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멜기세덱 (Jesus and Melchizek)
김 광 락
I.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 7장은 성경전체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가장 뛰어나게 논증하고 있는 부분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논증의 근거를 멜기세덱이라는 성경의 한 역사적인 인물에게서 찾는다.
우리는 그러한 논리 전개 방법이 히브리서 저자 자신의 고유하고 독특한 교리적 체계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고유한 사상 체계가 아니며, 비평학자들이 말하듯 초대교회의 산물은 더욱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오히려 멜기세덱 이론은 구약에서의 메시야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에서 비롯한 것이며 예수께서 또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셨다는 확신에 찬 구속사관인 것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저자가 유대인 또는 유대화하려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변증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 인물인
멜기세덱에 관하여 살펴봄으로 그것이 구약의 메시야 대망사상과 예수님의 자기이해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히브리서 저자의 구속사적 논증에 어떠한 방식으로 관여하고 있는 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본 고찰의 목적은 우선 통상 교회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성경 상의 한 인물인 멜기세덱에 관한 구속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멜기세덱’의 인용에 나타난 메시야 이해가 성경에서 어떻게 발전되어 히브리서에 이르게 되었는 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즉, 여기서는 멜기세덱에 대한 역사적-언어적 고찰ㅇ르 통한 이해보다는, 역사적 예수와 초대 교회의
케리그마 사이를 다리놓는--초대 기독교 의 교리의 근거를 밝히고 재확인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한다.
멜기세덱에 관한 고찰은 모형론, 신약과 구약의 관계,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 초대교회의 구속사관, 그리고 대제사장적
사역에 관련된 예수님의 자기이해 및 예수님의 사역이 가지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할 수 있다는 데서 연구의 중요성이 부여되어야 한다.
II.멜기세덱에 관한 이해의 변천
A. 창 14:18--20(모세의 이해)
우리가 창세기의 모세저작권을 전제로 할 때, 멜기세덱에 대한 오랜 전승이 모세에게 이르게 된 것이 분명하다.
모세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그 전승을 광야 이스라엘 공동체에 교훈을 줄 목적으로 이 기사를 기록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모세는 어떤 의도로 이 멜기세덱 기사를 기록하였을까?
모세의 관심은 히브리서 저자와는 달리 멜기세덱보다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광야 공동체의 언약적 조상은 멜기세덱이 아니라 아브라함이었고 또한 멜기세덱에
관해서 그다지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창세기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광야의 언약 공동체가 알아야 할 신앙지침이다.
아브람이 가나안의 제사장-왕인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고 또 그에게 십일조를 드림은 아브람이 오직 여호와께서
그 싸움을 이기도록 복을 주셨다는 것을 감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브람은 승리의 귀환을 하는 자신을 환영하는 가나안 족속들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주권을 잊지 않고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러한 아브람과 동일시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본문에서 멜기세덱은 분명 하나님의 주권을 대표하는 인물로 소개된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제사장으로 임명받게 되었는 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아브람이 살았던 고대 족장 사회는 아직 죄악이 관영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멜기세덱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다수의 경건한 자들이 남은 자들로서 살아가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어쨌든, 멜기세덱은 살렘 왕으로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거룩히 임명받았다.
그를 통하여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언약적 존귀함을 알려주고 있다.
B. 시 110 편 (다윗의 이해)
예수님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주 인용한 위 시편의 기록은 다윗이 아론의 제사장직과는 차원이 다른 신적인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의 기능을 부여받은 왕( Messiah as the Priest-King ) 의 즉위식 광경을 찬양하는 시이다.
다윗은 가나안 고대 역사의 그 신비의 예루살렘 왕 멜기세덱 역시 한 제사장이었듯이 여호와께로부터 임명받을
그 새로운 왕 역시 어느 제사장보다 훨씬 뛰어나며 폐하지 않고 영원히 제사장 직임을 수행할 것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제사장적 사역은 여호와의 우편에서 수행된다. 다윗에 의해 ‘주’라 불리워지는 그 대제사장-왕은 진노의 날에
열왕을 심판하실 분이시다. 이처럼 왕권을 이상적인 대제사장 개념에 연결시키는 것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생소하지
않은 것이었다. 고대 사회의 통치자들은 동시에 제사 의식의 주관자였다.
우리는 다윗의 이 시에서 제사장 개념이 왕권 개념과 결함하여 메시야 사상의 기반을 형성하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염두에 둘 점은 다윗이 아론의 반차가 아닌 또 다른 별개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왕
( Priestly King )의 도래를 찬양했다는 사실에서 당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레위 계통의 제사직분이 영원하지 못한 것--
일시적이며 불완전하다는--사실을 다윗 자신이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있어 아론의 반차는 잠정적인 것을 알았다.
만일 레위계의 제사직이 메시야 왕국의 완성된 궁극 목표이자 형태였다면 다윗 자신이 대제사장-왕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찬양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곧 살펴보겠지만 예수님과 히브리서 저자가 이 시편을 인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구속사적 안목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C. 막 12:35--37 (예수님의 이해)
다윗이 기대하고 찬양한 그 메시야 즉, 제사장적 기능을 영원히 수행할 종말의 위대한 왕을 대망한 것이 예수님 당시에도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이는 요한복음 12:34 에서 무리들이 예수님께 한 질문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그들 역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몇몇 서기관들의 이해가 문제성이 있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 시편 110 편을 인용하셨을 때 ‘그 메시야’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왕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전제하심이 분명하다. 즉, 예수님께서는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을 염두에 두시고서 멜기세젝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이며, 다윗이 ‘주’로서 높인 신적 제사장의 직무를 이해하지 못한 서기관들의 다윗 기독론을 배격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멜기세덱을 자신에게 적용시킨 예수님의 자기 이해( messianic self-understanding )는 뒤에 가서
좀더 상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D.히브리서 7장 (히브리서 저자의 이해)
신비의 서신이라고 불리워지는 히브리서는 요한복음과 함께 신약성경에서 가장 뛰어난 헬라어 문체를 가지고서 가장
세련되고 차원 높은 기독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 논증의 핵심이 바로 7장의 멜기세덱 논증이다. 저자는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창 14 장과 시 110 편의 구약 전승들을 알레고리가 아니라 예표론적인 방법을
가지고 다루고 있다. 저자가 사용하는 예표론적 혹은 모형론적 접근은 단순한 유사성의 논리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저자는 멜기세덱이 족보가 없다는 사실과 그 이름의 의미 등에서 예표의
논리적 근거를 찾아내고,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했고 다윗이 그 반차를 찬양한 데서 성경적 근거를, 히브리서의 저술
당시에 멜기세덱에 대한 종말론적 메시야 기대가 구약에서부터 중간사 시기를 거쳐 내려오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예표의
당위성을 찾아내고 있다. 무엇보다 본 고찰에서 강조하는 바, 멜기세덱 논증이 히브리서 저자 이전에 예수님의 자기이해
( 혹은, 자기계시)에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히브리서 저자의 멜기세덱 이론은 또한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즉, 예수님 자신이 먼저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을 예표적으로 자신에게 적용시켰다는 확신이다.
결국 히브리서 저자의 이해는 멜기세덱의 반차가 자기 안에 성취되었다는 메시야적 자기이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자기계시(Self-disclosure)를 당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논리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가 이러한 치밀한 논증을 하는 대상은 아마도 대제사장으로 불리울 예수님의 권리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었거나 박해의 위협을 피해 유대교로 다시 되돌아가려는 유대 기독교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일하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다시 확인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E. 기타 유대주의에서의 이해
창세기 14장에서 족보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이 신비스럽게 나타나 아브람에게 축복하고 또 그에게 십일조를 받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윗의 시에도 언급된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성경이 아무런 정보를 제공해주지는 않고 있다.
그 이유로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은 매우 일찍부터 유대인들의 많은 논란과 상상을 자극해 왔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 당시에는 시 110 편에 대한 랍비들의 메시야적 해석이 있었을 뿐 아니라 메시야적으로 보지는
않더라도 멜기세덱을 기타 여러 종말론적 인물들과 동일시하게 보는 사상들이 많이 존재했다는 것은 틀림없다.
예를 들면, 멜기세덱을 ‘돌아온 엘리야,’ ‘종말의 대제사장,’ ‘아담 혹은 이상적 인간.’ ‘의의 제사장,’ ‘로고스’ 등으로
간주하는 여러 견해들이 있었다. 즉, 히브리서만이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문헌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다른 신약 성경에서도 간접적인 대제사장적 기독론 사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유대주의는 사실 제사장 조직과 기능을 소유했지만 종말에 유대적 제사장직의 모든 요소들을 성취할 한 이상적 제사장-
왕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이 소망은 당시 존재하고 있었던 제사장직이 부패하여 유대인들의 기대에 못미치게 되자
더욱 강해졌다. 이 소망은 종말에 나타나게 될 한 완전한 대제사장이 메시야적 인물로서 모든 제사직의 관념을 적극적으로 성취하고 지상의 제사장직의 모든 불충분한 점을 극복하고 완전한 성전 예배를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이다.
이 봉말의 대제사장에 대한 기대는 쿰란 공동체(Qumran Community)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쿰란에서의 제 11 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기 파편들은 신약 시대에 멜기세덱에 관한 종말론적인 중요성이 널리
숙고되어지고 있었다는 시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것에는 멜기세덱이 벨리알에게 절하지 않는 유대의 경건한
남은 자들을 구원하는 종말론적 인물로 소개되며 그의 도래 시기는 대 속죄일이 될것이라는 내용이다.
신약 시대의 사람들이 대제사장-왕으로서의 메시야 개념에 친숙하여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역사적으로 마카비 시대의
시민 지도자 시몬(Simon)이 또한 대제사장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종교직임을 동시에 가진 정치적인 지도자상은
하스모네 가문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이러한 유대의 정치적 상황은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배경에서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야 개념을 반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될 여지가 있다.
히브리서 서신 역시 멜기세덱에 관련된 유대 및 기독교계의 관심을 구속사적인 안목을 통하여 왜곡된 메시야 이해들을
교정하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계획을 조명하고 있다.
III. 멜기세덱의 왕적 기능
성경은 멜기세덱이 단순한 제사장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히브리서 7:1--3은 분명 왕으로서의 멜기세덱이 강조되고 있다.
그의 이름(Melchizedek)은 의의 왕(King of Righteousness)을, 살렘왕은 평강의 왕(King of Peace)으로 번역된다.
이렇게 멜기세덱의 왕됨을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와 평강의 왕으로서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어떤 빛을 던지고 있는가?
다윗의 가지(Branch)로서 오신 그리스도의 왕직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 히브리서 저자는 제사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능력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 분명하다.
유대사회는 전통적으로 왕직과 제사장직이 구분되어 왔다. 다윗의 왕직 역시 제사장직과 구분된 것이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언약(삼하 7:13ff.)은 왕직과 제사장직을 결합한 후손이 다윗가문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후손의 전형(antetype)으로서 멜기세덱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모형 또는 전형으로서
멜기세덱의 왕권은 다윗의 그것보다는 차원이 높은 것으로서 충족성과 자발성을 갖고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A. 충족성(sufficiency)
멜기세덱이 제사장일 뿐 아니라 왕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은 아론의 제사장적 사역보다 더욱 뛰어나다.
그는 왕으로서 가진 부와 소유물로 인하여 그는 스스로 자기 비용을 들여 희생제 및 다른 의식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수행힐 수 있었다 반면 레위계의 제사장들은 왕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가져오는 제물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멜기세덱이 예표하는 시온의 왕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처럼 다른 재원에 의존하지 않고서
자신의 것으로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다. 레위계의 제사장은 자족하여 제사기능을 감당하지 못하며 항상 불충분하여 항상
반복될 수 밖에 없었으며 제사장은 자기의 죄를 위한 제물을 선택하여야만 했으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소유로써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멜기세덱의 자족성을 갖고계신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왕권은 제사직을 수행하는 것과 불가분 관련이 있는 것이다.
B. 자발성(spontaneity)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의의 통치자’를, ‘살렘 왕’이라는 이름은 ‘평화의 통치자’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의와 평화는 메시야적 은사를 지칭하는 것으로서메시야가 그 제사장적 기능을 수행함으로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가리킨다 멜기세덱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의를 소유하며 하나님과 평화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와 평강을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것은 제사장의 기능이다.
이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온전히 이루어졌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바로 이러한 의와 평강을 수여하는 제사장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바울 서신에서 강조되는 핵심 개념인 중보자 개념도 그러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예수 메시야의 제사장적 통치와
연관이 있다. 멜기세덱은 율법적 조항과 족보에 얽매인 레위계열의 제사장들과는 달리 자신의 고유한 권세로 의와 평강을 수여하는 직분을 감당했다. 그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것이며 레위 제사장들처럼 혈통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멜기세덱의 제사장적 통치기능은 족보에 의존하는 레위계 제사장들과는 달리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발적인 제사장 기능의 수행은 레위계의 그것과 구별시켜주는 중요한 특징인 것이다.
IV. 멜기세덱의 영원성 문제
히브리서 7:3은 멜기세덱을 영원한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멜기세덱이 어떠한 근거에서 그렇게 불리울 수 있는가?
또한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한 것과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선 그가 문자적으로 신적인 존재라는 가정을 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 아들 자신이다.
그러나 문맥은 이것을 반대한다. 왜냐면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게’ 되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창 14:18ff의 내용에서도 그는 한 인간으로서 아브람과 비교되고 있다.
둘째로, 그의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 영원하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의 제사장적 기능과 사역이 하늘에서 계속 행해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장직을 침해하게 되며 히브리서 저자의 의도와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세번째로,이것은 타당한 견해로서, 멜기세덱은 역사적 인물로서 영원한 인물이 아니지만, 성경의 한 인물로서,
아비나 어미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없고 그의 시작이나 죽음에 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영원한 인물과 ‘유사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멜기세덱은 모든 지상적인 관계에서 벗어나서 오직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임명받았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멜기세덱의 영원성은 직분이나 능력의 영원성이 아니라 단지 족보상으로는 지금도 제사장으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족보는 히브리 사상에서 메우 의미심장한 역활을 한다. 족보가 특히 레위계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반면, 제사장 멜기세덱의 족보 소개가 없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의 매우 독특한 관계 속에서 그 직분을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제사장직임을 부여받은 독특한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아들(Sonship)로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왕으로 임명되셨다.
멜기세덱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관계의 독특성은 레위 계열의 제사장들이 갖지 못하는 성질이다.
레위 계열의 제사장직이 족보에서 비롯되는 반면 멜기세덱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기인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멜기세덱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종말의 온전한 대제사장직을 부여받으신 참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 될 자격이 있었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히브리서 저자의 구속사관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가를
잘 보여준다.
V. 멜기세덱의 우월성 논증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그의 공동체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뛰어남을 논리적으로 역설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즉 복음의 궁극성을 확증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천사 및 모세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를 논한 후, 아브라함과
레위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를 논하는데 그 논증의 방법은 멜기세덱이라는 역사상의 한 인물을 구속사적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과 레위 계열의 제사장들과 비교하여 멜기세덱의 뛰어남을 논증한다.
저자의 논법은 역지적인 유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한 당위성에 그 촛점을 두고 있다.
그러한 논증의 목적은 히브리서의 독자들로 하여금 유대우월주의의 모순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통치를 받아들이도록 권고하는 데에 있다. 멜기세덱의 우뤌성에 관한 저자의 논증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아브라함에 대해서, 둘째, 제사장들에 대해서, 셋째, 새로운 반차의 필연성에 대해서이다.
A.아브라함보다 위대한 멜기세덱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위대한 사실은 두 가지로서 증명된다.
첫째,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준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자발적으로서가 아니라 의무로서, 그의 명예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그의 종교적 직분의 고귀함 때문에 자신의 노략물 중에서 좋은 것으로 십분일을 주었다.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은 전체를 바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면 십일조는 전체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바친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들 전체 민족이 바친 셈도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보다 위대하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그에게 복빎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위대하다는 것이 그의 축복권에서도 증거된다.
B.제사장들보다 위대한 멜기세덱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 일을 바쳤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인 레위도 그에게 십분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레위보다 뛰어나며 레위계의 어떤 제사장보다 뛰어나다.
그것은 동시에 레위 제사장들이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말이다.
더우기, 레위인 제사장들은 ’죽을(mortal)'자들이었지만, 멜기세덱은 그 족보상 ‘산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
그러기에 레위계 제사장들은 끊임없는 계승이 요구되었다. 계속 반복되는 계승과 제사는 그 자체로 온전하지 못하며
일시적인 성격의 것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본질적으로 새롭고 온전한 제사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C.멜기세덱 반차의 필연성.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 반차의 우위성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마땅히 필요하다는 당위성(inevitability)을 논한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제사직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제사직이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언약백성들로 하여금 ’온전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 ’온전함‘ 또는 ’온전케 됨‘은 언약 공동체의 목적이다.
이것은 언약의 목적이기도 하다.
온전케하지 못하는 제사직분은 일시적으로는 필요할찌라도 영원히 요구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영속적인 것을 요구한다. 레위계열의 제사 직분을 통해 ’온전함‘이 얻어진다면 왜 같은 제사가 반복되어야만 했는가? 즉, 제사가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은 제사가 죄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아론의 반차가 온전함을 제공하여 주지 못하므로 다른 반차를 좇아 그 언약 백성에게 온전함을
재공할 새로운 한 제사장이 일어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윗이 노래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레위 계열의 제사직이 언약 백성에게 온전함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지상적인 성격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시야가 통치할 나라에서는 그러한 제한적인 모든 요소들이 완전히 극복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이 요구하는 그러한 메시야적 기대를 깊이 인지하고 계셨으며 자신의 생애 동안 그것을
확증해보이셨으며 또한 그것을 실제로 성취하셨다.
VI.멜기세덱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
여기서 우리가 멜기세덱에 관한 예수님의 자의식을 다시 한번 더 세밀히 검토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다.
Geerhardus Vos가 그의 저서 「예수와 자기계시」의 제 1장에서도 주장하듯이 예수님의 자의식이 기독교의 진리가
왜곡되어 현대 자유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을 막아준다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전략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메세지가 왜곡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더욱 풍성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 동안 과연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의 직임을 의식하셨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히브리서 저자의 논리는 왜곡된 억지 논리임이 판명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 예수와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와의 깊고 깊은 심연을 초래하여 결국 기독교의 메세지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의 케리그마가 역사적 예수의 자의식에 포함되어 있다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사실 성경 상에서는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을 직접 인용하신 부분은 단 한번도 나타난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멜기세덱을 전혀 모르셨다거나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마가복음 12:35--37에서 예수님께서 시편 110 편을 인용하신 것은 분명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을 염두에 계셨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마가복음 14:62에서 대제사장의 심문 시 대답하신 것에도
나타난다. 막 12:37에서의 예수님의 질문이 막 14:62에 가서 대답된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는냐?”(Mk.12:37)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Mk.14:62)
막 14:62의 예수님의 대답은 시편 110 편의 메시야 개념과 다니엘 7 장의 인자로서의 메시야 개념을 조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은 분명히 시편 110 편을 근거로 하고 있다.
시편 110 편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 원수들 보다 뛰어나게 승귀되어 하나님의 오른 편의 자리에 앉아 영원한 제사장으로서의 직분를 담당할 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제사장-왕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을 것이다.
반면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단 7:13ff.에서의 인자는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즉,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중재하는
대리자로서의 인자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의 이러한 의도적인 결합은 다윗의 아들로서의 메시야 개념을
제사장-왕으로 승귀된 ‘그 인자’로서의 메시야 개념으로 교정시켜주시는 의도가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메시야 개념의 변환 내지 교정작업은 예수님의 전생애에 걸친 가르침에 있어서 핵심적이며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을 결정한다. 즉, 오실 메시야는 다윗의 아들 뿐만 아니라 다윗의 주이다.
다윗이 부른 그 주는 하나님 나라에서 심판과 통치를 수행할 제사장-왕으로서의 인자이시다.
그 인자는 신적인 존재이며 영원한 제사장으로서의 기능을 하나님 우편에서 수행할 것이다.
시 110 편에서 주로서 우편에 앉는 것은 제사장-왕의 즉위식을 선포하는 것이다.
‘우편’에 앉는 것은 왕적 권위만이 아니라 왕적 권위로서 영원한 제사장의 기능을 하나님 앞에서 수행함을 뜻한다.
결국 예수님께서 시 110 편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셧는 가를 알 수 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왕으로 이해하셨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바랐던(요.12:34)
그 메시야가 진정한 대제사장직의 직임을 성취해야 한다는 관념을 자신의 전 사역에 걸쳐서 깊이 소유하고 계셨다.
예수님이 생각한 그 제사장 직임은 멜기세덱적인 직무,즉, 당시 레위계열의 제사장 직임과 같이 온전함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반복적인 제사와 같은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 온전함에 이르고 다시 반복할 수 없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선택하셨다.
이러한 희생적 사역은 이사야 53장의 종의 노래에서 두드러진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을 제사장-왕으로 이해하신 것은 마가복음 14장에서 대제사장 앞에서 취하신 예수님의 태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것은 자신의 메시야권이 지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예수님의 성전 청결과 강화에서도 또한 분명해진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행동하시고 말씀하신 것은 거의 지상 성전과 지상 제사장직을 정면으로 공격하신 것과 다름없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지상 제사장직보다 훨씬 뛰어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적 메시야로 이해하셨다는 것에
의해서만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이상적인 제사장-왕의 개념을
적용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는 아론의 반차보다 더 나은 새로운 반차로서 새 성전을 건축하고(삼하. 7:12ff.참조) 아론의
반차에서 시행되는 제사보다 더 온전한 제사를 드리려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러기에 이제 지나간 옛 언약 하에서의 온전케
하지 못하는 제사장직과 건물로서의 성전은 더 이상 그에게 합당치 못하다.
따라서 옛 언약의 모든 것--성전, 율법, 제사장직 등--은 개혁되어져야 했다(히.9:10).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종말의 대제사장왕은 새 언약--새 성전, 새 율법, 새 제사장직--을 자기 안에 성취하였다.
(렘.31:31--34 참조.) 새 언약의 도래는 필연적으로 옛 언약에 속한 모든 것이 변역될 것을 요구한다.
옛 제도들은 새 언약 하에서는 그 기능상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제의에 관련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들은 이러한 이해 위에서만 설명되어질 수 있다.
요컨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에 있어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왕으로서의 이해가 항상 그 저변에 놓여
있었다. 히브리서 저자의 멜기세덱에 관한 모형론적 논증은 전혀 저자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 이해와 그 계시에 근거한 사역을 강화체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바울 서신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VII. 멜기세덱 반차의 구속사적 의미
그러면 이 멜시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되신 예수님의 사역은 어떠한 것이며 아론의 반차와 어떻게
다른 결과를 낳았는가? 한 마디로 더 좋은 언약 보증이 되신 것이다.
여기서 더 나은 언약이란 새언약을 의미한다. 새언약이란 옛 언약의 모든 요소들을 갱신한 것이다.
새 언약과 옛 언약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포함한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이 본질적으로 요구하는 그러나 옛 언약이 도달하지 못한 모든 목표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성취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예수님은 새 언약의 보증이 되신 것이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의 연속성 속에 세 가지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새 성전, 새 율법, 새 직분.
A.새 성전
새 언약이 도래하였으므로 옛 성전 역시 변역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고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기 위한 언약적 희생으로 보셨다.
그것은 성전의 의미와 목적을 성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그것은 새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되는데 삼하 7:!2ff.의 나단의 예언에 근거하고 있다.
삼하.7:12ff.에서는 다윗 집에서 하나님의 아들0이라 일컬어지는 자가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을 것이라 예언되어 있다.
예수님은 바로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그 집’을 일으키셨다.
그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곧 하나님 나라이다.
그 나라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그 백성들에게 중재하고 계신다.
B.새 율법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이 변역되어야 함을 말한다.(히.7:12ff.) 왜냐하면 율법은 제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새롭고 더 나은 제사를 드렸으면 엤 언약 하의 율법도 무효한 것이다.(히.7:18)
그리스도의 더 나은 제사로 말미암아 옛 언약 하의 율법과 같지 않은 즉, 돌비에 새긴 법이 아니라 새 언약 하에서의 법이
이제는 마음에 새겨지게 되었다.(렘.31:31--34) 구약의 율법이 그 효과 면에서 연약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율법의 목적은 그 자체가 폐하여진 것이 아니다. 율법이 주어진 그 본래의 선한 의도가 온전히 성취되는 것으로서
새 율법을 말한다. 엄밀히 말해서 율법은 하나뿐이다.(연속성)
그러나 율법의 수행을 가능케하는 그릇은 다른 것이다.(불연속성)
C.새 직분
그리스도께서 아로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셨다면 아론의 반차는 폐지된 것을 의미한다.
즉, 아론 계열의 제사장직으로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새 언약의 도래 앞에 이제 무능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 것이 이르게 되자 옛 것은 이제 뒤로 물러가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아론의 반차를 통하여서는 가능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놓으신 반차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먼저
앞서가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벧전.2:5--9)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VIII. 끝맺는 말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아론의 반차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반차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예레미야 31장에 예언된 새언약의 성취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새 언약은 새로운 반차의 도래로 말미암아 보증된 것이다. 옛 언약과 옛 질서는 그 도래를 끊임없이 기다려 왔다.
그러한 구속사적 개혁을 다윗이 먼저 노래하였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논증한다.
또한 저자는 그 개혁자의 모습을 고대 한 제사장-왕이었던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멜기세덱이라는 모델이 지향하는 참 개혁자 의식을 예수님께서 먼저 깊이 인식하고 계셨다.
우리는 그분이 가져오신 새로운 언약 질서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히브리서 7장의 멜기세덱 논증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으며 구약에서부터 멜기세덱이 지향하는 인물을
기다려왔던 것이 예수님 안에 구체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대속적인 사역으로 실제화된 것을 히브리서 저자가 당시
독자들의 상황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의 믿음은 초대 공동체의 독창적인 산물이 결코 아니며 하나님의
구속 경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선포와 사역에 있어 기본적인 맥락을 형성하는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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