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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로마 철학

하나님아들 2023. 7. 19. 23:51

그리스-로마 철학

 

1. 서론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의 철학은 오늘날처럼 학문이 아니라, 삶의 방법이었다. 윤리학은 주요 헬라철학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철학자들은 대중 종교에 대해 중요한 비판들을 전개했다. 그들은 전통적 신화의 신인동형론과 부도덕, 다신론, 미신적 종교행위, 그리고 희생제사의 거칠고 상스런 면들을 비판했다.

 

철학자들은 가르치는 데에 공적인 연설 외에 다른 수단을 사용했다: 편지, 발췌(방대한 저서를 체계적으로 요약한 것), 특별한 주제에 관한 어느 철학자의 가르침이나 충고들을 편찬한 것, 철학적인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서 격언, chreiai(교훈적인 일화로서 금언에 설화적인 배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격언과 다르다), 그리고 시가 사용되었다.

 

2. 궤변론자들(Sophists)과 소크라테스

 

궤변론자들(Sophists)들은 본질적으로 방랑자요 세계주의적 타입이었다. 그들은 자기의 기술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대중에게 강의를 하고, 그렇게 해서 일을 얻었다. 그들은 가정교사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대중 연설의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궤변론자들은 일반적인 질문들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성주의적인 경향은 신들의 존재에 대한 그들의 생각들을 통해 묘사될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신들의 존재 여부에 대해 알 수 없으며, 또 그들의 형상이 어떠한지를 알지 못한다. 확실성을 가로막는 것들이 많이 있으니, 예를 들면 물질의 불명료함과 인생의 짧음 등이다”

 

소크라테스(B.C 469-399)는 철학을 천상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그는 원리가 아니라 인간을 철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의 기본 사상은, 사람들은 올바른 것을 알면 그대로 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를 인도하는 다이몬(diamon)을 소유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다이몬은 마치 양심처럼 어떤 일을 행하는 데 대한 사전 경고를 주며 언제나 부정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결코 해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더 나은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의 철학은 훈련이지 체계가 아니었다.

 

3. 플라톤과 1세기까지의 아카데미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플라톤에게 일종의 종교적 각성을 초래했다. 그는 그의 스승의 삶과 가르침을 영구화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아테네를 떠나 약 12년 동안 여행을 한 후에 아테네로 돌아왔고, 387년 이후 아카데모스 신에게 바쳐진 과수원 근처에서 가르침을 시작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교수법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서 대화 형식의 저술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자신이 강의가 아닌 대화를 통해서 진리에 도달케 하는 소크라테스에게서 듣고 경험한 것을 문학으로 표현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관념(이데아)’이란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정신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밖에 있었다.

 

‘이데아’는 실체적이며 물질적 세계는 서툰 모방에 불과했다. 모든 형상이나 이데아는 하나의 궁극적인 이상, 즉 선의 이데아(완전의 원리)에 귀결된다. 또한 플라톤에게 ‘영혼’이란 현세 이전에 존재했으며, 그 후에도 계속적으로 존재하는 불멸의 존재였다. 그는 영혼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지적이거나 이성적인 것, 힘차거나 기운찬 부분, 그리고 욕구적이거나 육욕적인 부분이다.

교부 신학은 주로 플라톤 철학의 뼈대 속에서 모양을 갖추었다. 일부 유대교와 후기 이슬람 철학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비물질적인 실체에 대한 강조, 육체로부터 구별된 죽지 않는 영혼, 우주적 종교의 개념,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의 이론은 큰 영향을 끼쳤다.

 

4. 아리스토텔레스와 소요학파

 

아리스토텔레스가 17세 때 아카데미에 왔을 때, 플라톤은 논리와 이데아 이론의 비평에 관심을 쏟던 후기 단계에 있었다. 그는 플라톤이 죽은 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났다. B.C 334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연무장과 건물을 빌려 학교를 설립했다. 그가 연무장 안마당을 거닐며 제자들을 가르쳤으므로 그의 학파는 ‘소요학파’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의하면, 각각의 객체들은 자신의 완전을 향해 발전해간다. 따라서 그는 이 세상과 개개의 사물들에 관심을 가졌다. 플라톤이 형상들로부터 시작하여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간 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더 높은 종류들로 분류했다.

 

5. 회의주의

 

본래의 회의주의는 이론적인 목적보다는 실제적인 목적을 가졌고, 플라톤 학파가 그랬던 것처럼, 더 철저한 회의주의를 채택했다. 회의주의자들이 보기에 다른 모든 학파들은 독단적이었으며, 이것은 치료되어야 할 주된 철학적 병폐였다. 회의주의는 항상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결코 유력한 학파가 되지 못했다. 세계와 이론적인 질문들에 관한 한, 회의주의적 접근 방식이 옳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회의주의자들은 각 사람이 처한 사회에 의거해서 살라고 대답한다.

 

6. 견유주의

 

일반적으로 시노페의 디오게네스(B.C 400-325)가 냉소적 생활 방식을 창시한 것으로 본다. 디오게네스의 별명은 “개 같은 디오게네스”였다. 그는 무엇이든지 자연적인 것은 공공연하게 행해도 상스럽지 않다고 느꼈다. 최소한의 생필품으로 사는 자족의 삶을 옹호했다. 견유주의자들은 교리나 사상의 학파가 아닌 생활방식을 표현했다.

 

7. 스토아주의

 

스토아 철학은 키티움의 제논(B.C 335-263)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의 초기의 사상은 견유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사실이다. 스토아 학파의 견해에 의하면, 비물질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 세상, 그리고 말(words)까지도 물질이다. 감정조차도 물질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물질적인(혹은 육체적인) 현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은 삶의 목표를 덕으로 정의했다. 인간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성적 원리가 우주에 널리 퍼졌기 때문에 덕이 높은 사람은 이성(로고스)에 의거하여 산다. 이러한 인식의 보편적인 공식은 “본성에 의거하여 사는 것”이다. 이 세상은 가능한 세상들 중 최상의 것이며, 본성은 우리가 지니고 태어난 완벽한 환경이다. 따라서 본성에 의거해서 산다는 것은 이성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스토아주의에서 사용되던 용어들 중 일부를 사용했다: 영, 양심, 로고스, 덕, 자급자족, 말의 자유, 합리적인 봉사 등. 사회의 구성 단위와 관련한 성경적인 권면들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스토아적 영향을 보여준다.

 

8. 에피쿠로스주의

 

에피쿠로스는 B.C 341년에 ‘사모스’라는 아테네 식민지에서 태어나 B.C 270년에 사망했다. 그의 철학은 정신과 우정과 만족의 평온한 즐거움을 증진했다.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자였다. 물리적인 세계는 법칙에 의거해 움직이는 원자들로부터 유래된다. 그러므로 자연은 아무런 목적이 없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정련된 물질적 원자로 만들어진 신들의 존재를 믿었다. 그들은 불멸하며 최고로 행복하며 평온하다. 그의 체계에는 기도나 기도 응답의 여지가 없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사람이 추구해야 할 쾌락들은 영혼의 평정에 관한 것이다. 평정, 즉 동요의 부재가 최상의 선이었다. 고통과 두려움의 부재는 대부분 신들의 부재를 통해 성취될 수 있다. 마음의 평화는 신의 간섭을 제거함으로써, 그리고 죽은 후에 영혼이 생존하여 무언가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9. 절충주의

 

절충주의란 고르고 선택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른 철학 학파들로부터 원리들을 발췌하여 새롭게 배합함으로써 구성하는 경향을 지칭한다.

절충주의는 회의주의와 반대로서, 뜻하는 상태로 만들 수 없는 적대심 대신에, 근본적으로 모든 철학은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대중 철학은 여러 학파의 공통 요소들(특히 윤리적인 사상에서)의 덕을 보았다. 조직적인 방법으로 성취된 이 합병의 과정은 중기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를 생기게 했다.

 

10. 신피타고라스주의

 

B.C 6세기의 역사적인 인물인 피타고라스는 희미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철학과 종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네 가지 견해와 관련이 있다.

 

(1) 피타고라스는 숫자가 우주의 구조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주가 수학적인 법칙을 따른다는 견해는 심오한 중요성을 지녔다.

(2) 피타고라스는 영혼의 재생 또는 이주(육체가 죽을 때에 영혼이 다른 몸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의 이론을 가르쳤다.

(3) 피타고라스는 종교 집단의 결속력을 가진 제자들의 그룹을 형성했는데, 그들의 수호신은 아폴로였다.

(4) 그는 금욕적인 훈련을 확립했다. 그의 그룹의 회원들은 규칙에 의거해 살아야 했다.

 

11. 중기 플라톤주의

 

B.C. 1세기부터 A.D. 2세기까지의 플라톤주의는 중기 플라톤주의라고 불린다. 이것은 B.C. 50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듯 하다. 중기 플라톤주의는 스토아의 윤리,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그리스 신피타고라스의 형이상학과 종교와 숫자 상징의 영향을 받은 플라톤주의다.

중기 플라톤주의자들은 지고한 정신의 절대적인 초월성을 강조했다. 행복이라는 삶의 목표는 “가능한 신을 닮는 것” 안에 존재한다는 중기 플라톤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플라톤주의 전통의 다양한 형태와 연합한 키케로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플루타크는 그 시대의 절충주의적 경향들 및 여러 요소들을 흡수하며 새로운 종합을 위해 통합하는 틀이 되는 능력, 이교주의의 마지막 단계에서 주도적인 힘이 되게 해주며, 교부신학의 형성에서 주된 철학적 영향력이 되게 해주는 능력을 반영한다.

 

12. 플로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

 

헬레니즘의 철학적 발달은 신플라톤주의에서 절정을 맞는다. 신플라톤주의는 영적인 그리스 종교의 마지막 형태였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체계로서 기독교 사상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리겐은 신플라톤주의가 유래된 사고 세계와 동일한 것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 철학은 4세기 카파도키아인들의 저술의 배경이 되었고, 그들을 통해 그리스 정교회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것은 어거스틴의 지적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를 통해 중세 라틴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플로티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피노자 사이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불린다. 그의 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신피타고라스주의의 요소가 포함된 플라톤주의로 구성되어 있다. 그 시대의 이원론적 견해는 궁극적인 일치의 체제 안에서 표현되었다. 최고의 원리는 완전히 초월적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기초이며 모든 가치의 근원인 일자(the One), 모든 실존의 근저요 모든 가치의 근원이 되는 빗물질적이며 비인격적인 힘이다. 일자는 주체도 아니고 객체도 아니며, 자아도 아니고 세상도 아니다. 일자는 모든 이원성을 초월함으로써 남은 것이다. ‘1’이라는 숫자가 다른 모든 숫자들과 다르지만 여전히 그들의 근원이듯이, 이 제일 원리도 그러하다.

 

신플라톤주의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결실을 가져왔고, 시간의 개념들을 체계화했으며 신학과 철학을 통합했기 때문이다. 후기 신플라톤주의자들은 그것을 스콜라주의로 만들었고, 미신과 마법을 교리로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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