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스크랩] 새 예루살렘, 신천신지, 생명수 강 (계 21-22장)

하나님아들 2012. 9. 22. 00:22


신천신지 (新天新地) 사고는 종말론에서 그 절정을 구성한다 할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가장 성경적이라 간주하는 무천년설을 (無千年說) 비판하면서 말하길, 무천년설적 성경 이해는 구약의 땅에 관한 약속을 영화시키거나 뜬구름 같은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여, 사실상 성취에서 제거해 버린다고들 한다. 그보다 더 진실과 동떨어진 말은 다시 없을 것이다 (Nothing could be further from the truth). 안토니 후크마는 (Anthony Hoekema) 성경과 미래 (The Bible and the Future) 책에서 이렇게 답한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신천신지의 사고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우선, 그것은 장차 우리가 살 그 생활을 이해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찬송가들을 대할 때, 영화롭게 된 성도들은 영원 세계에서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하늘의 어떤 공중에 붕 뜨서 뜬구름처럼 사는가 하는 인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런 식의 신천신지의 생활은 성경적일 수 없다. 우리는 장차 하얀 옷을 입고, 비파를 켜며 찬양하면서, 구름에서 구름으로 둥둥 떠다니면서 공중에 붕 떠서 영원히 살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은 말씀하길,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 새 땅 위에서 영화롭게 된 부활의 몸을 입고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 것이라 한다. 그 새 땅 위에서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향유하며, 그 자원들을 탐구하며, 그 보화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면서 영원을 보내리라 소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새 땅을 자기 처소로 만드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에 하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때에 새 땅 위에 있으면서 하늘에 거하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하늘과 땅은 지금처럼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계 21:1-3). . . 둘 째로, 새 땅에 관하 교리는 하나님의 구속 프로그램의 완전한 차원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다.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하였기 때문에, 저주가 이 세상에 선고되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죄의 저주로부터 이 세상을 구속하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러므로 몇몇 사람들을 구원하는 정도나, 심지어 그의 피로 사신 수도 없이 많은 백성을 구원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전체 사역은 이 전체 세상을 죄의 결과에서 구속해 내는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 새 땅에 들어오시기까지, 상실한 낙원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완전히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 프로그램을 우주적 차원에서 보기 위해, 새 땅에 관한 교리를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로부터 인간의 타락한 모든 결과가 정결케 제거되기까지 결코 만족하지 않으실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274-275). 

 

후크마는 사 65:17, 66:22, 32:15, 35:2, 35:10, 35:7, 11:9 등의 구절들이 소위 재림 이후의 천년왕국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땅에서 창조 세계의 (인간과 짐승 모두) 회복이 이루어질 것을 말씀한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땅 위에 거할 영광스런 미래에 대하여 말씀하는 많은 구약 예언들은 현 시대의 교회나 하늘을 (공중에 붕 떠 있는 그런 의미에서의 하늘)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성질의 것들에 대한 구약 예언들은 상징적 언어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만드실 새 땅, 곧 1천년만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새 땅에 대한 묘사들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275-276). 

후크마는 자기의 이런 견해에 대한 근거를 다음 사실, 곧 가나안을 아브라함에게 주시리라는 그 언약이 성경에서 상당할 정도로 확장되어 갔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창 12, 13, 15, 17장). 즉, 그 궁극적 성취는 새 땅, 곧 구속된 땅에서만 실현될 수 있을 정도로 원래 약속은 확장되어 갔다. 예컨대, 후크마는 창 17:8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의 약속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 후손만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에게도 주셨다는 점을 주목하라.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한 치의 땅도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매장지로 산 그 동굴을 (창 23장) 제하면- 소유한 적이 없었다 (행 7:5 참조). 그렇다면, 아브라함 당대에 결코 성취된 적이 없었던 그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약속에 대한 그의 자세는 어떠했던가? 그 대답는 히 11:9-10에서 나타난다: 히 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 . 토대를 가진 성읍이란 말은 새 땅에서 나타날 그 새 예루살렘 혹은 거룩한 성읍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약속된 그 기업의 실제적 성취로서 새 땅을 앙망하고 있었다. 그만 아니라 다른 족장들 역시 그러하였다 (278).


그리고 후크마는 다시 말하길:

 

우리가 새 땅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적절하게 이해할 때, 많은 다른 성경구절들도 의미심장한 하나의 패튼으로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다. 예컨대, 시 37:11에서 "온유한 자는 땅을 소유하리라"고 한다. 예수께서 이 구절을 산상수훈에서 어떻게 자기 말씀으로 표현하셨는지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말씀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으리라" 하셨다 (마 5:5). 그 말씀의 의미는 땅의 개념을 신약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창 17:8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 전부를 영원히 소유하도록 하셨다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롬 4:13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신 약속을 언급하면서 그들은 세상을 기업으로 얻으리라고 약간 달리 말씀하고 있다. 즉 창세기의 가나안 땅이 이제 로마서에서 "세상"으로 바뀌어졌다 (pp. 281-82).

 

이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구절이 히 11장이다. 아브라함이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도달하였을 때, 그는 단지 거기서 이방인이 외국 땅에서 체류하듯 체류하였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히 11:9,13). 필립 휴는 (Philip Hughes) 질문하길,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그는 자기 소유라고 주장할 어떤 땅도 거기서 갖지 못했었고 따라서 한 곳에 정착생활을 영위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467). 우리는 대답을 추론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10절에서 답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설계자와 시공자가 하나님이신 토대를 가진 성읍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성읍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을 위해 준비하셨던 히 12:22에 언급된 그 성읍인가? 히 12:22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성읍,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언급되었다. 또한 히 13:44에서도 우리가 여기는 (현재의 땅)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라 하였다. 이는 확실히 히 12:22에 언급된 그 하늘의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그 성읍은 토대를 가진 성읍이다 (히 11:10).

 

또한 계 21:1-2도 참조해 보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 21:9-11도 참조: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체류자로 혹은 나그네로 살아야 했던 이유는 그가 그 세상의 땅은 보다 본질적인 땅/ 나라인 하늘의 땅의 모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필립 휴는 설명하길,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지시한 그 지상의 영토를 목표 자체로 바라보지 않고, 그것 저 너머의 먼, 초월적 실체를 sacramentally 가리키는 하나의 표지로서 간주하였다. 그는 그 약속을 멀리서 성취될 것을 바라보고 환영하였다. 그가 믿음의 눈으로 모든 지상의 가치 저 너머로, 하나님의 백성의 참 본향인 저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비록 그 땅/ 나라가 초월적이고, 영원하며, 하늘에 속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엄연히 땅/ 나라이다 (country). 요점은 족장들이 가나안의 지형적 땅을 영원한 소유물로 찾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약 땅의 약속의 초점은 "땅"에 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새 땅인 하늘 땅 (heavenly land), 새 예루살렘에 관한 것이었다.

가나안 땅이 원래 약속된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성취를 이 세상 가나안에서 받을 것이었다고 말씀하지 않고, 하늘 예루살렘에서 받으리라 말씀한다. 아브라함은 히 11:9-10에 의하면, 단순히 가나안 땅의 상속자일 뿐 아니라, 세상의 상속자이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순례자로서 생활할 때에 부딪힌 그 불편하고 실망스러운 조건들에 인내로써 묵묵히 견뎌낸 것은 그가 영원하고 완전한 하늘 성읍에서의 축복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히 11:13-16도 보라.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사람들이 약속을 받지 못하고, 오직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죽었던 이유는 그들의 소망이 이 지상의 어떤 기업이 아니라, 11:16이 지시하듯, 하늘의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브루스는 (F. F. Bruce) 이렇게 잘 요약해 준다:

그들의 참된 본향은 지상이 결코 아니었다. 그들이 염두에 두었던 그 보다 나은 고향은 하늘나라였다. ㅣ상의 가나안과 지상의 예루살렘은 임시적 실물 교훈으로서 성도들에게 영원한 안식, 하나님께서 잘 지으신 도시를 가리키기 위한 것이었다 (305).

아바르함의 땅에 관한 언약이나 우주의 회복을 언급하는 사 65:17, 66:22, 32:15, 35:2, 7, 10, 11:9와 같은 구절들은 새 창조에 속한 새 땅 위에서 (옛 창조 질서에 속한 천년왕국에서가 아니라) 성취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 계 21-22장의 신천신지에 (新天新地대하여 주목해 보자. 먼저 두 가지 서론적 사항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우선, 대부분의 학자들은 계 21-22장에 묘사된 바를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미래적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보지만 -예컨대 무천년설자들은 재림 이후에 나타날 바라고 보고, 전천년설주의자들은 천년왕국 시대에 이루어질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부분에 묘사되는 바는 이미 교회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영원세상에서 장차 누릴 것의 "맛보기 축복"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 본다.

계시록에 대한 과거파 해석에 의하면 (Gentry 같은 학자가 대표하듯), 요한이 계 21-22장에서 묘사하는 "새 창조"는 1세기에 시작한다 (C. Marvin Pate, ed., Four Views on the Book of Revelation: Counterpoints: Exploring Theology  [Grand Rapids: Zondervan, 1998], 87). 그러니까 계 21-22장에서 새 예루살렘은 주후 70년에 파괴당한 예루살렘을 대체하는 것으로 주전 70년 이후로부터의 모습이다. 겐트리는 이처럼 요한은 시적인 영상을 통해서 구원의 영광을 표현하고 있다 (89). 

이 책에는 과거파 (Kenneth L. Gentry Jr.), 이상주의파 the Idealist (Sam Hamstra Jr.), 점진적 세대주의파 Progressive dispensationalist (C. Marvin Pate), 고전 세대주의파 Classical dispensationalist (Robert L. Thomas) 등의 입장이 제시되고 있다.

겐트리는 이런 입장의 근거를 신천신지를 묘사하는 사 65:17, 20에서 찾는다: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겐트리에 의하면, 이사야가 묘사하는 신천신지는 여전히 죄와 늙어짐, 사망 등을 경험하면서 나타날 새 창조이다. 그래서 그는 결론짓길, "이 신천신지는 하늘이나 안성된 영원한 새 창조를 지시할 수 없다" (88).  그렇지만, 이사야가 묘사하는 바가 미래의 하늘에 비해 너무나 불완전하고 제한적이라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동시에 현재의 땅의 상태를 지시하기에는 너무나 높여지고 확장된 상태이다. 사실 이 구절은 모든 형태의 종말론 체계에 문제거리이다. 

다른 이들은 여기서 묘사된 신천신지는 영원 상태가 있기 전 이 지상에 나타날 천년왕국의 상태 묘사로 보기도 한다. 이 이사야 본문의 증거는 전통적인 견해를 지지해 준다. 즉, 이 신천신지는 영원한 상태, 완성되고 안전해진 하나님 나라이 형태를 지시한다.

둘째, 계 2-3장의 서신들은 계 21-22장에 반의적 (反意的 antithetic) 병행법을 구성한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다시 말해, 옛 창조 질서 안에 있는 교회의 불완전함이 계 2-3장에 제시된 일곱 교회들에 보낸 서신들에서 나타난다면, 그것이 새 창조에서 완성된 교회의 모습은 계 21-22장에서 제시된다.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부인할 수 없이 분명한 병행들을 고려해 보라 (Meredith Kline)

·거짓 선지자들 (2:2) / 12 참 사도들 (21:14)

·거짓 유대인들 (2:9, 3:9) 참 이스라엘 12지파 이름들 (21:12)

·사탄의 보좌가 있는 곳에 사는 기독인들 (2:13) /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에 거하는 성도들 (22:1)

·교회의 어떤 성도는 죽었다 (3:1) / 새 예루살렘 있는 모든 성도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다 (21:27) ·교회는 흔들리고 있고, 등대는 임시 (1:20; 2:5)/ 하나님과 어린 양이 영원한 등잔이시다 (21:23-24; 22:5)

·교회는 우상의 부정한 것들과 (2:14-15,20) 거짓말쟁이로 가득채워져 있다 (2:9; 3:9)/ 새 창조에는 정결과 진리만 있을 것이다 (21:8,27)

·성도들은 박해에 직면하여 이기는 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소망 (2:8-10,14) /새 창조에서 이런 약속들을 받고 그들은 통치하다 

 

 

유사하게 폴 미네아르는 (Paul Minear, I Saw a New Earth)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완성된 새 창조의 최종 환상에서 완전 성취된는 점 지적:

·음식 (2:7 /22:2)

·성전 (3:12/ 21:22이하)

·영원한 성읍과 동일시 (3:12/ 21:2, 10)

·큰 이름 (3:12/ 22:4)

·영원한 안전 (3:5/ 21:27)

·썩지 않는 의복 (3:5/ 21:2, 9이하; 19:7-8 참조)

·빛나는 돌과 발광체 (2:17, 28/ 21:11, 18-21, 23, 22:5, 16)

·그리스도의 왕적 권세에 참여 (2:26-27, 3:21/ 22:5)

·이둘째 사망에 참여치 않음 (2:11/ 21:7-8).

 

 

영원 세계: 신천 신지, 새 예루살렘 (21:1-22:5)

A. 신천 신지에 대한 요한의 환상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만약 땅과 하늘이 떠나고, 그들이 있을 곳도 없었다면 (20:11), 신천신지가 그들을 대신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전 것과 나중 것과의 관계는 모호하다. 분명 연속성의 요소들도 있다. 이는 마치 현재의 썩을 몸과 미래의 썩지 않고 영화롭게 된 몸 사이에 연속성이 있음과도 같다. 우리는 변화된 모습이겠지만, 우리가 현재 가진 그 사람으로 하늘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장차 나타날 하늘과 땅도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한다. 여기서 "새"는 헬라어로 kairos인데, 이 말은 대개 질적으로 (시간적인 차이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벧후 3:10 참조. 그 연속성의 요소들과 불연속성의 요소들의 구체적인 것들은 아래 참조.

불연속성의 한 요소는 새 창조에는 "바다"가 없다는 것이다. 왜 "바다"인가? "바다"는 구약에서 악, 혼돈,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 17:12,13, 51:9-10, 27:1, 57:20, 계 17:8, 21:1, 렘 46:7이하, 욥 26:7-13). 여기 계시록에서도 "바다"는 우주적 악과 반란,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불신앙이 나라들의 원천으로 나타나고 있다 (계 13:1, 17:2, 6). 또한 "바다"는 죽은 자의 처소이기도 하고 (계 20:13) 세상의 우상숭배하는 무역 활동의 처소이기도 하다 (18:10-19). 래드가 (Ladd) 언급한대로, 고대에 바다는 "어둠, 신비, 배반하는 자의 영역을 상징"하였다 (276; 시 107:25-28; 겔 28:8; 단 7:3이하). 새 창조에서 그런 악과 부패, 불신앙, 어둠이 제거되리라고 말하고자 할 때, 바로 새 창조에는 "바다"가 다시 있지 않다고 그림으로 그리듯 말씀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마 8:23-27에 묘사된 풍랑이는 갈릴리 바다를 주께서 잠잠케 하신 일에서 예표되었던가?

 

B. 새 예루살렘 환상 – 21:2-22:5

1. 그 도성의 하강 – 21:2-8

a. 남편을 위해 단장한 예루살렘 –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여기서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교회의 신적인 기원을 상징), 남편에게 오고 있는 신부에 비유되고 있다. 그 성읍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칭한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교회이다 (계 3:12, 19:7-8 참조). 계 21:9이하에서 보다 명시적으로 이런 사고가 확인되고 있다: 이리로 오라, 내가 네게 어린 양의 아내, 신부를 네게 보이리라

새 예루살렘은 이상화된 혹은 완성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다. 새 예루살렘의 영화로운 모습은 성령님의 열매를 주렁 주렁 맺은 (갈 5:22-23) 성도의 이상화된 모습이다 (사 54:11-12도 참조). 동시에 그곳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할 곳이기도 하다 (히 11:8-10,13-16 참조). 이처럼 새 예루살렘은 이중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b. 하나님과의 교제 – 21:3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3절에서 말씀하는 이는 천사인가 하나님이신가? 3절의 요지는 2절에 언급된 새 예루살렘 성과 결혼 은유의 의의를 해석하는 것이다. 2절에 언급된 표상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친밀성과 영적 교통을 묘사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그런 결혼 표상은 레 26:11-12, 겔 37:27 등의 성취이다 (고후 6:16 참조). 이는 구약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영화로운 미래를 예고한 그 예언이 "교회"에서, 곧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믿음 공동체에서 성취됨을 보여준다. 

보캄은 (Richard Bauckham, The Climax of Prophecy, 311) 말하길, 여기서 "사람들"은 (ton anthropon) 천사들이나 짐승과 구분되는 사람이란 의미가 아니라, 인류를 가리킨다. 이 말은 계시록 용레에서 통상적으로 갖는 그런 보편적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8:11; 9:6,10,15,18,20; 13:13; 14:4; 16:8-9,21; cf. 9:4; 11:13; 16:2).

 

c. 죄, 사망, 슬픔이 없는 곳 – 21:4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가운데 옛 창조 질서에서 존재하던 죄의 여파는 온전히 제거된다. 죄의 결과로 나타났던 슬픔이 사라진다 (사 25:8). 눈물은 하늘에서 지상에서 실패한 것을 후회하며 흘리는 여기 언급된 눈물이 아니라, 옛 창조 질서에서 복음 때문에 당한 고난을 회상하며, 혹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흘리는 눈물이다.

죄의 결과인 사망도 사라진다. 애통하는 것, 울부짖는 것, 고통도 사라진다. 처음 것들은 다 지나가기 때문이다.

 

d.  확신을 주심 – 21:5-6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1:1-6 부분은 이사야 예언을 반영하는데, 1절은 사 65:17, 66:22, 4절은 사 65:17, 43:18, 5절은 사 43:19, 66:22를 반영한다. 고후 5:17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새 생명을 세상 마지막에 최종 완성된 바의 시작으로 묘사한다는 점도 참조. 혹시 사람들이 의심하고 믿을 수 없다고 할까봐! 하나님은 이 말씀들은 신실하고 참되다고 확신을 주신다. 생명수 표상은 계 22:12-13, 사 49:10, 55:1 참조. 이 생명수는 목 마른 자에게 주어진다.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다.

하나님은 목 마른 자에게 생명수를 값없이 주시는데, 목마름을 느끼게 하시는 이도 사실은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

 

e. 성도에게 말씀하심 – 21:7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기는 자는 일곱 교회들에서 언급되었다. 이기는 자는 핍박과 곤고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 자이다. 3절에서 집합적으로 기술된 바가 7절에서 개인화되고 있다.

 

f.  불신자에게 말씀하심 – 21:8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deiloi) 핍박이나 고난이 올 때 겁약한 겁쟁이들을 지시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apistoi) 배반하는 자, 신의가 없는 자를 지시한다 (the cowardly, the faithless, NRSV)

이 죄악의 목록은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로 끝난다. 계 2:2에서 이 말은 사도들도 아니면서 자신들이 사도라고 자칭한 자들이 이런 거짓말 장이들이다. 3:9에서는 예수님을 배척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신을 기만하는 자들에게도 이 말이 적용되었다. 요일 2:4, 22, 4:20, 5:10에서 거짓말 쟁이는 말과 행동이 중생하지 못한 자임을 드러내면서도 교회에 속한 자를 지시한다. 따라서 거짓말쟁이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란 일반적인 의미라기보다, 기독인이라 하면서도 사실 그렇지 아니한 자들을 지시한다.


2.   새 예루살렘의 모습 – 21:9-22:5

세 가지 서론적 고찰

첫째로, 계 21:9-22:5에 제시된 묘사는 겔 40-48장에 제시된 성전과 성읍 환상에 주로 근거한다. 에스겔이 보았던 그 환상 성전과 성읍이 이제 새 예루살렘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둘째로, 계 17장에 제시된 음녀와 계 21장의 신부 사이에는 분명한 대조가 나타난다. 두 환상이 도입되는 유사성을 주목해 보라: 

17: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 .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사도 요한은 구속받은 공동체는 하나님의 신실한 신부와 아내라면, 불경한 공동체는 우상숭배를 통해 음행하는 자들과 대조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Beale, 1064).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은 거의 동일한 복장으로 묘사되고 있다 (금, 보석들, 진주; 17:4; 18:12,16; 21:18-21).

셋째로, 이 성은 문자적인 묘사인가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는 그림에 불과한가? 라고 묻곤 하는데, 여기 묘사된 바는 상징적 만화 같은 그림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상징인가? 그것은 구속 받은 자의 영원한 공동체의 영화롭게된 모습을 상징한다. 묘사된 바는 현실 세계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낙원의 영화로움을 부각시키고 있다. 영화롭게 된 교회는 (21:2, 10) 새 예루살렘의 세세한 구조와 동일시되고 있다 (21:11-22:5):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 . .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21:9-10)”(Beale, 1062). 요한에게 음녀가 보여졌듯 (17:1), 여기서도 신부가 그에게 보여졌다 (21:9). 계 21:16-17에 제시된 성의 규모 역시 상징적인 그림임을 암시해 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a.   새 예루살렘 환상– 21:9-10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사도 요한이 성령으로 체험한 경험에 대한 묘사는 에스겔의 경험을 기술한 것과 유사하다 (겔 2:2, 3:12,14, 24, 11:1, 43:5). 이런 유사성은 이런 유사성은 계 21:11이하의 새 예루살렘이 에스겔이 보았던 그 성전 환상과 (겔 40-48장) 동일하다는 앞서의 지적을 확인시켜 준다. 그 성읍같은 성전 역시 아주 높은 산에 위치하였다 (Beale, 1065).

 

b.   성의 모습 – 21:11-21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정이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졌다 (11절). 구약에서는 건물로 된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었다. 그러나 새 창조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그의 영광)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한다. 그 백성들은 (성도들) 그가 거하시는 거룩한 성읍이다. 

벽옥에 대하여 계 4:3 참조. 거기서 벽옥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벽옥 (jasper)

벽옥의 산출지는 인도, 러시아, 미국, 프랑스, 이집트, 독일 등이 주요 산지이고, 이웃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산출되나 한국은 나지 않는다. 일본에서 니가타 현의 사도, 쉬마네 현의 마추에쉬 등에서 난다

벽옥은 불투명한 석영 광석으로 여러 색으로 나타나는데, 흔한 것은 붉은 색, 갈색, 녹색, 노랑색, 드물게는 파란색과 검은 색으로, 혹은 아주 드물게는 흰색으로 나타난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이 둘렀는데, 그 성안에 거하는 자들이 최고로 안전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그림이다 (사 26:1, 겔 40:5-6). 그 성이 정방형이란 것은 구약 시대 지성소를 상기시키는데, 이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친밀함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성은 12문이 있고, 그 문들에는 천사가 한 명씩 있다 (12-13절). 이 천사들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과 유사하다 (계 2-3장; 사 62:6도 참조). 문들 위에는 이스라엘이 12지파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그 성벽은 12 사도들의 이름이 새겨진 12기초석들을 가졌다 (14절). 24란 수자는 12지파 + 12사도인데, 이는 이미 4:4에서 나타난 바 있다. 구약에서 다윗은 제사장들을 24반열 (대상 24:3-19), 24레위인 문지기들 (대상 26:17-19), 24반열의 레위인들 (25:6-31)로 조직했다.

12지파와 12사도는 각기 구약과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들이다. 이렇게 새 예루살렘 성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과 신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며, 동시에 그들이 거할 처소를 지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구약은 유대인 중심이지만, 신약은 유대인 성도도 있지만, 이방인 성도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신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요소는 동일하다: 유대인 성도 + 이방인 성도. 구약시대에는 이방인들이 할례나 결혼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 가입하였다.

- 성전 성읍을 측량하는 표상은 겔 40:3-5을 반영한다. 성을 측량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의미이다. 구약 시대 예루살렘의 성벽은 종종 원수의 침공으로 깨어지고 헐렸지만, 새 예루살렘 성벽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완전한 안전을 보장한다. 물론 이는 최고의 안전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만화 그림이다.

-새 예루살렘은 정방형으로 (16절에서 길이, 넓이, 높이가 같다) 지성소를 상징한다.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가 있다. 그런데 길이나 넓이, 높이는 모두 1만 2천 스타디온이다. 이는 약 1500마일이며, 약 2400킬로이다.

 

대략적인 새 예루살렘의 넓이 (높이 제외)

 

- 성벽은 (17절) 144큐빗이다 (7:4-9, 14:1, 3참조). 이는 약 64미터에 달한다! 이것만 보아도 새 예루살렘의 성격이 상징적임을 드러내 준다. 이 수치는 최고로 안전한 성벽임을 강조할 것이다. 이런 수치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성읍을 실제 나타날 모습으로 상상하지 말아야 한다.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고 한 것은 그 수치가 실제라기 보다, 천사들의 척량법에 따른 수치, 곧 상징적 수치임을 의미할 것이다. 어떤 이는 제안하길, 666은 헬라어로 짐승을 의미하는 therion을 히브리어 문자로 쓰고, 그 문자의 수치를 총합한 결과라고 하고, 144는 천사를 의미하는 헬라어 angelos를 역시 히브리어 문자로 쓰고, 그 문자의 수값을 총합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 성벽의 재료는 벽옥이고, 그 성읍 자체는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다 (18절).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면,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은 없다. 유리는 투명하고 금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즉, 이 부분의 기술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 성벽의 기초석들이 열거된다. 이 12보석들은 출 28:17-20, 39:8-14에 제시된 대 제사장이 가슴에 달았던 흉패에 박힌 12보석에 근거한다. 그 12보석들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였다면, 이제는 성의 12문들이 (12지파), 12기초석들에 (교회의 12사도) 적용되고 있다 (벧전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참조).

- 성의 재료가 되는 보석들은 부의 상징이라기보다, 구약 성전의 지성소가 온통 정금이었듯,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곳의 영광과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간증하는 자들은 종종 천국에 갔더니 집이 황금 보석인데, 세상에서는 그런 황금 주먹만한 것만 가져도 부자인데, 하늘나라에서는 집이 다 황금이고 . . . 이런 식으로 간증하는데 번지를 잘못 짚은 것이다. 경쟁적 경제 활동이 소용없는 천국에서 무슨 황금의 값어치를 논할 것인가?

- 21절에서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라 한다. 그러니까 성문 하나가 전체로 진주 덩어리라는 것이다. 이는 역시 상징성을 드러내 준다. 성문 하나의 크기, 즉 그 넓이와 높이가 얼마인지 모르나, 그 성벽의 두께가 64미터라면 성문의 두께도 그 정도 될 것인데, 그런 큰 진주 덩어리를 상상해 보라.

- 성의 거리는 (21절)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고 했는데, 11:8에서는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한 두 증인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라고 했다. 즉 복음 때문에 큰 길에 시체가 벌려지는 수치를 당한 자들은 이제 그 수치에 비교할 수 없이 큰 영광에 참여하게 되리라. 

 

c.    성전: 주 하나님과 어린 양 – 21:22

21:22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신천신지에서 성전은 하나님과 어린 양 자신이시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d.  해와 달: 하나님의 영광– 21:23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신천지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옛 창조 질서에서 최고의 빛이었던 해와 달을 무색케한다.

 

e.   성에 거하는 자들 – 21:24-27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이 구절들은 사 60:3, 5, 11을 반영한다. 사도 요한은 구약 시대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 곧 열방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 여행을 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리라 예고한 바가 이제 영원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성취되고 있다고 말함과 같다. 그런데 이 새 예루살렘은 이상화된 교회의 모습이므로, 세상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이 부분은 신약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완성된 영원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투사하고 있다.

-열방과 땅의 왕들은 (24절) 이전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들이었으나 나중 하나님께 굴복하고 구원받아 믿음 공동체에 속한 상태로 변화되었다 (사 11:6-12). 계 5:9-10에서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한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이 열방이 성읍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그 영광은 무엇인가? 이사야는 사 60장에서 물질적 부와 보물을 언급하였지만, 여기서는 그런 물질적 금은 보화를 상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영적 보물, 곧 주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묘사한 듯 보인다. 계시록 4:9, 11, 5:12에서 "영광과 존귀"는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는 찬양을 지시한다.

앞에서처럼 이미 신약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미래 영광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양 투사하여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사도 요한이 시대착오적인 표현을 한다고 비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오늘날 신약 시대에 보듯, 세상의 권세자들이 자기의 좋은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굴복하고 그에게 모든 존귀 영광을 돌리듯, 영원 세상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양 묘사한 것은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하에 온전히 굴복되리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 그곳에는 밤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언제고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22:5에서 보듯, 어둠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항상 빛을 비추시기 때문이다.

24-26절을 근거로 이방인들이 새 예루살렘 성밖에 거주하고 구원받은 유대인들은 성 안에 거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전혀 합당치 않다. 보캄은 이렇게 지적한다:

예언은 미래를 묘사할 때, 현재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방식으로만 묘사할 수 있다. 그 미래 예언적 묘사는 당대인의 소망과 두려움의 견지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그리는 것이다.

 예언은 미래사를 선지자 당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묘사한다. 이사야의 예언은 자기 당대의 관습과 요소로 장차 새 창조에서 나타날 바를 묘사한다. 우리는 이런 선지자들의 예언적 묘사를 "겉옷과 알맹이의 원리"라고 불렀다. 겉옷은 분명 유대적 색채를 띄지만, 그 알맹이는 영적인 것들이다. 에스겔도 미래 성전을 묘사할 때 (겔 40-48장) 자기 당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당대 요소들로 기술하였다.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 21:8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f.  새 예루살렘 성의 생명 – 22:1-5

1)    생명수 강 – 22:1

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이 부분은 겔 47:1-9, 슥 14:8 등에 근거한다. 또한 창 2:10의 에덴동산과 연관된 강들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강들이 온 땅을 적신 모습과 여기 낙원의 생명수 강을 비교하여, 종말은 세상의 시작과 서로 상응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종말에 나타날 바는 시작의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창 3장은 실락원을 Paradise Lost, 계 22장은 복락원을 Paradise Regained 제시한다. 낙원은 하나님의 원래 창조였던 에덴동산의 회복이며, 그 영화로운 최종 완성에 다름 아니다. 첫 아담이 범죄로 상실한 바를 마지막 아담이 순종으로 회복시키신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생명수 강은 요 7:38-39에서 보듯,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심령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심령 천국, 곧 천국의 지점인데, 이 생명수가 심령에 흐르지 않는 자는 천국 본점에도 들어갈 수 없다.

 

2)   생명 나무 – 22:2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새 예루살렘 거리와 강은 나란히 하여 양편에 나무들이 있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개연성 있는 모습은 2상반절과 1하반절은 함께 취하여, 생명수 강은 성의 거리 한 가운데 위치한다. 마찬가지로 생명 나무는 강 좌우편에 정열한 수 많은 나물들을 집합적으로 지시하는 거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겔 47:12 참조). 에덴동산에서 한 그루의 생명 나무는 이제 종말의 낙원에서 수 많은 생명 나무가 되었다.

그 생명 나무의 치유하는 능력은 복음을 빋는 모든 자들에게까지 미친다. 이를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신약 시대에 우리가 체험하는 바를 반영하고 있다. 21:4에 의하면 거기에는 치유를 필요로 하는 죽음이나 고통, 슬픔이 없다고 했다. 여기서도 겉옷과 알맹이의 원리에 해당되는 기법이 동원되었다. 사도 요한은 현 시대의 상황을 미래 이상화된 상태에로 투사하고 있다. 혹은 미래의 완성된 모습을 현재의 교회 상황으로 묘사하고 있다. 성에는 해나 달이 비췰 필요가 없다 (21:23). 열매를 달마다 맺는 그 나무는 해나 달의 빛을 받아야 하겠지만, 그런 발광체가 없다. 따라서 상징적 묘사가 분명하다. 

알란 존슨은 (Alan Johnson) 이렇게 묘사한다: 

풍성한 열매와 치유하는 잎의 표상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구원 공동체, 곧 거룩한 도성에 미치는 원대한 효과를 상징한다고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너무나 강력하여 죄의 여파가 완전히 제거된다. 하나님이 구원 공동체에 주시는 영생은 영원히 있을 것이고, 이전의 죄를 영원히 치유할 것이다 (203).

 

3)   복된 미래 – 22:3-5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범죄로 인간에게 임했던 신체적, 영적 죽음이 마지막 동산에서, 새 창조 질서에서 어린 양에 의해 영구적으로 완전히 제거 되리라.

하늘에서 성도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님을 섬긴다 = 경배드린다 (3절)

하나님을 보리라 (4상반;출 33:20, 마 5:8, 요 17:24, 딤전 6:16, 요일 3:1-3)

그분의 임재를 향유하리라 (5상반; 민 6:25-26)

영원히 통치하리라 (5하반)

무엇을 통치한단 말인가? 거룩한 천사들; 타락한 천사들, 자연계 (짐승들). 아마도 통치하다란 왕적 위엄과 권세를 자로서 살리라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후기 Epilogue – 22:6-21 

These verses serve as a formal conclusion to the book and are linked with Rev. 1:1-3 by a number of verbal similarities. Note, however, that whereas the introduction to Revelation pronounced a blessing on all who obey the words of this book, the conclusion declares a curse on all who disobey.

A. 천사의 증언 – 22:6-15

1. 결론의 서론 – 22:6-7

Cf. Rev. 1:1-3. Of special interest here is the reference in v. 6 to the Lord as “God of the spirits of the prophets.” Note several things about this phrase:

First, the word “spirits” is what grammarians call an “objective” genitive. The idea can be paraphrased: “God over the spirits of the prophets” or “God ruling or inspiring the spirits of the prophets.” In any case, God is clearly portrayed as sovereign over what prophets prophesy. God, as it were, owns, operates, and oversees the ministry of true prophets. This confirm!s what we see elsewhere, especially in 1 Cor. 14, that the prophetic is entirely dependent on God, always awaiting his anointing and activity. Prophets may prophesy at will, but they only receive revelation by the initiative of God. Thus, more so than with the gift of teaching, prophets are somewhat passive, being instruments or conduits for the revelatory word of God, whereas teachers are more active, drawing directly from the Scriptures and expounding what they interpret. This is, in fact, the primary distinction between the prophetic gift and the teaching gift: the former is dependent on a spontaneous revelation while the latter is dependent on an inscripturated text. However, this should not be taken to mean that the Spirit is not also active in the exercise of other spiritual gifts, such as teaching.

Second, is the word “spirits” a reference to the human spirit of each prophet or is it a reference to the Holy Spirit? Some find it problematic to suggest that the Holy Spirit would be mentioned in the plural. But remember: (1) the plural is used for the Holy Spirit in Rev. 1:4; 4:5; 5:6; and (2) when the human spirit is energized by a charismatic manifestation of the Holy Spirit (i.e., when a spiritual gift is in operation), Paul seems to have in mind both; in 1 Cor. 14 it is difficult to know when one should translated pneuma as “Spirit” and when as “spirit”. Gordon Fee simply renders it S/spirit.


Third, Paul uses the same terminology in 1 Cor. 14:32 (“the spirits of prophets are subject to prophets”; the only difference is that in Revelation the definite article appears: “the
spirits of the prophets”). There he has in mind the control by the prophet of the manifestation of the Spirit. In other words, Paul is saying that, contrary to those who think prophecy is an ecstatic and uncontrollable phenomenon that overwhelms and overrides the will of the prophet, each individual is capable of consciously refraining from prophetic utterance in accordance with the rules and decorum for prophetic ministry in the church.

When John says that the angel was sent “to show His bond-servants the things which must shortly take place” he does not mean that Christians in general saw the visions as John did but “that they experienced the visions vicariously through John’s record of them” (Beale, 1126).

2. John’s second rebuke – 22:8-9

This passage is virtually identical to Rev. 19:10, except that in the latter we read at the conclusion: “For the testimony of Jesus is the spirit of prophecy.”

People have often wondered why John would be so nave as to fall at the feet of an angel and worship? Some have tried to dismiss the problem by saying that the word “worship” (proskunesis) need only refer to a normal gesture of respect, far short of genuine worship. Whereas the word can often have this meaning in the Bible, the angel’s response in v. 10b and his advice to John indicate otherwise. There are at least three answers to this problem, all of which bear a measure of truth.

· First of all, it may be that John, much like Daniel in chp. 10 of his prophecy, was overwhelmed with the brilliance and power of this angelic being. Let us remember that in 18:1 an angel is described as “having great authority” and so completely reflecting the glory of God that “the earth was illumined”.

· Second, in the Rev. 19:10 passage the angel has just pronounced an awesome beatitude on John and others who are invited to the marriage supper, immediately followed by a powerful declaration that authenticates its reality: “These are true words of God” (v. 9b). The impact of this statement may have been simply more than he could fathom. He may have thought that any spiritual being commissioned from the throne of God with such profound news was deserving of special reverence.

· Third, it has been argued that John’s desire was “to counter a tendency to angel-worship in the Asiatic churches to which he addressed his work” (Bauckham, 133). However, as Bauckham goes on to note, “in that case it is surprising that no reference to this aberration is made in the seven messages to the churches” (133).

But is there any other reason why the Spirit, through John, would include this story? Yes.

· First of all, note that it is the angel as the giver of prophetic revelation (this is especially emphasized in 22:8-9) that explains why John prostrates himself in this way. But “in rejecting worship the angel disclaims this status: he is not the transcendent giver of prophetic revelation, but a creaturely instrument through whom the revelation is given, and therefore a fellow-servant with John and the Christian prophets, who are similarly only instruments to pass on the revelation. Instead of the angel, John is directed to ‘worship God’ (19:10; 22:9) as the true transcendent source of revelation” (Bauckham, 134). As 22:16 makes clear, “the angel is mere intermediary, Jesus is the source of the revelation” (134). The angel wants to make it clear that when it comes to revelation, he belongs on the side of the creatures who receive it, while Jesus belongs on the side of God who gives it.

· Second, it may be that John is reinforcing in this story one of the principal themes of the entire book: namely, the difference between true worship and idolatry. Everyone in Revelation either worships God or the dragon/beast/Babylon. There is no third way or middle ground.

· Third, and related to the above, is the fact that “this passage presents an example of how easy it is to fall into idolatry, for which the judgment described throughout ch. 19 comes into play” (Beale, 947). If someone like John, who has been the recipient of such marvelous revelatory experiences as found in Revelation, can fall prey to this temptation, how much more should we be on the alert!

The phrase “the testimony of Jesus [cf. 1:2,9; 12:17; 19:10b; 20:4] is the spirit of prophecy” (found in 19:10 but not in 22:8-9) deserves comment. The Greek would allow us to render the first part either of two ways: (1) “the testimony about Jesus,” or (2) “the testimony which comes from Jesus,” i.e., which Jesus himself bears or declares. The latter option points to the idea that all true prophecy has its origin in the words and acts of Jesus; the former option highlights the idea that all true prophecy consists in testimony or witness to/about Jesus himself. I.e., he is its content and focus (whether directly or indirectly).

The second half of this statement may mean that all true prophecy is inspired by the Holy Spirit (i.e., energized and sustained by him). Or it may mean that the essence of prophecy, the purpose and principle of it all, is bearing witness to Jesus. Or again, it may mean that the (Holy) Spirit is chiefly characterized by prophetic manifestations. Aune also suggests the possible translation, “the prophetic Spirit,” by which he would be referring to “the power that allows certain individuals to have visionary experiences and gives them revelatory insights not available to ordinary people” (3:1039).

 

3. 신비로운 권면 – 22:10-13

Cf. Dan. 12:4. What Daniel was commanded to seal up for a future season, John is told to declare to all openly, for the time of fulfillment of such prophetic truth is at hand.

Verse 11 is problematic. If this were merely a statement of fact, no problem would exist. But it is an exhortation. How is it that an angel exhorts unbelievers to be unholy? Mounce suggests that since the end is near “there is no longer time to alter the character and habits of men” (392-93). But we know now that for John and his readers the time of the end has extended for some 1,900 years. Perhaps the angel’s point is that “the bent of one’s choices forms an unchangeable character, so that the imperatives have the sense of ‘be what you always have been as you face judgment’” (Beale, 1132).

Others argue that the meaning is to be found in Isaiah 6:9-10 and its use by Jesus in Mt. 13:9-17,43. In both these passages unbelievers are exhorted not to hear because of their insensitive response to the prophetic word. “To such communities,” explains Beale, “God sent prophets whose words increased the blindness of the apostate but served to shock the elect remnant out of the spiritual torpor characteristic of the majority. The impious were even exhorted not to understand, as a punishment for their apostasy and idol worship” (1132). The exhortation of Rev. 22:11 would thus be a judgment in which those who have rebelled and resisted the word of God are, in a sense, consigned and given over to a deeper aggravation of their chosen behavior.

What shall we make of the terminology of imminence here and in 1:3? It is a blessing to read, hear, and obey the words of this prophecy because “the time is near” (v. 3b). In 1:1 John said the things in Revelation “must shortly take place.” In 22:7, Jesus says, “I am coming quickly.” In 22:10, the angel declares that “the time is near,” and again in 22:12 Jesus says, “I am coming quickly.” What do these statements mean? Here are the options as I understand them:

(1) These statements have become the principal basis for the preterist interpretation of the book. Preterists insist that we should interpret these time indicators literally. Thus, John is saying that the vast majority of events in Revelation are all to transpire within the first century (primarily in the events associated with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and its temple in 70 a.d.).

(2) Some say that the words “near”, “shortly,” and “quickly” mean that once the appointed time arrives the events will unfold suddenly or will occur rapidly. In other words, the emphasis is on the speedy manner of fulfillment.

(3) Others contend that all that is meant is that the events are certain to occur.

(4) Some point to 2 Peter 3:8 (“With the Lord a day is like a thousand years”) and argue that John is writing from the divine perspective. What may seem like incessant delay to us is “quickly” and “near” for the Lord who views time from a heavenly perspective.

(5) Mounce argues that behind these words is the prophetic principle of imminence; i.e., John’s point is that the events could transpire at any time, even soon (although there is no way for anyone to know that with certainty; therefore, we must always be ready).

Consider Jesus’ statement in 22:7,12 (“I am coming quickly”). The preterist focuses on the word “quickly” and thus concludes that this is not the second coming of Christ at the end of history but his “coming” in judgment in 70 a.d. Others focus on the word “coming”, believing it to refer to the Parousia, and thus conclude that “quickly” must be pointing to the notion of imminence (but not necessarily immediacy).

(6) Beale contends that John’s words “quickly” (or “soon”) and “near” are a substitute for Daniel’s phrase “in the latter days” (e.g., Dan. 2:28). In other words, “John understands Daniel’s reference to a distant time as referring to his own [John’s] era, and he updates the text accordingly. What Daniel expected to occur in the distant ‘latter days’ – the defeat of cosmic evil and the ushering in of the divine kingdom – John expects to begin ‘quickly,’ in his own generation, if it has not already begun to happen” (153). John is declaring that prophetic fulfillment has already been inaugurated in his own lifetime. The consummation, however, is yet to come. In summary, “John probably views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Christ as inaugurating the long-awaited kingdom of the end times, which the OT (e.g., Daniel) had predicted and which will continue to exist throughout the church age” (185).

I find Beale’s explanation the most likely one. It seems as if John’s intent is to bring events which were once in the distant future into the immediate present. In that sense, then, “the time is near.” But the “time” for “what” is near? Wilcock asks the appropriate questions: “Time for the end of time, and all its associated events? Time for the beginning of a long series of happenings which will eventually usher in the end? Time for some immediate crisis of trouble or persecution, which will be a kind of foreshadowing of the end? John is not told immediately” (32). I believe Wilcock is correct when he goes on to suggest that

“the fulfillment is a process, not a crisis; and a lengthy one, not a sudden one, we may observe – for though events at its climax will move swiftly enough, the process itself will occupy the whole of the gospel age, from the inauguration of the kingdom (12:10) to its final triumph (11:15). If this that Daniel has foreseen for the latter days is what the angel is now bringing into John’s immediate purview, then ‘the time is near’ indeed. As soon as his letter reaches its destination in the churches of Asia, they will be able to say, ‘These things are happening now’” (33).

 

4.  일곱째 축복 – 22:14-15

For the metaphor of believers washing their robes (in the blood of the Lamb), see 7:14. Here we have the seventh and final beatitude or blessing in Revelation: those who have washed their robes clean by faith in the blood of Christ have been given authority or power over the tree of life in the sense that they can eat of it to their eternal spiritual welfare.

For the imagery of v. 15, see comments on 21:8,27. Here John adds one element: “dogs”, which in Scripture are generally regarded as unclean and despised and often refer symbolically to unbelievers (see Phil. 3:2-3; 2 Peter 2).


B.  예수님의 증거 – 22:16

There are several ways to interpret the words, “to you (plural) . . . for the churches”.

(1) The “you” (plural) = the seven churches and the “churches” = all other congregations addressed at the close of each letter.

(2) The “you” = the believers in one church and the “churches” = the other six churches.

(3) The “you” = church authorities or prophets or elders in each church and the “churches” = the rest of each congregation.

(4) The “you” = all the people who are addressed by Jesus “concerning” the state and destiny of the “churches”.

(5) It could be that “you” and the “churches” are co-extensive, hence, “to witness these things to you in/among the churches.”

 

C. 요한의 증거 – 22:17-211.

초청 – 22:17

Here the Spirit speaks through the bride, the people of God, issuing an invitation to “Come!” But to whom is the invitation addressed? Is it Jesus, being an invitation or plea that he come soon? If so, is the invitation issued by the “one who hears” also directed to Jesus for the same purpose? If so, the last two exhortations are probably issued to people in general to believe (see 21:6). Or it is also possible that the three final imperatives are exhortations to humanity other than Jesus (see the three similar exhortations in Isa. 55:1.

2. a concluding warning – 22:18-19

These verses are clearly built on Deut. 4:1-2 (cf. 12:32) and 29:19-20. What does it mean to “add” to or “take away” from the words of the prophecy of Revelation? In Deuteronomy it refers to those who taught, contrary to what God had said, that compromise with idolatry was not inconsistent with faith in Yahweh. Thus Beale concludes that

“to ‘add’ to the words of John’s prophecy is to promote the false teaching that idolatry is not inconsistent with faith in Christ. To ‘take away from the words of this prophecy’ is also to advancee such deceptive teaching, since this teaching would violate and vitiate the validity of Revelation’s exhortations against idolatry” (1151).

What are the consequences for disobedience to this exhortation?

(1) Some suggest that forfeiting one’s “part from the tree of life and from the holy city” refers to something other and less than the loss of salvation. Perhaps it means heavenly reward or position.

 

(2) Some contend that true believers can and, in fact, do violate this command and thus forfeit or lose their salvation.

(3) Others contend that whereas loss of salvation is theoretically possible, it will not in fact occur. The threat of loss is the means by which God stimulates his people to obey the command. In other words, if a believer were to “add” or “take away” he/she would lose their spiritual life. But a believer, in point of fact, will not. The threatened consequence is what the Spirit uses to energize and motivate the believer to obey the command.

(4) Others contend that those who “add” or “take away” are not true believers in the first place. A true believer is, by definition in Revelation, one who refuses to compromise with paganism. These are people who by their profession and outward behavior appeared for a time to belong to the church, but whose unregenerate condition is subsequently revealed by their disobedience to John’s command (cf. 1 John 2:19).

 

3. 축복 기도 – 22:20-21



출처 : 주님과 얼굴 맞댄 만남
글쓴이 : 중일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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