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靈),혼(魂), 육(肉)에 대하여
글/ 김종수 목사
영, 혼, 육과 같이 인간의 구조를 3 부분으로 이해하는 삼분설자들은 인간의 그 기능을 각각 3가지 유형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영 : 히브리어로는 루아흐(j'Wr,, ruach)이고 헬라어로는 프뉴마 입니다.하나님과의 교통 관계를 가지는 곳으로 보통 성경에는 성령으로 번역되었습니다.즉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인간 됨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하는 인격의 본질입니다.
예레미야 10장 14절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여기 '생기'란 단어는 루아흐로 사람에게 주신 영을 말합니다.우상에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그 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우상은 생기가 없으므로 차라리 사람의 이성(理性)보다 그 가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상 종말이 되면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자, 곧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자기를 위해 만든 우상을 만들 것입니다. 그우상에게 생기를 넣어 우상이 말을 하게 된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3장 15절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여기 말하게 되는 우상의 생기도 역시 프뉴마(pneu'ma)로 영이라 했습니다. 거의 인간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말하는 우상은 세계적으로 이슈가 될 것입니다.
스가랴 12장1절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라고 하는 말씀에서 사람 안의 심령이란 단어는 루아흐(j'Wr,, ruach),곧 영(프뉴마, pneu'ma)을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욥기 12장 10절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는 말씀에서 생물들에게는 혼으로 인생에게는 영이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혼은 히브리어 네페쉬(vp,n,)이며 영은 루아흐(j'Wr)입니다. 네페쉬도 사람의 영을 뜻할 때도 있으나 여기에 대조적으로 두 단어가 사용될 때는 동물의 기본적 정신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네페쉬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구절에는 인생의 혼과 짐승의 혼을 같은 단어 루아흐(j'Wr)로 사용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짐승에게도 사람의 영혼과 같은 영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짐승은 죽어 없어지고 사람의 영혼은 위로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3장 21절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줄을 누가 알랴'
동물에게는 영이 존재한다는 뜻아 아니고 다만 생명의 본능적 기능으로서 동물 나름 대로의 감정 좌소가 있음을 뜻합니다. 성경에 죽은 동물의 영이 돌아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물의 영이라 할 때 사람과 같은 영혼의 존재가 실재해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만이 하나님의 관리를 받는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 편의상 표현된 것인 줄 알 것입니다.
혼 : 히브리어 네페쉬(vp,n,)이며 헬라어는 푸쉬케(yuchv)입니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는 말씀에서 처음 영혼에 대한 단어가 출현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다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생기는 네페쉬(vp,n,)로 기록되었는데,이는 헬라어 푸쉬케(yuchv)로 보통 3분설자들이 혼이라 번역하기 원하는 단어입니다.혼이라 번역하는 네페쉬가 때로는 하나님 자신이나 당신의 뜻할 때도 사용하셨고 혹은 사람의 시체를 말 할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예레미야 51장14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로 맹세하시되 내가 진실로 사람을 황충 같이 네게 가득히 하리니 그들이 너를 향하여 소리를 높이리라 하시도다'는 말씀에서 '자기'라는 단어가 네페쉬(vp,n,)로 사용되었습니다. 레위기22장 4절 '아론의 자손 중 문둥 환자나 유출병이 있는 자는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말 것이요 시체로 부정하게 된 자나 설정한 자나'라는 말씀에서 '시체'라는 단어가 네페쉬로 사용되었습니다.
대체로 혼은 인간의 정신적 면을 고려할 때 사용되어지는 낱말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영감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이미 그 혼의 상태가 영적 활동으로 하나님께는 영이 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질은 하나이나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는 인간적 사고에 머물지만 그것이 성령으로 중생함을 받게 되고 성령의 인도를 얻게 될 때는 하나님의 영으로 사유하고 활동하게 됩니다.
기원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빚으시고 당신의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셔서 완성하신 바 인간은 2가지 요소로 창조되었습니다. 원죄를 지은 후 인간의 영은 하나님을 떠나 사단의 영감에 감염되고 훈련되어 육체와 함께 거룩한 영적사유가 죽게 되었습니다. 단지 우리가 인격 전체를 논하려 할 때 3가지의 본질로 조직된 것처럼 오해하는 것뿐입니다.
성경에서 영, 혼, 육체 그리고 골수 같은 용어들은 영적으로 정신적 가치를 높일 것을 권면하려 할 때 동원되는 전인을 뜻하려는 용어의 용례일 뿐 인간의 질적 요소를 세 가지로 교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그러므로 영혼에 대한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 사용은 혼용하고 있으므로 영이라든가 혼이라는 말은 같은 한 질적 요소를 달리 사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다만 강조하는 부분에 따라 어감을 달리 하고자 하는 편리에서 선택되어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일반적인 정신의 세계를 이원화해서 영과 혼으로 구분 짓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질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문제는 이 3분설은 대개 신비주의자 혹은 철학가들의 관념에 충실한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영감주의에 너무 심취하게 되면 사람의 일상적 정서와 현실생활마저 무가치한 것으로 비하하는 이원론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너무 영, 혼,육을 가려 분리 생각하면 세상의 일 자체가 비관되어 우울증이 생길 수 도 있습니다.일상 생활에 영적으로 유쾌하게 지낼 수도 없기 때문에 이런 논리에 인박히면 매사에 엑스터시(Ecstasy)한 감정에만 의존하고 역사의 사실적인 것들에 대해 부정하려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이단 시비에 연루된 자들은 대체로 3분설자 들입니다.
육 : 히브리어는 바사르(rc;B,, basar)이고 헬라는 살커스(savrx, sarx)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3장 19절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육신의 원료가 흙이 아니고 만약에 금이었다면 사람이 죽어 모두 금이 되어 산과 들에 가득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지구촌의 흙으로 사람의 육신을 만드셨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입니다. 또 흙은 흙 속에 무엇이든 던지면 모든 것을 희석시키고 또 새로운 흙으로 변하게 하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물질입니다.하나님의 창조는 흙에서 갖가지 나무와 열매를 내게 하시는 신비를 연출하십니다. 이것은 사실상 기적의 연속이고 신비 그 자체입니다. 짐승도 흙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창세기2장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그래서 짐승도 죽으면 땅으로 묻히고 흙으로 돌아갑니다.흙은 더러운 것도 받아들여 새롭게 하고 금과 은과 온갖 자원을 토해내고 샘물을 주고 기름도 냅니다.인간이 흙에서 나왔으니 결국 흙과 같은 존재의 역할을 할 법도 한데 불행하게 그렇지 못합니다. 사람이 흙의 원리만큼만 산다면 최고의 삶이 될 것입니다. 3분설은 영혼의 상태를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려다가 결국 구조적으로 영과 혼을 분리하는 가운데 성경에 근거 없는 논리가 되어버렸습니다.하나님은 흙의 원료로 사람을 디자인하시고 그 코에 생기(하나님의 숨)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고 하시므로 3분설의 구조학은 옳지 않습니다.
(2) 2분설
성경적으로 인간의 조직에 있어서 그 질적 요소로는 2분설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인간은 육(흙)과 영(혼)으로 창조되었습니다.성경은 영과 혼을 번갈아 가며 육과 함께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여기 '영혼'이라 번역한 원어는 3분설자가 말하는 인간의 정신, '혼'을 뜻하는 헬라어 푸쉬케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결국 여기 사용된 혼은 영을 다른 단어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영혼이라고 번역한 국역은 잘 된 번역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9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여기에서도 '영혼'의 단어는 역시 푸쉬케로 기록되었고 영을 말하는 프뉴마와 동의어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고 할 때, '영혼'으로 번역된 단어는 역시 프뉴마입니다. 그러므로 국역에는 영혼이란 말로서 영과 혼을 함께 잘 번역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0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예수님의 영혼에 대한 원어는 프뉴마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인간의 본질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다는 표현을 영 혹은 혼으로 표현함으로써 우리는 2분설이 성경적이라 봅니다. 물론 두 가지의 학설은 신학자들이 모두 수용하고 있습니다.
영혼 육
여기서 2분화, 3분화의 두 견해가 성립된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영적 존재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인간이 지음을 받을 때는 3분화 된 존재가 아니었는데 원죄로 인해 타락한 후 3분화 된 것처럼 오해하는 것뿐입니다.하나님을 만난 새로운 영혼의 상태와 그 의지가 있는가 하면성화(聖化)되어 가는 중에 인격적 갈등을 겪는 본성을 인간적인 정신이라 하고 혼의 생각이라 합니다. 그러나 결코 인간의 조직이 영과 혼과 육의 3가지 구조로 지음 받지는 않았습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두 요소로 만드셨고 그 후 타락한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이성의 합리주의로 이 세상을 사는 것뿐입니다.본성 자체로만 살 때 우리가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로 소위 신령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영이니 혼이니 하는 말보다 쉽게 사용하는 정신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의 존재가 아니라 한가지인데 어떤 사고를 하느냐에 따라 육적이냐 영적이냐를 구분하게 됩니다.
인간은 육신과 영혼으로 조직되었고 단지 타락한 영혼이 변화하여 하나님과 말씀의 근거로 성령 안에서 살게 될 때 우리는 이것을 신령한 삶이라 합니다.그런데 괴로워 하는 것은 혼적이고 즐거워하는 것은 영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얼마든지 거룩한 고민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신령한 영적 고민입니다.
고린도후서7장 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따라서 성도의 기본적인 교회 중심의 생활은 영적인 삶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 예배하는 정규적 신앙생활은 이신령한 생활입니다. 무슨 무아지경의 영에 이끌려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성령과 진리로 깨우친 이성적 판단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와 감사와 충성을 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2)살았으나 죽은 존재
죄인된 인간은 사실상 육신이 살아 있으나 죽은 존재와 다를 바 없습니다.성경에서 생명과 사망에 관한 표현은 단순히 육체적인 것을 뜻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영혼의 상태로 사는 인간은 살았으나 이미 꺾어진 꽃나무처럼 죽은 상태입니다. 즉 사형선고를 받은 자의 기다림처럼 삶의 그 마지막은 영원한 멸망이 정해진 상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살아 있다고 하나 죽은 존재와 다름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 허물과 죄,파라프토마(paravptwma)와 하말티아(aJma rtiva)라는 말은 비슷한 의미로 하나님의법에 어기는 모든 죄악상을 말합니다. 고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은 영생에 관한 감각이 없어졌고 그 기능을 잃은 상태로서 사후의 세계에 대한 사유가 없으며 대책도 없으며 지상 문화의 삶에 대한 거룩함도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영혼의 존재는 끝내 죄로 죽고 말 것이며 살았으나 죽은 자처럼 세상의 짧은 삶에도 진정한 행복이 없고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불안과 불행의 연속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죽음의 근원적인 연유는 원죄(原罪)라고 하는 죄를 짓고 받은 형벌입니다.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동산에 살게 하셨는데 동산중앙에 있는 실과를 먹지 말라 먹으면 죽으리라는 하신 명령을 어겨서 인생은 죽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뒤 원죄가 뿌리가 되어 여러 가지 죄악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본래 사람은 죽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원죄로 인해 사망이 오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삯'이란 원죄의 삯, 곧 하나님의 형벌인 죽음을 뜻합니다. 이 죄는 첫 아담과 하와가 지었던 죄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 원죄를 진 사람같이 되어버렸습니다.그러니까 아담 대표설이란 신학적 용어가 생겼습니다.
로마서5장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구약성경의 기록상 가장오래 연명한 자는 므두셀라로 969세를 향유했습니다(창5:27). 그리고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에는 수백 살을 사는 것은 보통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인간의 정서나 환경적 요소 등을 생각할 때 장수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노아의 때 홍수가 있은 뒤부터는 사람이 그 전처럼 오래 살지 못하고 급격하게 수명이 단축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음식도 채식이었으나 홍수 이후는 육식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3장 18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이라고 하셨다가
창세기9장 3절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고 먹을 음식을 추가하셨습니다.
육식과 채식은 골고루 섭취하면 좋습니다.그런데 이것은 지금의 상식이고 태초 인간은 육식을 허용 받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악해지고 정신과 함께 체질적 변화가 따른뒤에 육식을 허용 받았습니다. 대체로 문학과 예술적 감성을 소유한 자들은 채식 위주라 하고 사업과 힘을 사용하는 체육인들은 육식을 위주로 합니다.인격은 무관하지만 성향을 나타낼 수는 있습니다.
사람의 중심이 되는 영혼의기능이 상실되니까 생각하는 것이 생명이 없고 만들어 내는 문화가 죽음으로 가게 됩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활동하는 모든 것이 생명이 없게 되었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보실 때 영적으로는 죽은 존재이어서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들의 생명을 다시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어 영적으로 살아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중생함을 받아서 영이 살았으므로 성도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순간에 부활의 몸을 입어 영생하는 몸이 될 것입니다.
3)내세를 갈망하는 인간의 종교심
비록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이라도 그 영혼의 본질적인 성격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입김을 받은 바 영생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동물과 달리 영원을 사모하는 정신이 있고 또한 사후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영적 성질 때문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는 그러한 영원을 사모하는 정신 때문에 종교를 만들고 구원을 얻고자 하는 줄 믿습니다. 죄인이라서 완전하지는 않으나 그 영생의 기질은 발휘합니다.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것은 결국 영생이 가능하고 영원히 살수 있는 심정이 내재해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그 방법을 스스로 알 수 없을 뿐이지 사람은 영원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때 하나님의 예정된 택한 백성이라면 반응할 영성을 가지고 그 음성을 영적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그 영성의 기능을 성령께서 살리시면 잊고 살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놀라운 회생(回生)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重生)이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는 불신자도 부활을 하여 영원히 살게 되는날이 옵니다. 그러나 성도는 생명의 부활로 변할 것이며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로 서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5장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나님이 부르시면 영혼이 육에서 빠져 나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영과 육이 분리가 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정의합니다.그런데 혹 뜻이 있어 하나님이 그 영혼을 도로 불어넣으시면 육신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물론 죽은 지 오래되어 시체가 썩어도 상관없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어도 영혼을 다시부르시니 살아났습니다(요한복음11장).본래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사람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주장하십니다(인명재천,人命在天).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갈지라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마지막 심판 때가 되면 지구촌에 왔던 모든 사람은 부활을 입게 되고 영원한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지금은 영혼과 육신이 서로 분리된 죽음의 사람이 그 때는 다시 합쳐져서 본래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다시 육체에 넣으시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아무리 죽을 지경이라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죽지않고 아무리 살려고 해도 살 뜻이 없으면 죽게 됩니다.
이것은 운명론적인 사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과 역사하심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궁금하고 두려운 것은 죽음일 것이며 이 죽음을 해결하려고 만든 것이 종교입니다. 영원히 살려고 하는 삶의 욕망은 속된 세상살이를 슬프게 합니다.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세상의 삶에 대해 우리는 허무함을 깨닫습니다.때문에 영원한 삶을 희구하여 종교를 만들고 또 찾아 나섭니다.
3. 구원의 확신
구원은 이론만으로 진리를 깨우치는데 부족합니다.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의 구원을 제대로 확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특별한 신앙 간증이나 우리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경험으로 미루어봐도 체험 없는 신앙은 지속되지 못하고 흔들리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알고 입으로 시인한다 하여도 그 말씀을 좀더 인격과 생활 속에 체질화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경험이 요구됩니다.
누구든지 입으로 예수를 주님이라 말은 하지만 속으로 다 믿는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라는 것이 종교적으로 단지 예수를 믿고 이 세상의 문화적인 도움을 받는 정도로 생각하는 보통의 종교인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실 중생받지 못한 자요 영적으로 완전한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 자로서 아직 영생을 체득한자가 아닙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할례를 받게 함으로써 외적 표시를 하면 확인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영적으로 성령의 인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은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2천여년 전에 이 땅에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고 우리 죄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게 하시어,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내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그 언약은 구약 성경에서 계속적으로 예언하시다가 신약에 더디어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그 약속들에 대한 말씀을 당시의 사람들에게 직접 이해시키시고 자신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친히 증거 해주셨습니다.이 사실을 믿고 성경대로 전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진리의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이 놀라운 속죄의 길과 내세의 길을 2천년 기독교 역사는 계속 증거해 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이언약의 복음을 개인적으로 확신하지 않으면 교회를 다녀도 그 사람은 단순한 종교인일 뿐이지 구원을 받았다고는 볼 수 없는 자가 됩니다.그러므로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구원론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13장 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
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에 대하여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어떻게 구원을 확신합니까? 역시 성경적인 증거를 찾아서 우리들이 믿고 있는 바의 신앙을 검증(檢證)해야 합니다.우리가 스스로 확신을 해도 잘못 오인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단에 깊숙하게 빠진 신도들의 태도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확신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성경대로 믿고 확신하는 일은 구원을 얻는데 필수적입니다. 자기 구원이 모호한데 어찌 하나님이 구원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일에 한번쯤은 성경과 교리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들의 신앙이 더욱 굳세어져서 모호한 시대를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자기 구원에 대한 확신은 어쩜 필수 사항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개인적 관계를 확실시 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3장 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그런데도 구원의 확신은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도 있고 성도들 중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오해합니다.그러나 구원은 확신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죽어봐야 저승을 안다는 무지한 단언은 성도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 예수께서 오시지 않았지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그 주님의 날을 기다립니다.
아직 사회적 경험이 안되었지만 천국과 지옥의 실존을 믿습니다.때문에 우리들의 개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자념됨을 확신합니다.부활의 날에 가서야 알게 될 바가 아니요 이미 구원의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 구원의 확신 때문에 고백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란 자기 구원의 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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