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하나님아들 2021. 10. 26. 21:03

 공공신학과 성서해석 

 

먼저 공공신학에 관한 신학적 지식을 정리하고 공공신학이 형성된 배경과 상황들을 설명할 것이다. 

공공신학은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신학이요, 

현대 교회가 당면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 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공신학은 시대적 요청임과 동시에 성서에 기반한 신학이다.

 

1) 공공신학

 

  공공신학은 영어의 ‘public theology’를 번역한 말이다. 

공공신학은 두 가지의 목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가 신앙이라는 것을 단순히 신자의 사생활과 교회의 내부적 관심 정도로 여기고자 하는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공동의 이익을 위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기 위해 어떻게 하면 성서적이고 신학적 통찰력들을 가지고 노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은 기독교의 공적(public) 성격과 그리스도인들의 공적 삶을 강조하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공공신학은 신앙을 사(private)적인 영역이나 개인적 차원에서 한정하지 않고

사회와 공(public)적인 차원의 영역들인, 경제, 정치, 문화, 사회, 기술 등에 관련된 제 문제들을 다루려는 신학적 시도이다.

 

 

  사실 공공신학의 개념과 배경은 1970년대 후반 시카고대학의 교회사가인 마틴 마티(Martin Marty) 공공의 선’(public good)에 관한 에큐메니칼적인 결단의 내용으로 쓴 그의 책, 공공 교회(The Public Church)에서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마티가 이 책에서 지적하는 것은 사회를 향한 교회의 무관심과 철회를 향한 반대운동이었다. 

마티는 종교의 사사화를 통하여 교회가 점차 공적 영역과 삶에 공헌하지 못하는 미국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에 대한 대안적 교회의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공교회 개념을 제시하면서 마티는 한편으로는, 개인과 정부 사이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과 대중(masses) 사이를 중재해 주는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보았던 사회학자 알렉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관점을 따랐다. 토크빌은 이러한 중재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뿐만 아니라, 기타의 다른 자원 단체들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보았다. 제임스 파울러(J. Fowler)에 의하면, 마티는 이러한 토크빌의 주장에 기초하여 교회는 기독교 전통에 기초하여 공중에게 질서를 부여하는 신앙을 통하여 공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마티에 의하면 공교회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있는 사도적 교회로서 신앙적 정체성을 확고하게 지닌 교회이다. 동시에 공교회는 사회의 공적 질서에 민감하고 이에 대한 책임성을 지닌 교회이다. 이러한 공교회는 자신의 신앙적 확신을 가지고 공적 질서 또는 공적 삶에 신앙적 차원의 초월적인 가치를 불어 넣기 위해 노력한다. 공교회는 또한 복음적 열정을 에큐메니칼 열정과 서로 연결하는 특별한 과제를 수행하는 교회이다. 그는 이러한 공교회의 구성원들은 폭력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타자를 공격하지 않고도 자신들이 믿는 바를 긍정할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의 단계로 인류를 인도해 나가야 하는 중대한 소명이 있다고 한다.

 

 

  공공신학의 태동기는 1920~1930년대로 본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본회퍼와 칼 바르트가 이 시기에 공공신학을 창시한 것으로 보고 있고, 미국에서는 라인홀드 니이버가 공공신학을 전개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창립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공공신학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고, 1960년대에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신앙이 공공신학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진정 공공신학이라는 이름을 내어놓고, 신학 작업을 전개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형기는 공공신학이란 말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60년대에 종교사회학자인 벨라(Robert Bellah)가 그의 논문 미국에 있어서 시민 종교(1967)에서 시민 종교를 사회에 있어서 일반적인 공적 종교(a common public religion)라고 부름으로써 그리고 시카고대학의 교회사가인 마틴 마티(Martin Marty)가 라인홀드 니버의 공헌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공적인 신학”(a public theology)이란 말을 처음 사용함으로써, “공공신학이란 말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공공신학이 지닌 더욱 더 구체적인 의미는 실천신학자인 파울러에게서 잘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신앙발달 이론을 확장 시켜 나가면서 성숙한 신앙(공공신앙)을 양육하는 장소로서 공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파울러에 의하면, 공교회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교제로 세워진 교회공동체로서 역사의 진행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프락시스(praxis of God)를 지향하도록 명령하는 성경적 근거에 충실히 하고자 하는 교회라고 한다. 계속해서 파울러는 말하기를, 기독교 교육을 비롯하여 실천신학이 지향하는 프락시스는 교회 내의 그리스도인들의 프락시스에만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적 프락시스는 하나님의 프락시스를 지향해야 함을 역설한다. 하나님의 프락시스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피조물을 향하신 창조, 치료, 용서, 지탱 등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수행하는 모든 실천의 궁극적인 모범이 되는 규범적인 실천을 뜻한다고 했다.

 

,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신앙고백은 단순히 기존 제자들에게만 관련된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예를 들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주이시다라는 교리는 신앙조항 중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교리는 교회라는 범주 안에 있는 자들만의 신앙고백으로 머물러 있다.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창조론은 세속사회에서 아직 과학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적 사고방식은 사적인 신앙으로는 허용될 수 있지만, 공적인 면에서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 하나님이 창조주라면, 단지 교회 안에서만 인정되는 하나님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신앙 교리는 교회를 넘어 만인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리는 반드시 공적인 연관성’(relevance)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연관성의 의미를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그의 책 세계 속에 있는 하나님(Gott im Projekt der Modernen Welt)에서 부제로 신학의 공적인 연관성(the public relevance of theology)’을 언급하면서 그는 기독교 신학을 공공신학이라고 하였다. 공공신학은 사회 안에 공적인 일에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빛에서 일반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주어진 사회에 가난한 자들과 소외당한 사람들의 이름 하에 정치적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기억을 통해서 정치적인 종교와 우상들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신학은 이성적인 입장에서 반성하거나 설명하는 사회의 종교적, 도덕적 가치들에 관해서 비평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했다. 몰트만의 공공신학의 핵심은 기독교 신학을 통하여 기독교 정체성을 가지면서 사회의 공적인 일에 연관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그의 책에서 공공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상과 공적인 관계성을 맺지 않는 기독교의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신학의 기독교적인 정체성 없이 세상과의 공적인 관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학은 그가 다루는 대상 때문에 공적인 신학(theologia publica)이다. 신학은 사회의 공적인 질서(res publica)에 관여해야 한다.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 속에서 사회의 공공복리에 대해 깊이 유념해야 한다. 신학은 사회의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을 정치적으로 대변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고는 신학이 정치적 종교와 우상숭배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항하도록 만든다. 신학은 자신이 몸담은 사회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변증해야 한다. 그러나 신학은 현대의 다원주의의 함정을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 함정 안에서 신학은 소수자로 축소되며 자신의 종교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제한당하기 때문이다.

 

 

  즉, 몰트만은 기독교 신학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시대에 공공성이 실현되고 설명할 수 있는 신학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식민 시대가 끝난 이후 여러 가지 사회적인 부작용이 생김을 직시하고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교회의 기능은 단지 교회에 속한 개개인을 위한 교회가 아니며, 또한 교회는 사회와 분리된 채 살아가는 생존을 위한 공동체가 아님을 강조했다.

 

 

  그리고 공공신학의 저명한 신학자인 던컨 포레스터(Duncan Forrester)는 공공신학에 대해 정의하기를, “공공신학은 고백적이고 복음적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선포하고 나누는 복음이다. 세대의 징표들을 분별하고 복음이 빛 안에서 진행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신앙의 전통과 성서에 참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공공신학의 구성은 기독교적인 전통 안에 있는 확신과 통찰을 통해서 공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카고학파의 중재(mediation) 신학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인 맥스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도 공공신학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관하여 공적인 담론, 즉 다른 과학자들과 상호작용하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수반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공공신학의 개념을 공적이라는 근거에 대해서 말하기를, “첫째는 기독교인들이 믿는 바와 같이 우리는 비밀스러운 집단이 아니며, 어떤 특권층도 아니고, 비합리적이지도 않고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이해될 수 있고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힌두교도 및 불교도와 유대교인 및 회교도와 인문주의자 및 공산주의자와 합리적인 입장에서 논의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공공신학은 공적 생활의 구조나 정책에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 공공신학은 본질적으로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논하는 진리는 생명력 있는 정의의 요소를 함축할 것이며, 이 바탕 위에서 진리의 온전성이 시험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스텍하우스는 공공신학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과 공적인 삶의 구조에 대한 정책을 펼 수 있는 합리성이 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다른 종교들과도 대화함으로써 기독교적인 확신들이 설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공공신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신학을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적 신념과 교리들의 공적인 적합성’(public relevance)에 관심을 갖는 신학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일학파이면서 공공신학자인 로날드 티먼(Ronald F. Thiemann)도 공공신학에 대해서 말하기를, “기독교적 확신과 기독교 공동체가 속한 더 넓은 사회적, 정치적 맥락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신앙이라고 하였다. 티먼은 교회가 교회가 될 때, 나름대로 공적인 일에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면서, 기독교적인 정체성과 사회, 정치적인 맥락 하에서 공공신학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호주의 신학자 클라이브 피어슨(Clive Pearson)도 공공신학에 대해서 말하기를, “공공신학은 확대된 사회의 여러 문제를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고민하는 신학이라고 했다. 피어슨은 기독교 신앙이 공공선’(common good)과 연관성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피어슨은 공공신학은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헌신이 요구되는데, 이 헌신은 반드시 이성적 판단과 엄밀함이 필요하므로 조심스러운 접근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공공신학은 기독교 신앙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관계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공공신학은 모든 학문과 대화가 가능해야 하고, 기독교 신앙 주변의 자리에까지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피어슨은 공공은 정부, 시민봉사, 경제, 정치 분야, 교육, 문화 그리고 새로운 협회 단체들을 공공이익집단이라고 말하면서 신학이 이런 공공사회와 소통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일반적으로 보편타당한 사회규범과 함께 공유하면서 함께 인류 문제들을 해결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공공신학은 사회 속에서 사람들에게 직면한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서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신학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공공신학자인 노영상 또한, 그의 책 교회와 신학의 공공선에 대한 논구에서 공공신학을 신학과 윤리의 교차 부분에서 파생된 신학 분야로 보며, 그 공통분모들을 몇 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는 공공신학은 교회 내의 사람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 종교적 담론이 이해되고 확신되며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의도된 신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 공공신학은 과학적이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종교적 공동체뿐 아니라, 더 넓은 사회를 포괄하는 문제에 대해 진술한다. 셋째는 이론에 있어, 다양한 도구와 자료와 방법을 채용하고 있다. 그리고 넷째는 공공신학자란 어떤 한 신앙이 있으면서도, 사회의 모든 사람을 향해 설득력 있게 사회의 공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하며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임성빈은 공공신학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신앙의 공공적 책임성을 구체적으로 모색하려는 신학적 노력이 곧 공공신학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공공신학의 공통적 지침으로서 여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공공신학은 성경적인 토대를 가진 신학적 전통에 근거해야 한다. 둘째, 그러나 동시에 공공신학은 이중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셋째, 그러므로 공공신학은 학제 간의 연구여야 한다. 넷째, 기본적으로 공공신학은 비판적이어야 한다. 다섯째, 궁극적으로 공공신학은 보편성을 지향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공공신학은 지구적 시민 사회를 위한 신학이어야 할 것을 제시하였다.”

 

 

  공공신학이 형성된 역사적 배경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근대의 과정에서 나타난 다원화로 인한 종교의 사사화(privatization) 현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근대를 통하여 탈 주술화(disenchantment)로 인한 합리화(rationalization)의 과정이 진행되면서 사회적 정당화를 독점하던 종교는 이제 설득력(plausibility)을 잃어버리게 되고 다른 많은 대체물과 경쟁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결과 종교는 점차로 그 기능이 축소되어가고 사회의 구조적 분화(structural differentiation)를 통한 종교의 사사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역시 공공의 선을 위한 위치에 서지 못하고 개인적 혹은, 종교적 영역에서만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사사화 된 모습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둘째, 많은 종교전쟁으로 인한 정치와 종교의 분리 현상 때문이다. 종교전쟁으로 인한 부정적인 경험이 정치와 종교 간의 분리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종교는 공적인 영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개인적이거나 종교 공동체 내의 실천으로만 제한하게 되었다. 셋째, 근대화와 세계화로 인한 서구적 개인주의의 확산이 가져온 종교적 개인주의화 때문이다. 근대화 과정을 통하여 유럽과 북미에서 형성된 개인주의 현상은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다. 이 영향으로 기독교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갖게 된 것이다. 넷째, 1960년대 유럽의 정치신학과 남미의 해방신학의 영향 때문이다. 유럽의 정치신학은 신앙의 사사화와 종교와 정치의 철저한 분리로 인한 교회의 비정치화를 비판하면서 전개된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신학은 신학의 공적인 증언과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공공신학의 태동과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일어나는 종교의 탈 사사화(deprivatizaton) 현상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탈 사사화 현상은 세계화와 포스트모던적 다원주의 상황에서 종교가 지닌 공적인 영향력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 주었고, 이 현상은 공공신학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임성빈에 의하면, 사회학자 호세 카사노바(Jose Casanova)는 기존의 종교의 세속화 이론을 수정하면서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점차 증대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한다. 종교의 탈 사사화 현상은 종교의 공적 역할에 대한 기대를 다시 불러일으키게 되었으며, 이는 공공신학에 대한 요청으로 연결되었다.

 

 

  대표적인 공공신학자들의 이론을 소개하면, 영국의 던컨 포레스터(Duncan B. Forrester)를 들 수 있다. 그는 1984, 에딘버러에 신학과 공적 이슈들 연구소’(The Center for Theology and Public Issues)를 만든 이래, 공공신학에 관한 20여 개의 논문을 편집하여, 21세기를 위한 공공신학을 출판하면서 그가 주장하는 바는, ‘공공’(public)은 공동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공동체(community)와 차별화한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상호 간의 유사성과 공통점을 특징으로 한다면, 공공에서는 비교, 차별, 깨어지기 쉬움 등이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공공신학은 교회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사람과 이들이 가진 독특성(particularity)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교회, 아카데미, 사회 등과 같은 3가지 공공을 제안하고 이에 상응하는 신학 분야로 조직신학, 기초신학, 실천신학 등을 연관시킴으로써 공공신학이 갖는 기능을 구분했다.

 

 

  포레스터의 공공신학의 구성은 기독교적인 전통 안에 있는 확신과 통찰을 통해서 공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신학이 단지 사적인 삶에만 영향을 끼친다거나, 개인적 주관성의 기능이라는 점을 거부한다. 그에게 신학 함이란, 어떤 사람이 공적인 일에 직면하여 그곳에 참여하는 행위라고 한다. 그래서 신학은 항상 개방된 곳에서 즉 포럼(forum)과 아고라(agora)와 같은 곳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하며, 신학이 개방적이라는 것은 신학이 대화라는 것을 뜻하며 이는 타인을 위한 설득과 타인에 대한 수용 모두를 포괄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는 로컬과 글로벌을 아우르는 글로컬(glocal)’ 신학을 추구했다.

 

 

  그리고 독일의 볼프강 후버(Wolfgang Huber)를 들 수 있다. 후버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하인츠 에두아알드 퇴트(Heinz Eduard Tödt) 교수 지도하에 교회와 공공성”(Kirche und Öffentlichkeit)이라는 제목으로 교수자격 논문을 제출하였다. 후버는 독일 밖으로 눈을 돌려 세계 개신교들, 특히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의 교회 공공성의 구조변경에 관심을 가지면서, 교회와 공공성의 구조 변화들과 함께 교회론적 고찰(ekklesiologische Betrachtung)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는 이 공공성 문제를 정치신학적 혹은 사회윤리적 측면에서보다는 교회론적 측면에서 다룰 것을 제안했다. 이후 그는 공적 이슈와 관련된 자료들을 끊임없이 편집해 오면서, “공적 담론에 대한 이슈가 칼 바르트의 교회 중심적 및 도그마 중심적 신학과 바르멘 선언 이후 현재까지 진행 중인 많은 중요한 토론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유럽에서 얼마나 많이 보여주고 있느냐고 지적하면서” “종교는 사적이다라고 했던 슐레테(H. R. Schlette)의 주장을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유대적 그리스도교적 전통에서 신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를 규정하는 데서도 사적 성격이란 존재하지 않고 나아가서 성서, 특히 신약성서 전통에서도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제의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 더 나아가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명백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더 나아가 후버는 교회가 갖는 공공성에 대한 성서적 전통적 신학의 근거를 본회퍼(D. Bonhöffer)의 교회론에서 찾았다. , 본회퍼의 교회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Christus als Gemeinde Existierend)라는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으로부터 교회는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리행위가 신자들 상호 간의 대리행위와 세계 안에서 달성되어 가는 장소다.”라는 명제를 통해서 후버는 교회론의 공공성을 더욱 구체화하였다. , 후버는 그리스도 교회의 공공성을 세계를 위한 존재라는 본회퍼의 교회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래서 손규태에 의하면, 후버는 세계 없는 교회나 교회 없는 세계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세계에서 교회는 새로운 창조와 피조물로서 존재하는데 그것이 교회의 공공성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후버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앙의 체계적인 부실화를 막고, 경험과 지식을 위한 신앙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신앙의 지식은 공적으로도 새로운 주제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그의 연구성과라고 한다면, 교회와 국가라는 전통적 정치신학의 틀 안에서 특히 독일교회가 갖는 공공성의 구조 변화들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미국 신학자로서는 로날드 티먼(Ronald F. Thiemann)을 들 수 있다. 루터교 목사이며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86년부터 하버드 대학에서 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특히 공공에서의 종교의 역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티먼은 그의 저서, 공적 신학을 구성하면서: 다원 문화 속에 있는 교회에서, 개혁교회의 신학 전통을 따라서 은혜의 언약에 근거한 정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구원 얻은 백성들에게 정의를 요구하신다고 주장한다. 이형기에 의하면, 티먼의 공공신학 방법은 일반종교와 기독교 신학 사이의 접촉점을 인정하는 스텍하우스와 달리, 칼 바르트와 내러티브 신학의 입장에서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전개하고 있다.”라고 한다.

 

 

  그리고 또한 미국의 스탠리 하우워스(Stanley Hauerwas)를 들 수 있다. 하우워스는 미국 기독교윤리의 교회적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는 이야기 신학자로서, 이성적으로 보편적인 만남과 대화보다는 교회의 이야기로서 비롯되는 전통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신실하게 발전시키고자 하는 인격과 덕의 함양을 더욱 우선시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보다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책을 세우는 것보다는 인격이 형성되는 그 자체 안에서 공적인 일들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우워스가 공적인 일에 참여하는 방법은 교회를 전제로 한 윤리이다.  교회는 공동체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전제로 하는 윤리는 곧 사회윤리이고 공동적인 이슈를 해결할 수 있는 근원이라고한다.” 그래서 하우워스의 실천(Praxis)의 의미에 대해서 로버트 게스코이그네(Robert Gascoigne)는 말하기를, “공적인 사회의 불의를 변혁시켜 가려고 하는 것보다는 세상에서 평화의 공동체로서 본보기를 보여 줄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실천을 말한다.”라고 했다. , 교회가 철저하게 제자도의 삶을 산다면,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기주의적 마음을 버린다면, 교회가 교회 됨으로써, 세상의 공적인 일을 변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지적인 엘리트적 결의론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공동체 지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잘하는 결의론자들의 소수 전문가 집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은사들을 받은 교회 공동체 지체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우워스의 공공신학은 신앙 고백적 방법의 배경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공적인 영역에 참여하는 자들이 교회 정체성을 망각하여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에 몰입되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야기와 실천을 통해서 기독교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공공신학은 신학과 윤리의 교차 부분에서 파생된 신학 분야로서, 공공신학자들이 그들의 환경 상황에서 정의하는 공공신학을 종합해 보면, 대략 네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 공공신학은 교회 내의 사람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 종교적 담론이 이해되고 확신되며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의도된 신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신학은 과학적이어야 한다. 둘째, 공공신학은 종교적 공동체뿐 아니라, 더 넓은 사회를 포괄하는 문제에 대해 진술해야 한다. 셋째, 공공신학은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이론에 있어서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하며, 다양한 도구와 자료와 방법들을 채용하고 있어야 한다. 넷째, 이런 의미에서 공공신학자란 어떤 한 신앙이 있으면서도, 사회의 모든 사람을 향해 설득력 있게 사회의 공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하며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자이다. 그래서 공공신학자는 이중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공공신학의 목적은 공공의 선(public good)’, ‘공동의 선(common good)’, 혹은 시민 사회(civil society)’라고 불려 온 것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공공신학이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 공유하는 공공도덕(common morality)’이다. 그리고 다른 신앙이나 전통을 가진 자나 다른 학문 분야의 사람들과 대화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않으며, 어떠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지속적인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는 신학이다. 끝으로 스텍하우스의 말이 인상적이다. “기독교의 소명과 청지기 같은 기독교적 개념보다는 보편적인 공공선’(public good)이란 일반적인 도덕적 개념을 갖고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진술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공신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공공신학은 교회만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사회, 정치, 문화, 교육 모든 부분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서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신학이다. 그래서 임성빈은 공공신학은 첫째, 공적 영역에서의 교회의 위치를 논하고, 둘째, 교회적 사회적 형태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며, 셋째, 사회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했다. 시대가 점점 조직화 되어가면서 정교분리원칙의 근본정신은 사사로운 개인 관심거리로 치부되고 더 이상 사회의 공공성에 관련 없는 것으로 변질하여 간다. 이러한 현상이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사적 관심거리로 변질하여 갈 뿐만 아니라, 종교가 지닌 공공성에 대한 책임 의식이 결여되고 종교가 인간의 자기 행복과 성공을 획득하려는 수단으로 변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시점에 공공신학은 역사 현실에 대한 책임성과 사회윤리 의식을 가지고 세계현실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향해 변혁해 가고자 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2) 공공신학적 성서 해석

 

 

  앞에서 언급한 공공신학이 단순히 시대적 요청에 의한 신학적 응답만이 아니라 성서에 뿌리를 둔 신학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 기독교의 공공성에 대한 해답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대안들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신학은 신구약성서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신학이다. 구약의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의 보편적 의지의 표현이 창조된 세계에서 공공성의 실현이 중심적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배경은 개인적이기보다는 지극히 공동체적이다. 하나님은 7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거기에 인간과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을 창조하심으로써 모든 만물이 살아갈 수 있는 보편적이고 공적인 영역인 창조의 세계를 만드신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창조된 공적 영역을 통해 인간들의 사적 영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말한다. 따라서 손규태는 말하기를, 성서에 의하면, 이 세계는 인간의 사적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 즉 공적 영역이며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들과 동식물들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공생을 위한 영역이라고 한다. 이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탐욕으로 인해서 그의 창조의 공적 영역이 인간들에 의해서 파괴당하고 그 결과 인간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 , 인간의 타락이란 공공성의 파괴를 의미한다.

 

 

  공동체성의 첫 출발은 창세기 1 26~27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들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는 신적 본체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공공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을 때 가장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의 역사 속의 이스라엘 백성 또한, 개인의 존재를 공동체 속에서 찾아야 하는 사회였다. 개인의 축복보다는 공동체의 축복을 바랐고, 개인의 생활보다 공동체의 중요성이 강조된 사회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호칭은 공동체 속 아브라함의 존재, 이삭의 존재, 야곱 존재의 정체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의 구약성서의 배경은 공공신학일 수밖에 없다.

 

 

  구약성서 전체의 뼈대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의 내용에서도 그 공공성이 잘 나타나 있다. 십계명의 구성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1~4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5~10계명은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그중 5~10계명의 내용은 개인의 도덕성 추구만을 목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동은 곧 공공의 안녕과 질서 유지로 이어진다는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규정된 것이다. ,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삶의 원칙을 제시하지만, 그 적용 범위를 보아 궁극적으로 공동체 전체의 행복이라는 공공영역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구약학자들이 도덕법으로 분류하는 십계명은 사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결국 시민법의 또 다른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구약성서의 율법 중 사회법에서도 공공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구약의 사회법들은 토지나 유산과 같은 것들을 가지지 못한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법들이다. 특히,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이 보호의 중심적 대상들이었고, 토지를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들, 외국인들은 사회적 공공성을 담보로 하는 법적 제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약자들이었다. 레위기의 안식년제도는 기본적으로 농경지의 휴경을 목적으로 하며, 그해에 소출은 그 땅 주인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먹을거리가 된다는 규정이다. 이런 레위기의 안식년은 전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 제도에 의하면, 채권자는 채무를 이행할 수 없는 가난한 자에게 면제를 선언하고, 6년 동안 종이 되었던 자는 해방을 선포했다.

 

 

  이처럼 구약성서에 나타난 율법의 근본정신은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위한 것이었다. , 약자를 보호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며, 공공의 영역에서 신앙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것을 진정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서나 지혜서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개인과 공동체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개인에게 적용되는 전통적인 율법적 도덕과 공동체 전체의 선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으로 간주하는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손규태에 의하면, “공공성이 상실된 나라들,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서 망했다는 것이 예언자들의 증언이다. 따라서 사회 정의를 상실한 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무의미하고 인간들 사이의 정의, 즉 공공성보다 예배가 선행할 수 없었다.”라고 한다. 율법의 궁극은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하나님의 거룩성을 닮는 것인데 이 말은 공공의 행복과 안녕을 목표로 했다는 말이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메시지는 공공의 선을 위한 것이었다면, 지혜 문서의 메시지는 공공의 지혜를 가르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임성빈에 의하면, 구약성서는 하나의 거대한 공공신학의 담론서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성취라 할 수 있는 신약성서 또한 공공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한 공동체성이 강조되어 있다면, 신약은 교회라는 기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공동체성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은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는 대로 전체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공공성을 파괴하고 지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 사랑의 의지의 사건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이러한 공적인 삶의 구조와 정책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다. 이 하나님 나라는 기존의 질서를 비판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기독교 공동체의 공적인 삶의 구조와 정책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통한 기독교의 이러한 공공선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다. 예를 들어, 죄인에 대한 정의를 단순히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연관해서 이해한다. 즉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설정해 주어 이스라엘의 거룩함을 보존할 수 있는 수단인 정결의 사회적, 종교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의()에 합당하지 않았던 죄인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로 확인시켜 줌으로써, 사회적 음지(陰地)에 있던 죄인을 공적인 양지(陽地)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예수의 공공선의 핵심은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비주류로 던져졌던 죄인들을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주류로 복원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14 1~14절의 식탁 질서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는 식탁에서 자리를 정하는 바리새인들의 관습을 비판할 뿐 아니라 그들이 식탁을 나누는 대상들도 비판한다. 예수는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과 같은 사람들과 식탁을 나누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하며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식탁에 초대할 것을 요청한다. 이유인즉,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은 청한 자들을 도로 청하여 갚아줄 수 있지만,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은 갚을 것이 없음으로 청한 자들에게 복이 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식탁을 비판하고 있는 누가복음 14 1-14절에 연이어 나오는 큰잔치 비유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주인의 명령을 통해서, 기존의 경계를 유지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즉 예수가 전한 진정한 의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곧 산상설교의 핵심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한 기대와 요구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공공신학의 출발점이라는 것 말해 준다.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초기 기독교의 공공성의 특징은, 공적인 삶의 구조를 상실한 자들에게 공적인 삶을 복원시켜 주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이것을 구원으로 강조한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 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구조 속에서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 배려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정체성의 출발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에 나타난 기독교의 공공성은 사회의 비주류로 물러나 있던 죄인들이 사회적인 삶, 공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일으킨 공적인 삶의 구조와 정책은 기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삶의 현장으로 바꾸어 나갔다.

 

 

  결국,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공공성 실현이 중심주제 중 하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공공체를 형성하신 삼위 하나님이 인간과 동물들 그리고 모든 만물이 살아갈 수 있는 보편적이고 공적인 영역, 창조의 세계를 만드신 것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각 지파 별로 공공성의 원리에 따라 공정하게 분배한 것,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인 공공성을 버리고 사적 이익에 빠져서 생기는 인간들 사이의 제반 갈등들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 그리고 인간의 타락이 곧 공공성의 파괴를 의미한다면,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바로 공공성의 회복을 위한 사건이며, 바로 인간들이 다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 회복은 공공성 회복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마지막 설교( 28:18-20)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의 가능성을 전 인류에게 제공해야 함을 피력한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선포는 첫째, 그 대상을 전 세계 인류로 하고 있고, 둘째, 그 내용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전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구원의 메시지의 내용과 대상은 전적으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공적이다. ,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구원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 실현은 그의 형상의 내용인 공공성의 실현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성서에는 공공신학적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공공신학이 추구하는 내용이 곧 성서에 기록된 말씀이고, 공공신학의 목적인 공공의 선이 성서에서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뜻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신학은 성서를 기반으로 한 신학이며 성서에서 말씀하시는 신학이므로 공공신학적으로 성서를 재해석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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