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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 레 니 즘

하나님아들 2023. 8. 20. 23:24

헬 레 니 즘              

 

   서론:  Hellenism (영어식 표현) 이란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세계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한 시기의 문화적 성격을 표현하는 역사적 개념으로서, 그리스풍의 문화를 의미한다.

 

  이 용어는 주전 3세기의 역사적 혹은 문화적 사료를 제공하는 파피루스에서 발견되는 "Hellenizein; Hellenization" (헬라인으로 동화시키는 것, 헬라화) 에서 온 조어 Hellenismos (그리스인에 모방)에서 차용된 것이다. 어떤 학자는 영어의 "hellenism"을 가리켜서 미와 지성 그리스 문화 전반을 표현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다른 한편 유대사상 의 근본이 되는  율법, 도덕, 구제 등을 상징하는 Hebraism과는 대조되는 문화현상임으로 혼돈을 피해야 한다.

 

 

 

I. Hellenism의 시대적 구분과  그 문화의 지역

 

   알렉산더의 죽던 해인 주전 323년에서 시작하여 Ptolemy 왕조의 최후의 왕 클레오파트라가 몰락하던 주전 30년까지 약 300여년 간을 Hellenism 시대라고 한다.  이것을 전후기로 구분하면, 전기는  주전 146/5년까지, 177년 간이요, 후기는 주전 30년까지 116년 간이다. 전기에 있어서는 마케도니아의  제 4왕조에 이르러 Hellenism 최전성기를 이루었고, 주전 146/5년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학자 추방사건과 전후해서, 동방으로 확장해 나가는 로마의 무력 정복에 의해서 헬레니즘의 왕조는 점차로 영토와 주권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 아가야 동맹이 해체되었고, 고린도가38) 146년에 로마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주전 133년에는 버가모 (Pergamum)39) 왕조가 소멸하였다.  후기에 접어들면서 헬레니즘은 그 보호자를 상실하여 동방주의  저항에 부딪쳤으며,  잇따라 일어나는 동란의 와중에서 쇠퇴 일로에 접어들고 말았다.  어떤 학설에는 헬레니즘 시대를 마케도니아의 빌립 2세를 포함시켜 헬라의 '코이네'가 통용되었던  마호메트 (주후 7세기)까지 보기도 한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의 판도는 마케도니아, 그리스 본토, 소아시아, 수리아, 애굽,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즉 에에게 해역으로부터 옛 페르시아 전역에 이르고, 인더스강까지 이르렀다. 그후 동지중해로부터 근동 아시아를 중심으로 성장한 헬라화 운동의 결과로 생긴  헬라문화지역은 점차로 확대되어 동으로는 흑해연안으로부터 서로는 영국에 이르는 전가주세계(全可住世界)에 퍼져나갔다.

 

 

 

 II.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

 

    고대 그리스 문화는 Polis (도시국가; city-state)40)의 생활과 불과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Polis는41) 최고의 입법자요 또한  위정자의 권력까지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종교, 교육, 정치, 경제, 외교 등 제반 문제에 있어서 시민의 집단 내지는 개개인의 생활의 원천까지도 바로 이 Polis였다.  Polis는 모든 시민의  충성과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많은 전사들이 조국 Polis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받쳤고, 소크라테스도 Polis의 법에 따라 독배를 마셨다. 푸라톤이나 알리스토텔레스도 polis 이상의 시야를 가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polis적인 동물"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스는 Chaironeia42) 전투의 패전 (338 B.C.)으로  도시국가의 종주권을 완전히 상실한 이래,  Polis는 마케도니야의 武力하에(스팔타를 제외하고) Polis 연합체를 만들어, 그리스는  Hellas43) 연맹의 일원으로서 오래도록 존속해 왔다.  따라서 알렉산더 대왕이 동정(東政)에 성공함에 따라, 좀처럼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던  유럽과 아시아의 양 세계가 융합되어, 대제국이 창설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이 초 Polis적  세계국가상의 실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하는 문제이며,  다른 한편 그리스 본토의 종주권을 상실한 도시국가가, 더 이상 수행할 연맹의 사명이 무엇이었는가하는 것이다.

 

  

 

  견유학자들의 이상

 

  견유 철학자들은(Cynicism)44) 현존의 인간적 사회질서나 국가조직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을 cosmopolis(세계국가)인 이라 부르고, 자연법에 따라 사회적 제도와 정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으로서 개처럼 자유롭게 사는 것이 덕이요 이상으로 생각한다.

 

  

 

  다음으로 스토아 철학자도 현실의 polis를 부정하고 전우주를 포함하는 건설적인 '세계국가'(Cosmopolitan)을 주장하였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근원은 신, 즉 Logos 이다. 인간은 세계 Logos의 종자를 받았으며, 이 Logos에 의하여 생활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한다. 이 세계국가에 있어서는 민족과 민족, 주인과 노예, 남녀의 차별을 인정치 않고, 전 인류는 평등한 동포이며, 사랑에 의하여 단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Cynics와 Stoics는 동일하게 현실의 도시국가를 부정했다.

 

 

 

   그 다음 Epicurian에45) 의하면 인간은 Polis 정치와 신들로부터 해방되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마음의 정온(靜穩)을 얻어 진정한 지복(祉福)에 이르는 쾌락(감각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을 구하여, "정신의 피난처"(에피큐로스의 정원)에 들어가는 결사(結社)로서, 우애의 생활을 하는 것이 Epicurian의 이상이다. 이것은 몰(沒)Polis적이며, 초민족적인 점에서 Stoics과  맥락을 같이하지만 후자는 개인적인 구제와 우애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III.  마케도니아 4 왕조의 성격

 

      단명으로 끝난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은, 그의 사후 그의  후계자 무장(武將)들의 20여년 간의 쉴세 없는 상극흥망(相剋興亡)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중, 애굽은 푸톨레미 왕조가, 수리아와 아시아는 세리코스 왕조가, 소아시아와 버가모는 Attalos46) 왕조, 그리고 마케도니아는 안티오코스 등,  4독립전제군주국가가 서로 대립하여 왔고, 그들은 그후에도 계속 항쟁을 하여 동란이 쉴세 없었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옛날 아테네 해상동맹(海上同盟) 같은 제국주의적 경향을 극력 배격하고, 가맹국은 상오 도시간의 철저한 자유와 평등 원칙에 입각하여, 종래의 대의제도 보다도, 인도적 정치기구를 가지고 Aitolia동맹과47) Achaia동맹이 Hellas동맹의 후계로서  Polis 연방국가를 형성하게되었다. 이것은 그리스 민주정치가 달성한 최고의 이상적 정치조직이었는데 당시의 정치 학자들로부터 이의  역사적 중요성과 의의를 인정받기도 전에 로마의 손에 붕괴되고 말았다.

 

  전술한 4인의 마케도니아 군인왕국에 대해서 언급한다면, 규모에 상관없이 그들의 도시들은 다  沒 Polis적-초민족적 (마케도니아를 제외한) 성격을 가졌으며, 알렉산더가 남긴 '세계국가'(Cosmopolitan)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아시아와 애굽이 자리잡은 이들 세 왕조가 똑 같이 해결의 박차를 가해야할 문제는 수적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 마케도니아, 희랍인의 (정복자로서의)소수의 지배층의 무리가 왕국내의 다종 다양한 사회를 형성하고있는 피정복 이질민족에게 어떻게 내적인 통일을 도모하여, 어떻게 완전히 장악할 것이냐, 어떻게 통치해야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었다. 이문제는 알렉산더 자신의 때에 이미 당면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인종의 융합책과 이방인을 등용하여 군사와 정치에 참여케 하는 정책을 썼던 것이다.48)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주예배이었다. 군주를 신격화해서 민심을 하나로 집중시키는 것이다. 후속한 군주들은 이와 같은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들은 헬레니즘을 추진하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고, 그리스인과 그리스의 교육을 받은 자를 최우선 순위로 대우하였다. 이것이  philo-hellas정책이다.

 

  이 정책은 아시아의 신흥 왕국에 널리 침투해 갔고, 로마에까지 그대로 답습되었다. 이것이 각지방 문화와 접촉을 하여 그리스-소아시아, 그리스-이란, 그리스-인도, 그리스-로마 등과 같은 각이한 신문화를 육성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층외피(上層外皮)에 머문 현상이고, 하층 대중 원주민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며, 토속의 문화는 여전히 민중 속에 흐르고 있었다. 다만 그 문화의 번영은 왕도와 식민지 정책의 결과임을 간과할 수 없다. 외관상으로는 성공했으나 인간의 정신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혁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각자의 고유문화사에 화를 끼친  제국주의의 침략행위에 대한 대과는  영원히 사죄할 문제로 남아 있다.

 

        

 

IV. 헬레니즘의 성격

 

    헬레니즘은 그들이 점령한 국가에 대해서 희랍문화의 모방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전 시대의 양식과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건설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른 한편 지방문화와의 접촉과 융합, 혼성, 절충적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 헬레니즘의 성격이기도 하다.

 

 

 

V.  헬레니즘과 희랍의 교육

 

    야망에 넘치는 알렉산더는 좁은 지역에서 넓은 지역으로 그의 세력이 확산함에 따라서 그의 군사적, 상업적 거점을 건설하기 위하여 70개의 식민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들 식민정책을 위한 신도시들은 헬라화의 저수지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최대의 도시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였다.  

 

    Seleuchos 제 4왕조의 군주들은 다 같이 세계 최대의 도시건설에 장려자들이었다. 그 도시들은 희랍문화를 공급하고 활성화하는 데에 중심지가 되었으며, 제구내의 군인, 관료 등, 상류계급의 인적 자원지가 된 것이다. 그와 반면에 마케도니아와 고대 그리스 도시들은 동방으로 향하는 이민자의 공급지가 되었다. 그 인구율이 얼마나 높았는가 하는 것을 잘 나타내는 실례를 든다면,  로마에 멸망당할 때의  마케도니야에는 알렉산더 시대에 존재하였던 정예농민병(精銳農民兵)은49)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가 동방 제국으로 이민시켰다.  이것이 헬라가 패망한  주요 원인의 하나 였다.    

 

   각 지방으로부터 모여든 그리스민족과 점령지의 지방 토착민들과 석기여 이루어진 식민 도시가 외관상으로는 Polis적 양상을 구비한 것같이 보였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서로 다른 국제인종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50)

 

  이들 식민도시에는 국제 대로가 개설 되었고, 국제어, '코이네'가51) 통용되었다.  화폐로서는 아테네를 표준으로 한 국제통화가 유통되고 있었다.52)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헬레니즘이 모든 도시마다 가지고 있었던 어떤 소수의 귀족제도를 채용하지 않았다는 사실과,53) 아테네의 법과 민주정치를 숭앙하는 제도를 채택했다는 것은 유의할 일이다. 여기에는 반듯이 헬라씩 시장, 신전, 체육관, 경기장, 학교, 극장 등의 공공건물이 있었다.54)  특히 왕도(王都)인 알렉사드리아와 Orontes江 유역의 안디옥(수리아 안디옥)과  버가모에는, 왕궁 안에 왕립 학술연구소, 아마도 대학원에 상당한 Musai 학원과55) 장려한 도서관이 설치되어 있었고, 알렉산드리아에는 약 70여 만권, 버가모에는 약 20여 만권의 도서가 소장되어 있었다. 자연히 각지방에서 저명한 학자들과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자유사색과 연구로 헬레니즘 문화의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도시의 공공건물 중에 특히 중요한 것은 체육관, 경기장, 학교 등, 희랍의 교육기관으로 멀리는 아시아 변방의 사람들까지 이러한 헬라의 교육을 받아, 차세대에게  헬라교양을 전승시켜 헬라문화의 생명을 보존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상에서 말하는 기관의 덕분이었다. 예를 들면, 서쪽에는 마루세유(Marseille)로부터56)  동으로는 수사(Susa)에 이르는 헬라 문화권 안에 141개소에 이르는 '장정훈련소'(에프에베이야)라고 부르는 희랍 고등교육 기관이 있었다. 이 에프에베이야 교육은 일반적으로 체육관에서 실시했기 때문에,  졸업생은 모두 '체육관 출신자'라고 부르는 사교 클럽을 결성해, 각지에서 특권적  지위를 점유하여 왕국 내에서 뼈대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근대에 와서 애굽에서 나온  파피루스에서 이와 같은 교육기관에서 사용했던 교과서 내용을 판독한 결과 호머의 시편이 압도적으로 많고 데모스테네스가 그 다음을 차지하고, 유리피데스, 메난도로스, 풀라톤, 도규데이데스, 이소크라데스, 알리스토파네스, 크세노폰의 순서로 되어 있고, 수사학 우선의 관리교육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VI. 학문의 도시 아테네

 

    헬레니즘시대의 아테네는 희극작가 메난도로스의57) 도시였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 네 사람의 철학자의 도시라고 봄이 더 온당할 것이다.

 

 

 

   1. 우선 Agadeia학파58)

 

      이학파는  최초로 수학의 분야에서 뛰어난 학풍을 가졌으며, 정치학의 분야에서는 신흥 Polis에 많은 헌법 기초자를 파송했다.

 

   2. 소요학파(Peripatos;소요, 산책의 의미)

 

      알리스토텔레스의 학파를 소요학파라고도 한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가로수 밑을 산책하면서 철학을 논한대서 유래하였다. 이 학파는 알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체계화하고 해석하는데서 멈추고 말았으며, 독창성은 결하였다. 역사와 전기학의 분야로 발전하였다. 그의 학풍은 알렉산드리아의 Muses에 이식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3. 스토아학파(Stoic Philosophy)

 

      Zenon(342-270 B.C.)은 늘 화랑 같은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 파는 Cynic과 Socrates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또한 풀라톤으로부터 중요한 사상을 따왔다고 본다. 그의 제자들로서 크레안테스, 그 다음이 스토아학파의 학설을 대성하고 조직화한 크리싯포스(Chrysipus; 280-206 B.C.)가 있다.

 

  이 사상은 후에  로마의 제국주의 정책과 세계정복의 국가관의 이론으로 삼았고, 로마의 상류사회에 널리 수용되었다. 이 사상은  충성과 의무의 실천도덕을 說破해서 진정한 로마 정신을 연마육성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초기 학파의 대표격인 크리싯포스는 논리학과 자연철학과 윤리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후기 학자들 가운데는 윤리학을 강조한  Seneca, Marcus Aruelius, 그리고 Epictetus 등이 있다.  

 

 

 

VII.  희랍문학

 

      헬레니즘의 문학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꽃을 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렉산드리아 외에 Seleucia, Antioch, 그리고 Pergamum 등지로 퍼져나갔다.  알렉산드리아 문학에는 조국에 대한 뜨거운 정열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고, 해방된 인간의 사랑과 죽음을 테마로 하고 있으며, 기우레네 학파의 향락주의 세례를 받아 기교와 세련미에 뛰어나 있지만 설명적이다.

 

 

 

VIII. 헬레니즘과 종교

 

      헬레니즘 시대의 제 4 왕조는 복잡한 국내의 사회사정을 일원화하기위하여 주권의 확립을 달성할 필요성을 느껴 알렉산더가 창시한 왕신격화정책(王神格化政策)을 써서 帝王祭祀를 공식으로 채용하였다.  왕즉신(王卽神)에게 대한 예배는 新國家에 대한 충성의 구상적(具象的) 표현임을 의미하여, 專制君主로 하여금 절대화하는 최고의 정치수단이 되었다.

 

  현신인신화(現身人神化)의 단서는 희랍의 철인제왕(哲人帝王)59) 사상과 영웅신화(英雄神化)의 제사로부터 출발했지만, 애굽과 이란 등지의 제왕신권수수(帝王神權授受)의 동방의 제사법과 합해져서 용이하게 제도화되는 데 이르게 되었다.  그후에 이 제도는  황제예배제도로서 로마에 전래되어 중세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헬레니즘 종교의 현저한 특징은 그 지역의 주신(主神)과 병합시킨 교리를 만들어 제왕을 신으로 제사하는 것이다. 그 예로서 애굽의 푸톨레미 1세가 권장한 애굽의 Osiris60)-Apis라든지61) 희랍의 Zeus-Pluton62)의 합성신인 Serapis이다.63)  양민족(애굽 본토인과 마케도니아인) 융합의 상징으로 Memphis와 Alexandria에 Serapis의 본전이 있었다.  계속되는 동란과 천재지병으로 극심한  빈곤과 사회불안에 처해 있는 절망적인 서민 대중에게는 가장 요청되는 것이 영혼의 평안과 빈곤의 구제였다.  이러한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각 도시국가(Polis)의 신들은 너무도 무력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밀의종교(密儀宗敎)가 인기가 있어서 매우 성행하였다. 그 가운데 Serapis 신앙을 곱을 수 있다. Serapis는 배우자, 미의 여신 Isis64)와 지하계의 사자 누피스 신의 3신에 의한 입신례(入信禮), 밀의혼례(密儀婚禮), 신생, Isis의 운명조복(運命調伏), 찬미 등, 호화미려(豪華美麗)한 밀의제례(密議 祭禮)가 급속도로 퍼져나가 그 선교도 매우 효과가 있어서 애굽의 상인들이 가는 곳마다, 지중해 연안 전역에 밀의종교가 전파되어 Serapis 나 Isis의 사당이 생겼고, 후에는 각지에서 도시의 승인을 얻어 많은 입신자들이 모이게 되었다. 후에 동방으로부터 이러한 종류의 밀의종교가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  이란의 빛의 신 즉 태양신으로서  Mithra65)가 널리 퍼져 나갔다.  현재 기독교의 12월 25일을 구주 성탄일로 지키는 것도 미드라 종교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하는 이도 있다. 왜냐하면 이날을 태양신의 탄생일로 지키기 때문이다.

 

 

 

 

 

========================================  주

 

 

 

38) 고린도는 고대 헬라 도시 중에 매우 중요한 도시중의 하나이었다.

 

이 도시는 역사적을 매우 이른 시기에 건립되어다. 호머에 의하면,  고린도는

 

Bellerophon, Medea, and Sisyphus의 고향이었다. .

 

  고린도는 무역항으로써 고대 헬라에서 가장 부한 도시였다. 고린도는 주전 454-404년과, 146-44, 두 기간을 제외하고 약 1300년간 경제적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주전 734년에,  고린도 사람들은  현재 Corfu,  그리스 서쪽 이오니아 Corcyra를 식민지로 하였고, 주전 581년에, 2년마다 열리는 국제 경기에 소위 이스미안 게임(Isthmian Games)을 창안했다(고대 헬라의 Olympia, Pythian, Nemean Game과 함께 이스미안 게임을 4대 경기 중의 하나이었다.

 

  이 경기는 그들 지방의 주신, Poseidon 을 찬양하기 위한 경기였다.

 

고린도는 청동과 도자기의 작품으로 유명하였으며, 해양업에도 유명하였다.   

 

 아테네와 상업의 경쟁자인 고린도는 그리스의 Peloponnesian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주전 146년에 로마가 이 도시를 파괴되었으나, 후에 유리아스 시자의 령에 의해서 재건되었다. 어거스트 황제가 이 도시를 로마령의 아카디아 지방 수도로 삼았다.  사도 바울이 주후 51년에 이곳을 방문하여 교회를 세웠다.

 

39) 버가모는 서쪽 소아시아의 도시 중에 가장 큰 도시였다.

 

이 도시는 헬라가 약 200년간 헬라 문화의 꽃을 피우기 얼마 전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주전 63년 이후 Atalid  왕조의 왕들이 버가모를 통치하였다.

 

그들은 철학자와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궁전에 초빙하였고, 도시에 훌륭한 도서관을 건립하였다.  

 

  그들은 무역을 고무하였고, 직물 제조업을 장려하였다.

 

버가모 출신의 조각가들은 진귀한 스타일의 작품을 만들어 내었고, 특히 그들은 헬라의 신들이 우두머리 제우스의 거대한 제단을 만들어 내었다.

 

  버가모는 주전 197-159년 사이에  Eumenes 가 통치하던 때에 경제적으로 절정에 도달했었다.

 

  주전 133년에 로마가 Attalid와 동맹하여 버가모는 로마의 지배하에 들고 말았다.  로마는 버가모를 산업과 교육의 가장 큰 중심지로 삼았다. 도성은 의학대학이 들어서고 아름다운 대형 건물들이 건립되었다.   Galen이라 하는 유명한 의사가 주후 100년경 버가모에 살았으며, 그 도시는 또한 초대 기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40) 도시 그 자체가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 주권은 시민에게 있고, 지배는 부속 지역에까지 미친다. 아테네를 비롯하여 고대 희랍의 여러 도시가 이에 속한다. 'Polis'라는 용어는 호머의 시에 종종 나타난다. 이 의미를 인용한 가장 오랜 공문서는 주전 7세기경의 것으로 알려진 구레다의 도시국가의 도레로스의 결의문에 나타나 있다.  

 

   Polis의  이상은 자치, 대외적 독립, 경제적 자급자족이다. 귀족정치, 참주정치, 시민정치 등, 각가지의 정치체제를 경험하는 가운데서, polis의 특색이라고 할수 있는 것은 시민 공동체의 성격으로서 agora를 들수 있다.  agora는 희랍 도시국가 (polis) 시민의 중앙 광장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의 경제생활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영국사람은 이 agora를 Market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희랍인은 이것을 정치 참여의 광장으로 간주하는 편이 강하다. 따라서 그들은 광장의 뒷언뎍에 acro-polis (acro는 높다는 뜻이다.즉 언덕의 광장이라는 뜻이다) 신전을 도시국가의 중심도시인  asty시에 건축하고 국가 수호신을 모시기도 했다.  아테네에의 아크로 포리스는 고가 150m, 동서가 300m, 남북이 150m, 석회암의 언덕이다. 오래 전부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페루시야 전쟁때 파괴된 이후 방치되었다가 페리 구레스때부터 주전 5세기 말에 걸처서 희랍풍으로 재건되었다.

 

41) Polis라는 희랍어에서 영어의 Politics(정치학), Policy(정책), Police(경찰)이라는 말이 나왔다.

 

42) 아테네의 서북방 95km에 위치한 희랍의 Boiotia에 있던 고도시이다. 주전 447년에 아테네군이 Boiotia군에게 패전하고, 주전 338년에는 마게도니야의 빌립 2세가 아데네-데베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현제는 1000명 미만의 주민이 살고있는 작은 마을이다.

 

43) Hellas란 옛날 희랍의 전설적인 영웅 Hellen에 의해서 뎃사리아에 건축되었다고 전해지는 그리스의 한 종족이 살던 지명이다. 이 부근에 살던 Myrmidones의 거주지 전체도 이 지명으로 불리었다. 후에 에페이로스, 뎃사리아를 포함해서 그 이남의 희랍반도를 Hellas라고 불렀다. 그러나 소아시아 주민을 전체를 포함하여 희랍인이 살고있는 전 지역을 Hellas라고 부른 때도 있었다고 한다.

 

44) 견유학파의  철학은 주전 300년경 소크라테스의 제자, Antisthenes가 세웠다. 그의 철학의 출발점은   향락보다는 덕이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요참된 행복을 유지한다고 했다.

 

   현자(賢者)란 삶의 통상적인 향락을 멸시하며, 부나 명예를 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사람이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욕망을 바란다면,  행복이란 지속할 수 없다고 선포하였다.  

 

 사람은 사회와 국가와 가족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불러 오기 때문이다.

 

 Antisthenes의 열렬한 지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Diogenes 였는데, 그는 견유학파의 원리를 지나치게 따른 사람이다.  그는 조식(粗食)을 하였고 밤에는 통나무 속에서 잤다고 한다.

 

  후기 로마 시대에 견유학파 중의 유명한 사람은 제노(Zeno)이다.  

 

이 견유학파는 소크라테스와 스토아 학파를 다리 놓는 역할을 했다.

 

   권위 있는 설에 의하면, cynic이란 명칭은 견유학파들이 처음 모인 아테네 건물 이름, Cynosarges와 관계가 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설은 헬라말, 개에서 왔다고도 한다. 그것은 견유학파들의 지저분한 생활 습관과 연상시키는 것이다.

 

45) Epicurus (342?-270 B.C.)는 희랍의 철학자였다.  그의, 향락과 자유와 우정에 대한, 사상은 그레고-로마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Epicurean 이란 단어는 그의 이름에서 비롯하였다.  Epicurus는, 인간의 마음은 두가지 주된 근심 때문에 혼란해진다고 했다: 하나는 신들에 대한 공포요, 다른 하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믿었다.  그는, 이 두가지 공포는 다 잘못된  신앙 때문에 생긴 것이며, 사람은 이를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신들은 존재하나,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신들은 인간 세상에서 떨어져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들은 그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싸우기 때문에 인간사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Epicurus는,  선과 악이란 단지 감각일 뿐, 죽음은 감각을 소멸시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 않아야 한다고 했다.  이 공포로부터 자유하여, 사람은 적당한 쾌락을 찾고 고통을 피하여 행복한 삶을 살수 있다고 했다.  

 

  최선의 쾌락은 사람이 신중함과 중용과 용기와 정의와 우정을 유지함으로 얻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사모아 섬에서 태어나 주전 306년부터 죽을 때까지 아테네에서 철학을 을 가르쳤고 많은 저술을 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을 요약한 세편의 편지를 제외하고는 그의 철학은 그의 많은 작품의 단편들과  자연에 대한 시집에서 재편집되어 전해지고 있다.  

 

 46) (1) Attalos I (269-197 B.C.) 버가모 (Pergamum)왕 (제위241-197)은 시리아로부터 독립함. 수리아의 대항을 의식하여 로마와 친선을 맺음.

 

   (2) Attalos II (220-138 B.C.; 재위 160-138). 앗다로스 1세의 둘째아들. 이때에는 로마의관계가 악화됨. 그는 학술의 보호자로서 유명하다.수도 버가머는 알렉산드리와 쌍벽을 이루는 헬라문화의 중심지다.

 

   (3)   Attalos III (171-133 B.C.; 재위 138-133). 친로마정책을 씀. 버가모왕국을 로마에 유증했다고 알려짐. 이때문에 사회불안을 증대시켜132-129 B.C.아리스토니고스의 유토피아 국가건슬을 목적으로한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47) 그리스 도시동맹의 하나이다. 중부 그리스의 Aitolia 지방의 도시와 촌락을 중심으로 한 이 동맹은 후에  기원전 376년경부터 그리스 역사에 등장했다.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Peloponsus (그리스 남부의 반도)의 Achaia아가야 동맹과 함께 그리스의 2대 도시 동맹으로서 쇠퇴한 Polis에 대신하여 그리스 본토의 정국을 좌우했다.

 

48) 이런 사례는 현실 이민국가인 미국에서도 현저히 찾아볼 수 있다.

 

49) 한국의 향토예비군과 같은 것

 

50) 우리는 근대사에서 스페인이나 폴트갈이 남미의 식민지에 건설한 식민도시와 그 현재의 양상을 미루어 보아 그 시대의 식민지 양상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앞으로 미국의 정책도 양상은 다르지만 스스로 넓은 땅덩어리 위에 세계각지의 민족을 이민시켜서 귀화(U.S.Natulization)정책을 쓰고 시민권을 주고 성인하교를 통해서 언어를 가르치고 문화를 교육시키는 정책을 쓰고 있지만 그 정책이 고유의 민족성을 앞질러 가지는 못하고, 미국 자체가 퇴폐풍조와 자본주의 경제정책의 허점으로 인해서 강도,  불법,  마약, 폭동,등,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를 파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앞으로 최후로 남아날 수 있는 생존의 길은,  각 민족 단위의 강한 주체성과 고유의 정신문화와 전통의 가치를 보존하고 외부 세계의 역사적 현실을  바로 비판한 뚜렷한 주체성과 가치관을 보유하는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51) 예수 시대에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이 『코이네』가 통용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는 이 헬라 『코이녜』로 기록이 된 것이다

 

52) 현제 미국의 딸라가 세계 어디서도 통용되는 것과 같다.

 

53) 유다의 전통적 종교제도와 지도자들을 인정하지 않은 것도 헬레니즘 제도의 하나이 였을 것이다.

 

54) 성지의 여러 유적지에도 헬라의 문화의 유산으로 여러 극장과 경기장을 복 수 있다.

 

55) Muses라고도 한다.  희랍신화의 시가, 문학, 음악, 무용의 여신의 이름이다. 후에는 학문의 여신이라고도 했다. 이 신이 학문의 영감을 불어 넣어야 이상의 모든 학문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 여신을 승배한 고대의 신전은 뎃사리아의 오림프스 산 근처인  Pieria와 보이오데이아의 Helikon 산이었다.

 

56) 현제는 불란서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불란서 제일의 무역항이다.

 

57) Menander(os)(342?-291? B.C.)는 헬라의 극작가였는데, 약 100편 이상의 희극을 썼다. 우리는 다만 그의 단편적인 작품들과 로마의 극작가들, Terence 와 Plautus에 의하여 대충의 줄거리를 개작한 작품과 완전한 작품으로서는 1959년에 발견된 Dyscolos(토라진 놈)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메난더는  아테네에서 태어나서 알렉산더 대제와 같은 힘있는 자가 정치적 군사적 사건을 통치함으로 정치적으로 문제가 심각할 때에 살았다.   

 

  그 때의 작가들은 사회에 있어서  개인주의 적인 체험에 관심을 기울였다.  메난더의 희극은 특히 연애사건과 중산층의 익살적인 상황을 극화했다.

 

 그는 인간미에 대해서 특징이 있고  뚜렷하고 깊은 애정을  가진 자기 분야를 구축한 사람이다.

 

 

 

58) 희랍철학의 한 학파의 이름이다. Platon은 기원전 386년경 아테네 교외에 있는 아가데모스(agademos; 신을 사랑한다는 뜻)라는 영웅이 가지고 있던 토지에 학교를 창설했는데 Platon의 사후에도 학풍, 사조의 변천은 있었지만 대대로 학파로서 계승되었다. 주후 529년 로마의 유스데이아누스 대제의 칙령에 의해서 철학의 가르침이 금지 될 때까지 이 학파가 지속되었다. 그 학파를 총칭해서 아가데이아 학파라고 하는데 보통 3기로 구분한다.

 

   1. 고대 아가데이아 파;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가미하고

 

       Platon(B.C.427-347)의 교설을 발전시켰다.

 

   2. 중기 아가데이아; 회의주의적

 

   3. 신 아가데이아; 독단론과 절충주의

 

59) 철인 통치사상의 극치를 의미한다. 철인으로서의 왕을 최고의 통치자로 보는 것이다.

 

60) 애굽의 신화,  유계(幽界) 의 왕 Osiris는  모든 신들의 아버지  Ra(해라는 뜻; 고대 애굽의 태양신)의 승천후 애굽의 '좋은 왕'이라 해서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인민을 재판하고, 신들을 섬기는 것과 농경법을 가르쳤다. 그의 동생 Set(악한 신)는 이를 시기하여 형을 죽여 그 시체를 관에 넣어 나일강에 흘러보냈다. 관은 시리아의 비부로스에 표착하여 버드나무에 휘말리어 후에 그 땅의 왕궁의 기둥이 되었다. 그의 누이이자 그의 처인 Isis는 고심 끝에 이것을 뽑아서 애굽으로 가져왔지만, Set는 이것을 14토막으로 내여 전토에 뿌려 버렸다. Isis는 다시 이것을 수집하여 마포에 싸서 (이것이  최초의 미라라고 한다) 입김을 불어넣어 부활을 시켰다. 그의 아들 Horus은 성장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복수했다. 부활한 Osiris는 유계의 왕이 되었다. 이 신화에서 보여주듯이 Osiris는 불멸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신이며, 원래는 시리아 기원의 농경의 신이며, 바벨론에서는 단무즈와 이슈달로 나타나있다. 제일 처음 이 신앙의 중심은 Delta의 프시리스(Osiris의 집)있었는데 차츰  남쪽으로 전해저서 토착의 사신과 합쳐져서  전토에 전파된 것으로 본다.

 

61) 멤피스에 있는 Apis(황소)(렘 46:15).

 

아피스로 알려진 거룩한 황소는 고대 역사시대 이래에 애굽사람들이  섬겼던 풍요의 신이다.  비록 그가 애초에는 신, Ptah의 현현이 였지만, 그의 풍요의 기능은 그레코-로마 시대의 Osiris 에 밀접하게 관련되여 졌고, 또한 그는 Osiris-Apis나 혹은 Serapis라는 이름으로 재 성육신 되었다고 본다.   

 

 이 특별한 대표적인 황소는 지대한 관심하에 제사장에 의해서 선별되며, 그 황소가 살아 있는 동안 이것은  거룩한 예배와 찬사를 받게 된다. 그가 죽으면 미라로 만들어 애굽에 보존되어 온 여러 무덤중의 어느 하나에 묻히게 되었다.

 

 

 

62) 제우스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왕으로서 신생의 최고 통치자이다. 본래 그는  하늘의 신이 였다. 한 때, 헬라 사람들은 그를 전 우주를 통치하는 유일한 신으로 생각했었다. 헬라 사람들은 제우스와 연합하여 정의를 시행했고, 제우스는 상선 벌악한다고 믿었다. 제우스는 로마의 신 쥬비터와 같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63) Serapis는 애굽에 있던 헬라-로마 사람들이 섬기던 신이다.  세라피스는 치유의 신이며 선부를 보호하는 신이 였다.  그의 이름은 Osiris 와  Apis에서 왔다.  Osiris는 매우 인간미가 있고 다감한 애굽의 신이 였다. 그는 악신에  의해서 살해되어, 지하 세계의 재판장이 되었다.  세라피스는 지하세계에 들어간 후에 Osiris가 되었고, 거룩한 황소인 Apis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고대 멤피스에 와서  세라피스 상에 경배하고 있다.

 

64) Isis는 애굽 사람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여신이 였다. 그 여신은 Osiris의 누이이자 아내였으며, Horus의 어머니 였다. 멤피스를 중심한 그 여신의 예배는 애굽 전역에 퍼져 있었으며,  주전 약 100년경에 그 종교는 헬라와 로마에 들어왔다.  

 

  Isis는 만물의 어머니이며, 모든 성분의 여성분이였으며,  모든 시간의 시작이 였다.  여행자와 항해자는 Isis를 그들의 보호자로 생각했다.  고대 애굽의 예술에 있어서, 그 여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65) 로마 帝政期에 가장 널리 신봉된 밀의종교의 하나이다. 본래는 산스크리트에서 유래되어 '계량,' '계량자,'를 의미하여, 세월의 계량자, 즉 태양신,  또는 인간 사이에 올바른 관계의 계량자, 즉  계약-정의-우정의 신으로서 기원전 2000 년대 초기부터 그 기원을 두고있다.  미드라는 헬라에서 일직 알려젔고  그들의 태양신 아폴로와  같이 취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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