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보나벤투라의 영성신학 小考* 유 해 룡

하나님아들 2022. 11. 8. 16:06

 

 보나벤투라의 영성신학 小考*

 

                                  유 해 룡

                           (대전신학교 교수)

 

Ⅰ.서   론

 

신학의 일반적인 정의는 믿음의 경험을 지적인 반추를 통해서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구성하고 표현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신학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신앙의 한 생활양식으로서의 경험이 전제되어야 하는 가이다. 예를 들면 성서신학이란 성서를 통한 개인 혹은 집단 경험이 전제되지 않을지라도 단순히 기록된 객관적인 계시에 대한 이해 내지 지적인 탐구로도 성서신학이 성립된다. 그러나 12세기의 스콜라주의가 태동하기 전까지는 직접적으로 기독교 경건생활에 유익되지 않는 사변적인 신학에는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당시 신학이 대부분 수도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수도원의 경건과 삶을 지탱해주고 발전시키는 범위내에서만 신학활동이 허용되었을 정도이다. 이를 가르켜 수도원적 신학이라고 한다.1) 이것은 믿음의 경험이 반드시 수반되는 신학을 의미한다. 즉 믿음의 경험이라고 하는 情意的인 차원과 그것에 대한 반추로서의 思惟的인 차원이 함께 어울러진 신학이다.  이것을 또다른 신학적인 영역으로 설정하자면 그것이 곧 영성신학이다.

영성신학이라는 개념은 스콜라주의 시대에 들어 더욱 뚜렷하게 구분되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플라톤 철학이 본격적으로 서방세계에 유입됨으로서 그것이 하나의 학문적인 방법론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신학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침으로서 스콜라 주의를 태동케 한다. 여기서 믿음의 경험을 전제하지 않는 순전한 지적인 사유개념으로서의 신학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서 개인이나 집단의 구체적인 신앙 경험을 반추하는 활동으로서의 신학과 차이점을 보이게 되었다. 전자를 일컬어 신학이라고 한다면 후자를 일컬어 영성학이란 용어로 구분할 수 있다.

후기 스콜라 시대 당시 파리대학의 총장이면서 영성가였던 게르송(Gerson, 1363-1429)은 그의 저서『신비신학에 대하여(On Mystical Theology)』라는 저서에서 두 종류의 신학에 대한 구분점을 좀더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영성신학적인 방법론과 스콜라주의적인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첫째 스콜라 신학은 외적인 효과를 통해서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한다. 반면에 영성신학은 내적인 효과 즉 내적인 신의 임재경험이 그 근본자료가 된다. 둘째 스콜라주의는 이성을 의지하고 감정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영성신학은 감성적(affective)면을 소중히 여긴다. 즉 지성적인 이성보다 마음의 이성이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가고 있다는 말이다. 셋째 스콜라주의자들에게는 이성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면, 영성가들에게는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이르는 보다 완전한 길이라고 믿는다. 사랑이 깃든 지성만이 새로운 진리를 향하여 자유롭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2)

 

사유적 개념으로서의 신학과 경험적인 반추로서의 영성이 이렇게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던 스콜라주의 한복판에 나타난 인물이 곧 보나벤투라(1217-1274)이다. 그는 일찍이 파리대학에서 당시 스콜라주의를 이끌고 있던 해일즈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 로부터 신학을 배웠다. 그이후 스콜라주의 신학활동의 산실인 파리대학에서 10여년동안 성서와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스콜라주의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책인 피터 롬 바르드의「Sentences」의 주석을 쓸 만큼 스콜라시대의 중심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Francis의 단순한 영성적인 삶의 방식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내가〔보나벤투라〕 복된 프란치스꼬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교회의 시작과 성장과정이 그의 〔프란치스꼬〕삶의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교회가 단순한 어부들로부터 시작되었고 후에 교회가 유명한 교회의 박사들을 낳게 했던 것처럼, 복된 프란치스꼬의 수도회 안에서도 비슷한 경로를 밟고 있다. 그럼으로서 하나님은 교회가 인간의 신중성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워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3)

 

프란치스꼬적인 삶에 대한 열망은 그가 40세 때인 1257년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총장으로 부름을 받으면서 구체화 된다. 그가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을 당시 탁발수도회가 지향하고 있던  '淸貧'이라는 이상에 대해서 한창 논란이 일고 있었다. 이 논란으로 말미암아 프란치스꼬 수도회가 분규의 위협에 처하고 있었다. 보나벤투라가 이러한 시기에 그 수도회의 지도자가 됨으로서, 이 복잡한 문제속에 깊이 개입되어 문제를 풀어가야 할 주역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보나벤투라가 이러한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서 그 이전의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스콜라주의적인 저술활동에서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영성을 대변할 수 있는 영성적인 저술로 바뀌어지게 된다. 이것은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문제를 불투명한 영성적인 문제로 규정하고, 이 수도회의 영성을 재정립함으로서 수도회 내적인 문제를 풀어  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서 이 때에 쓰여진 대표적인 영성적인 저술이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여정」(The Soul's journey into God)과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The Life of St. Francis)이다. 이 두 영성적인 글은 단순한 영성적인 경험의 나열이 아니다. 영성적인 삶의 경헙을 그의 훈련된 스콜라주의적인 방법을 통하여 분석적이고 조직적으로 재편성해 놓은 신학이 담겨진 작품들이다. 즉 이 글들 속에 프란치스꼬적인 영성의 경험과 그 해석이 동시에 깃들여져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글들의 구조와 내용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이해할 때 보나벤투라에게 있어서의 영성신학 의미와 방법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다.

 

Ⅱ.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 에 나타난 영성신학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총장으로 있었을 때인 1260년 수도회의 부탁에 의해서「legenda」라는 이름으로 프란티스꼬의 전기를 썼다. 이 말은 동사 '읽다'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legere'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legenda'란 중세시대 전반에 걸쳐 공적으로 읽어지는 문서를 의미했다. 프란치스꼬의 전기는 이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 이전에 이미 여러 전기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주로 체라노의 토마스(Thomas of Celano)와 스페이어의  줄리안(Julian of Speyer)에 의해서 쓰여진 전기가 주로 많이 읽혀지고 있었다. 그런데 보나벤투라에 의해서 또 다른 전기가 쓰여지게 된 주된 동기로는 첫째 심도있고 일관성있는 영성신학적인 구조안에서 프란치스꼬의 생애가 해석되어질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스콜라주의적인 훈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프란치스꼬의 영성에 참여하고 있는 보나벤투라가 적합한 인물이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한편으로 프란치스꼬 수도회를 세워가는데 있어서 그 이전의 전기들은 보나벤투라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원시적이고 거르지 않은 프란치스꼬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는 판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나벤투라가 이 전기를 쓸 때 아직도 프란치스꼬와 함께 사역을 했던 동료들이 살아있었다. 예를 들면 형제 가일즈(Brothers Giles), 일루미나토(Iluminato), 레오(Leo), 마세오 (Masseo)와 루피아노(Rufino)등이 있었다.4)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이름들을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프란치스꼬의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곳에서 아직도 살아 있는 그의 가까운 친구들과 이야기 할수 있었으며 특히 그의 성스러움을 직접 경험했고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본받고자 노력했던 사람들과 조심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5) 이렇게 쓰여진 보나벤투라의 전기는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전기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가 쓴 전기는 프란치스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영향을 미쳐왔다.

보나벤투라의 프란치스꼬의 전기의 특징은 그 자료가 조직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우 진보된 영성신학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전기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단순히 연대기적인 기록이 아니고 그의 영성신학적인 이론이 투영된 것이다. 그는 이 전기의 서문에서 자기의 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야기는 향상 연대기적인 순서를 따라 적은 것이 아니다. 대신에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좀더 조직화하여, 동시에 일어났지만 서로 다른 주제들에 관한 것들은 분리시키는 반면, 각각 다른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주제가 유사한 사건들을 함께 모아 두었다."6) 사실 이 전기는 순서를 나열할 때 두가지 패턴을 따르고 있다. 첫 번째 패턴으로서 시작부분과 끝부분은 연대기적인 순서를 따르고 있다. 즉 일장부터 4장까지는 프란치스꼬의 초년시절과 변화의 경험, 수도회의 창설과 확장에 관해서 다루고, 마지막 부분인 13장부터 15장까지는 그의 십자가의 성흔과 그의 죽음과 그의 諡聖式(시성식)을 다루고 있다.  

두 번째 패턴은 연대기적적인 순서를 따르지만 동시에 주제에 따라서 9개의 장으로서 분류 나열하고 있다. 보나벤투라는 성프란치스꼬가 삶을 통하여 쌓아가고 있는 德(virtues)들을 분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청빈, 순명, 경건등의 덕들을 유형별로 나누고 재편성해서 세가지 단계로 제시하고 있다. 즉 영성생활의 전통적인 단계로 알려진 정화(purgation), 조명(illumination), 완덕(perfection)이라는 범주가 프란치스꼬 전기의 내적인 질서를 이루고 있다. 다음과 같은 목차가 곧 보나벤투라의 영성 신학적인 패턴을 인식케 해주고 있다.

 

정화의 단계 : 제 5장 엄격한 생활과 피조물이 준 위안

             제 6장 겸손과 순종

             제 7장 청빈에의 사랑

 

 

조명의 단계 :  제 8장 정의적인 경건함과 창조물에 대한 사랑

             제 9장 사랑에의 열망과 순교에의 갈망

             제10장 기도의 헌신과 능력

 

완덕의 단계 : 제11장 성경에 대한 이해력과 예언의 영

             제12장 설교의 효력과 치유의 능력

             제13장 거룩한 오상

 

첫째 단계에서 보나벤투라는 프란치스꼬의 영성생활의 출발점을 극단적인 금욕적인 삶의 수련에 두고 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의 금욕적인 삶의 훈련이 내면화 됨으로서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이해가 그의 삶의 현실로 전이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부정적인 자기 제어로서의 훈련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에 적극적으로 적응해 가는 과정이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적인 삶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의 사역속에서 빛을 발하게 되는 단계이다. 보나벤투라가 해석한 프란치스꼬의 영성적인 삶의 전체의 흐름은 상당히 엄격한 자기 절제와 금욕생활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나 그 금욕적 삶자체에 가치를 두기 보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간과하지 않는다. 보나벤투라가 프란치스꼬의 전기를 제 14 장과 15 장에서 그의 죽음과 諡聖式으로 연결시킴으로서 보나베투라는 프란치스꼬의 내적인 영적 성장과정은 복음적인 삶으로 전환된 이후의 프란치스꼬의 연대기적인 삶의 과정과 일치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보나벤투라는 이러한 조화로운 프란치스꼬의 영성생활의 패턴을 통하여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구체적인 현장에서 실현시킨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로 승화시켰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관상적인 삶(contemplative life)과 활동적인 삶(active life)의 조화이다. 프란치스꼬가 바로 이 두 삶을 훌륭하게 하나의 통일된 삶으로 조화시킨 사람이다. '물러감의 영성'과 '앞으로 나옴의 영성'이 서로간의 역동성을 주고 받음으로서 프란치스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워갔다. 프란치스꼬에게 관상적인 삶의 특징인 것은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관조였다. 자연은 '나와 그것'('I and It')이라는 단지 객관적인 대상물이 아니고, '나와 당신'('I and Thou')라는 인격적인 관계로서, 하나님을 말해 주고있는 신비의 매개체이다. 보나벤투라는 자연에서 보여주는 하나님과의 유비적인 관계를 곧바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신비와 연결시킨다.

 

Ⅲ. 영성생활의 삼단계

 

성프란치스꼬 영적 삶을 해석하는 도구로 채택한 삼단계의 영적 성장의 모형은 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다. 이 전통은 3-4세기 때 이미 신플라톤주의의 이론적 체계를 동방에서는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가 서방에서는 어거스틴이 기독교 안으로 들여왔고, 그것이 중세시대 이래로 기독교 영성경험을 해석하는 중요한 모형으로 제시되어 왔다.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플로티누스(Plotinus)는 영혼이 일자(一者)에게 돌아가는 과정을 세단계로 제시하고 있다. 첫번째 단계는 복합적인 영역으로부터의 분리 즉 "아래로부터의"의 분리로서 성취할 수 있는 단계이다. 지성적인 경험을 일컫는 말이다. 두번째 단계는 좀더 고상한 복합성(multiplicity)으로부터의 분리이며, 이성 그자체로부터의 분리이

 

다. 플로티누스는 이 단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명제나 삼단논법을 다루는 소위 논리적인 탐구를 다른 영역으로 넘기는 단계이다.7) 세번째 단계는 지성적인 활동안에 존재하고 있는 불안전한 모든 복합성을 점차적으로 제거함으로서, 지성적인 활동이 영혼의 심연으로 흡수되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것이 곧 일자와의 연합이다.8)

플로티누스의 영향 아래에 있던 위디오니시우스도 영성적 경험에 대한 단계적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그의 저서 「천상의 위계」(Thr Celestial Hierarchy)에서, 천상을 향한 계층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영적인 순례를 함으로서 가능한 만큼 하나님과 가까이 나아가고 그와의 일치의 경험을 하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9)라고 밝히고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위디오니시우스는 이 천상의 질서를 정화의 단계, 조명의 단계, 완덕의 단계로 구체화하고 있다. 그는 이 세단계를 먼저 교회 질서안에서 구체적인 모형을 찾고 있다. 즉 정화의 단계란 집사10)의 단계를 말하고, 조명의 단계는 성직자의 단계를, 완덕의 단계는 수도자의 단계로 비유하고 있다. 사실 위디오니시우스가 말하는 이 삼단계 질서는 도덕적인 정화나 현상적인 신비적인 경험을 규정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영적인 지식의 깨달음 정도에 관심을 두고 분류한 것이다. 20세기 신비신학의 이론가이면서 영성가인 애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위디오니시우스의 형식은 플로티누스의 법칙을 재설명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왜냐하면 위디오니시우스의 최고의 신비경험인 관상의 단계는 순수한 지성의 세계로 인도하는 플로티누스의 "영적인 직관"을 의미하고, 위디오니시우스의 일치의 경험이란 플로티누스의 일자에 대한 신비적인 비젼과 상응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11)

어거스틴은 그의 「영혼론」에서 영혼의 기능을 일곱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그 중에서 다섯번째는 마음의 평정의 단계, 여섯번째는 관상의 진입의 단계, 일곱번째는 관상의 단계이다. 이 단계들은 위디오니시우스의 구조인 정화의 단계, 조명의 단계, 일치의 단계와 각각 상응하는 단계들이다.12) 세번째와 네번째는 자아의 윤리적인 변화의 과정을 의미하고 있다. 이 단계들이 다섯번째의 단계에서 정착을 하게 되고, 여섯번째 단계는 어거스틴의 영적인 '신적 조명'이론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영혼의 신적인 지식에의 도달을 의미한다.13) 최고의 단계인 일곱번째는 진리에 대한 관조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다.14) 버틀러는 이러한 영적 성장의 단계를 어거스틴이 자신의 고백록을 기록하는데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다.15) 이러한 역사적인 영적 성장의 단계들의 모형이 보나벤투라의 영성신학의 뼈대를 세워주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뼈대를 중심으로해서 지어진 한 균형잡힌 아름다운 영성신학의 건물이 바로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여정」(The Soul's journey into God)이라는 저서이다.

 

 

Ⅳ.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여정」에서의 영성신학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여정」은 이 글의 서문에서 밝히듯이 성프란치스꼬의 영적여정을 밟아가는 동안 경험한 영적인 통찰력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고요한 장소와 영혼의 평정을 찾기 위해서 성프란치스꼬가 십자가의 성흔을 경험한 투스카니의 라 베르나산(Mt, La Verna)으로 물러가 명상과 기도생활에 정진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복되신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제 7 대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총장이 된 하나의 보잘것 없는 죄인인 나는 우리의 복되신 아버지 프란치스꼬의 모범을 따라 나는 헐떡이는 영혼으로 평화를 찾고 있었다."16) 이러한 저술에서 우리는 그가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원장으로서 해결해야 할 현안 문제가 얼마나 복잡했고 심각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보나벤투라에게 적지않은 긴장과 갈등을 야기시켰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바로 선임자인 극단적인 영성주의자 팔마의 요한(John of Parma)이 남겨놓은 혼란과 상처를 수습해야 할 과제가 보나벤투라 앞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에서 찾아낸 문제의 실마리가 바로 성프란치스꼬의 정신을 추적함으로서 프란치스꼬 수도회의 영성을 재정립해 주는 것이었다.

보나벤투라는 성프란치스꼬가 경험한 여섯 날개 달린 스랍을 명상하는 동안 성프란치스꼬의 영성의 길이 무엇인가를 감지하게 된다.17) 보나벤투라는 성프란치스꼬의 영적성장의 단계를 여섯 날개달린 스랍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여섯단계로 나누고 있다.18) 그 여섯단계의 결과로서 일곱단계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일치경험이다. 이것이 성프란치스꼬의 영성을 해석한 보나벤투라의 영성신학의 내적인 골격이다.

보나벤투라는 그의 저서 「삼위 일체론」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은 우리안에 이미 새겨져 있으며,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19)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피조된 세계가 곧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고 인간을 당신에게 인도하기 위하여 피조세계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 밖에서는 물질세계를 감지하고, 자신 안에서는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고, 자기자신을 초월해서는 하나님 그 분 자신을 관조할

 

수 있도록 지음받았다.20) 이러한 보나벤투라의 영성 신학적인 입장에서 자연과 초자연의 연속성을 엿보게 된다. 그렇다고해서 그의 신지식에 대한 이해를 이성적인 추리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거나 직관에 두고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觀照(contuition)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의미한다. 관조의 세계란 자연과 초자연 안에서 결과를 보고 제일원인을 추구하듯이, 자연에 비추어진 하나님의 흔적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21)

보나벤투라의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여정」에서는 철학적인 관조를 뛰어넘어 신비적인 관상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그는 지성과 의지의 상대적인 가치를 고려하지만, 신학을 지혜라고 보는 입장에서, 보나벤투라는 사변적인 것보다 실제적인 신학의 기능을 중요시 하고 있다. 뵈너(Boehner)는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여정」의 목적은 단순히 인간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지고한 사랑의 정서감(affection)을 통해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 그와 일치의 경험을 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22) 사랑을 통한 일치의 경험은 보나벤투라의 신학적인 지혜에 대한 핵심이다. 보나벤투라에 있어서의 신지식은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추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통한 경험적인 지식이며 참여적인 지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보나벤투라의 영성신학은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존재론적인 인간조건에 그 이해의 바탕을 두고 있다.

이제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여정」에서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단계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보나벤투라는 신학적인 지식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책"(liber)이라는 은유적인 용어를 채택하고 있다. 즉 인간은 어떤 "책" 안에서 하나님을 읽어낼 때 하나님께 이른다는 말이다. 그의 「신학서설」(Breviloquium)에서 말하기를 두 종류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 자신 안에 기록되어진 것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아이디어이며 지혜를 의미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밖에 기록된 것으로서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물질적인 세계를 의미한다.23) 전자를 "생명의 책"이라고 하고, 후자를 "피조물의 책"이라고 부른다.24) "생명의 책"은 천상의 세계에서만 읽혀질 수 있는 가려진 책이며 "피조물의 책"은 피조물의 세계에서의 일상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인간이 읽어낼 수 있는 책을 말한다. 보나벤투라는 이 "피조물의 책"을 다시 세종류의 책으로 구분한다. '물질적인 피조물', '영적인 피조물', 그리고 '성서'라는 삼중적인 책의 도움을 통할 때 하나님께 이르게 된다.25)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이르는 길로서 '자연의 책', '영혼의 책', 그리고 '성서'라는 세종류의 책을 읽고 바르게 해석해 낼 때 하나님과의 만남의 길이 열리게 된다. 은유적인 이 세 책을 보나벤투라는 영적성장의 단계로서 채택하고 영혼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과정을 조직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까지 보나벤투라의 입장을 일괄해 볼 때, 그는 자연신학이 그의 영성신학의 출발점이요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나벤투라의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여정」의 구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는 다음의 서술들을 살펴보면 곧 자연신론적인 견해는 수정되어질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르는 과정들을 분별할 수 있는 빛을 받는다. 피조물의 입장에 있는 우리는 우주 그 자체가 하나님께로 이르는 사다리이다. 어떤 피조물은 하나님의 흔적을 나타내고, 어떤 피조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고 있다. 어떤 것은 물질적이요, 어떤 것은 영적이다. 어떤 것은 일시적이요, 어떤 것은 영원하다. 어떤 것은 우리 자신 밖에 있고, 어떤 것은 우리 자신 안에 있다. 가장 영적이고 영원하고 우리 위에 있는 제일원칙을 관상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이고 일시적이고 우리 자신 밖에 있는 하나님의 흔적에 불과한 것들을 뛰어 넘어야 한다... 우리는 영원하고 영적이요 우리 안에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의 영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제일원칙을 관조함으로서 영원하고 가장 영적이고 우리 영혼 위에 있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식을 즐기는 것이요, 그의 위엄에 대한 경외감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존재에 대한 삼중적인 실존을 반영한 것이다. 즉 물질적인 실존, 영혼의 실존, 영원한 실존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삼중적인 실체를 반영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신적으로 우리의 사다리이다.26)

이 서술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영적 여행의 출발점을 논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자연으로부터 영혼으로, 영혼으로부터 하나님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측면에서 그것이 가능해지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사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보나벤투라의 영성신학의 근간은 기독론이며 그것을 기초로 해서 영적성장의 단계가 설명되어진다.

보나벤투라는 영혼의 자연적인 능력을 무용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사다리로서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자연을 통한 영적인 진보는 기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은총 없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은 합목적성에 이르지 못한다. 자카리 헤이즈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은 은혜 안에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하나의 잠재능력에 불과하다고 한다.27) 자연과 은혜의 두 영역에 대하여 보나벤투라는 인간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중적으로 분류하고 있다. 창조된 형상(imago creationis)과 재창조된 형상(imago recreationis)이다. 전자의 범주 안에 있는 인간의 영혼은 '기억'과  '지성'과 '의지'라는 삼중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반면에 후자의 범주 안에 있는 영혼은  믿음, 소망, 사랑의 능력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28) 이렇게  창조된 형상이 재창조된 형상으로 재형성될 때 그리스도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보나벤투라는 이 신학적인 삼덕인 믿음, 소망, 사랑을 영적 감각들을 회복시키는 것과 연결을 시키고 있다. 믿음은 영혼의 영적인 청각과 시력을 회복시키는데 관계하고 있다. 소망은 영적인 후각을, 사랑은 영적인 미각과 촉각을 변화시키고 회복시키는데 관련을 맺고 있다. 의가 태동하기 전까지는 직접적으로 기독교 경건생활에 유익되지 않는29) 이러한 영적인 오각은 외적인 오각과 유비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만 다른 점은 영적인 감각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의 활동을 즉각적으로 감지하고 현재화 시키는 능력이 있다. 즉 회복된 영적인 감각은 영혼에게 영적인 경험을 즉각적으로 감지하도록 해준다.

 

이러한 영적인 감각의 회복과정은 이성적인 경험이라기보다는 情意的(affective)인 경험이다. 말하자면 영적인 후각은 영혼이 소망을 가지고 말씀을 받으려는 열망을 가질 때 회복된다. 사랑 안에서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이것으로 인해서 영적인 미각과 촉각이 회복된다. 특별히 보나벤투라는 회복된 영적인 감각을 소유한 영혼의 예를 아가서로부터 추적하고 있다. 그는 아가서의 경험을 보면서 이성적인 경험과 정의적인 경험을 구분한다. 이성적인 경험이 지성의 능동적인 활동이라면, 정의적인 경험은 수동적인 활동이다. 회복된 영적인 감각은 영혼의 비약적인 성장 즉 영혼의 황홀한 경험을 위한 하나의 준비태세를 갖춘 것이다. 이들 영혼의 특징은 헌신과 감탄과 환희이다.

이 회복된 감각들은 먼저 자연을 통하여 하나님의 흔적을 관조하게 된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연을 통하여 유비적인 하나님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프란치스꼬의 자연에 대한 영적인 태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프란치스꼬 자신의 작품인 '태양의 노래'는 자연에 대한 그의 신비적인 의식을 표현하고 있는 대표적 작품이다. 프란치스꼬는 이 노래의 두 번째의 소절에서 "주여, 당신의 피조물로 인하여 찬양을 받으소서"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에서 모든 피조물들은 우주의 대파노라마처럼 전개되고 있다. 하늘에는 태양, 달, 별들이 있고, 땅에는 4가지 요소인 공기, 물, 불, 흙이 있다. 성프란치스꼬는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론과 그리이스의 우주론에서 말하고 있는 만물의 구성요소인 4가지를 함께 조화시켜서 자연에 대한 신비적인 의식을 자아내고 있다.

프란치스꼬의 영향아래에 있었던 보나벤투라 역시 피조물을 하나님의 놀라운 활동으로 인식하기에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끌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놀라운 광휘에 의해서 눈을 뜨지 못하는 사람은 장님이요, 그 피조물의 광음에 의해서 깨지 못하는 사람은 귀먹어리요,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사람은 벙어리요, 이렇게 분명한 사인에도 불구하고 제일원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다.30)

 

감각적인 지식은 하나님에게 이르는 일차적인 단계를 제공한다. 육체적인 감각을 통해서 얻은 정보는 내적인 감각에 전달되어 이성적으로 조사하고 믿음으로 신뢰하고 지적으로 관조하게 된다. 이러한 관조를 통하여 내적인 감각은 하나님의 '능력'(power)과 '지혜'(wisdom)와 '선하심'(goodness)의 속성을 감지한다. 내적인 감각으로 포착한 하나님의 속성이 자연 속에서 감지된 위엄과 섬세함과 아름다움이라는 하나님의 속성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흔적으로서 유비적인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할 뿐이다. 피조물 자체가 자아내는 위엄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유추하고, 피조물의 구조의 섬세함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유추하고, 피조물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유추하게 된다. 이것을 보나벤투라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흔적으로 이해하고 있다.31) '자연의 책'은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속성에 참여할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의 흔적을 간직하게 된다. 이 '자연의 책'을 통하여 영적 순례자는 자신 영혼의 문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리게 된다.

두 번째 단계로 보나벤투라는 '영혼의 책'을 읽도록 안내한다. 영혼의 책을 바르게 읽을 때 우리의 영혼은 성부 삼위일체의 삶에 참여하고 있는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즉 영혼의 기능은 '기억'과 '지성'과 '의지'가 있다. 이 영혼의 기능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형상을 발하

 

고 있다. 영혼의 기능이 제대로 회복되어 있으면 그 세 기능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 안에 조명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관조할 수 있게 된다.32) 그러나 이 세 영혼의 기능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온전하지 못하기에 온전한 회복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세 번째 단계인 성서를 요청한다. 개혁되지 못한 영혼은 죄의 세력으로 인해서 감지된 영혼의 비젼을 왜곡시키고 혼미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불완전한 자연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성서 안에서 발견된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인 지식으로 온전케 한다. 존 둘리(John Dourley)는 이러한 보나벤투라의 영적 여행의 패턴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인간의 자연적인 이성의 빛안에 내재한 삼위일체의 이미지를 감지한다면 그것이 성서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하게 계시된 삼위일체의 이미지를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기본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33) 보나벤투라는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여정」의 제일장에서 이미 자연의 빛을 하나님께 이르는 첫 번째 사다리라고 언급하지만, 사실은 바로 성서와 그리스도를 통한 영혼의 개혁이 영적 순례의 진정한 시발점이라는 것이 보나벤투라 영성신학의 본래의 의미이다. 전자는 이성에 의한 논리적인 순서라고 한다면, 후자는 인식론적이고 경험적인 순서라 하겠다.

영혼의 개혁을 통하여 이제 우리의 영혼은 본격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한다. 보나벤투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을 '선하심(goodness)'이라고 한다. 이 선하심의 본질이 바로 사랑인데 이 사랑 안에서 성부되신 아버지는 자신을 주는 행위로서 아들을 낳게되고 아들과 아버지는 그 사랑의 연결 고리로서 성령을 산출한다(procession). 그리고 아들은 사랑의 동기로서 피조물을 산출하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 자신의 표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위격간의 상호적인 사랑의 열매이며 모든 창조행위도 이 삼위일체적인 사랑으로 비롯된다. 인간의 사랑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반영이고 그 사랑의 원형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공통의 실존은 사랑이다. 사랑 안에서 우리 영혼과 삼위일체 하나님이 공통적인 연대성을 형성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영혼의 열렬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육신 안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실존을 영혼의 눈으로 관조하게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향한 열렬한 사랑의 관조를 통하여 비로소 그리스도와 더불어 안식을 얻게 된다. 이 상태를 보나벤투라는 "홍해를 건너 이집트에서 사막으로 넘어가는 것"34)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십자가와 무덤이 생명을 약속하듯이 사막도 생명을 살리는 만나를 내리시던 곳이다. 보나벤투라에게 있어서 이 단계는 성 프란치스꼬가 십자가의 성흔을 경험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을 신비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비로소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게되고 하나님과의 신비적인 조우를 이루게 된다. 이 신비적인 조우는 지성적인 활동이 아니고 완전한 情意的인 활동이다. 보나벤투라는 이 상태를 분석하기를, '영적 순례자는 이해를 구하지 않고 단지 열망하며, 부지런한 독서 대신에 신음하는 듯한 기도를, (예수를) 스승으로서보다는 배우자로서, 인간보다는 하나님을, 분명한 것보다는 어두움을 구한다. 빛보다는 우리를 불타는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고 불을 붙여줄 수 있는 불을 구한다'라고 말한다.35) 여기서 얻어진 지식은 지적인 활동으로 얻어진 지식이 아니요, 사랑으로 얻어진 일체감을 이루는 지식이다.

 

하나님은 불이요, 그리스도는 불붙는 듯한 수난의 불꽃을 통하여 하나님의 불꽃을 우리 영혼 속에 붙이시는 분이다. 이리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 밖에서 성부 하나님에게로 인도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과의 일치 경험이요 보나벤투라에게 있어서 영성적인 완성이다.

 

Ⅴ. 맺 는 말

 

존 허치슨(John A. Hutchison)은 서양종교 전통을 특징짓고 있는 네 가지 형태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믿음은 배제하는 이성주의적인 전통이다. 둘째는 이성이 우선적이지만 동시에 믿음을 배제하지 않는다. 세째는 믿음이 우선적이며 이성을 배제시킨다. 네째는 믿음이 우선적이지만 동시에 이성을 포함시킨다.36) 이러한 분류들을 비추어 볼 때 보나벤투라의 영성신학은 네번째의 전통에 서 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로서 주어진 자연적인 이성의 능력들을 인정하나, 그것들이 자발적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지식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보나벤투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에 바탕을 두고 위디오니시우스가 제시한 영성적 성장의 파라다임을 발전시켰다. 보나벤투라에 있어서 은혜란 영혼을 청결케하고, 깨닫게 하고, 온전케 하는 선물이다. 즉 이 선물은 영혼을 생동케하고, 개혁하고, 강화시킨다.37) 다시 말하면 은혜가 정화, 조명, 일치라는 영성적 성장의 패러다임의 주요한 요소로서 작용한다. 보나벤투라는 이 은혜의 원천을 십자가에 달리신 육화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다. 동시에 그는 스콜라주의적인 이성적인 논리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적인 영혼의 능력을 은혜 안에서 보완하고 완성시키는 노력을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보나벤투라는 이론적인 신학과 경험에 바탕을 둔 영성과의 조화를 위협하는 당시 스콜라주의를 극복한 사람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지적인 활동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영성적 완성의 종국은 정의적인 삶(affective life) 즉 신적인 사랑의 참여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보나벤투라의 영성신학의 입장은 단순히 사변적이고 지적인 추구가 아니라 영혼의 정의적인 경험을 그 목적으로 두고 있다. 38) 보나벤투라에게 있어서 정의적인 경험은 하나님을 향한 자아의 내적인 침투운동이며, 논리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을 향한 상승운동이다. 이러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인 운동은 외부적인 활동 이전에 기도를 통한 내면적인 여행이라고 하였다.39) 그래서 그것을 보나벤투라는 영혼의 여행이라고 했다.

보나벤투라는 본래 활동가이며 지성을 고도로 사용하는 스콜라주의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

 

러나 그의 영성적인 접근은 전혀 외향적인 활동만도 아니요, 지성적 활동만도 아니었다. 내적인 성찰과 기도의 경험을 가장 중요한 영성학의 근저로 삼았다. 그는 지적인 이해 기반으로서 뿐만 아니라 지성을 뛰어넘는 사랑의 열정으로서의 하나님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을 역으로 해석하면 보나벤투라 자신에게 있어서, 신빙성 있고 확신있는 맹렬한 활동가의 필연적인 요소는 내면적인 영성생활이었다. 그의 하나님에 대한 논리정연한 이성적인 체계 역시 정의적인 하나님의 경험이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보나벤투라의 영성적인 경험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안셀름의 영성적인 경험으로 대체할 수 있다. "주여 나의 이해심은 당신의 높으신 경지에 도저히 비길 수 없으므로 이성을 통해서 주를 이해하려 들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당신의 진리를 조금씩이나마, 내가 마음 속으로 믿고 사랑하는 진리를 알기 원하나이다. 나는 믿기 위해서 알려고 하지 않나이다. 오히려 알기 위해서 믿나이다. 또한  나는 '믿지 않으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음'도 믿고 있나이다."40) 이러한 논리가 곧 보나벤투라의 영성신학의 핵심적인 태도였다.

 

 

 

 

 

 

 

 

 

 

 

 

 

 

 

 

 

 

 


1* 본 고는 93년 10월 27일 대전 충남제일교회에서 행한 개교기념 특강원고임.     ) Jean Leclercq, The Love of Learnimg and the Desire for God (New York: Fordham University, 1988), pp. 191-196.

2) Steven Ozment, The Age of Reform 1250-1550: An Intellectual and Religious History of Late Medieval and Reformation Europe (New He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0), pp. 73-74.

3) Epistola de tribus quaestionibus, 13(Ⅶ, 336) in Bonaventure, trans. Ewert Cousins,"Introduction." (New York: paulist press, 1978), p. 6.

4) 상게서., p. 39.

5) Bonaventura, The Life of St. Francis, 권숙애 역,「보나벤투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프란치시꼬 대전기」,분도출판사, 1991, 서장, 4, p. 12.

6) 상게서.,

7) The Essential Plotinus, trans. Elmer O'Brien (Indianapolis : Hackett Publishing Company, 1986), Ennead Ⅰ, 3[20], 4.

8) Ibid., pp. 31-32.

9) Pseudo-Dionysius, The Celestial Hierarchy in Pseodo-Dionysius: The Complete Works (New York: Paulist Press, 1987), ch. 3, 164D.  

10) 여기서 말하는 집사는 준성직자적인 계열을 일컫는 말이다.

11) Evelyn Underhill, "The Essential of Mysticism," in Understanding Mysticism, ed. Richard Woods (New York: A Division of Doubleday Inc., 1980), p. 33.  

12) Dom Cuthbert Butler, Western Mysticism: The Teaching of SS Augustine Gregory and Bernard on Contemplation and the Contemplative Life (New York: E.P. Dutton & Company, 1924), pp. 37,68.    

13) Ibid., p. 55.  

14) Ibid., p. 68.

15) Ibid., pp. 37-38.  

16) Bonaventure, The Soul's Journey into God, trans. Ewert Cousins (New York: Paulist Press, 1978), Prol., 2, p. 54.

17) Ibid.,

18) 보나벤투라는 『성프란치스꼬의 대전기』를 기록하면서 프란치스꼬의 스랍 천사들에 대한 영적인 비젼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어느날 아침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무렵 산에서 기도하고 있던, 프란치스꼬는 여섯 날개가 달린 세라핌이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은 재빨리 그 가까이 내려와서는 공중에 멈추어 섰다. 그 때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 즉 양손과 발을 쭉 뻗친 채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상이 날개들 중앙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날개들 중에 두 날개는 그의 머리 위로 들어 올려져 있었고, 또 둘은 날기 위해 뻗쳐져 있었고, 한편 나머지 두 날개는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프란치스꼬는 그것을 보고 놀라 당황하였으며 그의 마음은 기쁨과 슬픔이 섞여 흘러 넘쳤다.... 그는...영감에 의해...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완전히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그에게 알게 하려고 이 환시를 보여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환시가 사라지자 그것은 그의 마음을 열심으로 불타오르게 하였으며 그의 몸에 기적적으로 그와 꼭같은 것을 박아 놓았다. 그 때 거기서 그의 손과 발에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환시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못자국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보나벤투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프란치스꼬 대전기』, 3, pp. 140-141).

19) Bonaventure, Quaestiones Disputatae de Mysterio Trinitatis, q. Ⅰ, a. Ⅰ.            

20) Bonaventure, The Soul's Journey into God, Ⅰ. 4.  

21) Philotheus Boehner, "Introduction," Works of Saint Bonaventure II: Itinerarium Mentis in Deum (St. Bonaventure, N.Y.: The Franciscan Institute, 1956), p. 24.              

22) 상게서.,

23) Bonaventure, The Breviloquium, Ⅱ. xi. 2.  

24) Bonaventure, Quaestiones Disputatae de Mysterio Trinitatis, q. 1, a. 2.

25) Bonaventure, Collationes in Hexaemeron, . 14-17.  

26) The Soul's Journey into God, Ⅰ. 2-3.  

27) Zachary Hayes, The Hidden Center (New York: Paulist Press, 1981), p. 43.

28) B. J. Van Walt, "Man the Tension-Ridden Bridge between the Transcendent and the Non-Transcendent World in the Thought of Bonaventure of Bangoregio," San Bonaventura Maestro di Vita Francescanae di Sapienza Christiana vol. Ⅱ. (Roma: Pontificia Facolta Theologia <San Bonaventura>, 1974), p. 591.

29) The Soul's Journey, Ⅳ. 3.

30) The Soul's Journey, Ⅰ. 15.

31) 상게서, Ⅰ. 14.

32) '하나님의 모든 아이디어들이 인간의 영혼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라는 조명이론은 플라톤의 이데아설이 어거스틴에게 영향을 주었고, 보나벤투라의 조명이론은 바로 이 어거스틴의 주장을 보완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33) John Dourley, "God, Life and the Trinity in the Theologies of Paul Tillich and St. Bonaventure," S. Bonaventura 1274-1974, Ⅳ, p. 279.

34) The Soul's Journey, Ⅶ. 2.

35) 상게서, Ⅶ. 6.

36) John. A. Hutchison, Faith, Reason, and Existence: An Introduction to Contemporary Philosophy of Religion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56), p. 97.

37) Bonaventure, Breviloquium, ch. 1, n. 2.

38) 보나벤투라는 "하나님의 향한 영혼의 여정"의 서문에서 그의 영성신학적인 입장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나는 독자들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로하는 듯한 기도로 초청한다. 그의 보혈로 우리들은 악의 더러움으로부터 정결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감격없는 독서나 헌신없는 사변, 놀람없는 탐구, 기쁨없는 관찰, 경건없는 활동, 사랑없는 지식, 겸손없는 이해, 하나님의 은혜없는 노력, 신적 감화로 인해 얻은 지혜없는 거울로서의 반추가 충분하다고 믿지말아야 한다"(The Soul's Journey, Prologue, 4).

39) The Soul's Journey, Ⅰ. 1: "더 높은 힘이 우리를 끌어올려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 위로 오를 수 없다. 우리의 내적인 진보가 아무리 잘 정리되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도움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도움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겸손하고 진지하게 구하는 사람에게 유효하다. 이것은 기도를 통하여 눈물의 골짜기에서 그것을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기도는 영적 상승의 어머니요 원천이다."

40) St. Anselm, Basic Writings: Proslogium, (La salle, IL: Open Court Publishing Company, 1988) ch 1, pp. 5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