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땅의 역사
AD 70년 :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AD 66년경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로마의 장군 타이투스(디도)는 4년간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에 70년에 도시를 함락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도 이때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떠나서 가실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성전의 건물들을 보여 드리려고 그분께 나아오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아니하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서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 하시니라. (마 24:1~2)
AD 135년 : 마지막 유대인 반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대교 예배 제한법을 공포하고 유대 성전이 있던 자리에 이교 사원을 세우겠다는 발표를 했을 때 시몬 바 코츠바가 이끄는 무리들의 반란이 3년간이나 이어졌습니다. 이 반란의 진압 과정에서 58만 명이 사망했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 이들까지 합치면 100만 명이 훨씬 넘는 숫자가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로마 제국 전역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AD 135~640년 : 로마 지배 시기
이 시기에 예루살렘 폐허 위에 세워진 도시 앨리아 카피톨리나에는 유대인이 들어오면 죽인다는 로마의 칙령이 발표되었고, 그곳에 이교의 사원이 건축됩니다. 유대 지방은 이름 자체가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바뀌게 되는데, 이 이름에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이 나왔습니다.
성 경에는 출애굽기와 이사야서에 팔레스티나라는 지명이 등장하며, 요엘서에도 팔레스타인이 나옵니다. 2세기경의 기록에도 현재의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이 연안에 정착해 유대인들에 맞서 살아가는 바닷가 주민들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인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 그리고 이스라엘이 독립 후 차지한 지역 모두가 역사적으로는 팔레스타인의 땅으로 그들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복잡하고 골치아픈 지역은 유대인들과 오랜 세월 분쟁을 겪어 왔는데, 몇몇 성서학자들의 분석대로, 여호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두 진멸할 것을 명령 받았으나 다 처리하지 못한 지역에 해당합니다.
AD 640~1090년 : 이슬람교 시대
640 년경 이 지역은 이슬람교 세력에 의해 점령당합니다. 서방세계와 연결돼 있던 로마와는 달리 이슬람 세력은 모든 접촉을 단절했고, 모든 곳에 아랍 문화를 건설했으며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바위 돔 사원(오마르 모스크)과 엘 아크사 사원이 들어섰습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마호메트)가 승천할 때 밟고 올라섰다는 바위가 있는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의 성지 메카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 성지가 됩니다.
AD 1090~1291년 : 라틴 시대
이 혼란의 시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은 회교도 터키인들과 십자군 원정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가톨릭이 예루살렘 성지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1099년,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잠시 빼앗았지만 그 후 다시 아랍에 빼앗기고 재차 공격이 반복되었습니다.
AD 1250~1517년 : 맘루크 시대
이 시대에는 이슬람교 맘루크 왕조를 공격하여 죽이고 내쫓은 터키인 살라딘의 후손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팔레스타인, 이집트, 시리아에 47명의 통치자가 존재했던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AD 1517~1917년 : 오토만 터키 시대
오토만 터키 제국은 지중해 동쪽 연안과 북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점령한 이 시기에는 다른 민족의 침략은 거의 없었으나 국지적 전쟁은 많이 있었습니다.
1566 년, 예루살렘의 현존하는 성벽이 재건되었고, 이슬람 문화는 더욱 강화됩니다. 예루살렘은 세 종교의 성지입니다. 특히 유대교는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 이후 헤롯이 재건한 제3차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으므로 반드시 예루살렘에 다시 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갈등은 끝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성전에 대한 설명은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AD 1800년대 후반 : 시온주의의 태동
시온은 이스라엘의 산 이름으로 헤르몬 산의 가장 높은 부분을 말합니다. 도시 이름이기도 한 시온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높은 도시로 '다윗의 도시'로도 통하는 곳이며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상징적인 곳입니다. 시온주의(시오니즘)란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스라엘의 땅으로 회복시키려는 운동이자 사상을 뜻합니다.
이 시기에 천년왕국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땅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을 회복하고 환난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일은 성경의 수순이기 때문입니다. 서구 사회의 기독교인들의 재림에 대한 열망이 나타난 결과입니다. 이 시기에는 예언적인 문학작품들이 출현해 서양 교회들의 설교와 선교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자기 땅을 잃은 유대인들의 꿈같은 고토 회복에 자극을 주었습니다. 바론 로스차일드(B. Rothschild)는 팔레스타인 농업 식민지 계획을 주창했는데 이 계획이 유대인들에게 매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1861 년, 팔레스타인을 식민화하기 위한 모임이 런던에서 결성되었고,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같은 움직임이 있었는데,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고국 땅이 이슬람 세력이 아닌 유럽 강대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 그 땅으로 이민을 간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그 땅을 자기들에게 영원히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어온 그들은 회당에서 오랫동안 드려온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는 기도가 실현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일어난 유대인 출신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A. Dreyfus) 대위가 군사적 추문 사건의 희생양이 되어 파면당하고 죄수가 되어 악마섬에 갇히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는 몇 해 후에 무죄로 누명을 벗지만, 나라 잃은 민족의 입장에서 당한 이 일로 유대인들은 어찌 보면 당연한, 독립국가 설립을 꿈꾸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언론인 테오도르 헤즐(T. Herzl)은 드레퓌스 사건을 1894년에 신문에 크게 다루었습니다. 또한 그는 1897년에 제1회 시온주의자 의회를 소집했습니다. 서방국가에서 온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 의회에서 "시온주의는 유대 민족이 팔레스타인 법에 보장되는 조국을 만들기 위해 투쟁한다"는 요지의 결의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런 움직임들의 결과로 1907~1908년에는 최초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유입되었습니다. 1914년에는 9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이주해 살게 되었고, 40여 개 이상의 농업 개척지가 설립되었습니다.
AD 1917년 : 밸푸어 선언
영국의 외무장관 아더 밸푸어(A. J. Balfour)는 독일과의 전쟁에 영향력 있는 유대인들의 후원을 얻기 위해 영국 내각의 승인을 받은 선언문을 발표합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 선언은 마른 뼈들이 서로 소리를 내며 연락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세계적인 유대인 거부 바론 로스차일드 경에게 전달하는 방식의 이 선언문에는 이스라엘 재건에 관한 결정적인 내용이 수록되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모국을 건설하는 것에 호의를 갖고 있으며 이 목표의 성취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현재 팔레스타인에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공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나,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를 침해하는 일이 행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들의 이주로 황폐한 팔레스타인 땅이 비옥하게 바뀌어가자 그곳의 아랍인들은 점점 악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1929년에는 영국인들의 지배에 대항하는 대규모 폭력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고, 이런 난동은 1936년까지 끊이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이런 환경에서 유대인들을 보호했고, 독립국가를 이룰 때쯤에는 유대인들의 자주국방력은 아랍인들의 틈바구니에서 버티기에 충분하게 되었습니다.
AD 1918년 : 영국의 이스라엘 점령
영국의 알렌비 장군은 영국 왕의 정부를 대표해 거룩한 땅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총 한 방 쏘지 않고 터키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터키인들은 알렌비(Allenby)의 이름을 Allah-bey, 즉 '알라신의 예언자'로 보고 즉각 땅을 내주었다고도 합니다. 이후로 이스라엘 독립까지 약 30년간 영국령으로 있던 이 지역은 오늘날의 이스라엘과 요르단 서안지구(West Bank), 가자지구(Gaza Strip)를 포함하는 일대였습니다.
AD 1933~1945년 : 히틀러에 의한 탄압
1933 년에 독일 총리가 된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A. Hitler)는 유대인 포로수용소를 조직적으로 세워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켰으며, 열등한 인종으로 취급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600만 명이나 학살했습니다.
이에 온 백성이 응답하여 이르되, 그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임하리이다, 하니라. (마27:25)
AD 1930~40년대 : 독일 패망과 아랍 국가들의 독립 러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연합군은 유대인들을 포함한 포로들을 석방합니다. 이후 유럽 이외 지역에 있던 부유한 유대인들의 도움은 흩어진 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2 년에 이라크가 독립했고, 1943년에 레바논이, 1944년에 시리아가 독립합니다. 1945년에는 이스라엘 재건에 강한 적개심을 품은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 예멘, 트랜스요르단이 아랍동맹을 맺습니다. 1946년에는 시리아와 트랜스요르단이 독립합니다. 이 시기를 전후로 1919년에 아프가니스탄이, 1922년에 이집트, 1952년에 리비아, 1956년에 수단, 1960년에 니제르와 차드 등, 1961년에 쿠웨이트, 1967년에 남 예멘이 독립하였습니다.
AD 1947년 : UN의 팔레스타인 분할안
UN은 평화를 위해 팔레스타인 지방을 유대인과 아랍인들의 나라로 분할할 것을 가결합니다. 예루살렘은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이슬람교에게까지 거룩한 도시로서 완전 개방하는 국제도시로 선포됩니다. 이 분할안에 유대인들도 불만이 있었으나 정치적 목적으로 찬성했고, 아랍인들은 반대했습니다. 이때 내란을 두려워한 30만 명가량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집을 버리고 피난민 신세가 되어 자기 나라를 떠나 도망치는데, 국제연합이 임시 천막을 세워주었고, 그것이 이 난민들의 영구한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AD 1948년 : 이스라엘 독립(5월 14일)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를 끝내자 이스라엘 정부는 정식으로 65만 이상의 인구를 지닌 이스라엘 국가를 설립합니다. 마른 뼈가 드디어 하나의 커다란 군대를 이룬 것입니다. 물론 아랍 세력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고, 아랍동맹은 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이때 일어난 독립전쟁(제1차 중동전쟁)에서 수는 많아도 무기력한 아랍 군대들은 수천 명이 희생하면서 저항한 이스라엘에게 패하여 이스라엘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서쪽 지역은 이때부터 이스라엘이 점령했고, 1950년부터 정치적 수도로 삼았습니다(행정수도는 텔아비브임).
이스라엘은 1949년에 네게브 사막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땅 2천 평방 마일을 차지하며 총 7천 평방마일의 영토로 확장합니다. 그해에 유엔군이 이스라엘의 공공질서를 확립하는 데 도움을 주도록 허용되지만 아랍인들은 유엔의 결의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해에 70~80만 정도의 팔레스타인 피난민들은 인근 아랍 국가들로 이주합니다.
1948년 회복의 역사는 바빌론으로부터의 회복이 아닌 두 번째 회복, 즉 온 나라로 흩어진 민족들이 모이는 것에 관한 예언의 실현입니다.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자신의 손을 두 번째 세우사 자신의 백성 중의 남은 자들 곧 남게 될 자들을 되찾되 아시리아와 이집트와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의 섬들로부터 되찾으실 것이요, 또 그분께서 민족들을 위하여 기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의 사방에서부터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함께 모으시리라. (사 11:11~12)
AD 1964년 :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설립
아랍연맹의 촉구로 피난민들에 의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가 창설됩니다. 반(反) 이스라엘 전선인 이들의 목적은 유대인들을 그 땅에서 몰아내고 자신들만의 독립된 팔레스타인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들은 1970년까지는 요르단에, 이후로는 레바논에 근거지를 두고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게릴라식으로 투쟁했습니다. PLO는 1974년에 이르러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됩니다. 1988년에는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선언했고, 이스라엘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했습니다.
91년 마드리드 평화협상과 93년 오슬로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 건국운동이 성취되는데, 팔레스타인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오히려 PLO의 존립은 불확실해졌습니다.
AD 1967년 : 6일 전쟁(6월 5일~10일)
1952 년에 수에즈, 시나이 전쟁(제2차 중동전쟁) 이후 1960년대에 이스라엘 정보국은 아랍이 군사적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운 사실과 소련의 무기가 그들에게 대량 유입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967년에 먼저 이집트와 요르단, 시리아를 공격합니다(제3차 중동전쟁). 병력은 아랍이 무려 30배나 우세했지만 이스라엘의 육군과 공군은 이들 나라를 쳐부수고, 수에즈에 있는 소련의 미사일 기지까지 고스란히 차지했습니다. 이때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의 공동 성지인 예루살렘의 동쪽 지역까지 점령합니다.
국방장관 모세 다얀(M. Dayan) 장군의 지휘 아래 단 6일 만에 끝난 이 전쟁은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놀랄만한 전투로,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와 요르단 서안 웨스트 뱅크, 가자지구, 골란고원 등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영토는 4배 확장되었습니다. 아랍의 사망자가 3만 5천 명이었던 반면, 이스라엘의 사망자는 천 명을 채 넘지 않았습니다.
소련은 이집트에 군사적 지원을 계속하면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를 불러 휴전을 요청했고, 소련의 군사 개입 가능성을 예측한 미국은 긴장 완화를 위해 유엔을 통해 10월에 휴전을 결의했습니다. 이 유엔 결의 338조는 전쟁 이전의 상태로 물러나는 것을 주요 내용입니다. 이후 유엔의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의 비무장 지대에 유엔 감시군이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은 반환하지 않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며 1981년에 자국 영토로 무단 병합했는데, 시리아와 맞닿은 동쪽 휴전선은 일정치 않은 상태입니다.
AD 1973년 : 욤 키푸르 전쟁
10월 6일 유대 속죄일 욤 키푸르(Yom Kippur)를 지키기 위해 각 회당에 유대인들이 모였을 때 시리아와 이집트의 침략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부는 처음으로 허점을 보였지만 한 시간 내에 예비군을 집결시켜 반격에 나섰고, 잠시 빼앗긴 골란고원을 되찾고, 유엔의 정전 명령이 있기까지 전진했습니다. 19일간의 전쟁에서 이스라엘도 수세에 몰리며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시리아와 이집트에는 훨씬 더 많은 타격을 입힌 전쟁이었습니다.
중동의 전쟁과 위기는 늘 영토와 함께 석유의 문제로 발발합니다. 소련을 비롯한 강대국의 개입도 늘 석유를 선점하기 위한 기득권 싸움이었습니다. 70년대는 이 욤 키푸르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가 석유의 위기를 겪어야 했고, 각국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1977 년 민족주의 진영인 우파 정치세력인 리쿠르당이 이스라엘에서 집권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우파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의 문제를 영토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성경을 근거로 팔레스타인 땅을 신이 부여한 영원한 땅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후로 이스라엘에서 이런 민족주의의 목소리는 점차 힘을 더했습니다. 이런 입장은 리쿠르당을 비롯해 종교민족주의당, 구시 에무님(신앙의 블록) 세력, 그리고 이라크,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등 이슬람 국가에서 이주해온 유대인인 세파르드들도 리쿠르당 집권에 큰 몫을 했습니다. 1990년대에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세력도 우파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강경노선자들입니다.
AD 1978년 : 캠프데이비드 회담과 이집트와의 평화협정
제 1차 세계대전 후 이집트령으로 인정된 시나이반도는 시내산이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에 의해 가끔씩 점령되던 이 드넓은 지역은 1967년부터는 이스라엘의 점령이 계속되었지만 제4차 중동전쟁인 욤 키푸르 전쟁 이후, 1974∼75년 병력 분리협정에 따라 시나이반도의 일부가 이집트령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후 1977년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과 1978년 9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주선한 캠프데이비드(메릴랜드에 있는 미 대통령 전용별장) 회담을 통해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1979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이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에서 군대를 단계적으로 철수, 1982년에는 시나이반도 전체를 이집트에 넘겨주었습니다.
AD 1988년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하마스 설립
오슬로 평화협정에 의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출범합니다. 해외 거주민을 제외한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정부입니다. 난민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민족 전체를 대변하는 PLO의 입지는 좁아졌는데, PLO 의장인 아라파트가 자치정부의 수반이자 그의 세력들도 정부 관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996년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의해 직접보통선거가 이루어져 88명의 입법의원이 선출됩니다.
1988 년은 이슬람 저항단체 하마스가 결성된 해이기도 합니다. 무슬림 형제단(1928)에서 갈라져 나온 이슬람 지하드(1983)에서 파생한 단체로, 다른 이슬람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과격하지만 사회분야의 인프라 구축에도 힘을 쓰는 단체입니다.
종종 뉴스에 보도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보면 국제사회의 비난이 이스라엘의 오만한 독선적 조치들 위에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이스라엘은 다시는 그 땅에서 뽑히지 않으리라는 예언을 성취 중인 것이며, 그들 스스로 운명적으로 자신들의 땅을 지키고 다시는 디아스포라가 되지 않으리라는 확고한 신념 속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해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AD 1995년 : 라빈 총리 암살
민족주의 진영에 반하는 세력은 좌파 노동당 세력입니다. 온건하고 평화적인 노선을 걷는 이들을 강경파는 무척 경계하는데, 유대인 정착촌의 와해를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1995년 11월 4일에는 노동당의 이츠하크 라빈(Y. Rabin) 총리가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 진영은 수세에 몰리기도 했지만 2000년을 전후로 다시 힘을 얻고 있습니다.
AD 2004년 : 아라파트 사망
2004 년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지병으로 사망했는데, 이스라엘의 독살설이 끊이지 않았으며 일부 증거도 드러나 2012년 11월 그의 시신 공개에 따라 수개월 간 자세한 검토가 이루어질 전망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방사능 물질 독살설이 사실로 밝혀지게 되면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중동 국가들로부터의 위협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근과 현재 상황
많은 때에 팔레스타인과의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재현되고 하마스 등의 자살폭탄 테러가 이어짐에 따라 이스라엘의 민족주의 진영의 주장이 이스라엘 내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즉, 팔레스타인 민족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며 이스라엘을 국가로 용인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오늘날까지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국가의 존립이 외세로부터 늘 위협받고 있어 위태롭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약자로 비쳐지는 팔레스타인 민족에 대해 우호적인 국제 여론은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유대인과의 공존을 받아들이는 평화주의자라는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유일신교에 대한 거부감과 이유를 알 수 없이 강력하고 우수한 유대인 민족에 대한 시기에서 기인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오바마의 재선 직후인 2012년 11월. 하마스의 포탄이 이스라엘 쪽으로 잘못 날아간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을 해서 백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악화되고 전면전의 위기까지 언급될 정도로 긴장감이 돌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왜 우리는 다른 나라 어린이들처럼 평범할 수 없나요?"라며 성토하는 모습이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세계인들은 또 한 번 이스라엘의 안하무인 식 대처를 비난했지만 영토에 대한 그들의 확고한 의지는 혈통에 깊이 박힌 불문율과 같은 것임을 다시 확인시켜 줄 뿐이었습니다. 이 사태는 정전 협정과 서로의 승리 주장으로 일단락됐지만 긴장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2012년 11월 29일, UN 산하 유네스코 정회원국에 머물던 팔레스타인이 정식으로 국가 지위를 인정받았습니다(비회원 옵서버 국가). 이 날은 65년 전 UN이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과 아랍 영토로 분리했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완전 독립국가를 꿈꿔온 팔레스타인인들의 염원이 실현될 날이 다가왔다고 언론은 보도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도발에 엄중히 대처하고 응징하겠다고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분쟁은 오히려 격화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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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예수님 이후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와 정치상황을 간략하게 알아보았습니다. 근현대에 소비에트 연방과 러시아는 이스라엘 침공의 주된 예언국으로 지목될 정도로 이스라엘에 큰 위협이었습니다. 이는 모두 이스라엘 땅과 사해 등지에 매장된 광물질 등 막대한 에너지원에 대한 탐욕과, 중동 지역 나라들을 지원하여 얻는 석유 때문이었습니다. 소련의 이스라엘 침공 야욕은 번번이 들통이 나고 좌절되었는데, 이것을 곡 마곡 전쟁으로 오인한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과격한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인 살얼음판 같은 정세 속에서도 굳건히 예루살렘과 독립 영토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마스와 PLO의 잦은 테러 공격과 국제 여론의 악화 속에서 강경노선을 이어가는 이스라엘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그간 그들을 둘러싼 중동의 여러 나라들 속에서 수많은 전쟁과 무력충돌이 있었지만 현재 이스라엘의 가장 큰 위협은 이란의 핵 보유 문제입니다. 이란은 숙적 이스라엘을 겨냥한 증오심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2 년 이스라엘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구약성경의 에스더기를 선물한 일이 있었습니다. 에스더서는 인도에서 에티오피아까지 117개 지방을 통치한 아하수에로 왕 때, 그의 왕비였던 유대인 에스더가 그녀의 삼촌 모르드개를 못마땅하게 여겨 유대인 말살정책을 펴려던 아각(아말렉) 사람 하만의 음모를 슬기롭게 넘겨, 나라를 구하고 하만을 응징했다는 바빌론 포로 시대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굳은 민족주의와 국가수호 의지를 드러낸 은유가 담긴 선물이었습니다.
오바마의 정체성과 관련해 이스라엘과 미국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유럽과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는 당연히 성경의 수순입니다. 이스라엘을 돕지 않는 나라는 하나님께서도 축복하지 않겠다는(창 12:3) 말씀에 따라 유럽과 미국의 위기는 전 세계를 어려움에 빠뜨리게 되어 종말의 상황에 더욱 가깝게 되며, 더욱 궁지에 몰리는 이스라엘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열 발가락 국가와 손을 잡는 마지막 7년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리니... (단 9:27)
예루살렘의 지위와 성전
예루살렘에 위치한 제1차 솔로몬 성전, 제2차 스룹바벨 성전이 있었고, 제3차 헤롯 성전은 AD 70년에 함락됩니다. 이 성전의 서쪽 옹벽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통곡의 벽, 또는 서쪽 벽이라 불립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예루살렘은 둘로 분할됩니다. 도시의 서쪽은 이스라엘이, 동쪽은 트랜스요르단이 차지합니다. 1949년에는 휴전선에 분리벽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성지들은 거의 동쪽 지역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유엔 결의안 181조인 국제적 개방도시화의 취지에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1950년에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서쪽을 자국의 수도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국제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6일 전쟁이 있었던 1967년에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동쪽을 불법 병합함과 동시에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통치하는데, 이때 통곡의 벽은 이스라엘로 넘어 옵니다. 1980년에 이르러서는 통일된 동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로 지정했습니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비난했지만 이 모든 지역에서의 철수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의 국제적 지위는, 서쪽은 이스라엘의 영토로, 동쪽은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6일 전쟁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예루살렘의 나머지 동쪽을 지배하게 된 점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예언의 성취입니다. 예루살렘이 회복되는 날은 이방인의 때가 차는 순간입니다. 그때까지 예루살렘이 짓밟힐 것이라고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날들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그 땅에 큰 고난이 있고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으리라. 또 그들이 칼날에 쓰러지고 모든 민족들에게 포로로 잡혀 가며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 (눅 21:23~24)
이방인에게 짓밟힌 예루살렘은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통치 이래로 한 번도 유대인들에게 되돌아간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땅이 실효적으로 이스라엘 영토가 된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 예언은 거의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의 때도 다 찬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들의 땅은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전 터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 들어선 이슬람 성전이 유대 성전이 되면 그제야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환난이 시작될 것입니다. 성전이 재건되어야만 모든 역사는 마지막을 향해 마지막 태엽을 풀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모든 준비를 마친 하나님의 마지막 방아쇠이며 그곳을 통해 신호탄이 울릴 것입니다. 이 최후의 버튼을 두고 하나님은 세상의 악이 임계점을 넘어섰음에도 아직 인내하고 계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재건에 필요한 모든 자재와 준비를 갖춘 상태이며, 그 땅을 무력으로라도 탈취해 성전을 짓고 거기서 희생제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강경파와 다른 지역에 짓자는 평화주의적 온건파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라빈 총리의 암살 사건으로도 이런 대립이 매우 첨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이 세워져야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마지막 때 멸망의 아들 적그리스도는 성전에 들어가 자기를 하나님이라 하며 경배를 강요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 (살후 2:4)
이처럼 성전은 마지막 역사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 유대인들의 성전은 하룻밤에 착공하여 완성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므로 우리가 깨어 주시하면 도둑같이 오시는 하나님의 때를 어느 정도는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날짜를 점칠 수는 없어도 그 즈음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매우 임박한 일들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래서 '역사의 해시계'로 불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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