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3월11일 설교 -- 사랑터치 요3:16

하나님아들 2018. 10. 8. 21:36

2012311

본 문 : 3:16

제 목 : 사랑터치

 

(동영상)

 

몇주 전 주일예배 후에 있는 제자 양육반에서 오늘 읽은 본문말씀을 공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만기 성도님이 어릴 때 교회 다니면서 오늘 본문으로 만든 노랫말을 부르곤 했다는데 이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벌써 40여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음에도 이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큼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그 때의 기억이 박만기 성도님을 다시금 주님 앞으로 나아오게 한 동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학교 아이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3:16 찬양을 옛날 기억을 되살려 한번 불러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 요한복음 316

 

3:16말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기 전부터 이미 사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한 공동체를 이루시어 서로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창조된 인간에게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다름 아닌 사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최초의 사람들 간에 있었던 사랑은 온전히 서로만을 위한 사랑이요, 사랑의 대상을 나누지 않았기에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원형이 에덴동산에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인하여 타락했을 때 그토록 사랑하던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그만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여야 함에도 죄가 사람에게 들어오자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대상이 나누어지고 말았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원형이 손상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이때로부터 인간의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망이 인생에게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지만, 죄는 이를 파괴하고 인간에게 죽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이제 인간에게는 소망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영원한 죽음, 영원한 형벌만이 앞길에 놓여 있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저와 여러분의 실존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부모는 때로는 자신이 부양하기가 버겁다고 자녀를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녀를 포기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너무도 뜨거운 그 사랑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그 사랑이 어떻게 준비되었고 이 땅에 나타난바 되었을까요?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여자의 후손이 누구입니까? 남녀간의 정상적인 관계에서가 아닌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사람을 가리킵니다.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것임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는 그 순간에 이미 구원할 계획을 준비하시는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창3:15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성취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위격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을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가장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것도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일까요? C.S. 루이스가 네 가지 사랑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약해지는 것이다. 무엇이든 사랑해 보라. 그러면 당신의 마음은 괴로워질 것이고, 아마 깨어지고 말 것이다사랑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가장 아끼는 것 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사랑에 빠지셨습니다. 그렇기에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우리 없이 살기보다는 죽기를 택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아기로 성육신하는 것으로 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 참으로 놀라운 사랑이 아닙니까? 그 누구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이 땅위에 고귀한 사랑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누구에게 베풀어졌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베풀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아무런 받을 가치조차 없던 우리에게 이 놀라운 사랑이 베풀어진 것입니다.

요일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기까지 했다는 이 말씀이야말로 복음 중의 핵심이요, 기독교의 핵심이요 전도의 핵심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스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예수 믿기 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볼 때 그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죄의 경중이란 것도 우리끼리 서로 비교하는 것이지, 사실 하나님 보실 때에는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럼에도 죄투성이인 저와 여러분에게 이 놀라운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기꺼이 내어주시는 아낌없는 사랑을 아무런 값없이 은혜로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에 21세의 젊은 나이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노예선 그레이하운드호의 선장이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노예무역으로 큰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레이하운드 호는 엄청난 파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잠을 깨어 보니 선실에 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펌프로 물을 퍼냈지만 더 이상 가망이 없었습니다. 절망 속에 있던 그는 그가 그토록 부정했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부정했던 그가 위기에 직면하여 더 이상 소망이 없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아무런 가치가 없었던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임했고 기적적으로 그를 비롯한 모든 선원들과 배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폭풍이 몰아치던 대서양에서의 그날 밤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주님을 영접한 그는 노예무역을 청산하고 영국으로 돌아가 복음전도자가 되었고 많은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시 중에 하나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새찬송가 305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찬양입니다. 1,2절만 함께 부르겠습니다. “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참으로 놀라운 이 은혜와 사랑이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임한 줄로 믿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참으로 구원받을 아무런 공로도 자격도 없는 우리들이지만, 우리 편에서는 아무런 대가도 치루지 않고 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 편에서 아무런 대가도 치루지 않고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값싼 은혜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가장 값 비싼 대가를 치루셨기에 가장 귀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큰 은혜를 받고 나면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면, 하나님의 이 크신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하나님께 직접 갚으라 명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 은혜를 갚는 길은 우리가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라 말씀하십니다.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사도는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는 참된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요일 4:19-2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과연 사랑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오래전 유행가중에 이런 노래가 있었지요.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이 노랫말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는 것이기에 사랑을 눈물의 씨앗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을 전할 때 사랑은 친절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사랑은 섬김이다라고 정의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어떠한 사랑을 하셨습니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친히 자기 목숨을 주시는 것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가리켜 주님은 섬김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는 사랑이 우리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섬김이라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섬김은 헬라어로 디오코네오로서 이에는 종이 되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섬기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의 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디아코네오의 명사형은 디오코노스로서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헬라어에서 종이란 단어는 두 가지로 쓰여집니다. 하나는 디오코노스로서 자발적으로 종이 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또 하나는 둘로스로서 이는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포로 등에 의해서 타의로 종이 된 사람을 가리킬 때 씁니다. 따라서 디오코노스는 억지로 시켜서 주인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21장에 보면 가난으로 인해 종이 된 사람도 6년을 일하면 무조건 종에서 놓아주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종이 주인을 사랑하여 자유를 포기하기를 원할 때에는 그대로 종으로 삼도록 법에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종이 바로 디오코노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섬기되 하나님이 시키시니까 억지로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억지로 어쩔 수 없이 섬기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섬기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로부터 자발적인 섬김의 사랑을 받은 우리도 또한 자발적으로 섬기는 사랑을 행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우리가 참된 사랑을 하지 못합니까? 내가 종이 되려고 하지 않고 주인이 되려 하기 때문입니다. 배우자를 섬기는 사랑을 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내 배우자에만은 왕 대접을 받으려고 하니 부부간에 참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섬기기보다는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어가려고 하는 왕 노릇을 하려다보니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섬기기보다는 내 뜻대로 상대방을 이끌려고 하는, 내가 상대방의 주인이 되고 상대방은 나의 종으로 삼으려는 것 때문에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되 자발적으로 섬기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중에 누가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의 종이 되기를 좋아하겠습니까? 다른 것은 다 해도 다른 사람의 종노릇만은 죽어도 못해,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왔노라고 말씀하시고 자발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섬김의 사랑이 없었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모두 구원의 영광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도 또한 다른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섬기는 사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여러분은 어떠한 사랑을 해 오셨습니까? 혹 상대방을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이끌려는 주인 행세를 하면서도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섬기는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예비신자들에게 자발적으로 섬김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사랑이 여러분의 섬김을 통해 흘러갈 때 이 사랑으로 인하여 예비신자들의 마음이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터치전도 그 네 번째 주간으로 사랑터치 주간입니다. 사랑으로 예비신자들을 섬기는 주간입니다. 전도는 무엇보다도 사랑으로 영혼을 섬기는 것이기에 가장 큰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터치의 출발점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이 품고 있는 예비신자들을 찾아가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사랑은 섬김입니다. 예비신자가 여러분의 가족이라면 가정에서 섬김으로 사랑을 실천해 보십시오. 가정에서 주인 노릇하려던 모습들을 다 내려놓고 자발적인 종이 되어 가족들을 섬겨 보십시오. 여러분의 섬김으로 인해 가족들의 마음의 문이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예비신자가 여러분의 친구나 이웃이라면 이제 그 분들을 찾아가 자발적인 섬김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상대방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했던 모습들을 다 내려놓으시고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며 낮은 자리에서 섬김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관심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러브터치의 출발은 예비신자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비신자들에게 사랑과 관심이 듬뿍 담긴 문자를 먼저 보내시기 바랍니다. 문자를 보내고 나서 통화를 하게 됩니다. 평소에 하던 안부차원이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통화를 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준비된 사랑의 선물을 들고 찾아가서 만나시기 바랍니다. 선물이 비록 작을지라도 그 선물에 담겨져 있는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과 섬김이 있기에 가장 값진 선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습니다. 겨울 내내 얼어붙었던 땅이 봄 햇살이 따사롭게 비추일 때 서서히 녹는 것처럼 예비신자들의 마음도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의 섬김을 통해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을 통해, 여러분의 자발적인 섬김의 사랑을 통해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온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큰 영광의 면류관이 어디 있겠습니까?

 

 

출처 : 성남생명나무교회
글쓴이 : 징검다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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