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의 관계

하나님아들 2024. 4. 18. 22:29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의 관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의 관계를 말하려 할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1) 첫째, 하나님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코 하나님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골2:9에 "신성"(theotes)이란 말이 나오지만 신성의 충만하심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하셨고, 롬1:20에 나오는 "신성"도 인간에게 분명히 보여 알게 될 뿐 아니라, 우리가 거기에 구체적으로 반응(감사와 찬송)해야 할 만큼 실제적인 것입니다. 빌2:6에 나오는 "하나님의 본체"(morphe theou)는 철학에서 말하는 추상적인 개념어인 우시아(ousia; 본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을 언급할 때,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추상적인 무인격적 본질로서 그 분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결코 성경은 추상적인 신개념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해 언급할 때에 언제나 그가 지으신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시는 살아 계신 분으로 묘사하며, 그리고 또한 거기서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 어느 구절에서도 속성 밖에 있는 본질에 관해 언급한 곳이 없습니다. "모든 본질은 각 속성 안에 있고, 속성은 본질 안에 있다"고 말한 쉐드(Shedd)의 지적은 타당합니다(Dogmatic Theology I, p334). 하나님의 본질이 속성들 없이 그것만으로 존재하거나, 그 본질이 속성들보다 앞선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그 속성들이 신적인 본질에 덧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여러분, 함께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는 어떤 것들이 잇습니까? 예, 사랑, 자비, 지혜, 권능, 덕 .. 등등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 중의 한 속성을 예로 들어보십시다. 덕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덕은 하나님의 본질에 덧붙여진 것(우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바로 덕의 충만(pleroma)이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은 바로 사랑의 충만이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하나 하나 대입시킬지라도 각각은 마찬가지로 성립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혹은 '거룩하시다' 할 때, 사랑이란 속성 혹은 거룩이란 속성 이외에 본질이 속성과 분리하여 따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유기적(有機的)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른 바, 어떤 것에 무엇을 덧붙인다는 뉴앙스를 지닌 표현인, '속성들'(屬性; attributes)보다는 '특성들'(properties)이란 용어가 훨씬 더 낫지 않겠느냐는 루이스 벌콮(L. Berkhof)의 제안을 들어볼 만한 이야기 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우에 있어서는, 모든 피조물의 경우에서와는 달리, 각 속성들 가운데 신적인 본질이 동일하게 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벌콮이 말한 "하나님의 속성들은 그가 그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대로의 하나님 자신이시다"(God's attributes are God Himself, as He has revealed Himself to us - S.T. p.45)란 표현 역시 따지고 보면, 하나님은 자신이 가지고 계신 그대로 계신다는 뜻으로서 하나님 안에서는 그의 모든 속성이 그의 본질과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린 이 같은 결론과는 달리, 만일에 신의 속성들을 신의 본질로부터 분리시켜 피조물 속에 역사하는 여러 신적인 격위(格位)로 만들어 버리게 되면, 다신론(多神論)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오류를, 지난 역사 가운데서 철학과 신학이 함께 범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플라토(Plato) 같은 이는 이데아(Idea)의 세계와 신(神)을 나란히 독립적으로 존재케 한 결과, 이데아의 세계를 신격화하였으며, 필로(Philo) 같은 이는 신의 선하심, 능력 등을 신의 본질과 다른 신격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본질과 그 속성들을 분리시키는 일을 잘못이라고 경계한 벌콮의 태도(S.T. p.45)는 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학자들마다 신의 본질과 속성을 구별하는 일에 있어서 그 범위 설정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은 이 둘, 곧 본질과 속성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례로, 이종성은 그의 <신론>에서 신의 본질을 8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사랑, 영, 창조자, 전지, 전능, 전재(全在), 영원, 불변(신론, p.149f.)이며, 신의 속성을 사랑, 성(聖), 의(義), 선(善)으로 분류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사랑'은 신의 본질에도 속하고, 신의 속성에도 속한 것으로 범주화해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류는 다른 신학자들의 분류방법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신의 본질과 속성에 관하여 이 같은 애매한 분류를 할 수밖엔 없습니다. 그래서 이종성 자신도 그의 책에서(p.148) 독일의 개혁신학자 Heppe를 인용하면서 하는 말이 "본질을 생각할 때에는 속성을 생각하고, 속성을 생각할 때는 본질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발언은 우리가 앞서 내린 결론처럼,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분리시키는 일은 신관(神觀)을 부요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빈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속성에 대해 생각해 볼 때,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여 절대성이 결여된 것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하는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다 그것들 속에 신적인 절대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신적 본질과 분리되어서는 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 대개 '절대자'(絶對者)라는 개념으로부터 그들의 철학적 논의를 시작하는 것처럼, 신학도 '영원자존'(永遠自存)이란 존재개념, 즉 다시 말해 속성 없는 본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처럼 혹 생각하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신의 존재 개념을 그 본질로 삼고, 다른 속성들은 거기에 부수적인 것으로 보려는 관점인데, 이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완전성과 여러 속성들의 충만함이 함께 넘치는 자존자(自存者)이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존자는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살아 역사하시며, 무한히 부요하신 구체적인 신격자(神格者)이십니다. 철학자들의 '절대자'처럼 내용 없는 추상적 개념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속성들을 지니신 생명이 넘치는 자존자이십니다.

 

 

주의할 점,

 

(3) 세 번째는, 하나님의 속성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극대화 시켜 그것을 하나님의 본질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신의 어떤 속성이 본질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어떤 속성을 본질로 높이고, 그 외의 다른 속성들을 그것에 예속시켜 격하시켜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신적인 본질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교회 역사상 신의 속성들 가운데 어떤 속성만을 높여 신의 본질로 삼고, 다른 속성들은 거기에 종속되는 것처럼 여기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었습니다. 예컨대, 스콜라신학자인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하나님의 자존성을,  유명론자인 스코투스(Duns Scotus)는 무한성을, 16세기의 합리주의자들인 소시니안파(Socinianen)는 신의 의지를 강조하였으며, 네덜란드의 흐로닝헌(Groningen) 학파는 신의 부성(父性)과 사랑을, 카이퍼(A. Kuyper)의 스승인 스콜턴(Scholten)은 신의 절대적 지배를 신의 본질로 보았습니다. 또한 윤리파는 스콜턴의 사색적 지성주의와 결정론적인 경향에 반대하여 신의 지고성(至高性), 혹은 거룩한 능력을 본질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어떤 특정한 속성을 추상화하여 신의 본질로 삼는 것은 앞서 논의한 것처럼, 전적으로 비성경적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도 동일한 우(遇)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질로 삼아, 결과적으로 다른 속성들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적인 신관이 세워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의 원리도 그 설 땅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표현만이 아닙니다. 공의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랑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게 되면, 십자가의 의미를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빛이시다. 자비로우시다. 거룩하시다. 의로우시다. 등등의 표현이 골고루 나타납니다. 어느 한 속성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해서는 안됩니다. 사랑 없는 공의는 공의가 아니듯이, 공의 없는 사랑 또한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속성들을 서로 서로 유기적으로 결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들 속에 신적 본질이 충만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속성만을 배타적으로 부각시켜 절대화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리는 삼위일체론과 연관 시켜서도 동일하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성부가 하나님의 본체, 곧 신의 본질을 가지셨고, 성자 역시 동일하게 공동 본질을 지니셨고, 성령 역시 동일하게 신적 본질을 지니신 것으로 보아야지, 이 삼위 밖에 또 다른 하나의 본체(본질; substantia)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또 하나의 본체가 있어서 그 본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주관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또한 달리 표현하여 성부, 성자, 성령이 그 본체에 예속 되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는 분명 잘못입니다. 이미 이단으로 판명된 종속론의 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