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연구 방법 해석! 분해!

루터와 칼빈에 있어서 성경 해석의 관점 문영주

하나님아들 2023. 12. 19. 14:19

루터와 칼빈에 있어서 성경 해석의 관점               

 

문영주

 

Ⅰ.현대 신학의 양상

현대 신학의 양상은 매우 다양하다. 극우로 치우쳐 신학의 학문성이나 객관적 논리성을 무시한채 개인의 체험을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단체들과 이단들의 왜곡으로 해석학의 혼란한 양상을 보여주는 반면 좌로 치우쳐 학문의 객관성만 주장하며 신학을 논리와 이성애 복종시켜 그의 사회적 역활만을 강조하는 것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극단의 양상들이 모두 자기 존재의 근거를 성경 에서 인출하여 '성경적'이라 주장하는 점이다.

현대신학의 가장문제시되는 부분은 조직신학과 교리학이며 또한 그 이론을 됫바침하는 성경신학이다.

특히 성경신학은 성경에서 그들 모두 이론의 근거를 발견 한다는 점에서 현대신학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고, 성경에 대한 옳바른 관점 (딤후 3:16)이 옳바른 신학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모든 신학의 근거를 이룬다. 그래서 옳바른 성경관과 해석학은 모든 신학의 기초이다.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 제목이 지시하는 것처럼 종교개혁자들의 성경관과 그의 해석원리 등을 비교해 가면서 옳바른 성경해석이 개혁 교회사에 어떻게 큰 영 향을 미쳐왔나 살펴보고자 한다.

 

루터는 1507년 회심후 Augustinus 수도원에 입단하고, 1512년 Wit- tenberg 대학에서 신학박사 1) 학위를 받고 1513년 시편강해를 시작하면서 일련의 성경 연속 강해를 통해 2) 자신의 해석학과 신학을 구성한다. 특히 루터는 그의 신학 과정인 수도원 생활을 통해 성경을 거의 암송하 다시피, 그리 하여 성경을 라틴어로 틀리지 않고 암송 할 수 있는 정열을 보였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나중에 루터가 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성경에서 얻은 확실한 신앙에 대한 근거로서의 지식으로 로마교회 의 관습주의, 권위주 의적 성경해석을 반대하고,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 해석 되어져야 한다. (Sui ipsius interpres)는 것을 주장하였다.

 

루터가 해석학에 이러한 공적을 가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경학 에 칼빈과 대조되는 몇 군데의 약점을 남겨 둠으로서 오늘날 만연되는 루터 신학의 필연의 결과인 현대 비평, 혹 역사적 비평신학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유감된 일이다.

그외 오늘 이 곳에서 지적 될 약점들은, 칼빈이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 것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성경에 대한 그의 편견을 나타 내는 부분들에서 후대의 비평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Ⅱ.루터에게 있어서 성경

루터에게 있어서 성경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거(Zeuge des Vortes Gottes)이다. 그래서 어디든지 성경이 읽혀지고 들려지는 곳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사람을 감동 시킨다. 오직 이 하나님의 말씀이 홀로 구원의 은혜가 된다. (WA. 2. 509: Verbum, in quam et solum verbum, esc vehiculum gratiae Dei) 루터에 게 있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위해서 인간들에게 들려져야 한다 는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루터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의 현재성 이기 에 성경을 해석하는데 하나님의 말씀 자신의 해석을 주장한다. 3)

 

이 성경이 성경자신을 해석하는 것을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결과로 보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해석으로 봄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의 해석학 적 방법으로 성경은 오직 하나의 문자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었고 (Unicus sensus simplicissimus, Litteraricus) 그것이 성경의 4중해 석을 요구하던 가톨릭과 스콜라 신학에 대해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4) 이 성경의 4중해석법은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로 두터 유래하는 것으로 그가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헬라 문명의 중심인 알렉산드리아에 서 랍비전통과 유대인의 성경관, 특히 모세 오경에 대한, 그리고 수년에 걸쳐 전해지는 고전헬라의 시인, 연극인, 철학가 특히 플라톤의 관념주 의와 스토아철학을 섭렵하며, 유대인의 전통을 변호하는 모습으로서 5) 성경의 모형론적 해석을 발전시키며, 그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안에서 초대 교부 오리게네스의 성경의 3중해석법 (Trichothomie) 6) 에 기초하여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로 이어져 스콜라신학의 성경의 4중해석법(유추 적, 상징적, 문자적, 종말론적 해석)으로 발전되고 성경의 모든 문자와 귀절을 4겹으로 나누는 영적해석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로마가톨릭의 교권주의적 해석의 근간이 된다. 7)

 

그러나 문자적 해석이 유일한 해석학적 방법으로 선택될때, 성경의 의미가 종래의 이현령 비현령식의 '이것도, 저것도'에서 탈피하여 하나로 정립될 수 있었다. 루터는 이 성경의 문자적 해석방법이 유일한 해석학 의 방법이므로, 또한 그가 주장하는바 성경을 복음과 율법으로 옳바로 구분하기 위해, 해석학의 도구로서 문자에 대한 언어적, 역사적, 그리고 당대의 배경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경해석자는 이런 무기를 갖추어야할 의무를 지니는데, 이 해석자의 학문에 대한 태도와 연구를 성경신학이라 명한다. 8) 이러한 루터의 태도는 당시 대학에 일반화된 인문주의자들의 고전어에 대한 정열과 그의 수업기간 동안 계속되어져온 스콜라신학 그리고 인문주의 자들과의 접촉에서 연유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9)

 

성경해석을 학문이 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루터의 공은 후세기를 주도 하는 모범이 되었으나 해석을 학문에 종속시킴으로 학문이 갖는 일반적 성격인 비판과 논리라는 개념에도 신학이 복속하게 된 것은 루터신학의 필연의 결과이다.

이러한 루터의 해석학의 새로운 지식이 그의 1517년 종교개혁에 어떠 한 요인으로 발전하는지는 루터의 개혁사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한 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성경해석 의 바탕위에 루터가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신앙관에서 벗어나 종교 개혁자의 신앙을 형성했다고 주장 하나 사실 루터는 교부들의 신앙안에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전승안에 머물고 있는 많은 부분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일련의 1513∼1519년간 의 성경해석 강좌에서 또는 토론 논문들에서 특히 Augustinus의 영향을 많이 받아 (Augustinus의 "De spiritu et Littera") 그의 해석학의 중심 인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Christozentrische Auslegung)을 구성한다.

 

루터의 해석학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이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다. 즉 모든 성경이 신약과 구약에서 그리고 각 장, 절에 서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이며 이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Mitte der Scbrift)이다. 10) 이 성경을 보는 관점으로서 그리스도론에서 루터는 그의 비평을 시작 하는데, 그를 우리가 현대 비평학의 창시자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모든 성경이 그의 문자적 표현에서 그리스도 의 구속사역인 칭의, 즉 값없는 은혜를 나타내고 있는가를 질문하며 대답의 기준을 칭의와 사죄의 내제성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그의 칭의와 사죄신학은 1507년 구도자로서 신부의 길을 찾은 강렬한 노중의 회싱과 성경의 새로운 인식인 1516∼1517년의 고마서 강해(AD ROM 1:17) 등에 나타나고 있다. 11)

 

그리하여 루터는 성경에서 이러한 값없이 주는 은혜의 근원으로서 주 예수의 모습을 정확히 묘사하는 부분을, 즉 사죄와 칭의의 그리스도 묘사를 복음이라 하며 이 복음이 발견되지 않는 부분을 율법이라 부른 다. 율법은 죄인으로서 죄를 깨닫게 하며 절망의 상태에 이르게 하고 복음은 그를 살리게 한다. 이 율법과 복음은 더 나아가 고후 3:6의 영 (Spiritus)과 의문(Littera)이라는 구별로 (cf. Augustinus의 "De Splritu et Littera") 복음은 영이요 살리는 것이며, 의문 즉 기록된 문자는 율법 이요 죽이는 것이라 분류한다. 루터의 성경해석에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은 그에 따르면 성경의 모든 부분에 균등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성경에서는 그것이 강조되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그것이 강조되지 않고 빠져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구약과 신약을 율법과 복음으로 가를 뿐만 아니라 신약안에서도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도구로서 그것이 약하게 혹 강하게 표현되어 있는가를 평가하여 소위 고급한 것과 저급한 것으로 분류한다.

해석학상 루터의 획기할만한 공로는 1521년 Wartburg 성 중의 피난 시절 그의 성경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 하였다는 것이다.

 

Novum Testamentum Erasmii Roterodamo판을 번역 출판한 그는 9월판 서문에서 히브리서와 야고보, 유다서, 요한계시록의 정경 결정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그 성경들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사상을 포함하 지 않은 (예를들면 유다서) 또는 그들 자신이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 난제(에를 들면 히브리서의 6장, 10장에 한번 은혜를 입은 자가 타락하 면 회개에 이룰수 없다는 내장은 루터 자신에게 의신칭의의 교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12) 들 때문에 다른 성경과 비교하여 낮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루터는 그것들이 정경안에서의 위치가 맨마지막에 와야 할 것으로 보았다. 13)

또한 그는 야고보서는 짚으로 된 서신으로 바울의 칭의의 교리인 복음이 전연 내포되어 있지 않은 책이라 이야기 했으며 [WA. DB 6, 10,29 ff:"그리하여 성 야곱의 편지는 완전히 짚으로 된 서신으로 그안 에 복음적인 것들이 전연 들어 있지 않는 것이다."‥‥‥ 원문번역 註 참 조] 14) 성경 중에 그러나 이러한 복음적 성질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책들은 요한복음, 바울서신, 특히 옥중서신, 그리고 베드로전서로 꼽았 다. [WA. DB ibid; "모든것들, 성 요한복음과 그의 서신, 성 바울의 편지, 특별히 로마서, 갈라디이서, 에베소서, 그리고 성 베드로의 첫번 편지, 그것들은 너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해 주고 무엇이 환난이며, 축복 인가를 알게 해준다."] 15)

 

연이어서 루터는 이 그리스도 중심의 싱경이 언제나 깨달아 지기 위해 그 말씀이 우리에게 현실화 되어져야 하는데, 이 현실화는 복음이 선포될때 두가지로 이루어진다. 16) 그것은 외형적 명료성(claritas ext- erna) 으로서 문법과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의미이며, 내제적 명료성( claritas interns)으로 말씀이 듣는 자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지시할때 일어난다. 루터는 이러한 그의 성경에 대한 비평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정경성을 인정하며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초석 위에서 출발한다. 17)

 

루터는 성경해석을 교회의 권위로부터 성경자체의 권위로 돌려놓았 다. 이것은 루터의 아무리 양보해도 간과할 수 없는 큰 공이다. 교황과 교회회의에 의해 철학적, 권위적 유권해석과 스콜라의 의복을 덧입었 던, 그래서 안개에 쌓인것 같은 성경해석을 모든 전제와 조건을 제기하 고 성경자체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학문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척자였 으며 로마가톨릭교회로 볼때는 변할수 없는 권위에 도전하는 사단의 자식이었다.

루터는 자신이 성경학 박사였던 깃처럼 성경에 대한 강의가 많은데 특히 그곳에서 스콜라신학의 4중적 해석 (allegoricus, Litteraris, misticqs, Parabolicus)을 버리고 문자적 해석에 치중함으로 성경의 명료성과 해석 의 단일화에 기여했다.

 

특히 이 해석 원칙은 그전까지 인문주의자들의 전매물 같이 여겨지던 고전어에 대한 탐구, 역사와 언어학 등이 신학자에게 도입되어 학문의 깊은 진전을 가져왔다. 그래서 루터신학안에서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확실케 하기 위한 언어적, 역사적 연구가 활발하며, 특별히 20세기초 현대신학의 종교사학파도 이와같은 연류를 가진 것으로 해석될 수 있 다. 루터의 많은 해석학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장 큰 약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후세의 칼빈이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과 달리 각 성경의 권들을 동등한 것으로 받지 않는다는 것이 다.

각 성경의 다양성을 놓고 다양성 안의 통일성을 찾지않고 그들의 다양성을 오직 그리스도 중심으로만 판단했으며, 또한 이것을 판단 할수 있는 기준을 인간의 이성에 둠으로 성경비평의 길을 후대에 열어 두었 다.

그의 성경관은 칼빈이 모든 성경을 영감된 하나님의 동등한 말씀이 라 주장한 것과 18) 비교해 볼때 분명한 신학적 차이가 난다.

루터에 반해 비평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그의 해석학을 건설한 칼빈은 해석학에 루터보다 더 나은 해석학의 구조를 구성한다.

 

Ⅲ.루터의 해석학상의 비평적 시각

루터의 해석학상의 비평적 시각은 그의 종교개혁이라는 공적과 해석 학의 교권주의에서 해방이라는 공적 때문에 가끔 간과 되는 수가 있다. 물론 루터의 해석학이 당시 가톨릭 교회의 해석에 비해 진일보 한 것이 사실이지만 합리주의적 비평신학이 발판을 놓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 했다는 과실을 안고 있다. 이러한 그의 해석학의 근원은 그의 신학수업 과정과 그의 성장과정들을 살펴봄으로 증명되어 질 수 있다.

 

루터는 1505년 Erfurt 대학에서 Baccalarius Artium 19) 학위로 고진문 헌과 중세대학의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고 버학을 계속하여 공부하기를 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얻은 번개와 뇌싱속의 격렬한 회심의 경험은 그가 구도자로서 로마 가톨릭에 귀의 하는 동기와 그의 신학에 나타나는 신비주의적 경향을 가져오게 하였다(예; WA. PS . 1, 70, 51, 68) 회심후 1507∼1512년까지 Augustinus 수도원에서 신학수업을 한후 1509년 Baccalarius Biblia와 1512년 박사학위를 받음으로 신학의 정규과정을 마친다. 루터의 회심과수도원의 입단이 증명하는대로 우리 는 그가 이 구도자의 길에 자신의 모든 정열을 쏟았다는 것을 안다. 그는 이 신학수업의 과정중 교회의 지시에 따라 가장 엄격한 Augustinus 수도단의 규율을 따랐으며 교회가 제공하는 것을 해면처럼 흡수했었 다. 그래서 그는 스콜라 신학에 성행하던 논리의 구조와 성펑해석에 통달했으며, 후기 스콜라의 대표였던, 당시 스콜라 신학의 거장인 Thomas Aquinas의 시대는 물러가고, 유럽대륙에 William Ockam의 영향력과 그의 추종자들이 주도하게 되었는데, 그 중 루터에게 큰 영향 을 미쳤던 스콜라학자로는 Pater Rombardus의 "Sentensen"과 Gabriel Biel 등이 있으au 그것의 영향래 있었던 것이 1513년∼1514년간 행했던 그의 첫 시편강의 "Dictata super Psalterium"으로서 스콜라신학의 4 중해석법에 묶여 해석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루터의 신학수업은 완전히 카톨릭적이었으며 그의 은혜의 방편들 안에서 구원의 길을 찾던 루터, 그리고 그곳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카톨릭의 신부였으며 1517년 10월 면죄부 판매 반대운동을 시작하기까 지 그가 느낀 것은 로마교회의 제도상의 타락이었지 성경해석에 대한 로마교회와의 직접적인 반발은 없었다. 그의 교황의 성경해석권에 대한 (마태 16:18에 근거한) 반탁 등은 거의 1518∼1521년 사이의 종교개혁 의 토론과 심문 기간중 저술했던 곳에서 찾아 활 수 있다. 면죄부사건으 고 인한 종교개혁의 발단은 루터가 그의 사용의 불가성, 그 제도자체의 불합리성을 지적 한 것이지 그것을 인허한 교황청이나 종교회의의 권위 에 도전한 것은 아니다.

 

그거나 면죄딕사건에 대한 루터의 반대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인허한 로마의 교귄과의 대립이라는 문제로 확산되었다.

1512년 Augustinus 수도원의 일단으로 로마를 방문했을때도 그가 느낀것은 종교상의 타락이었지 로마 교황청이라는 교권에 반발을 느낀 펏은 아니었다.

 

피는 1517년 그의 95개조의 반박논문을 제시 할때에도 신실한 로마카 톨릭의 신부였고 그를 심문하는 교황청의 사절에게 그의 주장이 잘못되 었으면 철회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언급했었다.

만약 위의 내장대로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혹 그후까지라도 종교 개혁의 의지로서 보다 로마카톨릭의 신부로서 이러한 일을 행했다고 한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의 의지가 완전히 표출된것은 언제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현 루터 연구에 논란으로 번지고 있는 루터의 의신칭의, 사죄와 값없는 칭의가 종교개혁의 계기가 피었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 지만 그 성경 연구에서 얻은 의신칭의가 언제 진정 한 종교개혁 의 동기가 되었었던가에 대하여는 많은 의견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의신칭의 신학이 종교개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루터의·개혁의 의지에 작용하는 시간을 K. Holl은 1512년이라 지적했으며 카톨릭의 루터 연구가 Denifle, J. Lortz; Die Reformation in Deutschland, 등도 1512∼1513년 소위 "Turm-Erlebinis"가 계기라 주장한다 한편 많은 현신학자들은 루터의 의신칭의가 1518년경, 즉 1517년 10월 Disputatio pro decla ratione virtutis indulgentia겨m(95개 조항)이 보편화되고 로마교회가 그를 심문하기 시작하던 때, 즉 그 심문에 대한 대응책으로 서 변화와 수용 그리 고 논리 의 증명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부분의 개신교 신학자들, 예를들면 0. Bayer: Promissio,1971, E. Bitzer : Fides ex audits, 1958, 19894), 혹은 K.-V. Selge; Die Ausb- urger Begegnung von Luther, JHKV 20, 1959, 등은 루터의 의신칭의 개념이 루터에게 상당히 일찍, 즉 1513∼1514년의 Dictata super psa- lterium에 발견되나 그것은 종교개혁적인 의미에서 보다는 Theologia Humilitatis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야된다고 주장하여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Theolgia Crucis)과 연결을 시도한다. 그들에게서 진정한 종교개혁 의 동기는 그의 성경관에서 온95개조를 해석한 1518년의 Resolutiones disputatinum de Indulgentiarum이라고 정의한다.

 

사실 루터는 그의 칭의의 신학을 그의 시편강의나 로마서강해( Vorlesung ueber den Roomer Brief등에 강하게 주장한다. 그의 칭의는 소위 스콜라철학, 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공적에 의한 칭의, 즉 meritum do congrue 혹 Justitia per meritum de condigno로, 즉 지금까 지 스콜라 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메스 윤리에서 차용한 선한 공적으로 의롭게 된다. "facere quod in so esc"라는 개념이 아니라, 수동 의 즉 "Iustitia passiva"로서 인간의 행위와 공적에 상관이 없는 하나님 의 선물(Dora Dei)이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의 개념인 Institia Distributiva(정죄하는 의)로서 칭의를 설명할때 심한 곤경에 빠져 하나님의 의를 심히 미워 했다고 한다. 20) 그러나 Iustitia Passiva라는 개념을 통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다. (qua lustus dono Dei vivid, nempe ex fide‥‥‥ iustitiam Dei, sc. passivam, qua nos Deus misericors lustificat per fidem) 그래서 이 선물 로 의로워진 자는 교만할 수 없고(Superua Fiducia) 겸손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루터에게 인식된 이 새로운 칭의사상 그대로 종교개혁이 되었 다는 주장보다는 루터에 게 있어온 오랫동안의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수업 과 그의 저서들의 영향이 수도원 생활때부터 잠재하고 있었다고보아야 할것이며 루터는 이러한 칭의인식 에도 불구하고 그가 늘 전통적 인 카톨 릭교회의 범주안에 머물기를 바랐었다. 그가 요구했던 95개조는 카톨릭 교회내의 개혁(Reform)이지 개혁(Reformation) 자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는 그의 저서를 통해 안다.

이러한 그의 로마가톨릭 교회에 대한 태도는 95개조의 선언이후 있었 던 여러번의 종교심문 과정에서 드러난다. 1518넌 3월에 작성된 Eck 에 대한 반박문 21) 이나 1518년 10월 12∼14일에 있었던 추기경 Cajetan, de vio의 심문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몇 번씩이 나 자신의 실수나 잘못된 교리가 발견되면 즉시 철회 할것을 다짐했고, 로마친회의 가르침에 순복 할것을 약속했었다. 이 심문이 끝난후 Spalatin과 Karlstadt에게 보낸 1518년 10월 14일 편지에서도 자신은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자로 몰리지 않을것과 로마교회 안에 버물기를 원한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22)

 

물론 이러한 로마교회의 심문과정에서 (Vaeterlich, night richterlich?) 우리는 로마교회로부터 루터가 교리상의 문제로 피동적으로 결별을 선언받은것 같지만 23) 근본적으로 Thomas de trio Cajetan과는 믿음 개념 정의로 fides aquisita와 fides infusa로 나뉘어 성례의 집행에 따른 주입적 은혜를 주장하는 Cajstan과 그것을 집행하는 교회 즉 ex opere operato에서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갈리워 지게 된다. 23)

루터는 이 심문후 1520년 그의 "Disputatio de fide infusa et aquis- ita",: WA 6.84∼86에서 Cauetan의 이중적 믿음교리와 성례시 사제의 의식속에 성례는 효력이 있다는 것을 반다하고 성례에 참례하는 자는 그것을 믿을 때에만 효력을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루터의 1517년 이전의 저서들에서 루터가 분명히 의신칭의의 개념을 깨닫고 확립했음을 확인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 의 종교 개혁의 근원은 로마가톨릭의 제도적 개혁이었고 이 의신칭의가 실제로 종교개혁에 힘이 되었던 것은 1518∼20년 그의 심문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이 의신칭의에 의한 낮아짐의 신학은 로마가톨릭 교회안의 신학 이었으며 로마서 1:17절 그리고 시편 68, 70편 등의 의신칭의도 그 한 의미로 의미로 해석되어져 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는 루터 의 개혁의 동기 가 깊은 성경의 해석에서 나온 24) 것이라기 보다는 그가 원했던 로마교 회의 개혁 즉 교회내의 개혁과 로마교회로부터 실시된 이단심문의 과 정, 그리고 그의 답변에서, 그리고 로마교회가 그를 이단자로 축출해 내는 과정에서 그의 이미 확인된 의신칭의 개념이 정리되고 개혁의 밑바 침이 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두번째로 루터에게 있어서 이러한 비판신학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오랜 로마가톨릭 안에 젖은 스콜라적 사상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1517년의 "스콜라 철학을 반대함" Contra the- ologiam scholaticam에서 스콜라 신학의 구조적 신학을 반박하나 Ockam으로부터 인유된 후기 스콜라신학 구조는 그의 신학의 초기과정 (1507∼1512)에서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던 사상이다.

 

세번재로 이러한 루터신학의 비평적 시각은 인문주의와의 접촉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루터는 그의 신학수업 이전, 이미 밝혀진대로 Erfurt 대학의 Artium수업을 통해 고전문헌학에 깊이 접촉할 수 있었 다. 루터는 천성이 온화하고 많은 사람을 친구로 만들수 있는 사람이었 다. 특히 이런 성격은 당시의 인문주의자 Erasmus와의 교우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인문주의자 Erasmus는 이성의 가치를 높게여겨 이성에 의 한 비판신학의 기치를 높게 들었는바, 루터가 9月 판 신약 성경의 번역 에서 Erasmus의 헬라어 성경을 원문으로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종교개혁안에서 로마가톨릭 교회의 권위와 교권에 대항하는 이성으로서의 모습을 보았고 그들은 서로를 동지로 확인했으 며, 그래서 1525년 억눌린 자유의지 "De Servo Arbitrio"에서 자유의지 에 관한 견해의 차이로 결별할때까지 서로 깊은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 다. 사실 루터는 인문주의 적 이성과 합리주의 적 신학이 의신칭 의를 방해 하지 않는한 관용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언어학, 역사학 혹은 주변 학문 들을 성경의 의미를 밝히 보이는 도구로서 장려했다. 이러한 인문주의에 대한 관용의 태도는 그 자신 뿐아니라 그의 후계파요, 루터신학의 조직 적 신학자라 할 수 있는 멜랑히톤과의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는 이제 그가 확신했고 주장했던 신학의 체계와 사상이 그의 후계자로 이어지는 멜랑히톤에게서 어떠한 영향으로 작용하여 어떻게 루터교안에 확산되는가 보자.

멜랑히톤은 1497년 2월 16일 서부독일의 팔즈지방에서 출생한다. 그의 외할머니의 동생이 당시 인문주의의 대표였던 Reuchlin이었으며 그의 가문이 나타내는 것처럼 그는 유아기때부터 라틴어 교육으로 성장 하며 Heldelberg Tueblngen에서 고전어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대학후 그는 그의 고전어의 해박한 지식으로 1518년 5월판 헬라어교본을 지어 낼 수 있는 재능을 보였다. 그가 1519년 Wittenberg대학의 히브리어, 헬라어 교수로 초빙을 받고도 그는 역시 해박한 고전미 학자이었으며 루터의 개혁주의와는 동떨어진 인문주의자이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Wittehberg대학의 교수 취임도 인문주의자인 친척 Reuchin 의 추천에 의했으며 그의 대학교수직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어학, 즉 Artium이었지 신학부 교수는 아니었다. (그는 신학부의 박사학 위를 소유하지 못했으므로 평생동안 Wittenberg의 신학보 정교수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 종교개혁에 대한 멜랑히톤의 관심은 비덴베르그에 온후 루터와의 대면애꺼 시작된다. 멜랑히톤의 비텐베르그대학 취임강 의는 25) 루터에 의해 환영받고, 그의 해박한 고전어 지식과 성경가 역까 적 연구는 루터가 그를 개혁의 동지로 인식할 충분한 조건이 되었으며 루터는 그의 고전어와 역사적 성경해석에 동의했으며 그의 의신칭의 사상이 멜랑히톤에게 오해되는 부분에게는 그와 충돌했다. 1519년 비텐 베르그에 들어와서 1년반에, 물론 그는 학생의 자격으로 들어온것은 아니 지만, Baccalarius Theologiae를 획득한 멜랑히톤은 그의 인문주의 적 경향을 따라 소위 "신학적 인문주의 (Christliche Humauismus; BGG 제4권)"라는 색채로 루터와 접근하며 루터는 이 멜랑히튼의 특수성을 인정했고 멜랑히톤에게는 그리하여, 에라스무스와 다른 인문주의자들이 종교개혁을 로마교황권에 반대하는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자신의 인문주의와 혼동한 것처럼, 개혁주의인 종교개혁과 인문주의 사이에 확실한 구별이 희미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루터가 자신이 스스로 구도자의 길을 위해 로마가톨릭에 귀의했고 오랫동안 끝없는 정열로 스콜라철학과 성경연구에 힘쓴, 그래서 그의 신학형성의 기초를 로마가톨릭이라는 상황서, 그곳에서 신부서품을 받은, 그러므로 로마가톨릭과 자의에 의한 필은 관계에 있으며 최후까지 도 그곳에 머물기를 바랬고, 또한 인문주의자들과의 필은 관계를 통해 인문적 지성을 추구하는 다른 면이 있었던 것에 비해, 멜랑히톤은 신학 과는 거의 관계없이 인문주의적인 자유와 지성으로 교육받은 그래서 고전어에 모국어처럼 능숙했던, 학문을 사랑하는 학자이었다. 그의 신학 수업도 루터와의 만남 이후에 결정, 시행되었고 그는 단 일년간의 신학 수업으로 B. Th 학위를 받음으로 공식적인 신학수업을 끝낸다. 그러나 그의 신학수업의 연한의 빈곤이 말해주는 것처럼 그는 신학수업 후에도 여전히 언어 학자이었다. 물론 우리 는 그의 신학적 능력 의 긍정 적 평가로 서 그의 일년의 신학수업 후 학위(B.Th)와 그의 교리서인 Loci com- runes Theologicie; 1521을 저술하여 루터교의 교리신학의 교과서가 될만큼 신학을 정리할 수 있으며, 이 1521년판 Loci에 루터가 칭찬을 아끼지 않을만큼 그에 게 신학의 천재성이 있음을 인정한다(예; Joachim Melhausen ; in Strecker 224∼226; WA. 54, 179). 그러나 그는 1521 년 신학통론을 저술한 후 1522∼1529년까지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간의 심한 선택의 갈등을 겪는다.

 

이 갈등에서 과는 자신을 결국 종교개혁쪽으로 선택하지 만, 그의 신학 에 지욱 수 없는 인문주의적 색채를 나타내게 되는데 그의 1529년 작성 된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to)에서는 루터의 비판을 받을만큼26) 유화한 어조로서 로마가톨릭에 대한 양보와 전통주 의 등을 표방해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의 상황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러한 멜랑히톤신학의 유화적 성격은 그의 오랜 인문주의 적 성장 과정과 개혁신학 연륜의 부족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Stupperich가 주장 하는바 (in: Der unbekannte Melanchthon: 1961.) 그의 이 개방적, 유화적 신학이 후세대 그리고 작금의 교회일치운동에 른 공헌을 했다는 이론은, 오히려 그의 공적으로 돌려지기 보다는 그의 후계자들과 루터의 후계자들간에 나타난 오랜 신학논쟁으로 교리주의자들의 양산을 가져왔 다는 견해를 덧붙일수 밖에 없다.

 

우리는 루터교안에서 일어난 필립 파 "Philippisten"이라 두르는 필립 멜랑히톤의 후계자들과 Gnesiolutheanes라 부르는 루터의 후계자간의 신학논쟁을 통해 이성과 합리가 신학의 요소로서 루터신학안에 어떻게 자리 잡아 가는가를 본다.

1548년 로마 가톨릭의 예배의식을 신교의 의식에 허용하자는 Adia- phora 논쟁부터, 칭의와 구원에 인간의 선한행위(dart gute Werk)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G. Major와 Amsdorf간의 논쟁, 그리고 자유의 지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인간의 협력설을 주장하는 1556년의 Syn- ergi느 논쟁 등으로 루터개혁주의는 한 세대 간을 온전히 型리논쟁의 진뚜한 늑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은 멜랑히톤의 인문주의적 성격과 유화성에서 기원하는 다음 세대의 신학적 결과이었다.

 

멜랑히톤은 성경을 루터의 복음과 율법이라는 사상위에 게시와 이성 이라는 두가지 도구(instrumentum Rationis et Revelations)로서 이해 할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게시가 되어지는 곳에 사랑은 이성의 작용을 통해 개시를 수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한으로, 이 이성이 개시의 수납도구로 작용할때 우리는 멜랑히톤에게서 루터에 악서는 이성중심의 신학과 계시 와 나란히 서는 이성의 필요성을 깨달으며 이러한 신학안에 서 구원에 있어 인간의 동력이 필요하다는 Synergism 토론이 불가피하 였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러한 그의 이성주의는 신의 존재도 이성과 논리로 증명되어질 수 있다하여 중세 스콜라신학의 신존 재증명 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을 받으며, 성경해석에서 신조와 교부들의 서적들 을 성경과 나란히 설수 있다고, 함으로 27) 루터의 사상과 대치된다.

 

루터는 교부들의 서적들이 성경의 권위의 옆자리에 앉는 것을 반대하 며, 오직 성경이라는 개혁자의 입장을 주장한다.

그의 증거로, 아우구스부르그에서 만난 Thomas de Vio, Cajetan과의 대담에서 그가 질문한 교회의 공직부분에서, 즉 그리스도와 제 성자의 남은 공적 이 교회에 쌓여 교회는 그것을 사면받기 위해 회개하는 자들에 게 나누어 줄수 있는 권세를 받았다는 주장과,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Cajetan이 제시한 교황 클레멘트 결세(1342∼1352)의 칙령인 "Unigen- itus" 의 권위를 루터는 그것이 비록 교황의 칙령으로 발표되었더라도 누구도 자신이나 남의 죄를 사해줄수 있을만큼 충분한 공적을 쌓은 사람 이 없고, 사죄는 믿음에서 오며 그리하여 Unigenitus가 성경의 원뜻을 이탈하여 잘못 적용된 결과로 지어진 것이므로 성경자체에 위반되며 성경의 권위 옆에 나란히 설수 없기에 그것에 근거하는 면죄원리는 잘못 되었다고 반박했다. 물론 Cajetan은 루터의 이 반박에 "Hoc est novam ekklesiam construere" 28) 라 하여 지금까지 인정되어온 가톨릭의 교황권 에 반대하는 새로운 이론이라 규정하고 실질적으로 루터와의 결별을 선언하였지만 우리는 루터의 이 대담가운데 Sola Scriptura라는 종교개 혁의 대원칙을 본다. 그러나 멜란히톤에 게는 Sola Scriplura라는 정신이 결여되며 오히려 다시 가톨릭 혹은 스콜라적 구조주의로 돌아가는 느낌 을 받는다.

 

우리는 루터와 멜랑히톤으로 이어지는 독일개혁사 안에서 인문주의와 의 연계관계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인문주의가 추구하는 합리와 이 성, 또한 후기 스콜라 신학이 루터에게 미 친 영 향도 보았다. 물론 루터는 그것들을 그의 개혁과정에서 척 결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이러한 것들은 루터의 성경해석에 남아 성경각권의 경중을 가르는 도구로서의 역활을 했으며, 인문주의에 대한 유화성이 그의 후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한 세대를 온전히 계시와 이성이라는 시점에서 배척인가? 조화 인가의 논쟁을 계속해야만 했었다.

 

Ⅳ.칼빈(Jean, Calvin)

칼빈(Jean, Calvin)은 1509년 7월 19일 불란서의 피카르디 노용이란 곳에서태어나 신학과 일반학문을 대학에서 공부하고 19세때는 법학을 공부하였다. 칼빈이 법학을 공부하게 된 등기는 주교청에 근무하던 아버 지의 권유이었던 것같다. 아버지는 아마 주교청과 개인적 분쟁 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 때문에 그는 주교청으로두터 파문을 당하고 죽음 후에도 교회묘지에 장례되는 것이 거부되었으며 칼빈은 자신의 아버지 의 장례를 위해 주교청에 탄원하여 겨우 허락을 받게되었다. 29) 이러한 분쟁 의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관으로서 더 나은 장래를 누리 는 것을 소원했으리 라 짐작된다.

 

법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역시 당대의 학생들처럼 인문주의와 접촉하 게 되는데 특히 1531∼1532f College de France에서의 시절이었다. 당시 인문주의는 서양사회의 대명사로 여겨졌으며 루터나 멜랑히톤 역시 인문주의에 깊이 심취했던 것럼 칼빈도 세네카의 관용론 De Clementia 를 주석 프랑스 왕께 헌정할 만큼 그것에 통달하게 되었다.

아뭏든 칼빈은 회심전까지 로마가톨릭에 속한 신앙인이었으며, 그후 뜻하지 않은 회심(Subita conversio ad docilitatem)으로 개혁주의로 전향하게 피었다. 칼빈이 자신의 회심을 이러한 진술로 표현한 것은 30), 자신의 완고한 로마가톨릭적 생활 즉 자신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자신의 나이 연소함에도 불구하고 완고하였던 깃과 가문이 완고한 가톨 릭적 신앙에 짖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칼빈은 자신의 회심전의 심경을 "수년에 걸쳐 교황권의 미신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31) 이라고 표현하여 이러한 심경 속에 찾아온 회심 이 기대하지 않았던 회심이라 설명한다. 칼빈이 회심의 경위를 설명 하는 Subita라는 단어는 갑자기라는 의미의 Sudden으로 번역되기 보다 는 non tempora subita 즉 준비되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기대하지 않은 이 란 "unexpected"로 번역되어야 할것이다. 그래서 이 "기대 하지 않은"이 란 개종의 의사가 전연없었던 상태에서 그를 하나님이 개종시키 셨다라는 의미가 적절할 것이다. 우리 는 루터 의 1505년의 경우에서개종 이 아니라 회심 이 라는 단어가 적절하며, 이뢰심은 로마카톨릭 의 사제의 길을 자처한 것이었으며, 반대로 칼빈의 경우는 교황권의 미신"에서 개혁자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개종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을 본다.

 

칼빈에게 이 개종의 사건이 무엇이었는지 역사적으로 밝혀지지는 않으나, 적어도 칼빈이 De Clementia Fraucis 1 왕에게 한정한 후 1534년 10일 파리대학에서 Nicolas Cop의 연설문 기안작업에 동참함으 로 인해 피난 생활을 떠나기 진 즉 1530∼1534년 10인 사이의 어떤 사건 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32) 우리는 여기서 칼빈이 자신의 회고대로, 33) 회심한 후 로마교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복음주의 개혁신앙으로 회전했으며 회심후 다시 그곳에 집착하지 않음을 보여 루터와 대조되는 면을 본다. 그의 시편주석 서문에서처럼 개종한후 1년만에 1년만에 가르칠수 있도 록, 그리고 수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찾아와 배웠다는 증언처럼 그의 개종은 완전하며 철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의 신학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하나님께 영광" 이다. 피의 신학은 루터가 그리스도의 칭의와 사죄에 중점을 두었던 것에 비해 하나님 중심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그의 개종도 그의 증언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고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 구성되는 곳에 성경해석도 하나님 중심의 해석이된다.

 

우리는 우연히도 칼빈과 루터에게 영향을 끼쳤던 고대의 효부들이 아우구스티누스,롬바르두스, 성 버나드 등과 일치할 뿐 아니라 그들의 사상적계보도 유사함을 본다. 특히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체류하면 4·1 Martin Bucer에게서 많은 영향을 밭았다. 그럼에도 칼빈은 그들에게 서 받은 영 향을 로마가톨릭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전통을 버리고 하나님 의 권위와 영 광을 중심 하는 신학을 완성 한다. 신의 인식 (Cognitio Dei) 에서도 인간은 타락하여 신을 인식할 수 없으므로 특별계시인 하나님 자신의 계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 계시신학의 기초를 마련한다. 34) 계시의 윈인으로서 하나님이 강조되는 곳에 하나님은 게시의 주인이 되시고 인간의 협력이나 자질 등은 요구되지 않는다. 이 하나님이 내신 특별계시의 방법으로서 성경을 언급하게 될때 성경을 내신 하나님으로 서의 권위는 일차적인 것이된다(Institutio I, 7, 1).

그래서 성경은, 교회에 의해 권위가 주어졌다는 로마가톨릭의 성경관 을 반박하며 교회가 성경에 의해 시작되고 성경에 따라 존립하며( Institutio I,7, t), 성경이 없다면 모든 사람이나 교회도 오류에 빠질것 이라 경고하며( 1,6,3) 차라리 성경안에서 천천히 달리는 것이 성경없 이 빨리 달리는 것보다 낫다고 언급한다. 35)

 

이렇게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라 할때 (Testamouium Spiritu Sancti) 칼빈에게는 성경전체 즉 구약과 신약을 포함하며, 어떤 신학적 이념에 따라, 영이나 의문,율법 혹 복음으로 나누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 의 계시는 그 자체로 완전하며 스스로 증기하는 것이기에 ( 1, 7, a autopiston) 인간은 하나님게시의 수용자이지 분리자나 평가자는 아니 다. (Instltutio 1, 7, 4)

특히 이러한 그의 사상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 정의에 신구약이 율법 과 복음으로 분리 되는 것이 아니 라 완전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라 한다. 이러한 사상안에서 구약은 충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외되 며,모든 성경은 동등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루터의 사죄와 칭의중심의 성경해석이 칼빈에게는 구약과 신약에 흐르는 예언과 성취라는 구속사적 관점으로서 신구약을 꿰뚫는 사상으 로 정리했으며 (렘 31:31) 구속사적 진행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는 것을 강조한다. (Institutio n, 9, 1∼12, 7) 그래서 칼빈에게서 구약은 하나님의 게시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언약으로 (HO Topos- Typologie) 이해된다. 이러한 신구약의 조화(Harmony)를 이루는 성경 관은 특히 그의 복음서주석 36) 에서 3권의 공관음서를 조화시켜 주석함 으로 복음서내에 서로 배척되는 기사로 인해 성경의 일부를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37)

칼빈은 특히 성경해석중 Allegorie에 의한 유추적 해석을 엄격히 금지 했으며, 간략하고 적절한 가장 정확한 단어를 찾아 사용하는 정열을 보였다.

 

이러한 원칙안에서 성경의 조화를 시도한 칼빈은 성경의 한절 한절을 따로 갈라 해석하는 방법을 끈 양하고 늘 본문의 상호 연결관계를 고려하 여 해석하는 본문안에서의 해석방법(Kontext-Auslegung)을 사용하였 다.

칼빈은 이러 한 해석의 목적을 교회의 덕을 세움에 둠으로 성경해석이 단순히 논쟁의 차원을 떠나 직접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 의 교회를 든든 히 세운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38)

 

V.P. Stuhlmacher

P. Stuhlmacher는 칼빈을 가장 잘 정리된 조직을 갖춘 비상한 천재라 평했다. 또 0. Weber는 그를 가장 훌륭한 조직신학자 (ausgezeichnete systematiker)라 했고 그 가장 훌륭한 조직신학의 배후에는 피의 그칠줄 모르는 하나님에 대한 정열, 즉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성경이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인이 있었다. 그래서Weber가 칼빈을 조직 신학 자요, 그의 기독교 강요가 참으로 우수한 교리서이지만 그 이전에 그가 성경신학자(Biblical Theologe)였다고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옳다.

그의 성경신학적 데 전제는 하나님 중심이었으며 그의 목적은 하나님 에 대 한 순종과 영광이었다. 성경을 하나님 의 완전 계시로 받아들인 칼빈 은 그 望애 어떠한 다른것도 함께 놓기를 거부 했으며, 이성과 합리 혹 교부들의 권위까지도 성경과 함께 할 수 없으며 "오직 성경으로만"을 강조한다. 그래서 사실 개혁자들의 기치 인 "Sola scrlptura"는 칼빈에게 와서야 완성된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칼빈과 베자로 이어지는 신학체계안에서 루터와 멜랑 히톤으로 이어지는 루터주의 신학과 완연히 다른 특색이 나타나는 것을 탈 수 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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