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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헬레니즘 세계와 그리스도교의 형성

하나님아들 2019. 2. 4. 15:39

 헬레니즘 세계와 그리스도교의 형성


 

 
                                                         

I    서언
II   헬레니즘 세계
     1. 헬레니즘 세계의 형성
     2. 헬레니즘 세계의 특징
III  그리스도교의 배경으로서 헬레니즘 세계
    1. 헬라니즘 세계와 유대교의 관계
    2. 헬레니즘 세계와 그리스도교의 관계
IV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대응
    1. 헬레니즘 문화의 수용
    2. 헬레니즘 문화의 거부
V   결어

         I    서언
  그리스도교는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상황을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역사의 어느 특정한 시
점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신, 구약 66권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쓰여졌
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 구약 66권은 한 시기에, 한 사람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
기를 거쳐서 다양한 사람들에 위해서 쓰여지고 묶여져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각
각의 책들이 쓰여진 배경들, 그것들이 하나로 묶여지게 된 배경이나 목적, 혹은 그리스도교가 발흥하게
된 역사적 정황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신약성서는 가장 먼저 쓰여진 데살로니카전서(기원 후 50년 중반)에서부터 가장 나중에 쓰여졌다고 볼
수 있는 공동서신들(기원 후 2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이상의 기간 동안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
서 쓰여졌다. 이 기간은 매우 다양하며 역동적인 역사적 정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복잡한 것은
이러한 것이 문서화되기 전에, 이미 기원 후 30년, 40년대에 예수와 바울이 활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원 후 1세기 전반에 걸친 역사적 정황을 염두에 두어야할 필요가
있다. 예수와 바울, 그리고 성서기자들이 시간과 공간의 진공상태에서 활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기자들은 역사 속에서 활동한 사람들에 대해서 기술할 뿐 아니라, 성서기자들의 입장에서 사건
들을 해석한다. 그리고 성서기자들이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사건들을 해석할 때, 그들은 그들의 정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이 시간과 공간의 진공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은 이를 뜻한다. 성서기자들은 그들
주위의 상황과의 상호영향관계 하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해 받은 예수와 바울, 초대 그리스도교
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은 그것이 쓰여진 기원 후 1세기 팔레스틴의 정황 속에서 적절히 이해될 수 있다.
성서본문은 저자와 독자 사이의 교감을 전제로 하는데, 쓰여진 본문이 당시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되
어졌는가 하는 것이 성서해석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원 후 1세기라는 역사적 정황 속에 존재하던 예수와 바울, 성서기자들과 그들의 독자들의 세
계는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들은 과연 어떤 세계에 속해있었으며, 어떠한 영향을 받았던 자들일까?
기원 후 1세기에 팔레스틴이 속해 있던 근동을 지배했던 세력은 헬레니즘과 로마였다. 이는 당시에 '유대
교의 한 묵시적 소종파'로 형성된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헬라세계와 로마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
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 로마, 유대교와의 상호영향 아래 형성되고 성장했다
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그리스도교 형성배경으로서의 헬레니즘의 특성과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의 상호관계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갖게 된 특성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헬레니즘 세계
1. 헬레니즘 세계의 형성
  헬레니즘 시대, 혹은 헬레니즘 세계는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에 시작되었다. 헬레니즘 세계란 알렉
산더 제국에 의해서 형성된 국가들이 기원전 323년에서 기원전 2, 1세기에 로마가 동 지중해를 정복하기
까지의 기간동안에 가졌던 제도와 문명을 말한다. 헬레니즘 세계는 비록 알렉산더의 죽음 이후에 열려졌
지만, 헬레니즘 세계가 가능했던 것은 세계정복을 꿈꾸었던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의 원정으로부터였
다. 기원전 336년 마케도니아의 왕이었던 필립이 그의 딸의 결혼축하연에서 암살되자, 당시 갓 스물을 넘
은 알렉산더가 그의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알렉산더가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즉위할 당시, 그때까지 역사상 최고의 제국은 페르시아였다. 페르시아
는 기원전 7세기말에 중흥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우위를 점했던 바벨론을 밀어내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지배하는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다리우스1세(기원전 521-485) 때 이룩된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상 위대한 제국들인 알렉산더 제국, 로마 제국, 몽고 제국 등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은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다. 페르시아는 훌륭한 행정조직을 가진 제국으로서, 인종적으로 다양한 민
족들을 지배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제국이었지만, 통일된 왕국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다양한 민족들을
하나의 국가로 만드는데 실패했고, 이것이 그들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페르
시아 제국이 갖고 있던 이러한 다양성은 근동에서 세계적 문화가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놓았고
볼 수 있다.
  알렉산더가 역사에 등장했을 때, 그는 이미 전성기가 지난 페르시아의 군대를 어렵지 않게 섬멸했으며,
페르시아의 지배 밑에 있던 많은 그리스의 도시들과 소아시아지역의 나라들을 빼앗았다. 알렉산더는 시리
아, 팔레스틴, 이집트 등에서 페르시아인을 내쫓았으며, 나일강 델타지역의 서단에 그의 이름을 딴 새로
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다. 이 알렉산드리아는 동 지중해의 주요항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알렉산
더가 이룩하고자 했던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그후 알렉산더는 점차로 동진하여 페르시아의 핵심부를
점령하였으며, 아프카니스탄, 중앙아시아, 인도대륙의 북서부에 이르기까지 그의 정복을 계속했다. 결국
그가 즉위한 기원전 336에서 그가 죽은 323년까지, 12년 동안에 알렉산더는 이전에 있던 페르시아 제국을
능가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정복한 세계도 페르시아 제국과 같이 하나의 국가는 될 수 없었다. 알렉산더는 그가
정복한 다양한 국가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두 가지 정책을 세웠다. 하나는 그 지방마다 고유의
전통에 따라서 통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 문화를 제국을 묶어주는 기반으로 삼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렉산더에 의해서 이룩된 헬레니즘 세계는 정치적으로 통일된 세계가 아니라, 문화적으
로 통일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헬레니즘 세계가 정치적으로 하나로 묶이지 못했다는 것은 알렉산더 죽
음 이후의 분열된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문화적인 특징을 공유하는 헬레니즘 세계
가 형성되었지만, 이들은 정치적으로 마케도니아, 이집트, 시리아 등의 주도적인 몇몇 세력들에 의해서
나뉘어졌다. 이 3개의 큰 헬레니즘 국가들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끝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고, 그들은
그들의 발판이 되었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받았던 벌을 그대로 받아야 했다.
  '헬레니즘'이라는 말은 그리스를 뜻하는 '헬라스'에서 나온 것으로 '그리스적'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헬레니즘 세계가 지향하는 것은 그리스적 문화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 국가들에
대한 이해는 헬레니즘 세계를 이해하는 배경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연대순으로 3기로 나눌 수 있
다. 제1기는 기원전 800-600년의 시기로, 해외 식민지의 건설과 정치제도의 급속한 발전을 특징으로 한
다. 제2기는 기원전 600-400년의 시기로, 그리스문명의 황금기이며 정치, 경제, 사회적 제도의 발달이 극
에 달했던 때이다. 제3기는 기원전 400이후의 시기로, 정치적으로 쇠퇴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이 기간에
문화적인 쇠퇴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플라톤과 알렉산더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시기의 초
기에 활동했다.
  기원전 4세기 이후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사실상의 독립을 상실하였으며, 알렉산더
와 그의 후계자들이 지배한 마케도니아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2세기 뒤에는 로마제국에 의해서 흡수되
었다. 정치, 경제, 문화가 눈부시게 발전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이러한 몰락은 그들이 정치적인 통일
성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국가들에게는 전체로서의 그리스라는 의미보다는 개개의 도시국
가들이 보다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갖고 있던 이러한 독립성은 결국 그들보다
더 큰 세력 앞에서 자신을 무력하게 내어놓는 결과를 차지했다. 아테네를 패배로 몰고 간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승리도 평화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후 도시국가들 간의
끝없는 전쟁과 페르시아의 사주는 그리스가 하나로 되지 못한 벌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스의
북쪽, 에게해의 위쪽에 있던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기원전 359-336)이 마케도니아를 부흥시키자, 결국 쇠
퇴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1세기 반전의 페르시아의 원정 이후 가장 심각한 외침의 위협에 놓이게 되었
다.
  알렉산더가 등장하기 전 이미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세력을 넘어, 마케도니아의 세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후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대한 정치적인 침략은 마무리되었다. 그
러나 결국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세계도 페르시아 제국이나 발달된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같은 정치적 특성
을 보유했으며, 이는 그들의 멸망의 공통된 원인이었다. 문화적으로는 하나의 세계를 구축했지만, 정치적
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할 수 없었던 헬레니즘 세계는 로마 제국에 의해서 몰락하게 되었다. 기원전 5세
기에 시민들에 의한 공화정으로 시작한 로마는 그 이웃들과 이탈리아의 나머지, 그리고 지중해의 다른 지
방들을 정복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27년에 확장된 로마
의 단독지배자가 되면서, 로마 제국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로마 공화정의 마감으로 시작된 로마 제국은 페르시아나 그리스의 도시국가들, 헬레니즘 세계가 이루어
내지 못한 하나의 통일된 거대국가의 탄생을 의미했다. 지중해연안에서 헬레니즘 세계가 지배하던 영향력
은 로마에게로 이어지고, 기원 후 1, 2세기에 로마제국은 그 절정의 시기에 이르렀다. 이 때에 로마는
'팍스 로마나'(기원전 27-기원 후 180), 즉 '로마의 평화'라는 구호 속에 당시의 모든 세계를 포섭했다.
로마 제국은 정치적으로는 당시의 모든 주변국들을 하나로 묶는 통일성을 구축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새로운 것에 기여한 바가 많지 않다. 로마인들은 군사조직, 정부, 법률, 토목공사들의 실리적이고, 정치
적인 면에 있어서는 뛰어났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주로 그리스인의 업적을 배우고, 본뜨고 보존하였
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면에서의 헬레니즘 세계는 로마의 출현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지만, 헬레니즘의 문
화적 영향력은 기원 후 1, 2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로마는 그리스와 근동의 오래된 문명에서 많은 것을 빌
려왔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에는 그리스와 근동으로부터 사상, 종교, 제도들의 이입이 많았다. 그러므로
로마 문명에서 그리스-동방적, 혹은 헬레니즘적 요소를 구별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이렇듯 로마 제국의
문명에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헬레니즘이 기원 후 1세기에 형성된 그리스도교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
다.              

2. 헬레니즘 세계의 특징
 
  헬레니즘 세계의 정신적 뿌리는 고대 그리스 사상이다. 빈부의 차이가 심했던 헬레니즘사회는 그리스의
민주제가 쇠퇴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리스 문화의 영향력은 헬레니즘 세계 속에서 계속되었다. 이
때, 그리스 문명을 지속, 발전시킬 수 있는 도구가 된 것이 그리스어이다. 알렉산더는 그가 정복하는 곳
에서 군인들에게 그리스어를 사용하게 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
을 세계의 주인으로 만들면서, 그리스 문화는 다른 모든 것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알
렉산더가 가는 곳마다에서 사용된 그리스어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넘어서 알렉산더 제국을 연결시켜주는
구실을 했다. 그리스어의 이러한 일반화는 철학과 문학에 고급스럽게 사용되던 고대 그리스어에서 일반인
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코이네 그리스어를 탄생시켰다.
  코이네 그리스어는 그리스어와 타 지역의 문화와 생활양식이 결합되어서 만들어진 것으로, 헬레니즘 세
계를 대표하는 문화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리스계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교양 있는 사람
들은 즐겨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교양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알렉산더의 군대와 접했던 많은
일반인들이 자연스럽게 그리스어를 접할 기회들을 얻었다. 기원전 2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인
LXX의 출현은 그리스어가 얼마나 일반적으로 보편화되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어
는 정치적으로 하나로 묶일 수 없는 헬레니즘의 세계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중요한 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와 근동의 다른 문화들을 연결시켜주는 코이네 그리스어는 헬레니즘 세계가 갖고 있는
특징을 표상 하는 것이다. 코이네 그리스어는 그리스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고대 그리스어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그리스어이기 때문이다. 코이네 그리스어는 그리스적 특성뿐만이 아니라, 근동지역의 특
성을 함께 보유한다.
  알렉산더는 하나의 세계라는 이상을 품은 최초의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그의 확장된 제국을
통해서 하나의 세계라는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자이다. '하나의 세계'라는 기치 하에 다양한 근동의 국
가들을 묶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는 헬라사상을 기초로 이를 형성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 이렇듯
두 개의 오래된 문화인 그리스문화와 근동의 문화를 융합시키려는 곳에서 헬레니즘의 다양성이 드러난다.
그리스화된 당당함의 이면에는 신적인 왕에 대한 정치적 절대복종이나 신비한 신들에 대한 정신적 절대복
종과 같은 근동의 뿌리들이 자리잡고 있다. 왕의 절대권이나, 신비주의적 종교들은 분명히 그리스적인 특
성을 지닌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로 묶여진 것 같지만, 그 내면에는 각자의 독자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헬레니즘의 특징을 드러낸다. 이러한 다양성이 헬레니즘 세계의 성격을 보다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후기 헬레니즘 시대로 가면서, 그리스적인 것보다는 동방적인 것이 헬레니즘의 주
된 특징으로 자리잡는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헬레니즘의 다양성을 그 배경으로 한다. 헬레니
즘은 다양한 문화의 공존을 전제하며, 언어, 신화 사상들은 그들을 연결시켜주는 융통성 있는 매체였다.
이렇듯 헬레니즘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헬레니즘 세계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보편주의와 개인주의라는 특성이다. 하나의 세
계를 만들어 냈던 알렉산더는 정복된 그들의 국민들에게 '보편주의'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이러
한 보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알렉산더는 근동에서 성행하던 '지배자에 대한 절대복종'을 하나의 이념
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헬레니즘 세계에서의 왕과 고대근동에서의 왕 개념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왜냐하
면 후자는 신적인 권위에 의존해서 왕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반면, 전자는 왕 개인의 능력(군대를 통제할
수 있는 힘과 더불어)에 의존한 왕권강화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이상적인 왕은 모든
덕을 소유하고 있으며 보편적이며 총체적인 주권을 갖는다. 그러므로 절대적 왕권이라는 근동의 사상적
배경을 간직한 보편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은 알렉산더가 근간으로 하는 민주적인 그리스적 사상과 연합할
때, 새로운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헬레니즘 세계와 그에 속한 각각의 인간들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이다. 그러므로 일견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보편주의와 개인주의라는 두 개의 특
성은 헬레니즘 세계를 특징짓는 두 개의 축이 되었다.
  물론 헬레니즘 세계의 이러한 이원성은 그들의 정치체제 속에서 싹튼 것이기는 하다. 알렉산더와 그의
후계자들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도시국가들에게 결여되
어있던 구심점을 헬레니즘 세계 속에서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였다. 발전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멸망은
하나의 국가를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이 보편
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장은 정치가 아니라, 문화였다. 그들은 결속된 정치체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
스와 근동의 문화를 융합시킴으로써, 그들이 꿈꾸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구심점으로 삼은 '문화'라는 단위는 그들의 정치체계가 불확실할 때, 국가를 하나로 존속시킬 수 있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치적인 독자성을 유지한 채 지속된 사상적 연계의 틀은 그 정치적
인 기반이 무너져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와해되는 정치적 기반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없었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헬레니즘 세계의 또 하나의 축인 개인주의는 헬레니즘의 정치적 배경과 그리스문화의 특성으
로부터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보편주의적 이상에 입각한 '세계의 시민'이라는 자의식은 오히려 사람들
을 그의 국가에 대한 일반적인 책임감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것이 철학에서 원자론(atomism), 견유학
파(cynicism), 허무주의(nihilism), 무정부주의(anarchy)등으로 나타났다. 헬레니즘 세계의 이상이었던
보편주의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개개의 인간이었지, 어느 국가나 제도 자체는 아니었다. 알렉산더의 후
계자들이 어떤 특정한 정치적인 제도를 강요하기보다는 각각의 나라들이 가진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헬레
니즘 세계를 존속시킨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중요한 가치중의
하나는 '자기만족'이었다. 헬레니즘 세계의 철학자들은 사물의 본질이나, 공동체의 문제들에는 관심이 없
었다.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 즉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에 집중하였다. 그러므
로 헬레니즘 세계를 대표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철학적 경향은 실은 개인주의라는 같은 출발선상에 있
다. 에피퀴로스 학파가 자기만족을 위해서 자신의 쾌락에 집착하는 반면, 스토아 학파는 개인의 덕을 강
조한다. 스토아학파에서 덕과 이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자아통제'의 기술이 되기 때문이다. 그 시대
의 개인주의를 통해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 즉 현자는
세계로부터 자신을 더욱 멀리 고립시킨다.
  헬레니즘 세계의 종교도 이러한 철학적 사고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페르시아의 멸망은 고대근동에서
숭배되던 절대적 능력을 가진 신들의 실패를 드러냈다. 그러므로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절대적 능력의 신
보다 이성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으며, 종교는 보다 더 세속적이며 이 세상적인 특성을 띄게 되었다. 헬레
니즘 세계의 종교가 인간 중심적 특성을 갖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헬레니즘왕조
의 신성화를 통해서 신들이 갖고 있던 모든 신비함을 제거했으며, 인간을 속박하던 모든 종교적 개념들로
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들을 묶고 있던 종교적인 위계질서로부터의 해방이
그들의 종교성 자체를 없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만들고, 그들
통해서 또 다른 형태의 종교에 자신을 구속시킨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고대종교에 대한 해체가 일어난 후에, 옛 종교의 제도나 신들을 대치할 만한 것으로
나온 것이 신비주의와 혼합주의, 점성학 등이다. 헬레니즘 세계의 종교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게 되었
다. 옛 종교에 대한 반발로 신비주의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신비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헬레니즘세계의 특성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옛 전통이나, 세상을 개선할 수 있는 교육의 능
력,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옛 것을 보존하는 국가의 힘에 대한 환멸을 통해서,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
고, 그들 개인 자신 속으로 파묻혔다. 이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헬레니즘의 종교적 특성이 저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변한 것이다. 헬레니즘세계에 퍼진 이러한 종교적 특성은 종교의 역사적인 성격을
파괴하고 종교가 갖고 있는 진리를 역사적인 삶과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로부
터 이성에서 출발한 헬레니즘 세계의 종교는 역사적인 합리성, 또는 필연성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강조,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희망, 비밀스러운 입교식과 같은 헬레니즘 밀
의 종교의 특징은 헬레니즘 세계의 다양성을 배경으로 한 아이러니하고 할 수 있다.
 
         III  그리스도교의 배경으로서 헬레니즘 세계
   
1. 헬레니즘 세계와 유대교의 관계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내의 묵시적 소종파'로 출발하였다. 그러므로 유대교가 헬레니즘 세계와 갖는 관
계는 그리스도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유대교에 대한 헬레니즘
의 영향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는 것이다. 헹엘(M. Hengel)은 헬레니즘과 유대교의 관계에 대한 그의 저서
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 기원전 3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이스라엘 내의 유대교는 이미 심각한
정도로 헬라화 되었다. 즉 이것은 이미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교서가 있기 전이었다. 2) 그러므로 헬
라화라는 관점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팔레스틴 유대인들 사이의 구분은 확실하지 않다. 그가 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은 언어나, 문학, 예술품, 종교적인 표현들이다. 헹엘은 이러한 것들을 근거로 해서 이
미 팔레스틴 내의 헬라화가 매우 심하게 진행되었고, 그것이 마카베어 전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라고 분
석한다.
  여기서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헬라화'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것이다. 헹엘은 헬
라화란 직업적으로 밀접하게 그리스적인 것과 연계된 것, 결혼과 같은 육체적 결합, 그리스어와 문화의
수용, '동양화된' 그리스인과 '그리스화된' 동양인과 같은 완전한 동화를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즉 헬라
화란 어떠한 형태로든 헬라적인 요소를 접하고 그것에 영향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
로 그에 의하면 이미 기원전 3세기의 팔레스틴 내에서도 헬라화를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는 것은 언제, 어느 정도로 헬라화가 진행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헹엘에 반
대하는 하는 학자들은 유대교가 가지고 있는 배타성을 근거로 해서, 팔레스틴에서의 헬라화 정도는 심하
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휄드맨(L. H. Feldman)은 헹엘의 주장은 약한 근거를 확대 해석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휄드맨의 주장에서 불확실한 것은 헬레니즘 세계에 대한 이해인 듯하다. 그는 헹엘을 비판하는 근거로 스
미스(M. Smith)의 헬라화를 근거로 내세운다. 스미스에 의하면 헬라화의 근본적인 힘은 그리스적인 것
이기보다는 이집트나 페르시아적인 것이다. 이러한 스미스의 주장에 따라서 휄드맨은 그리스적 요소가 발
견되는 헬라화는 팔레스틴 내에서 심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휄드맨의 이러한 주장은 헬레니즘 세계
안에 있는 그리스적 요소와 근동적 요소의 결합이라는 특성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러한 혼합
의 과정 속에서 그리스적 특성과 근동적인 특성을 분리시키는 것도 단순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문화가
서로 결합할 때,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의 영향만을 강조하는 것은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문화의 결합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호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 코이네
그리스어가 헬레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산물이라는 것은 이를 대변해준다. 코이네 그리스어를 단순히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만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헬라화의 중심을 페르시아적인 것
으로 보아서 팔레스틴 내에서의 헬라화의 정도를 약화시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볼 수 있다. 문화의
영향에 대한 휄드맨의 일방적인 이해는 결국 유대인들의 배타성을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유대인들이 어떠한 환경과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그들의 율법과 관습을 지킨 자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리
고 그는 유대인들의 이러한 독자성이 반셈족주의를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반 셈족주의 자체가 유대인의 반 헬라화와 직결된 것은 아니다. 반 셈족주의가 출현하게 된 데
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 물론 헬라화에 대한 그들의 저항은 반 셈족주의를 유발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반 셈족주의를 근거로 유대인들이 헬라화의 영향에서 비켜서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 어
떤 문화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그 문화에 흡수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만은 않는다. 그리고 거꾸로 그 문
화에 흡수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문화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유대인들은 헬레니즘에 흡수
되지 않았지만, 이미 침투한 일상적인 헬레니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지는 않았다.
  이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 마카베어 전쟁이다. 휄드맨은 이 전쟁을 촉발시킨 안티오커스 4세의 헬라화
강요를 지속적인 헬라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기보다는 일시적인 변덕으로 치부한다. 그는 안티오커스 4
세가 굳이 유대인들을 그들에게 동화시킬 이유가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안티오커스 4세가 유대인을 개
종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해서 지속하지 않은 것이 일관성의 결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안티
오커스 4세의 포기는 변덕스러운 정책 때문이 아니다. 그의 포기는 단순한 혼합을 넘어서 유대인 자체를
섬멸하려는 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이다. 한편으로 안티오커스 4세가 처해 있던 급박한
나라 밖 상황은 유대인에게 집착할 수 없었던 그의 상황을 설명해 준다. 더욱이 안티오커스 4세의 칙령
으로 인해서 야기된 마카베어 전쟁과 그로 인한 하스몬 왕가의 탄생을 일시적 변덕에 대한 유대인의 대응
책으로 여기기에는 미비한 점이 있다.
  헹엘이 지적했듯이 마카베어 전쟁은 이미 어느 정도의 수위에 달한 헬라화를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헬레니즘을 수용할 때, 그들의 관습의 외곽에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개방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LXX의 출현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적응하는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이 전혀
헬라화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었다면,  LXX를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경전을 다른 언어로 번
역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빌려오는 것뿐 아니라, 사고자체를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향의 정도에서 팔레스틴만이 예외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 종교의 핵심부분이 침해받을 때, 유대인
들은 그에 대해서는 완강히 거부했다. 이는 그들이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가 아니라, 헬레니즘에
흡수되지 않기 위해서 이다.
  안티오커스 4세의 요구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유대인의 항거는 극에 달한
헬라화에 대한 거부로 볼 수 있다. 안티오커스 4세의 강요와 그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은 이미 팔레스틴
내에 지속적으로 진행되던 헬라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무엇을 뜻하는가? 이
것은 헹엘의 지적대로 기원전  3세기에 이미 팔레스틴 유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구별이 무의미해졌
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유대인의 정체성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유대인은 그 주변
의 세력들과의 상호영향 관계 속에서 헬레니즘 세계 에 적응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기
서 다시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로 돌아가 보자.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내의 묵시적 소종파로 출
발했고,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유대교의 헬라화가 깊이 진행 중이었다면, 헬레니즘과 그리스도교의 관계
는 어떠하겠는가?                    

2. 헬레니즘세계와 그리스도교의 관계
 
  유대교의 헬라화와 신약성서가 배태되고 쓰여진 기원 후 1, 2세기의 헬레니즘 세계는 신약성서가 헬레
니즘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헬레니즘세계가 신약성서의 배경이 된다는 것은 무
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교를 형성시킨 사람들, 혹은 신약성서의 독자들과 관련된
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팔레스틴 밖으로 전파되면
서,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청중들의 다양성은 복음의 다양
한 성격을 야기 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런데 문제는 청중들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분하고, 그 이
분법 위에 그리스도교의 복음의 내용을 유대적인과 이방적인 것, 혹은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
교로 가르는 것이다.
  하이트뮐러(W. Heitmueller)가 예수에 의한 그리스도교와 바울의 그리스도교를 서로 다른 단계로 분리
시킨 이래, 그의 이론은 브제트(W. Bousset), 디벨리우스(M. Dibelius), 한(F. Hahn), 불트만(R.
Bultmann), 훌러(R. H. Fuller)등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발전되었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팔레
스틴 유대인 - 유대파 헬라인 - 이방인의 순서로 발전되었고, 유대적인 특성을 가진 복음을 헬라적인 것
으로 전환시킨 선두주자가 바울이라고 주장하였다. 각각의 학자들마다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은
성서에 나타난 복음이 몇 단계의 발전과정을 반영한다는 생각에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
은 신약성서에 나타난 복음이 과연 발전단계를 드러내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의 과정 중에
서 예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을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지역이 확장되면서 복음의 특성이 유대적인 것에서 헬라적인 것으로 변모했다는 견해
가 갖는 가장 큰 오류는 기원 후 1세기의 헬레니즘의 영향 정도를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미 기원전 3세기의 팔레스틴에 헬라화가 진행되었고 기원 후 1, 2세기까지 헬레니즘의 영향이 지
속되었다면, 유대파 그리스도교와 헬라파 그리스도교를 단계적 발전의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
다. 더욱이 헬라파 그리스도인과 히브리파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예배 시 사용한 언어에 근거하기 때문에,
이들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사도행전 6장 1-6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초대교회에 히
브리파 그리스도인들과 헬라파 그리스도인들이 공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들의 구체적인 특징과
차이를 밝혀내기는 어렵다. 알 수 있는 것은 성서의 저자들에 따라서 헬라파 그리스도인과 히브리파 그
리스도인을 구분하는 것이 다르며, 이것은 그들 공동체의 서로 다른 정항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헬라파
그리스도인과 히브리파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다양한 문화교류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며, 복음이 전파되는
단계적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융통성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오히려 이들의
존재는 복음이 전파되는 다양한 상황을 동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유대인을 팔레스틴 유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나눌 때, 기원 후 1세기의 팔레스틴 유대인
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서 헬라적 요소를 분명히 구분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물론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서 헬라적 영향의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영향의 정도와 지역이 불가분의 관
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우리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쓰여진 팔레스틴 유대인 그리스도교의 문서
를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팔레스틴 지역의 그리스도교적 특성을 명확하게 일별해 낼 수도 없다.
우리의 출발점은 단지 그리스도교가 헬레니즘 세계(그리고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지 않지만, 로마의 영
향)속에 살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배경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구별은 단계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의 대상, 혹은 상황의 다
양성을 의미한다.
  복음선포의 대상의 다양성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복음이 갈릴리에서 선포되었다고 해
서,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당연히 팔레스틴 유대교로 이해해야 한다는 공식에 의문을 던진다. 팔레스틴 유
대교와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분명히 구분짓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비록 복음의 시작이 팔레스틴 내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팔레스틴 내에서 가능한 다양한 구성원을 상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팔레
스틴 유대인과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지역적인 의미에서보다는 헬라화에
대한 반응정도에 따라서 적용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팔레스틴 유대인이란 그가 어디 있느냐에 상관
없이 보다 덜 헬라화된 유대인을 의미한다면, 디아스포라 유대인 역시, 지역과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보다
더 헬라화된 유대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역적인 특성이 아니다. 유대적 요소와
헬라적 요소가 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리스도교가 팔레스틴에서 헬라세계로 전파되었고, 예수의 복음에서 바울의 복음으로 변질되었다는 이해는
타당하지 않다. 더욱이 신약성서에서 전적으로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이러한
이해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팔레스틴이 헬레니즘 세계에서 고립된 지역이 아니라는 이러한 추측은 그리
스도교의 기원과 성장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를 수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 세계
에서 성장하였으며, 헬라적 유대교와 그리스의 사상들, 그리스 종교, 그리스 정신의 혼합"이라는 샌드
멜(S. Sandmel)의 이해는 헬레니즘 세계 속의 그리스도교의 기원과 성장을 잘 함축해준다.           IV 
헬레니즘세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대응

1. 헬레니즘문화의 수용
   
  헬레니즘 세계 속에서 유대교의 묵시적 종파로 출발한 그리스도교는 과연 어떻게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
시킬 수 있었을까? 타문화를 배경으로 그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시켜갈 때, 세 가
지 방법이 나올 수 있다. 타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것(타문화에 대한 완전 흡수까지를 포함한다), 적극 반
대하는 것(완전 거부까지를 의미한다), 변형, 수정하여 수용하는 것(부분적인 거부, 부분적인 수용을 의
미한다). 서로 다른 둘 이상의 문화가 만났을 때, 이 세 가지 방법 중 어느 하나만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
다. 이 세 가지 대응책들은 그 문화들이 가지고 있는 항목에 따라서 다양하게 적용된다. 유대교의 경우,
헬라화의 강요에 대해서 어느 부분에는 완전 거부의 태도를 보이지만, 다른 부분은 수정하여 받아들이거
나, 아니면 전적으로 흡수된 상태로 변화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헬레니즘
세계 속에서 취사선택해서 대응함으로써, 그리스도교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가 헬라 세계 속에서 받아들인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먼저 헬
레니즘 종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혼합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다양한 그리스적 특성과 유대교의 특성이 '혼합'된 것이라는 샌드멜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여기서 사용된
'혼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다면, 샌드멜의 이해는 그리스도교를 별 특색 없는 혼합물이라는 오해 속
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기원 후 1세기의 헬라 세계에서 혼합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며, 그 혼합주의 속에
서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헬레니즘은 '혼합화'의 과정이다. 알렉산더 이후에 그리스의 문화와 근동의
문화들이 인위적이며, 또한 자의적으로 섞여지면서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세계, 혹은 문화가 탄생했다.
그러나 이 혼합은 'A 더하기 B는 AB다' 라는 식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다. 'A 더하기 B는 C다'라는 식으로
진행된 것이 그리스 문화와 근동문화가 융화된 헬레니즘 문화이다. 대표적인 것이 종교적인 면에서 일어
났는데, 그것이 바로 헬라 세계의 특징인 밀의 종교이다. 헬레니즘은 알렉산더가 정복한 근동에 그리스문
화를 주입하는 것이었고, 밀의 종교는 그리스적 특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밀의 종교는 메소포
타미아 지역에 있는 근동종교의 특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헬레니즘 세계에서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구속력
이 약화되면서 밀의 종교가 헬라세계의 특징적 종교현상으로 떠올랐다. 이것은 아이러니칼하게 헬레니즘
에서 종교가 갖고 있던 역사성을 상실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헬레니즘종교의 특성을 반역사적이며 신비적
인 것으로 만들었다. 아마도 밀의 종교의 이러한 신비주의적 특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헬레니즘 세
계가 갖고 있는 개인주의적 성향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헬레니즘 세계에서 혼합이라는 것은 단순히 둘 이상의 융합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인가의 탄생
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헬레니즘종교의 혼합주의를 '응집력 있는 하나의 체
계'로 이해한 마틴(L. H. Martin)의 견해는 탁월하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체계로서의 혼합주의는 헬
레니즘의 보편주의를 확장시키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헬레니즘 세계에서 혼합주의는 혼돈을
의미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혹은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것을 연결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혼합주의를 통해서 섞여진 것들 간의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볼 수 있다. 혼합주의 속에는 하나의
문화가 여타의 문화들과 갖는 긍정적인 관계나, 혹은 부정적인 관계들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헬레니즘 세계를 배경으로 형성된 그리스도교도 헬라적 요소들을 끌어들이는데 있어서 나름대로
어떠한 관계를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교와 헬라 세계와의 관계를 일괄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교가 다양한 요소들을 배
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신약성서 자체가 다양한 상황을 배경으로, 다양한 저자
들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다양성을 입증한다. 예수가 활동한 시기부터 신약성서에서 가
장 늦게 쓰여진 책들까지의 기간은 어언 1세기에 해당한다. 한 사건에 대한 동시대적 반응도 참으로 다양
하거니와, 100년이라는 기간동안 있었던 헬레니즘에 대한 반응을 일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구체
적으로는 불가능하더라도, 신약성서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말할 수 있는 몇몇의 항목들을 대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그 항목에 대한 세부적인 대응은 물론 여기서 말할 수 없다) . 
  우선 헬라세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신약성서의 문학적 형식들을 들 수 있다. 성서기자들은 예수의 활
동과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당시에 일반적이던 문학양식이나 문학기법 등을 사용하였다. 복음
서는 당시의 문학형태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장르이기는 하지만, 예수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부분적으로
당대에 유행하던 전기와 유사한 부분을 갖고 있다. 또한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서신형태는
당시에 의견을 교환하는 대표적인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서기자들은 헬라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
던 이러한 형식들에 유대전승에서 기인한 형식들을 첨가하거나, 그들의 독특한 형식을 가미하였다. 문
학형식을 빌려오면서 가장 쉽게 동반될 수 있는 것은 문학적 표현방식이다. 우리는 신약성서의 표현들 중
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수사학적 기법을 사용하거나 변형시키는 표현들을 접할 수 있다.
  헬라적 형식과 표현기법의 사용은 헬라 세계 속에 있는 독자들이 신약성서의 메시지를 무리 없이 이해
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다. 그리고 또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성서기자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세계
로부터 '개념'이나 당시의 '관습'등을 빌려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헬라철학이나 종교, 혹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던 많은 단어들이 예수에게 적용되었고, 당시에 유행하던 관습들이 초대교회의 모습들
속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기자들이 헬라 세계의 개념들을 예수와 그의 복음에 적용시킬 때,
그 의미가 변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유대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헬라세계
와 만나면서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메시지로 변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헬라 세계에 있던
어떤 개념들이 신약성서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당시의 헬라적 의미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기자들은 의미의 변용을 통해서, 헬라 세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사고 속에 그들의 독특한 메시지를
강조한다.  
  개념뿐만이 아니라, 헬라적 관습에서 형식을 빌어오는 것도 그리스도교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면 예수가 그의 제자들과 나누는 식탁교제의 경우는 그것이 유대적 일뿐만이 아니라, 헬라적인 관
습에서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사회관습에서 빌어온 것 외에, 당시에 유행하던 밀의
종교에서의 여러 형식들은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틀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대표
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 행해지던 세례나 성만찬은 당시의 밀의 종교에서 행해지던 것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것들을 빌어와서, 거기에 나름대로의 독특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
로운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유사한 관습들을 비판하는 기능을
한다는 면에서, 그리스도교가 당시의 여타의 밀의 종교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스도교가 형성될 때, 그리스도교는 그가 속한 주변의 이러한 관습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
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도교는 다양한 헬라적 양식이나, 개념, 관습들에 대해서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영향들을 무조건적으로나, 혹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들이 처한 환경 속에서 그들의 메시지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하여, 거기에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형식이나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들은 독특한 그들의 메시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기존의 양식들을
도구화하였다.          

2. 헬레니즘문화의 거부
  앞에서 지적했듯이 타문화를 수용할 때의 태도는 다양하다. 일방적으로 수용만 하는 것도, 일방적으로
거부만 하는 것도 부적당하다. 상황에 따라서 수용과 거부의 태도를 유연성 있게 함으로써, 타문화 속에
서 그들의 독특성을 유지하며 발전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수용이 헬라적인 요소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헬라적인 요소 중에 그리스도교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혹은
정면으로 반대했던 것은 무엇인가? 혹은 그리스도교의 특성에 있어서 헬라적 요소와 가장 상충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요소들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교의 독특성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헬라 세계의
관계성 여부를 확실히 드러내는 길이 될 것이다.
  앞에서 헬레니즘 세계는 보편주의와 개인주의라는 서로 상반되는 듯한 두 개의 특징을 갖고 있다고 지
적했다. 보편주의와 개인주의라는 두 개의 특성은 혼합주의적인 헬레니즘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보편주의라는 헬레니즘의 정치적 이념이 헬라철학이나 근동종교와 만났을 때, 개인주의라는
독특한 특성을 낳게 되었다. 그러므로 개인주의와 양립하는 보편주의적 특성은 헬레니즘의 가장 큰 틀이
며,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헬레니즘의 이러한 근본적인 틀에 대해서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보편주의는 그리스도교에서도 중요한 전망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헬레니즘에서 말하는 보편주의와 그리
스도교에서 말하는 보편주의에는 차이가 있다. 헬레니즘에서의 보편주의는 공간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과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반면, 그리스도교에서의 보편주의는 공간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과 문화 속에 살았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즉 그리스도
교에서의 보편주의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시키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이 공통적으로 보편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그 강조점의 차이를 통해서, 그리스도교는 헬라적인 시간이해에 반대할 뿐만 아니
라, 헬레니즘이 가지고 있는 개인주의적 특성에도 반대한다.
  헬라적인 시간이해의 가장 큰 특징은 순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적인 시간이해는 직선적이라고
볼 수 있고, 이는 시작과 끝에 대한 생각을 전제로 한다. 유대교의 묵시적 소종파로 출발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역사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역사이해는 그리스도교와 헬라 세계의 서로 다른 신 이해
와 종교적 특성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그리스도교의 역사이해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이 역사를 주관하시
고,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무엇보다 강조된다. 그러나 헬
레니즘 세계에서 신들은 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들을 갖는다. 그들이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지만, 헬레
니즘 세계에서 신들의 초월성은 강조되지 않는다. 오히려 헬레니즘 종교는 다신교적 특성은 여러 신들
을 마치 인간의 세계에서처럼, 위계질서 하에 놓고, 신의 초월성을 약화시킨다. 더욱이 헬라세계의 다
신교는 장소와 밀접한 연관을 갖기 때문에, 같은 신이라도 장소에 따라서 달리 이해되는 것을 볼 수 있
다. 그리스도교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초월성은 장소와 연관된 헬라 종교를 비판하는 기능을 한다. 하
나님의 초월성에서 연유한 하나님의 자유로움은 장소에 매인 신들의 열등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헬레니즘 종교에 나타난 이러한 다신교적 특성은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는 헬레니즘적 특성과 맞물려 있
다. 그러나 다른 근동종교와는 달리, 유대교는 유일신을 강조하며, 그리스도교도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적
이해를 따른다. 유일신에 대한 이해는 여타의 모든 신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유일신 하나
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그의 주권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역사이해는 물론 헬라적인 특성과도 다를 뿐 아니라, 유대적인 이해와도 구별된다.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역사이해를 나타내는 것이 묵시문학적 종말론이다.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유대적 뿌
리를 갖고 있는 역사이해이다. 그러나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에서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강조되는 반
면, 그리스도교적 묵시문학에서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넘어서는 새로운 이해가 나타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실현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이 동시에 강조된다. 미래적 종말론은 현재를 악으로
규정하고 도래할 세대에서 희망을 찾는다는 면에서 유대적 묵시문학적 종말론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실
현된 종말론은 악한 현 세대 속 에 희망의 미래가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뚜렷한 이분법적
구조를 넘어선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 사건이다. 실현된 종말론은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승리가 이미 이 악한 세대 속에 임했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이분법을 넘어서는 이러한 독특한
이해는 헬라 세계의 이원론과도 분명히 구분된다. 헬레니즘의 이원론이 헬레니즘 종교에서 윤리성을 제
거함에 따라서, 후기 헬레니즘의 밀의 종교에서 도덕성이 결여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시간
이해는 현재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삶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유대교와 더불어,
도덕적 삶을 종교와 분리시키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특성은 또한 당시 헬라종교를 비판하는 기능을 하였
다.  
  이원론은 헬레니즘의 세계관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영과 육, 정신적인 것
과 물질적인 것의 구분을 통해서, 전자에 속하는 것들을 선한 것으로 후자에 속하는 것들을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장 잘 반영해주는 것이 영지주의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
지주의 문서는 기원 후 2세기 이후의 것이기 때문에, 영지주의의 기원이나 그리스도교와의 영향 관계 등
을 정확히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더욱이 영지주의는 매우 다양한 특성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특성을 영지주의로 정의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문서화되기 이전에, 기원 후 1세기에
이미 비록 완성되지 않은 형태라고 하더라도, 어떤 형태로든지 영지주의가 존재했을 것이고, 그 세부적
인 것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특징으로 언급할 수 있는 근본적인 몇몇 요소들을 간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의 출발점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원론적 이해이다. 영지주의에서는 물질적인 이 세상과 인간
의 육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천상에서부터 내려온 육을 입지 않은 구원자로부터 이
악한 세계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육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태도는 결국 현 역사에 대한 부
정적인 태도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영지주의에서부터 나온 금욕주의나 쾌락주의는 모두 역사를 변혁시키
고자 하는 적극적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역사이해는 그리스도교의 역사이해와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서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곳이며, 결국에는 하나님이 승리하실 바탕이다. 그리
스도교의 독특성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근거를 자연에서 역사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
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육을 입고 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이 시작되
며, 새로운 하나님 이해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알렉산더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전망에 눈뜨게 했다면,
예수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전망에 눈뜨게 했다"는 막스(J. H. Marks)의 지적은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더불어 그의 인성이 강조되는 것은 역사에서 벗어나지 않
는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영지주의에 나타나는 구세주에 대한 가현설적 이해는 헬레니즘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커다란 차이점 중
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헬레니즘 종교가 갖고 있는 신비주의적 특성의 일면이라고 볼 수
있다. 헬레니즘 종교의 신비주의는 탈역사화된 성격과 개인주의적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면에서 헬라
종교의 신비주의는 역사성에 기초한 그리스도교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에서 연유
한 개인주의적 특성이 그리스도교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보편주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보
편주의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고,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을 구원할 것이라는
이해가 그리스도교의 근간에 있다.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이해가
유대교나 헬라세계와 구별되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훠거슨(E. Ferguson)은 역사성, 도
덕성, 사회적 결합력, 구원의 보편성을 그리스도교의 특징으로 지적한다. 휘거슨의 이러한 주장은 헬라
세계에서 그들의 독특성을 유지한 그리스도교의 특징을 적절히 지적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이해에서 출발한 유대교는 그들의 구원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갖는다. 그러나 그
리스도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모두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임을 강조함으로써, 유대인의 배타성을 넘어
선다.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다는 이러한 보편적 구원에 대한 생각은 구원된 자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구원된 자들 간의 이러한 연계성은 개인주의
적인 헬레니즘 세계의 특징과 완연히 구분된다. 헬레니즘 종교에서는 신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만이 강
조되지, 그것이 인간들 간의 관계로 확대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뿐 아니
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헬라 세계가 갖고 있지 못한 종교적 특성을 드러낸다.          
   
 
         V   결어
   성서는 그것이 쓰여진 사회적 정황과 분리될 수 없다. 성서를 그것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서 보지
못할 때, 성서가 갖고 있는 역사성이 상실되고 성서의 내용은 단순한 도그마로 전락된다. 그러므로 그리
스도교가 형성되고 성서가 쓰여진 배경에 대한 이해는 성서의 메시지가 갖고 있는 역동성을 살려내고, 성
서의 내용을 단순한 문자의 배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 되살려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형성배경
으로서 헬레니즘이 끼친 사상적, 문화적 배경을 과소 평가할 수 없다.
  기원 후 1세기에 형성된 그리스도교는 당시에 만연해 있던 헬라세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
다. 이미 그리스도교의 뿌리가 되었던 유대교도 헬라적 영향권 내에 있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도교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환경도 헬라 세계의 영향권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
도교는 헬라 세계에 다양하게 반응함으로써, 그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해나갔고, 그러한 특성들이 신
약성서에 나타나 있다.
  타문화에 대해서 반응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에 대한 수용과 거부라는 태도를 적
절히 취함으로써, 여타의 종교와는 다른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였고 헬라 세계에서 그들의 메시지가 선
포될 수 있는 틀을 만들었다. 그리스도교가 헬라 세계에서 가져온 것은 그들의 메시지를 담는 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당시의 문학적인 기법, 사회적, 종교적 관습, 철학적 개념 등을 수용하거나 변
형하여서 그들의 메시지가 헬라 세계의 영향 내에 있는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틀 안에 담는 메시지의 내용은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즉 그리스도교
는 헬라 세계 내에서 그들의 메시지를 전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주의와 개인주의라는 헬레니즘의 기본적인
이념을 벗어난다.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교는 여타의 헬레니즘 종교와 다르며, 또한 유대교와도 구별된다.
그리스도교는 헬레니즘의 보편주의 이념을 역사적 보편주의, 즉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이라는 것으로 바
꾸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피조세계에 대한 이해는 헬레니즘의 이원론적 사고를 넘어
섬으로써, 개인주의적 특성을 극복한다.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이해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까지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헬레니즘의 배경 속에서 유대교의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 새로운 종교적 틀을 가질 수 있
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교가 하나의 체계로서의 혼합주의적 특성을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 그리스도교는 유대교나, 헬레니즘, 그리고
로마의 영향 내에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들에 대해서 유연하게 대응함으로써, 즉 그들에 대한
긍정적 관계와 부정적 관계를 적절히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주었던 기존의 세력들에 다시 영향을 끼치는 부메랑 효과를 만들어내
었다. 그리스도교는 여타의 문화, 종교의 배경 속에서 성장했지만, 오히려 기존의 것들을 비판하는 새로
운 안목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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