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성경 배열 순서와 그 의미는
구약성경은 연대기 순으로 기록되어있지 않은데 그 배열의 순서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답변 : 66권의 성경 순서는 전체적으로는 연대기를 우선하되, 내용별로 모았습니다.
성경을 둘로 나눌 때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눕니다. 두 말할 것 없이 연대순서가 성경 66권의 순서에서는 가장 큰 틀이라는 뜻입니다.
1. 구약을 먼저 살펴본다면
성경 기록 연대로 보나 그 성경 내용으로 볼 때,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모세 5경이 제일 먼저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모세 때까지를 기록한 다음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서, 그 이후 이어지는 시대가 '사사기'의 사사시대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서'는 사사기 이후의 이스라엘 왕정시대를 연대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사기' 다음에 '룻기'가 나오지만, 그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대신 룻1:1에서 '사사시대'에 발생한 기록이라고 했으므로 사사기 바로 뒤에 두었습니다. '역대서' 이후에 '에스라' '느헤미야'는 왕정시대 이후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역사들입니다. 이 역시 연대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다음의 '에스더'는 그 앞에 있는 '에스라' '느헤미야'보다 앞선 시대에 있었던 내용이지만 뒤에 기록된 이유를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경신학' 관련 서적을 참고한다면 그 중에서 참고할 만한 내용도 있겠지만, 성경 내용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 이외의 것은 저절로 들리는 상식이 아니면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 홈의 신학 상식은 기초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면이 많겠으나 이 홈의 기본 방향이 그렇다고 아시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욥기'부터 '아가'까지는 시적 내용으로 기록했고 그 연대가 명확하지 않거나 아니면 명확하다 해도 앞에 어느 연대 가운데 한 부분만 끼워넣을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모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 형식으로 기록한 예언서들 16권을 함께 모았습니다.
2. 신약의 경우
예수님이 오시므로 시작된 것이 신약이므로 예수님 오신 때부터 기록하고 있는 4복음서가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 승천 후 사도들의 활동을 기록한 사도행전이 그다음 나오고,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는 시대순서로 구분하기 곤란한 내용들입니다. 사도행전이 역사 순서로 되어 있는데 사도들이 활동하면서 편지 형태로 기록한 성경이고 또 연대를 구분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한 곳에 모았습니다.
특히 계시록을 마지막에 둔 것은, 마치 구약시대 마지막에 예언서를 두어 오실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기록했듯이 신약에도 그 마지막에 계시록을 두어 오실 예수님과 신약 전체의 전개 방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창세기는 기원에 관한 책으로서, 그 대상은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사람과 짐승, 죄와 구속, 축복과 저주, 사회와 문명, 결혼과 가정, 기술과 산업 등 실로 다양하다.그 뿐 아니라 이스라엘 신정정치(神政政治) 수립에 초석이 된 가나안 땅에 관한 언약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택하시어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지만, 그 목적은 그들을 통하여 이 땅의 모든 족속들을 축복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방대한 계획을 밝히는 과정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늘과 땅도 움직일 수 있는 우주의 지배자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인류를 축복하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진리(히 11:6)를 상기하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출애굽기의 주제는 한마디로 말해서 '구속' 이다.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택한 백성을 노예 상태로부터 구속하시고 그들 중에 임재하셔서, 결국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본서의 핵심이다. 성경의 구원 사상은 출애굽의 언약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과정을 통해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며, 동시에 그를 따르는 자들을 구원하는 자임을 계시하였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
출애굽기에는 최소한 몇 가지의 기본적인 신학사상이 깔려 있다.
첫째 하나님의 자기 계시
둘째 그의 속성
셋째 구속사상
넷째 그의 율법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 방법이다.
또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의 소명과 사역 등으로 다양하다. 하나님의 속성은 3, 6, 33-34장에 잘 나타나 잇으며, 그 초점은 '여호와' 라는 이름과 그의 영광의 임재에 있다. 또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그의 영광, 거룩함, 위엄, 능력에 견줄자가 없음(15:11)을 강조한다. 그리고 구속 신학의 핵심은 12, 24장에서 볼 수 있다. 유월절 양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취되었다(요 1:29;고전 5:7). 그리고 이 구속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것(2:24)으로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점차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3:15-17;6;2-8;19:3-8).또 '십계명'(20:22-23)을 통하여 성경적 윤리와 도덕의 기초를 확고히 하고, '언약의 책'(20:22-23:33)을 통하여 그 원리를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배학에 관한 사상으로 끝을 맺는다. 거기에서는 성막을 중심으로 한 모든 제도와 규율이 무소부재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강조되고 있다.
레위기
1. 하나님의 임재(臨在)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제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셨다. 레위기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부단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기본적인 사상이 흐르고 있다. 성막에는 성막뜰과 회막이 있었다. 회막은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안쪽 방은 지성소라고 불렀으며, 바깥쪽 방은 성소라고 불렀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놓여 있었다. 법궤의 윗 부분을 속죄소라 불렀으며, 바로 그 곳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장소인 시은좌(施恩座)였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성소에서 모세를 불러 명령하신 그 말씀을 기록한 책이 바로 레위기이다(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소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계신다. 심지어 평범한 일상 생할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타난신다.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배와 관심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지은 범죄는 하나님께서 직접 처리하셨다. 사람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 앞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는 결코 없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이 반복되는 이유는, 그들의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되어진다는 것을 일개워 주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21-24장), 성(性 18,20장), 이웃과의 관계(19,25장) 등이 그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관심이셨다. 레위기는 영원히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특별한 경우에 영광의 광채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분하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을 지켜 주시는 것과, 특별히 지성소의 법궤 위에 계시는 것을 구별한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미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다(고전 6:19-20). 레위기에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신다.
2. 성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레위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거룩, 정함, 부정함'이다. 성결의 근본 원리는 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로 온통 물들어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과 분리되기를 원하셨다. 성결에 대하여 레위기는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그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事役)이며, 또 한 가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만이 성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와 같은 의미이다.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이심을 자주 강조하셨다. 곧 구원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행위나 의지로 구원받을 수가 없다. 둘째로 사람이 해야 하는 부분은 율법대로 '순종'하는 일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성화(聖化;구원받은 사람이 거룩하게 되어 가는 단계)의 교리와 같은 의미이다. 일단 하나님께로부터 택함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성결하게 되어 간다.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3. 희생 제물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의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었지만 역시 많은 죄를 범했다. 이러한 백성이 어떻게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을까?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사 제도를 만들어 주셨다. 모든 희생 제물을 드리는 목적은 속죄와 봉헌을 위함이었다. 여기서 희생 제물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곧 희생 제물은 장차 오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에 대하여 미리 보여 주기 위한 예표(豫票)였다. 흠이 없는 짐승을 고른 다음에, 드리는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했다. 이것은 드리는 사람의 죄가 제물에게로 전가되는 것을 뜻했다. 그 다음에는, 드리는 사람이 손수 잡은 제물의 피를 제사장이 번제단 사면에 뿌렸다. " 단에 피를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제물의 피가 제단에 뿌려질 때 이로 말미암아 죄가 소멸되고 용서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 용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레위기의 희생 제물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심은 다시 반복하실 필요가 없는 죽임이었다. 또한 그 효력의 범위도 '온 세상'을 포괄한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1:1-2).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히 9:26).
민수기
1. 하나님의 성품
(1) 임재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계셨다.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고 계셨다고 여러번 언급하고 있다. 성막 위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성막이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임을 나타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갔고, 구름이 멈추는 곳에서 진을 쳤다(9:15-23).
(2)하나님의 거룩하심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도 나타낸다. 구름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죄인들에게 무서운 징계가 이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11:25, 33; 12:5, 10; 14:10; 16:19, 42;20:6). 이러한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오게된다.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은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오면 반드시 죽기 때문이었다(출 19:12-13). 그래서 성막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사장과 레위인이 성막 둘레에 진을 쳤다(1:49-3:10). 심지어 언약궤,금등잔 등 성소의 가장 거룩한 기구를 운반하는 고핫 자손의 레위 인도 직접 이것들을 볼 수 없었다. 제사장이 이것들을 보자기로 싸야 비로소 운반할 수 있었다(4:1-20).
(3)하나님의 자비하심
제사장과 레위 인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섣불리 나아오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3, 4, 16-18장). 하나님은 여러 번 모세의 중보 기도, 또는 제사장의 속죄 행위를 받으시고 심판을 철회하셨다(11:2; 12:13; 14:13-20; 21:7).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온 것도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체험했다. 단지 애굽을 나온 사람들 중 20세 이상의 사람들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14:16;출 32:13).
2. 약속의 땅
민수기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32:7, 9).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셨던 땅이었다(32:11; 14:16; 창 17:8; 26:3; 28:13). 가나안 땅을 정탐한 정탐꾼들의 불신앙은 매우 악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묻혀 있는 헤브론을 다녀왔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13:22-24;창13:14-18:1,23;35:27-29;50:13).
(2) 가나안 땅은 거룩한 땅이 되어야만 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시면 그 땅은 거룩하게 된다(35:3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의 거민을 모두 몰아내야만 했고, 그들의 산당과 우상을 파괴해야만 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땅에서 경배를 받으실 분이시다(33:51-52).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참으로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이다(13:27;14:8).
(3)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히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은 민수기에서보다는 창세기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창 13:15; 17:8). 그리고 이 사실은 희년에 대한 규정에서 암시되어 있다(레 25장). 또한 여성 상속자에 대한 규정에서 이 사실이 분명하게 타나난다.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36:9).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그 땅에서 혹시 쫓겨나게 될지리도 결국에는 그 땅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레 26:40-45; 신 30:1-10).
3. 하나님의 백성
민수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닮아야만 한다는 성경적 원리가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나 또는 전체로서 그들을 구속주,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야 하는데, 하나님이 한 분이시므로 이스라엘도 거룩해야만 한다(레 11:45)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 하나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민수기에서는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구 조사는(1, 26장)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곧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모두 한 조상 야곱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하나됨은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인구 조사는 전쟁에 나갈만한 사람을 열거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그리고 모든 지파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하기 위하여 정탐꾼을 1명씩 보냈고(13:2), 미디안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각 지파에서 1,000명씩 보냈다(31:4). 나중에 르우벤,갓,므낫세 반 지파가 트랜스요르단에 정착할 것을 요청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됨을 개뜨리는 심각한 위기였다. 결국 그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하기로 하고 나서야 트랜스요르단 정착이 허락되었다(32:1-33).
(2) 거룩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지 사람의 성품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거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거룩은 결국 사람의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근거한 것이다. '거룩'이라는 성품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을 깨뜨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다. 민수기에는 이러한 측면이 두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곧 불순종과 부정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민수기는 이것의 치료법을 다룬다. 이렇게 파괴된 거룩함을 회복하는 치료법 또는 구제법은 더러움이나 죄로 오염된 사람을 진영 밖에 격리시키는 것과 정결케 하는 물로 깨끗케 하는 것이다.
신명기
1. 전문(前文): 선지자의 본질과 기능
신명기는 '이는 모세가…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1:1)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대변자', 또한 '선지자'로서 모세의 역할을 지적하는 말이다. 선지자로서 모세는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에 들어갔으며, 인간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또한 최초의 선지자로서 그는 다음 세대에 나타날 선지자들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기본적인 지침을 확정하였다(참조. 13:21-5; 18:15-22). 그러나 모세의 선지자적 역할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맡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임있는 인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을 촉구하며, 그들이 언약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았을 때 뒤따를 결과에 대해 경고해야 했다.
2. 역사적 서언(序言) : 역사 신학
언약에 있어서 역사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역사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하셨던 일을 계시해 준다. 다시 말해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신명기에 있어서도 역사의 역할은 이러한 사실에 초점이 집중되어 있다. 즉,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현제의 시점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행동의 틀을 마련해 준다.
3. 일반규정 : 언약 관계의 근본 원리
신명기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연결하는 언약 관계의 근본원리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인 위치에서 언약을 체결하게 된 동기도 사랑이며,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이 사랑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와 같은 관계의 본질 -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 이 구체화된 것으로 십계명을 들 수 있다(5:6-21).
4. 특별 규정 : 언약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
신명기 언약법의 특별 규정이 취급하는 내용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즉, 여기에는 성소, 우상 숭배, 절기, 성적 범죄, 전쟁, 노예, 안식년, 예언과 제사 제도, 경제 문제, 유괴 등이 망라되어 있다. 이것들은 크게 의식법, 종교법, 시민법, 형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대 세계에서는 자주 종교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이 구분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그러한 구분은 인위적이며 허구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삶은 언약의 주(主)이신 하나님의 지배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하나님께 성실했을 때에만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5. 축복과 저주 : 보상과 형벌
신명기에서 축복과 저주를 취급한 부분(27-28장)은 신명기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축복에 대해서보다는 저주를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약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장수와 약속된 땅의 소유 등 축복이 주어지며, 반대로 불순종은 불행을 초래한다.
여호수아
(1) 족장들과 맺은 언약의 신실성.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점이다(참조. 13:1-7). 즉 어떤 지파들은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땅을 아직 그들의 기업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참조. 15:63'17:12 등).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니라 계속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한편 그 땅은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대로 주신 땅이기도 하다. 즉, 이미 완성한 것(already)이지만 그러나 아직(not yet)이라는 주제가 깔려 있다.
(2) 가나안 땅에 관한 내용.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 이 책에서 '여호와의 기업' 또는 '유업'으로 불리고 있으며 여호와의 소유지(22:19)로도 불리어 진다. 땅의 진정한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서 나그네처럼 우거하는 자로서의 삶의 태도를 지녀야 했다. 레 25:23이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기업'과 '나그네'란 말이 신약에도 그대로 나타난다(벧전 1:4; 히 11:13; 롬 8:17).
(3) 안식에 관한 내용.
히 4장은 여호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시키고 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안식하는 것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안식의 의미로 나타난다. 안식에 관한 의미는 신 12;9-10;25:19; 삼하 7:1에 있다.
(4)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내용.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대화를 한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직접 말씀하신다(1:1-9). 때로는 제비 뽑는 것으로(7:14) 혹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통하여 자기 뜻을 알리셨다(5:13-15).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 주셨지만, 그 땅을 정복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책임을 면제시키지는 않으셨다(1:3;10:7-9).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안식을 주시고 그 땅에서 여호와만을 성실하게 사랑하고 경외할 것을 명하셨다(22:5;24:14). 또한 하나님은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이 임하지만(23:5), 불순종한 경우 파멸이 있을 것을 나타내셨다.
(5)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멸절시킨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6:2; 8:1-2; 10:8). 그것은 가나안 족속의 강퍅한 마음(11:20)과 죄의 관영함(창 15:16)을 심판하신 행위였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자연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인간의 범죄를 심판하는데 있어 죄의 연대 책임이 나타난다(7:15). 아간 개인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비교. 창 34:7;삿 19:23;20:6;렘 29:23). 구약의 다른 곳은 개인의 죄가 자신에게만 해당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신 24;16; 겔 18:20; 렘 31:30). 신약에서도 죄의 연대 책임 및 개인의 책임 모두를 가르치고 있다.
사사기
사사기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다. 곧 이스라엘이 그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스엘에대한 하나님의 왕권은 시내 산 언약(출 19-24 장)에 의하여 수립되었으며, 그 후 모압 평지(신 29장)에서 모세와, 세겜(수 24장)에서는 여호수아에 의해 다시 확인되었다. 사사기의 기록자는 여호아의 왕권을 반복해서 거부한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여호와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여호아를 위한 전쟁을 거부하고, 가나안 신들에게로 돌아섰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렸다.
사사기의 구조상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사사 기드온은 여호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심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켜야 했다(참조. 8:23).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18:1; 19:1; 21:25)고 하는 반복 어구는 여호아의 통치를 중개할 인간 통치자가 없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구절은 이스엘이 하늘에 계신 왕을 인정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은 것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한다.
불순종·이방인의 압제·곤경중에서의 부르짖음·구원이라는 반복적 주기(週期)로부터,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끌어낼 수 있다. 그것은 언약에 대한 여호아의 신실하심이다. 혼란스러웠던 사사 시대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와 오래 참으심이 잘 나타난 때도 없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불충(不忠)과 배약(背約)의 역사였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만 주변의 이방 나라들에게 흡수당하지 않을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와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앞으로 도래할 여호아의 종 다윗과 그의 왕조의 수립을 기다리는 구속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진행된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한 구원 사건에 뒤따라 오는 이 시대(사사 시대)는, 놀랍게도 성령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활동하신 때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신은 사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을 대항하여 싸우는 거룩한 전쟁에서 큰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주었다(참조. 3:10; 6:34; 11:29; 13:25; 14:6, 19; 15:14; 삼상10:6,10; 11:6; 17:13). 바로 이 성령으로 권능을 받은 여호아의 백성들은 복음을 모든 나라에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룻기
1. 하나님의 이름
룻기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각자 여호아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고백한다('여호와' 라는 이름은 룻기에서 18회 나온다). '여호아' 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그들을 시내 산으로 이끄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 다른 하나님의 이름은 '엘 샤다이' 이다(1:20, 21). 창세기에 나오는 '엘 샤다이' 라는 이름은 인간의 무력함함을 강조하고, 인간의 무기력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대해 말할 때 사용되었다.
2구속
'기업을 무르다·구속하다' 라는 히브리 어 동사 '가알'이 이짧은 책에서 20회 나온다. 이말은 가족법과 관련되는 용어이다. 곧 한 가족(친적)의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1) 가족(친족)의 재산을 다시 무르거나(레 25:25), (2) 종으로 팔린 형제를 자유롭게 해 주거나(레 25:47-55), (3) 또는 자기 친족을 죽인 살인자에게 복수하는(민 35; 신 19:6)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이런 보호자가 된 가까운 친족을 '고엘'이라고 한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고엘'이라고 말할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하는 것이다.
3.헤세드(자비 loving-kindness)
'헤세드'라는 히브리 어 단어는 1:8과 2:20과 3:10에 나오는데 그 의미를 한 단어로 나타기는 매우 어렵다. 룻기에서 선택,은혜,인애 등의 뜻을 가진 '헤세드'는 '하나님의 신실한 보호' 뿐만 아니라,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의 따스함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체험한 사람은 그것에 의해서 변화되어야만 한다. 나오미와 보아스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헤세드'를 베풀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모압 여인 룻이었다(3:10,'너의 베푼 인애가').
사무엘상
(1) 왕정 체제를 수립한 사무엘의 생애와 사역.
(2) 백성들이 요구한 세속적인 왕의 표상인 사울의 생애와 그의 통치하의 이스라엘.
(3) 메시야 왕국을 통치할 의로운 통치자의 표상인 다윗의 생애 및 사역과 그의 통치하의 이스라엘.
본서를 사건별로 요약하면, 사무엘의 출생 기사로 시작하여(1장), 다윗이 진정한 왕으로 부각되면서 사울은 그 일가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으로(삼상 31장) 상권은 끝을 맺는다. 이어서 하권은 사울의 사망 소식을 듣는 다윗의 기사로 시작하여 다윗 왕정의 종말에 관한 기사로 끝을 맺는다.
한편, 사무엘서에서 처음으로 메시야('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말이 찬양 내용 중의 하나에 사용되는데(삼상 2:10), 이 말은 헬라 어로는 '그리스도'로 번역된다. 따라서 이 말은 인류의 구세주요 영원하고 진정하며 의로운 통치자를 가리킨다. 구약적인 면에서 메시야의 일차적 의미는, 하나님의 대리자 또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중보작적인 역할을 가리킨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삼하 2:4,7;3:39;5:3,17)로 언급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신정국 이스라엘을 통치할, 대리자 및 그 백성의 중보자로서의 위치를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 왕국의 영원한 통치자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구약적 표상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을 세워 메시야 왕국의 궁극적인 도래를 소망하도록 역사의 의미와 방향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다윗이 건설한 이스라엘 왕국은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이다. 그리고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다스리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다윗 왕국의 계승으로 묘사되고 있다(암 9:11; 사 11:1-10).
사무엘하
본서는 다윗을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이상적인 신정 통치의 진정한 대리자로서 묘사한다. 다윗은 일차적으로 유다 지파에 의해 헤브론에서 왕으로 추대된다(1-4장). 그 후 이스보셋이 살해 된 후에는 나머지 모든 지파에 의해서도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5:1-5). 다윗의 통치력은 확실하고 능력있게 집행된다. 그는 여부스 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그 곳을 왕의 도시로 정한다(5:6-14). 곧이어 법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모든 백성과 민족 앞에서 자신과 그 백성을 여호아께서 통치하신다고 선포한다(6장;시 132:3-5).
한편 다윗은 하나님의 처소이며 그 백성의 예배 장소인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 곧 다윗 왕가의 영원한 존속을 약속하신 내용이다. 사무엘하의(또는 이스라엘 역사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이 장은 다윗 언약의 수립을 의미한다(시 89:34-37).
열왕기상
열왕기 저자는 이 기록을 통해서 그들에게 임한 참상, 그들의 성전 파괴, 왕가의 굴욕, 그리고 열조의 땅에서 쫓겨나 타국에 포로로 끌려가는 데까지 이른 비운의 원인이, 그들 자신의 죄악과 하나님의 대한 배반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동족들에게 가르키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포로로 잡혀 왔지만 신앙을 저버리지 말고, 이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 모든 죄악과 우상을 버리고 옛 신앙을 회복하라는 의도로 본서를 기록했다. 열왕기는 그 안에 '하나님 나라' 라는 깊은 신학을 간직하고 있으며, 절망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망을 심어주는 구약 교회사이다.
본서의 저작 목적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근거로 할 때 왕국의 흥망성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에 달려 있으며, 왕들의 성공 여부도 모세의 법대로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저자의 의도 속에는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이스라엘의 영웅들을 영화롭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래서 저자는 세속 역사가들의 눈에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될만한 업적들을 전혀 무시하기도 했다. 저자의 주된 관심은 왕들과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언약에 대하여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열왕기하
[1] 열왕기상
1. 통일 왕국시대(1:1-11:43)
2. 분열 왕국시대(12:1-22:53)
[2] 열왕기하
1.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1:1-17:41)
2. 남조 유다의 멸망(18:1-25:30)
역대상
역대기 저자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회복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여 이 역사서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역사서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역사의 계속성 곧 과거 역사와의 연결성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의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 "그의 언약은 아직도 유효한가?" 또는, "지금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은 왕도 없고 오히려 바사(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형편인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는 "하나님의 대심판(다윗 왕가의 몰락과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및 바벨론의 포로가 됨)을 당하고 있는 판국에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가 무슨 소용인가? 등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 역대기 저자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역대하
역대상.하의 핵심어는 "왕가의 계보"와 "헌신" 등이다. 역대상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왕권에 이르게 되는 다윗 왕가의 계보를 특별히 자세하게 설명한다. 다윗의 일생은 철저히 하나님께 헌신된 삶으로 묘사된다. 그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했으며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져왔고 하나님을 위하여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려 했다.
에스라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렘 29:10-14)하신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은 본서에서 성취된다. 모두 세 차례의 귀환 중 에스라에는 제1, 2차 귀환이 나타난다. 에스라서는 그 내용을 크게 둘로 구별해볼 수 있다. 첫째는 1-6장에 걸쳐 나타나는 성전 재건의 역사이다. 약 70년의 세월동안 포로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안정을 누리던 때였지만 잃었던 신앙을 되찾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과감히 귀환길에 오른 것이다. 먼저 제단과 종교적인 절기들을 회복하고, 여호아 하나님의 성전복 사업을 시작한다. 수많은 반대와 방해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슥 4:6) 말미암아 완성케 된다. 두 번째의 주요 내용은 자체 개혁(7-10장)이다. 첬 번째 내용은 스룹바벨이 지도적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에스라에 의하여 진행된다. 제1차 귀환후 81년만(B.C. 457년)에 소수의 무리를 데리고 에스라가 귀환한다. 에스라는 1차 귀환으로부터 에스라 귀환 당시까지 극도로 혼탁해진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율법의 말씀에 입각하여 개혁을 성공시킨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죄의 회개와 영적인 부흥은 재건된 성전과 더불어 귀환한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느헤미야
본서에 나타난 주요 내용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과 여호아의 율법에 대한 충성이다. 예루살렘 성벽은 유대 인들에게 있어서 성전과 더불어 민족의 상징이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원수들의 갖가지 조롱과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건축하라는 나팔소리는 결국 승리의 환호로 이어져,죄악으로 인해 허물어졌던 성벽이 갖은 고초 가운데서 재건되었다. 이는 포로 후의 새출발에 있어서 새 삶의 터전이 되었고, 또한 신앙의 증거로서 후대에 큰 귀감이 되었다.
느헤미야는 이전 자기 민족의 멸망과 포로생활의 고난은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한 범죄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율법의 회복과 거룩한 말씀에 대한 충실한 해석 및 준행에 그의 정성을 기울여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특히 제사장겸 학사인 에스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서 마음판에 새겨 온전한 생활을 하도록 했다.
에스더
에스더서의 핵심어는 "아름다움"과 "섭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축복하사 아름다운 외모를 주셨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하나님이 그녀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헌신된 마음 때문에 그녀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셨다. 이처럼 한 미천한 유대 여자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왕비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비록 에스더서 내에는 하나님이란 이름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지만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 저기에서 나타난다.
1. 폐위된 와스디 왕비(1:1-22)
2. 왕비가 된 에스더(2:1-18)
3. 왕의 생명을 구한 모르드개(2:17-23)
4. 유다 인들에 대한 하만의 계략(3:1-15)
5. 에스더의 결심(4:1-17)
6. 연회를 베푼 에스더(5:1-14)
7. 굴욕 당하는 하만(6:1-14)
8. 에스더의 두 번째 연회 (7:1-10)
9. 모르드개의 조서(8:1-17)
10. 유다 인의 승리와 부림절의 기원(9:1-10:3)
욥기
욥기에서 다루는 주제는, 온 세상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사람들이 간혹 품게 되는 의문점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다른 사람에게 좋은 본이 되는 사람에게 닥치는 재난의 이유는 무엇인가? 반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악인들이 편안하게 지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다면, 왜 의인이 고난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방관한 채 계시는가? 하나님은 실제로 공의로우신가? 하나님은 과연 전능하신가? 하나님은 땅 위에 도덕적인 질서를 유지하실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욥기는 이와 같은 질문들에 답할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욥은 극심한 고난을 통해 자기 연민에 빠지고, 하나님에게 불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케 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는 진리를 시련을 통해 확고하게 깨달았다. 비록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이 책은 하나님의 고귀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실상 욥은 진정한 복종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로 하나님께 선택되는 영광을 가졌던 것이다.
사단은 욥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보다는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비방했다. 즉 물질적인 복만을 받기 위한 방현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게서는 이 점에 대해서 사단이 그릇되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욥을 선택하였다. 욥이 이 의도를 미리 알았더라면, 닥쳐 오는 시련들을 기쁘게 감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절망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시편
1. 하나님 개념의 특징
유일신관(唯一神觀)이 왕권 사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어떤 학자들은 시편의 유일신 사상을 부인한다.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시 77:13; 81:9; 135:5)라는 구절이다. 즉, 이스라엘은 많은 신들 중에서 오직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았을 뿐이란 것이다. 즉,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시편에서 혹시 '신들중에…'(86:8)와 같은 표현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신을 인정하는 말이 아니다. 내 주만 하나님이며(86:10), 다른 신이라 불리는 것들의 실상은 헛 것이요 거짓 것(135:15)이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한다. 때문에 다른 우상과 하나님을 비교한다는 듯한 구절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왕권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시 95:3-6).
2. 시편이 이해한 죄악
죄악이라면 시회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서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편에는 이 양자가 모두 존재한다. 사회적인 죄악을 철저하고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반면, 영적인 면도 깊이 취급한다. 그러나 엄밀히 파고 들면, 그 둘은 영적인 죄악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의 죄악관은 영적이요 개인적이다.
3. 시편이 이해한 징벌
구약에서는 종족, 또는 혈통적 연대책이란 것이 강조되고 있다. 즉 공동체나 한 가정에 있어서 어떤 일원의 범죄는 그 징벌이 개인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미치고 있음을 본다(수 7:1: 삼하 21장).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하나의 몸으로 보는 견지에서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나 후에는 점점 그 책임이 개인화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 즉 혈통적인 연대성보다도 영적 연대성과 개인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는것이다. 따라서 한 시편 기자는 79:8에서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담대히 기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징벌의 원리는 또한 복과 보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보상과 복도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개인적이다.
또한 징벌의 원리는 악인과 의인에 대한 궁극적인 징벌과 보상을 말하고 있다. 악인의 번영은 있을 수 있으나 일시적이므로, 의인이 낙심할 바 아니다. 그들에게는 마침내 징벌이 있을 것이다(37:7; 39:1; 73:1-3).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나(1:3),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선언한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자기의 연한(年限)이 차기 전에 핍박으로 죽어가고, 악인은 고통 없이 자기의 수명을 채우고 죽기도 한다. 이에 대한 문제는 결국 메시야를 대망케 하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을 심화시켜 주었으며, 또한 사후 세계의 궁극성을 바라보게 해주었다.
제1권 : 1-41편
제2권 : 42-72편
제3권 : 73-89편
제4권 : 90-106편
제5권 : 107-150편 시편은 네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앙 공동체의 시, 개인적인 신앙 고백의 시, 찬양의 시, 왕의 시(Royal Psalm) 등이다.
1. 신앙 공동체의 시
하나님 백성 전체가 그 주체가 되는 시이다. 당연히 주어가 복수로 나타난다. 공동체의 애가(哀歌)와 공동체의 감사시로 다시 나눌 수 있다. (1) 애가(哀歌)-큰 재난의 ?, 전쟁에서의 패배, 흉년 등의 어려운 때에 겸손히 재에 앉아 호소하는 회개와 간구의 노래들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시편들로는 44, 60, 74, 79, 80, 83, 85편 등이 있다. (2) 감사시-공동체의 승리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것으로서, 124편과 129편이 이에 속한다.
2. 개인적인 신앙 고백의 시
대부분의 시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신앙 공동체의 시와 같이 애가와 감사시로 나뉜다. (1) 애가-질병, 불행, 박해, 비난, 학대 등의 환난과 결부되어 있으며, 이런 것들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들도 공동체와 절대적으로 무관하지는 않다(참조. 시 22:22-23). 그리고 이러한 시들의 특징은 항상 성소(聖所) 지향적이라는 점이다9참조. 시 3;4;5:7). 여기에 해당되는 시는 40여 편이나 된다(3, 5, 6, 7, 13, 17, 22, 25, 26, 27, 28, 31, 35, 38, 39, 40, 42, 43, 51, 54, 55, 56, 57, 59, 61, 64, 68, 69, 70, 71, 86, 88, 102, 109, 120, 130, 140, 141, 142, 143편 등). (2) 감사시-이 유형에 속하는 시들이 감사시의 대표적인 시들이다. 감사시의 특징은 과거의 환난 중에 있을 때 부르짖었던 애가를 회상하는 데 있다(시 30;8-10). 이 유형에 해당되는 서는 열세 편이 있다(18, 31, 32, 34, 40, 41, 66, 92, 100, 107, 116, 118, 138편 등).
3. 찬양의 시
찬미의 대상에 따라서 분류된다. (1)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시(8, 19, 29, 104,편) (2) 시온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시(46, 48, 76, 84, 87, 122, 137편) (3) 구속의 역사를 찬미하는 시(78, 81, 105, 106, 111, 114, 135, 136편) (4) 하나님의 왕국을 찬미하는 시(24, 27, 68, 93, 95, 96, 97, 98, 99편) (5) 하나님의 율법을 찬미하는 시(1, 19, 119편) (6) 이러한 것들이 혼합되어 있는 시(33, 103, 113, 115, 145-150편 등). 전형적인 형태의 찬양의 시는 서곡과 본곡과 종곡으로 나뉘는데, 117편이 그 좋은 예이다.
4. 왕의 시
왕의 시(메시야 시)는 물론 직접적으로는 왕에 대한 찬양이지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데에 찬양의 의미를 부여하므로, 결국 이러한 시들은 메시야를 내다보는 예언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 해당되는 시는 모두 열한편이 있다92, 8, 20, 21, 45, 72, 89, 101, 110, 132, 144편 등).
5. 그 밖의 시
이상의 네 가지 구분 이외에도 지혜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인간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시편으로서 127편, 128편, 133편 등이 있으며, 인생의 생존 문제를 다룬 시로 16편, 37편, 49편, 73편 등이 있다.
잠언
이 책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게 되는 지혜로운 삶을 강조한다.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혜롭기 때문에, 지혜로운 삶은 곧 경건한 생팔이다. 이와 대조적인 것이 악인 또는 불의한 사람의 어리석은 삶이다. 이 두 가지 삶의 특징과 결과는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된다.
잠언에서 다루는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지혜와 어리석음·의로움과 사악함·삶과 죽음·지식과 무지·근면과 나태·질서와 무질서·성공과 실패·자제와 분노·신실함과 신실하지 못함·복종과 반항·정직과 사기·정의와 불의·진리와 거짓·존귀와 치욕·칭찬과 비난·교만과 겸손·깨끗함과 더러움·격려와 비방·화평과 다툼·사랑과 미움·인자와 잔인·관용과 탐욕·기쁨과 슬픔·부와 빈곤·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 등이다. 따라서 이 책이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진 것도 당연하다.
전도서
전도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인생을 즐길 것을 강조한다(2:24-26; 3:12, 22; 5:18-20; 8:15; 9:7-9; 11:7-10). 이 사상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쾌락을 즐기라고 하는 쾌락주의의 일종이라고 잘못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저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인생 향락(享樂)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참조. 2:24-26; 3:13; 5:19-20; 9:7).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2:26), 그분을 경외하고(8:12),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며 자제하는 사람만이 그 향락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 향락과 대조를 이루는 사상이 '헛되다'는 말로 표현된다. 전도자는 인간사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선언한다. 여기에는 사람의 수고(1:14; 2:11, 17; 4:4, 7-8)·지혜(2:15)·의로움(8:14)·재물(2:26; 5:10; 6:2)·존귀(4:16)·쾌락(2:1-2)·젊음과 힘(11:10)·생명(6:12; 7:15; 9:9)·사후(死後 11:8) 등 인간사에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 모든 것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단정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수고 함으로써 위대한 일들을 성취할 추 있고, 그 결과 다소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2:10). 지혜를 사용하면 쉽게 일을 끝낼 수 있다(10:10). 사람의 의로움은 불의보다 더 낫다(8:12-13). 그러나 인간의 타락(7:29)·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6:12)·죽음의 급박성(12:1-7)·사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사람의 수고와 지혜와 의로움은 궁극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전도자는 '해 아래서'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방편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권하고 있다.
아가서
아가서는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책'으로서,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진정한 사랑, 즉 성도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보여 주는 하나의 비유
1. 제목(1:1)
2. 사랑을 구함(1:2-2:7)
3. 만남과 헤어짐, 다시 만남(2:8-3:5)
4. 결혼예식과 첫날 밤(3:6-5:1)
5. 잃었다가 다시 찾음(5:2-8:4)
6. 사랑의 성숙과 확인(8:5-14)
이사야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 나아가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밝혀주는 책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1:4;6:1)로서, 그분을 거역하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나, 나중에는 그들을 구속하실 것이다(41:14,16). 이스라엘은 소경과 벙어리된 나라요(6:8,10;42:7), 황폐케 될 포도원이요(5:1-7), 공의와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백성이었다(5:7;10:1,2). 사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그분께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민족들에게 장차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했으며, 이 심판의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언급했다. 더 나아가서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모든 나라들과 그 나라들의 통치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40:15-24) 절대 주권을 지니신 분으로 소개되었다(25:8).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긍흘히 여기시며(14:1, 2), 그들을 죄와 어두움의 권세로부터 또한 정치적인 압박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속하시고(35:9;41:44), 구원하시는(43:3;49:8) 사건은 제2의 출애굽이 될 것이다.(43:2,16-19;52:10-12).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창조주께서(40:21,22;48:13) 그 백성을 고향으로 인도하실 그때에 사막에 시내가 넘쳐 흐르게 하실 것이다(32;2). 포로 생활로부터의 귀환을 상징하는 대로(大路)는 본서 전후반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1:16;40:3). 여호와께서는 열방을 사용하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5:26).
메시야 시대의 특징으로서 본서에는 평강과 안전이 묘사되었다(11:6-9). 다윗의 왕위를 잇는 한 왕이 의로움으로 통치하실 것이며(9:7; 32:1), 그 왕으로 인해서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으로 모여들 것이다(2:2-4).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악한 지도자들로부터 압제를 당하지 않을 것이며(11:14; 45:14),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성읍'이라고 불릴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42-53장에서 메시야 왕(Messianic King)을 '나의 종'이라 칭하셨다. 또한 이 용어는 한 나리인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되었다(41:8,9;42:1). 진정한 구원은 여호와의 종의 고난을 통해서 온전히 성취된다. 참된 여호와의 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고레스는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원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지만(41:2),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의 사슬로부터 구원하신다(52:13-53:12). 그리스도께서 '이방의 빛'이 되시므로(42:6) 심판에 직면한 나라들이(13-23장) 구원을 얻게 되었다(55:4,5)
이사야서는 '여호와의 종'인 의로운 통치자가 이 땅에서 주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해 나아가리라는 그 정점을 향해 예언의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예레미야
예레미야서의 가장 특징적인 내용은 '새 언약'이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당대에 편만한 '모세 언약'이나 '다윗 언약'에 근거한 단순한 회복이나 실현이 아니다. 가히 '새롭다'라는 형용사가 수반될 만큼 이전 언약에 비해 전혀 획기적인 사실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죄악을 용서할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심령을 새롭게 창조하여 하나님을 향해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게 할 뿐 아니라, 사죄의 은총을 내려 죄악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분명히 심판의 메시지였지만 그것은 동시에 구원의 메시지였다.
1. 서두(1:1-3)
2. 예레미야의 소명과 두 가지 환상(1:4-19)
3.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2:1-25:38)
4.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논쟁(26:1-29:32)
5. 위로의 책(30:1-33:26)
6.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당시에 주어진 예언(34: 1-39:18)
7. 예루살렘 함락 후의 예레미야의 생애(40:1-45:5)
8. 열방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46:1-51:64)
9.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유수(52:1-34)
예레미야애가
■ 구조
본 애가서는 각 장이 22절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한 예외가 있다면 66절로 기록된 3장인데, 살펴보면 이 3장 또한 '22절 구조'라 볼 수 있다(22×3). 이러한 형식은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절을 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히브리 알파벳은 22자임).
■ 사상
예루살렘이 폐허화되고 언약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버린 B.C. 587년의 참극은, 소위 언약 백성에게 많은 의아심을 품게 했다. 어떻게 계약의 하나님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파괴를 묵인하셨는가? 이와같은 질문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하여 인간에게 내리시는 한 방편이다(3:37).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 목적을 이루시도록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길(3:25-27)일 뿐이다. 시인은 이를 생각하며 절망중에 감사했다(3:23). 하지만 그는 그날을 기다리며 간구한다.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5:21).
에스겔
(1)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징계로서, 이것은 그들에게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징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배교의 죄악에서 구해 내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었다(1-24장).
(2)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들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고 움직이시는 온 우주의 통치자요 주권자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들도 심판으로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25-32장)
(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그 가운데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회복시키시고 친히 그들의 영원한 목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야가 통치하실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섬기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복들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 다가오고 있다(33-48장).
다니엘
1. 바벨론 궁전에서의 다니엘(1:1-21)
2. 느부갓네살이 본 큰 신상(2:1-49)
3. 풀무불에서 건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3;1-30)
4.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의 겸손(4;1-37)
5. 벨사살의 잔치와 다리오의 박해(5;1-6:28)
6. 네 짐승에 대한 이상(7:1-28)
7. 수소와 수양의 이상(8:1-12:13)
다니엘 서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한 그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열강의 군주들과 열국의 역사와 자연의 힘을 그의 예지와 권능으로써 어떻게 다스리고 조종하시는지를 제시하는데 있다.
호세아
호세아는 자신의 책에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이 책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체험을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보여주는 극적인 묘사 수단으로 활용하고 계신다. 여호와의 마음은 자기 백성을 향한 따뜻하고 간절한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다(11:8). 여호와는 기이한 사랑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14:4). 호세아는 자신의 메시지에서 심판과 사랑을 가장 큰 주제로 삼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는 죄는 공의의 심판을 초래하고 심판 후에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사랑은 언제나 자기 백성의 소망이 된다. 심판과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중심이 되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요소를 나타낸다.
1. 선지자의 결혼 생활(1:1-3:5)
2.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 심판(4:1-13:16)
3. 이스라엘의 회개와 축복(14:1-9)
요엘
선지자가 환상 속에서 본 메뚜기 떼가 직접적인 저작 동기이다. 메뚜기 떼는 적의 침입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여호와의 날'의 징조로 서술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이 범죄한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의 날이 아닌 캄캄한 날이요 크고 두려운 날이며, 해와 별이 빛을 거두고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날임을 인식시킨다.
본서의 교훈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다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 이날은 희망의 날(암:18)이 아니라 저주의 날이 될 뿐이다.
아모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했다면(6:1-5),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한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속성을 공의 혹은 정의로 파악하고, 이것이 인간 도덕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가르쳤다(5:24). 그러나 그 하나님은 도덕적인 실제만이 아니요 창조의 하나님이기도 하며 계시의 하나님, 섭리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4:13).
특히 그에게 두드러지는 것은 유일신 사상이다. 우상을 말할 때 거짓 것, 헛 것이라 불렀다(2:4). 이는 우상을 가리켜 그렇게 부른 첫 사례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이방신의 실재(實在)를 인정하여 나라마다 지방마다 각각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와 하나님도 그중 하나에 불과한, 이스라엘 민족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신인 여호와와 아울러 바알을 섬기는 혼합주의를 택했다. 하지만 아모스는 우상이 실재(實在)하지 않고 다만 헛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또한 당시에 제사는 믿음과 별개의 것으로 취급 되었다. 믿음과 행위는 없고 불순종의 반복 속에서 의식적인 제사만이 시행되었다. 아모스는 이를 개탄하여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5:21-23).
이것은 공의를 진멸하고 정의에 눈감은 제사가 얼마나 헛된 것임을 지적한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선포하렸다. 이날은 공의가 이행되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악인들은 심판받고 의로운 '남은 자들'은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오바댜
오바댜의 예언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짧은 에돔 족속에 대한 한정된 심판처럼 보이나, 담겨 있는 의미는 심오하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게 행한 에돔의 교만하고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 우주적인 심판으로 확대된다(15, 16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오바댜 예언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다."(Hengstenberg)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에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하고 악한 이방인의 태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비교. 욜 3:19). 그러나 오바댜의 예언이 전적으로 미래의 예언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므로, 역사 가운데서 에돔의 행위와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이 징계에 대한 이방인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심판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유다에 대해 방관하고 악한 행동을 가하는 그 자체 또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요소가 되는 것이다.
남은 자가 땅을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갱신이다.
요나
요나서의 핵심어는 "물고기"와 "순종"이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킨 사건은 요나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사건은 오히려 선지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뻗치신 손과 같은 것이다. 물고기 뱃속에 있는 동안 그는 회개하였고 다시 큰 구원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요나가 순종하고 니느웨로 간 행동을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큰 열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미가
미가서의 핵심어는 "정의", "자비", "겸손"이다. 미가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의 모든 삶 속에서 정의를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고 외친다.
나훔
그는 앗수르의 죄악 중 두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번째의 것은 군사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한 점이다. 그 결과 피가 강처럼 흘렀으며, 많은 민족이 멸절되었고, 훌릉한 관습과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전쟁이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다(2:11-13). 정복자 앗수르 인들, 특히 앗수르 바니팔 등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을 살펴보면, 말뚝을 박아 사형을 집행하고 인골로 피라밋을 쌓았으며 그밖에 너무도 끔찍하여 묘사할 수 없는 많은 야만적인 행위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멸시하였던 그 백성들에게 나훔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리라'라고 선포하였다.
나훔이 지적하는 두번째의 다른 죄악은 비양심적인 교역이었다. 그 주변국가들은 아부와 부패로 정복민들의 사치와 악을 만족시켜 주고 있었고 상인들은 황금에 굶주려 온갖 종류의 우상과 세공품, 그리고 악을 조성할 만한 모든 물건을 팔았다. 그들에게 정직과 도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며 부만 얻고 쾌락만 즐기려 하였다(3:1-4). 그러나 나훔은 유다 민족에게 좋은 소식을 전달하는 사자가 오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이 압제자의 멸망에 대한 감사로써 종교 절기를 지키고 양심적으로 서원을 갚고 의무제사를 드리라고 권고한다(1:15).
하박국
하박국 선지자는 나훔과 마찬가지로 자기 백성을 비난하고자 나선 것이 아니다(1:2-4은 약간의 불경건한 자들을 책망한 것이다). 그렇다고 국수주의자처럼 자기 민족애에 빠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동기는 불의하고 비도덕적인 세력이 세계를 통치하는 데에 대한 의인의 고뇌이다. 또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서의 위대한 주제는 사도 바울(롬 1:17; 갈 3:11)과 히브리서 기자(히 10:38)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으며 종교 개혁과 루터의 개혁 이념이기도 하였다.
하박국서의 핵심어는 "믿음"과 "정의"이다. 이 하박국서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시고 그분이 작정하신 모든 계획 속에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스바냐
스바냐의 메시지는 '여호와의 날'이 주요 내용이다. 여호와의 날에는 모든 사람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멸절당한다(1:2-3).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악한 아들과, 유다를 괴롭혀 온 이방 족속도 포함된다(2:4-15). 그래서 '여호와의 날'은 희생의 날(2:8)이며, 분노의 날, 고통의 날, 황무와 파괴의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2:14)이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거짓 예배에 있다. 즉, 하나님을 무시하며, 더 나아가 그의 존재를 인정치 아니한 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소인 예루살렘에서 이방신들을 섬기며(1:4, 5), 하나님을저버렸다(1:6). 그들은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1:12)는 불신앙에 빠져 있었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부패와 악정과 거짓을 거듭 자행하고 있었다(3:1-8).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인에 대하여 분노를 쏟으실 수 밖에 없었다(1:2, 3; 2:4-18; 3:8).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진노의 날이 임박하기 전에 회개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2:3). 또한 회개를 촉구하기에 앞서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2:4-15).
마지막 후반부에서는 선지자의 메시지가 갑자기 변한다. 즉, '여호와의 날'은 기쁨의 날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것은 진노의 날에 전능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남겨 자신의 의로운백성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의 심판과 종말이란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기쁨이 된다. 왜냐하면 그날이 원수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되지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 되기 때문이다.
학개
학개서는 오바댜 다음으로 구약에서 분량이 가장 적은 책이지만 그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
선지자 학개는 먼저 불순종의 결과와(1:6, 11; 2:16-17) 순종의 결과를(2:7-9, 19) 명백하게 보여준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의 전(殿)에 우선권을 둘 때 그들이 받는 보상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임을 역설한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성령의 격려와 힘을 가져온다(2:4-5).
제2장은 '만국의 보배'(만국이 사모하는 것)라 불리는 메시야의 도래를 말한다(7절). 그의 오심으로 재건될 성전은 영광으로 가득차게 된다(9절). 여호와께서는 스룹바벨을 인(印)으로 삼으사 장차 메시야가 오실 사실에 대한 보증을 삼으셨다(23절).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있을 열방에 대한 심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때 만국은 진동할 것이며 부서질 것이다(2:6-7, 21-22; 참조. 히 12:25-29).
스가랴
여호와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지와 자신이 임재해 계시는 곳으로 삼으려고 하셨다(슥 1:1-6; 8:7).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한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이러한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범죄한 자에게는 징벌이 있으며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선포해야만 했다(3:2, 9; 5:3, 4, 8).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열국과 모든 피조물에까지 미친다(8:23; 12:1). 결국 열국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2:13; 6:1-8; 14:16-21).
하나님의 목적은 메시야에게 집중되어 있다. 스가랴서의 전반부에서(1-8장) 메시야는 비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3:8 '내 종'). 그러나 그는 다윗의 왕통을 잇는다(6:12 '순'; 사 4:2; 11:1; 렘 23:5). 후반부에서(9-14장) 메시야는 다윗처럼 목자로서(11:4; 12:10; 13:7) 그리고 왕으로서(9:9, 14:9) 나타난다.
말라기
말라기의 핵심어는 "십일조"와 "준비"이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을 때, 사실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그들이 도둑질하는 격이 되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그들이 소유한 재물보다 더 많은 것들을 빚지고 있다. 그들의 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간, 재능도 빚지고 있다. 또한 말라기의 중요한 사역의 한 부분은 백성들의 마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보내진 세례 요한을 예비하는 일이다.
마태복음
1. 그리스도의 탄생과 유년기(1:1-2:23)
2. 그리스도의 세례와 시험(3:1-4:25)
3. 산상 설교(5:1-7:29)
4. 열 가지 이적과 관련된 사건들(8:1-9:35)
5. 열 두 제자의 파송(9:36-10:42)
6. 세례 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1:1-30)
7. 바리새 인들의 반대(12:1-50)
8. 천국 비유(13:1-52)
9. 예수님이 배척당하심(13:53-17:27)
10. 메시야적 공동체 내에서의 삶의 원리들(18:1-35)
11.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과 도전들(19:1-22:46)
12. 심판에 대한 경고와 예언(23:1-25:46)
13.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26:1-27:66)
14. 그리스도의 부활하심(28:1-20)
마태복음의 핵심어는 "성취"와 "천국'이다. 마태는 참으로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세상의 구세주인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약속이 성취됐다는 주장을 더 확실히 뒷받침하기 위해서 구약의 모든 부분에서 말씀을 인용한다. 또한 마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시고 인간의 삶을 다스리신다는 복음을 소개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천국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신약 가운데 이 용어는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난다.
마가복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1:1)는 서두에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라고 십자가 앞에서 외친 백부장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고 있다. 변화산 위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9:7) 뿐만 아니라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1:11)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확증해 준다. 심지어, 귀신들까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1:24; 3:11). 그리고 예수님도 자신의 교훈에서 이 사실을 가르치셨다(12:1-12; 13:32).
1.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준비(1:1-13)
2.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1:14-6:29)
3. 예수님의 갈릴리 안팎에서의 사역(6:30-9:29)
4. 예수님의 마지막 갈릴리 사역(9:30-50)
5. 예수님의 유대와 베레아 사역(10:1-52)
6.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11:1-15:47)
7. 예수님의 구원사역 완성(16:1-20)
누가복음
1. 서문(1:1-4)
2.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1:5-2:52)
3. 공생애를 위한 준비(3:1-4:13)
4. 갈릴리 사역(4:14-9:9)
5. 갈릴리 주변 지역으로 물러가심(9:10-50)
6. 유대 지역에서의 활동(9:51-13:21)
7. 베레아 지역에서의 활동(13:22-19:27)
8. 고난과 승리(19:28-24:53)
누가복음의 핵심어는 "예수님"과 "인자"이다. 하나님의 성육화된 존재인 예수님은 종종 인자로 묘사된다. 예수님의 이런 인성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족보와 그분의 성격 및 삶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통하여서 잘 드러난다.
요한복음
요한복음은 매우 순수하고 간결한 헬라 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신학적인 통찰력은 대단히 무게가 있고 심오하다.
본서는 영원한 아들, 곧 로고스(말씀)로서의 예수님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 분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세상이 창조될 때 하나님과 함께 일하셨다(1:3).
본서 전체에는 '나는 …이니라'는 말씀이 일곱 번 반복되어 나온다. 즉, ① 생명의 떡(6:35) ② 세상의 빛(8:12) ③ 양의 문(10:7) ④ 선한 목자(10:11) ⑤ 부활이요 생명(11:25) ⑥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⑦ 참 포도나무(15:1) 등이다.
그런데 '나는 …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 말은 불타는 가시 덤불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참조. 출 3:14), 신성(神性)을 표현하는 말이다(참조. 창 17:1; 출 15:26; 35:3; 렘 3:12).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복음서이다.
나아가 요한은 유일하게 보혜사, 곧 성령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나눌 때, 예수님은 앞으로 오실 성령님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자신에 대해 증인이 될 것이지만,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시작될 것이라고 하셨다.
1. 서언: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로서의 영광(1:1-18)
2.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1:19-51)
3. 예수님의 공적 사역: 표적과 강론(2:1-11:57)
4. 수난 주간의 예수님(12:1-19:42)
5. 부활하심(20:1-29)
6. 요한복음의 목적을 진술함(20:30-31)
7. 갈릴리에 나타나심(21:1-25)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교회의 탄생과 확장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이런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1) 중심 인물-베드로와 바울
(2) 중요한 주제 및 사건들-성령님의 역할·새로운 선교지로 나아감·회심의 사건들·교회의 성장·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의 삶
(3) 중요한 문제들-유대인들의 교회 박해·유대 인들과 로마 인들 앞에서 재판받음·선교를 위한 역경과 고난
(4) 선교 범위의 확장-말씀이 전파된 범위가 5단계를 거쳐 확장된다(1:1-9:31; 9:32-12:25; 13;1-15:35; 15:36-21:16; 21:17-28:31).
로마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인류가 처해 있는 영적인 상태를 개관함으로써 로마서를 시작한다. 그는 유대 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인류가 한결같이 죄인이며, 구원 받아야 할 존재들이라고 보았다. 이 구원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완성한 구원 사역을 통해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믿음으로 이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원리이다. 그런데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경험에 있어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죄와 율법,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논리를 발전시킨다. 이러한 자유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며, 성령의 임재와 능력 속에 거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며,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스라엘도 역시 비록 현재로는 불신앙의 상태에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준다. 현재 이스라엘은 남은 자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이스라엘 전체에게 구원받을 때가 올 것이다(11:26).
이 편지는 독자들로 하여금 교회와 세상에서의 실제적인 삶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완성하라고 권면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처럼 교리 서신도 아니며, 디모데전서, 후서나 디도서처럼 목회의 지침을 가르치는 서신도 아니다. 이 서신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생활에서 부딪히던 문제점들을 다루는 실용적인 편지라는데 있다.
바울은 교회내의 분쟁, 교인들간의 법적 소송, 결혼 문제, 영적 은사의 남용, 성만찬,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부활에 대한 불신 문제 등에 대하여 바른 길을 제시한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처럼, 많은 문제들을 알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 서신은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많은 교훈을 전해준다.
고린도후서
고린도전후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처럼 교리 서신도 아니며, 디모데전서, 후서나 디도서처럼 목회의 지침을 가르치는 서신도 아니다. 이 서신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생활에서 부딪히던 문제점들을 다루는 실용적인 편지라는데 있다.
바울은 교회내의 분쟁, 교인들간의 법적 소송, 결혼 문제, 영적 은사의 남용, 성만찬,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부활에 대한 불신 문제 등에 대하여 바른 길을 제시한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처럼, 많은 문제들을 알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 서신은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많은 교훈을 전해준다.
갈라디아서
(1) 바울은 그의 사도 자격을 변호·논증한다(1:11-2:21). 바울의 사도 자격 문제는 유대주의자들이 분명히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을 열거하여 사도 자격을 변호한다.
①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부르신 점(1:11-24)
②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그의 복음이 인정받은 점(2:1-10) ③ 베드로의 위선을 바울이 책망한 점(2:11-21) 이다.
(2) 바울은 복음과 유대주의적 이단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점을 지적하며, 후자를 강력히 논박한다(3:1-5:12). 만일 아브라함의 자녀이고 그의 약속들에 참여한 자라고 한다면 구원을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바울은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의 참 의의와, 믿는 자는 율법으로 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3)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5:13-6:8).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자유의 생활을 상세히 논의하며, 육체의 일과 대조시킨다.
에베소서
이 서신은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사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모든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1-3장은 교회가 누구의 뜻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이루어졌느냐는 것을 교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교회론을 정립(定立)한 반면에, 4-6장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실제적으로 어떻게 생활하여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교회는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하며(4: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하고(4:7-16), 옛 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림으로 개인 생활을 새롭게 해야 한다(4:17-5:20). 또한 교회는 여러 인간관계에 있어 서로 복종함을 원칙으로 삼아야 하며(5:21-6:9), 영적 전투를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6:10-20).
빌립보서
빌리보서의 핵심어는 "복음"과 "기쁨"이다.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복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고통스럽고 암담한 감옥 생활 속에서도 슬퍼하기는 커녕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계속 솟아나는 기쁨을 보여준다. 그가 이런 놀라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였고 그가 섬기는 교회를 향한 사랑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목적은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이단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1:15), 만물의 창조주(1:16),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1:17),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부활하신 분(1:18), 하나님의 충만한 신성을 몸에 지닌 분(1:19; 2:9), 또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시는 유일한 중보자(1:20-22)이심에 관한 진리를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다. 골로새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의 허구성과 대조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충족성(充足性)을 드러내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녀온 디모데의 보고는 바울에게 큰 기쁨과 힘을 주었다. 디보데가 전한 기쁜 소식이란,
(1)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여전히 바울을 사모하고(3:6-10),
(2) 바울이 전해준 가르침을 잘 지키며(2:13),
(3)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쁨을 가지고 신앙을 지켰다(1:2-10)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모데의 보고 중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점들도 섞여 있었다.
(1)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고 단정하고,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4:11-12).
(2) 어떤 교인들은 신자가 된 후에도 과거 이방 세계의 부도덕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4:1, 13-18).
(3) 어떤 교인들은 죽은 성도들 때문에 너무 비탄에 빠져 이었다. 그들은 먼저 죽은 자들이 주게서 재림하실 때 불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불안감을 가지고 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1) 데살로니가 교인들의좋은 믿음에 감사하고, (2)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잘못된 점들을 고쳐주기 위해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게 되었다.
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전서가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을 겪고 있는 초신자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편지를 써야 할 필요를 느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로부터 바울의 편지를 전했을 당시의 그곳 상황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에 살았던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더 큰 핍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핍박 가운데서,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더욱 애타게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고대했다.
그 곳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갑작스럽게 임하시리라는 말씀을 오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곧 오신다고 말하고 다니면서, 일상생활에 충실하지 않고 들떠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건전한 태도를 가르친다.
디모데전서
본 서신은 교회 문제와 교회 내의 다양한 지도층의 자격 요건과 그들이 해야 할 의무 등을 다루고 있다.
바울은 본 서신을 통해 디모데가 자기의 직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르치고 있다. 에베소 교회의 책임자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교훈들이 복음에 합당한가 아닌가를 살피는 것이며(1:3), 공중 예배를 감독하고(2:1, 2, 8), 교인들을 진리로 가르치고(4:6), 예배에 규정된 각 직무들을 수행하며(4:14-15), 권장을 실시하며, 스스로를 순결하고 거룩하게 보존하여 모든 일에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4:12; 5:21, 22; 6:11-14).
디모데후서
바울은 세 가지 동기에서 디모데에게 본 서신을 기록하여 보냈다.
(1) 그는 외로운 상태였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포함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고(1;15), 데마도 그를 내버려두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다(4:10).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로마로 와서 자기와 함께 있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였으며(롬 16:21), 그는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가까이에서 바울을 섬겼다(빌 2:22; 고전 4:17). 바울은 그를 두고 말하기를 '이밖에 내게 없다'9빌 2:20)고 하였다. 바울은 그를 그리워하여(1:4) 두번씩이나 속히 오라고 요청하였다(4;9,21)
(2) 바울은 네로의 박해 기간에 교회의 안전과 번영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는 디모데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복음을 지키고(1:14),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며(3:14),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4:2), 필요할 때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1:8; 2:3)고 명령하고 있다.
(3)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부분과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의 일반 성도들도 본 서신을 읽고 이해하도록 의도하였다.
디도서
당시 그레데의 교회는 행정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했고, 교회 안에 유대주의 성격이 강한 이단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이러한 이단의 가르침은 사도의 올바른 가르침을 흐리게 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바울은 목회 사역의 지침을 주었다.
빌레몬서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냈다(1:7). 그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1:19). 신앙 안에서 새로와진 빌레몬을 통해 그의 가족들도 신앙을 갖게 되었다. 신자들은 빌레몬의 집에서 정규적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 같다(1:2).
한편,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다. 이 노예는 주인 집에서 도망하여 멀리 로마까지 갔다. 로마에서 노예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났다. 빌레몬이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으로 새롭게 된 것처럼, 노예 오네시모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어 변화된 사람이 되었다.
당시 로마의 노예법은 가혹했다. 주인은 노예에 대하여 무제한의 권력을 가졌고, 노예의 생사(生死)는 완전히 주인의 손 안에 있었다. 하찮은 작은 죄 때문에 십자가 형으로 죽임을 당하는 노예들이 수없이 많았다. 하물며 오네시모는 주인에게서 도주하였을 뿐 아니라 주인의 재물까지 가지고 갔었으므로, 그의 죄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오네시모를 돌려보낸다. 그 편지가 바로 본서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상전과 노예의 관계를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서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환영해 달라고 편지를 통해 정중하게 요청한다.
히브리서
본서는 아들, 제사장직, 희생 제도, 새 언약과 같은 주제들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1.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신약 성경 가운데서 유일하게 본서는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며, 이와 더불어 제사장이라고도 나타낸다. 그리스도가 아론과 비교되는 경우에는 대제사장이라 불리고(2:19; 4:14; 5:1; 7:26,28; 8:13; 9:11,12 등), 레위 계통과 비교될 때는 제사장으로 불린다. 그러면 제사장직의 본질은 무엇인가? 5;1을 보면, 제사장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데리고 가는 자로서, 그의 백성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에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 포함된다. 또한 제사장은 백성들을 계속 보살피고 백성들은 제사장을 계속 따르며 닮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서 그의 인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1) 대제사장과 그의 백성들과의 밀접성을 표시하기 위해서이다(2:10, 11).
(2) 그리스도가 그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2:17; 4:15).
(3) 그리스도가 온전한 대제사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5:9; 7:28).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와 연합한 백성들을 완전한 데로 이끌 수 있다.
(4)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셨다(히 2:9이하). 이것은 예수님이 온전하시면서도 고난을 겪은 것은 그의 백성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하심으로써 참다운 동정을 베풀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였다(히 2:7,17; 5:5-10).
한편, 그리스도께서 이런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인 것이다(1:3 4:14; 7:28). 저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강조한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사역과 대제사장직과의 관계는 이러하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그의 죽음과 분리될 수 없으며(13:12), 그분은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도 계속 일하고 계신다(6:2). 또한 그분은 재림시에도 대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감당하신다(9:28). 이때는 첫 번째 성취하신 모든 축복을 더욱 확고한 것으로 나눠 주시는 역할을 하실 것이다.
2. 더 나은 제사:새 언약의 제사
새 언약의 제사는 더 나은 제사이다. 제사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의 중심이다. 그러나 본서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정도의 체계적인 속죄 교리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교리는 바울 서신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저자는 제사의 방식과 진행 과정보다는 제사의 효과에 더 큰 흥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객관적인' 표화(속죄, 화목, 칭의)를 발견하는 반면, 본서에서는 속죄가 '주관적인' 효과를 갖는 것, 곧 사람을 정결케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의 효과를 표현하는 의식적인 4가지 용어를 사용한다. 그 용어들은 '속죄하다', '정결하다', '거룩케 하다', '온전케 하다'이다. '
속죄하다'는 죄를 더는다는 의미이며(2:17) '정결케 하다'는 '죄책을 제거하는 것'을 뜻한다(9:14,22,23;10:2). '거룩게 하다'는 죄책(罪責)이 이동되었다는 선언을 받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위치를 얻었다는 뜻이며(2:11; 9:13; 10:10,14,19; 13:12), '온전케 하다'는 도덕적 완성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합당하도록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본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속죄의 목적, 곧 살아계신 하나님께 죄의식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제사의 효과면으로 설명한다.
3. 언약 개념
본서에는 '언약'이라는 말이 17회 나타난다(신약 성경에 총 33회). 저자는 옛 질서와 새 질서를 비교하는데, '언약' 개념을 통해 서로 비교한다. 이 언약 개념은 양 질서의 관계를 서로 묶어 주는 공통 분모이다. '언약'이란 뜻은 '엄숙한 종교적 제가(制可)'를 뜻한다.
그러면 본서의 '언약' 사상이 기독교 전체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첫째로, 본서는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예배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봉사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예배를 위한 종교임을 강조한다.
언약의 개념 가운데 하나님은 언약을 성립시키는 분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가 되선 것은 그 백성으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히 9:14,15)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9:25; 12:24) 그의 백성을 위해 간구하시고,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께 나아가신다(4:16; 7:25; 10:22). 이것 역시 경배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에배를 드리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일이 중요하다(10:19 이하).
둘째로, 본서는 하나님 백성의 종말론적 상태조차 하나의 예재 공동체로 보고 있다.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을 맺은 다음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했다. 이 사상이 신약에 넘어와 본서에 나타난다. 예배의 정상적인 모습은 신, 구약을 막론하고 개인적인 아닌 공동체의 모입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은 받아야 할 완전한 경배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본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경배의 개념과 연관시킨다. 여기서 백성의 개념은 인종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하에 있는 백성을 뜻한다92:17; 4:19; 11:25; 13:12).둘째로, 본서는 하나님 백성의 종말론적 상태조차 하나의 예배 공동체로 보고 있다.
야고보서
본서의 수신자들은 유대 밖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기회가 적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많은 시련이 있었다(1:2-4). 경건치 못한 부자들의 횡포와 학대 때문에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했고(5:1-6), 일부 성도들의 신앙은 형식에 치우쳤으며(1:22-27; 2:14-26), 사랑이 식어져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2:1-13). 또한 말과 행동이 거칠어서(3:1-12; 3:13-4:3). 성도간의 교제가 단절되어 갔다. 이 때문에 야고보는 이들을 격려하고, 잘못된 신앙 자세를 시정하며, 또한 "믿음과 행함"에 대한 바른 인식을 교훈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였다.
베드로전서
본서는 극심한 박해 아래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것이므로 '위로'와 '격려'로 가득 차 있다. 저자는 이 격려의 주제를 '산 소망'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본서를 '소망의 서신'이라고도 부른다. 본서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힘힙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근본 초석으로 삼고 있다. 또한 성도들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개우쳐 주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사실을 상기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박해를 이기라고 말한다.
베드로후서
베드로가 이 '둘째 서신'(3:1)을 쓴 시기는 그의 임종에 즈음해서였다. 본서 역시 베드로전서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기록되었으며, 베드로 전서와 동일한 수신자들에게 보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베드로는 첫 번째 편지인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수신자들의 고난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주로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 당시 거짓 교사들은 주로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기독교적인 윤리를 무시해도 된다는 도덕 폐기론을 내세우며 성도들을 유혹하였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지니고 예속 성장할 것과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는 진심으로 수신자들이 은혜와 지식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했다.
요한1,2,3서
■ 요한1서
사도 요한은 그노시스주의의 거짓된 가르침을 논박하고(2:26),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5:13) 이 편지를 썼다.
■ 요한2서
기독 교회의 초창기인 A.D. 1세기와 2세기경에는 순회 전도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이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들이 떠날 때는 여행을 위한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그노시스주의 이단과 교사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사상을 전하였다. 따라서 본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잘 모르는 가운데 이단사상의 전파에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이단 전도자들을 잘 분별하라고 권면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 요한3서
테메드리오에 의해 전달된 것으로 보이는 요한 삼서는 순회 전도자들의 보고에 기초하여 쓰여졌다. 그들은 사도 요한에게 돌아가 가이오와 데메드리오가 베푼 대접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교회의 지도자급에 있었던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의 권위에 도전하고 요한이 보낸 전도자들을 거부하였었다. 심지어 디오드레베는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기도 하였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칭찬하고, 디오드레베를 책망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했다.
유다서
본서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은 잘못된 가르침과 부도덕한 행실로 교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1)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다.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신자들은 도덕적 제재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2) 거짓 교사들으리 신앙은 신비 체험, 특별히 종교적 황홀경에 들어가서 체험한 환상을 지나치게 의존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러한 그릇된 교훈 뿐 아니라, 악한 행실로 교인들을 타락시켰다.
요한계시록
본서는 '계시'(헬. '아포칼립시스', 1:1)요, '예언'(1:3)이며, '서신'(1:4; 22:21)이다. '계시'란 숨겨진 어떤 것이 드러남을 뜻한다.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신 바를 담고 있다.
본서는 또한 '예언'이다. 예언이란 종말론적인 완성의 빛을 현재에 비취게 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다(참조. 벧후 1:19). 따라서 계시록은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이 시대(종말)에 있을 종말론적인 구원과 악한 세상 권세들에 대한 심판을 확인시키려는 의도를 갖는다. 동시에 본서는 '서신'이다. 수신자는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였다. 그 당시 교회는 외적인 박해를 당하여 배교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교회에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제시해줌으로써,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려는 것이 본서의 의도였다.
1. 서론(1:1-20)
2. 일곱 교회들에 보낸 편지들(2:1-22)
3. 하늘 보좌 환상(4:1-5:14)
4. 일곱 인들(6:1-8:1)
5. 일곱 나팔들(8:2-11:19)
6. 그리스도와 용과의 싸움(12:1-14:20)
7. 일곱 대접의 준비(15:1-8)
8. 진노의 일곱 대접(16:1-21)
9. 바벨론 심판(17:1-19:21)
10. 최종 완성(20:1-22:21)
11. 후기(22;6-21)
요한계시록의 핵심어는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와 "일곱'이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에 대해서 철저하게 밝히 드러내 주고 있다. 그분은 큰 권능과 지혜를 가지고 영광 가운데 임하실 것이다. 또한 그분은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몇몇의 숫자는 중요한 상징을 나타낸다. 그 가운데에서도 일곱이라는 숫자가 두드러진다. 즉, 일곱 편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표적, 일곱 재앙, 진노의 일곱 대접, 새로운 일곱 일 등이다.
구역성경 배열 순서와 그 의미는
구약성경은 연대기 순으로 기록되어있지 않은데 그 배열의 순서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답변 : 66권의 성경 순서는 전체적으로는 연대기를 우선하되, 내용별로 모았습니다.
성경을 둘로 나눌 때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눕니다. 두 말할 것 없이 연대순서가 성경 66권의 순서에서는 가장 큰 틀이라는 뜻입니다.
1. 구약을 먼저 살펴본다면
성경 기록 연대로 보나 그 성경 내용으로 볼 때,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모세 5경이 제일 먼저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모세 때까지를 기록한 다음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서, 그 이후 이어지는 시대가 '사사기'의 사사시대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서'는 사사기 이후의 이스라엘 왕정시대를 연대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사기' 다음에 '룻기'가 나오지만, 그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대신 룻1:1에서 '사사시대'에 발생한 기록이라고 했으므로 사사기 바로 뒤에 두었습니다. '역대서' 이후에 '에스라' '느헤미야'는 왕정시대 이후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역사들입니다. 이 역시 연대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다음의 '에스더'는 그 앞에 있는 '에스라' '느헤미야'보다 앞선 시대에 있었던 내용이지만 뒤에 기록된 이유를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경신학' 관련 서적을 참고한다면 그 중에서 참고할 만한 내용도 있겠지만, 성경 내용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 이외의 것은 저절로 들리는 상식이 아니면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 홈의 신학 상식은 기초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면이 많겠으나 이 홈의 기본 방향이 그렇다고 아시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욥기'부터 '아가'까지는 시적 내용으로 기록했고 그 연대가 명확하지 않거나 아니면 명확하다 해도 앞에 어느 연대 가운데 한 부분만 끼워넣을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모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 형식으로 기록한 예언서들 16권을 함께 모았습니다.
2. 신약의 경우
예수님이 오시므로 시작된 것이 신약이므로 예수님 오신 때부터 기록하고 있는 4복음서가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 승천 후 사도들의 활동을 기록한 사도행전이 그다음 나오고,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는 시대순서로 구분하기 곤란한 내용들입니다. 사도행전이 역사 순서로 되어 있는데 사도들이 활동하면서 편지 형태로 기록한 성경이고 또 연대를 구분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한 곳에 모았습니다.
특히 계시록을 마지막에 둔 것은, 마치 구약시대 마지막에 예언서를 두어 오실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기록했듯이 신약에도 그 마지막에 계시록을 두어 오실 예수님과 신약 전체의 전개 방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창세기는 기원에 관한 책으로서, 그 대상은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사람과 짐승, 죄와 구속, 축복과 저주, 사회와 문명, 결혼과 가정, 기술과 산업 등 실로 다양하다.그 뿐 아니라 이스라엘 신정정치(神政政治) 수립에 초석이 된 가나안 땅에 관한 언약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택하시어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지만, 그 목적은 그들을 통하여 이 땅의 모든 족속들을 축복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방대한 계획을 밝히는 과정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늘과 땅도 움직일 수 있는 우주의 지배자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인류를 축복하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진리(히 11:6)를 상기하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출애굽기의 주제는 한마디로 말해서 '구속' 이다.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택한 백성을 노예 상태로부터 구속하시고 그들 중에 임재하셔서, 결국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본서의 핵심이다. 성경의 구원 사상은 출애굽의 언약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과정을 통해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며, 동시에 그를 따르는 자들을 구원하는 자임을 계시하였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
출애굽기에는 최소한 몇 가지의 기본적인 신학사상이 깔려 있다.
첫째 하나님의 자기 계시
둘째 그의 속성
셋째 구속사상
넷째 그의 율법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 방법이다.
또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의 소명과 사역 등으로 다양하다. 하나님의 속성은 3, 6, 33-34장에 잘 나타나 잇으며, 그 초점은 '여호와' 라는 이름과 그의 영광의 임재에 있다. 또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그의 영광, 거룩함, 위엄, 능력에 견줄자가 없음(15:11)을 강조한다. 그리고 구속 신학의 핵심은 12, 24장에서 볼 수 있다. 유월절 양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취되었다(요 1:29;고전 5:7). 그리고 이 구속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것(2:24)으로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점차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3:15-17;6;2-8;19:3-8).또 '십계명'(20:22-23)을 통하여 성경적 윤리와 도덕의 기초를 확고히 하고, '언약의 책'(20:22-23:33)을 통하여 그 원리를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배학에 관한 사상으로 끝을 맺는다. 거기에서는 성막을 중심으로 한 모든 제도와 규율이 무소부재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강조되고 있다.
레위기
1. 하나님의 임재(臨在)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제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셨다. 레위기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부단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기본적인 사상이 흐르고 있다. 성막에는 성막뜰과 회막이 있었다. 회막은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안쪽 방은 지성소라고 불렀으며, 바깥쪽 방은 성소라고 불렀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놓여 있었다. 법궤의 윗 부분을 속죄소라 불렀으며, 바로 그 곳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장소인 시은좌(施恩座)였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성소에서 모세를 불러 명령하신 그 말씀을 기록한 책이 바로 레위기이다(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소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계신다. 심지어 평범한 일상 생할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타난신다.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배와 관심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지은 범죄는 하나님께서 직접 처리하셨다. 사람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 앞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는 결코 없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이 반복되는 이유는, 그들의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되어진다는 것을 일개워 주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21-24장), 성(性 18,20장), 이웃과의 관계(19,25장) 등이 그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관심이셨다. 레위기는 영원히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특별한 경우에 영광의 광채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분하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을 지켜 주시는 것과, 특별히 지성소의 법궤 위에 계시는 것을 구별한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미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다(고전 6:19-20). 레위기에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신다.
2. 성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레위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거룩, 정함, 부정함'이다. 성결의 근본 원리는 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로 온통 물들어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과 분리되기를 원하셨다. 성결에 대하여 레위기는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그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事役)이며, 또 한 가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만이 성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와 같은 의미이다.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이심을 자주 강조하셨다. 곧 구원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행위나 의지로 구원받을 수가 없다. 둘째로 사람이 해야 하는 부분은 율법대로 '순종'하는 일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성화(聖化;구원받은 사람이 거룩하게 되어 가는 단계)의 교리와 같은 의미이다. 일단 하나님께로부터 택함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성결하게 되어 간다.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3. 희생 제물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의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었지만 역시 많은 죄를 범했다. 이러한 백성이 어떻게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을까?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사 제도를 만들어 주셨다. 모든 희생 제물을 드리는 목적은 속죄와 봉헌을 위함이었다. 여기서 희생 제물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곧 희생 제물은 장차 오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에 대하여 미리 보여 주기 위한 예표(豫票)였다. 흠이 없는 짐승을 고른 다음에, 드리는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했다. 이것은 드리는 사람의 죄가 제물에게로 전가되는 것을 뜻했다. 그 다음에는, 드리는 사람이 손수 잡은 제물의 피를 제사장이 번제단 사면에 뿌렸다. " 단에 피를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제물의 피가 제단에 뿌려질 때 이로 말미암아 죄가 소멸되고 용서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 용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레위기의 희생 제물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심은 다시 반복하실 필요가 없는 죽임이었다. 또한 그 효력의 범위도 '온 세상'을 포괄한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1:1-2).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히 9:26).
민수기
1. 하나님의 성품
(1) 임재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계셨다.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고 계셨다고 여러번 언급하고 있다. 성막 위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성막이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임을 나타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갔고, 구름이 멈추는 곳에서 진을 쳤다(9:15-23).
(2)하나님의 거룩하심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도 나타낸다. 구름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죄인들에게 무서운 징계가 이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11:25, 33; 12:5, 10; 14:10; 16:19, 42;20:6). 이러한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오게된다.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은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오면 반드시 죽기 때문이었다(출 19:12-13). 그래서 성막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사장과 레위인이 성막 둘레에 진을 쳤다(1:49-3:10). 심지어 언약궤,금등잔 등 성소의 가장 거룩한 기구를 운반하는 고핫 자손의 레위 인도 직접 이것들을 볼 수 없었다. 제사장이 이것들을 보자기로 싸야 비로소 운반할 수 있었다(4:1-20).
(3)하나님의 자비하심
제사장과 레위 인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섣불리 나아오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3, 4, 16-18장). 하나님은 여러 번 모세의 중보 기도, 또는 제사장의 속죄 행위를 받으시고 심판을 철회하셨다(11:2; 12:13; 14:13-20; 21:7).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온 것도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체험했다. 단지 애굽을 나온 사람들 중 20세 이상의 사람들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14:16;출 32:13).
2. 약속의 땅
민수기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32:7, 9).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셨던 땅이었다(32:11; 14:16; 창 17:8; 26:3; 28:13). 가나안 땅을 정탐한 정탐꾼들의 불신앙은 매우 악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묻혀 있는 헤브론을 다녀왔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13:22-24;창13:14-18:1,23;35:27-29;50:13).
(2) 가나안 땅은 거룩한 땅이 되어야만 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시면 그 땅은 거룩하게 된다(35:3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의 거민을 모두 몰아내야만 했고, 그들의 산당과 우상을 파괴해야만 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땅에서 경배를 받으실 분이시다(33:51-52).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참으로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이다(13:27;14:8).
(3)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히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은 민수기에서보다는 창세기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창 13:15; 17:8). 그리고 이 사실은 희년에 대한 규정에서 암시되어 있다(레 25장). 또한 여성 상속자에 대한 규정에서 이 사실이 분명하게 타나난다.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36:9).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그 땅에서 혹시 쫓겨나게 될지리도 결국에는 그 땅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레 26:40-45; 신 30:1-10).
3. 하나님의 백성
민수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닮아야만 한다는 성경적 원리가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나 또는 전체로서 그들을 구속주,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야 하는데, 하나님이 한 분이시므로 이스라엘도 거룩해야만 한다(레 11:45)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 하나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민수기에서는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구 조사는(1, 26장)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곧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모두 한 조상 야곱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하나됨은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인구 조사는 전쟁에 나갈만한 사람을 열거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그리고 모든 지파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하기 위하여 정탐꾼을 1명씩 보냈고(13:2), 미디안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각 지파에서 1,000명씩 보냈다(31:4). 나중에 르우벤,갓,므낫세 반 지파가 트랜스요르단에 정착할 것을 요청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됨을 개뜨리는 심각한 위기였다. 결국 그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하기로 하고 나서야 트랜스요르단 정착이 허락되었다(32:1-33).
(2) 거룩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지 사람의 성품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거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거룩은 결국 사람의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근거한 것이다. '거룩'이라는 성품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을 깨뜨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다. 민수기에는 이러한 측면이 두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곧 불순종과 부정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민수기는 이것의 치료법을 다룬다. 이렇게 파괴된 거룩함을 회복하는 치료법 또는 구제법은 더러움이나 죄로 오염된 사람을 진영 밖에 격리시키는 것과 정결케 하는 물로 깨끗케 하는 것이다.
신명기
1. 전문(前文): 선지자의 본질과 기능
신명기는 '이는 모세가…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1:1)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대변자', 또한 '선지자'로서 모세의 역할을 지적하는 말이다. 선지자로서 모세는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에 들어갔으며, 인간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또한 최초의 선지자로서 그는 다음 세대에 나타날 선지자들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기본적인 지침을 확정하였다(참조. 13:21-5; 18:15-22). 그러나 모세의 선지자적 역할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맡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임있는 인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을 촉구하며, 그들이 언약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았을 때 뒤따를 결과에 대해 경고해야 했다.
2. 역사적 서언(序言) : 역사 신학
언약에 있어서 역사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역사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하셨던 일을 계시해 준다. 다시 말해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신명기에 있어서도 역사의 역할은 이러한 사실에 초점이 집중되어 있다. 즉,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현제의 시점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행동의 틀을 마련해 준다.
3. 일반규정 : 언약 관계의 근본 원리
신명기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연결하는 언약 관계의 근본원리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인 위치에서 언약을 체결하게 된 동기도 사랑이며,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이 사랑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와 같은 관계의 본질 -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 이 구체화된 것으로 십계명을 들 수 있다(5:6-21).
4. 특별 규정 : 언약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
신명기 언약법의 특별 규정이 취급하는 내용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즉, 여기에는 성소, 우상 숭배, 절기, 성적 범죄, 전쟁, 노예, 안식년, 예언과 제사 제도, 경제 문제, 유괴 등이 망라되어 있다. 이것들은 크게 의식법, 종교법, 시민법, 형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대 세계에서는 자주 종교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이 구분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그러한 구분은 인위적이며 허구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삶은 언약의 주(主)이신 하나님의 지배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하나님께 성실했을 때에만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5. 축복과 저주 : 보상과 형벌
신명기에서 축복과 저주를 취급한 부분(27-28장)은 신명기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축복에 대해서보다는 저주를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약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장수와 약속된 땅의 소유 등 축복이 주어지며, 반대로 불순종은 불행을 초래한다.
여호수아
(1) 족장들과 맺은 언약의 신실성.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점이다(참조. 13:1-7). 즉 어떤 지파들은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땅을 아직 그들의 기업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참조. 15:63'17:12 등).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니라 계속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한편 그 땅은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대로 주신 땅이기도 하다. 즉, 이미 완성한 것(already)이지만 그러나 아직(not yet)이라는 주제가 깔려 있다.
(2) 가나안 땅에 관한 내용.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 이 책에서 '여호와의 기업' 또는 '유업'으로 불리고 있으며 여호와의 소유지(22:19)로도 불리어 진다. 땅의 진정한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서 나그네처럼 우거하는 자로서의 삶의 태도를 지녀야 했다. 레 25:23이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기업'과 '나그네'란 말이 신약에도 그대로 나타난다(벧전 1:4; 히 11:13; 롬 8:17).
(3) 안식에 관한 내용.
히 4장은 여호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시키고 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안식하는 것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안식의 의미로 나타난다. 안식에 관한 의미는 신 12;9-10;25:19; 삼하 7:1에 있다.
(4)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내용.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대화를 한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직접 말씀하신다(1:1-9). 때로는 제비 뽑는 것으로(7:14) 혹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통하여 자기 뜻을 알리셨다(5:13-15).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 주셨지만, 그 땅을 정복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책임을 면제시키지는 않으셨다(1:3;10:7-9).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안식을 주시고 그 땅에서 여호와만을 성실하게 사랑하고 경외할 것을 명하셨다(22:5;24:14). 또한 하나님은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이 임하지만(23:5), 불순종한 경우 파멸이 있을 것을 나타내셨다.
(5)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멸절시킨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6:2; 8:1-2; 10:8). 그것은 가나안 족속의 강퍅한 마음(11:20)과 죄의 관영함(창 15:16)을 심판하신 행위였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자연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인간의 범죄를 심판하는데 있어 죄의 연대 책임이 나타난다(7:15). 아간 개인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비교. 창 34:7;삿 19:23;20:6;렘 29:23). 구약의 다른 곳은 개인의 죄가 자신에게만 해당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신 24;16; 겔 18:20; 렘 31:30). 신약에서도 죄의 연대 책임 및 개인의 책임 모두를 가르치고 있다.
사사기
사사기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다. 곧 이스라엘이 그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스엘에대한 하나님의 왕권은 시내 산 언약(출 19-24 장)에 의하여 수립되었으며, 그 후 모압 평지(신 29장)에서 모세와, 세겜(수 24장)에서는 여호수아에 의해 다시 확인되었다. 사사기의 기록자는 여호아의 왕권을 반복해서 거부한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여호와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여호아를 위한 전쟁을 거부하고, 가나안 신들에게로 돌아섰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렸다.
사사기의 구조상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사사 기드온은 여호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심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켜야 했다(참조. 8:23).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18:1; 19:1; 21:25)고 하는 반복 어구는 여호아의 통치를 중개할 인간 통치자가 없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구절은 이스엘이 하늘에 계신 왕을 인정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은 것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한다.
불순종·이방인의 압제·곤경중에서의 부르짖음·구원이라는 반복적 주기(週期)로부터,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끌어낼 수 있다. 그것은 언약에 대한 여호아의 신실하심이다. 혼란스러웠던 사사 시대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와 오래 참으심이 잘 나타난 때도 없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불충(不忠)과 배약(背約)의 역사였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만 주변의 이방 나라들에게 흡수당하지 않을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와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앞으로 도래할 여호아의 종 다윗과 그의 왕조의 수립을 기다리는 구속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진행된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한 구원 사건에 뒤따라 오는 이 시대(사사 시대)는, 놀랍게도 성령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활동하신 때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신은 사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을 대항하여 싸우는 거룩한 전쟁에서 큰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주었다(참조. 3:10; 6:34; 11:29; 13:25; 14:6, 19; 15:14; 삼상10:6,10; 11:6; 17:13). 바로 이 성령으로 권능을 받은 여호아의 백성들은 복음을 모든 나라에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룻기
1. 하나님의 이름
룻기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각자 여호아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고백한다('여호와' 라는 이름은 룻기에서 18회 나온다). '여호아' 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그들을 시내 산으로 이끄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 다른 하나님의 이름은 '엘 샤다이' 이다(1:20, 21). 창세기에 나오는 '엘 샤다이' 라는 이름은 인간의 무력함함을 강조하고, 인간의 무기력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대해 말할 때 사용되었다.
2구속
'기업을 무르다·구속하다' 라는 히브리 어 동사 '가알'이 이짧은 책에서 20회 나온다. 이말은 가족법과 관련되는 용어이다. 곧 한 가족(친적)의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1) 가족(친족)의 재산을 다시 무르거나(레 25:25), (2) 종으로 팔린 형제를 자유롭게 해 주거나(레 25:47-55), (3) 또는 자기 친족을 죽인 살인자에게 복수하는(민 35; 신 19:6)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이런 보호자가 된 가까운 친족을 '고엘'이라고 한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고엘'이라고 말할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하는 것이다.
3.헤세드(자비 loving-kindness)
'헤세드'라는 히브리 어 단어는 1:8과 2:20과 3:10에 나오는데 그 의미를 한 단어로 나타기는 매우 어렵다. 룻기에서 선택,은혜,인애 등의 뜻을 가진 '헤세드'는 '하나님의 신실한 보호' 뿐만 아니라,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의 따스함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체험한 사람은 그것에 의해서 변화되어야만 한다. 나오미와 보아스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헤세드'를 베풀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모압 여인 룻이었다(3:10,'너의 베푼 인애가').
사무엘상
(1) 왕정 체제를 수립한 사무엘의 생애와 사역.
(2) 백성들이 요구한 세속적인 왕의 표상인 사울의 생애와 그의 통치하의 이스라엘.
(3) 메시야 왕국을 통치할 의로운 통치자의 표상인 다윗의 생애 및 사역과 그의 통치하의 이스라엘.
본서를 사건별로 요약하면, 사무엘의 출생 기사로 시작하여(1장), 다윗이 진정한 왕으로 부각되면서 사울은 그 일가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으로(삼상 31장) 상권은 끝을 맺는다. 이어서 하권은 사울의 사망 소식을 듣는 다윗의 기사로 시작하여 다윗 왕정의 종말에 관한 기사로 끝을 맺는다.
한편, 사무엘서에서 처음으로 메시야('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말이 찬양 내용 중의 하나에 사용되는데(삼상 2:10), 이 말은 헬라 어로는 '그리스도'로 번역된다. 따라서 이 말은 인류의 구세주요 영원하고 진정하며 의로운 통치자를 가리킨다. 구약적인 면에서 메시야의 일차적 의미는, 하나님의 대리자 또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중보작적인 역할을 가리킨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삼하 2:4,7;3:39;5:3,17)로 언급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신정국 이스라엘을 통치할, 대리자 및 그 백성의 중보자로서의 위치를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 왕국의 영원한 통치자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구약적 표상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을 세워 메시야 왕국의 궁극적인 도래를 소망하도록 역사의 의미와 방향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다윗이 건설한 이스라엘 왕국은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이다. 그리고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다스리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다윗 왕국의 계승으로 묘사되고 있다(암 9:11; 사 11:1-10).
사무엘하
본서는 다윗을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이상적인 신정 통치의 진정한 대리자로서 묘사한다. 다윗은 일차적으로 유다 지파에 의해 헤브론에서 왕으로 추대된다(1-4장). 그 후 이스보셋이 살해 된 후에는 나머지 모든 지파에 의해서도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5:1-5). 다윗의 통치력은 확실하고 능력있게 집행된다. 그는 여부스 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그 곳을 왕의 도시로 정한다(5:6-14). 곧이어 법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모든 백성과 민족 앞에서 자신과 그 백성을 여호아께서 통치하신다고 선포한다(6장;시 132:3-5).
한편 다윗은 하나님의 처소이며 그 백성의 예배 장소인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 곧 다윗 왕가의 영원한 존속을 약속하신 내용이다. 사무엘하의(또는 이스라엘 역사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이 장은 다윗 언약의 수립을 의미한다(시 89:34-37).
열왕기상
열왕기 저자는 이 기록을 통해서 그들에게 임한 참상, 그들의 성전 파괴, 왕가의 굴욕, 그리고 열조의 땅에서 쫓겨나 타국에 포로로 끌려가는 데까지 이른 비운의 원인이, 그들 자신의 죄악과 하나님의 대한 배반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동족들에게 가르키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포로로 잡혀 왔지만 신앙을 저버리지 말고, 이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 모든 죄악과 우상을 버리고 옛 신앙을 회복하라는 의도로 본서를 기록했다. 열왕기는 그 안에 '하나님 나라' 라는 깊은 신학을 간직하고 있으며, 절망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망을 심어주는 구약 교회사이다.
본서의 저작 목적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근거로 할 때 왕국의 흥망성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에 달려 있으며, 왕들의 성공 여부도 모세의 법대로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저자의 의도 속에는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이스라엘의 영웅들을 영화롭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래서 저자는 세속 역사가들의 눈에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될만한 업적들을 전혀 무시하기도 했다. 저자의 주된 관심은 왕들과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언약에 대하여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열왕기하
[1] 열왕기상
1. 통일 왕국시대(1:1-11:43)
2. 분열 왕국시대(12:1-22:53)
[2] 열왕기하
1.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1:1-17:41)
2. 남조 유다의 멸망(18:1-25:30)
역대상
역대기 저자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회복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여 이 역사서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역사서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역사의 계속성 곧 과거 역사와의 연결성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의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 "그의 언약은 아직도 유효한가?" 또는, "지금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은 왕도 없고 오히려 바사(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형편인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는 "하나님의 대심판(다윗 왕가의 몰락과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및 바벨론의 포로가 됨)을 당하고 있는 판국에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가 무슨 소용인가? 등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 역대기 저자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역대하
역대상.하의 핵심어는 "왕가의 계보"와 "헌신" 등이다. 역대상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왕권에 이르게 되는 다윗 왕가의 계보를 특별히 자세하게 설명한다. 다윗의 일생은 철저히 하나님께 헌신된 삶으로 묘사된다. 그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했으며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져왔고 하나님을 위하여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려 했다.
에스라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렘 29:10-14)하신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은 본서에서 성취된다. 모두 세 차례의 귀환 중 에스라에는 제1, 2차 귀환이 나타난다. 에스라서는 그 내용을 크게 둘로 구별해볼 수 있다. 첫째는 1-6장에 걸쳐 나타나는 성전 재건의 역사이다. 약 70년의 세월동안 포로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안정을 누리던 때였지만 잃었던 신앙을 되찾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과감히 귀환길에 오른 것이다. 먼저 제단과 종교적인 절기들을 회복하고, 여호아 하나님의 성전복 사업을 시작한다. 수많은 반대와 방해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슥 4:6) 말미암아 완성케 된다. 두 번째의 주요 내용은 자체 개혁(7-10장)이다. 첬 번째 내용은 스룹바벨이 지도적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에스라에 의하여 진행된다. 제1차 귀환후 81년만(B.C. 457년)에 소수의 무리를 데리고 에스라가 귀환한다. 에스라는 1차 귀환으로부터 에스라 귀환 당시까지 극도로 혼탁해진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율법의 말씀에 입각하여 개혁을 성공시킨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죄의 회개와 영적인 부흥은 재건된 성전과 더불어 귀환한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느헤미야
본서에 나타난 주요 내용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과 여호아의 율법에 대한 충성이다. 예루살렘 성벽은 유대 인들에게 있어서 성전과 더불어 민족의 상징이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원수들의 갖가지 조롱과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건축하라는 나팔소리는 결국 승리의 환호로 이어져,죄악으로 인해 허물어졌던 성벽이 갖은 고초 가운데서 재건되었다. 이는 포로 후의 새출발에 있어서 새 삶의 터전이 되었고, 또한 신앙의 증거로서 후대에 큰 귀감이 되었다.
느헤미야는 이전 자기 민족의 멸망과 포로생활의 고난은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한 범죄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율법의 회복과 거룩한 말씀에 대한 충실한 해석 및 준행에 그의 정성을 기울여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특히 제사장겸 학사인 에스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서 마음판에 새겨 온전한 생활을 하도록 했다.
에스더
에스더서의 핵심어는 "아름다움"과 "섭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축복하사 아름다운 외모를 주셨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하나님이 그녀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헌신된 마음 때문에 그녀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셨다. 이처럼 한 미천한 유대 여자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왕비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비록 에스더서 내에는 하나님이란 이름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지만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 저기에서 나타난다.
1. 폐위된 와스디 왕비(1:1-22)
2. 왕비가 된 에스더(2:1-18)
3. 왕의 생명을 구한 모르드개(2:17-23)
4. 유다 인들에 대한 하만의 계략(3:1-15)
5. 에스더의 결심(4:1-17)
6. 연회를 베푼 에스더(5:1-14)
7. 굴욕 당하는 하만(6:1-14)
8. 에스더의 두 번째 연회 (7:1-10)
9. 모르드개의 조서(8:1-17)
10. 유다 인의 승리와 부림절의 기원(9:1-10:3)
욥기
욥기에서 다루는 주제는, 온 세상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사람들이 간혹 품게 되는 의문점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다른 사람에게 좋은 본이 되는 사람에게 닥치는 재난의 이유는 무엇인가? 반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악인들이 편안하게 지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다면, 왜 의인이 고난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방관한 채 계시는가? 하나님은 실제로 공의로우신가? 하나님은 과연 전능하신가? 하나님은 땅 위에 도덕적인 질서를 유지하실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욥기는 이와 같은 질문들에 답할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욥은 극심한 고난을 통해 자기 연민에 빠지고, 하나님에게 불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케 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는 진리를 시련을 통해 확고하게 깨달았다. 비록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이 책은 하나님의 고귀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실상 욥은 진정한 복종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로 하나님께 선택되는 영광을 가졌던 것이다.
사단은 욥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보다는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비방했다. 즉 물질적인 복만을 받기 위한 방현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게서는 이 점에 대해서 사단이 그릇되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욥을 선택하였다. 욥이 이 의도를 미리 알았더라면, 닥쳐 오는 시련들을 기쁘게 감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절망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시편
1. 하나님 개념의 특징
유일신관(唯一神觀)이 왕권 사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어떤 학자들은 시편의 유일신 사상을 부인한다.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시 77:13; 81:9; 135:5)라는 구절이다. 즉, 이스라엘은 많은 신들 중에서 오직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았을 뿐이란 것이다. 즉,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시편에서 혹시 '신들중에…'(86:8)와 같은 표현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신을 인정하는 말이 아니다. 내 주만 하나님이며(86:10), 다른 신이라 불리는 것들의 실상은 헛 것이요 거짓 것(135:15)이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한다. 때문에 다른 우상과 하나님을 비교한다는 듯한 구절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왕권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시 95:3-6).
2. 시편이 이해한 죄악
죄악이라면 시회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서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편에는 이 양자가 모두 존재한다. 사회적인 죄악을 철저하고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반면, 영적인 면도 깊이 취급한다. 그러나 엄밀히 파고 들면, 그 둘은 영적인 죄악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의 죄악관은 영적이요 개인적이다.
3. 시편이 이해한 징벌
구약에서는 종족, 또는 혈통적 연대책이란 것이 강조되고 있다. 즉 공동체나 한 가정에 있어서 어떤 일원의 범죄는 그 징벌이 개인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미치고 있음을 본다(수 7:1: 삼하 21장).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하나의 몸으로 보는 견지에서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나 후에는 점점 그 책임이 개인화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 즉 혈통적인 연대성보다도 영적 연대성과 개인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는것이다. 따라서 한 시편 기자는 79:8에서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담대히 기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징벌의 원리는 또한 복과 보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보상과 복도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개인적이다.
또한 징벌의 원리는 악인과 의인에 대한 궁극적인 징벌과 보상을 말하고 있다. 악인의 번영은 있을 수 있으나 일시적이므로, 의인이 낙심할 바 아니다. 그들에게는 마침내 징벌이 있을 것이다(37:7; 39:1; 73:1-3).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나(1:3),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선언한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자기의 연한(年限)이 차기 전에 핍박으로 죽어가고, 악인은 고통 없이 자기의 수명을 채우고 죽기도 한다. 이에 대한 문제는 결국 메시야를 대망케 하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을 심화시켜 주었으며, 또한 사후 세계의 궁극성을 바라보게 해주었다.
제1권 : 1-41편
제2권 : 42-72편
제3권 : 73-89편
제4권 : 90-106편
제5권 : 107-150편 시편은 네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앙 공동체의 시, 개인적인 신앙 고백의 시, 찬양의 시, 왕의 시(Royal Psalm) 등이다.
1. 신앙 공동체의 시
하나님 백성 전체가 그 주체가 되는 시이다. 당연히 주어가 복수로 나타난다. 공동체의 애가(哀歌)와 공동체의 감사시로 다시 나눌 수 있다. (1) 애가(哀歌)-큰 재난의 ?, 전쟁에서의 패배, 흉년 등의 어려운 때에 겸손히 재에 앉아 호소하는 회개와 간구의 노래들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시편들로는 44, 60, 74, 79, 80, 83, 85편 등이 있다. (2) 감사시-공동체의 승리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것으로서, 124편과 129편이 이에 속한다.
2. 개인적인 신앙 고백의 시
대부분의 시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신앙 공동체의 시와 같이 애가와 감사시로 나뉜다. (1) 애가-질병, 불행, 박해, 비난, 학대 등의 환난과 결부되어 있으며, 이런 것들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들도 공동체와 절대적으로 무관하지는 않다(참조. 시 22:22-23). 그리고 이러한 시들의 특징은 항상 성소(聖所) 지향적이라는 점이다9참조. 시 3;4;5:7). 여기에 해당되는 시는 40여 편이나 된다(3, 5, 6, 7, 13, 17, 22, 25, 26, 27, 28, 31, 35, 38, 39, 40, 42, 43, 51, 54, 55, 56, 57, 59, 61, 64, 68, 69, 70, 71, 86, 88, 102, 109, 120, 130, 140, 141, 142, 143편 등). (2) 감사시-이 유형에 속하는 시들이 감사시의 대표적인 시들이다. 감사시의 특징은 과거의 환난 중에 있을 때 부르짖었던 애가를 회상하는 데 있다(시 30;8-10). 이 유형에 해당되는 서는 열세 편이 있다(18, 31, 32, 34, 40, 41, 66, 92, 100, 107, 116, 118, 138편 등).
3. 찬양의 시
찬미의 대상에 따라서 분류된다. (1)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시(8, 19, 29, 104,편) (2) 시온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시(46, 48, 76, 84, 87, 122, 137편) (3) 구속의 역사를 찬미하는 시(78, 81, 105, 106, 111, 114, 135, 136편) (4) 하나님의 왕국을 찬미하는 시(24, 27, 68, 93, 95, 96, 97, 98, 99편) (5) 하나님의 율법을 찬미하는 시(1, 19, 119편) (6) 이러한 것들이 혼합되어 있는 시(33, 103, 113, 115, 145-150편 등). 전형적인 형태의 찬양의 시는 서곡과 본곡과 종곡으로 나뉘는데, 117편이 그 좋은 예이다.
4. 왕의 시
왕의 시(메시야 시)는 물론 직접적으로는 왕에 대한 찬양이지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데에 찬양의 의미를 부여하므로, 결국 이러한 시들은 메시야를 내다보는 예언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 해당되는 시는 모두 열한편이 있다92, 8, 20, 21, 45, 72, 89, 101, 110, 132, 144편 등).
5. 그 밖의 시
이상의 네 가지 구분 이외에도 지혜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인간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시편으로서 127편, 128편, 133편 등이 있으며, 인생의 생존 문제를 다룬 시로 16편, 37편, 49편, 73편 등이 있다.
잠언
이 책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게 되는 지혜로운 삶을 강조한다.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혜롭기 때문에, 지혜로운 삶은 곧 경건한 생팔이다. 이와 대조적인 것이 악인 또는 불의한 사람의 어리석은 삶이다. 이 두 가지 삶의 특징과 결과는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된다.
잠언에서 다루는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지혜와 어리석음·의로움과 사악함·삶과 죽음·지식과 무지·근면과 나태·질서와 무질서·성공과 실패·자제와 분노·신실함과 신실하지 못함·복종과 반항·정직과 사기·정의와 불의·진리와 거짓·존귀와 치욕·칭찬과 비난·교만과 겸손·깨끗함과 더러움·격려와 비방·화평과 다툼·사랑과 미움·인자와 잔인·관용과 탐욕·기쁨과 슬픔·부와 빈곤·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 등이다. 따라서 이 책이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진 것도 당연하다.
전도서
전도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인생을 즐길 것을 강조한다(2:24-26; 3:12, 22; 5:18-20; 8:15; 9:7-9; 11:7-10). 이 사상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쾌락을 즐기라고 하는 쾌락주의의 일종이라고 잘못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저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인생 향락(享樂)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참조. 2:24-26; 3:13; 5:19-20; 9:7).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2:26), 그분을 경외하고(8:12),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며 자제하는 사람만이 그 향락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 향락과 대조를 이루는 사상이 '헛되다'는 말로 표현된다. 전도자는 인간사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선언한다. 여기에는 사람의 수고(1:14; 2:11, 17; 4:4, 7-8)·지혜(2:15)·의로움(8:14)·재물(2:26; 5:10; 6:2)·존귀(4:16)·쾌락(2:1-2)·젊음과 힘(11:10)·생명(6:12; 7:15; 9:9)·사후(死後 11:8) 등 인간사에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 모든 것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단정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수고 함으로써 위대한 일들을 성취할 추 있고, 그 결과 다소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2:10). 지혜를 사용하면 쉽게 일을 끝낼 수 있다(10:10). 사람의 의로움은 불의보다 더 낫다(8:12-13). 그러나 인간의 타락(7:29)·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6:12)·죽음의 급박성(12:1-7)·사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사람의 수고와 지혜와 의로움은 궁극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전도자는 '해 아래서'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방편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권하고 있다.
아가서
아가서는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책'으로서,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진정한 사랑, 즉 성도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보여 주는 하나의 비유
1. 제목(1:1)
2. 사랑을 구함(1:2-2:7)
3. 만남과 헤어짐, 다시 만남(2:8-3:5)
4. 결혼예식과 첫날 밤(3:6-5:1)
5. 잃었다가 다시 찾음(5:2-8:4)
6. 사랑의 성숙과 확인(8:5-14)
이사야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 나아가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밝혀주는 책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1:4;6:1)로서, 그분을 거역하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나, 나중에는 그들을 구속하실 것이다(41:14,16). 이스라엘은 소경과 벙어리된 나라요(6:8,10;42:7), 황폐케 될 포도원이요(5:1-7), 공의와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백성이었다(5:7;10:1,2). 사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그분께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민족들에게 장차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했으며, 이 심판의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언급했다. 더 나아가서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모든 나라들과 그 나라들의 통치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40:15-24) 절대 주권을 지니신 분으로 소개되었다(25:8).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긍흘히 여기시며(14:1, 2), 그들을 죄와 어두움의 권세로부터 또한 정치적인 압박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속하시고(35:9;41:44), 구원하시는(43:3;49:8) 사건은 제2의 출애굽이 될 것이다.(43:2,16-19;52:10-12).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창조주께서(40:21,22;48:13) 그 백성을 고향으로 인도하실 그때에 사막에 시내가 넘쳐 흐르게 하실 것이다(32;2). 포로 생활로부터의 귀환을 상징하는 대로(大路)는 본서 전후반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1:16;40:3). 여호와께서는 열방을 사용하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5:26).
메시야 시대의 특징으로서 본서에는 평강과 안전이 묘사되었다(11:6-9). 다윗의 왕위를 잇는 한 왕이 의로움으로 통치하실 것이며(9:7; 32:1), 그 왕으로 인해서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으로 모여들 것이다(2:2-4).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악한 지도자들로부터 압제를 당하지 않을 것이며(11:14; 45:14),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성읍'이라고 불릴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42-53장에서 메시야 왕(Messianic King)을 '나의 종'이라 칭하셨다. 또한 이 용어는 한 나리인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되었다(41:8,9;42:1). 진정한 구원은 여호와의 종의 고난을 통해서 온전히 성취된다. 참된 여호와의 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고레스는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원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지만(41:2),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의 사슬로부터 구원하신다(52:13-53:12). 그리스도께서 '이방의 빛'이 되시므로(42:6) 심판에 직면한 나라들이(13-23장) 구원을 얻게 되었다(55:4,5)
이사야서는 '여호와의 종'인 의로운 통치자가 이 땅에서 주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해 나아가리라는 그 정점을 향해 예언의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예레미야
예레미야서의 가장 특징적인 내용은 '새 언약'이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당대에 편만한 '모세 언약'이나 '다윗 언약'에 근거한 단순한 회복이나 실현이 아니다. 가히 '새롭다'라는 형용사가 수반될 만큼 이전 언약에 비해 전혀 획기적인 사실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죄악을 용서할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심령을 새롭게 창조하여 하나님을 향해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게 할 뿐 아니라, 사죄의 은총을 내려 죄악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분명히 심판의 메시지였지만 그것은 동시에 구원의 메시지였다.
1. 서두(1:1-3)
2. 예레미야의 소명과 두 가지 환상(1:4-19)
3.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2:1-25:38)
4.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논쟁(26:1-29:32)
5. 위로의 책(30:1-33:26)
6.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당시에 주어진 예언(34: 1-39:18)
7. 예루살렘 함락 후의 예레미야의 생애(40:1-45:5)
8. 열방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46:1-51:64)
9.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유수(52:1-34)
예레미야애가
■ 구조
본 애가서는 각 장이 22절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한 예외가 있다면 66절로 기록된 3장인데, 살펴보면 이 3장 또한 '22절 구조'라 볼 수 있다(22×3). 이러한 형식은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절을 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히브리 알파벳은 22자임).
■ 사상
예루살렘이 폐허화되고 언약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버린 B.C. 587년의 참극은, 소위 언약 백성에게 많은 의아심을 품게 했다. 어떻게 계약의 하나님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파괴를 묵인하셨는가? 이와같은 질문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하여 인간에게 내리시는 한 방편이다(3:37).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 목적을 이루시도록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길(3:25-27)일 뿐이다. 시인은 이를 생각하며 절망중에 감사했다(3:23). 하지만 그는 그날을 기다리며 간구한다.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5:21).
에스겔
(1)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징계로서, 이것은 그들에게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징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배교의 죄악에서 구해 내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었다(1-24장).
(2)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들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고 움직이시는 온 우주의 통치자요 주권자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들도 심판으로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25-32장)
(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그 가운데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회복시키시고 친히 그들의 영원한 목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야가 통치하실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섬기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복들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 다가오고 있다(33-48장).
다니엘
1. 바벨론 궁전에서의 다니엘(1:1-21)
2. 느부갓네살이 본 큰 신상(2:1-49)
3. 풀무불에서 건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3;1-30)
4.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의 겸손(4;1-37)
5. 벨사살의 잔치와 다리오의 박해(5;1-6:28)
6. 네 짐승에 대한 이상(7:1-28)
7. 수소와 수양의 이상(8:1-12:13)
다니엘 서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한 그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열강의 군주들과 열국의 역사와 자연의 힘을 그의 예지와 권능으로써 어떻게 다스리고 조종하시는지를 제시하는데 있다.
호세아
호세아는 자신의 책에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이 책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체험을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보여주는 극적인 묘사 수단으로 활용하고 계신다. 여호와의 마음은 자기 백성을 향한 따뜻하고 간절한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다(11:8). 여호와는 기이한 사랑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14:4). 호세아는 자신의 메시지에서 심판과 사랑을 가장 큰 주제로 삼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는 죄는 공의의 심판을 초래하고 심판 후에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사랑은 언제나 자기 백성의 소망이 된다. 심판과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중심이 되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요소를 나타낸다.
1. 선지자의 결혼 생활(1:1-3:5)
2.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 심판(4:1-13:16)
3. 이스라엘의 회개와 축복(14:1-9)
요엘
선지자가 환상 속에서 본 메뚜기 떼가 직접적인 저작 동기이다. 메뚜기 떼는 적의 침입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여호와의 날'의 징조로 서술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이 범죄한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의 날이 아닌 캄캄한 날이요 크고 두려운 날이며, 해와 별이 빛을 거두고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날임을 인식시킨다.
본서의 교훈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다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 이날은 희망의 날(암:18)이 아니라 저주의 날이 될 뿐이다.
아모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했다면(6:1-5),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한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속성을 공의 혹은 정의로 파악하고, 이것이 인간 도덕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가르쳤다(5:24). 그러나 그 하나님은 도덕적인 실제만이 아니요 창조의 하나님이기도 하며 계시의 하나님, 섭리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4:13).
특히 그에게 두드러지는 것은 유일신 사상이다. 우상을 말할 때 거짓 것, 헛 것이라 불렀다(2:4). 이는 우상을 가리켜 그렇게 부른 첫 사례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이방신의 실재(實在)를 인정하여 나라마다 지방마다 각각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와 하나님도 그중 하나에 불과한, 이스라엘 민족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신인 여호와와 아울러 바알을 섬기는 혼합주의를 택했다. 하지만 아모스는 우상이 실재(實在)하지 않고 다만 헛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또한 당시에 제사는 믿음과 별개의 것으로 취급 되었다. 믿음과 행위는 없고 불순종의 반복 속에서 의식적인 제사만이 시행되었다. 아모스는 이를 개탄하여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5:21-23).
이것은 공의를 진멸하고 정의에 눈감은 제사가 얼마나 헛된 것임을 지적한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선포하렸다. 이날은 공의가 이행되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악인들은 심판받고 의로운 '남은 자들'은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오바댜
오바댜의 예언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짧은 에돔 족속에 대한 한정된 심판처럼 보이나, 담겨 있는 의미는 심오하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게 행한 에돔의 교만하고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 우주적인 심판으로 확대된다(15, 16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오바댜 예언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다."(Hengstenberg)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에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하고 악한 이방인의 태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비교. 욜 3:19). 그러나 오바댜의 예언이 전적으로 미래의 예언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므로, 역사 가운데서 에돔의 행위와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이 징계에 대한 이방인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심판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유다에 대해 방관하고 악한 행동을 가하는 그 자체 또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요소가 되는 것이다.
남은 자가 땅을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갱신이다.
요나
요나서의 핵심어는 "물고기"와 "순종"이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킨 사건은 요나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사건은 오히려 선지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뻗치신 손과 같은 것이다. 물고기 뱃속에 있는 동안 그는 회개하였고 다시 큰 구원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요나가 순종하고 니느웨로 간 행동을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큰 열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미가
미가서의 핵심어는 "정의", "자비", "겸손"이다. 미가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의 모든 삶 속에서 정의를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고 외친다.
나훔
그는 앗수르의 죄악 중 두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번째의 것은 군사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한 점이다. 그 결과 피가 강처럼 흘렀으며, 많은 민족이 멸절되었고, 훌릉한 관습과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전쟁이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다(2:11-13). 정복자 앗수르 인들, 특히 앗수르 바니팔 등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을 살펴보면, 말뚝을 박아 사형을 집행하고 인골로 피라밋을 쌓았으며 그밖에 너무도 끔찍하여 묘사할 수 없는 많은 야만적인 행위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멸시하였던 그 백성들에게 나훔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리라'라고 선포하였다.
나훔이 지적하는 두번째의 다른 죄악은 비양심적인 교역이었다. 그 주변국가들은 아부와 부패로 정복민들의 사치와 악을 만족시켜 주고 있었고 상인들은 황금에 굶주려 온갖 종류의 우상과 세공품, 그리고 악을 조성할 만한 모든 물건을 팔았다. 그들에게 정직과 도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며 부만 얻고 쾌락만 즐기려 하였다(3:1-4). 그러나 나훔은 유다 민족에게 좋은 소식을 전달하는 사자가 오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이 압제자의 멸망에 대한 감사로써 종교 절기를 지키고 양심적으로 서원을 갚고 의무제사를 드리라고 권고한다(1:15).
하박국
하박국 선지자는 나훔과 마찬가지로 자기 백성을 비난하고자 나선 것이 아니다(1:2-4은 약간의 불경건한 자들을 책망한 것이다). 그렇다고 국수주의자처럼 자기 민족애에 빠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동기는 불의하고 비도덕적인 세력이 세계를 통치하는 데에 대한 의인의 고뇌이다. 또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서의 위대한 주제는 사도 바울(롬 1:17; 갈 3:11)과 히브리서 기자(히 10:38)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으며 종교 개혁과 루터의 개혁 이념이기도 하였다.
하박국서의 핵심어는 "믿음"과 "정의"이다. 이 하박국서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시고 그분이 작정하신 모든 계획 속에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스바냐
스바냐의 메시지는 '여호와의 날'이 주요 내용이다. 여호와의 날에는 모든 사람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멸절당한다(1:2-3).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악한 아들과, 유다를 괴롭혀 온 이방 족속도 포함된다(2:4-15). 그래서 '여호와의 날'은 희생의 날(2:8)이며, 분노의 날, 고통의 날, 황무와 파괴의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2:14)이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거짓 예배에 있다. 즉, 하나님을 무시하며, 더 나아가 그의 존재를 인정치 아니한 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소인 예루살렘에서 이방신들을 섬기며(1:4, 5), 하나님을저버렸다(1:6). 그들은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1:12)는 불신앙에 빠져 있었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부패와 악정과 거짓을 거듭 자행하고 있었다(3:1-8).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인에 대하여 분노를 쏟으실 수 밖에 없었다(1:2, 3; 2:4-18; 3:8).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진노의 날이 임박하기 전에 회개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2:3). 또한 회개를 촉구하기에 앞서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2:4-15).
마지막 후반부에서는 선지자의 메시지가 갑자기 변한다. 즉, '여호와의 날'은 기쁨의 날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것은 진노의 날에 전능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남겨 자신의 의로운백성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의 심판과 종말이란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기쁨이 된다. 왜냐하면 그날이 원수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되지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 되기 때문이다.
학개
학개서는 오바댜 다음으로 구약에서 분량이 가장 적은 책이지만 그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
선지자 학개는 먼저 불순종의 결과와(1:6, 11; 2:16-17) 순종의 결과를(2:7-9, 19) 명백하게 보여준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의 전(殿)에 우선권을 둘 때 그들이 받는 보상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임을 역설한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성령의 격려와 힘을 가져온다(2:4-5).
제2장은 '만국의 보배'(만국이 사모하는 것)라 불리는 메시야의 도래를 말한다(7절). 그의 오심으로 재건될 성전은 영광으로 가득차게 된다(9절). 여호와께서는 스룹바벨을 인(印)으로 삼으사 장차 메시야가 오실 사실에 대한 보증을 삼으셨다(23절).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있을 열방에 대한 심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때 만국은 진동할 것이며 부서질 것이다(2:6-7, 21-22; 참조. 히 12:25-29).
스가랴
여호와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지와 자신이 임재해 계시는 곳으로 삼으려고 하셨다(슥 1:1-6; 8:7).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한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이러한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범죄한 자에게는 징벌이 있으며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선포해야만 했다(3:2, 9; 5:3, 4, 8).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열국과 모든 피조물에까지 미친다(8:23; 12:1). 결국 열국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2:13; 6:1-8; 14:16-21).
하나님의 목적은 메시야에게 집중되어 있다. 스가랴서의 전반부에서(1-8장) 메시야는 비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3:8 '내 종'). 그러나 그는 다윗의 왕통을 잇는다(6:12 '순'; 사 4:2; 11:1; 렘 23:5). 후반부에서(9-14장) 메시야는 다윗처럼 목자로서(11:4; 12:10; 13:7) 그리고 왕으로서(9:9, 14:9) 나타난다.
말라기
말라기의 핵심어는 "십일조"와 "준비"이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을 때, 사실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그들이 도둑질하는 격이 되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그들이 소유한 재물보다 더 많은 것들을 빚지고 있다. 그들의 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간, 재능도 빚지고 있다. 또한 말라기의 중요한 사역의 한 부분은 백성들의 마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보내진 세례 요한을 예비하는 일이다.
마태복음
1. 그리스도의 탄생과 유년기(1:1-2:23)
2. 그리스도의 세례와 시험(3:1-4:25)
3. 산상 설교(5:1-7:29)
4. 열 가지 이적과 관련된 사건들(8:1-9:35)
5. 열 두 제자의 파송(9:36-10:42)
6. 세례 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1:1-30)
7. 바리새 인들의 반대(12:1-50)
8. 천국 비유(13:1-52)
9. 예수님이 배척당하심(13:53-17:27)
10. 메시야적 공동체 내에서의 삶의 원리들(18:1-35)
11.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과 도전들(19:1-22:46)
12. 심판에 대한 경고와 예언(23:1-25:46)
13.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26:1-27:66)
14. 그리스도의 부활하심(28:1-20)
마태복음의 핵심어는 "성취"와 "천국'이다. 마태는 참으로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세상의 구세주인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약속이 성취됐다는 주장을 더 확실히 뒷받침하기 위해서 구약의 모든 부분에서 말씀을 인용한다. 또한 마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시고 인간의 삶을 다스리신다는 복음을 소개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천국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신약 가운데 이 용어는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난다.
마가복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1:1)는 서두에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라고 십자가 앞에서 외친 백부장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고 있다. 변화산 위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9:7) 뿐만 아니라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1:11)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확증해 준다. 심지어, 귀신들까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1:24; 3:11). 그리고 예수님도 자신의 교훈에서 이 사실을 가르치셨다(12:1-12; 13:32).
1.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준비(1:1-13)
2.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1:14-6:29)
3. 예수님의 갈릴리 안팎에서의 사역(6:30-9:29)
4. 예수님의 마지막 갈릴리 사역(9:30-50)
5. 예수님의 유대와 베레아 사역(10:1-52)
6.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11:1-15:47)
7. 예수님의 구원사역 완성(16:1-20)
누가복음
1. 서문(1:1-4)
2.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1:5-2:52)
3. 공생애를 위한 준비(3:1-4:13)
4. 갈릴리 사역(4:14-9:9)
5. 갈릴리 주변 지역으로 물러가심(9:10-50)
6. 유대 지역에서의 활동(9:51-13:21)
7. 베레아 지역에서의 활동(13:22-19:27)
8. 고난과 승리(19:28-24:53)
누가복음의 핵심어는 "예수님"과 "인자"이다. 하나님의 성육화된 존재인 예수님은 종종 인자로 묘사된다. 예수님의 이런 인성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족보와 그분의 성격 및 삶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통하여서 잘 드러난다.
요한복음
요한복음은 매우 순수하고 간결한 헬라 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신학적인 통찰력은 대단히 무게가 있고 심오하다.
본서는 영원한 아들, 곧 로고스(말씀)로서의 예수님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 분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세상이 창조될 때 하나님과 함께 일하셨다(1:3).
본서 전체에는 '나는 …이니라'는 말씀이 일곱 번 반복되어 나온다. 즉, ① 생명의 떡(6:35) ② 세상의 빛(8:12) ③ 양의 문(10:7) ④ 선한 목자(10:11) ⑤ 부활이요 생명(11:25) ⑥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⑦ 참 포도나무(15:1) 등이다.
그런데 '나는 …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 말은 불타는 가시 덤불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참조. 출 3:14), 신성(神性)을 표현하는 말이다(참조. 창 17:1; 출 15:26; 35:3; 렘 3:12).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복음서이다.
나아가 요한은 유일하게 보혜사, 곧 성령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나눌 때, 예수님은 앞으로 오실 성령님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자신에 대해 증인이 될 것이지만,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시작될 것이라고 하셨다.
1. 서언: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로서의 영광(1:1-18)
2.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1:19-51)
3. 예수님의 공적 사역: 표적과 강론(2:1-11:57)
4. 수난 주간의 예수님(12:1-19:42)
5. 부활하심(20:1-29)
6. 요한복음의 목적을 진술함(20:30-31)
7. 갈릴리에 나타나심(21:1-25)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교회의 탄생과 확장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이런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1) 중심 인물-베드로와 바울
(2) 중요한 주제 및 사건들-성령님의 역할·새로운 선교지로 나아감·회심의 사건들·교회의 성장·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의 삶
(3) 중요한 문제들-유대인들의 교회 박해·유대 인들과 로마 인들 앞에서 재판받음·선교를 위한 역경과 고난
(4) 선교 범위의 확장-말씀이 전파된 범위가 5단계를 거쳐 확장된다(1:1-9:31; 9:32-12:25; 13;1-15:35; 15:36-21:16; 21:17-28:31).
로마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인류가 처해 있는 영적인 상태를 개관함으로써 로마서를 시작한다. 그는 유대 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인류가 한결같이 죄인이며, 구원 받아야 할 존재들이라고 보았다. 이 구원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완성한 구원 사역을 통해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믿음으로 이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원리이다. 그런데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경험에 있어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죄와 율법,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논리를 발전시킨다. 이러한 자유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며, 성령의 임재와 능력 속에 거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며,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스라엘도 역시 비록 현재로는 불신앙의 상태에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준다. 현재 이스라엘은 남은 자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이스라엘 전체에게 구원받을 때가 올 것이다(11:26).
이 편지는 독자들로 하여금 교회와 세상에서의 실제적인 삶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완성하라고 권면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처럼 교리 서신도 아니며, 디모데전서, 후서나 디도서처럼 목회의 지침을 가르치는 서신도 아니다. 이 서신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생활에서 부딪히던 문제점들을 다루는 실용적인 편지라는데 있다.
바울은 교회내의 분쟁, 교인들간의 법적 소송, 결혼 문제, 영적 은사의 남용, 성만찬,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부활에 대한 불신 문제 등에 대하여 바른 길을 제시한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처럼, 많은 문제들을 알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 서신은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많은 교훈을 전해준다.
고린도후서
고린도전후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처럼 교리 서신도 아니며, 디모데전서, 후서나 디도서처럼 목회의 지침을 가르치는 서신도 아니다. 이 서신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생활에서 부딪히던 문제점들을 다루는 실용적인 편지라는데 있다.
바울은 교회내의 분쟁, 교인들간의 법적 소송, 결혼 문제, 영적 은사의 남용, 성만찬,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부활에 대한 불신 문제 등에 대하여 바른 길을 제시한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처럼, 많은 문제들을 알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 서신은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많은 교훈을 전해준다.
갈라디아서
(1) 바울은 그의 사도 자격을 변호·논증한다(1:11-2:21). 바울의 사도 자격 문제는 유대주의자들이 분명히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을 열거하여 사도 자격을 변호한다.
①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부르신 점(1:11-24)
②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그의 복음이 인정받은 점(2:1-10) ③ 베드로의 위선을 바울이 책망한 점(2:11-21) 이다.
(2) 바울은 복음과 유대주의적 이단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점을 지적하며, 후자를 강력히 논박한다(3:1-5:12). 만일 아브라함의 자녀이고 그의 약속들에 참여한 자라고 한다면 구원을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바울은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의 참 의의와, 믿는 자는 율법으로 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3)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5:13-6:8).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자유의 생활을 상세히 논의하며, 육체의 일과 대조시킨다.
에베소서
이 서신은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사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모든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1-3장은 교회가 누구의 뜻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이루어졌느냐는 것을 교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교회론을 정립(定立)한 반면에, 4-6장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실제적으로 어떻게 생활하여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교회는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하며(4: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하고(4:7-16), 옛 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림으로 개인 생활을 새롭게 해야 한다(4:17-5:20). 또한 교회는 여러 인간관계에 있어 서로 복종함을 원칙으로 삼아야 하며(5:21-6:9), 영적 전투를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6:10-20).
빌립보서
빌리보서의 핵심어는 "복음"과 "기쁨"이다.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복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고통스럽고 암담한 감옥 생활 속에서도 슬퍼하기는 커녕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계속 솟아나는 기쁨을 보여준다. 그가 이런 놀라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였고 그가 섬기는 교회를 향한 사랑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목적은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이단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1:15), 만물의 창조주(1:16),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1:17),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부활하신 분(1:18), 하나님의 충만한 신성을 몸에 지닌 분(1:19; 2:9), 또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시는 유일한 중보자(1:20-22)이심에 관한 진리를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다. 골로새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의 허구성과 대조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충족성(充足性)을 드러내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녀온 디모데의 보고는 바울에게 큰 기쁨과 힘을 주었다. 디보데가 전한 기쁜 소식이란,
(1)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여전히 바울을 사모하고(3:6-10),
(2) 바울이 전해준 가르침을 잘 지키며(2:13),
(3)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쁨을 가지고 신앙을 지켰다(1:2-10)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모데의 보고 중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점들도 섞여 있었다.
(1)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고 단정하고,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4:11-12).
(2) 어떤 교인들은 신자가 된 후에도 과거 이방 세계의 부도덕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4:1, 13-18).
(3) 어떤 교인들은 죽은 성도들 때문에 너무 비탄에 빠져 이었다. 그들은 먼저 죽은 자들이 주게서 재림하실 때 불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불안감을 가지고 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1) 데살로니가 교인들의좋은 믿음에 감사하고, (2)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잘못된 점들을 고쳐주기 위해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게 되었다.
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전서가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을 겪고 있는 초신자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편지를 써야 할 필요를 느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로부터 바울의 편지를 전했을 당시의 그곳 상황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에 살았던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더 큰 핍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핍박 가운데서,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더욱 애타게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고대했다.
그 곳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갑작스럽게 임하시리라는 말씀을 오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곧 오신다고 말하고 다니면서, 일상생활에 충실하지 않고 들떠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건전한 태도를 가르친다.
디모데전서
본 서신은 교회 문제와 교회 내의 다양한 지도층의 자격 요건과 그들이 해야 할 의무 등을 다루고 있다.
바울은 본 서신을 통해 디모데가 자기의 직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르치고 있다. 에베소 교회의 책임자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교훈들이 복음에 합당한가 아닌가를 살피는 것이며(1:3), 공중 예배를 감독하고(2:1, 2, 8), 교인들을 진리로 가르치고(4:6), 예배에 규정된 각 직무들을 수행하며(4:14-15), 권장을 실시하며, 스스로를 순결하고 거룩하게 보존하여 모든 일에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4:12; 5:21, 22; 6:11-14).
디모데후서
바울은 세 가지 동기에서 디모데에게 본 서신을 기록하여 보냈다.
(1) 그는 외로운 상태였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포함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고(1;15), 데마도 그를 내버려두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다(4:10).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로마로 와서 자기와 함께 있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였으며(롬 16:21), 그는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가까이에서 바울을 섬겼다(빌 2:22; 고전 4:17). 바울은 그를 두고 말하기를 '이밖에 내게 없다'9빌 2:20)고 하였다. 바울은 그를 그리워하여(1:4) 두번씩이나 속히 오라고 요청하였다(4;9,21)
(2) 바울은 네로의 박해 기간에 교회의 안전과 번영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는 디모데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복음을 지키고(1:14),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며(3:14),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4:2), 필요할 때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1:8; 2:3)고 명령하고 있다.
(3)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부분과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의 일반 성도들도 본 서신을 읽고 이해하도록 의도하였다.
디도서
당시 그레데의 교회는 행정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했고, 교회 안에 유대주의 성격이 강한 이단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이러한 이단의 가르침은 사도의 올바른 가르침을 흐리게 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바울은 목회 사역의 지침을 주었다.
빌레몬서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냈다(1:7). 그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1:19). 신앙 안에서 새로와진 빌레몬을 통해 그의 가족들도 신앙을 갖게 되었다. 신자들은 빌레몬의 집에서 정규적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 같다(1:2).
한편,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다. 이 노예는 주인 집에서 도망하여 멀리 로마까지 갔다. 로마에서 노예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났다. 빌레몬이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으로 새롭게 된 것처럼, 노예 오네시모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어 변화된 사람이 되었다.
당시 로마의 노예법은 가혹했다. 주인은 노예에 대하여 무제한의 권력을 가졌고, 노예의 생사(生死)는 완전히 주인의 손 안에 있었다. 하찮은 작은 죄 때문에 십자가 형으로 죽임을 당하는 노예들이 수없이 많았다. 하물며 오네시모는 주인에게서 도주하였을 뿐 아니라 주인의 재물까지 가지고 갔었으므로, 그의 죄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오네시모를 돌려보낸다. 그 편지가 바로 본서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상전과 노예의 관계를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서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환영해 달라고 편지를 통해 정중하게 요청한다.
히브리서
본서는 아들, 제사장직, 희생 제도, 새 언약과 같은 주제들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1.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신약 성경 가운데서 유일하게 본서는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며, 이와 더불어 제사장이라고도 나타낸다. 그리스도가 아론과 비교되는 경우에는 대제사장이라 불리고(2:19; 4:14; 5:1; 7:26,28; 8:13; 9:11,12 등), 레위 계통과 비교될 때는 제사장으로 불린다. 그러면 제사장직의 본질은 무엇인가? 5;1을 보면, 제사장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데리고 가는 자로서, 그의 백성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에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 포함된다. 또한 제사장은 백성들을 계속 보살피고 백성들은 제사장을 계속 따르며 닮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서 그의 인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1) 대제사장과 그의 백성들과의 밀접성을 표시하기 위해서이다(2:10, 11).
(2) 그리스도가 그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2:17; 4:15).
(3) 그리스도가 온전한 대제사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5:9; 7:28).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와 연합한 백성들을 완전한 데로 이끌 수 있다.
(4)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셨다(히 2:9이하). 이것은 예수님이 온전하시면서도 고난을 겪은 것은 그의 백성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하심으로써 참다운 동정을 베풀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였다(히 2:7,17; 5:5-10).
한편, 그리스도께서 이런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인 것이다(1:3 4:14; 7:28). 저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강조한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사역과 대제사장직과의 관계는 이러하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그의 죽음과 분리될 수 없으며(13:12), 그분은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도 계속 일하고 계신다(6:2). 또한 그분은 재림시에도 대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감당하신다(9:28). 이때는 첫 번째 성취하신 모든 축복을 더욱 확고한 것으로 나눠 주시는 역할을 하실 것이다.
2. 더 나은 제사:새 언약의 제사
새 언약의 제사는 더 나은 제사이다. 제사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의 중심이다. 그러나 본서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정도의 체계적인 속죄 교리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교리는 바울 서신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저자는 제사의 방식과 진행 과정보다는 제사의 효과에 더 큰 흥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객관적인' 표화(속죄, 화목, 칭의)를 발견하는 반면, 본서에서는 속죄가 '주관적인' 효과를 갖는 것, 곧 사람을 정결케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의 효과를 표현하는 의식적인 4가지 용어를 사용한다. 그 용어들은 '속죄하다', '정결하다', '거룩케 하다', '온전케 하다'이다. '
속죄하다'는 죄를 더는다는 의미이며(2:17) '정결케 하다'는 '죄책을 제거하는 것'을 뜻한다(9:14,22,23;10:2). '거룩게 하다'는 죄책(罪責)이 이동되었다는 선언을 받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위치를 얻었다는 뜻이며(2:11; 9:13; 10:10,14,19; 13:12), '온전케 하다'는 도덕적 완성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합당하도록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본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속죄의 목적, 곧 살아계신 하나님께 죄의식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제사의 효과면으로 설명한다.
3. 언약 개념
본서에는 '언약'이라는 말이 17회 나타난다(신약 성경에 총 33회). 저자는 옛 질서와 새 질서를 비교하는데, '언약' 개념을 통해 서로 비교한다. 이 언약 개념은 양 질서의 관계를 서로 묶어 주는 공통 분모이다. '언약'이란 뜻은 '엄숙한 종교적 제가(制可)'를 뜻한다.
그러면 본서의 '언약' 사상이 기독교 전체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첫째로, 본서는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예배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봉사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예배를 위한 종교임을 강조한다.
언약의 개념 가운데 하나님은 언약을 성립시키는 분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가 되선 것은 그 백성으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히 9:14,15)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9:25; 12:24) 그의 백성을 위해 간구하시고,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께 나아가신다(4:16; 7:25; 10:22). 이것 역시 경배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에배를 드리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일이 중요하다(10:19 이하).
둘째로, 본서는 하나님 백성의 종말론적 상태조차 하나의 예재 공동체로 보고 있다.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을 맺은 다음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했다. 이 사상이 신약에 넘어와 본서에 나타난다. 예배의 정상적인 모습은 신, 구약을 막론하고 개인적인 아닌 공동체의 모입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은 받아야 할 완전한 경배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본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경배의 개념과 연관시킨다. 여기서 백성의 개념은 인종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하에 있는 백성을 뜻한다92:17; 4:19; 11:25; 13:12).둘째로, 본서는 하나님 백성의 종말론적 상태조차 하나의 예배 공동체로 보고 있다.
야고보서
본서의 수신자들은 유대 밖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기회가 적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많은 시련이 있었다(1:2-4). 경건치 못한 부자들의 횡포와 학대 때문에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했고(5:1-6), 일부 성도들의 신앙은 형식에 치우쳤으며(1:22-27; 2:14-26), 사랑이 식어져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2:1-13). 또한 말과 행동이 거칠어서(3:1-12; 3:13-4:3). 성도간의 교제가 단절되어 갔다. 이 때문에 야고보는 이들을 격려하고, 잘못된 신앙 자세를 시정하며, 또한 "믿음과 행함"에 대한 바른 인식을 교훈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였다.
베드로전서
본서는 극심한 박해 아래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것이므로 '위로'와 '격려'로 가득 차 있다. 저자는 이 격려의 주제를 '산 소망'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본서를 '소망의 서신'이라고도 부른다. 본서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힘힙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근본 초석으로 삼고 있다. 또한 성도들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개우쳐 주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사실을 상기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박해를 이기라고 말한다.
베드로후서
베드로가 이 '둘째 서신'(3:1)을 쓴 시기는 그의 임종에 즈음해서였다. 본서 역시 베드로전서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기록되었으며, 베드로 전서와 동일한 수신자들에게 보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베드로는 첫 번째 편지인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수신자들의 고난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주로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 당시 거짓 교사들은 주로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기독교적인 윤리를 무시해도 된다는 도덕 폐기론을 내세우며 성도들을 유혹하였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지니고 예속 성장할 것과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는 진심으로 수신자들이 은혜와 지식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했다.
요한1,2,3서
■ 요한1서
사도 요한은 그노시스주의의 거짓된 가르침을 논박하고(2:26),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5:13) 이 편지를 썼다.
■ 요한2서
기독 교회의 초창기인 A.D. 1세기와 2세기경에는 순회 전도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이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들이 떠날 때는 여행을 위한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그노시스주의 이단과 교사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사상을 전하였다. 따라서 본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잘 모르는 가운데 이단사상의 전파에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이단 전도자들을 잘 분별하라고 권면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 요한3서
테메드리오에 의해 전달된 것으로 보이는 요한 삼서는 순회 전도자들의 보고에 기초하여 쓰여졌다. 그들은 사도 요한에게 돌아가 가이오와 데메드리오가 베푼 대접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교회의 지도자급에 있었던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의 권위에 도전하고 요한이 보낸 전도자들을 거부하였었다. 심지어 디오드레베는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기도 하였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칭찬하고, 디오드레베를 책망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했다.
유다서
본서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은 잘못된 가르침과 부도덕한 행실로 교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1)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다.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신자들은 도덕적 제재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2) 거짓 교사들으리 신앙은 신비 체험, 특별히 종교적 황홀경에 들어가서 체험한 환상을 지나치게 의존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러한 그릇된 교훈 뿐 아니라, 악한 행실로 교인들을 타락시켰다.
요한계시록
본서는 '계시'(헬. '아포칼립시스', 1:1)요, '예언'(1:3)이며, '서신'(1:4; 22:21)이다. '계시'란 숨겨진 어떤 것이 드러남을 뜻한다.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신 바를 담고 있다.
본서는 또한 '예언'이다. 예언이란 종말론적인 완성의 빛을 현재에 비취게 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다(참조. 벧후 1:19). 따라서 계시록은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이 시대(종말)에 있을 종말론적인 구원과 악한 세상 권세들에 대한 심판을 확인시키려는 의도를 갖는다. 동시에 본서는 '서신'이다. 수신자는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였다. 그 당시 교회는 외적인 박해를 당하여 배교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교회에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제시해줌으로써,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려는 것이 본서의 의도였다.
1. 서론(1:1-20)
2. 일곱 교회들에 보낸 편지들(2:1-22)
3. 하늘 보좌 환상(4:1-5:14)
4. 일곱 인들(6:1-8:1)
5. 일곱 나팔들(8:2-11:19)
6. 그리스도와 용과의 싸움(12:1-14:20)
7. 일곱 대접의 준비(15:1-8)
8. 진노의 일곱 대접(16:1-21)
9. 바벨론 심판(17:1-19:21)
10. 최종 완성(20:1-22:21)
11. 후기(22;6-21)
요한계시록의 핵심어는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와 "일곱'이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에 대해서 철저하게 밝히 드러내 주고 있다. 그분은 큰 권능과 지혜를 가지고 영광 가운데 임하실 것이다. 또한 그분은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몇몇의 숫자는 중요한 상징을 나타낸다. 그 가운데에서도 일곱이라는 숫자가 두드러진다. 즉, 일곱 편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표적, 일곱 재앙, 진노의 일곱 대접, 새로운 일곱 일 등이다.
구역성경 배열 순서와 그 의미는
구약성경은 연대기 순으로 기록되어있지 않은데 그 배열의 순서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답변 : 66권의 성경 순서는 전체적으로는 연대기를 우선하되, 내용별로 모았습니다.
성경을 둘로 나눌 때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눕니다. 두 말할 것 없이 연대순서가 성경 66권의 순서에서는 가장 큰 틀이라는 뜻입니다.
1. 구약을 먼저 살펴본다면
성경 기록 연대로 보나 그 성경 내용으로 볼 때,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모세 5경이 제일 먼저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모세 때까지를 기록한 다음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서, 그 이후 이어지는 시대가 '사사기'의 사사시대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서'는 사사기 이후의 이스라엘 왕정시대를 연대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사기' 다음에 '룻기'가 나오지만, 그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대신 룻1:1에서 '사사시대'에 발생한 기록이라고 했으므로 사사기 바로 뒤에 두었습니다. '역대서' 이후에 '에스라' '느헤미야'는 왕정시대 이후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역사들입니다. 이 역시 연대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다음의 '에스더'는 그 앞에 있는 '에스라' '느헤미야'보다 앞선 시대에 있었던 내용이지만 뒤에 기록된 이유를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경신학' 관련 서적을 참고한다면 그 중에서 참고할 만한 내용도 있겠지만, 성경 내용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 이외의 것은 저절로 들리는 상식이 아니면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 홈의 신학 상식은 기초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면이 많겠으나 이 홈의 기본 방향이 그렇다고 아시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욥기'부터 '아가'까지는 시적 내용으로 기록했고 그 연대가 명확하지 않거나 아니면 명확하다 해도 앞에 어느 연대 가운데 한 부분만 끼워넣을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모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 형식으로 기록한 예언서들 16권을 함께 모았습니다.
2. 신약의 경우
예수님이 오시므로 시작된 것이 신약이므로 예수님 오신 때부터 기록하고 있는 4복음서가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 승천 후 사도들의 활동을 기록한 사도행전이 그다음 나오고,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는 시대순서로 구분하기 곤란한 내용들입니다. 사도행전이 역사 순서로 되어 있는데 사도들이 활동하면서 편지 형태로 기록한 성경이고 또 연대를 구분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한 곳에 모았습니다.
특히 계시록을 마지막에 둔 것은, 마치 구약시대 마지막에 예언서를 두어 오실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기록했듯이 신약에도 그 마지막에 계시록을 두어 오실 예수님과 신약 전체의 전개 방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창세기는 기원에 관한 책으로서, 그 대상은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사람과 짐승, 죄와 구속, 축복과 저주, 사회와 문명, 결혼과 가정, 기술과 산업 등 실로 다양하다.그 뿐 아니라 이스라엘 신정정치(神政政治) 수립에 초석이 된 가나안 땅에 관한 언약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택하시어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지만, 그 목적은 그들을 통하여 이 땅의 모든 족속들을 축복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방대한 계획을 밝히는 과정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늘과 땅도 움직일 수 있는 우주의 지배자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인류를 축복하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진리(히 11:6)를 상기하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출애굽기의 주제는 한마디로 말해서 '구속' 이다.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택한 백성을 노예 상태로부터 구속하시고 그들 중에 임재하셔서, 결국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본서의 핵심이다. 성경의 구원 사상은 출애굽의 언약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과정을 통해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며, 동시에 그를 따르는 자들을 구원하는 자임을 계시하였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
출애굽기에는 최소한 몇 가지의 기본적인 신학사상이 깔려 있다.
첫째 하나님의 자기 계시
둘째 그의 속성
셋째 구속사상
넷째 그의 율법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 방법이다.
또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의 소명과 사역 등으로 다양하다. 하나님의 속성은 3, 6, 33-34장에 잘 나타나 잇으며, 그 초점은 '여호와' 라는 이름과 그의 영광의 임재에 있다. 또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그의 영광, 거룩함, 위엄, 능력에 견줄자가 없음(15:11)을 강조한다. 그리고 구속 신학의 핵심은 12, 24장에서 볼 수 있다. 유월절 양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취되었다(요 1:29;고전 5:7). 그리고 이 구속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것(2:24)으로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점차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3:15-17;6;2-8;19:3-8).또 '십계명'(20:22-23)을 통하여 성경적 윤리와 도덕의 기초를 확고히 하고, '언약의 책'(20:22-23:33)을 통하여 그 원리를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배학에 관한 사상으로 끝을 맺는다. 거기에서는 성막을 중심으로 한 모든 제도와 규율이 무소부재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강조되고 있다.
레위기
1. 하나님의 임재(臨在)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제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셨다. 레위기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부단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기본적인 사상이 흐르고 있다. 성막에는 성막뜰과 회막이 있었다. 회막은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안쪽 방은 지성소라고 불렀으며, 바깥쪽 방은 성소라고 불렀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놓여 있었다. 법궤의 윗 부분을 속죄소라 불렀으며, 바로 그 곳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장소인 시은좌(施恩座)였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성소에서 모세를 불러 명령하신 그 말씀을 기록한 책이 바로 레위기이다(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소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계신다. 심지어 평범한 일상 생할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타난신다.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배와 관심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지은 범죄는 하나님께서 직접 처리하셨다. 사람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 앞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는 결코 없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이 반복되는 이유는, 그들의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되어진다는 것을 일개워 주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21-24장), 성(性 18,20장), 이웃과의 관계(19,25장) 등이 그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관심이셨다. 레위기는 영원히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특별한 경우에 영광의 광채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분하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을 지켜 주시는 것과, 특별히 지성소의 법궤 위에 계시는 것을 구별한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미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다(고전 6:19-20). 레위기에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신다.
2. 성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레위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거룩, 정함, 부정함'이다. 성결의 근본 원리는 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로 온통 물들어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과 분리되기를 원하셨다. 성결에 대하여 레위기는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그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事役)이며, 또 한 가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만이 성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와 같은 의미이다.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이심을 자주 강조하셨다. 곧 구원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행위나 의지로 구원받을 수가 없다. 둘째로 사람이 해야 하는 부분은 율법대로 '순종'하는 일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성화(聖化;구원받은 사람이 거룩하게 되어 가는 단계)의 교리와 같은 의미이다. 일단 하나님께로부터 택함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성결하게 되어 간다.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3. 희생 제물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의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었지만 역시 많은 죄를 범했다. 이러한 백성이 어떻게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을까?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사 제도를 만들어 주셨다. 모든 희생 제물을 드리는 목적은 속죄와 봉헌을 위함이었다. 여기서 희생 제물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곧 희생 제물은 장차 오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에 대하여 미리 보여 주기 위한 예표(豫票)였다. 흠이 없는 짐승을 고른 다음에, 드리는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했다. 이것은 드리는 사람의 죄가 제물에게로 전가되는 것을 뜻했다. 그 다음에는, 드리는 사람이 손수 잡은 제물의 피를 제사장이 번제단 사면에 뿌렸다. " 단에 피를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제물의 피가 제단에 뿌려질 때 이로 말미암아 죄가 소멸되고 용서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 용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레위기의 희생 제물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심은 다시 반복하실 필요가 없는 죽임이었다. 또한 그 효력의 범위도 '온 세상'을 포괄한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1:1-2).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히 9:26).
민수기
1. 하나님의 성품
(1) 임재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계셨다.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고 계셨다고 여러번 언급하고 있다. 성막 위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성막이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임을 나타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갔고, 구름이 멈추는 곳에서 진을 쳤다(9:15-23).
(2)하나님의 거룩하심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도 나타낸다. 구름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죄인들에게 무서운 징계가 이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11:25, 33; 12:5, 10; 14:10; 16:19, 42;20:6). 이러한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오게된다.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은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오면 반드시 죽기 때문이었다(출 19:12-13). 그래서 성막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사장과 레위인이 성막 둘레에 진을 쳤다(1:49-3:10). 심지어 언약궤,금등잔 등 성소의 가장 거룩한 기구를 운반하는 고핫 자손의 레위 인도 직접 이것들을 볼 수 없었다. 제사장이 이것들을 보자기로 싸야 비로소 운반할 수 있었다(4:1-20).
(3)하나님의 자비하심
제사장과 레위 인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섣불리 나아오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3, 4, 16-18장). 하나님은 여러 번 모세의 중보 기도, 또는 제사장의 속죄 행위를 받으시고 심판을 철회하셨다(11:2; 12:13; 14:13-20; 21:7).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온 것도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체험했다. 단지 애굽을 나온 사람들 중 20세 이상의 사람들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14:16;출 32:13).
2. 약속의 땅
민수기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32:7, 9).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셨던 땅이었다(32:11; 14:16; 창 17:8; 26:3; 28:13). 가나안 땅을 정탐한 정탐꾼들의 불신앙은 매우 악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묻혀 있는 헤브론을 다녀왔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13:22-24;창13:14-18:1,23;35:27-29;50:13).
(2) 가나안 땅은 거룩한 땅이 되어야만 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시면 그 땅은 거룩하게 된다(35:3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의 거민을 모두 몰아내야만 했고, 그들의 산당과 우상을 파괴해야만 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땅에서 경배를 받으실 분이시다(33:51-52).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참으로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이다(13:27;14:8).
(3)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히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은 민수기에서보다는 창세기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창 13:15; 17:8). 그리고 이 사실은 희년에 대한 규정에서 암시되어 있다(레 25장). 또한 여성 상속자에 대한 규정에서 이 사실이 분명하게 타나난다.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36:9).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그 땅에서 혹시 쫓겨나게 될지리도 결국에는 그 땅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레 26:40-45; 신 30:1-10).
3. 하나님의 백성
민수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닮아야만 한다는 성경적 원리가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나 또는 전체로서 그들을 구속주,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야 하는데, 하나님이 한 분이시므로 이스라엘도 거룩해야만 한다(레 11:45)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 하나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민수기에서는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구 조사는(1, 26장)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곧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모두 한 조상 야곱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하나됨은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인구 조사는 전쟁에 나갈만한 사람을 열거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그리고 모든 지파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하기 위하여 정탐꾼을 1명씩 보냈고(13:2), 미디안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각 지파에서 1,000명씩 보냈다(31:4). 나중에 르우벤,갓,므낫세 반 지파가 트랜스요르단에 정착할 것을 요청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됨을 개뜨리는 심각한 위기였다. 결국 그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하기로 하고 나서야 트랜스요르단 정착이 허락되었다(32:1-33).
(2) 거룩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지 사람의 성품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거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거룩은 결국 사람의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근거한 것이다. '거룩'이라는 성품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을 깨뜨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다. 민수기에는 이러한 측면이 두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곧 불순종과 부정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민수기는 이것의 치료법을 다룬다. 이렇게 파괴된 거룩함을 회복하는 치료법 또는 구제법은 더러움이나 죄로 오염된 사람을 진영 밖에 격리시키는 것과 정결케 하는 물로 깨끗케 하는 것이다.
신명기
1. 전문(前文): 선지자의 본질과 기능
신명기는 '이는 모세가…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1:1)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대변자', 또한 '선지자'로서 모세의 역할을 지적하는 말이다. 선지자로서 모세는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에 들어갔으며, 인간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또한 최초의 선지자로서 그는 다음 세대에 나타날 선지자들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기본적인 지침을 확정하였다(참조. 13:21-5; 18:15-22). 그러나 모세의 선지자적 역할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맡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임있는 인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을 촉구하며, 그들이 언약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았을 때 뒤따를 결과에 대해 경고해야 했다.
2. 역사적 서언(序言) : 역사 신학
언약에 있어서 역사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역사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하셨던 일을 계시해 준다. 다시 말해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신명기에 있어서도 역사의 역할은 이러한 사실에 초점이 집중되어 있다. 즉,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현제의 시점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행동의 틀을 마련해 준다.
3. 일반규정 : 언약 관계의 근본 원리
신명기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연결하는 언약 관계의 근본원리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인 위치에서 언약을 체결하게 된 동기도 사랑이며,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이 사랑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와 같은 관계의 본질 -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 이 구체화된 것으로 십계명을 들 수 있다(5:6-21).
4. 특별 규정 : 언약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
신명기 언약법의 특별 규정이 취급하는 내용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즉, 여기에는 성소, 우상 숭배, 절기, 성적 범죄, 전쟁, 노예, 안식년, 예언과 제사 제도, 경제 문제, 유괴 등이 망라되어 있다. 이것들은 크게 의식법, 종교법, 시민법, 형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대 세계에서는 자주 종교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이 구분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그러한 구분은 인위적이며 허구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삶은 언약의 주(主)이신 하나님의 지배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하나님께 성실했을 때에만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5. 축복과 저주 : 보상과 형벌
신명기에서 축복과 저주를 취급한 부분(27-28장)은 신명기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축복에 대해서보다는 저주를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약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장수와 약속된 땅의 소유 등 축복이 주어지며, 반대로 불순종은 불행을 초래한다.
여호수아
(1) 족장들과 맺은 언약의 신실성.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점이다(참조. 13:1-7). 즉 어떤 지파들은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땅을 아직 그들의 기업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참조. 15:63'17:12 등).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니라 계속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한편 그 땅은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대로 주신 땅이기도 하다. 즉, 이미 완성한 것(already)이지만 그러나 아직(not yet)이라는 주제가 깔려 있다.
(2) 가나안 땅에 관한 내용.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 이 책에서 '여호와의 기업' 또는 '유업'으로 불리고 있으며 여호와의 소유지(22:19)로도 불리어 진다. 땅의 진정한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서 나그네처럼 우거하는 자로서의 삶의 태도를 지녀야 했다. 레 25:23이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기업'과 '나그네'란 말이 신약에도 그대로 나타난다(벧전 1:4; 히 11:13; 롬 8:17).
(3) 안식에 관한 내용.
히 4장은 여호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시키고 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안식하는 것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안식의 의미로 나타난다. 안식에 관한 의미는 신 12;9-10;25:19; 삼하 7:1에 있다.
(4)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내용.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대화를 한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직접 말씀하신다(1:1-9). 때로는 제비 뽑는 것으로(7:14) 혹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통하여 자기 뜻을 알리셨다(5:13-15).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 주셨지만, 그 땅을 정복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책임을 면제시키지는 않으셨다(1:3;10:7-9).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안식을 주시고 그 땅에서 여호와만을 성실하게 사랑하고 경외할 것을 명하셨다(22:5;24:14). 또한 하나님은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이 임하지만(23:5), 불순종한 경우 파멸이 있을 것을 나타내셨다.
(5)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멸절시킨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6:2; 8:1-2; 10:8). 그것은 가나안 족속의 강퍅한 마음(11:20)과 죄의 관영함(창 15:16)을 심판하신 행위였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자연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인간의 범죄를 심판하는데 있어 죄의 연대 책임이 나타난다(7:15). 아간 개인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비교. 창 34:7;삿 19:23;20:6;렘 29:23). 구약의 다른 곳은 개인의 죄가 자신에게만 해당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신 24;16; 겔 18:20; 렘 31:30). 신약에서도 죄의 연대 책임 및 개인의 책임 모두를 가르치고 있다.
사사기
사사기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다. 곧 이스라엘이 그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스엘에대한 하나님의 왕권은 시내 산 언약(출 19-24 장)에 의하여 수립되었으며, 그 후 모압 평지(신 29장)에서 모세와, 세겜(수 24장)에서는 여호수아에 의해 다시 확인되었다. 사사기의 기록자는 여호아의 왕권을 반복해서 거부한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여호와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여호아를 위한 전쟁을 거부하고, 가나안 신들에게로 돌아섰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렸다.
사사기의 구조상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사사 기드온은 여호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심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켜야 했다(참조. 8:23).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18:1; 19:1; 21:25)고 하는 반복 어구는 여호아의 통치를 중개할 인간 통치자가 없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구절은 이스엘이 하늘에 계신 왕을 인정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은 것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한다.
불순종·이방인의 압제·곤경중에서의 부르짖음·구원이라는 반복적 주기(週期)로부터,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끌어낼 수 있다. 그것은 언약에 대한 여호아의 신실하심이다. 혼란스러웠던 사사 시대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와 오래 참으심이 잘 나타난 때도 없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불충(不忠)과 배약(背約)의 역사였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만 주변의 이방 나라들에게 흡수당하지 않을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와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앞으로 도래할 여호아의 종 다윗과 그의 왕조의 수립을 기다리는 구속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진행된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한 구원 사건에 뒤따라 오는 이 시대(사사 시대)는, 놀랍게도 성령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활동하신 때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신은 사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을 대항하여 싸우는 거룩한 전쟁에서 큰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주었다(참조. 3:10; 6:34; 11:29; 13:25; 14:6, 19; 15:14; 삼상10:6,10; 11:6; 17:13). 바로 이 성령으로 권능을 받은 여호아의 백성들은 복음을 모든 나라에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룻기
1. 하나님의 이름
룻기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각자 여호아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고백한다('여호와' 라는 이름은 룻기에서 18회 나온다). '여호아' 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그들을 시내 산으로 이끄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 다른 하나님의 이름은 '엘 샤다이' 이다(1:20, 21). 창세기에 나오는 '엘 샤다이' 라는 이름은 인간의 무력함함을 강조하고, 인간의 무기력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대해 말할 때 사용되었다.
2구속
'기업을 무르다·구속하다' 라는 히브리 어 동사 '가알'이 이짧은 책에서 20회 나온다. 이말은 가족법과 관련되는 용어이다. 곧 한 가족(친적)의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1) 가족(친족)의 재산을 다시 무르거나(레 25:25), (2) 종으로 팔린 형제를 자유롭게 해 주거나(레 25:47-55), (3) 또는 자기 친족을 죽인 살인자에게 복수하는(민 35; 신 19:6)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이런 보호자가 된 가까운 친족을 '고엘'이라고 한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고엘'이라고 말할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하는 것이다.
3.헤세드(자비 loving-kindness)
'헤세드'라는 히브리 어 단어는 1:8과 2:20과 3:10에 나오는데 그 의미를 한 단어로 나타기는 매우 어렵다. 룻기에서 선택,은혜,인애 등의 뜻을 가진 '헤세드'는 '하나님의 신실한 보호' 뿐만 아니라,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의 따스함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체험한 사람은 그것에 의해서 변화되어야만 한다. 나오미와 보아스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헤세드'를 베풀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모압 여인 룻이었다(3:10,'너의 베푼 인애가').
사무엘상
(1) 왕정 체제를 수립한 사무엘의 생애와 사역.
(2) 백성들이 요구한 세속적인 왕의 표상인 사울의 생애와 그의 통치하의 이스라엘.
(3) 메시야 왕국을 통치할 의로운 통치자의 표상인 다윗의 생애 및 사역과 그의 통치하의 이스라엘.
본서를 사건별로 요약하면, 사무엘의 출생 기사로 시작하여(1장), 다윗이 진정한 왕으로 부각되면서 사울은 그 일가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으로(삼상 31장) 상권은 끝을 맺는다. 이어서 하권은 사울의 사망 소식을 듣는 다윗의 기사로 시작하여 다윗 왕정의 종말에 관한 기사로 끝을 맺는다.
한편, 사무엘서에서 처음으로 메시야('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말이 찬양 내용 중의 하나에 사용되는데(삼상 2:10), 이 말은 헬라 어로는 '그리스도'로 번역된다. 따라서 이 말은 인류의 구세주요 영원하고 진정하며 의로운 통치자를 가리킨다. 구약적인 면에서 메시야의 일차적 의미는, 하나님의 대리자 또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중보작적인 역할을 가리킨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삼하 2:4,7;3:39;5:3,17)로 언급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신정국 이스라엘을 통치할, 대리자 및 그 백성의 중보자로서의 위치를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 왕국의 영원한 통치자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구약적 표상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을 세워 메시야 왕국의 궁극적인 도래를 소망하도록 역사의 의미와 방향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다윗이 건설한 이스라엘 왕국은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이다. 그리고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다스리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다윗 왕국의 계승으로 묘사되고 있다(암 9:11; 사 11:1-10).
사무엘하
본서는 다윗을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이상적인 신정 통치의 진정한 대리자로서 묘사한다. 다윗은 일차적으로 유다 지파에 의해 헤브론에서 왕으로 추대된다(1-4장). 그 후 이스보셋이 살해 된 후에는 나머지 모든 지파에 의해서도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5:1-5). 다윗의 통치력은 확실하고 능력있게 집행된다. 그는 여부스 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그 곳을 왕의 도시로 정한다(5:6-14). 곧이어 법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모든 백성과 민족 앞에서 자신과 그 백성을 여호아께서 통치하신다고 선포한다(6장;시 132:3-5).
한편 다윗은 하나님의 처소이며 그 백성의 예배 장소인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 곧 다윗 왕가의 영원한 존속을 약속하신 내용이다. 사무엘하의(또는 이스라엘 역사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이 장은 다윗 언약의 수립을 의미한다(시 89:34-37).
열왕기상
열왕기 저자는 이 기록을 통해서 그들에게 임한 참상, 그들의 성전 파괴, 왕가의 굴욕, 그리고 열조의 땅에서 쫓겨나 타국에 포로로 끌려가는 데까지 이른 비운의 원인이, 그들 자신의 죄악과 하나님의 대한 배반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동족들에게 가르키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포로로 잡혀 왔지만 신앙을 저버리지 말고, 이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 모든 죄악과 우상을 버리고 옛 신앙을 회복하라는 의도로 본서를 기록했다. 열왕기는 그 안에 '하나님 나라' 라는 깊은 신학을 간직하고 있으며, 절망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망을 심어주는 구약 교회사이다.
본서의 저작 목적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근거로 할 때 왕국의 흥망성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에 달려 있으며, 왕들의 성공 여부도 모세의 법대로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저자의 의도 속에는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이스라엘의 영웅들을 영화롭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래서 저자는 세속 역사가들의 눈에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될만한 업적들을 전혀 무시하기도 했다. 저자의 주된 관심은 왕들과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언약에 대하여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열왕기하
[1] 열왕기상
1. 통일 왕국시대(1:1-11:43)
2. 분열 왕국시대(12:1-22:53)
[2] 열왕기하
1.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1:1-17:41)
2. 남조 유다의 멸망(18:1-25:30)
역대상
역대기 저자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회복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여 이 역사서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역사서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역사의 계속성 곧 과거 역사와의 연결성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의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 "그의 언약은 아직도 유효한가?" 또는, "지금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은 왕도 없고 오히려 바사(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형편인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는 "하나님의 대심판(다윗 왕가의 몰락과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및 바벨론의 포로가 됨)을 당하고 있는 판국에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가 무슨 소용인가? 등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 역대기 저자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역대하
역대상.하의 핵심어는 "왕가의 계보"와 "헌신" 등이다. 역대상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왕권에 이르게 되는 다윗 왕가의 계보를 특별히 자세하게 설명한다. 다윗의 일생은 철저히 하나님께 헌신된 삶으로 묘사된다. 그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했으며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져왔고 하나님을 위하여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려 했다.
에스라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렘 29:10-14)하신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은 본서에서 성취된다. 모두 세 차례의 귀환 중 에스라에는 제1, 2차 귀환이 나타난다. 에스라서는 그 내용을 크게 둘로 구별해볼 수 있다. 첫째는 1-6장에 걸쳐 나타나는 성전 재건의 역사이다. 약 70년의 세월동안 포로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안정을 누리던 때였지만 잃었던 신앙을 되찾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과감히 귀환길에 오른 것이다. 먼저 제단과 종교적인 절기들을 회복하고, 여호아 하나님의 성전복 사업을 시작한다. 수많은 반대와 방해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슥 4:6) 말미암아 완성케 된다. 두 번째의 주요 내용은 자체 개혁(7-10장)이다. 첬 번째 내용은 스룹바벨이 지도적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에스라에 의하여 진행된다. 제1차 귀환후 81년만(B.C. 457년)에 소수의 무리를 데리고 에스라가 귀환한다. 에스라는 1차 귀환으로부터 에스라 귀환 당시까지 극도로 혼탁해진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율법의 말씀에 입각하여 개혁을 성공시킨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죄의 회개와 영적인 부흥은 재건된 성전과 더불어 귀환한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느헤미야
본서에 나타난 주요 내용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과 여호아의 율법에 대한 충성이다. 예루살렘 성벽은 유대 인들에게 있어서 성전과 더불어 민족의 상징이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원수들의 갖가지 조롱과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건축하라는 나팔소리는 결국 승리의 환호로 이어져,죄악으로 인해 허물어졌던 성벽이 갖은 고초 가운데서 재건되었다. 이는 포로 후의 새출발에 있어서 새 삶의 터전이 되었고, 또한 신앙의 증거로서 후대에 큰 귀감이 되었다.
느헤미야는 이전 자기 민족의 멸망과 포로생활의 고난은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한 범죄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율법의 회복과 거룩한 말씀에 대한 충실한 해석 및 준행에 그의 정성을 기울여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특히 제사장겸 학사인 에스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서 마음판에 새겨 온전한 생활을 하도록 했다.
에스더
에스더서의 핵심어는 "아름다움"과 "섭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축복하사 아름다운 외모를 주셨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하나님이 그녀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헌신된 마음 때문에 그녀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셨다. 이처럼 한 미천한 유대 여자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왕비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비록 에스더서 내에는 하나님이란 이름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지만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 저기에서 나타난다.
1. 폐위된 와스디 왕비(1:1-22)
2. 왕비가 된 에스더(2:1-18)
3. 왕의 생명을 구한 모르드개(2:17-23)
4. 유다 인들에 대한 하만의 계략(3:1-15)
5. 에스더의 결심(4:1-17)
6. 연회를 베푼 에스더(5:1-14)
7. 굴욕 당하는 하만(6:1-14)
8. 에스더의 두 번째 연회 (7:1-10)
9. 모르드개의 조서(8:1-17)
10. 유다 인의 승리와 부림절의 기원(9:1-10:3)
욥기
욥기에서 다루는 주제는, 온 세상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사람들이 간혹 품게 되는 의문점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다른 사람에게 좋은 본이 되는 사람에게 닥치는 재난의 이유는 무엇인가? 반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악인들이 편안하게 지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다면, 왜 의인이 고난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방관한 채 계시는가? 하나님은 실제로 공의로우신가? 하나님은 과연 전능하신가? 하나님은 땅 위에 도덕적인 질서를 유지하실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욥기는 이와 같은 질문들에 답할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욥은 극심한 고난을 통해 자기 연민에 빠지고, 하나님에게 불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케 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는 진리를 시련을 통해 확고하게 깨달았다. 비록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이 책은 하나님의 고귀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실상 욥은 진정한 복종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로 하나님께 선택되는 영광을 가졌던 것이다.
사단은 욥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보다는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비방했다. 즉 물질적인 복만을 받기 위한 방현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게서는 이 점에 대해서 사단이 그릇되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욥을 선택하였다. 욥이 이 의도를 미리 알았더라면, 닥쳐 오는 시련들을 기쁘게 감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절망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시편
1. 하나님 개념의 특징
유일신관(唯一神觀)이 왕권 사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어떤 학자들은 시편의 유일신 사상을 부인한다.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시 77:13; 81:9; 135:5)라는 구절이다. 즉, 이스라엘은 많은 신들 중에서 오직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았을 뿐이란 것이다. 즉,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시편에서 혹시 '신들중에…'(86:8)와 같은 표현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신을 인정하는 말이 아니다. 내 주만 하나님이며(86:10), 다른 신이라 불리는 것들의 실상은 헛 것이요 거짓 것(135:15)이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한다. 때문에 다른 우상과 하나님을 비교한다는 듯한 구절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왕권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시 95:3-6).
2. 시편이 이해한 죄악
죄악이라면 시회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서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편에는 이 양자가 모두 존재한다. 사회적인 죄악을 철저하고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반면, 영적인 면도 깊이 취급한다. 그러나 엄밀히 파고 들면, 그 둘은 영적인 죄악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의 죄악관은 영적이요 개인적이다.
3. 시편이 이해한 징벌
구약에서는 종족, 또는 혈통적 연대책이란 것이 강조되고 있다. 즉 공동체나 한 가정에 있어서 어떤 일원의 범죄는 그 징벌이 개인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미치고 있음을 본다(수 7:1: 삼하 21장).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하나의 몸으로 보는 견지에서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나 후에는 점점 그 책임이 개인화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 즉 혈통적인 연대성보다도 영적 연대성과 개인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는것이다. 따라서 한 시편 기자는 79:8에서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담대히 기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징벌의 원리는 또한 복과 보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보상과 복도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개인적이다.
또한 징벌의 원리는 악인과 의인에 대한 궁극적인 징벌과 보상을 말하고 있다. 악인의 번영은 있을 수 있으나 일시적이므로, 의인이 낙심할 바 아니다. 그들에게는 마침내 징벌이 있을 것이다(37:7; 39:1; 73:1-3).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나(1:3),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선언한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자기의 연한(年限)이 차기 전에 핍박으로 죽어가고, 악인은 고통 없이 자기의 수명을 채우고 죽기도 한다. 이에 대한 문제는 결국 메시야를 대망케 하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을 심화시켜 주었으며, 또한 사후 세계의 궁극성을 바라보게 해주었다.
제1권 : 1-41편
제2권 : 42-72편
제3권 : 73-89편
제4권 : 90-106편
제5권 : 107-150편 시편은 네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앙 공동체의 시, 개인적인 신앙 고백의 시, 찬양의 시, 왕의 시(Royal Psalm) 등이다.
1. 신앙 공동체의 시
하나님 백성 전체가 그 주체가 되는 시이다. 당연히 주어가 복수로 나타난다. 공동체의 애가(哀歌)와 공동체의 감사시로 다시 나눌 수 있다. (1) 애가(哀歌)-큰 재난의 ?, 전쟁에서의 패배, 흉년 등의 어려운 때에 겸손히 재에 앉아 호소하는 회개와 간구의 노래들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시편들로는 44, 60, 74, 79, 80, 83, 85편 등이 있다. (2) 감사시-공동체의 승리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것으로서, 124편과 129편이 이에 속한다.
2. 개인적인 신앙 고백의 시
대부분의 시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신앙 공동체의 시와 같이 애가와 감사시로 나뉜다. (1) 애가-질병, 불행, 박해, 비난, 학대 등의 환난과 결부되어 있으며, 이런 것들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들도 공동체와 절대적으로 무관하지는 않다(참조. 시 22:22-23). 그리고 이러한 시들의 특징은 항상 성소(聖所) 지향적이라는 점이다9참조. 시 3;4;5:7). 여기에 해당되는 시는 40여 편이나 된다(3, 5, 6, 7, 13, 17, 22, 25, 26, 27, 28, 31, 35, 38, 39, 40, 42, 43, 51, 54, 55, 56, 57, 59, 61, 64, 68, 69, 70, 71, 86, 88, 102, 109, 120, 130, 140, 141, 142, 143편 등). (2) 감사시-이 유형에 속하는 시들이 감사시의 대표적인 시들이다. 감사시의 특징은 과거의 환난 중에 있을 때 부르짖었던 애가를 회상하는 데 있다(시 30;8-10). 이 유형에 해당되는 서는 열세 편이 있다(18, 31, 32, 34, 40, 41, 66, 92, 100, 107, 116, 118, 138편 등).
3. 찬양의 시
찬미의 대상에 따라서 분류된다. (1)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시(8, 19, 29, 104,편) (2) 시온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시(46, 48, 76, 84, 87, 122, 137편) (3) 구속의 역사를 찬미하는 시(78, 81, 105, 106, 111, 114, 135, 136편) (4) 하나님의 왕국을 찬미하는 시(24, 27, 68, 93, 95, 96, 97, 98, 99편) (5) 하나님의 율법을 찬미하는 시(1, 19, 119편) (6) 이러한 것들이 혼합되어 있는 시(33, 103, 113, 115, 145-150편 등). 전형적인 형태의 찬양의 시는 서곡과 본곡과 종곡으로 나뉘는데, 117편이 그 좋은 예이다.
4. 왕의 시
왕의 시(메시야 시)는 물론 직접적으로는 왕에 대한 찬양이지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데에 찬양의 의미를 부여하므로, 결국 이러한 시들은 메시야를 내다보는 예언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 해당되는 시는 모두 열한편이 있다92, 8, 20, 21, 45, 72, 89, 101, 110, 132, 144편 등).
5. 그 밖의 시
이상의 네 가지 구분 이외에도 지혜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인간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시편으로서 127편, 128편, 133편 등이 있으며, 인생의 생존 문제를 다룬 시로 16편, 37편, 49편, 73편 등이 있다.
잠언
이 책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게 되는 지혜로운 삶을 강조한다.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혜롭기 때문에, 지혜로운 삶은 곧 경건한 생팔이다. 이와 대조적인 것이 악인 또는 불의한 사람의 어리석은 삶이다. 이 두 가지 삶의 특징과 결과는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된다.
잠언에서 다루는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지혜와 어리석음·의로움과 사악함·삶과 죽음·지식과 무지·근면과 나태·질서와 무질서·성공과 실패·자제와 분노·신실함과 신실하지 못함·복종과 반항·정직과 사기·정의와 불의·진리와 거짓·존귀와 치욕·칭찬과 비난·교만과 겸손·깨끗함과 더러움·격려와 비방·화평과 다툼·사랑과 미움·인자와 잔인·관용과 탐욕·기쁨과 슬픔·부와 빈곤·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 등이다. 따라서 이 책이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진 것도 당연하다.
전도서
전도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인생을 즐길 것을 강조한다(2:24-26; 3:12, 22; 5:18-20; 8:15; 9:7-9; 11:7-10). 이 사상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쾌락을 즐기라고 하는 쾌락주의의 일종이라고 잘못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저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인생 향락(享樂)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참조. 2:24-26; 3:13; 5:19-20; 9:7).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2:26), 그분을 경외하고(8:12),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며 자제하는 사람만이 그 향락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 향락과 대조를 이루는 사상이 '헛되다'는 말로 표현된다. 전도자는 인간사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선언한다. 여기에는 사람의 수고(1:14; 2:11, 17; 4:4, 7-8)·지혜(2:15)·의로움(8:14)·재물(2:26; 5:10; 6:2)·존귀(4:16)·쾌락(2:1-2)·젊음과 힘(11:10)·생명(6:12; 7:15; 9:9)·사후(死後 11:8) 등 인간사에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 모든 것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단정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수고 함으로써 위대한 일들을 성취할 추 있고, 그 결과 다소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2:10). 지혜를 사용하면 쉽게 일을 끝낼 수 있다(10:10). 사람의 의로움은 불의보다 더 낫다(8:12-13). 그러나 인간의 타락(7:29)·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6:12)·죽음의 급박성(12:1-7)·사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사람의 수고와 지혜와 의로움은 궁극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전도자는 '해 아래서'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방편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권하고 있다.
아가서
아가서는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책'으로서,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진정한 사랑, 즉 성도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보여 주는 하나의 비유
1. 제목(1:1)
2. 사랑을 구함(1:2-2:7)
3. 만남과 헤어짐, 다시 만남(2:8-3:5)
4. 결혼예식과 첫날 밤(3:6-5:1)
5. 잃었다가 다시 찾음(5:2-8:4)
6. 사랑의 성숙과 확인(8:5-14)
이사야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 나아가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밝혀주는 책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1:4;6:1)로서, 그분을 거역하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나, 나중에는 그들을 구속하실 것이다(41:14,16). 이스라엘은 소경과 벙어리된 나라요(6:8,10;42:7), 황폐케 될 포도원이요(5:1-7), 공의와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백성이었다(5:7;10:1,2). 사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그분께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민족들에게 장차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했으며, 이 심판의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언급했다. 더 나아가서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모든 나라들과 그 나라들의 통치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40:15-24) 절대 주권을 지니신 분으로 소개되었다(25:8).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긍흘히 여기시며(14:1, 2), 그들을 죄와 어두움의 권세로부터 또한 정치적인 압박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속하시고(35:9;41:44), 구원하시는(43:3;49:8) 사건은 제2의 출애굽이 될 것이다.(43:2,16-19;52:10-12).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창조주께서(40:21,22;48:13) 그 백성을 고향으로 인도하실 그때에 사막에 시내가 넘쳐 흐르게 하실 것이다(32;2). 포로 생활로부터의 귀환을 상징하는 대로(大路)는 본서 전후반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1:16;40:3). 여호와께서는 열방을 사용하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5:26).
메시야 시대의 특징으로서 본서에는 평강과 안전이 묘사되었다(11:6-9). 다윗의 왕위를 잇는 한 왕이 의로움으로 통치하실 것이며(9:7; 32:1), 그 왕으로 인해서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으로 모여들 것이다(2:2-4).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악한 지도자들로부터 압제를 당하지 않을 것이며(11:14; 45:14),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성읍'이라고 불릴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42-53장에서 메시야 왕(Messianic King)을 '나의 종'이라 칭하셨다. 또한 이 용어는 한 나리인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되었다(41:8,9;42:1). 진정한 구원은 여호와의 종의 고난을 통해서 온전히 성취된다. 참된 여호와의 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고레스는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원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지만(41:2),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의 사슬로부터 구원하신다(52:13-53:12). 그리스도께서 '이방의 빛'이 되시므로(42:6) 심판에 직면한 나라들이(13-23장) 구원을 얻게 되었다(55:4,5)
이사야서는 '여호와의 종'인 의로운 통치자가 이 땅에서 주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해 나아가리라는 그 정점을 향해 예언의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예레미야
예레미야서의 가장 특징적인 내용은 '새 언약'이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당대에 편만한 '모세 언약'이나 '다윗 언약'에 근거한 단순한 회복이나 실현이 아니다. 가히 '새롭다'라는 형용사가 수반될 만큼 이전 언약에 비해 전혀 획기적인 사실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죄악을 용서할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심령을 새롭게 창조하여 하나님을 향해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게 할 뿐 아니라, 사죄의 은총을 내려 죄악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분명히 심판의 메시지였지만 그것은 동시에 구원의 메시지였다.
1. 서두(1:1-3)
2. 예레미야의 소명과 두 가지 환상(1:4-19)
3.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2:1-25:38)
4.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논쟁(26:1-29:32)
5. 위로의 책(30:1-33:26)
6.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당시에 주어진 예언(34: 1-39:18)
7. 예루살렘 함락 후의 예레미야의 생애(40:1-45:5)
8. 열방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46:1-51:64)
9.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유수(52:1-34)
예레미야애가
■ 구조
본 애가서는 각 장이 22절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한 예외가 있다면 66절로 기록된 3장인데, 살펴보면 이 3장 또한 '22절 구조'라 볼 수 있다(22×3). 이러한 형식은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절을 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히브리 알파벳은 22자임).
■ 사상
예루살렘이 폐허화되고 언약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버린 B.C. 587년의 참극은, 소위 언약 백성에게 많은 의아심을 품게 했다. 어떻게 계약의 하나님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파괴를 묵인하셨는가? 이와같은 질문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하여 인간에게 내리시는 한 방편이다(3:37).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 목적을 이루시도록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길(3:25-27)일 뿐이다. 시인은 이를 생각하며 절망중에 감사했다(3:23). 하지만 그는 그날을 기다리며 간구한다.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5:21).
에스겔
(1)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징계로서, 이것은 그들에게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징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배교의 죄악에서 구해 내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었다(1-24장).
(2)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들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고 움직이시는 온 우주의 통치자요 주권자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들도 심판으로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25-32장)
(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그 가운데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회복시키시고 친히 그들의 영원한 목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야가 통치하실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섬기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복들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 다가오고 있다(33-48장).
다니엘
1. 바벨론 궁전에서의 다니엘(1:1-21)
2. 느부갓네살이 본 큰 신상(2:1-49)
3. 풀무불에서 건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3;1-30)
4.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의 겸손(4;1-37)
5. 벨사살의 잔치와 다리오의 박해(5;1-6:28)
6. 네 짐승에 대한 이상(7:1-28)
7. 수소와 수양의 이상(8:1-12:13)
다니엘 서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한 그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열강의 군주들과 열국의 역사와 자연의 힘을 그의 예지와 권능으로써 어떻게 다스리고 조종하시는지를 제시하는데 있다.
호세아
호세아는 자신의 책에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이 책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체험을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보여주는 극적인 묘사 수단으로 활용하고 계신다. 여호와의 마음은 자기 백성을 향한 따뜻하고 간절한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다(11:8). 여호와는 기이한 사랑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14:4). 호세아는 자신의 메시지에서 심판과 사랑을 가장 큰 주제로 삼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는 죄는 공의의 심판을 초래하고 심판 후에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사랑은 언제나 자기 백성의 소망이 된다. 심판과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중심이 되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요소를 나타낸다.
1. 선지자의 결혼 생활(1:1-3:5)
2.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 심판(4:1-13:16)
3. 이스라엘의 회개와 축복(14:1-9)
요엘
선지자가 환상 속에서 본 메뚜기 떼가 직접적인 저작 동기이다. 메뚜기 떼는 적의 침입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여호와의 날'의 징조로 서술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이 범죄한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의 날이 아닌 캄캄한 날이요 크고 두려운 날이며, 해와 별이 빛을 거두고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날임을 인식시킨다.
본서의 교훈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다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 이날은 희망의 날(암:18)이 아니라 저주의 날이 될 뿐이다.
아모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했다면(6:1-5),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한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속성을 공의 혹은 정의로 파악하고, 이것이 인간 도덕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가르쳤다(5:24). 그러나 그 하나님은 도덕적인 실제만이 아니요 창조의 하나님이기도 하며 계시의 하나님, 섭리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4:13).
특히 그에게 두드러지는 것은 유일신 사상이다. 우상을 말할 때 거짓 것, 헛 것이라 불렀다(2:4). 이는 우상을 가리켜 그렇게 부른 첫 사례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이방신의 실재(實在)를 인정하여 나라마다 지방마다 각각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와 하나님도 그중 하나에 불과한, 이스라엘 민족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신인 여호와와 아울러 바알을 섬기는 혼합주의를 택했다. 하지만 아모스는 우상이 실재(實在)하지 않고 다만 헛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또한 당시에 제사는 믿음과 별개의 것으로 취급 되었다. 믿음과 행위는 없고 불순종의 반복 속에서 의식적인 제사만이 시행되었다. 아모스는 이를 개탄하여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5:21-23).
이것은 공의를 진멸하고 정의에 눈감은 제사가 얼마나 헛된 것임을 지적한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선포하렸다. 이날은 공의가 이행되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악인들은 심판받고 의로운 '남은 자들'은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오바댜
오바댜의 예언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짧은 에돔 족속에 대한 한정된 심판처럼 보이나, 담겨 있는 의미는 심오하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게 행한 에돔의 교만하고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 우주적인 심판으로 확대된다(15, 16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오바댜 예언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다."(Hengstenberg)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에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하고 악한 이방인의 태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비교. 욜 3:19). 그러나 오바댜의 예언이 전적으로 미래의 예언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므로, 역사 가운데서 에돔의 행위와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이 징계에 대한 이방인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심판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유다에 대해 방관하고 악한 행동을 가하는 그 자체 또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요소가 되는 것이다.
남은 자가 땅을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갱신이다.
요나
요나서의 핵심어는 "물고기"와 "순종"이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킨 사건은 요나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사건은 오히려 선지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뻗치신 손과 같은 것이다. 물고기 뱃속에 있는 동안 그는 회개하였고 다시 큰 구원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요나가 순종하고 니느웨로 간 행동을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큰 열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미가
미가서의 핵심어는 "정의", "자비", "겸손"이다. 미가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의 모든 삶 속에서 정의를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고 외친다.
나훔
그는 앗수르의 죄악 중 두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번째의 것은 군사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한 점이다. 그 결과 피가 강처럼 흘렀으며, 많은 민족이 멸절되었고, 훌릉한 관습과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전쟁이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다(2:11-13). 정복자 앗수르 인들, 특히 앗수르 바니팔 등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을 살펴보면, 말뚝을 박아 사형을 집행하고 인골로 피라밋을 쌓았으며 그밖에 너무도 끔찍하여 묘사할 수 없는 많은 야만적인 행위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멸시하였던 그 백성들에게 나훔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리라'라고 선포하였다.
나훔이 지적하는 두번째의 다른 죄악은 비양심적인 교역이었다. 그 주변국가들은 아부와 부패로 정복민들의 사치와 악을 만족시켜 주고 있었고 상인들은 황금에 굶주려 온갖 종류의 우상과 세공품, 그리고 악을 조성할 만한 모든 물건을 팔았다. 그들에게 정직과 도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며 부만 얻고 쾌락만 즐기려 하였다(3:1-4). 그러나 나훔은 유다 민족에게 좋은 소식을 전달하는 사자가 오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이 압제자의 멸망에 대한 감사로써 종교 절기를 지키고 양심적으로 서원을 갚고 의무제사를 드리라고 권고한다(1:15).
하박국
하박국 선지자는 나훔과 마찬가지로 자기 백성을 비난하고자 나선 것이 아니다(1:2-4은 약간의 불경건한 자들을 책망한 것이다). 그렇다고 국수주의자처럼 자기 민족애에 빠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동기는 불의하고 비도덕적인 세력이 세계를 통치하는 데에 대한 의인의 고뇌이다. 또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서의 위대한 주제는 사도 바울(롬 1:17; 갈 3:11)과 히브리서 기자(히 10:38)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으며 종교 개혁과 루터의 개혁 이념이기도 하였다.
하박국서의 핵심어는 "믿음"과 "정의"이다. 이 하박국서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시고 그분이 작정하신 모든 계획 속에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스바냐
스바냐의 메시지는 '여호와의 날'이 주요 내용이다. 여호와의 날에는 모든 사람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멸절당한다(1:2-3).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악한 아들과, 유다를 괴롭혀 온 이방 족속도 포함된다(2:4-15). 그래서 '여호와의 날'은 희생의 날(2:8)이며, 분노의 날, 고통의 날, 황무와 파괴의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2:14)이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거짓 예배에 있다. 즉, 하나님을 무시하며, 더 나아가 그의 존재를 인정치 아니한 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소인 예루살렘에서 이방신들을 섬기며(1:4, 5), 하나님을저버렸다(1:6). 그들은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1:12)는 불신앙에 빠져 있었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부패와 악정과 거짓을 거듭 자행하고 있었다(3:1-8).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인에 대하여 분노를 쏟으실 수 밖에 없었다(1:2, 3; 2:4-18; 3:8).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진노의 날이 임박하기 전에 회개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2:3). 또한 회개를 촉구하기에 앞서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2:4-15).
마지막 후반부에서는 선지자의 메시지가 갑자기 변한다. 즉, '여호와의 날'은 기쁨의 날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것은 진노의 날에 전능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남겨 자신의 의로운백성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의 심판과 종말이란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기쁨이 된다. 왜냐하면 그날이 원수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되지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 되기 때문이다.
학개
학개서는 오바댜 다음으로 구약에서 분량이 가장 적은 책이지만 그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
선지자 학개는 먼저 불순종의 결과와(1:6, 11; 2:16-17) 순종의 결과를(2:7-9, 19) 명백하게 보여준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의 전(殿)에 우선권을 둘 때 그들이 받는 보상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임을 역설한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성령의 격려와 힘을 가져온다(2:4-5).
제2장은 '만국의 보배'(만국이 사모하는 것)라 불리는 메시야의 도래를 말한다(7절). 그의 오심으로 재건될 성전은 영광으로 가득차게 된다(9절). 여호와께서는 스룹바벨을 인(印)으로 삼으사 장차 메시야가 오실 사실에 대한 보증을 삼으셨다(23절).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있을 열방에 대한 심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때 만국은 진동할 것이며 부서질 것이다(2:6-7, 21-22; 참조. 히 12:25-29).
스가랴
여호와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지와 자신이 임재해 계시는 곳으로 삼으려고 하셨다(슥 1:1-6; 8:7).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한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이러한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범죄한 자에게는 징벌이 있으며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선포해야만 했다(3:2, 9; 5:3, 4, 8).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열국과 모든 피조물에까지 미친다(8:23; 12:1). 결국 열국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2:13; 6:1-8; 14:16-21).
하나님의 목적은 메시야에게 집중되어 있다. 스가랴서의 전반부에서(1-8장) 메시야는 비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3:8 '내 종'). 그러나 그는 다윗의 왕통을 잇는다(6:12 '순'; 사 4:2; 11:1; 렘 23:5). 후반부에서(9-14장) 메시야는 다윗처럼 목자로서(11:4; 12:10; 13:7) 그리고 왕으로서(9:9, 14:9) 나타난다.
말라기
말라기의 핵심어는 "십일조"와 "준비"이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을 때, 사실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그들이 도둑질하는 격이 되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그들이 소유한 재물보다 더 많은 것들을 빚지고 있다. 그들의 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간, 재능도 빚지고 있다. 또한 말라기의 중요한 사역의 한 부분은 백성들의 마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보내진 세례 요한을 예비하는 일이다.
마태복음
1. 그리스도의 탄생과 유년기(1:1-2:23)
2. 그리스도의 세례와 시험(3:1-4:25)
3. 산상 설교(5:1-7:29)
4. 열 가지 이적과 관련된 사건들(8:1-9:35)
5. 열 두 제자의 파송(9:36-10:42)
6. 세례 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1:1-30)
7. 바리새 인들의 반대(12:1-50)
8. 천국 비유(13:1-52)
9. 예수님이 배척당하심(13:53-17:27)
10. 메시야적 공동체 내에서의 삶의 원리들(18:1-35)
11.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과 도전들(19:1-22:46)
12. 심판에 대한 경고와 예언(23:1-25:46)
13.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26:1-27:66)
14. 그리스도의 부활하심(28:1-20)
마태복음의 핵심어는 "성취"와 "천국'이다. 마태는 참으로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세상의 구세주인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약속이 성취됐다는 주장을 더 확실히 뒷받침하기 위해서 구약의 모든 부분에서 말씀을 인용한다. 또한 마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시고 인간의 삶을 다스리신다는 복음을 소개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천국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신약 가운데 이 용어는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난다.
마가복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1:1)는 서두에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라고 십자가 앞에서 외친 백부장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고 있다. 변화산 위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9:7) 뿐만 아니라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1:11)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확증해 준다. 심지어, 귀신들까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1:24; 3:11). 그리고 예수님도 자신의 교훈에서 이 사실을 가르치셨다(12:1-12; 13:32).
1.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준비(1:1-13)
2.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1:14-6:29)
3. 예수님의 갈릴리 안팎에서의 사역(6:30-9:29)
4. 예수님의 마지막 갈릴리 사역(9:30-50)
5. 예수님의 유대와 베레아 사역(10:1-52)
6.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11:1-15:47)
7. 예수님의 구원사역 완성(16:1-20)
누가복음
1. 서문(1:1-4)
2.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1:5-2:52)
3. 공생애를 위한 준비(3:1-4:13)
4. 갈릴리 사역(4:14-9:9)
5. 갈릴리 주변 지역으로 물러가심(9:10-50)
6. 유대 지역에서의 활동(9:51-13:21)
7. 베레아 지역에서의 활동(13:22-19:27)
8. 고난과 승리(19:28-24:53)
누가복음의 핵심어는 "예수님"과 "인자"이다. 하나님의 성육화된 존재인 예수님은 종종 인자로 묘사된다. 예수님의 이런 인성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족보와 그분의 성격 및 삶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통하여서 잘 드러난다.
요한복음
요한복음은 매우 순수하고 간결한 헬라 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신학적인 통찰력은 대단히 무게가 있고 심오하다.
본서는 영원한 아들, 곧 로고스(말씀)로서의 예수님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 분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세상이 창조될 때 하나님과 함께 일하셨다(1:3).
본서 전체에는 '나는 …이니라'는 말씀이 일곱 번 반복되어 나온다. 즉, ① 생명의 떡(6:35) ② 세상의 빛(8:12) ③ 양의 문(10:7) ④ 선한 목자(10:11) ⑤ 부활이요 생명(11:25) ⑥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⑦ 참 포도나무(15:1) 등이다.
그런데 '나는 …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 말은 불타는 가시 덤불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참조. 출 3:14), 신성(神性)을 표현하는 말이다(참조. 창 17:1; 출 15:26; 35:3; 렘 3:12).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복음서이다.
나아가 요한은 유일하게 보혜사, 곧 성령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나눌 때, 예수님은 앞으로 오실 성령님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자신에 대해 증인이 될 것이지만,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시작될 것이라고 하셨다.
1. 서언: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로서의 영광(1:1-18)
2.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1:19-51)
3. 예수님의 공적 사역: 표적과 강론(2:1-11:57)
4. 수난 주간의 예수님(12:1-19:42)
5. 부활하심(20:1-29)
6. 요한복음의 목적을 진술함(20:30-31)
7. 갈릴리에 나타나심(21:1-25)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교회의 탄생과 확장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이런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1) 중심 인물-베드로와 바울
(2) 중요한 주제 및 사건들-성령님의 역할·새로운 선교지로 나아감·회심의 사건들·교회의 성장·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의 삶
(3) 중요한 문제들-유대인들의 교회 박해·유대 인들과 로마 인들 앞에서 재판받음·선교를 위한 역경과 고난
(4) 선교 범위의 확장-말씀이 전파된 범위가 5단계를 거쳐 확장된다(1:1-9:31; 9:32-12:25; 13;1-15:35; 15:36-21:16; 21:17-28:31).
로마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인류가 처해 있는 영적인 상태를 개관함으로써 로마서를 시작한다. 그는 유대 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인류가 한결같이 죄인이며, 구원 받아야 할 존재들이라고 보았다. 이 구원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완성한 구원 사역을 통해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믿음으로 이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원리이다. 그런데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경험에 있어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죄와 율법,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논리를 발전시킨다. 이러한 자유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며, 성령의 임재와 능력 속에 거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며,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스라엘도 역시 비록 현재로는 불신앙의 상태에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준다. 현재 이스라엘은 남은 자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이스라엘 전체에게 구원받을 때가 올 것이다(11:26).
이 편지는 독자들로 하여금 교회와 세상에서의 실제적인 삶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완성하라고 권면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처럼 교리 서신도 아니며, 디모데전서, 후서나 디도서처럼 목회의 지침을 가르치는 서신도 아니다. 이 서신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생활에서 부딪히던 문제점들을 다루는 실용적인 편지라는데 있다.
바울은 교회내의 분쟁, 교인들간의 법적 소송, 결혼 문제, 영적 은사의 남용, 성만찬,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부활에 대한 불신 문제 등에 대하여 바른 길을 제시한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처럼, 많은 문제들을 알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 서신은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많은 교훈을 전해준다.
고린도후서
고린도전후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처럼 교리 서신도 아니며, 디모데전서, 후서나 디도서처럼 목회의 지침을 가르치는 서신도 아니다. 이 서신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생활에서 부딪히던 문제점들을 다루는 실용적인 편지라는데 있다.
바울은 교회내의 분쟁, 교인들간의 법적 소송, 결혼 문제, 영적 은사의 남용, 성만찬,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부활에 대한 불신 문제 등에 대하여 바른 길을 제시한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처럼, 많은 문제들을 알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 서신은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많은 교훈을 전해준다.
갈라디아서
(1) 바울은 그의 사도 자격을 변호·논증한다(1:11-2:21). 바울의 사도 자격 문제는 유대주의자들이 분명히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을 열거하여 사도 자격을 변호한다.
①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부르신 점(1:11-24)
②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그의 복음이 인정받은 점(2:1-10) ③ 베드로의 위선을 바울이 책망한 점(2:11-21) 이다.
(2) 바울은 복음과 유대주의적 이단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점을 지적하며, 후자를 강력히 논박한다(3:1-5:12). 만일 아브라함의 자녀이고 그의 약속들에 참여한 자라고 한다면 구원을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바울은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의 참 의의와, 믿는 자는 율법으로 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3)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5:13-6:8).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자유의 생활을 상세히 논의하며, 육체의 일과 대조시킨다.
에베소서
이 서신은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사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모든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1-3장은 교회가 누구의 뜻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이루어졌느냐는 것을 교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교회론을 정립(定立)한 반면에, 4-6장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실제적으로 어떻게 생활하여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교회는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하며(4: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하고(4:7-16), 옛 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림으로 개인 생활을 새롭게 해야 한다(4:17-5:20). 또한 교회는 여러 인간관계에 있어 서로 복종함을 원칙으로 삼아야 하며(5:21-6:9), 영적 전투를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6:10-20).
빌립보서
빌리보서의 핵심어는 "복음"과 "기쁨"이다.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복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고통스럽고 암담한 감옥 생활 속에서도 슬퍼하기는 커녕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계속 솟아나는 기쁨을 보여준다. 그가 이런 놀라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였고 그가 섬기는 교회를 향한 사랑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목적은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이단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1:15), 만물의 창조주(1:16),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1:17),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부활하신 분(1:18), 하나님의 충만한 신성을 몸에 지닌 분(1:19; 2:9), 또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시는 유일한 중보자(1:20-22)이심에 관한 진리를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다. 골로새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의 허구성과 대조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충족성(充足性)을 드러내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녀온 디모데의 보고는 바울에게 큰 기쁨과 힘을 주었다. 디보데가 전한 기쁜 소식이란,
(1)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여전히 바울을 사모하고(3:6-10),
(2) 바울이 전해준 가르침을 잘 지키며(2:13),
(3)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쁨을 가지고 신앙을 지켰다(1:2-10)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모데의 보고 중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점들도 섞여 있었다.
(1)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고 단정하고,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4:11-12).
(2) 어떤 교인들은 신자가 된 후에도 과거 이방 세계의 부도덕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4:1, 13-18).
(3) 어떤 교인들은 죽은 성도들 때문에 너무 비탄에 빠져 이었다. 그들은 먼저 죽은 자들이 주게서 재림하실 때 불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불안감을 가지고 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1) 데살로니가 교인들의좋은 믿음에 감사하고, (2)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잘못된 점들을 고쳐주기 위해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게 되었다.
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전서가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을 겪고 있는 초신자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편지를 써야 할 필요를 느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로부터 바울의 편지를 전했을 당시의 그곳 상황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에 살았던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더 큰 핍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핍박 가운데서,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더욱 애타게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고대했다.
그 곳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갑작스럽게 임하시리라는 말씀을 오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곧 오신다고 말하고 다니면서, 일상생활에 충실하지 않고 들떠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건전한 태도를 가르친다.
디모데전서
본 서신은 교회 문제와 교회 내의 다양한 지도층의 자격 요건과 그들이 해야 할 의무 등을 다루고 있다.
바울은 본 서신을 통해 디모데가 자기의 직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르치고 있다. 에베소 교회의 책임자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교훈들이 복음에 합당한가 아닌가를 살피는 것이며(1:3), 공중 예배를 감독하고(2:1, 2, 8), 교인들을 진리로 가르치고(4:6), 예배에 규정된 각 직무들을 수행하며(4:14-15), 권장을 실시하며, 스스로를 순결하고 거룩하게 보존하여 모든 일에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4:12; 5:21, 22; 6:11-14).
디모데후서
바울은 세 가지 동기에서 디모데에게 본 서신을 기록하여 보냈다.
(1) 그는 외로운 상태였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포함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고(1;15), 데마도 그를 내버려두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다(4:10).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로마로 와서 자기와 함께 있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였으며(롬 16:21), 그는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가까이에서 바울을 섬겼다(빌 2:22; 고전 4:17). 바울은 그를 두고 말하기를 '이밖에 내게 없다'9빌 2:20)고 하였다. 바울은 그를 그리워하여(1:4) 두번씩이나 속히 오라고 요청하였다(4;9,21)
(2) 바울은 네로의 박해 기간에 교회의 안전과 번영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는 디모데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복음을 지키고(1:14),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며(3:14),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4:2), 필요할 때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1:8; 2:3)고 명령하고 있다.
(3)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부분과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의 일반 성도들도 본 서신을 읽고 이해하도록 의도하였다.
디도서
당시 그레데의 교회는 행정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했고, 교회 안에 유대주의 성격이 강한 이단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이러한 이단의 가르침은 사도의 올바른 가르침을 흐리게 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바울은 목회 사역의 지침을 주었다.
빌레몬서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냈다(1:7). 그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1:19). 신앙 안에서 새로와진 빌레몬을 통해 그의 가족들도 신앙을 갖게 되었다. 신자들은 빌레몬의 집에서 정규적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 같다(1:2).
한편,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다. 이 노예는 주인 집에서 도망하여 멀리 로마까지 갔다. 로마에서 노예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났다. 빌레몬이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으로 새롭게 된 것처럼, 노예 오네시모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어 변화된 사람이 되었다.
당시 로마의 노예법은 가혹했다. 주인은 노예에 대하여 무제한의 권력을 가졌고, 노예의 생사(生死)는 완전히 주인의 손 안에 있었다. 하찮은 작은 죄 때문에 십자가 형으로 죽임을 당하는 노예들이 수없이 많았다. 하물며 오네시모는 주인에게서 도주하였을 뿐 아니라 주인의 재물까지 가지고 갔었으므로, 그의 죄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오네시모를 돌려보낸다. 그 편지가 바로 본서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상전과 노예의 관계를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서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환영해 달라고 편지를 통해 정중하게 요청한다.
히브리서
본서는 아들, 제사장직, 희생 제도, 새 언약과 같은 주제들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1.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신약 성경 가운데서 유일하게 본서는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며, 이와 더불어 제사장이라고도 나타낸다. 그리스도가 아론과 비교되는 경우에는 대제사장이라 불리고(2:19; 4:14; 5:1; 7:26,28; 8:13; 9:11,12 등), 레위 계통과 비교될 때는 제사장으로 불린다. 그러면 제사장직의 본질은 무엇인가? 5;1을 보면, 제사장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데리고 가는 자로서, 그의 백성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에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 포함된다. 또한 제사장은 백성들을 계속 보살피고 백성들은 제사장을 계속 따르며 닮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서 그의 인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1) 대제사장과 그의 백성들과의 밀접성을 표시하기 위해서이다(2:10, 11).
(2) 그리스도가 그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2:17; 4:15).
(3) 그리스도가 온전한 대제사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5:9; 7:28).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와 연합한 백성들을 완전한 데로 이끌 수 있다.
(4)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셨다(히 2:9이하). 이것은 예수님이 온전하시면서도 고난을 겪은 것은 그의 백성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하심으로써 참다운 동정을 베풀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였다(히 2:7,17; 5:5-10).
한편, 그리스도께서 이런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인 것이다(1:3 4:14; 7:28). 저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강조한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사역과 대제사장직과의 관계는 이러하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그의 죽음과 분리될 수 없으며(13:12), 그분은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도 계속 일하고 계신다(6:2). 또한 그분은 재림시에도 대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감당하신다(9:28). 이때는 첫 번째 성취하신 모든 축복을 더욱 확고한 것으로 나눠 주시는 역할을 하실 것이다.
2. 더 나은 제사:새 언약의 제사
새 언약의 제사는 더 나은 제사이다. 제사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의 중심이다. 그러나 본서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정도의 체계적인 속죄 교리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교리는 바울 서신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저자는 제사의 방식과 진행 과정보다는 제사의 효과에 더 큰 흥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객관적인' 표화(속죄, 화목, 칭의)를 발견하는 반면, 본서에서는 속죄가 '주관적인' 효과를 갖는 것, 곧 사람을 정결케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의 효과를 표현하는 의식적인 4가지 용어를 사용한다. 그 용어들은 '속죄하다', '정결하다', '거룩케 하다', '온전케 하다'이다. '
속죄하다'는 죄를 더는다는 의미이며(2:17) '정결케 하다'는 '죄책을 제거하는 것'을 뜻한다(9:14,22,23;10:2). '거룩게 하다'는 죄책(罪責)이 이동되었다는 선언을 받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위치를 얻었다는 뜻이며(2:11; 9:13; 10:10,14,19; 13:12), '온전케 하다'는 도덕적 완성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합당하도록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본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속죄의 목적, 곧 살아계신 하나님께 죄의식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제사의 효과면으로 설명한다.
3. 언약 개념
본서에는 '언약'이라는 말이 17회 나타난다(신약 성경에 총 33회). 저자는 옛 질서와 새 질서를 비교하는데, '언약' 개념을 통해 서로 비교한다. 이 언약 개념은 양 질서의 관계를 서로 묶어 주는 공통 분모이다. '언약'이란 뜻은 '엄숙한 종교적 제가(制可)'를 뜻한다.
그러면 본서의 '언약' 사상이 기독교 전체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첫째로, 본서는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예배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봉사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예배를 위한 종교임을 강조한다.
언약의 개념 가운데 하나님은 언약을 성립시키는 분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가 되선 것은 그 백성으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히 9:14,15)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9:25; 12:24) 그의 백성을 위해 간구하시고,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께 나아가신다(4:16; 7:25; 10:22). 이것 역시 경배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에배를 드리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일이 중요하다(10:19 이하).
둘째로, 본서는 하나님 백성의 종말론적 상태조차 하나의 예재 공동체로 보고 있다.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을 맺은 다음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했다. 이 사상이 신약에 넘어와 본서에 나타난다. 예배의 정상적인 모습은 신, 구약을 막론하고 개인적인 아닌 공동체의 모입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은 받아야 할 완전한 경배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본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경배의 개념과 연관시킨다. 여기서 백성의 개념은 인종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하에 있는 백성을 뜻한다92:17; 4:19; 11:25; 13:12).둘째로, 본서는 하나님 백성의 종말론적 상태조차 하나의 예배 공동체로 보고 있다.
야고보서
본서의 수신자들은 유대 밖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기회가 적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많은 시련이 있었다(1:2-4). 경건치 못한 부자들의 횡포와 학대 때문에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했고(5:1-6), 일부 성도들의 신앙은 형식에 치우쳤으며(1:22-27; 2:14-26), 사랑이 식어져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2:1-13). 또한 말과 행동이 거칠어서(3:1-12; 3:13-4:3). 성도간의 교제가 단절되어 갔다. 이 때문에 야고보는 이들을 격려하고, 잘못된 신앙 자세를 시정하며, 또한 "믿음과 행함"에 대한 바른 인식을 교훈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였다.
베드로전서
본서는 극심한 박해 아래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것이므로 '위로'와 '격려'로 가득 차 있다. 저자는 이 격려의 주제를 '산 소망'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본서를 '소망의 서신'이라고도 부른다. 본서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힘힙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근본 초석으로 삼고 있다. 또한 성도들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개우쳐 주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사실을 상기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박해를 이기라고 말한다.
베드로후서
베드로가 이 '둘째 서신'(3:1)을 쓴 시기는 그의 임종에 즈음해서였다. 본서 역시 베드로전서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기록되었으며, 베드로 전서와 동일한 수신자들에게 보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베드로는 첫 번째 편지인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수신자들의 고난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주로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 당시 거짓 교사들은 주로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기독교적인 윤리를 무시해도 된다는 도덕 폐기론을 내세우며 성도들을 유혹하였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지니고 예속 성장할 것과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는 진심으로 수신자들이 은혜와 지식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했다.
요한1,2,3서
■ 요한1서
사도 요한은 그노시스주의의 거짓된 가르침을 논박하고(2:26),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5:13) 이 편지를 썼다.
■ 요한2서
기독 교회의 초창기인 A.D. 1세기와 2세기경에는 순회 전도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이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들이 떠날 때는 여행을 위한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그노시스주의 이단과 교사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사상을 전하였다. 따라서 본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잘 모르는 가운데 이단사상의 전파에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이단 전도자들을 잘 분별하라고 권면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 요한3서
테메드리오에 의해 전달된 것으로 보이는 요한 삼서는 순회 전도자들의 보고에 기초하여 쓰여졌다. 그들은 사도 요한에게 돌아가 가이오와 데메드리오가 베푼 대접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교회의 지도자급에 있었던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의 권위에 도전하고 요한이 보낸 전도자들을 거부하였었다. 심지어 디오드레베는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기도 하였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칭찬하고, 디오드레베를 책망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했다.
유다서
본서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은 잘못된 가르침과 부도덕한 행실로 교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1)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다.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신자들은 도덕적 제재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2) 거짓 교사들으리 신앙은 신비 체험, 특별히 종교적 황홀경에 들어가서 체험한 환상을 지나치게 의존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러한 그릇된 교훈 뿐 아니라, 악한 행실로 교인들을 타락시켰다.
요한계시록
본서는 '계시'(헬. '아포칼립시스', 1:1)요, '예언'(1:3)이며, '서신'(1:4; 22:21)이다. '계시'란 숨겨진 어떤 것이 드러남을 뜻한다.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신 바를 담고 있다.
본서는 또한 '예언'이다. 예언이란 종말론적인 완성의 빛을 현재에 비취게 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다(참조. 벧후 1:19). 따라서 계시록은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이 시대(종말)에 있을 종말론적인 구원과 악한 세상 권세들에 대한 심판을 확인시키려는 의도를 갖는다. 동시에 본서는 '서신'이다. 수신자는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였다. 그 당시 교회는 외적인 박해를 당하여 배교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교회에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제시해줌으로써,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려는 것이 본서의 의도였다.
1. 서론(1:1-20)
2. 일곱 교회들에 보낸 편지들(2:1-22)
3. 하늘 보좌 환상(4:1-5:14)
4. 일곱 인들(6:1-8:1)
5. 일곱 나팔들(8:2-11:19)
6. 그리스도와 용과의 싸움(12:1-14:20)
7. 일곱 대접의 준비(15:1-8)
8. 진노의 일곱 대접(16:1-21)
9. 바벨론 심판(17:1-19:21)
10. 최종 완성(20:1-22:21)
11. 후기(22;6-21)
요한계시록의 핵심어는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와 "일곱'이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에 대해서 철저하게 밝히 드러내 주고 있다. 그분은 큰 권능과 지혜를 가지고 영광 가운데 임하실 것이다. 또한 그분은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몇몇의 숫자는 중요한 상징을 나타낸다. 그 가운데에서도 일곱이라는 숫자가 두드러진다. 즉, 일곱 편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표적, 일곱 재앙, 진노의 일곱 대접, 새로운 일곱 일 등이다.
구역성경 배열 순서와 그 의미는
구약성경은 연대기 순으로 기록되어있지 않은데 그 배열의 순서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답변 : 66권의 성경 순서는 전체적으로는 연대기를 우선하되, 내용별로 모았습니다.
성경을 둘로 나눌 때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눕니다. 두 말할 것 없이 연대순서가 성경 66권의 순서에서는 가장 큰 틀이라는 뜻입니다.
1. 구약을 먼저 살펴본다면
성경 기록 연대로 보나 그 성경 내용으로 볼 때,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모세 5경이 제일 먼저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모세 때까지를 기록한 다음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서, 그 이후 이어지는 시대가 '사사기'의 사사시대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서'는 사사기 이후의 이스라엘 왕정시대를 연대기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사기' 다음에 '룻기'가 나오지만, 그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대신 룻1:1에서 '사사시대'에 발생한 기록이라고 했으므로 사사기 바로 뒤에 두었습니다. '역대서' 이후에 '에스라' '느헤미야'는 왕정시대 이후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역사들입니다. 이 역시 연대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다음의 '에스더'는 그 앞에 있는 '에스라' '느헤미야'보다 앞선 시대에 있었던 내용이지만 뒤에 기록된 이유를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경신학' 관련 서적을 참고한다면 그 중에서 참고할 만한 내용도 있겠지만, 성경 내용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 이외의 것은 저절로 들리는 상식이 아니면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 홈의 신학 상식은 기초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면이 많겠으나 이 홈의 기본 방향이 그렇다고 아시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욥기'부터 '아가'까지는 시적 내용으로 기록했고 그 연대가 명확하지 않거나 아니면 명확하다 해도 앞에 어느 연대 가운데 한 부분만 끼워넣을 수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모았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 형식으로 기록한 예언서들 16권을 함께 모았습니다.
2. 신약의 경우
예수님이 오시므로 시작된 것이 신약이므로 예수님 오신 때부터 기록하고 있는 4복음서가 먼저 나옵니다. 예수님 승천 후 사도들의 활동을 기록한 사도행전이 그다음 나오고, 로마서부터 유다서까지는 시대순서로 구분하기 곤란한 내용들입니다. 사도행전이 역사 순서로 되어 있는데 사도들이 활동하면서 편지 형태로 기록한 성경이고 또 연대를 구분하는 것도 어렵기 때문에 한 곳에 모았습니다.
특히 계시록을 마지막에 둔 것은, 마치 구약시대 마지막에 예언서를 두어 오실 예수님에 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기록했듯이 신약에도 그 마지막에 계시록을 두어 오실 예수님과 신약 전체의 전개 방향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창세기는 기원에 관한 책으로서, 그 대상은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사람과 짐승, 죄와 구속, 축복과 저주, 사회와 문명, 결혼과 가정, 기술과 산업 등 실로 다양하다.그 뿐 아니라 이스라엘 신정정치(神政政治) 수립에 초석이 된 가나안 땅에 관한 언약이 기록되어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택하시어 그들과 관계를 맺으시지만, 그 목적은 그들을 통하여 이 땅의 모든 족속들을 축복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방대한 계획을 밝히는 과정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늘과 땅도 움직일 수 있는 우주의 지배자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인류를 축복하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진리(히 11:6)를 상기하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출애굽기의 주제는 한마디로 말해서 '구속' 이다. 그의 종 모세를 통하여 택한 백성을 노예 상태로부터 구속하시고 그들 중에 임재하셔서, 결국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본서의 핵심이다. 성경의 구원 사상은 출애굽의 언약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과정을 통해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며, 동시에 그를 따르는 자들을 구원하는 자임을 계시하였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
출애굽기에는 최소한 몇 가지의 기본적인 신학사상이 깔려 있다.
첫째 하나님의 자기 계시
둘째 그의 속성
셋째 구속사상
넷째 그의 율법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 방법이다.
또 언약의 중재자인 모세의 소명과 사역 등으로 다양하다. 하나님의 속성은 3, 6, 33-34장에 잘 나타나 잇으며, 그 초점은 '여호와' 라는 이름과 그의 영광의 임재에 있다. 또 역사의 주관자로서의 그의 영광, 거룩함, 위엄, 능력에 견줄자가 없음(15:11)을 강조한다. 그리고 구속 신학의 핵심은 12, 24장에서 볼 수 있다. 유월절 양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취되었다(요 1:29;고전 5:7). 그리고 이 구속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것(2:24)으로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점차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3:15-17;6;2-8;19:3-8).또 '십계명'(20:22-23)을 통하여 성경적 윤리와 도덕의 기초를 확고히 하고, '언약의 책'(20:22-23:33)을 통하여 그 원리를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배학에 관한 사상으로 끝을 맺는다. 거기에서는 성막을 중심으로 한 모든 제도와 규율이 무소부재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강조되고 있다.
레위기
1. 하나님의 임재(臨在)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제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셨다. 레위기 전체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부단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기본적인 사상이 흐르고 있다. 성막에는 성막뜰과 회막이 있었다. 회막은 두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안쪽 방은 지성소라고 불렀으며, 바깥쪽 방은 성소라고 불렀다.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놓여 있었다. 법궤의 윗 부분을 속죄소라 불렀으며, 바로 그 곳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장소인 시은좌(施恩座)였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성소에서 모세를 불러 명령하신 그 말씀을 기록한 책이 바로 레위기이다(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소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계신다. 심지어 평범한 일상 생할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타난신다.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배와 관심 밖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지은 범죄는 하나님께서 직접 처리하셨다. 사람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 앞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는 결코 없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씀이 반복되는 이유는, 그들의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되어진다는 것을 일개워 주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21-24장), 성(性 18,20장), 이웃과의 관계(19,25장) 등이 그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관심이셨다. 레위기는 영원히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특별한 경우에 영광의 광채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분하고 있다. 곧, 하나님께서 항상 이스라엘을 지켜 주시는 것과, 특별히 지성소의 법궤 위에 계시는 것을 구별한다.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미리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다(고전 6:19-20). 레위기에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신다.
2. 성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레위기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레위기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거룩, 정함, 부정함'이다. 성결의 근본 원리는 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죄로 온통 물들어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과 분리되기를 원하셨다. 성결에 대하여 레위기는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그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事役)이며, 또 한 가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만이 성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와 같은 의미이다. 레위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이심을 자주 강조하셨다. 곧 구원은 하나님에게만 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행위나 의지로 구원받을 수가 없다. 둘째로 사람이 해야 하는 부분은 율법대로 '순종'하는 일이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성화(聖化;구원받은 사람이 거룩하게 되어 가는 단계)의 교리와 같은 의미이다. 일단 하나님께로부터 택함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성결하게 되어 간다.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3. 희생 제물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의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었지만 역시 많은 죄를 범했다. 이러한 백성이 어떻게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을까?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사 제도를 만들어 주셨다. 모든 희생 제물을 드리는 목적은 속죄와 봉헌을 위함이었다. 여기서 희생 제물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곧 희생 제물은 장차 오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사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에 대하여 미리 보여 주기 위한 예표(豫票)였다. 흠이 없는 짐승을 고른 다음에, 드리는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했다. 이것은 드리는 사람의 죄가 제물에게로 전가되는 것을 뜻했다. 그 다음에는, 드리는 사람이 손수 잡은 제물의 피를 제사장이 번제단 사면에 뿌렸다. " 단에 피를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제물의 피가 제단에 뿌려질 때 이로 말미암아 죄가 소멸되고 용서받게 되었다. 따라서 이 용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레위기의 희생 제물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심은 다시 반복하실 필요가 없는 죽임이었다. 또한 그 효력의 범위도 '온 세상'을 포괄한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1:1-2).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히 9:26).
민수기
1. 하나님의 성품
(1) 임재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계셨다.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방황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고 계셨다고 여러번 언급하고 있다. 성막 위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성막이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임을 나타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갔고, 구름이 멈추는 곳에서 진을 쳤다(9:15-23).
(2)하나님의 거룩하심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도 나타낸다. 구름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은 죄인들에게 무서운 징계가 이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11:25, 33; 12:5, 10; 14:10; 16:19, 42;20:6). 이러한 심판은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오게된다.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은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오면 반드시 죽기 때문이었다(출 19:12-13). 그래서 성막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사장과 레위인이 성막 둘레에 진을 쳤다(1:49-3:10). 심지어 언약궤,금등잔 등 성소의 가장 거룩한 기구를 운반하는 고핫 자손의 레위 인도 직접 이것들을 볼 수 없었다. 제사장이 이것들을 보자기로 싸야 비로소 운반할 수 있었다(4:1-20).
(3)하나님의 자비하심
제사장과 레위 인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섣불리 나아오다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3, 4, 16-18장). 하나님은 여러 번 모세의 중보 기도, 또는 제사장의 속죄 행위를 받으시고 심판을 철회하셨다(11:2; 12:13; 14:13-20; 21:7).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온 것도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체험했다. 단지 애굽을 나온 사람들 중 20세 이상의 사람들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다(14:16;출 32:13).
2. 약속의 땅
민수기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32:7, 9).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셨던 땅이었다(32:11; 14:16; 창 17:8; 26:3; 28:13). 가나안 땅을 정탐한 정탐꾼들의 불신앙은 매우 악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묻혀 있는 헤브론을 다녀왔음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13:22-24;창13:14-18:1,23;35:27-29;50:13).
(2) 가나안 땅은 거룩한 땅이 되어야만 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시면 그 땅은 거룩하게 된다(35:34).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의 거민을 모두 몰아내야만 했고, 그들의 산당과 우상을 파괴해야만 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땅에서 경배를 받으실 분이시다(33:51-52).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참으로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것이다(13:27;14:8).
(3)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히 주신 것이다.
이 사실은 민수기에서보다는 창세기에서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창 13:15; 17:8). 그리고 이 사실은 희년에 대한 규정에서 암시되어 있다(레 25장). 또한 여성 상속자에 대한 규정에서 이 사실이 분명하게 타나난다.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36:9).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그 땅에서 혹시 쫓겨나게 될지리도 결국에는 그 땅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레 26:40-45; 신 30:1-10).
3. 하나님의 백성
민수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닮아야만 한다는 성경적 원리가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개인적으로나 또는 전체로서 그들을 구속주,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야 하는데, 하나님이 한 분이시므로 이스라엘도 거룩해야만 한다(레 11:45)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 하나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민수기에서는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구 조사는(1, 26장)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곧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모두 한 조상 야곱의 후손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하나됨은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인구 조사는 전쟁에 나갈만한 사람을 열거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그리고 모든 지파는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하기 위하여 정탐꾼을 1명씩 보냈고(13:2), 미디안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각 지파에서 1,000명씩 보냈다(31:4). 나중에 르우벤,갓,므낫세 반 지파가 트랜스요르단에 정착할 것을 요청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됨을 개뜨리는 심각한 위기였다. 결국 그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하기로 하고 나서야 트랜스요르단 정착이 허락되었다(32:1-33).
(2) 거룩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이지 사람의 성품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거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거룩은 결국 사람의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근거한 것이다. '거룩'이라는 성품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을 깨뜨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다. 민수기에는 이러한 측면이 두 가지로 제시되고 있다. 곧 불순종과 부정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민수기는 이것의 치료법을 다룬다. 이렇게 파괴된 거룩함을 회복하는 치료법 또는 구제법은 더러움이나 죄로 오염된 사람을 진영 밖에 격리시키는 것과 정결케 하는 물로 깨끗케 하는 것이다.
신명기
1. 전문(前文): 선지자의 본질과 기능
신명기는 '이는 모세가…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1:1)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대변자', 또한 '선지자'로서 모세의 역할을 지적하는 말이다. 선지자로서 모세는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에 들어갔으며, 인간들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또한 최초의 선지자로서 그는 다음 세대에 나타날 선지자들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기본적인 지침을 확정하였다(참조. 13:21-5; 18:15-22). 그러나 모세의 선지자적 역할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맡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임있는 인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사랑을 촉구하며, 그들이 언약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았을 때 뒤따를 결과에 대해 경고해야 했다.
2. 역사적 서언(序言) : 역사 신학
언약에 있어서 역사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역사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하셨던 일을 계시해 준다. 다시 말해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신명기에 있어서도 역사의 역할은 이러한 사실에 초점이 집중되어 있다. 즉,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현제의 시점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행동의 틀을 마련해 준다.
3. 일반규정 : 언약 관계의 근본 원리
신명기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연결하는 언약 관계의 근본원리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인 위치에서 언약을 체결하게 된 동기도 사랑이며,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이 사랑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와 같은 관계의 본질 -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 이 구체화된 것으로 십계명을 들 수 있다(5:6-21).
4. 특별 규정 : 언약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
신명기 언약법의 특별 규정이 취급하는 내용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즉, 여기에는 성소, 우상 숭배, 절기, 성적 범죄, 전쟁, 노예, 안식년, 예언과 제사 제도, 경제 문제, 유괴 등이 망라되어 있다. 이것들은 크게 의식법, 종교법, 시민법, 형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현대 세계에서는 자주 종교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이 구분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그러한 구분은 인위적이며 허구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삶은 언약의 주(主)이신 하나님의 지배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하나님께 성실했을 때에만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5. 축복과 저주 : 보상과 형벌
신명기에서 축복과 저주를 취급한 부분(27-28장)은 신명기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한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축복에 대해서보다는 저주를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약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장수와 약속된 땅의 소유 등 축복이 주어지며, 반대로 불순종은 불행을 초래한다.
여호수아
(1) 족장들과 맺은 언약의 신실성.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점이다(참조. 13:1-7). 즉 어떤 지파들은 지도상으로 분배받은 땅을 아직 그들의 기업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참조. 15:63'17:12 등).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니라 계속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한편 그 땅은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대로 주신 땅이기도 하다. 즉, 이미 완성한 것(already)이지만 그러나 아직(not yet)이라는 주제가 깔려 있다.
(2) 가나안 땅에 관한 내용.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 이 책에서 '여호와의 기업' 또는 '유업'으로 불리고 있으며 여호와의 소유지(22:19)로도 불리어 진다. 땅의 진정한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서 나그네처럼 우거하는 자로서의 삶의 태도를 지녀야 했다. 레 25:23이 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기업'과 '나그네'란 말이 신약에도 그대로 나타난다(벧전 1:4; 히 11:13; 롬 8:17).
(3) 안식에 관한 내용.
히 4장은 여호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시키고 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안식하는 것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안식의 의미로 나타난다. 안식에 관한 의미는 신 12;9-10;25:19; 삼하 7:1에 있다.
(4)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 내용.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대화를 한 것처럼 여호수아에게도 직접 말씀하신다(1:1-9). 때로는 제비 뽑는 것으로(7:14) 혹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통하여 자기 뜻을 알리셨다(5:13-15).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 주셨지만, 그 땅을 정복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책임을 면제시키지는 않으셨다(1:3;10:7-9).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안식을 주시고 그 땅에서 여호와만을 성실하게 사랑하고 경외할 것을 명하셨다(22:5;24:14). 또한 하나님은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이 임하지만(23:5), 불순종한 경우 파멸이 있을 것을 나타내셨다.
(5) 하나님의 심판.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을 멸절시킨 행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6:2; 8:1-2; 10:8). 그것은 가나안 족속의 강퍅한 마음(11:20)과 죄의 관영함(창 15:16)을 심판하신 행위였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자연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인간의 범죄를 심판하는데 있어 죄의 연대 책임이 나타난다(7:15). 아간 개인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를 심판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비교. 창 34:7;삿 19:23;20:6;렘 29:23). 구약의 다른 곳은 개인의 죄가 자신에게만 해당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신 24;16; 겔 18:20; 렘 31:30). 신약에서도 죄의 연대 책임 및 개인의 책임 모두를 가르치고 있다.
사사기
사사기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다. 곧 이스라엘이 그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에게 충성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스엘에대한 하나님의 왕권은 시내 산 언약(출 19-24 장)에 의하여 수립되었으며, 그 후 모압 평지(신 29장)에서 모세와, 세겜(수 24장)에서는 여호수아에 의해 다시 확인되었다. 사사기의 기록자는 여호아의 왕권을 반복해서 거부한 이스라엘을 고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여호와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여호아를 위한 전쟁을 거부하고, 가나안 신들에게로 돌아섰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렸다.
사사기의 구조상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사사 기드온은 여호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심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켜야 했다(참조. 8:23).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18:1; 19:1; 21:25)고 하는 반복 어구는 여호아의 통치를 중개할 인간 통치자가 없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구절은 이스엘이 하늘에 계신 왕을 인정하지도, 순종하지도 않은 것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한다.
불순종·이방인의 압제·곤경중에서의 부르짖음·구원이라는 반복적 주기(週期)로부터,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끌어낼 수 있다. 그것은 언약에 대한 여호아의 신실하심이다. 혼란스러웠던 사사 시대만큼 하나님의 놀라운 인내와 오래 참으심이 잘 나타난 때도 없다.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불충(不忠)과 배약(背約)의 역사였다.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만 주변의 이방 나라들에게 흡수당하지 않을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와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앞으로 도래할 여호아의 종 다윗과 그의 왕조의 수립을 기다리는 구속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진행된다.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한 구원 사건에 뒤따라 오는 이 시대(사사 시대)는, 놀랍게도 성령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활동하신 때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신은 사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위협하는 세력을 대항하여 싸우는 거룩한 전쟁에서 큰승리를 거둘 수 있게 해주었다(참조. 3:10; 6:34; 11:29; 13:25; 14:6, 19; 15:14; 삼상10:6,10; 11:6; 17:13). 바로 이 성령으로 권능을 받은 여호아의 백성들은 복음을 모든 나라에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룻기
1. 하나님의 이름
룻기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각자 여호아 하나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고백한다('여호와' 라는 이름은 룻기에서 18회 나온다). '여호아' 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셔서, 그들을 시내 산으로 이끄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 다른 하나님의 이름은 '엘 샤다이' 이다(1:20, 21). 창세기에 나오는 '엘 샤다이' 라는 이름은 인간의 무력함함을 강조하고, 인간의 무기력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대해 말할 때 사용되었다.
2구속
'기업을 무르다·구속하다' 라는 히브리 어 동사 '가알'이 이짧은 책에서 20회 나온다. 이말은 가족법과 관련되는 용어이다. 곧 한 가족(친적)의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1) 가족(친족)의 재산을 다시 무르거나(레 25:25), (2) 종으로 팔린 형제를 자유롭게 해 주거나(레 25:47-55), (3) 또는 자기 친족을 죽인 살인자에게 복수하는(민 35; 신 19:6)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이런 보호자가 된 가까운 친족을 '고엘'이라고 한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고엘'이라고 말할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하는 것이다.
3.헤세드(자비 loving-kindness)
'헤세드'라는 히브리 어 단어는 1:8과 2:20과 3:10에 나오는데 그 의미를 한 단어로 나타기는 매우 어렵다. 룻기에서 선택,은혜,인애 등의 뜻을 가진 '헤세드'는 '하나님의 신실한 보호' 뿐만 아니라,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의 따스함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체험한 사람은 그것에 의해서 변화되어야만 한다. 나오미와 보아스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헤세드'를 베풀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모압 여인 룻이었다(3:10,'너의 베푼 인애가').
사무엘상
(1) 왕정 체제를 수립한 사무엘의 생애와 사역.
(2) 백성들이 요구한 세속적인 왕의 표상인 사울의 생애와 그의 통치하의 이스라엘.
(3) 메시야 왕국을 통치할 의로운 통치자의 표상인 다윗의 생애 및 사역과 그의 통치하의 이스라엘.
본서를 사건별로 요약하면, 사무엘의 출생 기사로 시작하여(1장), 다윗이 진정한 왕으로 부각되면서 사울은 그 일가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으로(삼상 31장) 상권은 끝을 맺는다. 이어서 하권은 사울의 사망 소식을 듣는 다윗의 기사로 시작하여 다윗 왕정의 종말에 관한 기사로 끝을 맺는다.
한편, 사무엘서에서 처음으로 메시야('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말이 찬양 내용 중의 하나에 사용되는데(삼상 2:10), 이 말은 헬라 어로는 '그리스도'로 번역된다. 따라서 이 말은 인류의 구세주요 영원하고 진정하며 의로운 통치자를 가리킨다. 구약적인 면에서 메시야의 일차적 의미는, 하나님의 대리자 또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중보작적인 역할을 가리킨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삼하 2:4,7;3:39;5:3,17)로 언급한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신정국 이스라엘을 통치할, 대리자 및 그 백성의 중보자로서의 위치를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 왕국의 영원한 통치자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구약적 표상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을 세워 메시야 왕국의 궁극적인 도래를 소망하도록 역사의 의미와 방향을 가르치고자 한 것이다. 다윗이 건설한 이스라엘 왕국은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이다. 그리고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다스리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다윗 왕국의 계승으로 묘사되고 있다(암 9:11; 사 11:1-10).
사무엘하
본서는 다윗을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이상적인 신정 통치의 진정한 대리자로서 묘사한다. 다윗은 일차적으로 유다 지파에 의해 헤브론에서 왕으로 추대된다(1-4장). 그 후 이스보셋이 살해 된 후에는 나머지 모든 지파에 의해서도 왕으로 인정받게 된다(5:1-5). 다윗의 통치력은 확실하고 능력있게 집행된다. 그는 여부스 족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그 곳을 왕의 도시로 정한다(5:6-14). 곧이어 법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모든 백성과 민족 앞에서 자신과 그 백성을 여호아께서 통치하신다고 선포한다(6장;시 132:3-5).
한편 다윗은 하나님의 처소이며 그 백성의 예배 장소인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 곧 다윗 왕가의 영원한 존속을 약속하신 내용이다. 사무엘하의(또는 이스라엘 역사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이 장은 다윗 언약의 수립을 의미한다(시 89:34-37).
열왕기상
열왕기 저자는 이 기록을 통해서 그들에게 임한 참상, 그들의 성전 파괴, 왕가의 굴욕, 그리고 열조의 땅에서 쫓겨나 타국에 포로로 끌려가는 데까지 이른 비운의 원인이, 그들 자신의 죄악과 하나님의 대한 배반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동족들에게 가르키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포로로 잡혀 왔지만 신앙을 저버리지 말고, 이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 모든 죄악과 우상을 버리고 옛 신앙을 회복하라는 의도로 본서를 기록했다. 열왕기는 그 안에 '하나님 나라' 라는 깊은 신학을 간직하고 있으며, 절망에 빠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망을 심어주는 구약 교회사이다.
본서의 저작 목적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근거로 할 때 왕국의 흥망성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에 달려 있으며, 왕들의 성공 여부도 모세의 법대로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었다. 저자의 의도 속에는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이스라엘의 영웅들을 영화롭게 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래서 저자는 세속 역사가들의 눈에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될만한 업적들을 전혀 무시하기도 했다. 저자의 주된 관심은 왕들과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언약에 대하여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열왕기하
[1] 열왕기상
1. 통일 왕국시대(1:1-11:43)
2. 분열 왕국시대(12:1-22:53)
[2] 열왕기하
1.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1:1-17:41)
2. 남조 유다의 멸망(18:1-25:30)
역대상
역대기 저자는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회복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일차적인 대상으로 하여 이 역사서를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역사서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역사의 계속성 곧 과거 역사와의 연결성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의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 "그의 언약은 아직도 유효한가?" 또는, "지금 우리에게는 다윗과 같은 왕도 없고 오히려 바사(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형편인데,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는 "하나님의 대심판(다윗 왕가의 몰락과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및 바벨론의 포로가 됨)을 당하고 있는 판국에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가 무슨 소용인가? 등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 역대기 저자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역대하
역대상.하의 핵심어는 "왕가의 계보"와 "헌신" 등이다. 역대상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왕권에 이르게 되는 다윗 왕가의 계보를 특별히 자세하게 설명한다. 다윗의 일생은 철저히 하나님께 헌신된 삶으로 묘사된다. 그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했으며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져왔고 하나님을 위하여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려 했다.
에스라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렘 29:10-14)하신 포로 생활에서의 귀환은 본서에서 성취된다. 모두 세 차례의 귀환 중 에스라에는 제1, 2차 귀환이 나타난다. 에스라서는 그 내용을 크게 둘로 구별해볼 수 있다. 첫째는 1-6장에 걸쳐 나타나는 성전 재건의 역사이다. 약 70년의 세월동안 포로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안정을 누리던 때였지만 잃었던 신앙을 되찾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과감히 귀환길에 오른 것이다. 먼저 제단과 종교적인 절기들을 회복하고, 여호아 하나님의 성전복 사업을 시작한다. 수많은 반대와 방해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슥 4:6) 말미암아 완성케 된다. 두 번째의 주요 내용은 자체 개혁(7-10장)이다. 첬 번째 내용은 스룹바벨이 지도적 인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에스라에 의하여 진행된다. 제1차 귀환후 81년만(B.C. 457년)에 소수의 무리를 데리고 에스라가 귀환한다. 에스라는 1차 귀환으로부터 에스라 귀환 당시까지 극도로 혼탁해진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율법의 말씀에 입각하여 개혁을 성공시킨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죄의 회개와 영적인 부흥은 재건된 성전과 더불어 귀환한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느헤미야
본서에 나타난 주요 내용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과 여호아의 율법에 대한 충성이다. 예루살렘 성벽은 유대 인들에게 있어서 성전과 더불어 민족의 상징이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원수들의 갖가지 조롱과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건축하라는 나팔소리는 결국 승리의 환호로 이어져,죄악으로 인해 허물어졌던 성벽이 갖은 고초 가운데서 재건되었다. 이는 포로 후의 새출발에 있어서 새 삶의 터전이 되었고, 또한 신앙의 증거로서 후대에 큰 귀감이 되었다.
느헤미야는 이전 자기 민족의 멸망과 포로생활의 고난은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한 범죄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율법의 회복과 거룩한 말씀에 대한 충실한 해석 및 준행에 그의 정성을 기울여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특히 제사장겸 학사인 에스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서 마음판에 새겨 온전한 생활을 하도록 했다.
에스더
에스더서의 핵심어는 "아름다움"과 "섭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축복하사 아름다운 외모를 주셨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하나님이 그녀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녀의헌신된 마음 때문에 그녀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셨다. 이처럼 한 미천한 유대 여자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의 왕비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비록 에스더서 내에는 하나님이란 이름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지만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여기 저기에서 나타난다.
1. 폐위된 와스디 왕비(1:1-22)
2. 왕비가 된 에스더(2:1-18)
3. 왕의 생명을 구한 모르드개(2:17-23)
4. 유다 인들에 대한 하만의 계략(3:1-15)
5. 에스더의 결심(4:1-17)
6. 연회를 베푼 에스더(5:1-14)
7. 굴욕 당하는 하만(6:1-14)
8. 에스더의 두 번째 연회 (7:1-10)
9. 모르드개의 조서(8:1-17)
10. 유다 인의 승리와 부림절의 기원(9:1-10:3)
욥기
욥기에서 다루는 주제는, 온 세상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사람들이 간혹 품게 되는 의문점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다른 사람에게 좋은 본이 되는 사람에게 닥치는 재난의 이유는 무엇인가? 반면, 하나님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악인들이 편안하게 지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다면, 왜 의인이 고난당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방관한 채 계시는가? 하나님은 실제로 공의로우신가? 하나님은 과연 전능하신가? 하나님은 땅 위에 도덕적인 질서를 유지하실 수 없는 것은 아닌가?
욥기는 이와 같은 질문들에 답할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욥은 극심한 고난을 통해 자기 연민에 빠지고, 하나님에게 불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케 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는 진리를 시련을 통해 확고하게 깨달았다. 비록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이 책은 하나님의 고귀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준다. 실상 욥은 진정한 복종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로 하나님께 선택되는 영광을 가졌던 것이다.
사단은 욥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보다는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비방했다. 즉 물질적인 복만을 받기 위한 방현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게서는 이 점에 대해서 사단이 그릇되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욥을 선택하였다. 욥이 이 의도를 미리 알았더라면, 닥쳐 오는 시련들을 기쁘게 감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절망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워야 했다.
시편
1. 하나님 개념의 특징
유일신관(唯一神觀)이 왕권 사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어떤 학자들은 시편의 유일신 사상을 부인한다.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시 77:13; 81:9; 135:5)라는 구절이다. 즉, 이스라엘은 많은 신들 중에서 오직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았을 뿐이란 것이다. 즉,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시편에서 혹시 '신들중에…'(86:8)와 같은 표현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신을 인정하는 말이 아니다. 내 주만 하나님이며(86:10), 다른 신이라 불리는 것들의 실상은 헛 것이요 거짓 것(135:15)이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한다. 때문에 다른 우상과 하나님을 비교한다는 듯한 구절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왕권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시 95:3-6).
2. 시편이 이해한 죄악
죄악이라면 시회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서 강조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편에는 이 양자가 모두 존재한다. 사회적인 죄악을 철저하고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반면, 영적인 면도 깊이 취급한다. 그러나 엄밀히 파고 들면, 그 둘은 영적인 죄악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의 죄악관은 영적이요 개인적이다.
3. 시편이 이해한 징벌
구약에서는 종족, 또는 혈통적 연대책이란 것이 강조되고 있다. 즉 공동체나 한 가정에 있어서 어떤 일원의 범죄는 그 징벌이 개인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 미치고 있음을 본다(수 7:1: 삼하 21장).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하나의 몸으로 보는 견지에서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나 후에는 점점 그 책임이 개인화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 즉 혈통적인 연대성보다도 영적 연대성과 개인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는것이다. 따라서 한 시편 기자는 79:8에서 '우리의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담대히 기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징벌의 원리는 또한 복과 보상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보상과 복도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개인적이다.
또한 징벌의 원리는 악인과 의인에 대한 궁극적인 징벌과 보상을 말하고 있다. 악인의 번영은 있을 수 있으나 일시적이므로, 의인이 낙심할 바 아니다. 그들에게는 마침내 징벌이 있을 것이다(37:7; 39:1; 73:1-3).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나(1:3),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선언한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이 자기의 연한(年限)이 차기 전에 핍박으로 죽어가고, 악인은 고통 없이 자기의 수명을 채우고 죽기도 한다. 이에 대한 문제는 결국 메시야를 대망케 하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을 심화시켜 주었으며, 또한 사후 세계의 궁극성을 바라보게 해주었다.
제1권 : 1-41편
제2권 : 42-72편
제3권 : 73-89편
제4권 : 90-106편
제5권 : 107-150편 시편은 네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앙 공동체의 시, 개인적인 신앙 고백의 시, 찬양의 시, 왕의 시(Royal Psalm) 등이다.
1. 신앙 공동체의 시
하나님 백성 전체가 그 주체가 되는 시이다. 당연히 주어가 복수로 나타난다. 공동체의 애가(哀歌)와 공동체의 감사시로 다시 나눌 수 있다. (1) 애가(哀歌)-큰 재난의 ?, 전쟁에서의 패배, 흉년 등의 어려운 때에 겸손히 재에 앉아 호소하는 회개와 간구의 노래들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시편들로는 44, 60, 74, 79, 80, 83, 85편 등이 있다. (2) 감사시-공동체의 승리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것으로서, 124편과 129편이 이에 속한다.
2. 개인적인 신앙 고백의 시
대부분의 시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신앙 공동체의 시와 같이 애가와 감사시로 나뉜다. (1) 애가-질병, 불행, 박해, 비난, 학대 등의 환난과 결부되어 있으며, 이런 것들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들도 공동체와 절대적으로 무관하지는 않다(참조. 시 22:22-23). 그리고 이러한 시들의 특징은 항상 성소(聖所) 지향적이라는 점이다9참조. 시 3;4;5:7). 여기에 해당되는 시는 40여 편이나 된다(3, 5, 6, 7, 13, 17, 22, 25, 26, 27, 28, 31, 35, 38, 39, 40, 42, 43, 51, 54, 55, 56, 57, 59, 61, 64, 68, 69, 70, 71, 86, 88, 102, 109, 120, 130, 140, 141, 142, 143편 등). (2) 감사시-이 유형에 속하는 시들이 감사시의 대표적인 시들이다. 감사시의 특징은 과거의 환난 중에 있을 때 부르짖었던 애가를 회상하는 데 있다(시 30;8-10). 이 유형에 해당되는 서는 열세 편이 있다(18, 31, 32, 34, 40, 41, 66, 92, 100, 107, 116, 118, 138편 등).
3. 찬양의 시
찬미의 대상에 따라서 분류된다. (1)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시(8, 19, 29, 104,편) (2) 시온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시(46, 48, 76, 84, 87, 122, 137편) (3) 구속의 역사를 찬미하는 시(78, 81, 105, 106, 111, 114, 135, 136편) (4) 하나님의 왕국을 찬미하는 시(24, 27, 68, 93, 95, 96, 97, 98, 99편) (5) 하나님의 율법을 찬미하는 시(1, 19, 119편) (6) 이러한 것들이 혼합되어 있는 시(33, 103, 113, 115, 145-150편 등). 전형적인 형태의 찬양의 시는 서곡과 본곡과 종곡으로 나뉘는데, 117편이 그 좋은 예이다.
4. 왕의 시
왕의 시(메시야 시)는 물론 직접적으로는 왕에 대한 찬양이지만,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데에 찬양의 의미를 부여하므로, 결국 이러한 시들은 메시야를 내다보는 예언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 해당되는 시는 모두 열한편이 있다92, 8, 20, 21, 45, 72, 89, 101, 110, 132, 144편 등).
5. 그 밖의 시
이상의 네 가지 구분 이외에도 지혜시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인간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 시편으로서 127편, 128편, 133편 등이 있으며, 인생의 생존 문제를 다룬 시로 16편, 37편, 49편, 73편 등이 있다.
잠언
이 책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얻게 되는 지혜로운 삶을 강조한다.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혜롭기 때문에, 지혜로운 삶은 곧 경건한 생팔이다. 이와 대조적인 것이 악인 또는 불의한 사람의 어리석은 삶이다. 이 두 가지 삶의 특징과 결과는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된다.
잠언에서 다루는 내용은 아주 다양하다. 지혜와 어리석음·의로움과 사악함·삶과 죽음·지식과 무지·근면과 나태·질서와 무질서·성공과 실패·자제와 분노·신실함과 신실하지 못함·복종과 반항·정직과 사기·정의와 불의·진리와 거짓·존귀와 치욕·칭찬과 비난·교만과 겸손·깨끗함과 더러움·격려와 비방·화평과 다툼·사랑과 미움·인자와 잔인·관용과 탐욕·기쁨과 슬픔·부와 빈곤·좋은 친구와 나쁜 친구 등이다. 따라서 이 책이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진 것도 당연하다.
전도서
전도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인생을 즐길 것을 강조한다(2:24-26; 3:12, 22; 5:18-20; 8:15; 9:7-9; 11:7-10). 이 사상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쾌락을 즐기라고 하는 쾌락주의의 일종이라고 잘못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저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인생 향락(享樂)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참조. 2:24-26; 3:13; 5:19-20; 9:7).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2:26), 그분을 경외하고(8:12), 하나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며 자제하는 사람만이 그 향락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 향락과 대조를 이루는 사상이 '헛되다'는 말로 표현된다. 전도자는 인간사의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선언한다. 여기에는 사람의 수고(1:14; 2:11, 17; 4:4, 7-8)·지혜(2:15)·의로움(8:14)·재물(2:26; 5:10; 6:2)·존귀(4:16)·쾌락(2:1-2)·젊음과 힘(11:10)·생명(6:12; 7:15; 9:9)·사후(死後 11:8) 등 인간사에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러나 전도자는 이 모든 것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단정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수고 함으로써 위대한 일들을 성취할 추 있고, 그 결과 다소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2:10). 지혜를 사용하면 쉽게 일을 끝낼 수 있다(10:10). 사람의 의로움은 불의보다 더 낫다(8:12-13). 그러나 인간의 타락(7:29)·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6:12)·죽음의 급박성(12:1-7)·사후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사람의 수고와 지혜와 의로움은 궁극적인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전도자는 '해 아래서'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는 방편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권하고 있다.
아가서
아가서는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책'으로서, 인간의 감정을 초월한 진정한 사랑, 즉 성도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보여 주는 하나의 비유
1. 제목(1:1)
2. 사랑을 구함(1:2-2:7)
3. 만남과 헤어짐, 다시 만남(2:8-3:5)
4. 결혼예식과 첫날 밤(3:6-5:1)
5. 잃었다가 다시 찾음(5:2-8:4)
6. 사랑의 성숙과 확인(8:5-14)
이사야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들, 나아가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밝혀주는 책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1:4;6:1)로서, 그분을 거역하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나, 나중에는 그들을 구속하실 것이다(41:14,16). 이스라엘은 소경과 벙어리된 나라요(6:8,10;42:7), 황폐케 될 포도원이요(5:1-7), 공의와 의로움을 실천하지 않는 백성이었다(5:7;10:1,2). 사야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그분께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민족들에게 장차 무서운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했으며, 이 심판의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언급했다. 더 나아가서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모든 나라들과 그 나라들의 통치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40:15-24) 절대 주권을 지니신 분으로 소개되었다(25:8).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긍흘히 여기시며(14:1, 2), 그들을 죄와 어두움의 권세로부터 또한 정치적인 압박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속하시고(35:9;41:44), 구원하시는(43:3;49:8) 사건은 제2의 출애굽이 될 것이다.(43:2,16-19;52:10-12).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창조주께서(40:21,22;48:13) 그 백성을 고향으로 인도하실 그때에 사막에 시내가 넘쳐 흐르게 하실 것이다(32;2). 포로 생활로부터의 귀환을 상징하는 대로(大路)는 본서 전후반부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1:16;40:3). 여호와께서는 열방을 사용하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5:26).
메시야 시대의 특징으로서 본서에는 평강과 안전이 묘사되었다(11:6-9). 다윗의 왕위를 잇는 한 왕이 의로움으로 통치하실 것이며(9:7; 32:1), 그 왕으로 인해서 모든 나라가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으로 모여들 것이다(2:2-4).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악한 지도자들로부터 압제를 당하지 않을 것이며(11:14; 45:14),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성읍'이라고 불릴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42-53장에서 메시야 왕(Messianic King)을 '나의 종'이라 칭하셨다. 또한 이 용어는 한 나리인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되었다(41:8,9;42:1). 진정한 구원은 여호와의 종의 고난을 통해서 온전히 성취된다. 참된 여호와의 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고레스는 이스라엘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원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지만(41:2),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의 사슬로부터 구원하신다(52:13-53:12). 그리스도께서 '이방의 빛'이 되시므로(42:6) 심판에 직면한 나라들이(13-23장) 구원을 얻게 되었다(55:4,5)
이사야서는 '여호와의 종'인 의로운 통치자가 이 땅에서 주의 나라를 건설하고 확장해 나아가리라는 그 정점을 향해 예언의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예레미야
예레미야서의 가장 특징적인 내용은 '새 언약'이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당대에 편만한 '모세 언약'이나 '다윗 언약'에 근거한 단순한 회복이나 실현이 아니다. 가히 '새롭다'라는 형용사가 수반될 만큼 이전 언약에 비해 전혀 획기적인 사실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죄악을 용서할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심령을 새롭게 창조하여 하나님을 향해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게 할 뿐 아니라, 사죄의 은총을 내려 죄악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분명히 심판의 메시지였지만 그것은 동시에 구원의 메시지였다.
1. 서두(1:1-3)
2. 예레미야의 소명과 두 가지 환상(1:4-19)
3.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2:1-25:38)
4.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들의 논쟁(26:1-29:32)
5. 위로의 책(30:1-33:26)
6.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당시에 주어진 예언(34: 1-39:18)
7. 예루살렘 함락 후의 예레미야의 생애(40:1-45:5)
8. 열방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46:1-51:64)
9.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유수(52:1-34)
예레미야애가
■ 구조
본 애가서는 각 장이 22절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한 예외가 있다면 66절로 기록된 3장인데, 살펴보면 이 3장 또한 '22절 구조'라 볼 수 있다(22×3). 이러한 형식은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절을 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히브리 알파벳은 22자임).
■ 사상
예루살렘이 폐허화되고 언약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버린 B.C. 587년의 참극은, 소위 언약 백성에게 많은 의아심을 품게 했다. 어떻게 계약의 하나님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파괴를 묵인하셨는가? 이와같은 질문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하여 인간에게 내리시는 한 방편이다(3:37).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 목적을 이루시도록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길(3:25-27)일 뿐이다. 시인은 이를 생각하며 절망중에 감사했다(3:23). 하지만 그는 그날을 기다리며 간구한다.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5:21).
에스겔
(1)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징계로서, 이것은 그들에게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징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배교의 죄악에서 구해 내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었다(1-24장).
(2) 여호와 하나님은 또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은 아니시다. 하나님은 온 세상 나라들을 주관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고 움직이시는 온 우주의 통치자요 주권자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들도 심판으로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25-32장)
(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지만 그 가운데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회복시키시고 친히 그들의 영원한 목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메시야가 통치하실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섬기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복들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 다가오고 있다(33-48장).
다니엘
1. 바벨론 궁전에서의 다니엘(1:1-21)
2. 느부갓네살이 본 큰 신상(2:1-49)
3. 풀무불에서 건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3;1-30)
4.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의 겸손(4;1-37)
5. 벨사살의 잔치와 다리오의 박해(5;1-6:28)
6. 네 짐승에 대한 이상(7:1-28)
7. 수소와 수양의 이상(8:1-12:13)
다니엘 서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한 그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열강의 군주들과 열국의 역사와 자연의 힘을 그의 예지와 권능으로써 어떻게 다스리고 조종하시는지를 제시하는데 있다.
호세아
호세아는 자신의 책에 온 정성을 다 쏟았다. 이 책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체험을 이스라엘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보여주는 극적인 묘사 수단으로 활용하고 계신다. 여호와의 마음은 자기 백성을 향한 따뜻하고 간절한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다(11:8). 여호와는 기이한 사랑 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14:4). 호세아는 자신의 메시지에서 심판과 사랑을 가장 큰 주제로 삼고 있다. 하나님을 떠나는 죄는 공의의 심판을 초래하고 심판 후에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사랑은 언제나 자기 백성의 소망이 된다. 심판과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중심이 되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요소를 나타낸다.
1. 선지자의 결혼 생활(1:1-3:5)
2.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 심판(4:1-13:16)
3. 이스라엘의 회개와 축복(14:1-9)
요엘
선지자가 환상 속에서 본 메뚜기 떼가 직접적인 저작 동기이다. 메뚜기 떼는 적의 침입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여호와의 날'의 징조로 서술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이 범죄한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의 날이 아닌 캄캄한 날이요 크고 두려운 날이며, 해와 별이 빛을 거두고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날임을 인식시킨다.
본서의 교훈은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다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 이날은 희망의 날(암:18)이 아니라 저주의 날이 될 뿐이다.
아모스
이사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했다면(6:1-5),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한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속성을 공의 혹은 정의로 파악하고, 이것이 인간 도덕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가르쳤다(5:24). 그러나 그 하나님은 도덕적인 실제만이 아니요 창조의 하나님이기도 하며 계시의 하나님, 섭리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4:13).
특히 그에게 두드러지는 것은 유일신 사상이다. 우상을 말할 때 거짓 것, 헛 것이라 불렀다(2:4). 이는 우상을 가리켜 그렇게 부른 첫 사례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이방신의 실재(實在)를 인정하여 나라마다 지방마다 각각 다른 신들을 섬기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와 하나님도 그중 하나에 불과한, 이스라엘 민족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신인 여호와와 아울러 바알을 섬기는 혼합주의를 택했다. 하지만 아모스는 우상이 실재(實在)하지 않고 다만 헛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또한 당시에 제사는 믿음과 별개의 것으로 취급 되었다. 믿음과 행위는 없고 불순종의 반복 속에서 의식적인 제사만이 시행되었다. 아모스는 이를 개탄하여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5:21-23).
이것은 공의를 진멸하고 정의에 눈감은 제사가 얼마나 헛된 것임을 지적한 말씀이다. 마지막으로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선포하렸다. 이날은 공의가 이행되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악인들은 심판받고 의로운 '남은 자들'은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오바댜
오바댜의 예언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짧은 에돔 족속에 대한 한정된 심판처럼 보이나, 담겨 있는 의미는 심오하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게 행한 에돔의 교만하고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 우주적인 심판으로 확대된다(15, 16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오바댜 예언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다."(Hengstenberg)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에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하고 악한 이방인의 태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비교. 욜 3:19). 그러나 오바댜의 예언이 전적으로 미래의 예언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므로, 역사 가운데서 에돔의 행위와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이 징계에 대한 이방인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심판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유다에 대해 방관하고 악한 행동을 가하는 그 자체 또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요소가 되는 것이다.
남은 자가 땅을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갱신이다.
요나
요나서의 핵심어는 "물고기"와 "순종"이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킨 사건은 요나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사건은 오히려 선지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뻗치신 손과 같은 것이다. 물고기 뱃속에 있는 동안 그는 회개하였고 다시 큰 구원을 선포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요나가 순종하고 니느웨로 간 행동을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큰 열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미가
미가서의 핵심어는 "정의", "자비", "겸손"이다. 미가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의 모든 삶 속에서 정의를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고 외친다.
나훔
그는 앗수르의 죄악 중 두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번째의 것은 군사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한 점이다. 그 결과 피가 강처럼 흘렀으며, 많은 민족이 멸절되었고, 훌릉한 관습과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전쟁이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다(2:11-13). 정복자 앗수르 인들, 특히 앗수르 바니팔 등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을 살펴보면, 말뚝을 박아 사형을 집행하고 인골로 피라밋을 쌓았으며 그밖에 너무도 끔찍하여 묘사할 수 없는 많은 야만적인 행위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멸시하였던 그 백성들에게 나훔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리라'라고 선포하였다.
나훔이 지적하는 두번째의 다른 죄악은 비양심적인 교역이었다. 그 주변국가들은 아부와 부패로 정복민들의 사치와 악을 만족시켜 주고 있었고 상인들은 황금에 굶주려 온갖 종류의 우상과 세공품, 그리고 악을 조성할 만한 모든 물건을 팔았다. 그들에게 정직과 도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며 부만 얻고 쾌락만 즐기려 하였다(3:1-4). 그러나 나훔은 유다 민족에게 좋은 소식을 전달하는 사자가 오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이 압제자의 멸망에 대한 감사로써 종교 절기를 지키고 양심적으로 서원을 갚고 의무제사를 드리라고 권고한다(1:15).
하박국
하박국 선지자는 나훔과 마찬가지로 자기 백성을 비난하고자 나선 것이 아니다(1:2-4은 약간의 불경건한 자들을 책망한 것이다). 그렇다고 국수주의자처럼 자기 민족애에 빠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동기는 불의하고 비도덕적인 세력이 세계를 통치하는 데에 대한 의인의 고뇌이다. 또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서의 위대한 주제는 사도 바울(롬 1:17; 갈 3:11)과 히브리서 기자(히 10:38)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으며 종교 개혁과 루터의 개혁 이념이기도 하였다.
하박국서의 핵심어는 "믿음"과 "정의"이다. 이 하박국서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시고 그분이 작정하신 모든 계획 속에 정의가 온전히 실현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스바냐
스바냐의 메시지는 '여호와의 날'이 주요 내용이다. 여호와의 날에는 모든 사람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멸절당한다(1:2-3).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악한 아들과, 유다를 괴롭혀 온 이방 족속도 포함된다(2:4-15). 그래서 '여호와의 날'은 희생의 날(2:8)이며, 분노의 날, 고통의 날, 황무와 파괴의 날, 캄캄하고 어두운 날, 구름과 흑암의 날(2:14)이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거짓 예배에 있다. 즉, 하나님을 무시하며, 더 나아가 그의 존재를 인정치 아니한 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소인 예루살렘에서 이방신들을 섬기며(1:4, 5), 하나님을저버렸다(1:6). 그들은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1:12)는 불신앙에 빠져 있었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부패와 악정과 거짓을 거듭 자행하고 있었다(3:1-8).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인에 대하여 분노를 쏟으실 수 밖에 없었다(1:2, 3; 2:4-18; 3:8).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진노의 날이 임박하기 전에 회개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2:3). 또한 회개를 촉구하기에 앞서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2:4-15).
마지막 후반부에서는 선지자의 메시지가 갑자기 변한다. 즉, '여호와의 날'은 기쁨의 날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그것은 진노의 날에 전능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남겨 자신의 의로운백성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의 심판과 종말이란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기쁨이 된다. 왜냐하면 그날이 원수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되지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이 되기 때문이다.
학개
학개서는 오바댜 다음으로 구약에서 분량이 가장 적은 책이지만 그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
선지자 학개는 먼저 불순종의 결과와(1:6, 11; 2:16-17) 순종의 결과를(2:7-9, 19) 명백하게 보여준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의 전(殿)에 우선권을 둘 때 그들이 받는 보상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임을 역설한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성령의 격려와 힘을 가져온다(2:4-5).
제2장은 '만국의 보배'(만국이 사모하는 것)라 불리는 메시야의 도래를 말한다(7절). 그의 오심으로 재건될 성전은 영광으로 가득차게 된다(9절). 여호와께서는 스룹바벨을 인(印)으로 삼으사 장차 메시야가 오실 사실에 대한 보증을 삼으셨다(23절).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있을 열방에 대한 심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때 만국은 진동할 것이며 부서질 것이다(2:6-7, 21-22; 참조. 히 12:25-29).
스가랴
여호와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지와 자신이 임재해 계시는 곳으로 삼으려고 하셨다(슥 1:1-6; 8:7).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한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이러한 목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범죄한 자에게는 징벌이 있으며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선포해야만 했다(3:2, 9; 5:3, 4, 8).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열국과 모든 피조물에까지 미친다(8:23; 12:1). 결국 열국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2:13; 6:1-8; 14:16-21).
하나님의 목적은 메시야에게 집중되어 있다. 스가랴서의 전반부에서(1-8장) 메시야는 비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다(3:8 '내 종'). 그러나 그는 다윗의 왕통을 잇는다(6:12 '순'; 사 4:2; 11:1; 렘 23:5). 후반부에서(9-14장) 메시야는 다윗처럼 목자로서(11:4; 12:10; 13:7) 그리고 왕으로서(9:9, 14:9) 나타난다.
말라기
말라기의 핵심어는 "십일조"와 "준비"이다.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을 때, 사실 당연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그들이 도둑질하는 격이 되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그들이 소유한 재물보다 더 많은 것들을 빚지고 있다. 그들의 돈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시간, 재능도 빚지고 있다. 또한 말라기의 중요한 사역의 한 부분은 백성들의 마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곧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보내진 세례 요한을 예비하는 일이다.
마태복음
1. 그리스도의 탄생과 유년기(1:1-2:23)
2. 그리스도의 세례와 시험(3:1-4:25)
3. 산상 설교(5:1-7:29)
4. 열 가지 이적과 관련된 사건들(8:1-9:35)
5. 열 두 제자의 파송(9:36-10:42)
6. 세례 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11:1-30)
7. 바리새 인들의 반대(12:1-50)
8. 천국 비유(13:1-52)
9. 예수님이 배척당하심(13:53-17:27)
10. 메시야적 공동체 내에서의 삶의 원리들(18:1-35)
11.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과 도전들(19:1-22:46)
12. 심판에 대한 경고와 예언(23:1-25:46)
13.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26:1-27:66)
14. 그리스도의 부활하심(28:1-20)
마태복음의 핵심어는 "성취"와 "천국'이다. 마태는 참으로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세상의 구세주인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약속이 성취됐다는 주장을 더 확실히 뒷받침하기 위해서 구약의 모든 부분에서 말씀을 인용한다. 또한 마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시고 인간의 삶을 다스리신다는 복음을 소개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천국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신약 가운데 이 용어는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난다.
마가복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1:1)는 서두에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라고 십자가 앞에서 외친 백부장의 고백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고 있다. 변화산 위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9:7) 뿐만 아니라 세례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1:11)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확증해 준다. 심지어, 귀신들까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1:24; 3:11). 그리고 예수님도 자신의 교훈에서 이 사실을 가르치셨다(12:1-12; 13:32).
1.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준비(1:1-13)
2.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1:14-6:29)
3. 예수님의 갈릴리 안팎에서의 사역(6:30-9:29)
4. 예수님의 마지막 갈릴리 사역(9:30-50)
5. 예수님의 유대와 베레아 사역(10:1-52)
6.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11:1-15:47)
7. 예수님의 구원사역 완성(16:1-20)
누가복음
1. 서문(1:1-4)
2.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1:5-2:52)
3. 공생애를 위한 준비(3:1-4:13)
4. 갈릴리 사역(4:14-9:9)
5. 갈릴리 주변 지역으로 물러가심(9:10-50)
6. 유대 지역에서의 활동(9:51-13:21)
7. 베레아 지역에서의 활동(13:22-19:27)
8. 고난과 승리(19:28-24:53)
누가복음의 핵심어는 "예수님"과 "인자"이다. 하나님의 성육화된 존재인 예수님은 종종 인자로 묘사된다. 예수님의 이런 인성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족보와 그분의 성격 및 삶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통하여서 잘 드러난다.
요한복음
요한복음은 매우 순수하고 간결한 헬라 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속에 담긴 신학적인 통찰력은 대단히 무게가 있고 심오하다.
본서는 영원한 아들, 곧 로고스(말씀)로서의 예수님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 분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세상이 창조될 때 하나님과 함께 일하셨다(1:3).
본서 전체에는 '나는 …이니라'는 말씀이 일곱 번 반복되어 나온다. 즉, ① 생명의 떡(6:35) ② 세상의 빛(8:12) ③ 양의 문(10:7) ④ 선한 목자(10:11) ⑤ 부활이요 생명(11:25) ⑥ 길이요 진리요 생명(14:6) ⑦ 참 포도나무(15:1) 등이다.
그런데 '나는 …이니라'는 말씀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 말은 불타는 가시 덤불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자신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참조. 출 3:14), 신성(神性)을 표현하는 말이다(참조. 창 17:1; 출 15:26; 35:3; 렘 3:12).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들을 '표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복음서이다.
나아가 요한은 유일하게 보혜사, 곧 성령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나눌 때, 예수님은 앞으로 오실 성령님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예수님은 성령님이 자신에 대해 증인이 될 것이지만,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 시작될 것이라고 하셨다.
1. 서언: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로서의 영광(1:1-18)
2.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1:19-51)
3. 예수님의 공적 사역: 표적과 강론(2:1-11:57)
4. 수난 주간의 예수님(12:1-19:42)
5. 부활하심(20:1-29)
6. 요한복음의 목적을 진술함(20:30-31)
7. 갈릴리에 나타나심(21:1-25)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교회의 탄생과 확장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이런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1) 중심 인물-베드로와 바울
(2) 중요한 주제 및 사건들-성령님의 역할·새로운 선교지로 나아감·회심의 사건들·교회의 성장·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의 삶
(3) 중요한 문제들-유대인들의 교회 박해·유대 인들과 로마 인들 앞에서 재판받음·선교를 위한 역경과 고난
(4) 선교 범위의 확장-말씀이 전파된 범위가 5단계를 거쳐 확장된다(1:1-9:31; 9:32-12:25; 13;1-15:35; 15:36-21:16; 21:17-28:31).
로마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인류가 처해 있는 영적인 상태를 개관함으로써 로마서를 시작한다. 그는 유대 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인류가 한결같이 죄인이며, 구원 받아야 할 존재들이라고 보았다. 이 구원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완성한 구원 사역을 통해 마련해 놓으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믿음으로 이 구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시는 원리이다. 그런데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경험에 있어서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죄와 율법,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논리를 발전시킨다. 이러한 자유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며, 성령의 임재와 능력 속에 거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며, 그리고 나서 바울은 이스라엘도 역시 비록 현재로는 불신앙의 상태에 있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준다. 현재 이스라엘은 남은 자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이스라엘 전체에게 구원받을 때가 올 것이다(11:26).
이 편지는 독자들로 하여금 교회와 세상에서의 실제적인 삶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완성하라고 권면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처럼 교리 서신도 아니며, 디모데전서, 후서나 디도서처럼 목회의 지침을 가르치는 서신도 아니다. 이 서신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생활에서 부딪히던 문제점들을 다루는 실용적인 편지라는데 있다.
바울은 교회내의 분쟁, 교인들간의 법적 소송, 결혼 문제, 영적 은사의 남용, 성만찬,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부활에 대한 불신 문제 등에 대하여 바른 길을 제시한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처럼, 많은 문제들을 알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 서신은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많은 교훈을 전해준다.
고린도후서
고린도전후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처럼 교리 서신도 아니며, 디모데전서, 후서나 디도서처럼 목회의 지침을 가르치는 서신도 아니다. 이 서신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생활에서 부딪히던 문제점들을 다루는 실용적인 편지라는데 있다.
바울은 교회내의 분쟁, 교인들간의 법적 소송, 결혼 문제, 영적 은사의 남용, 성만찬,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부활에 대한 불신 문제 등에 대하여 바른 길을 제시한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처럼, 많은 문제들을 알고 있는 오늘날 교회에 서신은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많은 교훈을 전해준다.
갈라디아서
(1) 바울은 그의 사도 자격을 변호·논증한다(1:11-2:21). 바울의 사도 자격 문제는 유대주의자들이 분명히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이에 대응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을 열거하여 사도 자격을 변호한다.
①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부르신 점(1:11-24)
②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 그의 복음이 인정받은 점(2:1-10) ③ 베드로의 위선을 바울이 책망한 점(2:11-21) 이다.
(2) 바울은 복음과 유대주의적 이단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점을 지적하며, 후자를 강력히 논박한다(3:1-5:12). 만일 아브라함의 자녀이고 그의 약속들에 참여한 자라고 한다면 구원을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바울은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의 참 의의와, 믿는 자는 율법으로 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3)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5:13-6:8).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자유의 생활을 상세히 논의하며, 육체의 일과 대조시킨다.
에베소서
이 서신은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사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모든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1-3장은 교회가 누구의 뜻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이루어졌느냐는 것을 교리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교회론을 정립(定立)한 반면에, 4-6장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실제적으로 어떻게 생활하여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교회는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하며(4:6),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하고(4:7-16), 옛 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림으로 개인 생활을 새롭게 해야 한다(4:17-5:20). 또한 교회는 여러 인간관계에 있어 서로 복종함을 원칙으로 삼아야 하며(5:21-6:9), 영적 전투를 위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한다(6:10-20).
빌립보서
빌리보서의 핵심어는 "복음"과 "기쁨"이다.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복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고통스럽고 암담한 감옥 생활 속에서도 슬퍼하기는 커녕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계속 솟아나는 기쁨을 보여준다. 그가 이런 놀라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였고 그가 섬기는 교회를 향한 사랑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목적은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이단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1:15), 만물의 창조주(1:16),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1:17), 죽은 자 가운데 먼저 부활하신 분(1:18), 하나님의 충만한 신성을 몸에 지닌 분(1:19; 2:9), 또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시는 유일한 중보자(1:20-22)이심에 관한 진리를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다. 골로새서는 인간이 만들어낸 철학의 허구성과 대조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충족성(充足性)을 드러내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녀온 디모데의 보고는 바울에게 큰 기쁨과 힘을 주었다. 디보데가 전한 기쁜 소식이란,
(1)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여전히 바울을 사모하고(3:6-10),
(2) 바울이 전해준 가르침을 잘 지키며(2:13),
(3)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쁨을 가지고 신앙을 지켰다(1:2-10)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모데의 보고 중에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점들도 섞여 있었다.
(1)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시리라고 단정하고,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4:11-12).
(2) 어떤 교인들은 신자가 된 후에도 과거 이방 세계의 부도덕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4:1, 13-18).
(3) 어떤 교인들은 죽은 성도들 때문에 너무 비탄에 빠져 이었다. 그들은 먼저 죽은 자들이 주게서 재림하실 때 불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불안감을 가지고 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1) 데살로니가 교인들의좋은 믿음에 감사하고, (2)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잘못된 점들을 고쳐주기 위해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게 되었다.
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전서가 데살로니가에서 핍박을 겪고 있는 초신자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었는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편지를 써야 할 필요를 느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로부터 바울의 편지를 전했을 당시의 그곳 상황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에 살았던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더 큰 핍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핍박 가운데서, 데살로니가 신자들은 더욱 애타게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고대했다.
그 곳 교인들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갑작스럽게 임하시리라는 말씀을 오해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스도께서 곧 오신다고 말하고 다니면서, 일상생활에 충실하지 않고 들떠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건전한 태도를 가르친다.
디모데전서
본 서신은 교회 문제와 교회 내의 다양한 지도층의 자격 요건과 그들이 해야 할 의무 등을 다루고 있다.
바울은 본 서신을 통해 디모데가 자기의 직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르치고 있다. 에베소 교회의 책임자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교훈들이 복음에 합당한가 아닌가를 살피는 것이며(1:3), 공중 예배를 감독하고(2:1, 2, 8), 교인들을 진리로 가르치고(4:6), 예배에 규정된 각 직무들을 수행하며(4:14-15), 권장을 실시하며, 스스로를 순결하고 거룩하게 보존하여 모든 일에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4:12; 5:21, 22; 6:11-14).
디모데후서
바울은 세 가지 동기에서 디모데에게 본 서신을 기록하여 보냈다.
(1) 그는 외로운 상태였다.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포함한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고(1;15), 데마도 그를 내버려두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다(4:10). 바울은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로마로 와서 자기와 함께 있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디모데는 바울의 '동역자'였으며(롬 16:21), 그는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가까이에서 바울을 섬겼다(빌 2:22; 고전 4:17). 바울은 그를 두고 말하기를 '이밖에 내게 없다'9빌 2:20)고 하였다. 바울은 그를 그리워하여(1:4) 두번씩이나 속히 오라고 요청하였다(4;9,21)
(2) 바울은 네로의 박해 기간에 교회의 안전과 번영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는 디모데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복음을 지키고(1:14),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며(3:14),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4:2), 필요할 때면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1:8; 2:3)고 명령하고 있다.
(3)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부분과 마찬가지로, 에베소 교회의 일반 성도들도 본 서신을 읽고 이해하도록 의도하였다.
디도서
당시 그레데의 교회는 행정적으로 조직화되지 못했고, 교회 안에 유대주의 성격이 강한 이단들의 가르침이 있었다. 이러한 이단의 가르침은 사도의 올바른 가르침을 흐리게 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바울은 목회 사역의 지침을 주었다.
빌레몬서
빌레몬은 골로새 교회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사랑했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냈다(1:7). 그는 바울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1:19). 신앙 안에서 새로와진 빌레몬을 통해 그의 가족들도 신앙을 갖게 되었다. 신자들은 빌레몬의 집에서 정규적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 같다(1:2).
한편,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다. 이 노예는 주인 집에서 도망하여 멀리 로마까지 갔다. 로마에서 노예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났다. 빌레몬이 사도 바울을 통해 복음으로 새롭게 된 것처럼, 노예 오네시모도 바울의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어 변화된 사람이 되었다.
당시 로마의 노예법은 가혹했다. 주인은 노예에 대하여 무제한의 권력을 가졌고, 노예의 생사(生死)는 완전히 주인의 손 안에 있었다. 하찮은 작은 죄 때문에 십자가 형으로 죽임을 당하는 노예들이 수없이 많았다. 하물며 오네시모는 주인에게서 도주하였을 뿐 아니라 주인의 재물까지 가지고 갔었으므로, 그의 죄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오네시모를 돌려보낸다. 그 편지가 바로 본서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상전과 노예의 관계를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서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환영해 달라고 편지를 통해 정중하게 요청한다.
히브리서
본서는 아들, 제사장직, 희생 제도, 새 언약과 같은 주제들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
1.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신약 성경 가운데서 유일하게 본서는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이라고 부르며, 이와 더불어 제사장이라고도 나타낸다. 그리스도가 아론과 비교되는 경우에는 대제사장이라 불리고(2:19; 4:14; 5:1; 7:26,28; 8:13; 9:11,12 등), 레위 계통과 비교될 때는 제사장으로 불린다. 그러면 제사장직의 본질은 무엇인가? 5;1을 보면, 제사장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데리고 가는 자로서, 그의 백성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에는 믿는 이들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것이 포함된다. 또한 제사장은 백성들을 계속 보살피고 백성들은 제사장을 계속 따르며 닮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서 그의 인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1) 대제사장과 그의 백성들과의 밀접성을 표시하기 위해서이다(2:10, 11).
(2) 그리스도가 그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2:17; 4:15).
(3) 그리스도가 온전한 대제사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5:9; 7:28).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와 연합한 백성들을 완전한 데로 이끌 수 있다.
(4)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셨다(히 2:9이하). 이것은 예수님이 온전하시면서도 고난을 겪은 것은 그의 백성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하심으로써 참다운 동정을 베풀 수 있는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였다(히 2:7,17; 5:5-10).
한편, 그리스도께서 이런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인 것이다(1:3 4:14; 7:28). 저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표시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강조한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사역과 대제사장직과의 관계는 이러하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그의 죽음과 분리될 수 없으며(13:12), 그분은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도 계속 일하고 계신다(6:2). 또한 그분은 재림시에도 대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감당하신다(9:28). 이때는 첫 번째 성취하신 모든 축복을 더욱 확고한 것으로 나눠 주시는 역할을 하실 것이다.
2. 더 나은 제사:새 언약의 제사
새 언약의 제사는 더 나은 제사이다. 제사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의 중심이다. 그러나 본서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정도의 체계적인 속죄 교리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교리는 바울 서신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저자는 제사의 방식과 진행 과정보다는 제사의 효과에 더 큰 흥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객관적인' 표화(속죄, 화목, 칭의)를 발견하는 반면, 본서에서는 속죄가 '주관적인' 효과를 갖는 것, 곧 사람을 정결케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의 효과를 표현하는 의식적인 4가지 용어를 사용한다. 그 용어들은 '속죄하다', '정결하다', '거룩케 하다', '온전케 하다'이다. '
속죄하다'는 죄를 더는다는 의미이며(2:17) '정결케 하다'는 '죄책을 제거하는 것'을 뜻한다(9:14,22,23;10:2). '거룩게 하다'는 죄책(罪責)이 이동되었다는 선언을 받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위치를 얻었다는 뜻이며(2:11; 9:13; 10:10,14,19; 13:12), '온전케 하다'는 도덕적 완성을 뜻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에 합당하도록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본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속죄의 목적, 곧 살아계신 하나님께 죄의식 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하게 하는 제사의 효과면으로 설명한다.
3. 언약 개념
본서에는 '언약'이라는 말이 17회 나타난다(신약 성경에 총 33회). 저자는 옛 질서와 새 질서를 비교하는데, '언약' 개념을 통해 서로 비교한다. 이 언약 개념은 양 질서의 관계를 서로 묶어 주는 공통 분모이다. '언약'이란 뜻은 '엄숙한 종교적 제가(制可)'를 뜻한다.
그러면 본서의 '언약' 사상이 기독교 전체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첫째로, 본서는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예배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봉사를 위한 종교가 아니라, 예배를 위한 종교임을 강조한다.
언약의 개념 가운데 하나님은 언약을 성립시키는 분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가 되선 것은 그 백성으로 하여금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히 9:14,15)인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9:25; 12:24) 그의 백성을 위해 간구하시고,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께 나아가신다(4:16; 7:25; 10:22). 이것 역시 경배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에배를 드리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일이 중요하다(10:19 이하).
둘째로, 본서는 하나님 백성의 종말론적 상태조차 하나의 예재 공동체로 보고 있다.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을 맺은 다음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했다. 이 사상이 신약에 넘어와 본서에 나타난다. 예배의 정상적인 모습은 신, 구약을 막론하고 개인적인 아닌 공동체의 모입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경배하는 것은 하나님은 받아야 할 완전한 경배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본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경배의 개념과 연관시킨다. 여기서 백성의 개념은 인종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하에 있는 백성을 뜻한다92:17; 4:19; 11:25; 13:12).둘째로, 본서는 하나님 백성의 종말론적 상태조차 하나의 예배 공동체로 보고 있다.
야고보서
본서의 수신자들은 유대 밖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할 기회가 적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많은 시련이 있었다(1:2-4). 경건치 못한 부자들의 횡포와 학대 때문에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했고(5:1-6), 일부 성도들의 신앙은 형식에 치우쳤으며(1:22-27; 2:14-26), 사랑이 식어져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2:1-13). 또한 말과 행동이 거칠어서(3:1-12; 3:13-4:3). 성도간의 교제가 단절되어 갔다. 이 때문에 야고보는 이들을 격려하고, 잘못된 신앙 자세를 시정하며, 또한 "믿음과 행함"에 대한 바른 인식을 교훈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였다.
베드로전서
본서는 극심한 박해 아래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것이므로 '위로'와 '격려'로 가득 차 있다. 저자는 이 격려의 주제를 '산 소망'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본서를 '소망의 서신'이라고도 부른다. 본서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힘힙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근본 초석으로 삼고 있다. 또한 성도들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개우쳐 주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이 사실을 상기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박해를 이기라고 말한다.
베드로후서
베드로가 이 '둘째 서신'(3:1)을 쓴 시기는 그의 임종에 즈음해서였다. 본서 역시 베드로전서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기록되었으며, 베드로 전서와 동일한 수신자들에게 보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베드로는 첫 번째 편지인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수신자들의 고난에 대해서 언급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주로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고하였다. 그 당시 거짓 교사들은 주로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기독교적인 윤리를 무시해도 된다는 도덕 폐기론을 내세우며 성도들을 유혹하였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지니고 예속 성장할 것과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베드로는 진심으로 수신자들이 은혜와 지식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했다.
요한1,2,3서
■ 요한1서
사도 요한은 그노시스주의의 거짓된 가르침을 논박하고(2:26),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5:13) 이 편지를 썼다.
■ 요한2서
기독 교회의 초창기인 A.D. 1세기와 2세기경에는 순회 전도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이들을 집으로 맞아들여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들이 떠날 때는 여행을 위한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그노시스주의 이단과 교사들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사상을 전하였다. 따라서 본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잘 모르는 가운데 이단사상의 전파에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이단 전도자들을 잘 분별하라고 권면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 요한3서
테메드리오에 의해 전달된 것으로 보이는 요한 삼서는 순회 전도자들의 보고에 기초하여 쓰여졌다. 그들은 사도 요한에게 돌아가 가이오와 데메드리오가 베푼 대접에 대해서 보고하였다. 교회의 지도자급에 있었던 디오드레베는 사도 요한의 권위에 도전하고 요한이 보낸 전도자들을 거부하였었다. 심지어 디오드레베는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기도 하였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칭찬하고, 디오드레베를 책망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했다.
유다서
본서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은 잘못된 가르침과 부도덕한 행실로 교인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1)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다.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신자들은 도덕적 제재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2) 거짓 교사들으리 신앙은 신비 체험, 특별히 종교적 황홀경에 들어가서 체험한 환상을 지나치게 의존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러한 그릇된 교훈 뿐 아니라, 악한 행실로 교인들을 타락시켰다.
요한계시록
본서는 '계시'(헬. '아포칼립시스', 1:1)요, '예언'(1:3)이며, '서신'(1:4; 22:21)이다. '계시'란 숨겨진 어떤 것이 드러남을 뜻한다.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신 바를 담고 있다.
본서는 또한 '예언'이다. 예언이란 종말론적인 완성의 빛을 현재에 비취게 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다(참조. 벧후 1:19). 따라서 계시록은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이 시대(종말)에 있을 종말론적인 구원과 악한 세상 권세들에 대한 심판을 확인시키려는 의도를 갖는다. 동시에 본서는 '서신'이다. 수신자는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였다. 그 당시 교회는 외적인 박해를 당하여 배교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교회에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제시해줌으로써,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려는 것이 본서의 의도였다.
1. 서론(1:1-20)
2. 일곱 교회들에 보낸 편지들(2:1-22)
3. 하늘 보좌 환상(4:1-5:14)
4. 일곱 인들(6:1-8:1)
5. 일곱 나팔들(8:2-11:19)
6. 그리스도와 용과의 싸움(12:1-14:20)
7. 일곱 대접의 준비(15:1-8)
8. 진노의 일곱 대접(16:1-21)
9. 바벨론 심판(17:1-19:21)
10. 최종 완성(20:1-22:21)
11. 후기(22;6-21)
요한계시록의 핵심어는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와 "일곱'이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에 대해서 철저하게 밝히 드러내 주고 있다. 그분은 큰 권능과 지혜를 가지고 영광 가운데 임하실 것이다. 또한 그분은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는 몇몇의 숫자는 중요한 상징을 나타낸다. 그 가운데에서도 일곱이라는 숫자가 두드러진다. 즉, 일곱 편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표적, 일곱 재앙, 진노의 일곱 대접, 새로운 일곱 일 등이다.
'구약신학!! 구약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약 성경의 언어별 제목 (0) | 2022.08.26 |
---|---|
구약성경 39권의 개요 (0) | 2022.08.20 |
구약 성경의 산책 (0) | 2022.01.02 |
구약총론 (0) | 2021.09.10 |
구약성서개론(舊約聖書槪論) (0) | 2021.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