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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이해(요약)

하나님아들 2020. 12. 7. 12:02

구약성서의 이해(요약)  Understanding the O.T

 

저자: 버나드 앤더슨  출판: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머리말

 

성서학 연구의 전체적인 분야는 성서학 지식의 증가와 새로운 연구방법의 사용, 그리고 과거의 성서학 연구 업적에 대한 재평가에 힘입어 빠르게 변화되어 왔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다원주의적인 접근과 해석이 이 성서학 분야를 특징짓는다.

  이 책의 목적은 모세 시기에 고대 이스라엘의 결정적 출발로부터 일명 마카베오 시기라고 불리는 후기 성서 유대교 시기에 피어난 문학까지 고대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따라 성서신학, 문학비평, 고고학적인 연구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한데 엮어내는 것이다. 출애굽과 그 사건의 결과로 시작하는 이스라엘 역사의 전개는 시내 반도에서, 그리고 그 다음은 탈무드와 신약에 나타나 있는 고대 이스라엘의 성문화된 전통을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서로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던 서력 기원 때의 사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다.

  독자의 이해를 위한 몇 가지 기본적인 사항들에는 1 각 장이 시작될 때마다 구약에서 읽어야 할 내용을 제시해 놓은 것을 읽을 것. 2 각주는 매우 중요한 내용을 제공함. 3 성서학적 인용문은 다양한 현대 영어 번역본으로부터 나오는데, 생략형에 의해서 표시. 4 사건의 연대 규정은 존 브라이트의 ‘이스라엘 역사’에 나온 연대표를 따름.

 

□ 사람들의 이야기로서의 구약성서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자 할 때 그 사람이 살아온 과거의 내력을 알아 보는데, 이는 과거의 삶을 통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경우에서 더욱 그렇다. 미국인이라 함은 대대로 과거의 경험을 되새길 수 있고 또한 반복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들 고유의 역사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생활체험

  유대 민족에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의 역사의식일 것이다. 정체성과 소명 의식을 지닌 하나의 백성으로 만든 사건들에 대한 독특한 기억을 갖고 있는 민족의 종교이다. 기독교도 역사 의식을 가지고 있다. 문화, 사회, 신학적으로도 다양성을 띄고 있고, 성경이 기록하여 증거하고 있는 결정적인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기억을 가진 독특한 공동체이다. 이들 기억의 주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특히 집중되어 있다.

 

히브리인의 성경

  구약성서는 넓게는 히브리 성경, 즉 고대 이스라엘의 경전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기독교 성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단일서인데 유대인에게는 히브리 성경(거룩한 계약)만 있을 뿐이다. 이를 유대인들은 Tanak로 언급하는데, 이는 Torah(법률), Nebi'im(예언), Kethubim(말씀)의 각 첫 번째 자음을 따서 만든 약어이다.

  히브리 성경은 구약성경과 배열순서와 내용면에서 조금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다. 히브리 성경은 세 가지 중심 부분의 개요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데, 가장 중심에 들어 있는 율법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법률, 예언서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삶의 주석서, 성문서는 자유로운 토론과 이스라엘 신앙과 축제 행사로부터 지혜에 대한 이해까지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종교개혁 이래 개신교는 히브리 성서에 있는 구약의 일부를 구약의 정경으로 한정했다. 70인역 성서에서 발견된 책 중에 읽도록 허용된 부분에 대해서만 해설이 붙여진 채 경외서, 즉 외경으로 되어 성경에서 분류되었다.

  히브리 성경은 여러 면에서 다양성을 띄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잡다한 책들을 묶어 놓은 것이 아니라 기원전 2000년 직후에서부터 그리스도 시대에 접어들기 거의 1세기 반 전의 마카베오 혁명까지의 이스라엘 백성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을 증거하고 있다.

 

성경의 이야기(성경 역사의 줄거리)

  창세기 12-50장 : 기원전 2000년기에 접어들면서 메소포타미아에서 현재의 팔레스타인으로

                    알려진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이삭, 야곱. 야곱의 때에

                    기근이 들자 이집트로 이주하였다.

 

  출애굽기-신명기 : 야곱의 후손들은 이집트에서 처음엔 총애를 받았으나 세월이 흘러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주전 1300년경 극적인 여러 사건들을 겪으며 시내 반도의

                    사막으로 도망가 단일 종교를 가진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요단 동편 지역으로 우회하여 가나안에 들어간다.

 

  여호수아서, 사사기 :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요단강을 건넜고, 토착민들을 정복해서 그 땅을 정복

                       하였다. 사사시대에는 이 약속된 땅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다.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 외세의 압력이 심해지면서 왕정이 실시되었다.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위대한 왕의 출현으로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왕국이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고 난 뒤, 통일왕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고 만다.
                    북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함락되었고,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 바벨론에 의해 함락당했다.

 

  에스라, 느헤미야 : 주전 450년 경, 페르시아(바사) 제국의 관대한 정책으로 유대인들은

                     유배지에서 돌아왔고,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하고 생활양식을 되찾았다.

 

  마카베오상하 : 주전 332년 팔레스타인은 2세기 가량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알렉산더대왕의

                 세계 정복으로 그리스의 지배에 들어갔다. 전 세계를 헬레니즘화 시키려는

                 알렉산더 정책을 답습한 셀류키드 통치자들이 유대 공동체에도 펴려고 하자

                 마카베오가를 중심으로 봉기가 일어났다. 그 후 유대 왕국의 독립시대가 왔지만

                 거대한 로마제국의 그늘에 가려졌다. 신약성서의 배경들이 로마제국의 무대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주변국들의 쟁탈에 말려든 용감한 소수 국가라고 해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단순히 세속의 역사나 문화를 다룬 책은 아니다. 이는 유대인에게나 기독교인에게나 역사적인 체험을 신앙으로 해석하여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밝히려는 거룩한 역사이다.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활동하신 것이며, 이스라엘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의도가 실현된 것이다. 이러한 신앙 때문에 거룩한 책이라 부르는 것이다. 정리하면 구약성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만남에 대한 증언이고, 사람들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결정적인 사건

  구약성서가 천지창조나 아브라함 시대부터 기록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역사는 공동체로서의 자의식을 갖게 한 결정적인 역사적 체험인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한다. 기독인들이 주의 만찬을 거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회상하고 재현하듯이, 유대인들도 유월절을 거행하면서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고 재현하고 있다. 출애굽 사건이 주전 587년의 국가 멸망, 즉 유배 이전의 시대부터 성경문학에서 계속 언급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모스, 호세아, 에스겔, 시편, 다니엘, 다른 지혜서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몸소 행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원히 복종하게 한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 역사의 기원을 찾고 있다.

 

 

모세 오경의 중심 사상

  모세오경은 히브리어로는 Torah(토라), 율법이라고 번역되지만, 이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인도하고 지도하기 위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 오경은 출애굽 사건의 서문인 천지창조(창1-11)와 이스라엘 족장들의 이야기(창12-50)로 시작된다. 이스라엘인들은 후대에 와서 신학적인 반성을 한 다음에 출애굽 이전의 첫 히브리인인 아브라함에게서 그들의 역사의 기원을 찾았고, 아브라함이 약속된 땅으로 이주한 이야기에서 그들의 ‘소명의식(선택)’을 발견했다. 이는 출애굽 사건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전승 서사시에서 출애굽의 주제는 신명기의 기도에서 확실히 나타난다. 이는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 예배의식과 관련된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 고백이다.

 

연구 방향의 제시

  본 책에서는 출애굽을 시발점으로 하여 구약성서를 연구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적인 성격을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방법론 외의 다른 접근 방법을 생각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방법론에서는 문학비평, 고대 세계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상황과의 관계, 이스라엘의 신앙에 대한 해설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의 드라마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겪은 공동의 체험과 관련되어 고찰해야 한다. 그 다음 문화 정치 지리의 역동적인 맥락에서 성경적인 메시지를 이해하고,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성경의 기자들이 그 시대에서 무엇을 말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읽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성경의 이해를 돕는 것이지 성경을 대신할 순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기원

: 출애굽기에는 역사적인 드라마가 감동적으로 펼쳐지고있는데 이 역사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이다. 하나님은 무기력한 노예들의 편에 서면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활약성과 그 승리를 보여 줍니다.

 

전승의 본질 

유대교,개신교, 가톨릭 학자들의 지배적인 이론은 모세오경이 수 세대를 거쳐 오면서 전승되는 동안 여러 다양한 문학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형성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ex) 낙원이갸기, 아브라함이 시험을 당하는 이야기 , 불 붙은 가시 떨기나무에서의 모세 이야기

-여러 문학적인 전승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전 전승

고대사회에서는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전승은 종교의식이나 비공식적인 기회를 통해 구전으로 전해 졌다.

초기 구전시대의 이야기꾼인 설화자가 물려받은 전승을 새롭게 재창조 함으로써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재해석되고 확대 되면서 후세에 전해진 이스라엘 이야기의 커다란 주제는 다음과 같다.

1.조상들에게 준 약속 2.애굽에서의 노예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심.

3.시내 산에서의 하나님의 출혈과 율법을 줌. 4.광야에서 인도하심.5.약속의 땅을 상속

초기 구전 시기에 이러한 주제는 기록 형식으로 원형이 잡혀지기 오래 전에 역사적인 서사시에 이미 섞여 있었다.

 

설화자의 관점

성경적 드라마의 연구에는 2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을 언급하였는데 1.이야기 안에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은 여러 다양한 문학적인 전승이 섞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이러한 문학적 전승은 출애굽 사건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구전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또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출애굽 이야기는 구전 형식이든 기록에 의한 것이든 객관적인 역사는 아니라는 점이다.

출애굽의 이야기는 출애굽 사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므로 다른 관점에서 보았다면 현재의 내용과 판이하게 달라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를 대변하는 성경 기자들은 출애굽의 사건이야말로 신성한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단지 노예 상태를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 억압 받는 노예들을 하나님이 구원했고 이 구원시킨 노예들을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출애굽기의 서문

 

출애굽의 사건에 선행하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질문은 2가지이유에서 답하기 어렵다. 1.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득이 이스라엘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구전과 기록 전승의 과정을 통해 전해져 왔고 하나님의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형성되어 왔다.

 

후리족의 이동

구약성서의 말하는 히위족

 

헷 족속

성경전승은 헷족의 세력이 멀리 남쪽 가나안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피루

많은 셈족이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민족이나 종족을 이룬 집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근동의 여러 나라에서 시민권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사회 계층을 말한다.

 

아람족의 출현 

고대역사는 크게 2가지 분리된 움직임처럼 보인다.

1. 우르왕조의 몰락시기에 일어난 아모리족의 침투 2.gpt 제국과 이집트 제국의 봉괴 이후의 아람족의 출현.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 

이스라엘 조상들의종교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인 신과 개인적인 관계 또는 “계약”을 맺는 관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ex)아브라함의 “방패”로 알려진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고

이삭이 경외 하는 이 야곱은 전능자 와 관계를 맺었다.

 

 

이집트로 이주

  우선 요셉의 이야기는 훌륭한 문학 작품이며, 구전전승의 의존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주전 2000년기의 이집트 역사에서는 아시아인들이 정부의 요직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미루어 보아 요셉의 이야기는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니며, 더불어 이 설화는 중요한 신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요셉이야기는 와전한 소설이 아닌 2000년 기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 역사적 소설임을 알 수 있다.

 

힉소스의 침입

  여기서 힉소스족이란, “외국의 통치자들”을 의미이며, 여러 민족들로 구성 된 민족이었다.

  17세기 동안 힉소스족은 이집트를 통치했으며 강력한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집트인의 혁명이 일어나고 이집트인들이 다시 일어났다.

  배경으로는 자연의 이로움을 가지고 있던 이집트로 이들이 들어오게 된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어진다. 힉소스 족의 침입과 히브리 인들의 이주는 비슷한 시기라고 추정한다.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그럼에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 이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하던 힉소스 족의 사이에 섞여 이주함을 생각 해 볼 수도 있다.

 

이집트에서의 압제

 행정의 변화로 인한 히브리인들의 노예생활, 출 1:8처럼 새 왕이 일어나서 변화를 주려고 함.

 

압제자 바로    

  18,19세기에 셈족이 추방당해서 나올 시기에 모두가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부흥을 위해 값이 싼 노동력이 필요하여 하비루를 잡아 정책의 희생이 되었다. 학자들은 요셉이 활동하던 시기의 바로는  출애굽 시대인 세토스 1세와 라암세스 2세 (1305~1224)때 인것으 추정한다. 이런 비옥한 토지의 초승달 지대에서는 혼란스러운 정치와 민족들이 움직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히브리 인들은 역사를 전승하였고, 그런 역사의 움직임 속에 하나님의 뜻들이 펼쳐졌다는 사실이 참으로 중요하다.

 

 

제 2 장 억압에서의 해방 

 

이스라엘 백성은 억압과 압제로부터 해방을 하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서가 성서에 있다. 출애굽은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감하시고, 구원하시는 단계로 이루어진다. 출애굽의 1-15장은 각 장을 읽는 것이 좋으며, 또한 장들이 드라마적인 통일이 있다.

드라마의 줄거리는 하나님과 바로와의 대결구도로 이야기가 전개 된다. 이집트의 잡신들이 아닌 바로와의 대결구도는 당시 바로의 위치는 신의 화신으로 여김을 받고 절대적인 힘과 지혜를 가진 초인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출애굽의 전반부에서 극적인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분위기가 모세의 출생으로부터 하나님과 바로와의 갈등 그리고 홍해를 가르고 탈출하는 것까지의 긴장감이 계속적으로 고조된다.

 

모세의 역할

출애굽은 모세를 나타내기 위한 영웅적 서사시는 결코 아니나, 출애굽에서의 모세의 역할은 정치적인 지도자로써 또한 하나님과 백성의 중재자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모세의 출신 배경

  위의 언급한 내용과 같이 출애굽은 영웅적 서사시가 아닌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세를 대행자로 삼았다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모세의 출생은 살육을 피해 비천하게 출생되었고, 양육은 이집트의 궁중에서 받았다. 하지만, 모세는 살인한 이야기처럼 히브리인들에게 강한 동족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곤 소문이 확산이 되자 도망을 하고,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집에 거했다는  미디안 사람들과의 접속 사실이 있다.

 

불붙은 떨기나무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산”에 우연히 가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명과 모세의 마음속에 큰 갈등이 일어났다. 여기서는 시 한편을 읽듯이 감정이입으로 읽어야 한다. 모순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구전 전승은 문학적인 전승보다 먼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처럼 떨기나무 사건에서 이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하거나 경이적인 사건을 설명하려 든다면 이는 초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서의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압제를 뒤집어서 억압받는 노예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인간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였다.

  이 사건에서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모세로의 관점이 이동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집트의 백성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모세를 움직이고자 하신 말씀이었다. 이로보아 아브라함 헤셀 같은 학자는 하나님께서는 “구원하는 능력으로 인간 역사에 참여 한다”라고 언급한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의 모세는 자신을 인식하고, 역사적 상황의 요구에 더욱 민감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남 - 출3장

1) 모세의 하나님께 요구 - 당신의 이름을 알려달라 → 왜 이집트인들에게 누가 보냈는가를 말하기 위하여 - 고대의 신들의 전쟁

2) 당신 고대 근동에서 사용된 신명(神名) - 샤다이, 엘, 바알, 레 - 신의 성격을 파악

3)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름에 생명력(生命力)이 있다고 믿음 - 성명학(姓名學)

4) 체험을 통하여 이름이 변함  아브람 →아브라함, 야곱→이스라엘

 

1)나는 위대한 자로다 - 출 3장 13-15절

I am who I am 또는 I will be who I will be

  ( 나는 스스로 있는 자)   ( 나는 있을 것이다)

  = HE WILL NE

B.C.E 500이전까지는 - 제의 성전시대 - 신성을 침해한다하여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음. 이후 Adonai ( the Lord) 사용함 기원전 3세기 히브리성경을 헬라어 70인역으로 번역하면서 YHWH (주)로 사용함 - 여호와(Jehovah)는 아도나이를 히브리식으로 소리내어 읽은것 YHWH(자음) +Adonai(모음만) =Jehovah = YaHoWaH

 

야훼이름에 대한 견해

1) TO BE 나는 내가 있게 만든것을 있게 한다 = I cause to be what I cause to be

    I create what I create  나는 내가 창조한 것을 창조한다.  -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2) I am // I am the ONE who is - 나는 있는자 그로다 -신통치 않음- 영원한 존재 -헬라철학적

3)  I will be 나는 있을 것이다 - 이스라엘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 - 출애급사건 해석에 유리

 

야훼 숭배의 기원

 

 

 

야훼의 이름은  모세이후 시대에 활발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모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에게 :켄족(kenites): 신명을 빌려왔다.

야훼란 이름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신명이다. - 경험적 하나님을 알았다.

    출애급기 20장 2절 “ 나는  너를 애급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야훼로라”

 

바로와의 투쟁

 messenger - 하나님의 사자

야훼가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만들었다 - 하나님의 절대주권 “ 너희가 나를 야훼인줄 알리라”(출10:20)

 

이집트에 대한 재앙

- 바로의 완고함을 꺾기 위해 10가지 재앙 내림

- 모든 재앙은 야훼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내린 것이다 - 경험하고 해석하고

- 이집트 나일강의 주기적 범람으로 1-9가지 재앙은 일어날 수 있다 - 그런데 왜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인가?

 

전승의 본질

뱀- 지팡이 이야기 - 민간전승이야기 - 여러세대의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고- 확대- 축소- 재생산됨

 

전승의 역사

오랜된 구전의 산물이다.  - 긴 시간속에 축소 확대 변형 새로운 것으로 발전확대되었다.

   유월절의 의식 - 원래는 유목민들이 가축들이 잘 자라고, 악량추출 - 그러나 거룩한 의미로 재해석

                유월절이 가나안땅 정착후 - 보리수확과 맺어져 - 무교병과 엮어졌다. 무교절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출애급기는 긴 전승의 결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표징과 이적

‘재앙’ 이란 단어가 출애급기에는 거의 없다 - 대신 표징과 이적

하나님의 일반적 활동에 예외적인 사건이 바로 표징과 이적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기 위한 표징과 이적

이집트에서 행한 표징과 이적 보다 이스라엘 모두가 바다를 건넜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함 - 공동체저 경험을 강조함 - 계속 기억되고 의미를 찾으며 반복적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님의 직접적 주권적 개입과 구원을 강조함

 

바다에서의 승리

- 이스라엘의 민족적 경험 - 누룩없는 빵을 먹는 유월절 축제 - 무교절

 

탈출경로

- 갑자기 이집트를 빠져 나옴 - 남자 장정만 60만 - 모두 200만 - 신화적 과장법

-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 - 소규모 추정 - 혼합무리 - 다른 민족들의 노예들, 용병들, 떠돌이들, 광야를 방랑 하면서 늘어남

- 출 13장 18절 - 광야길을 택함 - yam suph 얌숲- 홍해: 갈대 바다, 파피루스 호수

    수에즈만 호수의 늪지대 - 낮에는 구름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 -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구약표현 - 구름, 불, 번개, 비

 

물 속의 길

바다의 이야기는 체험을 기초로한 것이다.

만잘레 호수의 늪지대 출 14:21 24-25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에서 경이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현존을 찬양

 

거룩한 사건

가장 오랜된 단편시의 하나 - 출 15:21

바다의 노래 - 공동체가 과거의 집단기억을 계속적으로 회고하며 그 경험을 재해석하고 현재화하는 것이다.  

바다는 하나님만이 움직일수 있다 - 카오스적인 시간의 발현 - 이적

악의 상징인 - 바다에 대한 야훼의 승리를 묘사

전승의 기억들을 후세에게 전하고 현재화하고 다시금 회고하는 이스라엘민족의 저력은 믿음을 가져옴

 

 

 

제3장 광야에서의 계약

  이스라엘 전승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그들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기억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집트에서 모세를 따라 도망했던 사람들은 잡다한 부류의 사람들, 즉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여러 인종이 섞인 다수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정체성이나 공동생활에 대한 의무감이 결여되어 있었고, 역사적인 공동체의식 역시 없었다. 그러나 시내 반도의 광야에서 이들은 ‘야훼의 백성’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광야에서의 인도

  히브리인들은 이집트를 떠나 광야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여정은 많은 고난과 불안정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이들은 광야에서 입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불평을 하고, 서로 미워하고, 모세에게 반항하기도 했는데 무엇보다도 신앙이 결핍되어 있었다.

 

야훼의 도움의 표징들

  야훼께서 자기의 백성이 궁핍하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광야에서 은혜를 베푸시고 인도하셨던 사실을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다. 일용할 양식을 주셨던 것은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이 있었다. 현대의 독자들은 이런 일들이 히브리인들에게 행운이었다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에서는 야훼께서 하루하루를 보살펴 주신다는 표징으로 보았다.

 

광야에서의 불평

  백성들이 궁핍할 때 간절히 원하면 야훼께서는 은혜를 베푸셨다는 긍정적인 내용도 있지만, 야훼와 그의 종 모세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불평을 했다는 부정적인 내용도 있다. 이에는 마라의 쓴 물, 이집트의 고기가마 그리워 하는 것, 만나에 대한 불평,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대한 불평 등이 있다. 이 이야기가 대대로 전승되어 오면서 일부 집단에 의해 이 불평 사건들이 더욱 강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승은 분명히 광야 생활에서 일어났던 실제 불평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시내(호렙)에 도착

  백성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굽히지 않고 마침내 백성들을 시내의 오아시스로 이끌고 갔다. 이곳에서 그들은 반성의 기회를 갖게 되었고, 부름을 받은 공동체라는 특징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전승에서는 모세가 계약을 맺은 장소가 ‘하나님의 산’이었다고 하며, 호렙 또는 시내라고 부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전승을 전수했던 사람들의 관심은 시내산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뒤에 광야에서 야훼와 맺은 계약에 있었다. 이는 한 백성으로써 이스라엘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계약

  계약은 둘 이상의 관계에서 상호 책임감을 수반하는 구속력있는 합의를 말한다. 구약성서에서는 계속성과 영구성을 갖고 약속과 의무에 바탕을 둔 구속력있는 관계를 의미할 때 쓰였다. 동의어로 ‘맹세’라는 말이 쓰일 때도 있었다.

 

시내에서의 계약

  출애굽기 1-24장의 이야기는 두 가지 사건, 이집트 해방 후 광야 인도 사건과 시내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고 계약을 맺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

 

‘독수리의 날개’ 구절 - 출 19:3b-6

  이 구절은 이집트를 떠난 지 석 달 만에 시내에 도착했다는 출애굽기 19장 1-2a 말씀 다음에 강조되어 있다. 이 구절로 이스라엘 백성의 특별한 소명(선택)에 대한 의미를 한층 더 성숙한 신학적인 반성으로 끌어올렸다. 야훼의 의도는 백성으로부터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고, 백성은 결정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목적안에서 사명을 맡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을 섬기도록 바쳐진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계약의 비준

  출애굽기 24장 에서는 계약 체결 의식을 묘사하고 있는데 계약이 산꼭대기에서 성찬 중에 체결되었다고 하는 것과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전체 집회가 계약 체결 의식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나뉜다. 어떤 면에서는 계약 체결 의식에 대한 차이점을 보는데, 이 의식의 차이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각 전승이 전제하고 있는 계약 그 자체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중요한 것은 출애굽기 19:3b-6과 24:3-8에서 특별히 입증된 것처럼 고대 서사시 전승에서는 계약이 백성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조건을 담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전승이 전수되는 과정에서는 계약에 대한 두 가지 견해, 조건적인 것과 무조건적인 계약이 서로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

 

계약과 율법

  고대 서사시 전승에 의하면, 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계약 조건의 선언이 포함된다. 편집자들은 후기의 계약법들 또한 모세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했다. 모세 오경의 법률들은 모세시대부터 유래하는 계약법(주로 십계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대 전승이 근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주장한다.

 

절대법과 판례법

  모세 오경에 나오는 두 가지 종류의 법률은 조건적인(판례)법과 절대적인(필연적)인 법이다. 조건적인 법은 만약 이것이 생기면, 그 때에는 저것이 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특징적인 유형을 갖고 있는 반면, 절대적인 법은 무조건적이며 명백하고 간략한 언어로 되어있다. 이러한 분석으로 십계명(출20:1-17)을 보면, 모세 시대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믿을 수 있는 이유가 있는데, 집계명의 대부분이 둘 또는 세 단어로 표현되어 있으며, 나머지 계명들도 전승되어 오면서 길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조약과 계약

  계약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조약에 많이 쓰였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학자들이 주장하는 계약의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계약 당사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쌍무적인 의무에 의해 각자 서로를 구속하는 평등계약과 편무적으로 종주국의 대왕과 속국의 우두머리인 봉신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인 종주권 계약이 있다. 하나님이 모세와 세운 조약은 종주권적인 계약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학자들은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위엄이 공포에 질린 백성 앞에서 두려운 번개와 천둥으로 표현된 것처럼, 주권자인 하나님에 의해서 맺어진 계약이었다.

 

출애굽과 계약

  출애굽과 시내계약을 연구하면서 주권조약 형식의 영향을 받아 전승을 편집상 배열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종주권 조약의 가설을 내세운 사람들의 의견에 무게를 싣는다. 시내계약은 실제로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 발생했던 히브리라는 집단이 체험했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초기 전승을 볼 때 여러 가지 불 확실한 부분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모든 전승은 출처가 되는 ‘뿌리 체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해방체험(출애굽)’과 ‘명령체험(시내)’이다.

 

계약의 위반

  여기서는 금송아지를 만드는 극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야훼께서 다시 계명을 내리고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재확인하는 출19-24장의 시내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민족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다만 하나의 공동체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특별한 체험이 있다는 것 뿐이다.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모세가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가지고 내려올 때 보였던 백성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먹고 마시며 춤추고 문란한 성문화를 즐겼다. 이를 보고 분을 참지 못한 모세는 십계명이 새겨진 판을 깨드림으로써 계약을 위반한다. 모세는 깨뜨린 돌판으로 인해 다시 만들게 되는데 이것은 계약의 갱신을 상징한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용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약속의 땅

영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은 언제나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큰 충동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주 초기부터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격렬한 각축전이 벌어졌던 무대였다. 여러 민족들이 이 지역을 탐내어 때때로 침공하였는데 이민족들은 이 좋은 땅의 한 조각이라도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려 하였고 다른 민족들을 짓밟고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좁은 땅덩어리를 둘러싸고 작은 나라들은 삶의 공간을 확보 하기 위해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싸웠고 큰 나라들은 제국을 이루기 위한 전쟁을 수행하는 곳이 되었다. 역동적인 무대 속으로 히브리인들도 들어오게 되었고, 고대 세계에 있어서의 다른 하피루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처음에는 영토가 없는 백성이었다. 그들은 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구성원들, 곧 유랑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야훼께서 이러한 투쟁의 와중에거 개가를 울리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줄 것이라는 것이 확고한 신념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창세기 12:7에 의하면 야훼는 세겜에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했고 이 약속은 이삭과 야곱에게 재천명되었고 모세 시대에 와서 갱신되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약속의 땅”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전승들은 가나안 정복이 완료된 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땅의 약속이 이스라엘의 조상 시대에서 무엇을 의미하였든, 그것은 후대에 이 전승들이 출애굽 사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에 비추어 재해석되었을 때 더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었다.

 

1)고대 이스라엘의 신앙 - ‘애굽으로부터의 인도는’ 경작할 수 있는 땅으로의 인도와 뗄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되어있다. 이것은 후손들에 대한 종교적 교훈을 다루고 있는 신명기의 한 수절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거기보면 계명을 지켜야 하는 동기에 관하여 “네 자손들이 물을 때” “우리들에게” (공동체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일어난 사건들을 말해 주라고 하였다.

2)두 가지사건 - 우리를 인도 하셨고, 우리에게 들어가게 하시려고  언급

*다른 예전문에도 나옴  

3)순례자의 축제 -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라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백 (첫 열매들을 드림)

4)고대인들의 생각 - 풍부한 젖과 꿀은 = 축복의미 , 가나안 땅 = 낙원 그 자체.

5)신명기 26:5-9에 나오는 의식은 추수 축제와 연관 하여 그것은 이스라엘 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논경생활로 이행한 함참 뒤에 나온 것이 분명함.

6)몇몇 학자들은 땅의 약속이 선조들의 신앙, 즉 종교의 한 측면이었다고 믿음.

 

예전문 폰 라트는 이를 “육경의 축소판” 이라했다.

야훼께서 땅을 선물로 주셨다는 단언에 와서 결정에 이른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땅의 선물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역사의 재연에 있어서 정점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오경, 특히 가나안의 정복을 다루고 있는 여호수아(육경)에서 아주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체험의 있어서 가나안 정복은 우연한 상황에 의해서나 뛰어난 인간의 능력의 발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 났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자랑스럽게 내세울 소유물이 아니라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선물이다.

그리고 상당한 분량의 제사장계 사료(P)가 민수기 후반부와 여호수아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나중에 (13장에서) 다룰 것이다. 게다가 가나안 진입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모세에 의해 주어진 설교를 제시하고자 하고 있는 신명기는 주전587년 국가의 멸망

전후에 씌어진 신명기계(D)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 (11장에) 서 그러므로 민수기의 고대  

서사시 전승과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가나안 정복이야기 만이 남게 된다,

 

유랑의 40년

전승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브엘세바 남쪽의 광야에서 40년을 유랑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40년을 수학적으로 정확한 것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된다.

한 ex)로 엘리야가 40일을 밤낮으로 광야를 걸었다는 말이나 예수가 동일한 기간 동안

광야에서 금식했다는 전승에서처럼 단지 “긴 세월”을 의미할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오는 말은 거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가데스에서의 체류

현재 형태의 오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시내산에서의 체류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지역은 브엘세바에서 남쪽으로 50마일 가량 떨어진 불모지인 네게브 지역의 오아시스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세 군데의 샘에서 물이 나왔다.

애굽에서 도망나온 히브리인들의 행선지는 시내산이 아니라 가데스였으며 그들의 기본적인 공동체 삶, 율법의 제정, 예배의 형식이 갖추어진 곳도 바로 이 오아시스에서였다고 주장하면서 가데스에서의 체류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왔다.

실제의 역사적 상황은 시내산에서의 계시를 부각시키고 광야 여정에 있어서 모세의 지도력을 강조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 성경 기사를 얼핏 보고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복 잡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애굽을 도망나온 히브리인들이 남쪽 길을 택해 시내산에 들렸다가 가데스로 갔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들이 오아시스에 도착 했을 때 그들은 이전에 팔레스타인에서 내려왔거나 다른 상황들 아래서 애굽을 떠나왔던 다른 히브리인들과 합류하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가데스와 그 부근에서 채류한 기간에 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지만 전승은 어떻게 백성들이 뼈아픈 분쟁과 고통을 통해 더 큰 연합과 결속을 이루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광야에서의 이러한 파멸적인 긴장들 속에서 언약에 의한 유대는 얼마든지 깨질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 신앙의 관점에서 사막의 경험을 되돌아보았을 때 , 이러한 시련들을 통하여 야훼께서 백성들의 앞날에 놓여져 있는 역사적 과업을 위해 백성들을 결속시키고 훈련시켰음이 분명해졌다.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는 거룩한분 

고대전승-야훼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시다는 것은 두 가지 성물로 표시.

1시내산에서의 체류와 관련하여 그후 언급된 회막 이었다.

제사장계 전승(P)도 출애굽기 26-27장과 35-38장에서 장막 또는 “성막”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제사장계 사료의 모든 기록이 고대 광야 시절의 상황과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제사장계 사료의 기술은 고대 셈족들 사이에서 알려져 있었던 붉은 가죽으로 된 장막 성소와 같은 것이었음에 틀림없는 옛 사막 성소에 대한 진정한 기억도 보존하고 있다. 장막은 야훼와의 만남의 장소였는데 여기서 신탁이 구해지기도 하였고 야훼의 말씀이 이스라엘 회중에게 선포 되기도 하였다. 어려운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은 이 장막으로 나아갔고 모세는 그들의 청원들을 야훼 앞에 가지고 나갔다. 우리가 생각건대 이런 식으로 언약의 율법은 해설되고 확대되었다.

또하나의 성물은 2.고대전승에 의거하여 서술하고 있는 언약궤였다.

원래 언약궤는 들고 다닐수 있는 보좌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약궤에 야훼RP서 눈에 보이지 않게 좌정하고 계신다고 믿었던 것을 보인다.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세 종교는 가시적인 형상의 형태로 야훼를 에배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였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 종교는 신전에 신상이나 여신상을 세우거나 축제행렬 때 신상을 들고 다님으로써 신의 임재를 나타 내었던 다른 고대 민족들의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게 임재해 계신다고 굳게 믿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고대 서사시 전승은 그 어디에서도 궤를 장막성소안에 두었다는 언급을 명확하게 하고 있지 않다. 이 문제에 관한 이러한 침묵으로 인해 어떤 해석자들은 원래 제의에 쓰인 이 두 성물은 서로 독립되어 서로 다른 집단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으로서 각각의 신학적 이해의 중심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처럼 매력적인 견해에 의하면 장막은 ‘현시’ (초월적인 하나님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때때로 나타난다)의 신학을 대변하였고, 궤는 ‘임재’ (야훼께서 백성들 사이에 임재해 계신다)의 신학을 상징하였다는 것이다.

 

가나안에 대한 무모한 공격

사막생활의 곤경과 생활공간의 결여로 인하여 히브리인들은 다른곳에서 살 만한 땅을 찾아야 했고 그래서 가나안 구릉지대를 조사하기 위해 정탐꾼을 보낸다.

정탐대는 땅이 기름지다는 보고, 실제로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는 보고를 가지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 땅은 요새화되어 있고 거민들은 매우 키가 컸다.

이스라엘 백성이 남방으로부터 가나안으로 진입을 시도하여야하느냐 하지 않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라졌다. 그때 정탐꾼들 가운데 여호수와와 갈렙은 자기네들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감행하자고 주장하였지만 백성들은 실망한 나머지 광야생활에 비해 젖과 꿀이 흐르는 이집트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지도자를 뽑자고 주장 하고 나섯다.

그러나 결국 일생을 광야에서 유랑하기보다는 모험이긴 하지만 공격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백성들은 공격을 시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무모한 공격은 하나님의 제가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왜냐면 언약궤와 모세가 가데스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브엘세바 동쪽으로 수 마일 부근에 있던 호르마 근처 구릉지대의 가나안인들에게 결정적으로 격퇴당하였다.

민수기21:1-3에도 호르마 전투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데 이 기사는 아마도 다른 전투에 관한 이야기가 잘못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방어로 전세로 그들을 막기위해 부대를 파견했지만 이번에는 전세가 역전 되었다.

이때 결정적으로 히브리인들의 승리로 인해 호르마라는 성읍의 이름이 생겨났다.

 

요단 동편 지역을 경유한 우회

요단 동편 지역은 여러 정착민족들이 점령하고 있었고 그들은 침입자들의 등장을 적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지도를 얼핏 보면.

사해의 정남쪽, 즉 가데스바네아의 정반대편에는 야곱의 쌍둥이 형제였던 에서를 통하여 전통적으로 이스라엘과 관련을 맺고 있었던 에돔이 있었다. 에돔 바로 위쪽으로는 북쪽으로 아르논강을 경계로 하고 남쪽으로는 세렛 시내를 남쪽 경계선으로 하는 모압이 있다. 모압 위쪽에는 아라비아 사막의 변경에 암몬이 있었다. 성경 전승에 의하면 모압과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인 룻의 후예들로서 이스라엘의 먼 친척들이었다.

당시에 이나라들이 많은 인구들을 거느린 나라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모압과 에돔은 후대에 가서야 국가적 실체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 두 민족은 히브리의 초기 시가들(바다의노래,출15:15)에서 야훼의 백성의 대적들로 언급되고 있고 애굽의 문서들에는 주전 13세기부터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이스라엘로 알려지게된 히브리인들이 본향을 찾고 있을 당시에 다른 하피루 집단들이 이 지역에서 정착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추측 할 수 있겠다.

 

통과를 둘러싼 분쟁

히브리인들은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들어서지 않고 대로로만 지나가겠다고 모세가약속을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많은 에돔 왕은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거절했다.

그래서히브리인들이 에돔의 서쪽 변경을 따라가다가 세렛 시내에서 동쪽으로 진로를 바꾸어 모압의 변경을 끼고 돌아 올라갔다.

히브리인들이 아모리족의 시혼 왕국의 영토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다시 사절을 보내어 왕의

대로를 이용할 것을 허락해주도록 요청했다.  하지만 시혼왕은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를 보내어 침입자들을 치러 나왔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최초의 주요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끝났다 히브리인들은 아모리족을 아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왕국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승리에 도취된 그들은 계속해서 북진하여 엄청나게 크고 탄탄한 침대를 사용하는 것으로 소문난 옥이라는 이름의 거인 바산의 왕을 만나 쳐부수었다. 이렇게 하여 히브리인들은 시혼과 옥의 땅을 포함한 요단 동편지역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히브리인들은 모압 평지 즉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여리고를 마주보는 모압의 저지대에 진을 쳤다.

 

발람의 신탁

화자는 모압의 왕이 승승장구의 이스라엘인들에게 저주를 퍼붓기 위하여 불러온 바벨론의 마술사 발람의 이야기를 들여왔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하나님의 예언적 대변자로서 발람이 말한 내용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저주든 축복이든 입을 통해 내뱉어진 말은 그대로 응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졌다.

발람은 이스라엘인들을 내려다볼 수 이는 산 꼭대기에서 그 어떤 군사력의 시위보다도 더 센 힘을 가지고 저주를 퍼붓도록 초청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승은 모압의 왕 발락이 발람에게 상당한 대가와 커다란 여예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람 같은 이방 마술사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천명하고 있다.

민23:8-10.

이러한 고대의 관점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애굽에서 그들을 구출해낸 야훼에 의해 구별된 특별한 백성이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마술이나 점술로도 야훼께서 그들에게 내리기로 한 축복을 막을 수 없었다.

 

가나안 침공

신명기는 모세의 죽음과 여호수아이 계승에 관한 이야기로 끝난다.

이와 같이 갑작스런 방식으로 토라 또는 오경이 끝난다. 오경의 이야기들이 지향하는 정점은 미래, 즉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유업으로 줄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을 한 눈에 바라 볼 수 있는 느보산에서의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이 공격태세를 갖춘 바로 그때 일어난다.

이야기는 여호수아서에서 계속 된다. 여호수아서는 예언서로 알려진 히브리 성경의 두 번째 주요 부분에서 첫 번째 책이다. 도표에서의 보는 바와 같이 정경 예언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각 부분은 4개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전기 예전서로 알려져 있고, 둘째 부분은 후기 예언서로 알려져 있다.

 

가나안 땅

여호수아는 율법 책(신명기계 율법)에 순종하며 이를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는 한 가지 조건 아래에서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이 부분은 이스라엘의 것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것이 성공의 열쇠였다(수1:7-9)여기서 우리는 성공과 실패에 관한 신명기계 공식, 즉 야훼의 계명에 순종하면 승리와 번영이 주어질 것이거, 불순종하면 고통과 실패라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를 것이라는 공식을 발견하게 된다.

 

가나안의 지형

가나안 구릉지대 세지역 - 북쪽으로 이스르엘 계곡 너머에는 갈릴리의 산들이 있고,그 아래에는 에브라임(사마리아)의 중앙 구릉지대가 있는데 그곳의 옛날 중심지는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의 길목에 위치한 세겜이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자연적인 경계에 의한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유다의 구릉지대가 있는데 브엘세바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남쪽광야 (네게브)에서 끝이난다. 헤르몬산에서 유다 광야에 이르는 이 길쭉한 중앙 구릉지대가 이스라엘의 싸움의 무대 였다.

가나안은 정치적으로 중요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전략적 통로였다는 사실이었다. 오느나라든지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지배하고자 하는 나라는 이 통로의 장악이 필수적이었다. 주전 2000년경부터 가나안은 명목상으로든 실제상으로든 이집트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이집트의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을 만큼 강대한 나라는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고 있었던 미탄니 왕국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강대국은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헷족의 위협이 점점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투트모시스4세(주전1412-1403년경)의 치세 때 평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집트는 가나안,페니키아,시리아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유롭게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아마르나 시대

바로들과는 달리 외교정책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둥근 태양신 아톤 숭배를 바탕으로 일종의 유일신교를 도입하여 이집트에서 종교개혁을 수행하는 데관심을 기울였다.

18왕조의 국내문제에 몰두해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지역은 이집트의 수중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아크나톤의 서고에서는 몇몇 가나안의 왕들이 보내온 외교서한들이 발견되었는데 그것들은 그당시에 얼마나 무질서한 상황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당시 하피루들이 왕의 성읍들을 장악하고 있다라고도 말을 하였고 이집트의 예루살렘 총독 합두헤바의 서한은 절망의 탄원을 하기도 하였다. 왕이여 이 땅을 돌아보소서 이땅을 지킬 오십 명의 수비대만 있어도 상당한 정도의 도움이 될것이라고 간청까지 하면서...

몇몇 학자들은 아마르나 서한들이 여호수아서에 묘사된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추측해 왔으나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피루’라는 말은 넓은 의미를 가진 용어로서 기존 사회체제에 어떠한 토대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온갖 유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아르마나 시대에 이 정치없이 떠돌아다니던 무리들이 혁명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을 만큼 수적으로나 세력에 있어서 충분히 강해져다. 그렇지만 아르마나 시대의 하피루의 침입과 이스라엘의 정복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가나안의 구릉 지대에 은신하여 중부 가나안의 넓은 지역을 장악했던 하피루들 가운데 일부가 한 세기 가량 뒤에 이 땅에 들어온

여호수아의 추종자들과 인척-또는 적어도 동조자들- 이었을 가능성은 꽤 크다고 하겠다.

 

이집트의 새로운 세력 추구

아마르나 시대가 끝이나고 아크나톤이 죽자. 그가세웠던 유일신교는 ‘이단’으로 몰려 모두 제거되었고 이집트는 내정에서 질서와 번영을 되찾기 시작했다 새로운 정세 발전은 이집트가 제 19왕조의 바로들 특히 출애굽과 관련하여 나온 바 있는 세토스 1세와 라암세스 2세 아래에서 엄청나게 부흥하던 시기와 거의 동일시에 일어났다. 한편 세토스 1세는 멀리 북쪽 시리아까지 원정을 수행했지만 이 두 강대국이 대결한 것은 라암세스2세 (주전1290-1224년경) 의 재위 제 5년에 일어났다.

그리고 라암세스가 죽자 이집트의 세력은 다시 약화되었는데 이번에는 만성적이었다.

라암세스의 아들 메르넵타(주전1224-1211년경)는 헷족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해 있었던 이집트 제국을 다스릴 경륜과 능력이 부족하였다. 아마르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헬라와 아나톨리아 (터키) 사이에까지 이르는 지중해의 팔인 에게 해역에서는 인구의 대이동이 있었다. 이 유랑민들 중 일부는 소아시아를 휩쓸어 옛 헷왕국을 종식시켰다. 또 어떤 민족들은 크레타 섬을 유린하고 미노아 문명을 끝장내고는 헬라로 이동하여 거기서 원주민들과 섞였다. 또 어떤 민족들은 바다를 향해해서 구브로를 장악한 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본토로 이동해 와서 우가리트(라스 샤므라)를 비롯한 중요한 성읍들을 점령 하였다.

또하나의 이동의 물결은 이집트로 세차게 밀어닥쳤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는 해로로 일부는 육로를 통해 밀어 닥쳤다. 이집트의 문서들에서 “해양 민족들”로 불렸던 이들 민족들은 여러 이름들을 뭉뚱그려놓은 것으로서 그 민족들 가운데 하나가 블레셋인 이었다. 메르넵타는

자신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에는 이민족들의 물결을 저지할 수 있었지만 특히 그의 후계자인 라암세스3세(주전1183-1152년경)의 치세 동안에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라암세스3세는 이집트를 침략하려는 이 연합군의 시도를 저지하고 블레셋인들을 가나안 해안에 있는 그들의 거점으로 밀어부쳤다. 이렇게 시도함으로써 이집트의 국력은 소진되어 다음 세기들에서 이집트는 이전과 같은 영광을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와 사회적 격변을 배경으로 우리는 분명히 주전1250년경에 시작된여호수아 영도하의 가나안 침공에 관한 성경의 기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메르넵타의 석비 성경 이외에 ‘이스라엘’을 최초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본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 바깥에서 이스라엘을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본문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있다고 말하고 있고 단지 하나의 민족으로만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은 아직 정착민이지 못했고 팔레스타인 근처 또는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한다고 주석하고 있다.

 

*이 전과주장은 과장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이스라엘과 이집트군대의 대결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은 조심스럽게 침묵을 지키면서 이 사건을 건너뛰고 있다. 그리고 메르넵타는 이 문제에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일 수 없었다 왜냐면 많은 인원으로 자기 나라를 위협해 들어온 해양 민족들이라는 다른 침략자들을 막아야한다는 더 큰 문제를 해결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섬리에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물려받을 무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가나안 정복 : 신명기 사가의 견해

 여호수아의 첫 부분은 가나안 정복에 관한 극적인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1차 군사 작전을 통해 요단강 서편에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들은 북쪽의 세겜까지 이동하여 거기서 여호수아는 성읍이 내려다보이는 산위에 제단을 세웠다. 2차 군사작전에서 승승장구한 이스라엘인들은 남쪽 구릉 지대로 쳐들어갔다. 이 작전에서는 천군을 지휘하는 하늘의 전사인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고 있었다는 목적으로 태양과 달이 멈추었다는 사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을 저지하려고 하렸으나 패배 당했다는 말만을 하고 있다. 3차 군사 작전에서 이스라엘인들은 북쪽 구릉 지대에서 중요한 승리들을 거두었다. 이는 단시일 안에 가나안을 완전히 장악하였다는 것이다. 이 글은 땅의 약속이라는 주제와 관한 모세 전승을 취하였다가 어떻게 그 모든 것이 여호수아 시대에 기적적으로 성취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1장에 나오는 가나안 정복에 관한 대안적인 견해

 여호수아 10:36-37에서는 여호수아가 헤브론 성을 쳐부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사기 1:10에서는 유다 지파가 이 성읍을 점령했다고 한다. 이처럼 가나안 정복에 관한 신명기사가의 견해를 여호수아서의 나머지 부분과 특히 사사기 첫 장에 나오는 말들과 비교해보면 복잡한 양상이 드러난다. 이러한 양상들은 좀더 오래되고 신빙성 있는 서사시 전승의 단편들이라는 것에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하며, 이 전승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오랜 기간을 두고 일어난 복잡한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에 지파들이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로 하나가 되었을 때, 여러 가지 다양한 지파들의 전승들은 결합되어 여호수아 아래에서의 온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관한 이야기로 되었다.

 

고고학의 증거

 고고학은 성경을 입증하거나 부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다만, 발견된 것을 기술하고 그 자료로부터 학문적인 논쟁을 통해 시험되고 있는 가설들을 추론하는 학문일 뿐이다. 고고학의 견지에서 후기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아마르나 시대에는 정치적 소용과 사회적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 시대는 철을 사용한 도구와 병기들의 제작, 방수용 석고 저수조의 사용, 계단식 단지 조성법의 사용 등이 이것이었다. 또한, 성서의 여리고를 초토화 시켰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3천 년대의 것으로서 아마 이집트에서 축출된 힉소스 족과 관련하여 주전 16세기 중엽에 파괴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 점령의 성격

 여호수아서와 고고학적 증거의 모호성은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게 만든다. 의견들은 대체로 세 가지의 학설을 따른다. 우선, 첫째로 점진적인 침투이다. 이는 실제의 역사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일어난 ‘점유’ 또는 정착이라고 하고 다윗 시대에 이르기까지 완결되지 않았다. 이처럼 단지 점진적이고 유목민적인 침투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침투는 가나안 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은 가운데 삶을 영위 하였고, 심한 갈등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의 신속한 정보에 관한 이야기는 야훼의 막강한 권세를 강조하고자 했던 신명기 사가의 종교적 상상의 산물이다.

 이 학설의 약점이 있는데, 이스라엘인들이 사막으로부터 들어온 유목민이었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하고, 농경인들 이었다는 것으로 성서를 순전히 ‘신앙고백적인’ 주장으로 생각되고 있다.

 둘째는 “무력으로 진입”하였다는 학설을 따르는 학자들의 군사적인 침공설이다. 여호수아의 윤색된 기사들을 이 사람도 인정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신적 전사인 야훼의 승리에 관한 극적이 이야기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 학설은 고고학적 발굴로부터 밑받침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나안 성읍들이 심하게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그리고 여리고와 아이는 지진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아마도 집필을 할 때에 아마도 그 근방의 벧엘과 혼동되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학설은 농민혁명의 학설이다. 이는 가나안 땅의 내부에서 폭동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가나안과 같은 몇몇 지역에서 아무런 저항이 없었던 이유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야훼의 전쟁들

 정복에 관한 기사들은 점진적 전투, 군사적 침공, 농민혁명 으로 볼 때에 성서 기사 보다 훨씬 복잡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존 브라이트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고려해야 하며, 팔레스타인과 사막으로부터 온 이스라엘 민족들은 지파 동맹체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대규모의 군사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군사 행동은 신속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천천히 여러 해 동안 진행 되었다. 이유는 삿1:19 와 같이 철병거의 민족들을 쫓아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위하여 끈질긴 공격을 감행해야 했다.

 앞으로도 역사가들은 이 가나안 정복을 논의 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이 정복의 성격이 무엇이든 승리들은 단순한 군사력이나 전략에 의해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확신은 이스라엘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졌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땅으로 인도하였던 야훼의 실제적인 임재와 인도하심을 깨달았다. 이것이 그들의 신앙이었다.

 

성전

 가나안 정복에 관한 전쟁은 충성을 맹세한 신의 이름으로의 부르심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을 토대로 한 일종의 게릴라 전투였고 공격적인 전투였다. 여기서의 승리를 주신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고대 이스라엘의 민족은 성전의 관습들 가운에 ‘헤렘’ 또는 제의적 진멸, 봉헌의 습관이었다. 여기서의 ‘헤렘’은 오직 저항하는 성읍들에만 적용되었다. 가나안의정복은 가나안 거민들의 멸절을 수반하지 않았다.

 

제5장 이스라엘 서사시의 형성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로부터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들이 다 여호수아가 말한 온갖 감동적인 체험들을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복잡한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여호수아의 고별사는 핵심 집단에 속하지 않았던 여러 지파들에게 출애굽의 해방의 하나님인 야훼를 인정하라는 초대 연설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는 정치적 통일과 사회적 연대를 가져올 것이었다. 백성들이 야훼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여호수아가 이러한 결단에 내포된 중차대한 의미들을 지적한 후에 백성들과 언약을 맺었을 때,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이 탄생되었다. 여러 지파들이 지파동맹에 들어왔을 때, 그 지파들은 이집트로부터의 탈출과 가나안 땅으로의 인도에 관한 ‘핵심적인 이야기’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만의 전승들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여러 세대들에 걸쳐 말해지고 전해짐에 따라 이스라엘 서사시의 확대와 증보를 가져왔다.

  이스라엘 서사시의 형성은 왕정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야훼와의 언약 속에서 그들의 하나됨과 연대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됨에 따라 이러한 이스라엘 서사시가 구전으로, 대체로 운문 형태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고 믿었고, 이 기본적인 설화 개요는 확대되고 다듬어져서 마침내 완결된 토라로 기록되었다.

 

전승에서 문학작품으로

  모세에서 다윗까지의 시기는 구전전승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승들 가운데 다수는 구전으로 전해졌고, 그 결과 기록된 말과 기억된 말 사이에 효과적인 상호작용이 있었다. 구약성경에는 현존하는 문헌 사료들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그러한 사료들로부터 인용한 구절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록된 문헌이 없다고 해서 이 초기 시대를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고대인들이 그들에게 중요한 전승들을 ‘암기하였고’ 기억력을 훈련하여 비상한 기억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많이 있었는데, 이는 호머의 시나 랍비의 구전, 코란을 외우는 아랍인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구전 전승의 형태들

  기록 이전 당시에는 여러 종류의 시적인 단위들이나 온갖 종류의 설화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민간 장르들은 노래와 전설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역사적 삶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어떤 것이 ‘전설적’이라고 하면 흔히 그것은 실제로 역사적인 진실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전설에는 20세기의 역사가가 요구하는 엄밀한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의 역사가에 의해 때로 무시되는 역사에 관한 그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체험된’ 역사, 즉 사건들의 내적 의미이다.

 

이스라엘 서사시의 형성

  구전전승의 단위들 가운데는 이스라엘에서 기원하지 않고 아마도 이스라엘인들이 점령한 가나안 성소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된 전승단위들을 그대로 빌려 왔던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야훼 신앙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므로써 알맞게 변형시켰다. 또 구전전승은 수많은 세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지파동맹은 세겜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거기서 여러 유형의 전승들을 가나안인들로부터 물려받고 변형시켜 자신들의 언약 신앙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야훼께서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자신들을 구원하여 불모의 사막을 은혜로 인도한 사건들에 관한 기억과 더불어 자기들 고유의 전승을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왕정 이전 시대에 구전전승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관심과 체험들이 각인된 한 묶음의 이야기들로 형성되고 있었다.

 

고대 서사시 설화의 범위

  첫째로, 모세 전승(출애굽, 시내산, 광야, 가나안 땅으로의 진입)이 야훼의 역사적 목적을 지니고 전개되는 드라마의 맥락 속에 놓여져 있다. 이 드라마는 3개의 막 또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A. 시원사(창2-11장). 자체의 구조와 완결성을 지니는 이 역사는 온 인류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범세계적인데, 창조로부터 혼돈(홍수), 홍수 이후의 새로운 시작으로 옮겨간다.

 

  B. 조상들의 역사(창12-50장). 자체의 구조와 역동성을 지니고 있는 이 역사는 민족을 ‘창건한’ 부조(선조)들의 가족 이야기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전사(역사이전)를 기술하고 있다.

 

  C. 백성들의 역사(출1장부터 여호수아서의 서장까지).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가나안 땅으로의 진입까지를 다루고 있는 모세 전승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역사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시원사(A)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체험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스라엘이 아닌 메소포타미아적 배경을 전제하고 있다. 조상들의 역사(B)는 본질적으로 가족사이다. 백성들의 역사(C)는 정치적인 부분과 연관된다.

  둘째로, 이 세 역사들은 이스라엘이 예배하는 하나님인 야훼에 대한 신앙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이주를 주도하고 각 조상들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야훼였다는 것,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 역사를 이끄는 분은 야훼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이야기의 점진적인 세련화

  지파동맹 시대에 출애굽과 시내산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서사시는 그 경계를 인류 역사의 시작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 속에 한 때 독립적으로 유포되었던 자료들을 채워넣음으로써 확대되기 시작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설화자들은 그들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과거를 재해석 하였는데, 심지어 이스라엘 역사의 범위를 넘어서는 시원사조차도 여기저기 당시의 상황에 맞게 꾸며졌다. 구전전승 시기에 출현한 이스라엘 서사시와 왕정 및 그 이후에 편찬된 문학 작품으로서의 서사시를 명확하게 구별하기는 불가능하다. 이미 살펴본 대로 후대에 다른 설화자들은 거룩한 유산을 자신들의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과업을 새롭게 떠맡았다. 최종 형태의 오경은 이 이야기가 수많은 세대들에 걸쳐 말해지고 또 말해진 오랜 전승 과정의 최종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서사시 설화의 개관

  어떻게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 전체 설화가 창조로부터 약속의 땅으로의 진입에까지 걸쳐있는 역사의 드라마에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온 이스라엘 서사시로 응집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A. 시원사

  오랫동안 시원사는 이스라엘의 부르심을 야훼의 우주적인 목적이라는 맥락 안에서 바라보고 창조를 구원의 이야기에 종속시키기를 원하였던 이른바 ‘야훼 문서 기자(J)'에 의해 조상들의 이야기와 출애굽 이야기 앞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시원사는 심지어 구전전승의 시대에서조차도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설화에 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수메르 시대에 통치했던 전설적인 왕 길가메쉬가 홍수의 영웅 우트나피쉬팀에게서 불멸의 비밀을 찾아내려고 한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길가메쉬 서사시는 성경의 홍수 이야기와 눈에 띌 정도로 비슷하다. 이 고대의 이야기와 성경 기사가 비슷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화자들이 민간전승을 자유롭게 빌려와 자기들의 신학의 관점에 맞게 변형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시원사에 관한 이야기들은 현대의 역사가나 과학자가 요구하는 종류의 사실적인 기사들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이 이야기들을 ’역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들이 역사의 의미의 깊이를 측량하고 역사의 여명기에 인간 존재에게 공통적이었던 근본적인 체험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낙원 이야기

  남자와 여자는 왜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는가? 사회는 왜 사람에게 옷을 입는 것을 요구하는가? 등의 의문들은 여전히 고대의 민간전승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대답되었다. 보다 큰 서사시 맥락에서 읽어보면, ‘실락원’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언약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과 관계를 맺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낙원 이야기는 이것을 이스라엘이나 셈족이 아니라, 사람들 또는 온 인류 역사의 의미로 묘사하고 있다. 낙원 이야기의 모든 의미들을 다 추적할 수는 없지만, 계속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는 인간의 반역,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독립을 주장하는 인간의 결정을 묘사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에 의하면 죄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의지의 행위이고, 하나님을 하나님되게 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결심이다. 이러한 인간의 도전 행위는 필연적으로 죄책감과 피할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 피하려는 헛된 수고, 잘못을 남이나 다른 것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시도, 산고와 고된 일이라는 곤경, 끝으로 하나님 동산의 원래의 아름다움과 조화로부터 쫓겨나는 것을 수반한다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

  이스라엘 서사시 설화에서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추방은 아담이 농경주의자가 되는 역사의 시작이다. 그 후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농경사회의 특징적인 갈등, 곧 농부와 목자 사이의 대립을 반영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동산에서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일들이 그릇되기 시작하였는지를 보여준다.

 

대홍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연례적인 범람이 있었던 메소포타미아 평원은 길가메쉬 서사시를 비롯한 여러 홍수 이야기들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서사시 설화에서 대홍수는 단순히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고대의 민간전승을 인간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심판이라는 이스라엘의 신앙의 근본적인 확신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설화자는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 야훼는 의미있고 일관된 방식으로 인간사에 역사하신다는 중심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그것은 야훼의 은혜이다. 대홍수라는 심판에도 야훼의 온유한 자비가 배어있다는 것이다.

 

문화의 유혹

  노아가 술취한 창세기 9장은 술에 취하고 성적으로 방종한 가나안의 농경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설화자는 바벨탑 전승의 시작부터가 앞의 내용과 일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옛 이야기를 시원사에 대한 적절한 절정임과 아울러 이 서사시 설화의 다음 주요한 단원으로의 이행으로 여기에 위치시켜 놓았다. 이 시원사는 비극적인 결말로 끝났다. 실패의 느낌이 들지만, 이 설화의 맥락에 있어서 시원사는 다음에 이어지는 것, 곧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그의 신앙의 모험에 대한 서장 역할을 한다.

 

 

 

B. 조상들의 역사

조상들의 역사(창세기12-50장)에 나오는 역사 이야기의 형태는 시원사와 마찬가지로 전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있는데 조상 시대의 전설들은 당시에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사건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다고 보고. 역사가들은 적어도 조상들의 역사와 고대 근동의 역사 사이의 어떤 상호관련을 설정하려는 노력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체로 사원사는 오직 그것이 인간 실존의 긴장과 갈등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섭의 드라마로서 인간 역사의 영욕을 해석하고 있다는 넓은 의미에서만 ‘역사적’ 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의 개요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가족사는 주로 아브라함, 야곱, 요셉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대한 약속 

조상들의 역사를 해석하는 열쇠는 그 처음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벨에서의 계획이 무산됨에 따라 산지방에 흩어진 사람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야훼는 한 사람을 골라내어 그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그 말씀은 창세기 12장 1~3.

:땅을 소유하는 것, 큰 민족을 이루는 것,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복이 되는 것 이 들어 있다. 그리고 야훼의 약속의 말씀들 을 보게 되면 아브라함의 이주는 새로운 종류의 역사, 곧 이스라엘 및 다른 민족들에게 유익들을 가져다줄 야훼의 약속들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었고, 특별히 과업을 위해 선택된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에 집중을 하게 됩니다.

 

축복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의 차원들 가운데 하나는 어느 정도 다른 민족들을 포함하는 축복의 차원이다. 축복의 약속의 측면들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 동사들을 어떻게 이해하야 하느냐 하는 문제(‘축복받다’라는 수동의 의미냐 아니면 ‘스스로를 축복하다’라는 재귀적 의미냐)로인하여 약간 모호하다 근데 아마도 여기서 의도되고 있는 의미는 다른 민족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거나 서로에게 ‘아브라함의 민족과 같이 우리를 축복하소서’라고 말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축복할’ 것으로 본다. 어째든 해석사에 있어서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할과 증언을 ‘통하여’ 즉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모든 민족들을 축복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졌다고 본다/

 

신앙의 시련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야훼께서 그들 앞에 설정해 놓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유랑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약속에 의지하여 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왜냐면 거듭거듭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상황들에 처하였기 때문이였다. 이러한 때에 야훼에 대한 그들의 신뢰는 심각한 시험에 놓여졌으며 그들은 정말의 벼랑 끝에 다다랐다.

 

앞으로 보겠지만 약속의 각각의 요소  -땅,자손,축복- 은 거의 박탈당하였다.

이러한 긴장감은 어떻게 야훼 께서 모든 것이 상실된 것 처럼 보이는 결정적인 바로 그 순간에 개입하여 약속을 새롭게 하셨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잠시 해소될 뿐이다. 이제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약속을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이 주제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야훼께서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을 새롭게 하고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탄과 회생제물로 바치는 모습과 이삭이 리브가를 만나는 것으로 인하여 다시한번 약속은 갱신되었다.

그리고 이삭의 아들 야곱은 절망에 빠져있을때 꿈에 나타나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삼중의 약속 , 곧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겠다는 것, 이스라엘을 크고 무수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것, 이스라엘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축복을 주겠다는 약속을 새롭게 한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 요셉. 하지만 요셉 이야기는 여러 가지 민간전승의 소재들로 수식되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소재들의 원천이 무엇이었든, 그것들은 장면장면마다 인간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목적이 은밀하게 실현되고 있음을 밝히는 단일한 줄거리를 예술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단편 속에 융해되었으며 이러한 견해는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한 관대한 말 속에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여기서 중요하게 볼 것은 요셉 이야기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즉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축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성취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의 역사   

조상들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들은 신앙의 백성의 내적 투쟁, 곧 하나님의 길이 감춰져 있는 것에 대한 당혹감, 하나님의 섭리보다는 인간의 계획을 더 의지하고자 하는 유혹 ,신앙의 변질과 불신앙을 반영하는 거울이며 또한 이것은 출애굽기에서 오경의 마지막까지에 걸쳐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시켰던 결정적인 사건들(출애굽과 시내산)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인간 체험의 현실들 즉 언약의 위반과 하나님의 용서로 인한 언약의 갱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상황에서 백성들의 한탄을 표현하는 광야에서의 불평 백성들이 강적을 만났을 때의 신앙의 시련들에 관한 묘사들을 밝견하게된다.

 

제 6 장   신앙과 문화 간의 투쟁.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부터 사울의 왕정시기가 도래하기까지 이스라엘의 동맹체제는 계속되는 투쟁의 연속과 혼란스러움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사사들이 지배하던 이시기는 농경생활에 적응기간 이었고, 가나안 안에서의 그들의 터전을 잡아야 했다. 또한 동맹체가 내외 세력들과의 갈등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 투쟁을 하였다. 이스라엘의 공세는 전쟁, 조약에 의해서 계속되었으며, 점차 가나안인을 이스라엘의 동맹관계로 흡수하려 했다. 이들의 더욱 중요한 갈등은 종교적 갈등인 이념의 갈등이었다.

 

가나안 문화의 유혹

 역사를 통해 보면 승리의 나라들이 정복을 당한 나라의 수준 높은 문화에 의해 지배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도 정복자가 피정복자의 문화에 의해 지배되었을까?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가나안 문화에 대한 이러한 깊은 반발심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뒤에도 오랫동안 일부 이스라엘인들에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이 태도에 못지않게 영향을 받은 것도 많다. 점차 가나안 문화에 매혹되어 그들의 생활 방식을 채택했다. 가나안의 문화 중심지였던 세겜에서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이 형성되었다. 그렇다면 가나안 문화의 유혹이 대단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의 모세의 설교처럼 가나안 문화의 유혹과 그 위험성이었다. 유랑민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땅에 묶인 농경 사회의 사람들로 된 것 이었다.

 

신명기적 해석

 신명기계 역사의 제2권인 사사기다. 가나안의 정복과 관련되 사사기 1:1-25의 서문과 사사기 17-21장의 부록은 이 시기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여호수아가 살아있었을 당시에는 해방과 계약의 위대한 경험들을 기억하고 있어서 야훼께 대한 신앙은 충실하였다.

 그러나 야훼를 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야훼를 알고, 야훼와의 계약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각 세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계약을 갱신하든지 파기하든지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 신앙이다. 역사는 정연한 질서를 따른다고 한다. 야훼께 순종하면 평화가 따르고, 순종하지 않으면 고난과 패배가 따른다는 것이다. 신명기의 구조는 사건들은 반항과 회복의 주기적인 반복으로 해석되어 있다. 역사에서의 한 백성의 몰락은 내부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큰 적은 가나안의 종교였다.

 

 종교와 농업

  가나안 인들의 종교와 농업을 알고자 해야 하는 이유는 사사시대의 투쟁의 성격을 알기위해서는 가나안의 종교를 알아야 한다. 가나안의 신중에 우주의 신들을 하나로 묶어 바알과 아스다롯 이라고 불리 우는 신이 있었다. 여기서 바알은 땅을 소유하고 풍작을 관장하는 남자 신을 가리킨다. 아스다롯이라는 개인의 이름이 사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안주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런 신들은 특별한 장소나 마을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가나안은 농업사회 였고 그들은 자연의 신비한 종교가 종교적인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그리고 땅의 결실은 바알과 그의 배우자와의성적인 결합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그리곤 제의적인 매음으로 남녀가 바알과 그의 배우자의 성행위를 모방함으로써 이 두 신으 아프가나스탄 풍작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고 입었다.

 

라스 샤므라 서사시

 가나안의 바알 종교의 형태는 비오간 초승달 지대 전체에 여러 행태로 퍼져 있었던 신화 제의 중 하나에 불과 했다. 예로써 바벨론에는 탐무즈제, 이집트에는 이시스제, 가나안에서는 바알제가 있었다. 이 종교들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서 공통적인 관심사를 나타내었고 모방을 한 것이 많아 유사한 점이 있다. 이 라스 샤므라는 문서는 1929년에 발견이 되었고 이 문서를 통하여 가나안의 종교가 지역적인 풍요의 신만을 믿는 바알과 아스다롯의 종교로 생각해왔었는데, 이 문헌이 발견됨에 따라 가나안 종교가 여러 관점에서 볼 때, 발달되고 세련된 종교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문헌에서 바알이 부활됨으로서 부각이 되고 있는데, 이 바알의 부활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풍요의 소생과 연관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농부의 생활은 이러한 자연의 변화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전에서의 바알신앙을 통하여 풍요와 번영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믿어 신과의 관계를 맺었다.

 

절충의 시도

 가나안의 종교는 농부들에게 실용적인 종교 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농부들은 바알제의를 부시할 수 없었다.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의 제의인 바알제사를 그들의 신앙에 적용시키려 하였다. 우선 야훼와 바알을 동시에 섬겼고, 가나안 종교의 신화와 제의를 야훼께 대한 예배에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풍요의 은혜를 베푸는 농경의 신인 바알을 이스라엘 인들도 무시 할 수 가 없었다.   이렇게 이들 민중에게는 이러한 혼합종교가 가나안에 들어올 때부터 어느정도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초승달 지대의 유사성 많은 종교들과는 달리 야훼신앙은 혼합주의를 바아들이지 않고 후대에 이르러 언약의 위반을 인식하고 야훼와 바알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물음을 갖는다. 이유는 야훼는 삶 전체의 주관자시고,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종교와 성

 어느 한 종교는 다른 종교의 도전을 받아야 그 본질과 잠재적인 림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야훼신앙과 바알신앙의 절충이 시도 되었지만, 절충이 될 수 없는 쟁점이 있었다. 이는 성에 대한 해석의 차이이다. 가나안의 신들은 자연의 영역을 다스리며 시들의 성적인 의식들을 통해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신을 지배하려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신앙은 역사적인 사건들에서 나타난다. 또한 바알과는 다르게 야훼는 유일성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족장의 사회여건상 야훼가 남성적으로 표현이 되어졌다. 가나안의 환경에 처음 접한 이스라엘인들은 농사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바알의식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위기의 지도자들

  지파의 정치적인 간섭도 받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가나안 침입은 고원 지대를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정적들은 가나안과 그 인근 지역에 국한되어 잇었는데, 요단 동편 지역의 신생국가들,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의 침입자들,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 블레셋이라고 알려진 새로운 민족이 고작이었다. 사사기에는 12명의 사사들이 어떻게허술하게 조직되어 있었던가를 또한 12명의 사사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다스렸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지나치게 단순화 되어져 있었다. 더불어 12지파 동맹은 공통된 신앙과 사회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사사의 역할

지파 동맹의 구조 내에서 이스라엘 사사의 역할을 살펴 보아야만 할 것인데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지도자의 역할은 군사적인 행동을 하거나, 법적인 문제를 판단함으로써 백성들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있었다. 사사는 주로 전사, 구조자, 지파의 중재자 역할을 했고 사사의 권위는 특정지파에만 적용 되는 것이 아닌 지파 동맹 전체에 미쳤다. 사사는 비세습적이고 야훼을 영을 받은 사람이명 누구나 사사가 되었다. 여기서의 야훼의 영은 하나님의 카리스마 또는 영적임 힘을 그들이 갖는 것이다. 또한, 배성들은 법적인 분쟁이 생겼을 경우에고 사사에게 해결을 요청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사기는 연대순으로 배열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듬어 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11세기와 12세기 동안의 상황과 위기를 알 수 있다.

 

 

므깃도(Megiddo) 전투 -BCE 1125

                가나안점령전투에서 요충지로서 많은 전투가 있었음(이스르엘Jezreel)

                상업적 전략적 요충지로서 - 이스라엘에게 많은 피해줌

                요한계시록 - 최후의 아마게돈 전쟁이 일어날 곳

                여사사 드보라가 6개 지파 소집 - 폭풍우로 인하여 기손강 범람으로 이스라엘승리

                시가 장문보다 더 정확하고 그때의 감정을 잘 전달한다 - 사사기 4장

                폭풍의 현존-야훼신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지파동맹은 - 자발적으로 야훼에게 헌신하는가? 가 가장중요한 핵심

 

다른 지역의 적들

                요단 동편의 신생왕국들이 싸움을 걸어옴

                애글론 왕 - 모압의 침입

                입다의 딸이 - 종교적인 서약으로 희생된것은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중의 하나

                미디안족 - 낙타를 타고 아라비아 사막을 건너옴 - 마을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한 이스라엘

                여룹바알- 기도온이 물리침

                기드온은 가나안 토착신 아세라를 헐고 - 야훼산당을 그 지역에 세움

                블레셋이 처들옴 - 에게해 - 지중해 - 해양민족의 하나- 철기를 능숙하게사용했다

                삼손이 불레셋을 상대로 싸움 - 가장 전설적인 이야기 - 사사기 초기에 등장

                                야훼의 능력을 개인적 치부에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줌

 

동맹체제의 쇠퇴

-tip 팔레스타인의 이름의 기원 - 블레셋(Philistines) - 페니키아의 후손들로 추정 - 빨간 자주빛

                지파동맹 - 주변과의 전쟁의 위협이 더해질 수록 힘이 없는 조직으로 전락

                이스라엘외 주변지역의 정치체제는 - 군주제,

 

세겜에서의 왕정제도 시도

                기드온의 지도력에 감복하여 그를 왕으로 세우려고 함

                기드온의 대답 - 야훼만이 당신들을 다스린다 - 거절

                기드온의 아들 아히멜렉 -(이방여인과 얻은 아들: 즉 이방문화에 익숙함, 바알브릿이방신전에서 정치자금을 가져옴) -세겜에서 왕이 되기를 원함- 다른 모든 기도온의 아들을 70명을 죽임 - 요담이 그리심산에 올라가 가시나무 우화를 이야기함

                               

실로의 멸망

                사사기로 - 사무엘 상 12장까지

                블레셋의 침공으로 사사시대 종결됨 - 왕정으로의 변화

                실로(하나님이 거하셨던 곳)에 두었던 언약궤의 빼앗김 -

 

이스라엘 최후의 사사

                사무엘 - 모세이후 최고의 정신적인 지도다 : 지파동맹에서 → 왕정으로 변환

                사울과의 만남(사울전승을 통하여-베냐민지파) - 왕으로 추대하다.

                하나님 반대 안함 - 사무엘도 자진하여 사울을 왕으로 선택

 

왕정의 요구 - 사무엘 전승을 통하여

                사울의 왕이 되는 것 - 하나님이 싫어함 

               

 

스라엘과 국가

                국가주의와 대립하는 이스라엘 / 농경 문화의 풍요신과 대립하는 이스라엘

                국가(왕)의 성립은 이스라엘의 정체성 공동체적 특징을 위협에 빠뜨림- 언약공동체

                이스라엘은 종교공동체였다.

                하나님 백성의 언약공동체(예언자들) + 국가주의(다윗, 솔로몬)

                왕정제도의 정점 - 다윗 솔로몬

                왕정 끝 - BCE 721 북 이스라엘 - 앗시리아에게 멸망// BCE 587 남 유다 바벨론에게 멸망

 

 

제7장 다윗의 왕좌

  철기 시대가 개막되면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갖게 되었다. 철기시대 초기 가나안에 들어온 블레셋 사람들은 금속을 제련하는 기술을 독점하며 세력을 키웠다. 블레셋 사람의 공격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지파동맹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러한 타격으로 이스라엘은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새로운 형태의 왕정 제도를 수립하고자 하는 자극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왕정 제도는 사울, 다윗, 솔로몬에 의해 정착되었다.

 

국제적 여건의 호전

  이 당시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정치적 상황은 이스라엘의 세력 확장에 유리하였다.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통일이 되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정치적인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무기력한 주변국의 상황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

  사무엘 상 13-31장의 사울의 통치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지파동맹 체제가 붕괴하고 새로운 체제가 수립되기까기 과도기를 살았던 영웅적인 지도자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무엘상권의 이야기는 남부 유다 왕국의 역사가들의 관점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유대 왕조의 창시자인 다윗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울에게 불리하게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울이 블레셋 사람으로부터 철제련술을 빼앗아 익히게 한 것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경제적인 발전의 길을 터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울의 통치 하에서 이스라엘 지파들 간에 일치와 조화가 가능했기에 사울의 업적도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울의 카리스마적인 영도력

  사울이 구체제인 지파동맹에 속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명확한 증거의 하나는 그가 하나님의 카리스마, 즉 ‘야훼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울은 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대 사사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사무엘과는 달리, 사울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심오한 통찰력은 부여받지 못했다.  하지만 전장에서 야훼께서 전쟁에 직접 참가하고 계시다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전세가 기울어지면 야훼의 비위를 거스를 만한 일이 있어났는가를 반성할 정도로 겸허하였다.

 

성전(Holy War)

  현대의 윤리 기준에 의하면, 전쟁 후 철저한 멸절은 야만적인 행위이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였다. 이런 시각으로 사울이 전쟁에서 전리품들을 취한 행동은 성전의 규정을 따르지 않고 자기 판단대로 했기 때문에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거절당한 인간

  사울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자기가 범한 행위의 결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울이 야훼로부터 멀어진 두가지 현상 중 하나는 지파 동맹의 최후의 대표자였던 사무엘과의 결별이었다. 사울이 제사장을 부르고도 전세가 급박해지자 직접 단을 세웠던 행동으로 예언자 사무엘과의 틈이 생겼다. 두 번째로는 다윗 때문이었다. 다윗의 행동들로 사울은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다윗이 더 크게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이로 인해 사울은 왕의 위신을 되찾으려 했지만 결국 길보아산에서 패하여 자살하게 된다.

 

다윗 -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자

  길보아산의 전투에서 블레셋 사람이 승리했지만,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를 재정비하여 블레셋 군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그 후 400년 이상 지속할 왕조를 세웠다. 다윗은 국가의 설립자이며 동시에 이스라엘 신앙의 승리자였다. 다윗 시대부터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은 중앙 집권화된 지도력으로 전환되었다.

 

다윗의 부상

  다윗은 자기의 정치적인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떠한 장애에도 굴하지 않았던 빈틈없는 정치가였다. 이로 37세의 나이에 전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통치할 동안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간섭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지파를 통일하고 실권을 잡게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침공해 왔다.

 

국가 권력의 강화

  다윗은 중앙 집권적인 세력을 차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처를 취했다. 여부스 족이 점령하고 있었던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인데, 이는 남, 북지파 모두를 지배하려는 정치적 야망의 실행이었다. 그리고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일단의 조신을 두어 왕실을 뒷받침하고 위엄을 갖추게 하였고, 이집트 정부 조직의 영향을 받아 관리직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빼앗겼던 언약궤를 되찾아와서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와서 종교의 중심지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다윗의 고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윗의 인기도 퇴색해 갔다. 백성들은 중앙집권에 반항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이 국가로 출범하기 이전에 누렸던 자주권을 갈망하게 되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유대에서 혁명을 일으켜 다윗의 왕좌를 무너뜨릴 뻔도 했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죄를 범하기도 했다. 다윗의 말년에는 아들들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음모와 배반을 일삼기도 했다.

 

이상적인 왕-

이스라엘의 역사가들은 다윗이 그 어느 왕보다 능력과 선을 갖춘 이상적인 왕이었다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야훼의 종’이며 “모든 백성에게 공의를 행한”왕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에서 보게 되면 워싱턴, 링컨, 리 장군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을 이상화 시켰듯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윗에 약점은 차츰 잊혀지고 그의 위대함이 다시 강조되기 시작했다.

 

메시야 - 왕실 문헌에서 사용되었던 마시야는 항상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이 땅의 왕국을

통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군주를 지칭한다.

 

솔로몬의 영화 

이스라엘의 어느 왕도 심지어 다윗까지도 솔로몬보다 더 세속적인 영화를 누리지 못하였다.

솔로몬의 거대한 토목 공사, 전설적인 부와 많은 후궁들, 활발한 교역, 발전된 군사력, 지혜와 예술에 대한 장려, 이 모든 것은 백성들뿐만 아니라 스바 여왕과 방문객들까지도 감탄해마지 않았다.

 

역사가의 편견

다윗의 조정실록은 왕위 계승 첫 번째 서열이었던 아도니야 대신에 솔로몬이 세력을 잡게된 음모가 기록되어 있는 왕상1-2장에 끝맺는다.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사울이나 다윗과 같이 카리스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순전히 신분과 지지자들의 정치적인 영향력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왕상3:3-15이 전설적인 이야기에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부와 명예보다는 백성을 판단 할수 있는 지혜를 구한다. 그러나 그의 행정의 실제적인 면을 보면 이러한 꿈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열의가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고 본다.그는 천성이 야심만만하고 이기적이었으므로 그의 화려한 예루살렘 궁전도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의 영광과 평판을 반영한 거울 궁전이었다.

 

성전 건축과 확장 계획   

오늘날의 대성당에 비교하면 평범하지만 그 당시로서는 대건축이었다. 다윗에 옛 도성인 시온에서 언약궤를 옮겨와서 정성스러운 의식을 거행하여 중앙 성소로 봉헌하였다.

그러나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모세 유산과 연결되는 것이지만 ,페니키아인이 설계한 성정은 가나안의 문화가 이스라엘의 생활과 신앙에까지  침투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스라엘 조상들의 신앙을 소중히 여겼던 이스라엘인이라면 솔로몬의 이같은 대담한 외국 문화 모방에 사는 데에는 여러 해가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본다.

 

불만을 품은 자들의 소요 

이집트의 바로들과 마찬가지로 솔로몬도 강제노역을 통해서 그의 계획을 밀고 나갔다.솔로몬의 강제노역 계획은 지극히 과중했다. 비록 그의 토목 공사에 정복민을 많이 이용했으나 , 자신의 백성에게도 과중한 노역을 부과 하였다, 이스라엘인 3만명을 뽑아 레바논의 노동 수용소에 보내 만명이 한달씩 번갈아가면서 일을 하도록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의 울분이 마침내 혁명으로 터지게 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반란의 지도자는 솔로몬이 부역 책임자로 임명했던 북쪽 지파의 하나인 에브라임 출신인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었다.

 

솔로몬의 관대함

솔로몬의 결점은 그의 망령 때문이라고 한다 솔로몬의 나이가 늙응ㄹ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라 라고 한다

솔로몬은 칠백명의 아내와 삼백명의 첩을 거느렸다고 나온다 그가 결혼을 많이 한 목적은 주변 나라들과 정치적 문화적으로 긴밀한 유대를 맺으려는 정략 결혼이었다.따라서 이집트의 바로의 딸과 결혼을 함으로써 신부의 지참금으로 게셀성을 선물로 받고 그 데려온 아내들의 종교를 섬기도록 허용하기 까지하며 수도안에서 그들의 신당까지 세워 준다.

 

이스라엘 신앙의 새로운 지평

근본적으로 지파동맹 시대의 관점으로부터 솔로몬 시대에 “세속적”인 것을 중시하는 관점으로 전환되었고 솔로몬 시대에 “개화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훼의 소박한 모습은 더 이상 만족감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새로운 신학에 의하면 야훼의 현존은 인간사의 과정에 감추어져 있고, 그안에서 야훼에 행위가 중요성을 갖는다.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서사시는 사사 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수세기동안 이스라엘의 구전 전승은 다양한 지파의 성소들, 특별히 중앙성소인 실로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야훼 문서기자 시대의 이러한 역사적인 관점을 이해할수 있다.

다윗과 솔로몬시대에 이스라엘은 족장 시대의 사고로부터 벗어나서 더 넓은 세계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이스라엘 신앙의 독측한 신앙이 새로운 세계주의 물결 속에 휩쓸리는 위험한 시기에 , 모세 전승을 재해석 하여 이스라엘이 역사의 더 넓은 세계에서특별한 과업을 완수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야훼 문서기작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관점은 수세기동안 지속되었으며 열방에 대하여 빛이 되리라고선언 하고 있다.

 

 

제 8 장

예언으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들

 

 이 장에서는 솔로몬이 죽은 후 일어난 격동의 사건들을 배경으로 발생한 예언 운동을 살펴 보고자 한다. 먼저 예언자의 역할 중 당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입 속에 넣어질 것이라는 야속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들로 인식 되어 졌다.

 이처럼 예언자들의 권세는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이들이 예언을 할 때에는 먼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 발을 들여 놓은 가까운 장래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것은 현재의 절박성을 강화 시키고, 현재에 관심을 갖게 된다. 곧 예언자들의 임무는 ‘지금’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바로 ‘오늘’ 응답하도록 촉구하는 것이었다.

 

예언의 배경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그의 지명을 확증한다는 것을 보여줄 여러 “징표들”을 열거하였고 사울을 블레셋인들의 진지 부근에 있는 “하나님의 언덕”으로 보낸 것이었다.

 

탈혼상태

 이 장에서의 ‘예언’은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탈혼 상태에서 예언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여기서의 탈혼은 하나님의 의지의 도구로 삼는 야훼의 영에 의해 일어난다. 사울이나 상무엘상의 이스라엘 장조들에게도 일어났던 것이 그 한 예이다.

 이스라엘은 처음에 가나안에서 바알 종교와 결부되어 있었던 탈혼 상태의 예언에 접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가나안의 예언자와 이스라엘의 예언자의 차이점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는 언약의 약속들과 요구들을 해석한 야훼의 대변자였다는 것이다.

 

제의 예언자들

 제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소들과 좀 더 신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예언자들도 있었다. 이 예언자들은 공동으로 직무에 종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들은 중보기도의 전문가로 중보기도를 하고 또한 야훼의 대변자로서 특정한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전해주거나 봉헌물이 하나님께 열납 되었는지의 여부를 알려주었다. 이들의 영향력은 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시편에 나오는 몇몇 시들은 이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맡았던 역할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언자들과 정치

 예언은 이스라엘에 등장한 바로 그 순간부터 정치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예언자들은 성전의 열렬한 수호자 이상이었고, 사울시대에 예언자의 열심히 부터 나온 힘에 의해 불이 붙은 야훼에 대한 생존 투쟁에서 이스라엘을 단결하게 하고 힘을 북돋워 주는 구심점이었다. 그러나 엘리야와 같은 몇몇 예언자들은 권력 구조 바깥에 섰고 따라서 왕의 대적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예언자들은 사회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자들로서 급속하고 혁명적인 사회 변혁을 주창하였다.

 

사가의 시대관

  정치 영역에서 예언자들의 활동에 대하여 지금까지 말해온 것에 비추어 볼 때 솔로몬이 죽은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열왕기 상하는 이스라엘 사회를 줍ㄴ 민족들의 부패한 관습들로부저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신명기 사가들은 예배를 예루살렘으로 집중시키고 혼합주의와 우상숭배가 번성했던 그밨의 성소들을 폐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왕국의 와들과 남왕국의 와들은 언ㅇ약의 순종이라는 이러한 신명기 사가의 기중에 따라 엄격하게 판단되고 있다. 신명기 사가들은 왕실 서고의 시록 문서들을 참도하라고 독자들에게 참조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다윗왕국이 몰락한 이래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역가 안에서 하나님이 활동하시면서 악한 생위들을 버리고 돌아오도록 예언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불충실한 행위를 되풀이하자 이에 대해 벌을 내리신 것임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이 신명기 사가들은 다른 사료들로부터 이야기와 전승들을 빌려와서 자신의 이러한 골격에 살과 피를 갖다 붙였음을 알 수 있다.  

 

 분열된 왕국

  열왕기 상 12장에서부터 시작된다. 르호보암은 세겜에서 그들의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였다. 하지만, 솔로몬의 채찍에 맞아가며 강제 노동에 시달린 백성들은 르호보암이 젊은이들의 조언에 휩쓸려 예루살렘으로 도망하게 된다.

 

여로보암 1세

 혁명의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을 때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1세는 왕국을 전복시키기 위한 음모에 가담하였다. 여로보암은 솔로몬 시대에 강제노동은 감독한 감독관이었다. 하지만,솔로몬은 반란의 분위기를 초기에 진압하였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이집트로 도망하여 시삭의 보호를 받았다. 솔로몬이 죽은 후에 여로보암은 돌아왔고, 북부 지파들의 왕으로 선출되고, 이름을 이스라엘로 구별하였다. 이집트의 시삭으로는 이집트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누렸던 옛 영광과 세력을 되찾기 위해 다윗 시대 및 솔로몬시대의 거의 말기까지 어쩔 수 없이 지켜오던 굴종의 외교저액을 바꿔서 팔레스타인 내정에 호전적으로 간접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여로보암을 보내 반한운동을 주도케 한 뒤 팔레스타인을 침공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여로보암의 계획

 여로보암은 르호보암이 이집트의 침공에 대비하느라고 눈코뜰새 없었을 때,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국을 강화시킬 수 있는 여러 조치들을 취했다. 브누엘을 요새화 시겼다. 또한, 백성들을 단결시키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먼저 유대에서 거행된 절기와 비경될 수 있는 연례의 가을 축제를 제정하였다. 특히 예루살렘과는 달리 성소들에 금송아지를 설치한 행위에 치를 떨었다.

 최근에는 여로보암 옹호자들은 이 행위가 야훼가 어린 황소 뒤에 눈에 보이지 않게 서 있다고 생각했던 북부 이스라엘의 고대 전승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라 한다. 더불어 여로보암은 새로운 신들에 대한 예배를 도입할 생각은 추호도 엇었으며 그의 의도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헌신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었다.

 

오므리가의 부흥

                신명기사가의 핵심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왕 - 복을 받고 - 성군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왕 - 벌을 받고 - 폭군

BCE 900-850 남, 북이 분열된후 50년 동안 - 내전이 이어짐

                이스라엘과 전통적으로 위협관계에 있는 시리아의 위협(야곱과 라반의 이야기)

 

시리아의 침공

                아사는 종교개혁에 관심(BCE 913-873) - 유다왕 - 신명기사가 칭찬

                                정치적인 문제 해결위해 시라아왕 벤하닷과 협공하여 이스라엘 침공

                이스라엘 혼란을 틈타 군사령관 오므리가 쿠데타에 성공하여 왕정에 올라섬

                                신명기 사가 - ‘더 악한 왕’ - 그러나 정치적으로 대단한 왕 -

                                정치안정, 경제적 부흥- 사마리아 성을 건설

                                오므리는 모압 전쟁에서 승리 복속함

                                오므리의 아들 - 아합과 페니카의 왕의 딸 이세벨의 결혼

 

앗시라의 위협

                앗시리아의 융성 - 초승달 비옥한 지대를 점령하려는 전투가 자자 지고, 팔레스틴에 대한 지배력이 커짐

                이스라엘과 유다가 위협에 처하자 - 모세와 사무엘이 전통을 잇는 예언자들이 등장함

                오므리 왕조시대에 활약한 뛰어난 3명의 에브라힘의 예언자 - 미가야, 엘리야, 엘리사

 

400명에 대항한 예언자 -  미가야 선지자 - 이블라의 아들

                예언자의 무리 -

                이스라엘의 아합과 유다의 여호사밧이 앗시리아를 막아내기 위해 연합군을 편성할 것인지 질문

                탈혼상태에서 - 400명의 승전하니 출전하라 - 단 한사람 청하지 않은 사람 - 미가야

                이제 더 이상 예언자가 정치적 시녀집단이 아니다

                직업예언자들과의 단절을 가져왔다 - 소명

 

9세기 예언자 - 디셉 사람 엘리야 ↔ 이세벨 - 페니키아출신

                엘리야 가 산당을 차림 - 벧엘의 황소를 규탄하지 않음 - 신명기 사가와 다른 견해를 가짐

                엘리야의 이야기는 사실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어려움의 시간에 야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말하려함

                사마리아 건축 - 신부 이세벨을 맞아들이기 위한 - 바알제단, 아세라 신상 이스라엘에 가져 오고 부흥시키고, 야훼의 예언자들과 대립하고 위협하고, 신앙을 흔듬

                아합의 종교정책 - 관용주의 , 외교정책 - 평화주의

 

갈멜산의 대결

                엘리야의 첫 번째 대결 - 특이한 행동의 엘리야

                신들의 싸움 - 엘리야 가뭄 선포 - 왜 - 바알은 풍요의 신

                야훼께서 땅의 다산 까지도 관장한다.

                야훼는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 야훼는 나의 하나님이다. - 모세전통

                장작더미와 제물 위에 물을 붇고 하늘의 불이 내림 - 하나님의 현현 임재

 

호렙산으로의 도망

                갈멜산 대결이후에도 현실정치에서는 이세벨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

                호렙으로 도망하는 엘리야 - 모세가 만난 하나님을 다시금 만남

                지진, 바람, 불 - 야훼 임재의 공통현상

                그러나 침묵속에 나타 나신 하나님

                                1) 정치적 혁명 2) 엘리사를 세우라

 

나봇의 포도원 사건

                아합의 궁정을 넗히기 위해 정당한 값을 주고 나봇의 포도원을 매수

                나봇의 사유재산 아니다. - 지파의 재산 - 땅의 진정한 소유주는 하나님

                왕과 예언자의 대결 양상 - 다윗과 나단의 대결처럼

                왕도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 -

                엘리야에서 되살아난 야훼 신앙은 문화의 악을 제거하고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힘

 

엘리사와 오므리 왕조의 말기

                경이로운 민담 전승의 발견 - 겉옷으로 요단 치자 갈라지는 이야기, 수넴여인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 모압군을 속인 이야기, 물에 빠진 도끼를 찾은 이야기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갈등을 주원인으로 본다 - 나아만 장군의 나병 고친 이야기

 

 

제 9 장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오늘날 우리는 관용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타 종교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방 종교와의 타협적인 자세에 공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당시의 관용적인 혼합주의를 공격하였고 야훼께 대한 열렬한 헌신을 역설하였다. 이 에서는 오므리 광조 대음의 예후 왕조 시대의 이스라엘을 살펴보고자 한다.

 

예후의 혁명

 다윗 시대E부터 멸망할 때까지 단일 왕조를 지켰던 남부 유다 왕국의 안정된 정세에 비해, 북 이스라엘 왕국은 많은 정변으로 얼룩져 있다. 이는 두 왕국의 ‘이데올로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유다 왕국은 다윗의 보조를 든든히 해주겠다고 언약하셨다는 견해 때문이다. 북 왕국은 심정이 불안하고 지파 동맹의 ‘민주주의적인’ 이상이 지속적으로 투구되었기 때문이다.

 군사령관 예후는 반란군의 세력을 등에 업고 나팔소리를 울리며 왕으로 선포 되었다. 예후의 왕위를 찬탈하고 난 뒤에 벌인 숙청작업은 철저하고도 무자비 했다. 왕을 죽이는 것에 멈추지 않고, 유다왕의 아하시야와 그의 형제들도 죽이고, 이세벨과 아합의 아들들 70명을 학살하였다.

 

외교정책의 문제

 북 왕국에서 혁명의 불길이 가라앉자 예후는 그가 처리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정치적 문제들에 직면하였다. 이때 시리아 왕 하사엘은 재빨리 이러한 상황을 노려 요단 동편 지방을 거쳐 쳐들어왔다. 그러자 예후는 앗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바치고 앗시리아의 시리아 진격으로 시리아의 위협에서 벗어나며, 그로인해 전세가 역전 되어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이스라엘의 요아스는 이전에 전쟁으로 시리아에게 빼앗겼던 성읍들을 되찾았다.

 

여로보암 2세 시대

 여로보암 2세 때는 북 왕국을 북쪽으로 하맛과 시리아의 세력권까지 넓혔고 남쪽으로는 유다까지 잠식하였다. 그리고 남쪽에는 웃시아는 군대를 증강시키고 현대화하여 요단 양편 지역에 대한 정복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래서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 시대에 쌍둥이 왕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에 이르기까지 과거 솔로몬 제국이 차지했던 거의 전 영토를 지배하였다.

 

번영의 시대

 여로보암 2세의 오랜 통치에 대해 신명기 사가는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우리는 아모스서, 호세아서와 아울러 고고학의 발굴을 통해 이 시대의 물질적 풍요를 생생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여로보암 2세 세대에 페니키아인들의 교역과 식민 활동은 지중해 세계에서 전성기를 맞이했고, 이스라엘도 상품과 용역의 교환을 통해 이득을 취했다. 또한 요단 동편을 장악함으로서 시리아의 교역로와 아라비아의 대상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마리아는 부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문제점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으며 흉악한 범죄들이 만연되어 있었다. 호세아서는 민간 종교에서도 생생하게 묘사 되어 있는데, 그중 농업에 축복을 준다고 생각되었던 가나안 폭동신의 지방 신들인 바알들을 숭배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번영을 누린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백성을 호되게 꾸짖었다.

 

북부의 모세 전승

 백성들이 거의 잊고 있었던 과거의 사건들과 야훼의 전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토대가 되었던 확신들으 청중들에게 상기시키려는 것이었다. 엘로힘 문서 기자 설화로 표현되엇다고 많으 sgkr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솔로몬 시대에 이른바 야훼문서기자가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색을 가미하여 편찬하였듯이 북부에서도 특색 있게 편찬되었던 것이다.

 에브라임 판과 유다 판의 서로 다른 문학적 신학적 특징들이 무엇이든 이 두 전승은 쌍둥이 왕국인 이스라엘과 유다를 야훼 예배라는 공통의 유산 속에서 결속시키고 있는 근본적인 확신들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하고 있다.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라는 이름을 지닌 예언서는 “야훼의 말씀”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모스에 대에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아모스에는 아모스의 출신 배경으로 유다 출신으로서 목자임을 나타낸다. 당시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열은 주로 정치적인 것으로서 이 두 나라는 실제로 공통의 종교적 전승을 지닌 ‘하나의’ 언약 백성으로서 결속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모스는 일개의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야훼의 신의 거역할 수 없는 권능으로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위탁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업을 그만두게 되었다.

 아모스는 신탁이 기록된 형태로 알려진 최초의 특출한 예언자이며 그의 메시지는 주로 북 왕국을 향한 것이었지만 그가 남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쌍둥이 왕국인 유다도 염두해 두었다.

 

열방에 대한 야훼의 주권

 우리는 다시의 정치적 상황을 기억하여야 한다. 앗시리아의 왕위 찬탈자 디글랏빌레셀3세는 주변국들을 정복해 버렸다. 이때 예언자로서의 아모스는 야훼께서 과거 이스라엘역사 속에서 행하셨던 바와 같이 지금도 행하고 계시는 이러한 불길한 사건들을 해석하며, 야훼께서 열방가운데 활동하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여기서 아모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주변국들에게 저주를 선포한다. 아모스가 야훼의 보편적인 주원을 천명하고 있다는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이 예언자가 뿌리박고 있는 언약 전승을 알 수 있게 된다.

 

언약의 약속들과 위협들

 아모스는 야훼의 행위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늬 공동체ㅡ 종교적 충성의 유대로 함께 결속된 “온 족속”이 되었는데 이를 이끈 사건은 출애굽을 회상하는 것이었다. 이출애굽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었으을 말하는 것이 었다.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공식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와 야훼의 백성 이스라엘’은 바로 언약 신앙의 핵심이다. 이런 언약 양식은 야훼의 축복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부에서 보존된 모세 전승에 의하면 언약은 미래에 대하여 무조선적인 보장을 주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부르심은 이스라엘에게 특권이 아니라 좀더 큰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체계적인 신학자가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백성들이 꼭 들을 필요가 있는 말을 전하는 예언자 였는데, 이러한 역사적 체험들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또 하나남이 어떤 생활 양식을 요구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어느 민족 보다도 더 중대한 심판을 받아야 했다.

 

멸망의 위협

 아모스는 멸망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 멸망은 다 섯가지의 이상에 나타나는데, 첫 번째 이상에 왕이 처음으로 목초를 벤 후에 세금으로 거두어 들인 것을 메뚜기떼가 나타나 곡물들을 먹어치우는 광경을보았고 두 번째 는 관개수가 모두 마르고 땅을 불태우는 불을 보았다. 이쯤까지도 중보기도를 하며 소망이 있음을 보았지만 나머지 세 이상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다림줄, 여름철과일을 담은 바구니, 성전의 예배자를 멸하는 이상들은 피할 구석 없는 야훼의 심판을 나타낸다. 아모스의 메세지는 오로지 이스라엘이 겉으로는 건강한 듯이 보이지만 속으로는 암이 번지고 있다는 확신에 의거 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의 백성 임에도 사회적 범죄들과 야훼백성으로서의 소명에 충실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361 질병의 징후들 - 조성배목사

                아모스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의가 이방적인 사과와 관습들로 너무도 많이 오염되어 있어서 백성들이 야훼에 대한 참된 예배와 야훼의  윤리적 요구들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제의를 정화할 것을 요구

 

회개의 초구

                회개: 생명의 근원인 분께 돌아오는 것

                아모스 설교의 목적 백성들의 생활을 개혁하고 재정립하라

 

호세아의 예언

                앗시리아 13세기 비옥한초승달지대에 관심을 가짐 -

                여로보암 시대 말기 주전 746 디글라빌레세이 앗시리아의 왕이 됨

                므나헴 앗시리아에 조공을 바쳐 잠시동안 평안을 유지함

 

호세아의 은혜 낙관론 - 호세아서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예언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 선지자

               

 

호세아의 결혼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비유

                전기적 자료가 아니다.  - 이스라엘과 야훼의 관계를 결혼 상징으로 표현

                1-3장에 고멜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3장은 다른 여인인가?

                첫아들 -이스르엘 - 예후가 무자비한 숙청을 했던 골짜기 - 예후의 비참한 최후

                딸 - 긍휼을 얻지 못한자 - 야훼인내의 한계

                막내아들 - 내 백성이 아니다. -

                충실하지 못했던 아내 - 어머니 - 즉 이스라엘

 

                3장에 호세아는 그녀의 몸 값을 지불하고 그녀를 데려옴

                야훼와 이스라엘의 결혼 - 관계를 유비로 풀어냄

 

깨언진 언약

                과거를 이해한 선지자 - 모세시대를 잘 알음

                출애급- 광야생활-호렙산 언약- 가나안 정복-

                호세아는 모세의 계승자/ 해석자/ 중보자/ - 엘로힘전승과 - 북왕국 출신

                첫 번째 - 아내와 남편의 유비를 들고 나온 선지자

                이방종교는 - 결혼의 유비를 - 자연의 주기로 설명 그러나 호세아는 역사적 시냇산언약에 기초하여 설명하였음 - 사회의 부도덕/ 정치적인 혼란/ 종교적 형식주의가 나타남

                왜 이스라엘은 결혼을 파기했나? - 왜 영적매춘을 - 왕정의 결과였다.

                왕정자체가 - 하나님을 버린 행위였다. - 인간을 더 의지했기 때문에, 군사를 의지했기 때문에

                그래서 왕권을 차지하기위한 - 북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정변(쿠데타)

                주변 정치 체제에 대한 두려움 - 앗시리아 - 늘 비유를 맞추어야 함

                성전에 가득 매운 사람들이 원하는 것 - 안정, 번영, 복지, 조화 - 하나님 없는

                제사장들은 - 매춘하는 이스라엘을 위한 제사를 주관하고 있었다 - 종교의 번영

                견실함고 충성 - 헤세드hesed- 이 결여된 사랑

 

내적인 결함

                호세아 6:6 “나는 인애(hesed 견실함과 충성)1)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언약관계의 본질 - 지식을 알기를 원했노라 - 종주권 계약의 형식- 호세아 13:4-5

                부모와 자식관계에서 행하여지는 관계적 본질

                성소들의 언약축제때 행하여 지는 본질 - 언약전승이다 - 여호수아 24장 세겜언약

                전인적으로 응답하라 - 그렇지 않으면 언약은 깨어진다 - 아내(이스라엘) 신뢰없음

                가나안의 문화에 빠져서 사랑을 저버리고 매춘행위로 얼룩졌던 이스라엘

                민간신앙에서는 바알과 야훼를 동시에 섬기기 시작했었다 - 가나안 초기 정착시기부터

 

사랑의 승리

                아모스와 마찬가지로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다고 예언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은  - 임박한 재난은 이스라엘 백성의 행동의 결과이다.  -자멸적인 외교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다. - 인간사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책임으로 이루어짐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 인간에게는 구원이다. - 하나님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치유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위한 선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파괴적이지 않고 새생명과 새언약을 주신다.

 

부모의 훈육

                심판과 자비의 양면성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은 이스라엘에 대한 Pathos 였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하나님의 자애롭게 내민 손의 그림자이다

 

언약의 갱신

                이스라엘도 고멜과 같이 일정기간의  훈육과 격리가 필요하다. - 광야로 가자 - 모든 유혹을 끊어내는 곳으로 가자- 절대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광야로 가자

                광야는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새 이스라엘이 시작되는 곳이다.

 

사마리아의 멸망

                은혜의 낙관론

                727 앗시리아와 디글랏빌레셀이 죽음 → 이스라엘의 반기→ 이집트쪽으로 기우는 정치 - 앗시리아 살마에셀 5세 사마리아 침략 → BCE 721 사르곤 2세 사마리아 정복

                2만 7천90명 이스라엘 사람 바사 지방으로 데리고 감  

 

제10장 죽음과 언약한 유다

 

통일왕국이 분열된 이후 이스라엘 왕국은 예언운동만이 아니라 정치에서도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물론 때때로 이스라엘이 내정문제나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을 때에 유다는 이스라엘과 대등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유다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북부나라에 압도되었다.

 

웃시야 시대

  북왕국의 사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불균형이 심했던 반면에 유다는 상당한 정도의 경제적,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유다는 웃시야 시대에 경제적으로나 군사력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웃시야 시대에 유다인들에게 유일하게 골치 아픈 문제는 주전 750년경 그들이 사랑하는 웃시야 왕이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급속히 쇠퇴하자, 유다는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버금가는 국력과 영향력을 자랑하는 위치로 올라섰다. 디글랏빌레셀 3세가 앗시리아의 권력을 잡자 비옥한 초승달 지대 전체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 이사야는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사야서

  현재 66장의 이사야서는 모두 이사야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 상당량의 자료가 예언자의 제자들이나 해석자들로부터 나왔다. 예전에는 예언의 내용을 보존하기 위해 스승의 말씀을 충실히 기억하고 후손을 위하여 전승을 기록한 제자들의 무리 가운데 그 예언의 말씀을 보존하였다. 이사야는 충실한 예언자 공동체에게 자신의 신탁들을 보존하도록 맡겼다. 거기에서 이사야의 신탁들은 소중히 보존되었고 이사야의 나중의 가르침에 비추어 개정되었으며 이사야가 죽고난 뒤에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전해져서 전승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사야서에서의 내용의 단절

  40-66장은 주전 8세기에 예루살렘에서 예언사역을 하였던 이사야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제1이사야’, 즉 예루살렘의 이사야의 저작과 함께 같은 두루마리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이름을 붙여졌다.

 

이사야의 초기 사역

  이사야는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도성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야훼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다윗의 왕실이 있는 곳이며, 많은 거룩한 기억들로 신성시되던 도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출애굽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성스러운 역사의 주제들에 관한 전승들에 대하여 침묵하였다.

 

야훼의 왕되심

  이사야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에 관한 기사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동기와 의도를 제공해준 예배 체험을 보여준다. 이사야는 솔로몬 성전에서 이상을 보았는데 야훼께서 드높은 하늘 보좌에 앉아 있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라는 노래소리가 그 궁정에서 울려퍼지는 이상을 보았다. 이 대 예배자들은 야훼께서 위엄있게 의관을 차려입고 ‘지극히 거룩한 곳’에 올라 백성들의 운명을 판단하고 중재하는 자로서 모든 피조물 위에 등극하는 모습을 찬양으로 노래하였다.

 

하늘 회의에 참석한 예언자

  이사야의 이상은 예루살렘 성전이 대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라는 고대의 견해, 즉 하늘 성전을 지상에 복제해 놓은 것이라는 견해를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백성들로 하여금 야훼가 참으로 시온산에 임재해 계심과 아울러 높은 곳의 보좌에 앉아계신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하였다. 이 이야기는 예언자가 솔로몬 성전의 전정으로 들어가서 하늘 군대가 왕을 호위하고 있는 야훼의 하늘 보좌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왕의 사자로 부르심을 받음

  예언자의 첫 번째 반응은 자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부르짖는 것이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기 전에 먼저 정화된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야훼의 날

  야훼의 날은 빛이 아니라 인간의 오만과 자만의 모든 상징들, 금, 은, 병거, 요새화된 도시 등에 대한 심판의 날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명의 보화들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떠받들어질 때 백성들은 그것을 의지하게 되고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백성들이 섬기던 우상들이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져버릴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야훼의 목적은 단지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왕을 섬기기에 적합한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시리아-이스라엘 동맹

  당시 서부의 군소국가들 사이에는 앗시리아의 진격을 저지하려는 음모가 진행중에 있었다. 서부의 군소국가들은 자기들의 힘을 모아 일시적으로나마 앗시리아군을 대적하려 짧은 기간이나마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정치적인 동맹관계를 맺게 된다.

 

임마누엘의 표적

  유다 역사상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왕이 된 아하스는 선지자 이사야의 ‘야훼를 의뢰하여 삼가며 종용하라’는 말을 믿지 않는데, 이 때 이사야가 그에게 나타나 표적을 보여주는 것이 임마누엘 표적이다. 이것은 임마누엘이라 불릴 아기의 탄생이었다. 예언자는 가까운 미래에 한 아기가 태어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보증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자라게 될 것을 가리킨 것이다.

 

다윗의 합법적 상속인

  이사야는 9:1-7절에서 기이한 아기가 다윗의 왕좌에 앉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처음에 임마누엘이라는 아기는 커다란 재앙의 시기에 살게 되고, 자기 백성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파괴되어 황폐하게 된 땅에서 백성들과 같이 살 것이라 이야기 한다. 야훼의 목적은 어두운 날이 아니라 백성들 가운데 남은 자들을 정련하고 정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일단 앗시리아의 멍에에서 푸렬나면, 이 아기는 백성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왕좌에 오를 것이다.

 

 

제11장 모세 율법의 재발견

  삶의 토대들이 심하게 흔들리는 불안정한 시대 사람들은 흔히 삶에 대한 전망을 되찾기 위하여 과거를 돌이켜보고 좋았던 시절을 동경하게 된다. 주전 7세기 유다 왕국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유다에서는 과거에 대한 관심과 향수가 부활하였다.

 

언약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

  유다 왕국에서는 북부의 모세 전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신학이 발달하였다. 이 신학에 의하면 야훼께서는 엄숙한 맹세로써 인봉된 절대적인 언약을 다윗과 맺어 다윗 왕조를 영원히 보존하고 이사야가 말했듯이 ‘내 종 다윗을 위하여’ 다윗 왕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한다. 주전 7세기 동안에 유다에서 일어난 가장 중대한 발전은 ‘모세의 재발견’이었다. 이에 대한 기념비적 문학작품은 신명기였다.

 

유다의 악한 므낫세

  신명기 사가는 므낫세를 다윗 계열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묘사한다. 그는 히스기야 아래에서 추진되었던 종교개혁을 뒤엎고, 백성들로 하여금 이웃 나라들보다 더 많은 악을 자행하도록 꾀었다. 주전 6세기 초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난 뒤 글을 쓴 후대 사가들은 야훼로 하여금 유다를 심판하게 만든 장본인이 므낫세였다고 주장하였다.

 

신명기 역사서

어떤 학자들은 신명기 역사서가 두가지 판본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하나는 왕정 말기에 편찬되어 요시야 왕을 중심으로 한 민족의 부흥에 대한 소망을 표현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요시야 시대의 밝은 기대들이 허망하게 지나가 버린 포로기의 사람들에 맞게’ 개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다의 암흑시대

  열왕기하 21장은 앗시리아에 대한 예속이 가져온 종교적 사회적 결과들을 반영하고 있는 므낫세의 내정을 부각시키고 있다. 므낫세는 야훼 신앙과 바알의 자연종교를 혼합시키려는 계획을 후원했고, 메소포타미아의 성신숭배 도입과 부정한 이교적 의식들로부터 정화시키려고 했던 중앙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에까지 이교적 관습들이 들어오게 하였다. 열왕기 사가는 므낫세 시대를 왕실에서 이교를 후원하고 전파하였던 아합과 이세벨의 시대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아합시대와 므낫세 시대에는 하나의 큰 차이가 있었는데 므낫세 시대에는 백성들이 모세 전승으로부터 빗나가고 있다고 담대하게 백성들을 책망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질투하시는 언약의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새롭게 하라고 촉구하는 엘리야 같은 예언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사가가 히스기야와 요시야 같은 개혁적인 왕들과 비교하여 므낫세의 악정을 강조하기 위해 므낫세 시대의 관한 기사를 과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므낫세가 야훼를 버림으로써 유다는 암흑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익명의 야훼 숭배자들

  므낫세가 죽은 뒤 몇 년이 되지 않아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고대의 모세 신앙을 버린 것에 항거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서약들을 충실하게 지켜 온 레갑인2)들을 칭찬하였다. 과거의 종교적 전승들을 보존하고 전해온 예언자들과 제사장들, 특히 성읍과 농촌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레위인으로 알려진 제사장들의 가르침과 설교를 통해 민족주의의 불꽃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예언의 새로운 흥륭

  그러나 신명기 사가의 눈에 끔찍하게 보였던 므낫세 시대는 완전한 쇠퇴의 시대는 아니었다. 유다 백성들의 삶의 깊은 곳에서는 예언자들의 열정이 살아 숨쉬고 있었고, 또 백성들은 모세 유산의 의미를 재발견하기 위하여 과거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익명의 단체들 속에서 주전 7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 동안에 유다에서 일어난 민족적 종교적 부흥의 길은 예비되고 있었다.  

 

 아슈르바나팔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언자의 오랜 침묵이 유다의 배교와 타락을 소리높여 규탄한 두 예언자에 의해 깨어졌는데 스바냐와 예레미야였다.

 

예언자 스바냐

  스바냐의 예언의 중심 주제는 아모스 이사야가 외쳤던, 분노와 환난과 고통의 어두움의 날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자만자족의 분위기를 날카롭게 꿰뚫었다. 백성들에게 아직 회개할 기회가 있을 때 결단하라고 촉구 하였고, 이교의 관습들을 규탄했다. 스바냐의 임무는 세계적인 위기를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파괴가 아니라 백성들을 정화시키고 갱신시키는 것이었다.

 

예언자 예레미야

  스무살도 안 된 젊었을 때 부르심을 받은 예레미야. 불길한 국제적인 사건들로 불안한 시대였지만 민족의 해방이라는 소망으로 충만해 있을 때 야훼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

 

파괴하고 재건하는 힘

  예레미야의 생의 의미는 야훼의 세계 통치에서 정치적 임무를 위해 성별되어 열방에 대한 예언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를 만드는 야훼의 말씀의 종, 파괴하고 재건하는(렘1:9-10) 힘으로 충만한 말씀의 종이 되어야 했다.

 

에레미야의 초기 설교

  예레미야가 부르심을 받고 난 뒤부터 신명기적 개혁이 있기 전까지 선포된 예레미야의 메시지의 내용은(렘2:1-4:4)은 일련의 신탁들로 표현되어 있다. 예레미야는 ‘언약 소송’의 형식을 사용하여 야훼의 소송 대리인 역할을 한다. 법정이 열리자 야훼는 논고를 한다. 그리고 이 주제를 다듬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남편을 버리고 떠난 신실치 못한 아내에 비유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혼합주의를 배격하고, 백성들의 삶을 뒤덮고 있는 묵은 땅을 갈아엎기 위한 ‘마음의 할례’를 요구하였다.

 

신명기적 해석

율법책의 발견

  요시야는 앗시리아와 그 밖의 이방의 영향들로 인한 모든 흔적들을 성전으로부터 제거하여 종교개혁을 하였다. 이 때 율법책이 발견되었는데, 요시야는 이를 백성들에게 읽어주었고, 백성들은 이 율법을 바탕으로 야훼를 따라 행하고 언약의 계명들에 순종하겠다고 야훼 앞에서 언약하였다. 이는 여호수아24장의 모세가 행했던 고대 언약의식을 상기시킨다. 그 후 요시야의 척결작업은 유다의 활력과 힘을 되찾고, 야훼의 계명들에 순종하지 않을 때 율법이 민족에 대해서 내리게 될 저주를 피하려는 염원이 있었다. 요시야의 개혁은 므낫세 시대 동안에 문화적으로 유다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앗시리아와의 단절을 의미하였는데, 여기에는 고대의 언약갱신 의식을 통하여 과거를 되찾고 현재에 그 과거의 의미를 되새기는 진지한 노력이 더해졌다.

 

요시야 개혁의 신명기적 기초

  요시야가 언약갱신의 의식 때 읽었던 것은 어떤 문서였을까?

  이 책은 므낫세 시대의 이교사상을 강력히 단죄하고 예루살렘으로의 예배 집중을 요구하며 야훼에 대한 흔들림없는 충성만이 민족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토대라고 경고하는 책이어야 한다. 이를 충족시키는 것이 신명기 12-26장의 율법이다.

 

신명기

신명기는 유다의 신앙과 예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때문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J.E  신명기가 간행 된 것은 신앙과 행실의 문제에서 전체 백성들에 대하여 구속력을 갖게 될 성스러운 문헌의 공식적인 정경화를 향하여 중대한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신명기는 앗시리아 제국의 붕괴라는 중대한 시기와 그 이후의 여러 세대에 걸쳐 야훼에 대한 신앙에 자양분을 공급하였으며 그 신앙을 깊게 하였습니다.

신명기의 구조를 보게 되면 율볍의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그주변에 3개 이상의 모세의 연설이 모여있는데. 요시아 개혁이전 에 편집되었는지 이후에 편집되었는지 확실히 알수 없지만 이 설교 자료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행한 설교의 가장 오래된 판이라는 데는 대체적으로 의견들을 일치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설교

신명기의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고 있지만 그연설이 모세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한 것은 완전한 문학적 허구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모세의 말을 그대로 옳겨놓은 것은 아니지만 예언운동의 종교적 윤리적 통찰들이 혼입된 모세시대의 신앙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신명기의 가르침은 예언자들과 같이 이스라엘을 새로운 차원의 종교적 발전으로 끌어올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 시대의 원형적인 신앙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하고 있다. 즉 신명기는 준칙들을 모아놓은 법전이 아니라 뱅성들에게 구속력이 있는 요구 사항들을 포함하고 있는 민족의 신앙에 대한 가르침이요 선포요 해설이다.

그러므로 법전만이 아니라 모세의 설교 전체를 가리킨다

 

언약의 갱신

이스라엘의 각 세대는 호렙산에서 맺은 언약에 개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언약이 갱신될때

과거의 결정적인 순간이 현재화 되는 것이다. 신명기는 현재의 소란으로부터 벗어나 과거의 황금시대로 물러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명기는 현재의 위기의 도전과 야훼의 목적에 이스라엘의 책임과 운명을 활기차게 다루고 있다.

 

율법의 완성

신명기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동기 때문이 아니라 야훼께서 먼저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한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선택

긍정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은 야훼를 특별히 섬기도록 구별되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보다 강하거나 수효가 많아 서가 아니라 야훼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하찮은 작은 노예 무리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의 백성의 삶은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언제나 의지하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선물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사회적 책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압제받는 자들을 위하여 공의를 행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셨다. 그런 까닭에 야훼는 고아, 과부, 거류하는 외국인 등 법적으로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보호자이다.그래서 야훼께는 편파성이 없다

이러한 강조점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법률은 귀족계급을 옹호한 고대 근동의 다른 법전들보다 높은 차원을 지니게 되었다.

 

신명기적 개혁의 부적절한 측면들

신명기적 개혁은 한동안 유다의 삶과 사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 개혁운동은 예언자들의 가르침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모세의 언약 신앙으로 되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회개혁은 백성들의 마음속에서의 내적인 변화가 지속되는 동안에만 계속되었다.

 

신학적 결함들

신명기 신학의 가장 큰 결함 가운데 하나는 역사를 통한 야훼의 활동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신명기의 가르침은 모든 것들을 너무도 간단하게 처리해 버리고 만다.:야훼께 순종하면 만사형통할 것이요 순종하지 않으면 고난이 찾아올 것이다. 민간종교의 토대가 되고 있는 성공철학 같은 인상을 주게되었다.

 

환멸의 시대

백성들의 생각으로 야훼의 정의는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고 수종하면 이 땅에서 안정되게 살고 적들에게 승리하며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잔인한 현실은 이러한 신념과 모순이 되었다. <유다는 앗시리아의 압제의 멍에에서 벗어났지만 잠시 이집트의 지배를 받다가 결코 가볍거나 자비롭지 않았던 바벨론의 멍에를 다시 짋어졌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시대의 예레미아와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로부터 알 수 있듯이 모세 싱앙은 잊혀졌거나 이방 종교와 혼합되어 버렸다. 또다시 쉽게 종교적 혼하주의의 경향으로 되돌아 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비극은 이스라엘이 야훼와 맺은 언약의 의미를 좀더 깊이 이해 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박국의 신앙의 초소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단순한 견해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선 사람은 예언자 하박국이다. 예언자는 역사가 의인의 옮음을 입증하는 것인지 아니면 잔혹한 힘이 실제로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인지 당혹해 한다. 하지만 예언자는 신앙의 초소에서

야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의도가 궁극적으로 실현될 미래의 지평선을 눈을 들어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동안 역사속에서의 하나님의 임재가 가려져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믿음을 갖고 용기 있게 살아가야 한다. 즉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주권이 분명해질 그 때를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는 가운데 신실하게 살고 행하라는 것이다.

 

신앙과 민족주의

요시아의 개혁은 암적인 존재와도 같이 이스라엘의 생명력을 약화시켰던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종교적 영향들을 철저하게 제거 시켰지만. 요시아의 개혁은 민족주의로 인해 손상을 입었다. 예루살렘성전으로 모든 예배를 집중시킨 것은 이방 종교의 관습들로부터 이 땅을 정화시킨 면도있긴 하지만 하나님이 백성들의 편이므로 어떤 재앙도 그들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교만한 생각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오만은 주전 7세기 말엽 눈사태와도 같이 유다에 덮친 소란한 사건들 속에서도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제 12 장 국가의 멸망

 

 이 시대는 다윗 제국의 시대와 같은 황금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요시야의 때 아닌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국가의 멸망. 일부 백성들의 바벨론으로의 포로로이어진 일련의 신속하게 진행된 사건들의 충격으로 인하여 애국자들은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그럼에도 민족주의는 사라지지 않았으며, 낙관적인 메시지로 한 대 열렬한 지지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암울한 시기가 계속됨에 따라 결국 날카로운 말로 한 낮의 환상을 깨고 백성들로 하여금 역사적인 현실을 똑 바로 직시하라고 촉구 한 예언자들이 득세를 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예레미아와 에스겔의 긴 증언이 있으며, 그들의 임무는 자신들이 물려받았고, 자신들이 서 있는 종교적 전승들을 성찰하고 재해석함으로써 당시의 위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고통받는 예언자

 예레미야는 초기 예언 활동을 하였다. 예레미야는 전대의 아모스나 이사야와 같이 백성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야훼의 나은 승리와 기쁨의 날이 아니라 멸망과 음울의 어둡고 비참한 날이 될 것이라고 한 것 같이 비참한 날이 될 것이라 선포하였다. 또한 예레미야의 생애는 십자가의 길과 같은 고난을 통하여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역정 이었다.

 

예레미야서

 예레미야서는 편집자들은 예레미야의 사역 초기, 중기, 후기하는 활동 순서에 따라 자료들을 모아 놓으려고 애썼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몇 증거들이 있다. 하지만 편집자들은 연대를 밝히려고 하지 않았고, 동일한 연대에 속하는 자료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아 예레미야서가 다른 예언문학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정경 형태에 도달하기 전에 복잡한 편집역사를 거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레미야의 문학 비평에서 세 가지 기본적인 유형의 자료 또는 “전승층”을 추출해내었다. 첫째, 1-25장은 시적으로 표현되었다. 둘째, 26-45장은 산문으로 되어있다. 셋째는 편집자들의 손길이 들어간 것이 나타난다. 편집자의 형태로는 신명기 학파의 편집자 또는 그와 유사한 인물들에 의해 편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편집비평

 우리는 성경을 최종적인 형태로 제공해준 편집자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최종적인 형성 또는 편집에 대하여 관심이 점점 집중되고 있다. 편집비평은 우 가지에 관심을 갖는데, 첫째로 편집비평은 현재의 성경 본문의 배열에서 얼마나 다양한 문학 단위들이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것은 전반적인 뼈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편집비평은 가급적 분문의 최종적인 형태에 영향을 미치고 또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되는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것은 최종적인 형태의 책이 전하는 신학적 메시지를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불태움

 예레미야는 그 당시의 시대의 신탁들을 간행하여 백성들에게 당시의 상황의 중대성을 일깨워주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고치도록 권고 하였다. 이런 선포한 신탁들을 그의 비서 바룩으로 하여금 두루마리에 적게하고 바룩이 금식일에 모인 모든 백성들 앞에서 두루마리를 읽게 하였다. 여호와김은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듣고는 대역죄로 여기고, 또한 두루마리를 화롯불 속에 집어넣어, 두루마리는 타게 되고 예레미야는 그로 하여금 다시 집필을 시작하였다. 이 신탁들은 주로 백성들에게 바벨론의 위협의 의미를 일깨워주려는 실제적인 의도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의 신탁들이 더욱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끝으로 아마도 신명기 학파에 속했을 편집자는 포로 기간 동안에 예레미야의 전승들을 하나의 책이라는 최종적인 형태로 편찬하였다.

 

여호야김 시대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여호야김 앞에서 읽은 사건을 분기점으로 삼아 먼저 여호야김의 치세 초반 동안을 고찰하고 그가 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후의 그의 활동을 다루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요시아 후에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올랐지만 3개월 후에 쫒겨났다. 그후에 엘리야김에서 이름을 바꾼 여호야김이 왕위를 계승 했다. 그의 처음 시행한 것은 이집트 조공을 위한 세금 부과였다. 그리고 화려한 궁전을 짓기 위해 백성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켰다. 그의 왕의 자리는 사치의 자리였다. 여호야김은 솔로몬의 영광을 따라한 듯하였다. 또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며, 예언자의 말을 듣지도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도들의 소굴인 성전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의 재위 초기에 공적인 무대에 나섰다. 그리고 그는 대중 앞에서 설교를 하는데, 두 곳이 등장한다. 7장과 청중들의 반응에 주안점을 둔 26장 이었다. 따라서 성전 설교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장을 함께 읽어야 한다.

 7장에서는 여호야김의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문화 수용과 이교 부활로 백성들이 자신들의 옛 생활로 돌아갔다. 그리고 성전에서의 가증스러운 일들과 형식적인 예배를 통한 이들의 범죄를 나타낸다. 이런 일들을 행하면서 예배를 드리러 성전에 들어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성전 뜰에 서서보고 있는 예레미야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과의 약속이 성취되도록 충성스럽고 순종하는 마음을 요구 하였다고 그는 말한다. 무엇보다도 계약 관계가 신실한 것이 근본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예레미야의 말에 대하여 왕실 예언자들은 예루살렘성전에 야훼의 임재를 보장하고 있다는 왕실의 계약신학에 예레미야가 도전한 것에 충격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예레미는 출애굽과 광야에서의 체험에 뿌리를 둔 언약전승에 서 있었다.

 

길르앗의 유향

 이집트에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북방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유일한 임시방편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 맞춘 하나님의 회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을 약속한 통속적이 예언자 들이 가장 큰 대적이었다.

 예레미야는 문제가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위기와 재앙을 통해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고 그들을 뒤흔들어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함으로서 정화가 이루어져야 했다. 이런 일을 겪으며 예레미야는 옹이장이의 신탁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가운데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개하다

 여기 예레미야에서의 회개하다는 ‘돌아오다’라는 동사는 ‘회개하다’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이 회개는 야훼께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즉 생활양식을 바꾸는 것이다.

 

북방으로부터의 적

 예레미야는 부르심을 받을 때 물이 끓는 가마가 팔레스타인 쪽으로 기울어 재앙이 쏟아지는 이상을 보고 북방으로부터의 적에 관한 말을 하였다. 그것은 바벨론의 진격이었다. 예레미야의 애절한 목소리는 전쟁 경보를 불리면서 백성들에게 요새화된 성읍으로 피하는 것이 안정될 것이라고 외치며 시간이 있을 때에 회개하라고 가르친다. 4장에서는 “혼란의 도래”에 관한 창조 이전의 혼돈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본 강력한 서정시가 포함되어 있다.

 

멸망의 표적들

 임박한 멸망에 관한 예레미야의 말에는 표적들이 수반되었는데, 예레미야의 잠방이 표적 오지그릇의 표적등 이러한 표적들은 ‘행위를 토안 말씀’은 불길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야훼께서 곧 행하실 일’을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이 후에 바벨론은 이집트 침공을 성공하였고, 바벨론은 세계의 폐자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비참한 예언은 여호야김을 격노케 하였던 두루마리의 주제였음이 틈림없다.

 

 

예레미야의 고백록

                주전 609 므깃도에서 요시야의 전사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

                주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  ----->> 예레미야의 마지막 10년

                                예레미야의 두루마리를 불태움

 

                이때 예레미야는 은둔생활 - 공공의 적 - 그래서 서정시가 나옴 - 바룩이 대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백성들의 고통을 묘사하고 있다 - 의심과 고통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 예레미야 11-20장)

               

 

쟁론(爭論)의 사람 - 렘 1:1-10절

                천성이 수줍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유다의 왕들 , 고관들, 제사장들, 백성들에게 - 하나님의 불길한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

                그의 성격과 맞지 않는 예언자 임무 - 금지 - 모든 것을 금지하도록 함 - 모든 만남

                예언자는 고독에 몸부림쳤다.

 

예레미야의 신원

                첫 번째 - 사역 초기- 예레미야의 탄원 - 도무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인들이 말림

                하나님께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멸망하게 해달라고 기도

                이러한 기도는 상처받은 마음에서 올라는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속였다.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다. 고통이 너무심하다/ 태어난 날을 저주

 

                야훼께 불평에 대한 응답 - 두 번째

                하나님이 예언자를 혼내심 - 백성들을 혼낸것이다 -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했다

                야훼께서 이런 응답이후 아무런 대답이 없음

 

                세 번째 - 하나님의 복수를 간구함

                네 번째 -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

 

                이런 탄원들은 예언자의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 중대한 임무를 맡은 예언자가 고뇌하며 체험으로 대표된 백성들의 고통에 인격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489쪽)

                분노와 사랑이든지 예언자의 삶과 사고 전체에 흘러들어갔다.

 

시드기야 시대

                바벨론을 느브갓네살이 통치

                여호아김 - 예레미야를 그냥둠 - 위험요소 제거

                바벨론의 조공을 거부함 - 다시 유다 침범의 요소

 

좋은 무화과와 나쁜 무화과

                여호아김의 전사 - 여호야긴이 왕이 됨- 하나님의 심판도 대신 받음

                598-597 년 느브갓네살의 유다공격 - 취임 3개월 여호야긴의 항복

                                성전과 왕실의 보물 모조리 털림, 젊은왕과 모후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감

                                에스겔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들도 데려감

                느브갓네살 - 요시야의 막내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움 그리고 시드기야로 개명

                               

                시드기야는 온순 착하다 우유부단 마음이 많이 흔들림

                일등시민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감 - 유다는 혼란의 시기가 되었다 - 근시안적 민족주의 , 거짓예언자들이 주범

                꿈속환상 - 성전 앞에 놓여 있는 두 개의 무화가 바구니 - 좋은것 -바벨론 포로잡혀간 자들

그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 반대 로 한 바구니 - 시드기야와 거짓예언자들 -유다땅의

 

혁명의 음모

                이집트는 반 바벨론 연합을 구축하기 위하여 - 에돔 모압 아몬 페니키아 유다를 선동하였다. 그 속에서 유다 시드기야를 중심으로 이집트의 왕 느고와 프사메티쿠스에게 협력

                예레미야는 이런 음모를 중단하라고 외쳤다

                멍에와 가죽끈으로 자신의 목에 매임 - 바벨론 상징 -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 바벨론

                예레미야는 느브갓네살을 - 야훼의 종이라고 선포

 

예레미야와 통속적인 예언자들의 충돌

                렘28장 - 바룩은 통속예언자들과 충돌한다

                통속예언자들은 곧 다윗의 계약신학에 충실히 예언 -하나냐 - 2년안에 바벨론 포로들 돌아옴

                여호아긴은 돌아온다 -- 그,러나 야훼의 예언자는 한결같이 멸망만을 예언했다

                예레미야 - 쇠멍에를 만들었다 - 인간의 노력으로 쇠멍에를 부술수 없다.

 

예루살렘의 포위

                느브갓네살 - 예루살렘을 포위함 - 예레미야 항복을 권함

                이집트의 호브라가 포위 - 유대인들은 동족  포로들을 자유케함 - 귀족들의 식량문제 해결

               

예레미야의 투옥

                바벨론의 일시적 퇴각 - 시드기야 예레미야에게 백성들을 위한 기도부탁 - 예레미야 바벨론은 되돌아온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파괴할 것이다. - 예레미야의 체포 - 신체적 폭력을 당함

                밧줄로 묶여 깊은 우덩이 속에 갇힘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 시드기야의 비참한 최후 -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죽고, 아버지는 두 눈이 빠져서 바벨론으로 잡혀감

               

        멸망의 날 넘어

예레미야는 그 땅의 잘못된 기초가 허물어져야 하나님이 새롭게 건설하고 심을 수 있다라는 것을 알음

 

예레미야의 토지 매입

                32장 - 유다에는 이제 내일은 없다. 소망이 없다

                예레미야 고향 아나돗 사촌이 소유한 땅을 사다 - 하나님이 이땅에서 포도원과 집을 다시 사리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함

 

새로운 공동체과 새로운 언약 -31장

                언약공동체속의 개인주의 - 예레미야

  1. 새언약은 하나님의 주도권과 권위로 이루어짐

                2. 모세언약과 다르다 - 모세언약은 깨어진 언약이다. - 신명기신학의 실패-

                3. 새언약은 시냇산 언약의 기본의도를 성취할 것이다.

                4. 새로운 공동체를 태동시킬 것이다.  - 야훼의 백성 -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것이다.

                5. 하나님의 죄사함을 토대로 할 것이다. - 인간의 오만 자만 끊어짐

                6. 마지막 일들에 대한 예언이 나옴

 

성전이 중심축을 차지 않고 있다  

 

 

제 13장

바벨론의 물가에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갈 수 있었지만 가기를 거부함

예레미야의 마지막 활동 40-44장 - 고통을 유다백성과 함께 함

민족주의자 이스마엘이 그달랴를 암살함

군지휘관들이 예레미야를 데리고 이집트로 도주

 

이집트로 간 사람들 이쉬타르 섬김 - 예레미야 화를 냄

변명- 하나님을 떠났을때 - 그들은 늘 풍부했다고 - 이쉬타르를 섬김을 정당화함

 

흩어진 유대인

                이집트는 전통적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 - 엘레판틴 파피루스 발견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 돌아와서 다시금 이스라엘을 재건함

                바벨론 포로들 사이에서 예언한 예언자 - 에스겔

 

제사장 에스켈

                부시의 아들 에스겔 첫 번째 바벨론 포로시기  여호야긴과 함께 바벨론으로 감

                에스겔은 귀족이며, 사독계열의 제사장 집단가운데 일원

                유대인들은 물을 끌어오기 위한 운하  그발 강가에  정착

                포로생활 5년 593년 예언자로 소명- 571년까지 활동

                바벨론 도시 - 모신 마르둑+ 이쉬타르

                특이한 신탁 - 황홀경, 벙어리,

 

에스겔의 문제점

                에스겔의 신탁은 정확성 - 역사적// 예레미야의 신탁은 복잡성

                예언은 바벨론 - 관심은 예루살렘 - 지리적 공간적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

                극복점 1) 다른 친구들을 통한 예루살렘의 소식접함2) 신탁의 수정 보완성- 후대 편집성

 

                A 예루살렘이 멸망하기전 예언 1) 에스겔의 환상과 사명(1-3장) 2) 유대 예루살렘신탁 24장

                B 이웃나라들에 대한 신탁 25-32장

                C 예루살렘 멸망이후 예언들 1) 약속 33-39장 2) 새 예루살렘 48장

 

에스겔의 소명

                엘리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잡혀갔기 때문에 생각보다 포로생활이 좋다

                30세 여호야긴 이 끌러간 5년째 소명 받고 예언자의 길에 들어섬

                예루살렘 신학을 형성 - 형이상학적 계시- 야훼 지성소에 앉아있고 천사들이 지키다

                영광의 하나님이 포로생활중에 나타남

                두루마리를 먹으라 - 계시를 예언자가 듣고 소화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

                두루마리의 기록 - 애가와 애곡 그리고 재앙의 말들

                에스겔 - 국가의 멸망과 포로로 잡혀갈 것 예언

 

쇠퇴하는 민족주의

                여호야긴 - 민족회복, 민족주의 의 희망 - 나라 회복의 희망 - 하나냐 가 2년만에 여호야긴 귀향한다. 이집트의 개입은 곧 유다가 회복된다 생각 - 그러나 유다 멸망

                바벨론을 향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유다 - 곧 멸망한다 예언 -에스겔

 

예언의 증표

                그림으로 예언 - 예루살렘 함락- 바벨론로부터

                예루살렘에 닥칠 3가지 일 - 머리카락 머리가닥을 3등분으로 자름

                1) 짐을 꾸려 성벽밑을 판다

                2) 무서워 떨며 떡을 먹음, 겁에 질려 물을 마심

                3)  예레미야 예언 믿지 않음 대조적으로 에스겔의 예언을 즐김

 

반역의 역사

                이스라엘의 광야시절 - 신혼부부 시절 - 호세아, 예레미야 - 그때를 그리워할 것이다

                회개하고 돌이키라 - 하나님께 신실하라

                출애급- 가나안 거룩한 역사 -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종교성지의 거짓역사

                항상 계약은 야훼의 은총과 주도권에 달려 있다

                에스겔 사상 = 모세의 조건적  사상+은혜의 영원한 사상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때가 되면 내가 야훼인줄 알리라 - 하나님에 대한 지식 = 계약

                대중예언자는 견책을 당할것이다. - 자기마음데로 하는 예언

                귀족과 예언자 의로운 사람 없다 - - 유다를 덥럽히도록 사회적 환경을 만듬

 

개인들 앞에 놓인 운명

                모든 유다에게 예언이 선포되다 - 집단의 책임성 강조, 이후 개인의 책인성등장

                유다의 고향을 잃어버리는 시대 - 외로움-전통적인 관습이 무너져 내림

                종교적 전통이 무너져 내리는 시대 - 에스겔 시대

                시대가 어려운 숙명적 시대 - 예언자의 역할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책임지는 시대

                부모세대의 잘못이 자녀세대에 영향을 준다.

                과거 현재 미래의 계약공동체의 연대성을 필요로 했다

                어려운 고난의 시기에 회개하라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여라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신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약속

“ 그가 본 환상은 많은 날 뒤에 일어날 일이며 그의 예언은 많은 시간 뒤에 일어날 이다. 12:7, 22 ”       

 

이스라엘의 부활

                허황된 민족주의때 에스겔은 -·유다가 멸망했다고 할때 -

                백성이 도탄에 빠져 실망과 통탄할 때 - 에스겔은 희망을 예언한다

                심판은 “ 너희가 내가 하나님인줄 알리라 ” - 즉 새로운 역사의 시작임을 알림

                37장 마른뼈 환상- 인간들의 의지와 노력이 다 파괴될때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발휘됨

 

목자되신 하나님 

                선한목자와 양 - 절대적 관계 --- ‘왕’대신 ‘방백’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계약한 민족이기 때문에 죄성을 완전히 바뀌 놓기를 원하신다.

                새로운 삶은 - 이스라엘의 믿음(마음, 정신)을 바뀌어야만 했고- 깊은 마음속으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지 거룩한 백성이 되고 - 거룩한 곳으로 인도받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의 새로운 것을 보여줌 -

                새로운 성전은 - 생명의 물이 흘러나옴  - 동쪽에서 흘러→ 빈광야→ 사해로 흘러감 → 열매맺는 과수들을 자라게 함 →  호수 - 엔게디 호수에서는 어부들이 고기잡음- 거룩한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도다( 계21장)

                국가와 종교 - 모든 것은 레위계열의 사독제사장이 판단한다. / 땅의 12지파 재분할/ 예배공동체로 거듭날 것이다 - 포로기이후 귀환한 백성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침

 

 

포로 생활

포로된 사건은 유대교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예레미야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계약 백성의 장래는 예루살렘 남은 자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느부갓네살의 침공 결과 예루살렘은 매우 많은 부분이 황폐화되고 무너져버렸기 때문에 신앙적인 활기는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주전 597년과 587년에 유대인들을 이주시킨 이후, 아마도 그달랴의 암살 사건 이후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하여 느부갓네살은 587년 다시 유대에 간섭을 했다. 바로 그 때 유대인들의 다른 집단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바벨론은 유대인 모두를 끌고 간것은 아니며 오직 유대인들의 지도부만이 끌려갔을 뿐이며,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은 곡물을 추수하기 위하여 남겨졌다.

 

바벨론의 환경에 적응함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의 상황은 그다지 나쁘게 되어가지는 않았다.

그들의 공동체로 살거나 대도시에 살거나 그들의 고유의 생활방식대로 사는 것이 허락되어서 매우 자유로웠다. 그러나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였다. 그들의 신앙은 제사장적 신학을 따라 항상 야훼께서 그들에게 유산으로 주신 팔레스타인 땅과, 예배하는 백성들 가운데 야훼께서 장막으로 계신 장소인 예루살렘의 성전 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정착할 곳을 잃어버린 유대의 신앙이 바벨론 문화의 바다에 잠겨 그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가졌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바벨론이 가진 높은 수준의 문화가 바벨론 종교의 우월함 때문인지 의아했을 수 밖에 없다.

 

성전없이 드리는 예배

이스라엘의 신앙은 엘레파틴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이집트로 피난갓던 사람들이 종교적 유산을 이방적인 사상과 관습 속에서 잃어버린 것과는 달리 바벨론 포로 기간중에 순수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보존되었다.

포로 기간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확신과 이방의 땅에서도 성소를 가질수 있음을 확신하면서 어느곳에서나 하나님을 섬길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전통의 보존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포로생활 중에 계약 공동체에 소속된 그 소속감은 약화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강화되었다. 비록 국가에 대한 충절로 사람들을 묶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공통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토라를 보존하는데 매달렸다.

그들의 전승을 연구하고 전승이 가지는 의미를 찾으려고 했으며 그들의 거룩하고 독특한 지식을 장차 올 세대에 물려주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보존했다.

 

전승의 해석자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유산에 대하여 집중적이고 신성하 관심을 가졌던 포로기는 종교적인 활동기였다. 그들은 그들의 거룩한 유산이 그들의 시대와도 깊은 관련이 있음을 믿었던 전승의 해석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전승은 단순한 과거로부터 나타난 박물과 같은 것이 아니었

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시대 상황에 말씀하시는 살아있는 전통이었다.

그들의 첫 번째 포로들이 사로잡혀 가기 바로 직전인 597년경에 완성되었을 신명기적 역사서들의 최종적인 형태를 갖춘 것은 포로기 중으로 본다. 그러나 신명기적 역사서의 첫 번째 편집본은 요시야왕이 므깃도에서 전사하기 직전인 610년경에 나타났을 가능성이있다고 본다. 그리고 주전 587년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의 보물들이 강탈당한 두 번째 침공때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 의하여 더욱 발전 되었다.

 

제사장적인 전승

이스라엘 역사의 제사장적 견해는 창세기와 출애굽기,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에서 찾아 볼수 있는 자료들 가운데서 시작된다. 제사장계 전승을 기록하면서 그 기록자는 성전 안에 보존되어 있던 제사장계문헌을 수집했다. 그 한 예가 레위기 17-26장의 ‘성결법전’ 부분인데

성결법전의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것은 성전에 오랜 세월 동안 사용되던 끝에 최종적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출애굽기의 뒷부분에 집중된 것과 레위기 전부 그리고 민수기의

일부 내용은 이 긴 역사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오경의 구성

우리가 창세기로부터 민수기까지 소위 4경이라고 부르는 내용이 제사장계의 편집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통일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후대에 신명기적인 역사서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기가 제사장계 작업에 추가되었다. 왜냐면 그것도 역시 모세의 죽음으로 끝나는 고대의 한 시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오경의 성립이다.

그리고 최근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6경인데 6경은 여호수아서도 땅을 수여 받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오경의 절정을 이루고 , 오경에 나온 이야기의 결론으로써 의미를 가질수 있다는 것이다.

 

제사장적인 관점

제사장계 자료들에 초점을 돌려본다면 가장 주목할 점은 전체에 흐르고 있는 예배의 분위기이다. 사실 제사장계 자료는 창조부터 시작된 역사 전체를 꿰뚫는 역사의 목적이 예배를 위한 이스라엘의 선택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회중’혹은 야훼께서

출애굽이라는 구원 행위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의 창조 행위를 많은 시편으로 찬양하는 신앙적인 공동체로 인식되었다.

 

역사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목적은 잘다듬어지고 매우 조직적인 그분의 계획에 따라서 세 시기에 순서대로

드러나게 되었다. 각각은 “영원한 계약” 이며 하나님은 각각을 무조건 인정하셨다 제사장적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과의 계약이 계승된다는 것은 순수하게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역사라는 것과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제한받지 않으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제사장계 기자 범주 안에 있던 첫 번째 시기에 하나님은 엘로힘으로 알려졌다. (하나님) 두 번째 시기에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엘 샤다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나타나셨다. (전능의 하나님) 세 번째 시기인 모세의 시대가 이르기 전에 야훼의 이름이 소개되었다 이 이름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쓸데없이 불려지면 안도었으며 너무도 신성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그거룩한 단어를 입에 담을 수도 없었다,

 

이견해에 의하면 모듬일들이 향하고 있는 목표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을 율법에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부름받은 예배하는 공동체로 구성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즉 제사장적인 시대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제사장적인 견해

포로기라는 위기의 시대에 제사장계의 기자는 이스라엘이 패망한 원인을 설명하려고 시도했고, 그의 동족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영원한 소유”를 요구한때 반드시 따라야 할

규범을 알리기 위하여 모세 시대를 재구성해서 제공한 것이다.

그들이 흔히 “족보”라고 하는 용어가 “역사” 로 바꾸어져 사용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제사장계 기자는 그들이 오랜 서사시 전승으로부터 물려 받았으며 이것은 시원사와 족장들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계약의 역사를 시작했다.

 

제사장계기자의 신정론 

사독 계열의 성전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예배하는 공동체 즉 거룩한 도시에 살며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거룩한 백성이었다는 견해를 수립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유대교의 큰 뿌리는 포로기까지 내려갈수 있다. 우리는 이시기에 이스라엘 예언 운동이 가장 깊은 수준까지 그리고 최고조에 달했다는 포로기의 또 다른 측면이 있음도 염두에 두어야한다.

 

 

제14장 새로운 시대의 여명

  포로기 중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그 경험은 많은 경우 아픔이었지만, 그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이 선한 일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로운 세계의 지평

이스라엘은 예배하는 공동체로, 그리고 그들의 삶 전체를 토라 위에 세우도록 부름 받았다.

 

제2이사야

  제2이사야는 아마도 8세기 예루살렘의 예언자 이사야의 제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벨론에서의 어려움

  수세기 동안 세계 문명의 중심지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었다. 아브라함 때부터 이 지역을 지배해왔던 바벨론 제국은 앗시리아 제국에 무너졌고, 느부갓네살 왕이 죽고난 뒤 7년 사이 세 번이나 왕이 바뀌었다. 포로기의 견딜 만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포로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품고 있었다.

 

페르시아 고레스의 발흥

  엘람 출신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B.C.E 550년 메대를 정복했다. 그리고 소아시아의 메대 국경까지 진군했고, 오늘날의 서부 터키인 리디아 왕국까지 정복했다. B.C.E 539년 페르시아가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수도도 함락시켰다. 고레스는 바벨론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강제노동을 없애고 주거 환경을 개선한 것들을 페르시아 문헌에 기록하여 능력을 과시하였다.

 

제2이사야의 시

  여러 해 동안 이사야의 뒷부분(40-66)을 예루살렘의 이사야가 앗시리아에서 기록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는데, 오늘날 성서비평학계에는 제1이사야가 이부분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부분 동의한다.

 

제1이사야와 제2이사야

  위와 같은 근거는 이사야서의 두 주요 부분의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는 것에서 나왔다. 예루살렘의 이사야(제1이사야)가 기록한 부분에서는 예루살렘은 야훼께서 결코 함락시키지 않으실 거룩한 도성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40장 뒷부분(제2이사야)을 보면 예루살렘의 성전은 무너졌고,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 이스라엘 왕정을 명백하게 과거의 사실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어휘, 시적구조, 운율을 연구한 결과 이사야 40-66장의 시가 8세기 예루살렘의 이사야에 의하여 기록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더욱 뒷받침한다.

  제1,2이사야는 신학적 강조점도 다르다. 제1이사야는 예루살렘이 여전히 서 있고 유다가 그 당시의 정치적인 풍랑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심판의 날이 임박했기에 사람들에게 시간이 있을 때 회개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제2이사야는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일어났고, 이스라엘을 결박해서 풀어주고 고향의 흩어진 기반을 다시 세워주시기 위해 오신다고 말한다.

  역사적 배경, 문학적 문체, 신학적 관점 등을 종합해 보면 이사야 40-66장의 저자(제2이사야)가 예루살렘의 이사야보다 200년쯤 뒤 포로기의 예언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사야의 전승

  이사야 55-66장은 명백하게 40-55장과 또 다른 역사적 배경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제2이사야가 바벨론에서 예언을 했다면 56-66장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회복에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흔히 제3이사야라고 불리는 56-66장 부분은 제2이사야의 제자가 바벨론에서 돌아온 뒤 바로 기록했다고 보고 있다.

  전반적으로 대예언서들은 위대한 예언자의 영향이 담긴 전승의 최종 결과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사야서도 이사야학파가 있었고, 이사야 예언의 전승과 스승이 직접 가르쳤던 내용을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것을 기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

처음부터 끝까지 제2이사야의 예언은 좋은 소식을 당당하게 외치고 있다.

 

천상 회의 가운데

  제2이사야가 시작되는(사 40:1-11) 시의 배경은 명백하게 야훼의 회의가 열리고 있는 천상이다. 그의 예언은 천상 회의로부터 들리는 기쁜 소식으로 시작된다. 그 다음 시의 배경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이동한다. 고대에는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주는 결정은 천상의 회의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아마도 바벨론의 신화와 제의에 익숙했을 제2이사야는 그가 야훼의 온 세계에 대한 왕권을 그릴 때 이런 종교적 요소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사 40:1-2을 보면 야훼께서는 천상 회의에서 약하고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하신다. 이제는 호세아가 야훼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마음에‘ 말씀하시리라고 했던 바로 그 시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과거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를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주어진 은혜로 용서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인간의 존재는 유한하며, 그들의 존재도 단지 한순간일 뿐이라는 우울하고 실존적인 절망이다. 그러나 예언자의 비관적인 관찰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확신이 되었다. 야훼는 역사를 초월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야훼의 말씀(표현된 계획과 의도)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바뀌지 않으며, 더럽혀지지 않고 다만 인간의 역사 속에서 역동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쁜소식

  다윗 신학에서 야훼는 자기의 거처로 백성들 한가운데 있는 시온산을 택했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비록 무너진 가운데 있지만 기쁜 소식의 선구자로 선택되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의 황폐된 도시들을 향하여 큰소리로 분명하게 구원의 하나님 야훼께서 권능을 가지고 오신다는 것을 외쳐야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창조주와 구속주

  제2이사야의 시는 야훼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펼치시려는 때가 임박했다는 주제를 치밀하게 발전시켜 갔다. 그는 모든 칭호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는 창조주와 구속주이다.

 

역사의 기초로서의 창조

 우선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역사의 주재자이심을 확신하며 위와 같이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주 야훼의 지혜와 권능에 대한 믿음이 제2이사야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주신다고 선포한 것을 보상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고레스를 통한 이스라엘의 희망과 역사 가운데 야훼께서 역사하셔서 백성들을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그 날을 위하여 목적을 가지고 일하고 계셨다. 따라서 야훼는 열방들 간의 논쟁으로 야훼만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제2이사야의 관점을 볼 때 이런 국제적인 사건은 이스라엘에게 특히 큰 의미를 가진다. 강국의 시각으로 볼 때 이스라엘은 불쌍하리만큼 약하며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 이었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속량주라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제2이사야는 백성들이 회복될 것을 예언 하였고, 제1이사야에서는 “야훼의 분노의 막대기”라고 일컬었지만 야훼께서 고fp스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역사적 임무를 이루실 것을 확신한다. 즉, 야훼께서 페르시아인 고레스를 자기 앞에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기름을 부으셨다는 것이다.

 

새로운 출애굽

 제2이사야가 전하는 메시지의 동기는 새로운 출애굽에 관한 것이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바로 구원의 순간이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이 찬조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출애굽과 광야의 전승 가운데, 나타나는 내용으로 표현했다.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서, 역사가운데 야훼가 하신 행위의 기억과 더불어 신화는 변형되며 새로운 출애굽에서 신적 전사의 “팔”을 선언한다. 이는 새로운 창조이기도 해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활동은 자연과 역사의 한계가 없다. 이는 야훼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 노래를 부르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있게 되는 것이다.

 

속량자

 신약의 속량자는 가족법에 의해서 나온 것이다. 가족의 일원 가운데 한명이 그의 “의”를 위협받고 있을 때, 그것을 보호해주는 것은 가까운 친척의 의무이다. 또한 속량자에게 능력이 있다면 그것을 사서 가족 가운데 보존 시켜야만 할 의무가 있다.

 

“라합, 바다”

 여기서 창조의 때를 표현한 바벨론의 창조신화 에누마 엘리쉬와 같은 고대신화들은 다양한 형태로 알려져 있었다. 이 신화는 신이 어떻게 무질서를 조장하는 혼돈의 세력들과 싸우면서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예언자는 고대의 신화를 야훼께서 왕중의 왕이시며, 창조주이고 해방의 주라는 이스라엘의 신앙 표현의 수단으로 다양하게 사용했다.

 

열방들을 향한 빛

 제2이사야의 시각이 전 창조의 범위와 모든 역사의 과정을 섭렵할 만큼 넓다는 점을 보았다. 제2이사야에서 “해안의 나라들”과 “섬들”을 언급하는 것은 그 이전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보다 더 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같은 경우 창 12:1-3에서 보듯이 장차 자신이 받을 복을 양보해야 하는 이야기가 담신 이스라엘의 서사시는 범세계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 또한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그들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 하신 것이다. 궁극적으로 야훼 앞에서 모든 무릎들은 꿇어져야 하며, 모든 혀로 그 거룩한 이름을 맹세해야 하는 것이다.

 

우상숭배에 대한 비판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 가운데서 다신교의 흔적을 추정하고 그것이 제2이사야에 이르면서 좋은 수준의 유일신교로 고양되었다. 또한 재구성을 시도할 때에 서양의 합리주의적 사고가 반영되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사변적이거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묻는 것이 아니였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요구를 하시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다. 십계명의 이스라엘이 한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고 명시 되었으며, 시내산에서의 야훼라는 개인적이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후 실제적으로 다신교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를 쉽게 잊어 버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야훼의 정체성과 목적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우상들처럼 사람들의 짐이 아닌(46장) 야훼만이 구원의 목적을 성취하실 수 있다.

 

세계사의 신학

 제2이사야는 역사적인 유일신을 보호하고 변호하고 있다. 야훼는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시며, 이는 모든 민족의 구원과 관련을 맺는다. 멍에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위로의 말을 예언자들은 하였지만, 새로운 시대가 동터 오르는 것을 보았던 다른 나라들에게도 똑같은 선포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2이사야서는 예언자는 야훼께서 선택한 자,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 세계의 구원을 활발하게 이루실 것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구속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목적은 열방을 향한 빛이 되어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 세계를 품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참된 이유이다.

 

야훼의 종

 

 제2이사야의 메시지 가운데 가장 어렵고 동시에 가장 중요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여러차례 나타난 “야훼의 종”이라는 인물 때문이다.

 1. 42:1-4   2. 49:1-6   3. 50:4-9   4. 52:13-53:12

 보통 이 구절들은 예언의 가장 깊은 의미이자 예언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메시아적 해석으로 주객이 전도된 일을 하지 않기 위하여, 종의 노래를 제2이사야의 메시지 가운데서 이해하도록 하자. 이 노래들이 독립적으로 씌였다는 것보다는 제2이사야의 문체와 그 문맥에 너무도 잘 맞는 것으로 보아 제2이사야에 속했다는 전제를 가지고 문제에 접근해 가면서 우리의 연구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로서의 종

 사 49:3의 종은 명백하게 이스라엘과 동일시된다. 그리고 사 41:8-10은 예언자가 이스라엘이 선택되고 부름 받은 시기를 출애굽의 시대로부터 이스라엘 조상들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야훼는 종을 “돌보시고”, “붙드실”뿐만 아니라, 그 종에게 야훼의 카리스마를 부어서 조용한 길로 열방들에게 정의를 세우는 일을 하게 할 것이다. 이는 고레스와 같이 종이 야훼의 역사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대리인이다. 또한, 고레스와는 달리 군사적인 방법과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계약 공동체와도 동일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공동체가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단련시킨다고 보면서 고난의 의미를 간파하였다. 이는 야훼께서 그가 역사에 대하여 갖고 계신 의도를 더 잘 수행하기 위한 도구가 되도록 그의 백성들을 고통으로 재창조하시는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종

 위와 같은 해석은 난제를 가지고 있다. 사 49: 1-6은 다름 아닌 개인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53장의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묘사에서 더욱 강해진다. 나아가 이스라엘과 종에관한 묘사가 너무도 같기도 하며 차이점도 명백하다고 한다.

 ·참고 : p. 584~585

 

하나와 다수

 제2이사야는 종을 집단적존재로 이해 되었는가, 혹은 개인적인 존재로 이해했는가? 와 자신이 살던시기인가, 혹은 장차 올 메시야로서 활동하리라고 생각했을까? 라는 문제가 제기 된다. 이런 양자택일의 문제는 예언에 실제적으로 기초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첫째 질문은 한 개인이 이스라엘 공동체로 승화되고 공동체가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 개인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는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도래할 종

 두 번째 질문은 제2이사야가 선포한 관점에서 본다면 새로운 시대는 시작 되었고, 머지 않은 미래를 내다보면서, 아직 역사의 지평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세계의 무대에 나타나서 땅 끝까지 야훼의 구원을 전하는 자가 될 것이다. 오래전에 야훼는 종을 불러서 시험하고, 그의 고난으로 정화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미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역시 현재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현재에서 미래로 차례로 진행하는 우리의 측정 방법에 따라 측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것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측정된다.

 

고난을 통한 승리

 

 제2이사야의 시 전체에 흐르는 주제는 이스라엘의 찬양이다. 이 찬양은 40장에서 55장까지 흐르는 글의 핵심이다. 이는 야훼가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그 종의 고귀함은 곧 이스라엘의 고위함이 되낟. 사람들은 그들의 높이 이름난 아들이 훗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큰 자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며 아들은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잃는 자는 그의 생명을 찾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 제2이사야서는 히스라엘이 고난을 통하여 많이 성숙되었음을 단언한다.

 

고난받는 사람

 네 번째 종의 시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이 시는 사52:13-53:12 “고난 받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 이 말씀은 그 종이 고난을 통하여 존귀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 때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대상은 이스라엘이지만 주된 관심은 열방을 향하고 있다. 마지막에는 종이 겪는 고난의 신비를 모든 민족들이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 의를 인정받게 되는 역전된 상황을 말하고 있다. 종은 그들 대신 그들의 죄의 결과를 자시 자신이 지고 그들을 온전하게 회복시키기 위하여 고통당했던 것이다. 이처럼 더 큰 고난들을 당한 이유는 그것이 열방들을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네 번째 단락인 7-9절에서는 종은 고난 가운데서 일체의 nf평과 반기를 들지 않는다. 철저히 외롭고, 범죄자의 무덤에 묻혀야하는 수모를 갖는다. 그리곤 끝으로 희생양이라는 주제를 반복하면서 끝을 맺으며, 끝까지 온유함과 순결함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하나님의 사건은 10절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종의 자발적인 의생에 종과 함께, 그리고 종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며 참여했다는 것이 이시가 의도하는 바라고 한다. 따라서종의 희생은 하나님의 활동임을 알 수 있다.

 

대속제물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이 대속이라는 개념은 고대사회에 널리 퍼진 이야기이다. 염소를 잡는 이스라엘의 제의가 생각 날 수도 있다. 또한, 신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 이 신앙은 널리 퍼져 있었다. 이처럼 제2이사야가 그리는 고난당하는 종의 모습은 희생의 신학이 구약 가운데서 가장 극적으로 표현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른이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종을 통하여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화해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존귀하게 된 종

 다시 종결의 단락으로 돌아간다. 야훼께서는 종이 사명을 감다한 결과는 승리와 존귀라고 선포하신다. 종은 희생자가 아니며 승리자이다. 왜냐하면 야훼는 종이 수치와 모욕의 자리에 있던 것을 역전시켜 주실 것이며, 전 세계에 그의 “의”를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종과 메시야

 

 제2이샤야는 이것이 전인류 역사에 대해 가지는 보편적으로 함축된 의미를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의 위안과 은혜라는 기쁜 소식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시작하고 있다. 제2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향한 야훼의 위안과 은혜라는 기쁜 소식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시작하고 있다. 사 55:3-5에서 제2이사야가 다윗을 향하여 야훼께서 은혜를 내리시리라고 약속한 것은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복을 전하기 위하여 고통당하는 이스라엘을 야훼께서 돌보시리라는 것이다.

 

계속되는 이사야 전승

 

  이사야 44-55장은 예루살렘 이사야의 8세기 제가가 쓴 것이라는 것을 폭 넓게 받아 들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바벨론의 포로생활 상황을 반영하며, 포로들에게 위로를 선포하는 정교하게 다듬에진 문학적 구조를 볼 수 있다.

 

제2이사야의 제자들

 이사야 56-66장을 제3이사야의 글로 돌려지기도 한다. 포로 후의 얼마 되지 않는 상황을 묘사한 것 같다. 제2이사야의 제자는 제2성전을 건립하던 무렵 스승의 예언을 새로운 상황에서 건네받고 재해석 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 58:6-8절은 정치적 맥락으로 기술하려 하였으나 제자의시는 역사라는 장을 떠나서 종교적 상상력의 초역사적인 영역으로 흘러간 경향이 있다. 여기서의 신적 전사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방해하는 악과 혼돈의 세력을 정복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전체로서의 이사야

 

 실제적으로 이것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예루살렘의 이사야가 활동하던, 앗시리아가 지배하던 시대상이 반영된 1-39장, 제2이사야가 풍미하던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전이되던 시대상이 반영된 40-55장, 그리고 페르시아가 지배하는 포로 후기의 시대상이 반영된 56-66장이다.

 여기서 제2이사야 혹은 제3이사야라고 이름을 붙인 부분들도 그 부분만으로는 독립적인 책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자료들은 예언자를 표시하거나 혹은 기록된 특정 시대를 표시한 표제가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며, 분명한 것은 이 제2이사야와 제3이사야는 8세기 예루살렘 이사야의 원작품 속에 포함되어있었다는 점이다.

 이 기자의 제자는 그 내용을 더 풍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승의 사상보다 더 진전시켰고, 출애굽과 시온 전승을 결합하였다. 최종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은 예언에 대하여 보충한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학작업의 결과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의 질문으로 다양한 이사야서의 자료들과 전승들을 최종 편집자가 어떻게 전체적으로 묶여있는가를 질문하며, 이 질문이 그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보는 “편집비평”에 관한 것이다.    

 

 

제 15 장  제사장들의 나라

 

 주전 6세기 중엽에 페르시아 군대가 진격해 옴에 따라 생겨난 큰 기쁨을 보여주는 일차적인 역사적 증언이다. 고레스의 관용 정책은 바벨론의 폭정으로부터의 구궝을 가져다주는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페르시아 군대는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었고, 페르시아 정부는 신속한 통신망을 구축하였다.

 

고레스의 해방칙령

 원통의 한 구절을 보아 고레스는 도시와 성전들을 파괴하고 성스러운 보화들을 약탈하며 우상들과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던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초토화’ 작전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정책을 바꿔서 속국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풍습을 따르고 자신들의 신을 예배하며 자신들의 고향에서 정착해 사는 것을 허용하였다.

 히브리어 판에 따르면 고레스는 자기에게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준적은 마르둑이라고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고레스를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한 야훼의 대리자로 생각한 제2이사야를 상기 시킨다. 이 것은 고레스는 피정복민들의 신들을 옹호하는 후원자로 자처했고 그들의 성소에 신상들을 다시 세워주고, 재건케 하였다.

 

정의 : 아람어

포로기 이후 시대 동안에 점차로 유대인들의 상용어가 되었다. 이 아람어는 히브리어만큼이나 오래된 언어로서 둘 다 셈어족에 속한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아람어는 커다란 국제적 특권을 누렸다. 나중에는 점차로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문어 또는 고전어로 생각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아람어가 일상어로 사용되었다.

 

다윗 가문 방백의 지도 아래에서의 귀환

 고레스는 포수로부터 첫 번째로 귀환하는 유대인들을 이끌고 가기 위한 지도자로 세스바살이라고 하는 인물을 “목백”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지방 국가의 영도자로 왕가의 인물을 임명하곤 했던 페르시아의 관행과 일치하는 것이 된다. 그다음은 스룹바벨이라는 인물이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제한된 범위 내에서는 국가의 재건도 허용한 유화 정책을 사용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귀환 이야기를 간단하게 세 가지 인물과 세 가지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첫째는 스룹바벨과 성전의 재건, 둘째로 에스라와 언약의 갱신, 셋째로 느헤미야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이다. 이 밖에 학개와 스가랴 같은 선지자들을 살펴봄과 에스라와 같이 생겨나 유대교의 성격도 알아볼 것이다.

 

역대기 사가의 저작

 

 고FP스의 등장으로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출현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에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의 생활에 대해 알려주는 주요한 사료를 살펴보자. 또한 유대교의 시기는 이스라엘의 삶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한 장을 차지하는 것으로서 흔히 알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이것들은 서양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친 정신적 유산을 이해하지 목하게 될 것이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제1차 예루살렘 귀환으로부터 느헤미야의 두 번째 유다 총독의 재임기간이 끝날 때까지의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 시대의 초기 세기들 동안에 표준성경이 맛소라 학파로 알려진 유대인 학자들에 의하여 꼼꼼하게 보존되었는데, 이들은 아무도 성경에서 단 한 글자라도 보태거나 빼지 않도록 성경의 모든 단어를 세어두었다. 우리는 하나의 책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왜 에스라에 관한 이야기가 일부는 에스라서에 나오고 일부는 느헤미야서에 나오는지를 이해 할 수 있다.

 에스라와 느헤미아는 저작 전체는 전반적인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역대기 사가’의 저작에 속하는 것이 틀림없는데, 역대기 사가라는 말은 포로기 이후시기에 활동한 일군의 역사 해석자들을 가리킨다. 앞장에서 이미 고찰한 바 있는 역사서들에 또 하나의 주요한 역사를 덧붙이게 된다.

1. 신명기 역사서

2. 제사장 문서

3. 역대기 사가의 저작

 신명기 역사는 모세의 마지막 날들로부터 시작하여 국가의 멸망과 백성들의 포수로 끝난다. 역대기 사가의 저작은 다윗의 출현으로 시작하여 주전 400년경까지의 포로기 이후 시기를 다루는 이야기로 끝난다.

 

역대기 사가의 제사장적 관점

 신명기 역사서와 역대기 상하를 병행되는 기사 끼리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사무엘상 15장부터 열왕기상 2장까지의 다윗 이야기와 역대기상 10-29장에 나와 있는 다윗의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역대기 사가의 저작에서 과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역대기 사가들이 사무엘-열왕기의 전승을 다루면서 어떻게 선택하고 생략하고 추가했는지를 살펴봄으로서 이 역대기 사가들의 신학적인경향을 알 수 있다. 이 저작이 후대에 씌여졌으며 제사장적 관점이라고 해서 허구일 수는 없다. 이는 신명기 역사서에 포함되지 않은 자료나 그 당시에는 이용될 수 없었던 자료를 원천으로 씌여졌다. 근본적으로 역대기 사가는 이스라엘 역사의 수정판이다.

 

교직자로서의 다윗

 역대기 사가 저작의 저자들은 다윗의 정치적 역량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이 저작을 쓸무렵에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의 나라가 아니 였기 때문이다. 다윗의 군사적인 업적과 다윗 왕국의 광휘를 찬양하였다. 언약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상적이 왕이요 ‘메시아’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예배공동체로 조직한 인물이었다. 역대기 사가의 저작의 저자들이 다윗에게 교회의 의상을 입힘으로써 인간 다윗의 모습은 가리워 지는 경향이 있다.

 역대기 사가의 저작은 다윗의 ‘메시아’적 지위 다른 지위였다. 다윗의 ‘교직자다운’ 관심을 보여주는 전승 속에서 상당한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윗이 이스라엘의 예배의식, 특히 악기를 사용한 음악에서 변화를 가져왔다는 역대기 사가의 주장에는 상당한 진질성이 있는 듯하다.

 

교회로서의 이스라엘의 역사

 역대기 사가는 다윗으로부터 예배 공동체가 기원하였다는 기사로부터 시작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교회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역대기 사가는 에스라-느헤미아서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사가는 고레스 칙령이 내려서 충실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지를 말한다. 후에 에스라가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주도하였고 성벽의 재건과 사회적, 종교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스라엘은 포로 되었던 곳으로부터 하나의 국가로서가 아니라 종교적 공동체로 돌아왔다.

 

스룹바벨이라는 순

 

 여기서는 고레스 칙령에 호응하여 공향 땅으로 얼굴을 돌린 개척자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는 바벨론으로부터 대대적인 민족이동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숫자는 훨씬 적었고 여레세대에 걸쳐 이주 했을 것이다. 그 동안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사업도 번창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불확실성과 불안저안이 기다리고 있을 황폐한 예루살렘을 향한 길고도 험난하며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여행길에 오르는 것은 힘든 일이 였을것이다.

 

팔레스타인 공동체 내부에서의 긴장들

 스룹바벨이 행정 당국자가 되어 있었을 때 그들은 제단을 세우는 일과 기초를 놓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레스 치세의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팔레스타인 공동체 내부의 논란들과 갈등들로 인해 복구 사업은 방해를 받았다.

 결국 이 긴장은 뚜렷한 적개심으로 발전되었고 세겜을 굽어보는 그리심산 위에 예루살렘 성전에 대항하는 사마리아 성전을 건축하는 일로 이어졌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사마리아인들은 앗시리아가 그 지역에 이주시킨 이방인들과 뒤섞임으로써 타락했다. 하지만 사마리아 인들은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스룹바벨에게 제의를 했지만 스룹바벨은 이러한 제의를 일축해 버린다. 이밖에도 두 백성들 사이에는 경제적, 정치적 경쟁관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기도 하다.

 

학개와 스가랴의 시대

 위의 일들로 18년의 공백기간이 지난 주전 520년 다리우스 1세 제2년에 성전 재건작업은 재게 되었다. 그리고 다리우스가 왕위에 올랐을 당시 페르시아의 여러 속주들은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반란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우스는 이 반란들을 잠재우고 베히스툰 바위 위 높다란 곳에 거대한 부조와 3개 국어로 된 비문을 새겨 놓았다. 유대인들은 다윗 가문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 했다. 또한, 주전520년 바벨론의 혁명이 확실한 성공을 거둔 것에 고무된 학개는 자신의 말 속에 민족주의의 설교를 하였고 새로운 성전에 대한 꿈을 심었다.

 약간후대의 스가랴 예언자도 이와 같은 예언을 하였으나 초기 때와는 달리 기이한 이상들과 야훼의 원수들이 분쇄되고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극적인 피날레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다.

 

제2성전

 성전건축의 과정을 보면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나라를 부활시키려는 소망이 크게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공동체의 지도력은 이제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부여 되었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은 성전 중심의 공동체, 제사장들의 나라가 되는데, 역대기 사가에 의하면 이것은 다윗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전의 성전과는 달리 소박한 새 성전 이었지만 포로기 이후 시대에 이스라엘의 삶의 구심체와 보루 구실을 하였다. 부족한 건축미는 백성들이 거기에 쏟아 부은 헌신과 야훼께서 그곳에 거하신다는 확신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이 성전의 예배의식이 참여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회당이 포로기 이후 시대에 팔레스타인의 촌락에 군데군데 생겨나기 시작하였고, 이 회당은 이스라엘의 삶과 사상에 기은 영향을 미쳤다. 예루살렘의 성전의 예배에 참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순례하기도 했다.

 

재건과 개혁

 

 성전완공으로부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나타날 때까지 대략 3세대의 간격이 있다. 이때는 페르시아의 문화는 절정에 달했는데, 에스라의 위대한 문화적 개혁으로 넘어가기 위하여 이 시기를 건너 뛰고 있기 때문에 유대인의 정보가 빈약하다. 몇몇 예언서들이 어느 정도의 빛이 될 것이다.

 

에돔에 관한 오바댜의 규탄

 오바댜의 예언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영토의 일부를 점령한 에돔에 대한 신랄한 공격을 퍼 붓는 내용이다. 오바댜의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587년 이후나 주전 5세기 이전에 씌인 것이 틀림없음이 발견된다.

 

신실한 예배를 위한 말라기의 탄원

 말라기의 시대는 유대인 공동체는 페르시아 총독이 통치하였다. 하나님의 호의 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제사에 오염된 음식을 바쳐 야훼를 욕되게 한했고, 이로 이스라엘이 신실치 못하고 배은망덕한 행위를 날카롭게 부각시킬 뿐이라고 예언자는 말했다. 왜냐하면 야훼는 가장 좋은 제물과 가장 성실한 예배만을 받아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사회적으로 종교가 눈에 보이는 유익들을 가져다주지 못해 하나님을 불성실하게 섬긴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야훼의 제사장을 향한 의도는 무엇보다도 제사장들을 연단시켜서 그들이 야훼께 “의로운 제물”을 드릴 수 있도록 깨끗케 하는 것이었다. 이로 의인과 dr인을 가려내는 일은 시작되고 있는데, 이는 야훼를 경외하는 사람들의 이름은 “기념책”에 기록하고 그들을 심판날에 건지기 위함이라고 예언자는 말했다.

 

 

 

요엘과 메뚜기떼

요엘은 주전 500년과 350년사이의 어느 시기에 살았던 것으로 학자들은 믿고 있다.

그시기야 어쨌든 그가 설교하게 된 계기는 고대 팔레스타인에 흔히 있었던 그 땅을 황폐화시킨 메뚜기떼의 재앙이었다.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아마 가을의 신년축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회개와 애통의 큰 금식을 행하라고 촉구하였다. 요엘의 예언은 야훼의 날에 관한 포로기 이전의 설교를 생각나게 하지만 포로기 이후의 묵시문학에서 찾아볼수 있는 것과 같은 우주적 이변에 관한 서술도 담고 있다.

 

사건들의 순서

역대기 사가 저작의 저자들은 에스라가 먼저 왔으며 그는 아닥사스다 1세 제7년, 즉 주전 458년에 예루살렘에 나타났다고 믿었다. 그런 까닭에 역대기 사가의 도식에서 주전 515년 성전 완공 후의 다음 사건은 주전 5세기 중엽 시온주의자들을 대동하고 에스라가 귀환한 사건으로서 무려 반 세기 가량을 건너 뛰고 있다. 예루살렘에 당도한 얼마 후에 에스라는 백성들을 수문으로 모아 놓고 모세의 뮬법책을 읽어 주었다.

근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활돌시기가 겹친다는 가정 위에서 역대기 사가는 이 사건 전후에느헤미야의 회고록을 배치하였다.

 

첫판은 주전 520-515년에 성전을 재건하던 때에 편찬

두 번째는 450년경에 편찬

세 번째판은 주전 400년경에 이루어졌다.

최종판에서는 역사적 기록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하여 관심을 가진것이 아니라 에스라의 개혁을 부각시키는데 주로 관심을 가졌다.

 

이문제의 견해에 의하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같은 시기에 일했고, 적어도 그들의 활동시기의 일부는 서로 겹치기는 하지만 에스라가 먼저 예루살렘에 당도했다는 것이다.

 

유대교의 설립자 에스라   

우리의 연대표가 정확하다면,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사람들을 이끌고 두 번째 팔레스타인으로 왔다. 나중에 온 느헤미야와는 달리 에스라는 정치적인 직책을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받고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페르시아 제국의 승인하에페르시아의 다섯 번째 태수령에 속하였던 예루살렘과 유다의 종교적인 문제들을 조사하고 규율하기 위하여 온것이었다.

에스라의 첫 과제는 유대인의 정체감을 유지하고 이스라엘의 전승들을 보존하는 데 언제나 근본적으로 중요하였던 가문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방인들과 통혼,특히 비유대인 여자와의 결혼에 대하여 엄한 조치들을 취했다. 이러한 정책을 집행하는 그의 권세는 두가지로 보는데 첫째 그는 칙령을 시행하는 재판관들과 행정가들의 임명에서 페르시아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었고, 둘째 더 근본적으로 그는 모세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승, 특히 언약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의무들에 호소하였다.

 

 

언약갱신의 의식

에스라가 바벨론으로부터 가져온 보따리 안에 들어 있는 중요한 품목들 가운데 하나는 “모세의 율법책:의 사본이었다.

백성들은 율법책의 지시 사항에 따라 초막절을 지내기 시작했고 그들은 나뭇가지들을 잘라 이 7일동안의 절기에 머무르게 될 초막을 지었고 이 절기를 지내는 동안에는 율법책의 낭동이 계속되었다. 에스라가 주관한 언약의식은 요시야가 주관한 언약의식과 마찬가지로 성소에서 주기적으로 행해졌던 언약갱신이라는 고대의 전승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율법책이 회중들에게 낭독 될 때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레위인들의 역할이었다.

 

에스라의 율법책

에스라가 낭독한 율법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결법전,제사장법전,에스겔의 복구 계획 신명기 오경이었다는 등 다양한 제안들이

있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에스라가 율법책의 낭독을 끝내는 데 걸린 시간을 계산함으로써

이문제를 해결한수 있다고 생각 한다.

근데 에스라의 가장 큰 공헌은 오경을 유대인들의 신앙과 생활에서 권위있는 정경으로 확립한 것이었다. 에스라는 아마 오경을 공식적으로 이정된 모세의 전승으로 소개 하였고 자신의 제의 개혁을 통해 이스라엘의 삶을 이 규범에 맞추도록 했을 것이다.

 

사마리아의 오경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전개된 긴장관계는 율법(오경)의 권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의 해석, 특히 누가 율법의 참된 백성이냐라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 주전4세기 중엽쯤에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심산에 자신들의 성전을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오늘날까지 사마리아인 무리가 그리심산 근처에 살고 있다.

그들의 제사장들은 방문객들에게 오경의 두루마리를 자랑스럽게 펼쳐보이는데 그들의 종교는 오경이라는 단 하나뿐인 경전을 토대로 하고있다.

 

느헤미야의 총독 재임 기간

대체로 느헤미야서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기록한 느헤미야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하고있다.

이것은 자서전이라는 양식으로 씌어진 한 사람의 활약에 관한 연속적인 이야기로서 구약에서 찾아볼수 있는 유이란 예이다 . 느헤미야 서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 기록이며 하나의 이야기로서 참심하고도 흥미로운 방식으로 씌어져 있다.

그 흥미로운 방식으로는 어떻게 그가 총독의 권한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갈수 있도록 왕을 설득 시켰고  백성들을 일으켜 도성의 방비를 재건하였으며 52일만에 그 사업을 완성시킬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노래하고 감사하는 분위기 가운데 그 성벽을 봉헌되었는지를 말해준다.  

 

느헤미야의 개혁

느헤미야는 주전 432년에 시작된 자신의 두 번째 총독 임기 동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첫 번째 총족 임기 전체에 걸쳐 유대인들을 긴밀하게 결속된 공동체로 묶어 놓기 위하여 여러 개혁조치들을 시행하였다.

느헤미야에 의하면 유다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은 두가지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1 출생에 의한 것이다.

:적법한 적법한 가문에서 태어나 유대인 부모와 할아버지 등을 자신의 조상으로 내세울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임기 기간에 느헤미야는 신명기의 규정을 바탕으로 다른 민족들과의 통혼을 엄격히 금지시켰고 격노하였다. 그리고 에스라는 이러한 개혁조치들을 한층 더 밀고 나갔다

 

정체성 위기

느헤미야의 정책에 의하면 유대인이 되는 또하나의 자격 요건은 율법에 대한 충성과 성전에 대한 신실한 후원이었다. 그는 성전에서의 정기적인 옙의식을 조직하였으며 백들들에게 십일조를 바쳐서 성전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을 부양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렇게 유대인 공동체 둘레에는 철통같은 울타리가 둘러쳐졌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의 성벽이 아니라 출생과 종교적 충성을 바탕으로 한 베타주의의 울타리였다.

그러나 결국 민족들과 문화들에 대한 변화력으로 불타올라서 서구문명의 진로를 새로운 통로로 변화시켜놓은 정신적인 유산을 보존했던 것은 바로 이렇게 스스로를 얽어매놓은 공동체였다,

 

율법과 예언자들

이스라엘 신앙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은 아마도 모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수 있는 십계명은 하나니믜 명령에 대한 고대의 증언이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울법 전승은 이스라엘이 새로운 역사적 상황들에서 “야훼께서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직면함에 따라 확대되었다.

 

은혜와 율법

우리가 앞에서 거듭 보아 왔듯이 자비의 행위들 가운데서 먼저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백성들을 감동시켜 그들로 하여금 마음과 존재와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응답을 가져온 것이었다. 위대한 사회 개력의 토대였던 신며기는 은혜가 울법에 우선한다는 이스라엘의 이해를 아주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독특한 삶의 이야기에 대한 공동체의 회상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은 여기 기도의 두드러진다. 이 기도에서는 야훼의 은혜로운 주도권과 구원 활동이 울러퍼지고 있다. 이러한 선언을 바탕으로 백성들은 언약을 갱신하고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야훼를 섬기겠다고 스스로를 헌시하였다.

 

율법 안에서 즐거워함

랍비들의 계산에 의하면 율법에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율법 조항이 613개가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구약 시대와 그 이후의 랍비 시대에서조차도 유대인들의 태도는 율법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율법에 복종하는 것은 랍비들의 표현을 빌면 왕국의 멍에를 스스로 짊어지는것 즉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 이었다.

그리고 경건한 유대인은 율법을 공부하는 것에서 큰 기쁨을 느꼈다.

왜냐면 율법은 생명과 축복의 워천이었기 때문이다.

 

 

예언자와 제사장

이스라엘의 신앙은 본질상 합당한 예배와 사회적 책임을 통해 야훼를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에의 참여를 요구하였다.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감사하는 의무를

나타내는 희생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예배자들은 찬양의 행위들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행하셨던 것을 인정하였다. 신명기의 나오는 작은 ‘신앙고백’은 성소에서 드리는 ‘제의 행위’ 곧, 추수의 맏물을 바치는 것과 관련하여 행해졌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의 문맥이 분명히 보여주는 바와같이 이 장엄한 고백은 하나의 예배 행위였다.

또한 예언운동도 제의로부터 생겨났다. 초기 예언자들의 다수는 성소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있었던 ‘제의예언자들이었다’ 사실 모든 위대한 예언자들, 심지어 제의를 아주 철저하게 비판한 예언자들까지도 모두 제의에 의존 하고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교의 약점들

유대교에는 약점들이 있었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약점들은 점점 더 뚜렷해졌다

성전의 의식들은 너무도 자주 깊은 통회와 진지함과 예배의 기쁨이 결여된 공허한 형식들이 되어 갔다. 더욱이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베타주의 정책은 나중에 오졸하고 완고한 전망으로 발전하여 심지어 “율법이 없는 시시한 족속들”에 대해 경멸적인 태도를 취하기까지 했다.

족보나 할례나,안식일,율법의 많은 사소한 것들에 대한 세심한 준수를 바탕으로 선민 공동체의 경계를 사람-하나님이라- 이 정할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너무도 쉬웠다.

 

 

제16장  이스라엘의 찬양

이스라엘은 자신의 역사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즉 역사의 드라마 속에서 ‘하나님과의 동반자 관계’로 이해하였다. 구약성경은 야훼의 권능있는 행사들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의 행사들을 회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온전히 인격적인 방식으로 야훼께 진언하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대상이 아니라 야훼와 함께 대화하도록 선택되었기 때문이었다.

 

시편

이스라엘이 야훼와 대화를 나눈 것을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예들은 흔히 시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편은 다윗 시대로부터 구약성서의 후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과 함께 한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체 드라마에 관한 집약된 기사이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 상황을 이야기 하는 시편 137편을 제외하고는 특정한 시편들의 내용이 그것들이 지어진 시기와 상황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시편에 관한 연구를 많은 세대의 찬송과 기도들이 주전 515년에 완공된 제2성전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편찬된 유대교의 시대라는 배경 안에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심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야훼에 대한 예배를 자신들을 결속시키는 일차적인 끈으로 삼았던 언약 공동체였다.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멸망 후에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들의 첫 번째 생각은 성전을 재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모든 사회적 변화와 역사의 흥망성쇠를 통하여 근본적인 실체는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시편의 많은 내용들이 개인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들로부터 지어졌지만, ‘나’, ‘나의’라는 대명사가 사용 되었어도 그 신앙을 표현하고 있는 공동체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신앙에 의하면, 성일 또는 축제의 때에 회중이 함께 성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야훼는 임재해 계신다(찬송중에 거하신다)고 한다. 개인은 예배하는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한다.

 

제2성전의 찬송가

  현재 형태의 시편은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산물이다. 시편이 이 시대의 예전 관습을 반영하고 있는 한 시편을 ‘제2성전의 찬송가’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시편은 주전5세기경부터 2세기경까지 여러 단계들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 이는 제1집부터 제5집까지의 다섯권의 책들로 구성된다. 시편을 이러한 다섯 권으로 배열한 것은 토라의 다섯 권을 본뜬 것으로 보인다.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의 예배

  대부분의 시편들이 어디에서 기원하였으며 얼마나 일찍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양식비평’으로 알려진 연구방법론을 적용하면 시편에 반영되어 있는 포로기 이전의 이스라엘의 예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 시편은 세 가지 주요한 범주로 나누어지는데, 첫 번째 장르는 예배하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위엄과 신실하심을 송축하는 찬송시편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주권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문제 상황을 전제로 하는 탄원시편,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찬양을 표현하는 감사시편이다.

 

예배하는 이스라엘

한 백성의 예배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세상과 어떻게 관련을 맺고 있는가에 대한 확신의 표현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에 의하면 거룩한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들어와서 역사를 만들며 역사에 개입하여 압제 받는 자들을 구원하고 오만하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낮추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찬양의 시작은 하나님이 행하셨고 행하시고 계시며 앞으로 행하실 것에 대한 묵상이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역사적 체험들에 의거하였다.

 

찬송시편

  찬송시편은 역사와 창조의 행사들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크심과 선하심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예배로 부르는 명령법으로 시작된다. 그 다음 찬양을 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는 부분이 나오고, 마지막은 맨 처음에 나온 음조를 되풀이하여 다시 한번 찬양하라는 부름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있다. 찬송시편의 구조를 보면

    A. 서론 : 예배로의 부름

    B. 본론 : 찬양의 동기

    C. 결론 : 반복

 

고통 속에서의 탄원시편

  야훼의 행사들에 관한 기억은 개인이나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현재의 고통스럽고 괴로운 상태에 관한 당혹감에 빠트릴 수 있는 효과를 가질 수도 있다. 이스라엘은 야훼께서 백성을 버리셨다는 느낌으로 때때로 고통스러워 했는데, 시편 전체의 1/3이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께 부르짖는 탄원시편으로 되어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유형의 시편들이 야훼에 대한 찬양이 인간의 슬픔을 통하여 울려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탄원시편은 야훼께서 놀라운 은혜를 보이시며 개입하신다면 고통의 상황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탄원시편의 문학형식을 보면

    A. 부름말 : 하나님을 부르는 말. 짧은 부르짖음이나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것

    B. 불평 : 공동체의 고통스러운 일이나 개인의 병이나 핍박, 죄의식과 같은 문제들

    C. 신뢰의 고백 : 문제 상황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함

    D. 간구 : 하나님의 개입/변화시키심을 호소

    E. 감사의 서약 :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행하실 것을 공동체 앞에서 증언할 것을 서약

 

감사의 노래들

  개인적인 감사의 노래의 주요한 특징은 회고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이다. 탄원자는 고통의 상황에서 야훼께 도움을 부르짖었던 때를 돌아본다. 그리고 이를 들으시고 해방하시는 은혜로 ‘새 노래’를 부른다. 개인적 감사의 노래의 독특한 문학형식은 시적인 변용(p.665)이다.

 

이스라엘의 순례 축제들

이스라엘이 지파동맹으로 조직되었을 때부터 중앙성소로 순례하는 것은 하나의 관습이었다. 언약법에 의하면 일년에 세 번, 무교절, 오순절, 장막절에 백성들의 대표자들은 야훼앞에 보여야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농경 축제들은 역사화되어 이스라엘의 거룩한 역사에 비추어 재해석 되었는데, 보리 수확기가 시작되면서 열린 봄의 무교절은 유월절과 연관되었는데, 둘 다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들로 되었다. 또한 밀 수확기 칠 주 후에 열린 오순절은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선물로 주신 것을 기념하였다. 해가 바뀔 때 열린 수장절(장막절)은 야훼와의 언약을 갱신하는 절기로 되었다. 이러한 중앙성소를 순례하는 고대의 관습은 왕정시대 전체에 걸쳐 지속되었고 제2성전의 완성 이후에 부활되었다.

 

언약갱신 축제들

  지파동맹 시대에 세겜에서 처음으로 열린 고대의 언약갱신 축제가 북왕국에서 부활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성경에 북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인 여로보암 1세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는 관습을 막기 위하여 자신의 영토 내에 가을 축제를 제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편 81편은 여호수아 24장에 나오는 언약 갱신에 관한 고전적인 기사와 아주 유사하다. 처음엔 야곱의 하나님을 예배하자고 촉구하고, 그 다음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신 하나님의 행사들을 이야기 하고, 공동체에게 야훼의 축복을 받으라고 호소한다. 이는 북부의 언약갱신 축제에서 나온 시편일 가능성이 높다.

 

예루살렘의 축제

  다윗은 지파동맹의 종교적 지지를 얻기 위해 언약궤를 자신의 수도로 옮겨왔다. 예루살렘 왕궁은 야훼께서 다윗 왕을 ‘하나님의 아들’로 세웠으며 시온을 중앙성소, 즉 야훼께서 성례들을 통하여 임재하시는 장소로 택하셨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왕과 성전에 관한 새로운 신학을 발전시켰다. 이는 솔로몬의 영향력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예배를 수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시온축제를 언약궤를 시온으로 메어오는 행렬과 다윗에 대한 은혜의 약속들을 언급하고 있는 예전적 찬송시편인 시편 132편에 반영되어 있다. 이 시편의 처음은 야훼에게 성소를 마련해드리겠다는 다윗의 맹세와 기럇여아림에서 언약궤를 발견한 사건을 말하고 있다.

 

성전과 왕

  ‘시온의 선택’과 ‘다윗왕조의 선택’ 이라는 이중의 강조는 시편에 들어 있는 두 부류의 시편들의 신학적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 부류는 시온 시편들인데, 이 시편들은 성전을 모시고 있는 성읍인 시온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야훼의 임재의 장소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야훼의 ‘기름부음 받은 자’ 또는 ‘메시야’인 통치하는 왕을 위한 기도들로 이루어진 제왕시편이다. 이스라엘은 왕의 임무가 우주적 질서의 질서와 공의를 인간 사회에 중재함으로써 자기 나라에 축복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주적 왕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멀리 있음과 지금 여기에 임재해 계심 모두를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영광으로 성전의 지성소를 가득 채우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주적 왕과 창조주로서 높이 들어올려져 보좌에 앉아 계심을 찬양했는데, 꽤 오랜 기간 동안 학자들은 이 찬송시편들을 ‘즉위 시편’이라고 하였다. 신화와 의식의 공통적인 패턴이 고대 근동에서 성행하였다는 가정 아래에서 즉위 시편들은 이스라엘과 열방들과 우주에 대한 야훼의 왕권을 노래와 의식과 행렬을 통해 송축하기 위하여 해마다 열렸던 ‘등극 축제’를 제의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되어 왔다. 다른 분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배 분야에서도 이스라엘은 주위의 문화 환경으로부터 많은 것을 빌려왔다. 그러나 이렇게 빌린 것은 이스라엘의 언약 신앙이라는 연금술을 통해 녹여져서 왕이신 야훼에 대한 찬양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한 예로 홍수 또는 바다에 대한 신의 승리를 이야기하는 고대의 신화는 야훼께서 모든 세력들, 특히 세상을 흑암과 무의미한 혼돈에 빠뜨리고자 위협하는 역사적 원수들에 대하여 승리하신다는 신앙을 표현하기 위하여 채택되었다.

 

토라를 묵상함

  앞에서 성전예배, 주로 큰 축제들과 관련하여 사용하기 위하여 찬송시편과 탄원시편과 감사시편들을 모아놓은 모음집으로서의 시편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성전에서의 야훼예배를 전제하지 않았던 비제의적 시편들도 있었다. 이런 유의 시편들로 대표적인 것들은 토라를 묵상하는 가운데 기뻐한다는 것을 중심주제로 삼고 있는 부류의 시편들이다. 토라 시편들의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토라에 대한 연구가 사람을 지혜롭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주제이다. 이는 시편 1편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의인은 시냇가에 심겨져 때를 따라 과실을 맺으며 늘 푸르른 나무에 비유된다.

 

 

제 17장 지혜의 시작

철학을 직역하면 지혜의 사랑이 된다. 우리의 철학적 전통의 원천인 고대 헬라인들에게서 지혜의 탐구는 최고도로 성숙되고 세련되었는데, 특히 페리클레스 시대의 소크라테스로부터그 이후 세대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가 전성기였다.

그러나 헬라인들의 지혜의 사랑은 문화, 민족, 인종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알수 있다.

지혜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사 이기 때문이다.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바벨론인이든 이집트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왕이든 노예든 지혜에 대한 추구는 삶의 의미에 대한 추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구는 모든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관심사이다.

 

동방의 지혜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설된 헬레니즘 제국에서 동방과 서방이 만나기 오래전에 지혜에 대한 추구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 특히 이집트와 바벨론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혜저작들의 기원은 이집의 피라밋 시대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지혜에는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었다.

 

지혜자의 개인주의

지혜문학의 또다른 특징은 지혜가 개인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지혜자들은 말하자면 인간 실존의 문제를 깊이 파헤치기 위하여 역사를 정지시켜 놓았다.

그들은 한 민족의 유일무이한 역사의 반복될 수 없는 사건들과 역동적인 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모든 개개인이 참여하고 있는 반복되는 체험들과 고정되어 있는 도덕 질서에 괌심을 가졌다.  

 

이스라엘의 지혜문학

아주 초기부터 이스라엘은 자기 나름대로의 지혜운동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운동은 이스라엘 문학의 영역들 -즉 역사문학, 예언문학, 시문학 -에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행사하였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은 이스라엘의 역사신앙에 완전히 젖어들게 되었는데 이것은 토라와 지혜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에서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러한

동일시는 신명기적 전승, 예를 들면 이스라엘에게 연약의 계명들과 규례들로 권면하고 있는 모세의 설교들 중의 하나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지혜문학과 이스라엘의 거룩한 유산과 완전한 동화에서 절정을 이룬 고유한 지혜운동은 왕정 초기, 특히 솔로몬 시대에 시작되었다.

 

지혜자의 충고

지혜자는 삶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에서 나온 통찰력으로 수많은 세월의 경험과 고대 지혜의 자원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사용하여 충고를 하였다. 통찰력의 ‘초자연적인’ 원천들에 의존하고 있던 제사장과 예언자와는 달리 지혜자의 충고는 ‘합리적’ 또는 ‘경험적’ 관찰을 토대로 하였다는 말을 흔히한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성’과‘신앙’ 이라는 이러한 구별

이 없었다 지혜는 단순히 높은 지성과 진지한 연구, 오랜 세월의 경험에 의거한 인간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졌다. 이스라엘의 전승의 의하면 지혜의 은사는 솔로몬에게 가장크게 내렸으며, 그는 아주 지혜로운 통치자였기 때문에 그의 지혜에 대한 명성은 자신의 제국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 알려질 정도였다, 그리고 다읫의 궁정 고문 가운데 한 사람인 아히도벨의 충고는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으로 여겨 졌다. 즉 그의 충고는 실제로 예언적인 권능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솔로몬, 이스라엘의 수호 지혜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셨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솔로몬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문화적인 영햑을 극히 환대하였으며 또 페니키아와 이집트와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졌다는 역사 기록에 의해서 확증된다.

이스라엘이 이전의 지파동맹이라는 틀과 그것에 수반된 제한적인 종교 제도들 및 시야들을 깨고 자신의 신앙의 지평을 모세 언약의 유산의 경계선 너머로 넓힌 것은 솔로몬 시대였다.

이 때 시대정신은 사회샐활에서 ‘인간적인’요소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일부 계층에 있었다는 의미에서 ‘세속화’의 시대(물론 이 말은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한다.)였다. 이러한

경향의 일면은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의 개입이 없는 상태로 궁정에서 벌어진 일련의 행동의

인간관계를 묘사하고 있는 다읫의 궁정사에서 엿볼수 있다.    

 

잠언의 선집

1. 1-9장 ‘솔로몬의 잠언’

2. 10:1-22:16 ‘솔로몬의 잠언’

3. 22:17-24:22 ‘지혜 있는 자의 말씀’

   24:23-34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라’

4. 25-29장 ‘히스기야의 신하들의 편집한 ...솔로몬의 잠언’

5. 30장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

6. 31:1-9 ‘르무엘 왕의 말씀’

7. 31:10-31 현숙한 아내에 대한 알파벳 시

 

대체로 1-4번은 솔로몬의 전승에 속하고 나머지는 외국에서 기원한 것들이라는 점을 주목할수 있다. 그리고 이 네 가지의 솔로몬 전승안에서도 많은 학자들은 두 번째 모음집을 잠언의 가장오래된 부분으로 본다. 첫 번째 모음집은 흔히 가장 후대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부분 안에 들어 있는 가나안적인 요소들에 비추어볼 때 몇몇 학자들은 적어도 그 일부는 포로기 이전의 전승에 속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잠언이 구약시대 거의 전기간에 걸쳐 있는 복잡한 전승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인 잠언들 

잠언들 가운데 많은 수가 다소 ‘세속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물론 이 용어는 너무 현대적이서 잠언들을 완전히 올바르게 대우 했다고 볼 수 없지만 가장 오래된 잠언들은 세상에 대한 긍정적이고 건전한 관점을 보여준다. 인간행동의 여러 과정들을 성찰하면서 지혜자는 선한 삶은 근면과 절제와 사려분별을 통해 얻어 질 수 있으며 이 선한 삶의 표지로는 성공과 번영과 장수와 보람있는 삶이 있다고 주장한다.

잠언들 중 많은 수는 충만한 삶의 성취를 방해하는 일산적인 문제를 다룬다.

:게으름,술취함, 매춘부와의 관계, 지혜롭지 못한 상거래 등등 ..

그러나 ‘세속적’ 으로 보이는 이 충고에는 종교적인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를 맺는데 주도권을 가졌으며, 언약의 율범에의 순종은 번영과 성공을 보장해주었고 반면에 불순종은 곤경과 재난을 초래하였다.

각각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주도권에 의존하고 있는 이 두가지 관점의 융합은 결국 이스라엘 전승의 역사 속에서 토라와 지혜를 ed일시하는 경향을 촉진시켰다.

 

야훼를 경외함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에 의하면 참된 지혜는 야훼의 주권을 이정하는 사람, 거룩하신 분을 ‘경외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온자는 것이다.

성경의 지혜문학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야훼를 경외함’이라는 모티프는 일찍부터 이스라엘의 종교 전승들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러나 지혜 교사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언약 전승들에 속하였던 신학적인 관심들을 발전 시켰다.

사람들은 만유인력의 힘을 무시하고 말을 절벽 위로 몰거나 바다를 황소로 건너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위반할수 없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들은 이러한 가르침에 동의하였지만 도덕적 질서는 야훼의 통제를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움직인다거나 야훼는 고정된 창조 질서에 속박되어 있다고 까지는 말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고 본다.

거룩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으로서 야훼는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러므로 도식은 때때로 자유로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산산이 깨어진다.

 

신학적 지혜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은 거친‘세속성’으로부터 신학적으로 세련되고 성숙된 것을 향하여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처음에 지혜자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인정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지혜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성찰하는 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유대교의 시대에 신학적 지혜에 대한 커다란 관심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후대의 지혜자들은 처음부터 존재하였던 지혜의 종교적인 차원들을 토대로 덧붙이고 정교화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지혜라는 여인

지혜라는 여인과 대조적으로 어리석음이라는 여인이 자기 집 문앞에 앉아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유혹하는 매춘부로 묘사된다.

또다른 구절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의 대리자로 묘사된다. 요한복음의 서무과 유사한 듯한 언어로 그녀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창조의 사역 속에서 기뻐한 하나님의 자였다고 한다. 몇몇 학자들은 이러한 지혜의 의인화와 이집트의 ‘마아트’ 라는 인물과의 유사성을 발견하였는데 이 둘은 우주적인 질서 원리와 창조의 신 아툼의 딸인 여신으로 여겨졌다.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

지혜자와 어리석은 자, 의인과 악인이라는 두 분류로 갈라놓는다고 한다.

이러한 분류는 잘 알다시피 자유롭게 이루어진 결과이다. 그것은 선천적인 지성,사회적

신분, 올바른 교리와는 아무 상관이없다.

‘어리석은 자’ 는 지성이 결핍된 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런 사람은 오만과 정욕으로 지혜의 정도를 거스려 결정했기 때문에 그 결정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자는 두가기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다, :생명의 길을 따르는 사람과 죽음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 이다.

 

전도서의 회의주의

지혜전승의 긴 역사를 총망라하는 ‘모음집들의 모음집’ 인 잠언과는 달리 전도서는 근복적으로 포로기 이후 시대의 후기, 아마도 주전 250년과 200년 사이에 씌어진 한 지혜자의 작품이다. 유대교 및 그것의 단순한 ‘신명기적’ 상벌 교리에 대한 전도서의 대담한 도전은 좀더 정통적인 종교적 감수성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결과 이 책은 입맛에 맞도록 여기저기 손질이 가해졌고 두가지 결론이 덧붙여졌다. 잠언들의 경중을 비교하고 연구하고 정리한 이 지혜자의 재능을 찬양하였고 또다른 편집자는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없이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한다라고 말하면서 이 가르침을 소금을 뿌려가며 받아 들여야 할것이라고 독자들에게 경고한다. 이 편집자의 따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이 책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의 근복적인 주의 , 주장은 여전히 견재한다는 것이다.

 

수심에 잠긴 전도자 

전도자는 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유한한 삶의 한계들을 인식하고 신중하게 행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약간의 가치는 있다고 인정한다. 지혜는 열 명의 통치자보다도 더 큰 힘의 원천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지혜를 통하여 얻어지는 유익이 정말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지혜와 더불어 슬픔이 많아 지고 결국에는 지혜자에게나 어리석은 자에게나 똑같이 죽음이 다치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동안 최선의 삶을 살며 현재를 누릴것이지 미래를 내다보려고 애쓰지 말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지혜는 그 실제적인 가치에도 불구하고 삶의 신비에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궁극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목적

전도서가 어느정도 헬라 문화의 정신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것같다.

이것이 그가 숨쉬고 있던 환경이었으며, 현대 저술가들이 20세기 과학정신의 영향을 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헬레니즘의 정신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헬라의 개념들이 근복적으로 코헬렛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삶에 대한 비관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코헬렛은 하나님이 인간사를 주재한 다는 학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삶의 비극은 헬라 문화에서 처럼 운명이라는 불가항력 적인 힘이 사람들과 신들을 모두 지배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는 탐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시각에서 볼 때 삶은 까닭도 이유도 없다는 것에 있다.

 

우리의 삶의 때들 

코헬렛은 시간에 관하여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인 ‘때들’-즉 특정한 내용 또는 목적을 지닌 때들-에 관하여 쓰고 있다.

우리가 ‘지금이 때가 무르익었다’ 라거나 어떤 행동을 ‘시의적절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때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행동을 요청하는 기회이다.

근데 문제는 인간은 자신의 제한된 지혜로 삶의 다양한 체험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쇄도해오는 전체적인 목적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죽어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보다 더 비참하다. 왜냐하면 -매튜 아놀드의 어구를 사용하자면- 인간은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또 전체적으로 바라보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코헬렛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고 증언한다. 죽을 운명을 타고난 인간은 하나님의 목적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는 장막 너머로 들여다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의

경험들의 무의미함에 당혹한다. 만약 인간이 모든 때들을 의미있게 엮는 실마리를 분별할 수 없다면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에는 헛되다는 판결이 내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문제

인간은 죽을 운명을 타고 났다. 인간 속에는 불멸하거나 ‘죽지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점에서 인간은 동물보다 나을 것이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죽으면 ‘다 한 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오직 현세에서만 소망이 있다.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낮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자는 비관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에 의하면 두가지 길에 관한 교리도 경험에 비추어 진리가 아닌 것 같다.

그는 지혜자는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보다 행복하고 아예 태어나지 않은 것이 이 둘보다 더 낫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혜와 어리석음의 중간에서 중용을 지키라고 권고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재앙을 불러오게 되기 때문이다.

 

절망의 그림자

물론 코헬렛은 예언자들이나 제사장들의 방식을 따라 하나님의 가르침을 베푸는 것처럼 하지 않고 오히려 경험과 성찰에서 나온 교훈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의 신학의 기본적인 주장은 하나님은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중요한 예를 들자면 예레미야의 고백록에는 그림자 같이 신앙에 뒤따라 다니는 시련들에 관한 묘사가 있다. 전도자는 절망의 그림자 안에서 글을 쓴다. 그에게 하나님은 초월하신 분이고 완전히 다른 분이며 무한한 간격을 두고 인간과 떨어져 계신 분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에게 의문을 제기할 여지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보다 강한 자와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그러나 코헬렛은 이 모든 말을 야훼를 경외함 이라는 관점에서 즉 신앙 속에서 하고 있다.

하지만 전도서는 전통적인 지혜가 하나님의 목적을 분별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논박이다. 잠언의 지혜자들은 지혜는 모든 여행자들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코헬렛은 인간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해아릴 수 없기 때문에 지혜가

그런 일들을 하나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욥기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지혜문학

- 악과 신정의 문정을 다루고 있다 - 악고론 -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욥의 성급함

                욥기는 운문으로(詩) 쓰여졌다.

                욥은 인내의 귀감이 아니다- 많은 이들은 경건의 모델, 인내로 승리한 사람으로 그림

                욥은 자신의 태어난을 저주하고,  하나님께 항변하고 울부짖는다

 

                하나님의 호의로 의롭고 잘된 축복의 사람  욥을 - 천상회의에서 the Satan 이 고소한다

                어찌 까닭없이 여호와를 경외하는가? 그것은 이기심이 원인이다. - 고소자(천사)

                결국 야훼의 허락으로 욥을 상하게 함 아이들을 죽고, 아내는 떠남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찾아와서 위로 함 - 입으로 범죄치 않음

                하나님의 갑절의 축복 - 잘 살았다

 

산문과 운문의 관계

                산문(기) 1.2장--- 운문(승,전) Shaddai, Eloah =잠언, 전도서 ----- 산문(결)야훼 43-45장

 

                운문- 민간설화에서 기원 - 전승의 오래됨을 말해줌 - 운문은 거의 노래 - 고대에로부터 잘 알려진 전설에서 채용하여 사용

 

운문의 형식

                운문(중간 3-42장) - 욥과 친구들과의 대화 욥- 엘리바스 - 논쟁 , 욥- 빌닷, 욥-소발 × 3회전을 반복함

                후에 추가 - 엘리후의 등장 - 후대편집설(31장이후)

 

욥기의 저자

                1 우스 땅의 에돔 족장

                                우스는 에돔근처 팔레스틴 남동쪽에 위치

                2 팔레스틴 변두리 지방의  이스라엘의 지혜자

                               

                저작시기 - 제2이사야와의 관계 - 언어와 사상이 비슷- 욥기가 2이사야에게 영향을 준 - 고난받는 종의 모습 - 예레미야 시대와 - 제 2이사야 시대에 쓰여짐

                운문은 - 역사적인 인물의 나로서 여겨져서 일반적 악고론의 문제에 대한 질문으로 마친다.

 

욥기와 그 밖의 지혜문학

                욥기 배경이 되는 고대근동의 수많은 지혜문학이 있다

                ‘바벨론 욥기’가 있었다 - ‘인간 비참에 관한  대화’

                이집트 : 말 잘하는 농부의 항의/ 자살에 관한 논쟁/ 삶에 지친 자의 자기 영혼과의 논쟁

                욥기 저자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 아리비아, 에돔 영향을 받았다

 

                절망에서 신앙으로

 

                어떻게 절대선과 절대악이 하나님의 본성안에서 조화를 이룰수 있나? - 철학적 논쟁

                결론부에 야훼가 회오리 바람가운데 나타나서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 - 욥처럼

               

욥과 친구들과의 대화

                고대근동의 문학속에 널리퍼진 - 상과 벌의 관계

                엘리바스 - 욥이 잘못이 있다 - 욥을 위로함

                욥이 잘못없을 강변하자 - 친구들은 욥을 비방

                친구들이 결국 - 욥의 오만을 공격 - 친구들은 정통주의 고수한다.

                친구들은 완고함으로 인해 욥에 대해 진정한 동정심을 가질수 없었다

 

욥의 프로메테우스3)적인 도전

                친구들의 조롱에 점점 화가 난 욥 - 죄없음과 순진함

                욥은 자신의 엄청한 불행에도 입으로 범죄치 않음

· 욥은 하나님을 의심하고 반역하고 도전하는 거인이 되었다

               

신원을 위한 욥이 탄원

                얼굴을 가리시는 하나님의 고통 - 너무 멀리있는

                욥은 자신의 신원자가 자신을 대신하여 대변하여주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시켜줄거이다

                자신의 과거 의로운 삶을 강변하고 -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람

 

회오리 바람으로부터 들려온 목소리

                엉뚱한 야훼의 대답 -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 38;1-40, 40:41-43 

                하나님은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태초에 우주 창조

                하나님은 아무도 당할 수 없는 능력으로 우주를 붙들고 있음

 

욥의 회개

                욥은 과장되게 아는 체를 했다 - 결국 하나님과 논쟁할 수 없다 - 회개

                재앙은 인간의 죄에 대한 마땅한 형벌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신정론에 대한 도전 - 하나님의 길에 대한 철학적 설명에 대한 도전이다.

                고통의 신비는 합리적 설명으로 불가능하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 하나님의 뜻안에서 부르받은 자들은 모든 것에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서 8:23

                신비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곤욕스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놀라움과 경이로움속에서 응답하는 신앙의 근본문제다

 

지혜에 관한 후대의 성찰들

잠언안에서의 지혜 : 독특한 인격, 여예언자, 땅의 토대

지혜는만물보다 먼저 창조

벤 시락의 지혜서

지혜는 하나님 창조의 대리자, 하나님과 세상의 중재자

구약의 지혜는 인간존재자체에 관심을 가짐 - 어쩌면 무역사

성서적 유대교 후기시대 - 이스라엘의 거룩한 역사에 관심을 가짐 - 유역사

지혜와 토라를 동일시함 ( 벤 시락의 지혜서) 지혜를 이스라엘의 민족화함 - 하나님의 구원활동과 연관

결국 지혜를 얻으려면 토라를 지켜야함 -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제18장 미완성의 드라마

역사의 침묵은 유다가 에스라와 느헤미야 이후 1세기 또는 그 이상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상황은 구약의 막이 내리기 전에 이스라엘 역사의 물줄기가 사나운 격랑 속으로 소용돌이치며 휘말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유대교 내부의 긴장들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기 오래 전에 페르시아인들은 광활한 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고, 이로 인하여 국민들의 시야는 넓혀졌고 무역로는 확대되었으며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사상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유다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사이에서 그들의 세력다툼에 휘말려 있었다. 하지만 이것보다 좀 더 지역적인 유대교 자체 내에도 문제가 있었다.

 

요나 이야기

  요나서의 저자의 메시지는 이스라엘 예언의 고전 시대에 살고 있었던 한 예언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 이것은 아밋대의 아들 요나가 아니라 저자의 세대에게 예언적 메시지를 충분히 납득시키기 위한 짤막한 이야기이다. 이 글은 아마도 포로기 이후 시대인 주전 4세기 페르시아 시대 말기에 씌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요나가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도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설교하도록 야훼에 의해 사명을 받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요나는 니느웨에서 설교하였고, 온 도성이 회심하여 야훼는 재앙을 내리기로 계획했던 일을 뉘우쳤다. 요나의 설교는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멸망의 선고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 위협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동정심은 넓고, 자비는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불합리한 자유가 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정책이 협소한 민족주의와 교조적인 배타주의를 양성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에 요나서를 쓴 익명의 예언서 저자는 하나님의 동정의 신비를 선포하였다.

 

에스더서

  요나서와 대립되는 또 하나의 이야기(소설)가 에스더서이다.

  이 책은 하나님 또는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들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하나도 없지만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에스더의 저자는 이스라엘과 아말렉족 사이의 해묵은 적대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구성하였다. 이 적대관계는 모세 시대에 시작되었고, 이스라엘 왕이 아말렉족들과 그들의 왕 아각을 희생제물로 삼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인 사울 시대에 그 절정에 달했다. 에스더서에서 이 적대감은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후손, 베냐민 지파 유대인 모르드개와 아각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 의해 구체화된다. 에스더서는 종교적인 문제들을 일부러 회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대인 성경의 책들 가운데서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조심스러운 태도는 술을 마시는 것이 허용된 부림절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에스더서의 세속성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고 오로지 언약에만 충실함을 보이도록 부르셨다는 확신이 깔려 있다.

 

헬레니즘 시대

주전 4세기 후반에 마게도냐의 알렉산더가 등장함에 따라 국제 정세는 달라졌다. 그의 군대는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휩쓸었고 주전 326년 무렵에는 현재 파키스탄에 있는 인더스강까지 이르렀다. 알렉산더는 헬라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밑에서 공부했는데, 헬라 학문이 다른 모든 학문보다 우월하다고 믿은 그는 고대의 문명을 헬라의 학문, 예술, 교양으로 발효시키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알렉산더는 주전 323년, 32살로 죽었는데, 그의 방대한 제국 중 동부지역의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는 셀류코스에게,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정치적 경쟁관계임에도 헬라 문화를 전파하려고 애썼다.

 

문화적 통일을 위한 싸움

  ‘헬레니즘’이라는 말은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에 의해 육성된 헬라식 문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헬레니즘의 전파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지는 국제적인 사업과 정치문제에 쓰이던 생활언어 ‘코이네’헬라어를 사용한 것이다.

  셀류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들이 문화의 중심지가 되기 위해 다투었는데 결국 프톨레마이오스가 이겼다.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적 우월성은 한편으로 지중해 세계, 다른 한편으로 아라비아 및 비옥한 초승달 지대와 이 도시의 전략적인 관계에 의해 더욱 높아졌다. 처음에 이 헬레니즘을 유대인들은 신앙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진보적 유대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온건한 보호정치 아래에서 헬레니즘을 환영하기도 하였다.

 

저항운동

  그러나 헬레니즘의 전파는 신앙과 문화의 관계라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였다. 이스라엘의 신앙이 세계 시장에서 팔려 나갈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질투하는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세게 저항한 사람들인 열심당이 있었다. 이러한 저항은 흔히 신명기적 개혁의 경우에서처럼 이스라엘 민족주의의 부활을 동반하였는데, 이는 후대의 바리새파의 선구자인 소외된 농촌 출신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으로부터 불타올랐다. 토라에 대한 열심으로 가득찬 이들은 조상들의 신앙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다.

 

유대인 박해의 시작

  시리아의 셀류코스 왕조는 지중해 해안지대를 손에 넣으려 하였지만, 이집트 지배 아래 있었다. 그런데 주전 223년에 안티오쿠스 3세가 안디옥에서 시리아 왕에 즉위하였다. 이집트와의 20년 이상의 전쟁 후, 주전 198년에 요단강의 발원지 가까이에 있는 파니아스에서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격파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팔레스타인을 자신의 정치적 세력권 아래 두었다.

  안티오쿠스 3세는 헬레니즘의 강력한 사도였다. 그의 정책들은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 광적으로 수행되었는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군림하였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반대하진 않았지만 정치적인 충성심을 시험하는 잣대로 제우스를 숭배하게 했다. 그는 나라에 돈이 부족해지자 과도하게 세금을 걷었는데, 이 때 가장 거룩한 직책인 대제사장직을 뇌물을 가장 많이 바친 사람에게 팔자 유대인들이 강하게 저항하였다. 유대인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안티오쿠스는 유대인의 종교를 불법화하고 유대인의 생활을 완전히 헬레니즘화하도록 하는 영을 내렸다. 이 칙령에 따라 자신의 자녀들을 할례시킨 어머니들은 사형 당했고, 토라의 사본들은 불탔으며, 안식일의 준수와 토라 사본의 소유는 중죄로 다스려졌다.

 

마카베오의 반란

  이 공포정치 기간 동안 많은 유대인들은 왕의 칙령에 굴복하였다. 신앙을 굽히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잡혀 죽거나 도피하여 은신하였다. 어느 날 예루살렘 북서쪽 한 작은 마을 모데인에서 맛다디아가 시리아 장교의 이교제사 명령을 거절하였고, 이교제사를 드리려고 나온 유대인과 시리아 장교를 살해해 버렸다. 맛다디아는 죽음을 앞두고 큰 아들 유다에게 이 일을 위탁하였고, 용감한 투사였던 유다는 ‘마카베오’라는 칭호를 얻으며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곧 안티오쿠스 장군을 격파하고 승리를 거두었고, 주전 165년 성전의 제단을 재건하고 유대인들의 예배의식을 복구시켰다. 이로 인해 수전절(등화절)이 생겨났고 유대인들은 아직도 크리스마스 무렵 이 절기를 지킨다. 이렇게 시작된 마카베오 전쟁은 유다, 요나단, 시몬 형제들에 의해 계속 수행되었고, 국제 정세가 좋아지고 로마의 개입이 증대됨에 따라 유대인들은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다니엘의 묵시록

마카베오 전쟁이 발발한 직후 익명의 저자가 다니엘서를 썼다. 이 사람은 헬레니즘의 생활방식과 그것을 유대인들에게 강요한 폭정에 대하여 심한 반발을 느꼈던 하시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셀류코스 왕조의 호전적이고 위압적인 정책으로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던 이스라엘 신앙에 대시 불을 붙이고 박해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신앙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지 말라고 유대인들에게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백성들이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을 때,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의 저자는 현재로부터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처럼 옛날 페르시아 시대의 저술로 가장하여 당시의 사람들에게 말을 하였다. 예언이 그쳤다고 믿어졌던 포로기 이후 시대 후기에는 옛 유대인 전승의 몇몇 인물들의 이름으로 글을 써내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예언과 묵시문학

  다니엘서는 묵시문학으로 이 문학 유형에 속하는 작품들은 포로기 이후 시대의 후기와 초기 기독교 시대에 많이 나왔다. 묵시문학은 기괴한 이상들, 이상한 상징, 초자연적인 일들로 가득 차 있다. 박해시대에 씌어진 이 책은 신앙 단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봉함된 책이 되게 하는 일종의 영적인 암호를 사용한다. 묵시문학의 중심주제는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 문학은 예언이 그쳤다고 생각되던 때에 생겨났지만 예언의 메시지를 계승하여 새롭게 표현하고 있다. 예언자들은 시장, 성전, 왕의 면전에 서서 백성들의 잘못을 꾸짖었는데,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의 언약에 대한 신실치 못함을 일깨워주고 회개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충격을 주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이 역사를 완성시키는 때인 마지막 때에 관심을 가졌다. 심판날의 어두움 너머로 그들은 야훼께서 자비 가운데 이끌어올 새 시대의 여명을 보았다.

 

새로운 언어로 된 예언

  포수를 계기로 예언에 강조점의 변화가 생겨났는데 이를 예언자 에스겔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멸망과 소망을 강조하여 말하였지만, 그의 메시지는 괴이한 이상과 불가사의한 상징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취하였다. 심판날 너머를 바라보면서 제사장적 유토피아의 형태에 따라 도출된 새 시대의 모습을 그렸다.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악의 신비와 맞붙어 싸우면서 현재의 비극적인 상황을 심히 비관한다. 현시대는 악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고, 다가올 시대는 악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의하면 역사는 최후의 대결과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승리를 향한 이미 결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불변의 운동량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묵시문학은 강조점에서 변화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야훼는 왕이시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며 각 사람은 모든 상황 아래서 신실하도록 촉구되고 있다는 예언적 확신들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소유인 나라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1-6장과 다니엘의 이상들을 담고 있는 7-12장으로 나뉘고 책의 일부는 아람어로 씌어져 있어 각색됨을 알 수 있다. 165년경에 나온 하나의 통일된 작품이다. 또한 역사적인 시기들을 혼재 시켜놓고 잇는 것과 같은 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저자는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를 올바로 알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것들은 유대인 동포들에게 종교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려는 것이었다. 원수들이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한 아호로 글을 씀으로써 저자는 영악하게도 동시대의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오래 전 옛날에 있었다고 하는 이야기와 이상들로 위장시켰던 것이다.

 

토라에 대한 충성

 1-6장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읽을 때 토라의 사본을 한 권이라도 지니고 있으면 중죄가 되는 시대에 이 묵시문학적인 책이 나왔음을 명심하고, 이에 다니엘서의 저자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율법에 충성을 요구한 종교적 신앙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느부갓네살의 왕궁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이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유대인의 토라의 음식 규례를 충실하게 준수 하였다. 채소와 물로 다른 이들 보다 더욱 건강하게 되고 왕의 꿈을 해몽했을 뿐만 아니라 그 꿈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알아 맞추어 다니엘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다니엘을 바벨론의 속주를 다스리는 총독으로 삼고 바벨롱 모든 박사들의 지도자가 되게 하였다.

 가장 혹독한 시련들 가운데에서도 야훼께 신실했다는 주제에 관한 이야기로 느부갓네살이 모든 신민이 거대한 금 신상에 절을 해야 할 것을 명령했지만, 다니엘과 세친구는 그렇지 않았다. 이에 화난 느부갓네살은 풀무를 7배나 강하게 하여 녛었지만 죽지않고 살았다. 그 후에 왕은 몰락 하였다.

 후의 벨사살이 왕위에 올랐고 꿈 해몽을 하여 총리로 삼았다. 다니엘은 다리우스의 후계자로 추정되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 시대에 잘 살았다.

 

마지막 때에 관한 이상들

 다니엘서의 두 번째 부분인 7-12장은 하나님이 세상 권세의 포악한 통치를 타도하고 하나님 나라를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세울 때인 최종적인 완성을 향한 역사의 움직임을 네 개의 이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이상은 다니엘은 “큰 바다”에서 네 마리의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 네 마리의 짐승은 ‘해석하는 천사’가 바벨론, 메대, 페르시아, 헬레니즘 또는 셀류코스 왕국으로 묘사한다. 두 번째이상은 해석을 유다 백성의 수호 천사인 가브리엘에 의해 주어졌다. 뿔달린 수양(메대-페르시아)이 사방으로 치닫고 있다가 현저한 뿔(알렉산더)이 나있는 (헬라)와 싸워 패를 당하는 이상. 세 번째는 다니엘은 하나님의 일정표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기 때문에 “여러날”이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속한 구원을 호소하는 그의 기도는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실성이 아니라 오직 야훼의 견실하고 은혜로운 선하심을 토대로 하는 것이었다. 20-27정에서는 다니엘이 자신의 죄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 가브리엘 천사가 와서 칠십 년을 해석해 주었다.

 마카베오 시대로부터 세월을 거슬러 뒤돌아보고 있다는 사실은 왜 알렉산더의 등장 이전 시대에 관한 역사적 지식이 흐릿하고 이 저작의 집필 시기에 가까워질수록 역사적 정보가 더 정확하고 자세하게 되는지를 설명해 주는 데, 이점은 마지막 이상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상의 초점은 셀류코스 2세의 두 아들 치하에서의 세력균형의 변화에 있다. 11장 나머지 부분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라는 ‘비열한 인간’에 관한 예언들을 다루고 있다.

 다니엘의 역사 개관은 하나님의 “진리의 글”에 기로괴어 있는 다가올 사건들에 관한 이상이라는 형식으로 씌어져 있지만, 그 이상은 실제로는 고유한 의미의 예언에 거의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건의 정확성을 결여하는 부분과 흐릿하게 묘사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마카오 전쟁의 발발 이후인 주전 169년과 164년 사이에 씌여졌다는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이런 것을 저자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관점으로 자신들의 고난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했고 그 어느 것도 우연하게 일어난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배에 관한 이러한 극단적인 강조는 자기만족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와는 반대로 역사가 미리 정해진 계획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은 유대인이라는 작은 집단의 열심에 불을 붙였으며 모든 것이 그들에게 불리해 보일 때에도 그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고 행동할 수 있게 하였다.

 

인자

 ‘인자’로 번역된 이 표현은 히브리어에서 사실 죽을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을 뜻한다. 이는 야훼의 거룩하고 엄위하신 신성과 대비되는 예언자의 죽을 운명의 연약함과 유한한 인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메시아 소망

 다니엘 7장에서 이 하늘에 속한 인물은 다니엘의 꿈을 해석해 주는 자가 분명히 말하듯 언약 공동체를 상징한다. 역사의 목표는 어떤 수식어를 가진 인간의 나라도 아니고 어떤 사회적 계획에 따른 이상향도 아닌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묵시 문학의 공헌 가운데 하나님 이 내세에 관한 교리는 늦게 등장하였다. 묵시문학은 내세적이다. 역사의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들어 있다는 확신 속에서 현재의 고통에 맞서나갈 것을 호소하고 있다.

 

구약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여명이 곧 도래할 것이라는 강렬한 기대로 끝난다. 그러나 메시아가 오리라는 묵시문학적 이상은 그 후에 역사적인 현실이 되지 못했다. 유대인이 독립한지 대략 백년이 지난 후 유대인들은 다니엘서의 도식에는 보이지 않았던 제국인 로마제국에 복속되고 말았다.

 

유대교 내의 파벌들

 로마의 통치하에 있던 시기인 이 때에 토라의 권위, 성전의 제사의식, 하나님나라가 거룩한 땅을 그 중심으로 한다는 것 등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교조들을 일상 세계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와 관련하여 파벌들 간에 차이가 생겨났다.

 사두개파로 알려진 집단은 특권과 정치적인 영향력을 지닌 가문 출신들이었다. 토라의 엄청난 신봉자로 자처하였고 부활에 관한 교리를 거부하였다. 더불어 천사와 마귀에 관한 신념,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과 같은 묵시문학적 사상의 여러 측면들을 반대하였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세에게 계시된 양식에 따라서 형성된 신정 공동체를 건설한 것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현상’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외국의 통치자들과 협혁하는 정책을 지지했다. 또 다른 한 편은 바리새파이다. 이방인과 구별하는 관습들을 준수 하였고 사두개패 사람들보다 더 엄격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진보적이었다. 그래서 토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육신의 부활과 묵시문학적 하나님 나라와 같은 교리들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다른 집단으로 열심당이 있었는데, 정치활동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마카베오의 혁명노선에 가까웠다.

 기독교 시대 이전의 두 세기 동안 많은 조류들이 유대교 속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예언의 중단 이전의 세대에 살았던 인물들에게 주어진 계시라는 형식으로 나타내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묵시론적인 소망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크게 영향을 준 것 가운데 하나였다.

 

이스라엘 성경의 정경

 토라에 대한 열심은 유대교를 하나로 묶는 힘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고동체 안에서의 다양함들이 존재하였다. 성전과 불과 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두개파는 성전이 파괴되는 일로 말미암아 그들의 존재이유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만이 살아남아 위세를 부렸다. 그래서 유대교에 바리새파적 사상을 각인시킬 수 있게 되었다 성전 파괴로 인한 유대교의 위기는 이스라엘로 알려진 백성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하였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찾아온 정체성의 위기는 ‘안정화’와 ‘고정화’를 위한 큰 추진력을 제공해 주었다. 그 결과 ‘정경’에 관심이 고조 되었다.

 학자들은 ‘암니아 회의’가 주후 90년경 개최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말하였다. 하지만 얌니아에서 있었던 랍비들의 논의들은 매우 영향을 끼쳤을 것은 틀립 없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 회의 훨씬 전에 ‘정경’의 주요 윤곽은 이미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는데 신앙 공동체는 자신들의 삶과 예배에서 중심을 이루는 몇몇 책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을 확정하는 문제가 있었고 초대 기독교회의 신학자들이 구약의 범위에 관하여 명확하지 않음도 있었다. 그래서 구약의 범위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었다. 하지만 얌니아 회의가 비공식적임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그 의견들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 들여 졌다. 이에 판별기준으로는 성경적 토라오의 조화였다고 추론한다. 또 하나의 원칙으로 예언은 h로기 이후 시대인 에스라 시대 직후에 끝났음을 전제한 예언적 영감의 교리였다. 끝으로 랍비들은 헬라어가 예언적 영감의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헬라어로 씌여진 책들도 제외하였다.

 

이스라엘의 순례

 

   책의 끝에서 한 가지 부각되는 사실은 구약은 이스라엘이 겪은 역사적 체험들의 기억과 그에 대한 해석들을 보여주며 이스라엘의 삶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은혜로 부르셔서 특별한 책임을 수행하도록 열방으로 부르셨고 이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기억하고 그 전승들을 보존하였기 때문에 ‘순례의 백성’은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 속에서 살 수 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의하면 하나님 백성의 순례는 구약을 거쳐 토라와 예언자를 완성하기 위하여 온 그리스도, 곧 에수로 이어진다고 한다.

 

1)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좋은 헤세드의 예이다. 내면의 충실의 행위로서,  행함과 관계있는 것이다.  - 두 사람의 관계자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2) 예레미아 35장을 읽어보면 레갑족속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미디안 족속으로 모세의 장인 이드로와 같은 동족인 겐 족속(왕하 19:15-17)으로 불리는 레갑인들은 예레미야가 포도주를 가득 찬 단지와 잔들을 내놓고 "포도주를 드시지요" 하며 그들에게 권하였지만 마시지 아니하였다(5절).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아라.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 자손도 절대로 마셔서 안 된다. 너희는 집도 짓지 말고, 곡식의 씨도 뿌리지 말고, 포도나무도 심지 말고, 포도원도 소유하지 말아라. 너희는 언제까지나 장막에서만 살아라. 그래야 너희가 나그네로 사는 그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조상 요나답이 명령하신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실천하여 살면서 장막에서 살았습니다."(6-10)


가나안에 정착하여 바알의 영향을 받는 이스라엘의 순결하지 못한 삶과 구별되어 레갑족속은 광야로 돌아가 장막을 치고 양을 치며 절대로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며 살았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인도에 의존하며 또 거기에 순종하는 삶이다. 나의 파종과 경작에 의존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도와주심에 의존하는 삶이 레갑인들의 생활방식 이었다. 예레미야는 레갑인들의 생활자세와 유다를 경고하며 본래의 믿음으로 돌아오도록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절규하신다. "너희는 나에게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고 나의 명령을 듣지도 않았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조상이 자기들에게 명령한 분부를 그렇게 엄수하는데, 이 백성은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16,17절)


하나님도 부러워하시는 레갑족속의 순종은 요나답으로부터 예레미야 시대까지 약 300여년 동안 이어온 것이다. 그 순종심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복 주신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 가운데서 나를 섬길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19절) 이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이 계속 이어져서 포로 이후의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력을 이 가문에서 계속 가지게 되었다. 순종은 제사나 수양의 기름보다 나은 것으로(삼상 15:22-2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름길이며,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통로이다.(히 3:7-4:11)

3)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신족(神族)인 이아페토스와 바다의 요정 클리메네 사이에 태어난 아들. 신(神)과 사람에 관한 미래 지식의 소유자로 되어 있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거인 아틀라스와 에피메테우스의 형제이다. 제우스가 인간에게서 불을 빼앗아버렸을 때 제우스를 속여 불을 훔쳐서 인류에게 주었으며, 희생으로 바친 소를 신과 인간이 분배할 때 계략을 써서 신들이 기름덩이를 가지도록 하였다. 그 밖에도 그는 인간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혜와 기술을 가르쳐준 인류문화의 은인이었다. 그러나 제우스는 이를 벌하기 위해 인류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를 만들어 프로메테우스의 아우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내었는데, 에피메테우스가 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아내로 삼음으로써 <판도라의 상자> 사건이 일어나 인간은 여러 가지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제우스의 장래에 관한 비밀을 제우스에게 알려주지 않아 제우스는 그를 코카서스의 큰 바위에 묶어 놓고 독수리로 하여금 간(肝)을 쪼게 하였으나 밤이 되면 그 간이 다시 회복되어 다음날이면 똑같은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오랜 세월 끝에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여 구원을 받았고 제우스와도 화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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