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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에 나타난 목회자상

하나님아들 2023. 6. 27. 15:13
신약에 나타난 목회자상         
 
이한수 교수(신약신학)

세속화의 물결이 범람하는 세계 속에서 목회자의 모습은 여러 면에서 상처를 받고 때론 위기에 직면해 있다. 각 방면에서 목회자상은 도전을 받아 전통사회의 기존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받아 퇴색해가거나 세속화의 범람으로 인해 목회자의 정체성이 흐려지기도 하고 교회의 영성 쇠퇴와 윤리적 타락으로 인해 때로는 목회자들이 불신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는 집단적인 이기주의, 지방색, 물질만능주의, 세상적 정치 행태 들이 만연하고 있는데, 부지불식간에 목회자들까지 이에 편승해 가고 있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때에 신약 성경이 교훈하는 바른 목회자상을 정립하고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는 것은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1. 목회자는 "보냄을 받은 자"

복음서가 교훈하는 목회자상은 어디까지나 기독론적인 기초를 갖고 있다. 사실 어떤 목회자상이 올바른 것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 하는 기독론적인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누구이시고 그가 어떤 사역을 하셨는가를 바로 아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떤 목회자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후자는 전자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이차적인 질문에 불과하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계셨고 그의 제자들도 역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 랍비 문헌에 보면 보냄을 받은 자는 그를 보낸 자와 같다고 한다. 보냄을 받은 자의 사명은 자신을 보낸 자를 정확하게 대변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 보낸 자는 보냄을 받은 자에게 자신의 권세와 권위를 덧입혀 준다.

따라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 목회자가 세상에서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보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대변해야 한다 (요 8:42). 자신을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대변하고 그의 뜻을 정확하게 선포할 때 비로서 목회자로서의 정체성과 권위가 확립된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정체성과 권위가 흔들리는 것은 진실되고 능력있는 말씀 선포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2. 목회자는 "예수님의 길을 가는 자"

목회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묻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어떤 사명의 길을 가셨는가를 알고 그를 본받는 일이 필수적이다. 예수의 사명을 떠나 목회자 자신의 독립적인 사역을 생각할 수 없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위기를 겪는 핵심 이유는 예수님을 본받으려는 우리의 비젼과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속적인 가치판단 기준들과 행습들이 우리를 장악하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문제에 부딛혔을 때 예수께서는 어떻게 행동하셨을까를 묻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대로 세상 정치와 지역주의, 세속적 가치관에 편승하여 처신한다면 그의 처신이 아무리 정치적으로 능숙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목회가 아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그런 사람들이 목회 배테랑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는 데 있다.

목회자가 걸어가는 길은 세상이 걸어가는 길과 상반된 길이다. 예를 들어, 세상의 질서는 힘의 질서요 파워게임의 질서라면, 제자들의 질서는 섬김의 질서요 종의 질서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主管)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權勢)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

이 구절은 예수께서 세상에 섬기는 자로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시려는데,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행태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주셨다. 적어도 참된 예수의 제자들이라면 예수께서 걸어가신 사랑과 겸손과 섬김과 자기희생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 편에서 십자가는 인류를 위한 최대의 섬김의 사건이었다.

이러한 섬김의 정신은 바울 사도의 말씀 속에서도 나타난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4).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섬김의 정신은 목회사역이 서고 무너지는 정체성의 표지이다. 목회자는 예수께서 가셨던 길을 동일하게 걷고자 결단한 사람들이다.

3. 목회자는 "고난을 통한 영광"을 갈망하는 자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섬김, 희생, 겸손보다는 영광, 권세, 능력, 명예 등을 더 좋아한다. 우리들의 사역 속에는 어느 사이엔가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이 빠져버리고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만이 판을 치고 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밥벌이하고 권세를 얻고 영광을 얻는 일에만 신경들을 쓰기 쉽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높아지려 하고 권세를 잡으려 하고, 때로 이를 위해 권모술수나 세상의 부패한 정치들이 교회의 거룩한 정체성을 훼손시키고 세속주의, 지방색, 물질주의 등이 목회사역의 심장에 파고 들어오고 있다. 기독교 역시 목회자들이 얻게 될 영광의 세계를 가르친다.

하지만 영광의 신학은 항상 십자가 신학을 전제해야 한다. 영광은 항상 고난을 통해,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통해, 섬김의 길을 통해 온다. 빌립보서의 그리스도 찬송시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5-10)

이 그리스도 찬송시에 나타난 예수의 삶의 패턴은 "스스로 낮아질 때 하나님이 높이시며, 고난을 통해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려 하다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형극과 고통의 삶을 살았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자신을 비우시고 낮아지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더니 지극히 높임을 받으신 분이 되셨다.

목회자는 모름지기 이러한 예수의 삶의 패턴을 체현하는 사람들이다.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영광이나 받으려 하고 그들에게 권위주의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들은 자신의 목회자를 끌어내리려 하지만, 목회자가 그들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며 겸손의 길을 가면 갈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목회자를 높일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4. 목회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

목회란 죄인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사역이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에 힘입지 않고서는 올바른 목회를 할 수 없다. 성령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롬 8:9). 신자들의 존재와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체현하시고 이루시는 영이 바로 성령이시다. 따라서 어떤 목회 사역이든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에 붙들리지 않고서는 죄인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람들로 만드는 일에 성공할 수 없다.

목회자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주님의 사람들로 만들기보다는 사람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유혹을 받기 쉽다. 그들은 인간 목회자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람의 종으로 만들려고 하는 유혹을 받기 쉽다 (갈 4:17). 설교를 해도 목회자 개인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 목회자 개인에게 충성하고 열심을 내도록 만들려고 하는 유혹을 받기 쉽다. 이것은 진정한 목회가 아니다. 인간적 정치는 결코 주님의 사람을 만들지 못하고 인간 개인에게 열심을 내는 사람의 사람으로 만들 뿐이다. 이러한 유혹을 극복하고 죄인들을 주님의 형상을 닮은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에 의지하고 그에게 민감하지 않으면 안된다.

특별히 죄인들을 주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로 변화시키는 일은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야 할 사역이다. 성령도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분이시다. 따라서 성령은 공동체 전체에 덕을 세우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람들로 세우기 위해 각 지체들에게 각양 은사들을 나누어 주신다 (고전 12:4-11). 목회자가 성령의 사역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공동체 각 지체들에게 나타나는 은사들을 사장시키지 않고 각 지체를 통해 그것들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고무시켜야 한다. 성령의 은사들에 무지하거나 배타적인 목회는 교회의 생명력에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고전 12:1 참조).

개혁신학자인 헤르만 리델보스(H. Ridderbos)가 지적한대로 교회는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는 장소이다. 목회자는 성령에 붙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역에 민감하여 교회가 늘 성령 자신에 의해 움직여지도록 성도들을 교육하고 고무시킬 필요가 있다.

5. 결 론

한국교회는 성장 정체라는 복병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세속화라는 거대한 물결에 직면하여 흔들리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목회의 기초가 되기 보다는 현실적 이익과 세상적 가치관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이럴 때 우리가 돌아가야 할 최후의 보루는 성경의 말씀이 아닐까? 그 속에 나타난 예수의 삶과 비전, 그리고 사역 등을 회복할 때 예수의 제자들로서의 목회자상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