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0장은 천년왕국 교리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계 20장은 재림 이후에 지상에 유토피아 천년왕국이 수립된다고 해석하는 전천년설과 (혹은 세대주의 전천년설) 계 20장의 1000년은 영적인 통치 곧 신약 시대 전반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나라/ 통치를 묘사한다고 보는 무천년설이 서로 대립하는 전쟁터이다.
세대주의/ 역사적 전천년설
무천년설
우리는 재림 이후에 지상에 유토피아 천년왕국이 세워지리라고 해석하는 해석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 사고는 주님이 이미 배척하신 (요 6:15) 당대 유대인들이 가졌던 다윗왕국의 재건과 같은 그릇된 메시아 사상의 복사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왜 신약시대를 건너띄어 지상에 구약시대의 예언들이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 구약 시대 사람들은 자기 시대 이후에 말세가 곧 인류의 마지막 역사 시대가 오리라고 예견했다면, 주님이 그 예언대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 하나님 나라가 바로 복음 전파를 통해 온 세상에 확장되고 있고, 그 하나님의 통치가 곧 천년왕국의 실상이다.
구약 선지자들이 자기 당대의 관습이나 지리적 요소들로 미래 메시아 왕국을 그렸다면, 그것은 겉옷이었고, 그 알맹이는 현재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는 모든 축복이다. 구약의 모든 약속은 신약 시대 전반에 걸쳐 전부 성취되고 있고 성취된다.
계 20:1-3, 사탄의 결박
전천년설은 이 환상이 전천년설을 가장 확실하게 지지해 주는 증거라고 말한다. 두 가지를 저들은 주장하곤 한다.
- 계 19:11-2과 20:1-3은 연대기적으로, 전후 관계를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천년동안 사단을 결박하는 일은 역사적으로 주님의 재림 이후에 일어날 일이라.
- 둘째로, 현 시대에 사단이 결박당하여 그 활동범위가 극히 제약받고 있다는 무천년설의 주장은 (계 20:1-3에 대한 무천년설의 입장) 현 시대의 상황, 곧 마귀가 현재 활동한다고 제시하는 신약 구절들과 양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단은 현재 모든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신약은 말씀하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1-3절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답변해 보자.
-전천년설은 계 19:11엣 시작하여 21:1까지, 연대기적으로 전후 관계를 구성하는 일련의 환상들이 제시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두 가지 근거로 강조한다.
우선, "내가 보았다" (kai eidon; 계 19:11,17, 19, 20:1, 4,11, 21:1)란 표현을 근거로 환상들은 역사적, 연대기적 전후 관계로 연결된 일련의 사건들을 도입한다고 주장한다. 즉 20장에서 요한이 보았던 바는 그 환상이 지시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19장에서 보았던 바의 이후에 일어날 일이라고 한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 때의 사건을 묘사하는 19장이 아직 미래사이므로, 그 이후에 일어날 사단의 결박과 천년왕국은 여전히 미래사라는 것이다.
답을 하자면, "내가 보았다"는 표현은 계시록에서 수도 없이 나타나는데, 이 표현은 환상들이 지시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전후 관계를 지시하지 않고 단지 요한이 환상들을 받았던 순서만 지시할 뿐이다. 따라서 그 표현은 여러 환상들이 지시하는 그 역사적 사건들의 순서를 구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면 20:7에서 "-때에"는 (and when, kai hotan) "내가 보았다"는 표현과 달리 결정적으로 "시간"을 표시하는데, 20:7-10에 묘사된 사건들이 역사적으로 20:4-6, 20:1-3의 사건들 이후에 일어날 것임을 가리키며, 이런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아니한다.
다음으로, 만약 우리가 20:1-3의 사건들을 19:11-21의 사건들 다음에 일어날 사건들로 본다면, 심각한 문제가 야기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20:1-3은 이미 사단에 의해 기만당했고 (16:13-16), 또한 후에 이미 멸망당한 (19:19-21) 열방들을 사단이 더 이상 미혹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처를 묘사하게 된다. 이미 이루어진 일을 다시 할 이유가 있을까? 열방들은 이미 미혹은 당했고 (16:13-16; 19:19-20도 참조),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멸망당한 (19:11-21, 16:15상, 19도 참조) 그 열방을 사단이 미혹하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 무엇일까? 계시록의 환상들의 놓인 순서들을 연대기 순서로만 이해하려고 할 것이면, 말이 통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19:17-21과 20:7-10 사이에는 병행이 나타난다는 점도 주목해야한다. 사도 요한은 같은 사건을 (아마겟돈 전쟁) 반복해서 병행 묘사하는 것이다. 요한은 1000년이란 역사를 사이에 두고 일어나는 두 개의 다른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의 같은 사건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반복 제시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 본다면, 겔 39:17-20을 염두에 두고, 계 19장의 아마겟돈 전쟁과 계 20장의 곡과 마곡의 전쟁을 살펴본다면 결국 같은 전쟁임이 드러난다. 에스겔은
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한 백성이 다 이스라엘 산에 엎드러지리라
내가 너를 각종 움키는 새와 들짐승에게 붙여 먹게 하리니(겔 39:4)
너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는 각종 새와 들의 각종 짐승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잔치 곧 이스라엘 산 위에 예비한 큰 잔치로 너희는 사방에서 모여서 고기를 먹으며 피를 마실지어다(겔 39:17)
라고 한다. 즉 곡과 마곡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침공한 원수들은 모두 공중 나는 새들의 밥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아마겟돈 전쟁을 묘사하는 계 19:17-18에서 이 곡과 마곡 전쟁의 표상을 차용하고 있다:
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 . .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즉 아마겟돈 전쟁 묘사를 위해서 곡과 마곡의 표상을 빌려 왔다. 즉 아마겟돈 전쟁은 천년왕국 전에, 곡과마곡 전쟁은 천년왕국 끝날 즈음에 일어나는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라, 같은 동일한 사건을 지시한다. 파울러 화잇은 (Fowler White) 바로 지적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계 19장과 20장에 기록된 반란들을 역사상 일어나는 두 다른 사건들이라고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사도 요한이 그 두 사건들을 묘사하면서 에스겔의 예언에서 묘사된 같은 사건에서 그 언어적 표상들을 모두 빌려오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반대로, 요한이 겔 38-39장에 묘사된 곡과 마곡 전쟁 묘사에서 계 19:17-21, 20:7-10에 필요한 표상들을 모두 빌려왔다는 사실은 기본적으로 19:17-21이 20:7-10에서 반복된다고 이해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것이다. 만약 20:7-10이 19:17-21의 반복이라면, 20:7-10은 재림 때에 일어날 사단의 멸망을 묘사할 것이고, 19:17-21은 역시 재림 때에 일어날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멸망을 묘사할 것이다. 달리 이해하려고 하면, 그렇게 이해하는 이들이 왜 같은 곡과 마곡 전쟁 기사에서 두 다른 사건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도 요한이 차용했는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1:2 (Fall 1989) p. 320ff.; R. Fowler White, “Victory and House Building in Revelation 20:1-21:8 : A Thematic Study.” Ph.D. dissertation,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87. Pp. 87–105도 참조.
계 16:14와 19:19 모두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치는 전쟁은 "그 전쟁"이라 정관사가 붙어 언급되었다. 이는 두 전쟁이 한 동일한 종말의 전쟁임을 암시한다. 계 20:8에서 "그 전쟁"이라 (ton polemon; 한, 싸움) 할 때도, 역시 앞에 언급된 바로 그 전쟁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반면 9:7, 9, 11:7, 12:7, 17, 13:7에서는 정관사가 없이 "전쟁"이라고만 한다는 점을 주목해 보라.
넷째로, 계 19장과 20장을 연대기적 전후관계로 보는 전천년설 입장은 히 12:26-27의 선언과 충돌한다.
히 12: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
전천년설은 두 번의 종말의 인류 파멸 전쟁이 천년 기간을 전후로 있으리가 가정한다 (16:17-21, 19:11-21에서 아마겟돈, 그리고 20:9-11에서 곡과 마곡 전쟁). "또 한 번"이라는 것은 (Yet once more) 흔들릴 수 있는 피조물들을 제거하여, 흔들릴 수 없는 것들이 남도록 하는 것을 (이전에 시내산에서 했던 것처럼) '한 번 더' "종말의 때에" 하리라는 것이다. 의미한다. 전천년설자들은 여기서 "내가 또 두 번 (한 번은 천년왕국 전에, 한 번은 후에) 더 땅과 하늘을 진동시키리라"로 읽고 있다. 오히려 계 20:9-11에 제시된 바는 이미 6:12-17, 16:17-21, 19:11-21에 제시된 바를 반복 제시하는 것이라 이해함이 적절하다.
전천년설자는 계 20:10에 의하면, 사단이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이미 던져진 그 불못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따라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천년왕국 시작 전에 (계 19:20) 불못에 던져졌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답하자면:
이런 주장은 20:10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20:10은 문자적으로 한다면, "그들을 유혹하는 자, 마귀가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was thrown into the lake of fire and sulfur, where also the beast and the false prophet [were cast], and they will be tormented . . .), 그리고 그들이 밤낮 영원히 고통받게 될 불과 유황 못에 던져졌다"이다 (kai ho diabolos ho planwn autous eblethe eis ten limnen tou puros kai theiou hopou kai to therion kai ho psyeudoprofethes kai basanisthesontai hemeras kai nuktos eis tous aiwnas twn aiwnwn). 여기 굵은 글자체 부분에는 동사가 없다. 따라서 문맥에 비추어 보충해야 하는데, 19:20에 비추어 과거 시제 동사를 보충함이 적절하다. 그렇게 하면, 마귀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던져진 불못에 던져졌다가 될 것이다 (the devil . . . was cast into the lake of fire and brimstone, where also the beast and false prophet were cast)(eblethesan).
그렇다면,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언제 던져졌던가? 답변은 그 전쟁이 끝난 후에, 곧 마귀가 던져진 그 때에 저들도 던져졌다. 이 용의 삼위일체가 함께 아마겟돈/ 곡과 마곡 전쟁 반란을 부추겼고 함께 불못에 던져져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본문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사탄이 던져졌을 때 그 이전에 "이미" 그 불못에 던져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설사 두 놈이 사단보다 일찍 불못에 던져졌다 해도, 그 놈들이 먼저 심판을 받아 불못에 던져지고, 다음에 사단도 곧장 심판을 받아 같은 곳에 던져졌다고 이해해야 한다.
짐승과 거짓 선지가가 사단보다 1천년이나 먼저 불못에 던져졌다는 주장은 19장의 "전쟁"과 20장의 "전쟁"이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두 번의 전쟁과 두 번의 심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의 전쟁과 심판이 있으며, 그것을 두 다른 보충적인 시각에서 반복 조명하는 것이다. 먼저 19장에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운명을, 20장에서는 사단의 운명을 조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도 요한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불못에 던져지는 환상을 먼저 받고, 다음에야 사단이 불못에 던져지는 환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전지가 후자보다 먼저 불못에 던져졌다는 것을 입증하기위해서는 본문 자체가 제공하는 정보 이상의 정보가 필요하다. 여기에 제시된 바는 요한이 환상을 받은 순서만을 반영할 뿐, 그 환상들에 담긴 사건들의 역사적 순서까지 제시된 것은 아니다.
(2) 전천년설자들이 20:1-3으로부터 끌어낸 두 가지 주장 중 두번 째 것은 사단이 결박의 성격과 범위이다. 전천년설자들은 사단의 결박과 무저갱 감금은 신약 서신들에서 묘사된 그놈의 활동상과 양립될 수 없다고 한다 (고전 5:5; 고후 4:3-4; 엡 6:10-20; 살전 2:18; 약 4:7; 벧전 5:8-9; 요일 4:4, 5:19).
머리는 (G. R. Beasley-Murray) 주장하길,
계 20:1에 언급된 천사는 사탄을 무기력하게 만든다고 한다. 마귀의 감금은 삼중으로 에워쌓였다: 그 놈은 결박당했고, 그가 던져진 무저갱은 잠겼으며, 도장이 그 위에 찍혀 있다. 사도 요한은 사단이 인류에게 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아주 무능하게 되어졌다는 것을 이보다 더 강력하게 강조할 수 없을 것이다.
답을 하자면:
무슨 면에서 사단이 결박되었나? 사단의 결박은 그로 어떤 활동을 못하도록 제재하기 위함인가? 전천년설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머리는 (Beasley-Murray) 사단의 결박은 그가 인류를 해하는데 무능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전천년설자들의 과오는 요한이 분명하게 제한하는 바를 보편화시키려고 시도하는 점이다.
20장에서 두 진술은 사단의 결박과 감금의 목적을 말해준다. 우선 3절은 사단이 더 이상 열방을 기만하지 못하도록 결박당했다고 한다. 그리고나서 8절에서 요한은 사단이 무저갱에서 놓인 후에 나와서 땅 사방에 있는 만국, 곧 곡과 마곡을 모아 전쟁을 함께 하도록 기만하리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한이 말하는 바와 말하지 않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단이 결박되어 기독인들을 핍박하지 못하리라고 말하지 아니한다. 결박당하여 사단은 우는 사자처럼 믿는 성도들을 삼키려고 돌아다닐 수 없다고 말하지 아니했다 (벧전 5:8). 사도 요한은 사단이 결박당하여 더 이상 교회 평화를 깨트리는 궤계를 만들어 낼 수 없다고 말하지 아니한다 (고후 2:11); 혹은 결박당하여 광명의 천사로 더 이상 가장할 수 없다고 (고후 11:14) 말하지 아니한다. 사도 요한은 사단이 결박당하여 불 화살을 기독인들에게 던질 수 없다고 (엡 6:16) 말하지도 않았다. 혹은 결박당하여 사도 바울의 계획을 좌절시킬 수 없다고 (살전 2:18) 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사도 요한이 말하는 바는 사단이 결박을 당하여 그 결과로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할 수 없다는 것이다 (3절). 다시 사단이 결박당한 결과는 하나님의 성을 치기 위해 만국을 부추켜 전쟁을 위해 모집하는 활동을 더 이상할 수 없게된다는 것이다 (8절). 20:1-3에서 요한이 사용하는 언어는 너무나 분명하여, 천년 기간에 사단이 그렇게 할 방식이 없다고 지적한다. 바로 이 특수한 방면에서 그는 제약을 받고 있는데, 그 제약은 그 방면에서는 절대적이며 결정적이다. 마귀의 의도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 종말 전쟁 아마겟돈을 촉박시키는 행동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높여지신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통해서 사단이 땅의 열방을 선동하여 최후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잠시 사단의 활동을 그 방면에서 제약하신다.
어린 양과 그의 성도들을 치는 마지막 공격은 그 제약이 풀리는 날에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현 신약 시대 동안에 사단의 손은 묶인 상태이다. 그놈이 감금에서 풀리는 때에 그 놈은 자기 휘하 귀신 졸개들을 보내어 열방의 왕들을 선동하여 하나님의 큰 날이 전쟁을 위해 모이도록 할 것이다 (계 16:14).
사단은 현 시대에 신약 성경이 그놈의 활동에 대하여 기록하듯 여러가지 활동을 할 것이지만, 요한이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한 가지 사항은 사단은 하나님의 때가 되기 전에, 불신 나라들을 모아서 마지막, 최종적인 교회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그 최종 전쟁은 현 시대의 종말의 때에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살후 2:8, 계 20:9).
사도 요한은 사단의 활동이 모조리 제거되었다고 말하지 아니한다. 한 가지 방면에서 그 놈의 활동은 확실하게 금지되었다고만 한다. 그것은 천년간 열국을 미혹하여 모아서 교회를 치는 최종 종말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첨가하자면, 다른 무천년설 학자들인 안토니 후크마와 윌리암 헨드릭슨은 사단에게 가해진 제약을 약간 확장하고자 한다. 즉, 사단이 그리스도의 초림 이전에 저지른 바는 복음과 연관되는 기만이었다 한다. 그리스도께서 오기 전에 이스라엘을 제하면 모든 열방은 사단에게 기만을 당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진리를 수용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복음의 세계적인 전파는 (마 28:19) 사단이 감금당한 결과이다. 이렇게 두 학자는 사단의 결박과 주의 초림 때에 그 놈이 당한 결정적 패배를 동일시한다 (마 12:29; 눅 10:17-18, 요 12:31-32, 16:11, 골 2:15, 히 2:14, 요일 3:8).
특히 이 점에서 적절한 구절은 높여지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주신 사명과 연관되는 행 26:16-18이다:
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열방, 이방인들은 복음에 관한 한, 사단의 통치 하에서 눈이 감기고 (미혹당한 상태) 어둠에 처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그런 기만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방인들은 이제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것이다. 헨드릭슨은 이렇게 결론 짓는다:
계 20:1-3에서 사단의 결박과 그놈이 무저갱에 던져져서 1천년간 그곳에 머물도록 되어졌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뻗치는 현 시대 내내, 마귀이 지상에서의 영향력이 제약되어 그 놈이 교회의 열방 중에서의 선교 활동을 더 이상 방해하지 못하게 된 것을 말해 준다. 이 현 시대 동안 그놈은 열방이 교회를 멸하도록 만드는 일을 하지 못하게 감금되었다. . . 성령님의 역사와 말씀 선포를 통해서 온 세상 곳곳에서 택함 받은 자들은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어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열방을 정복하고 열방이 교회를 정복하지 아니한다.
사단이 열방을 모아 종말 전쟁을 벌이도록 하는 주요 수단은 열방이 어둠 속에 불신앙 가운데 처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세계적인 전파를 통해서 사단이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필요한 기지가 파괴당하였다. 다시 말해, 복음의 세계적인 전파의 결과로, 사단이 이 점에서 활동을 (종말 전쟁을 위한 선동) 할 수 없게되는 것은 바로 교회의 영향력 때문이다. 사단은 여전히 믿지 않는 자의 마음을 눈 멀게 하지만 (고후 4:4), 그 놈은 복음의 세계적 전파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섭리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다. 사단은 종종 이기는 전투는 할 지언정 전쟁의 승리는 교회에 속한다.
이제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자들 사이에 의견 차이를 야기하는 핵심 사항인 "첫째 부활"의 문제에 이르게 되었다. 무천년설자들은 첫째 부활이 영적인 출생 곧 중생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안토니 후크마나 메레딧 클라인 같은 무천년설 학자는 (Meredith Kline, Anthony Hoekema) 요한은 성도의 죽음 이후, 재림 이전의 중간기 상태의 축복된 삶을 묘사한다고 이해한다.
전천년설자들에 의하면, 20:4하반절의 "살아나다"란 말은 재림 때에 (그러나 천년왕국이 시작되기 전에) 일어날 성도들의 육체 부활이라 한다. 20:5상반절의 "살아나다"란 말도 육체 부활이지만, 천년왕국 다음에 불신자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한다. 따라서 1천년 기간을 두고 각기 육체 부활이 두 번 여기 언급되고 있다고 한다. 천년기 전에 성도들이 부활하고, 불신자는 천년기 이후에 일어난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증거들로 전천년설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한다.
(1) 알포드의 (Henry Alford) 명언
만약 한 구절 안에서 두 부활들이 언급되었는데, 거기서 처음에 어떤 영혼들이 살다라고 하고, 그 이후에 특정 기간이 끝난 후에 나머지 죽은 자가 살아난다고 하면, 만약 그런 구절에서 첫째 부활은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적 부활을 의미하고, 둘째는 무덤에서의 문자적 부활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면, 언어에서 모든 의의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 성경은 어떤 것에 대한 결정적 증거로서 전적으로 무기력하게 되고 말 것이다. 만약 첫째 부활이 영적이라면, 둘째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만약 둘째가 문자적이라면 첫째도 그렇다.
여기에 답하자면,
알포드의 명언은 해석 원리에 도움이 되긴 하나, 그 말이 여기 구절에 특별히 적용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런 원리는 요 2:18-22, 11:25-26; 마 8:22; 눅 9:24; 요 6:49-50; 벧전 3:1; 고전 15:22; 롬 9:6; 고후 5:21등에서는 통할 수가 없다.
무천년설자들은 거의 일치되게 요 5:25-29이 알포드의 격언에 분명한 예외를 구성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영적 부활과 육적 부활은 같은 문맥 안에서 말씀되어지고 있다.
(2) 부활의 (anastasis) 의미
전천년설자들은 헬라어 anastasis에 (부활) 호소한다. 이 명사는 신약에서 42번 나타나는데 39번은 죽은 자의 육체적 부활을 지시한다 (눅 2:34에서 예외). 나머지 두 구절은 계 20:5, 6인데, 그 의미는 이제 결정해야 할 처지이다. 이런 전천년설자들의 지적은 합당하고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런 지적은 그렇게 강력한 증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논쟁을 위해서 한 번 가정해 보자. 요한은 계 20:4-6에서 중간기 상태의 삶을 묘사하길 원한다고. 그러면 그가 한 방식 외에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기술할 수 있었을까? 만야 요한의 의도가 순교를 앞둔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위함이었다면, 만약 그리함에 있어서 그가 짐승이 그들에게 육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어린 양이 그들에게 영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 사이의 분명한 대조를 부각시키기 원한다면, 그들이 짐승의 손에 육체적으로 죽임을 당하나, 어린 양의 임재 앞에서 영적으로 살아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한다고 말하는 것 외에 달리 더 강조할 방법이 또 있을까? 죽음에도 불구하고 죽음 이후에 누릴 그 축복의 상태를 부각시키는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만약 요한이 순교를 앞둔 자들의 중간기 상태의 축복을 묘사하고자 한다면, 지금 그가 사용하는 그 용어들 외에 다른 말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자기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헬라어 명사 anastasis 외에 다른 말을 사용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다른 부활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신약에서) exanastais인데, 빌 3:11에서 나타나고, egersis는 마 27:53에서 나타난다. 이런 본문들은 모두 육체 부활을 지시한다.
요컨대, 만약 요한이 부활의 견지에서 중간기 상태에 들어감을 묘사하기 원하였다면 (그는 이제 순교에 직면할 자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라), anastasis 외에 다른 헬라어 단어로 그 점을 적절하게 기술할 수 있었을까? 성경은 육체 부활의 용어와 표상으로 영적 생활을 묘사한다는 것을 부인할 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겔 37; 엡 2:1-6; 골 2:12-13; 3:1; 롬 6장 등). 그렇다면, 중간기 상태의 영적 생활을 묘사하기 위해 육체 부활의 용어와 표상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무엇인가? 특별히 그런 삶이 ㅈ구음과 대조될 경우 더욱 그러하다. 요한은 anastasis가 독자들의 마음에서 육체 부활을 생각나게 하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그는 "목베임을 당한 자의 영혼들"이라는 말로 그 부활을 수식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그런 말이 계 6:9-11에서 병행되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러하지만, 독자들에게 (이제 순교를 직면할 독자들) 여기 고려중인 부활의 종류는 육체적 죽음 이후의 영적 삶이라는 점을 상기키실 것을 알았다. 이런 사항에 더하여, 신약 전체에서 오직 여기서만 "부활"이란 말 앞에 "첫째"라는 말이 첨가되었다는 것도 주목하자. 이는 무천년설 주장을 지지해 줄 것이다.
계 20장에서 anastasis란 말은 전천년설자들이 주장하듯 육체 부활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요한은 중간기 상태를 묘사하기 원한다고 가정하고, 그가 기술하던 그 역사적 정황을 고려할 때 (독자들이 순교에 직면할 정황), 그리고 요한이 사용할 수 있었던 용어의 제한성을 고려해 볼 때, anastasis란 말이 그의 요지를 제시하는데 부적절한 말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이런 무천년설자들의 anastais 주장이 개연성이 있는지 여부는 다른 근거들로 결정되어야 한다.
(3) 살다 (zao)의 의미
전천년설자들은 신약에서 동사 "살다"의 (zao) 용례에도 주목한다. 이 동사는 4, 5절에서 나타나는데, 이 말은 죽음 이후에 살아나는 부활, 곧 육체 부활을 의미한다고 한다 (마 9:18; 롬 14:9; 고후 13:4; 계 2:8).
답하자면,
이 동사는 신약에서 130번 가량 나타나는데, 여러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여기서 지금의 생존, 육체적 생존 상태를 지시하거나, 살아계신 하나님, 영원히 사는 일,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승귀되신 주로서 살아계신 일, 우리가 윤리적으로 행위를 가져야 할 그 사는 방식, 영적 중생과 회심 등 다양한 의미를 전한다. 이 말은 또한 마 22:32에서 (눅 20:38, 요 11:25-26) 중간기 상태에 사는 것도 지시한다.
요한은 순교자들이 중간기 상태에서 경험하는 바를 산다고 표현할 때 놀랄 이유가 없다. 중간기 상태는 육체 죽음 이후의 영적 생활이다. 예수님은 계 2:10-11에서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계 20:6에서도 둘째 사망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를 해할 권세가 없다고 한다.
중간기 상태의 삶을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살아 가는 상태라고 묘사할 때,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근거가 무엇인가?
(4) 1천년의 (chila ete) 의미
끝으로, 전천년설자들은 1천년이란 말은 문자적 1천년, 수학적으로 연대기적으로 정확한 1천년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계시록은 (4-22장) 환상을 매개체로 주어진 묵시 문헌이다. 따라서 상징법이 생명이다. 수자는 그 전달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문자적인 해석을 가하는 것은 묵시 문헌의 성격을 무시하거나 무지한 자의 소치일 것이다.
다른 본문들에서 1천년은 수학적 정확성을 가지고 해석해야 하는가? 문맥이 시간적이 아닌 것을 다루는 시 50:10, 아가 4:4, 수 23:10, 사 60:22, 신 1:11, 욥 9:3, 전 7:28 등에서도 이는 사실이다. 언제나 이런 곳에서 상징적이거나 과장법적 표현이다 (신 7:9; 대상 16:15; 시 84:10; 90:4; 105:8; 벧전 3:8).
1천의 의미는 무엇인가? 칠톤에 의하면 (David Chilton) 7이 성경 상징법에서 자질의 완전을 의미하듯, 10도 자질의 완전함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10은 많음을 의미한다. 1천은 10이란 숫자를 세 번이나 곱하므로 완전의 극치를 의미하거나 (10 x 10 x 10), 엄청나게 광대함을 (계 5:11; 7:4-8; 9:16; 11:3,13; 12:6; 14:1,3,20) 표현한다. 시 50:10에서 "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라 할 때, 천개의 산들의 생축은 무엇을 말하겠는가? 이는 1001개째 산의 생축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산들의 생축을 소유하시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천 개의 산들로 한정시키는 것은 많은 산들, 많은 생축을 지시하기 위함이다. 워필드 (Benjamin B. Warfield) 역시 동일하게 말한다:
거룩한 수자 7은 역시 거룩한 수자 3과 합하여 거룩한 완전을 의미하는 10을 구성한다. 이 10을 삼승하면 1천이 되는데, 사도 요한은 절대적인 완전을 우리에게 전달하기 위해 달리 말하기 어렵고 1000년이라고 기술한 것이다. . . 그러므로 성도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1천년 통치한다는 것은 보통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상할 수 없는 존귀한 상태, 안전과 축복의 사고를 전하기 위함이다.
첫째 부활에 대한 다른 무천년설자들의 견해
알포드의 명언을 인정하면서 몇몇 무천년설자들은 첫째 부활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제출하기도 한다. 그중 하나가 Philip E. Hughes이다. Hughes는 계 20장에서 "살다"라는 말로 표현된 부활이 모두 육체 부활임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첫째 부활은 성도들이 장차 1천년 통치기 직전에 가질 그 육체 부활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부활인데, 성도들이 그 부활에 참여한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되다고 (계 20:6) 말씀하기 때문이다.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활에 참여한다고 할 수 없고, 남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의미라고 지적하고, 그 남의 부활은 곧 주님의 육체 부활이라고 한다 (롬 6:4; 골 2:12ff.; 3:1; 엡 2:4-5).
유사하게 Norman Shepherd도 주장하길, 첫째 부활은 세례식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골 2:12; 롬 6:4). 그 부활은 개종, 회심이란 말과 거의 같다. 따라서 Shepherd는 골 3:1, 엡 2:5-6에 호소한다. 계 20:6은 둘째 부활을 직접으로 언급하지 않긴 해도, 첫째 부활이란 말에 함축되어 있다. 이 둘째 부활은 재림 시에 성도들이 가질 육체 부활인데, 롬 8:18-23; 벧후 3:13; 계 21:1등에 비추어, 이 둘째 부활은 육체 부활에 불과한 것만 아니라, 우주적 의의를 지닌다고 주장한다.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사이의 기간은 의인의 문자적 부활과 악인의 문자적 부활 사이의 1천년이 아니라, 그것은 성도들이 참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때에 만물의 부활 사이의 기간이다.
Hughes나 Shepherd는 모두 Alford의 명언을 인정하면서 헬라어 erzesan이란 (그들이 살았다) 말이 두 군데서 모두 육체 부활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James Hughes나 Anthony Hoekema는 Alford의 명언을 인정하면서도 두 군데 모두에서 "영적 부활"을 본다. 어떤 이는 물을 것이다. 즉, 어떻게 불신자가 천년왕국 지난 후에 "영적으로" 살리심을 얻을 수 있는지 말이다. James Hughes나 Hoekema 모두 말하길, 바로 이 점을 본문은 말씀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두 사람 모두 "-까지"라는 말이 (achri) 그것이 지시하는 시점에 도달한 이후에 변화를 요청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불신자 시체들이 1000년이 끝나기까지 "살아"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 요한은 1000년이 지난 후에는 그들이 "살아나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Hoekema는 이렇게 말한다:
요한이, 죽은 자들 중 나머지는 '살아나지 아니하였다'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바는, 그가 방금 성도의 시체에 대하여 말한 바의 정반대이다. 불신자 시체는 이 1000년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 (통치하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반면 성도들은 죽음 후에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종류의 삶을 향유한다. 그들은 그런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한다. 불신자들은 죽음 후에 이런 새 종류의 삶이나 이런 통치의 어떤 것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 . . . 여기서 "-까지"로 번역된 헬라어 achri는, 여기 언급된 바가 1000년 기간 동안에 해당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까지"라는 말의 사용은 이 불신자 시체들이 1000년이 끝나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통치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아니한다. 만약 이것이 그런 의미라면, 그런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낼 다른 문장을 사용했을 것이다.
물론 어떤 경우들에서, "-까지"는 (unti) 그것이 지시하는 시점까지 성행한 상황의 반전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계시록에서 "아크리"란 말이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와 함께 사용된 세 경우들에서 (7:3; 15:8; 20:3) 그 의미는 그 시시된 기간이 끝난 후에 상황의 반전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문맥상으로도, 1000년 기간이 끝나면, 아주 중대한 변화들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특히 1000년 기간 동안 결박당했던 사단의 풀림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보다 결정적인 요소는 계 20:11-15의 내용이다. 거기서 불신자 시체는 (즉 1000년간 살지 못했던 불신자들) 심판을 받기 위해 큰 백보좌 앞에 선다고 언급된다. 다시 말해, 불신자 시체는 1000년 기간이 지나면, 불못에 던져지기 위해 육체적으로 살리심을 받는다는 의미에서 살아난다. Hoekema와 James Hughes는 계 20:11-15에서의 "부활"과 20:5에서의 "부활"이 동일하지 않다고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포드의 명언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모두 헬라어 ezesan이란 말이 두 군데서 모두 동일한 성격의 부활을 지시한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문법이나 문맥상, 죽은 자들 중 나머지는 1000년이 지나면 살아난다고 이해한다. 우리는 Philip Hughes나 Norman Shepherd의 입장, 곧 첫째 부활이 육체적 부황리라는 점을 배격하므로, 알포드의 명언을 배격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부활은 영적 부활, 1000년이 지난 불신자의 부활은 육체 부활이라 믿는다.
래드의 (George Ladd) 요 5:25-29 해석 비판
George Ladd는 무천년설자들이 요 5장의 사고가 계 20장의 사고와 유사하다고 할 때, 이를 배격한다. 래드는 주장하길, 두 본문은 서로 간에 충분히 유사한 점이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서 문맥은 영적 해석을 요청하는 암시를 제공하지만, 계 20장에서는 문자적 해석을 요청하기 때문이라 한다. 래드는 말하길, 계 20장에서 그 부활들이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아무런 문맥적 암시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우선, 어찌하여 바로 주변 문맥만이 결정적인 판단자가 되게 해야 하는가? 요 5장의 주변 문맥이 자신의 암시들을 제공하지만, 계 20장의 주변 문맥은 (적어도 래드에 의하면) 그 자신의 암시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계 20장에 대한 무천년설자의 해석을 배격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만약 요한이 계 20장에서 요 5장에서처럼, 부활들은 다른 차원의 것들이라는 긴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성경의 더 넓은 문맥이 (broader context of Scripture) 이미 필요한 암시들을 이미 제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에서 우리는 오직 하나의 전체 부활을 볼 뿐이다. 우리는 중간기나 재림 이후 천년기 시대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거듭해서 영원한 상태의 완성으로 이어진다고 언급된다. 이것을 고려해 볼 때, 요한이 자기 설명을 길게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요한의 의도는 한 환상을 기록하는 것일 뿐, 그것의 의미에 대하여 신학적 주석을 저술하는 것이 아니었다 (계시록에서 요한은 아주 드물게, 자기 환상들을 우리를 위해 해석해 준다).
더구나, 래드의 이해와 반대되게, 요한은 부활들의 성격에서의 차이를 독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근접 문맥에서 암시들을 제공했다고 믿는다. 그런 암시 중 하나는 사이에 끼인 1000년 기간 자체이다. 다른 암시는 "부활"과 함께 사용된 "첫째"라는 서수이다 (신약에서 그런 조합은 여기서만 나타난다). 그런 부활이 육체를 떠난 순교자들의 "영혼들"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그들의 육체적 죽음 이후에 살아난다는 것이 신체적 부활 아닌 다른 부활을 의미한다는 다른 암시이다. "첫째 죽음"과 "둘째 죽음" 사이의 함축된 질적 차이들은,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사이의 질적 대조들도 요한이 서로 대조되는 성격의 두 부활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물론, 계 20:4-6에 대한 알포드의 명언을 배척해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그 구절들에 대한 무천년설 해석의 적절성 때문이어야 한다.
(1) 사도 요한은 계 20:4-6에서 중간기 상태에 관하여 말씀하는 듯 보이는데, 6:9-11과의 병행을 고려하면 그런 가정은 개연성을 더해준다. 계 20:4-6과 6:9-11을 서로 비교 고찰해 본다면, 둘은 사실상 동일한 경험을 묘사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계 6:9 계 20:4
“내가 보았다” (kai eidon) “내가 보았다" (kai eidon)
죽임 당했던 자들의 영혼들 목베임을 당했던 자들의 영혼들
(tas psuchas ton (tas psuchas ton
esphagmenon) pepelekismenon)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dia ton logon tou theou) (dia ton logon tou theou)
그들이 주장했던 그 증거 때문에 예수님의 증거 때문에
(dia ten marturian hen eichon) (dia ten marturian‘Iesou)
요한은 중간기 상태의 축복 상태를 이 두 부분에서 묘사하고 있다.
(2) 계시록에서 기독인의 죽음의 축복됨에 대한 강조는 20:4-6이 중간기 상태의 축복을 다룬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계 14:13에서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도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자기들의 노동으로부터 쉬게 되리라.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 안식의 축복에 대하여, 클라인은 (Meredith Kline)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계 20:6에 언급된 천년왕국의 축복과 아주 흡사하다. 성경에서 '안식의 휴식' (sabbath rest) 사고는 왕적 통치가 나타나는 노동의 완성 이후에 즉위식을 포함한다 (예, 사 66:1). 부활하신 예수님의 안식 휴식은 그분이 하나님의 우편에 왕으로 즉위하심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함께 통치한다는 것은 그의 왕적 안식 휴식에 참여하는 일이다. 계 20:6에서 이 축복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약속되었고, 계 14:13에서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동등한 것이 선포되고 있다.
이 점에서 아주 적절한 것은 계 2장에 언급된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이고,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축복성에 대한 강조이다. 계 20:4-6과도 몇 가지 중요한 점들에서 계 2장의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는 서로 병행된다.
우선, 그 서신은 신실한 믿음 때문에 순교한 것을 언급한다 (죽기까지 충성하다)
둘째로, 신실한 자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되었다.
셋째로, 신실한 순교자들은 둘째 사망으로부터 면제된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리라)
이런 병행들은 우연일 수 없다. 클라인은 (Kline)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서신에서 기독인의 죽음의 상태를 계 20장에서 언급된 첫째 부활의 상태와 동일시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요소 때문이다. 첫째로, 둘째 사망이란 공통적 요소, 다음으로 이 둘째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두 부분에서 모두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다른 곳에서 둘째 사망은 언급되지 않는다. 계 2:10에서 생명이 면류관이 약속되었다는 것도 역시 이 서신과 계 20장 사이의 관계가 확고함을 말해 준다. 그 면류관은 (stephanos) 축제 때의 꽃 다발일 수도 있지만, 왕의 면류관일 수 있다. 만약 여기서 왕의 면류관을 의미한다면, 생명의 면류관이 죽은 성도에게 약속되었다는 사실은 계 20:4이하에서 언급된 바, 곧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살아서 통치했다는 사고와 사실상 같은 것이다.
계 3:21에서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진 그 약속, 곧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게 되리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통치한다) 약속과 함께 고려하면, 중간기 상태의 축복성은 그 육체적 생명들을 짐승에게 빼앗긴 자들에게 실로 격려일 것이다.
계 2-3장에서 요한은 (그리고 예수님) 중간기 상태를 죽음 이후에 산 영혼들로 (따라서 부활) 간주하였다. 또한 중간기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는다고 (따라서 그와 함께 통치한다) 묘사한다. 따라서 계 20장에서도 사도 요한은 중간기 상태를 산 영혼들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것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3) 요한은 그 장소에 관하여 보다 더 분명히 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말하였으므로, 따라서 요한이 자기가 보좌들을 (thrones) 보았다고 말할 때, 성도들의 천년 통치의 성격을 분명하게 묘사한 것이다. 성도들이 그 위에 앉은 이 보좌들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동시에 그들의 천년 통치의 성격이 어떠하냐? 를 묻는 것과 같다.
계시록에서 보좌들이란 말의 용례를 살펴보자.
· 보좌라는 (thronos) 말은 신약에서 62번 나타나는데, 그 중 47번이 계시록에서 나타난다.
· 두 번은 (2:13; 13:2) 보좌란 말이 사단의 보좌를 (사단의 권세와 동의어) 가리키고, 한 번은 짐승의 보좌를 (16:10) 가리킨다.
· 네 번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후에 새 땅 위에 하나님의 보좌가 서게되는 것을 가리킨다 (21:3, 5, 22:1, 3). 그리고 다른 모든 경우들에서는 (40번) "보좌"가 하늘의 보좌를 가리킨다. 성부나 그리스도의 보좌, 그리고 24 장로의 보좌를 가리킨다.
· 그렇다면 왜 전천년설자들은 "부활"이 (anastasis) 신체상의 부활을 의미해야 한다고 하는가? 계시록에서 보좌는 하늘의 보좌를 가리킨다면 (계시록에서 40번), 그 부활을 신체 부활로 보기 어렵지 아니한가?
· 계시록 밖에서 '보좌'란 말은 15번 나타나는데, 7번은 분명 하늘에 있는 '보좌'를 가리킨다.
· 눅 1:52에서 '보좌'란 말은 지상 통치자들의 권능과 권세를 상징적으로 가리킨다.
· 골 1:16에서 '보좌'는 천사들을 (악령?) 지시한다.
· 눅 1:32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전한 소식에서, 오실 메시아가 약속 성취로 오실 때, 그 다윗의 보좌에 앉으리라 증거해 준다. 행 2:30에서 베드로가 그 점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한다. 행 2:30 이하를 고려해 본다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존귀하게 높여지심이 가브리엘의 선언 대로, 아버지의 우편에 즉위하심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바라 보았다.
· 또 '보좌'란 말은 네 가지 다른 용례들도 갖는다 (마 19:28 [두번]; 25:31; 눅 22:30). 이 경우 모든 구절에서 '보좌'란 말은 계 20:4과 같은 동일한 범쥐에 속한다. 다시 말해, 이런 본문들에 언급된 '보좌들'이 하늘의 것이냐? 지상의 것이냐? 하는 문제는 입증되어야 할 사항이다. 따라서 아무도 이 구절들에 근거해서 지상의 보좌이다, 하늘의 보좌이다 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지 않으면 질문을 스스로 제기하게 하는 것이 되고 만다.
요컨대, "보좌"란 말의 다른 관련 구절들을 검토해 볼 때 (계시록 내에서나 밖에서 모두), 그 보좌들은 에외없이 하늘의 보좌들이다. 그 보좌들이 지상의 것이라 거나, 천년 왕국 시기의 것이라는 암시도 없다.
(4) 계 20:5-6에 언급된 "첫째 부활"이란 표현에서 "첫째"라는 서수의 의미와 본문에서 요한이 확정한 신학적 대조들을 고려해 보자.
성경 그 어디에서도 "부활"이란 명사는 (anastasis) "첫째"라고 (protos) 수식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부활"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계 21:1이하를 주목해 보라. 거기서 "첫째"는 "새로운" 것과 (kainos) 대조되었다. 주목해 볼 것은:
(a) 역사의 최종 완성은 (consummation of history) 신천신지 (1절), 새 예루살렘을 (2절) 가져온다. 실로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5절).
(b) 첫째 라는 말이 "새로운 것"으로 대체된 것을 가리키고 있다: "첫째 하늘과 첫째 땅은 지나갔다" (1절). 실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 모든 첫째 것들은 지나갈 것이다 - 눈물, 사망, 슬픔, 울부짖음, 고통 (4절).
(c) 그러므로, 첫째 것은 지나가는 현재의 사물의 상태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클라인은 (Meredith Kline) 설명한다:
"첫째" 것은 (Protos) 현 세상을 일련의 세상들에서 첫째 세상이라고 특징짓거나 모든 동일한 종류의 일련의 세상들에서 첫째 것으로 특징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첫째 것이란 말은 이 세상을 "새 세상"과 다른 종류의 것으로 특징지운다. 이는 현재 세상이 영원히 존속할 최종 완성의 새로운 세상 질서와 대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 21장에서 "둘째"란 말이 (deuteros) 새로운 것을 가리키는 다른 용어임을 보게 된다. 이처럼, 불못과 동일시된 사망, "첫째 것들"의 질서에 속하는 사망에 대조되는 영원한 사망이 (4절), "둘째 사망"이라 (8절) 불리고 있다. 이처럼, 둘째나 새로운 것은 첫째 것과 질적으로 대조되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요컨대, 첫째 혹은 옛 것은 현 세상과 연관되는 것이다. 곧 일시적이고 지나갈 거이며, 불완전한 것이다. 반대로, 둘째 것이나 새로운 것은 미래 세상, 곧 영원하고 완전하며, 만물의 영원한 최종 완성과 ㅇ녀관되는 것을 가리킨다. "첫째" 라는 말은 그러므로 종류가 동일한 대상들을 헤아리면서 첫째, 둘째 이런 식으로 계수하는 서수가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은 "둘째"나 "새로운" 이란 말과 함께 나타날 때, 질적으로 대조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첫째 것"은 이 현세, 일시적, 지나갈 세상을 지시한다. 첫째 것은 장차 올 세상의 것인 영구하며, 최종성을 지니는 것에 참여하지 않는다.
[첫째/ 옛 것과 둘째/ 새로운 것 사이의 유사한 질적 대조는 히 8:7, 8, 13, 9:1, 15, 18, 10:9 참조]
이제 우리는 계 20장으로 돌아가서 첫째 부활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부활과 둘째 사망이란 말이 함께 언급된 것으로 보아, 질적인 대조가 의도되었음이 암시된다.
(1) 첫째 사망도 있을 것이다. 이는 신체적 죽음을 의미한다. 짐승이 자기 우상에게 경배하길 거절하는 순교자들을 목 벨 때 이 첫째 사망이 일어난다.
(2) 둘째 사망은 영원한 처벌을 의미하는 영적 사망을 가리킨다.
(3) 둘째 부활도 있다. 이는 불신자들의 신체 부활을 지시한다 (20:11-15).
이런 관계를 고려한다면, 첫째 부활의 성격은 결정된 것이 아니겠는가? 첫째 사망이 신체적 사망이고, 둘째 사망이 영적 사망이라면, 둘째 부활은 영원한 세상에 해당되는 문자적, 신체적 부활을 가리켜야 하고, 반대로 첫째 부활은 이 세상에 연관되는 영적인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해 본다면, 첫째 부활은 전천년설자들이 주장하듯, 문자적, 신체적 부활 일 수 없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사도 요한은 20:11-15에서 불신자의 신체 부활을 묘사하는데, 거기서 "부활"이란 용어 대신 그는 "둘째 사망"이란 말로 불신자들의 육체 부활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불신자들의 신체 부활이 실제로는 그들의 둘째 사망이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사도 요한은 20:4-6에서 성도의 신체적 죽음을 묘사하는데, 그는 "사망"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첫째 부활"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이는 성도의 신체적 죽음이 실제로는 첫째 부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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