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일
본 문 : 롬13:11-14
제 목 : 잠에서 깨어나라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인 1992년 다미선교회 이장림의 시한부종말론으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한 적이 있었지만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큰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대로 1999년에 세계종말이 온다고 했지만 그 또한 아무런 일도 없이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지난해에는 잉카문명에서 예고한 지구종말이 2012년이라고 해서 세계적으로 종말에 대한 위기감이 많은 사람들을 두렵게 했지만 그 또한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저는 문득 양치기소년이라는 이솝우화가 떠올랐습니다. 양치기소년이 동네사람들에게 늑대가 나타났다고 몇 번씩이나 거짓말을 했는데 몇 번 속임을 당한 동네사람들이 정작 늑대가 나타났을 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아 결국 양들이 다 늑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구 종말에 대해 여기저기서 거짓으로 말하니 이제는 지구 종말에 대해 그다지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고 시대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이제는 종말에 대해 그다지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사단이 노리는 바입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종말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만들어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아주 고단수의 전략을 펼치고 있는데 여기에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넘어가고 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잠시 눈을 돌려 지구 종말에 대한 관심을 조금만 가져도 그에 대한 많은 징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가 ‘지구종말시계’라는 것입니다.(사진) 이 시계는 핵전쟁 발발 등으로 인한 지구 종말을 자정으로 가정한 예고시계로 1947년 핵물리학자들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간은 미국 시카고에 본부를 둔 미 핵과학교육재단이 발행하는 <원자과학자 회보>의 표지에 게재됩니다. 이 시계의 오전 0시를 핵에 의한 인류파멸의 날로 보고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다가오고 있는가를 장침의 움직임으로 나타냅니다. 시계의 시각은 원래 전 세계 핵무기 보유국들의 움직임과 핵실험, 핵무기 협상의 성공과 실패 등을 고려해 결정되어 왔는데, 2007년에는 새로운 위협요인으로 지구온난화가 포함되었습니다. 맨 처음 자정 7분 전에서 출발한 지구종말시계는 지금까지 17차례 수정되어서 최근에는 2012년 1월 11시 55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제 완전한 지구종말까지는 불과 5분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이 시계는 긴박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지구종말이 가까이 왔음을 보여주고 있는 징표가 있습니다. 지금은 작고한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생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꿀벌이 지구에서 사라지고 난 뒤, 4년 안에 지구는 멸망한다.” 꿀벌이 사라지면 자연 수정되는 농작물의 3-40%가 줄어들게 되고 농산물 가격의 급등을 불러 오게 됩니다. 식량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생기게 됩니다. 비단 그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다 알 수 없는 생태계가 파괴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수년 사이 지구촌에서 꿀벌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발견된, 꿀벌의 집단 폐사장애는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미국 내 꿀벌의 36%가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생태계의 급격한 파괴로 지구종말이 성큼 다가왔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렇게 시대적인 현상을 보노라면 우주적인 종말이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를 가리켜 오늘 성경 본문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여기서 잔다는 것은 영적인 잠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종말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얻게 되는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우주적인 종말이 오고 그때 비로소 완성될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우주적인 종말 곧 주님 재림하실 날이 성큼 다가왔으니 이를 깨닫고 그 날을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대부분은 임박한 종말론에 근거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비록 지금은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인해 말로 할 수 없는 핍박과 어려움을 겪어도 곧 주님께서 오실 것이기에 소망 가운데 참고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라나타’ 즉 ‘주여 오서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며 주님의 재림이 속히 임하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이 땅의 모든 고난이 끝이 나고 자신들을 핍박했던 유대의 지도자들과 로마제국의 지도자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사도가 종말이 임박했음을 경고한 이후로 무려 2천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우주는 종말을 맞지 않고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상당수의 사람들이 우주종말에 대해 무감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오늘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에도 우주적인 종말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벧후 3: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그들은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곧 다시 오실 것이라 믿었으나 점차 시간은 흘러감에도 주님이 재림하실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자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하물며 그때부터 2천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우주적인 종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일이 아닐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우주적인 종말이 과연 올까요? 온다면 언제 오게 될까요? 우리 시대에 올까요? 언제 그 때가 임하겠습니까? 사실 그 때와 시기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우주적 종말의 때는 주님 자신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행 1: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그러니 누군가가 종말의 때를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는 분명히 이단이고 잘못된 가르침이니 절대 미혹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그 때는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우주적인 종말이 올 것이고 그 때에 주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셔서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시고 온전히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비록 우주적 종말이 우리 때에는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인 종말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고 그 때는 오늘일수도 내일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상으로 한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진행자가 "호랑이와 사자가 싸우면 어느 쪽이 이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팀은 호랑이, 어떤 팀은 사자라고 대답했습니다. 사자라고 대답한 팀에게 “왜 사자가 이긴다고 생각합니까?” 물었더니 할머니 한분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사자가 이기지유. 호랑이든 사람이든 다 잡아 가는 건 저승사자이잖아유?"
사람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실존에 직면합니다. 이것은 예외가 없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많이 배운 사람도 많이 배우지 못한 자도 죽음을 맞이합니다. 병든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어린 아이도 어른도 죽음을 맞이합니다.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죽음은 순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즉각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에게 가장 평등한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이렇게 누구나 맞이하는 죽음 앞에 사람은 어떤 태도를 보일까요? 사회학자이며 신학자인 토니 캄폴로박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며 죽지 않는다. 돈을 조금 더 벌었어야 했는데, 조금 더 출세했어야 했는데 하며 죽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동안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죽는다. 그러면서 보통 세가지를 후회하는데 ‘좀 더 바르게 살 걸..’ ‘좀 더 사랑하며 살 걸...’ ‘좀 더 즐겁게 살 걸...’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미 죽음 앞에 놓여 있다면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시간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은 꼭 우주적 종말이 아니더라도 언제 맞이할지 모르는 개인적 종말을 항상 준비하며 살아가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언제 닥칠지 모르는 개인적 종말을 맞을 때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고 주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어둠의 일을 벗어야 합니다.
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가 입는 옷은 희한한 면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슨 옷을 입든지 입은 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예비군훈련을 받을 때를 보면 평소에는 넥타이를 매고 점잖게 행동하던 사람들이 예비군복만 입혀놓으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행동도 무질서해지고 수동적인 태도로 돌변합니다. (물론 제가 그랬다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도 정장 차림을 하면 행동거지가 조심이 되지만 가벼운 옷차림을 하게 되면 그만큼 행동에 자유함을 느껴 조심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옷을 입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바울사도도 옷의 중요성을 알기에 우리가 종말에 가져야 할 태도를 옷에 비유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벗어야 할 어둠의 일들은 무엇일까요?
13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여기서 벗어야 할 어두움의 일들을 방탕, 술취함, 음란, 호색, 다툼, 시기 여섯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방탕은 무질서입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자기의 이기심을 좇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푯대를 정하지 못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방향을 상실한 모습입니다.
②술취함은 이성이 마비되어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건 사고는 술취함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나라의 술 소비는 세계적입니다. 2010년 국민 1인당 술 소비량은 15세 이상 성인 인구 1인당 9.0리터로 OECD 회원국 평균 소비량 9.4리터보다는 다소 적습니다. 그러나 독주소비량은 OECD 국가 평균보다 무려 5.6배나 높다고 합니다. 가히 술공화국이라 할만 합니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는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음주에 대해 관대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습니다.
③음란입니다. 육체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부도덕한 행동을 말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적 타락이 점점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④호색입니다. 음란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⑤다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여유가 없다보니 걸핏하면 분을 내고 혈기를 부립니다. 심지어 사소한 다툼 끝에 살인까지도 저지르고 부모 형제에게까지도 흉기를 휘두르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있습니다.
⑥시기입니다. 남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내가 못살면 남들도 못살아야 한다는 못된 생각이 있습니다.
이 모든 어둠의 일들을 14절에서는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죄악의 뿌리가 하나님 없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에 종말의 때도 알지 못해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이러한 습관적인 어두움의 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 벗어야 합니까? 이런 죄악 가운데 있어서는 주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거룩함이 없이는 결코 주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아직도 벗지 못한 어두움의 일이 있습니까? 주님께 언제 나아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두움의 옷을 벗는 것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결단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자세로서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는 것을 소극적인 자세라 한다면 여기서 머물지 않고 적극적인 자세로 나아가야 함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떤 자세가 적극적인 것일까요?
12절 하반절 “빛의 갑옷을 입자” 14절 상반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빛의 갑옷을 입는 일 즉 예수 그리스로 옷 입는 일이 주님 오실 날을 예비하는 성도의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13절 상반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낮은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는 때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죄를 지을 때 은밀한 곳 어두운 곳을 찾아다니고는 합니다. 범죄가 주로 언제 발생합니까? 밤에 발생하지요. 낮에는 모든 일이 밝히 드러나기에 행동거지를 단정하게 하려고 합니다.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은 모든 행동거지를 단정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별히 에베소서 6장에는 성도들이 갖춰야 할 전신갑주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사진) 엡 6:13-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입어야 할 전신갑주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는 지난 에베소서 강해시간에 자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오늘 더 이상 상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있습니까? 빛의 갑옷을 입는 일이야말로 재림을 준비하는 성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셋째, 오늘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로 알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11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어느 현자에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소중한 사람입니까? 스승은 "내가 대하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가장 귀한 사람이다."라고 답했습니다. 제자가 이어서 그러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무엇입니까?질문하니 "네가 지금하고 있는 그 일이 가장 귀한 일이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 가장 소중한 때는 언제입니까?라고 질문하니 "네가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이 가장 소중한 것이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내가 서 있는 그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지금 여기서(Now and Here)" 만나는 사람, 하고 있는 일, 주어진 시간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은 결정됩니다. 미래는 바로 오늘 나의 삶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미래를 준비하는 현명한 자세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오늘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에 나의 개인적인 종말이 옵니다. 언제 주님의 우주적 종말이 다가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 때와 시기가 언제일까 노심초사하기 보다는 오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야말로 깨어 있는 것이며 언젠가 주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럽지 않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미래를 아름답게 꾸밀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잘못된 종말론의 특색이 무엇이냐 하면 현세의 삶을 포기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소중한 가족, 사랑하는 사람, 이웃을 포기하도록 강요합니다. 재산도 포기하게 하여 헌납하게 하고 직장생활도 포기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파에 헌신하도록 강요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종말론에 빠져 가정이 파괴되고 인생이 파멸로 가는지 모릅니다.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종말에 임하는 자세를 결코 현실의 삶을 포기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가 가까울수록 주어진 관계, 일,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종말을 준비하는 성도의 바른 자세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한 채 끈임없이 미래의 삶에 대해서만 꿈을 꾸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기에 그 가운데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이요 언제 맞이할지 모르는 개인적인 종말을 준비하는 바른 자세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어진 삶에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최용우라는 분의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시 한편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쩌면 오늘일지도”(Perhaps Today)
평생에 세 번 온다는 행운이 오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내게도 첫사랑은 시작되겠지 어쩌면 오늘일지도
훗날 후회하지 않으려면 무언가 시작해야 하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열매를 거두기 위해 나무를 심어야 하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보고 싶은 반가운 친구가 찾아오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맺힌 것을 풀어야 하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우리 주님 오시는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 어쩌면 오늘일지도
오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주님 앞에 서는 날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받는 모든 성도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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