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난제! 중요한 문제들 ???

어원연구의 허와 실 / 오광만의 성경해석

하나님아들 2023. 8. 2. 22:57

어원연구의 허와 실 / 오광만의 성경해석

 

 

오광만/ 장신 신학원 교수

어원 연구란 무엇인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 혹시 성경을 해석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신 적이 있거나 해석한 사람의 경우를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죄“를 설명하면서, “‘죄‘는 한자어로 罪인데, 넉 사(四)자와 아닐 비(非)가 결합된 것으로서, 네 가지가 아닌 것이다“라든가, “‘죄‘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αμαρτια)인데, 그 의미는 원래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에서 빗나가는 것을 가리킨다.“ 첫번째 경우처럼 말도 안 되는 단어 풀이가 우리 주변에서 대단히 많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두번째의 경우는 약간의 호소력이 있지만 로마서 3:23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구절 이외에는 적용되기 곤란한 죄에 대한 이해입니다. 특히 성경 원어를 공부했다고 하시는 분들 중에 이런 분이 많습니다.

어원 연구(etymology)는 어떤 단어가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원천적인 연구를 탐구하여 그 단어가 가진 최초의 의미를 살피고, 가능하다면 그 최초 의미 이전의 의미나 단계가 있는지를 추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의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비교 언어학의 입장에서, 어떤 언어가 다른 언어에서 빌려와 사용하는 경우 그 단어의 원래의 의미를 규정할 때와, 성경에서 단 한번 사용되는 단어의 경우 그 단어의 의미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이런 어원 연구에서 우리는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원 연구가 지니는 가장 취약점은 그 단어가 사용되는 문맥을 무시한다는 데 있습니다. 어원 연구는 그 단어가 지금 이 문장에서 어떤 의미로, 또 저자가 지금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기보다는 단어가 형성되었거나 예전에 사용된 단어의 과거의 의미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는 무슨 대단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굉장하게 여기겠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게 되면 해당 문맥에서 단어가 지니는 생동감 넘치는 의미는 사라지고 맙니다. 

“죄“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과 아울러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어원 연구는 “교회“의 뜻을 설명하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원어로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인데 ‘안에서 밖으로‘라는 ‘에크‘(εκ)와 ‘불러내다‘라는 뜻을 지닌 ‘클레시아‘(καλεω에서 변형된 κλησια)가 합쳐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밖으로 불러냄을 얻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 저자들이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한 곳에서 이런 의미로 교회를 표현했으며, 교회는 정말로 그런 어원학적인 의미를 지니는 공동체일까요? 사도들이 표명한 교회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등등 원어의 의미와 관련하여 언급된 곳은 없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신다면 단어 연구보다는 교회의 성격과 풍성한 정의를 다룬 [교회론] 책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도 이런 어원학적 의미를 지닌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우리니“(마 16:18)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그분은 [교회론]이나 신약 성경에서 교회에 관하여 설명하는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는 것을 세운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8에서 예수께서 염두에 두신 교회의 구체적인 의미는 “유대 공동체, 유대인들의 회당 모임과 다른(구별된) 기독교 공동체, 집단을 형성하겠다는 것. 즉, 예수님과 관련된 공동체, 메시아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것이지, 제도, 조직, 예배 형태, 독립된 민회와 같은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원 연구를 할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이고 건전한 단어 연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원 연구에서 해서는 안 되는 것들과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을 차례로 살펴봅시다.

어원 연구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일반적인 오류들

첫째, 어근의 오류

모든 단어는 그 형태 또는 구성 요소와 관련된 의미가 있다는 전제에 따라 어근 연구가 성행하고 있습니다만, 많은 경우 이런 식의 어원 연구는 오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를 가리키는 “아포스톨로스“(αποστολο )에 대해 그 단어의 의미를 “보냄을 받은 자“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사도가 보냄을 받은 자의 의미보다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일하는 대표자, 또는 사신을 의미하지 보냄을 받은 자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또 다른 예는 전혀 다른 두 단어를 연결시키기 위해 두 단어에 공통적으로 개입되어 있는 어근을 중심으로 두 단어를 연결시키는 경우입니다. 빵을 설명하면서 어근에 호소하는 예가 있습니다. 빵(bread)은 히브리어로 “레헴“이고 이 단어는 “전쟁“을 의미하는 “밀하마“와 같은 어근인 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은 빵과 관련되었고, “빵을 얻기 위한 전쟁“이라고 설명한다면, 이것은 단어의 의미가 시간과 언어의 장벽 넘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지 못한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똑같은 원리로 “속죄“(atonement)의 의미를 at + one + ment로 구성되었다는 생각에 속죄는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따위가 다 이런 어근의 오류에 빠진 경우입니다.

둘째, 시대착오적인 의미를 적용하는 경우

이것은 근래에 발전되고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를 이전 시대에 적용함으로써 오는 오류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1:7, 8의 ‘아버지께로 오는 “능력“(δυναμι )을 설명하는 경우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능력“이 영어의 다이나마이트(dynamite)라는 단어가 형성된 동일한 어원에서 온 것이라고 하여 성령의 능력이 다이나마이트처럼 폭파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면 오순절을 비롯한 신약에 언급된 성령과 그 사역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로마서 1:16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δυναμι )이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도 폭파하는 힘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능력이 폭파하는 힘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원하는 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를 살리고(엡 1:18~20), 여러 사람들에게 작용하여 구원에로 인도하는 힘입니다(롬 1:16). 현대어 다이나마이트(dynamite)는 그 단어를 만들 때 헬라어 δυναμι 를 변형하여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의 dynamite의 의미를 신약의 “능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적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셋째, 의미가 사라진 것을 적용하는 경우

이전에 과연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의심스러운 의미를 단어에 집어넣으면서 단어의 어원학적 의미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증인“이라는 단어인 μαρτυ 가 영어 단어 순교자(martyr)와 비슷하다는 데 착안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한 너희가 네 “증인“이 되라는 예를 순교자가 되라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cf. 계 2:13; 11:7), 일반화시켜 적용하기는 힘든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발생한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고 증거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지 “죽으라“고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 두 단어가 형성된 것은 별개입니다.

넷째, 알려지지 않은 의미나 그렇지 않음직한 의미에 호소하는 경우

이러한 실수는 해당 단어에 대한 연구 부족과 다른 사람이 내린 결론을 확인도 하지 않고 의지하는 경우에 많이 발생합니다. 로마서에 등장하는 “율법“(νομο )을 모세율법이나 모세의 율법 언약이 아니라 “율법주의“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롬 3:21). 샌더스 같은 학자들이 그러합니다. 과연 그런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의 중이고 아직 결정적인 해결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섯째, 배경적 자료에 주의하지 않고 호소하는 경우

요한복음 3:5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문제를 설명하면서, “물“을 1) 세례를 의미한다거나, 2)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거나, 3) 자연적 출생(이것이 물에서 탄생한다는 의미에서 아버지의 유전자를 의미한다는 생각에)을 의미한다는 것은 잘못된 배경 자료를 본문에 부과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네가 율법 선생이면서 이것을 모르느냐“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 염두에 두신 “물“은 구약적 배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에스겔 36:25~27에 묘사된 “물과 성령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정결한 물로 뿌린다는 종말론적 정결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하며, 성령과 물 하나 하나가 각기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깨끗하게 하는 작용을 강조하기 위해 물이 언급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사람을 정결케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에게 부여하시는 성령의 이중적인 사역을 언급합니다.

여섯째, 동의어와 병행구 사용의 오류

다른 글에 이와 비슷한 말이나 문구를 상호간에 개념상의 연관성이나 의존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배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신학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신학 공부를 하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낯설게 보이고 엄밀하게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이긴 하지만, 성경에 있는 어구와 비슷한 것을 성경 이외의 자료에서 찾아 성경이 그 자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경우입니다. 요한복음의 글을 만디안 문서나 그밖에 영지주의 문서와 병렬시키는 것이 그러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글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기독교 이전 시기에 쓰였다고 단언을 내리는 것입니다.

일곱째, 언어와 정신(mentality)의 연결에서 오는 오류

보만이라는 학자는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적 사고>라는 책에서 히브리 사람과 헬라 사람은 각각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그러므로 사물을 보는 관점과 표준이 다르다고 단언을 하였습니다. 그럴 경우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연결하는 데에도 문제가 생긴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적 사고는 그림으로 되어 있고 명사들이 구체적이고 회화적(vivid)이며, 그래서 중성 명사 같은 것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설득력이 없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현대어에서 독일어 das M dchen(소녀)는 중성 명사로 사용되고 있고, 헬라어에서도 το παιδιον(어린아이)가 중성 명사인데, 구체적이고 회화적이지 않은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또한 헬라어는 신약 계시를 제시하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라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언어와 정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대한 비판은 영국의 성서학자 James Barr와 미국의 신약학자 Moses Silva 교수가 잘 분석하고 비판하였습니다.

여덟째, 전문적인 의미에 대한 잘못된 가정에서 발생한 오류

이것은 어떤 단어가 항상 또는 거의 전문적인 의미 즉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오류입니다. 단어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 중에서 특히 신학적인 의미 부여의 대부분은 해석자의 개인적인 조직신학적인 관심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2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설명하면서, 이 구절에 언급된 “거룩하여지고“를 성화(sanctification)와 연결하여 조직신학에서 다루는 성화의 의미를 가지고 설명한다면 바울 사도의 의미를 과도하게 해석한 것이 될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성화는 칭의 이후 계속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언급된 “거룩하여지고“ 역시 칭의 이후의 “성화“를 지칭해 준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바울의 경우 어떤 경우는 그렇게 사용하기도 했으나 모든 경우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종종 회심했을 때 개인이 하나님께 취해야 할 태도를 표시하기 위해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는데,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인 것입니다. 단어 속에는 이 단어와 관련된 개념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지난번에도 지적하였듯이 단어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벽돌 한 장에 불과합니다.

아홉째, 단어마다 하나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오류

그 동안 우리는 단어가 여러 단어와 다양하게 결합됨으로써 다양한 의미를 표출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도 단어 하나 하나가 각기 다른 실체를 지시하고 하나의 고정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어가 관계성에 의해 의미가 규정된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많이 사용되는 “시험“(πειρασμο )이란 단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야고보서 1:2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와 1:12의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에서 “시험“이란 단어는 “역경, 어려움, 난관“이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1:13의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 하시느니라“에서 “시험“은 “유혹“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각각의 의미는 원래 πειρασμο 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는 문맥이 결정해주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단지 의미의 가능성만을 지닐 따름입니다.

오류를 피할 수 있는 방법

그렇다면 위와 같은 오류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단어 연구에서 주의할 점 몇 가지를 지적하겠습니다.

첫째,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만, 바른 독서법을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책을 읽을 때 전, 후 문맥과 생각의 흐름을 잡아가면서 글을 읽으십시오. 한 단어의 의미가 되었든지 아니면 문장 전체의 의미가 되었든지 간에 의미는 문맥에서 작용하며 그 문맥에서 의미를 얻습니다. 단어와 단어의 관계, 문장과 문장의 관계를 잘 살피면서 글을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성경 각 권들은 우리의 문화와 다른 문화 속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이사야 5:2의 포도원을 만들 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라는 말은 이스라엘 땅은 돌밭으로서 포도원을 만드는 단순한 사실적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의 돌을 제하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설교하는 것은 본문의 메시지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며, 설명하는 사람이 당시의 단순한 문화적 서술에 대해 무식하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역사적, 문화적인 배경을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성경이 우리의 언어와 다른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원어를 통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것은 성경을 연구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번역 성경이라도 잘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자국어라도 정확하게 하여 말 표현에 대해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을 차선책으로 권합니다.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저자가 원래 독자에게 의도한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해석자의 목표는 저자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를 통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확증하는 데 있습니다. 저자의 의도를 알고, 저자의 의도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본문에 관하여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필요합니다. 이것은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법이므로 성경 언어와 번역 언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넷째, 언어학을 세속적인 학문이라고 무조건 도외시하거나 성경 연구에 그것을 저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 해석에 언어 사용의 정확성에 도움을 주는 언어학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언어학은 남의 글을 이해하는 데 우리로 하여금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지침을 줄 뿐만 아니라, 현대의 해석학 방법이 이런저런 면에서 언어학과 관련이 있으므로 성경 해석법에 대한 감각을 얻으려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울만과 실바 교수가 단어의 의미를 확정하는 데 있어 어원 연구보다 단어의 기본 연구의 중요성을 장기에 비유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장기에서 각 말이 가는 길과 방향이 있고 이것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듯이, 어떤 특정 언어는 일반적인 패턴을 가진 구조체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구문론 또는 통사론이라고 부릅니다.

㉡ 장기에서 차나 포의 사용은 그것이 다른 말과 어떤 관계에 있고,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작전이 달라지듯이, 언어의 특정한 의미소(item)의 의미는 그 구조에서의 위치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즉 단어의 고정된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 장기에서는 어떤 말을 움직이기 전에 작전을 펼 수 있는 것과 움직인 후에 펼 수 있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장기를 둘 때 항상 현재의 말의 위치가 중요하듯이, 어떤 특정한 단어의 의미는 그 의미의 과거 역사가 아니라, 구조 체계 속에서의 현 위치에 의해 결정됩니다.

㉣ 역설적인 말입니다만, 장기를 직접 두는 사람보다 훈수하는 사람이 말을 더 잘 쓰는 수도 있듯이, 모국어를 쓰는 사람은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의 체계를 의식하지 못하는 수가 많습니다. 그것은 단지 몸에 밴 습관에 의해 나오기 때문입니다. 제삼자는 철저한 연구로서 그들에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월간 <교회와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