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론 VS 혼합주의
1. 죄 많은 이 교회로 충분한가?
“예수를 안 믿는 것이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다.”(<복음과상황> 188호(2006. 7. 15), 28) 내 친구 구교형 목사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예수를 믿는다면 이런 식으로 교회 다니고, 세상에서 살겠느냐고 한마디 덧붙인다.
가슴 아프지만 가장 정확한 한국교회 진단이 아닐 수 없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의 뜻을 좇는 것이 신앙의 근본인데도, 예수를 부인하고 자기의 야망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이 된지 오래다.
이제 “한국교회는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의 언사가 자기 부인의 정도를 넘어서 자기 학대가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적은 언제나 내부에 존재하는 법이다.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외부의 적이나 요인도 한몫하지만, 일차적으로 한국교회 자신이다.
불경을 왜곡하는 것은 불교이고, 사서삼경을 오도하는 것은 유림이듯, 기독교를 망가뜨리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니체의 말은 치명적이다.
“기독교 역사상 그리스도인은 단 한 사람뿐이다.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다.”
한국교회는 자신부터 변혁해야 하고, 전도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변혁의 대상이며 최악의 전도 불모지이다.
인도에서 오랜 선교사역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온 뉴비긴은 당혹과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열악한 빈민가의 인도인들보다 부유한 영국의 런던을 활보하는 이들에게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었다.(<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대장간), 12)
또한 선교국인 영국이 피선교지인 인도보다 더한 선교 대상국이었다.
서구는 복음을 전하기 전에 복음을 먼저 들어야 했다. 우리는 이 점에서 뉴비긴이 진단한 영국과 다른가?
우리의 일차적 과제는 예수를 위해 무언가 할 일을 찾기 이전에 예수부터 제대로 믿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묻는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건가요?”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제자들이 해야 할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일이다면,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부터 예수를 믿어야 한다.
너나없이 교회들은 세상을 변혁하지 못하고 세상을 닮아가고 있다.
세속적 문화와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
메노나이트인 로날드 사이더는 그의 책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에서 북미교회가 빠진 영적이고 도덕적 수렁이 얼마나 깊고 너른 것인가를 고발한다.
세상을 그대로 빼다 박은 치부를 낱낱이 들추어내는 통에 거북하다.
그가 들이대는 구체적인 통계를 보면, 이혼, 돈, 성, 인종 차별, 가정 폭력에서 불신자와 신자는 무론하고 복음적 그리스도인조차 전혀 다를 바 없다.
이런 탄식은 개혁파 신학자 마이클 호튼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의 핵심 주장은 복음주의가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라 미국제가 되었고, 세상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복음주의 운동이 현대 세속 문화의 사상에 거의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복음주의자들이 ‘세속적 휴머니즘’을 공격하고 있다.”(<세상의 포로 된 교회>, 79)
그러니까 자신이 세상이면서 세상을 변혁한다느니, 세상은 심판받을 것이라느니 하는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아이러니’다.
그는 초지일관 기독교를 문화와 등치하려는 모든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목적들과 유익을 미국 혹은 우리의 특정 정당의 목적 및 유익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증거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주장이지, 공화당이나 민주당의 진리가 아님을 절대적으로 분명히 해야 한다.”(165)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를 바 없이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상과 동화되는 것이 항상 개혁의 일차 과제라는 점은 동일하다.
한번은 런던의 타임스(Times)가 체스터톤(G. K. Chesterton)을 포함하여 저명한 작가들 몇 명에게 “이 세상에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동일 주제로 에세이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의 대답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짧고도, 길이에 반비례하는 위력을 내뿜는다.
“나요.”(I am) 너무나 세상을 닮아서 도무지 세상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교회가 어떻게 예수가 원했던 공동체가 될 것인지를 성찰해야 한다.
우리의 염려는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에 있지 않다.
‘이원론’(dualism)이 아니다. 문제는 교회요, ‘혼합주의’(syncretism)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화두는 이렇다. “죄 많은 이 교회로 충분한가?”
2. 이원론 속의 혼합주의
기독교 신앙의 요체는 주되심(lordship)이다.
그러나 주되심의 장애물은 이원론에 있지 않고 혼합주의에 있다는 것을 세계관론자들은 부지중에 말하고 있다.
송인규는 누구보다도 이원론에 예민하고, 촘촘한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평신도 신학>(홍성사)에서 이원론은 한 부분이지만, 일상, 소명, 예배, 제사장, 성전, 안식, 주의 일 등은 직간접적으로 이원론을 겨냥하고, 총체적 주되심의 회복에 공을 들인다.
모든 영역에서 목회자와 평신도 구분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당 안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왕과 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7)
그는 이원론을 이렇게 정의한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실체나 영역 혹은 양상이 각각 별개로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도 다른 쪽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현상.”(<평신도신학2>, 211) 개념 자체로 보면, 이원론은 기독교 신앙과 부합한다.
예컨대, 하나님과 세상, 초자연과 자연,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기독교와 일치한다.
아무리 기독교가 일원론적인 성격이 강하고 양자 사이의 공통점이 많아도, 선이 악이 되는 것이 아니며, 세상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원론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정작 문제가 되는 이원론은 성속적 이원론이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실체/영역/양상이 각각 별개로 존재하는데, 거룩한 것에 해당하는 가치를 속된 것에는 부과할 수 없다”(219)는 생각이다.
이는 창조 가치를 무시하고, 세상 영역으로부터 후퇴하게 만들고, 주되심을 축소한다.(222)
하지만 ‘세상 정신’과는 대립하되 세상을 긍정하는 것과 상충된다.
성경에서 세상은 창조 전체와 그 가치관을 일컫는다.
그런데도 정신으로서 세상과 분리를 오해하여 세상에서의 모든 활동을 무가치하고 심지어는 사탄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의 의도는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 전체를 가리키는 세상1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정신인 말하는 세상2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하여 그는 세상 1과 2 사이의 고착된 혼동을 떨쳐내고자 한다.
세상2와 싸우라는 말씀을 세상1로 짐작하고 세상과 단절하는 오류를 재연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영역이 아니라는 것, 성과 속, 주의 일과 세상 일의 경계를 가르는 것은 실로 위험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모든 일이 주의 일인데, 어찌 금을 그어놓고 성과 속을 가른단 말인가.
하지만 그의 논리에는 중대한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성경 이해이다.
두 본문은 세상과 분리된 교회를 질책하지 않고, 세상과 혼음하는 교회를 질타한다.
영역을 구분하는 성속의 이원론이 아니라 성과 속이 혼합되는 것, 성에 의해 속이 변혁되는 것이 아니라 속에 의해 성이 잠식당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 본문이야말로 공동체 내에 얼마든지 세상 정신이 침투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구절인 셈이”(237)다. “어떻게 해석하든 성속적 이원론의 세상관은 맞지 않는다는”(238) 것이 아니라 성속을 혼합해서는 안 된다고 해석해야 한다.
둘째, 대조모델에 대한 오해다.
그는 <평신도 신학>에서 수미일관되게 성속 이원론이 세상과의 격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한다.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분리도 세상과의 관계 맺는 하나의 존립 양식이고,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듯이 분리도 변혁적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세상과 절대 고립된 공동체는 추상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절연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분리를 대조 혹은 대안이라고 명명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실 파악과 관련된 것으로, 한국교회는 세상1과 2를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2가 교회 안에 침투해서 사실상 장악당한 것이 문제다.
송인규가 명명한 세상1을 성서는 그닥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늘 우리의 문제도 아니다.
그도 인정하듯이 신자가 씨름해야 할 상대는 세상2이다.
세상의 정신을 교회는 내면화하고 있기에 야고보는 그 교회와 신자를 향해 ‘간음하는 여자들’이라고 엄히 경책한다.
바울의 염려가 세상과의 분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세상 정신의 교회 내 침투 문제”(<평신도신학1>, 56)라면,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분투도 이원론이 아니라 혼합주의가 아닐까.
3. 역사 속의 혼합주의
역사 속의 혼합주의는 콘스탄틴주의를 의미한다.
혼합주의는 콘스탄틴주의와 다른 이름이 아니다.
콘스탄틴주의는 교회와 세상을 동일시하는 시스템으로 정의된다.(John Yoder, The Royal Priesthood, 154)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거나 종주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이는 혼합주의다. 왜냐하면 내용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사회의 변혁이 아니라 교회의 변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콘스탄틴주의가 낯설기에 나는 ‘혼합주의’라는 용어가 더 적절해 보인다.
이 전환이 승리가 아니라 변질이라는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된다.
그리스도의 주권이 약화되고 국가와 군주의 명령이 그리스도와 유사한 지위를 차지하고 권한을 행사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공동체에서 사회의 일부분으로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세속적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되기보다 국가와 세상에 대한 책임 속에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은 반드시 현 체제에 대한 심판이자 해체이건만, 콘스탄틴주의로 전환 이후, 교회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성취로 재가하였다.
알리스테어 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기독교가 콘스탄틴화한 “가장 극적인 증거는 콘스탄틴의 승리의 트로피가 피로, 그러나 다른 사람의 피로 물들어 있다는 점이다.”(<콘스탄틴 대 그리스도>(한국신학연구소), 215) 콘스탄틴의 종교는 나를 위해 남의 피를 흘리는 종교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종교는 남을 위해 내가 피를 흘리는 종교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종이 되라고 가르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이 성공과 고지를 위해 남을 종 삼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그가 되었다.
이보다 더한 역사의 비극과 아이러니가 있겠는가.
콘스탄틴의 길은 강함과 무력을 지향하지만, 그리스도의 길은 약함과 무력함을 추구한다.
콘스탄틴의 전략은 강한 군대를 통해서 약자와 빈자를 억압하여 강자와 부자의 평화와 승리를 쟁취한다.
반면, 그리스도의 전략은 일찍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통해서 도리어 빈자와 약자가 높아지는 승리를 노래한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은 복음서와 바울서신의 십자가의 정신을 계승하여 어린 양의 정치를 주창하건만, 현재 기독교는 국가와 민족의 적을 적그리스도로 분장시켜서 그들과 싸우는 전투적 정치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에서 콘스탄틴의 ‘십자가’의 정신으로 기독교의 본질이 변화하였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승인 이후, 기독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박해받는 신앙에서 박해하는 종교가 되었고, 국가는 기독교로부터 신의 대리자로 영적 권위를 부여받는 것은 이탈이요 탈선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두고 콘스탄틴주의로의 전환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콘스탄틴주의로의 타락이다.
결과적으로 교회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콘스탄틴이 승리한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변혁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개조당한 것이다. 반복하건대, 혼합주의다.
교회사는 위에서 말한 콘스탄틴주의, 곧 혼합주의가 교회의 타락의 근본 원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지적한다.
개혁파 신학자인 더글러스 존 홀은 서구 교회가 콘스탄틴 이후로 기독교국가(Christendom) 체제였고, 현재 급격히 몰락하고 있다고 경계 사이렌을 울린다.(John Hall, The End of Christendom &the Future of Christianity, 19) 하여, 더 이상은 그런 시스템에 의존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대안은 계속 지배 권력을 행사하려는 욕구로부터 잘라내고, 문화적 기성 권력의 지위를 제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다.(48)
가톨릭에도 동일한 반성이 존재한다.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이 된 이후 교회는 추악한 오점을 많이 남겼다.
콘스탄틴 체제 이후, 기독교 국가 이후, 계몽주의 이후를 묻는 현 시점에서 성서적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브 콩가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회식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종말을 선포했다.”(피에르 신부, <하느님…, 왜?>(샘터), 85에서 재인용) 물론 가톨릭의 특성상 얼마나 그리고 언제나 그 시대의 종언을 실현할지 그 전망은 불투명해 보여도 적어도 문제 인식만은 공유한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물론, 현실은 계몽주의 이후, 프랑스 혁명 이후, 국가와 교회는 공존과 동맹에서 제도적 분리의 기간을 거쳤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서구적 콘텍스트에서 조차도 적절하지 못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
물론 더는 그토록 적나라한 동일시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넓은 의미에서 국가교회를 지향하고, 미국에서 국가와 교회의 도덕을 동일시하고, 자본주의가 기독교와 결탁하고, 혁명과 해방과 같이 보다 나은 권력 시스템을 하나님 나라와 환원하는 한, 콘스탄틴주의이다.(Yoder, The Priestly Kingdom, 141-43)
이름과 형태를 달리할 뿐 본질은 콘스탄틴주의다.
기독교 역사의 변천에도 교회와 사회의 동일시라는 콘스탄틴주의는 모습을 달리하면서도 여전히 살아있다.
다만, 양상이 유럽에서는 법적이라면, 북미의 경우는 문화적이고, 관념적이고, 사회적이다.
“유럽의 기독교 세계의 전통적인 체제가 형식의 차원이라면, 우리는 내용의 차원이다.”(John Hall, 29)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
교회와 사회의 동일시라는 점에서 콘스탄틴주의이고, 사회에 의한 교회의 변질이라는 점에서 혼합주의다.
그 시대의 종언이 목전에 임하였다.
4. 성경 속의 혼합주의
성경은 거칠게 말하자면, 기독교 세계관의 염원과 달리 이원론이 아니라 혼합주의를 위험시한다.
주되심의 주된 장애물은 영역을 구분하는 이원론이 아니라 영역을 혼동하는 혼합주의라는 것이 신구약 성경의 일관된 흐름이다.
구약에서는 가나안 문화와 바벨론 제국의 철학에, 신약에서는 유대적 율법주의, 헬라적인 영지주의, 로마적 제국주의와 갈등과 투쟁을 묘사한다.
그 가운데 세상의 지배적 문화에 동화되지 말고 구별된 존재의 정체성을 유지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1) 구약 : 언제까지 머뭇거리려는가?
구약이 혼합주의를 적대시한다는 것은 많은 본문이 지지한다.
몇몇 텍스트를 언급한다면, 창세기 아브라함의 소명 기사, 출애굽, 여호수아의 세겜에서의 고별 설교, 갈멜산에서의 엘리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멸망 원인에 대한 진단, 바벨론 귀환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 본문들은 구약의 전체 역사를 거의 포괄한다. 일관되게 구약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증언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어떤 점에서 아브라함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이 아니라 11장에서부터 시작한다.
바벨탑을 쌓아서 창조세계의 청지기됨을 부인하고 지배자가 되기를 갈망하는 인간 군상들의 세계-더 정확히는 바벨론 제국이며, 이전과 이후의 모든 제국을 가리킨다-에서 불러내서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그는 먼저 옛 체제로부터 떠나야 하고, 다음으로 지배와 폭력이 아닌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살아가는 한 민족을 구성해야 할 사명을 안고 있다.
출애굽은 이 점이 극명하게 드러낸다.
애굽에서 그들의 실존은 십계명의 서문이 규정하는 바, 노예였다.
그곳에서는 제국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 민족의 어린 아이를 죽이는 일은 예삿일이다.
그러기에 출애굽의 명분은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다.
폭력에 근거한 강자의 지배와 약자와 소수의 배제가 횡행하는 애굽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전일적으로 실현되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 제사장 나라(19:6)를 건설하는 과제를 안고 탈출한다.
세겜에서 행한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와 갈멜산에서 엘리야의 투쟁은 이스라엘 백성 내부의 뿌리 깊은 이방과 이교 문화와의 결별을 촉구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도 섬겼음을 뜻한다.
그러기에 여호수아는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맹세한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엘리야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힐문한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였다.”(왕상 18:21)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을 열왕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 이집트 왕 바로의 손아귀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주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며, 또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면전에서 내쫓으신 이방 나라들의 관습과,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이 잘못한 것을, 그들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왕하 17:7-8)
남유다 역시 이방의 가증한 것을 본받아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길을 반복한다.
그들은 뼛속 깊이 이교 문화와 이방 신을 사랑하였다.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개혁의 요체는 그들 속에 자리 잡은 세상의 잔재를 청산한다.
히스기야는 모세의 놋뱀이 하나님 대신 분향하자 파괴하고, 요시야는 성전 안에서 횡행하던 이방 예배를 제거한다.
구약의 개혁과 부흥은 종교 혼합적 관습의 타파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구원자 하나님을 잃고 세상의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에게 던진 엘리야의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2) 신약 :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양다리 걸치는 신앙을 혹독하게 비판하기는 신약도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과 재물, 세상의 영성의 알맹이인 맘몬의 정신을 갖고서는 결코 참 제자가 될 수 없다.
돈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돈이 가진 우상성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던 엘룰조차도 돈을 죄악시하지 않았다. “부는 유혹이다.
부 자체는 악이 아니라 유혹이다.”(<하나님이냐 돈이냐>(대장간), 59)
신자에게 재물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재물을 섬김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대하는 것에 있다. 신앙과 돈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다.
예수가 원했던 교회가 어떤 모습인지에 관한 복음서의 대답은 간명하다. 대조사회로서의 교회이다.
교회는 “마땅히 여느 민족들과는 다른 사회질서를 가진, 거룩한 백성이”다.(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분도), 202) 하긴 그렇다.
세상과 똑 같거나 유사하다면 뭐 하러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웠겠는가. 산상수훈은 세상과 대조되는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삶의 지침이 가득하다.
축복 개념을 전복하는 팔복, 세상 혹은 도덕과 종교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더 나은 의 등은 세상의 삶의 원리와 정반대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토대를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의 삶으로 규정한다.(12:1-2)
리처드 헤이스는 그의 방대한 <신약의 윤리적 비전>에서 이 구절이 “신약 윤리학의 과제”라고 간결하고도 힘찬 말로 마무리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필리스 역본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처럼, 세상의 틀에 맞추거나 그 문화에 의해 순응하지 말라는 뜻이다.
요한의 기록들은 대조 교회-헤이스는 반문화 공동체라고 한다-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요한공동체 내부의 지독한 사랑과 섬김의 강조는 그들을 배척한 다수요 강자인 유대 공동체와 선명한 대척점을 보여준다.
빌라도의 재판에서 자신의 나라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예수의 선언은 로마 권력의 절대화를 뒤집어 하나님의 권한 아래로 복속시킨다.
이것이 세상 속에 있지만(in the world)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not of the world)는 말이다. 세상과 전혀 달라서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되며, “위험한 사회적 위치 이동”을 불가피하게 감수하는 삶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살았던 증인들이 구름 떼와 같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그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세상과 구별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서성대는 이들에게 임한다는 본문을 예시하자면, 성경 전체를 말해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돌아섬의 회개, 세상과 구별된 삶이라는 의미의 거룩 등에 이르기까지 신자의 적은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다. 문제는 혼합주의다.
5. 정치 속의 혼합주의
최근 보수적인 교회의 대 사회적 발언이 부쩍 늘어났다.
양심적 병역거부, 이라크 파병, 국가보안법, 사학법에 이르기까지 한기총은 그 중심에 있다. 보수적인 집단인 한기총의 정치 참여나, 그 칼라가 극우에 가깝다는 것은 논쟁할 사안이지 참여 자체가 시비거리는 아니다.
어떤 집단이든지 정치적 견해가 있으며, 공적 광장에서 표명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들이 서로 공존한다.
그러므로 한기총의 정치적 행위와 특정한 이념적 성향이 정죄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문제는 “교회와 국가의 차이 혹은 신실한 교회와 신실하지 못한 교회의 차이는 하나는 정치적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상이한 방식으로 정치적이라는 것이다.”(Yoder, Body Politics, ix.) 성조기와 태극기의 결합, 미국 대통령을 연호하면서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에 있다. 이는 신의 이름으로 국가 이익을 합법화하는 것이며, 예배라는 미명으로 드리는 정치 집회이다.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종교적이다. 우려할 점은 종교가 정치화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종교화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하는 정치에는 기독교인의 됨됨이가 반영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오는 무엇인가? 첫째, 혼합주의다.
불행하게도 한기총은 십자기와 성조기를 의식적으로 구분하지 못하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혼합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KBS의 <선교 120년, 한국교회 위기인가> 방영 반대, 영화 다빈치 코드 상영 금지, 사학법 개정을 위한 삭발 단식, 이라크 전쟁 지지가 하나의 정치적 견해로 용인될 수 있어도 성경과 거리가 멀다.
자기 이익의 합리화와 극대화에 불과하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들이는 것은 참으로 볼썽사나운 일이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성경과 신앙을 수호하는 것은 바벨탑 쌓기이다.
둘째, 지나치게 힘과 권력에 의존한다.
근본주의 정치학의 근본 잘못은 권력과 폭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있다.
대형집회를 통해서 기독교의 요구를 관철하고자 하는 노력은, 그리고 기독교 인구수에 상응하는 또는 그 이상의 발언권에 집착하는 것은 기독교가 십자군의 종교가 되었다는 증거다.
그것은 세상의 셈법이다. 세상은 지위와 수, 힘을 믿고 군림하고 권세를 부린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눅 22:46) 교회는 ‘도덕적 다수’가 아니라 ‘예언자적 소수’이다.(크라이더, <평화교회는 가능한가?>, 44) 그런 교회의 권위는 실용성이나 효용성이 아니라 신실함과 자기 비움에 근거한다.
셋째, 힘과 수에 의존하는 것은 ‘폭력이 구원한다는 신화’(myth of the redemptive violence)로 연결된다.(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42-47)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잡지인 <크리스처니티 투데이>는 6,70년대 “정부의 매파들보다도 더 매파적인 입장에서 전쟁의 노력을 끝까지 지지했”던 것이다.(<세상의 포로 된 교회>, 207)
오스 기니스는 미국은 전 세계에서 경찰국가의 사명을 저버리는 때부터 약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보어전쟁을 승인했고, 프란시스 쉐퍼는 월남전쟁을 지지했다.
찰스 콜슨은 국방장관이었던 럼즈펠드에게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도 정당하다고 전쟁을 부추기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밧모 섬의 요한은 지배적인 정치 질서에 도전하는 것은 신앙의 논리적 귀결임을 환기시킨다.
세상의 정치 체제와 갈등은 필연적이다.
세상 권력에 의해 살해된 무죄한 어린 양을 노래하는 것은 그만큼 서슬 퍼런 국가의 횡포를 고발하는 것이다.
그것이 짐승인 한에 있어서 어찌 대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대 문화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혼동하는 것이 콘스탄틴주의요, 혼합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타협은 결코 용인될 수 없다.
그래서 요한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전반적인 메시지는, 교회와 세상 사이에 엄격한 경계선을 그으라는 것이다.”(<신약의 윤리적 비전>, 282) 이 메시지는 지금도 유효하고 적실하다.
6. 좁고 협착한 길 위에서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오랜 숙원은 교회 갱신과 사회 변혁이다.
교회 갱신은 교회의 정체성의 회복이고, 사회 변혁은 적절성의 유지이다. 교회는 교회다워지는 동시에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해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배제되거나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오늘의 기독교가 처한 두 가지 위기를 상관성과 동일성이라고 말한다.(13-37) 사도 요한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말들의 공통분모는 갱신과 변혁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몰트만의 지적처럼 세상에 참여할수록 교회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위기에 봉착하고, 반대로 교회가 고유한 색깔을 옹호할수록 세상과의 관련은 멀어지게 된다. 이런 딜레마는 성서에서도 볼 수 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소수의 공동체는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성전 예배와 십일조, 안식일을 회복하고, 이방인과 결혼한 이들이 이혼하도록 촉구하였다. 반면 요나서의 하나님은 패악한 도성 니느웨마저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 예언자를 파송한다. 앞의 정경이 거칠게 말해 배타적 민족주의라면, 후자는 보편적 국제주의다.
성경이 이러한 갈등 구조를 감추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는 것을 새겨야 한다. 세상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흐르는 물과 함께 흐느적거리는 상황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처럼 자기 정체성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 어쩔 수 없이 세상과의 관련성 자체를 놓쳐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요나서가 귀한 것이 바로 이 까닭이다. 하나님의 시선은 구원받은 백성에게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계 만민과 열방 위에 머무른다.
지금까지 한국교회의 상황이 세상과의 분리가 아니라 혼합이라는 지적에 설령 동의하더라도, 혼합주의 경계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이원론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반복해서 말하건대, 양자의 균형과 긴장을 늘 유지해야 한다.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마땅히 역사적 선택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성을 가지고 밀고 나아가되, 그 결과와 심판은 하나님께 있음을 겸손히 기억하면 된다.
그래도 한국 교회의 문제가 어찌 혼합주의에만 있겠느냐는 반론도 가능하다. 여전히 세상과 담쌓고 지내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혼합주의를 피하려다가 기독교가 게토화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답답해한다. 맞는 말이다. 예수 공동체는 쿰란 공동체가 아니다. 변화산 아래의 신음 소리는 귀 닫고 산 위의 구름 속에 둥둥 떠다니며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산에서 변화된 예수의 모습을 보고 변화된 자라면 산 아래의 질곡과 질고에 눈을 열어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혼합주의를 경계하고 대조의 기치를 높이 드는 것은 결코 격리나 후퇴가 아니다. 로핑크는 대조 교회는 “만민을 위한 징표”라고 역설한다. 예수가 마태복음서에서 이스라엘 선교에 집중하면서도 만민을 가르쳐 제자 삼으라고 한 것을 예로 든다. “예수가 이스라엘에 전력을 집중한 것은 필경 보편주의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지평이 한정되어서도 아니요, 세상을 등져서도 아니며,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다스림 그 자체가 모든 민족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에누리 없이 전제했기 때문이다.”(225)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의 전략이다.
혼합주의를 경계하고, 세상과의 대조를 강조하는 것은 한편으로 현재의 교회가 혼합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호튼의 단언처럼, 교회의 깊숙한 중심이 세속적인 전제에 따라 행동하는 한 그 사회를 구할 수 없다.(<세상의 포로 된 교회>, 103) 다른 한편으로 대조성 강화가 세상 변혁의 전제조건이자 선결 과제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또 오로지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바로 그 까닭에, 교회가 세상으로 변해서는 안 되며,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238) 만민을 위한 징표로서 대조공동체라는 좁고 협착한 길에 서기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자.
7. 바벨론 강가에서
기독교 철학회에서 존 요더의 평화주의의 인식론이 상당히 포스트모던하다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논문의 논지와 달리 평화주의 자체에 관심과 질문이 집중되었다. 그때 한 분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 의거하여 정당한 전쟁론이 옳다고 하였다. 평화주의가 성경과 예수님의 삶에 정확히 일치하며, 총알 한방으로도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우리 실정에서 평화주의는 신앙 본질의 문제이고, 생존의 문제라고 말해 주었다.
그의 발언 이면에 놓인 것은 과하게 말하자면 신학적 사대주의다. 솔직히 말해 새로운 환경, 한국이라는 정황 속에서 정답이라고 배워왔던 것들을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았다. 그 고백서가 성경적인지, 그리고 한국적 상황에서 적절한 것인지를 반추해야 한다. 콘스탄틴 체제로부터 외형만 분리되었지 그 내면은 철저히 그 체제와 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서구와 전혀 다른 현실을 감안하지 않고 신학하고 신앙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 범하는 근본 오류로 본다.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고 고수하느라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다. 성경도, 역사도, 정치도 그 어느 것도 세상과 분리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오히려 세상과 밀착하고 정치적 떡고물에 혈안이 되어 있는 마당에 아직도 참여를 외치는 것은 씁쓸하다. 더 이상 뭘 동참하란 말인가. 머리털을 밀고, 길거리로 나선 선배들은 이제 교회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에서 교회를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세상을 신물 나게 보고 있는 마당에,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을 언제까지 외면하고 이원론을 고집할 건가.
그렇다. 우리는 바벨론 땅에서 살고 있다. 예루살렘이 아니다. 낯선 땅에 사는 나그네, 외국에 거주는 이방인이다. 예레미야는 말한다.(렘 29:4-14) 하나님의 원수의 땅에서 집도 사고, 정원도 꾸미고, 결혼해서 아들 딸 낳아 행복하게 살라고. 그렇다고 “바벨론에 동화되라는 의미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피터슨,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182) 그 진의는 그곳에서 사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바벨론 땅에서 시온의 삶을 살아내라는 것이다. 한때 세상의 지배자였던 교회와 신학이 옛 영화와 언어를 버리고 새롭게 하지 않는 한, 잡신의 나라, 무신의 나라, 불신의 나라에서 시온의 노래를 어찌 부르겠는가. 이 바벨론 강가에서 말이다.(<공격적 책읽기>, 27-29)
김기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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