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연구 방법 해석! 분해!

복음주의 과학관과 성경 해석

하나님아들 2024. 3. 11. 23:24

복음주의 과학관과 성경 해석
  

1) 과학적 해석의 가능성
  
라틴어 Scientia는 사람의 지식을 말한다. 이 라틴어에서 영어의 Science가 유래하였다. 이 말을 지금부터 110여 년 전 일본 사람들이 과학’(科學)이라고 번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과학도 인간이 가진 하나의 지식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즉 과학은 자연 세계에 대한 지적이며 실제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와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지식 체계가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종교의 지식체계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를 해석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오늘날 과학 철학은 바로 자연과학에 대한 정의와 물음에 대한 학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표준이 되는 정의 조차 없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는 오늘날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떠나 높이 평가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과학과 과학적 방법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과도한 기대와 본질의 모호함 속에서 기독 과학 철학자인 델 라치(Del Ratzsch)는 과학의 본질은 최소한 경험성(the empirical)과 객관성(the objective)과 합리성(the rational)을 본질로 한다고 말한다. 
성경이든 과학적인 데이터든 모두 해석을 통해서 산 의미를 갖는다는 면에서 오늘의 컨텍스트(context) 아래에서 이 둘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 지를 다루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종교와 과학은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의 담을 쌓아온 면이 없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성서 해석에 있어 과학적 해석이 왜 필요한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경이 과학적으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먼저 성경은 창조의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더욱이 성경은 우주가 시작될 때 시간(태초, bereshith)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우주의 연대 문제는 진화론에서도 관심 사항이므로 과학적 논증의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다. 과학이 아무리 성경과 다른 언어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다른 책인 자연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서론에서 밝힌 것처럼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성경을 탐색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자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사반과 토끼는 일반적으로 되새김 동물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 사반을 되새김질 동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무조건 과학적 논리로 풀려고 하면 오히려 성경을 미련한 책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 성경 해석에 있어 과학적 논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금새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해석자는 자기 스스로 사반은 되새김 동물이 아니라는 과학적 해석을 전제하고 과학의 언어로 성경을 보지 말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이 해석자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이 말하는 되새김의 범위를 훗날 생물학자들이 만든 분류학(taxonomy)의 틀에 갖다 넣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멸종된 생명이나 검증 불가능한 동물에 대해서도 창조론과 무신론은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성경은 오늘날 생존 하지 않는 여러 동물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다. 이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용과 유니콘(一角獸)이다. 그 이외에도 거수(巨獸), 리워야단, 세이터 등이 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이들을 전설적인 동물로 해석한다. 하지만 복음주의 주석가들은 용은 고래 혹은 뱀으로, 유니콘은 들소로, 거수는 코끼리 혹은 하마로 번역한다. 거대한 리워야단은 악어로, 세이터는 들 염소로 번역되고 있다. 낯선 동물들에 대한 동물 해석은 현존 동물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에 나타난 리워야단(Livyathan)이나 탄닌(thannin), 라합(rahab), 비히못(behemoth) 등을 공룡이나 어룡 등 과거에 멸종해버린 자연적 동물로 보느냐(the naturalistic perspective) 아니면 신화적인 동물로 보느냐(the mythological perspective) 상징적인 존재로 보느냐(the emblematic perspective)에 따라 해석 전반에 대한 다양한 단면들을 얻을 수 있게 된다. 

 

표 1.성경에 묘사된 공룡 유사 동물(*참조: 히브리어 철자가 좌우 뒤바뀌어있음)
히브리어 원문
로마어 표기
성경에 나타난 빈도
ןינת
t(h)annin
29/ 12/ 1: 21 
ןתיול
livyathan
5/ 3/ 41:1-34,  27장 외
תמהב
behemoth
1/ 40:15-24
בהר
rahab
5/ 3/ 9:13, 26:12,  87:4, 89:10,51:9
공룡(dinosaur)이라는 이름은 영국의 오웬(R. Owen) 1841년 붙여주었고 성경의 영문 번역은 1600년 경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당연히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용은 구약에서 25회 이상 언급된다. 이들 중 하나는 바다에 있는 용으로 불리며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과 동일어로 사용되고 있다. 욥기 41장에는 리워야단이 악어로 번역되어 있다. 사실 이 동물에 대한 어원적 분석(etymological approach)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 논문의 논제에도 벗어난다. 여기서는 단순히 이 동물 자체를 분석해 본다. 이 뱀은 불을 뿜는 동물로 묘사된다. 불 뿜는 동물은 과연 존재하였을까? 지금은 물론 그런 동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나라의 전설이 불을 뿜는 괴수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전설의 용은 불을 뿜는 동물이었다. 역사적 동물이냐 상상 동물이냐 아니면 역사적 동물이기는 하나 멸종된 이후 그 이미지가 변색되어 온 것인가 그런 부분들이 해석될 필요가 있다. 물론 어떤 관점이 보다 더 진리에 가까운가 하는 사실이 중요할 수 있다. 즉 과학적 해석 자체가 성경의 권위 내지는 무오성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해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와 같은 해석의 다양성을 통해 먼저 계시로서의 성경과 세속적 신화 사이에 어떤 충돌과 연속성이 있었는지를 배우고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과학과 관련된 이러한 성서 해석은 UFO 진위 논쟁, 유전공학, 의약, 생명의료윤리 등에서 우리의 일상 신앙 생활과 당장 뗄 수 없는 판단을 강요한다.
이와 같이 여러 부분에서 과학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해석의 중요성이 금새 드러나게 된다. 과학이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영역은 이밖에도 다양하다. 그 중 하나는 생태적 환경과 관련한 과거의 역사를 탐색하는 부분과 특별히 초 과학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태초의 창조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과학의 역할은 중요하다. 진화론에서는 제임스 허튼(J. Hutton) 이래로 동일과정적인 지질학적 역사관(uniformitarianism)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성경은 대격변론적인 홍수의 역사성(catastrophism)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성경과 과학의 문제에 대해 일찍이 해석의 원리를 제공한 사람은 침례교 신학자 버나드 램(Bernard Ramm)이다. 그는 성경과 과학의 해석의 원리로 첫째.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할 때에는 성경에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주장이 아니어야 한다. 둘째, 성경의 언어가 믿기 어렵다는 점이 성경 무오성에 대한 이의 제기는 될 수 없다. 셋째, 성경이 그 당시의 문화적 조건 속에서 계시 되었다는 점이 성경을 부정하는 도구가 되면 안 된다. 넷째, 성경과 현대 과학 사이의 너무 지나치게 많은 상관(相關) 관계를 찾으려는 시도는 적절치 않다. 다섯째, 창세기 1장은 창조의 대강 윤곽만을 보여준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5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 버나드 램은 적응의 이론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적응의 이론이 신학적 이슈에 있어 주로 자유주의자들의 도구가 되었다고 논증한다. 램의 견해에 따른다면 개혁주의자 칼빈의 적응의 이론에 대해 복음주의자들이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온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성경과 과학에 관한 한 램의 성경과 과학의 해석 원리는 적응의 이론을 많이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는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 과거 해석자들보다 훨씬 풍부한 이해의 범위와 경험을 가지고 텍스트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슐라이에르 마허가 말한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의 최소의 공통 분모라 할 수 있는 선이해(preunderstanding)가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자연 계시와 적응의 이론은 이렇게 서로를 보충하며 과학의 발달 가운데서 보다 점진적인 성경 해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고 본다.
  
2) 과학적 방법과 성경
  
과학의 일반적인 방법은 먼저 관찰의 대상에 대해 관측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자료를 분석하고 필요하면 실험한다. 시간과 상황과 조건을 달리하여 어떤 조건 아래에서도 실험의 결과가 동일하게 나타나면 비로소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학적 방법은 탁월한 설득 수단이 될 수 있는가. 포스트모던 과학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 충격적인 보기가 바로 뒤하임-콰인 논제(Duheim-Quine thesis)로 실험이 이론적 가정을 궁극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실험 자체도 그 실험을 지지하는 많은 이론의 신빙성에 의존한다. 실험이란 결국 개인이나 집단의 의견, 아이디어, 전통 등과 같은 이론이 태어난 문화와 사회의 그물망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일반적 과학적 방법이란 성서적 해석에 많은 제한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창조의 사실에 대해 관측하고 실험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칼 포퍼(Karl Popper)가 분명히 한 것처럼, 과학적 이론의 보편적 명제들은 검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증 사례를 들어서 잘못된 것임이 입증될 수는 있다. 예를 들어서 모든 백조(swans)는 하얗다는 것은 결코 검증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백조를 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마리의 검은 색 백조(swan)가 나타나면 금새 이 명제가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반증의 원리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과학적 방법이고, 과학은 명확히 잘못된 존재를 드러내는 법(the art if being precisely wrong)이라고 포퍼는 주장하였다. 상대주의적 경향들을 막아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포퍼의 이와 같은 주장은 토마스 쿤(Thomas Kuhn) 과학 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에의해 곧 무너졌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의 한계가 과학적 설명 즉 성경에 대한 과학적 해석의 필요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많은 기독교인 과학자들은 과학적 방법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들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 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성경 해석과 과학 해석에 아무런 갈등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성경 해석처럼, 과학적 방법 자체가 가진 논리 안에서 해석은 언제나 가능하다. 비록 창조를 관찰한 사람이나 창세기 대홍수 사건을 재현(再現) 하거나 직접 목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나 과학적 해석은 가능한 것이다.
  
3) 복음주의 과학관과 신앙의 전제
  
포스트모던적 사고는 과학의 기원으로부터 발전에 있어 기독교적 사고의 틀을 거부한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에게서 잘 나타난다. 하지만 복음주의 과학관은 복음이 있음을 전제한다. 자연은 신성한 것도 아니요 영원한 것도 아니다. 이런 성경적 사고는 자연에 대한 실험을 용이하게 하였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영향권에서 과학이 발전한 것은 당연하다. 기독교는 과학의 영역이 영원히 자연에 순종하는 과학이 아니라 때로는 창조주인 신이 직접 개입하여 그 질서에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본다. 반 틸(C. Van Til)이 주장하였듯 기독교 신앙의 전제가 필요하듯, 과학 안에도 마찬가지의 전제가 분명 있다. 근대 과학의 초기 견해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으로부터 나왔다. 베이컨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탐구하는 주제에 대해 모든 편견에 대해 자유롭고 어떤 이론이 옳다는 선호도도 없으며 은밀한 종교적 철학적 전제로 인해 방해를 받지 않으며 객관적인 자세로 관찰하고 자료를 모으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경험론을 선호하였다. 사실 전제 없이 시작해야 한다는 베이컨적 사고도 분명 전제이다. 모든 전제를 배제하면 결코 생산적인 자료는 수집되지 않는다. 탈봇(Talvot School of Theology)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모어랜드(J. P. Moreland) 기독교와 과학의 본질(Christianity and the Nature of Science)에서 과학의 명확한(clear-cut) 정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물론 과학의 방법론은 존재한다. 하지만 모어랜드는 그 방법론은 다양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방법론은 그 본질에 있어 보다 더 철학적이다. 여기에 신앙적 과학의 방법론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과학에도 전제가 따라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틸(C. Van Til)의 견해가 아니더라도 성경을 믿는 것은 전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복음주의 과학관의 흐름에 반하는 전제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이들, 복음주의적 부흥주의자들, 정치적 이상가들, 심지어 기성신학들의 조금 동요된 옛 사제주의도 모두가 자신들의 신념들이 과학의 혁명적 발견들에 의해 시대에 뒤쳐지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새로운 사제주의(the new priesthood)에로 향한다. 이 새로운 사제주의는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때로는 일정한 정식(formula)을 가지고, 또 때로는 수사(rhetoric)에 의해서, 그러나 언제나 과학을 가지고서 재확인이 주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오히려 과학과 신학의 논쟁에 충돌과 갈등만 가져다 줄 수 있다.
자연에서 관찰 가능한 형태들을 통해 관찰 불가능한 형태와 과정들에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은 과학의 전제이다. 우리는 원자나 그와 같은 소립자들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인간이 볼 수 있는 보다 더 큰 규모의 물체에 의거 소립자들의 존재가 있음을 안다. 그 반대의 경우에도 전제가 가능하다.
과학에 대한 적응의 방법은 충돌을 피하면서 창조와 구속이라는 전제를 해석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복음주의 과학관과 성경 기적(奇蹟)의 문제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의 기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기적은 불가사의한 일을 뜻하는 라틴어 미라쿨룸(miraculum)에서 왔다. 자연이나 사건의 흐름에 대해 초자연적 간섭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적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면 다양하다. 오늘날까지 성결파 및 오순절 복음주의자들은 신유와 방언의 기적이 유효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18세기 철학자 흄(David Hume, 1711-1776)은 기적은 자연법의 위배로 보았다. 흄은 종교에 관한 자신의 두 저서 종교의 자연사(The Natural History of Religion)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 에서 우주 질서의 원인이 되는 지적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신은 우주 질서의 원인으로서 가정된 이신론적 존재(a deitistic being)이며 따라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기적은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흄에게 있어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흄이 볼 때에 혹 신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일반 법칙이 깨어지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기적은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20세기 초 과학자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기적을 거부한 사례가 늘어나자 복음주의 신학자 워필드는 우리 마음에 품은 세계관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한 정당한 고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기적을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워필드는 기적은 사도들이 교회의 토대를 놓음과 함께 그쳤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성경을 과학의 틀 속으로 가져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즉 피조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과율(因果律)에 사로잡힌 희랍인들의 구조 안에서 기적은 존재할 수 없다. 기적이 그들의 틀 속에 잡힐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 있어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하나님이 단지 무엇을 하시며 그 일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그들의 의문의 영역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과학적 검증은 희랍인의 몫이지 결코 유대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성경은 과학 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쓰여 지지 않은 책이다. 자연과학적 영역과는 관심 분야가 다른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우리가 갖는 신앙적 믿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두 권의 책(말씀의 책 성경과 하나님의 활동의 책 자연)은 때로는 근접하기도 하고 어떤 시기는 우호적이었으며 어떤 때는 서로 간에 무관심한 영역으로 치부하여왔으며 어떤 때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여왔다. 그것은 간혹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필요한 긴장이기도 하였다. 
복음주의 과학관으로 볼 때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과학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하였다. 헨리 모리스는 엔트로피(entropy)의 법칙이 성경 창조의 기적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럴 경우 참된 기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과 과정들의 관계에 비추어 정의 될 수 있다.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도 당연히 성경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류까지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는 하나 창조주 하나님 스스로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성경이 과학의 언어로 쓰여 지지는 않았으나 과학의 이름으로 탐색하는 일이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고 볼 수 있다. 
 
조덕영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