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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설교와 그 의미들

하나님아들 2023. 6. 27. 15:11

성경에 나타난 설교와 그 의미들               

 

 송영목 (copy right)

들어가면서

청중을 분석하여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가 교육적 차원을 가지는가? 설교는 단지 예수님을 통해서 성도에게 허락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나, 그러한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라고 격려하는 것에만 머물 수 없다. 더 나아가 설교는 믿음 안에서 성도를 양육하고, 연단시키며, 교정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적지 않은 예배 참석자에게 있어서 설교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과 이에 걸 맞는 삶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중요한 기회이다. 성경을 요약한 교리가 중요하기에 개혁교회에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1년 52주에 걸쳐서 설교한다. 설교자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 하나님이 주신 소망과 기업 기업의 풍성함과 그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이 청중의 삶 속에 현실이 되도록 교육해야 한다 (엡 1:17-19). 여기서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설교 중에서, 교회 교육적 함의를 가지는 본문을 선별해서 개괄적으로 다루어 보려고 한다.

본론

1. 구약의 설교와 그 의미

1.1. 신명기에 나타난 모세의 설교

신명기는 모세가 출애굽 2세대를 위해 향한 3가지와 법률 요약이다. 이 설교에 새로운 세대는 부모 세대가 행한 죄악을 피하고, 율법에 순종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언약의 복을 받도록 할 목적이 나타난다. 신명기는 고대 근동의 종주권 언약과 비슷한 형식을 가지고 있다: 서론 (신 1:1-4), 역사적 서언 (1:5-4:43), 언약 조항들 (4:44-26:19), 언약 비준 (27:1-30:20), 리더십 계승 (31:1-34:12). 신 1:5-4:43절에서 모세의 지도하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을 설명한다. 신명기는 모세가 애굽의 바로를 직면한 것과 10가지 재앙을 경험한 바로가 이스라엘을 나가도록 한 것을 언급하지 않지만, 출애굽 사건을 여러 번 암시한다 (신 1:27, 30; 4:20, 34, 37). 모세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호렙 산까지 이스라엘을 섭리적으로 그리고 기적적으로 돌보신 것을 회상한다. 민수기에 나타난 사건을 언급한다. 신 4:44-11:32절은 모세의 두 번째 설교의 첫 번째 부분인데, 권면으로 구성되고 십계명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십계명 이외의 법들은 모세를 통해서 중재된다. 신 12:1-26:19절은 두 번째 설교의 두 번째 부분인데, 예배와 정결한 음식, 종과 채무, 연중 잔치, 도피성과 다른 행동 규칙에 관한 율법을 다룬다. 세 번째 설교 (신 27:1-30:32)는 주님의 법에 순종하라는 강력한 권고이다.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서 언약을 세우고 언약 조항에 주의할 것을 가르친다. 신 33장에서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12지파를 향해서 축복한다. 이것이 교훈하는 바는 현대 예배 중에서 '설교자'가 복을 선포하는 것이 옳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신정정치의 기초를 놓은 모세는 옛 언약을 중재했는데, 새 언약의 중보자이시오 새 출애굽을 새 이스라엘인 신약 교회에게 주신 예수님을 내다본다. 예수님은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로서, 신약 성도가 새 가나안인 신천지를 어떻게 맛보며 살 수 있을지 하나님 나라의 법을 선언하셨다 (신 18:15; 마 5-7). 신명기의 모세의 설교는 현대 교회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언약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며 산다. 성도는 하나님을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언약의 갱신을 통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참고로 신명기는 70인역으로부터 '두 번째 율법'이라는 제목을 받았지만, '율법의 반복'이 더 적합하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모든 세대에 생명의 법으로 역사한다.

1.2. 잠언과 전도서의 솔로몬의 설교

잠언서에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잠 1:1)은 아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교훈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잠언서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인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지혜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쳐 준다. 현대 설교자는 성육하신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처럼 (고전 1:24, 30; 골 2:2-3), 믿음으로 은혜로 어떻게 천국 백성답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야 한다. 유사하게 전도서는 전도자 (코헬렛, preacher)인 솔로몬의 설교이다. 전도서는 보통 설교가 아니라, 인생의 좌절과 헛됨을 맛본 후에 나오는 진한 고뇌가 담긴 경험담이다. 물론 우리는 전도서가 성령의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한다. 전도서는 1:1절에서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다"라고 시작한다. 솔로몬을 '다윗의 아들'로 소개하는 것은 영원한 다윗의 왕국을 건설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떠올리는 표현이다. 계시사적으로 볼 때, 영원한 다윗의 나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 나라인데, 그것은 일 시간 반짝 거리는 세상 나라와 다르다. 그리고 솔로몬은 '예루살렘 왕'이기에, 그는 하나님의 발등상이 있는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다스리는 왕이다. 그러므로 해 위에서 바라보면서, 영원한 거룩한 제사장 나라를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전도서에 나타난다. 해 아래 나라는 헛되고 헛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헛된 이 세상 나라를 헛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로 바꾸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전도서를 읽어야 부활의 생명을 가진 성도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가르칠 수 있다 (고전 15:58). 솔로몬은 잠언과 전도서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신약 교회가 다양한 상황 (악의 유혹, 성적 유혹, 부부관계, 담보 등) 속에서 어떻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의 자녀로 살아야 할지를 교훈한다.

1.3. 에스라의 설교

이스라엘의 무너진 영적 상태를 말씀 선포로 회복하려는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총독 스룹바벨은 제 2성전을,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의 재건과 영적 부흥은 에스라의 몫으로 남겨 두셨다. 에스라가 주도한 2차 귀환은 제 2의 출애굽인데, 정월 초하루에 페르시아를 떠났다 (스 7:9). 정월 초하루는 출바벨론하기에 가장 적합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다. 제 2차 포로 귀환 후, 초막절 무렵 에스라가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나무 강단에 서서 모세의 율법을 낭독했고, 백성은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했다 (느 8). 율법 낭독은 백성의 회개와 삶의 변화로 이어졌다 (느 9). 이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교훈은 예배 중 '말씀 봉독'이 설교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설교 전의 성경 읽기는 교독보다 설교자가 봉독함으로 선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경 봉독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감동을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1.4. 예레미야의 설교

렘 7:1-7절에서 남 유다의 패망 직전에 활동한 제사장 겸 선지자였던 예레미야는 유대인의 심장부인 성전에서 설교를 한다. 그는 성전 안뜰로 통하는 여러 문 중 하나에 서서 많은 사람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이때 절기를 지키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예레미야는 성전이 서 있는 한, 삶이 어떠하든지 간에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예배자들의 위선을 지적한다. 예레미야의 설교는 그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르던 ‘공인된 유대인의 종교’에 대한 도전이다. 남 유다 백성들의 생각과는 달리, 성전과 제사 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렘 26:1-6절에도 성전에서 설교했는데, 그 때는 여호야김왕 시대로서 유다의 마지막 시대였다. “너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렘 7:3). 이것은 위선되고 거짓된 삶을 개혁하라는 용기 있는 선지자의 외침이다. 공의를 행하고 (5절), 이방인, 고아, 과부와 같은 약자를 압제하지 말고 (6절), 살인과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면 (6절) 조상에게 언약하신 대로 그들을 보존하실 것이며 남 유다가 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7절). 이스라엘에게 보호와 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조건적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미래 메시아 시대를 예언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렘 7장처럼 대부분 그 당시 백성의 부패성을 말씀으로 지적하고 돌이키게 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감금된다. 거짓 선지자로 오해받았기 때문이다 (신 18:21-22). 성전이 서 있는 한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악한 사람들 때문이다 (사 31:4-5). 껍데기 붙들고 사는 사람의 비참한 말로는 2-3년 후에 바벨론의 침공에서 본다. 예수님도 거짓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질타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너희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될 것이다.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돌이키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인은 예수님을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일으키려는 거짓 선동가로 몰아부쳤다. 그러나 주님은 참 선지자이시기에 그분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거짓 번영과 소위 '강남복음'을 전하는 대신, 현대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죄악되고 위선적인 현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담대히 지적할 수 있는 용기이다.

2. 신약의 설교와 그 의미

2.1. 예수님의 설교

예수님께서 다양한 상황 (산, 회당, 집, 법정, 다락방 등)에서 다양한 방식 (지혜적 격언, 예화, 묵시, 비유, 구약의 사용 등)으로 권위 있는 설교를 하셨으나 (막 1:22), 나사렛 회당설교 (눅 4:16-20), 산상설교 (마 5-7), 감람산강화 (마 24) 그리고 고별강화 (요 13-17)가 전형적인 설교형태를 띤다. '메시아 취임설교'라 불리는 회당 설교에서, 예수님은 사 61장을 본문으로 하여 새롭게 동튼 하나님 나라는 희년이 성취된 은혜의 해와 관련된다고 설교하셨다. 산상설교에서 구약을 기초로 하여 설교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새롭고도 충분한 방식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의 법을 내면화-심화하여 청중에게 적용하셨다. 감람산강화에서는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역사의 완성을 구약의 묵시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설교하셨다. 고별강화에서는 자신의 부재는 비극이 아니라, 성령으로 현존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고 설교하시면서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예수님의 설교는 권세의 제국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임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나라를 청중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설교하시고 행하신 일을 ‘TRUMPET’이라는 단어의 머리글자말로 살펴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복음 설교'를 위한 중요한 지침이 된다: Total restoration (전체적인 회복; 영과 육의 구원! 사회적 정의 실현), Rule of God (하나님의 통치; 우주적이고 역동적이고 종말론적), Unbroken new covenant (파기 될 수 없는 새 언약- 렘 31:33; 부드러운 새 마음으로 법을 마음에 새기고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를 맺음), Messianic blessing (메시야적 복- 벧후 1:3; 쇠하지 않고 줄지 않는 복을 주심), People of God renewed (갱신된 하나님의 백성; 출 사망, 출 죄악, 출 흑암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입음), Enemies avenged (심판 받은 대적들; 안팎에 있는 대적이 진멸됨), Transformation by the glorified Spirit of Christ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에 의한 변화됨-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됨; 요 14장의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


2.2. 베드로의 설교

예루살렘에 성령님이 강림하신 오순절에 베드로는 그리스도 완결적이고 성령 완결적인 (Christotelic and Pneumatelic) 구원계시사적 설교를 행 2:14-36절에서 했다. 욜 2장의 성령의 강림 예언이 오순절에 성취되어 '새로운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열렸다는 내용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기만 하면 성령의 사람이 되어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데, 그 사람 앞에 천지개벽적인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상황이 펼쳐진다 (행 2:19-20). 지금 시대는 예수님의 구원 사건을 신약 교회에 적용하시는 종말의 은사이며 종말의 개시자인 성령께서 놀랍게 역사하시는 주의 날의 연속이다.  

행 3:11-26절에서는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은 장애인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친 후 솔로몬 행각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설교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아 회개하라, 그리고 ‘돌이키라.’ 그리하면 죄 없이 함을 받으며 ‘유쾌하게 되는 날들’ (kairoi anapsykseos)이 주님으로부터 올 것이다"고 설교한다 (행 3:19). ‘유쾌하게 되는 날’은 호흡을 회복하는 것 (recovery of breath) 즉 숨통을 다시 트는 것처럼 안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죽이고 영적 무지와 죄악 가운데 살던 유대인들은 질식 상태에 있었는데, 그들이 다시 숨통을 틀려면 성령께서 주시는 호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 없이는 성령의 유쾌케 하는 역사를 경험할 수 없다. 설교자는 승천하신 예수님이 지금도 치유와 회심의 역사를 성령과 교회를 통해서 이루고 계심을 선포해야 한다.

2.3. 바울의 설교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얻기를 원한 바울은 행 18장의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철학과 종교성이 풍성한 아덴 시민을 향해서 생명의 기원이신 하나님께서만 부활 생명을 주심을 가르쳤다. 행 20:7-12절에는 드로아에서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하나님 나라에 관해 설교 (dialegomai) 했는데 (참고. 행 20:25), 이 때 피곤한 청년 유두고가 설교를 듣다가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이 설교와 기적은 드로아교회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행 20:2, 12). 바울의 이 설교는 보이는 설교인 성찬식과 더불어 진행되었다 (행 20:11). 성찬식이 있을 때 고정된 하나의 성찬식문만 읽고 별도의 설교를 하지 않는 것보다는,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성찬 주제 본문을 설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행 23-24, 26장에서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 총독 베스도와 벨릭스, 그리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 미결수의 입장에서 복음을 수사학적으로 담대히 변증한다. 바울은 부활을 핵심으로 하는 그리스도 사건은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매우 이성적인 것임을 변증한다 (행 23:6; 26:25). 더 나아가 바울은 재판정에 와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음을 왜 믿지 못하느냐 라고 책망한다 (행 26:8). 서신서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완결적인 구원계시사적 설교를 했다. 바울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표 된 구원을 성취하신 관점에서 출발하여 설교했다. 한 예로, 고전 10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 당시 광야에서 생수를 낸 반석이요 신령한 음식으로 보면서, 출애굽 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을 구약 성도의 세례라고 설명한다.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와 구약을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서 출발하여 전하는 그리스도 완결적 설교가 상호보충적으로 작용하면 바람직하다.

여기서 사도의 성경해석과 설교의 특징 중 하나인 그리스도 중심적-완결적 해석과 설교를 더 살펴보자. 구약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구약 교회에게 적실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던지면서 궁극적으로 오실 예수님을 예언한다. 구약에 그림자처럼 희미하지만 예수님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구약 저자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께서 구약 인물들에게 '사역적 성령'으로 임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사역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견하도록 하셨다. 이 희미하게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메시지가 구약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새 언약의 문맥에서 더 농도가 진해진다. 예수님이 성육하신 이후에는 그림자가 걷히고 완전한 실체가 드러난다. 그림자에서 실체로의 운동은 농도에서 차이가 나는데, 그 질적 차이는 한 마디로 '예수님 안에서의 확대-상승'이다. 그림자에서 출발하여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다.

그렇다면 이와 구별되는 개념인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은 실체를 출발점으로 삼아 (구약과 신약의) 그림자를 분석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이렇게 구약을 그리스도 완결적으로 해석한 흔적이 신약에 많다. 구약이 그리스도 완결적으로 해석되었다면, 동일하게 신구약 중첩기를 배경으로 하는 대부분의 신약 성경도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을 요청한다. 신구약 중첩기에 살았던 사도들이 했던 구약의 그리스도 완결적 해석의 원칙을 현대의 우리도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 우리는 구약은 물론 신구약 중첩기의 신약 성경을 그리스도 완결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는 시대는 신구약 중첩기가 아니라 온전한 신약의 시대이며,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 (몸의 부활, 영원한 심판 등) 이외에는 남아 있는 구속 사건이 없기에,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리스도의 완결된 구속 사역의 은덕이 성령의 역사로 우리에게 미치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약 그림자를 붙들고 살 수 없다. 우리는 신구약 중첩기의 원칙을 붙잡고도 살 수 없다. 그리스도 중심적이건 그리스도 완결적이건 일단 주석된 내용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도 중요한 원칙이 있다. 구약과 중첩기에 주로 '사역적 성령' 즉 구속사건에 필요한 능력을 부여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일군을 감동하신 것이라면, 우리 시대에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은혜'가 신약 성도 안에 임하여 있다. 이 이유로 예수님과 관련하여 도달한 주석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요, 군사 된 우리가 성령으로 온전히 행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적용해야 한다. 이 적용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적용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무슨 재미로 사는가?"라는 어리석은 질문과는 달리, 만유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영적 눈을 뜨게 하시는 은혜로 우리가 풍성하고 역동적이며 형통한 삶을 살도록 돕는다.  

2.4.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설교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의 초대교회의 예배의 맥락에서 사용되어야 할 예언적 서신이다 (계 1:3). 계시록은 핍박 받는 공동체를 위로하기 위해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 (계 1:1, 3; 22:6). 특별히 계 8-9장의 일곱 나팔 재앙을 통해서 계시록에 나타난 설교를 살펴볼 수 있다. 나팔은 무언가를 선포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7나팔이 하나씩 불려 질 때 마다, 계시록의 수신자들의 대적인 불신 유대인들과 이방 로마 제국이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받게 된다. 이것은 설교자가 복과 은혜에만 집중하는 설교가 아니라, 구원 이면에 있는 심판에 관한 설교를 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 때 주의할 것은 예수님이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원수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의 원수이지, 우리 개인의 원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오면서

구약 설교자들은 언약적 메시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내다보았다. 예수님은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설교하셨다. 신약 저자들은 구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 혹은 그리스도 완결적 설교를 했다.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설교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설교 중에 주요 메시지로 둔갑하면 안 된다. 현대 설교자는 예수님을 드러내고 높이는 적극적인 성경해석에 근거한 설교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라 설교 전의 성경봉독 시에 구약과 신약을 같이 읽어야 한다.

참고문헌

윌리엄 윌리몬 & 리챠드 리스쳐. 2003. 설교학 사전. CLC.
R.L. Pratt Jr. (ed). 2003. Spirit of Reformation study Bible. Grand Rapids : Zonderv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