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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는 창조론자 아닌 유신진화론자(1) -(3)

하나님아들 2024. 2. 12. 23:42

 

팀 켈러는 창조론자 아닌 유신진화론자(1)

허정윤 박사(알파와 오메가 창조론 연구소)

1. 들어가는 말

허정윤 박사

 

지난 5월 23일 작고한 팀 켈러(Timothy Keller)는 미국 뉴욕에서 리디머 교회를 개척한 목사로 국내에서도 그의 저서가 다수 번역 판매되면서 꽤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개혁적 복음주의 변증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칼빈주의 정통을 벗어난 신칼빈주의자(New Calvinist)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창세기 1장과 하나님의 아담 창조를 인정하지 않고, 유신진화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보수적 교회로부터 유신진화론자로 비판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2023. 3.17일 기독교학술원이 제41회 포럼에서 “팀 켈러의 유신진화론 비판적 성찰”이라는 주제로 토론했다. 이에 대해 창조론오픈포럼의 제44회 온라인포럼(2023.11.28.)에서 이윤석 박사가 “팀 켈러의 창조론”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면서 기독교학술원 포럼 참가자들의 주장을 반박했다(⌈기독일보⌋ 2023. 11. 20자 보도). 그가 발표한 글과 강의 동영상 등을 보면, 기독교학술원 포럼에서 팀 켈러의 유신진화론을 비판적으로 성찰했던 주요 참가자들의 사진을 게시하고, 그들의 글과 자료를 다수 인용하면서 그들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팀 켈러는 미국 유신진화론 그룹 ‘바이오로고스’ 홈페이지에 올린 그의 글 “창조, 진화, 그리고 그리스도인 평신도: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 2012”(이하 CECL로 표기한다)에서 창세기 1장의 사실성을 부정하면서 EBP(Evolutionary Biological Process, 진화생물학적 과정)까지는 유신진화론을 수용하고, 그 이상 세계관으로서의 GTE(Grand Theory of Evolution, 거대 진화이론)는 반대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기독교학술원 포럼 참가자들은 정통 기독교적 관점에서 켈러의 견해에 대해 유신진화론이라고 평가했으나, 이윤석은 창조론이라고 평가했다. 필자는 기독교학술원 제41회 포럼에 논평자로 참여하여 참가자들의 글들을 논평했었고, 창조론오픈포럼 제44회 온라인 포럼에도 참가하여 강의를 듣고 자료들을 읽어보았다. 필자는 그런 과정에서 팀 켈러의 관점이 ‘바이오로고스’ 유신진화론의 전부는 아니지만, 유신진화론을 상당 부분 수용하는 것은 사실임을 재확인했다.

이윤석은 이전에도 [복음과 도시]에 “팀 켈러에 대한 허수아비 공격을 우려한다”는 제목으로 기고한 바가 있다([기독일보]: 2023.04.12.자 보도). 이윤석의 두 개의 글을 비교해보면, 제목은 다르지만 주장하는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팀 켈러는 그가 지지하는 데릭 키드너(Derek Kidner)의 견해를 유신진화론과 오랜 지구 점진적 창조론의 혼합이라고 말하지만, 전통 창조론의 범주를 벗어나 유신진화론에 좀 더 가까운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견해는 오히려 진화적 창조론(Evlutionary Creationism) 범주(유신진화론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어쨌든 기독교인들이 창세기 1장을 부정하는 팀 켈러의 주장에 끌려가면, 기독교 신앙의 토대인 창조주 하나님의 정체성과 성경의 권위를 훼손할 위험성이 매우 크므로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면서 어느 쪽 주장에 타당성이 더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켈러에 대한 지지자들과 비판자들

이윤석은 켈러가 “창조에 대해 남긴 글” 2개를 소개하면서 미국의 유신진화론자 홈페이지 ‘바이오로고스’에 실린 에세이 CECL과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한다』의 6장 “‘과학이 기독교 신앙이 틀렸음을 증명해 낸 거 아닌가’ 한 챕터 밖에 없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켈러의 창조론?”을 물으면서 “이 정도의 글밖에 없는 이에 대해 마치 그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남긴 것처럼 그의 창조에 대한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타당한가?”라고 반문한다. 이 반문이 “팀 켈러의 창조론”을 논술하는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또는 그가 소개하는 켈러를 비판하는 학자들에게 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것이 어느 쪽이든 팀 켈러가 남긴 이 2개의 글은 창조와 진화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분명히 잘 드러내고 있다.

1) 비판자 김병훈

(1) 이윤석은 먼저 기독교학술원 포럼에서 켈러의 비판자로 나섰던 김병훈의 논문 “팀 켈러와 유신진화론”(『신학정론』 게재, 387-426 * 저자는 이 논문이 기독교학술원 포럼에서 발표했던 “팀 켈러의 유신 진화론과 창세기 해석의 문제”를 확대한 것이라고 한다)을 끌어와서 “자신의 잣대로 마음대로 단정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이라는 말로 평가한다. 이어서 김병훈에게 “판단 자료의 제한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음”이라고 말하면서 그 근거로 김병훈이 “이 두 개의 글 이외에 켈러가 신앙과 과학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줄만한 마땅한 글을 없는 듯하다”고 말한 것처럼 따 놓는다. 그러나 김병훈은 그의 논문에서 “이 두 개의 글은 팀 켈러의 유신진화론 성향이 어느 정도인지를 평가하는 데에 필요한 충분한 내용을 제공한다”(『신학정론』, 391)고 말한다. 이윤석은 김병훈의 글을 변조해서 인용해놓고 왜곡 비판하고 있다. 무엇을 위하여 이런 황당한 짓을?

(2) 이어서 이윤석은 대부분 그런 사실을 모르는 청강자들에게 “과연 정당한 평가가 가능한가?”라고 질문하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타인의 글을 변조해서 인용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비난받는 행위(허위 사실 유포)이지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절대 금기시하며 있을 수 없는 행위이다. 이윤석은 왜 그런 행위를 감행해야 했을까? 그는 앞에서 “이런 정도의 글 밖에 없는 이에 대해 ... 그의 창조에 대한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타당한가?”라고 질문했다. 이 2개의 질문들에서 추정해본다면, 그에게 팀 켈러는 국내에서 유신진화론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막아야 할 절박한 사정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미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로 공인한 상황이다. 과연 이윤석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까?

2) 비판자 리타 샌더스(Lita Sanders)

기독교학술원 제41회 영성포럼 자료의 하나인 “켈러의 CECL에 답함”을 쓴 리타 샌더스는 창조과학적 관점의 여성 창조론자이며,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는 창조론과 유신진화론을 비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윤석은 샌더스가 팀 켈러를 비판하는 관점 3가지를 소개한다.

(1) 창세기 1장을 비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역사성을 부정한다.

(2) 창조 주간 하루의 길이가 24시간이 아닌 더 긴 시간을 의미한다.

(3) 진화라는 생물학적 과정을 수용하고 그 과정에서 아담과 하와가 나타난 것으로 본다.

켈러를 비판적으로 평가한 샌더스는 그의 관점에서 올바르게 지적했다. 이윤석은 켈러가 유신진화론자는 아니라는 관점에서 샌더스의 글을 비판하고, 기독교학술원이 리타 샌더스의 이름을 ‘Lisa Cosner’로 잘못 표기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는 Lita의 t를 s로 잘못 읽었던 원고 번역자의 실수일 뿐이며, 리타가 두 개의 성을 쓰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비난한 이윤석의 실수가 더 커 보인다. 말하자면 기독교학술원을 폄훼하려다가 자신의 얕은 지식을 노출하는 더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기독교학술원 포럼에서 “리타 코스너의 팀 켈러 유신진화론 비판”을 발표한 김윤태는 이런 사실에 대해 각주를 달아 놓고 있다.(기독교학술원 제41회 포럼 자료집 게재). “리타 코스너의 팀 켈러 유신진화론 비판” 각주 80) 코스너는 ... 또 다른 이름 센더스(Sanders)를 사용하기도 하나, 본명은 코스너이다.

3) 비판자 테드 반 라알트(Ted Van Raalte)

이윤석은 라알트가 켈러를 비판하는 관점 두 가지를 소개하고는 그냥 넘어 간다.

(1) 켈러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 진화를 수용하도록 촉구한다.

(2) 켈러는 아담과 하와에 선행하는 생물학적 조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라알트는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인류였다고 보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라알트의 지적에도 틀린 것이 없다.

4) 비판자 매트 레커(Matt Recker)

[이윤석의 레커에 대한 비판]

(1) 이윤석은 기독교학술원에서 다루지 아니한 미국 뉴욕 헤리티지 침례교회 매트 레커 목사를 비판자로 등장시키고, 교회 홈페이지 주소를 올려 놓았다. 여기에서 레커 목사는 “팀 켈러 창조론의 유신진화론적 관점”이라는 글을 올려 놓고, 그가 켈러의 진화론적 입장을 1998년 [뉴욕 타임즈]의 “Making New Christians”라는 기사를 읽고 처음 접했다고 말한다.

(2) 레커는 켈러가 24시간 하루의 6일 동안에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믿지 않으며, 진화는 리디머(교회)에서 용인되지도 배제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3) 이윤석은 NYT의 기사 제목은 찾을 수 있으나 위 문장은 찾을 수 없다고 말하고 이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하지 않는다. NYT는 구독료를 내면 과거 기사를 볼 수 있다고 광고한다.

(4) 레커는 “팀 켈러 창조론의 유신진화론적 관점”을 part 1-3으로 나누어 팀 켈러의 유신진화론적 관점을 날카롭게 분석 비판하고 있다(FBFI National Meeting Workshop, June 14-16, 2016 강의 자료). 레커 목사는 이어서 CECL을 인용하면서 켈러에 대한 비판을 각주에 요약해 놓았다. “Keller는 Biologos 재단 웹사이트에 글을 쓰면서 유신론적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뻔뻔하게 가르칩니다 ... BioLogos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창조하기 위해 진화 과정을 사용하셨다고 믿습니다 …이하 생략”

이윤석이 위 인용문을 보았다면 이어진 이 글도 분명 보았을 텐데 왜 못 본 체하는가? 레커의 켈러에 대한 비판을 이윤석은 소개하지 않지만, 예를 몇 개 더 들어 본다.

[레커의 켈러에 대한 비판]

(1) "자연의 책(그에게 진화를 가르치는 자연과학)을 신의 책"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2)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믿는다. 창세기 1장을 연대순 서술로 해석하는 것을 금지하는 메레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을 따른다.

(3) 켈러에게는 신학적인 “적자생존”을 위해 유신론적 진화론이 필요하다.

(4) 진화과학을 의학 및 기술 발전을 가져오는 객관적인 과학과 동일시한다. 그에게 진화론은 과학과 동일하다.

(5) 로마 카톨릭 제도를 참된 교회로 지지하며,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 권위를 지지한다.

위와 같이 네 명의 비판자를 끌어온 이윤석은 이제까지 비판자들의 글을 변조하거나 감추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의 목적은 아마도 창조론오픈포럼 참가자(또는 청자)들에게 팀 켈러가 유신진화론자로 비판받을 거리가 없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계속)

 

 

 

 

 

 

 

 

 

 

 

 

팀 켈러는 창조론자 아닌 유신진화론자(2)

허정윤 박사(알파와 오메가 창조론 연구소)

허정윤 박사

 

3. CECL 서론

CECL(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은 바이오로고스 재단 홈페이지(https://biologos.org/articles/creation-evolution-and-christian-laypeople.)에 올려져 있다. 켈러는 프란시스 콜린스가 설립한 ‘바이오로고스 재단’ 행사에 참여하여 호스트를 맡아 대화하고 예배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때까지 복음주의자 목사로 알려진 켈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체 행사에 왜 참여했을까? 켈러는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바이오로고스’에 우호적인 CECL을 발표했다. 이윤석이 켈러의 CECL을 논의하는 관점을 살펴보면, 그들의 의도가 모두 나타날 것이다.

1) 무엇이 문제인가?

이윤석은 그의 켈러의 문제적 주장을 다음과 같이 대변한다.

(1)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님

켈러는 과학과 신앙이 양립할 수 없다는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반과학적 종교’와 ‘반종교적 과학’ 중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다. 켈러는 정통 신앙과 진화생물학이 양립 불가하다는 것은 극도로 단순화된 논리이고, 실제로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관계가 가능하다고 했다.

켈러와 이윤석은 기독교인이 켈러의 주장에 동의하려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과학으로 확증된 사실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너무 경시하고 있다.

(2) 이윤석은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을 인간이 제어하지 못함”이라는 항목에서 켈러가 자기 주장을 대변하기 위해 인용한 피터 반 인와겐(Peter van Inwagen)의 글을 “초자연적인 믿음의 보편성에 대한 글”이라고 소개한다.

(인와겐 김병훈 역)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초자연적인 믿음이 사람에게 보편적인 것이 되기를 바라신다고 가정해 보자. 또 어떤 특성들이 사람에게 유용할 지를 -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과 같이 진화적 관점에서 유용할 지를 - 아신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이 특성들로 인하여 초자연적 믿음이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사람에게 보편적인 것이 된다는 결론을 갖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아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들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의 원인이 되게 하지 않으실 이유가 있겠는가? 마치 자동차의 설계자가 승객을 따뜻하게 하기 위하여 엔진의 남은 열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김병훈의 인와겐 인용문 비판에 대한 이윤석의 비판]

이윤석은 “인와겐 인용에 대한 김병훈의 비판” 항목에서 “켈러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정통 신앙 안에서 진화생물학을 수용할 수 있는 논리적 설명을 위하여 인와겐(Peter van Inwagen)의 다음 말을 끌어온다”고 한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하나님이 진화 과정으로 생명체들과 인간 생명을 창조해 내실 수 있기 때문에 정통 창조신앙과 진화 생물학이 양립 가능하다는 켈러의 신학적 주장 또는 허용은 타당성을 잃는다.”

이윤석은 위 글을 인와겐의 글처럼 소개하고 있으나, 사실은 김병훈의 글 (“팀 켈러의 유신진화론”[신학정론] 게재)이다. 여기에서 이윤석은 누구의 글인지조차 헷갈리고 있으면서 “켈러가 의도하지 않은 것을 기정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한 후 켈러가 주장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 임의로 결론을 내리며 비판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윤석이 켈러가 무엇을 의도하고, 주장하지 않은 내용이 무엇인지, 또 누구를 향한 비판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켈러를 옹호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가 쓴 글 제목처럼 허수아비를 공격하는 듯한 말만 내지르고 있다.

(3) 필자가 관련 자료를 전체적으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김병훈의 비판 글 앞에는 다음의 말이 연결되어 있다. 그 글을 먼저 읽어야 올바르게 정확한 문맥의 이해가 가능하다.

“인와겐의 진술은 위에서 보듯이 가정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켈리의 주장에 도움을 주는지 의문스럽다. 인와겐의 결론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진화적 관점에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특성들이 자연 안에서 정말로 존재하여야 하며, 또한 진화론적 특성이 사람으로 하여금 초자연적 믿음으로 나가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요건이 모두 가정일 뿐이다. 이러한 가정은 철학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 뿐이다”.

(4) 김병훈은 켈러가 자기 주장을 대변하기 위해 끌어 온 인와겐의 글을 적절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윤석의 김병훈에 대한 비판은 글의 저자조차 혼동하면서 문장을 거두절미하여 인용함으로써 글의 문맥 파악을 어렵게 한다. 이윤석이 위에서 한 비판은 오히려 자신을 향한 비판이 아닐까 한다.

4. CECL 본론: 3가지 난제와 답변

이윤석은 켈러가 제시한 “진화가 정통 개신교인들에게 제기하는 4가지 난제”를 소개하고 켈러가 자기의 글을 학술적 논문의 수준이 아니라, 대중적 수준의 목회적 답변과 가이드라는 점을 밝힌 점을 소개한다. 켈러는 그렇게 해서 신학적 반론을 피해보려고 의도했겠지만, 목회자의 글은 어떤 것이든 일반 신자들에게 학자들의 논문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런 핑계를 댈 일이 아니다. 이윤석이 무작정 켈러를 유신진화론자가 아니라고 왜곡하는 것도 무책임해 보인다.

켈러는 4가지 문제(① 성경의 권위 ② 생물학과 철학의 차이를 혼동 ③ 아담과 하외의 역사성 ④ 폭력과 악의 문제)를 제시했다가 곧바로 3가지 난제로 줄여서(앞의 ③과 ④를 합쳐서) 질문과 요약된 답변과 설명으로 넘어간다. 이윤석은 이를 본론으로 본다.

난제 1) 성경의 권위 문제: 진화는 창세기의 문자적 읽기와 조화될 수 있는가?

[질문] 하나님이 진화를 이용하여 창조하셨다면, 우리는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데, 또 우리가 그럴 수 없다면, 성경의 다른 부분은 왜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답변/이윤석 역] “성경 저자들의 권위를 존중하는 방식은 성경을 성경이 취해지기 원하는 식으로 취하는 것이다. 때로는 성경은 문자적으로 취해지기 원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성경을 경청해야 하며, 우리의 생각과 의제를 성경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

[켈러의 관점] 이윤석은 켈러의 답변을 번역(또는 잘못 번역된 것을 인용)하면서 원문에서 저자들을 가리키는 they 또는 them을 ‘성경’으로 바꿔 놓아서 켈러의 관점을 흐리고 있다. 켈러는 ‘성경’이 아니라, 저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취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윤석은 “켈러의 관점”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펼쳐 놓는다.

(1) “켈러는 창세기 1장이 실제로 있었던 정확한 사실을 기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도하여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보여줌”. 켈러는 말을 그렇게 비틀지 않고, 분명하게 ‘문자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2) “켈러는 출애굽기 14-15장이나 사사기 4-5장에 나오는 장면처럼 창세기 1장을 역사성이 있는 시적 표현 같은 성격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라고 하는데, 켈러는 창세기 1장을 “역사성이 있는” 시적 표현으로 말한 적이 없다. 이윤석이 멋대로 하는 말이다. 앞의 (1)의 자신의 말과도 배치된다.

(3) 창세기 1장 자체는 세상의 창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 그때 사용된 기간에 대해서는 24시간 6일을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가르치거나 또는 진화를 가르치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함”이라고 주장하다. 여기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이라는 말도 비틀어놓은 말이다. 창조 6일의 시간적 길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말은 이윤석이 켈러가 창세기 1장을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는 사실을 뒤집어 반대로 보면서, 비틀어 놓은 말이다. 켈러가 창세기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창조도 아니고 진화도 아니라면, 이윤석은 켈러의 견해가 다른 무엇이라고 보는 건가?

[이윤석의 김병훈 비판]

켈러를 비판하는 김병훈을 이윤석은 다시 끌어와서 비판하고 있으나, 이곳에서도 그의 비판적 주장은 그가 옹호하려는 켈러의 의도와는 동떨어져 있다.

(1) 켈러가 “생물학적 과정인 진화를 인정하는 범위에서 유신진화론을 지지”한다는 김병훈의 지적은 올바르다. 그리고 켈러가 “창세기 1장을 비문자적으로 읽어야 하며 이것은 역사적 사실로 읽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는 지적도 틀리지 않는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석은 “우리는 비문자적으로 읽으면서도 역사성 있는 기록으로 읽을 수 있음”을 주장하고, () 안에서 “비문자적으로 읽기 때문에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창조과학회의 전형적인 입장”이라고 강변한다. 여기서 켈러는 이미 유신진화론을 믿기 때문에 창세기 1장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켈러의 주장은 신자들이 그와 같은 믿음을 갖기 위해 창세기 1장을 비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 또한 김병훈이 “생물학적 과정인 진화를 인정하는 범위에서 유신진화론을 지지”한다면서 켈러를 “비판하는 근거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주장한다. 켈러가 CECL을 쓴 목적 자체가 바로 기독교인들에게 생물학적 진화 과정(EBP: Evolutionary Biological Process)을 수용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에게 가설 수준인 EBP를 현대 과학으로 수용하라고 촉구하는 켈러에게 “유신진화론 지지자라는 근거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4) 켈러의 “난제 1”은 기독교인이 진화를 믿게 되면 발생하는 창세기 1장의 문제를 답변하는 것이다. 켈러는 기독교인들에게 성경 저자들의 권위(the authority of the writers)를 존중하여 “저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장르에 따라 읽으면, 창세기 1장에 대해서는 비문자적으로 읽으면서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모른다면 이윤석이 주장화는 켈러의 창조론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이것들과 관련하여 켈러의 관점을 제대로 논의하려면, 저자인 켈러가 원하는 방식으로 CECL이나 제대로 읽어 본 후에 하기를 권고한다. (계속)

 

 

 

 

 

 

 

 

 

 

생물학과 철학의 차이를 혼동하는 문제-팀 켈러는 창조론자 아닌 유신진화론자(3·끝)

팀 켈러는 창조론자 아닌 유신진화론자(3·끝)

허정윤 박사(알파와 오메가 창조론 연구소)

난제 2) 생물학과 철학의 차이를 혼동하는 문제

허정윤 박사

 

[질문] 만약 생물학적 진화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단지 우리의 유전자에 의해 주도되는 동물들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이 자연선택으로 설명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답변] 아니다. 생물학적 과정으로서의 진화에 대한 믿음은 세계관으로서의 진화에 대한 믿음과 같지 않다.

[켈러의 관점]

(1) 켈러는 먼저 진화 생물학적 과정(EBP)과 세계관으로 믿는 진화의 거대 이론(Grand Theory of Evolution)의 개념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2) 이윤석은 켈러의 답변에 대해 “진화를 믿으며 진화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이라고 주장하고, “오히려 기독교인이라면 혹시 EBP에 대해서는 찬성하더라도 GTE에 대해서는 반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임”이라는 주장을 내놓는다. 이윤석은 켈러가 CECL은 물론, ‘난제 2의 질문과 답변’을 왜 썼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다시 읽어보기를 권고한다!

(3) 이윤석은 “기원의 설명으로 EBP에 대해 찬성하는 기독교 목회자들, 신학자들, 과학자들이 그와 동시에 GTE에 반대하는 데 더 많은 강조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켈러의 말을 끌어다 놓는다. 만약 이윤석의 위의 주장이 맞다면, 켈러는 자기가 찬성하거나 믿지도 않으면서 EBP를 찬성하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만 GTE에 반대하는 데 더 많은 강조를 하도록 요청한단 말인가? 이윤석의 주장은 한결 같이 저자인 켈러의 의도를 벗어나 임의로 주장하고 멋대로 결론을 내린다. 이윤석은 켈러의 CECL을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왜곡 해석하면서 켈러와 그의 글을 읽는 독자를 얼빠진 바보로 만들고 있거나 조롱하고 있는 것 같다. 이윤석이 인와겐의 글을 인용 비판한 김병훈을 비판하면서 사용했던 말이 자신에게로 돌아감을 알아야 한다.

[이윤석의 김병훈 비판]

이윤석은 김병훈이 3가지 문제를 제시하면서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로 단정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여기서 김병훈의 켈러에 대한 3가지 문제 비판은 틀리지 않았다.

(1) 김병훈은 켈러가 ‘진화를 GTE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단지 EBP로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숱하며, 세상에서 가장 큰 가톨릭교회도 그런 생각을 지지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판단에 힘을 더한다’고 말하는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로 단정함. 유신진화론은 EBP 없이 성립하지 않는다. 나아가 ‘자연선택’은 무신진화론에서도 빠질 수 없는 기초이론이다.

(2) 김병훈은 켈러의 위 주장을 어떠한 검토도 없이 EBP를 검증된 과학적 사실이라고 믿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고 단정함

(3) 켈러는 진화를 자연선택이나 유전자 변이를 통하여 생물이 변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정함.

[이윤석이 간과한 것들]

(1) 여기에서 이윤석은 켈러가 그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중요하게 인용한 데이비드 에킨슨(David Atkinson)의 말(The Message of Genesis I-II(IVP, 1990. p.31)을 빼놓았다. “만일 ‘진화’가 사물의 존재방식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지위로 올라간다면 성경적인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할 것이다. 하지만 ‘진화가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가설 수준에 머문다면, 창조주를 믿는 크리스천의 생각과 하나님이 창조 과정을 시작하신 방식에 대한 과학적 탐사(생물학적인 차원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여기에서 두 사람의 견해에 차이점을 발견해야 한다. 켈러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세계관 수준으로 믿지만, 아킨슨은 그런 주장을 ‘가설’이며 ‘과학적 탐사’ 수준으로 보고 있다.

(2) CECL 외에도 켈러가 자신이 진화론을 수용하는 범위에 대해 밝힌 말이 있다. “분명하게 말해 두자면, 하나님이 일정 부분 자연선택의 과정을 이끄셨다고 생각하지만, 진화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론이라는 개념은 단호하게 거부한다.”(『하나님을 말하다』, p.161). 켈러는 이렇게 자신이 주장하는 진화론의 EBP(자연선택의 과정)과 GTE(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론)를 구별하여 그의 수용 범위를 말했다. 결국 100%는 아닐지라도 60% 이상 유신진화론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것이 켈러가 바이오로고스와 관점이 다르다고 하는 차이다.

난제 3) 아담과 하와 / 죄와 고통

[질문] “만약 생물학적 진화가 참이고 역사적 아담과 하와의 존재가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죄와 고통의 기원을 알 수 있는가?”

[답변] “진화에 대한 믿음은 역사적 타락 및 문자적 아담과 하와에 대한 믿음과 양립 가능하다. 이 주제에 대하여는 답변이 이루어지지 않은 질문들이 많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이 진화를 사용했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관점들에 열려 있어야 한다.”

켈러의 답변에서 주목할 점은 “진화에 대한 믿음은 역사적 타락 및 문자적 아담과 하와에 대한 믿음과 양립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 말 또한 켈러가 진화를 믿는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진화를 믿지 않는다면, 애써 주장할 필요가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성경의 신뢰 가능성” 항목에서 켈러는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 이유를 “저지가 그렇게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켈러의 관점]

(1) 이윤석은 “창세기 2-3장과 로마서 5장의 기록이 역사적 인물인 아담에 대한 역사적 기록임을 진술하며, 정통적인 언약신학의 구조와 교리를 그대로 충실하게 따라 설명함.” 그리고 바로 이어서 “바로 이 부분에 아담과 하와에 대한 켈러의 신학적 입장이 잘 담겨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켈러가 저자의 의도를 따른다는 핑계로 창세기 1장을 비문자적으로 읽고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켈러의 신학적 입장을 “정통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윤석의 신학적 입장은 과연 무엇인가? 정통적 개신교의 언약 신학은 창세기 1장의 기사에 대해 문자적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로 믿는다는 공통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닌가?

(2) 이윤석은 켈러의 관점에서 “아담과 하와가 EBP의 결과물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던지고, 켈러가 제시한 데릭 키드너(Derek Kidner) 모델을 설명한다. 키드너 모델은 켈러가 기독교 신앙과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EBP의 핵심 내용을 담고 있으며, 켈러가 주장하는 아담과 하와의 역사적 존재 과정을 설명하는 모델이다. 이윤석은 그것을 “성경에 나오는 아담보다 수준이 훨씬 떨어지는 인간 종(원문은 homo faber)이 당시에 이미 존재했고, 그들 중에 한 아담이 진화를 통해 나타났으며, 하와는 특별하게 창조하여 이 한 쌍을 하나님의 대리 통치인으로 세운 후에 그 후손들이 번성하게 되었다고 제안함”이라고 소개한다. 켈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믿기를 권유하는 모델이고, 켈러의 관점에서 현생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는 모델이다.

(3)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켈러의 EBP는 하나님이 아담을 직접 만드신 것이 아니라,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공통 조상으로부터 ‘도구 사용자’로 진화한 무리 중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EBP는 키드너 모델을 뒷받침하는 이론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창세기 1장의 기사를 믿지 말고, 키드너 모델을 믿으라고 권고하는 켈러를 유신진화론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4) 켈러는 알렉산더 데니스(Alexander DenDenis)에게서 다른 모형들을 빌려온다. 이윤석은 켈러가 키드너 모델을 유신진화론과 (오랜 지구) 점진적 창조론을 혼합한 “하이브리드 유형의 한 가지”로 볼 수 있다고 말했음을 제시한다. 이윤석은 이 말에 근거하여 켈러를 창조론자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러나 켈러의 말은 유신진화론자라는 비판을 피하려는 말장난일 뿐, 키드너 모델은 사실상 유신진화론에 더 가깝다.

(5) EBP를 믿는 켈러는 ‘하나님의 형상’이 진화된 아담과 창조된 하와에게 부여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존재했던 방계 사람들(다른 도구 사용자들)에게도 부여되었고, 아담의 타락의 원죄는 혈통적으로 상속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켈러는 하나님이 선택한 인류의 언약적 대표자 아담의 대표성 안에서 아담의 원죄는 아담의 자손들은 물론 당시에 존재했던 방계 사랃들과 그들의 후손들도 모두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켈러는 성경에서 그와 같은 사례로서 아간이 죄를 지었을 때 그 일족이 같이 벌을 받은 것(여호수아 7장)을 말한다. 이윤석은 켈러의 관점에서 이토록 중요한 설명을 논의하지 않고 넘어간다(의도적인가?).

[이윤석의 난제 3에 대한 비판]

(1) 이윤석은 “키드너의 모형은 켈러의 표현처럼 창의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생경한 생각일 수 있음”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글을 읽거나, 강의를 듣거나, 동영상을 보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신자들에게 유신진화론을 믿으라고 권고하는 팀 켈러 목사를 유신진화론자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이윤석 목사의 모습이 더욱 낯설고 생경하다.

(2) 이윤석은 난제 3에 대한 켈러의 “논의의 답변은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라고 평가했으나, CECL의 본문을 잘 읽어보면, 켈러의 답변은 충분히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다. 사람마다 이해력의 차이는 있겠지만.

(3) 이윤석은 “키드너 모형, 유신진화론, 점진적 창조론→ 켈러는 문자적 아담과 하와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도, EBP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믿는 몇 가지 방식을 보여주었다고도 하지만 잘 정리되지 않고 끼워 맟춘 느낌(성공적이지 않음)”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켈러의 CECL을 읽고, 그가 유신진화론자임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윤석은 왜 같은 켈러의 CECL을 읽고 “잘 정리되지 않고 끼워 맟춘 느낌(성공적이지 않음)”이라는 말로 그치고 마는가? 켈러가 유신진화론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반론했다는 건가? 이윤석의 “팀 켈러의 창조론”도 그런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이 왜 그런 창조론을 믿어야 하는가? 켈러가 믿는 키드너 모델은 아담을 진화되었다고 보면서 창세기 1장을 문자대로 읽지 않는다. 알렉산더의 다양한 모델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유신진화론과 오랜 지구 점진적 창조론의 혼합이나, 유신진화론에 더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5. 나가는 말

(1) 이윤석은 CECL의 결론 부분에서 두 개의 구절을 인용하여 그의 글에 결론을 맺는다.

첫째 구절은 “성경과 과학을 연관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원문: 그리스도인)은 반과학적 종교인이나 반종교적 과학자가 아니라 ‘더 큰 텐트’(bigger tent)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함”.

이 글의 각주를 보면 알렉산더 데니스의 것임에도 이윤석은 밝히지 않았다. 그냥 읽으면, 켈러가 일반 사랍들에게 주장하는 것처럼 이해될 것이다. “사람들”이라는 말도 원문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이윤석이 임의대로 바꾼 것이다. 무책임한 저자의 행동이다.

둘째 구절은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원문: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제안함”에 덧붙여서 인용하는 “ ... 그는(원문: 나) 그(원문: 나)의 관점이 ‘탐색적인 제안으로 ... 단지 잠정적이며, 개인적인 관점이다. 그것은 수정과 더 나은 종합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켈러가 키드너의 말을 인용한 글에서 “나”를 “그”로 바꿔 놓았다. 켈러는 맨 끝에 자신의 말 “그것이 이 분야에서 일하는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이다.”라는 한 마디를 얹어 놓고 끌을 맺는다.

이 글 전문에서 이윤석은 켈러의 말과 비판자들, 또는 다른 저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잣대로 마음대로 단정하고 비판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이라는 자신의 말을 넘어 잘라내고 바꿔치기까지 하는 성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2) 켈러의 글을 보면, 먼저 자기의 의견을 개진한 다음에 자기와 같은 견해를 가진 저자들에게서 글을 인용하여 자기의 주장을 대변하거나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윤석은 켈러의 글 쓰는 방식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문맥을 오독하여 EBP를 믿으라고 권유하는 켈러의 입장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것 같다.

(3) 켈러의 본거지 미국에서 최근에 나오는 신학자 또는 목회자들의 자료들을 보면, 이제는 켈러가 유신진화론자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도 않을 만큼 결론이 내려진 상태인 것 같다. 켈러의 유신진화론자적 입장은 바이오로고스 홈페이지 “scholar essays”란에 게재되어있는 CECL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남은 쟁점은 EBP 수용을 권고하는 켈러를 지지하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뒤늦게 한국에서 켈러를 창조론자로 보는 견해가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그의 유신진화론적 견해가 국내에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쨌든 창세기 1장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 켈러의 유신진화론을 전통적 창조론의 범주에 넣고 수용하면, 보수적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국내 신자들과 교회에 상당한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어떤 신앙을 가지든지 자유이지만, 기독교인들이 켈러의 말에 따라 하나님의 창조를 기록한 창세기 1장을 버리고, 확증되지도 아니한 EBP(진화적 생물학 과정)를 믿는다는 것은 풍문을 믿고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과 같다고 본다. 그런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자는 것이 이 글을 쓴 필자의 우려 섞인 당부이다.

[부록] 이윤석의 첨부한 “켈러의 창조에 대한 관점을 찾아서”의 웹 사이트에 대한 내용 평가

1. 개혁의 딸 블로그

① “팀 켈러와 바이오로고스: DR. TIM KELLER AND BIOLOGOS”(2012) 기사: 켈러 박사는 바이오로고스의 지도적 인물 목록에서 삭제되었지만, 바이오로고스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목회자의 일”이라고 믿는다. 그는 BioLogos와 그 진화론적 견해에 대한 그의 지지가 꽤 확고한 것 같다는 내용

② “켈러 박사는 점진적 창조론자인가?”(2012) 기사: ‘켈러가 자기를 오랜 지구 점짐적 창조론자(old earth progressive creationist)라고 말해서 놀랐다. 만약 그렇다면, 휴 로스의 RTB가 활동하기에 더 낫지 않느냐고 물었다.

2. vimeo.com/ 켈러와 Eric Metaxas의 인터뷰(2012) 동영상(앞의 개딸 블로그 기사의 원천): 켈러는 “아담과 하와의 실재를 믿는 오랜 지구 점진적 창조론자”라고 했다. 필자 주 : 켈러는 CECL에서 아담을 진화된 무리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이 선택하여 하와와 짝을 맺고, 하나님의 형상을 받았다고 했다. 아담의 진화를 주장하는 건 유신진화론과 거의 같지 아니한가?

3. youtube.com/켈러, 무어 던컨: 창조에 대한 타협 불가한 믿음: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 연맹) 의 토론 동영상(2017)

(던컨) 정통 창조론의 필수요소: 주장 ⓵ 무로부터의 창조 ② 창조의 선함 ③아담과 하와의 특별 창조 주장

(켈러의 응답) “지금으로서는, 아담과 이브가 있었고, 모든 인간이 아담과 이브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들은 특별한 창조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 친구들에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내 입장이다.>” 이윤석의 이해(=번역) 인용 “그리고 혹 내가 내 과학자 친구들에게 할 답변이 없을지라도 그게 내가 서 있는 곳이다.” 켈러의 말은 곳에 따라 조금씩 바뀐다.

4. 휴 로스의 RTB(Reasons to Believe) / reasons.org/ 휴 로스가 앞의 TGB의 동영상을 보고 쓴 글(2017): “아담과 하와에 대한 켈러와 던컨의 입장에 대해 감사하며”, 앞 3항의 TGC 동영상 대화에서 보듯이, 던컨의 3원칙 주장에 켈러는 대답을 얼버무리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