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11월24일 설교 --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고후5:1-10

하나님아들 2018. 10. 8. 21:32

2013124

본 문 : 고후5:1-10

제 목 :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

 

이제는 고인이 된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이 저술한 책 중에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속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해피엔드라는 확실한 미래가 있습니다. 20세기 기독교 변증가인 C. S. 루이스는 역사를 보면 현세를 위해 가장 훌륭한 일을 한 기독교인들이 다음 세상에 대해 많이 생각한 사람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마 제국을 개종시킨 사도들, 중세의 암흑기를 밝힌 위대한 개혁자 등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기력해지는 이유는 천국에 대한 생각을 멈췄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바라보십시오.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가치가 있는 것들 중에 우리 평생에 완성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소망을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구원 자체를 의심할 정도로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해피엔드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소명은 직분보다 선행돼야 하고, 또한 지속돼야 합니다. 우리의 소명은 세상 끝날 때까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면 모든 소명도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순간에 우리의 소명은 절정기를 맞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힘든 일을 겪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크게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절망감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몇일 전 신문기사를 보니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국가 중 1위라고 합니다. 그것도 OECD국가 평균보다 무려 3배나 높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는 것일까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 소망을 찾던 사람들이 현실에서 빛을 발견하지 못하니 좌절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구가 860만이 되고 인구 5명당 1명꼴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이렇게 높은 자살률이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요?

어떤 분이 예전에 공자가 죽어야 교회가 산다라는 칼럼에서 우리나라 기독교는 유교 사상으로 교회에 외식과 체면 문화, 서열 문화가 들어와 예수교회인지 공자교회인지 모르겠다고 비평했습니다. 그러나 유교가 우리 기독교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것은 죽음의 문화입니다. 조상을 귀신으로 섬기는 토착화된 유교가 신앙화 되어 이로 인해 교회가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세 지향적인 유교 문화가 내세 지향적인 기독교의 본질을 얼마나 흐려 놓았는지 모릅니다. 내세를 말하면서도 내세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서 잘 살면 된다는 기복주의 기독교가 한국기독교를 오염시켜 이로 인해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교는 본래 죽은 뒤가 문제가 아니라 이 땅이 좋사오니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식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니 한번 사는 세상 여기에서 잘 살아 보자는 것이 유교의 사상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그릇된 사상이 기독교인들의 의식 속에서도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어서 이것이 뜻대로 안될 때 쉽게 낙심해버리고 심지어 신앙생활에서 떠나는 모습들을 종종 보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세상에 연연해 영원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면 참된 기쁨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만일 천국의 영광을 실제로 느낄 수 있어 영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위해 산다면, 우리 마음은 세상의 삶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온갖 핍박 가운데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믿음의 선배들도 일제치하와 공산당 치하에서도 굳건히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났을 때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내세가 있느냐고들 하지만 내세 곧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어떻게 이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천국이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서 일관되게 천국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 2000년 역사와 한국 기독교 130년의 역사에서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던 많은 순교자들과 신앙의 선배들의 삶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을 쓴 바울 사도의 삶도 천국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이 죽음을 느끼면서 살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는 항해 중에 여러 차례 파선의 경험을 하면서, 옥중에서,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씩이나 맞으면서, 여행 중에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을 겪으면서 숱한 죽음의 위협을 느꼈니다. 그럼에도 그가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일까요? 우리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심지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음을 아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 됩니다.

본문 1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이 구절에서 장막집은 우리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우리의 육체가 무너질 때 하늘에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집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 사도는 한편으로는 복음을 전하면서 한편으로는 천막을 짓는 일에 종사하였기에 천막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의 삶을 천막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막을 영구한 집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없겠지요? 천막은 그저 레저용이나 일시적으로 거주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지 그곳에서 영원토록 거주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전 필리핀에서 있었던 큰 태풍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천막 속에서 거주하고 있는 장면들을 TV를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어서 속히 천막 속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견고한 집에 들어가 생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바울사도는 이 땅에서의 삶을 천막속에 사는 것으로 비유하면서 우리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개역개정 성경에는 장막집이나 영원한 집이나 다 집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장작집을 tent,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을 빌딩(building)”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텐트와 빌딩 이 두 가지는 어감상으로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빌딩은 한번 세우면 수십년, 수백년도 가지만 텐트는 아무리 잘 쳤다고 해도 얼마 못가 낡아져서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의 육체가 이 텐트와 같아서 우리가 아무리 좋은 보약을 먹고 몸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고 열심히 운동을 할지라도 영원토록 보존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얼마 못가 무너질 터이니 막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건강하게 살 의무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곧 무너지고 말 이 장막집에 거주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면 무언가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대책을 세울 수 있을까요? 옛적 중국 진나라의 황제였던 진시황은 영원토록 늙지 않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세계 각처로 사람들을 보냈지만 결국은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신처럼 숭배를 강요했던 많은 이단종파의 교주들도 결국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대책을 세울 수 있을까요? 이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하늘나라의 집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는다고 하지 않고 안다는 표현을 쓴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확신을 표현할 때 믿습니다라고들 하지만 이보다 더 확신 있는 표현은 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부모를 향해서 저는 아빠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실히 믿어요어떻습니까? 아주 이상하지요? 오히려 확신이 없는 말같이 들리지 않습니까? 확신이 없어서 억지로 믿음을 가지려는 말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저는 아빠가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잘 알고 있어요이렇게 말한다면, 앞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강한 확신을 표현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1절에서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은 분명한 확신 속에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하자 그들이 근심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요142절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우리가 장차 거할 영원한 처소 즉 천국이 있음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살아가는 천국이 있습니다. 다시는 죽음도 고통도, 슬픔도 질병도, 유혹도, 죄도, 갈등도, 번민도, 가난도 없는 천국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천국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이제는 믿는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바울사도처럼 분명한 확신 속에서 천국이 있음을 분명히 안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확신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지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늘에 영원한 집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의당 천국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하게 사는 것일까요?

첫째는 천국을 사모하며 살게 됩니다.

2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C.S.루이스의 악마의 편지라는 책에 보면, 사단이 부하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설명하는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내세를 인정하게 하라. 그러나 그것을 믿고 사모하지는 못하게 하라내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과 그 내세를 믿고 사모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2:19-20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귀신들도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분명히 믿지만 믿는 것에 합당한 행위가 없기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내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에 합당한 준비가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세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곳에 들어가기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사모할 때 삶이 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이 땅에 가치를 붙들고 살아가게 되지만 내세가 있음을 알고 사모한다면 이 땅에서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하늘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가게 됩니다. 왜 우리가 이 땅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며 살아갑니까? 이 땅의 삶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덴마크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그룬두비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그는 덴마크의 비극적인 역사를 가슴 아파 하면서 병든 민족을 살리기 위해 행동하는 목사로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룬두비가 수석으로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고시를 치르는데 목사고시의 설교제목이 '덴마크 교회 지도자들이여 회개하라'였습니다. 시험관들은 건방지다는 이유로 그를 떨어뜨렸고 멀리 떨어진 섬으로 발령을 내렸습니다. 덴마크 교회는 국교회여서 목사들이 정부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발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교회를 개혁하고 나라를 구하겠다고 일어섰지만 목사고시에 낙방을 하고 조그마한 섬에 유배당하다시피하여 신경쇠약에 걸려 잠도 못 자고 나중엔 헛소리까지 해가며 폐인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룬두비는 완전히 절망하고 낙심하고 밑바닥에 떨어져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을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은혜가 임하자 그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통회 자복하며 눈물로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로 그를 뜨겁게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이 땅의 삶이 아니라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놀랍게도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신경쇠약, 불면증도 고치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룬두비가 성령의 감동, 하나님의 치료하심으로 뜨거워지고 담대해지자 그 때부터 그의 입에서 말씀이 쏟아지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덴마크 사랑을 외쳤습니다. 그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확실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던 청년들이 뜨거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뜨거워졌습니다. 지금도 덴마크에 가 보면 곳곳에 그룬두비 목사의 동상이 서있다고 합니다.

이 땅의 나라가 아닌 주님의 나라를 뜨겁게 사모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변합니다.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다 보면 소명도 생기고 이 땅을 변화시킬 힘도 생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거칠 것이 없이 힘있게 일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저 천국에서의 삶을 사모하고 계십니까?

 

둘째,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해 힘을 다합니다.

9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가 천국이 있으며 그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임을 아는 사람들은 주님 만날 날을 사모하며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까 생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힘쓰게 됩니다.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운동을 하든, 집을 짓던, 직장을 다니든 무엇을 하든 주를 기쁘게 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만 힘쓰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뭔가를 더 가지게 되면 그 때문에 교만해 지고 우쭐해합니다. 돈 조금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지식 조금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처럼 살아 갑니다. 권력 조금 있으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지배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다릅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으로 주를 기쁘게 할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그의 삶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심지어 배설물처럼 여기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또한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삶일까요?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온전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반면에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롬 8:8에서 말씀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이 땅에서의 삶만이 전부인줄 알며 오직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믿음과 하나님을 위해 살겠노라는 결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심판 날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합니다.

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쳤을 때 모두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9:27"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로 내려가는 최종 심판을 받는 자리이지만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행한 일을 가지고 상급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언젠가 결산의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 결산의 때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평가받아서는 안됩니다. 저의 기도제목 중 가장 우선되는 것이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아니 저만이 아니라 우리 생명나무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이러한 칭찬을 주님께로부터 받게 되기를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턱걸이 구원,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 열심히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 일에 열심을 다하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풍성한 열매를 드림으로 상급의 면류관을 받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분들은 천국에까지 가서 무슨 차별이 있느냐? 그렇다면 그곳이 어떻게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렇게 상급론에 대해 항변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마는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그 신앙의 깊이나 열정의 정도, 혹은 헌신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날의 평가도 분명히 다양할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삶의 여정을 모두 마치고 사랑하는 주님 앞에 서는 날,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되겠습니까? 주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앙인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면, 주님 앞에 서는 일이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날을 생각하며 주어진 삶과 사명에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어떻게 최선을 다 했노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감히 최선을 다했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은 했습니다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인생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언젠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어떤 자세로 서고 싶으십니까? 당당히 서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날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고 계십니까? 오늘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면 기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이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신다면 여러분 인생은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언제든지 주님 부르실 그날에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를 늘 소망하여 그에 합당한 준비에 최선을 다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출처 : 성남생명나무교회
글쓴이 : 징검다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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