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며, 녹보석은 그의 선하시고 아름다우심을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사도 요한은 둘째로 보좌에 둘려 있는 24보좌들을 보았다. 거기에 24장로들이 앉아 있었다. 24장로들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상징하는 것 같다. 24라는 숫자는 구약교회의 12지파들과 신약교회의 12사도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요한계시록 21:12, 14에 보면, 새 예루살렘의 열두 문 위에는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있고, 성곽의 열두 기초석 위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있었다. 24장로들이 입은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성결을 가리키고, 그들이 쓴 금면류관은 교회가 천상에서 누릴 존귀와 영광을 상징한다고 본다. 우리의 소망과 영광은 이 땅에 있지 않고, 천국에 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를 바라보며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며 산다. 이 땅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의 불로 불태워질 것이나,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영광이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유할 것이다.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번개와 음성과 뇌성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보이며 이러한 위엄과 능력은 특히 그의 심판하심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 보좌 앞의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충만하신 영, 불같은 성령을 가리킨다. 그는 전지하신 영이시요, 소멸하시는 불이시다. 그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영이시다.

[6, 7]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사도 요한은 셋째로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을 보았다. 보좌 앞에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 네 생물이 있었다.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는 구약시대에 성막의 물두멍이나 성전의 바다를 기억나게 한다. 그것들은 다 제사장의 수족을 씻는 일을 위하여 만든 것이었다. 천상의 '수정 같은 유리 바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말미암아 흠과 점 없게 된 성결을 나타낼 것이다. 보좌 가운데와 주위의 네 생물은 에스겔서에 나오는 그룹이라는 천사와 같다. 24장로가 교회를 대표하듯이, 이 네 생물은 천사들을 대표하는 것 같다. 그들의 앞뒤에 눈이 가득한 것은 그들의 통찰력과 지식의 충만함을 상징할 것이다.

그 네 생물의 모습은 매우 상징적으로 묘사되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다. 사자는 불굴의 용맹스러움을, 송아지는 온순함과 충성을, 사람은 지혜와 총명을, 독수리는 쇠하지 않는 생명력과 민첩함을 상징하는 것 같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이러한 특징들을 가진다. 그들은 악령들과의 영적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고 용맹스럽고, 온순하여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순종하고 충성하며, 또 지혜롭고 민첩하며 쇠하지 않는 생명력을 가진다.

[8, 9]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네 생물이 여섯 날개가 있는 것은 마치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스랍이라는 천사의 모습과 같다. 거기에 보면, 그 여섯 날개는 얼굴과 발을 가리우는데 넷이 사용되고, 나는 데 둘이 사용되었다. 여하튼 네 생물들은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찬양하기를 힘쓴다. 천사들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천사들의 존재는 실재이다. 천사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다.

천사들의 주요 임무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찬양대의 임무이다. 자기의 육신의 기분이나 흥이나 감정을 좋게 하려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아니고, 참으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을 찬양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허무한 가사를 지절거리는 노래들을 미워하시나, 진리에 합한 노래들을 귀하게 보신다. 물론, 찬양은 가사 뿐만 아니라, 곡과 리듬과 박자도 하나님이 세우신 법과 질서에 맞게 아름다워야 한다. 시편 96:9,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불협화음의 빈번한 사용과 광란적인 무질서가 특징을 이루는 현대음악, 특히 록 형식의 음악은 기독교인들이 채택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오늘날 교회들 속에 밀려들어 온 현대기독교음악(CCM)은 분별력을 가지고 취사선택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

[10, 11]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24장로들이 그들 자신의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던져 드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고백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믿음과 선행에 대해 상주시지만, 성도는 사실상 그런 상을 받을 만한 의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우리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지상에서도, 천상에서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천사들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24장로들 곧 성도들의 회인 교회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한 근본적 이유는 그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천지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고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직 그 분만 모든 피조물들에게서--천사들과 사람들과 기타 모든 만물에게서--영원히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 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현실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자. 그것은 하나님의 성결의 영광이요 그의 공의과 심판의 영광이요 그의 언약에 신실하심과 그의 선하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오직 하나님만 섬기자.

둘째로,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의의 흰옷과 금면류관을 쓰는 자가 되자. 이것이 천국에 있는 승리한 성도들이 모습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모습이요, 악한 세상 속에서 의롭게 산 노아의 모습이다.

셋째로, 우리는 네 생물의 덕을 배우자. 그들의 사자 같은 용맹을, 송아지 같은 온유와 충성과 순종, 사람 같은 지혜와 총명을, 독수리같이 쇠하지 않는 생명력과 민첩함을 배우자.

 


 

 

5장: 어린양

1-5절,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사도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든 책을 보았다. 그 책은 장차 될 일들, 즉 종말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쓴 책일 것이다. 이것은 곧 인류의 미래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6장부터 계시되는 내용이며 요한계시록의 중심 부분이기도 하다. 안팎에 썼다는 말은 그 내용의 세밀하고 충만함을 보인다. 일곱 인으로 봉하였다는 것은 은밀하게 감추어진 내용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그 인봉이 하나씩 떼어질 것이고 인류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종말 계획이 하나씩 계시될 것이다.

[2-4]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하나님의 이 은밀한 종말 계획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하늘 위에 천사들이나 의인의 영들 중에도, 땅 위에 살아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죽은 자들 중에도 없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크게 울었다. 그는 아마도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타깝고 답답하여 울었을 것이다.

[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장로 중 한 사람은 요한에게 울지 말라고 말하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일을 하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가르쳐 주었다. 유대 지파의 사자요 다윗의 뿌리라는 표현은 창세기 49:9에 "유다는 사자새끼로다"는 예언과 이사야 11:1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날 것이라"는 예언에 근거한다. 이기셨다는 표현은 그가 마귀의 시험과 죄와 세상의 악을 이기셨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시험과 죄와 세상의 악을 이기셨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셨다. 이제 그는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셨다.


6-10, 어린양의 모습과 24장로들의 찬송

[6, 7]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어린양을 본 것은 요한이 본 환상의 상징적 성격을 보인다. 요한이 본 어린양은 이전에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양이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주님이시다. 그는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위한 속죄를 완성하셨고 부활하심으로 그 사실을 확증하셨다. 어린양에게 있는 일곱 뿔은 그의 충만한 능력을 보이고 일곱 눈은 그의 충만한 통찰력과 지식을 보인다. 그 일곱 눈은 또한 천지에 충만하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어린양은 종말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을 기록한 책을 취하였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며, 어린양은 구속 사역을 완성하심으로 인류 역사의 미래, 곧 종말 사건들, 심판과 최종 영광까지를 계시하실 자격자가 되셨다.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어린양에 의해 하나씩 계시될 것이다(계 6:1).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어린양이 책을 취하실 때 네 생물과 24장로들은 그에게 엎드려 경배하였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경배를 받으실 자이시다. 24장로들은 각각 거문고와 향 대접을 가지고 있었다. 옛날부터 악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시편 150편에는 나팔, 비파, 수금, 소고, 현악, 퉁소, 제금 등의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했다. 물론, 하나님께 사용되는 악기들은 경건하고 아름답게 연주되어야 한다. 또 성도의 기도들을 향에다 비교하였다. 성도의 찬양, 감사, 혹은 죄의 고백, 그리고 거룩한 소원의 간구는 향과 같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믿음의 기도들을 기뻐하신다.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새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노래하는 노래를 가리킨다. 어린양 예수님은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에 있는 그 인봉된 책을 취하시고 그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사람으로서 그와 비교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세상에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멧도 그와 비교될 수 없다. 그는 친히 십자가에 죽으셔서 그의 피로 세계 각국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속(救贖)하셨다. 참된 찬송은 속죄의 찬송이다. 우리의 찬송이 그러해야 한다. 단순히 하나님의 이런 저런 속성이나 사역을 찬양하는데 그치지 말고, 하나님의 하신 가장 중요하고 가장 존귀하고 가장 은혜로운 속죄 사역을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친히 자기 피로 우리 같은 죄인을 구속(救贖)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송해야 한다.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전통 사본에는 '나라'라는 말이 "왕들"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속죄 사역으로 우리를 왕들과 제사장들을 삼으셨다. 우리는 세상을 다스리는 왕들이 되었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들이 되었다. 성도들은 장차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할 자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천국에서 영원히 왕노릇할 자들이다(계 20:6; 22:5).


11-14절, 천사들과 만물들의 찬송

[11, 12]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사도 요한은 또한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수많은 천사들의 찬양 소리를 들었다. 그 천사들의 수는 천천 만만으로 표현되리만치 수없이 많았다. 그들은 어린양에게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돌렸다. 어린양의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부와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힘과 하나님의 존귀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합당하다. 특히 신성(神性)을 가지신 그가 죽임을 당하신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죄의 책임과 형벌을 대신 감당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에게 죄씻음의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인해, 즉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성취되었음을 인해, 하늘의 천사들도 어린양에게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것이다. 그 찬송은 합당한 찬송이다.

[13, 14]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천지에 있는 모든 만물들, 피조물들 즉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사람들이나 기타 모든 만물들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찬송과 영광을 돌렸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리는 영광스러운 만물의 합창이었다. 여기에 또 한번 더 성자(聖子) 예수께서 성부(聖父)와 동등한 영광과 능력을 가지신다는 우리의 삼위일체 교리가 증거된다. 만물들의 찬송에 대하여 네 생물과 24장로들은 아멘과 경배로 화답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 장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 역사의 미래가 계시되었음을 알자. 역사의 주체는 인간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세상의 역사는 정치가들이 만들어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배후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인류 역사의 수레바퀴는 실상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역사 속에서 이루신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이다. 하나님의 이 구원 경륜 속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주로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택한 백성의 속죄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해 증거해주실 유일한 주님이 되셨다.

둘째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피로 우리를 구속(救贖)하신 구주 예수님은 우리와 모든 천사들과 모든 피조물들의 경배와 찬송을 받으실 주님이시다. 우리는 본 장의 찬송의 가사들과 같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송을 항상 주께 올리자.

 

 

 

 

6장: 일곱 인

요한계시록 6장부터는 어린양이 일곱 인을 떼실 때 요한이 본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 일곱 인의 내용은 4:1에 언급한 대로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이다. 6장부터 19장까지 나오는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재앙의 해석에 관하여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첫째로, 어떤 이들은 이 내용을 초대 교회 시대 즉 로마 제국 시대에 다 이루어진 예언으로 본다. 이것을 과거적 견해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의 예수님의 예언에 보면 세상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에 대환난의 징조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들이 과거에 다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둘째로, 어떤 이들은 이 내용을 사도 요한 때로부터 세상 종말까지의 교회 역사 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이것을 교회사적 견해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서에 예언된 내용을 교회사상의 사건들에 구체적으로 일치시키는데 어려움이 있다.

셋째로, 어떤 이들은 이 내용을 전 기독교 역사에 악의 세력과 교회 간의 싸움의 대원리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을 상징적 혹은 영적 견해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서의 내용은 어떤 미래의 구체적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시간적 진전을 보이는 것 같고 단순히 어떤 원리만 보이는 것 같지 않다.

넷째로, 어떤 이들은 이 내용을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사건들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이것을 종말적 견해라고 한다. 이것이 가장 타당하게 생각되지만, 교회사적 사건들이나 일반적 징조들을 나타내는 점들도 있다고 본다. 우리는 요한계시록 6장부터 19장까지의 내용이 교회 역사에서 원리적으로 어느 정도 나타났으나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더욱 구체적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2절, 첫째 인

[1, 2]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지난 장에서 본 대로, 어린양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일곱 인으로 봉해진 책을 취하셨다. 이제 그 인을 하나씩 떼실 때 미래의 사건들이 예언된다. 첫째 인을 떼실 때, 사도 요한은 흰말과 그 탄 자를 보았다. 요한계시록에서 흰색은 좋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 같다. 인자 같은 이의 머리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았다(1:14). 신실한 성도들은 흰 돌을 받았고(2:17) 흰옷을 입었다(3:4). 또 재림의 주님은 흰말을 타고 오실 것이며(19:11) 그를 따르는 하늘 군대들도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흰말을 타고 그를 따를 것이다(19:14). 또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 보좌도 흰 보좌일 것이다(20:11). 흰색은 성결과 의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본절의 흰말과 그 탄 자는 문맥상 그리스도의 거룩한 심판의 사역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가 면류관을 받고 이기고 또 이기려 한 것은 그의 사역이 승리적임을 말한다.


3-4절, 둘째 인

[3, 4]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붉은 말과 그 탄 자는 전쟁을 상징함이 분명하다. 그가 '큰 칼'을 받은 것은 전쟁으로 인한 큰 살육을 뜻할 것이다. 그것은 전쟁 무기의 발달로 오늘날 볼 수 있는 대량 살상 무기를 예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세의 한 징조는 전쟁들이다. 주의 재림 전에 큰 전쟁들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요한계시록에는 본절 외에도 유브라데강 부근에서 2억의 군사가 동원될 전쟁과, 유브라데강이 말라 동방의 왕들이 들어옴으로 세계적 연합군이 형성되어 아마겟돈(므깃도 언덕)에서 일어날 마지막 세계적 대전이 예언되어 있다(9:13-16; 16:12-16).

역사상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전쟁들 중에서도 20세기에 치룬 두 차례의 세계적 전쟁은 처참한 '대전'(大戰)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죽은 군인들만 거의 1000만명에 이르렀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군인들만 약 1700만명이었다고 한다. 민간인들의 수는 몇 배 갑절이 될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후 세계는 서방세계와 공산진영으로 서로 대립되었고 아직도 그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세계 공산화의 꿈을 버리기 전까지는 그러할 것이다. 또한,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종교적 갈등이 남아 있다. 만일 제3차 세계대전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핵무기와 화학-생물학무기들을 동원한 인류 역사가 일찌기 경험하지 못한 처참한 전쟁이 될 것이다. 현대인은 고도로 불안한 전쟁의 위험 속에 살고 있다.


5-6절, 셋째 인

[5, 6]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검은 말과 그 탄 자는 기근을 상징하는 듯하다. 손에 저울을 가진 것은 식량의 배급을 상징하며 그것은 식량이 부족할 것을 뜻한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요, 한 되는 보통 사람의 1일분 식량이다. 하루 품삯으로 한 되의 밀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식량값이 매우 비싼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수요 공급의 원리대로 식량의 큰 부족을 나타낸다. 보리는 밀보다 싼 곡물로서 품질이 낮은 식량이다. 감람유와 포도주를 해치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서민들의 기본적인 식용품, 의약품, 음료수가 허용됨을 보이는 것 같다.

주의 재림 전에는 기근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 "처처에 기근들과." 기근은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근래에 세계적으로 더욱 심해진 것 같다. 월드북 백과사전에 의하면, 1870년대에 남부 인도에서 약 5백만명이 기근으로 죽었고, 중국에서는 9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1929년과 30년에는 중국의 황허강의 홍수로 인한 기근으로 약 2백만명이 죽었다. 1943년 동부 인도 벵갈에 대 기근이 있었다. 2차 대전후 150만명 이상이 기근으로 죽었다. 1960년대 이후 아프리카의 소위 사하라 사막 남부 사헬 지역과 남부 아프리카, 특히 이디오피아 등에 심각하여 수백만명이 죽었다. 1998년 세계농업기구는 발표하기를, 전 세계에 8억 2,800만명이 기아 상태에 있으며 해마다 1,800만명이 굶주림과 이로 인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7-8절, 넷째 인

[7, 8]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청황색 말과 그 탄 자는 본문의 설명대로 사망을 상징한다. 그의 뒤를 따르는 음부는 무덤을 가리킨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4분의 1은 전쟁과 기근과 사망 혹은 무서운 질병과 땅의 짐승들로 인해 죽을 것이다. '사망'이라는 말(다나토스)은 '사망'이라는 일반적인 뜻 외에 '치명적 질병'이라는 뜻도 있다.

주의 재림 전에 많은 질병들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4:7, "기근들과 온역들(전통 본문)과." 역사상 많은 질병들이 있었지만,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도 병원들은 각종 환자들로 붐빈다. 고혈압과 당뇨와 암은 오늘날 무서운 질병들이다. 특별히 동성애적 음란에 관련되어 있다고 보이는 에이즈(후천성 면역 결핍증)의 확산은 매우 위협적이다. 에이즈는 아직 예방약이나 치료약이 없다. 에이즈는 현 시대의 흑사병이라고 불리우는데, 1981년 처음 보고된 이후 2001년까지 약 20년 동안 에이즈로 인한 전 세계의 사망자 총수는 약 2100만명에 이른다. 또 2001년 6월 현재, 전 세계에 에이즈 감염자수는 약 3600만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는 주의 재림 직전의 대환난 시대의 여러 일들을 계시한다고 본다. 그것은 시대 순서라기보다 동시적이라고 생각된다. 주의 재림 직전에 전쟁과 기근과 사망 혹은 질병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자신의 재림 직전의 징조들로서 제시하신 내용들과 일치한다. 물론 이러한 징조들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어느 정도 나타났으나, 교회 시대 말기, 즉 주의 재림 직전에 절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주의 재림 직전에 전쟁과 기근과 질병들과 사망의 대환난의 시대가 올 것이다. 우리는 지금이 그런 시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환난에 대비하는 믿음을 준비하는 일이다.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께서 순교의 상황을 주시고 그것을 요구하실 때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참된 믿음을 준비해야 한다.


9-11절, 다섯째 인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 사도 요한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탄원하는 모습을 보았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은 원문대로 번역하면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다.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고 죽으면 몸과 영혼이 분리된다. 몸은 땅에 장사되지만, 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간다(전 12: 7).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자들이다. 즉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순교한 자들인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반했더라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사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단순히 몸만 죽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에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마 10:28).

이와 같이 신앙의 핍박과 순교는 종말 징조의 내용이며 대환난 시대의 한 특징이다. 마태복음 24:9, 10,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요한계시록 13:7, 15,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순교자들의 영혼들은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공의의 심판을 탄원하였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을 보응하신다는 도덕 질서를 위하여, 그리고 기독교가 참된 진리임을 변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며 또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들의 탄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들의 영혼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셨다. '흰 두루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성결과 의를 상징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른 동료 종들과 형제들이 순교하기까지 잠시 동안 쉬라고 말씀하셨다. 죽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에게는 비록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간청하는 기도가 있었지만 또한 참된 안식이 있을 것이다. '잠시 동안'이라는 말은 인간 시간표의 수천년도 하나님 앞에서는 잠시에 불과함을 보인다.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다(벧후 3:8).

다섯째 인의 중요한 진리는 마지막 심판 때까지 순교자들의 죽음이 더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교회 역사상 초대교회로부터 많은 순교자들이 있어 왔지만 마지막 심판 때 전까지 순교의 죽음은 계속될 것이다.


12-17절, 여섯째 인

[12-14]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매.

여섯째 인을 떼실 때 사도 요한은 큰 지진과 천체의 큰 변동을 보았다. 해는 총담같이 검어졌다. 총담은 털실로 짠 거무스름한 부대자루를 가리킨다. 달은 피같이 되었다. 별들은 무화과나무가 큰 바람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졌다.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갔고 각 산과 섬은 제자리에서 옮겨졌다. 이러한 묘사는 극심한 천재지변을 나타낸다. 큰 지진들과 천재지변들은 종말의 한 징조라는 사실이 계시된 것이다.

천재지변들은 세상의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의 한 징조이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주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고 하셨다(마 24:29). 또 요한계시록 8:12에도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는 예언이 있다.

특히 큰 지진들은 세상의 종말과 주의 재림 직전의 한 징조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지진들이 세상 종말과 자신의 재림 직전의 한 징조일 것을 말씀하셨다(마 24:7). 또 요한계시록 11:13은 두 증인의 승천 후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7천명이라고 증거하였고 요한계시록 16:17-20은 일곱째 대접을 쏟을 때 큰 지진이 있어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또 큰 우박이 있을 것이라고 증거한다. 큰 지진의 힘은 약 1억 8천만 톤의 티엔티(TNT) 폭탄과 같으며,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용되었던 원자폭탄의 약 만 배의 위력이라고 한다.

월드북 사전에 의하면, 역사상 대지진들이 일어난 장소와 그 사망자 수는 다음과 같다: 주후 526년 시리아 안디옥(오늘날 터어키) 25만명, 1268년 소아시아 실레시아 6만명, 1290년 중국 북동부 10만명, 1556년 중국 중앙부 솨안키(산시성) 83만명, 1667년 코카시아(구 소련 남서부) 8만명, 1693년 이태리 카타니아 6만명, 1730년 일본 혹가이도 13만 7천명, 1737년 인도 칼커타 30만명,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 6만, 1783년 남부 이태리 5만.

20세기에 들어와 대지진들은 더욱 빈번해졌다. 20세기에 5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지진들은 24개 이상이 되며, 그 중에 2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은 14개나 된다. 5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큰 지진들이 일어난 장소와 그 사망자 수를 열거해보면, 1908년 이태리 멧시나 7만 5천명, 1920년 중국 중앙부 간서 20만명, 1923년 일본 도오꾜-요코하마 약 14만 3천명, 1932년 중국 중앙부 7만명, 1935년 인도 쿠에타(오늘날의 파키스탄) 6만명, 1970년 페루 침보테 약 6만 8천명, 1976년 중국 북동부 헤베이 24만명 등이다.

또 최근의 대지진들이 일어난 장소와 그 사망자 수는, 1988년 아르메니아 2만 5천명 이상, 1990년 이란 서북부 카스피해 인접지역 약 2만 5천 내지 4만명, 1993년 인도 약 7천6백명, 1995년 일본 고오베 약 6천4백명, 러시아 사할린도 네프트골스크 2천명 이상, 1998년 아르메니아 2만 5천명, 아프가니스탄 3천5백명, 아프가니스탄 5천명, 1999년 터키 1만 5천명, 대만 2천명 이상 등이다.

[15-17]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은 평상시에는 담대하고 때때로 교만하기까지 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 대환난의 날에 두려워 떨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의 진노를 피할 곳을 찾기에 급급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찌기 예언하기를, 하나님의 심판 날에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고 하였다(사 2:19).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은 전통사본에는 '그의 진노의 큰 날'이라고 되어 있다. 대환난의 날들은 어린양의 진노의 큰 날이다. 이 때에 담대히 설 자가 누구인가? 불경건한 자들 중에는 아무도 없다.


결론적으로,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까지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예언하기보다 일반적인 종말 징조들을 나타내는 것 같다. 그것들은 전쟁, 기근, 질병과 죽음, 핍박과 순교, 큰 지진 등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고 세상 종말이 가까울수록 이런 징조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징조들을 볼수록 우리는 성경의 예언의 말씀들을 기억하고 고난을 각오하면서 믿음과 소망을 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의 작정하신 일들을 다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신실하게만 살아야 할 것이다.

 

 

 

 

7장: 흰옷 입은 무리

1-8절, 인맞은 자의 수 14만 4천

[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이 말씀은 앞장과의 관계에서 볼 때 시간 순서대로가 아니고 환난 시대에 대한 계시 중간에 삽입된 위로의 말씀이다. 네 천사, 땅 네 모퉁이, 땅의 사방의 바람 등은 온 세상을 가리키는 일상적 표현이다. 바람은 환난의 바람을 가리킨다. 네 천사가 땅 사방의 바람을 잡고 있다는 것은 성도가 감당할 만한 것 이상의 환난을 하나님께서 통제하고 계심을 나타낸다. 마태복음 24:21, 22,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2, 3]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하나님의 한 천사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치기까지 환난을 중지시켰다. 인을 친다는 것은 확인과 확증의 표시이다. 중요한 문서들에는 그 문서를 쓴 자의 도장을 찍는다. 그것은 확인의 도장이다. 하나님의 인은 인맞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확인하는 것이다. 즉 구원의 보장이다. 이것은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 소유로 인치셨으므로 우리를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요한복음 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로마서 8:35, 38, 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4-8]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들이 14만 4천이니, 유다 지파 중에 인맞은 자가 1만 2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갓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1만 2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맞은 자가 1만 2천이라.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단 지파가 빠졌다. 그 대신 레위 지파가 들어 있다. 또한 에브라임 지파 대신 요셉 지파라는 이름이 들어 있다. 이스라엘 지파 중 인맞은 자 14만 4천은 문자적으로 14만 4천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고, 상징적으로 구속받은 모든 성도의 완전 충만한 수를 가리킨다고 본다. 12는 3과 4를 곱한 수로서 완전한 수요 1000은 충만한 수이다. 그러므로 12x12x 1000은 완전 충만한 수를 상징할 만하다.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의 수인 14만 4천을 세상에서 구속받은 모든 성도의 상징으로 볼 만한 근거는, ① 본문이 일반적인 이스라엘 12지파를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며, ② 요한계시록 9:4의 황충 재앙에서 그 재앙이 이마에 인맞지 아니한 자들에게만 임하는데, 거기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또 ③ 요한계시록 14:3에 보면, 14만 4천은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자들'이라고 불리우기 때문이다.

구속받은 성도들을 이스라엘 지파에 비유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자들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약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이다.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9-17절, 흰옷 입은 큰 무리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흰옷 입은 큰 무리는 전절에서 말한 14만 4천과 동일한 무리라고 본다. 4절은 그 무리가 대환난 전에 인침을 받는 것을 보이고, 본절은 대환난 후에 평안을 누리는 것을 보인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는 말은 교회의 세계성을 말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온 세계에 하나이며 그 구성원들은 온 세계에 속한다.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다는 말은 구원받은수가 충만함을 말하며, 이것이 14만 4천의 상징적 의미라고 본다. 흰옷은 역시 성결과 의를 가리키며, 종려가지는 승리와 기쁨을 상징할 것이다. 구속받은 성도들은 대환난을 무사히 통과하여 승리의 기쁨을 누릴 것이다.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여기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힘찬 찬송이 있다. 어떤 이들은 구원이 결국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처럼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이 결국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회개할 수도 믿음을 가질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주시고 깨달음을 주셔야만 그가 회개하고 주를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회개하고 믿어야 구원을 받지만, 회개와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셔야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롬 9:15, 16, 18). 사람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은 문자 그대로 구주이시다. 그는 구원의 길을 지시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의 능력의 오른팔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11, 12]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서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천사들은 성도들의 찬송에 화답하였다. 그들은 구원이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일임을 노래한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나 같은 죄인을 그의 기이한 방식으로 불러주셨고 그의 능력으로 나의 죽었던 영혼을 살리셨고 나의 믿음을 지키고 거룩의 열매를 맺도록 나를 보존해 주셨다.

[13, 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큰 환난을 통과하여 나오는 흰옷 입은 성도들에 대한 환상은 대환난을 직면한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환난을 통과할 성도의 무기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다. 요한일서 5:4, 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성도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과 마귀를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나 믿지 못하는 자는 환난에서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종교적 형식은 소유했으나 참 종교의 실질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알곡이 아니고 쭉정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속죄 신앙을 가진 자마다 죄와 세상과 마귀를 이길 수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세상을 이길 수 있다.

[15-17]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대환난을 통과한 승리한 성도들은 천상에서 완전한 평강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계셔서 그들을 먹이시고 마시우시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심으로써 더 이상 주림이나 목마름이나 더위로 인한 해가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장의 중요한 진리는 구속받은 성도들이 대환난을 통과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인치심이 있기 때문에 잘 감당하고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대환난을 통과해야 할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어린양의 피에 우리의 옷을 빨아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확신해야 한다. 그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할 것이다.

 

 

 

 

8장: 일곱 나팔 (1)

1-6절, 일곱 나팔과 금향로의 환상

[1, 2]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半時) 동안쯤 고요하더니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侍衛)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

6장에 기록된 일곱 인 중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까지의 환상은 전쟁, 기근, 죽음, 순교, 큰 지진 등 대환난 시대에 대한 묘사이었다. 거기에는 땅 4분의 1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언급되어 있었다(6:8). 이제 일곱째 인의 환상인 일곱 나팔 재앙은 좀더 구체적이고 좀더 강화된 재앙이다. 이 재앙을 나팔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경고의 뜻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회개의 경고요, 믿는 자들에게는 기도와 믿음과 순종과 전도로 더욱 환난을 준비하라는 경고일 것이다. 그러나 16장에 일곱째 나팔로 계시될 일곱 대접은 하나님의 경고의 시간이 지나고 무서운 진노의 심판이 선포된다고 생각된다. 본문의 '반시 동안쯤의 고요함'은 다가올 환난과 재앙이 심히 크고 두려울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과 기도로 준비해야 할 것이며 불신자는 이제라도 회개해야 할 것이다.

[3-6]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金)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香煙)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일곱 나팔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예비하더라.

이 환상은 성도들의 기도들이 하나님께 올려지며 또 그 기도들의 결과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힘 있게 시행됨을 나타낸다. 성도들은 무엇을 기도하는가? 성도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다 시행되기를 기도할 것이다. 기도는 성도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게 하며 사탄과 악령들의 일들이 파하여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게 한다. 우리는 고난의 세상 속에서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한다.


7절, 첫째 나팔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3분의 1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3분의 1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

일곱 나팔의 재앙은 문자적으로 성취될 수 있으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것들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려면 정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 나팔의 재앙은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는 것이다. 그 불로 인해 땅의 3분의 1과 나무들의 3분의 1과 모든 풀들이 태워질 것이다. 그것은 지구 전체에 대 화재 사건이 될 것이다. 땅은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므로 땅과 나무들의 3분의 1과 모든 풀들이 불태워진다는 것은 실로 사람들의 생활에 큰 타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땅과 나무들의 3분의 1만 타고 3분의 2가 남겨지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요 성도들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8절, 둘째 나팔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3분의 1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3분의 1이 죽고 배들의 3분의 1이 깨어지더라.

둘째 나팔의 재앙은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해 바다의 3분의 1이 피가 되고 바다의 생물들의 3분의 1이 죽고 배들의 3분의 1이 파괴될 것이다. 이것도 문자 그대로 성취될 수 있다. 바다도 사람들의 주요한 생활 터전이며 배들은 특히 어부들과 상인들의 주요 생활 수단이므로 그 재앙으로 인한 타격도 매우 클 것이다.


9-10절, 셋째 나팔

[9, 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3분의 1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이 별 이름은 쑥이라. 물들의 3분의 1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셋째 나팔의 재앙은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강들과 물샘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늘의 별들도 하나님이 떨어지게 하시면 떨어진다. 하늘에서 떨어진 큰 별은 강들과 물샘들의 3분의 1을 쑥과 같이 쓰게 만들 것이며 그 쓴 물을 마시는 자들은 죽게 될 것이다. 물은 사람이 사는 데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다. 사람의 몸은 70퍼센트가 수분이라고 한다. 사람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런데 물들의 3분의 1이 오염되어 마실 물이 적어졌으니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겠는가?


12절, 넷째 나팔

[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3분의 1과 달 3분의 1과 별들의 3분의 1이 침을 받아 그 3분의 1이 어두워지니 낮 3분의 1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넷째 나팔의 재앙은 해와 달과 별들의 3분의 1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도 그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이 어둡게 하시면 어두워질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그것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해의 빛과 열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 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그 빛이 어두워질 수 있는지 잘 알고 계신다. 빛의 양이 줄고 어두움이 늘어남으로써 지구 전체의 온도는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재앙이다.

위의 네 가지 재앙들은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동시적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것들은 자연세계의 재난들이다. 이것들을 문자적 의미가 아니고 상징적 의미로 해석할 정당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 재앙들은 복음서에 증거된 예수님의 종말 예언과 일치한다. 마태복음 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후에 주의 재림과 세상 종말이 올 것이다.


13절, 한 독수리의 외침

[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

위의 네 가지의 나팔 재앙들은 다 두려운 재앙들이다. 그러나 남은 세 개의 나팔 재앙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를 통해 그 재앙들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화, 화, 화가 될 것을 선포하셨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8장에서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하게 된다. 첫째로, 우리는 무엇보다 기도에 힘써야 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연과 같이 올리운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기뻐하신다. 성도들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된다. 대 환난의 성취도, 악인들에 대한 공의로운 보응도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악한 환경 속에서도 항상 깨어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장차 일어날 천재지변을 두려워하지 말자.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예언하신 바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기록된 내용들은 문자 그대로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장차 우리 앞에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 하여도 우리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야 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자. 이것이 환난시대를 위한 준비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교훈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에게는 영생이 있다.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즉시 하나님의 영광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범죄하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거룩하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9장: 일곱 나팔 (2)

1-12절, 다섯째 나팔

다섯째 나팔의 재앙은 황충 재앙이다. 그것도 앞의 재앙들과 같이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

본절에 언급된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을 많은 주석가들은 사탄 혹은 타락한 천사로 보고 어떤 이들은 정반대로 거룩한 천사로 본다. 그러나 이 별을 말 그대로 하늘의 별로 보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넷째 나팔까지도 문자적으로 해석했듯이, 다섯째 나팔도 가능한 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다고 한 것은 별이 땅에 떨어져 큰 구멍을 낸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하늘에서 큰 별이 하나 떨어지면 지구에 큰 충격이 생기고 땅 깊은 곳으로부터 구멍이 뚫어질 것이다. 무저갱은 때때로 지옥을 가리키지만, 때로는 단순히 땅속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권한과 허락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천체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소행성이란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태양 둘레를 공전하는 수십만개의 작은 별들을 가리키며 지구에 근접하는 것들로 지구 전체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은 240개 가량이라고 한다.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2002 NT7이라는 소행성은 직경이 2km로 추정되며 초속 약 28km(시속 약 100,800km)로 달리고 있는데 2019년 2월 1일에 지구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것의 충돌 충격은 히로시마에 투하됐던 원자폭탄 2천만개의 위력이라고 하며(미우주항공국 NASA 제트추진연구소에 의하면, 그것은 TNT 100만메가톤의 폭발 충격일 것이라고 함) 그때 엄청난 먼지 구름이 대기권을 덮으므로 태양이 가리워 1년 이상 겨울이 지속될 것이며 충돌 지점의 국가들이 초토화 되는 것은 물론 대규모 해일이 일어나고 오존층이 파괴되므로 2년간 자외선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되어 생물체들에 돌연변이와 암과 백내장 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2, 3] 저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큰 풀무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오매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인하여 어두워지며 또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에 나오매 저희가 땅에 있는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더라.

그 별로 인하여 뚫어진 땅속에서는 큰 풀무의 연기 같은 것이 올라왔고 그 연기로 인하여 해와 공기가 어두워졌다. 그것은 대단한 대기 오염의 사건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연기 가운데로부터 황충들 혹은 메뚜기들이 올라왔다. 이 황충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떤 이들은 그것들을 이슬람교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고, 어떤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고, 또 다른 이들은 그것들을 사탄의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황충들은 문자 그대로 땅속에서 올라온 특별한 생물체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들 중 하나를 위해 준비된 악한 생물체들일 것이다.

[4]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땅의 풀과 나무는 문자 그대로 풀과 나무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앞장에서도 수목과 풀, 바다, 고기, 배, 강과 샘, 해와 달과 별들 등을 다 문자적 의미의 수목과 풀, 바다와 고기와 배, 강과 샘, 해와 달과 별들로 보았다. 황충 재앙은 자연 세계에 내리는 재앙이 아니고 이마에 인 맞지 아니한 자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는 재앙이다.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인 맞은 사람들'은 재앙에서 면제됨을 보인다. 하나님의 재앙은 때때로 차별적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들을 애굽에 내리실 때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했던 고센 땅에는 그것들을 내리지 않으셨던 것과 같다. 시편 91:1-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 . .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白晝)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5, 6]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황충 재앙은 다섯달 동안 고통을 주는 재앙이다(5, 10절). 황충들은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것이다. 전갈은 쏘는 독을 가진 생물체이다.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자들에게 다섯달 동안 이러한 전갈의 쏘는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사람들이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것이다.

[7-10]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예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는 사자의 이 같으며, 또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장(戰場)으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본절은 황충들의 모양을 묘사한다. 이 황충은 보통 메뚜기와 달랐다. 전쟁을 위해 예비된 말들 같다는 것은 기동성을 보이고, 금 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쓴 것은 그들의 활동이 승리적임을 보이며,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은 그것들의 지혜를 보이고, 사자 같은 이는 그것들의 잔인함을 나타내고, 병거와 많은 말들의 소리 같은 그들의 날개들의 소리는 두려움을 나타낼 것이다. 그것들은 악인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준비된 생물체이다.

[11, 12]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無底坑)의 사자라. 히브리 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이더라. 첫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아직도 이 후에 화 둘이 이르리로다.

사탄은 땅속에서 올라오는 저 황충들의 왕이다. 아바돈, 아볼루온은 '파괴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사탄에게 해당되는 명칭이다. 사탄과 악령들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일들, 즉 에덴 동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약 이스라엘 나라와 신약교회에 이르기까지 파괴하는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나라와 교회를 세우신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2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재앙이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섯째 나팔 재앙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에게 무저갱의 열쇠를 줌으로 이루어졌다. 그 열쇠를 주실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주기도 하시고 주지 않기도 하신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재앙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황충 재앙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않은 자들에게만 고통을 주는 재앙이다.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 즉 심령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에게는 그 재앙이 아무런 고통을 주지 못할 것이다. 또 그 재앙은 단지 다섯달 동안만 계속되는 재앙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재앙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그의 편에 서서 참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13-21절, 여섯째 나팔

여섯째 나팔 재앙은 유브라데 강 주위에서 일어날 큰 전쟁에 관한 예언이라고 생각된다.

[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금단은 향단을 가리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와 성도들의 기도를 상징한다. 향단의 뿔은 기도의 능력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와 성도들의 기도에 능력으로 응답하신다. 그 결과 하나님의 작정하신 종말 사건들은 하나씩 이루어질 것이다.

[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 하매.

유브라데강은 오늘날 시리아와 이라크를 통과하여 페르사만으로 흐르는 강이다. 그 주위에는 중동 산유국들이 있다.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들을 놓아주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권한으로 억제하고 계시던 것을 풀어주라는 뜻이다. 그것은 분명히 중동 지역이 세계적인 전쟁의 격전지가 될 것을 암시한다. 과연 중동은 전 세계의 석유의 주 공급원이라는 점과 그곳에는 현재 아랍과 이스라엘의 갈등이 계속되고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세계적인 전쟁의 화약고가 될 만하다.

[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연,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3분의 1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유브라데강 주위에서 일어날 전쟁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다. 여섯째 나팔을 불 때가 되면 그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의 정확한 연도와 월일과 시각을 작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만세 전에 다 아실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뜻대로 작정하셨다. 전쟁은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다. 말세에 중동에서 일어날 거대한 세계적 전쟁도 그러하다.

그런데 그 전쟁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쟁으로 온 세계 인구의 3분의 1은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히 제3차 세계대전을 암시한다. 20세기에 일어난 제1, 2차 세계대전도 참혹한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군인들은 약 천만명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죽은 군인들은 약 1700만명이었고 민간인까지 합하면 약 5천만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본절에 예언된 이 전쟁은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죽게 할 가장 참혹한 전쟁이다. 현재의 지구의 인구를 60억으로 본다면, 요한계시록 6장에 예언된 넷째 인으로 4분의 1이 죽으면 45억이 남고 그 중에서 3분의 1이 죽으면 약 15억이 죽는 셈이 된다. 그러면 세계 인구는 현재의 2분의 1로 줄어들 것이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죽일 전쟁이 가능한 것은 인류는 무서운 원자폭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3차 세계대전은 화생방 전쟁, 즉 화학가스 전쟁, 생물학적 병균 살포 전쟁, 방사능 핵전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무서운 전쟁이다. 구 소련의 의학연구소장 리콜라이 볼로킨은 핵 군비축소에 관한 과학자 회의 연설에서 "핵전쟁이 나면 3분의 1의 인구가 죽고 나머지는 핵암으로 쓰러질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은 성경의 예언과 일치한다.

[16] 마병대의 수는 2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본절은, 예언된 세계대전에 2억의 군인들이 동원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는 말씀은 그 수가 실제적으로 가능한 수임을 암시한다. 핵을 보유한 미국과 영국 등과 아직 공산주의적 신념을 버리지 않은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이슬람교 신앙으로 단합될 아랍 국가들의 총인구를 생각한다면, 중동에서 발발할 제3차 세계대전에 참여할 군인들의 이 거대한 수는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특히 중국은 세계 전체 인구의 약 5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2억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17-19] 이같이 이상한 가운데 그 말들과 그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이 세 재앙 곧 저희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인하여 사람 3분의 1이 죽임을 당하니라. 이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으니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본절은 제3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군인들이 사용하는 현대적 무기들을 묘사하는 것 같다. 군인들은 불빛과 자주빛과 유황빛 흉갑으로 무장하였고 그들이 조종하는 탱크나 비행기나 기타 무기들은 그 입에서 불과 연기와 유황을 내뿜을 것이다. 그것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죽을 것이다. 그 말들의 힘은 그 입과 그 꼬리에 있다는 것은 현대 무기들이 전후에 화력이 장착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20, 21]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銅)과 목(木), 석(石)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여섯째 나팔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자들은 회개치 않고 도리어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재앙보다 더 슬픈 사실이다. 이 사실은 부수적으로 대 환난시대의 환난들과 재앙들의 목적을 보여준다. 그것은 택자들의 교정과 회개를 위함이 아니다. 택자들은 이미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았다. 환난과 재앙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분노뿐이다. 그래서 6:16, 17에서는 이것을 '어린양의 진노,' '그의 진노의 큰 날'이라고 불렀다. 8:13에서는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나팔을 두고 화, 화, 화라고 표현하였다.

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화를 내리시는가? 그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 무슨 죄 때문인가? 로마서 1장에 언급된 대로 불경건, 음란, 불의의 죄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불경건의 죄 가운데는 기독교계 안에서 성경말씀대로 믿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으로 신앙 생활과 교회 봉사를 하려고 하는 많은 주의 종들의 행위들이 포함된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세계적인 큰 전쟁의 불행을 통과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았다. 사람은 재앙이 온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회개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회개할 기회가 올지는 미지수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행 11:18). 그러므로 사람은 회개할 마음이 들 때 회개해야 한다. 그때가 하나님께서 회개하도록 은혜를 주시는 때이다. 우리는 회개를 내일로 미루지 말고 회개해야 할 때에 즉시 회개해야 한다. 이사야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가올 세계적 전쟁을 두려워말자. 그것은 지구의 인구 3분의 1을 죽일 무서운 핵 전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작정된 바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뜻은 세계적 전쟁을 포함한 마지막 대 환난까지 포함되어 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섬기고 하나님의 예비하신 영광스런 천국만을 사모하자. 세상은 장차 불 타버릴 장망성(將亡城)이다. 단지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혹시 연약하여 죄를 지었을지라도 즉시 회개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회개치 않고 완고한 마음을 가지면 영영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10장: 작은 책을 먹음

요한계시록 10장은 환상 중에 사도 요한이 천사가 들고 있는 책을 받아 먹은 일을 증거한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시간이 급한 종말 사건들에 대해 계속 예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1-4절, 작은 책을 든 천사

[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 기둥 같으며.

5장에서도 '힘 있는 천사'가 나타났는데, 본절의 '힘센 천사'도 원문에는 같은 말이다. 그 천사는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왔고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있고 얼굴은 해 같고 발은 불기둥 같았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 같다(창 9:13). 본절의 천사는 매우 위엄 있고 영광스러워서 많은 주석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해석하지만, 신약성경이나 요한계시록 다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천사로 표현한 곳이 없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천사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6절에 하나님께 맹세하여 말하는 것도 천사에 더 적합하다.

[2, 3]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천사가 들고 있는 그 책은 닫혀진 책이 아니고 펴있는 책이었다. 사도 요한을 통해 증거되는 종말 예언은 공개된 내용, 계시된 내용, 알려진 내용이다. 그 천사가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선 것은 종말 예언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것을 나타낸다. 과연 그 천사는 그 책을 들고 바다와 땅을 밟고 서서 사자같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때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였다. 종말 예언의 말씀은 말세에 큰 소리로 외쳐야 할 경고의 말씀이다.

[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일곱 우뢰의 소리를 기록하려고 했으나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그것을 기록하지 말라고 하였다. 일곱 우뢰 소리들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미래의 사건들의 계시 여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기록된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요한계시록 22:18, 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5-7절, 천사의 맹세

[5-6]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은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시며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자이시다. 그 분만이 참 하나님이시다. 그 분만이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신다. 종말의 사건들과 심판은 그 분의 손 안에 있다. 세상의 창조자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다. 우리가 바라고 의지할 분은 그 분밖에 아무도 없다. '지체하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은 '시간이 더 이상 없다'는 뜻이다.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그 천사가 맹세하면서 말한 내용은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이시다(골 2:2).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成肉身), 그의 대속(代贖)의 죽으심, 그의 육체적 부활, 승천, 재림이 다 놀라운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때가 되어 다 이루어졌고, 이제 그의 재림 하나만 남아 있는데 그것도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세계의 역사는 끝없이 윤회(輪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다. 역사는 일직선의 과정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그의 모든 계획이 성취될 것이다.


8-11절, 책을 취하여 먹으라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하늘에서 나는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다. 천사의 손에 펴 놓인 그 책을 가지라는 말은 그 책을 취하라는 말이다. 그 책은 종말 예언의 책인데, 요한계시록 전부를 가리키든지 아니면 11장부터의 내용을 가리킬 것이다. 본 장에서 그 책을 때때로 '작은 책'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이들의 해석대로 '가치 없는 내용의 무시된 책'이라는 뜻보다는 단순히 성경 전체에 비해 작은 분량의 책이라는 뜻일 것이다.

[9, 10]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책을 취하여 먹는다는 것은 종말 예언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뜻할 것이다. 성경은 영의 양식, 생명의 양식, 인격의 양식이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원만히 이해하려고 힘써야 한다. 모든 성도는 성경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이것은 성도에게 거룩한 의무요 복된 특권이다. 입에 단 것은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의 즐거움을 말할 것이다(시 19:10). 그러나 배에 쓴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의 내용을 음미할 때 오는 마음의 고통과 이 말씀을 지키며 전하려 할 때 예측되는 고난을 나타낼 것이다.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요한은 이제까지 예언했지만, 다시 온 세계의 나라들과 백성들을 위해 예언해야 한다. 요한이 먹은 종말 예언의 말씀들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말씀이다.

결론적으로, 본 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종말 예언은 공개된 내용, 계시된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둘째로, 대 종말이 곧 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간이 더 이상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 의식을 가져야 한다. 셋째로, 종말 예언은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한다.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그것은 바로 종말을 대비하는 것이다.


 

 

 

 

11장: 두 증인

1-2절, 성전을 척량함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지팡이 같은 갈대는 길이를 재는 자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은 구약적 표현이다. 구약의 성전은 일차적으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지만, 또한 그의 몸된 교회인 참된 성도들도 가리켰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 . . 알지 못하느뇨?"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받은 참된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척량한다'는 말은 소유물의 확인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신다. 그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기 백성을 보존하신다.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성전 밖 마당은 형식적 교인들을 가리킨 것 같다. 그들은 성전 뜰만 밟는 자들, 중생(重生)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교회에 다니거나 교양적으로 다니거나 가족이나 친척의 비위를 맞추려고 다니거나 인간적 교제나 세상적 유익을 위해 다니는 자들이다. 그들은 본질상 이방 사람들이다. 이런 형식적 교인들은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 밖에 있다.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성을 가리켰는지도 모르나, 아마 이름만의 기독교 세계를 가리킨 듯하다. 그 속에는 천주교인들, 자유주의자들, 이단종파 신봉자들이 다 들어 있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 연합 운동의 세계이다. 이름만의 기독교 세계는 이방인에게 마흔 두달, 즉 3년 반 동안 짓밟힐 것이다. 이 3년 반은 대환난 기간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3년 반을 의미하든지, 아니면 너무 길지 않은 어떤 기간을 상징할 것이다.

3-14절, 두 증인

[3, 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내가'는 문맥적으로는 천사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이시다. 천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고 있다. 두 증인이 나타나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간, 즉 3년 반 동안 말씀을 전할 것이다. 둘이라는 수는 확실한 증거를 위한 수이다. 예수께서는 70인 전도자들을 둘씩 둘씩 내보내셨다(눅 10:1). 굵은 베옷은 회개하고 금식할 때의 복장이다. 그들은 기독교계의 죄악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회개하며 기도할 것이다.

1260일간, 즉 3년 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혹시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짓밟고 있는 신약 교회 시대를 가리킬지도 모른다. 주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하셨다(눅 21:24). 그러나 가능한 문자적 해석에 의하면, 그것은 여섯째 천사의 나팔로 계시된 유브라데강에서 시작되는 전쟁, 즉 3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방인들이 형식적 기독교 세계를 핍박하는 기간이다. 그 기간에 두 증인이 나타날 것이다.

두 증인은 이 땅의 주, 곧 하나님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하였다. 이 표현은 구약 스가랴 4장의 환상에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거기에서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가리켰다. 본절의 두 증인은 3년 반 환난 기간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두 인물을 가리킨다. 그들이 감람나무라고 불리운 것은 성령의 끊임 없는 공급을 받기 때문이고 촛대라고 불리운 것은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빛, 곧 하나님의 바르고 온전한 뜻을 전하기 때문이다.

[5, 6]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그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 같은 능력의 종들일 것이다. 모세가 물로 피가 되게 하는 기적을 행하였듯이, 엘리야가 3년 동안 기근이 들게 하고 또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였듯이,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칠 것이다. 또 그들을 해하려는 자들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구약시대의 모세와 엘리야같이, 그들은 그 사역기간 동안 여러 능력의 일들을 행할 것이다.

[7, 8]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그러나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 곧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그 두 증인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무저갱'은 깊은 어두움의 세계를 가리킨다. 짐승으로 표현된 적그리스도는 짐승과 같이 사납고 난폭하며 이성과 도덕이 없는 인물을 나타낼 것이다. 그것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 예언된 '불법의 사람'으로서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전제적, 독재적 정치인을 가리킨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초대교회로부터 역사하여왔다. 역사상 로마제국과 로마 천주교회는 적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리어 활동했다. 그들은 많은 참된 성도들을 핍박하였고 또 죽였다. 그러나 마지막 날들에 적그리스도라는 인물이 나타날 것이며 그가 나타나면 그 두 증인과 싸워 이길 것이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두 증인의 시체가 놓여질 큰 성은 적그리스도의 본거지일 것이다.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이라고 묘사되었다. 소돔은 음란과 부도덕의 도시요, 애굽은 우상숭배와 압제의 나라이었다. 또 그 도시는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즉 예루살렘이라고 말한다. 그 도시는 이처럼 소돔과 애굽과 예루살렘으로 표현된다. 그 도시는 뒤에 나올 음녀와 바벨론으로 묘사된 큰 도시와 동일한 도시라고 보인다. 그것은 참된 종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타락한 종교적 교권주의자들의 도시를 가리킬 것이다. 역사상 로마가 바로 그런 도시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날 그 도시가 어디인지 알게 될 것이다.

[9, 10]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온 세상 사람들은 그 두 증인의 시체를 3일 반 동안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기뻐하며 선물을 주고 받으며 즐거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두 증인의 설교는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내용들이었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심한 고통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1, 12] 3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기쁨과 즐거움도 잠시 동안뿐이다. 3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영 혹은 기운이 들어감으로 두 증인은 다시 살아날 것이고 구경하는 자들은 크게 두려워할 것이다. 더구나 부활한 그 증인들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할 것이다. 에녹과 엘리야같이, 예수님같이, 또 두 명의 사람들이 승천할 것이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주님의 재림 시에는 모든 성도들이 재림의 주를 영접하기 위해 하늘로 올리울 것이다.

[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7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두 증인의 승천이 있을 때 그 큰 성에 큰 지진이 나서 성 10분의 1이 파괴되고 7천명이 죽게 될 것이며, 그 남은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바로나 느부갓네살이 그러했듯이, 이러한 행위가 그들이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출 9:27; 10:16, 17; 단 2:46, 47).

[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세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첫째 화는 황충 재앙이고, 둘째 화는 유브라데강의 큰 전쟁과 그 후에 있을 두 증인의 사역과 큰 지진이다. 이제 마지막 화만 남았다. 그것은 일곱째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계시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정리해본다. 첫째로, 우리는 성전 뜰만 밟는 형식적 교인이 되지 말고,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참된 성도들이 되자. 그들은 속죄 신앙을 가지고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으며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종들의 교훈을 겸손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자. 디모데후서 4:3, 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셋째로, 우리는 진실한 증인들처럼 순교를 각오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증거하자.


15-19절, 일곱째 나팔과 하늘의 찬송

본문은 일곱째 천사의 나팔과 그 후의 일들 중 하늘의 큰 음성과 24장로들의 감사의 찬송, 그리고 하늘 성전이 열린 광경 등을 증거한다.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하니.

일곱 천사들의 나팔로 말미암은 종말 예언들이 하나씩 계시되는 가운데, 이제 마지막 천사의 나팔로 말미암은 종말 예언이 계시된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사도 요한은 하늘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하늘의 천군 천사들의 외치는 소리이다. 그것은 승리의 외침이었다. 그 내용은 세상 나라가 우리 주 하나님과 그의 세우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왕노릇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 나라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우리 주'는 주 하나님을 가리킨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역사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예언했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셨다. 신약 시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시대이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다 구원받아 주께로 돌아오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 수가 찰 때, 그리고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때,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목표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고 완성되는 것이 바로 천국이다. 종말 사건들은 이 목표를 이룰 것이다.

[16, 17]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24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하시도다.

사도 요한은 24장로들이 하늘의 큰 소리에 화답하여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며 감사의 찬송을 올리는 것을 보았다. 24장로들은 신구약 시대의 교회를 대표하는 것 같다. 그들은 구약 시대의 12지파들과 신약 시대의 12사도들을 대표하는 것일 것이다. 24장로들은 하나님을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장차 오실 자'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재림의 때가 다 되지는 않았지만, 재림의 시간을 미리 앞당겨 하나님의 통치권이 완전히 드러났음을 노래한 것이다.

24장로들이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17절과 18절에 나타난다. 원문에는 '전능하신 이여'라는 말씀 다음에 '왜냐하면'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감사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큰 권능을 가지시고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활동하던 사탄과 악령들의 일들이 끝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통치하심은 우리의 감사와 찬송의 이유요 내용이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로소이다 하더라.

본절도 계속 감사의 이유를 말한다. 24장로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내용에 대해 좀더 말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관한 것이다. 그 내용에 보면, 이방인들이 분노했을 때 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다. 심지어 죽은 자들까지도 주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철저하고 공정한 심판이다. 그 심판의 결과는 상과 멸망이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시며, 세상을 멸망시키는 자들에게는 멸망을 주실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24장로들의 감사의 이유이었다.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사도 요한은 또한 하늘의 성전이 열리는 광경을 보았다. 하나님의 성전은 천국 자체를 상징한 듯하다. 요한계시록 21:22에 보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 곧 천국에는 성전이 없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히브리서 9:23, 24에는 하늘 성소에 대해 말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성전 혹은 성소는 천국 자체, 특히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가리킨다고 본다.

요한은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았고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을 보았다. 그가 성전 안에 있는 언약궤를 본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것임을 보인다. 하나님의 심판은 구약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공의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공의의 심판이다.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은 하나님의 심판의 엄위성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하나님의 진리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세상 나라는 마침내 주 하나님과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통치는 그 나라에서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자들은 가장 복되다. 둘째로, 모든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이다. 죽은 자들까지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철저하고 공정한 심판이다. 셋째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한 종들과 성도들에게는 칭찬과 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한 영광의 삶을 주실 것이다. 넷째로, 세상에서 악을 행하고 교회를 혼란시키고 세상을 멸망시킨 자들에게는 멸망의 형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수치와 고통을 당할 것이다.


 

 

 

 

12장: 사탄이 내어쫓김

본 장은 큰 붉은 용이 하늘에서 내어쫓김과 땅에 있는 성도들과 싸우려는 광경을 증거한다.


1-6절, 용이 여자의 낳은 아들을 삼키고자 함

[1, 2]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요한은 하늘에서 한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해를 입은 한 여자의 광경이었다. 이 여자는 교회를 가리킨다. 그가 해를 입은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의의 영광을 소유함을 나타내며, 그의 발 아래 달이 있음은 교회가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함을 나타내며, 그의 머리에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쓴 것은 아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나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들을 나타낸다. 아이를 배어 해산하려 한 것은 구약교회가 메시아를 갈망한 것을 나타낸다.

[3, 4]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3분의 1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요한은 하늘에서 또 다른 하나의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큰 붉은 용의 광경이었다. 그 용은 사탄을 가리킨다. 그가 크고 붉은 것은 그의 세력이 크고 그 잔인함이 심함을 나타낸다. 그의 일곱 머리는 그의 지혜가 매우 큼을 보이며, 그의 열 뿔은 그의 힘이 매우 큼을 암시한다. 사탄은 하늘의 별 3분의 1, 즉 하늘의 천사들의 3분의 1을 속여 타락시켰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귀신들 혹은 악령들이다. 그 용은 그 여자가 낳을 아이를 삼키려 하였다. 그것은 사탄이 헤롯왕을 통해,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한 일을 가리킨다(마 2장). 사탄은 그리스도의 출생 때부터 그를 죽이려 하였다.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여자는 한 아들을 낳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냐하면 그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그는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리워 갔다.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는 원어는 직역하면 '그 아이가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리워 갔더라'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리킨다.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1260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 신약 교회는 1260일 동안 사탄의 핍박을 피하도록 광야에 하나님의 예비하신 피난처를 가지고 있었다. 1260일은 신약 시대를 가리키든지, 혹은 대환난 기간 중의 일부분을 가리킬 것이다.


7-12절, 용이 하늘에서 내어쫓김

[7, 8]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하늘에서 천사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은 용과 그의 사자들과 전쟁을 치루었다. 이 전쟁에서 용과 그의 사자들은 이기지 못하여 하늘에서 있을 곳을 얻지 못했다. 이 전쟁은 언제 일어났는가 혹은 일어날 것인가? 아마 이 전쟁의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완성 직후이었을 것이다. 누가복음 10:18,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요한복음 12: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하늘에서 내어쫓겼다.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큰 용은 옛날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했던 그 옛 뱀, 곧 마귀 혹은 사탄이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이다. 사탄과 그의 미혹을 받은 다른 천사들은 다 땅으로 내어쫓겼다. 그들은 지금 성도들을 속이고 시험에 떨어지게 하고 위협하고 핍박하는 자들이다. 베드로전서 5:8,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요한은 하늘의 큰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은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는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영혼들의 음성이 분명하다. 원문에는 '이루었으니'라는 말 다음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 음성의 내용은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밤낮 성도들을 참소하던 사탄이 쫓겨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사탄의 추방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이 확증되었다.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또 그 음성은 진실한 성도들이 승리하였음을 말했다. '여러 형제가'라는 원어는 단순히 '그들은'이라는 말이고, 그것은 앞절의 '우리 형제들을'이라는 말을 받는다. 그들은 죽기까지 주님을 따랐고 믿었고 사랑하였다. 로마서 14:7, 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들의 승리의 비결, 승리의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는 어린양의 피 때문이고, 둘째는 그들의 증거하는 말씀 때문이다. '인하여'라는 원어는 '때문에'라는 뜻이다.

어린양께서 피 흘려 사신 자들은 실패하지 않는다. 그의 피는 효험이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고 하셨다. 또한 복음의 말씀도 성도의 승리의 힘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20:32에서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였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 갔음이라 하더라.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는 성도들은 즐거워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밤낮 성도들을 헐뜯고 비난하던 사탄이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이 땅에 내려왔고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성도들을 대적할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사는 성도들은 핍박과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13-17절, 큰 용이 여자를 핍박함

[13-16]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으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사탄은 교회 즉 성도들을 핍박한다. 그러나 세상의 성도들에게 사탄의 핍박을 피할 길도 있다. 큰 독수리의 두 날개는 하나님의 강력한 보호의 날개이다. 믿음과 순종의 날개를 가진 성도들은 피할 곳을 가지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 심지어 땅도 성도들을 도와 사탄의 악한 활동을 막는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신약교회 시대이든지, 아니면 마지막 대환난 기간의 일부인 1260일을 가리킨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표현은 환난의 시작과 강화와 절단을 묘사했는지도 모른다.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사탄은 진실한 성도들과 싸우려고 준비하였다. '그 여자의 남은 자손'은 이미 죽은 자들과 순교자들을 제외하고 지상에 살아 있는 진실한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롭게 사는 자들이다. '모래 위에 섰더라'는 본문은 전통사본에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 '내가 바다 모래 위에 서서 보니'라고 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본 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이 존재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대적하며 세상을 속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알고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장차 세상에 성도들과 사탄과의 큰 싸움이 있을 것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진실한 성도들을 핍박하고 그들과 싸우려고 준비하였다. 우리도 사탄의 도전에 대응하여 깨어 싸울 차비를 해야 한다. 에베소서 6:10, 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셋째로,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한다. 앞서간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그리고 자기의 증거하는 말 때문에 사탄을 이기고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자들이며(11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이다(17절). 우리에게도 복음 진리에 대한 확신과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3장: 두 짐승

1-10절, 첫째 짐승

[1, 2]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이 첫째 짐승은 적그리스도라고 이해된다. 그것은 어떤 국가인 것 같다. 구약 다니엘 7장에서는 세계적 제국들을 짐승들로 표현하였다. 사도 바울은 주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였다(살후 2:3). 이 짐승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세계 열국들 중에서 나타날 것을 말한다.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은, 17장에 설명되어 있는 대로, 그 나라의 지도자들을 말한다. 그 나라는 세상적으로 많은 지혜와 능력을 가질 것이다. 그 짐승의 머리들에 참람된 이름들이 있는 것은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심히 불경건하고 신성모독적일 것을 나타낸다. 초대 시대에 로마 황제들은 신적 명칭들을 자신들에게 돌렸었다. 이와 같이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나라의 지도자들도 신성모독적일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또한 표범같이 날쌔고 곰같이 덮치고 사자같이 찢어삼키는 힘과 파괴력이 있다. 그것은 강력하고 무서운 세력이다. 그것은 그 나라의 배후에 사탄이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 나라에 준다.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사탄의 도구인 것이다.

[3, 4]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적그리스도의 나라의 한 지도자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가 회복되므로 온 땅이 이상히 여겨 그 나라를 따르고 사탄이 그 나라에 권세를 주므로 온 세상의 사람들은 사탄에게 경배하며 그 나라에 경배하며 그를 높이고 추앙할 것이다. 온 세상의 분위기가 이렇게 불경건하고 반기독교적이게 될 것이다. 사탄 숭배는 보편화 될 것이다. 이미 요즘 세속적 록음악들은 이런 사탄 숭배를 이미 선보였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음악과 춤에 매혹되고 있다. 불쌍한 일이다. 기독 청년들은 시대의 풍조를 분별하고 배격해야 한다.

[5-7]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을 향해서와 하늘에 거하는 성도들을 향해서 참람된 말들을 많이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주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은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고 말했다(살후 2:3, 4). 예수님께서도 세상 끝날에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15).

또 그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42개월 즉 3년 반 동안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 즉 온 세계를 다스릴 권세를 받을 것이며 또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될 것이다. 그때 성도들은 큰 핍박을 당하게 되고 감금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 3년 반은 많은 성도들이 순교하는 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외적으로는 그러할지라도, 참된 성도들은 결코 그 악의 세력에게 지지 않는다. 성도들은 죽음으로써 믿음을 지키며 승리할 것이다.

[8]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창세 이후로'라는 말은 원문에서 '죽임을 당한'이라는 말에 연결되게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구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어린양의 제물로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 속죄 신앙만이 승리적 신앙이다. 우리의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다. 성도가 자신의 죄악성과 세상의 악과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의 피밖에 없다. 이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참으로 믿는 자는 승리한다. 그러나 속죄의 어린양을 모시지 못한 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구원은 종교의 어떤 외적인 형식에 있지 않다. 사람의 구원은 속죄의 어린양을 마음으로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속죄의 신앙을 가진 자들만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들은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에게 굴복할 것이다.

[9, 10]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악한 자들의 악에 대해 공의로 징벌하신다. 성도들을 사로잡는 적그리스도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사로잡힐 것이며 성도들을 칼로 죽이는 그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의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핍박과 순교를 요구하는 환경 속에서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와 믿음이다.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따르며 고난 중에 참고 기다려야 한다.


11-18절, 둘째 짐승

[11, 12]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이 둘째 짐승은 16:13; 19:20; 20:10에서 '거짓 선지자'로 불리웠다. 첫째 짐승이 적그리스도적 국가라면, 이 둘째 짐승은 배교적 교회이다. 그가 땅에서 올라오는 것은 그의 근원을 보인다. 참 선지자는 하늘로부터 사명과 영감과 말씀과 능력을 받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자이지만, 거짓 선지자는 땅에 속하고 헛되고 죄악된 것만을 구하는 인간에 불과하다(빌 3:19). 그에게 어린양같이 두 뿔이 있는 것은 그가 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냄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사탄의 말과 같다. 그가 전하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에 반대된다. 이 배교적 교회는 적그리스도의 나라의 권세를 가지고 행하고 세상 사람들을 그 적그리스도의 나라에 충성하고 복종하게 한다.

[13-15]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도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말세에 나타날 거짓 종교는 큰 기적들을 행하는 은사주의적 종교이다. 주께서는 이미 예언하시기를,"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하셨고(마 24:24), 바울 사도도 예언하기를, "악한 자의 임함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고 하였다(살후 2:9, 10). 그 거짓 선지자는 우상숭배자요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며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을 죽이는 무서운 핍박자가 될 것이다. 타락한 교회는 우상숭배적 교훈과 행위를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16-18]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666이니라.

그 거짓 종교 지도자 혹은 그 배교적 교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른손에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그 표 없이는 매매를 못하게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장차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벌써 컴퓨터로 이런 류의 통행증이 세계의 특수 부문들에서는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본문에 말한 그 짐승의 숫자 666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숫자를 위한 글자가 따로 없고 글자의 기본 알파벳으로 수를 표기한다. 예를 들어, 초대 시대에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는 히브리어로 666이 된다. 종교 개혁자들 루터와 칼빈, 존 낙스 등과 존 웨슬리와 요나단 에드워드 등은 그 짐승을 로마 천주교회와 교황으로 보았다. 다른 많은 이들은 그 짐승을 세상 종말에 일어날 적그리스도의 나라로 본다. 그 나라의 이름을 숫자로 환산하면 666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장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진리와 교훈을 배운다. 첫째로, 장차 성도들에게 사탄의 극심한 핍박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거짓된 종교 지도자나 배교적 교회를 통해 올 것이다. 그들은 짐승의 표를 받게 하고 그것을 거절하는 자는 물건을 사지 못하게 함으로써 참된 성도들을 핍박할 것이다.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 즉 속죄 신앙이 없는 자들은 그 짐승에게 굴복할 것이지만, 참된 성도들은 순교의 죽음으로써 승리할 것이다.

둘째로, 참된 성도들은 인내와 믿음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들은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어떤 혹독한 시험과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악과 타협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참된 성도들은 마침내 이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연약 때문에 불완전하게 되거나 부분적이게 되는 구원이 아니고 승리적이며 완전하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 위해 피흘려 완전한 구원을 이루셨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시작하신 착한 일을 주의 재림 때까지 완전히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구주이시다.

여러분은 속죄의 신앙을 준비했는가? 여러분은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를 참으로 믿고 의지하는가? 만일 그렇지 못한 분이 있다면,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으라. 그에게 나아와 그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구원을 받으라.

 

 

 

 

14장: 구속받은 성도들

요한계시록 14장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임할 일들의 계속으로 큰 용과 두 짐승들의 핍박 속에서도(12, 13장) 구속받은 성도들이 승리할 것을 증거한다.


1-5절, 구속받은 성도들

[1-3]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救贖)함을 얻은 14만 4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요한은 어린양이 시온산에 선 것을 보았다. 그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시온산은 천국이다. 히브리서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또 요한은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 14만 4천은 7장에서 하나님의 인을 이마에 맞은 자들이다. 그들은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 즉 교회를 가리킨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었다. 그것은 소속과 소유권을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사신 자들이다.

요한은 또 하늘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았으며 거문고 타는 자들의 거문고 타는 것 같았다. 그것은 분명히 14만 4천명이 부르는 찬양의 소리이었다. 참된 성도, 참된 교회는 지상과 천상에서 찬송을 부를 것이다.

요한은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 노래는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14만 4천인 밖에는 능히 배울 자가 없는 새 노래이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좋아하며 불렀던 노래들, 민요든지 유행가든지, 그것들은 다 옛 노래들이다. 우리는 이제 그것들이 헛되다는 것과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심지어 죄악되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노래를 좋아하지 않으며 또 부르기를 원치 않는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새 노래를 부른다. 새 노래는 구원의 노래이다.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참된 속죄 신앙을 가진 자들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새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며 감사하고 또 증거하는 노래이다. 구원받은 자들은 새 노래를 배우고 부르고 사랑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시편 98: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에베소서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4, 5]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본문은 구속받은 성도들의 특징들을 묘사한다. 첫째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순결한 자들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들은 여자들로 더불어 더럽혀지지 아니했으니 이는 그들이 처녀임이라." 여자들은 세상을 가리킨다. 참된 성도들은 구원받은 후 또다시 죄악되고 멸망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과거에 술 마시고 방탕하였을지라도, 이제 그들은 다시 그런 세상적인 생활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이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을 사랑했다면, 그들은 자신의 몸을 더럽힌 여자와 같았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 했다(고후 11:2, 3). 또 그는 고린도교인들이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용납한 것을 지적하며 책망하고 권면하였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모든 잘못된 사상과 교리, 모든 잘못된 행위와 풍조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며 섬기며 경배하며 오직 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한 뜻만 믿고 그를 따르며 섬겨야 할 것이다.

둘째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순종하는 자들이다. 본문을 직역하면, "이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더라." 우리는 사람을 따라가는 자들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범할 수 있으며 심지어 목사도 때때로 그러하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며, 성경에 기록된 그의 말씀과 명령, 즉 목사의 성경적 교훈에 순종하고, 비성경적 교훈은 분별하고 배척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바른 태도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의 명령이 보이는 대로, 그가 어디로 가시든지 그를 따라가는 것이 순종의 삶이다. 주를 따라가는 것은 항상 즐겁고 평안한 길만이 아니다. 주를 따라가는 길에도 수고와 슬픔이 있고 심지어 고난과 핍박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를 즐거이, 자원함으로 따라간다.

셋째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첫열매들이다. 본문을 다시 직역하면, "이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첫열매들이 되었더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피조 세계에 관계되며 그 목표는 온 세상의 회복이므로, 이제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 첫열매들과 같다. 성도들의 구원이 충만하게 성취되면, 온 세상 만물이 회복되며 새로워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네째로, 구속받은 성도들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 본문을 다시 직역하면,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으니, 이는 그들이 흠이 없음이니라." 흠이 없는 인격은 거짓말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된다. 거짓말하는 것은 작은 죄악이 아니다. 거짓은 사탄의 죄악이며 그 종들의 특징이고, 진실은 하나님과 그 종들의 특징이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참 성도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계속 거짓말하는 자는 참 성도가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에게 하늘의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의 성도들의 모습을 증거한다. 그들은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들은 신앙의 순결성을 지킨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절대 순종한 자들이며 흠 없이, 진실되게 산 자들이었다. 오늘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저 십사만 사천 명의 성도들의 모습을 본받자. 신앙의 순결성을 지키고 예수님께 순종하며 흠 없이, 진실되게 살면서 항상 새 노래, 즉 구원의 노래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자.


6-12절, 세 천사들의 외침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요한은 온 세계에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공중에 날아가는 한 천사를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해 천사들을 사용하신다(계 8:13; 10:1; 11:15).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신속히 수행함을 상징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다. 그것은 어느 한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복음이다. 그 효력은 영원하다. 그것은 사람에게 영원한 천국과 영생을 주는 복음이다. 그것은 특히 마지막 심판 전에 온 세계에 증거되어야 할 복음이다.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그 천사는 큰 음성으로 그 복음의 내용을 외쳤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되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천지와 바다와 샘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에게 경배하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매우 근본적인 진리들이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9:10). 거기에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도 있다. 또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감사와 찬송을 올려야 한다. 또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에게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죄인에게 필요한 근본적 진리이다.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또 요한은 다른 한 천사 곧 두 번째 천사의 외침을 들었다. 그 외침은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내용이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라고 두 번이나 반복한 것은 그 무너짐의 확실함을 나타낸다. 큰 성 바벨론은 마지막 날에 확실히 무너질 것이다. 이 바벨론은 16:19에서는 일곱째 대접 재앙에서 큰 지진으로 인해 세 갈래로 무너질 큰 성이라고 말했고, 17:5, 18에서는 땅의 임금들과 음행하는 큰 음녀요 그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말했고, 19:3, 10에서는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해 부요함을 얻었던 크고 견고한 성이라고 말했다.

이 큰 성 바벨론에 대해서는 성경 주석가들의 해석이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이 바벨론이 로마 제국을 가리킨다고 본다. 어떤 이들은 이 바벨론이 세상을 가리킨다고 본다. 다른 많은 이들은 이 바벨론이 로마 천주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또 다른 많은 이들은 이 바벨론이 미래의 배교한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 마지막 두 견해가 적절해 보인다. 이 바벨론은 짐승을 탄 음녀(17:3)로서 세속화된 배교한 교회를 가리키며 그것은 로마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 큰 성 바벨론은 모든 나라를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먹였다. 여기의 '음행'은 육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둘 다 가질 것이다. 배교적 교회는 음행의 풍조를 퍼뜨리는 일에 앞장 설 것이다. 또 그 교회는 이단들을 포용하고 이방 종교들을 포용하는 신학적 포용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의 교회가 될 것이고, 또 세상적 부귀와 향락을 조장하는 세속화된 교회가 될 것이다.

옛날 로마 천주교회는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심히 부패하였었다. 그것은 큰 성 바벨론과 같았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황청이야말로 성경에 예언된 그 바벨론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온 세계의 배교적 교회들의 연합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또다시 로마 천주교회와 연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전세계적인 배교적 교회의 중심에 또다시 로마의 교황이 서게 되리라고 본다. 또다시 로마시가 전세계의 종교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배교적 교회는 망하고 말 것이다.

[9-11]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요한은 또 다른 천사 곧 세 번째 천사의 외침을 들었다. 그것은,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배교적 교회 안에서 신앙의 변절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다. 참 성도는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한다. 그는 비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고 비진리와 타협할 수 없다. 그러나 참 신앙을 버린 자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잔을 받을 것이며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고통의 형벌이다. 거기에서 그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미래의 사실이 이러할 것이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오직 인내가 필요하다. 성도들은 끝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 믿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의(義)이며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죄이다. 성도는 은혜로 구원받은 자이지만, 의로운 행위로 그 구원을 증거해야 한다. 의로운 행위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그것은 구원의 증거이다. 사람이 의로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의로운 행위로 열매 맺지 않는 구원이란 없다. 다시 말해, 구원받은 자들은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죄 가운데 사는 자는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속죄의 피로 구원받은 자는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며 죄를 떠날 것이다. 또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지켜야 한다. 참된 신앙은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다. 그것이 보수 신앙이다. 보수 신앙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의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말세에 선포된 영원한 복음을 받아들였는가?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경배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을 구별하는 잣대가 된다.

둘째로,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배교적 교회가 결국 망하게 될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교회, 즉 성경적 교훈의 터 위에 세워지고 성경적 교훈 안에서 양육되는 교회를 건립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연합되는 배교적 교회를 분별하고 그것과 타협치 말아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인내로써 바른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바른 신앙이란 성경적인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가리킨다. 그 신앙을 지키는 것이 보수 신앙이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거룩과 의, 사랑과 진실을 끝까지 실천해야 한다. 참 성도는 인내로써 신앙과 의의 삶을 지켜야 한다.


13절,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됨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요한은 하늘의 한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음성이었다. '자금 이후로'(이제부터)라는 말은 '복음 신앙을 가진 이후부터'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복음 신앙은 곧 구원이 되므로 복음을 믿고 죽는 자는 확실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니 복되다는 뜻이다. 또 이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대환난 시대에 순교자들이 많을 것을 암시한다(계 6:11).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님과의 영적 연합 속에서' 죽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주님 밖에서, 복음 신앙 없이 죽는다는 것은 큰 불행이다. 왜냐하면 모든 죄인에게 지옥 형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눅 16:19-31). 그러나 주 안에서 죽는 것은 큰 행복이다. 본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그가 그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수고와 고생이 많다(시 90:10; 마 11:28). 그러나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에게는 참된 안식이 있다. 히브리서 4:3, 10-11,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안식은 바로 천국의 안식을 가리킨다. 천국은 안식의 세계이다.

둘째는 그가 세상에서 행한 선행들에 대해 보상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 본문은 ". . .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며 저희의 행한 일들이 따르리라 하시더라"이다. 우리의 선행이란 천국 들어갈 만한 가치도 없는 보잘 것 없는 것이며 그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귀히 보시고 상 주실 것이다. 고린도후서 5:8-10,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14-16절, 곡식 추수

[14-16]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利)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요한은 흰 구름 위에서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날카로운 낫을 들고 땅의 곡식을 거두는 인자(人子) 같은 이를 보았다. 요한이 본 그 사람은 구름 타고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가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곡식을 베는 것은 성도들의 구원의 때 곧 그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가 된 것을 상징한다. 주의 심판의 때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때이다. 가을에 곡식이 다 익으면 추수하여 창고에 들이듯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천국으로 들이신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기쁨의 이유이다.


17-20절, 포도송이 추수

[17-20]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利)한 낫를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利)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利)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1천 6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날카로운 낫을 가지고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땅의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상징한다. 그들을 포도송이에 비유한 것은 그들이 땅에서 피를 흘리게 될 것을 상징한다. 그것은 큰 전쟁으로 인한 많은 사람들이 피흘림을 암시한다. 피가 말굴레 즉 말의 목까지 닿은 것은 온 세상이 피의 강수가 될 것을 암시한다. 인류의 마지막 전쟁은 많은 피를 흘리는 처참한 전쟁이 될 것이다.

1600스다디온은 약 300km로서 유대 나라 팔레스틴 땅의 남북의 길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1600이라는 숫자가 땅의 수(4) x 충만의 수(10)의 제곱, 즉 충만한 넓이를 상징하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악인들에 대한 심판은 무섭고 처참하다.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는 심히 두려운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주 안에서 죽는 것이 복됨을 깨닫자. 복음 신앙을 가지고 죽는 것은 복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참된 안식이 있고 그 선행에 대한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성도들에게는 천국에 들어갈 시간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며 의와 선을 행하자.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은 큰 화가 있다. 불경건과 우상숭배는 죄이다. 음란과 미움과 탐욕은 죄이다.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다. 그것은 많은 피 흘림의 심판일 것이다. 그 피는 온 땅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

 

 

 

 

15장: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

15장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들의 모습과,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에 대해 증거한다.

[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요한은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한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일곱 천사들이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 일곱 재앙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리실 마지막 재앙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이 일곱 재앙으로 마치게 될 것이다. 이 일곱 재앙은 다음 장(16장)에 기록되어 있는 일곱 대접 재앙이다. 그것은 앞의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의 재앙들보다 더욱 심해진 재앙이다.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요한은 무서운 마지막 대접 재앙에 대해 증거하다가 잠시 멈추고 또 하나의 광경을 증거하였다. 그는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을 보았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대환난의 시대를 통과하고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분명히 마지막 재앙에 대한 예언으로 인해 성도들이 두려움을 가지지 않도록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뜻이 있는 광경이다. 지금 영적 싸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미래의 승리를 앞당겨 봄으로써 위로를 받고 더욱 담대함을 얻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그 노래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라고 불리웠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불렀던 노래를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이한 능력으로 도우셔서 그들을 위협하던 악한 세력을 완전히 파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한 노래이었다. 물론 신약교회가 부를 노래는 모세의 노래가 아니고 어린양의 노래이다. 그러나 그 둘의 내용은 똑같다. 신약교회가 받은 구원은 홍해로부터의 구원, 애굽왕 바로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고 대환난의 세상으로부터의 구원, 사탄과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거짓 선지자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이지만, 그 내용은 동일하다.

그 노래의 첫번째 내용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크고 놀랍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크고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적그리스도와 그 우상과 그 이름의 수(666)로부터 이기게 하셨다. 노래의 두 번째 내용은 만국의 왕이신 하나님의 길이 의롭고 진실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국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의롭고 진실하신 왕이시다. 그는 의롭고 진실하게 세상을 다스리시며 심판하신다. 그는 의롭고 진실한 성도들을 지키시고 구원하시며 불의하며 악하고 거짓된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신다.

[4]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그 노래의 세 번째 내용은 하나님께서만 거룩하시고 그의 의로우신 행위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만국의 모든 사람이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고 주께 경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마땅히 가지는 경외심이며 특히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와 심판을 경험한 자들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이다. 악한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와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있지만,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섬겨야 한다.

[5-8]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되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요한은 승리한 성도들의 노래하는 광경을 본 후에 이어서 앞에 보았던 그 천사들을 보았다. 하늘에 증거 장막이 열리고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들이 그 성전으로부터 나왔다. 그들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옷은 그들이 수종드는 심판이 얼마나 성결하고 영광스러운 사역인가를 나타낸다. 그들은 또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었고 또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을 받았다. 금띠와 금대접도 그들이 수종드는 심판의 위엄성과 영광을 나타낸다. 하늘의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인하여 연기가 가득하였고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수 가 없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길이 없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만이 남아 있다.


결론적으로, 본장은 성도들이 대환난을 이기고 사탄과 적그리스도를 이기고 마침내 승리의 노래를 부를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마지막 재앙과 거룩한 심판은 두려운 사실이다. 그러나 승리자들의 노래하는 광경은 대환난을 통과할 성도들에게 위로와 힘이 된다. 성도들은 반드시 사탄과 세상과 악을 이길 것이다. 로마서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나 성도편에서 하나님만 섬기며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필요하다. 요한일서 5:4, 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또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참된 믿음과 의와 거룩은 성도가 승리하는 방편이다. 이와 같이 살아서 우리도 마침내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자들이 되자.

 

 

 

 

16장: 일곱 대접

요한계시록 16장은 일곱 대접의 재앙을 증거한다. 15:1에 증거한 대로 이 일곱 재앙은 마지막 재앙이며, 15:1, 7; 16:1의 말씀대로 이 재앙은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이다. 요한계시록 8, 9장의 일곱 나팔 재앙과 같이, 땅, 바다, 강, 하늘, 유브라데강이 언급된다. 그러나 일곱 나팔 재앙과 달리, 그 삼분의 일이 아니고 그 전체가 재앙을 당한다.


1-2절, 첫째 대접

[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요한은 또 성전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었는데, 그것은 그 일곱 천사에게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말하는 음성이었다. 성전에서 나는 그 큰 음성은 분명히 성전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음성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수행자들이다. 그 일곱 천사는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가지고 있었고 그 대접들을 땅에 쏟을 것이었다. 여기의 땅은 온 세상 곧 지구 전체를 가리킨다.

[2]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매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첫째 천사가 그 대접을 땅에 쏟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헌데와 종기가 났다. 본절의 땅은 사람들이 사는 땅을 말한다. 지구에는 여섯 개의 큰 대륙이 있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주가 그것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첫째 대접이 땅에 쏟아지자 악하고 독한 헌데가 사람들에게 났다.

그런데 그 악하고 독한 헌데와 종기는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났다. 이 말씀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들, 즉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이 재앙에서 면제됨을 암시한다. 그 재앙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과 악인들을 구별하신다. 말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이든지 아니면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인데, 그 헌데와 종기의 재앙은 후자에게만 해당된다.


3절, 둘째 대접

[3]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으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니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

둘째 천사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자, 바다가 죽은 자의 피같이 되어 모든 바다 생물들이 죽었다. 지구에는 다섯 개의 큰 바다가 있다.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남빙양, 북빙양이 그것이다. 둘째 대접으로 인해 그 바다들은 마치 심각한 적조현상처럼 붉게 되었고 모든 바다 생물들은 죽었다. 바다는 많은 물고기들을 사람의 음식물로 공급하는 공급원인데, 바다에 내린 재앙은 또한 거기에 많은 것을 의존하는 인간에게 큰 고통을 주는 재앙이다.


4-7절, 셋째 대접

[4] 셋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더라.

셋째 천사는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았다. 그러자 강과 물 근원 곧 샘들은 피가 되었다. 물은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사람의 몸은 70퍼센트가 수분이라고 한다. 사람은 물을 마셔야 산다. 강과 물 근원은 사람들의 식수원이다. 그런데 이 물이 피가 되니 사람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5, 6]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물을 차지한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의 공의로움을 말했다. 하나님은 공의로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적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많이 흘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의인의 피를 흘린 대가로 피를 마시게 하신다. 그것은 합당한 일이다.

[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요한은 제단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라는 소리이었다. 이것은 6:9, 10에 기록된 순교자들의 영혼들의 소리다. 그들은 자신들의 피흘림 당함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대접 재앙으로 그들의 호소에 응답하셨다. 그럴 때 순교자들의 영혼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참되심과 의로우심을 증거할 것이다.


8-9절, 넷째 대접

[8, 9]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넷째 천사는 그 대접을 해에 쏟았다. 그러자 해가 권세를 받아 큰 열기로 사람들을 태웠다. 태양의 중심 온도는 약 섭씨 1600만도로 추정되며 태양 표면의 온도는 약 섭씨 4200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만일 태양 주위의 가스층이 대폭발을 한다면, 태양의 표면 온도는 약 섭씨 200만도로 올라간다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날 지구는 이상 기온의 더위를 경험하고 있다. 그것을 지구 온난화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태양의 표면 온도가 급격히 높아진다면, 지구의 생명체들은 태양의 열기로 태움을 입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재앙을 받으면서도 악인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사실, 회개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에만 할 수 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회개할 만한 때에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회개를 뒤로 미루지 말고 항상 오늘이라는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기를 힘써야 한다.


10-11절, 다섯째 대접

[10]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다섯째 천사는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았는데, 그러자 짐승의 나라 즉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곧 어두워졌고 사람들은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었다. 나라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혼란하고 쇠퇴하며 몰락하게 됨을 뜻한다. 사람들의 고통은 독한 헌데와 태양열로 인한 화상 등 때문일 것이다. 죄는 일시적 쾌락을 주지만, 그 결과는 재앙과 고통이다.

[11]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짐승 곧 적그리스도의 나라에 사는 자들은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고 자기 행위들을 회개치 않았다. 본절의 '종기'는 2절의 '헌데'와 같은 단어(헬코스)이다. 넷째 대접의 경우와 같이, 이 사람들도 회개치 않았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1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다. 16:5, 6, "내가 들으니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사람의 판단은 편벽되기 쉬우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들에게 내려진다. 첫째 대접은 땅에 쏟아졌는데, 그것은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는 재앙이었다.

셋째로, 죄의 회개는 때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실 때이다. 그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회개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몸이 조금 아플 때라도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없나 자신을 살펴야 하고 결코 하나님 앞에 불평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된다.


12-16절, 여섯째 대접

[12]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여섯째 천사는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았는데, 그러자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었다. 9:13 이하의 여섯째 나팔 재앙에서와 같이, 유프라테스 강은 세계사에서 마지막 세계 대전의 격전지로 예언되어 있다. 강물이 마른 것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것일 것이다. 동방에서 오는 왕들은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 등의 군대를 가리킨 듯하다. 여하튼 유프라테스 강이 마름으로 동서양의 연합군 즉 온 세계의 연합군의 집결이 가능하게 될 것이다.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적그리스도 나라의 활동은 악령들의 활동이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시끄럽게 떠들어댈 것이나 실상은 거짓되고 더러운 영들임을 암시한다. 그 영들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왔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말들은 악한 영들의 활동이다.

이 귀신의 영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정치가들을 선동하여 연합군을 형성하게 한다. '이적을 행하여'라는 말은 이 악령들의 활동은 은사주의를 동반함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을 구하는 은사운동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수많은 곳들에서 '여호와의 날,' '주의 날'로 묘사된 그 날, 곧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다. 그 날의 전쟁은 본서의 19장에 증거된 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의 전쟁을 가리키는 것 같다. 19:11, 14, 19,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 . .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 . .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주께서는 도적같이 오실 것이다. '도적같이'라는 말은 주의 재림이 뜻밖에 혹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을 보인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킨다. 정상적 신앙생활은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사는 것이다. 참된 경건과 의로운 삶! 바른 믿음은 바른 삶으로 나타난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죄를 떠나고 의롭게 살게 되어 있다.

주께서는,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고 말씀하신다. 성도의 옷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義)의 옷이다. 갈라디아서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로마서 3: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빌립보서 3:9,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 믿음의 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가 성도의 옷이다. 우리는 참된 믿음으로 이 의를 지켜야 한다.

[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우리 말 성경에 작은 글씨로 '세 영이'라는 말은 원문에는 '그가'라고 되어 있다. 여기의 '그'는 하나님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왕들을 모으신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장하신다. '아마겟돈'이라는 말은 다수 사본에는 '므깃도'라고 되어 있다. 그 곳은 팔레스틴 북부, 갈릴리 호수 서편으로서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던 곳이다. 그 곳은 예전에 유다왕 요시야가 애굽 군대를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며 그 일은 유다 왕국의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이 예언은,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 이스라엘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보인다. 여섯 째 대접은 아마겟돈 전쟁을 위한 준비를 예언한다. 그 전쟁 자체는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의 큰 음녀 곧 바벨론의 멸망과 관계되고 특히 19장에 백마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와 관계된다고 본다.


17-21절, 일곱째 대접

[17, 18]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일곱째 천사는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았다. 그 때 성전에서부터 '되었다'라는 큰 음성이 들렸다. 그것은 '다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이 일곱째 대접 재앙으로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일곱째 대접의 재앙은 번개와 뇌성과 음성들을 동반한 큰 지진과 우박의 재앙이다. 그 지진은 역사상 가장 큰 지진이 될 것이다.

[19, 20]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더라.

큰 성 바벨론, 즉 적그리스도 나라의 수도는 그 지진으로 인하여 세 갈래로 갈라지고 그 외의 지구의 모든 성들도 그 지진으로 인해 무너지게 된다.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세상의 악들을 안 보시는 듯할지라도 다 보시고 아시고 마지막 날에 다 보복하시는 것을 증거한다. 하나님 앞에 피할 수 있는 죄인은 아무도 없다. 이 마지막 큰 지진으로 인하여 섬들과 산들도 부숴지고 가라앉고 사라질 것이다.

[21]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리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하니 그 재앙이 심히 큼이러라.

또 큰 우박이 내릴 터인데, 그 우박의 무게는 한 달란트, 약 30kg이나 될 것이다. 이런 무게의 큰 우박이 떨어지니 그 재난이 얼마나 극심할 것인가? 그렇지만, 사람들은 역시 회개치 않고 하나님을 훼방하기만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말세에 나타날 배교와 은사운동을 조심해야 한다. 본문의 거짓 선지자는 배교적 교회를, 이적을 행하는 것은 은사운동을 나타낸다. 이것은 성경에 예언된 바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9- 11,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둘째로, 우리는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바른 신앙, 복음 신앙, 속죄 신앙, 옛신앙, 성경적 신앙을 잘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 바른 신앙을 지키고 성경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힘쓰는 것이 깨어 자기 옷을 지키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회개할 만한 때에 열심으로 회개해야 한다. 회개치 못할 때가 올 것이다. 그 때에는 회개하려고 해도 회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때가 오기 전에 힘써 회개하자. 히브리서 12:15-17,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17장: 큰 음녀

요한계시록 17장은 큰 음녀에 대한 예언이다. 그것은 그 큰 음녀가 어떻게 열국을 음란으로 부패시킬 것인지, 또 그가 마침내 어떻게 멸망을 당할 것인지 증거한다.


1-6절, 큰 음녀에 대한 환상

[1, 2]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큰 음녀는 많은 물 위에 앉은 자로 증거되었다. '많은 물'은 15절에 증거하기를,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고 하였다. 즉 여기에 상징적으로 표현된 그 큰 음녀는 온 세상 나라들과 백성들 위에 역사하는 자이다. 그의 영향력은 세계적이다. 그는 세계적인 인물 혹은 단체이다. 특히 그는 땅의 정치 지도자들과 결탁되어 있다. 그의 음행은 영적인, 육적인 의미를 다 포함하는 것 같다. 그는 사상적으로 참된 종교와 세속주의를 혼합시키고 도덕적으로도 음란을 조장하는 자인 것 같다. 본문은 세상의 정치 지도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그 사상적, 도덕적 음행에 빠질 것이라고 보인다.

본장의 큰 음녀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그 큰 음녀를 악인들의 세상으로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그 음녀는 땅에 거하는 자들을 그 음행의 포도주로 취하게 한 자이며(2절), 일곱 산 위에 앉은 자요(9절),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요(18절), 하나님의 백성은 거기서 나와야 할 자들임을 생각할 때(18:4), 그는 단순히 악인들의 세상과 동일시 되기 어려워 보인다.

둘째는 그 큰 음녀를 로마 천주교회로 보는 견해이다. 그 근거는, 첫째로, 그가 정치 권력과 결탁되어 있다는 것이다. 3절,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천주교회는 역사적으로 정치적 세력 집단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요한복음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둘째로, 천주교회는 기독교의 배교와 이방종교화(마리아 숭배)의 결정체이다. 천주교회는 온 세계를 영적 간음의 포도주로 취하게 하는 자이다(2, 5절). 셋째로, 천주교회는 참된 성도들의 피를 많이 흘렸다. 6절, "내가 보니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순교자들]의 피에 취한지라." 넷째로, 로마는 일곱 산 위에 위치하고 있다. 9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그 산들의 이름은 팔라티누스, 퀴리날리스, 아벤티누스, 셀리우스, 베미날리스, 에스퀼리누스, 카피툴리누스 등이다. 그래서 옛부터 사람들은 로마를 '일곱 언덕의 로마' 혹은 '일곱 언덕'이라고 불렀다.

셋째는 그 큰 음녀를 말세에 나타날 '배교한 교회'를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배교한 교회가 왜 일곱 산 위에 위치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장차 로마 천주교회가 모든 개신교회들을 흡수하여 그 배교한 교회로 진전될 것이라고 내다본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둘째와 셋째의 견해는 하나가 될 것이다.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천사는 요한을 광야로 데리고 갔다. 광야는 참 교회가 사탄의 핍박을 피하여 숨은 곳이었다(계 12:6, 14). 거기에서 요한은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탄 것을 보았다. 여자가 탄 그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리킨다. 여자가 그 짐승을 탄 것은 배교한 교회가 적그리스도의 나라의 정치적 세력과 결탁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짐승의 색깔이 붉은 것은 그것의 호화롭고 사치스런 세상적 영광을 나타낸다. 그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거스리는 적그리스도적임을 나타낸다.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그 여자가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은 것이나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진 것은 다 세상적 부귀와 영광을 나타낸다. 타락한 교회는 세상적으로는 부요하고 사치와 영광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 금잔 안에는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였다. 그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배교적 교회이다. 그에게는 영육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만 가득하다.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그의 이마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비밀'이라는 이름은 그의 정체가 드러나 있지 않고 감취어 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분별력이 아니고서는 그 정체를 분별할 수 없다. '큰 바벨론'이라는 명칭은 역시 로마를 암시한다. 바벨론이 옛날 바벨론 제국의 수도이었듯이, 로마는 사도 요한의 당시 로마 제국의 수도이었다. 그것은 큰 바벨론이라고 불리울 만하였다.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는 이름은 영적으로 모든 우상숭배와 거짓 사상들의 어미이며 또한 육적으로 모든 음란의 원천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더욱이, 사도 요한은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 혹은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여 있음을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겼다. 로마 천주교회는 역사상 무수히 많은 진실한 성도들을 죽였다. 마지막 때에도, 그 배교적 교회는 많은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피를 흘릴 것이다. 참 성도를 핍박하는 행위는 그 교회가 참 교회가 아니고 거짓 교회임을 드러낸다. 그 배교적 교회는 참 성도들을 핍박할 것이다.


7-14절, 큰 음녀가 탄 짐승에 대한 설명

[7, 8]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 우리는 본 예언이 어느 나라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사상 적그리스도적 성격을 나타낸 나라들은 종종 있었다. 옛날 바벨론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는 강력한 나라이었다. 또 헬라 시대에 수리아의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한 적그리스도적 인물이었다(단 8:9 참조). 사도 요한 당시 로마의 도미시안 황제(주후 81-96년)도 초대 교회와 성도들에게 무서운 핍박자이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쓸 시점에는 적그리스도적 세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의 나라는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올 나라로 묘사된다. 그 나라는 재생 로마라고 불리운다. 장차 로마제국 같은 강력한 전제국가가 나타나 참 교회를 핍박할 것이다.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본절은 그 짐승의 일곱 머리가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로마를 가리키는 것 같다. 예로부터 로마는 '일복 언덕' 혹은 '일곱 언덕의 로마'라고 불리웠다(1, 2절 해석 참조). 만일 그것이 로마라면, 이 예언은 배교적 교회가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교회일 것이며 또 적그리스도의 나라도 그곳을 중심으로 삼고 활동할 것이라는 예언이 된다. 그렇다면 옛날 신성로마제국 시대처럼 로마는 또 한번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가 될 것이다.

[10-12]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많은 이들은 일곱 왕들은 일곱 나라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 일곱 나라들 중 이미 망한 다섯은 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 등 다섯 나라이며, 하나는 로마제국을 말하며, 아직 이르지 않은 다른 하나는 미지수이다.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이 짐승은 여덟째 나라이며 그것은 그 일곱 중에 속한 자라고 하였다. 많은 이들은 이 나라를 재생 로마라고 부르며 오늘날 유럽 연합(EU)이 이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주목한다. 또 열 뿔은 거기에 속한 열 나라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13, 14]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적그리스도의 나라들은 재림의 주님과 싸울 것이다. 이것은 주께서 재림하셔서 싸우실 싸움이다. 이것은 아마겟돈 전쟁과 동일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 때 어린양은 그들을 이기실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입고 진실한 자들은 이길 것이다.


15-18절, 큰 음녀의 받을 심판

[15-18]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그 큰 음녀는 마침내 적그리스도의 나라에 의해 망하고 만다.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벗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영적 음행으로 간주하시고 징책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몽둥이로 사용하여 타락한 교회를 치실 것이다. 배교한 교회는 세상보다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큰 음녀의 죽음과 멸망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되어지는 일이다. 적그리스도의 나라 지도자들이 그 큰 음녀를 미워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모든 뜻이 다 이루어질 것이다.


본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본장에 예언된 음녀는 배교한 교회로서 로마 천주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로마 천주교회(RCC)는 장차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연합하여 세계의 모든 형식상의 기독교회들을 포괄하는 세계적 교회를 형성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 앞에 불신실한 형식적 교회들의 연합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와 더불어 로마 천주교회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음행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영적 음행이나 육적 음행에 다 해당한다. 영적 음행은 이단, 우상숭배, 배교, 자유주의, 세속주의, 물질만능주의를 받아들임으로 우리의 사상과 인격이 더러워지는 것을 가리킨다. 육적 음행은 하나님 앞에서 불합당한 이성관계 혹은 동성관계로 우리의 몸이 더러워지는 것을 가리킨다. 오늘 시대는 매우 음란한 시대이다. 예술을 빙자한 영화, 연극 등과 온갖 대중매체들이 음란하고 또한 음란을 조장하고 있다. 성도들은 이러한 음란물들 혹은 외설물들을 멀리하고 자신의 순결을 지켜야 한다. 결혼한 이들은 부부의 관계를 깨끗하고 아름답게 유지해야 한다.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과 청소년들은 특히 자신들을 깨끗하게 지키되 보는 것과 남녀 교제를 조심해야 하며 절제력이 부족한 자들은 적당한 때에 결혼하는 것이 좋다. 여하튼, 우리는 영적 음행이나 육적 음행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4절,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배교적 교회의 핍박과 미혹 속에서 승리하려면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신실한 속죄 신앙을 가지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깨어 있으며 성경의 모든 교훈에 복종하며 행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14:3-5,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18장: 바벨론의 멸망

요한계시록 18장은 큰 음녀인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예언한다. 그 여자는 말세에 나타날 배교한 교회를 가리킨다고 본다. 배교적인 로마 천주교회는 장차 개신교회들을 흡수하여 세계적 교회로 나타날 것이며 로마는 다시 한번 세계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1-3절, 바벨론의 정체와 그 멸망

[1-3]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사도 요한은 큰 권세와 영광을 가진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힘센 음성으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외치는 것을 들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말세에 나타날 배교한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확실히 멸망할 것이다. 외형적으로 하나님의 전인 그 교회는 실상 각종 더럽고 가증한 영들의 집합소가 될 것이다. 배교한 교회는 모든 형식적 교회들을 통합하고 또 모든 세계 종교들을 통합할 것이다.

또 그 교회는 땅의 왕들과 상인들로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게 하였다. '그 사치의 세력'이라는 원어는 '그 음탕함의 세력'이라는 뜻이다. 그 음행은 영적인, 육적인 의미를 다 가진다고 본다. 그 교회는 거짓 종교로 만국을 타락시킬 것이다. 본장 23절,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또 그 교회는 바른 진리와 도덕성으로 세상을 인도하기는커녕 도리어 음란을 조장하는데 앞장설 것이다.


4-8절, 바벨론 멸망의 이유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는 음성을 주셨다. 세상 종말의 배교의 시대에라도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그 배교의 죄와 그 영적인, 육적인 음행에 참여하지 말고 거기에서 분리되어 나와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그 배교한 교회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그 배교한 교회와 정신적으로 분리할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분리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분리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친다(요이 7-11; 살후 3:6, 14).

[5]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바벨론의 멸망의 이유는 그의 죄가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어 그 뜻이 분명하다. 옛날 노아 시대에는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였더니(창 6:5, 11, 13)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하셨다. 그러나 말세의 배교한 교회의 죄는 하늘에 사무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 고로 그에게 멸망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6-8]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그가 어떻게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난과 애통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신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게 행위대로 갑절이나 갚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며 사치한 만큼 그에게 고난과 애통으로 갚으시며 그 교회가 자신을 여황으로 높이고 결코 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만한 만큼 하루 동안에 사망과 애통과 흉년의 재앙들을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갑작스럽게, 하루 동안에 임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불로 그를 사르실 것이다. 불로 심판하실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시다.


9-20절, 바벨론 멸망의 모습

[9, 10] 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그 교회와 영적 음행을 하고 그로 인해 부요와 사치를 누릴 세상의 권력자들은 그것이 불타며 망하는 광경을 보고 울며 가슴을 치며 그 고난을 무서워할 것이다. 그들은 멀리 서서 부르짖기를, 크고 견고한 그 성에 일시간에 심판이 이르렀으니 화가 있다, 화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 성의 멸망은 일시간에 돌연히,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10, 17, 19절).

[11-14]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놋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 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세상의 상인들도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들이 없을 것이므로 그 성의 멸망을 애통할 것이다. 그들이 취급했던 주요 물품들은, 첫째로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 등의 귀금속들이요, 둘째로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 등의 의복 재료들이요, 셋째로 각종 향목과 상아 기명과 값진 나무 등의 고급 가구나 그릇 재료들이요, 넷째로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 등의 향품류요, 다섯째로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 등의 식료품이요, 여섯째로 소와 양과 말 등의 가축들이요, 일곱째로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었다. 사람들이 한때 즐겼던 모든 좋은 것들이 다 멸망을 당하여 없어질 것이다.

[15-19] 바벨론을 인하여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외쳐 가로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하며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고 애통하여 외쳐 가로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배교한 교회로 인하여 부를 누렸던 상인들과 선장들과 선인들은 그 성의 멸망을 인해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할 것이다. 그들은 그 큰 성의 불붙는 모습을 보면서 그 성의 이전의 부귀와 영광이 이처럼 일시간에 망하는 것을 인해 무서워하며 울며 애통할 것이다.

[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대조적으로 하늘에 있는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억울함을 갚으시는 심판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그 교회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많이 죽였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으며 또 사도들과 성도들을 많이 죽였다. 타락한 교회와 교직자들은 참된 종들과 성도들을 많이 핍박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억울함과 억울한 피흘림을 갚으실 것이다.


21-24절, 바벨론 멸망의 영원함

[21-24]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 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배교한 교회의 멸망은 영원하다. 다시는 그것이 누리던 세상적 즐거움들이 없어질 것이다. 다시는 거기서 음악소리도, 세공업자도, 맷돌소리도, 등불도, 신랑과 신부의 음성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교회의 거짓된 종교로 인하여 만국이 미혹을 받았었다. 또 많은 선지자들과 성도들의 피가 그 성 중에서 보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 교회의 끝날이 왔고 다시는 그 교회의 세상적 찬란한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한계시록 18장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말세에 나타날 배교한 교회는 마침내 갑작스럽게, 확실하게,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그가 누렸던 세상적 부귀와 영광과 쾌락도 끝날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무서운 불의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된 우리는 거기서 나와야 한다. 그 죄와 멸망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단순히 정신적으로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분리되어야 한다. 우리는 비록 지상에서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끝까지 순결한 교회를 건립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것은 말세에 나타날 배교한 세계 교회로부터 분리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볼 때 하늘의 성도들과 더불어 기뻐해야 할 것이다.


 

 

 

 

19장: 백마 탄 자의 심판

요한계시록 19장은 하늘의 찬송 광경과 백마 탄 자의 심판에 대해 증거한다.


1-10절, 하늘의 찬송

[1-3]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큰 음녀 바벨론에 대한 환상과 그의 멸망에 대한 음성을 자세히 들은 후, 사도 요한은 하늘에 많은 무리가 큰 음성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무리는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을 다 포함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과 능력을 찬송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세상에 이미 역사하였고 또 말세에 절정적으로 나타날 사탄과 적그리스도 나라와 배교한 교회의 세력은 참으로 크다. 그들은 힘을 합쳐 666인을 맞지 않은 성도들을 심히 핍박할 것이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돈과 육신의 쾌락과 음란의 유혹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또한 고난과 핍박과 순교까지 견뎌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모든 고난에서 건지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울 것이다. 그 음녀는 하나님의 종들의 피를 많이 흘렸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피를 그 음녀에게 갚으실 것이다. 그 심판의 연기는 세세토록 올라갈 것이다. '그 연기'라는 원어는 '그 여자의 연기'라는 말로서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가리킨다.

[4, 5]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또한 24장로들과 네 생물의 화답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그 많은 무리의 찬송 소리를 듣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아멘, 할렐루야'하고 화답하였다. 그 때 하나님의 보좌에서 한 음성이 들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는 음성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고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노인이든지 어린아이이든지 간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의 구원을 찬송해야 한다. 하늘의 천사들과 화답하여 찬송해야 하는 것이다.

[6-9]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사도 요한은 또 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많은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 웅장한 소리이었다. 그것은 하늘의 천사들과 성도들의 힘찬 찬송의 소리일 것이다. 그들은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찬송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라고 말했다. 또 그들은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준비되었다고 말한다. 또 그 아내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성을 기뻐하고 찬송하였다. 또 한 천사가 그에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섭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구원인데, 그것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표현되었다. 혼인은 완전한 연합을 가리킨다. 신부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부활한 성도들이 천국에서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된 삶을 누릴 것을 가리킨다. 사람의 불신앙과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과 순종과 사랑은 완전한 연합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천국에서 가능하다.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물론,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러나 성도들은 아직 연약하여 때때로 슬퍼하며 피곤해 하고 낙심하며 방황하고 또 실수하며 범죄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이 교인들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표현하였다(고후 11:2). 성도들은 지금 혼인을 기다리는 신부와 같다.

신부가 입게 될 옷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옷이다. 8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이다. '옳은 행실'이라고 번역된 원어(디카이오마타)는 '의'라는 단어이다. 성도들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가 되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라고 증거했다(빌 3:9). 인간의 행위의 의는 불완전하다. 이사야는 인간의 의가 더러운 옷 즉 누더기 옷과 같다고 말했다(사 64:6). 오직 예수께서 주신 의만이 완전하고 영광스럽다. 성도의 의로운 행실은 그 의에 비하면 보잘 것 없으며 또 영광스럽지도 못하다.

성도들이 누릴 천국의 영광을 혼인 잔치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기쁘고 즐겁고 참된 만족을 주는 것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천사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했다. 천국에서 누릴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세상의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의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크고, 그 만족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만족보다 가히 비교할 수 없이 더 크다. 이 천국의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에 참여하는 자들은 참으로 복되다.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너무 감격하였던 것 같다. 그는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였다. 그 천사는 자기도 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는 말씀은 자기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한다.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하나님의 영에 의한 대언(代言) 사역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를 사용하여 일하시는 하나님께만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두어가지 실제적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음성을 듣는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면,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이라면, 우리가 참으로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고 큰 음녀, 즉 배교한 교회로부터 분리된 삶을 사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과 화답하여 힘차게 하나님을 찬송하자.

둘째로, 우리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 즉 부활한 몸으로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사모하자. 거기에는 더 이상 죄가 없고 슬픔이 없고 질병과 고통이 없고 피곤과 낙심과 방황이 없다. 거기에는 완전하고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이 있다. 우리는 그 영광을 사모하자. 또 그 혼인 잔치에 참여할 신부처럼 속죄 신앙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지키고 또 거기에 합한 의의 삶을 힘쓰자.


11-16절, 백마 탄 자의 오심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백마와 탄 자는 심판하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사도신경,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것은 재림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말은 전쟁 수행의 기동력과 힘을 나타내고 흰색은 성결함을 나타낸다. 심판하러 오시는 주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의 심판은 신속하고 힘이 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시다. '충신'이라는 원어(피스토스)는 '충성된 자'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충성되이 완수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은 택한 백성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영생에 이르도록 구원하는 일이었다(요 6:39, 40). 그는 그 일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셨다. '진실'이라는 원어(알레디노스)는 '참된 자'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 자체이시고 참되신 구주이시다.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그는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는 자로 표현되어 있다. 그의 심판은 공의로울 것이다. 그는 의롭고 공평하게 모든 일을 판단하실 것이다. 그는 사람의 낯을 보지 않고 공의의 법을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그가 싸울 대상은 악한 자들 곧 적그리스도로 표현된 전제주의적 국가와 거짓선지자로 표현된 배교한 교회이다. 그는 그들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그의 눈은 불꽃 같았다. 이것은 그의 꿰뚫는 지식과 통찰력을 가리킨다. 또 그의 머리에는 많은 면류관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상징한다. 그는 많은 승리의 전력(前歷)이 있다. 그에게는 승리만 있다.

또 그 다음에 전통 사본들의 다수 사본에 보면, "그에게는 여러 이름들이 있고 또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한 이름이 있다"고 되어 있다. 그에게는 여러 이름들이 있다. 본문에도, 충신, 진실, 하나님의 말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등의 이름이 나온다. 또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한 이름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그의 신성의 이름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을 다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본질은 인간에게 신비의 베일에 감추어져 있다.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그는 피 뿌린 옷을 입으셨다. 그것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는 고난을 받으셨음을 나타내거나, 혹은 원수들을 심판할 때 그들의 피가 그의 옷에 묻은 것을 가리킬 것이다(사 63:1-3). 또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하였다. 그것은 이 백마 탄 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나타낸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칭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이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그를 따르는 하늘 군대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재림의 주님은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1:7,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그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탄 것은 그들의 성결함과 기동력과 힘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심판을 도울 천사들은 다 거룩하고 능력이 있는 자들이다.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날센 검이 나오는 것은 그의 말씀의 능력을 나타낸다. 그의 말씀은 심판의 능력을 가진 말씀이다. 그는 그 두려운 말씀으로 만국을 치실 것이다. 또 그는 친히 철장으로 저희를 다스릴 것이다. 철장 통치는 무적(無敵)의 통치를 가리킨다. 그를 대항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을 것이다. 그가 밟을 포도들은 원수들을 가리킨다. 그는 포도주 틀을 밟듯이 그 원수들을 진멸하실 것이다.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그의 옷과 다리에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는 분명히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계시록 17:14,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그는 모든 왕들을 다스리시는 크신 왕이시요 모든 주인들을 다스리시는 참 주인이시다.


17-21절, 심판의 큰 잔치

[17, 18]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또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의 모든 새들에게 외치는 것을 보았다. 천사가 해에 선 것은 온 세계의 새들이 볼 수 있도록 외치기 위해서이다. 외친 내용은 하나님의 큰 잔치에 관한 것이다. 그 잔치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와 대조된다. 그것은 심판의 잔치이다. 그것은 새들이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그 전쟁에 참여한 모든 자들의 고기를 먹는 잔치를 가리킨다. 그것은 예언된 대 전쟁에 참여한 자들의 죽음을 의미한다.

[19-21]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연합군은 재림의 주님과 더불어 싸우려 하다가 망하고 만다. 이 전쟁은 요한계시록 16장에 예언된 아마겟돈 전쟁을 가리킨 것 같다. 17, 18장의 큰 음녀 곧 바벨론의 멸망은 이 전쟁의 결과로 멸망함을 가리키는 것 같다. 거짓 선지자는 짐승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자요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이었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잡혀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운다.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배교한 교회가 멸망하고 맨 먼저 지옥에 던지울 것을 가리킨다. 산채로 던지운다는 말은 그들이 직접 악인의 부활체를 입은 후 최종적 지옥에 던지울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에녹과 엘리야가 죽음을 경험치 않고 변화된 몸으로 천국에 올라간 것과 비교된다. 이렇게 재림의 주님은 적그리스도 나라와 배교한 교회를 멸망시키실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또 그 전쟁에 참여한 나머지 사람들도 다 죽어 새들의 밥이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본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거룩하고 권세 있는 심판자로 다시 오실 것이다. 하늘의 천사들도 그를 따라 내려와 그의 심판을 도울 것이다. 둘째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결국 망할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나라와 배교한 교회는 일시적으로 번영하고 사치할 것이지만, 마침내 망하여 산채로 지옥에 들어가는 벌을 받을 것이다. 셋째로, 세상의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배교한 교회의 종말이 이러할 것이므로, 우리는 믿음과 인내로써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또 우리는 죄악된 일들을 버리고 오직 거룩과 의로 우리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우리는 죄 지으면 망하는 줄 알고 믿음으로 살고 거룩하고 의롭게 살자.


 

 

 

 

20장: 천년왕국과 대심판

요한계시록 20장은 천년왕국과 마지막 대심판에 관한 내용이다. 천년왕국에 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고 해석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 천년왕국은 실제로 땅 위에 이루어질 왕국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인가, 후인가? 천년왕국 직전에 일어날 의인들의 부활과 마지막 대심판 때의 악인들의 부활은 과연 천년간의 간격을 가진 사건일 것인가? 또한 천년왕국의 목적과 성격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에 따라, 즉 요한계시록 20장의 본문에 대한 해석의 견해에 따라 그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천년왕국에 대해서는 세 가지의 견해들이 있다. 첫째로, 무(無)천년설이라는 견해는 천년왕국을 신약교회시대로 본다. 둘째로, 후(後)천년설이라는 견해는 천년왕국 후에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는 견해로서 천년왕국을 교회시대 후기에 있을 복음의 황금시대로 본다. 셋째로, 전(前)천년설이라는 견해는 천년왕국 전에 주께서 재림하신다는 견해, 즉 주께서 재림하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신다는 견해이다. 전천년설 가운데도 구약의 예언들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세우고 짐승 제사들을 다시 드린다고 보는 견해(세대주의적 전천년설)가 있고 천년왕국을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신약 성도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는 왕국으로 보는 견해(역사적 전천년설)가 있다.

이러한 세 가지 혹은 네 가지의 견해들 중에 어느 것이 바른 견해인가하는 것은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의 성경적 근거는 복음서와 서신서들이다. 복음서와 서신서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세상에 종말이 오고 모든 죽은 자들이 함께 부활하고 함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거기에는 어디에도 천년왕국에 대한 언급이 없고 또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오랜 기간의 간격을 두고 있다는 암시도 없다. 그러나 전천년설의 근거는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 20:1-10은 전천년설의 가장 강한 근거이며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의 가장 큰 난제 구절이다.


1-3절, 마귀의 일시적 감금

[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사도 요한은 한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무저갱(無底坑, 아뷔쏘스)은 '밑바닥이 없는 구덩이'라는 뜻으로 사탄과 악령들의 근거지 혹은 감금 장소로 생각된다. 예수께서 거라사[혹은 가다라]인의 땅에서 만난 '군대' 귀신들은 예수께 자기들을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눅 8:30, 31).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천사들을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말했고(벧후 2:4), 유다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했는데(유 6), 그곳이 무저갱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한계시록 9:1-11에 보면,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사람들을 다섯 달 동안 괴롭힐 것이며(다섯째 나팔 재앙) 그것들의 왕은 '파괴자'(아바돈 혹은 아볼루온)라고 불리우는 무저갱의 사자이다. 요한계시록 11:7에 보면,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은 1260일 동안 예언하던 두 증인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17:8에 보면, 큰 음녀가 타고 있던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이다.

[2, 3]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다가 그 후에는 반드시 잠간 놓이리라.

그 천사는 하나님이 주신 큰 권세를 가지고 용을 잡았다. '용'이라는 원어(드라콘)는 큰 뱀을 가리킨다. 그는 옛 뱀, 곧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케 하였던 그 뱀이다. 그는 또한 마귀요 사탄이다. '마귀'라는 원어(디아볼로스)는 훼방자, 중상자, 참소자, 반역자, 배신자 등의 뜻이다. '사단'이라는 원어(사타나스)는 대적자, 원수라는 뜻이다. 마귀는 처음부터 인류를 타락시킨 자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훼방하고 중상한 자요 대적자요 하나님과 인류의 원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귀를 잡아 결박하여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가두게 하시고 그 위에 인봉하여 그 감금을 확실케 하셨다. 마귀는 이제 천년 동안 만국을 미혹하지 못할 것이다. 만국을 미혹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던 마귀의 활동은 천년 동안 잠잠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감금은 일시적이다. 사탄은 마치 징역 천년의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힌 것과 같다. 천년이 차면 사탄은 반드시 잠간 놓일 것이다.

무천년설은 마귀의 결박과 감금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효력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마귀가 감금되었기 때문에 그는 복음의 힘 있는 전파를 방해하지 못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사탄의 잠시 놓임은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효력이 잠시라도 무효화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인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일시적 감금을 신약시대 전체로 보는 것은 바른 해석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이상의 어떤 뜻, 곧 문자 그대로 사탄이 결박되고 감금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주께서 백마 타고 오셔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폐하신 후에 사탄을 천년 동안 감금시키실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본문에 가장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4-6절, 첫째 부활과 천년왕국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

사도 요한은 또 몇 가지를 보았다. 우선, 보좌들을 보았다. 보좌는 보통 재판하는 권세를 상징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보좌들에 앉아 있었다. 거기 앉은 자들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원문에는 단순히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 위에 앉아 있었다'고 되어 있다. 아마 그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할 모든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 보좌에 앉은 자들은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다. '심판하는 권세'라는 원어(크리마)는 '심판'으로 보통 번역되지만 여기서는 문맥적으로 '심판하는 권세'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또 요한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 목 베임을 받은 자들의 영혼들을 보았다. 그것은 순교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물론 그들도 심판 권세를 받고 보좌들에 앉은 자들 중에 포함될 것이다. 그 다음 구절을 원문에서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은 누구든지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 않았다.' 여기의 '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만일 그들이 바로 앞의 순교자들만을 가리킨다면,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할 자들은 순교자들뿐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의 그들은 순교자들을 포함하여 심판 권세를 가지고 보좌에 앉아 있는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즉 그들은 모든 진실한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짐승 곧 적그리스도의 활동은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를 거쳐 교회 역사상 항상 있어 왔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복종하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들도 교회 역사상 항상 있어 왔다.

그 다음 구절도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고 그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노릇하였다.' 여기의 그들은 앞에 언급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다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다음 절에 언급된 '첫째 부활'이다.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만일 앞에 언급된 자들이 순교자들만을 묘사한 것이라면,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나머지 예수 믿는 자들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 언급된 자들이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의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신자가 아닌 자들 곧 불신자들과 악인들을 가리킬 것이다. 즉 이 구절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구별한 것이라고 본다. 고린도전서 15:23, 24,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첫째 부활'은 성도들의 영혼의 중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성도들의 육체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이다. '부활'이라는 원어(아나스타시스)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12, 13, 21, 42절). 그러나 그 말은 성경에서 중생을 위해서는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하리라.

첫째 부활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은 복되다. 그들은 몸의 구속(救贖)을 받은 자들이므로 완전히 거룩함을 얻은 자들이다. 둘째 사망 곧 지옥의 형벌이 그들을 다스릴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계 5:10)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 그 천년은 사탄이 결박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온 세상에서 불의와 불법이 제거되고 풍성한 평화가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다시 한번 더 기억하자. 사탄이 아무리 악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잡아 무저갱 속에 감금하기를 원하실 때, 그는 감금되고 말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자.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순종함으로써 할 수 있다. 우리는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 목 베임을 받을 각오까지 해야 할 것이다. 디모데후서 2:11-13,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7-10절, 사탄의 놓임, 미혹, 형벌

[7, 8]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천년의 감금 기간이 다하면 사탄은 그 무저갱의 감옥에서 놓여날 것이다. 사탄이 할 일이 남아 있다. 그는 천년 동안의 긴 감금 기간 동안 회개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를 간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즉시 거대한 일을 도모한다. 그것은 역사상 전무한 일이다. 그것은 지구상의 모든 백성을 미혹하는 일이다.

지구상의 모든 백성은 '곡과 마곡'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것은 구약성경 에스겔 38장과 39장에서 인용한 표현임이 분명하다. 거기에서 곡과 마곡은 이스라엘의 대적자로 나타났다. 마지막 시대의 사람들은 곡과 마곡으로 표현된다. 그들은 천년왕국 중에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다.

사탄은 그들을 미혹하여 마지막 전쟁에 참여케 한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아마 이렇게 선전할 것이다. "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은 특권 계급처럼 너무 오랫 동안 우리를 통치해왔다. 우리는 이제 그들의 통치에 싫증을 느낀다. 우리는 자유를 원하고 우리 스스로의 민주적 통치를 원한다. 자, 우리가 단합하여 저들을 쳐부수고 영구적인 자유와 기쁨을 누리자."

그러나 사탄의 이 선전은 순전한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그들의 행복을 위하기는커녕 자신과 인류의 영원한 멸망을 자초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는 바다의 모래같이 많을 것이다.

[9, 10] 저희가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저들은 온 땅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둘렀다. '성도들의 진'은 부활한 성도들이 거주한 곳을 가리키고 '사랑하시는 성'은 예루살렘을 가리킨 것 같다. 재림하신 주께서는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시는 것 같고 또 부활한 성도들도 한 곳에 모여 사는 것 같다. 성도들은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온 세계를 통치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놓여난 후 세상을 미혹하자 그 미혹을 받은 사람들은 대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저들은 성도들의 통치권을 부정하며 선전 포고를 할 것이다. 이런 세계적인 반란을 막아낼 방법이 있을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마지막 형벌의 때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희를 소멸하실 것이다.

그런 후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미혹한 마귀를 잡아 불과 유황 못에 던져넣을 것이다. 거기에는 이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을 것이고 그들은 다 거기서 세세토록 밤낮 고통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짐승은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리키고 거짓 선지자는 배교한 교회를 가리킨다고 해석했다. 그것들이 지옥불에 던지운다는 표현은 그것들이 어떤 인물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짐승은 적그리스도 나라의 지도자이며 거짓 선지자는 배교한 교회의 지도자일지도 모른다. 이제 사탄이 그들과 함께 지옥불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과 성도들을 대적했던 원수 마귀의 최후이다.


11-15절, 마지막 심판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사도 요한은 또 마지막 심판 보좌를 보았다. 그것은 크고 흰 보좌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 땅 위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심판할 대 심판대이다. 그 심판 보좌가 흰 보좌인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거룩하고 의로울 것을 나타낸다.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그는 성경에 마지막 심판주로 증거되어 있다. 요한복음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사도행전 10: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땅과 하늘은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고 심판받을 모든 자들이 그 앞에 서게 될 것이다.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죽은 자들은 어른이나 아이를 막론하고 다 그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부활하여 서게 됨을 가리킬 것이다. 의인들은 천년왕국 전에 부활하였으므로 이때는 악인들이 부활할 것이다. 사람은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차 다 부활하여 심판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이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가장 공평한 처분이다. 그는 사람을 가장 존귀하게 창조하신 대신에 마지막 날에 공의롭게 심판하실 것을 성경에 말씀하셨다. 이것은 바르고 정당한 처분이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 처분 앞에 불평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자들로서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사도 요한은 심판대 앞에서 여러 권의 책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다 펴져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책들'은 사람들의 행위들을 기록한 책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위들을 보시고 그 행위들에 따라 공의롭게 심판을 하신다. '죽은 자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 이 행위록들과 구별되는 다른 한 책은 생명책이라고 불리웠다. 그것은 모든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들을 기록한 책이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0:20).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은 이 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안다.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자들은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자들이다. 비록 그들이 바다 가운데 빠져 죽었을지라도 그들은 거기에서부터 부활할 것이다. 모든 무덤들이 죽은 자들을 내어줄 것이다. 온 세상에서 죽은 자들의 원소는 다시 결합되어 부활할 것이다. 사람에게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이 밝히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이심이 밝히 증거될 것이다. 모든 죽은 자들은 다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 보좌 앞에 서서 각각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행위에 대해 받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결코 핑계하거나 불평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의롭고 공정할 것이다.

[14, 15]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육신의 죽음과 무덤 그리고 악인들이 부활 전까지 머물며 고통 당하던 음부 곧 지옥도 최종적 지옥인 불못에 던지우는 것으로 표현된다. 불못은 부활 후에 악인들이 들어갈 형벌의 장소이다. 그것이 둘째 사망이다. 이것이 참으로 두려운 사망이다. 사람들은 육신의 죽음 곧 첫째 사망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사람의 일들 중에 장례식이 가장 슬픔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렵고 슬픈 일은 둘째 사망의 일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다가 죽었을지라도 이 둘째 사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그의 행과 불행이 나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누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결론적으로, 7절부터 15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사탄이 아무리 무섭고 강한 원수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사탄의 결말을 바로 알고 그를 당당히 대적하자. 베드로전서 5:8, 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야고보서 4:7,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둘째로, 우리의 이름은 반드시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믿음으로 된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굳게 가지자. 그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그리고 성경 말씀을 통해 생기며 견고해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는 그것과 비교해보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화롭게 살았다 할지라도 장차 지옥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결코 행복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 유여하게 살지 못했을지라도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면 우리는 확실히 행복자이다. 그런 자가 되고 그런 자로 당당히 살자.

셋째로, 우리는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위들에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바른 행위에 힘쓸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2:36). 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증하였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8-10).

 

 

 

 

21장: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성

1-8절, 천국과 지옥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인의 확실한 소망이다. 현재의 하늘과 현재의 땅은 사라지고 새 세계가 올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다 예언하는 바이다. 이사야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현재의 하늘과 땅은 죄로 인해 저주 아래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 속에도 갖가지의 추하고 불행한 요소들이 있다. 저 아름답고 푸른 하늘은 때때로 폭우와 폭설을 내린다. 오곡백과(五穀百果)를 내는 땅은 때때로 화산과 지진으로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공포를 준다. 또 땅에는 늑대, 이리, 뱀 같은 무서운 짐승들이 있고 각종 병균들이 득실거린다. 바다는 낭만적이지만 않고 때로는 미친듯한 파도로 배들과 사람들을 삼킨다. 이것들은 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하나님께 받은 저주의 결과들이다(창 3:17).

그러나 현재의 하늘과 땅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어두움 가운데 빛이 비취듯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듯이, 옛 하늘과 옛 땅은 지나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다. 죄악된 세계가 지나가고 의로 충만한 새 세계가 오며, 저주 받은 이 땅이 지나가고 저주가 거두어지고 하나님의 복이 충만한 세계가 올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우리의 확실한 소망이다.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새 도시가 세워질 것이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운다. 그 도시는 '거룩한 성'이다. 그것은 죄악되고 불결한 현재의 세상 도시들과 전혀 다르다. 현재의 세상 도시들은 얼마나 타락되어 있는가!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죄악과 불결이 없는 거룩한 성이다.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새 예루살렘은 또한 아름다운 도시이다. 그 아름다움은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고 묘사되었다. 11절에는,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했다. 또 18, 19절과 21절에 보면,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고] . . . .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고 했다.

죄는 추함을 만들지만, 의는 아름다움을 만든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하나님이시다. 경건한 아브라함의 처 사라는 아름다웠다. 의로운 욥의 딸들은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믿음과 순종심이 많았던 에스더는 아름다웠다. 미는 조화에서 온다고 하는데, 미와 조화는 하나님의 성질이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예루살렘은 아름다운 도시일 것이다.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계셔서.

새 세계 곧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의 주관자이시며 관리자이시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모든 좋은 것이 다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기쁨과 평강이 넘칠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 자체가 복이다. 하나님은 만복의 원천이시다.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의 모든 불행이 제거된 세계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눈물이 제거되고 사망이 없고 애통이 없고 아픈 것이 없을 것이다. 얼마나 이 세상과 다를 것인지! 이 세상에는 병자들이 많다.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 갖가지로 고통 당하는 자들이 많다. 이혼으로 파탄한 가정들도 많고 소년 소녀 가장들도 많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많다. 장례식들이 끊임이 없고 공동묘지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새 세계에서는 이런 불행한 요소들이 다 제거될 것이다.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이렇게 만물을 회복시킬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시다.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그가 말씀하신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세상은 인간의 범죄로 부패하였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 죄악되고 저주받은 세상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신다. 그는 옛 하늘과 옛 땅을 지나가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오게 하신다. 그는 자기의 택한 백성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예비하신다. 그는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는 말씀은 만물의 회복이 하나님의 중요한 진리임을 강조한다. 만물의 회복은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마지막 목표이다. 사도행전 3: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두리라."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만물의 회복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그는 처음과 나중이 되신다. 세상의 일들은 나의 생각, 나의 계획,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구원 사역을 시작하시고 6천년 동안 진행해오셨고 또 그의 정하신 때까지 계속 그러하실 것이고 마침내 완성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만을 의지해야 한다.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기는 자'란, 죄의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세상과 마귀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자를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자는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죄와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길은 참된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할 것이다. 세상은 악하고 마귀의 시험은 강하고 우리는 약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자마다 세상을 이기고 자신의 죄성을 이기고 마귀를 이길 것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인간 계산으로 살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살자. 그것은 이기는 길이며 영광스런 새 세계에 들어가는 복된 길이다.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새 세계에는 악한 자들이 없을 것이다. 모든 죄인들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세상의 핍박과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마술사들, 우상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모든 악인들은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그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다. 그렇지만 죄와 의는 반대되는 것이므로, 또 죄 가운데 머무는 자는 결국 지옥에 갈 수밖에 없으므로, 또 주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지만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한다. 죄는 지옥 백성의 특징이요 천국 백성의 특징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죄를 버려야 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정리해본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목적인 만물의 회복의 때를 사모하자.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 이루어질 때를 사모하자. 그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나라를 사모하자.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거할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눈물도 고통도 죽음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소망을 오직 천국에 두자.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으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으로 우리의 죄악성을 이기고 세상과 마귀의 유혹과 핍박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택하시고 그리스도께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께서 인치신 자들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들은 다 영광스러운 구원에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행하자.

셋째로, 우리는 결코 죄 가운데 사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세상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는 모든 종류의 악을 버리자. 미움과 살인, 음욕과 간음, 우상숭배, 모든 거짓을 다 버리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오직 거룩과 의와 선함과 진실함 가운데 거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자들이 되도록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9-27절, 새 예루살렘성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는 구원얻은 성도들 곧 교회를 가리킨다. 그들은 부활의 영광을 입은 상태 즉 영화의 상태에 있다. 주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 재림하실 그 자신을 신랑에, 그리고 성도들을 열 처녀에 비유하셨다(마 25:1).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에서 교인들을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을 처녀에 비유하였다(고후 11:2). 또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 비교하면서 한 몸 됨과 일치와 연합을 강조하였다(엡 5:32).

[10, 11]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감동 중에 새 예루살렘성의 환상을 보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이었다. 새 예루살렘성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은 그 성이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성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지혜와 능력으로 만드신 성임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1:10,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새 예루살렘성은 무엇을 가리켰는가? 그것은 단순히 영화된 교회를 상징하는가?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그 성의 묘사가 구체적이다. 그것은 실제로 어떤 도시로 생각된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수도일 것이다.

그 성은 한마디로 거룩한 성이라고 표현된다. 인간의 영화의 상태나 천국은 한마디로 죄가 없는 곳이며 죄가 없는 상태이다. 그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 성의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았다. 그것은 그 성이 심히 거룩하고 영광스러움을 나타낸다.

[12, 13]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그 성에는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고 각 문에는 열두 천사가 있다. 그 천사들은 그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이다. 그 성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성이다. 또 열두 문 위에는 각각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다. 열두 지파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전체의 수를 상징한다(계 7:4-8).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성의 열두 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모든 백성들이 그리로 들어옴을 나타낸다. 동서남북에 세 개씩의 문이 있는 것도 온 세계로부터 택한 백성들이 그리로 들어옴을 상징한다. 온 세상의 모든 민족 중에서 택한 백성들은 그리고 그들만 구원받을 것이다.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새 예루살렘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지만(고전 3:11), 그는 사도들을 통해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교회는 사도들이 전파하고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와 속죄의 복음 위에 세워졌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했다(고전 1:23). 그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그들이 모여 교회를 이루며 그들은 장차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15-17]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그 성의 크기가 언급된다. 그 성을 척량하는 금 갈대는 세상의 잣대가 아니고 영적인 잣대, 그러나 확실한 잣대를 가리키는 것 같다. 금 갈대로 재어진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고 넓이와 길이가 같은 정방형이며 높이도 같다. 그 길이는 12000스다디온이다. 그것은 12 x 1000스다디온이다. 12는 완전을 나타내는 수이며 1000은 충만을 나타내는 수이다. 스다디온은 약 184미터이며 12000스다디온은 약 2210킬로미터이다. 우리나라 이북의 함경북도 북쪽 끝에서 경상남도 부산의 남쪽 끝까지 직선거리가 약 1000킬로미터이니까, 새 예루살렘성은 문자적으로 그 길이의 두 배 가량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를 가진 도시이다. 그러나 12000스다디온은 완전하고 충만한 크기의 도시를 상징할지도 모른다. 또 그 성곽의 높이는 144규빗이다. 144규빗은 12 x 12규빗이다. 그것은 약 65미터 정도이지만 아마 완전한 높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18-21]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다.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이며 열두 문은 열두 진주이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다. 이것은 다 그 성이 아름답고 깨끗하고 귀하고 영광스러움을 나타낸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장차 누릴 영광을 나타낸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부활체의 영광이며 영원한 천국의 영광이다. 사도 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말했다(롬 8:18).

특히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며졌다. 그것은 마치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이 입은 판결 흉배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긴 열두 개의 보석과도 같다(출 28:17-21). 성곽의 기초석 위에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했는데(14절), 그것은 교회의 기초가 된 사도들이 각각 받은 은혜가 달랐지만, 다 귀한 하나님의 보배들이었음을 증거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보석과 같이 귀히 여기신다(마 13:44-46).

[22-27]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성 안에는 없는 것들이 있었다. 첫째로, 성전이 없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구약 성전은 그림자와 모형이었고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주 예수께서 친히 계시기 때문에 성전이 필요치 않다. 둘째로, 해와 달의 비침이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직접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광은 해와 달의 비침보다 더 클 것이다.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들어올 것이다. 셋째로, 밤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 성을 항상 대낮같이 밝게 만들 것이며 따라서 성문들을 닫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넷째로, 죄인들이 없을 것이다. 모든 더러운 것들과 가증한 일이나 거짓말을 하는 자들은 거기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회개치 않은 자들은 아무도 그곳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씻음받고 중생한 자들만 그곳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속죄 신앙은 그 성에 들어가는 출입증이다.


결론적으로, 9절부터 27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 본다. 첫째로, 우리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깨닫고 그것을 믿고 지키자. 사도들의 교훈은 성곽의 기초이다. 갈라디아서 1:8, 9,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디모데후서 1:13, 1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둘째로, 우리는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을 감사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배로 여기신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셋째로, 우리는 모든 더러운 것과 악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만 믿고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만 순종하며 살자. 모든 죄를 다 버리고 멀리하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시 1:1). 성경의 모든 교훈을 믿고 가감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할 바른 길이며 복된 길, 평강의 길, 영생의 길이다.


 

 

 

 

22장: 이 예언의 말씀을 지키라

1-6절, 새 예루살렘성의 복됨

[1]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전장에서 새 예루살렘성의 영광에 대해 증거한 사도 요한은 이제 그 성의 복됨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성도들이 그 성에서 영생을 누릴 것을 증거한다. 새 예루살렘성에는 생명수의 강이 있다. 그것은 수정같이 맑은 강이다. 그것은 더러운 쓰레기와 오폐수로 더럽혀지지 않은 강이다. 거기에는 사람에게 장염을 일으키는 대장균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생명수의 강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 강물이 생명의 힘을 주는 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마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강물이다. 그것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고 표현된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근원함을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義)와 생명과 성령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강물이다.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또 새 예루살렘성에는 많은 생명나무들이 있을 것이다. 그 나무들은 길 가운데, 강 좌우에 있을 것이다. 그 나무들에 열두 가지 실과들이 달마다 맺힐 것이다. 그것들은 천국 백성에게 다양하고 풍성하게 생명력을 북돋울 것이다. 또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에 생명력과 활기를 주는데 사용될 것이다. 천국에는 생명의 쇠약함이나 쇠잔함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병도 병원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항상 건강과 원기가 넘칠 것이다. 새 예루살렘성에서 우리는 영생을 누릴 것이다.

[3-5]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둘째로, 요한은 성도들이 그 성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릴 것을 증거한다. 새 예루살렘성에는 저주가 없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성도들은 그를 섬기며 그에게 예배드리고 그의 얼굴을 보고 그와 교제할 것이다. 또 그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소속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영광이 친히 비취시므로 어두움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그곳에서 왕 같은 신분과 특권을 가지고 생활할 것이다.

[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이 말' 곧 새 예루살렘성에 관한 말씀은 신실하고 참되다고 증거되었다. 또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은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신' 것이라고 증거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실하고 참된 말씀이며 요한계시록도 그 한 부분이다. 또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반드시 속히 되어질 사건들을 예언한 것이다.


7-10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됨

[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주께서는 자신의 재림이 속히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면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초두에서도 읽을 수 있는 말씀이다.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은 어떤 내용을 가리키는가?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7인, 7나팔, 7대접으로 묘사된 대환난이 올 것이다. 천재지변들이 있고 세계적 큰 전쟁들이 있을 것이다. 적그리스도 즉 세계를 지배하는 무서운 전제주의적(專制主義的) 국가와, 거짓 선지자 즉 전세계적인 배교한 교회가 나타날 것이다. 극심한 환난과 핍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재림하심으로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패할 것이다. 큰 음녀와 바벨론은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성도들은 인내하면서 순결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메시지의 요지이다. 우리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 그런 자들이 복이 있다.

[8, 9]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사도 요한은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 한 잘못을 범했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하다. 사도라도 실수할 수 있다. 천사는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은 그와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라고 말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했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우리 모두는 다 형제, 자매이며 성경책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하는 자들일 뿐이다.

[10]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재림의 때, 심판의 때, 천국의 때가 가깝기 때문에,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어려운 책이긴 하지만, 덮어두어야 할 책은 아니다. 그것은 목사들이 성심으로 설교하고 강론하고 전파해야 할 내용이다.


11-15절, 행한 대로 받음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한두 번 권면했으면 충분할 것이다. 세 번 혹은 네 번 반복해서 권면하고 기다릴 시간이 없다. 이제 각자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그 은혜를 좇아 자신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대로 살아가야 한다. 불의를 하는 자나 더러운 자는 더 이상 권면을 받을 기회가 없다.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도 그러하다. 그들은 모두 각자 하나님이 주신 은혜대로 하나님께 응답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힘쓰고 있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일 것이다. 그 은혜 안에 거하고 그 은혜 안에서 최선을 다하자.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주께서는 다시 재림이 속히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시면서 행위 보응에 대하여 약속하셨다. 의를 행하는 자는 천국에, 악을 행하는 자는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신자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의와 거룩을 행하다가 영생에 들어간다. 로마서 6: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다. 처음과 시작은 창조를 가리키고 나중과 끝은 종말과 심판을 가리킬 것이다. 처음과 끝을 주장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또 처음과 끝이 되신 주님은 인간과 세상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시며 정리자가 되신다.

[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다수사본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 대신에 '그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계명들의 내용은 의와 사랑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제로 의를 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정확히 알고 배우고 깨닫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자들이 복되다. 또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은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개인적으로, 단체적으로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기를 원하며 또 기도하기를 원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원한다. 또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다른 이를 미워하거나 비방하지 않는다. 그는 남을 존경하고 남의 부족과 실수를 용서하고 남에 대해 너그러움과 이해심과 관용심을 가진다. 이런 자들은 생명나무에 나아갈 것이며 문들을 통해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자가 참으로 예수 믿는 자이다.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그러나 의와 사랑이 없는 자들, 죄 가운데 사는 자들, 예컨대, 개들 즉 부도덕하고 남을 물어뜯는 자들, 술객들 즉 악한 신비술을 쓰는 자들, 행음자들, 살인자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은 성 밖에 있을 것이다. 성 밖에 있다는 말은 결국 지옥에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인류의 최종적 상태는 천국과 지옥 둘뿐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부터 15절까지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강조한다. 첫째로, 본문은 새 예루살렘성의 복됨을 증거한다. 그 성에서 우리는 생명수의 강과 생명나무를 통해 풍성한 영생의 생명을 누릴 것이다. 또 그 성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얼굴을 뵈올 것이다. 또 왕 같은 신분과 특권을 누릴 것이다. 그 복된 성과 거기에서의 삶을 사모하자!

둘째로, 우리는 이 책의 에언의 말씀을 지키자. 장차 극심한 대환난과 핍박이 닥칠 것이지만, 우리는 불신앙과 악과 타협하지 말고 순수한 믿음을 지키면서 끝까지 참아야 한다. 환난 시대에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은 경건과 의와 사랑과 진실 등이다. 우리는 항상 성경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하고, 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또 진실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참된 표이며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는 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힘써 행한다.


16-21절,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은 예수께서 교회들을 위하여 그의 천사를 사도 요한에게 보내어 그로 하여금 우리에게 증거하고 기록하게 한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참 저자는 사도 요한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라고 증거하셨다. '다윗의 뿌리'라는 말은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낸다. 그는 만물의 근원이시고 인간의 근원이시며 또 다윗의 근원이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다윗의 자손'이시다. 이것은 그의 인성(人性)을 나타낸다. 그는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인간 다윗의 후손으로 탄생하셨고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로 오셨다. 그는 또한 자신을 '광명한 새벽별'이라고 증거하셨다. 그는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 아침이 올 때 뜨는 별처럼 죄악된 인류 역사를 끝마치고 천국의 새 시대를 여는 별로 오셨다.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성령과 신부는 교회와 그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오라'는 말은, 많은 주석가들이 이해하는 대로, 전체 문맥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에 대한 대답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오소서'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7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본문, '오소서.' 또한 주의 재림의 약속이나 그에 대한 응답의 말을 듣는 자도 '오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자들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요한복음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7:37, 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18, 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가감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책에서부터 강조되었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모세오경에 역사서들과 시가서들과 선지서들이 첨가되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주신 내용에 무엇을 첨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한 말씀들이었다. 이제 구약성경에 신약의 복음서들과 역사서와 서신서들이 첨가되었고 요한계시록이 마지막으로 첨가되었다. 그런 후 요한계시록의 이 마지막 부분에 가감치 말라는 또 한번의 강조와 경고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언급된 경고는 매우 엄숙하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더하면 하나님의 재앙이 그에게 더하여질 것이며, 누구든지 무엇을 빼면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경고되어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증거한다. 또 이것은 이 책이 종말 예언에 있어서 충족한 계시의 책임을 증거한다. 이 책에 더 이상 무엇을 첨가할 내용이 없다. 요한계시록은 종말 예언에 있어서 최종적 권위요 표준과 법칙이 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에만 적용될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와 아니 성경 전체에 적용될 만한 말씀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성경 맨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성경 전체의 권위와 충족성에 대한 결론적 확증이 되었다.

[20, 21]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주의 말씀에 응답하여 사도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말했다. 전통사본에는 '아멘 주 예수여 진실로 오시옵소서'라고 되어 있다. '진실로'라는 말(나이)은 '정말, 참으로, 진실로'라는 뜻으로 재림의 확실함을 나타낸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나이). 아멘."

주께서는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주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나타낸다. 베드로후서 3:8-10,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아멘, 주 예수여 진실로 오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것은 모든 신약 성도들의 큰 소망이다. 주께서 다시 오셔야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할 것이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자. 모든 신자들은 그를 향해 '오소서'라고 외쳐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주의 재림에 모든 가치를 두어야 한다. 또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주께 나아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비롯하여 모든 신구약 성경을 가감하지 말자.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 말씀을 다 믿고 그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성경으로 만족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믿고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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