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부활 그 이후의 삶

하나님아들 2024. 3. 31. 23:22

부활 그 이후의 삶 (새장승포교회 민귀식목사)

마태복음 28장 1절~10절 말씀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며 떨며 죽은 사람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며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 질 할 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면서 ‘부활 그이후의 삶’이라는 주제로 말씀의 증거를 나누고자 합니다!”

 

“개혁은 창조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교황 중심으로 종교적인 정통성이 확립 되고 교회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마틴루터는 부활절을 앞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결혼해야 되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당시 신부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행위이다. 그러나 마틴루터는 종교개혁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결혼에 대한 결심을 주변에 밝히게 되는데 주변의 부정적인 의견은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 것은 맞지만, 결혼을 하면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반대에 부디치게 된다. 하지만 마틴루터는 결혼을 하겠다는 결심을 굽히지 않은 채 ”나는 성경적 가정의 모본을 실천함으로서 천사들을 웃게하고 나를 비웃는 마귀들을 울게 할 것이다!“ 선언하고 결혼을 결정하고 자신의 종교개혁의 의미에 공감한 ‘카타리나 폰보라’와 결혼생활을 하게된다.”

 

마틴루터의 고백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가장 소중한 선물은 나의 아내다!“

 

 

“마틴루터는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면서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개혁의 선봉에서서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엄청난 고통과 고난이 다가오고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가톨릭 교황청은 교권에 항거하여 투쟁한 신부 마틴 루터에게 사형집행

명령을 내렸습니다.

루터가 이 일 때문에 심히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본 그의 아내는

어느 날 상복을 입고 남편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를 본 루터는 아내에게

“누가 죽었는데 상복을 입고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루터의 부인은 “하나님이 돌아가셔서 운다”고 대답했습니다.

루터는 화를 내며 “어찌 하나님이 돌아가실 수 있는 분이냐”고 책망 했습니다.

그때 루터의 아내는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낙망하고 있느냐”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마틴루터는 이 말에 용기를 얻고 거대한 교황청과 맞서 종교 개혁의 막중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 주님이 장사지낸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야 부활의 주님을 마나는 것입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 이후의 삶

첫째)기쁨이 넘치는 삶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자 예수의 제자들은 살수 없겠다며 낙심하면서 갈릴리로 돌아가거나 두려움에 떨며 슬픔과 한숨 속에 살아가게 되는데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고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게 된다. 지진이 일어남과 동시에 예수님의 돌무덤을 누군가가 열게 되는데 그 형상이 천사의 모습이며 이를 발견한 여인들은 떨리고 두렵고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본문 천사의 말 5절~6절>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며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누가복음 24장 5절~6절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자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 하셨는지 기억하라

 

두려움과 무서움과 떨림이 다 사라지고

본문8절)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 질 할 새

 

“부활의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 성도들에게 부활의 기쁨이 넘치고, 부활의 감사가 넘치고 부활의 은혜가 넘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심각한 문제이고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어려움은 죄와 죽음의 문제다. 사망의 늪에 빠지거나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번민 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 떨 수밖에 없으며 죽음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죽음이후에 확실한 부활이 있다면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넘어 영원한 세계 하나님과 함께 영생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이 원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찬송가>기뻐 찬송하세

1,기뻐 찬송하세 주님 부활 했네 그 무덤의 권세 다 깨뜨렸네

2,기뻐 찬송하세 밝은 빛이 왔네 그 어둠의 권세 다 이기셨네

3,기뻐 찬송하세 주님 피를 흘려 그 속량한 값을 다 치르셨네

4,기뻐 찬송하세 죄를 사했으니  그 속죄한 은혜 다 찬송하세

 

후렴>

찬송하고 전파하세 대속하신 주님 할렐루야 찬송 다시 사셨도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

 

둘째)우리 주님께 늘 경배하는 삶

본문9절)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경배는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이 절대자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같음을 느끼면서 경배해야 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경배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할 수 있다.”

 

사도베드로의 말

사도행전 10장26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두 사도의 말

사도행전 14장15절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국민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영국 황실에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대주교 월리엄 템플에게 국민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자 윌리엄 템플(willam temple)은 “여왕 폐하이시여! 위로는 해답이 아니라 예배가 해답입니다! 이 땅에 거하는 주의 모든 백성들이 살아계신 주님 앞에 엎드려 그를 경배 한다면 역사는 달라 질것입니다!”

 

“문제의 해결 자이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드리고 예배하고 경배하면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역사가 이루어 질것입니다.”

 

셋째)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삶

본문10절)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전해들은 여인들은 부활의 주님을 제자들에게 전한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마가복음 16장 9절~11절

 

예수께서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쫏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부활의 증인으로 삶을 살았다.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마났으면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메신저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갈릴리로 가라!

(상징성)

-소망이 없는 곳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라!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고통 속에서 절망 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 착취당하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희망을 주는 사명을 감당하라는 주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갈릴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부활의 희망을 주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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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2011년 4월17일)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 (새장승포교회 민귀식목사)

스가랴 9장 9절~10절 말씀

 

구원을 베풀 왕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예브라함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애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요한복음 12장 12절~19절 말씀

 

예루살렘으로 가시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 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려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림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 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더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 하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 성을 입성 할 때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래서 ‘종려주일’ 이라고 하며 오늘부터 시작해서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영접하고 환영했음을 본문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예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손 에 손 에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는 모습이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듯 했다. 많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옷을 벗어 나귀를 타고 예수님이 지나가는 자리에 양탄자 깔 듯 깔았으며, 예수님이 지나갈 때에 좌우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외쳐서 소리치기를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 영광이로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외친 ‘호산나’히브리어 뜻

“구원하소서! 이제 구원하소서!”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면서 ‘호산나!’하고 외쳤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이처럼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고 예루살렘 시민들은 왜? ‘호산나!’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는가?”

 

예루살렘 시민들이 구원을 요청한 이유?

=>예수님을 정치적임 메시아라고 생각했기 때문

 

요한복음 11장에 기록 된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죽은 지 나흘이 지나고 돌무덤 속에 묻힌 사람을 예수님께서 살려내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며 이스라엘 역사 속에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요한복음 9장 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우의 눈을 예수님께서 깨끗이 고쳐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든 놀라운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6장 에서는

어린 꼬마가 가지고 있는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가 들어 있는 도시락을 예수님이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데 약 2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게 먹이고 12광주리를 가득 채웠다는 ‘5병2어’의 기적이 기록되어있다!“

=>예루살렘 시민들이 자신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나라의 왕이 백마를 타고 궁궐에 들어가는 개선장군처럼 예수님께서 권력을 가지기 위한 메시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아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며 권력자의 메시아가 아님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게 된 이유?

첫째)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무든 인류의 구원자로서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가 되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스가랴 9장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둘째)유월절의 어린 왕이 되기 위해서

 

“애굽 땅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내리는 마지막 10번째 재앙을 내리는데, 집집마다 모든 장자를 죽이겠다. 이 재앙이 히브리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도 내려졌다”

 

죽음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

=>어린 양을 잡아서 각 가정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하는 것

 

유월(踰?) pass over

=>죽음의 손이 장자를 죽이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유월절을 우리나라로 치면 1월14일 다음 날 해질 때까지이며 이 절기가 다가올 때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재물이 되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선지자 세례요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셋째)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켜 드리기 위해서

=>모든 인류의 죄를 심판하도록 하기위해서

 

본문9장9절)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죄의 삯은 사망(롬 6:23)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심판을 예수님께 전가시켜 이 땅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함으로서 이 당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짊어지고 고초당하셨네

  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를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름답다 예수여 나의 좋은 친구

 예수 공을 아끼며 영원과 영원답게

 예수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대구샘터교회 정용섭 목사“나는 아니지요?”
마태복음 26:14-25, 사순절 마지막 주일, 2011년 4월17일
 


     오늘은 사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고난주일, 또는 종려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종려주일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는 사실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왕을 환영하는 듯한 멋진 장면입니다만 실제로는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 십자가에 처형당합니다. 33살의 나이로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대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간 것일까요? 제자들은 왜 스승의 처형을 막지 못한 것일까요?
     복음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돈을 받았다고 합니다. 유다가 자기 스승인 예수님을 판 이유는 복음서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유추는 가능합니다. 말 그대로 돈에 욕심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은 30을 받고 스승을 파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인격이 파탄된 인물입니다. 유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맡을 정도로 예수님의 신임을 받았고, 열두 제자들 중에서 학문이 가장 깊었던 사람입니다. 메시아 관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유다는 무력혁명도 불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만을 선포했습니다. 이런 차이를 결국 극복하지 못해서 배신했다는 말도 가능합니다. 복음서를 사실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체포 장면에서 유다의 역할은 미미했습니다. 제사장의 사병(私兵)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추는 것뿐이었습니다. 유다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사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유다의 배신에는 우리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따라가기 힘든 어떤 곡절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체포에 관련된 미묘한 사태를 이해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다음입니다. 배신은 유다만의 문제가 아니라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에게 해당됩니다. 마 26:31절 이하에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시고, 대표자로 베드로를 지목합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유다와 베드로의 행동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베드로는 자기 행동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지만 유다는 자살로 끝냈다는 차이는 그렇게 결정적인 게 아닙니다. 오히려 유다가 자기잘못에 대해서 더 엄격했는지도 모릅니다. 같은 자리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부인한 베드로의 잘못이 더 엄중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베드로에게는 너그럽고 유다에게는 인색합니다. 복음서도 그런 입장을 견지합니다. 거기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어떤 상황이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가룟 유다에게만 모든 책임을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당시 배신에서 자유롭지 못한 제자들을 대표할 뿐입니다. 그 내막이 어떤지를 알려면 본문을 꼼꼼히 살펴야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주겠다는 계략을 꾸미고 돌아온 뒤에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먹게 되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은 모든 유대인들이 지키는 의식입니다. 양을 잡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습니다. 이런 특별한 먹을거리는 출애굽 사건에 기원합니다. 유월절(逾越, pass over)은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당시에 죽음의 천사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유대인의 집만은 비켜갔습니다. 민족 멸절의 위기를 넘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양을 잡고, 그것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기억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먹으면서 자신의 운명이 유월절 양과 같다는 생각을 하셨겠지요. 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21절) 제자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근심에 싸였습니다. 각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22절) 예수님은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이 말씀을 실감나게 들었을 겁니다.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다는 말은 한 상에 둘러앉은 가족이나 형제, 친구처럼 아주 가깝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이어서 예수님은 스승을 판 이가 감당해야 할 운명의 짐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징벌을 없습니다. 존재할 가치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 되니까요. 초기 그리스도교에는 이에 관한 신학적인 논란이 벌어졌을 겁니다. 지금 우리도 생각해야만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고 한다면 가룟 유다의 행위도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른 것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만약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인류 구원이 불가능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그럴듯하지만 역사를 원인과 결과라는 실증적인 관점으로만 보는 견해입니다. 복음서 기자는 그런 견해와 논란을 한 마디로 잠재웁니다. 스승을 판 제자는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운명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가룟 유다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자신의 음모가 들통 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까요? 아니면 이 위기를 모면할 궁리를 짜느라 정신이 없었을까요? 그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겁니다.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25절) 이미 앞에서 다른 제자들이 한 말입니다. 유다도 말했을 텐데, 양심이 찔린 탓으로 다시 확인하고 싶었겠지요. 도둑이 제 발 저려한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라고, 진리를 거스르지 않는다고, 스승을 배신하는 철면피가 아니라고 발뺌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은 배신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모두 도망갔습니다. 일부 여자들만 빼고 모두 그랬습니다.
    
“나는 아니지요?”라는 제자들의 발언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위기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들이 이런 불안을 안고 신앙생활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30대 초반의 한 유대인 남자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추종자들을 조직하거나 지금 우리가 말하는 교회를 세우지도 않았고, 부처나 공자처럼 천수를 누리면서 많은 가르침을 남기지도 않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남아 있는 것은 죽어서 무덤에 장사되었던 예수님을 생명의 실체로 만났다는 일부 제자들의 경험뿐입니다. 그것에 근거해서 주변의 눈총을 받으면서까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남아 있기는 어렵습니다. 아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떠났을 겁니다. 그냥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배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아직 떠나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기회만 오면 떠날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받을 정신적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나는 아니지요?”라는 발언에는 배교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불안감이 그대로 묻어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배신과 배교를 믿음이 없는 탓이라고 나무라고 싶은 분들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가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 그들과 똑같이 배교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를 등한히 여긴다거나 떠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신앙생활에 열정을 보이면서도 내면적으로 예수님을 은 30에 팔 수 있습니다. 이중적으로 얼마든지 처신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나는 아니지요?” 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합니다. 물론 일부러 이렇게 위선적으로 신앙생활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신앙으로 끌려들어갑니다. 무엇이 예수님의 뜻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주로 그리스도교가 교권으로 자리 잡을 때 일어납니다. 교회가 말씀과 영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교회권력에 사로잡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와 20세기 초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던 정교회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이야기는 교권에 찌든 교회의 전형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한국교회도 이런 증상을 보인다고 걱정을 합니다. 기독교계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속 사회에까지 크게 불거진 사건도 적지 않습니다. 부도덕성, 분열, 개교회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개교회 안에서도 싸우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별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주먹다짐을 하기까지 합니다. 한기총의 대표회장 선거에서 거액의 돈봉투가 오갔습니다. 감리교회는 감독회장 선거 후유증으로 수년 동안 사법 재판을 받았고, 판결이 났는데도 여전히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한국교회에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이런 행태는 본문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제자들의 배교와 행간에 들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배교와 다를 게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설교를 듣고 이제 정신 차려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이구나, 바른 믿음을 지키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제자들처럼 유치하게 살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바른 믿음을 지켜나가도록 노력하십시오. 그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유다의 배신으로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을 향한 인류의 배신입니다. 예수님의 처형에는 유다만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과 민중들, 그리고 로마 제국이 모두 연루되었습니다. 그들은 인류 전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살해자가 곧 인간입니다. 니체는 1882년에 쓴 <즐거운 학문>(Die fr?hliche Wissenschaft) 제3권 ‘미친 사람’이라는 제목이 붙은 단락에서 “신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미친 사람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이것을 너희들에게 말하려고 한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니체의 그리스도교비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기 위해서 음모를 꾸민 겁니다.
    
이런 이야기가 현실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살기 힘든데 그렇게 거창하고 고상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허투루 읽는 겁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그리스도교 영성 안으로 들어가기는 힘들겠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실상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가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나를 팔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각자 “나는 아니지요?” 하고 대꾸한 제자들의 모습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인류의 비겁하고 영악하고 비루한 배신과 변명의 역사를 헤치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분께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구원 신비를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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