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개혁주의 관점에서 본 교회사)
L. J. Joosse 저,
안재경 역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리
"교회사는 역사를 다루는 분야이다. 곧 교회의 역사를 다룬다. 그러므로 교회사는 교회의 역사이다
우리 주님은 당신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베드로의 그 고백 위에다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다(마16:18).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를 삼으라는 전도/세례 명령에서 교회 설립을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다. 교회 설립의 약속은 그 주님이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 교회를 모으셨고, 지금도 모으시며, 스스로 이 교회의 '모퉁이 돌'이시다(엡 2:20).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의 사역이시며, 동시에 제자인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 구약에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는 계시사로 우리에게 전승되었고, 초대교회의 역사도 계시사로 완결되었다. 그럼에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는 예수님의 약속은 성령 주심과 임재로 계속 실현되면서, 교회는 존속되고 설립되며 교회역사는 계속된다. 교회사는 바로 이 교회의 역사를 다룬다. 곧 하나님의 사역의 역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서 그들의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영광을 본다. 구약의 역사서처럼 교회사도 언약의 백성인 신앙의 후손들에게 부단히 전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사는 사건 나열을 벗어나 이야기로 전승되어야 한다. 각 족속에게로 복음이 전파되면서 영혼만 구원받음이 아니라 성령으로 임재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보면서 다시 오실 주님과 영광의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도록 교회사는 이야기꺼리로 씌어져야 한다. 이것을 본서는 만족시켜 줄 것이다. 역사만 배우지 않고 교회의 역사를 배우고 나아가 삼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본서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잘 이야기해 줄 것이다.
1995년 5월
고신대학 신학대학원 연구실에서
유해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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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 2
1. 교회사 서론 / 4
2. 옛 것에서 새 것으로 / 6
3. 내부적인 공격에 직면한 새로운 교회 / 9
4. 외부적인 핍박에 직면한 새로운 교회 /13
5. 새로운 교회에서 카톨릭 교회로 / 16
6. 국교가 된 카톨릭 교회 / 21
7. 카톨릭 기독교회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로 / 23
8. 동, 서교회의 분리 / 26
9.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복음적인 교회로 / 29
10. 복음적인 교회에서 개혁교회로 / 32
11. 복음적인 교회에서 장로교회로 / 38
12. 개혁교회의 교회연합운동 / 42
13. 종교개혁의 진전 / 46
14. 보편적으로 확립된 개혁, 장로교회 / 50
15. 기존 개혁교회에서 진정으로 개혁된 교회로 / 54
16. 기존 장로교회에서 진정으로 개혁된 교회로 / 58
17. 연합적인 개혁된 교회를 향하여? / 62
18. 그리스도의 진정한 교회에 의해 수행된 복음전도
(부록)
개혁신앙고백교회로서의 개혁교회와 한국장로교회(허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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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의 중요성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주목해야 할 점들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우리는 교회사가 성경역사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성경역사(Biblical history)는 구약과 신약의 기간 내에서 하나님의 언약백성 혹은 다른 말로 교회의 백성들과 관련지어 일어났던 사건들을 뜻한다. 그 사건들은 성경에 나타나있다. 그런 까닭에 성경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던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유대인들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사도행전의 끝에서 멈춘다.
교회역사(Church history)는 세상의 시작부터 예수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실 때까지(the forthcoming return)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에 관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역사는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는 더 이상 교회역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성경역사와 교회역사 사이의 아주 큰 차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성경역사는 ‘계시-역사’를 또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인데, 계시역사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그분 자신과 그분의 구원의 사역을 계시하심에 따라서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비록 교회역사는 성경역사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지만 교회역사는 훨씬 더 많은 기간들과 사건들,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탄생 전 2세기 동안에 일어났던 마카비 전쟁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역사는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성경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그런 목적으로 교회역사를 강조하지 않는다.
교회역사도 성경역사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언약역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역사는 지나간 세기동안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역사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지어 타락한 후에도 이런 교제(fellowship)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아담(창3:15)과 인류와 더불어 교제를 재확립하셨다. 창세기 9:8-17절에 나온 대로 노아에게 말하셨던 말씀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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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사가 단지 사람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들을 무엇보다 먼저 명백히 증언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역사를 기록하거나 연구할 때 모든 시대의 교회를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을 관찰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역사 속의 교회가 자체로 완전하게 될 것이라거나 어떤 식으로든 변하지 않는 실체인 것처럼 말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역사를 통해 복음을 이해하고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점차로 넓어지고 깊어지는, 점진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사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속되는 사역인 ‘구원역사’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 주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끊임없이 애쓰고 계신다(롬10:14∼17). 교회사를 연구해 보면 우리가 깊이 인식해야 할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그의 백성을 구원하는 이 진행과정에 참여자가 되게 하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모든 진실한 신자들과 상관이 있다.
그러면 교회란 무엇인가?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로 이해해야 한다. 벨직 신앙고백서 제27장은 보편적인 기독교회에 대해 명백히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보편적인 교회 혹은 우주적인 교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의 보혈로 죄 씻음 받으며, 성령으로 성화되어 인치심 받음을 믿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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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도 역사(최소한 현재역사라 할지라도)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역사를, 특별히 현재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계신다. 그 분은 온 인류 중에서 홀로 당신의 교회를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이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하고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를 세우시는 사역을 수행하셨음을 알리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진실한 믿음 속으로 불러들이신다. 위에서 살펴본 여러 요소들을 잘 주목해 보면서 앞으로 개관할 교회사의 몇몇 사건들을 잘 살펴보면 지나간 교회역사에서 일어났던 분쟁들의 배후뿐만 아니라 실재적인 사실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의 몸 된 교회를 유지해 오셨는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미 얻었으며, 앞으로 유지해 나가야 할 교회적인 발전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 옛 것에서 새 것으로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11:19)고 말했다.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 기독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을 때 그는 이러한 분쟁들을 개인적으로 경험하였다.
새 언약(행 2장)으로 말미암아 교회생활이 확립되었을 때 모세의 가르침을 고수해야 할지에 대한 수많은 이견들이 있었다.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유대인의 회당생활을 청산해야 하는가? 모세의 율법들을 계속해서 지켜야 하는가? 이방인들 중에서 새로 입교한 사람들은 (사도바울의 조력자인 디도의 경우처럼) 유대인들과 같이 할례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오순절 이후 얼마동안, 특히 바울이 선교여행을 하던 기간에 여러 번이나 제기되었다.
바나바는 회중들에게 바울을 사도로 소개했다. 첫 번째는 안디옥에서, 그 다음에는 예루살렘에서 말이다. 다른 교사들과 같이 사도들의 파송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가서 회중들을 가르쳤던 바나바는 바울을 데리고 와 그로 하여금 얼마동안 안디옥에서 선생으로 가르치게 했다. 이것이 AD.37∼43년의 일이었다. 바울을 이방인들에게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리셨다(행 13장). 이에 두 사람은 첫 번째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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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바리새인들도)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한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와 왕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초대 기독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이 안디옥에 전해진 즉시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이 첫 번째 선교여행을 할 동안에 이방인들이 기독교인들이 되어 교회생활에 참여하게 되자 예루살렘교회의 바리새인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이 제기한 질문은 ‘하나님의 종이었던 모세의 가르침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에서 온 몇 몇의 형제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형제들은 교사자격으로 안디옥의 회중들을 가르쳤다. 그들은 기독교회의 구성원 중 바리새파에 속한 신자들이었다. 바나바와 바울의 형제들이자, 동료 교사들이었던 이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가장 잘 따르기 위해서는 할례와 같은 모세의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대인이 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구약교회는 이스라엘의 국가종교 아닌가?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백성들이 아니었는가? 그러니 현재도 누구든지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자 하면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야 하지 않는가?
바울은 이런 이단사상을 물리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바울은 (성도들이 보기에 아주 큰 권위를 가지고 있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이미 전해진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것은 안디옥 교회든지, 예루살렘 교회든지 상관이 없었다. 바리새파의 형제들은 사도바울과의 유대를 끊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을 (비록 마지못해 그렇게 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했다. 이런 의견 차이에 직면하자 안디옥의 회중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도 포함된) 위원들을 파송했다.(여러분도 교회생활을 하는 도중에 발생하는 이런 긴장들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은 이런 논의과정을 잘 보여준다. 예루살렘회의는 이 문제를 잘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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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은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메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예루살렘에 파송된 사람들은 안디옥으로 내려가 이 편지를 전달하고 이 메시지에 따라 교인들을 격려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머물면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다.
얼마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행15:36)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가라고 불리는 그들의 조력자 요한에 관해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날카로운 의견충돌이 있었다. 그 결과 바나바는 마가와 더불어 구브로를 향해 떠났다. 이 섬은 바나바의 고향이었고 바울과 함께 첫 번째 여행 동안 설교한 곳이기도 하다. 바울은 실라와 더불어 첫 번째 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소아시아로 떠났다. 바울은 이런 과정을 통해 구약의 중요성에 관계된 의견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경험하였다. 예루살렘의 형제들과 초기 기독교회는 구약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세 율법의 모든 의식법들에 나와 있는 문자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는 사상을 폐하셨다고 고백했다. 그들은 교인들이 옛 언약시대처럼(의식법이 예표한 약속된 하나님의 어린양, 즉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죽으심, 부활을 통해서도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아니한 것처럼) 의식법을 순종해야 한다는 사상을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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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 형성한 이런 새로운 공동체그룹은 유대 회당공동체와 대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당공동체는 계속해서 구약교회와 아브라함의 씨로 남아있었다.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며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된 이방인들을 유대화하려고 유혹하였던 바리새파 유대주의는 초대교회에 계속해서 강력한 힘으로 남아 있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것에 관해 편지를 썼다(갈 2장). 베드로가 안디옥에 내려갔을 때 이방인들과 식사를 했다. 그러나 야고보가 보낸 어떤 사람들이 오자 베드로는 할례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식사자리에서 떠나 이방인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해 버렸다. 다른 유대인들도 이런 외식에 가담했다.
그들의 외식에 바나바(!)조차도 유혹되었다. 이에 바울은 한 번 더 강조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아는 고로 우리(베드로)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노라"고 하였다.
이단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누가 하나님께 옳다 인정받을지가 명백해진다(고전11:19).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하고 무엇보다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나님도 되신다. 새언약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들, 즉 진실한 믿음에 의해 의로워진 모든 자들의 조상이 되었다. 회당에 속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새언약에 속한 기독교회도 아브라함의 씨이다. 옛 것과 새 것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에 의해 연합되어 “새로운” 친교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구약의 아브라함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율법들이 예표한 분, 즉 오실 메시야에 의해 그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바라보았다. 구약의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국제적인 ‘그룹’, 즉 다양한 국가들의 회중들(예수님을 알고 그 분을 우리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예루살렘, 안디옥, 수리아, 시실리, 구브로, 그리고 소아시아에 있는 성도들)도 동일한 믿음을 소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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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에 퍼졌다. 그러나 사도들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메시지를 전한 것은 아니었다. 예루살렘교회와 유대로부터 다른 곳으로 흩어진 회중들은 그들이 정착한 곳에서 피난민으로서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행전은 수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그 분을 유일한 구세주로 영접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특별히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자로 유명했다(갈라디아 2장을 보라. 여기에서 사도인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동의하였다는 것을 사도적인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바울은 기독교회들이 세워진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아마 바울은 헬라의 무역도시인 Sinope가 세워진 지역인 본도(Pontus)에서도 성경을 가르쳤을 것이다. 이곳은 말시온(벨직 신앙고백서 제12장)이 태어난 도시였다. 아굴라가 태어난 곳도 본도지역임을 기억하라! 말시온의 할아버지는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말시온은 AD85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Sinope에 있는 기독교회의 주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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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 외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Sinope에 살았다. 그들은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회당모임을 가졌다. 말시온은 수많은 구약성경의 구절들을 반대했지만 구약의 유대적인 해석을 많이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Sinope에 있는 유대인들은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과 달리 ‘율법과 선지자들’을 풍유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였던 헬레니즘적인 유대인들을 싫어했다. 풍유적인 해석에 의하면 구약의 구절들은 단지 비유적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구약의 실재적인 표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Sinope에 있는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였다.
말시온은 어릴 때부터 성경과 유대주의 학문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회당과 유대인들의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봉사한 기독교회에 활동적으로 참여했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말시온은 기독교 교리로부터 빗나간 그의 사상을 공공연 말하고 다녔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초기 단계부터 자기 아들의 이러한 잘못을 알아차렸다. 말시온의 아버지는 말시온의 이단적인 끈질긴 주장 때문에 그를 기독교회에서 추방했다. 이로 인해 말시온의 아버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독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아들보다 사랑하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국 말시온은 다른 마을과 도시를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그는 다른 지역의 기독교회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사도바울이 친히 가르치고자 했던 바로 그 가르침을 사람들이 완전한 의미로 붙잡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소명감(?)을 가졌다. 말시온은 배 한척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아시아 해변을 항해했으며 서머나와 에베소를 방문했다. 마침내 그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회에 가입하기 위해 로마로 항해했다.
당시에는 교회들끼리 서로 의사교환이 잘 이루어지지 아니했기 때문에 말시온의 출교는 다른 교인들과 다른 교회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에 있는 교회의 환영을 받았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는 약 400만원에 해당하는 돈을 교회에 헌금했다. 이것은 물론 그때에 상당히 큰 금액이었다! 그는 로마에 5년 동안 머물면서 자기 사상을 책으로 출판하고자 열심히 일했다. 그는 신약정경을 편집하였다. 작품이 마무리되자 그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회의 장로회와 종교회의에 자기 작품을 내놓았다. 그러나 장로회는 이 책을 보자 거부반응을 보이고 그가 바친 상당한 돈을 되돌려주면서 교회에서 내쫓았다! 이 사건이 AD 144년에 발생한 그의 실제적인 출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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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이런 출교가 일어났을까? 또한 이러한 출교는 정당한 것인가?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 사건은 말시온이 기독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으로부터 출교된 것을 의미한다(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30, 31주일).
그런데 말시온은 자신이 기독교회 내에서 다른 교리를 장려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은 사람들이 사도바울의 실재 가르침을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자. 사도바울은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바울은 유대인들의 회당을 반대했고, 할례와 모세율법의 중요성을 재고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믿음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다고 로마서에서 분명하게 표방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유대인들은 달랐지 않은가?
말시온은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바울처럼 구약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말시온은 자신이 적어도 기독교회보다 사도바울을 더 잘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회는 사도바울의 저작들을 이해했다고 주장하지만, 말시온은 교회가 눈을 뜰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율법에 주의를 돌려보면 구약의 수많은 구절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신약성경의 말씀처럼 만약 사람이 행위에 의해 의로워지지 않고 믿음에 의해서만 의로워진다면 새 언약의 관점에서 경배해야 하는 또 다른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된다. 그러니 믿음에 의해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자신을 계시하신 구약의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이심에 틀림없다.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야 산다고 말씀하셨지만, 신약의 하나님은 “회개하고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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