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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참된 권위 확립을 위한 이론

하나님아들 2023. 11. 7. 15:32

성경의 참된 권위 확립을 위한 이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여기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란 첫째로는 성경의 내용, 즉 메시지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리키며, 다음으로는 성경 자체에 대한 바른 이해, 즉 성경이 무엇이며 어떻게 기록되고 전수되어 왔는가 하는 등에 대한 바른 이해, 곧 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가 본문 해석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본문 형성에 관한 것이다. 필자가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후자에 관한 것이며 오늘날의 본문 비평학(textual criticism)도 그 가운데의 한 면이다. Ⅰ.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 우선 성경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이에 대해서는 딤후3:15 이하가 잘 말해주고 있다. 딤후3:15-17의 말씀은 신·구약 성경 본문 가운데에서 성경 자체에 관하여 가장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 본문은 성경의 유일성(唯一性)에 관한 논급으로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15절의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는 오직 성경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특질을 가리킨다.이 세상에는 철학, 역사, 문학, 예술, 과학 등 수많은 분야에 관한 책이 있지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은 오직 성경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16절 전반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라는 말씀은 성경의 기원에 관한 것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다른 책은 단지 인간인 어떤 저자만에 의해 기록된 책인데 대해, 성경만이 (모세, 이사야, 마태, 바울 등 인간 저자와 함께)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것이다. 

셋째, 16절 후반의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는 세상의 다른 모든 책과는 달리 성경만이 가지는 유일한 내용을 가리킨다.이 세상에 있는 다른 모든 책들은 각기 그 어떤 분야(철학, 역사, 과학, 문학, 예술 등)에 관한 지식을 주는 것인데 대해 성경(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썼을 때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으므로 본문에서의 성경은 구약만을 가리킨다.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 말씀을 적용해석할 때는 신약성경도 포함함은 물론이다)만이 인간의 죄를 책망하고 잘못된 것을 옳게(의로)바로잡아 주는 책이라는 것이다. 

넷째, 17절의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는 성경의 목적을 가리키는 말씀으로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책과는 달리 성경은 정치인이나, 경제인, 학자, 기술자, 예술인 등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간에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네 가지, 즉 성경의 특질, 기원, 내용, 목적은 다 성경의 유일성 또는 독특성을 천명한 것으로서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어떤 성경 본문을 강해하기에 앞서 먼저 성경의 특성에 관한 이 본문을 가르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대한예수교장로회의 12신조는 그 첫 항에서 성경에 관하여 "신구약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다"('유일의 법칙'은 잘못된 표현이다)라고 규정하여 올바른 성경관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이 본문이 담고 있는 세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은 물론 신구약 성경의 모든 말씀이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란 뜻이 아니다.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말씀 가운데에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도 있지만(예 : 창1:3 "빛이 있으라"), 그 이외에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예 : 마5-7장 산상보훈), 신구약 성경의 여러 저자(모세, 이사야, 마태, 바울 등)의 말이 있고(성경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신약의 서신은 전적으로 저자만의 말이다), 천사의 말이 있는가 하면(창16:8), 마귀의 말도 있고(마4:3), 동물의 말이 있는가 하면(민22:28) 식물의 말도 있다(삿9:9-15). 신·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본문 가운데의 말이 실제적으로 누구의 말이든지 간에 그것이 성경에 기록될 때는 저자에 의하여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뜻이다.

둘째,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관하여 정확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적극적인 의미와 소극적인 의미가 있다. 적극적인 의미로는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해서만 정확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이요, 소극적인 의미로는 성경이 신앙과 행위 이외에서는 정확 무오한 말씀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성경의 실제적인 내용이 밝혀주는 사실이다. 즉, 앞서 딤후3:15에서 본 대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으로서의 독특한 성격을 가진다. 
성경 가운데에는 역사도 있고, 문학도 있고, 과학(당시)도 있으나 성경은 결코 역사책이나 문학 책이나 과학 책이 아니다. 따라서 성경 안에 기록된 역사나 과학에는 일부 오류가 있는 것도 사실이나(이에 대해서는 후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경의 오류가 될 수 없다.왜냐하면 성경은 본래적으로 역사를 가르치거나 과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부 극단 보수주의자들이 마치 성경은 세상의 모든 사항에 대해 정확 무오한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는 다르며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해서만 정확 무오한 말씀인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셋째, '유일의 규범'이라는 의미는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우리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데"(딤후3:15) 정확 무오한 규범이라는 것으로서 성경의 절대성을 나타낸다. 세상에는 어떤 고답적인 지식을 전해주는 책도 많고, 성현들의 훌륭한 교훈서도 많지만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절대적인 규범이 되거나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이 못되며,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규범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한 가지 부언할 것은 우리가 말하는 성경이란 신·구약 66권을 말하는 것이며 구약의 정경성에 관해서는 마르시온(Marcion, 2세기의 이단자)으로부터 불트만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인 비평도 있었으나 그것이 잘못된 견해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개신교는 외경(로마 카톨릭에서는 정경)도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Ⅱ. 영감(靈感)과 원본에 대한 바른 이해 영감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는 데오스(theos, 하나님)와 프네오(pneo, 숨쉰다)의 합성으로서, 딤후3:16에만 나오는 낱말(소위 hapakslegomena)로서 하나님께서 성경(원본)을 기록하는 사람에게 기록자가 인간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자신(하나님)의 영적인 통제력을 행사하셨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성경이 영감으로 쓰였다고 할 때 그 표현은 기록에 보다도 기록자(성경의 원저자)에게 초점을 두는 것이다. 벧후1:21은 이 사실에 대하여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성경 영감설은 일찍이 유대교의 전통과 신약 성경(딤후3:16과 벧후1:21 등)을 기초로 하여 형성된 성경관이지만 종교개혁 때까지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강한 교황권 때문에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다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란 구호를 외쳤던 종교 개혁자들에 의하여 그 권위를 확립하였다.그러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부정적인 성경비평학으로 인해 성경의 영감설 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도전을 받다가 금세기에 와서는 바르트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Die Theologie des Wort Gottes)에 의하여 다시 그 권위를 되찾기에 이르렀다.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에 관한 논쟁(영감설과 그에 따르는 성경 무오·유오설)은 그 후로도 바르트와 불트만 및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논쟁으로 이어졌고, 미국에서는 1929년 메이첸(G. Machen)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움으로써 프린스턴신학교의 분열을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이토록 신학의 논쟁점이 되어온 성경영감설은 어떠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이제 이 문제를 영감의 성질, 영감의 방법, 영감의 범위 등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자. 첫째, 성경의 영감은 그 성질에 있어서 기계적 영감(mechanical inspiration)이 아니고 유기적 영감(organic inspiration)이다. 극단적 보수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는 기계적 영감설은 성경을 기록한 저자는 성령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아 그들 자신이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성령이 지시하시는 대로만 기록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그들이 기록한 성경의 내용에는 저자 자신들의 개인적인 요소(그들의 지식, 경험, 사상, 개성 등)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지를 기록하는데 사용된 기계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유기적 영감설은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를 기계적으로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개인적인 지식이나 경험, 사상이나 개성 등을 그대로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메시지를 기록하도록 성령으로 감동하셨다는 것이다.따라서 성경에는 그 기록자의 개인적인 지식, 경험, 사상, 개성 등 뿐 아니라 심지어 그들이 즐겨 쓰는 용어나 문체까지도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볼 때, 성경의 내용이 밝혀 주는 진실은 결코 전자, 즉 기계적 영감이 아니고 유기적 영감임을 알 수 있다.예를 들면 유태인을 위하여 복음서를 쓴 마태는 그가 잘 알고, 또 그의 독자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 성경의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누가가 당시에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 즉 죄인, 여자, 이방인 등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에는 헬라의 이원주의 사상에 대한 요한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가 애용하는 용어로 '빛', '생명', '사랑', '진리' 등이 특별히 많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이 성경의 실제적인 사실에서 저자의 개인적 요소가 다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이러한 개인적인 요소가 추호도 하나님의 영감을 제한하거나 배제하지 않은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성경의 영감은 그 방법에 있어서 축자적 영감(verbal inspiration)이 아니고 개념적 영감(conceptual inspiration)이다. 즉 성경의 영감은 저자(원본의 기록자, 로마서에서와 같이 원본의 기록자와 저자가 다를 때에는 저자)가 성경(원본)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어휘의 선택이나 자구(字句)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지배하여 조금도 다름(相異)이나 틀림(相違)이 없도록 하셨다는 것이 축자적 영감설인데 대해 개념적 영감설은 저자가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께서 하신 영감은 그러한 글자 한 자 한 자에 이르기까지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내용을 개념(의미)상으로만 바로 기록하도록 영감하시고, 어휘의 선택이나 표현의 기술 방법 등은 저자에게 맡기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감이 전자와 같은 것이라면 아무런 논란의 여지가 없고 문제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의 실제는 전자와 같지 않음을 증명해 주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다.이러한 사실을 몇 가지 실례를 들어 논증해 본다.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성경 가운데, 그 사본이 아니라 원본에서 동일한 사건이나 사실이 문자적으로 동일하게 기록되지 아니하고 각기 다르게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논증을 두 가지만 들어보자. 
먼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기술하는데 있어서 4복음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세밀한 부분에까지 언급하면 문자적으로 다른 것이 열 곳도 넘지만 그 중 세 가지 사실만 들어본다.1. 무덤에 찾아간 사람에 대하여 네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달리 기록하고 있다. 

마태 :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마가 :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 
누가 : "이 여자들…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와 또 저희와 함 께 한 다른 여자들" 
요한 : "막달라 마리아" 2. 그들이 무덤에 간 시각에 대하여는 

마태 :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마가 :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누가 :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요한 :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3. 무덤에 나타난 실체에 대하여 

마태 : "주의 천사" 
마가 : "흰옷을 입은 한 청년" 
누가 :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요한 : 언급이 없음 위의 예에서 보면, 예 1에서 무덤에 찾아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만이 네 복음서에 공통으로 기록되었을 뿐 그 이외는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예 2의 무덤에 간 시각에 대해서는 안식 후 첫날 새벽이라는 점에서는 네 복음서가 공통되나 그 이상의 세밀한 서술에서는 네 복음서가 다 다르다. 예 3의 무덤에 나타난 실체에 대해서는 기록된 네 복음서가 다 다르다.  
다음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신앙고백의 내용에 대해서도 마태, 마 가, 누가복음은 각각 다음과 같이 달리 기록하고 있다.마태 :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가 :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니이다" 
누가 :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위의 예에서 보면 베드로의 고백에서 그리스도라고 한 점은 세 복음서에 공통되나 그 이외는 고백의 내용으로나마(마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도 고백), 그 표현에 있어서나(마가에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두 가지의 역사적인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서 복음서는 분명히 세 복음서간에, 또 네 복음서간에 문자적으로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 즉 성경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공통되고(동일하고) 상치되거나 결여된 것이 없다. 즉, 주님 부활하신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몇 사람이 무덤을 찾아갔다는 사실과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실은 조금도 틀림이 없이 기록하고 있다. 
부활의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한 번 일어난 사건이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는 한 번만 있었던 사건으로 믿을진대, 그리고 그 이야기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을 믿을진대, 그 영감이란 축자적 영감이 아니고 개념적 영감이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이러한 경우에 성경 저자에 대한 하나님의 영감을 믿으면서 축자적(문자적) 영감을 고집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감의 능력을 제한하는 중대한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그리고 동일한 사건에 대한 복음서간의 기록이 세밀한 부분에서는 문자적으로 같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성경의 오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술한 바와 같이 성경의 영감은 저자에 대한 기계적인 영감이 아니라 유기적인 영감이어서 저자 자신의 지식, 경험, 사상, 개성 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즉, 네 복음서 저자는 모두가 영감을 받아서 기록했으며 각기 그들이 가진 지식과 경험의 한도 내에서 다시 말하면 그들의 들은 대로, 본대로, 아는 대로만 정직하게 기록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성경의 메시지 내용을 저자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는 데 있어서 낱말의 문자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영감을 주어 기록하고자 하셨다면, 저자가 기계적으로 영감을 받게 하셨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은 것이다.왜냐하면, 성경을 기록하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소식과,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가르침을 주는데 있는 것이지 결코 어떠한 역사적인 보도를 정확하게 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성경의 영감을 그 성질에 있어서 기계적 영감이라고 한다면 축자적 영감이 그 당연한 결과가 될 것이나, 유기적 영감으로 이해한다면 축자적 영감은 논리상 성립될 수가 없으며, 그것이 유기적 영감이요, 개념적 영감인 것은 기록된 성경의 실상이 충분히 증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이러한 이해가 아니고서야 광야에서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사람의 소를 고린도전서 10장 8절에서는 23,000명이라 하고, 민수기 25장 9절에서는 24,000명이라 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셋째, 성경의 영감은 그 범위에 있어서는 부분적 영감이 아니고 전체적 영감이다. 18세기 합리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성경의 범위를 내용에 따라 구별하여, 영감은 교리적 내용에만 한정되고 역사적 내용에는 영감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성경 안에 있는 역사의 기술에 있어서는 다소간 오류가 있기도 하므로 그러한 구별을 하였으나, 역사적인 오류가 결코 성경의 영감의 사실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합당한 이론이 될 수가 없다.
성경의 저자에 대한 영감은 그 내용이 역사이거나 교리적인 것이거나, 문화적인 장르에 있어서도 산문이거나 시이거나 예언이거나 묵시이거나, 말의 주체가 하나님이거나 사람이거나 심지어 마귀이거나 간에 성경 내용의 전 범위에 미치는 것이다(여기 마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마귀가 말을 하는데 영감을 주셨다는 뜻이 아니라, 마귀의 말을 바로 그대로 기록하도록 성경의 저자에게 영감을 주셨다고 하는 뜻이다). 
어떤 학자는 성경의 영감을 신약에만 국한시키나 그것도 성경의 내용(딤후3:16)과 상치된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감은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 마지막 절까지 되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영감은 정경에 한정되는 것이므로,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로마 카톨릭교회와는 달리 외경(카톨릭 측으로는 정경)의 영감은 인정할 수가 없다. 넷째, 성경의 영감이란, 엄밀히 말하면 원본의 저자에 대한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영감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영감을 받은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영감이 사본의 필사자(筆寫者)에게도 주어졌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옳은 견해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은 파피루스, 양피지 사본을 합쳐서 대문자 사본, 소문자 사본, 성서일과표 등 모두 5,500개도 넘는데 그 중의 단 둘도 완전히 동일한 것이 없으며, 바로 이 사실이 사본의 필사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감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본 필사자에게, 원본의 저자에게와 같이 영감을 주셨다면 모든 사본이 어떻게 이처럼 다를 수가 있을까? 만일 하나님께서 사본의 팔사자에게 영감을 하셨는 데도 불구하고 사본간에 서로 다르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중대한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대다수의 성경학자들은 그들이 성경의 영감에 대하여 언급할 때, 사본이나 역본의 영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데, 이는 사본이나 역본의 필사자나 역자에게 영감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여서 도무지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독자들이 만일에라도 오해를 할까 하여 사본의 필사자나 역자에게 영감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기도 하는데 그 사례를 셋만 들어본다. 

미국의 유명한 보수주의 신학자인 루이 벌코프(L.Berkhof)는 그의 책「성경해석학(Principles of Biblical Interpretation)」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이 모든 세부분에까지 완전무오하게 영감 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다만 원본만을 언급하는 것이며,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사본들이나 현대판 성경이나 번역본들을 같은 의미에서 언급한 것은 아니다"(위 번역서 44면) 

피녹크(C. H. Pinnock)는 그의 책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변증(A Defense of Biblical Infaiivility)」에서 "영감은 성령에 의해 영감된 사람들이 구술했거나 기록한 말씀에 관한 것이지 사본의 필사에 관한 것이 아니다"(15면). 

「기독교대백과사전」(기독교문사 간행)은 영감에 대하여 "영감은 성서의 진리주장을 확실히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본이 아닌 원본(친필)과 관련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필사자들의 잘못이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위의 책 641면). 

우리는 영감이 성경의 원본의 저자에게만 해당된다는 데 대해서 더 이상의 증명이 필요치 않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본 필사자에게도 영감이 있었다고 억지 이론을 고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가공할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름지기 겸손하고 정직하지 않으면 안된다. Ⅲ. 사본에 대한 바른 이해 맨 처음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이나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의 원본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지만 오늘날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한편 그 없어진 원본을 보고 베껴 쓴 사본은 수천 개나 남아 있어 없어진 원본의 내용을 알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사본의 필사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길이 보존하고자 하는 열정과 또 그 말씀을 널리 보급하고자 하는 사명감으로 그들의 심혈을 기울여서 원본을 베껴 썼다. 경건한 필사자들은 원문을 베껴 써내려 가다가 하나님의 이름 네 문자(Tetragrammaton)YHWH가 나오면 그때마다 손을 깨끗이 씻고 쓰기까지 그들의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이토록 정성을 다하여 필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지라, 사본이 수백 년 동안 필사를 거듭해 오는 과정에서 거기에는 얼마간의 착오가 생기게 되었다. 이제 그러한 착오의 구체적인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본다. 첫째, 필사자의 비고의적인 착오로 본문이 잘못 베껴진 것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다. 

1. 필사자가 잘못 보아서 생긴 착오로서 1) 서로 비슷한 헬라어 글자(모양이나 붙여쓰기, 띄어쓰기를 잘못함으로)를 잘못 구별하여 착오를 일으킨 경우(예 : 딤전3:16, 벧후2:13, 롬6:5 등)가 있는가 하면, 2) 필사하는 대본의 두 행이 같은 낱말이나 음절로 끝났을 때 필사자가 그 두 번째 행을 빠뜨리고 베낌으로 착오를 일으키는 경우(예 : 눅10:32, 고전9:2 등) 등이 있다. 

2. 필사자가 잘못 들음으로 생긴 착오로서 이것은 받아쓰기를 하는 경우에 생길 수 있는 사례이다. 예컨대 롬5:1의 echomen(가지자)과 echomen(가진다), 마11:16의 heterois(다른 것들)와 hetairois(동료, 친구) 등이다. 

3. 잘못된 기억 때문에 생긴 착오로서, 동의어가 혼동되어서 쓰이거나(apo와 ek), 낱말들이나 한 낱말 안의 글자의 자리가 바뀌어 필사되는 경우(예 : 막1:5, 14:65 등)이다. 

4. 필사자가 자신의 간단한 주해를 본문 사이에 끼워 둔 것을 그 다음 필사자가 그것을 본문으로 잘못 판단해서 본문으로 베껴 씀으로써 생긴 착오로서 요5:3-4, 고후8:4 등의 경우이다. 둘째, 필사자들이 그 전 필사본의 어떤 부분이 문맥으로나 내용상으로 잘못된 것으로 알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로 첨가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눅11:2-4에 있는 주기도문의 짧은 본문 필사자는 그것보다 더 친숙하고 긴 형태인 마6:9-13의 본문으로 보충하여 마태복음에 있는 주기도문과 같이 만들었으며, 눅5:32의 필사자는 마9:13의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에 한 마디가 빠져 있다고 생각하여 "회개시키려"란 말을 첨가한 것이다(이 점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의 메츠거의「신약의 원문, 그 전수와 오류 그리고 회복(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Its Transmission, Corruption and Restoration))」을 보라). 
어쨌든 성경의 사본은 이상과 같은 원인 등으로 그 필사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달라진 것이 사실이다. 마6:9-13에 이어지는 주기도문의 송영 부분은 비록 본문이 아니고 난하주(본문비평장치)에 수록되기는 하였으나 사본의 종류가 7가지로 달리 되어 있어 사본의 다양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데, 이제 그 실상을 보이면 다음과 같다. 

1) ".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2) ",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3) "권능과 영원무궁토록 당신의 것입니다" 
4)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5) "나라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6)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나라가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7) "아멘" 

위의 7가지 다른 사본에서 마지막 것을 제외하고는 나라와 권능과 영광 세 가지 중에서 혹은 셋, 혹은 둘, 혹은 하나를 언급하는 차이는 있어도 그 내용에서 보면 송영(doxology)이라는 근본적인 의미상으로는 차이가 없다. 더욱이 첫째와 둘째 사본간에는 송영 바로 앞 문장의 마지막 낱말 포네루ponerou(악) 다음에 종지부(.)가 찍히느냐, 휴지부(,)가 찍히느냐의 차이 뿐이다.
그리고 이 7가지 다른 사본 중에서 학자들은 본문비평장치에서 첫째 것을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수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 본문이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 등 가장 권위 있는 사본의 본문이며 또 터툴리아누스, 오리게네스 등 유력한 교부들이 그 본문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본문을 후대의 첨가라 해서 받아들이지 않는 로마 카톨릭교회를 제외하고는 절대 다수의 개신교의 주기도문은 첫째 것을 채택하고 있다. 
마21:28-32에 있는 두 아들의 비유에서 보면, 위의 경우와는 달리 내용상 정반대의 두 가지 사본이 있다(문구상으로는 6가지). 즉 아버지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한 사본의 본문은 맏아들이 가겠다고 했다가 안 가고, 둘째 아들이 안 가겠다고 했다가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대해(우리말 성경 개역본과 새번역의 본문), 다른 사본은 맏아들이 안 가겠다고 했다가 가고, 둘째 아들이 가겠다고 했다가 안 간 것으로(우리말 성경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한국천주교200주년 기념 신약성서 등의 본문) 되어 있다.
이상의 두 가지 다른 사본 중에서 여러 나라의 성경 번역에서는 어느 것을 택하였는가? 여기에는 한 가지 경향이 있다. 즉 옛 번역에서는 첫째 사본의 본문을 선택한 편이었으나(KJV, 중국의 문리역 등 예외도 있다) 최근의 번역에서는 둘째 사본의 본문을 택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RSV, GNB, NIV, LB, JB, NRSV, 일어 공동역, 신공동역, 중국의 현대중문역(現代中文譯), 금일성경(今日聖經), 당대성경(當代聖經), 독일의 현대역, 불어 현대역 등. 한편 KJV, 중국어성경文理역 등 오래 전의 번역도 예외적으로는 여기에 속한다). 따라서 우리말 성경도 개역과 새번역(1967년)에서는 전자를 따랐는데, 공동번역(1971년)과 표준새번역(1993년)에서는 최근의 본문비평의 결과를 따라 후자를 따르기로 하였다.이상과 같이 여러 가지로 다른 본문의 사본을 세밀히 비교, 대조하여 없어진 원본의 본문을 재구성해 보고자 하는 노력이 본문비평인 바, 이 작업은 실로 어려운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성경 연구가들은 원본의 본문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1) 어려운 본문과 쉬운 본문이 있을 때에는 더 어려운 본문을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
2) 긴 본문과 짧은 본문이 있을 때에는 더 짧은 본문을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 
3) 조화가 잘된 본문 형태보다는 얼마간 불일치한 본문 형태를 더 원본에 가까운 것으로 본다. 
4) 어떤 본문이 같은 문헌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저자의 일반적 용어나 문화적 양식에 맞지 않을 때, 또는 어떤 한 부분이 전체 문맥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들어가 있을 때, 그러한 사본의 본문은 잘못된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본문을 비평하고 사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두어 가지 곡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사본에 있어서의 영감의 문제는 사본 필사자에 대한 영감의 문제라는 점이다. 즉 사본 필사자에게 영감이 없었다고 하는 것(전술)과 사본의 내용의 영감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둘째, 사본의 내용이 영감된 것이냐 하는 문제는 그 대답이 너무나 쉽고 간단하다. 즉 사본이 원본을 정확하게 필사하여 보존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는 그 내용에 있어 영감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의 원본이 영감된 것이기 때문이다. 
패튼(Patton)박사는 그의 「성경의 영감」이란 책에서 "정확무오한 원본은 전사생들의 노고에 의하여 영구히 보존되었다고 본다. 상위(틀림)가 생겼다면 사생들의 잘못된 실수로 말미암아 일어난 중요치 않은 세부에 그치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L. Berkhof, 「성경해석의 원리(Principles of Biblical Interpretation)」, 김진홍 역, 46면).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원본의 중요치 않은 세부에 있어서는 필사자들의 실수로 잘못 기록되어 원본과 다른 것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본의 필사자에게는 영감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일 성경의 원본이 기록될 그 때에 오늘날과 같이 복사기가 있어서 그것으로 복사를 하였다고 가정을 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감이 작용할 여지조차 없으며, 영감이 없이도 원본과 100퍼센트 틀림없는 사본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며, 오늘날 우리가 하는 본문비평연구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사본 필사자들의 사소한 실수로 인해서 본문비평이라는 성가신 일을 하기는 하지만, 한편 그들 사본 필사자들이(영감이 없이도) 그들의 신앙적인 정열과 성의 있는 노력으로 영감된 원본의 대부분이 잘 필사되고 전승되어진 데 대해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Ⅳ. 역본에 대한 바른 이해 오늘날 대다수의 성경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은 각기 자기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이다. 원본은 없어졌지만 그 말씀은 사본을 통하여 전승되고, 우리는 그 사본을 우리의 말로 번역을 해서 읽게 된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번역본은 1993년 말 현재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보고에 따르면 2,062개 언어에 이른다. 그러면 성경의 번역에는 문제가 없는가? 우리는 위에서 성경의 사본에 관한 몇 가지 문제점을 보았거니와 성경의 번역에는 실로 그 이상의 문제가 있다. 사본에 있어서는 사본의 필사자가 영감된, 정확무오한 원본을 정확하게만 베껴 썼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지만 번역에 있어서는 제한된 능력을 가진 인간인 번역자가 성경 원문, 특히 어려운 원문을 번역하는데 있어서 각기 다른 이해에서 달리 번역할 수가 있고, 그 중에는 오역의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번역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비평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각기 저마다의 원문 이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오늘날까지의 성경 번역사상 가장 훌륭한 번역이라고 인정되었던 번역본도 오늘날의 본문비평 연구의 결과에 비추어 보면 번역된 본문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한 가지 예를 그 유명한 킹 제임스 역본(King James Version)으로 들어보자.흠정역(欽定譯, The Authorized Version)이라고도 불리는 이 번역본은 당시 영국왕 제임스 1세(James Ⅰ)가 최고의 석학 54명으로 하여금 번역하게 하여 1611년에 간행된 것인데, 요한 웨슬리는 1758년에 무려 12,000여 곳을 수정하여 신약개정판을 내었거니와 이 비율로 치면 신·구약 성경 전체로는 수정할 곳이 40,000군데도 훨씬 넘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거기에다 당시 흠정역이 번역대본(text)으로 삼았던 소위 '공인본문' 또는 '표준본문'이라고 불리었던 Textus Receptus라는 헬라어 원문도 오늘날의 본문비평의 결과로 되어진 헬라어 원문 네슬·알란트(Nestle-Aland)의 Novum Testamentum Graece 27판이나 UBS 의 The Greek New Testament에 비하면 정확성이 훨씬 못한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Textus Receptus를 대본으로 하지 않은 세계의 모든 번역은 다 틀린 번역이고, Textus Receptus를 대본으로 한 킹 제임스 역본이 가장 훌륭한 번역이라는 일부 극보수층의 주장은 교계를 혼란케 하는 어이없는 주장이다. 과거 100년 동안의 전세계적인 본문비평적 연구를 전혀 외면하고 19세기말의 학계가 신약 본문 중 가장 빈약한 것(the scholarship of the nineteenth century had conclusively demonstrated it - Textus Receptus -to be the poorest form of the New Testament text)이라고 한 Textus Receptus를 현재 가장 바른 본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세계의 절대 다수의 성경번역에 도전하는 일이다. 
성경의 번역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그 대본(text)을 잘 선정해야 하는데, 현재 구약으로는 Biblia Hebraica Kittel(BHK)과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BHS)가 있고 신약으로는 전술한 네슬·알란트의 Novum Testamentum Graece(NTG)와 세계성서공회연합회(the United Bible Societies)의 The Greek New Testament(GNT)가 있다. 위의 각각 두 가지의 구약과 신약의 원문 성경이 달리한 것은 주로 본문비평장치(난하주)이며, 본문은 거의 동일하다.
성경의 번역이 잘못된 경우는 실로 수다하지만 여기서는 그 중 한 가지만을 예로 들고자 한다. 우리말 성경에서 '독생자(獨生子)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ho monogenes huios인데,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라는 것이 절대 다수 학자들의 견해이다. 영역 성경에서 보면, 킹 제임스 성경까지는 'the only begotteon Son'으로 번역되었으나 1881년의 개역 이후로는 'begotteon'을 삭제하고 'the only Son'으로 바로잡은 것을 볼 수 있다(단, American Standard Version은 예외). 그 이유는 원어 monogenes(mono와 genes의 합성어)의 genes가 gennao(beget, 낳는다)에서 유래된 줄로 알았는데, 사실은 genos(kind, 종류)에서 유래된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이 the only begotton Son이 중국어 성경에서 문자 그대로 '獨生子'로 옮겨지고, 같은 한자를 쓰는 우리말 성경에도 그대로 옮겨 쓰게 된 것이다(자세한 것은 나채운의 「주기도·사도신경·축도」170-190면 참조). 그러나 현재는 중국어 성경 현대중문역본(現代中文譯本)에서도 '獨子'로 쓰고, 영어역 RSV, NEB, GNB, NIV, JB, LB, NRSV 등도 다 'the only Son'으로 번역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번역의 대본(text)을 원문(히브리어 또는 헬라어)으로 하지 않고 기존의 권위 있는 번역본으로 하는 수가 있다. 예를 들면 민24:3에서 개역은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을 따라서 "눈을 뜬 자"라고 번역하지 아니하고, 라틴어역인 불가타를 따라서 "눈을 감았던 자"라고 번역하고 마소라 본문은 난하주에 수록하였다(민영진, 「국역성서연구」35-36면 참조). 
이 경우 원어로는 Shetum과 Setum의 차이뿐, 둘 중의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뜻은 전혀 반대가 되는데, 따라서 이 낱말, 나아가서 그 문장이 가지는 의미는 전적으로 번역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경우 만일 번역자가 없어진 원본의 원어와 다른 것을 택하여 번역했다면 그것은 본의는 아니나 오역이 될 수밖에 없다. 

인칭대명사의 경우 번역자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의도적으로 원문과는 달리 번역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는 구약에 여러 곳 있으나(나채운의 「우리말 성경연구」188-194면 참조) 그 중 한 가지만 예시하면 단2:36에서 우리말 개역성경은 "그 꿈이 이러한즉 내가 이제 그 해석을 왕 앞에 진술하리이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여기의 "내가"는 히브리어 원문에는 "우리가"로 되어 있으나 번역자는 그 뜻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내가"로 바꾸고 그 난하주에 히브리어로는 "우리가"로 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원어에 해당되는 번역어(수용어)가 없기 때문에 도저히 원어의 뜻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없는 본문이 있다. 예컨대 요21:15-17에 있는 예수님과 베드로간의 사랑의 문답에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예수께서 두 번 물으신 것은 아가페의 사랑이고, 예수님께서 세 번째 물으신 것과 이 두 가지 사랑이 다른 말로 되어 있지만 우리말로는 다같이 '사랑'이라고만 되어 있어 원문의 뜻을 완전히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경우는 영어, 독어, 불어, 일어, 중국어 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외에 히브리어 성경이나 헬라어 성경에 있는 어희(語戱)나 알파벳 구문의 경우에서도 우리말로는 결코 원문 그대로 번역할 수가 없다(나채운,「우리말 성경연구」308-309면 참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번역에는 이처럼 어려운 문제들이 있으므로 학자들에 의하여 몇 가지 번역 이론이 주장되어 왔는데, 거기에는 직역과 의역, 문자역과 자유역, 형식적 일치의 번역과 역동적 동등성의 번역 등의 대립적 번역 원칙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번역 원칙 중 어떤 것이 적용되느냐는 원어와 번역어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번역을 철저하게 문자적으로만 해야 된다고 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이다. 

두어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마8:11에서 헬라어 원어 anaklithesontai는 문자적으로 직역을 한다면 "기대어 눕는다"라고 해야 하지만 이는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에 가지는 자세로서 우리에게 이해가 안되므로 주로 직역을 한 개역성경에서도 "앉으려니와"로 번역하였는데 이 경우에도 "기대어 누우려니와"로 해야 한단 말인가? 
또 마19:24의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에서 '바늘귀'에 해당되는 헬라어 원어는 문자적으로는 '바늘구멍(hole)'인데 이런 경우에도 번역어인 우리말의 표현을 무시하고 '바늘구멍'으로 하자는 말인가? 이 경우는 영어에서도 'needle's hole'이라고 하지 않고 needle's eye(문자적으로는 '바늘 눈')라고 번역한다(기독교사상 1993년 10월호 필자의 논문 "표준새번역에 대한 바른 이해" 110면 참조).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때까지 "형제들아" 또는 "brothers"라고 번역해온 헬라어 hoiadelphoi를 "형제 자매들이여" 또는 "brothers and sisters"라고 번역한 표준새번역이나 New Revised Standard Version의 입장도 수용해야 한다.Ⅴ. 맹목적 보수신앙의 모순성과 위험성이상에서 우리는 성경의 영감과 원본, 사본, 역본 등에 관한 중요한 점들을 고찰해 보았거니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는 그 어떤 신학이론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어떤 신학이론도 성경을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소위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성경에 기초하여 신학이론을 세우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들 나름대로 어떤 신학이론이나 교리를 정립해 놓고 그것에다 성경의 본문을 적용시키는 exegesis(reading out)가 아니라, eisegesis(reading into)를 하는 과오를 범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한 가지 실례가 성경의 영감과 원본, 사본, 역본 등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그리하여 성경의 영감에 대해서도 무조건 성경의 영감을 철저하게만 주장하면 그것이 마치 가장 좋은 신앙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영감은 사본 필사자에게도, 나아가서 성경 번역자에게도 되었다고 고집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의 고집은 이미 위에서 밝힌 대로 사본이나 역본의 실제와는 다르므로 그것이 무식의 소치가 아니면 맹목적인 신앙일 수밖에 없다. 다시 한번 말해서 만일 사본의 필사자에게 하나님의 영감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수천 개의 사본이 다 같지 아니한가?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그들은 곧잘 대답을 회피하고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라고만 말한다. 그러나 어떠한 학문적인 이론을 주장, 즉 논단(論斷)을 하는데 있어서는 충분한 논증(論證)을 해야 하고, 그 논증에는 바른 논거(論據)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런 논거나 논증도 없이 논단만을 내세우는 것은 이 얼마나 맹목적인 신앙의 발로인가? 
이러한 맹목적인 신학이론은 또한 그들이 주장하는 다른 신학이론에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사본 필사자에게 영감이 되었는데도 그 결과가 그렇게 다르다면 하나님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말밖에 안되니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사본 필사자에 대한 영감을 주장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게 된다면 이야말로 영감설에 대한 과오보다도 더 큰 과오(신관에 대한)를 범하는 것 아닌가? 
만일 그들이 사본 필사자나 역자에 대한 영감과 사본 자체나 역본 자체(내용)에 대한 영감을 혼동한다면 그것 또한 어이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성경 원본의 저자에게 영감을 받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 신앙과 행위에 관한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 되는 그 내용이 영감이 안된 사본 필사자나 번역자의 실수나 착오로 극히 적은 일부분이 일치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전수되어 온 것은 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본 필사자나 성경 번역자의 실수나 착오로 야기된 극히 적은 부분의 차질은 추호도 성경 전체에 대한 영감성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완전성을 침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원본이 없고 사본과 역본만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지 않은가? 

성경의 원본이 없는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이다. 그러나 그 원본이 경건한 사본 필사자의 최선의 노력으로 필사되어 그 메시지가 오늘의 우리들에게까지 전수된 것은 또한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한편 성경의 본문(사본)이 오랫동안 본문비평학자들에 의하여 원본에 더 접근되고, 그것에 따라서 오늘날 점점 더 성경이 잘 번역되고 있는 것 또한 다행한 일이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있는 성경의 번역본이 과거의 어느 시대의 번역 성경보다도 원본에 가깝게 번역된 것임을 믿고 자부해도 좋다. 
우리는 성경이 사본 필사자나 번역자에게까지도 영감이 되고,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항에 대한 척도가 되며 문자적으로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야말로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원본에도 서로 불일치한 점이 있으며, 사본의 필사자나 번역자에게는 영감이 없으므로 사본간의 불일치가 있고 번역상의 오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이나 역본이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관한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범이라고 하는 데에 진정으로 성경의 권위가 바로 세워지고 성경이 바로 이해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나채운(장신대 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