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페일리의 자연신학이란?
1)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년)는 잉글랜드 피터버러 출신의 성공회 신부요, 신학자요 철학자였다.
2) 페일리는 그의 아버지가 학장으로 있던 기글스윅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케임브리지 대학교 크라이스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1763년 시니어 랭글러로 졸업을 하고, 1776년과 1768년에는 그 학교에서 튜터가 되었다. 그는 윤리철학을 가르치며 새뮤얼 클러크와 조셉 버틀러 그리고 존 로크에 대해 강의를 했다. 그리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윤리와 정치철학에 대한 토대를 형성하게 된다.
3) 무엇보다 그는 신의 존재에 대한 목적론적 논쟁을 해설한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or Evidences of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the Deity, 1802년)으로 알려진 학자다. 시계공 논증으로 유명한 그 책이다. 즉 페일리 논증의 핵심은 생명체와 시계 사이의 유비라 할 수 있다.
단순한 시계공 논증이 아니다. 이 책은 이 논증을 위해 동물의 근육, 해부학, 생명의 본능, 곤충, 식물, 천문학, 신적 선함 등을 동원한 당시로서는 대단히 정교한 논증이라 할 수 있다. 19세기 초(1802) 소박한 논증을 넘어 생각보다 정교한 논증을 전개하였다는 것이 그의 탁월함을 보여준다.
4) 페일리는 이 《자연신학》에서 시계가 무엇인지 모르고 시계를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일단 시계를 한 번 보면 누구나 그 시계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능을 가진 그 누군가가 시계를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했다.
시계와 마찬가지로 신이 창조한 우주는 아주 복잡한 과학적 원리와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시계의 침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정교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우주는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지적인 존재가 창조한 것이고, 그 창조주는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로 설계 논증이다.
5) 생명의 대사 작용(Metabolism)이 일종의 정교한 암호 체계 아래 일어난다는 것은 속속 밝혀지고 있다. 다만 이것이 우발적이고 우연이냐 하는 것과 설계라고 보느냐 하는 믿음의 영역만 남은 상황이다. 온갖 생화학(식물생리, 발효, 영양, 유기, 식품 등)과 군 시절 인간이 고안한 암호 체계를 배웠던 필자가 보기에 생화학과 암호 체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수준은 비슷한 수준으로 보였다. 즉 단순해 보이면서도 단순하지 않으며 복잡해 보이면서도 단순한 카오스가 아닌 정교한 질서가 있다. 다만 생명 안에서는 그 대사작용이 누구의 통제도 없이 정교하면서도 일사분란하고 능수능란하게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군대의 암호 체계는 인간 기술자가 만들어 숙달된 병사들의 몫이란 점이 다르다.
6) 미국 휴스턴대의 유명한 화학 진화론자 오로(John Oro) 교수 아래 화학진화를 정통으로 배우고 연구하다, 유기화학을 전공하여 연세대서 가르치다 은퇴한 김정한 박사(연세대 명예교수)께서도 화학진화보다 창조신앙이 훨씬 더 논리적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미 유학 중 화학 진화론자에서 창조론자로 입장을 수정한 학자이기도 했다. 사실 화학 진화가 무너지면 모든 생물 진화는 화학 진화를 배경으로 하기에 설 자리가 없다. 김정한 박사는 열린 창조론자이면서도 당시 화학 진화를 본격적으로 배운 국내 유일한 학자였기에 8-90년대 자신의 입장을 담대하게 전개하였다. 페일리 논증에 대한 현대 과학자의 설계 믿음이라 할 수 있었다.
7) 하지만 설계 논증은 결국은 믿음의 영역이다. 논증은 논증일뿐 과학의 명료한 영역은 아니기에 설계 논증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세속과학자들의 한결같은 입장이다. 과학적 논리에 맞지 않으니 우연이라 끝까지 우길 것인가 아니면 설계임을 믿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집마다 지으신 자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라 말하는 성경의 말씀이 연상된다(히 3:4). 이것은 그저 믿음의 영역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일리가 비판받는 이유는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의 등장과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의 자연신학 비판의 영향이 크다 할 수 있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적 자연주의를 넘어, 진화의 원리로 사회를 설명하려는 도구화하면서 초월성을 상실해버렸으며, 초월성을 강조한 칼 바르트는 자연신학을 “자연에서 나와 인간에게 이른” 신학이라 매도하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자기 보존이자 자기 긍정”이라 하였다. 자연신학은 내재와 초월이라는 양쪽에서 모두 공격을 받은 셈이었다.
8) 사실 가톨릭 신학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신뢰하고 확신한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특별 계시 없이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자연신학과 연결된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신뢰>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이 입장은 "나는 이해하고, 믿는다"(intelligo et credo)는 신학의 출발점을 가진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의 철학을 수용한 로마 카톨릭 신학은 바로 이 자연신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은혜는 자연을 찢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라고 한 말이 이것을 잘 증거한다.
신앙을 실증적이고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한 사실들에 근거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창조과학운동”이나 “지적설계운동”도 이 같은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변증학에서는 이 같은 접근을 험증학(Evidentialism)이라 부르고 있다.
9) 19세기 초, 성공회 신학자 페일리가 전개한 자연신학도 당시로서는 탁월한 논증을 전개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지금의 눈으로 보면 소박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이 같은 상황 속, 20세기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다시 나타났다. 토머스 토렌스(1913-2007)와 알리스터 맥그라스(1956~)가 그들이다. 토렌스는 자연신학을 계시신학에 종속된 한 측면으로 보면서 자연신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자연신학의 범위를 이해하는 길을 터주고 있다. 즉 자연신학을 믿음에 근거한 기독교 전통 아래 삼위일체적이며 성육신적인 작업 아래 두려고 하였다. 믿음의 언어로 말하면 "복음을 전제한 자연신학이요 창조신학"이라 할 수 있겠다. 창조와 타락과 자연과 구속은 개별적인 요소를 넘어 일련의 기독교세계관적 구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과학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토렌스의 뒤를 잇는 분자생물물리화학을 전공한 천재 과학자요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자연신학 작업이 어떤 결론을 도출해 낼 것인지 궁금하다. 페일리와 토렌스를 넘어 맥그라스의 탐구는 현재진행형이기에 하는 말이다.
[출처] 윌리엄 페일리의 자연신학이란 무엇인가?|작성자 창조의 작은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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