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그리고 섭리
박홍섭 목사
I. 들어가면서
지금 우리가 하려고 하는 작정과 예정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신론에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사역 등을 공부하는데 존재는 삼위일체를 배우고, 속성에는 공유적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배운다면 하나님의 사역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고 계신 일들을 배우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셨고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가? 창조와 구속과 섭리가 있다. 이 중에서 창조와 구속은 따로 하니까 우리는 섭리만 한다. 그런데 그 전에 무엇을 해야 하나?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기 전에 반드시 계획을 하고 하신다는 것이 작정과 예정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정과 작정이 무엇인가?
2.작정의 정의
작정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무엇인가 행하시기 전에 그것을 계획하시고 결정하신다. 인간도 행동하기 이전에 계획을 세우는데 하물며 하나님이겠는가? 작정은 만사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도모이며 정하신 뜻이다. (도모-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대책과 계획을 세우는 것) 하나님은 무한한 권능과 무한한 지혜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사변들의 진로를 선택하고 결정하셨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부른다. 펠라기안 파는 하나님에게 계획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알미니안파는 총괄적인 계획은 있어도 특정적 계획은 없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결정하시거나 허락하시지 않는 이상 그 무엇도 발생할 수 없다.
(예/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 뉴턴이 숙련된 기계공에게 태양계의 모형을 만들도록 했다. 태양을 중심으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등) 태양계의 모형을 만들어서 크랭크를 돌리면 순서를 따라 돌아가도록 만든 멋진 기계였다. 어느 날 무신론자인 과학자 친구가 그 태양계 모형을 보곤 크랭크를 서서히 돌렸다. 그러자 모형에 달린 각종 혹성들이 다양한 속도로 태양 주위를 회전하는 것이었다. 놀란 친구는 훌륭한 모형임을 칭찬하며 누가 만든 것이냐고 뉴턴에게 물었다. 뉴턴은 “아무도 만든 사람이 없네.”라고 대답했다. 그 친구는 재차 물었고 그 때도 뉴턴은 동일한 답을 하면서 그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그러자 은근히 화가 난 친구는 “자네는 나를 완전히 바보로 생각하나? 이렇게 정교하고 훌륭한 모형이 어떻게 저절로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소릴 질렀다. 그제야 뉴턴은 그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이처럼 작은 모형 태양계도 설계자가 있고 제작자가 있어야 만들어지는 것인데, 하물며 한없이 큰 진짜 우주가 질서정연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우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를 되물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없으며 우주와 모든 생명체는 우연히 만들어져 진화되어 온 것이라고 주장하던 그 친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조그마한 태양계의 모형도 사람이 정교하게 설계하고 계획해서 만들어야 한다. 하물며 그 본체인 이 방대한 우주가 어떻게 우연히 만들어 질 수 있겠는가?
3.작정과 예정에 대한 오해
작정과 예정론에는 많은 오해들이 따랐다. 그것을 운명론이라 한다거나 인간의 자유행동과 도덕적 책임에 모순된다고 한다거나 혹은 노력하려는 인간의 모든 동기를 좌절시키거나 하나님이 죄의 창조자가 아니냐는 등. 다른 어떤 성경의 교리보다 심한 오해와 조소를 받아왔었다. 그러나 예정 신앙은 인간을 결코 로봇처럼 만들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반론은 나중에 다시 다루겠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의 조화의 문제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에 속한다는 것이다. 로레인 뵈트너는 이 신비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내부적 감정, 외부적 환경, 습관, 욕망, 동기 등을 거느리고 제어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행동하게 하시면서도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수행케 하신다. 이 작용은 측량하기 어려우나 그럼에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현재 지식 상태로서는 어떻게 이 작용이 인간의 자유 행동력을 파괴함이 없이 수행되는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그렇게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실재하는 것들이요, 또한 그들이 완전한 조화 속에 함께 역사한다는 것이다.” 뵈트너의 말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대해 ‘해명’할 의무가 없다. 다만 우리에게는 성경에 계시된 대로 말하고 또한 우리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 말씀을 오해와 반대로부터 옹호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예/잔잔한 바다 위 평화롭게 항해하는 배에서 갑자기 “사람 살려!”하는 조난당한 한 사람의 절규가 들려왔다. 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몰려와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보았지만 아무도 선뜻 구조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이슬람교도가 말하기를 “전능하신 신이 저 사람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였다면, 저가 살아날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면서 방관자의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저 사람을 구원하도록 예정하셨을지 몰라!” 하면서 두 팔을 걷어 부치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조난당한 사람을 구하여 내었다.)
여기서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하메트교 신자는 숙명론적인 결정론에 빠져 있는 자이고, 기독교인은 성경이 말하는 예정의 신앙을 소유한 자이다. 이 두 사람 속에 내재해 있는 서로 다른 종교적 세계관은 전혀 다른 삶의 양상을 나타내게 하였다. 한 사람은 역사적 현실에 대해 수동적인 태도로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였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면서 역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사실은 성경적 예정론을 우리의 강의 주제로 삼을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가치를 제공한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열고 성경계시의 표준을 따라 지난 날 교회 역사 속에서 울려나왔던 여러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분명해질 것이다. 엡1:1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며 이 세상 모든 만물의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결정하시고 전 피조계에 자기의 주권적 의지를 행사하시되 자기의 선정하신 계획에 의하여 하신다. 성경은 만사만물이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되었음을 선언하고, ‘온 세계’, ‘땅의 모든 거민’, ‘모든 일’을 그의 정하신 경영과 뜻에 따라 처리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돌이키거나 금할 자가 없으니 하나님의 도모는 영영히 서며(시 33:11), 그의 경영은 정녕 행하여진다(사 46:11). 심지어 사람의 악행이라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만사 만물에 하나님의 작정대로 되지 않는 일은 없다.
(운명론/과학이 발달하기 전 고대인들은 하늘의 해와 달, 별을 보면서 그것이 자신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 태양을 보면서 신을 생각,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밝은 태양,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태양을 절대적인 신으로 생각, 달을 보면서 달이 하루하루 변하는 모습, 기울기도 하고 차기고 하고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달이 자신들의 운명을 닮았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운명이 달에 달려 있다고 믿고 달을 운명의 여신으로 믿음, 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을 보고도 그 별 속에 자신들의 운명이 새겨져 있다고 믿음, 저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나의 별이 떨어지면 내 인생도 끝난다고 믿음. 애굽 왕들이 죽으면 피라미드에 구멍을 내고 왕의 눈과 그의 별이 일치하는 자리에 시체를 안치한 것도 그와 같은 생각 때문이다. 왕은 죽어서 자기별을 보고 누워있고 그 별로 돌아간다고 생각한 것, 고대인들은 별을 보면서 인간의 운명과 국가의 장래를 점쳤다.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기 전 고대인들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운명을 생각했던 운명론에 빠져 있었다. 하늘의 비밀이 풀리지 않았을 때 인간은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에 빠져서 운명에 압도된 체 모든 것을 두려워하며 꼼짝하지 못하고 살았다. 하나님의 작정을 오해하면 이와 같은 운명론으로 오해하게 된다.)
4.작정과 예정 교리에 접근하는 자세
이 교리는 성삼위일체의 교리처럼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을 초월하고 보잘것없고 왜소한 지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내용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계획과 우리의 책임이 충돌할 때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하시고 계획하셨다면 왜 우리의 행위에 그 책임을 묻는가? 왜 누구는 택했고 누구는 버리는가?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왜 야곱은 택하시고 에서는 택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을 억지로 조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성경에 계시된 내용대로 받아들이려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 주제는 유한(有限)한 인간이 무한(無限)하신 하나님의 세계에 접근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헛된 호기심이나 상상으로 접근하면 깊은 어두움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예정론을 탐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의 거룩한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태연하고 자신 만만하게 이곳에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호기심을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며, 미로 속에 들어가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지혜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하기를 원하시며, 찬양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영원한 영광 가운데 들어가 이 모든 답을 얻을 때까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그의 영원하신 작정과 창세전에 결정하신 일들에 관한 성경의 말씀들을 믿는 것이다. (롬9:20-23, 토기장이의 비유, 하나님을 힐문할 수 없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성경의 권위와 그것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 따라서 우리는 깊은 경건과 겸손한 주의를 가지고 이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5.허용적 작정
하나님의 작정에는 적극적인 면으로 모든 사물의 창조, 보존, 통치 등 섭리의 능동적, 효과적 사역을 위한 유효적 작정이 있고, 소극적인 면으로 인간의 범죄를 허용하고 사탄과 악의 활동을 허용하는 허용적 작정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 안에 악한 욕망이나 선택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자유로 범죄 하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뿐이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결코 시험할 수 없고(약1:13), 죄의 결과를 기뻐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정하셨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해서는 안 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의 처벌을 작정하셨지만 죄의 행위를 작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악한 일들을 그의 영원하신 도모 가운데서 허용하시지만 불쾌감을 드러내고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 여기에 관한 것을 허용적 작정이라고 정의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1항은 허용적 작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그 자신이 뜻하신바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계획에 의하여,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자유롭고 변치 않게 작정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며, 피조물들의 의지가 침해당하지 않으며, 제2원인들의 자유나 우발성이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확립된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작정에 따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일어나도록 하시면서도 하나님 자신은 죄에 대한 책임을 갖지 않으며 죄를 범한 사람에게 그 책임이 돌려지는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의 실행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 신비로움은 제1원인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을 실행할 때에 자유의지나 어떤 우연성과 같은 제2원인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그대로 확립하면서 그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어떤 일이 이루어질 때, 그렇게 이루어진 일에 대한 책임이 그 일을 행한 자들에게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도록 넘겨준 유대인들의 행위는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을 따라 일어난 일이지만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고자 빌라도에게 주님을 넘겨준 죄악의 책임은 그 유대인들에게 돌아간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도다.”(행 2:23)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넘겨준 것은 하나님의 작정대로 이루어진 일이거늘 왜 유대인들에게 그러한 일에 대한 죄책을 물을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작정한 일을 누가 거슬릴 수가 있겠는가? 죄악을 행한 자가 그렇게 행하였음을 통해 하나님의 작정이 이루어진 것이니 오히려 하나님의 작정의 실행에 도움을 준 것으로 칭찬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제기들은 죄책이 발생하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여 나오는 질문들이다. 사람이 죄악을 범할 때 그에게 죄책을 묻게 되는 근거는 우선 그가 행한 것이 하나님의 법도와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점과 또한 그가 그것을 자신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외부로부터의 강압이 없이 행한 것에 있다.
하나님은 작정을 실행하실 때에 놀라운 그의 능력과 지혜에 따라서 사람의 자유의지를 억압하지 않으시며 도리어 그것을 확립하신다. 즉 하나님의 작정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줄 때 그들은 외적인 강압에 의하여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거슬려 달리 행하지도 못한 채 그러한 죄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자를 불법한 자에게 넘겨주는 일이 죄악인 줄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자유로운 판단을 따라 의지를 세워 그렇게 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과 관련한 죄책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롯 유다도 빌라도도 같은 이유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을 죄책을 피할 수가 없다. 이렇듯 인간의 죄 행위는 전적으로 그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짓게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섭리 안에서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
6.작정의 특성과 목적
1)신적지혜에 기초함(하나님께는 마지못해 하는 것 하나도 없음,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하심,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속하고 감추어진 비밀의 경륜에 속함, 다 알지 못한다. 고전2:7, 엡3:9)
2)완전한 자율성(어느 누구에게도 영향 받지 않고 그 기쁘신 뜻대로, 그 마음의 원대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작정하심. 무조건적, 무의존적, 엡1:5,11,행2:23)
3)영원적임(비시간적)
4)불변적임
5)효과적임(반드시 이루어짐)
6)보편적(우주의 모든 사변을 포함)
7)죄와 악에 관해 허용적(죄의 조성자 아님. 허용하지만 거룩한 목적을 위해 악을 지배)
8)숙명론이나 결정론이 아님(숙명론은 사건들이 맹목적인 우주과정에 따라 사정없이 생기지만 작정은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므로 그 기초가 다르다.)
9)작정의 목적
하나님의 작정은 피조물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도 하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심에 있다.(계5:13) 그러므로 믿는 자의 삶은 이 목적에 부합되도록 살아야 한다.
7.예정
작정과 예정이 혼동되어 자주 교차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원래 그 의미는 서로 다르다. 작정이 만사 만물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계획이라면 예정은 그 포괄적인 작정 가운데 이성적존재인 천사와 사람,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람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예정이라고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장3-4절은 다음과 같이 예정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그의 영광을 잘 드러내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었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미리 정해졌다. 이렇게 예정된 천사들과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불변적으로 계획되어진 것이며 그들의 수는 매우 확실하고 명확해서 더해지거나 감해질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예정이 이중예정, 즉 선택과 유기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정교리가 바로 이해될 때 우리의 구원은 변덕무쌍한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작정과 은혜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한없는 위로와 감사가 될 것이고 끝까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1)선택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를 선택하셨다. 이 선택은 무조건적이며 주권적이다. 하나님은 선택을 통하여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작정하셨다.
2)유기
죄에 빠진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구원의 특별은혜를 주지 않고 죄 가운데 버려두셨다가 영원히 형벌 받도록 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로 작정하신 것을 유기라고 한다. 웨신 3장 7항은 유기를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는 자신의 의지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경륜에 따라서,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자신의 주권의 영광을 위하여 인류 가운데 나머지 사람들을 간과하고, 그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치와 진노를 받도록 기쁘게 작정하시므로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미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류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여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미하도록 하신 것처럼, 나머지 인류를 선택에서 간과하시고 또한 죄로 인해 영원토록 심판을 받도록 하심으로써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를 찬미하도록 하셨는데 그것이 유기이다.
유기에는 간과와 정죄의 두 요소가 있다. 간과는 선택의 예정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시며 구원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심을 뜻한다. 부패한 죄인의 비참한 상태에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선택의 예정을 받은 자들과는 달리, 구원의 방편을 따라 행하지를 않고 자신의 부패한 성품에 따라 죄를 범하기를 기뻐하며 죄로 인한 비참한 상태의 삶을 살게 된다. 즉 이들은 회개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믿고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법도에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처럼 유기된 자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범하며 살다가 마침내 죽어서 영원한 정죄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일반적인 섭리에 의하여 이들에게 하나님의 호의를 베푸는 것조차 거두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에게도 해와 비를 차별 없이 나누어 주시며, 또한 도덕적 선을 행하도록 호의를 베풀어주신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유기된 자들이 죄를 범하는 까닭을 그들이 유기된 자로 예정이 되었기 때문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죄를 범하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부패한 죄인의 비참한 상태에 내버려 두었다는 데에 있지 않고 그들 자신의 부패한 성품을 좇아 자유의지에 따라 스스로 자원하여 행한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으며, 또한 영원한 정죄의 심판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려서도 안 된다. 이것은 마치 병자의 질병을 고치지 않은 의사에게 질병의 자체의 원인을 돌릴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은 죄를 범하도록 이들에게 어떤 사악함을 주입하거나 부추기시지 않으셨다. 다만 그들에게 부패한 성품을 거슬려 죄악을 범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구원의 생명력을 주시지 않으셨을 뿐이다. 유기된 자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하려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기억해야 한다.
이 교리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 가혹하게 여겨지는 것은 맞지만 성경은 명확하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마11:25-26, 롬9:13,17,18,21, 11:7, 유4, 벧전2:8).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 않으신 것과 관련하여 결국 유기된 자들의 죄의 원인은 하나님께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감히 비난의 말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구원의 은혜를 모든 사람들에게 주셔야만 하는 의무를 지신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기의 교리는 하나님을 불공평하고 불의한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3)사람의 예정과 천사의 예정 차이
예정의 대상은 이성적 피조물인 모든 사람, 모든 천사들이다. 그런데 그 이성적 피조물들 가운데 타락한 인류는 예정의 본격적인 대상이다. 그리고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딤전5:21)이란 표현은 택함을 받지 못한 천사들이 있음을 함의한다. 이 거룩한 천사들(막8:38, 눅9:26)이나 타락한 악한 천사들(벧후2:4, 유6), 모두는 다 예정의 대상들이다. 이처럼 인간도 천사도 다 예정의 대상이라면, 양자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인간의 경우, 타락한 후에 선택된 것이며, 천사의 경우는 타락 전에 선택된 것이다. 즉 인간의 경우처럼 타락한 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을 선택하신 것과는 달리, 천사의 경우는 타락 전에 어떤 천사들에게 특별한 견인의 은혜를 주어 타락을 예방한 것이다. 또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선택에서는 중보자가 요구되지만, 천사의 경우는 타락한 상태에서의 구속을 위해 선택된 것이 아니므로 중보자는 불필요하다. 중보자가 아니라 원수(元首)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봉사의 관계를 가지도록 선택된 것이다.
8.절대 예정? 예지 예정?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그는 지 정 의지의 인격적인 요소를 지니신다. 그는 전지하시며 전능하시다. 전지는 지성적 국면이고, 전능은 의지적 국면이다. 그런데 그의 지성이 그의 의지보다 앞서는가? 아니면 의지가 지성보다 앞서는가? 이에 대한 논의는 이미 고대 교회로부터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의지가 앞선다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지성이 앞선다고 했다. 이리하여 예정론은 서로 다른 두 조류를 형성하며 내려왔다. 그 중 한 조류는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와 16세기의 칼빈을 연결하는 노선이요, 다른 한 조류는 5세기의 펠라기우스와 17세기의 아르미니우스를 주축으로 형성되었다. 전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중점을 둔 절대 예정을 주장하였고, 후자는 하나님의 절대권에 인간의 책임성을 약화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인정하는 예지 예정론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관계된 역사적 변천 과정은 다음과 같다.
1)고대교회
동방교회를 중심으로 의지의 자유를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다소간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유로우며 선을 택할 수 있고, 주어진 은혜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능력이 있다. 이러한 인간은 여전히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은혜가 필요하다. 만일 인간이 그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의 도움으로 견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은혜를 받고, 견인할 자들을 미리 아시고 그들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 그 외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비록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으나, 그들을 자신의 타락한 상태 속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시고, 그들을 타락으로 정하셨다. 이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이나 불가항력적 은혜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신적 작정(예정)의 근거를 하나님의 예지에 두었다. 상급과 형벌의 결정 역시 이 예지에 의존케 하였다.
펠라기우스는 이러한 고대 동방교회의 경향을 따랐다. 그런데 그는 이성주의적 경향과 도덕률에 대한 금욕주의적 태도로 인해 원죄교리를 부인하고,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죽음에 대한 교리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는 정통적인 기독교와는 하나 될 수 없는 일련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로우시므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케 된 모든 피조물 역시 본성이 선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도 자유의지를 포함한 선한 본성이 결코 변하거나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이 펠라기우스의 주장이다. 비록 인간이 악을 행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의지는 본질상 타락 전 상태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죄는 자유의지로 말미암은 행위의 결과이지, 결코 자연적 성향이나 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아담의 죄가 그 후손들의 본성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은 창조 때의 아담과 동일한 도덕적 상태로 출생된다. 이는 곧 원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죄란 모방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란 죄에 대한 결과가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에로의 예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정이란 전적으로 인간의 선행에 대한 예지에 의존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벌이기 전, 오래 전부터 예정론을 가르쳐 왔었다. 그는 로마서 연구를 통해 그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으며, 성경의 교훈 이외의 어떤 것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예정은 인간의 공덕과 가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은혜로 말미암는다. 믿기 때문에 택함 받는 것이 아니라, 믿도록 택함을 받는다. 예정의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그의 절대적인 권위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어떤 이들을 영광의 그릇으로, 다른 이들을 수치의 그릇으로 삼으실 수 있다. 예정은 유기를 포함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주 영원한 죽음에로의 예정에 관해,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된 자들에 관해, 그리고 정죄되기로 예정된 세상에 관해 언급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예정된 자들 가운데 아직 믿지 아니하거나 혹은 출생하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모두 그 가운데 속한다. 그들의 수는 정해져 있으며 불변하다. 시간 세계 속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에게로 나오며, 세례를 받으며 신앙과 더불어 견인의 은혜를 받는다. 이 모든 것들이 오직 선택된 자들에게만 부여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예정에 포함되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오직 이로써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정된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고 또한 잘못된 평안으로 속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선택받지 못하고, 견인하지 못하는 자들도 교회에 들어가게 하신다.
2)중세
중세 교리사는 그레고리우스 대제(540년생)로부터 시작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예정 교리를 수정하였다. 그는 은혜의 불가항력성을 말하였으며, 또한 예정을 확실한 수의 선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이라고 하였으나 결국 예지를 예정의 원인으로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선택과 유기를 말하는 이중 예정설을 주장하였는데, 7세기부터 8,9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추종자들이 이 예정의 이중성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그레고리우스의 주장이었던 것처럼 오해하였다. 이에 곧쇌크라는 사람이 그것이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유래된 것을 발견하고 이중 예정설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레고리우스를 반대하여 예지에 기초한 예정론을 부인하였다. 이에 곧 반론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내용인즉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정통교리가 주후 848년 메이언스에서 정죄되었고, 곧쇌크는 한 평생 금고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다시 논쟁이 일어나 한편으로는 이중 예정설을 옹호하는 자들과 다른 편에서는 이를 공격하는 자들이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교리의 옹호자도 반대자도 모두 반(半)펠라기안주의자들이었다. 전자는 이중 예정을 말하였으나 유기는 예지에 근거한다고 하였으며, 후자 역시 유기에 관한 한 동일한 입장을 취하였다. 여기서 ‘반펠라기안주의’란 은총과 자유의지를 절충한 것으로서 중세기를 거치면서 변형된 교리체계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으나 죽은 것이 아니고, 단지 병든 것과 같다. 마치 자신이 자신을 치료시킬 수는 없으나, 약을 먹을 수는 있으며 그래서 회복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인생은 마치 우물에 빠진 자와 같다. 그가 그 자신을 구할 수는 없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던져진 밧줄을 잡을 수는 있다. 결국, 죄악 된 인간은 은혜를 대가로 벌지는 못하지만, 그가 은혜를 수납할 수는 있으며, 또한 은혜로 도움을 받아 견인할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앙과 견인을 예견한 자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신다. 반면에 예견했던 행위를 거스르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은 그의 은혜를 중지시킨다. 반펠라기안주의에 있어서 예정과 유기는 이 이상의 더 깊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선택과 유기는 인간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의존한다. 로마교회는 아퀴나스처럼 어거스틴주의의 방향으로 움직여 절대적 예정과 이중 예정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개는 다 반펠라기안주의로 기울어졌다.
3)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그 이후
개혁자들은 엄격한 예정론자들이었다. 루터와 칼빈은 모두 이중 예정을 믿었으나 루터는 철저하지 못했다. 말년에 가서 그는 유기 교리에 대해 부정하려는 경향을 드러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을 의도하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유기를 하나님의 예지에 의존케 하기도 하였다. 쯔빙글리는 칼빈과 같이 유기를 효과적인 작정이라고 주장하였다. 멜랑톤은 초기에 엄격한 예정의 교리를 표방하였으나, 점차 확고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가능한 한 이 예정의 문제에 대해 회피하려는 성향을 드러내었다. 개혁파 신앙고백서들은 거의가 다 예정 교리를 구체화하고 있다. 그 중에 특별히 도르트 신조는 이 교리에 대해 명백하고 상세한 진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신조가 알미니안파의 도전에 대한 방어의 목적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알미니안파는 이 예정의 교리를 기각한다. 그들은 절대적 선택과 절대적 유기를 믿지 않는다. 그들에 의하면 선택은 예견된 신앙과 순종과 견인에 그 기초를 두었고, 유기 역시 예견된 불신앙과 불순종에 기초를 두었다. 이들보다 먼저 있었던 소시니안파는 예정을 반대한다면, 예지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죄와 은혜의 교리에 관한 한 고대 펠라기우스 이단의 재판에 불과하였다.
4)도르트 총회의 결론
문제의 발단은 야콥 알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예정교리에 '타락전 선택설'을 첨가했던 베자에게 배웠으며, 1588년에 암스테르담에서 목사가 된 후, 벨직 신앙고백의 개정작업에 참여한바 있는 유니우스(Francis Junius)의 계승자로 1603년에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자유사상가 더크 쿠른헤르트(D.V. zoon Koornheert)가 개혁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예정론'을 부정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암스테르담 시장이 알미니우스에게 그의 저서를 검사하라는 요청을 했는데 알미니우스는 그의 책을 검토하다가 오히려 그 내용이 더 설득적이라고 생각하고 보편적 은총과 구원에 있어서의 의지의 작용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알미니우스는 선택과, 유기의 이중예정을 부인하고, 원죄교리를 약화시켰으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벨직 신앙고백서의 수정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철저한 예정론을 고수하고 있던 당시 동료 교수 프란시스 고마루스(F. Gomarus)와 공개적인 논쟁을 하였는데, 사실 고마루스는 알미니우스에게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한 사람이었으나 최대의 적수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논쟁이 불붙어 가자 그는 정부가 교회회의를 소집하여 공적으로 논쟁할 것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알미니우스와 개혁교회와의 논쟁은 1609년 알미니우스가 사망하므로 써 잠시 중단되었지만 그로 인해서 알미니우스 신학은 17세기 초엽에 철저히 개혁교회에 의해서 분석 당했고 그의 주요 저서는 대부분이 출판을 금지 당하게 되었었다.
그 후에 요한 위텐보가르트(John Uytenbogaert)가 이끄는 43명의 알미니우스주의 목사들은 1610년에 회합을 가지고 탄원서를 작성했고 자신들의 지위를 보호해 줄 것을 폴란드 정부에 요구했다. 아울러 그들은 당시 화란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인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베르크 신조가 항변서의 입장을 따르도록 변경해야 한다고 교회에 청원하기까지 했다. 이때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5가지로 천명했는데, 자유의지와 예지예정, 만인 속죄, 가항적 은혜와 비궁극적 구원이 그것이다.
이들의 예정론에 대한 평가를 확인해 보면 이들이 정통적으로 가르쳐져 왔던 예정론의 내용을 얼마나 악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은 예정론을 이렇게 공격했다. “예정론과 여기에 첨가된 몇몇 요소들에 관한 개혁교회의 교리는 그 특징적인 경향에 비춰 볼 때 사람들에게서 모든 경건한 신자의 의무를 무시해 버리고 있으며, 사단에 의해 조작된 일종의 마취제이다. 또한 이것은 사단의 견고한 요새이며, 여기에서 사단은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며 실망과 나태함의 화살로서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며, 하나님을 죄와 불의의 원인으로 돌리며 또한 하나님을 폭군이요, 위선적인 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예정 교리는 그 어떤 것도 택함 받은 자의 구원을 방해할 수 없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온갖 흉악한 범죄를 마음대로 자행하도록 유도되고 있다.”
이 말을 보면 알미니안 들이 정통적인 개혁교회의 예정론을 얼마나 싫어하고 거부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특히 "사단에 의해 조작된 일종의 마취제" 라는 표현은 이들의 악함에 대한 최고 절정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도전이 교회를 더욱 혼란하게 한 이유는 위에서 본 것처럼 이들이 겉으로는 예정론을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정통적으로 개혁교회 안에서 인정해 온 예정론인 「예정예지」의 형태를 주장하지 않고 이것을 변형시켜서 「예지예정」을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더욱 깊은 주의와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이에 1618년 도르트에서 의회가 열려 그 주장을 검토했고 결론적으로 답을 내린 것이 칼빈주의 5대 교리이다. 당시는 국가교회 형식을 취하였기에 국가가 총회를 소집하였다. 84명의 회원과 18명의 정치적 대표자로 구성된 종교회의는 48명이 네델란드인이고, 그 외에는 영국, 스코틀랜드, 스위스 등 외국인들이었다. 알미니우스파들은 회원으로 참석한 것이 아니고, 피고로 참석하였다. 이 도르트 총회의 결정사항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데 먼저 당시 네델란드나 그 외 다른 나라들에서 만연되고 있던 불확실성을 종식시켰으며, 먼 훗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정론에 대한 도르트 회의 결정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전적타락(Total Depravity)/자유의지(Free Will)
②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예지예정(조건적 선택)
③제한속죄(Limited Atonement)/만인속죄(Universal Atonement)
④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가항적 은혜(Obstructable Grace)
⑤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비궁극적 구원(Falling From Grace)
특별히 이 총회에서는 타락 후 선택설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취하였다.
9.전택설과 후택설
예정의 교리가 항상 동일한 형식으로 전승되어 온 것은 아니다. 타락 후 선택설이 도르트 회의에서 공식입장으로 결정되었지만, 두 견해는 서로 마주하며 오늘날도 개혁신학 권내에 공존해 있는 형편이다. 두 견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서의 작정의 논리적 순서와 연관된다. 다시 말하면 선택과 유기에 대한 작정이 논리적 순서상 창조와 타락을 허용한 작정보다 먼저 오느냐, 후에 오느냐에 의해 결정되는데, 먼저 오게 되면 타락 전 선택설로, 후에 오게 되면 타락 후 선택설로 불려진다. 이 순서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시간적인 것이 아니요, 논리적 차서인 것이다. 타락 전 선택설은 합리성과 논리성에 주목하는 반면, 타락 후 선택설은 구속역사의 진전 경위에 주목한다.
타락 전 선택설에 의하면, ①하나님께서는 먼저 선택과 유기를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그들은 다만 가능성으로서만 하나님의 의중에 존재한다. ②다음으로 그 목적 성취의 수단으로 이미 선택되거나 유기된 자들을 창조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③이 계획의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타락을 허용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④마지막으로 선택된 자들에게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다른 이들은 간과하시기로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영원히 멸망 받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타락 후 선택설에 의하면, ①먼저 인간을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②인간의 타락을 허용하기로 작정하셨다. ③다음으로 일정한 수의 타락자를 영생 얻도록 선택하시고, 다른 이들은 간과하여 그들 자신의 죄 때문에 멸망 받도록 작정하셨다. ④마지막으로 선택된 자들을 위하여 구원의 길을 준비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전택설보다 후택설이 더 많은 개혁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개혁주의 문서도 타락후 선택설을 지지하고 있다.
10.예정론 비판에 대한 반박
1)예정론이 일종의 운명론이라고 하는 비판
예정론이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해 하나의 통일된 계획과 목적을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능력 있는 계획을 말한다면 운명론은 우주통치의 고삐를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사랑에서 빼앗아 맹목적 필연에다 맡기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 운명론은 마치 큰 강이 나무 조각을 떠내려 보내듯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이끌어가는 맹목적이고 무지한 그리고 비인격적이며 무도덕한 세력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건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자연이 가는 길과 인류의 경험을 미지의 불가항력적인 힘에다 돌리는 것이요, 그 힘에 대한 항쟁은 헛되고 여기 대해서 불평을 말하는 것은 유치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운명론에는 종교, 사랑, 긍휼, 거룩, 정의, 지혜 등을 넣을 여지가 없고, 또 그러한 것들을 자극하는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예정론은 이러한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한 근거를 준다. 그런고로 예정론과 운명론과는 마치 인간의 행동과 기계의 활동이 다른 것 같이, 혹은 하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다할 수 없는 사랑과 지구의 중력이 서로 다른 것 같이 다른 것이다.
2)예정론과 도덕적 책임
만일 인간의 행동이 영원부터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자유롭게 행동하고 책임을 지는 행위자일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이 난문제의 참 해결은 둘 중의 하나를 부결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두 가지 모두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무한히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의 자유 위에 두는 조화에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인간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도록 예정하신 것이다.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와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지 않는다. 예정론 안에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고스란히 보존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인간의 자유를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은 일어날 모든 것을 자유롭게 또한 변함없게 제정하셨다」라고 언명하고, 그 후에 「그러나 하나님이 죄를 조성하시거나 인간에게 허락하신 의지를 부정하시거나 또는 제2의 원인이 발생할 자유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굳게 세우신다.」고 정의하고 있다.
성경에는 자유행위자의 활동에 의해서 성취된 크고 작은 일들이 예언되어 있다. 보통 이러한 자유행위자는 자기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시키면서도 예언을 성취시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유대인이 예수를 거절한 일, 로마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제비뽑은 일,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일, 닭이 우는 것, 예수의 시체를 창으로 찌른 것, 예루살렘의 함락과 유대인이 타국의 포로로 끌려가는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런고로 어떤 행동의 확실성은 그것을 실행하는 행동자의 자유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가 있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사람은 타락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노예의 자유라 부르는 자유를 가질 뿐이다. 그는 죄의 속박아래 있고 자연히 사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무수하게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는 전연 행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명하는 예가 있다. 손이 오그라진 사람에게 대해서 손을 펴라고 명하시고, 중풍병자에게는 서서 걸어가라고, 또 죽은 나사로에게는,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또 사람들은 믿으라고 명령받고 있지만,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그들이 위에서 주어지지 않는 예수를 믿지는 못했던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가져온 도덕적 세계에 있어서 그들의 무능력을 그들의 그 의무에서 해방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내부의 감정, 외부의 환경, 그리고, 습관, 소원, 동기 기타를 통어하시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목적하는 것을 자유로 행하는 것이다.
행동이 외부에서 결정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행동이 내면에서 이성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유다. 하나님의 예정은 바로 이와 같이 활동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행동을 파괴하는 일 없이, 손상하는 일도 없이, 하나님은 그들 위에 특별한 섭리를 주어 또 성령에 의해서 그들의 내면에 활동하고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와서 또 그리스도를 섬기며 변치 않도록 해 주는 것이다.
구원되는 자와 멸망하는 자와의 관계를 잘 나타내는 존슨 박사의 예화를 소개한다. 「여기 2백 명의 범죄자가 법을 범하고 투옥되어 있다고 하자, 나는 그들의 용서를 위해서 변호한다. 그 결과로 정의는 만족을 얻고 법률은 지켜지고 더구나 죄수는 자유를 얻는다. 옥문은 열려지고 쇠 빗장은 제거되고 사면이 약속되며, 모든 죄수는 자유인으로 출옥하게 된다는 보증이 주어진다. 그러나 하나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사면을 위해서 나의 변호를 헛일로 끝내지 않게 하려고 결심하고 그중의 150명의 범죄인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열심히 사랑으로써 출옥하도록 설명한다. 이것이 선택이다. 이 사실은 내가 나머지 50명을 옥중에 가두어 버린 것이 될 것인가? 사면을 위한 준비는 여전히 충분하다. 옥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내어딛고 그것을 얻는다면 각자에게 자유는 약속되어 있다. 옥에 있는 각인의 뜻이 있다면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머지의 50명을 옥중에 가뒀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註 Johnson-Pamphlet- The Love of God tor Every Man)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이와 같이 통치하시는 게 아니라면 그는 무수한 피조물들에 의해서 가져오는 영향의 결과를 상쇄하는 새 수단의 안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만일 자유행위자의 행위가 전연 불확정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단지 개략적으로 아는 것 이외로 미래의 사건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새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놀라고 당황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하나님에 대해서 큰 욕을 가하는 것이 되고 동시에 그것은 불합리하고, 또 비성경적이다.
알미니안 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통치권을 빼앗고, 그 힘을 강탈하게 한다. 문제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인간이 큰 자유를 가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자랑하는 그 자유를 지금 좀 자세하게 검토하면 최초에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제한된 자유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은 어항을 그 원하는 곳으로 가져갈 수가 있다. 그러나 어항 안의 금붕어는 자유로 헤엄쳐 다니고 스스로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한가지인 것이다.
3)예정론과 죄의 책임
예정론은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라는 비난이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이 세계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예정하신 거라면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죄의 문제는 논리나 이성을 기본으로 해서는 절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비논리적 비이상적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악에 관한 무서운 신비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성질에 어떠한 약간의 죄도 암시하는 일이 없도록 지극히 조심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죄의 깊이는 피조물에서만 발생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고 또 가장 바르게 계시고 죄의 작자 혹은 승인자가 아니며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5:4)
하나님은 그 은밀한 뜻으로 어떻게 해서 인간의 죄 많은 행동을 지배하고 통제하시는지는 우리들이 설명할게 못되지만 하나님이 어떠한 일을 하신다 해도 자신의 완전한 정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 숨겨진 섭리적 지배에 의해서 사악한 인간의 마음에 지도적 감화를 주어서 그들이 의도한 악보다 선을 결과로 주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죄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예를 들면 야곱이 눈 먼 늙은 아버지를 속인 것은, 그것 자체가 죄의 행위였지만, 하나님께 용납되었고 형이 아우를 섬긴다는 하나님이 이미 계시한 계획 수행의 고리로서 쓰여진 것이었다. 또 나사로의 죽음은 마르다, 마리아 그 밖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인간적 입장에서 말한다면 큰 불행이었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것이었다.(요11:4)
하나님의 많은 속성은 세계의 창조와 이치에 의해서 나타났지만 정의의 속성은 형벌에 해당되는 피조물에만 나타나고 또 긍휼이나 은혜의 속성은 불행 중에 있는 어떤 피조물에만 보여준다. 만일 피조계(被造界)에 죄가 들어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속성은 영원토록 나타나지 않은 체로 넘어갔을 것이다. 이러한 속성의 지식을 갖지 않는다면 세계는 마치 태양빛을 갖지 못한 지구와 같다. 그러므로 죄는 죄의 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고 죄의 형벌에 있어서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나기 위해서 용납되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과 아담에게 시작되는 인류의 타락도 결코 우연이나 갑자기 생겨난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이 숨겨두신 또 안에서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알려지고 있었지만」세상의 죄를 위해서 그 희생으로 오신 것이었다.(벧전1:20 참조) 바울은 죄의 구속이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말했다.(엡3:11)
성경 전체를 통해서 구속은 영원한 옛날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타락한 폐허에서 최초의 창조보다도 더욱 영광스러운 영적 창조의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파는 하나님을 아담이 타락하는 동안에 의심하며 방황하고 그 사실을 방관하고 있던 태만한 방관자이며, 자기 손으로 만든 피조물인 인간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방해를 받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하나님이 죄를 생기게 하는 실제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4)예정론과 인간의 노력
예정론은 인간의 노력의 전반적인 동기를 저해한다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죽음의 때와 그 상태를 정하신다 해서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거역하고, 병났을 때에 약을 거절하겠는가? 본래의 사건은 우리들에게 숨겨져 있고, 미지(未知)의 것인 까닭에 거기 관해서 전혀 결정된 것이 없는 것같이 우리들은 자기들의 사업에 힘을 쓰고 열심히 우리들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미래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전도서에,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11:6) 라고 되어 있는 것 같이 우리들은 이 이유―미래가 우리들에게 확실하지 못한 것-로 한층 더 활동할 것을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5)예정론과 하나님의 공평
예정론은 불공평한 사랑을 하는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모든 인간이 죄로 죽고 자신의 힘으로 영적인 생명을 회복할 수 없다고 한다면 왜 하나님은 그 전능의 힘을 움직여서 어떤 자는 갱신시키고, 그리고 다른 자는 멸망가운데 남겨두느냐고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은 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불공평하게 행하신다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렇게 이의를 말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단순한 피조물로써 인간을 다루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요구하는 모든 권리를 잃어버린 죄 있는 피조물로 대하신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죄의 처벌은 부채, 정의, 응보의 문제로 사악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구출된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무상 부당한 은혜다. 그런고로 그 정죄된 죄인이 그 형벌에 해당이 안 된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성도가 그 보상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큰 소리를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주는 자비심이 많으므로 원하는 자에게 은혜를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의의 심판자이기 때문에 모든 자에게 주지 않으실 때도 있고, 어떤 자에게는 거기 상당한 이상의 것을 주어서 그 자유로운 은혜를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자에게 그것을 주지 않고 모든 자의 죄를 선언하시는 것이다.
반대자들이 보통 사용하는 의미의 「불공평」이란 은혜의 분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들은 때로 이 거지에겐 주고 다른 거지에게는 안 줄 때도 있다. 그것이 우리들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그런고로 멸망되는 자 중에 누구하나 부당하게 처벌되는 자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들이 영원히 불행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고통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형벌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6)예정론과 복음전도
예정론은 복음 전도의 성질을 가로막는다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선택의 결정은 비밀이다. 따라서 선택된 자에게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택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중 가운데 누가 선택되었으며 누가 선택되지 않았는지 설교자에게는 감춰져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누가 구원에 이르도록 알아들었는지, 혹은 누가 심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알 수가 없다.
7)예정론과 만인 구원설
예정론은 성경의 만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과 모순된다는 반발이 있다. 디모데전서 3: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이란 말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1:5) 고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 또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켜 세워주었을 때에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더라」 (행4:21)고 한 경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눅 21:17)라고 말씀하신 경우, 결코 문자 그대로의 모든 개인을 말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12:32)고 선언했을 때도 이것이 전 인류를 의미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역사는 결코 인류의 모두가 그가 있는 곳에 오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모든’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 세계 각국과 각 계급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의미는, 구속된 자가 어린 양의 보좌 앞에서 부르는 노래(계 5:9), 즉,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에 의해서 보다 한층 분명하게 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모든」이란 말이 복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차별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데 사용되고 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한 1서 2:2).
11.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사역에 작정, 창조, 섭리가 있는데 지금 우리가 하는 강의는 작정과 섭리만 한다. 창조가 하나님의 작정의 실현이라면 섭리란 작정의 실현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창조의 목적대로 유지하고 보존하실 뿐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간섭하고 통치하시는 행위를 의미한다.
12. 섭리의 성질
1)보편성-섭리의 범위는 보편적이다. 성경은 모든 자연의 법칙들, 역사의 진정(進程), 개인들의 다양화복(多樣禍福)이 항상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히1:3, 행17:20, 엡4:16).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과 만사가, 스랍들로부터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그의 끊임없는 섭리에 의해 정돈되고 유지되고 진행 된다.
2)주밀성(周密性)-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사와 자연사 모두에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마 10:29). “공중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눈송이, 움직이는 벌레, 자라나는 식물, 공중에 떠도는 먼지의 가루 하나도 의미 없이 그냥 되는 것이 없고 각각 일정한 원인과 일정한 효과들을 가진다.
3)주권성-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은 주권적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세계와 모든 인간사변들을 주권적으로 주관하신다.
4)허용성-지금도 이 세상에는 죄가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다. 다만 죄를 허용하실 뿐이다.
13. 섭리의 요소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칼빈, 댑니, 핫지, 딕, 셰드, 맥퍼슨과 같은 개혁파 교의학자들은 섭리의 요소로 보전(보존)과 정치(통치)를 드는 2구분법을 취했으나 17세기 이후 화란 개혁파 교의학자들 곧 브라켈, 프랑켄, 카이퍼, 바빙크, 보스, 호니히 등은 이 두 요소에 “협력”을 추가한 3구분법을 취했다. 한국의 박형룡박사도 3요소로 구분하였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2요소와 3요소는 내용상 큰 차이가 있지 않다. 화란 개혁파 신학자들이 2요소 대신 3요소로 구분한 것은 범신론과 초연신론의 위험을 경계하여 섭리에 대한 인간의 노력의 요소를 강조하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섭리의 3요소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전은 만물의 실유(實有)에 관설(觀設)하고 협력은 그 활동(活動)에, 정치는 그 지도(指導)에 관계하나 이것은 결코 배타적 의미로 이해될 것이 아니다. 보전에도 정치의 요소가 있고, 정치에도 협력의 요소가 있으며, 협력에 보전의 요소가 있는 것이다.
1) 보전
보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 성질과 능력과 함께 계속 유지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가 우주의 존재를 설명한다면 보전은 그것의 계속을 설명한다. 보전을 창조의 지속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지만-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모든 것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주장(조나단 에드워즈)- 창조와 보전은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짐승들을 끊임없이 창조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생명을 유지하고 이미 창조된 것들을 보존하고 계신다.
2)협력
하나님의 섭리는 피조물의 존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활동(공작)에도 해당된다. (창 45:5, 출4:11-12, 수11:6, 잠21:1, 신8:18, 벧전1:4, 빌2:12,13). 이렇게 피조물들의 활동에 주권적으로 관계하여 그들과 합작하는 것을 하나님의 협력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원리들과 작용의 법칙들을 부여하셨지만 그것이 스스로 독립적이고 자동적으로 진행되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친히 지배하시고 주도하신다(초연신론에 반대). 그러나 이것이 피조물들의 활동이 종속적이고 기계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의 협력은 직접적이며 또한 동시적이다. 즉 신적 능력은 사람의 능력과 서로 통하되 그것을 파멸하거나 흡수함이 없이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작업은 자연적 능력들로 하여금 자기와 함께 작업케 하기를 마치 붓과 손이 함께 역사하여 기록을 산출함과 같이 한다. 하나님의 협력은 제일원인의 부정(초연신론 또는 무신론)과 제이원인의 부정(계속적 창조설 곧 범신론)이라는 두 오류를 다 거부하고 두 원인의 합작을 지지한다.
3)정치(통치)
정치란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목적 있게 통치하시어 자신의 신적계획의 성취를 확실케 하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왕으로 통치하시는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치하시며, 피조물들의 성질에 적응하여 통치하신다. 피조물들의 성질에 적응해서 통치한다는 말은 물리적 영역에서는 자연법칙을 방편으로 하고, 정신적 세계는 간접적으로 마음의 특성들과 법칙들을 통하며, 직접적으로는 성령의 공작을 통하여 정치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정치는 우주적이어서 만세와 만대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행동들을 다 대상으로 한다.(딤전1:17, 6:15, 단4:34, 시22:28, 103:19). 이 통치는 시간적, 공간적 경계도 없다. 이성적 및 비이성적 피조물들, 큰일과 작은 일들, 사람의 선행과 악행도 다 신적 관할 속에 있다. 뿐만 아니고 하나님의 정치는 극히 장엄하여 사람의 지혜로 다 측량할 수 없다(사55:8,9, 시77편).
14.일반섭리와 특별섭리
하나님의 섭리는 일반섭리와 특별섭리로 구별된다. 하나님은 일반섭리에 의하여 우주의 만사만물을 질서 있고 조화되게 유지하여 가시며, 특별섭리를 통하여 우주의 각사각물로 하여금 우주 전체와의 관련에서 뜻있게 전진하게 하신다. 즉 일반섭리가 우주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관할을 의미한다면 특별섭리는 그 각부를 전체와 관련하여 세밀하게 간섭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두 섭리는 두 종류가 아니고, 같은 섭리의 두 활동이다. 특별섭리는 자주 이성적 피조물들을 위한 특별한 돌보심과 간섭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기도에 대한 응답, 고통에서의 구출, 위험에서의 보존 등이 있다.
15.통상섭리와 비상섭리(이적)
섭리는 또한 통상섭리와 비상섭리로 구별된다. 보통의 경우 하나님은 기정 자연법칙을 주관하시면서 제이원인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이것을 통상섭리라고 한다. 그러나 비상섭리에서는 그가 직접적으로, 제이원인의 통상공작의 매개 없이 일하시어 이적을 행하신다. 이것은 자연을 거슬러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적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계시와 기적의 관계이다. 이적 시대는 지나갔다고 믿는 것이 개신교 교회의 일반적인 태도다(칼빈도 이렇게 주장한다). 계시가 완성된 신약시대에 이후 새로운 계시가 불필요하기에 기적이 필요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기적을 계시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비상섭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이적을 행하실 가능성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성적-통상섭리의 방식, 심은 대로 거둠, 감당해야)
16.섭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하나님의 섭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켜져야 한다. 하나님을 자신을 만드신 분이요 우주를 조성하신 분으로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유익하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면서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또 다른 죄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사악함을 무죄로 만들어주는 교리가 아니다. 한편으로 섭리의 교리는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를 준다.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친히 돌보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인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삶은 견디기 힘든 것이 될 것이지만 섭리에 대한 확신 때문에 신자는 많은 악에 둘러싸여 있어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17.마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그리고 섭리의 사실을 함구하지 아니한다. 인간의 전적 부패, 전적 무능력의 교리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성경의 진리라면, 예정과 섭리의 교리도 진리이다. 종교적 확신이 인생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하나님의 예정과 창조와 섭리를 믿는 자와 믿지 못하는 자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예정과 섭리를 믿는 신앙인이야말로 자신과 역사의 현재와 미래를 올바로 해석하는 지혜와 생의 담력을 소유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당한 억울함으로 인해 불평하지 아니한다. 그는 역사의 모순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의 의의 승리를 의심치 아니한다. 그러기에 한숨과 탄식과 좌절 대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영위한다. 만일 우리가 예정과 섭리의 교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만 있다면, 성경에는 모순이 아니라 역설들이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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