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와 예정
홍 영철 목사
많은 사람들이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궁금증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면서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하는데 그 자유의지란 인간 스스로 자유롭게 판단하고 결정하며 행할수 있는 의지를 주었다는 말인가 ?
즉 내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내가 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하는 결정권이 나 자신에게 있어서 내 생각대로 자유롭게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가리키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자유의지에 대하여 이와같은 생각을 갖게될 때 우리는 예정론에 부딪히게 된다.
내가 내린 결정에 앞서 하나님의 예정이 있기 때문에 사실 내가 어떤 결정을 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자유의지 무용론이 대두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나의 모든 생각, 감정의 표현, 의지적인 행동의 모든 것을 예정해 놓은 것일까 ?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대로 저절로 되어갈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된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게 되면 결국 숙명론에 빠져서 인간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존재인 것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성경은 결코 숙명론을 말하지 않으며 예정론의 의미가 그런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은 인간의 구원과 관계된 면에서의 예정이다.
하나님이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 구원하기로 예정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엡1:5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로마서 8:30에도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복음의 소식을 듣는 것을 외적소명(외적 부르심)이라고 말하며 복음의 소식을 듣고 성령이 역사하므로 예수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내적소명 (내적부르심)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어떤 자들을 성령을 통하여 부르셔서 예수를 믿어 의롭게 하시는가 ? 미리 정하신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한 자들이요(엡1:4) 내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고자 예정한 자들인 것이다. 이렇게 예정된 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을 받게 되는데 그것을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쫒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7-39)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가 곧 창세전에 택한 자들이며 구원하기로 예정한 자들인 것이다. 이들 가운데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살리겠다 즉 구원받아 영생을 누리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절대적인 주권 속에서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신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나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어떤 것을 할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는 유한한 자이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출생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듯이 타락하여 영원한 죽음의 자리에 놓일 자신을 자기 마음대로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권한은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며 인간에게 주지 않았다. 이런 것을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 주시는 선물이며 이것이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엡2:8) 그러니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을 택하거나 혹은 구원 받기 싫어서 예수 믿기를 거부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행사하시는 것을 항거할 자격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한다면(창2:17)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죄의 댓가로 영원히 죽어도 할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누군가가 창세전에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 될 자로 예정된 자이어서 영원한 형벌의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롬9:20-24에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 잘 말씀해 주고 있다.
이 예정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에 관계된 모든 일들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예정이 성경에 분명히 언급한 것 외에는 우리가 구체적인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하나님만이 아실 뿐 어느 누구도 알수 없으며 다만 인간편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는 점이다.(요3:16)
인간편에서는 믿는 자가 구원을 받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예정된 자가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진심으로 예수를 영접하고 믿고 있다면 나는 구원 받기로 이미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한가지 재미있는 말이 있다.
천국의 입구에 세워진 문위에 “믿는 자만 들어오라”고 쓰여있어서 신자들이 들어가보니 천국문 안쪽에 “선택된 자들만 여기에 들어왔다”고 쓰여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구원받기 위하여 해야할 일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마음에 영접하고 믿는 것과(요1:12) 믿는 도리를 굳게 잡는 것이다.(히4:14)
믿는 도리를 굳게 잡는다는 것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다.(빌1:27)
나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으니 이후로는 내 마음대로 신앙생활해도 괜찮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도록 내어드려야 한다. 곧 주님께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할 때 이미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근심하게 된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을 근심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엡4:30)
앞에 잠간 언급했지만 내게 있는 자유의지로 내가 예수 믿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가 ?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지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자유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인간 존재자체의 독립된 인격을 말한다. 쉽게 말한다면 누구나 독립된 지정의의 인격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자유의지라고 말한다.
아담이 타락하면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하나님을 향하는 행동을 표현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과 관계없는 육적이고 죄악된 것을 향한 행동을 표현한다. 그 이유는 의지는 생각을 통해 표현되는데 생각자체가 타락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락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를 믿게되면 새사람을 입게 되는데 그 때 하나님의 형상을 쫒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된다고 성경은 말한다.(골3:10)
여기서 우리는 자유와 능력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선과 악을 행할 자유는 지금도 신불신자를 막론하고 갖고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후로 모든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은 상실되고 악을 행할 능력만 갖고있다.(창6:5,요6:44) 여기서 ‘선을 행할 능력’이란 하나님을 스스로 찾으며(이것이 최고의 선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 이 인정하시는 선 곧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을 떠난 가운데 행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선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체가 죄이며 죄의 그늘 아래서는 도덕적으로 선을 행할지라도 그것을 ‘선하다’ 인정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것은 더러운 그릇에 담긴 음식을 깨끗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시편 14:2-3에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한 것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자를 말한다. 왜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다고 말하는가 ? 그것은 아담이 타락한 후의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전적타락이란 위에서 말한 지식은 물론 감정과 의지까지 모두 타락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런 상태의 사람은 죄의 지배아래 있기 때문에 죄성이 생각과 감정, 의지를 모두 이끌어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스스로 찾을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죽어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의 자리에 욕심이 들어가 있다. 이 욕심이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지배하므로 끊임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편에 서는 자는 없고 다 그 욕심에 끌려 세상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타락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하여 일그러져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것 뿐이지 하나님의 형상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가운데서도 강한 능력을 소유한 신적인 존재를 찾아 의지하려는 마음이 있다. 따라서 어떤 결과가 찾아왔는가 ? 로마서 1:21-23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말씀한대로 교통부장관이 고속도로 개통을 하면서 도로상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돼지머리 앞에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행위들을 갖는 것이다. 이정도 설명이 되었으면 이제 선을 행할 자유의지는 있으나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말을 이해하겠는가? 선을 행할 능력을 다시 회복하려면 우선 죄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놓으신 예수를 믿고 회개함으로 죄사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될 때에 비로소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어 선을 행할 능력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빌2:13, 엡2:10) 그러나 능력이 회복되었다고 완전해진 것은 아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성령이 항상 마음에 내주하여 계시기 때문에 언제든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곧 선을 행할 능력이 회복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난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능력이 회복되었는데도 힘써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 그것은 내 안에 옛 사람이 그대로 있어 자유의지로 육을 좇아 죄를 짓는데로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난 후에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자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법을 좇아가려는 새사람과 자유의지로 죄의 법을 좇아 가려는 옛사람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점점 죄의 법이 이기기 때문에 너무 괴로웠던 사도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탄식을 했던 것이다. 바울에게서 이 갈등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 이라”(롬8:2) 즉 내 자유의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으므로 해결되었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이 창조시에 아담에게 주었던 자유의지의 바른 모습이다. 그때는 타락 전이라 죄가 없었기 때문에 갈등의 문제가 없으며 자유의지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분을 찬양하며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것 그 자체였다. 그러나 타락한 지금의 우리로서는 죄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었다면 마땅히 나의 자유의지는 성령을 좇아가는 것으로 활용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위의 문제로 돌아가 해답을 생각해 보자.
“내게 있는 자유의지로 내가 예수 믿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가 ?”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분명해진다. 자유의지는 나의 인격(지성, 감성, 의지)을 행동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예수를 믿고 안믿는 것은 온전히 성령이 그에게 역사하는가 역사하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성령이 역사해서 예수를 믿고자 하는 믿음이 주어졌을때 비로소 자유의지로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한다든지(의지), 혹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지성) 통회자복하는 것(감성) 등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불신자에게 여전히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자유의지는 복음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지성) 아무 감동이 없으며(감성)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의지) 이런자가 갖고 있는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죄의 법을 좇아가는 것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유의지로 인한 표현 이전에 이미 성령이 역사하는가, 안하는가로 예수를 믿고 안믿는 것이 결정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정과 자유의지는 어떤 충돌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 자유의지는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대로 사용 되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은 우리의 삶 속에서 행동하는 모든 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는다.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에 게 지정의의 인격과 그것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매일 밥먹고 잠자고 일하는 것 하나 하나를 예정해 놓으시겠는가 ?
거듭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는 삶의 과정을 걸어가는 여부를 예정해 놓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자유의지는 지정의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를 믿으므로 새사람을 입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목적대로 자유의지를 사용해야 하나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역사 속의 계시 곧 성경을 통해 알려 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부지런히 성경을 살펴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자유의지를 바르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때 그것이 곧 죄를 낳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빈번히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직 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깨달았음에도 여전히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고의로 죄를 계속 짓는다면 그것은 고범죄를 짓는 것으로 사함을 받지 못한다.
시편기자는 이런 고범죄를 짓지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시19:13)
이 고범죄는 히브리서 10:26에 ‘짐짓죄’에 해당되며 이것은 또한 마가복음 3:29의 ‘성령훼방죄’와 같은 것으로 성령의 역사로 회개도 하며 예수도 영접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데 성령의 사역 자체를 부인하며 훼방하되 그것을 고의로 계속 부인하니 사함을 받지 못하며 결국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죄인줄 알면서 습관적으로 계속 죄를 짓게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람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며 만일 성령을 거스리고 계속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은 징계를 통해서라도 그 죄 짓는 것을 중단하게 한다.
요일 3:9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씀이 곧 이것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의 징계도 없이 습관적으로 계속 동일한 죄를 짓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연약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므로 죄를 짓게되면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 낱낱이 고백하고 회개하여야 하며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그 죄를 사하여 주신다.(요일1:9) 갈수록 자유의지를 바르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때 그는 거룩해져 가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이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되며 하늘에 보화를 쌓는 지혜롭고 축복된 성도가 된다.
하나님의 예정과 자유의지를 바르게 깨닫고 신앙생활 하므로 하나님이 축복할만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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