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시대의 문학과 철학
1. 헬레니즘 시대의 문학 헬레니즘 시대의 문학에 특이한 것은 문학의 전경에 확장된 세계 이해에 해당하는 내용과 형식과 전승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리스인들은 확장된 새로운 세계의 지평 속에서 동방의 이야기들과 주제 그리고 세계경험들을 그들의 문학적인 창작의 대상으로 가져왔다. 이 시대에는 시, 역사서, 전기와 아레탈로지, 소설 등이 새로 형성된 주요 문학 장르였다. 1) 서사시 고전 비극의 전승이 헬레니즘 시대에도 계승되었다. 특히 프톨레미 왕가가 그것을 주도했다. 프톨레미 이세인 필아델포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드라마 경연을 개최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적인 서사시들의 영향은 적었다. 그리고 오십여 개로 알려진 비극서사시 가운데서 통틀어 몇 개의 조각이 그것도 총 십여 줄로만 남아있다. 이 비극을 한때 지도적인 도시였던 아테네가 왕국분할 시대에 새 희극을 통하여 계승한다.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시인은 메난더(BC 342-293 혹은 291)이다. 그의 희극은 오로지 개성적인 인간을 다룬다. 주제와 줄거리는 사회의 중하 층에서 취한다: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가진 시민과 그의 부인과 딸들, 수공업자, 농부, 노예와 여행객들. 그들은 개인적이고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가난과 사악으로 위협받는 사회 상황의 역경과 싸운다. 자신의 삶을 확고하게 하기 위한 이익 추구와 돈 혹은 조그마한 수유가 이러한 사람들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메난더는 참되고 진실한 인간됨의 최후의 것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고전 비극의 계승이나 새로운 희극도 오락적인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요구에 흉내내기가 부응했다. 이 흉내내기가 헬라-로마 시대에는 모든 무대를 점령했다. 시문학은 주전 3세기 이래로 알렉산드리아에서 프톨레미 2세인 필아델포스의 후원으로 새로운 도약을 한다. 가장 유명한 시인은 칼리마코스였다. 그의 시 가운데서 유일하게 보존된 것은 찬양시이다. 이 찬양시는 제의와는 상관이 없고 이 시에서 신화적 전승이 사용된다. 이 시는 신화적 전승을 합리적인 의미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재미있는 예술의 놀이로서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때로는 프톨레미가의 통치자에 대한 풍자도 나온다. 그에게 그의 신성이 증명된다. 그렇지만 왕을 신으로 믿는 믿음에 대해서는 단 한번의 표현도 없다. 그것은 공손한 예술적 표현이다. 옛날의 제의나 신들에 대한 신앙은 죽었다. 그러나 신화는 헤시오드나 호머적 찬양시의 전통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임을 통해 새롭게 활기를 띈다. 이러한 시문학은 로마시대의 시인 오빗과 버질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 2) 역사서 헬라시대의 시작은 역사서를 위한 개막이었다. 많은 사건과 풍부한 자료를 통하여 보편사, 국지사, 자서전, 단편 등의 역사서가 많이 집필되었다. 이때에 집필된 헬라적인 역사서들은 많은 부분이 잘 보존되어 우리에게 전해졌다. 특히 유대적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작품들은 온전하게 전해졌다. 그의 유대전쟁사는 신약의 유대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필독서가 된다. 이 시대에 대표적인 역사가는 폴리비우스(BC 200-129 혹은 120)이다. 그는 칼타고 등 여러 원정에 참여했고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함대 탐험도 했다. 그는 사건에 적극 참여한 역사가의 시각에 따라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편집했다: 자신의 경험, 참여자들의 질문, 문서적인 발표들, 정치가의 말씀과 편지들, 증명서들과 이 관점에서 비평적으로 정선된 옛 역사가들의 자료들을. 그의 역사서 집필의 목적은 실용적이고 비판적인 역사서술을 통한 진리의 발견이었다. 폴리비우스와 견줄 수 있는 역사가는 아무도 없다. 그의 역사편찬을 승계한 사람은 포세이도니우스이다. 그도 자료를 평가하는데 비평적이지 못했고 역사적 원인을 평가하는데 분명한 기준을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포세이도니우스가 그의 방대한 책에서 최소한 “역사” 쓰기를 시도했다면, 헬레니즘 시대의 다른 역사가들은 우선 수집가와 편집가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그들의 책에서 많은 가치 있는 보도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헬레니즘 시대의 역사가들 가운데 다마스커스의 니콜라우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헤롯 대왕의 궁중 역사가로서 144권으로 된 세계사를 서술했다. 이 책을 요셉푸스가 참조하여 유대전쟁사를 기록했다. 밀레의 알렉산더 폴리히스토는 편집가인데 동방의 여러 민족들에 대한 자료들을 수많은 책들 속에 수집했다. 3) 전기와 아레탈로지 문학 장르로서 전기는 동방 국가들에서 발생했다. 그것의 발생을 위한 토양은 군주적인 국가형태였다. 이러한 국가에서는, 특히 이집트에서는 통치자의 전기와 고위 관리와 귀족들의 전기가 옛날부터 발전되었었다. 반면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기가 없었다. 그리스에도 그 이전에 호머의 서사시나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이 있었으나 그것들은 엄격한 의미에서 전기는 아니었다. 이 시대에 그리스적인 공동체의 정치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구조는 탁월한 인물의 삶과 운명에 대하여 하등의 관심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문학 장르가 그리스에서는 동방의 지배자의 전기가 자라난 동기와는 아주 다른 동기에서 헬레니즘 시대에로 진입하는 시기에 나타나게 되었다. 전기 형성의 동기는 유명한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삶에 대한 관심이었다. 사람들은 현자의 올바른 삶에 대한 모범적인 상을 구하느라고 그들의 작품과 삶과의 관계에 대하여 알고자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아리스토세노스가 전기작가로서 유명한데 그는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의 전기를 집필했다. 헬레니즘 초기에야 비로소 통치자의 전기가 등장했다. 로마황제 시대에 헬레니즘적인 모형에 종속된 새로운 문학 장르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아레탈로지이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전기적인 관심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나 개인에 관한 그리스적인 견해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원래 찬양적인 제의 노래에서 신의 위대한 행위에 대한 제의적인 열거가 중요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개막 이래로 신에 대한 그러한 찬양을 돌에 새겨 신전에 세워놓기 시작했다. 더 이상 과거의 신화론적인 신들의 행위들이 아니라 현재에서 그들의 기적 행위들에 대한 산문적 설명이 거기에 포함되었다. 이러한 표기들이 다양한 제의들에 의해 전파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공공연하게 강연되었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에게는 특별한 인간적인 재능이 근본적으로 신적인 능력과 다른 종류는 아니었다. 그래서 인간의 신적인 성품과 놀라운 행위는 신들의 행위들과 동일한 형식으로 찬양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레탈로지는 헬레니즘에서 전기와 매우 가깝고, 신의 아레탈로지가 아니라 신적인 인간의 아레탈로지가 다루어지는 한에 있어서는 전기와 동일했다. 그래서 전기들은 무비판적으로 기적사화들을 그들의 묘사에 포함시켰다. 전기는 이미 초기에 이렇게 아레탈로지의 요소들과 혼합되었다. 이러한 문학적인 장르가 공관복음서에 영향을 미쳤다. 일단의 학자들은 마가복음서를 예수에 관한 아레탈로지적인 전기 혹은 예수 아레탈로지로 본다. 4) 소설 헬라 소설은 주전 2세기에 시작되어 후기 로마 황제 시대에도 계속된다. 소설은 헬라시대의 인간 이해의 전형적인 문학적 표현으로 이해된다. 소설은 새로운 문학적인 단위와 결합한다. 그것은 알렉산더의 동방정복을 통하여 확장된 지리적 지평을 계산한다. 그러나 줄거리의 중심에는 개별 인간의 삶이 자리한다. 그리고 소설은 이 사람과 그에게 적대적으로 서있는 운명을 화해시킨다. 그래서 “해피엔딩”이 된다. 이 소설에 헬라시대에 나타났던 모든 장르들이 나타난다. 자서전에서 기적적인 출생의 묘사와 영웅의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태도의 서술 등을 따온다. 아레탈로지, 인류학, 동물학, 약학 등에서 소설은 수많은 요소들을 취한다: 기적, 이율배반, 악령들, 민족들, 신전, 지구의 균열, 신과 여신으로 여겨지는 영웅들 등등. 유명한 소설가는 니노스와 이암불루스 등이다. 니노스의 소설은 연애 소설이다. 이암불루스의 소설 “태양의 국가”는 여행 모험 소설이다. 니노스의 소설은 파편만 남아있기 때문에 전체 묘사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 반면에 남아 있는 이암불루스의 소설에서 주된 관심이 무엇인가를 포착할 수 있다. 주인공이 남해의 비밀이 가득한 섬에 있는 에티오피아로 모험적인 여행을 떠난 후 오랜 후에 인도를 거쳐 되돌아온다. 소설의 핵심은 이상향이다. 여러 해를 주인공은 남해 섬의 행복한 주민들로 된 이상적인 국가에 참여하도록 허락된다. 그곳에서는 태양이 숭배되고 여성 공동체가 지배하며 모든 시민들이 공정하게 그리고 동등하게 가장 영광스럽고 해볼만한 일에 참여한다. 처음으로 연애와 여행모험의 두 동기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소아시아의 아프로디시아스에서 온 샤리톤의 소설 “샤이레아스와 칼리로호”에서 이다. 2.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정치 사회적 발전과 병행하여 상부 시민 계층의 올바른 삶의 형태에 관한 물음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더 이상 도시가 아니라, 세상, 우주가 사유와 의식의 지평이 되었다. “자유”와 “법”은 더 이상 자치적인 도시에 사는 시민의 자유와 법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 안에서 개인의 위치를 말한다. “자유”는 느낄 수 있는 세상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내적 자유인 것이다. “법”은 개별적인 인간에게 내재하는 세계법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개념은 구체적인 정치적 기능과 의미를 상실한다. 사회정치적 상황에 대한 기피와 세계동포주의적인 성향이 철학 안에 침전되었다. 인간은 자신을 자연과 우주 속에서 이해하려고 하였으며 동시에 철학은 우주의 법이 곧 인간의 법이라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 시대의 철학학파는 다음의 네 개가 대표적이다: ① 풀라톤 학파, ② 소요학파, ③ 스토아 학파, ④ 에피큐로스 학파 1) 풀라톤 학파 풀라톤 학파의 창시자는 풀라톤(주전 427-347)이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서 그 밑에서 약 8년간 공부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그리고 오랜 편력의 시대를 지난 후 풀라톤은 주전 386년 아테네에서 그의 대학교인 아카데미아 학원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주전 367년에 철인 군주의 이상을 디오니시우스 2세에게 실현해보고자 하였으나 승낙을 얻지 못했다. 결국 풀라톤은 실천적인 공무로부터 손을 떼고 남은 생애를 모든 주요 철학분야에 관한 저술활동에 바쳤다. 고대 아카데미에서 풀라톤의 죽음 후에 그의 우주론적이고 신학적인 가르침에 대한 마무리 작업을 했다. 풀라톤의 제자 쎄노크라테스와 스페이시포스가 풀라톤적인 체계를 만들었다. 고대 아카데미의 가르침에 의하면 “데모놀로지”가 중요하다. 풀라톤 자신은 이미 “데몬”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피력했다. 데몬들은 신들의 위치에서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출 수 있는 중간적인 존재였다. 그는 데몬들의 등급을 천상에 있는 데몬, 공기에 있는 데몬, 영과 혼의 영역에서 역사하는 데몬 등으로 나누었다. 그의 제자 쎄노크라테스가 이러한 개념에다가 좋고 나쁜 데몬의 구별을 집어넣었다. 나쁜 데몬(-> 귀신)이 이 지상 세계에서 설치고 돌아다닌다. 그리하여 민속신앙 안에 존재하던 관념이 철학적으로 정당화되었고 후대의 확산에 기여하게 되었다. 로마시대의 플루타크와 신피타고레스 학파와 같은 풀라톤주의자들은 그들의 사상의 중심에 이 데몬론을 세웠다. 기독교인들도 이 견해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때 신들과 데몬 사이의 구별을 상대화한 쎄노크라테스의 가르침에 직접 결합하였고 그것을 다양하게 사용했다. 이러한 데몬론으로부터 우주론과 인간론에서 이원론적인 사상이 발전한다. 포세이도니우스는 우주론에서 두 세계로 나눈다: 달 위에 있는 변하지 않고 영원한 천상적인 세계와 달 아래에 있는 변하고 없어질 세계. 인간론에서 그는 인간을 삼분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와 영혼과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원론이 관념세계와 감각세계의 이원론적인 구분으로 나아간다. 관념세계(원형)와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세계(모형)는 병행한다. 풀라톤 학파는 관념적인 생활을 지향하고 세속적인 성향을 갖지 않음으로써 관념론을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사상들이 많은 지식인들과 유대인 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그러한 사상들 가운데서 풀라톤으로부터 시작한 “이 세상은 하늘 위에 있는 원형의 모형”이라는 사상은 헬라주의적 회당과 초기 기독교 안에서 성서적 창조신앙과 결합하게 되었다. 2) 소요학파 소요학파의 창시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이다. 그는 약 20년 동안 풀라톤에게서 배운 풀라톤의 제자로서 알렉산더 대왕의 가정교사를 했다. 알렉산더가 대왕이 된 후 그는 풀라톤주의자들과 관계를 끊고 주전 335년 그 자신의 학파인 소요학파를 창설하였다. 이 학파가 소요학파로 불리어진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이 그늘진 숲길을 따라 산보하면서 철학적 쟁점들을 강의하고 토론한 관례 때문이었다. 소요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과 같이 경험적인 학문을 중시하였다. 그들의 철학은 여섯 가지 중심적인 진술들을 포함하고 있는 체계를 토대로 한다: “신”은 우주의 부동의 제일동인이다. “이러한 우주”는 영원하며, “인간”의 세상은 신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 우주적 진행의 이상은 순환이며, 풀라톤의 “관념론”은 반박되었다. 정신론에서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발견되는 긴장이 시종일관되고 있다: 영혼은 비육체적, 신적인 것으로 - 또는 지상적인 물질로서 육체에 결합된 것으로 - 여겨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소요학파의 “윤리”는 덕을 항상 두 가지 가능한 극단의 중간으로서, 예를 들어 용기를 겁 많음과 만용의 중간으로서, 관대함을 탐욕과 낭비벽의 중간으로서 이해한다. 신약성서의 가훈목록이 이것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도 전체적으로 관념에만 머문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하는 소요학파의 영향력은 중세에 매우 미미했다. 3) 스토아 학파 스토아 학파는 에피큐로스 학파에 대항하는 입장이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의미하는 것을 거부하고 온전한 윤리적인 삶을 재창건 하였다. 이 학파의 창시자는 제논이다. 그는 주전 336-264년 동안 살았다. 그는 동방의 셈족 출신으로 주전 317년경 아테네에 와서 스토아 호이킬레라는 곳에서 학교를 창설하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가르쳤다. 스토아라는 명칭은 스토아 호이킬레에서 기원했다. 제논은 고독하고 진지해서 아테네 청년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 이후 크리시포스가 스토아 학파를 지도하면서 스토아 사상의 체계를 완성하였고 아테네 학계에 군림하게 되었다. 이 학파는 파나이티오스에 의해서 로마에까지 전파되었다. 로마에서는 대체로 통속적이고 절충적인 도덕성으로 변질되었으나 인기가 있었다. 네로 황제를 시중하였던 세네카, 노예 출신이었던 에픽테투스와 황제였던 아우렐리우스 등이 스토아 사상에 심취하였다. 이 학파는 우선 온 세계를 커다란 통일성으로 본다. 그러면서 유물론적인 입장을 취한다. 모든 것, 인간의 영혼이나 힘, 사물의 성질, 정력까지도 물체이다. 이 모든 물체는 물질과 힘으로 양분되면서도 하나인데 물질 자체는 아무런 성질이 없으나 거기에 힘이 가해져서 운동함으로써 여러 가지 성질을 나타낸다. 이 힘의 근원을 로고스라 하였다. 그리고 만물의 근원의 원소는 불이라고 하였고, 이 불이 곧 신이요, 로고스라는 것이다. 이 학파의 형이상학은 범신론적인 색채를 띠었다. 그들에 의하면 신과 자연은 하나이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철학이 윤리적 자연주의와 밀접하게 결합된다. 경건은 지식과 동일시되고 종교적 순종은 보편적 자연법과 동일시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신의 본질적 성격과 자연 세계를 구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종교를 철학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비록 그들이 신에 대한 숭배의 매개물로서 다신론적인 정령들에 의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부단히 유일신론적 학설을 고수하였으며 (우주의 창조자이자 유지자로서) 유일한 지고의 보편적 신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그들의 도덕철학의 토대로 삼았다. 그들은 윤리철학을 중요시했다. 그들의 윤리철학에 의하면 철학과 인생의 목적은 덕을 갖는 데 있다. 인간은 자연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며 살 때에 덕의 극치에 이른다. 유덕한 사람이 현자이고 덕만이 행복을 갖고 온다. 그들이 중요한 덕으로 꼽고 있는 네 가지 덕목은 “명상”, “용기”, “절제”, “정의”이다. “명상” 대신에 “불굴”이 꼽히기도 한다. 이러한 개개의 덕은 그와 반대되는 단 하나의 부덕만을 갖는다. 참다운 덕을 갖지 못한 사람은 그 누구라도 도덕적으로 악이나 부덕의 상태에 빠져있게 된다. 덕으로부터 부덕으로 침몰하는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돌발적인 일이다. 지혜를 얻음으로써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덕 있는 사람임을 확신할 수 있다. 이렇게 스토아 학파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완전성이며 이 완전성이야말로 행복의 필요조건이 된다. 반면에 불완전성은 어쩔 수 없이 불행으로 낙착된다. 모든 인간은 덧없는 죽어있는 자와 같은 사람으로서 지혜를 결하고 있고 그리하여 행복을 놓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연에 맞추어 살면서 참된 자유를 발견하고 내적인 독립과 행복을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노력을 통하여 덕을 얻음에 따라서 행복해지고 더욱 더 거룩해지며 신을 닮아간다. 그래서 탁월한 덕의 소유자는 행복의 향유에 있어서 신과 비등하게 된다. 신약과의 관계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 학파의 일원인 포세이도니우스가 “신은 프뉴마다”라고 주장한 점이다. 그의 말은 요한복음의 “하나님은 프뉴마(영)이시다”와 유사하다. 또 신이 만물의 창조자와 유지자라는 스토아 학파의 개념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롬 11:36과 거의 같다. 4) 에피큐로스 학파 에피큐로스 학파의 창시자는 에피큐로스이다. 그는 사모스섬 출신으로 주전 341-270 사이에 살았다. 그는 병약하였고, 정치적으로 추방당하여 망명생활도 했다. 주전 310년 그의 제자들이 아테네에 집과 정원을 마련해주어서 여생을 거기서 보냈다. 그는 여기에 정원학교를 세워 더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성격이 좋았고, 그의 사상은 실용을 위주로 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그의 사상을 알리기만 하였다. 오랜 후에 로마의 시인 유크레티우스는 에피큐로스가 마음에 들어 굉장한 서사시를 지어 바쳤다. 이 학파는 자기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것을 중요시하여 “사람들이 자기 생활을 향유하며 사는 것이 최고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조용히 사는 것, 즉 자연을 즐기며 사는 것이 최고라고 하며 공적인 삶에서 물러났다. 이 학파는 이렇게 즐김, 쾌락을 중요시하면서 수신치세의 윤리학을 가르쳤다. 그들은 쾌락을 선으로 보았고, 고통을 악으로 보았다. 사람은 쾌락과 고통을 비교하여 쾌락을 선택함으로써 영속적인 쾌락을 취할 수 있다. 현명한 사람은 어떤 쾌락을 누리더라도 부작용에 빠지지 않는다. 이러한 쾌락은 일시적인 환락에 빠져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영광을 제외함으로써 생기는 불만이 없는 생활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마음을 동요시키는 적극적인 쾌락을 취하는 것보다도 마음에 안정을 취해서 무욕의 상태에서 소극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좋다. 그들은 외적인 변동이나 내적인 감정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생활이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육체적인 쾌락은 진정하지 못하고, 정신적인 쾌락만이 진정하다고 보았다. 육체적인 쾌락은 다만 존재가 있으므로 일시적이나 정신적인 쾌락은 과거와 미래에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강도가 강하다. 이 학파는 명성을 바라지 않았다. 감각적인 충동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노력하였고 모범적이고 순결한 절제 있는 생활을 하였다. 이 학파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이었고, 의무가 결여된 편이었다. 그리고 복잡한 정치사상을 떠나 은자의 생활을 찬양하였다. 그들은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들이 인간생활에 개입함을 기대하지 않았고 인간이 신들을 숭배하거나 그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자연법에 따라 발생한다. 세상은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물질세계를 벗어난 피안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학파는 일반문화와 철학에 영향을 많이 주었으나 초기 기독교를 위해서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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