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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혼(Soul)

하나님아들 2023. 12. 10. 14:27

영혼, 혼(Soul)               

 

I. 전통적 기독교에서 보는 영혼은 인간의 인격 속에 있는 이성과 의지의 장소이다. 이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므로 육체적 죽음 후에도 계속 살아 있는 영적인 실체이다. 이 영혼의 개념은 길고도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며, 현대의 신학자들은 이 개념의 역사를 재해석함으로써 또다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도, 신약성경에서도, 영혼의 개념에 관한 어떠한 발전도 찾아 볼 수 없으며,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에 대한 별다른 이론이 없었다. 히브리 사상은 헬라의 사상과 달리 인간을 하나의 살아있는 육체로 생각하였고, 육체와 영혼을 대조시켜 생각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은 전체적으로 헬라의 사상 보다는 히브리 사상에 가까웠기 때문에, 영혼의 독립적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는 구절은 몇 구절에 불과하다. 기독교를 헬라-로마 문화 속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신학자들은 헬라 철학과의, 특히 플라톤주의자와의 화해를 시도하였다. 플라톤

 

주의의 심장부에는 파괴될 수 없고 죽을 수 없는 영혼에 대한 개념과, 그 영혼의 구원은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데에 있다고 하는 사상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헬라 사상을 기독교라는 직물에 짜 맞추어 가는 과정 속에서, 신학자들은 히브리 사상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플라톤주의가 영혼을 불멸의 신적인 실체로 생각하는 반면, 기독교는 영혼이 창조된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죽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플라톤주의가 육체를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면, 기독교는 육체를 선한 것으로 보고 의지의 왜곡을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플라톤주의가 영혼불멸을 희구하였다면, 기독교는 사자의 부활을 찾았다. 기독교의 신조들이 고대 히브리 인간학의 잔재를 그 속에 수용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말해서는 헬라의 사상이 승리하였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함으로써 헬라적 개념과 히브리적 개념을 인상적으로 종합하였다. 아퀴나스는 선장이 배를 지휘하는 것과 같은 플라톤적인 육체와 영혼의 관계를 지양하고, 한 실체, 혹은 한 인격 안에 구분될 수 있는 두 요소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혼은 자연적 상태에서는 아니지만 육체가 죽은 후에도 살아 있어서 부활 때에 육체와 재결합 한다고 믿었다.

 

개혁자들은 이러한 아퀴나스의 견해를 영혼의 미래의 상태에 관한 상술을 제외하고는<참조: 연옥, 림보> 대체로 받아들였다.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영혼불멸의 개념은 그들의 이상주의에 부합하기 때문에 이를 간직하였으나, 부활의 개념은 문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불필요한 부록으로 취급하여 이를 버렸다.

 

신개혁주의 신학은 헬라의 철학적 전통, 특히 영혼의 불멸 사상에 대한 깊은 의심으로 특징 지워진다. 영혼불멸은 비성경적인 것이며, 육체와 육체적 경험을 격하시키는 것으로 믿어졌다.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들은 영혼불멸의 개념이 하나의 대상화(objectification)이며, 철학적으로 부당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문헌 속에서는 자아에 대한 분석은 많이 등장하나, '영혼'이라는 단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체로 육체의 부활이라는 상징에 대해서는,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를 다시 중요한 것으로 고찰한다.

 

II. 성경에 나오는 몇 가지 단어들의 번역어이다.

KJV 구약에서(추적의 실마리가 현대번역어들에서는 어느 정도 삭제되고 있다) soul은 거의 히브리어 nephesh만을 표현한다. 영어에서 soul이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는 그 히브리 단어를 자연스럽게 표현해 주기는 하지만, 히브리어의 '네페쉬' 개념을 결하고 있는 희랍철학(플라톤주의).오르퓨스교. 영지주의 등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 관념들 때문에 흔히 히브리어의 '네페쉬' 개념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표현하게 된다.

 

구약성경에서의 '혼'(또는 영혼.영)은 불멸의 영혼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본질적으로 생의 원리 또는 살아있는 존재, 즉 욕망과 감정을 지닌, 그리고 때로는 의지까지도 지닌 주체로서의 자아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의 psuche는 구약성경에서의 nephesh에 상응한다. 그러나 '푸쉬케'는 비교적 적게 나온다. '푸쉬케'라는 단어는 '생명'을 의미하는 옛 희랍어 용법을 계속 잇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새로운 심리학적 특성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때때로 soma와 pneuma라는 단어들을 사용하기를 더 좋아한다. 한두 번 그는 psuche라는 말을 낫게 평가하기도 한다.

 

1. 구약성경에서의 혼

(1)nephesh의 어원

이 히브리 단어는 아마도 '확장하다'를 의미하는 아카드어 napasu로부터 유래되었을 것인데, 그 아카드 단어는 '목'이라는 의미를 지닌 napistu라는 단어를 암시해 준다. napistu는 '숨'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숨-영혼'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구약성경의 잡다한 경우들에서 '목' 이라는 의미가 암시된다. 예컨대, 사 5:14, 29:8, 욘 2:6, 가장 분명한 경우는 아마도 시 105:18일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숨'의 의미는 불확실하다.

 

(2)'혼'의 히브리 관념

히브리 사상은 혼을 생명의 물질적 기초인 몸과 구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희랍의 관념을 추적해 볼 수도 있는 욥4:19,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를 제외한다면 두 개의 분리된 독립적 실재들이리라는 의문은 전혀 없다. nephesh라는 단어는 생의 원리를 지칭하며, 항상 어떤 형상이나 표상으로 등장한다. 그러한 형상을 취하지 않으면 nephesh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nephesh를 떠나가고 되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창35:18, 왕상17:21-22 등과 대립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은 nephesh를 '시신'에 대하여 '죽은'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서든 붙이지 않고든 사용할 수 있었지만(예. 레19:28, 민6:6) 몸을 떠난 nephesh는 생각할 수 없었다.

 

(3)표준구절

창2:7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고 생기(nshamahim)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nephesh hyh)이 된지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번째 표현은 창 1장에서 동물들에 대하여 집단적으로 사 용되고 있다. 창 2:7에서의 '생'이라는 수식은 생명력이 없는 흙과의 대조를 강조해 준다. 그 기자는'숨'을 지칭하는데 nshamah 대신에 ruah를 사용하였던 것 같다(창 7:15를 보라).

 

(4) nephesh의 용례

히브리인들은 우리가 '몸'을 이야기하듯이 자신의 육신을 이야기할 수 있었으나, 종종 심리-육체적 유기체로서의 자신, 즉 그의 nephesh를 이야기하였다. 그는 몸을 '가지지는' 않았으나 육신적 형상 안에 표현된 생명의 단위인 생명을 지닌 몸'이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의 원리는 때때로 피와 연결되었다(예. 창9:4, 레17:11,14, 신12:23). nephesh는 흔히 '생명'을 의미 한다(예. 생명을 건져내기로, 수 2:13; 생명을 취하소서. 왕상19:4;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삿 5:18, 삼하 23:17; 생명을 위하여 떨리로다. 겔32:10). 생명은 항상 통전적인 것으로서, 그 자체를 몸 안에 전체로 표현할 수 있으며 몸의 어떤 지체나 기관(혀.눈.귀.손.심장 등)에 집중시킬 수 있고, 제유법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양상 가운데 전체를 표현할 수 있다. '분산된 인격'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류이다. 인칭대명사를 사용하는 것은 자아의 통일성의 의식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 문구는 버려진 것의 가치라는 관점에서(참조. 삼하23:13-17) 사53:12에서 보다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nephesh는 종종 '자아', '인물'을 의미하며 접미사와 더불어 인칭대명사들에 대한 감정적 대리물을 형성할 수 있다. 이 단어는 재귀적 관념을 표현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수를 헤아리는 데도 사용된다.

 

혼은 정신처럼 강해지기도 하며 약해지기도 한다. 모든 힘이 쇠할 때 죽음이 찾아온다. 혼을 쏟아 붇는 것은 낙심한 상태를 의미한다(예. 삼상1:15, 시42:5). 강한 혼은 그 혼과 연결된 인물이나 사물들을 통하여 그 분명한 한계들을 넘어선다. 이것은 '인격의 확장'으로 불리어 왔다. 다른 자아들과 더불어 그것은 심리적 일치를 이룰 수 있다(예. 창23:8, 왕하9:15, 시 33:20).

 

(5)다른 용어들과 nephesh와의 관계

전인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 nephesh는 자아가 충동이나 욕망 또는 감정적 경험들을 가진 것으로 생각될 때 일반적으로 널리 선호되어 사용되었다(참조. 영어의 soulful). nephesh는 감정의 통전 성을 표현할 수 있다(출 23:9). nephesh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고, 탐욕스럽고, 만족하며, 기쁨. 슬픔. 사랑. 미움. 희망. 절망 등을 느낀다. 자아의 힘이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영'(spirit) 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수 있으며, 비범한 힘이나 통찰 또는 기술은 침입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으로 간주된다. 한편 행위를 위한 의지나 영혼의 조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마음'(heart)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수 있었으며 때때로 '혼'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었다. 이 세 개의 단어들은 흔히 상호 교환된다. 하나님은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힘을 부여해 주실 것이다(겔 11:19, 18:31, 36:26). 마음은 또한 지식의 주요 거처이다. 사고는 사변적이라기보다는 실천적이며 따라서 생각은 곧바로 행위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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