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신학함의 태도로서 ‘신학을 어떻게?’의 문제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의 글을 쓰도록 편집실로부터 원고청탁 받았다. 편집기획자의 의도는 ‘신학을 왜’(Why), '신학을 어떻게‘(How), '신학은 무엇을’(What) 할 것인가 세가지 범주로 대별하여 서로 다른 필자에게 글을 쓰도록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How)의 관심은 신학함의 학구적 방법론보다는 실존적 지향성에 초점을 집중하려는 것 같다.
신학함의 과제를 수행하는 개인이나 공동체는 적어도 5가지 차원의 대상과 항상 마주하면서 신학을 하게 마련이다:
첫째는 신비이신 삼위일체 하나님,
둘째는 복음을 증언하는 원증언집 성서,
셋째는 복음이 선포되고 들려지는 오늘의 현실세계,
넷째, 신학함의 행위가 그 안에서 이뤄지는 회중공동체로서의 교회,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신학하는 응답적 주체자 로서 ‘인간실존 그 자체’ 가 5가지 대상들이다.
줄여 반복하면
신비이신 하나님(God the Mystery),
신앙전통의 총괄로서 성경(Bible as the Tradition),
실질적 현실세계(World as the actual Reality),
신앙공동체로서 교회(Church as the congregational Community),
응답자로서 실존(Existence as the Respondent)이 그것이다.
이상 다섯가지 핵심적 대상들은 해석학적으로 불가분리적으로 상호연계 되면서 ‘신학적 실존’과 ‘신학의 내용’을 규정한다. 어느항목 한가지를 별도로 동떨어지게 분리시켜서 생각 할 수도 없고, 그리해서도 않된다. 각각의 실재가 독립적 실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세상은 세상이며, 성경과 교회와 인간실존은 각각 구별되어야 하는 실재임에 틀림없다. 성경이 기록되고 편찬되기 전에도 하나님은 계셨고, 세상과 인간의 본질이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지는 않으며, 성경과 교회가 없을 때에도 세상 인간들은 존재했었다. 그렇지만, 각각의 실재가 신학도에게 참으로 ‘의미있는 실재’로 체험되고 고백되려면 위에서 언급한 5가지 항목들은 상호 유기체적으로 연관된 맥락구조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필자는 ‘어떻게 신학 할까?’ 라는 물음도 결국 그 5가지 항목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질 것인가의 문제로서 파악하려 한다.
2. 경외로운 신비자이며 온전히 계심과 비우심의 하나님과 씨름하기
신학도가 신학하기로 작정하고 신학하는 공동체에 들어온 직후부터, 신학도는 승산도 없고 씨름경기 종료휘슬도 울리지 않는 ‘신비자 하나님과의 씨름하기’ 게임에 들어가 삿바를 붙잡게 된다. 이것은 생각하면 엄청난 사건이요 선택받은자의 축복이면서도 다른편 생각하면 결코 행복스럽지만은 아니한 신학도의 멍애같은 운명의 짐이다.
현대철학이나 신학은 당분간 ‘하나님’같은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말하기를 중지하고, 실천적 문제들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느냐고 암묵적으로 약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의 제일차적 주제는 그 학문의 이름자체가 말하듯이 ‘하나님에 대한 학문’(Theos〮〮〮 -Logos)이다. 해방과 실천윤리학, 교회성장론, 기독교교육, 목회상담, 설교 및 예배학, 예전학등등이 우선적으로 논의될 때라도, 언제나 이미 거기엔 ‘하나님의 문제’가 전제되어 있거나 관여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머리로서나 마음으로서는 도저히 그 정체와 실체를 인식하고 완전히 파지할 수 없는 대상을 신학도는 인식하고, 고백하고, 신뢰하고, 증언해야 한다는데 신학함의 최대 위기와 난제가 있다. 이 불가능성을 어떻게 극복하고 돌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피조물이 아닌 절대자, 영원자, 창조주 하나님, 궁극적 실재이신 무한자를 자기 머리통 속에 혹은 마음 안에 다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좁쌀같은 지구위에 탄생하여 300만년 진화결과 제법 사물의 이치와 본질 직관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갈댓잎 같은 ‘호모사피엔스’가 ‘신비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 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이것은 첨부터 잘못된 관계설정이다.
아직 철이 덜든 제법 용감한 신학자나 목회자는 자기 머릿속에서 수립한 제법 위대하고 그럴싸한 ‘웅장하고 거룩한 신론체계’를 가지고, 자기는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거나 만족한다. 그런데 대부분 ‘우상’을 마음 속에 그리기 십상이다. 그런 사람들은 말로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자기가 지켜드린다고 신의 근위병임을 자처하면서 이단사냥에 바쁘고, 하나님의 본질을 자기가 규정하고 자기관리하에 두면서 즐긴다. 실제로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경외하는 두려움도 없으며, ‘하나님에 관하여’ 강의하고 설교하면서 밥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삼고 만다.
그러면, 애시당초 하나님 알기와 하나님 인식문제는 포기하고 말 것인가? 그런 태도는 신학을 인문학이나 사회학으로 변질시키고 만다. 신학도가 신학도 됨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짓이라 그럴 수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씨름을 하면서 신학을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하겠고, 용감하게 의심함을 통해서 우상의 덫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신학함에서 하나님을 나의 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 알았는데, 점점 인식의 대상이 내안에 들어와 있고, 나를 감싸고 있으며, 무한히 거듭 거듭 모든
‘하나님에 관한 내가 만든 이론과 이미지’를 깨트리면서 나를 감싸시는 ‘존재의 빛’과 ‘텅빔의 충만’이시라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 어거스틴이 고전적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내가 내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내 곁에 계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신비앞에 경외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 찬미하는 마음, 감탄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얍복강가의 씨름’을 계속해야한다. 브니엘의 체험을 하기까지, 환도뼈가 위골 될 때까지, 삼위일체 하나님 그분이 나를 편안하게 놓아줄 때까지 진지한 자세로 씨름하되, 교만이나 태만은 금물이다.
3. 성경의 대화음이 영적 귀에 들릴 때까지
신학도가 부딪히는 신학함에서의 두 번째 문제는 성경해석의 문제이다. 성경은 이스라엘 예언자와 사도적 전승의 총괄적 표현으로서, 모든 기독교 신앙의 규범이고, 내용이고, 그 영적 샘터이고, 우주와 역사와 인간의 비밀암호가 적혀있는 계시적 경전임에 틀림없다. 이 사실을 신학적 교의학의 명제로서나 근본주의적 보수신학의 ‘성경축자무오설’ 교리로서가 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실존적 고백으로 확인되기 전까지 복음전도자로서 일하려고 나설 수 없다.
진실로 깨닫고 보면, 성경은 위대하고도 위대한 책이다. 어떻게 이런 위대한 책이 그렇게 작은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고난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전승되었는가를 생각할수록 성경은 ‘영감의 책, 만인구원을 위한 경륜된 책’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그만큼 사람을 살리기도하고 죽이기도하는 놀라운 힘을 가진 책인지라, 그 성경을 잘못이해하거나 잘못 남용하면 개인과 인간 공동체를 무섭게 파괴시키는 사탄적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우선 신학도는 성경을 수없이 많이 읽어야한다.
중요한 성격구절이나 문단은 저절로 거의 암기 할수 있을 정도로 수십독, 수백독 하는 것이 방법론적으로 제일 중요한 일이다. 성경을 수없이 많은 회수만큼 통독을 통하여, 성경 전체에서 울려퍼지는 신비한 ‘영적 대화음’을 듣는 영의 귀가 열려야 한다. 성경전체에서 들려오는 ‘영적 대화음’의 주제가 무엇이냐고 너무나 쉽게 신학적 테마로 정립할려고 해서는 않된다. 그것은 너무나 장엄하고, 아름답고,맑고 신선함으로 가득찬 주제음이기 때문에 그냥 감상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전체 통전적 성경의 ‘영적 대화음’을 듣기 위해서 성경 66권 각권이 지닌 독특한 음색을 가능하면 자주 자주 들어야 하겠다. 성경 66권의 각 책은 비유하건데 악기가 다르고, 악보가 다르고, 연주법이 다른 작은 오케스트라라고 말 할 수 있다. 우리는 각권의 주악상(leit motiv)을 이해하기 위해 소위 ‘비평적 성경연구방법’을 도입한다. 그러나, 그러한 근대이후 비평적 성서연구방법은 어디까지나 성서의 주제음을 바르게 듣는데 이르기까지 준비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신학도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성경만 가지면 온 세상을 자기것으로 가진듯한 만족감과 충만한 포만감을 가져야 한다. 성경구절 한 마디가 위대한 사상가의 두꺼운 명저가 말하려는 진리보다 더 간결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성경이 위대하고도 위대한 경전이지만, 그 위대한 진리의 내용과 질은 자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은 위대한 악기나 오케스트라와 같아서 연주하고 지휘하고 감상 할 줄 아는 사람에게, 그만큼만 마음의 귀에 들리는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진지하게 질문하고, 성실하게 인생과 삶과 죄와 죽음의 신비를 묻고 고민하는 실존에게만 열리고 들리고 보이는 책이기 때문이다.
4. 세상을 흑백논리로 갈라 보지않고 꿰뚫어보기
신학함에 있어서 세계는 세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첫째, 창조세계로서 우주 대자연,
둘째 역사와 인간경험현실의 총체, 그리고
셋째는 예수를 십자처형 시킨 영악하고도 악한 힘들이 판치는 죄악적 세계현실이 그것이다.
신학도는 그 세가지 세계 또는 세상을 모두 생각해야 하지만, 여기에선 특히 둘째번 의미의 세계 곧 ‘역사와 인간경험현실의 총체’로서의 세계를 주목하기로 한다.
신학함의 자리는 신학도의 마음이나 상상적 관념세계도 아니고, 천사들이 모여있는 천계도 아니고, 지옥불이 불붙는 연옥도 아니다. 신학하는 구체적 ‘삶의 자리’는 빛과 어둠이 교차하고,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며, 빛의 자녀들과 어둠의 자식들이 공존하는 역사적 현실세계이다. 그러므로 신학도는 세상을 흑백논리로서 한편만을 보아서는 아니된다. 세상은 온갖 망할 놈들이 살고 있고 사탄이 완전 지배권을 행사하는 저주받은 땅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되고, 장미빛 찬란한 에덴동산 쯤으로 낙관해서도 않된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를 낙관하지도 않지만 비관하지도 않는다. 팽팽한 긴장과 힘겨룸의 한마당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학을 잘하려면, 세상을 가능하면 깊이 넓게 사실적으로 경험하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차피 복음이 들려져야하고, 그 안에서 복음이 재해석되고 받아드려지면서 변화시켜 가야할 현실세계가 ‘세상’이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는 ‘복음’과 ‘세상’을 어떤관계로 정립시키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목회관과 신학하는 근본자세가 결정된다고 본다.
리챠드니버가 말하는 고전적인 다섯가지 관계모델들은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다: 세상과 대결하고 맞서는 자세, 세상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자세,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별개로 독립된 두 왕국에서 살아가는 이원론적 자세, 세상적 성공과 이념에 홀딱 빠지고 영합하는 자세, 소금처럼 세상 속에 녹아들어서 맛을 내고 변화시키는 자세가 그것이다. 그 다섯가지 자세중에서 어느자세를 취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복음적 태도인가는 쉽게 단정 할 수 없는 것이다. 신학도가 삶을 살아가는 세상의 ‘상황’이 다섯가지 중에서 어느것을 택하도록 하는 것 곧 ‘복음과 세상과의 관계는 컨텍스츄알한 상관관계’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대결하고 맞서야 할 때, 함께 영합하고 덩달아 딩구는 꼴이란 꼴불견의 교회를 만든다. 세상 속에서 ‘종교적 소왕국’을 설립한 교만증에 취하여, 세상이 전혀 바르게 보이지 않고 안하무인적으로 동키호테식의 저돌적 자세를 취하면서 한국이 기독교 국가라도 다된듯이 배타적 독선을 부리는 자만함이란 차마 보기가 민망하다. 더욱이, 성장주의와 축복론의 달콤한 유혹에 휩쓸리 나머지 복음적 신앙을 오해하여 이 세상 속에서 교회란 ‘남보다 승리하는 비법’을 판매하는 영적판매소로 선전하는 일부 사이비 성직자도 있는게 현실이다. 올바른 신학도는 세상을 도피하지도 않고, 영합하지도 않고, 흑백론으로 갈라보지도 않고, 그 정체를 꿰뚫어 보고 갈릴리복음을 힘입어 정면돌파하려는 담력을 길러가야 한다.
‘세상’은 복음이 던져져야 할 선교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내야 할 연못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관점에서 불교의 ‘연꽃상징’을 음미하는 것이 좋다. 연꽃은 청초하게 피지만, 온갖 부유물질이 썪어 가라앉아있는 연못바닥 진흙뻘에 뿌리를 내리고서라야만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대승불교에 비해서 확실히 기독교는 시작할 때부터 영지주의와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영향을 너무나 강하게 받아서 ‘세상 부정적 견해’가 무의식중에 강하다. 부정되어야 할 세상은 ‘소유,탐욕, 온갖 혈기, 자기자랑, 명예욕, 분쟁과 다툼’이 지배하는 병든세상 현실인 것이지 ‘세상 그 자체’가 부정되어서는 아니된다.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꿰뚫어보기 위해서, 신학도는 직접 몸으로 ‘세상경험’을 하는것이 좋다. 동서종교사에서 ‘탁발’을 강조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신학도에게 있어서 세상 안에서의 모든 경험들은 후일 그가 목회자로 나설 때 귀중한 자산이 된다. 막노동판의 일자리 경험, 경제적 빈곤경험, 질병투쟁경험, 악의 유혹경험등이 모두 귀중한 경험이다. 그러나,직접 경험이 쉽지않을 때는 ‘배낭여행’과 ‘문학작품 다독’을 권하고 싶다. 그것들은 제2차적 간접경험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5. 교회는 내 영혼의 어머니처럼 사랑하며 섬길 것
신학도가 구체적으로 신학훈련받는 목적은 “교회를 교회답게 섬길 능력을 갖추기 위하여”라고 말 할 수 있다. 신학이란 궁극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라는 고전적 명제도 그런 의미이다. 그런데, 신학도가 신학함에 있어서 교회를 사랑하고 봉사하는 태도와 방법은 깊이 생각 할 점이 있다. 우선 최신 신학정보와 신학사조에 밝은 젊은 신학도는 ‘현실적 교회’를 통체로 비판하고 부정하는 비판자로서 자기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 적어도 신학도는 “현실교회는 다 썪었고 병들었다”등등 극단적인 단언적 말은 삼가야 한다. 그런 말은 교회 밖에서, 교회와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회비평가들이 할 말이다.신학도에게 있어서, 교회란 마치 자기를 낳고 길러주신 영혼의 어머니와 같아서 교회에 욕을하고 침을 뱉으면 그것은 자기 어머니 얼굴에 그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꾸로, 신학도는 ‘교회’란 오늘 눈앞에 보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왜곡된 교회모습에 안주하거나 영합해서도 아니된다. 흔히 현실교회론, 교회목회 현장론의 명분을 내세우면서 마땅이 극복되어야 할 교회모습을 긍정하거나 묵종하라고 다그치는 ‘교회현실론자’들이 많다. 병든 교권주의 모습, 교회 물량주의적 사고, 속물적 냄세가 진동하는 사람을 치켜 내세우는 타락한 예배행태, 진정한 성도의 교제를 방해하는 교회조직운영 형태, 에큐메니칼 정신을 상실한 나홀로 성공교회 경쟁, 이런 모습들은 극복되어야 한다. 오늘의 현실교회안에 극보되어야할 부정적인 요소들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되어야 할 점들을 스스로 점검하면서, 장차 내가 목회자가 되었을 때 보다 교회다운 교회의 목자가 되리라고 다짐하면서 준비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신학도는 신학수업의 3년-6년 기간동안에, 학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어느 특정교회에 메여 신학도 시절을 다 보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회학교 총무, 전도사, 청년부 간사등등의 명목으로 한 교회를 성실하게 봉사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신학도의 신학수업기간 동안 가급적 목회패러다임이 다양한 몇교회를 두루경험 해볼 것을 권하고 싶다. 잘 정착된 교회, 고투하는 개척교회, 성가대가 잘 조직운영되어 교회예배의식이 모범적인 교회, 뜨거운 성령은사를 강조하는 교회, 교파도 다양할 수 있으면 더 좋다. 각 교회의 주보작성 형태와 내용으로부터 제직회와 당회 교회학교 조직운영등을 눈여겨보는 것은 졸업후에는 신학도가 다시 체험해보기 힘든 귀중한 경험자료가 되는 것이다.
6. 신학수련은 결국 자기영혼을 그리스도형상으로서 영글게 하는 것
마지막으로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물음은 신학도 자신의 내적 영성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신학적 실존 그 자체’가 마지막으로 문제가 된다. 앞서 언급한 하나님, 세상, 성경, 교회등 중요항목들이 결국은 신학도의 ‘실존적 영혼의 필터’를 거치면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함이란, 신학적 실존이 생래적인 자아,혈육적인 자기로서는 점점 죽고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람, 성령 안에서 중생한 사람으로 변화해 가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세상 속에서 복음의 사역자로서 “썩어져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자!”라는 헌신다짐은 둘째단계 일이다. 아직 알곡으로 영글지도 않았는데 세상 속에 던져지면 거름밖에는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 영글지 않은체로 교회에 파송되면 하나님 백성을 괴롭히거나 종교로서 밥벌이하는 가장 불쌍한 직업종교인이 될 뿐이다. 신학도의 신학함에서 가장 어려운 최대의 난제는 신학도가 자기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성실한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일이다. 끊임없이 십자가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자기를 비우면서 성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곧 신학도의 영성수련인 것이다.
영성수련이란 ‘영성과목’ 수강이나 ‘영성훈련 채플강화’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작은 일부터 시작해서, 자기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이기심, 자기자랑, 명예욕, 물질적 탐심, 형제위에 군림하고 지배하면서 쾌감을 느끼려는 욕망, 게으른 태만심, 율법과 신학뒤에 숨으려는 하나님과의 승산없는 숨박꼭질을 청산하는 일이다.
같은 길을 걷자고 입학한 형제자매들의 희비애락에 무관심하는 무정한 이기심, 강의실 시간 지키기나 책임적으로 참여해야할 채플같은 일상사를 소홀히 생각하는 시건방진 똑똑한 신학도가 훌륭한 목회자로서 졸업후 큰 일꾼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좀 어리석고, 손해보기를 게의치 않으면서 뚜벅 뚜벅 끝까지 성실하게 일상적인 삶의 길을 걸어가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주목하시면서 기다리시고 찾으실 것이다.
김경재(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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