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예언과 샤머니즘 예언의 차이
○ 쾌자 자락을 날리며 무당은 현란한 춤사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장고와 제금의 소리가 높아지며 박자와 장단이 빨라진다. 이윽고 춤이 끝나면서 무당의 입에는 위엄찬 소리가 울려 나온다. 굿을 의뢰한 여인네는 연신 손을 비비면서 그 소리를 듣고 있다. 관중들도 손을 비비면서 별비로 지전을 내밀면서 신수 봐주기를 간청한다. 무당은 이들에게 각각 예언한다.
○ 지금은 현대문명에 밀려서인지 아니면 소음 때문인지 도심지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굿판의 광경이지만 한국 도처에는 여전히 굿이 행해지고 있고 민간신앙으로서의 무교(巫敎)는 한민족의 심성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샤머니즘
○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무교, 즉 무당종교는 시베리아를 중심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는 샤머니즘의 한 지류로서 한국화한 하나의 원시신앙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무당은 '샤먼'(Shaman)이라 부를 수 있다. '샤먼'이란 말은 시베리아와 만주족의 언어인 퉁구스(Tungus)어에서 온 말이다.
○ 샤머니즘의 공통적 신앙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영 장군이나 장보고같은 인물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가족을 떠나 큰 일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라는 점이며, 이들은 민중의 마음에 살아 있어 민중의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무교에서는 죽은 사람이 신령으로 대접을 받는다. 무교에서 영혼은 육신에서 이탈한 것으로 무형의 전지자이며 불멸한다고도 믿는다. 그리고 죽은 영혼은 조상과 악한 원귀로 세분할 수 있다. 즉 선한 영과 악한 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영혼은 살아있는 사람과 동일한 인격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여 굿에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무교는 기독교와 판이하게 다르다. 기독교에서의 사자(死者)는 추도의 대상이 될 뿐 숭배나 의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무교에서 신앙하는 신은 전국적으로 273종이나 된다. 최고 신으로 천신이 있고 그 밑에 일월성신, 제석신, 칠성신, 등 다신들이 자리잡고 있다. 때로는 신들의 알력 여파로 인간들이 화를 입기도 한다. 우주는 천상(낙원), 지상, 지하(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지옥과 낙원)로 구분된다. 유일신적 구조를 가진 기독교와는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는 점이 바로 무교가 다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샤먼', 즉 무당은 신을 체험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무당은 입무식(Initiation)을 거쳐서만 숭앙된다. 이 입무식은 인간적 속성이 성화하여 가는 과정을 상징하고 있다. 신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은 무병(巫病)을 앓게 된다. 이것은 무교에서 신이 내린 '사랑의 매'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인간이 초능력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입신체험을 한 무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을 지배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이 신들을 자신에게 들어오게도 하고, 그들 마음대로 신들을 제압하는 힘을 발휘한다. 중요한 것은 무당이 신에게 불가항력으로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신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기에 자신 안으로 신을 결합시키거나, 또는 자신 안에 있는 영을 영계(靈界)속으로 다시 보내기도 한다.
무당은 예언자, 의사, 사제의 기능을 가진다
러시아 학자 반자로프는 무당의 기능을 예언자의 기능, 무의(巫醫)의 기능, 사제자(司祭者)의 기능 등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 가운데 주목할 것은 바로 예언자의 기능이다. 무당이 예언할 때는 굿판 가운데서 예언하기도 하고 단순히 점을 쳐서 예언하기도 한다.
○ 최길성 교수에 따르면 굿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 첫째, 의복인 무복(巫服)이다.
○ 둘째, 장고와 제금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덩더쿵 장단이 특징인 무악(巫樂)이다.
○ 셋째, 접신의 상징을 이루는 무무(巫舞)이다.
○ 마지막으로 중요한 특징은 무당이 구술하거나 노래하는 무가인데 그중에는 굿의 특징이 되는 신탁인 공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무당의 예언이라 부를 수 있다. 격렬한 무악과 도무(跳舞)에 의해 강신된 무당이 신이 되어 제일인칭으로서 공수를 한다. 이 때 굿을 의뢰한 주인이 공수를 받기도 하고 굿을 구경하는 관중이 공수를 받기도 한다. 이 광경은 신과 인간이 대화를 하는 광경이며 굿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공수이며 첫번째의 공수를 '말문'이라고 한다. '말'은 신어를 뜻하고 '문'은 시작을 뜻한다. 이 말문이 곧 예언이고 점언이다. 무당은 신에 의한 점복을 행하면서 전문적인 의례의 양식을 배우고 사회적인 관계를 확대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무당이 점언을 할 때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한 비밀스러운 정보를 영에게서 알아내어 그 내용을 전달해주게 되는데 대개 물체나 자연현상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그 정보를 알아내며 그 과정 가운데서는 여러 현상들을 해석하는 과정도 있다. 그러나 무당이 다른 기능을 행하지 않고 신에 의한 점복의 기능만을 행하며 세상을 돌아다닐 때 '돌팔이 무당' 이라는 뜻으로 '선무당'이라 한다.
○ 공수는 신탁으로 대부분 예언자적 선언의 노래 형태로 이어진다. 공수의 내용은 두 요소로 형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불성실에 대한 비판이요,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은총으로써의 축복에 대한 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수는 인간의 기원에 대한 신의 응답이요, 축복의 약속이다. 곧 장수와 부귀와 평강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
무속과 하나님의 예언과의 차이
○ 놀랍게도 나타나는 현상만을 볼 때 기독교의 예언과 무속과는 유사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기독교의 예언자들이 소명을 받을 때 신비한 체험을 하듯 무당도 강신의 경험을 하며 신비한 체험을 한다.
○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은 기독교의 예언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만 그 소명을 받은 후에도 인간으로 남아 있지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예언자는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인간으로 그 임무를 수행한다. 자신이 스스로 예언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셔서 예언자가 되었음을 강조하며 하나님이 주신 권위와 능력으로 예언 활동을 한다.
○ 광야 한 가운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고, 성전에서 잠자고 있던 사무엘을 하나님은 부르셨으며,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에 의한 선택된 예레미야는 다시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아 예언자가 되었다. 기독교의 예언자는 신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으며 더구나 신이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무당은 입무식을 거친 뒤에는 신으로 행세하며 신의 세계와 인간이 세계를 왕래하며 신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 예언을 할 때 유사한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무당이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면서 황홀경 속에서 예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예언자 가운데는 음악을 이용하는 엘리사의 모습도 나타나고 (왕하3:15), 사울이 사무엘을 만날 때 예언자의 무리가 음악을 들으면서 예언한 모습도 볼 수 있다(삼상10:5,6).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전기 예언자들 가운데서 잠깐 나타날 뿐 대부분의 기독교 예언자는 맑은 정신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다. 그리고 음악을 사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것으로 사용하게 되며 더욱이 춤은 기독교 예언자들 가운데서는 찾아볼 수 없다. 오직 바알 예언자들의 모습에서 춤추는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왕상18:25-29).
○ 다음은 예언하는 자세의 문제이다. 기독교의 예언자들이 예언할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혹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등의 심부름꾼의 어투를 사용한다. 이러한 형식을 사자문체(使者文體)라 부른다. 즉 예언자는 자신의 말로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아서 진실되게 전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어투이다. 이 때의 예언에는 미래의 정보를 미리 알려주는 예언(豫言)도 포함될 수 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전달해주는 예언인 것이다. 따라서 성서를 번역할 때 예언서를 예언서(豫言書)라 하지 않고 예언서(預言書)라 번역한다.
○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충격을 받고서야 예언할 수 있었다. 예언자 아무스는 말하기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 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암3:8)고 하면서 자신의 예언 활동이 철저히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고 움직여지고 있음을 밝혔다. 반면, 무당은 예언 할 때 자신이 신이 되어 일인칭으로 말한다. 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것이 무당의 모습인 것이다.
개인에 대한 기복과 공동체의 유익의 차이
○ 중요한 것은 예언의 내용이다. 무당의 예언이나 기독교의 예언이나 동일하게 비판과 축복의 내용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점은 분명하다. 무당의 예언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은 그 내용이 세상적이요, 육체적이요, 현재적이다. 이 세상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자는 것이지 내세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다. 또한 사회적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 신과 자기와의 수직적인 관계만 관심의 대상이 된다. 가족이나 동리는 자기의 연장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기복신앙이 핵심이 되어 있다.
○ 그러나 기독교 예언의 내용은 전공동체에 대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때로는 국가, 때로는 국제적인 문제까지도 언급되어 있다. 사회적인 문제 예를 들면 윤리, 정치, 경제적인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 예언에도 개인적인 평강과 윤택함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전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평강으로 나타난다.
○ 차이점으로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무당이 예언을 할 때는 반드시 예언의 대가를 먼저 지불해야 하는 별비(別備)라는 것이 있다. 즉 별비를 먼저 바침으로써 신의 기분이 좋아지고 그 결과로 축복의 예언이 내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예언은 그러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예언자가 그 명령을 수행할 뿐 예언을 듣는 청중에게서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으며 금전의 여부에 의해 예언의 내용이 변경되지 아니한다. 만약 그러한 경우가 있다면 그 예언자는 거짓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기독교의 예언과 샤머니즘의 예언의 차이를 성서에 나타난 한 사건에서 찾아보자. 열왕기하 5장에는 시리아 장군 나아만과 엘리사가 만나는 장면이 나타난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10절)고 예언으로 했지만, 나아만은 불평을 터뜨린다. 당연히 예언자가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특이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병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당이 굿을 하듯 주술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신을 조종해서 자신의 병을 고쳐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불만을 참고 엘리사의 예언을 따랐을 때 나아만은 치료받을 수 있었다. 그 다음 치료 장면은 치료받은 나아만이 예물을 엘리사에게 바치는데, 엘리사가 거절하는 장면이다. 엘리사는 예물을 받을 수도 있지만 나아만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예물을 사양한다. 예물 여부에 의해 하나님의 예언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받기 위해 예언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행동으로 전한 것이다
출처 : 정중호 / 계명대 신학과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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