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의 12제자 | 이 름 | 성경 자료 | 전승 자료 | 시몬 베드로 | - 오순절날 말씀을 선포함
-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킴
- 산헤드린 공회의 박해를 잘 견딤
- 아나니아와 삽비라, 마술사 시몬을 견책함
- 죽은 자 도르가를 다시 살림
-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함
- 기적으로 감옥에서 풀려남
- 안디옥에서 바울에게 힐책받음
- 두 편의 서신을 집필함
| - 전승에 의하면 후에 영국과 프랑스 지역을 방문함
- 네로화제 박해시 (A.D. 64-68) 십자가에 달려죽음
| 안드레 | | - 스구디아, 소아시아, 그리스 등지에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추정됨
- 아가야지방 파트라스에서 십자가형을 받음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 | | 요한 | -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사건의 동역자
- 사마리아 지방 전도에 빌립과 함께 참여함
- 말년에 밧모섬에서 생을 보냄
- 복음서, 세 편의 서신, 계시록을 집필함
| - 에베소에서 목회함
- 초대 영지주의자 케린투스를 반박함
- 100년경 에베소에서 여생을 마침
| 빌립 | | - 소아시아 지방 히에라볼리에서 십자가형을 받았다고 전해짐
| 마태 | | - 에티오피아, 파르티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지역 등 저마다 일치하지 않는 전승이 알려지고 있음
| 도마 | | | 바돌로매 | | - 빌립과 함께 히에라볼리에서 선교하였으며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목회활동 중 순교한 것으로 추정됨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 - 초대교회 전승에서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혼동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시리아 지방에서 목회함
| 다대오 | | - 종종 예수의 형제 유다와 혼동되었으며 전승은 그가 에데사와 같이 목회한 것으로 관련시킴
| 셀롯인 시몬 | | - 페르시아, 이집트, 카르타고, 영국 등지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되어짐
| 가롯 유다 | | |
2. 초대 기독교의 상징 | 상징 | 해설 | ALPHA-OMEGA | -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뜻함
| ANCHOR(닻) | - 신앙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상징물임
| BREAD AND WINE (빵과 포도주) | - 성찬식-그리스도의 희생(죽으심)을 기념함
| CHI-RHO | - 그리스어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첫 두 글자를 말함
| CROSS(십자가) | - 그리스도의 죽으심
| DOVE(비둘기) | - 그리스도의 수세(受洗)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말함
| FIRE(불) | - 오순절날에 임하신 성령의 임재를 가리킴
| FISH(물고기) | - 그리스어 단어 ICHTHUS-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의 머리말 글자로 예수께서 5천명을 먹이신 이적사건과 사람을 낚는 어부를 뜻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음
| LAMB(양) | - 그리스도의 (참다운) 자기희생을 뜻함
| SHEPHERD(목자) | -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분임을 가리킴
| SHIP(선박) | - 교회(노아의 방주)를 가리킴
| VINE(포도나무) | -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과의 연합도미이나 성찬식에서의 포도주를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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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도 교부 | 이름 | 연대 | 목회지 | 저술 | 주요 사실 | 로마의 클레멘트 | - 30-100년경
| - 로마
| | -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제4대 교황으로 추대함
- 성서에는 빌립보서 4:3에 언급된 것으로 추정함
- 도미티아누스황제 박해시 순교함
- 그의 서신은 사도의 계승원칙을 강조함
| 이그나티우스 | - 117년 사망
| - 시리아 안디옥
| - 에베소 서신
- 마그네시아 서신
- 트랄레스 서신
- 로마 서신
- 빌라델비아 서신
- 서머나 서신
- 폴리갑 서신
| - 그의 서신은 로마에 순교하러 가는 도중에 기록되었으며 그는 순교를 당연한 기쁨의 운명으로 받아들임
- 주교와 장로직의 구분을 최초 역설함
- 이단사상인 영지주의를 배격함
- 트라야누스황제의 박해로 순교함
| 헤르마스 | - 1세기 말엽
- ~ 2세기 초엽
| - 로마
| | - 클레멘트와 동시대 인물임
- 환상과 비유에 관한 많은 저술이 있음
- 아마도 유대인이었으며 노예 출신의 신분을 지닌 것으로 추정함
| 알렉산드리아의 바나바 | - 1세기 말엽
- ~ 2세기 초엽
| - 알렉산드리아
| | - 알렉산드리아의 법률학자임
- 필로의 알레고리 방법에 능통함
| 파피아스 | - 60-130년경
| - 히에라볼리
| | - 사도 요한과 깊은 친교를 나눈 자임
- 종말론에서 전천년설을 주장함
-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어록집에 기초하여 저술되었으며 마태복음은 원래 아랍어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함
| 폴리갑 | - 69년경-160년
| - 서머나
| | - 사도 요한과 깊은 교제를 나눈 자임
-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을 편집하고 보존함
- 영지주의자 말시온을 "사단의 맏아들"로 규정함
- 안토니누스 피우스 치하에 순교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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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세기 변증가 | 이름 | 연대 | 목회지 | 주요 저서 | 주요 사실 | 쿠아드라투스 | - 2세기 초
| - 아테네
| | - 아테네 주교임
- 그의 저서는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보낸 변증서였음
- 기독교를 유대교와 이교도의 예배와 대조하여 구별시켜 놓음
| 아리스티데스 | - 2세기 초
| - 아테네
| | - 그의 저서는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보낸 변증서로 사도 바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
| 순교자 저스틴 (유스틴) | - 100-165년경
| - 팔레스틴
- 에베소
- 로마
| - 제1 변증서
- 제2 변증서
-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
- 이교에 대한 비판(전해지지 않음)
- 말시온 이교 반박서(전해지지 않음)
| - 철학적인 훈련을 받음
- 순회 평교사로 영지주의자 말시온을 반박하며 로고스(logos) 개념정립을 위해 헌신함
- 예언, 이적, 윤리의 근본인 기독교에 대한 토론에 열의를 보였고 그후 로마에서 순교함
| 타티안 | - 110-172
| - 앗시리아
- 시리아
- 로마
| | - 저스틴의 제자로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르 주장함
- 그는 최초로 복음서들간의 공통된 기사를 정리하였으나 말년에 영지주의에 심취되고 말았음
-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켜 "극단적 금욕주의자"로 간주함
| 아데나고리스 | - 2세기
| - 아테네
| | | 데오필루스 | - 181년 사망
| - 안디옥
| | - 안디옥의 주교로 이교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인 엄격한 변증가임
| 멜리토 | - 190년 사망
| - 사르디스
| | - 시르디스의 주교로 Quartodecimans(14일주의)을지지함
- 구약성서 가운데 최초로 그리스도인 목록을 작성함
| 헤게시푸스 | - 2세기
| - 시리아
- 그리스
- 로마
| | - 유대교에서 개종한 자로 초대교회의 순수성과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해 각종 문헌정보를 수집하였고 모든 이단사상의 책임을 유대교에 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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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변증가들의 주요 논쟁점 |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입장 | 변증가들의 답변 내용 |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빗나간 형태의 분파임 | 유대교의 법은 본래 한시적이었기에 새 계약을 지향하는 것을 표방한 것임 | 십자가에 달린 목수의 아들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아님 | 구약성서는 메시야의 영광과 고난을 예언하고 있음 |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나님의 일체성과 모순되는 것임 | 구약성서는 삼위일체 안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나타내고 있음 | 변증가들의 유대교에 대한 반박 내용 | - 구약성서의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음
- 구약성서의 전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
- 예루설렘의 멸망은 유대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자 기독교에 대한 입증을 말함
| 기독교에 대한 이교(異敎)의 입장 | 변증가들의 답변 내용 | 부활의 교리는 불합리한 것임 | 복음서마다 수많은 증거가 있고 제자들에게 끼친 영향이 크며 자연계의 순환 (예를들면, 계절)에도 그 비유가 있음 | 성서는 모순투성임 | 타티안의 공관복음서처럼 모순된 내용들이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있음 | 무신론은 폭넓게 전파되고 있음 | 플라톤조차도 보이지 않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음 | 기독교는 범죄자들의 예배처소임 | 예수의 의도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함에 있었음 | 기독교는 흔히 발생하는 종파에 불과함 | 기독교는 모든 이들의 영생을 준비하고 있으며 모세는 이교 철학자들의 등장을 예견함 | 기독교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함 |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한 모든 법에 순종함 | 기독교는 근친상간(近親相姦)관 만행을 저지르는 등 도덕상의 문제가 있었음 | 그리스도인들은 순교자의 정신을 본받고 있듯이 그들의 삶의 방식을 준수할 따름이었음 | 기독교는 천재로 인한 사회질서 파괴의 주범이었음 | 자연의 재해는 그릇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 | 변증가들의 이교(異敎)에 대한 반박 내용 | - 이교 철학작들은 자신들의 주요 이념을 모세와 예언자들로부터 도용한 표절자에 불과함
- 다신교는 철학의 불합리리성과 비도덕성을 특징으로 삼고 있음
- 이교 철학자들은 서로들 간에는 물론 그들 자신조차도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음
| 변증가들의 기독교에 대한 옹호 내용 | - 참된 진리는 이교 철학자들이 기독교에 개종함으로써 입증되었으며 이로써 기독교의 진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되었음
- 그리스도, 사도들, 그리고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연속적으로 발생된 기적들이 기독교의 진리됨을 증거함
- 수많은 시련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발전은 그 자체의 진리성을 확증하고 있음
- 기독교만이 인간 존재의 참된 행복을 발견케하는 종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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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3세기 교부 | 이름 | 연대 | 목회 장소 | 대표 저서 | 주요 내용 | 이레니우스 | - 2세기 후반
| - 서머나
- 고올
| - 이교에 대한비판
- 악의 기원과 신(神)의 일체성에 관하여
| - 폴리갑에게 공부한 그는 선교사요 변증가였으며 영지주의에 강력한 반대를 표방하였고 전천년설을 옹호하였으며 리용의 주교로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 클레멘트 | - 150-215년경
| - 알렉산드리아
- 안디옥
- 예루살렘
| | - 철학 수업을 쌓았던 그는 성년에 이르러 개종하였으며 로고스이론을 강조하였고 성서를 은유적 해석방법으로 접근하였다.
- 고전적인 그린스도인 찬양시인 "선한목자"를 저술하였다.
| 터툴리안 | - 160-220년경
| - 카르타고
| - 이교에 대한 규정
- 말시온 이교반박서
- 프락세우스 이교반박서
| - 로마군대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한 그는 중년의 시기에 몬타누스파로 개종하였으며 그의 업적은 그가 삼위일체 교리를 정립시켰다는 데에 있다.
| 히폴리투스 | - 170-236년경
| - 로마
| | - 이레니우스에게서 공부한 그는 당대 로마의 주교들에게 배척받았는데 그 이유는 알레고리적인 방법으로 성서를 해석하였기 때문이었다.
- 후에 사르디니아지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 | - 160-240년경
| - 팔레스틴
| | - 오리겐에서 공부한 그는 천지창조로부터 서기 221년까지 역사적인 자료연구서를 발간하였다.
| 오리겐 | - 185-254년경
| - 알렉산드리아
- 가이사랴
| - 6개국어 대역성서
- 켈수스 이교반박
- 제1원리(신학)
| - 그의 아버지 레오니다스는 202년에 순교하였고 그는 클레멘트에게서 공부하였다.
- 203년 클레멘트 사후(死後) 교리문답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성서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의 주목할만한 업적을 이루었으며 극도의 수도생활을 하였고 교회내 반대세력을 피해 망명생활한 후 로마인의 손에 의해 고문 끝에 순교하였다.
| 씨프리안 | - 200-258년경
| - 카르타고
| | - 수사학을 공부한 그는 245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247년부터 카르타고의 주교 일을 담당하였고 터툴리안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감독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 박해시 배교자들의 문제에 엄격한 입장을 취하였고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시 순교하였다.
| 그레고리 -타우마 투르고스 | - 213-270년경
| - 팔레스틴
- 소아시아
| | - 오리겐에게 공부한 후에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만능학자"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신 가이사랴 지방의 주교직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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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신약성경의 정경화 과정 | 시기 | 특색 | 연대 | 중요한 출처 | 수용대상이 된 책 | 논의대상이 된 책 | 사도 교부들 | - 공식적인 논의와 심각한 토론이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음
| - 100-140년경
| - 사도교부들의 기록 인용
| | | 영지주의자들의 활동 | - 초대교회가 영지주의자 (특히, 발시온)에 의해 제외된 정경화작업을 반박하고 나옴
| - 140-220년경
| - 교부들의 문헌 인용
- 무라토리안 단편(180년경)
- 진리의 복음서(영지주의적)
| - 네 개의 복음서
- 사도행전
- 바울서신 13권
- 베드로전서
- 요한 1서
- 유다서
- 요한계시록
| - 히브리서
- 야고보서
- 베드로후서
- 요한 2,3서
- 헤르마스의 목자서
- 디다케(12사도들의 교훈집)
- 베드로의 묵시록
| 정경화 완료작업 | - 4세기 말경 일반적인 합의점을 도출함
| - 220-400년경
| - 오리겐의 구분
| - 네 개의 복음서
- 사도행전
- 바울서신 13권
- 베드로전서
- 요한 1서
- 요한계시록
| - 히브리서
- 야고보서
- 베드로후서
- 요한 2,3서
- 유다서
- 헤르마스의 목자서
- 디다케
| - 유세비우스의 구분
| - 네 개의 복음서
- 사도행전
- 바울서신 14권
- 베드로전서
- 요한 1서
| - 히브리서
- 야고보서
- 베드로후서
- 요한 2,3서
- 유다서
- 헤르마스의 목자서
- 디다케
| - 아다나시우스의 부활적 회람편지(367년)-동방교회 최종 승인
| | | - 로마회의(382년)-서방교회 최종 승인
| | | - 카르타고회의(397년)-전체 교회에게 보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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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신약성경 정경화에 논란이 된 책 | 문제의 책 | 수용하려는 입장 | 거부하려는 입장 | 결과 | 히브리서 | 동방교회에서는 바울의 저서로 높이 평가함 | 서방교회에서는 바울 저작성을 의심함 | 수용됨 | 야고보서 | 동방교회에서 온전한 저서로 인정함 | 서방교회에서 저작성 시비가 대두됨 | 수용됨 | 베드로후서 | 베드로의 저서로 인정함 | 본문 2장과 유다서의 내용문제로 저자에 이의 제기됨 | 수용됨 | 요한 2,3서 | 요한의 저서로 인정함 | 초대교회의 문서로 인용에 문제시됨 | 수용됨 | 유다서 | - 초대교회의 문서로 인용됨
- 사도성이 충분히 인정됨
| 저자에 이의가 제기됨 | 수용됨 | 요한계시록 |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요한의 저서로 인정함 | 천년왕국설을 반대하는 유세비우스에 의해 제기됨 | 수용됨 | 헤르마스의 목자서 | 하나님께서부터 온 계시를 담고 있는 유익한 교훈서임 | 비사도적인 기원을 갖고 있는 후대의 저서임 | 거부됨 | 디다케 | 순수한 사도적 전승을 담은 기록임 | 사도적인 기원이 불분명한 후대의 저서임 | 거부됨 | 베드로묵시록 | 베드로 저적성에 기인하며 요한계시록과 유사함 | 본문의 출처 근거가 의심스러움 | 거부됨 |
9. 니케아회의 이전의 이단종파 | 이단 | 지도자 | 역사적 사실 | 가르침의 특징 | 에비온파 (엘케파, 만데파) | -
| - 1세기 후반 팔레스틴 지방에서 발생한 후 소아시아에 전파되었고 대부분 유대인계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히브리적인 마태복음을 중시하였다.
| - 구원에 필요한 부분인 모세율법의 보편성을 가르쳤으며 바울에 대한 반감을 지니며 예수는 메시야이지만 단지 세례시 성령이 임한 인간일 뿐이라 하였다.
- 특히 천년왕국의 임박함을 기대한다.
| 노스틱파 (영지주의) | - 마술사 시몬
- (1세기)
- 케린투스
- (1세기 말엽)
- 바실리데스
- (2세기 초엽)
- 사투르니누스
- (2세기 초엽)
- 말시온
- (160년경 사망)
- 발렌티누스
- (160년경 사망)
- 타티안
- (110-172)
| - 특히 그리스철학인 플라톤철학에 기초하여 동방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일반대중에 대한 포교는 미흡했고 교회지도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했다.
- 제국 전체에 걸쳐 다양한 종교운동형태를 보여주었으며 이들의 가르침 때문에 교회는 신앙과 신약성서 정경화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교회는 진리의 보고(寶庫)로서 사도의 계승원칙을 강조하게 되었다.
| - 그들은 독특하고도 탁월한 "영지"(gnosis)를 지닌 자로서 신성(神性)이 어떤 "영적인"개인들의 몸 안에 주입되었다고 믿는다. 물질적인 것은 악으로 규정하며 영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는 철저한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다(Pleroma). 따라서 성(性)과 결혼에 대한 극단적인 금욕주의 현태를 일반적으로 취하여 유대교와 구약성서를 거부하며 성서를 알레고리(은유)적으로 해석하고 세계는 조물주(=여호와)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육체는 한갖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믿는다.
| 몬타누스파 | - 몬타누스(2세기)
- 브리스길라(2세기)
- 막시말라(2세기)
- 터툴리안
- (160-220년경)
| - 브루기아 지방에서 발생하여 후에 로마와 북아프리카에 널리 성행하였다.
| - 금욕적이며 천년왕국을 고대하였고 정통 기독교 교리에 비교적 충실하였으나 그들 자신을 성령의 대변자로 간주하며 예언자적인 계시를 믿고 방언을 하며 신자들의 만인사제직을 주장하였고 어떤 류의 오락 및 여흥도 생활 속에서 배격했었으며 오로지 순교자의 길을 추구하였다.
| 마니교파 | - 마니
- (215-277)
| - 페르시아에서 발생, 배화교의 영향으로 성장하였고 마니는 그의 육체를 벗고 환생했으며 그의 시체는 페르시아 거리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 어거스틴이 젊은 시절 심취한 바 있으며 후대 바울학파, 보고밀파, 카타리파, 알비겐파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었다.
- 엄격한 계급조직에 의해 형성되었다.
| - 창조의 이원론적(빛과 어두움) 견해를 지니며 그리스도는 빛으로, 사단은 어둠으로 묘사한다.
- 이들에 의하면 사도들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진 것이며 마니가 올바른 가르침을 주도록 계시받은 자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 추종세력들은 극도의 금욕생활을 표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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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로마제국의 10대 기독교 박해사건 | 연도 | 황제 | 박해의 유형 및 범위 | 대표적인 순교자 | 64 | - 네로
| - 로마와 근교 부근에서 박해를 가했다.
- 로마시 대화재의 혐의를 재난의 원인을 그리스도인에게 전가시켰다.
- 네로의 궁전을 밝히기 위한 소위 '인간횃불'로서 그리스도인을 화형에 처하는 광란(狂亂)을 벌였다.
| - 바울
- 베드로
| 90년경 -96년 | - 도미티아누스
| - 로마와 소아시아 지역에서 일시적이고도 산발적인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의 황제숭배 거부로 비롯되었다.
| - 로마의 클레멘트
- 사도요한(밧모섬에 유배)
| 98-117 | - 트라야누스
| - 점차 박해가 강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비애국적인 집단으로 규정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발견 즉시 처형되었다.
| - 이그나티우스
- 시므온
- 조시므스
- 루프스
| 117-138 | - 하드리아누스
| - 황제 숭배는 계속되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하는 자는 처벌되었다.
| - 텔레스포루스
| 161-180 | - 마르쿠스
- 아우렐리우스
| - 기독교를 사상적으로 배격한 스토아주의자인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연재해의 장본인으로 규정하였다.
| - 순교자 저스틴
- 포티누스
- 블란디나
| 202-211 | - 셉티무스
- 세베루스
| - 기독교로의 개종을 금지시켰다.
| - 레오니다스
- 이레니우스
- 페르페투아
| 235-236 | - 트라키아의
- 막시미누스
| - 기독교 성직자를 처단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황제가 암살한 전임황제를지지하였다는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 - 우르술라
- 히폴리투스
| 249-251 | - 데키우스
| - 최초로 제국전체에 박해의 손길을 펼친 그는 황제숭배의 향기로운 제물을 요구하였고 기독교의 완전한 파멸과 더불어 이교신앙으로 복귀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 - 파비아누스
- 예루살렘의 알렉산더
| 257-260 | - 발레리아누스
| - 그리스도인의 재산을 몰수하며 그들의 공민권(公民權)을 박탈하였다.
| - 오리겐
- 씨프리아
- 식스투스 2세
| 303-311 | - 디오클레티아누스
- 갈레리우스
| - 가장 혹독한 박해로서 교회는 파괴되었고 성서는 불태워졌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박탈위기에 처했으며 로마신들에 대한 숭배가 강요되었다.
| - 마우리티우스
- 알바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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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니케아회의 이후의 교부들 | 이름 | 연도 | 목회지 | 대표 저서 | 주요 사실 | 락탄티우스 | - 240년경
- -320년
| - 이탈리아
- 고올(프랑스)
| | - 그의 아버지는 이교도였으며 성년기에 개종하였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아들의 가정교사로 활동하였다.
| 유세비우스 | - 263-339년경
| - 가이사랴
| | - 교회사의 아버지로 불리우며 가이사랴의 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그곳에서 감독직을 수행한 후 안디옥의 감독 요청을 사양하였다.
- 아리우스 논쟁에서 타협점을 모색하였지만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의 견해를 모두 동조하지 않았으며 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자문역으로 활약한 그는 천년왕국설에 완고하게 반대입장을 견지하였다.
| 힐라리 | - 291년경
- -371년
| - 포아티에
| | - 생애 말년에 그리스도인이 된 그는 아리안주의에 서방측 반대론자로 활동하였으며 350년 포아티에 지역 감독일을 맡아 보게 되었다.
| 아다나시우스 | - 296년경
- -373년
| - 알렉산드리아
| - 그리스도의 성육신론
- 아리안주의 반박서
- 아폴리나리우스 반박서
| - 정통 삼위일체론자의 대표적인 변증가로 알렉산더 주교의 비서일을 보면서 니케아회의에 참석하였다.
-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된 후 다섯 차례의 망명생활과 철저한 금욕생활을 하였다.
| 바질 | - 329년경
- -379년
| - 갑바도키아
| | -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여 아테네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금욕생활로 일관한 그는 갑바도키아지역 가이사랴의 감독이 된 후 아리안주의와 논쟁을 벌였으며 나병환자 진료소를 세웠다.
| 닛사의 그레고리 | - 330-394년경
| - 갑바도키아
| - 에우노미우스 반박서
- 아폴리나리우스 반박서
- 성자와 성령에 대하여
| - 바질의 동생으로 오리겐의 영향으로 은유론자가 되면서 결혼후에도 철저한 금욕생활을 추구하였다.
- 372년 권유에 못이겨 닛사의 감독이 되었고 아리안주의와 싸웠으며 삼위일체론 가운데 본체와 위격의 구분을 최초로 주장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회의에 참석하였다.
| 낫시안수스의 그레고리 | - 330-390년경
| - 갑바도키아
- 콘스탄티노플
| | - 낫시안수스감독의 아들로 바질과 함께 그리스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철저한 금욕주의자로 374년 낫시안수스의 감독이 된 후에 381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일도 보았으나 곧 사임하였으며 아리안주의에 반대한 당대의 웅변가요 시인이었다.
| 암브로시우스 | - 340년경
- -397년
| - 밀라노
| | - 고올(프랑스)지방 총독의 아들로 태어나 관료가 되려고 준비중에 북이탈리아의 집정관에 오른 그는 374년 밀라노의 감독직을 맡았으며 그후 금욕생활을 표방하였으며 아리안파와 논쟁을 벌였고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데살로니가인을 학살하자 여기에 맞서 싸웠으며 그의 설교는 어거스틴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 요한 크리소스톰 | - 374년경
- -407년
| - 안디옥
- 콘스탄티노플
| | - 그의 별명은 "달변가"로 고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설교가였으며 그의 설교는 윤리적인 실천에 큰 비중을 두었고 로마 관료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사학을 공부하였으며 수도생활을 자청하였다.
-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직에 올랐으나 여황제 에우독시아에 의해 추방되어 망명지에서 여생을 마쳤다.
| 제롬 | - 345년경
- -420년
| - 로마
- 안디옥
- 베들레헴
| - 라틴어성서(Vulgate)
- 저자목록 색인[다수의 주석서]
| -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나 수사학을 배웠고 수도원운동의 주창자로 대부분의 생애를 사막에서 운둔생활로 보냈으며 당대에 히브리어에 능통한 극소수의 사람으로서 로마의 감독 다마수스의 비서일을 담당하였다.
- 그의 영향으로 수많은 로마여성들이 금욕주의에 호응하였으며 그의 후반 생애의 35년간은 베들레헴에서 보냈고 그의 불후의 역작인 라틴어성서(Vulgate)는 가톨릭교회의 공식성서로 인정되었다.
|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르 | - 350년경
- -428년
| - 안디옥 몹수에스티아
| - 소예언서 주석
- 은유론자 반박서
- 원죄 옹호론자 반박서
| - 안디옥 신학파의 대부로 크리소스톰의 친구였던 그는 금욕생활을 청산하고 결혼하였고 392년 몹수에스티아의 감독이 된 후 성서해석을 위해 문법적, 역사적 자료의 활용을 주장하였다. 성서의 은유적 해석에 반대하였고 네스토리우스(경교)의 지도자가 된후 제2차 콘스탄티노플회의로 파문당했다.
| 어거스틴 | - 354-430
| - 북아프리카
| - 고백록
- 명상록
- 신(神)의 도성
- 신학개요
- 재고록
| - 그리스도인 어머니와 이교도인 아버지에게서 출생한 그는 카르타고에서 공부한 후 젊은 시절 마니교에 심취하였으나 386년 개종하여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에게 강화를 받았다.
- 395년 히포의 감독이 된 후 수도원생활을 동경하였다.
- 마니교, 도나투스파, 펠라기안주의자들을 배격했으며 기독교 역사철학에 초석을 마련하였고 그의 저서는 거의 중세 신학논쟁의 모든 부분에서 폭넓게 수용되었다.
| 씨릴 | - 376-444
| - 알렉산드리아
| | - 알렉산드리아 신학파의 거장으로 412년경 감독직에 추대되었고 그를 적대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표리부동하게 처신하였으며 크리소스톰, 데오도르, 네스토리우스를 배척하였고 마리아 숭배를 옹호하였다.
|
12. 초대교회(1~5세기) 감독제도의 발전 | 시기 | 출처 | 내용 설명 | 1세기 | - 신약성서
| - 모든 교회는 장로(감독)와 집사들은 사도들의 관리 아래 있었다.
| 2세기 초엽 | - 이그나티우스
| - 감독직과 장로직은 구분되었고 각 교구들은 감독, 장로, 집사들에 의해 처리되었다.
| 2세기 말엽 | - 이레니우스
- 터툴리안
| - 일정 지역의 교회들을 관할하는 지방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로 간주되었다.
| 3세기 중엽 | - 씨프리안
| - 목회직분과 제사직분이 구분되어 장로는 제사(속죄)하는 사제로 여겼으며 로마주교의 우위성이 공인되었다.
| 4세기 초엽 | - 니케아회의
| - 대주교는 그들 교구의 규모에 따라 관례상 지방주교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 4세기 말엽 | - 콘스탄티노플회의
| -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의 주교들을 총대주교(대감독)로 추대하였으며 로마대주교 궐위시 그 역할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그 권한을 대행케 되었다.
| 5세기 중엽 | - 레오 1세
- 칼케돈회의
| - 로마 대주교(교황)의 우위권 천명-레오 1세는 베드로 사도의 계승원칙을 내세워 모든 교회는 로마교황의 권위에 복종할 것을 역설하였다.
|
13. 로마대감독(대주교)이 교황이 된 요소 | 요소 | 결과 | 신약성서 마 16:17-19 | 예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모든 교회의 권한을 일임하셨다는 사실을 교황은 주장하고 있다. 이 내용은 레오1세에 의해 처음 채택되었다. | 사도 계승권 |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사도 베드로의 최고 권위가 로마주교들에게 계승되는 것으로 전하여지게 되었다. | 베드로와 바울의 순교 | 순교한 성자들을 존경하는 상황에서 로마는 두 사도의 순교지였다는 측면이 적극 고려되었고 또한 네로의 대박해시 로마교회는 굳건한 신앙을 유감없이 견지하였다. | 로마의 인구 | 도시와 교회의 규모가 주교의 권한과 관계가 있었다. | 제국의 수도 | 밀라노칙령 이후 대체로 황제들은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로마주교들의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 언어 | 로마주교가 주창한 서방세계의 라틴어는 신학논쟁시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였으며 반면에 라틴어에 미숙한 동방기독교는 불분명한 의미만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 장소 | 다섯 지역의 대주교 도시 가운데 서방에서는 로마시민이 해당되었고 로마의 주교는 다른 지역의 대주교보다 훨씬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가 있었다. | 선교사 파송 | 로마교황 그레고리1세는 로마에 대해 우호적인 이방 민족들에게 전도사업을 펼쳤으며 반면, 동방교황들은 페르시아 민족과 회교도들에 대한 선교활동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이민족의 침입 | 이민족의 침입 후 서구세계의 몰락과정에서 제국 내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한 대다수 세력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 이슬람의 정복 | 대주교 관구지역인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의 함락과 지속적인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이슬람군의 공격이 로마교황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
14. 고대교회의 주요 교리논쟁 | 논쟁점
| 이단파 지도자
| 정통파 지도자
| 회의
| 결정된 사항
| 삼위일체론 | - 아리우스
-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 - 아다나시우스
- 호시우스
- 대(大)바질
- 닛사의 그레고리
- 낫시안수스의 그레고리
- 힙포의 어거스틴
| - 니케아(325)
- 콘스탄티노플(381)
| -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체시며 성부, 성자, 성려은 영원성과 본체성과 동등성을 지닌다."
| 기독론 | - 아폴리나리우스
- 네스토리우스
- 유티케스
| - 알렉산드리아의 씨릴
- 데오도르
- 레오1세
| - 콘스탄티노플(381)
- 에베소(431)
- 에베소(로버회의)(449)
- 칼케돈(451)
| -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을 지닌 인격체로서 순수성, 불변성, 동일성을 지닌 분리할 수 없는 분이다."
- 마리아는 "성모(聖母)"이다.
| 도나티스트 운동 | - 도나투스
| - 케실리안
- 힙포의 어거스틴
| - 아를(314)
|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 펠라기안주의 | - 펠라기우스
- 코엘레스티우스
- 요한 카시안
- 아를의 케사리우스
| - 힙포의 어거스틴
- 제롬
| - 에베소(431)
- 오렌지(529)
| - 반(半)어거스틴주의 : 성만찬의 은총은 사람들의 원죄를 씻겨줄 수 있다.
|
15.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 이단 | 이단학설 | 대표적인 변증가 | 주장하는 내용의 논점 | 모나키안주의(양자설) | - 비잔티움의 데오도투스
- 사모사타의 바울
| - 예수는 수세(水洗)시 그리스도가 되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성부에 의해 양자가 되었다.
| 사벨리안주의 (양태론, 성부고난설) | - 시벨리우스
- 프락세우스
| -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가지 방편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 아리안주의 | - 아리우스
-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 유독시우소
- 유노미우소
| - 그리스도는 최초의 피조물이다.
| 반(半)아리안주의 (유세비안니즘) | - 앙키라의 바질
- 라오디게아의 그레고리
| - 그리스도는 성부와 본체시나 그에게 종속되어 있다.
| 마케도니안주의 (성령피조물설) | - 마케도니우스
| - 성령은 하나의 피조물이다.
|
16. 고대교회의 기독론 이단 | 이단학설 | 대표적인 변증가 | 주장하는 내용의 논점 | 아폴리나리안주의 | - 아폴리나리우스
| 그리스도는 인간정신을 지니지 않았으며 대신에 로고스(Logos)을 지니고 있다. | 네스토리안주의 | - 네스토리우스
| 로고스는 두 본질(God-Man)이 하나의 인격과 실체 안에 동시에 내주하신다기보다는 그 안에 분명한 두 존재 또는 인격이 계시며 그 두 인격은 본질적 연합이 아니라 단지 도덕적 연합에 불과하다. | 유티키안주의 | - 유티케스
| 그리스도의 인간본성은 로고스에 의해 흡수되었다. | 단성론 | - 세베루스
- 할리카르나수스의 줄리안
- 스데반 니오베스
| 그리스도는 하나의 본성을 지니셨다(인격을 지니지 않는 그리스도의 인간본성을 수용하기란 곤란하다.) | 단의론 | - 아라비아의 데오도르
- 세르기우스
- 알렉산드리아의 씨루스
| 그리스도는 인간의지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직 신의(神意)만을 지니고 계신다. |
17. 펠라기우스 논쟁 | 입장 | 대표적인 변증가 | 주장하는 내용의 논점 | 펠라기안주의 | - 펠라기우스
- 에클라눔의 줄리안
- 코엘레스티우스
| -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게 태어났으므로 그 자신이 구원에 필요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 어거스틴주의 | - 힘포의 어거스틴
| - 인간은 죄 가운데 죽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며 그 대상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다.
| 반(半) 펠라기안주의 | - 요한 카시안
| - 하나님의 구원은 은총과 인간의지의 협력작업이며 구원에 있어서도 인간은 그 주도권을 행사해야만 한다.
| 반(半) 어거스틴주의 | - 아를의 케사리우스
| - 하나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며 구원에 필요한 것을 인간이 선택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
18. 초대교회의 회의 | 장소 | 연도 | 황제 | 참가 대표자 | 주요 성과 | 니케아 | - 325
| - 콘스탄티누스
| - 아리우스
- 알렉산더
-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
-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 호시우스
- 아다나시우스
| - 성자는 성부와 homoousios(동일본체)임
- 아리우스파 정죄함
- 니케아신경의 원안을 공식적으로 채택함
| 콘스탄티노플 | - 381
| - 데오도시우스
| - 멜레티우스
- 낫시안수스의 그레고리
- 닛사의 그레고리
| - 니케아회의의 결정을 재확인함
- 니케아신경의 개정작업 완료함
- 삼위일체논쟁에 종지부를 찍음
- 성령의 신성(神性)을 재천명함
- 아폴리나리안주의를 정죄함
| 에베소 | - 431
| - 데오도시우스 2세
| - 씨릴
- 네스토리우스
| - 네스토리안주의를 이단으로 선언함
-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기독론을 수용함
- 펠라기우스를 단죄함
| 칼케돈 | - 451
| - 마르키아누스
| - 레오 1세
- 디오스쿠루스
- 유티케스
| - 글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불변성, 통일성, 동일성을 지니고 있음을 선언함
- 유티키안주의를 배격함
| 콘스탄티노플 | - 553
| - 유스티니아누스
| - 유티키우스
| - 단성론(單性論)의 3개 장에 반대칙령 발표함
- 칼케돈 회의의 씨릴의 해석을 재확인함
| 톤스탄티노플 | - 680-681
| - 콘스탄티누스 4세
| -
| - 단의론(單意論)을 배격함
- 교황 호노리우스(638년 사망)를 이단자로 배격함
| 니케아 | - 787
| - 콘스탄티누스 6세
| -
| |
19. 이민족의 개종 | 종족 | 개종 시기 | 대표적인 선교사와 지배자 | 고트 | 340년경 | 울필라(아리우스파) | 720년경 | 보니페이스(인프리트)(가톨릭) | 픽트 | 400년경 | 니니안 | 아일랜드 | 435년경 | 패트릭 | 프랑크 | 496년경 | 클로비스 | 스코틀랜드 | 563년경 | 콜룸바 | 앵글로색슨 | 600년경 | 켄터베리의 어거스틴, 에델베르 | 프리즐랜드 | 690년경 | 윌리브로르드 |
20. 교회와 국가 (754-1309년) | 시기 | 연도 | 주요 사건 | 지도자 | 주요 사실 | 샤를마뉴의 신성로마제국 | - 754
- -962
| - 754년 : 피핀의 교황령 기증
- 8세기 중엽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후대에 위조로 밝혀짐)
- 800년 : 샤를마뉴 대관식
- 9세기 중엽 : 위(僞)이시도르 문서(위조로 판명됨)
- 840년 : 샤를마뉴의 손자들에 의한 제국의 분할
| - 피핀
- (714년경-768년)
- 샤를마뉴(742-814)
- 니콜라스 1세
- (800년경-868년)
| - 교황려의 탄생은 교황이 세속의 통치자가 되게끔 만들었다.
- 샤를마뉴의 대관식은 교회와 국가간의 권력투쟁의 계기가 되엇다.
- 봉건적인 사회의 분권화현상이 나타났다.
- 제국의 말기 교황권은 로마 귀족들의 지배하에서 불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 오토대제의 신성로마제국 | - 962
- -1059
| - 962년 : 오토1세가 교황에 의해 황제로 즉위됨
- 1044-1046년 : 교황의 대분열
- 1054년 : 동방과 서방교회의 대분열
| - 오토 1세(912-973)
- 레오 9세(1002-1054)
| - 이 시기는 이탈리아 내정과 교황권에 대해 독일의 부단한 간섭이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
- 교황들은 대체로 미약하여 이탈리아와 독일 대군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 클뤼니수도원 개혁운동은 교회가 강한 지도력을 갖게 했다.
| 교황지배권의 확대 | - 1059
- -1216
| - 1059년 : 추기경단에 위임된 교황 선거 실시
- 1077년 : 헨리4세의 카놋사의 굴욕
- 1095년 : 십자군운동 시작
- 1122년 : 보름스협약
- 1215년 : 제4차 라테란회의
| - 힐데브란트(그레고리7세)(1021년경-1085년)
- 우르반 2세
- (1042-1099)
- 헨리 4세(1050-1106)
- 인노센트 3세
- (1161-1216)
| - 힐데브란트 식(式)의 개혁은 점차로 교황권의 확대를 가져왔다.
- 평신도 서임논쟁은 절정에 다다랐으며 파문과 금령(禁令)은 교황권의 적절한 조치로 사용되었다.
- 교황권은 절대적인 성속(成俗)의 권위를 주창한 인노센트 3세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 교황지배권의 쇠퇴 | - 1216
- -1239
| - 1291년 : 아크르의 함락, 십자군의 종말
- 1302년 : 교황칙서(하나의 거룩한 교회)
- 1309년 : 교황의 바빌론 유수(교황권을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천도함)(교황의 아비뇽 유수라고도 일컬음)
| - 보니파시우스 8세
- (1234년경-1303년)
- 필립 4세(1268-1314)
| - 교황들은 세속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으나 점차로 교황권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 교황권도 결국에 가서 그 지배권을 프랑스에 넘겨주고 말았다.
|
21. 중세 초기의 교회 지도자 | 이름 | 연도 | 사역지 | 대표 저서 | 주요 사실 | 보에티우스 | - 480년경-524년
| - 아테네
- 이탈리아
| | - 동고트 왕 데오드릭을 섬기고 있었으며 그의 철학은 인간이 신(神)에게 도달하도록 안내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고 있으며 결국 그는 반역죄로 고소되어 사형되었다.
| 대(大) 그레고리 | - 540-604
| - 로마
| - 대교육론(Magna Moralia)
- 대화론(Dialogues)
| - 귀족가문에서 출생,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후 최초로 로마교황이 된 그는 로마교황의 권위를 전(全) 서방교회에 천명하였으며 중세교회에 영향을 끼친 대중신학을 기초하였고 영국에 대한 선교의 열정을 지녔으며 로마를 롬바르드 족(族)으로부터 보호하였다.
| 이시도르 | - 560년경-636년
| - 세빌
| - 알레고리 성서론
- 유대인에 대한 보편 신앙론
- 품사론(어원학)
- 문장론(전3권)
| - 600년에 세빌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633년 톨레도회의의 의장이 되었고 중세에 의심스러운 위(僞) 이시도르 문서의 편집자가 되었다.
| 베데 | - 673년경-735년
| - 노덤브리아
| - 영국 교회사
- 린디스판의 성(聖) 쿠트베르트전기
| - 7세에 수도원생활을 시작하여 그의 출생지로부터 몇마일 밖으로 여행해본 적이 없었으며 그의 지식은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홀로 습득하였다.
| 다메섹의 요한 | - 675년경-749년
| - 다메섹
- 팔레스틴
| | -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이슬람 칼리프의 궁정에서 생활하였다.
- 성상숭배론자로서 수도원에 들어가 헌신하였으며 동방교회에 적합한 정통신학을 체계화시켰다.
| 알퀸 | - 735-804
| - 요오크
- 아헨
- 투우르
| | - 귀족가문의 태생으로 요오크의 성당학교에서 공부한 후 성당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사를마뉴 궁전의 가정교사로 초빙되었고 양자설을 배격하였으며 제롬의 라틴어성서(Vulgate)를 개정하였다.
|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 | - 785년경-865년
| - 소숀
- 삭소니
| | - 어린시절 고아로 성장한 후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화체설이론의 옹호자로서 경건왕 루이의 친구였고 고트샬크(Gottschalk)를 배격했다.
| 고트샬크 | - 805-868
| - 라임
| | - 부모에 의해 어린시절 수도원에 들어온 후 성인이 된 다음에는 수도원을 떠나기를 희망했으나 결국 그의 뜻이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
- 어거스틴의 예정설의 교리 옹호자로서 때로는 정죄시되거나 투옥되기도 하였다. 20년간의 옥고 끝에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고 그의 유해조차 기독교식으로 묻히지 못하였다.
| 요한 스코투스 에리게나 | - 810-877
| - 아일랜드
- 프랑스
| | - 아일랜드 태생으로 프랑스 샤를왕의 궁정에서 생활하였고 범신론적 경향을 지닌 자로서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
- 예정론과 성찬론의 논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
22. 1054년 동서교회 분열의 주요 사항 | 원인 | 동방 교회 | 서방 교회 | 정치적인 경쟁대상 | 비잔틴제국 | 신성로마제국 | 교황권의 주장 |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는 그 서열상 로마대주교 다음에 있었다. | 로마 대주교는 모든 교회의 최고권을 주장하였다. | 신학논쟁 발전 | 칼케돈회의 이후 정체되었다. | 끊임없는 논쟁의 전개 속에서 성장과 변화가 지속되었다. | 삼위일체 논쟁 | 성령은 성부로부터 기인한다고 선언하였다. |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인한다고 선언하였다. | 성상숭배 논쟁 | 120년 동안 예배시 사용된 성상(聖像)에 관한 논쟁을 전개하면서 마침내 그들은 조상(彫像)사용을 금지하였다. | 동방교회와의 부단한 논쟁 끝에 조상(彫像) 사용을 허용하였다. | 언어와 문화의 차이 | 그리스어(동방) | 라틴어(서방) | 성직자 독신문제 | 하급 성직자의 결혼은 허용되었다. | 모든 성직자는 독신생활을 하게 되었다. | 외부세력 | 회교도들의 압력과 동방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침입이 감행되었다. | 서방의 이민족은 기독교화하여 서구교회에 동화되었다. | 1054년 상호파문 결정 |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는 교황 레오 9세에 의해 파문당한 후 교황을 저주하였다. | 레오 9세는 콘스탄티노플의 미카엘 케룰라리우스 대주교를 하였다. |
23. 십자군 운동 | 십자군 | 연도 | 주요 제창자 | 대표적인 참가자 | 목표 | 결과 | 제 1차 | - 1096
- -1099
| - 우르반 2세
- 은자 피터
| - 위터 산사브와
- 은자 피터
- 고트샬크
- 투울루즈의 레이몽
- 갓프리
- 탄크레드
- 노르망디의 로베르트
| - 터어키 치하(治下)
- 예루살렘의 자유선포
| - 십자군들은 니케아, 안디옥, 에뎃사, 예루살렘을 차례로 탈환한 후 그곳에 봉건왕국을 세움
| 제 2차 | - 1147
- -1148
| - 클레르보의
- 베르나르
- 에우게네 3세
| - 콘라드 3세
- 루이 7세
| - 터어키로부터 에뎃사 탈환
| - 서방 십자군과 동방 수비대간의 불화는 결과적으로 많은 군사를 잃었고 다메섹 탈환도 실패하였다.
| 제 3차 | - 1189
- -1192
| - 알렉산더 3세
| - 프리드리히 1세
- 존엄왕 필립
- 리챠드 1세
| - 살라딘과 사라센 치하
- 예루살렘의 재탈환
| - 프리드리히는 익사하고 필립왕도 귀국하였으며 리차드는 아크르와 욥바를 탈환했으나 살라딘의 계략에 말려 포로가 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 제 4차 | - 1200
- -1204
| - 인노센트 2세
| - 샹파뉴의 티보
- 블루와의 루이
- 플란더즈의 볼드윈
- 시몬 드 몽포르
- 헨리 단돌로
| - 이집트를 침공함으로써 사라센 세력의 약화
| - 기독교권의 자라 도시가 베니스 상인의 농간으로 약탈을 당하였는데 이 당시 십자군은 읻르에게 교통수단을 확보하려고 하였을 뿐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교황에게 파문당하였고 그러자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시를 약탈하였다.
| 소년 십자군 | - 1212
| - 니콜라스
- 스데반
| -
| - 순전한 마음으로 성지회복을 위한 출전
| - 대다수의 어린이들이 익사하였고 그중 일부는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렸다.
| 제 5차 | - 1219
- -1221
| - 호노리우스 2세
| - 홀란드의 윌리암
- 브랜느의 존
| - 이집트를 공격함으로써 사라센 세력을 약화
| - 십자군은 이집트의 라미에타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곧 탈환당하고 말았다.
| 제 6차 | - 1229
| -
| - 프리드리히 2세
| - 예루살렘의 재탈환
| - 십자군은 술탄과 계약을 맺어 예루살렘의 지배권을 얻었으나 이 일로 프리드리히는 파문당하였다.
| 제 7차 | - 1248
| -
| - 루이 9세
| - 이집트 침공으로 성지 회복
| - 십자군은 이집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
24. 이슬람의 정복과 십자군 | 비교 영역 | 이슬람의 정복 | 십자군 | 연 도 | 633-732 | 1095-1291 | 착 수 | 마호메트의 죽음 | 클레르몽 회의 | 결 말 | 투우르 전투 | 아크르의 몰락 | 동 기 | 성전(聖戰) (지하드)을 통해 불신자들에게 그들의 참다운 신앙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 순례자를 보호하고 신의 영광과 이교도 터어키족으로부터 성지(聖地)를 탈환키 위함이다. | 동기 유발 | 전투에 직접 참가한 자에게 사망시 낙원을 보장했다. |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사면받아서 전투 중에 죽는 자는 바로 천국에 들어가며 그밖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죄의 짐과 세금감면의 혜택을 부여했다. | 타민족(他民族)에 대한 처우 | 이교도는 코란을 받거나 죽음을 택했으며 우대인과 기독교인은 그들의 종교를 지킬 수 있어서 일정한 세금을 내고 개종하지 않아도 되었다. | 정복된 회교도는 무차별하게도 처단당했으며 유대인 거주민들은 학살되었다. | 결 과 | 팔레스틴, 시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은 정복되었지만 그리스 문헌은 "암흑시대"속에서도 보존되었다. | 영속적인 영토를 확보할 수 없었고 고전 그리스와 로마문화는 회복되었으며 동방과 서방교회, 기독교인, 유대인 , 회교도인 간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
25.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神) 존재 증명논쟁 | 논쟁점 | 관찰 | 관련성 | 결론 | 운동의 원인 | 세계의 운동은 그 자체로는 시작할 수 없으나 운동 가운데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에 의해 움직여야만 한다. | 운동자의 무한한 연결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최초운동자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 없이는 어떠한 운동도 발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운동의 무한한 연결은 최초의 동인(動因)을 필요로 한다. | 움직일 수 없는 최초 운동의 제 1동인을 신(神)이라 부른다. | 인과율의 원인 | 분명한 사건들은 최초사건과 관련성을 지닌다. 곧 이것이 그들 자신의 원인이다. | 위와 같이 인과율의 연쇄고리는 무한정일 수 없다. | 영원한 제 1원인을 신(神)이라 부른다. | 가능성의 원인 | 반드시 사물들은 유한하며 그들의 존재는 필요에 의한 것보다 가능성에 있다. | 존재의 부차적인 연쇄고리는 유한하지만 필요에 의해 자존하는 존재로서 그들의 원천은 밝혀져야만 한다. | 이 자존하는 필연적 존재를 신(神)이라 부른다. | 불완전성의 원인 | 인간은 다른 것보다 완전의 정도를 적게 지닌 사물을 판단한다. | 상대적인 평가에서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기준을 요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진리에 있어 가장 위대한 것이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 이 절대기준인 신(神)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 설계자 원인 | 생명없는 사물은 정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작동한다. | 이 현상은 우연성을 배제하며 합리적인 설계자를 요청한다. | 이 합리적인 설계자를 우리가 신(神)이라고 부른다. |
26. 대표적인 스콜라 신학자 | 이름
| 연대
| 목회지
| 주요 저서
| 신앙과 이성에 대한 견해
| 우주의 본성에 대한 견해
| 주요 사실
| 안셀무스 | - 1033
- -1109
| - 이탈리아
- 프랑스
- 켄터베리
| | - "신앙은 지식에 선행(先行)한다."
| - 실재론자-보편은 개별적 물체에 앞서 실재한다.
| - 이탈리아 태생으로 프랑스 수도원에 입문하여 1093년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평신도 서임을 반대하였으며 신(神)존재논쟁에서 존재론적인 주장을 창안해내었으며 그리스도 속죄의 핵심적인 견해를 선언하였다.
| 피터 아벨라르 | - 1079
- -1142
| - 프랑스
| | - "이해될 때까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 - 보편실재론자-보편은 개별적물체 속에 있다.
| - 어린 시절부터 지도교사들과 논쟁하였으며 이후 파리 성당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엘로이즈와의 결혼생활로 아버지가 되었으나 엘로이즈의 삼촌에 의해 거세되었다.
- 수도원에 은거하였으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를 선동한 죄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 - 1090년경
- -1153년
| - 프랑스
| | - "하나님은 사랑이신 분으로 알려진다."
| - 신비론자
| - 귀족 계층 출신으로 시토수도원에 1113년 입문하여 이후 클레르보에 수도원을 세웠다. 제2차 십자군운동에 앞장섰으며 아벨라르의 격렬한 반대자로 찬송시도 많이 작사하였다.
| 피터 롬바르드 | - 1095년
- -1159년경
| - 이탈리아
- 파리
| | - 신앙의 갈등은 이성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
| - 보편실재론자
| - 북이탈리아 태생으로 아벨라르의 제자로 파리의 주교가 되었다. 그의 명제집은 중세 조직신학의 교과서가 되었으며 7성사를 강조하였다.
| 성(聖) 빅토르 위고 | - 1096년경
- 1142년
| - 삭소니
- 파리
| | - 신앙은 확실히 "경험보다 위이고 학문보다는 아래이다."
| - 신비론자
| - 삭소니 태생으로 파리의 성(聖) 빅토르 학교에 입학하여 후에 교장이 되었다.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 1200년경
- -1280년
| - 바바리아
- 파두아
- 파리
- 꼴로뉴
| | - "신학은 참된 의미에서의 학문이다."
| - 보편실재론자
| - 바바리아에서 태어나 도미니코수도회에 입문하였고 아퀴나스의 스승으로 레겐스부르크의 주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깊은 식견을 지녔고 마리아 숭배를 찬양하였다.
| 존 보나벤투라 | - 1217년경
- -1274년
| - 이탈리아
| - 그리스도의 빈곤
- 성프란시스의 생애
- 연설록(문집)
- 신(神)의 마음에 이르는 길
| - 참된 지식은 신(神)과의 명상에서만 얻을 수 있다.
| - 신비론자
| - 투스카니 태생으로 17세에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마리아 숭배의 예찬론자로서 주옥같은 찬송시를 지었다.
| 토마스 아퀴나스 | - 1225년경
- -1274년
| - 이탈리아
- 파리
- 꼴로뉴
| | - 자연이성은 인간을 "신앙의 문"으로 안내한다.
| - 보편실재론자
| - 아퀴노의 귀족가문 태생으로 5세에 몬테카시노수도원에 입문하였고 19세에 도미니코수도원에 다시 입문하였다.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파리, 꼴로뉴, 이탈리아 등지에서 설교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어거스틴의 저작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신학체계를 세웠다.
| 존 둔스 스코투스 | - 1266년경
- -1308년
| - 영국
- 파리
- 꼴로뉴
| | - 신(神)에 대한 지식은 이성으로가 아니라 교호의 권위에 근거해 수용해야만 한다."한가지 사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철학에서는 진리이지만 신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 - 보편실재론자
| - 영국 태생으로 프란시스코수도회에 입문하였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와 교수생활을 하였다.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아퀴나스의 적수가 되었다.
- 성모 마리아의 정결교리(무흠설)에 영향받았다. 후에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그는 저능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 윌리암 옥캄 | - 1280년경
- -1349년
| - 영국
- 파리
- 뮌헨
| | - "교리는 독특함이란 계시된 신학이 순수이성의 증거에 민감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 - 유명론자-보편은 사물이 있은 뒤에 실재한다.
| - 서레이 태생으로 프란시스코수도회에 입문하였고 둔스 스코투스에게 사사를 받았다. 파리대학 교수생활을 하였으나 그의 이론으로 인하여 파문당하게 되었다.
- 특히 교항무오설에 반대하였고 교회의 일반적 권위를 배격하였다.
|
27. 중세의 대표적인 수도회단체 | 분류 | 교단 | 설립자 | - 설립
- 연도
| 발생지 | 핵심 인물 | 주요 사실 | | - 베네딕트수도회
| - 누르시아의
- 베네딕트
| - 529
| - 이탈리아의
- 몬테카시노
| - 베데
- 보니페이스
| - 최초 수도원으로 베네딕트계율에 근거하여 설립되었다.
| 기 사
수 도 회 | - 성(聖)요한 기사수도회
- (병원기사단)
| - 레이먼드 드 페이
| - 1113
| - 예루살렘
| -
| - 순례자들의 보호처로 후대에 십자군의 싸움터가 되었다. 수도회 본부는 1530년 몰타섬으로 옮기었고(몰타기사단)1798년 나폴레옹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1834년에 재건되었다.
| - 성전기사수도회
| - 위고 드 페이앙
- 성(聖) 오메르
- 갓프리
| - 1119
| - 예루살렘
| -
| - 무력으로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호하여 부(富)와 권력을 얻었으나 1312년 폐쇄되었다.
| - 튜튼기사수도회
| - 독일 순례자들
| - 1190
| - 아크르
| -
| 성지(聖地)의 병원과 경비를 담당하였고 독일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1523년 와해되었으나 동 프리시아 지역에 진출하여 융커지주의 조상이 되었다. | 베 네 딕 트 파 | - 클뤼니수도회
| - 아퀴텐느의 윌리암
| - 910
| - 프랑스의
- 클뤼니
| - 그레고리 7세
- 우르반 2세
| - 베네딕트파 개혁의 결과로 발생하였으며 베네딕트계율을 충실히 이행하였다.(클뤼니 개혁)
| - 시토수도회
| - 로베르 몰렘
| - 1098
| - 프랑스의
- 시토
| - 에우게네 3세
- 베네딕트 12세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 - 베네딕트계율 추종, 트래피스트 수도회는 이 수도회의 일파였다. 1790년 와해되었다.
| 어 거 스 틴 파 | - 어거스틴수도회
| -
| -
| -
| - 토마스 아 켐피스
- 게르하르트 그루테
- 마르틴 루터
- 리미니의 그레고리
| - 성(聖)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신봉하였으며 이들중 몇몇은 탁발수도사가 되었다.
| - 프레몽트르수도회
| - 노르베르
| - 1119
| - 프랑스의
- 프레몽트르
| -
| - 성(聖)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준수하였다.
| 독 립 파 | - 카르투지오수도회
| - 브루노
| - 1082년경
| - 프랑스의
- 카르투지오
| - 린컨의 위고
| - 카르투지오 계율에 충실하여 매우 엄격하며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고행을 일삼았다.
| - 갈멜수도회
| - 비톨드
| - 1156
| - 갈멜산
| - 아빌라의 테레사
| - 미확인된 엘리야 선지자(구약성서 참조)의 업적을 추모하였으며 후대에 탁발 수도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 탁 발 수 도 회 | - 도미니코수도회
| - 도미닉 구즈만
| - 1216
| - 스페인
| - 토마스 아퀴나스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존 타울러
- 바르톨로메오 드 라 카사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 토마스 드 토르케마다
| -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전수하였고 교황에 힘입어 이단학설에 대항하였으며 종교재판소를 주관하였다.
| - 프란시스코수도회
| - 아씨시의 프란시스
| - 1223
| - 이탈리아
| - 보나벤투라
- 둔스 스코투스
- 윌리암 옥캄
- 로저 베이컨
- 리라의 니콜라스
| - 이들의 근본규칙과 가르침은 성서에 기인하였다. 절대적인 빈곤생활을 서약하였고 1525년 캐퓨친수도회를 설립, 운영하게 되었다.
| | - 예수회(제수이트파)
| - 이그나티우스
- 로욜라
| - 1540
| - 로마
| - 프란시스 싸비에르
- 로베르 드 노빌리
- 마테오 릿치
| - 이들의 규칙은 로욜라의 영성훈련에 기인하며 이들은 선교와 교육사업에 전력을 다하였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박멸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1773년 와해되었다가 1814년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28. 중세의 비국교도 및 이단 | 단체 | 가르침의 특징 | 주요 사실 | 바울파 | - 이원론과 가현설, 바울서신의 강조 및 영지주의자 말시온의 가르침과 유사하며 구약성서와 베드로서신을 거부함과 동시에 모든 외형적인 종교훈련을 배척하였고 극도의 금욕주의생활을 강조하였다.
| - 7세기에 발생하여 동방교회에 한정되어 만연되다가 동방교회의 박해를 받았으며 12세기에 쇠퇴하였다.
| 보고밀파 | - 이원론에 입각한 철저한 고행생활을 강조하였고 삼위일체논쟁에서 양태론(사벨리안)을 표방하였으며 성찬을 거절하였다.
| - 유키테스의 영향 아래 성장하여 동유럽의 현저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 카타리파 (파타리파,알비겐파) | - 이원론과 가현설의 주장 및 성찬의 거부를 내세우며 철저한 독신주의를 표방하며 마니교와 유사하였다. 그들만이 참된교회를 나타내며 참신자와 거짓신자를 구분하며 연옥, 면죄부를 거절함과 동시에 종종 금식을 통해 죽음을 맞이하였고 영혼재래설을 믿으며 평화를 애호하는 자들이었다.
| - 11세기 초에 발생하여 바울파와 보고밀파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고 추종자들은 유럽 도처에서 화형을 당하였으며 한때 남프랑스 지역에서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여러 차례 종교재판소와 십자군의 공격대상이 되어 점차 쇠퇴하였다.
| 왈도파 | - 간단한 공동체생활 및 각 지방어로 성서를 전하였고 특히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을 강조하였으며 평신도설교를 형요하였고 여성설교자를 인정하였으나 연옥을 부정하였다.
| - 피터 왈도(1215년경 사망)에 의해 남프랑스 지역에서 발생한 이들은 리용의 빈자(貧者)"라는 별명이 주어졌으며 교회의 동의없이 하였던 이들의 설교는 저주받았고 북이탈리아 및 오스트리아에서 박해를 당하였다. 1532년 종교개혁에 적극 나섰다.
| 롤라드파 | - 평신도 설교자의 양성과 화채설의 부정 및 영국민의 평화에 성서의 사용을 강조하였다. 순례여행, 고해성사, 성상숭배를 비난하였고 연옥 및 성직자 독신주의를 부정하였다.
| - 존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이 결성한 모임으로 다수가 순교하였지만 박해가 시작되자 많은 사람이 국교도로 개종하였다.
| 후스파 | - 교회보다 성서의 권위 강조와 평신도에게 성찬의 완전한 참여보장요구 및 화채설, 성인(聖人)숭배, 면죄부, 고해성사의 전면부정 그리고 각 지방어로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 - 존 후스의 추종자들이 결성한 모임으로 후에 보헤미아 형제단의 원형이 되었다. 이들을 섬멸하기 위한 다섯 차례의 종교전쟁이 있었으며 바젤회의에서 국교도와 타협점을 모색했다. 왈도파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오늘날 모라비안교도 형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
29. 교황권의 대분열(1378-1417) | 연도 | 로마 교황 | 아비뇽 교황 | 통합 교황 | -
1375
1378
1381
1384
1387
1390
1393
1396
1399
1402
1405
1408
1411
1414
1417
1420
1423
|
| - 그레고리 11세(1370-1378) : 1378년 사망 후 대분열의 싹이 트게 되었다.
|
| - 우르반 6세(1378-1389) :교황의 "바빌론 유수"의 막을 내렸으나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을 소외시킴으로 분열의 발판을 만들었다.
| - 클레멘트 7세(1378-1394) : 우르반 6세의 지지자들과 3년 동안 싸운 후 1318년 아비뇽으로 천도하였다.
| - 보니파시우스 9세(1389-1404)
| - 베네딕트 13세(1394-1417) : 1409년 피사회의에 의해 폐위되었으나 이 결정에 불복하여 1417년 콘스탄스회의에 제소했으나 역시 패배하였다.
-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갔으나 죽는 날까지 자신이 참된 교황이었음을 잊지 않았다.
| - 인노센트 7세(1404-1406)
| - 그레고리 12세(1406-1415) : 1409년 피사회의에 의해 폐위되었으나 이 결정에 불복하여 1415년 콘스탄스회의에 제소했으나 역시 패배하였다.
| - 알렉산더 5세(1409-1410) : 피사회의에 의해 임명되었다.
| - 요한 23세(1410-1415) : 1415년 콘스탄스회의에 의해 파문되었다.
|
| - 마르틴 5세(1417-1431) : 콘스탄스회의에 의해 임명됨으로 대분열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
|
30. 중세교회의 회의 | 회의 | 연도 | 관련 인물 | 결정 사항 | 제1차 리테란 | - 1123
| - 칼리스투스 2세
| - 보름스협약을 확정하였다.
- 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였다.
- 십자군 참전자에 대한 면죄부를 승인하였다.
| 제2차 리테란 | - 1139
| - 인노센트 2세
| - 반(反)교황주의자 아나클레투스 2세의 추종자를 정죄하였다.
- 대분열집단을 비난하였다.
- 제1차 라테란회의의 결정사항을 재확인하였다.
| 제3차 리테란 | - 1179
| - 알렉산더 3세
| - 카타리파를 비난하였다.
- 교황 선출시 추기경외의의 2/3찬성을 원칙으로 하였다.
| 제4차 리테란 | - 1215
| - 인노센트 3세
| - 종교재판소 설치와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선출의 승인 및 대헌장의 비난 그리고 화채설의 규정을 정하였다.
- 프란시스코 종단을 승인한 반면 카타리파와 왈도파를 비난하였다.
- 제5차 십자군 출정을 결의하였다.
| 제1차 리용 | - 1245
| - 인노센트 4세
| -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폐위하였다.
- 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에게 정복되었음을 애도하였다.
| 제2차 리용 | - 1274
| - 그레고리 10세
| - 삼위일체 조항 재확인 및 새로운 수도원 신설금지, 그리고 동방과 서방교회의 재통합을 추진하였다.
- 추기경단은 교황선거기간 동안 급료를 받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 비엔나 | - 1311-1312
| - 클레멘트 5세
| - 성전 기사단 폐지 및 새로운 십자군 창설에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 베긴수도회와 베가르트수도회를 비난하였다.
| 피사 | - 1409
| - 피터 달리
- 피터 필라르기
- 귀 드 마제즈
| - 교황권의 중재안 승인 및 로마의 그레고리 12세와 아비뇽의 베네딕트 13세의 파문 결정 및 알렉산더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 이 결정으로 세 명의 교황이 존재하여 교황권의 막대한 타격을 안겨 주었다.
| 콘스탄스 | - 1414-1418
| - 요한 23세
- 지기스문트
- 피터 달리
- 존 거슨
| - 세명의 대립교황을 파문하고 마르틴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여 대분열의 막을 내렸다.
- 존 후스의 사형이 결정되었고 회의의 권위는 교회에 대해 절대적이 되었고 교회 결정사항이 필요로 하는한 회의가 소집되는 선례를 남겼다.
| 바젤 | - 1431-1449
| - 마르틴 5세
- 에우게네 4세
- 줄리안 케사르니
- 쿠사의 니콜라스
| - 교황이 회의를 해산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회의의 권위는 더 한층 강화되었다.
- 교황은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고자 회의의 분열을 조장하였고
- 후스파와의 타협점을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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