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신학!! 구약개론!!

구약성서의 맥 ( 천년과 하루)

하나님아들 2020. 12. 7. 12:11

구약성서의 ( 천년과 하루) 지은이 : C.Westermann 옮긴이 : 김윤옥. 손규태

출판사 :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3.

 

 

구약성경속에 인간이 다루는 모든 사건이 있다는 것을 저자는 거침없이 밝히고 있다. 한 아기의 탄생에서 노인의 죽음까지, 어린이의 놀이부터 청춘남녀의 사랑과 우정, 결혼, 노동, 모든 인간의 삶을 말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인간과 일하는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 확고한 닻을 내리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성경은 인간을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있었다. (P.9)

Westermann은 그러면서도 이 모든 구약성서가 요한복음이 말하는 인자의 높임을 받는 날, 그 한 날의 사건에 집약되어 있다는 것이다. 네 개의 복음서들의 내용이 목표로 하고 있는 그 한 날이 바로 구약성서의 목표이기도 하다. 천년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는 한 역사가 한 날의 도래를 위해서 일어났어야 했다. 이 한 날은 이처럼 긴 여정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천년은 이 한 날 없이는 그 끝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으리라.(P. 8)

첨언 : 구속사학파로서의 성경이해는 목회적 입장에서도 분명하거니와 오경을 그리고 신명기를 후기시대의 산물로 보는 것은 성경을 그대로 수용하는 입장에서 벗어나는 바 수용이후에 다른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완성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Cannonical - Contextual Study의 입장을 따르는 것이 목회적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을까?

1. 제 1 장 원역사

성서의 중심에는 한 구원자의 도래로 마감되는 선택받은 민족이 서 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은 전 인류를 위해서 왔고 그의 메세지는 전 세계의 구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성서의 첫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전 넓이와 역사의 시작과 종말, 인류의 기원과 목적이 다루어지고 있다.

성서의 첫 열 장은 이른바 원역사인데 전세계의 인간의 기원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는 자연과학적 의미에서의 세계와 인류의 발생에 대한 기록이 될 수 없으며 그걸 원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세계의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인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들을 전개시키고 있다.

1.1. 오경의 형성-------------------------------P. 11

오경의 전체전승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을 수밖에 없는 위험에서 건져준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그 근간을 이룬다. 이러한 "역사적인 신앙고백"(kleine geschichtliche Credo ; von Rad)은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이해 모인 집회에서 말해졌는데 예를 들면 세겜에서 모인 모든 지파들의 총회에서 행한 연설이 그것이다.(수 24)------P. 12

1.2. 두 개의 창조설화 -------------------------P. 14

이 성서의 처음 장들에서 언급된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위엄성 앞에 자기를 낮추는 존경에서,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는 하느님의 가능성들에 대한 놀랍고 두려운 긍정에서 산출된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나오는 창조보도의 배후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그리고 2장의 배후에는 <나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 이 두 물음에 대한 해답은 우리와 모든 것을 존재에로 부른 이는 우리를 돕는 주시라는 것이다.-----P. 15

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창조주라고 하는 구약성서의 신앙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의 비신화화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이해와 연구를 위한 전제를 형성해 놓았다.---- P.17

1.3. 창조와 자연과학---------------------------P. 17

세계생성의 탐구를 향한 과학적 열정은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이라고 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배제할 수 없으리라.

창조기사가 전하고 있는 것은 인간존재의 완성은 오직 인간이 하나님과 대면하는 데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P. 18

하느님이 흙으로 빚어 만든 인간에게 숨을 불어 넣으셨다. 인간의 호흡과 그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실존은 하나님의 현존에 의해 가능해진다. 인간의 창조와 관련해서 세 개의 기본적인 규정성을 가진다. 1)식물과 관련된 노동 2)하나님의 계명 3)공동체와 그것과 관련된 연속성들이다.

노동은 저주받은 것이 아니다. 노동은 오히려 인간 현존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과제로 규정되어 있다.---------P.19

1.4. 경작과 파수-------------------------------P. 20

선악과를 금지한 것은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금지는 인간의 가장 고차적인 가능성들 가운데서 인간을 가장 중요시하려는 것, 인간이 하나님에게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음을 믿는 신뢰의 표식이다.

두 개의 창조설화 가운데서 결혼은 모두 인간 공동체의 기본형식으로 간주되어 있다. ------------ P. 20

3장에는 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죽어야 하는가? 왜 인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 규정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가지고 있다. 인간창조의 결론부로서 매우 간결하게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P. 21

1.5. 가인부터 바벨탑까지-----------------------P. 22

카인에게 있어서 동기는 하나님의 호의였다. 이 살인의 배후에는 한의 순수하고 경건한 동기가 서 있다. 문제는 그 호의를 획득할려는 방법이었다. 이 사건은 인간은 살인까지도 할 수 있는 존재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카인의 책벌은 경작지로부터의 추방이었다. 이것은 살인이 처음부터 인간의 가능성 속에 속한다는 것과 또 우리는 이런 살인을 사형을 통해서 제거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P. 23

또 하나의 다른 의미는 아담으로부터의 불순종의 파멸의 씨가 어떻게 확대되는가이고 하나님과 유리된 인간은 그 자체 속에 파멸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이다.

6장의 네피림의 출현은 인류가 가진 또 하나의 위험성, 즉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선의 말살, 초인간적인 힘을 가져서 인간의 피조성에 의문을 품는 종족의 출생을 지적하려고 한 것이다. 피조물의 경계선을 넘는 것은 노아 한 가정만 구원을 얻는 인류파멸로 이어진다.---P. 24

노아홍수의 기록은 역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연이어 발생한 어려운 파멸을 거친 후에 세계가 계속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가호를 통해서만 가능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다.

노아이후 바벨탑사건은 전자의 경우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한계성을 말살해 버린 초인간적인 존재들이 등장하나 후자의 경우는 땅과 하늘의 경계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작업이 문제가 된다. 인간 교만의 최초의 암시이기도 하다.---P. 25

건축물은 건축자의 명성을 영구화하고 어떤 권력자의 제국을 확고히 해 줄 건축물들이 인간의 척도의 한계를 넘어간 것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이들은 지구상에 흩으셨다. 이 점에서 바로 어떤 기술적 성과를 과대찬양하는 것은 인간의 멸망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하는 깊은 인식을 암시해 주고 있다.

성령감림절설화에서 언어의 혼란은 여러 나라의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이들이 사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원대한 역사를 각기 자기 나라 말로 듣는 데서 명백하게 제거되고 만다.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게" 만든 업적을 통해서 자기를 영구화하려는 인간의 시도들과는 철두철미 다르게, 아브라함으로부터 더불어 시작되는 역사가 이끌어 간 인간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 이 행위가 인간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심연을 뛰어 넘어 새로운 이해의 터전을 마련했고 이 행위의 언어가 이것을 중요시하는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게 만든다. ----P. 26

2. 제 2 장 족장들의 이야기

2.1. 아브라함----------------------------------P. 27

창조의 전적인 파멸의 위기에서 하나님은 인류를 보호하기로 작정하신다. 즉 부름 받은 이의 역사, 전체 세계사 가운데 하나의 특수한 역사가 시작된다.----P. 27

세계사와 구원사가 구분이 되고 성서는 그 때부터 구원사와 관계를 가진다. 이 원역사와 족장사의 구분으로 성서는 시대를 구분해 하고 있으며 또 하나는 세계 전체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소명이후 하나의 선상에서 움직이는데 우선 거기에는 세계 전체의 모든 민족, 전 인류가 문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신비 속에 묻어둔다.----P. 28

이것은 약속의 성취를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다. 성서는 하느님이 말하니 그대로 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시작된다. ----P. 29

아브라함을 통해서 인간의 절망 속에서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을 알게 된다. 실패한 그와 함께 하느님께서는 길을 간다.----P. 32

아브라함의 경우는 한 여인이 곤경, 즉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처지에 기쁨의 소식을 천사가 가져오고 사사기에는 남자들의 곤경, 압박의 처한 상태의 기쁨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백성의 처음 시초의 사건들에 근원을 두고 있는 이 기쁜 소식의 두 가지 노선은 한 아기, 이 세상의 구주로 삼은 아기의 탄생이라고 하는 기쁜 소식으로 끝난다.----P. 34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만인 우리가 서구인의 개념을 가지고 그의 일생의 모든 일 즉 성취, 공헌 그의 추구와 노력 등에 관한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말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정말로 위대한 분이다. 아브라함의 생활 가운데 자기 일을 해내고 그 백성이 역사를 그의 어깨 위에 지워 주었던 하나님의 장엄한 현실에 대한 하나의 간접적인 증거이다.----P. 37

중요한 것은 사람은 자기의 삶을 그를 개체로서 영원과 연결시켜주는 부름에 복종시키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삶의 본질은 버려야 한다. 그렇지만 부름에 응함으로서 인간적인 것의 본질적인 존엄성,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름 받은 이의 영원성을 획득한다.----P. 38

2.2. 야곱에서의 축복을 얻기 위한 투쟁----------P. 38

이 형제간의 다툼은 인류에게는 살인이나 형제간의 전쟁을 야기시킬 수 있는 경쟁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들의 영역, 약속의 영역에도 경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형제사이의 경쟁은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형제됨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에서 배제된 일이 없다. 절대적인 조화, 아무런 갈등도 수반되지 않는 형제애란 현실적인 형제됨의 이상주의적인 위조이다. 형제사이의 절대적인 조화는 비정상적인 것이다.----P. 39

이 형제간의 다툼은 축복이 그 촛점에 있다.

축복이라는 개념은 옛 조상들의 세계에서는 우리시대의 성공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축복은 성서에서는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할 수 없는, 그의 힘을 넘어서는 능력을 말한다. ----P. 40 아브라함은 자식축복, 야곱의 이야기는 가축의 축복, 요셉의 이야기는 곡식의 축복을 다루고 있다. 축복의 약속으로 족장이야기가 시작되고 야곱의 아들들의 대한 축복으로 마감된다. 축복은 하느님의 자유행위로서 어떠한 법칙에도 매여있지 않다.41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조상 야곱과 별다른 것이 없었다. 이들은 죄를 하나의 가능성으로서뿐 아니라 하나의 현실성으로 이들 역사의 본질적 구성요소로 지니고 있는 민족이었다. 족장으로서의 야곱, 지도자로서의 모세, 왕으로서의 다윗 모두다 그렇다. 여기에는 아무런 이상적 인물들이나 흠없는 모범적 인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P. 43 여기는 우리는 왜 이들이 걸어간 마지막 자리에 그리스도가 서 있는가를 예감하기 시작한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으나 이방에서 종노릇해야 하는 민족, 부요하게 하느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았으나 그 소유에 대한 보장을 얻지 못한 민족, 축복과 범죄, 보호와 위협에 의해 규정되는 순환 속에 머물러야 하는 민족!!!

축복 받은 자의 고백--내 나그네 세월의 130년이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P. 50

2.3. 요셉의 이야기-----------------------------P. 50

야곱의 가정의 평화는 그의 막내를 편애하는 데서 깨어진다. ----P. 53

의상의 주제는 처음부터 요셉이야기의 전면에 있다. 소매 달린 옷이 편애의 공공연한 표현이었고 그것이 형제들로 아버지에게 그들의 행위를 숨기는 증거물이었다. 또 에집트에서 요셉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하는 데 쓰인 것도 옷 한 벌이었다. 그리고 그가 생애의 절정에 달했을 때 바로는 친히 그에게 장관의 옷을 입혀 주었다. ----P. 55

(진정한 권위는 언제나 보다 높은 다른 사람에게 대답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효력을 가지며 또 나타난다. 르우벤이 동생을 구하려할 때---P. 57)

요셉의 이야기는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결과는 처음에는 파멸로 몰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점이 여기서 매우 냉철하게 고려되고 있다. 여기서는 아무런 과장이 없다. ----P. 60

요셉의 이야기는 인간공동체는 사죄 없이는 성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실수한 언제나 그것이 발생한 그곳에서 발견되고 승인되고 용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제반 사건을 인간이 다 다룰 수 없다.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에 맡겨져 있다.

여기서 처음으로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서는 한 개인의 헌신적인 자기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등장한다. ----P. 64

3. 제 3 장 세 개의 세계

3.1. 강들과 나라들-----------------------------P. 65

팔레스틴은 두 강대국의 사이에 위치해서 한 번도 이웃의 거대한 세력으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다. 이 작고 가난하고 불행한 위치를 차지한 나라에서 하나의 역사가 계속적인 형성들이 오늘에까지 미치며 서구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지난 이 천여년 동안 지대한 의미를 제공했다는 사실은 지리적 물질적 인간적인 제반 여건들로 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P. 67

이 광야를 거쳐가는 길은 이 백성이 해방의 메세지를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광야는 잔인하고 심판이 기다리는 곳이었다. 그래서 광야는 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늘 이 광야가 인간들의 정화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 또 개인이나 공동체가 이 광야에서 변화될 수 있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광야를 통한 길은 백성의 역사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존속되고 있다. 이들은 거듭 광야로 나갈 것을 부름 받고 있다. ----P. 68

3.2. 하느님 백성의 역사가 지닌 기본성격들------P. 68

이 백성이 자기의 근거를 하느님에게서 본다는 것, 즉 그 나라를 그의 선물로, 그들의 길을 그의 인도로, 그들의 번성을 그의 축복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파멸을 그의 심판으로 본다고 하는 이 사실을 단순히 그들의 역사에서 배제하고 나머지 것만을 역사적인 사실로 볼 수는 없다. ----P. 71

창 세 기

출 애 굽 기

창조

구원(출애굽)

하나님 보호선언(축복)

하나님 보호선언

禁 果

誡 命

계 명 파 기

계 명 파 기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진노

계속보호(옷을 입혀줌)

계속보호(계속인도)

계 약 갱 신

계 명 갱 신

 

하느님이 그의 백성과 엮어 가는 역사는 이러한 계명파기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으며 하느님은 자기의 계명을 파기한 인간들에 대해 바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물론 인류전체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고 하는 방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P. 73

새로운 계약의 갱신은 순종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미래 즉 하나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사죄를 지시하고 있다.

광야의 유랑시대가 지나고 나서 커다란 세 개의 시기가 있다.

첫 째 요단강을 지나 왕국의 형성까지를 내포한다. 요약하면

衁. 백성들이 압제를 당해 부르짖는다.

遁. 하느님이 듣고 도울 자를 보내 구원하신다.

鑁. 잠시 감사하나 곧 하느님을 잊는다.

鱁. 하느님이 다시 고난을 주신다.

둘 째 시기는 왕국시대다. 백성과 왕의 불복종에 대한 심판이 완전한 정치적 몰락의 원인으로 작용하난 심판이 끝나면 마지막 예언자는 새로운 계약을 건너다보았다. ----P. 75

마지막시기는 바벨론 포로로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도래를 거쳐 다른 한편으로는 예루살렘의 완전한 파괴까지 이른다.

4. 유랑하는 백성

하느님의 해방행위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어려움, 인간을 통한 인간의 억압이라고 하는 고난을 피하게 하는 것이었음은 성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애굽에서 숫자는 불어나는데 이것은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생명의 원천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이것을 성서는 축복이라고 하는 데 생명력은 오직 하느님의 손에서만 있고 인간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P. 80

성서전체를 꿰뚫고 있는 하느님의 구원은 오직 하느님과 인간관계에서 되는 양면적 사건, 대화적 사건으로 묘사된다. "주께서 잠자는 동안에 자기의 사람들에게 허락한 것"은 구원이나 구속이 아니라 축복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결코 잠자는 이가 받을 수 없다.

애굽의 노동자들의 부르짖음은 아직 범죄-형벌-회개라고 하는 일련의 과정에 들지 못한다. 여기에 하느님의 자비가 아무런 설명없이 주어졌다. ----P. 81

하느님의 자비는 우선은 인간이 곤궁에 쳐했을 때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온다.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진입해 오는 것은 권고의 말씀이다. 구원자에게 중요한 것은 곤궁한 가운데서 소리지르는 자를 조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울부짖음을 찬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P. 81

구원이나 구속은 성서에 의하면 인격적 만남, 말씀과의 만남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또 성서에 나타난 원초적인 약속은 구원의 승인이다. 성서는 뭔가 도래할 것을 선포하는 데 그것은 이 메세지를 받는 자에게 하느님이 이미 일어날 것으로 약속한 것을 전한다는 방식으로 선포된다. 약속의 시간은 성취의 시간과 결부된다 이미. ----P. 83

출애굽기가 말하는 모세는 말씀과 행위의 중보자이다.

광야 시대

말씀과 행위의 중보자

정 착

행위의 중보자

왕국 시대

행위의 중보자(왕) 말씀의 중보자(예언자)

포로 시대

(수난 가운데 있는 중보자)

완성 시대

말씀과 행위와 수난을 겸한 중보자

 

신 구약에 소명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데 그것은 받는 이의 삶을 수백 사람의 삶과 연결을 시킨다. 소명은 부름 받은 이의 삶에다 모든 연관성, 기준, 목표를 설정해 준다는 것이다. ----P. 87

모세의 격정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살 각오를 한 사람이라도 늘 겸손하고 경건하고 인내력을 가지고 살 자신이 있다고 하는 환상을 깨뜨린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생 가운데를 뚫고 들어오고 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에 투쟁과 강한 항거와 굴복 그리고 회의와 시련이 있게 마련이다. ----P. 92

4.1. 광야의 길 --------------------------------P. 93

하느님과 같이하는 이들의 역사는 정착이나 안전한 주거에서 얻는 휴식뿐만 아니라 다른 것, 즉 광야 불확실성을 향한 방랑자들의 어려운 실존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내포하고 있음을 잊지 않았다. 광야에서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피곤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에 대한 이론적 지식들은 무가치한 것이다. ----P. 95

그러나 그들은 이 광야길을 통해서 그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그래서 그들은 후에 가서도 이 일을 잊지 않았다. ----P. 96

민수기 21장 구리뱀 사건에서 이전에 모든 백성에게 즉 그들이 일원이면 다 유효하던 하느님의 구원의 행위가 여기서 최초로 개개인에게 행해진다. 구리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신약의 사건에서도 그렇다.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세상에 주어진 구원은 그의 인격에 감추어져 있다. 그가 가져온 왕권통치는 그의 가난과 무력 속에 감추어져 있다. ----P. 99

4.2. 약속의 땅을 얻기 위한 투쟁 ---------------P.100

--- 여호수아서와 판관기 ---

약속의 땅에 도착한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때야말로 가장 어려운 과업 앞에 서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이 지구상에 사는 한, 오늘날까지도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명심하지 않을 수 없다. ----P. 101

여호수아는 모세가 아니다. 모세는 유일회적인 사람이다. 그보다 적은 능력과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물려받아야 한다. 성서에서 중요한 것은 여호수아가 신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P. 105

수 24장에서 여호수아는 그들을 애집트에서 구원해 내고 약속의 땅을 주신 하느님께 충성을 다짐한다. 이 일련의 질문과 대답을 묘사한 것이 우리가 신앙고백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성서의 기본형이다. "누구를 섬길 것인지를 오늘날 택하라."(24:15) 자기고백은 자유로운 결단의 신앙고백의 본질이다. ----P. 107

여기서 민족전체가 결단과 병행해서 개인의 결단이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백성이나 왕이 하느님을 거역하는 결단을 내렸다해도 개인들은 단독적으로 하느님에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그가 다가오는 세대로 하여금 하느님과 그가 행하고 약속한 것을 신실하게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P. 108

수 24장에서 신앙고백의 본질적인 요소가 드러나는데 신앙고백은 결코 사사로운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즉 너희는 여기서 너희 자신들의 힘이나 능력에 의지하고 그 약속을 지켜 나가지 못하리라. 너희의 말에서 구속력을 요구하는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다. 너희들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으리라. 너희는 그것을 환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너희가 이 하느님에게 약속을 하지만 그는 거룩한 하느님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끝까지 충성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실성을 용납한다. ----P. 109

4.3. 부름 받은 조력자들 ------------------------P.110

판관기의 행위는 모든 경우 해방의 행위이다. 하느님의 영이 이런 행위를 가능하게 만들면 인간이 부당하게 권력가진 사람에 의해 억압당하는 곳에서 하느님이 그들을 돕기 원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P. 113

판관들의 이야기는 교회의 제도들에 너무 많이 매달리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어느 교회에나 영의 자유로운 활동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P. 115

판관기에는 젊은 정신이 담겨져 있다. ----P. 116

4.4. 땅과 국가 --------------------------------P.117

바벨탑의 이야기는 한 국가의 건설작업과 그것이 상징하는 것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말해 주고 있다. ----P. 118

4.5. 역사서들의 성립에 대해서 -----------------P.119

백성들의 과거에 대한 죄책의 고백은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신명기는 오경과 역사서들의 중간기에 있다. ----P. 120-121

5. 왕국

왕국은 우리 지구상에 있는 인간의 통치의 기본형이요 고전적 형식이다. 왕은 바로 높은 존재, 통치자이다. ----P. 123

왕권과 함께 하느님의 통치가 심각하게 손상을 입게 될 것이라는 염려에서 이 제도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노선이 있었다. 그러나 역대기 관점에서 왕권과 같이 시작한 것은 구속사의 새로운 장이었다.

신약성서의 메세지는 이스라엘 왕권의 전역사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구세주),와 "하늘나라"(하느님의 왕권통치)라는 신약성서의 주요개념은 이스라엘의 왕권과 그 역사를 전제하고 있다. ----P. 124

왕에 반대하는 노선이 후기 전승에 보면 억압되거나 제거되지 않고 왕권은 어려운 시기에 준 하느님의 선물이며 왕을 기름 부는 것은 하느님의 위탁에 의한 것이라는, 또한 왕권은 처음부터 여러가지 위험과 유혹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는 방식으로 후세대를 위해 보존되어 왔다는 것은 위대한 역사적 성실성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A.N.E.에서처럼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었다. ----P. 125

그리스도교가 황제를 신으로 받드는 것에 반대하여 항거하고 마침내 로마의 황제제도를 무너뜨렸을 때 이 저항은 그 뿌리를 왕을 신으로 섬기는 데 반대한 하느님의 백성에게 두고 있다. 황제를 신으로 섬김으로서 정치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 전체적인 것, 신적인 것으로 삼으려는 인류의 가장 큰 시도들 가운데 하나가 죄절된 셈이다.

인간의 통치, 정치, 국가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은 이것과 함께 분명히 선포되었으나 동시에 자기를 절대화하려는 국가에 대한 하느님의 부정도 선언되었다. ----P. 126

5.1. 이스라엘의 왕들 --------------------------P.126

이스라엘 왕들은 사울, 다윗, 솔로몬의 초기, 솔로몬 이후 사마리아 함락까지 중기, 예루살렘 함락까지가 말기이다. 중기는 왕과 예언자 사이의 투쟁이 자리하고 있다. 개인도 자기의 시간을 가지듯 민족도 자기의 때가 있다. 이 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특별히 명백하게 드러난다. ----P. 127-128

5.2. 사울왕 -----------------------------------P.129

구약에서는 커다란 세 가지 출발이 있는 데 족장사의 출발(창 12장), 민족사의 출발(출 1장), 왕조사의 출발(삼상 1장)등이다. 이 세개의 시발 점에는 모두 한 아기의 탄생이야기가 등장한다. 신약성서의 시발점도 한 아기의 탄생으로 되어진다. ----P. 131

이스라엘 첫 왕 사울에 대한 성서의 음울한 표현은 하나의 특수한 의미를 가지는 데 이스라엘 왕조사를 대표한다. ----P. 133

5.3. 다윗왕 -----------------------------------P.134

다윗의 상승에는 세 단계가 있다. 처음은 사울의 왕국에 들어와 요나단의 친구가 되고 미갈의 남편이 된다. 둘째는 사울에게 도망친 의용군의 두목이 되고 많은 모험을 경험한다. 결국 사울이 죽자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되고 이어서 전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P. 134-135

그는 많은 장애물을 거쳤으나 목표를 잃지 않았다. ----P. 138

다윗은 법궤를 다윗성에 옮김으로서 자기의 왕의 직무와 행정을 백성들의 조상에게 준 약속들을 계승해 나가는 데서 이해했던 것이다. ----P. 143

다윗 가문의 왕국이 영원하리라고 한 이 약속은 한편으로는 다윗가문으로는 다윗가문의 왕국을 세우는 것과 그것을 하느님이 확증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다른 한편은 하느님의 역사경륜과 그 백성과의 관계가 백성 중의 한 가문과 밀점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P. 144

5.4. 다윗의 왕국통치 --------------------------P.144

다윗의 범죄에 있어서 문제는 그의 잘못을 처벌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묵인이 되었다면 이스라엘 왕국은 절대전제군주국이 전락하고 기름부음은 하나의 형식으로 되었을 것이다. 나단의 한 마디 말은 예언의 가장 본질적이고 또 완성된 형식으로 등장한다. ----P. 146

고발은 이 범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선언으로 구상되어 있다. ----P. 147

사죄는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어떤 형벌을 부과하는 데서 성립되며 또 그것을 긍정하고 감수하는 것이 곧 사죄를 받는 것이다. ----P. 148

성경은 있는 그대로의 다윗을 그리는데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는 진지한 태도로 기술하고 있다. ----P. 150

5.5. 솔로몬왕 ---------------------------------P.151

솔로몬의 말기의 우상숭배는 그의 모든 업적보다 더 큰 영향력을 주었다. 그럼에도 주목할 것은 솔로몬에게 직접 말한 예언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배후에는 솔로몬에 의해 왕은 일반백성보다 하느님과 더 가깝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5.6. 이스라엘의 왕국 제 2 기 ------------------P.156

--- 왕국의 분열부터 사마리아 함락까지 ---

솔로몬의 부귀영화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부역이 있었다. 위대하고 부유한 솔로몬 왕국이 파멸될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분부에 따른 것이며 나라의 분열의 이유는 위대하고 지혜롭고 강력한 솔로몬이 하느님에 대한 순종에 실패한 결정적인 점에 두고 있다. ----P. 157

르호보암이 왕권을 인수할 때 가졌던 사건의 보도--여기서 분명하게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솔로몬의 궁전에서 한 새로운 지배계층이 자라났고 그로 인해서 과거에 있었던 국민이 다 형제라는 느낌이 상실되었고 이들은 의식적으로 이 하부계층 사람들의 노동으로 살아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P. 158

아합과 엘리야에 이르러 왕과 예언자사이의 처음이자 큰 싸움이 벌어진다. 여기서는 예언자가 한 사자로서 뿐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을 손수 집행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구약에서는 예언자는 제물과는 상관이 없으며 제사는 제사장의 문제였다. ----P. 161

엘리야는 당시에 야훼께 충성하던 집단을 가르키고 바알종교는 가나안 종교를 대변한다. 이 이야기는 전국에 뿌리박고 있는 바알신앙의 위력과 대다수 사람들의 우유부단과 중립성에 대한 야훼에게 충성하는 소수자의 투쟁을 말해준다. ----P. 162

왕들이 판관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이방의 적들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들은 자신의 불순종으로 해서 이스라엘을 위태롭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혀 새로운 길과 수단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위기에 하느님은 예언자를 보내사 새롭고 전혀 다른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병기와 마병으로 이해되었다. ----P. 164

로뎀나무 아래서의 엘리야의 호소는 너무 큰 과제에 회의를 품은 예언자의 최초의 고백이다. 이 고백은 예레미야를 거쳐 겟세마네의 호소로 이어지는 일련의 노선을 보여 준다. 즉 호렙산에서 엘리야의 호소로부터 예루살렘을 보고 눈물을 흘린 예수가 직면했던 상황이다. ----P. 167

이제는 남은 7,000의 사람에게 약속이 이어진다. 오직 남은 자에게만 유효하게 되는 지점이 된다. ----P. 168

나아만이 치유가 되는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충성하는 예언자 엘리야에게는 비록 나아만이 치료가 되어 적군의 전투력이 강화 된다고 해도 이 고통받는 한 인간을 돕는 일을 주저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멀리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 이것이 엘리야, 엘리사 이야기의 대단원의 막이다. ----P. 177

예후는 바알의 종교를 잔인하게 뿌리뽑았지만 후에도 칭찬을 듣지 못한다. 자기 민족 사이에서의 거친 행위는 하느님의 구원받는 길이 아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의식하든지 의식을 하지 않든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파괴도 불사하겠다는 열심으로 옛날의 유산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저 초기 예언자들의 경향은 확실히 문제시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P. 180

이스라엘은 망한다. 구약의 한 가운데 죽음이 있고 신약의 한 가운데 죽음이 있다. 구약은 한 민족의 죽음이요 신약은 한 인간의 죽음이다.

5.7. 사마리아 함락부터 예루살렘 함락까지 ------P.182

개혁에 있어서 예언자들이 요청했던 두 가지는 하나는 노예를 인간적으로 다루고 그들의 가족의 생활이나 예배에 참여시키고 또 그들에게 필요한 휴식을 주라고 되어 있다. 이는 "너는 애굽 땅에서 종되었던 것과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너를 해방시켜 주신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신 15:15)을 근거로 한다. 또 하나는 너희 하느님이 준 선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또 너희는 가난하게 이 땅에 들어와서 이 땅에 문화를 이룩한 것이 아닌 것을 잊지 말라. 또 너희는 광야에서 온 것을 잊지 말라고 하는 과거에 대한 회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5.8. 신명기서 ; 개혁을 위한 논제들 ------------P.187

신 6:4 Shema를 통해서 우리는 유일하신 하느님과 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임을 배운다. 구약의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이어서 피조물과 배타적인 관계를 가진다. 하느님은 신적 영역에서는 아무런 역사를 이룩해 가지 않고 오직 그의 세계와 백성과 함께만 역사를 이루어 간다. 역사란 한 분 하느님 즉 그의 행위가 무한한 시공을 초월하고 인간 역사의 높이와 깊이를 포괄하며 의미 있게 연결시켜 주는 한 분 하느님에게 불변하는 고정적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파악된다. ----P. 188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는 이 고백에서만 하느님의 심판의 때에 하느님에 대한 강한 기다림이 생겨날 수 있다.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는 그 자신의 시공을 초월, 시간의 중심에서 전 세계를 위해 오는 구속자로서 이 신앙고백 즉 한 분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에서만 자랄 수 있다. ----P. 189

출애굽기 20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역사의 근간을 이루는 하느님의 구원(1-14장)과 보존(15-18)을 경험하고 나서 그 하느님을 섬기고 그가 원하는 것(19-20)을 순종하려는 이 백성에게 향한 하느님의 뜻을 계시한 내용을 담고 잇다. 신명기 5장에는 이 백성이 몰락에 직면해서 다시 한 번 모든 백성들 앞에서 처음 계시되었던 하느님의 뜻을 내세우려고 시도된 종교개혁을 통해서 이 민족사의 종말에 하느님의 동일한 뜻을 긍정한 것이 나타나 있다. ----P. 190

신명기 30장의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 놓는다."는 말씀은 율법, 즉 하느님의 계명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를 인식하게 한다. 그것은 생명과 행복, 축복을 주는 데 목적이 있다. 결론적으로 강조하면 하느님의 계명을 승인하는 것은 자유로운 결단의 문제다. 그렇게 하면 생명을 얻으리라! ----P. 191

5.9. 네 자녀들이 묻거든 -----------------------P.195

신명기에 보면 다가오는 세대에게 이 전통--우리는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야훼께서 이끌어 내셨다.--을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제기하는 하느님, 교회, 성서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 대해서 그들에게 경외심을 가르치고 하느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한 인간을 만들려는 부모에게 이보다 더 좋은 교육방법은 없다. ----P. 197

6. 예언자들

예언자들은 특별한 수준에서 최고의 속박과 동시에 최고의 자유의 통일성, 그들이 등장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인간의 본래적인 존엄성을 드러내는 통일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예언자들이 기능적 인간들과 달랐던 것은 그들의 생에 위탁된 것은 극히 개인적이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진노의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진노를 보내지 않고 진노의 사자를 보내신 것은 하느님의 자비이다. ----P. 199

역사 산사태 가운데서 그들은 헤어날 수도 없고 또 헤어나서도 안된다. 그들은 같이 미끄러져 들어갔고 파멸을 같이 겪는다. 비록 그들이 기초에 발판을 두고 있는 유일한 존재들일망정, 그들의 모든 수고는 헛된 것 같고 그들은 산사태를 막지도 못했다. 우리의 척도로 보면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다. ----P. 200

이미 산사태가 시작되었고 막을 수 없다면 예언자들의 선언은 의미가 없을 것인가? 이것은 역사에 있어서 하느님의 無力을 증거 하는 것일 뿐 아닌가? 여기에 우리에게 통용되거나 잴 수 없는 어디엔가 비밀, 역사의 주인인 하느님의 풀 수 없는 비밀이 우리 인간의 삶 곳에 배태되었다면 바로 여기 이 예언의 역사이다. 이 비밀은 예언을 정신사적, 종교사적 현상으로서 분류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매우 분명한 특성을 지닌다. ----P. 201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사 55:11)

6.1. 예언자들의 시간 --------------------------P.202

예언은 자기의 시간을 가진다. 750-700의 예언의 1기는 제국의 절정의 시기이다. 아모스(750경), 호세아(750-725경), 이사야(740-701), 미가(722-701)등이 활동한다. 사마리아 함락과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시기이다. 650-600년에 이르는 시기는 앗수르의 멸망과 바벨론의 등장시기이다. 나훔, 하박꾹, 예레미야, 에스겔이 활동한다. 제 3 시기는 마지막 사건직후부터 시작되는데 이 시기에는 에스겔과 제2이사야가 활동한다. 그 후에 학개 스가랴가 520년경에 말라기는 470년경에 활동한다. ----P.204

이스라엘의 예연역사를 연구하면 이 역사는 우연적인 것들이 가지는 성격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언 운동의 역사로부터 우리가 언제나 새롭게 말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일어나는 하찮고 대단치 않는 사건과 세계사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흥망성쇠 사이에는 일상적으로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관계들, 그러나 대개 여기 예언운동에서처럼 갑자기 환히 드러나고 또 하느님이 모든 것의 주님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상관관계들이 형성되어 있다.

6.2. 예언활동의 뿌리들 ------------------------P.206

예언자의 선임자는 선견자였고 예언자의 다른 기원은 황홀경이 이르는 사람이다. 세째 뿌리는 하느님의 의해서 특별한 힘으로 무장된 하느님의 사람 즉 기적을 행하고, 사람을 고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른 사람보다 하느님과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이다.

예언운동이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해명을 우리는 예언자들 자신의 언어에서 찾는다.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P.206-208

예언의 말들은 "진짜로 보증된 것"이 아니고 듣는 사람의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예언자의 말이 갖는 본질이다. 성서의 영감설 역시 우리는 하느님께 받아 적은 것도 없고 인간적으로 전해지지도 않았다. 하느님의 서명도 없다. 우리가 그의 전령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그의 메세지를 믿을 수가 없다.

신약도 전령을 통해서 온다. 사도도 전령이다. 전령자의 말이 전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왔는가 하는 것은 아무런 보증이 없다. 우리는 전령이 하느님으로부터 위탁을 받았고 그가 진짜 그의 전령이라는 것을 믿을 뿐이다. ----P.211

6.3. 예언자들 ---------------------------------P.212

예언활동은 예언자들의 말들을 통해서 그의 수집된 것을 통해서 알고 또 하나는 역사서술과 관련하여 예언자의 활동에 관한 단순한 보도가 그것이다. ----P.212

예언의 초기에는 예언자의 말이 있다. 예언자의 말, 예수의 선포, 사도들의 선포. 이 모든 것은 원래 글로 씌여진 것이 아니라 말로 선포된 것이다. 2천년 전의 교회의 삶은 일차적으로 문서로 된 말이 아니라 구전 즉 생생한 선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는 사실의 이유도 여기에 있다. ----P.214

6.4. 예언자의 선포 ----------------------------P.215

예언자의 선포는 "누구에게" 온 것인가? 첫째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곧 유다와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이 백성중의 책임 있는 사람들이다. 다음으로 타민족에게 이다. 예언의 역사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은 이 세계에 속한 모든 사건과 관련이 된다.

"그가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가지 즉, 구원과 심판이다. ----P.215

예언자들은 현실의 사자이다. 그들은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백성들의 일상용어를 사용하였다. ----P.217

6.5. 사회적 메시지를 선포한 예언자들 ----------P.218

이들은 아모스와 미가이다. 아모스의 선포는 부자들의 뇌물과 영향력 행사로 인한 재판에서의 타락, 법의 구실로 가난한 자들의 재산 갈취, 가난한 자들을 짓밟고 억압하는 것들이다. 여기는 명예이 문제가 있다. 예언자들은 사회문제가 깊이 들어가 보면 명예의 문제가 있음을 인식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토지분배에 참여할 권한을 갖고 있다. "야훼는 우리 하느님이다."는 고백은 사회 경제적인 현실들에게까지 미친다. ----P.221

역사의 이 한군데 즉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사회에 대한 고발에서 한 민족의 공동체가 사회계층이나 계급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역사적 순간이 포착된다. 예언자는 미래로부터 즉 그들이 선포해야 할 하느님의 도래하는 심판으로부터 사회적 균열의 시발점을 역사의 빛에 밝히 드러낸 것에 그들의 직무가 놓여 있다. 내가 아는 한 이것은 세계사의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 혁신운동들은 사회적 균열이 극단화된 후기 단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P.222

19-20C에 일어난 사회혁명들은 교회에서 예언자들의 사회적 설교가 기능하지 못해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을 우리는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P.223

서구 사회의 교회는 점점 자기 보존적, 보수적 공동체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삶의 전 영역에 해당된다. ----P.224

아모스는 단순한 인간일 뿐이다. 왜 하느님은 자기를 섬기기 위해 있었던 기구들을 통해 행동하지 않았을까? 왜 그는 한 농부 한 목자를 택했을까? ----P.226

예언은 선포가 사람들의 일상언어로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 준다. ----P.228

그는 암 3:3이하에서 말하지 않을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하느님이 말씀하셨다는 단순한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P.229

아모스의 메세지는 매우 무자비한 것이었다. 하느님의 심판을 알리는 것은 그의 자비의 행위이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기호를 준다. 심판의 사자가 이 기회를 제공하면서 온다. 심판의 메세지 안에 나타난 자비라고 하는 역설적인 이 제안은 심판을 이기게 한다. 심판의 사자는 구속사에 해당한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하느님의 행위, 때가 찼을 때 십자가의 표식 아래 세상에 구원을 주는 분의 행위를 본다. ----P.232

그들은 이 말씀을 듣지 않았으나 그 말씀은 쓸데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P.233

6.6. 이사야 ; 거룩한 예언자 -------------------P.233

전체주의 국가들이 극단적으로 그들의 국가체제를 성스러운 것으로 선언한다. 거기에 대해 거룩한 경의를 요구하는 것은 개화 즉 하느님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는 데서 자라나온 국가 사회주의의 마지막 결과이다. ----P.234

이사야가 만난 하느님은 사상이 아니라 현실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바로 들을 수 있다.

衁. 하느님은 거룩한 분으로 이사야를 만난다. (1-4)

遁. 이사야는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불결하므로 깨끗해져야 함을 깨닫는다. (5-7)

鑁. 이사야는 소명을 받는다 (8-11)

첫째 이사야는 하느님을 거룩한 분으로 만난다. ----P.235

둘째 하느님의 거룩함에 직면해서 이사야는 그가 누구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람은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죄는 오직 하느님 앞에서만 죄로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사야가 자기 속에 발견한 부정함은 제의적 수단으로 제거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자기의 천사들 가운데 하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제거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즉 하느님만이 죄를 사해줄 수 있고 하느님만이 인간을 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제의적 제도들고 하느님의 사죄를 강요할 수 없다.

세째 이것은 하느님과 한 영혼사이의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의 백성과의 따라서 하느님과 전세계와의 사건이다. 하느님의 거룩성은 하느님 자신을 있지 않고 인간의 정화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만남으로부터 그 어떤 것이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派送이 없이는 진정한 하느님이란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에 모든 신비주의적 경건과 성서적 하느님 신앙사이의 깊고 건널 수 없는 차이가 있다. ----P.236-238

이사야는 하느님을 만나서 제사장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의식을 정화하고 새롭게 하거나 개혁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그의 사자가 된다. 여기 구약성서 한가운데에 하느님의 거룩성에 대한 찬양은 성전에서의 예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종으로서 그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신약에 나타난 변화산상의 이야기도 같은 방향을 지시해 준다. ----P.239

6.7. 예레미야 ; 시련의 예언자 -----------------P.248

예레미야는 40년이 넘는 기간동안 그는 파멸로 끝장날 것이 뻔한-그는 처음부터 알았다.-길을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레미야는 그 백성과 빚어 가는 하느님의 역사에서 수난이 하나의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려준 최초의 예언자다. ----P.250

삶을 사랑했고 기쁨과 공동체를 열망하고 그를 내리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한 인간 예레미야에게서 어려워지면 질수록 이 개개인의 수난에는 어떤 의미 즉 다른 사람, 전 민족에게 영향을 미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졌다. 다른 한편 이 노선을 통해서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수난을 통한 구속사업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것이 더욱 분명해 진다.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업의 마지막에 한 인간이 된 하느님의 아들의 수난을 통한 구속행위가 왔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이 목표를 향하고 있는 길을 깨달을 때만 똑바로 파악된다. ----P.251

예레미야의 탄식들은 우리 성서에서 가장 놀랄 만하고 가장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그의 탄식은 가정으로부터의 고독, 이웃으로부터의 고독, 하느님 앞에서의 고독, 즉 인간소외의 3차원을 가진다. 이 고독자는 그의 마음을 하느님에게로 돌려 놓았으나 아마도 냉혹한 반응만을 들은 것 같다. ----P.254

하느님에게 항거하기까지 고독에 처한 인간들은 하느님에게 의지했었다고 하는 점을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유익하다. ----P.255

아무도 그의 말에 귀담아 듣지 않았으나 왕과 지도적인 정치가들에게 최후적이고 극적인 경고를 주었다. 이 경고문을 잘라서 불에 태우는 행위는 왕가와 유다나라에 대한 확정된 심판을 의미한다. 그러나 불에 태워 없애버린 말씀들이 완전히 죽지 않았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기까지 10년 동안은 몰락을 향한 비틀거림과 같았다. 다시 한 번 왕과 예언자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한 가지만을 말할 수 있었고 상황의 변동이나 위협과 체포와 사형의 위험이나 반역죄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말했던 이 예언자의 변함없는 침착성은 갈팡질팡하는 정책과는 강한 대조를 이루었다. ----P.258

32:15에서 다시 땅을 사고 파게 되리라는 말씀은 이것은 매우 겸손하게 조심스럽게 표현한 구원의 말씀이다. 이 말에 의하면 파괴, 몰락,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 계약은 씌여진 율법의 기초를 도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 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P.259

6.8. 위로의 예언자 ----------------------------P.260

제 2 이사야는 위로의 사신이다. 그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는 무상성을 확인해 주는 대답을 듣는다. 하지만 이 현실은 "그러나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하는 또 하나의 다른 현실과 마주친다. ----P.261

이사야의 종의 노래에 이르러 우리는 그 본래적인 의미에 따라 구약성서가 가장 명백하게, 가장 직접적으로, 가장 의미 깊게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P.267

6.9. 인류사에 나타난 예언활동의 의미 ----------P.268

예언자들은 하느님이나 혹은 신들이 아직도 사고의 대상들이 아니라 사고의 전제들에 속해 있던 시대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P.268

예언운동의 역사는 그 자체를 넘어서 이 역사의 완성자로서 실피라고 하는 같은 길을 걸어갔고 거기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 한 사람을 지시하고 있다.

7. 바벨론 포로이후

구원에 대한 환호성이 사라진 후에 휴식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시험의 시간이 온다. 홍해바다에서의 구출 이후 그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 그랬고, 바벨론 포로이후에 또 그랬다. ----P.273

7.1. 예언활동의 후기역사 ----------------------P.277

후기에 씌여진 한 시편에 "예언자도 다시 없나이다."(74:9)라는 고백을 듣게 된다. 이 말은 예언자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을 확인해 주고 예언활동은 사제직과는 달리 특정하게 제한된 기간에 국한되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P.277

 

7.2. 하깨, 즈가리야, 말라기 -------------------P.278

하깨는 이전 예언자 같이 성전건축을 하도록 하는 데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하느님의 전을 폐허로 내버려 둔 데 있다고 전한다. 공사를 시작하면 하느님이 너희를 어떻게 축복하는가 보라고 말한다. 곤궁하고 힘든 시기에 교회를 건축하라고 한 음성이 있었다는 것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더욱 의미 있다. ----P.278

 

7.3. 즈가리야 ---------------------------------P.279

즈가리야도 미래의 구원은 성전건축에 달려있다. 우리는 즈가리야에서 다윗 후손의 왕국통치가 몰락한 이후 최초로 정치적으로 규정된 메시야 기대, 이스라엘에 위대함과 과거의 명성을 다시 돌려 줄 다윗 가문으로부터 왕에 대한 기대를 본다.

나사렛 예수는 명백하게 그리고 주저없이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부인하고 제2이사야에 의해서 드러난 수난 받는 하느님의 종의 노선을 걷기로 결단한다. ----P.280

말라기는 비록 작은 책이지만 우리에게 완결된 예언을 남겨준 마지막 예언자 였다. 말라기는 신앙과 불신, 하느님께 충성하는 사람들과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여 하느님의 계명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 사이의 투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한다. ----P.283

 

7.4. 율법 -------------------------------------P.284

요시야 종교개혁의 율법에 바탕을 두고 있는 신명기적 역사서술에서 너희가 하느님에게 복종하면 살고 너희가 하느님을 떠나 다른 세력에 의지하면 죽으리라는 것이 강한 지배적 기본동인으로 작용했다. 포로기 이후의 공동체는 이 양자택일을 긍정했고 또 조상들으 죄를 인정했으며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이라고 하는 터전 위에 새로운 것을 건설하였다. ----P.287

 

7.5. 시편들 -----------------------------------P.287

구약성서의 첫부분은 일정한 시간영역에 걸쳐 활동한 하느님의 행위에 대한 기록이다. 둘째 부분은 필요한 곳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예언자들을 불러서 하느님의 역사를 보강한다. 세째는 두 부분을 전제하고 있고 처음 두 부분에서 일어난 사건과 말해진 것에 대한 하느님의 백성의 다양한 응답이다. 그것들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호관계의 부분이다. ----P.288-289

여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것은 원초적인 것이어서 모든 가능성을 가진 인간, 경건할 뿐 아니라 반역적이고 투쟁적이고 회의적인 인간에게 해당된다. ----P.290

두 개의 기본 색조 즉, 찬양과 탄식이 전체 시편을 규정한다. 이것들은 심판과 은혜라고 하는 하느님의 행위의 두 가지 기본방식에 상응한다. 심판에 대해서는 탄식이, 은혜에 대해서는 찬양이 응답한다. ----P.295

 

7.6. 지혜문학 ---------------------------------P.297

성서의 잠언서에 나오는 지혜는 철두철미 세속적인 삶의 지혜로 차 있다. 이 잠언의 지혜들은 성서의 변두리에 있지만 거기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느님에 의해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들을 승인하는 것들을 다시 분명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이 주는 중요한 것은 지혜에 있어서 성서는 다른 민족에게 개방적이었다는 것이다. ----P.297

 

7.7. 열려있는 책 ------------------------------P.298

구약성서는 열려 있다. 옛 계약의 역사의 전시대를 꿰뚫고 뻗어 있는 약속들은 이 책 안에 기술된 역사 내에서는 언제나 부분적으로나 단편적으로 성취되거나 전혀 성취되지 않았 채 남아 있다. 포로기 이후 성취보다는 실망으로 기울자 기다리는 힘으로 바뀌었다. 나사렛 예수, 그의 선포와 행위, 그의 수난, 죽음, 부활에서 온 성취도 사람들이 단순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세가 뱀을 단 것과 같아서 사람들은 주목해서 봐야 했었고 믿어야 했다. 그래야만 구원을 가져왔다. 나사렛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오지 않았고 그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절할 수 있는 하나의 제안을 가져 왔다. 이 점에서는 오늘날에도 변화가 없다.

수 천년의 구약성서의 역사에서, 세계의 창조주요 모든 것의 주님이신 하느님이 이 한 민족과 더불어 특별한 길을 갔고 이 길을 가면서 세계와 그 역사에서 위대한 것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했다고 하는 그의 주장처럼 증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수 천년이 예수가 십자가에 죽는 그 한 날을 향했다고 하는 것은 증명할 길이 없다. 이것은 오고 오는 세대에 신비로 있다. 거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책,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결코 한 번 잃고 끝내버리거나 남김없이 해석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열려있어서 우리는 거기에서 새로운 기적을 발견하고 또 변화된 시대에 새로운 언어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데 그 앞에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 역자후기

1977년 해외교포를 위한 목회를 하면서 이 책을 가지고 성경의 기초지식을 가지도록 유도하였다.

그는 구속사학파의 입장에서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성취라는 도식을 구약의 전체내용을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는 구원사의 틀로 본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인류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을 통하여 씨족사회, 부족사회, 국가형성등의 역사발전의 제단계를 거치는 내용과 나라의 패망 포로생활 등에서 빚어지는 인간의 파노라마가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특히 형제 간의 살상, 배반, 모략, 한 작은 국가의 강대국 사이에서의 해방을 위한 투쟁, 해방된 민족의 국가형성과 거기에서 빚어지는 억압과 수탈, 파멸 등 오늘날까지도 인류가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온갖 고뇌를 깊은 통찰력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국가형성 이후의 발전상과 야훼신앙의 갈등을 그린 신명기 학파의 역사 이해의 부분은 오늘날에도 인류가 안고 있는 국가권위와 종교하는 문제에 그리스도교적 조명을 밝게 비추고 있다.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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