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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설교현장과 위기 요소들

하나님아들 2023. 11. 12. 23:05

한국의 설교현장과 위기 요소들           

 

1901년 평양에 새워진 신학교가 1907년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함으로 시작된 이 땅의 설교 사역은 많은 변화와 발전을 지켜보며 그 흐름을 같이 하여 왔다. 1910년 한일 합방이라는 민족 초유의 탄압 속에서도 순교로써 말씀선포의 억압에 대하여 분연히 맞섰으며, 이후 6.25와 함께 민족의 아픔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하였다. 60년대의 민주주의의 기틀을 놓을 때도 70년대 경제성장과 독제의 그늘 속에서도 설교는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80년대 접어들어서는 민족의 고난에 슬픔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던 때도 있다.

 

이러한 설교의 선포는 결국 이민족의 삶과 같이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던 것이다. 아픔이 있으면 더욱더 절실한 바램과 위로를 요구하는바, 그리스도의 평안과 또한 짐 진 자들의 위안과 치유로써 설교의 사역은 이 땅의 1000만 성도의 위업에 주춧돌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발전의 현장의 뒤 안에는 위기의 요소들이 더욱 산재한바 지금의 현실은 매우 우려할 위기에 처하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국민소득의 향상으로 인한 성장후퇴현상이다.

1995년 1인당 GNP가 10,070$에 넘어서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복음에 의지 하려는 열심이 사그라지기 시작하고 있다.

 

둘째는 위기의식의 해소이다.

6.25와 각종 민족의 어려움에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사회 전반적이 여건이 안정의 단계에 들어가면서 점차 신앙에 의지하는 것에서 후퇴하고 있다.

 

셋째는 이념과 체제의 약화를 들 수 있다.

구 공산권이 넘어지면서 결국 전체 이념 해제의 아노미적인 상황을 맞이하여 교회의 권위조차도 상대주의적 잣대로 보게 되는 현실에 다다르고 말았다.

 

여기에다 한국적인 설교자에 대한 과도한 환상적 기대가 더욱 설교사역을 어렵게 하고 있다. 설교자는 완전한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기대 10.3% 말씀대로 살려는 자들80.2%로 설교자들을 말씀의 신비적 구도자로 보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과도한 기대는 목회사역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1년에 156편의 설교를 공식적으로 해야 하는 어려움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결국 올바른 말씀에로의 접근과 묵상을 차단하여 깊은 진리를 선포하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을 설교의 부실로 이어진다. 본문을 떠난 말씀, 현장화 되지 못하는 적용, 물량주의 기복사상의 설교가 방편화 되며 회중이 요구하는 말씀을 전하는 피치 못할 모습을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는 평신도들의 책임도 있다고 하겠다. 많은 교인들은 자신들이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음은 설교자가 외치고 있는 메시지가 들을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든가 또는 전달방법이 회중들을 붙잡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날카롭게 반응을 한다. 자극적인 설교에 민감하며 '축복의 성회' '신유의 성회''은사의 성회'라는 간판이 달린 곳으로 모인다. 이러한 모임의 현상은 회중들의 취향에 따라주지 않는 설교자를 도태(?)시키는바 결국 설교의 선포가 사라지게 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 현재의 설교는 말씀의 선포로서 이기보다는 회중들이 원하는 말씀의 전달로 그 모습이 변하는 위기에 처하여 있는 것이다.

 

 

평신도의 설교의식 구조

 

설교를 듣는 대상으로써의 회중 곧 평신도의 설교에 대한 입장은 참으로 중요하다. 개신교의 존립과 성장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도구는 일반적으로 70%의 비중을 차지한 설교라는 특유한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특수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설교에 대한 평신도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현재의 모든 설교 위기를 해결하는 하나의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가. 설교사역자의 정체성

 

평신도들은 설교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그분의 말씀을 가지고 강단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미지이며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써 하나님의 종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종으로써 말씀을 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의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러기에 설교의 성패가 설교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인격성에서 크게 좌우된다. 그리고 인격적 표준 인으로서 자신을 보여주어야 하는 의무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한국의 문화권에서는 설교자의 인격 때문에 설교를 경청하거나 또는 거부하는 현상이 다른 민족보다 뚜렷함을 본다. 또한 설교자가 교회강단에 서서 아무리 웅변적 설교를 토할지라도 그의 보통 일상생활이 그리스도 복음의 빛을 가리게 된다면 교회 강단에서 외친 설교조차 무효의 설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시대의 변천이 계속되고 사회의 도덕관념이 퇴색되고 짙어 가면 갈수록 더욱 강력하게 우리의 설교자에게 요구되어질 것이다.

 

 

나. Communicator 로서의 설교 사역자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와 경험의 표현에 담아 전달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설교의 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특이 이때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사고와 언어와 생활에 담아서 기호화하여야 하기 때문에 설교자는 회중과의 만남에 요소가 되는 외형적인 형태에 주의 하여야 한다. 음성과 음정 언어의 질과 속도에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신체 언어의 구사를 비롯하여 설교 전달의 형태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다. 한국 설교사역자의 문제점

 

설교 사역에서 반응이란 메시지가 설교자에 의하여 전달되어 회중에게 접촉이 되었을 때 전달자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표현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한국의 문화권에 있어서 많은 제약이 따른다. 즉 윗사람을 따르는 것이 상례인 한국의 문화는 메시지의 외곡을 가져올 수 있는 문제로써 이러한 문화적인 문제를 넘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또한 한국 강단의 기복사상도 문제이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우리는 종말론적인 메시지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 후 경제계발이 계속되면서 우리의 메시지는 기복적인 것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교회를 복 받는 장으로서의 그릇되게 인식하고 설교를 복의 의식으로 잘못 이해하게 되었다.

 

2010년 1인당 2만 불을 넘어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설교가 또한 어떠한 방향으로 갈 것인가? 말씀의 내용이 그 시대의 사람들의 배를 채우는 것으로 전락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회중의 욕망의 투사 외에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참으로 조심하여야 할 것이며 또한 올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도록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예화로써 말씀을 흥미위주로 이해하게 하는 것. 자신을 주체어로 하여 그 종결어가 하나님이 아닌 자기가 되는 것은 조심하여야 할 문제라 할 것이다.

 

 

라. 회중들의 반응

 

회중들은 설교자를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인 동시에 인간이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이다. 존경하는 분이다. 등으로 이해하며 하나님의 사자로 이해를 한다. 이는 도시 쪽으로 갈수록 설교자를 인간인 동시에 말씀의 종으로, 시골 쪽일수록 설교자를 말씀의 종이요 존경하는 인물로 보고 있다. 교육수준별로는 학력이 낮을수록 설교자를 종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며 학력이 높은 이들보다 설교자를 훨씬 존경하고 있음을 본다.

 

연령별로는 60세 이상의 연령층에서 설교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종으로 보는 전통적인 경해가 많으며 반면에 30대 이하의 젊은 층에서는 단순한 인간적인 측면에서 설교자를 이해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신급 별로는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라는 응답에 학습 34.4%, 세례 25.7%, 유아세례22.7%, 순으로 나타나 초 신자의 경우 설교자에 대한 존경도가 높고 신앙의 연조가 깊어질수록 낮아짐을 보게 된다.

 

교회의 직분별로는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인간이라는 높은 응받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장로의 경우 하나님이 말씀의 종이라는 응답에 평균보다 높은 응답률 41%를 보이고 있으며, 안수집사와 권찰이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응답에 각각 12.2% 10.5% 평균 보다 높게 응답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설교자의 삶과 메시지의 관계성에서 교인들은 설교자들이 완전치는 못하지만 설교한 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80.2% 설교하는 대로 생활한다. 10.3%라는 반응을 보임으로써 설교자들이 적어도 설교에 충실한 삶을 살려고 하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러나 지역별로 농촌이 설교한대로 생활한다에 높은 반면 도시 쪽은 살려고 노력한다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수준별로는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설교자의 위선적인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연령별로는 나이가 젊을수록 설교자의 위전적인 모습을 지적한다. 그러나 신급 별로는 신급이 높을수록 설교자의 삶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한다.

 

설교자의 복장에서는 설교가운을 입고하는 것이 효과적인 것으로 답하여 성직자로서의 외형적이 모습을 갖추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뚜렷하였다. 농촌은 검소한 모습을 도시는 가운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가운을 선호하며 나이가 많을수록 가운을 선호하는 반면 젊을수록 검소한 평상복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신급별로 직분별로는 연조가 오랠수록 가운입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교시의 음성에 관하여서는 아주 높은 관심을 보였으며 나이가 많을수록 신급이 높을수록 직분을 맡을수록 중요하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또한 설교 시 신체언어도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며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신급이 높을수록 직분이 있을수록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설교준비를 원고화 하는 것에 있어서는 대도시 쪽으로 고학력자들일수록 나이가 적을수록 신급이 높을수록 직분이 있을수록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교에 있어서 민감히 반응하는 것에 대하여 대도시 쪽으로 저학력 층일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신급이 낮을수록 직분이 없을수록 바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기복적인 메시지에 있어서 도시보다는 시골이 고학력자보다는 저학력자가, 연령이 많을수록 신급이 낮을수록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화설교는 거의가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저학력 고령자 신앙의 연배가 낮고 직분이 없을수록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설교문장의 주격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예수님임을 인지하고 있다. 고학력자 대도시 신급이 높을수록 그리고 직분이 있을수록 분명히 할 것을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상적 설교사역을 위한 제언

 

설교란 택함 받은 설교자가 당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하여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진리를 선포하고 해석하고 이 진리를 회중들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성령의 감화하심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고 정의 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설교의 정의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질문을 해야 한다.

 

첫째 나는 선택받은 설교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정확하게 해석하고 효율적으로 적용해 주고 있는가?

셋째로 나의 전달 방법과 기술이 오늘의 시대와 동떨어져 있지 않는가?

 

이상과 같은 질문들의 대답이 자랑스럽게 나타나고 성공적으로 발생되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외치게 된 설교이다. 바로 오늘의 설교가 회복해야 할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왜곡되지 않은 신언의 사실적 증거가 그 첫째라고 할 수 있다. 성서적 설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서 속에서 석의 주해 적용은 결국 성경에 질문하고 그 결과 대답하는 성령님의 뜻을 밝히 때달아 인격적인 대화를 통하여 하나님이 선포의 주체가 되가 설교자는 그 도구가 되는 말씀과의 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설교가 다수의 사람들에 주어지는 진리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볼 때 설교자는 이 진리를 운반하는 올바른 방편이 되기를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가 일반 연설과 구별되는 두개의 큰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안에서 전개된다는 점과 성령의 역사 안에서 그 모든 노력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시대의 각종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씀을 전개하고 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설교의 올바른 목표이다.

선포적 설교, 교훈적 설교, 치유설교, 예언적인 설교가 있다. 이러한 설교들의 여러 차원이 올바로 엮어져서 성령님의 기뻐하시는 결과를 예견하며 성실히 준비되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인들 개개인을 향하여, 교회공동체를 향하여, 사회를 향하여, 국가를 향하여, 전해져야 하고 말씀되어져야할 선포적 사명과 뜻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는 설교에 임하는 설교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몸가짐과 정숙한 말씨 그리고 균형 잡힌 몸놀림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설교의 경건성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특히 설교 시 쓰이는 언어에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자기의 뜻을 강요하고 자기의 뜻으로 종결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분명히 하여 전체의 설교가 말씀의 주체자 되신 하나님을 잘 들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맺음말

 

한국민족에 함께하신 성령님의 역사는 1000만 성도의 교회를 우리에게 복으로 주셨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우리의 자랑이 되기보다 오히려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소득의 증대와 세계정치 환경의 변화는 결국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나태하게 만들고 있다. 더욱이 한국 회중의 물량주의적이고 기복적인 바람은 더욱 설교를 피폐하게 만들었는바, 결국 원하는 말씀만을 섭취하는 편식을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욱이 설교자들도 여기에 편승하여 말씀의 선포를 외면하며 또한 자기의 입장을 강요하고 설득하는 잘못을 난발함으로써 우리교회의 앞날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설교자들은 말씀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또한 그 준비와 선포결과가 성령님의 주관하심 가운데 있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아 선포의 도구로 겸허히 자기를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또한 강단에서 설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이 들어날 때 우리교회는 다시 한 번 새로운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 세계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