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카타리나 수도원(Saint Catherine`s Monastery)
십계명을 받는 모세
수도원 앞쪽 길에서는 수도원 요새만 보인다. 맞은편 바위쪽으로 올라가면 수도원 안을 바라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시나이 산쪽(북쪽)으로 오르는 돌계단 길에서 바라본 카타리나 수도원
성곽이 지어지던 비잔틴 시대의 다양한 십자가들을 볼 수 있다.
모세의 우물. 이곳에서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 이트로(르우엘)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여 주었다.
모세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화
수도자들의 독방과 다른 구조물들은 요새화된 성벽의 안쪽 면을 따라 지어져 있다. 울퉁불퉁하고 경사진 바닥은 단단한 아치와 통모양의 둥근 천장 구조물로 평탄하게 되었고 그 위에는 수도자들의 숙소와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한옥처럼 되어 있는 부분은 외부 손님들이 왔을 때 머무르는 방이다.
양철지붕처럼 되어 있는 곳이 수도원 성당(바실리카)이며 오른쪽에는 성당 종탑과 이슬람 첨탑이 함께 있다.
수도원 도서관, 복도처럼 길게 나 있는 방이 있는 곳이 수도원 도서관
수도원 도서관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수도원 도서관
<수도원 성당- 바실리카>
성당 출입문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현관 입구에서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6세기에 레바논 향백나무로 만든 아름답게 새겨진 출입문을 볼 수 있다. 현관 입구는 11세기 십자군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성당 출입문
성당 출입문 부조
성당 출입문 부조
성당
성당
성당
수도원 본당(Catholicon)
당시 육중한 화강암 덩어리를 사용하여 지었는데 넓은 홀이 딸린 3개의 측랑으로 이루어진 바실리카였다. 길이 40m, 폭 19.20m로 뒤쪽 제단 후진에 불타는 가시덤불 경당, 성야고보에게 봉헌한 경당과 시나이의 거룩한 교부들에게 봉헌한 경당들을 포함하고 있다. 본당의 회중석(naos)은 길이가 25m, 폭 12m이다. 회중석은 이음매가 없는 통으로 된 녹색으로 칠해진 화강암 6개 기둥이 있는 두 개의 줄로 3개의 회중석으로 나누어져 있다. 에프램 부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12 기둥은 1년의 매 월을 상징하였다. 각 기둥에는 해당하는 달에 기념하는 성인들의 축일에 상응하는 성인들의 성상으로 덮여 있었다. 기둥의 작은 구멍에는 성인들의 성유물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수도자들은 몸을 숙여 차례대로 각 기둥에 입 맞춘다. 각 기둥의 기둥머리는 십자가, 어린양, 식물과 과일 등의 주제로 각기 다르게 장식하고 있다.
바실리카(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위쪽에 있는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성당내부
그리스도의 변모’ 모자이크
바실리카 안의 제대 후진(apse)에는 6세기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변모’ 모자이크가 있다. 예수님의 양 옆으로는 시나이 산의 두 중심인물인 모세가 예수님의 왼쪽에 그리고 오른쪽에는 엘리야 예언자를 배치하였고 그 아래쪽으로는 무아경에 빠진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 서로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위 둥근 반원 아래쪽 가운데 중심에는 다윗 왕을 배치하고 그 양쪽으로는 16명의 예언자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위쪽 라인에는 12 사도들이 그려져 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린 그림 안에는 그리스어로 각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2사도에는 배반자 유다가 빠지고 그 자리에는 바오로와 타대오 그리고 마티아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변모’ 모자이크
‘하느님의 영광에 빛’(2코린 4,6; 히브 1,3)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변모 모자이크는 예수님의 뒤쪽 배경을 아몬드(편도나무) 모양으로 배치하였다. 예수님이나 성모님의 주위를 아몬드 모양으로 처리하는 성화 기법은 아몬드 꽃이 겨울이 끝나기도 전인 이른 봄에 피어나듯이 마치 죽어 있는 듯한 나무에서 피어나는 아몬드 꽃은 부활을 상징하는 꽃이며 하느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고 말 것이라는 약속의 표징으로서 사용되었다(예레 1,11 참조). 아몬드는 안쪽은 조금 더 짙은 검은색 원형 아몬드에서 밖으로 향하면서 엷은 색으로 처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초자연적인 빛이 발산되는 것처럼 느끼게 하였다.
성녀 카타리나의 성유골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바실리카 안 제단 이콘(iconostasis) 뒤쪽에는 성녀 카타리나의 성유골이 담긴 하얀 대리석 관이 하나 놓여 있다. 성녀의 성유물은 이른 시기 이래도 대리석 궤에 보관되어 왔다. 이 유골함은 1231년의 순례기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그 후 1688년 러시아 왕족이 은궤를 보내왔는데 은궤에는 러시아 황제가 보낸 선물이라고 키릴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유물은 오래된 대리석 궤에 계속 모셔져 왔다
종탑
오늘날의 종탑은 1871년에 지어졌다. 9개의 종은 러시아 황제가 보낸 선물이며 주일과 축일에 울려진다. 반면 나무로 만들어진 세만트론(semantron)은 저녁기도와 아침 기도 때 울려진다. 프레스코발디는 수도원 경내에 일례가 없는 회교 사원이 1381년경에 수도원에서 봉사하는 베두인 무슬림들을 위하여 건설된 것을 언급한다. 이슬람 사원의 첨탑(minaret)은 대성당(basilica)의 그리스도교 종탑과 나란히 서 있다. 전승에 따르면 이슬람교도들의 손에서 살아남은 수도자들은 수도원 경내에 작은 이슬람교 사원을 세워서 그들을 회유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수도원의 안전을 보장해준 마호메트에게 감사하기 위해 첨탑을 지었다고도 하는데 어쩌면 이슬람으로 개종한 수도원을 돕고 있는 베두인들을 위한 작은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수도원 안에 이슬람 사원이 지어졌지만 이 사원은 메카를 향하여 지어지지도 않았고 사용된 적도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교 성당 종탑과 이슬람 첨탑이 수도원 안에 함께 있는곳은 이곳 카타리나 수도원이 유일한 곳이다.
그리스도교 성당 종탑과 이슬람 첨탑
그리스도교 성당 종탑과 이슬람 첨탑
시나이 산에 오르면서 만나게 되는 베두인들은 카타리나 수도원을 위해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들이다. 불타는 떨기나무 성당에 대성당과 요새를 짓게 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루마니아와 이집트 지역에서 200 가정을 뽑아 수도자들을 보호하고 수도원을 돕도록 하였다. 비록 이슬람의 출현으로 모두 그리스도교를 포기했지만 그들은 수도원을 떠나지 않고 그들의 자리에서 그들의 역할을 오늘날까지 충실히 해 오고 있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신자들이지만 거룩한 산의 예언자 모세를 숭배하고 있고 조르지오 성인과 카타리나 성녀를 공경하고 있다. 이들은 4개의 씨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씨족은 수도원에서 인가된 각자의 족장이 있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의 수도원 보호문서
7세기에 접어들어 시나이의 수도원들은 아랍 정복자들에 의하여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한때 수천 명의 은수자들이 살았던 시나이 반도에는 30여명으로 줄어들었고 희망의 불빛이 꺼져버린 시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유스티아누스 요새와 성당, 성유물과 값진 이콘들 그리고 필사본들은 이러한 고난의 시기를 견디어 냈다.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고 시나이 반도의 수도원들을 휩쓸고 간 격변의 시기에 시나이 수도원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전승에 의하면 수도원장은 마호메트(Muhammad)에게 시나이에 살고 있는 은수자들과 그리스도인 그리고 유대인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 하였다. 이 요구는 기꺼이 받아들여졌고 마호메트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시나이의 수도원들을 보호할 것을 지시하였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도서관에는 마호메트(Muhammad)가 시나이 반도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하고 있을 때 마호메트로부터 받은 두 손바닥으로 날인한 문서 위에 그의 조카 아부 탈립(Abu Talib)이 622년에 서명한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이 문서 덕분에 수도원은 무슬림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었다. 이 문서는 20세기의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요인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의 신빙성을 주장한 반면 다른 이들, 특별히 다수의 아랍인들은 900년 이후의 것으로 보았다. 여하튼 역사가 아만토스(K.Amantos)가 제안하는 것처럼 시나이 수도원은 마호메트와 그의 후계자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집트의 이슬람 통치자들이 수많은 법령으로 그리스도교 수도원을 보호하도록 확증해 주었던 것은 마호메트 자신이 시나이의 보호를 지시했다는 사실로부터 가능한 일이었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술탄 셀림 1세(Sultan Selim I)가 1517년에 이집트와 시나이를 정복했을 때도 이 마호메트의 문서는 효력을 발휘 하였다. 터키의 술탄들 특별히 셀림 1세(Selim I)와 슐레이만 대제(Suleiman the Magnificent)는 종종 관대한 법령들을 공포하여 수도원에게 관례에 따른 의무들을 관면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 마호메트의 손도장이 찍힌 문서의 사본은 수도원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성녀 카타리나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성녀 카타리나(St.Catherine)는 310년경에 활동한 알렉산드리아의 동정 순교자이며 축일은 11월 25일이다. 상류 가문에서 태어나 학식 있는 카타리나는 철학과 수사학 · 시 · 음악 · 자연과학 · 수학 · 천문학과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뛰어난 학문 그리고 고귀한 성격은 그녀가 천상 신부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막지 못했고 그녀는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게 된다. 4세기 초에 막시미누스(Maximinus, 308-313 재위)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할 때, 카타리나는 우상을 숭배하는 황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다. 황제는 카타리나를 설득하기 위하여 50명의 학자들을 보내 그녀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신앙을 반박하였지만 오히려 이방인 철학자들은 황제의 많은 지인들과 함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황제는 이러한 노력들이 헛수고임을 깨닫고 카타리나에게 고문을 하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대못을 박은 바퀴를 만들어 카타리나를 고문하였지만 카타리나는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고 오히려 구경꾼들이 바퀴에서 튕겨 나온 못에 의하여 죽었다고 한다. 온갖 고문으로도 카타리나의 신앙을 바꾸지는 못하자 마침내 참수하고 만다. 카타리나의 목에서는 하얀 피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카타리나의 시신은 천사들에 의하여 시나이 산의 최고봉으로 옮겨졌다. 5세기가 지난 9세기 초에 시나이 산에서 수행하던 어느 수도자가 환시에 빛에 싸인 채 천사에 의해 성녀의 시신이 시나이 산 정상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수도자는 다음 날 산 정상에서 성녀의 시신을 발견하였고 시신은 수도원에 안치되게 된다. 시나이는 성녀 카타리나의 명성과 공경이 전파되면서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시메온 메타프라스테스(Symeon Metaphrastes)는 10세기에 성녀의 삶을 일반 신자들에게 알리는 대단한 공헌을 하였는데 “위대한 순교자의 순교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를 거둔 성녀 카타리나”라는 성인전을 기록하였다. 시메온은 중세 그리스어로 성인들의 삶을 담은 성인전을 10권으로 저술하였다. 시메온이 성녀의 성유물 일부를 프랑스로 옮겨 가면서 이 후 성녀의 시신이 발견된 산은 ‘카타리나 산’이라고 명명 되었고, 불타는 떨기나무 수도원 또는 거룩한 변모 수도원이라고 불리던 수도원은 9세기경부터 ‘성 카타리나 수도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10세기경부터 동방 교회 뿐만 아니라 서방교회에서도 가장 높이 공경 받는 성인 중의 한명이 되었다. 값진 선물들이 수도원으로 보내져 왔고 많은 토지들이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의해 기증되었다. 안젤리코(Fra Angelico), 코렛찌오(Correggio), 루벤(Rubens), 티씨안(Titian)과 무릴로(Murillo)와 같은 거장들에 의해서 성녀 카타리나는 그녀의 생애에서부터 순교에 이르기까지 캔버스 세계에서 불멸하게 되었다. 성녀의 공경과 초상화는 마찬가지로 동방으로 전파되었다. 성화에서 성녀는 왕실의 복장을 하고 화관을 쓰고 지혜와 순교를 암시하는 깃펜, 지구의, 책들 그리고 대못이 박힌 수레와 같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녀 카타리나의 일생과 순교의 장면을 함께 그린 17세기의 이콘
성녀의 수많은 이콘들 중에서 종종 이콘의 가장자리에 작게 성녀의 생애에서부터 순교까지 가장자리를 장식한 이콘들이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수도원에 잘 보관되어 있다.
수도원 도서관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은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도서관에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서관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 희랍어로 쓰여 있지만 히브리어, 아랍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이집트어 등 4500편의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다.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잔틴시대의 이콘들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번역 필사본을 갤러리에서 만나 볼 수 있다. 5세기경에 시리아어로 번역된 루카복음서 사본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번역 사본이다.
성 캐서린 수도원 도서관
성 캐서린 수도원 도서관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수도원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경이로운 발견은 4세기경에 쓰인 희랍어 성경인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이다. 전 세계에서 바티칸 사본 다음으로 중요한 필사본인 4세기경 희랍어로 쓰인 시나이 사본의 대부분은 유감스럽게도 현재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독일 성서학자 티센도르프(K.van Tischendorf)는 1844년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불태우려고(수도원 쪽에서는 꾸며낸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내 놓은 낡은 바구니 안에 129장의 양피지를 발견하였다. 유심히 살펴본 성서학자인 티센도르프는 이것이 희랍어로 쓰인 70인역 본 사본임을 알아차리고 이것을 자기가 보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자 수도자는 양피지의 가치를 즉각 알아차리고는 양피지 중 43장만을 주었다. 이것은 330-360년 사이에 희랍어로 쓰인 성경 필사본으로 오늘날 시나이 사본(Codex Sinaiticu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나이 사본은 바티칸사본(Codex Vaticanus)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이며 동시대에 쓰인 바티칸 사본과 함께 가장 귀중한 사본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구약성경의 70인역과 신약성경은 거의 모두 이 두 사본에서 번역된 것이다. 대략적으로 70인역(희랍어로 번역된 구약 성경)의 절반정도가 남아 있고, 신약성경은 전부와 바르나바 서간(Epistle of Barnabas)과 헤르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 일부가 발견 되었다. 카타리나 수도원에는 필사본을 공식적으로 빌려 간다고 1844년에 티센도르프가 직접 작성하고 서명한 문서가 남아 있다. 수도원으로부터 필사본을 선물 받은 것인지 아니면 대여해 간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는 것이다. 티센도르프가 처음 받은 43장의 필사본 내용은 역대기 상권, 예레미야서, 느헤미야서 그리고 에스터르기 일부로 티센도르프는 그것을 독일로 가져와 라이프찌히 대학(Leipzig University) 도서관에 기증하였고, 1846년 티센도르프는 그 내용을 ‘코덱스 프리데리코 아우구스타누스’(Codex Friderico Augustanus)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같은 묶음 중에서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남아 있는 사본은 이사야서 전권과 마카베오기 1권과 4권이다. 나머지 필사본을 찾기 위해 1853년 카타리나 수도원을 다시 찾았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1859년에 티센도르프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2세의 도움으로 필사본을 찾기 위해 3번째로 카타리나 수도원을 방문 하였다. 이 때 이미 알고 있는 나머지 86장의 필사본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347장의 완전한 양피지 필사본을 발견하게 된다. 수도원은 러시아 황제에게 이 시나이 사본을 대여 해 주기로 결정하고 티센도르프를 통해서 보내게 된다. 구소련 연방은 1933년에 이 시나이 사본을 대영박물관에 10만 파운드를 받고 팔았다. 시나이 사본은 현재 347장(199-구약, 148-신약)은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에, 12장과 14 조각은 시나이 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 43장은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 도서관에 그리고 3장의 조각들은 세인트 피터스버그(St. Petersburg)에 있는 러시아 국립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다. 2005년 6월 영국과 유럽, 이집트, 러시아와 미국의 전문가 팀이 4개의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필사본을 디지털 작업화 하기 위하여 구성 되었고 4년에 걸친 공동 작업 끝에 800 페이지로 합쳐지게 되었다. 시나이 사본은 다음 웹 사이트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이제는 온라인을 통해서 전 세계 학자들과 일반 독자들은 누구나 학문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http://www.codexsinaiticus.org 1975년에는 성 카타리나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수도원 복원 작업 도중 우연히 성 조르지오 경당 아래에서 수많은 양피지 조각들이 들어 있는 방을 발견했다. 이 조각들 중에는 시나이 사본의 12장과 11장의 모세오경 그리고 헤르마스의 목자 1장 있었다. 그리고 2009년 9월에는 박사 학위를 준비하기 위해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머무르고 있던 니콜라스 사리스(Nikolas Sarris)가 이전에 발견되지 않은 여호수아 1장 10절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 조각을 발견되기도 했다. 카타리나 수도원에 보관된 사본들은 1945년에 세운 수도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미국 의회 도서관과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지원으로 모두 마이크로 필름화 하였다.
시나이 사본 중 루카복음 11,2절
이콘 갤러리 (이하 출처- http://blog.daum.net/terrasanta/17464788)
동방교회에서는 8-9세기에 일어난 ‘성화상 논쟁’으로 수많은 이콘들이 철저하게 파괴 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 카타리나 수도원은 모진 풍랑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이고 정치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다. 제국의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시나이반도는 지리적인 특성상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 아닌 외진 장소였으며 더욱이 7세기 이후 비교적 타 종교에 관대했었던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정치적인 외풍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성화상 논쟁을 피한 초기 이콘들은 모두 36개로 잘 보관 될 수 있었다. 이콘 갤러리는 작은 규모이지만 수도원에 있는 2000여점의 이콘들 중에서 엄선된 것들이다. 이 이콘들은 비잔틴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15세기 동안을 아우르는 더없이 귀중한 문화적 유산을 담보하고 있는 것으로 그중에서 유일하고 중요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을 갤러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불타는 가시덤불 경당을 바라보고 왼쪽 2층에 작게 마련된 갤러리는 비록 입장료를 지불(수도자 무료) 하더라도 잠시 시간을 내어 둘러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갤러리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잔틴시대의 이콘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번역 사본인 5세기경에 시리아어로 쓰인 필사본과 전례 용품들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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