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상의 안식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I. 오직성경/속죄/구원/하나님의 율법
재림교회의 27개 기본신조에 나타난 성경관, 속죄관, 구원관, 및 하나님의 율법관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오직성경
성경, 곧 신약과 구약은 신적 영감에 의해 주어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 대로 말하고 기록한 것이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인간에게 주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무오류의 계시이다. 성경은 품성의 표준이요 체험의 시금석이며, 교리들에 대한 권위 있는 계시자요, 역사 속에서 활약하시는 하나님의 행동들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다.
종교개혁이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신학의 기본 원리가 되어 왔다. 성경은 그리스도교 교리와 그리스도인 행위에 관한 최고의 권위(Authority)를 지녔고 그것들을 명쾌하고도(clarity), 충분히(sufficiency)설명하고 있으며 그 효력(Efficiency)을 발휘하고 있다.
안식일 문제 역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펴보아야 한다.(참고 John Eck Enchiridion of Commomplaces (Grand Rapids: Book House, 1979), 13쪽과 101쪽에서 Eck는 “오직 성경”을 주장하는 개혁자들을 향하여 안식일을 폐기하고 일요일로 바꾼 성서적 근거/권위가 없다고 논박한 바 있다)
2. 그리스도의 속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한 유일한 속죄의 수단을 마련하셨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이 속죄를 받아들이는 자는 영생을 얻을 수 있고,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무한하신 사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완전한 속죄는 하나님의 율법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성품의 자비로움을 옹호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우리의 죄를 정죄 하고 우리를 위한 용서를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대리적, 속상(贖償)적, 화해적 및 변형적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의 세력을 이긴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요, 속죄를 받아들인 이들이 결국 죄와 죽음을 정복하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 앞에 하늘과 땅에 있는 자들이다. 그것은 그분 앞에 하늘과 땅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권을 선언하는 것이다.
3. 구원의 경험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자비와 사랑 가운데서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를 삼으심으로 우리가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자각하고, 우리의 죄악성을 인정하고, 허물을 회개하며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 대속자와 모본으로 믿는 믿음을 행사하게 된다.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 믿음은 거룩한 말씀의 능력에서 나오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며 죄의 세력에서 구원을 얻는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거듭나고 성화 된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기록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룩한 생애를 살 능력을 받는다. 그의 안에 거함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고 현재와 심판 때에 구원에 대한 보증을 얻는다.
4.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율법의 위대한 원칙들은 십계명에 체현되고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예시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뜻 그리고 인간의 행위와 관계들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의 표현이며 각 시대의 모든 인류가 지킬 의무가 있다. 이 교훈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세우신 언약의 기초가 되며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 표준이 된다.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그것들은 죄를 지적하며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얻는 것이요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의 열매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다. 이와 같은 순종은 그리스도의 품성을 계발시켜 주며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의 증거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은 생애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전도를 힘있게 해준다.
II. 안식일의 의미
자애로우신 창조주께서는 엿새 동안의 창조 후 쉬셨으며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창조의 기념일로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율법의 넷째 계명은 이 제칠일 안식일 쉼과 예배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교훈과 실천에 조화되게 봉사하는 날로 준수할 것을 요구한다. 안식일은 하나님과 즐겁게 교제하며 인간 상호간에 교제하는 날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구속의 상장이며 우리의 성화의 표징이요 우리의 충성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왕국에서 누리게 될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백성 사이에 맺은 영원한 언약에 대한 영원한 표징이다. 이 거룩한 시간을 저녁부터 저녁까지, 즉 해 질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즐겁게 준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행위를 경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10계명 율법은 오늘날까지 신자/불신자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에게 기속력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와 특별 계시인 성경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십계명이 구속력을 지닌 이유는 인간의 최종 심판이 이 행위의 대 원칙 되는 십계명으로 심판 받기 때문이다.
롬 14:10 “우리가 다 심판대에 서게 된다”
전 11:9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 12:13,14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넷째 계명(출 20:8-11)은 매주 일곱째 날에 쉬고 특히 하나님과 교제를 하도록 명하고 있다. 13계명 중 오로지 넷째 계명에만 “기억하라”고 되어 있어 인간이 잊어버리기 쉬운 점을 각성시키고 있다.
1. 역사적 의미
a. 안식일은 인류 역사의 시작(첫 주일)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의 창조 사업을 마치시고 이 일곱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 2:1-3).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첫 주일에 결혼제도와 안식일 제도를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다.
b.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이유 - 하나님께서 피곤하여 쉬신 것이 아니었다.
(a) 사랑의 대상인 인간과 교제하고 기쁨을 나누기 위하여 쉬셨다. 이것은 완성에 대한 만족의 쉼도 된다(창 1:31).
(b) 위대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하시는 위대한 모본을 보이셨다(예수께서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의 모본이 되시고자 침례를 받으셨듯이)
(c)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인간에게 안식일이 신체적 휴식, 하나님 품안에서 영적 쉼을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 예견하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즉, 6일과는 별도로 따로 떼어 놓으셨다.
c. 안식일 제도는 시내산에서 성문법으로 공포되기 이전부터 존재하였고 하나님 백성은 이를 준수해야 했다(출 16:26-30 광야에서의 만나의 삼중 이적).
d. 예수께서는 지상 생애 동안 자기 규례대로 안식일을 지키셨다(눅 4:16).
더 나아가서는 AD70년 사건을 내다보시며 “그날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하라(마 24:20)”고 하셨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으로 안식일이 폐지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말씀이다. 보이신 것이다. 겨울은 신체적 곤난 때문에 안식일은 영적 곤난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당대에 인간이 만든 안식일 규정을 개혁하셨지 원래의 안식일 신성성과 의무성을 폐지한 것이 아니었다.
e. 안식일 준수 범위 - 안식일 제도는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위 구약 성경의 복음 선지지라고 불리는 이사야를 통하여 안식일이 모든 백성에게 주어졌다고 하며(사 56:67), 새 땅에서도 모든 육체가 안식일에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말씀하셨다(사 66:23). 넷째 계명 그 자체도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을 포함시키고 있다(출 20:10).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하심으로 유대인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시켰다(막 2:27).
2. 법적인 의미
안식일 계명은 영구 불변적 도덕률에 속한다. 혹자는 골 2:14을 근거로 “하나님의 법이 십자가에서 폐지된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이는 하나님의 법의 종류에 여러 종류가 있음을 간과한 소치이다. 본질의 의미는 뒤에 다룬다.
성경상 율법의 의미는 다의적이다. 따라서 문맥과 그 사상을 중심으로 합당한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일반적으로 법의 종류는 도덕률, 의문률, 국법, 건강법으로 분류된다. 이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 십계명(도덕률)
도덕률, 이는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류에게 주신 것이다. 바울은 죄형법주의적 논리를 펴고 있다(롬 7:7; 3:20; cf 5:13). 아담의 행위가 되자면 어떤 형태의 법이 있어야 한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롬 4:15). “죄는 불법이다(요3:4).” 따라서 법이 없으면 죄가 없다. 십계명은 계율화 된 사랑이다(codified love). 즉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칼빈과 웨슬리도 이와 유사하게 십계명 율법을 하나님의 본성의 사본이라고 한 바가 있다. 안식일은 바로 이 도덕률에 속한다.
b. 제사법
이는 시내산에서 주신 의식과 희생 제서 제도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표를 지목하고 죄인을 위한 그의 속죄를 표상 하는 그림자가 된다. 이 표상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원형으로) 성취된 범주내에서는 더 이상 기속력이 없는 종교법이다. 혹자는 안식일 제도를 이 의문률 범주에 넣으나 이는 바른 성경 이해가 아니다. 문제의 성구에 대해서는 뒤에서 검토하기로 한다.
c. 국가법
장소와 때를 따라서 가변성이 있지만 그 기본 원칙은 십계명과 궤를 같이 하는 규례와 법도들이다(출 21-30장 등). 시내산에서 준 이 규례와 법도는 신정정치를 위한 규범들의 역할을 했다. 모세법은 안식일 제도에 관하여 국법 규정을 두고 있다(안식일 범법자 사혛 제도). 이 국법 조문은 비신정정치하에 있는 오늘 이 시대에는 기속력이 없다.
d. 정결, 부정에 관한 건강법
하나님께서는 홍수 때까지지 육식을 허용하시지 않았다. 홍수 이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짐승과 시내산에서의 음식과 관련하여부정한 것의 구분은 재천명 하셨다(레 11장). 이 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도 존속하였음을 시몬 베드로가 환상 중에 부정한 음식을 먹지 못하겠다고 한 것(행 10:9-16,28)과 바울이 인간 몸을 성령의 전으로 보는 점(고전 3:16-18; 6: 19,20) 및 먹고 마시는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3. 상징적 의미
하나님께는 상징도 중요하다. 삼손의 경우를 보자. 삼손의 머리카락에 그렇게 큰 힘이 있었던가? 그 머리카락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표(taken)였다. 이 표가 방종으로 상실되었을 때 축복이 몰수된 것이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라졌다 하더라도 자기편에 잘못이 없었다면 그 힘은 그대로 보존되었을 것이다. 상장은 인간에게도 중요하다. 태극기는 천에 4패와 파랑과 빨강으로 된 원이 그려져 있는 것에 불과하나 국가의 상장(문장)으로 선택되었을 때 그 의미는 심대한 것이 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복된 소식이 말씀으로만 선포된 것이 아니고 상징들을 통하여도 나타나 있다. 할례, 성막, 침례, 성찬, 및 안식일 등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고속의 확증을 농축시켜 체험케 한 제도들이다. 안식일은 자유, 충성, 사랑을 상징한 국기와도 같다. 이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창 2:1-3), 구속의 상장(신 5:15),성화의 표징(출 31:13; 겔 20:20),충성의 표(겔 14:9,12),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쉼(히 4장)의 의미에서의 상징, 표가 된다.
4. 종말론적 의미
재림교회는 역사의 마지막 끝에 그리스도께 향한 충성이냐 아니면 적그리스도에게 향한 충성이냐에 대한 이슈가 제기될 것으로 보고 있다. 요한 계시록 14장에 나오는 세 천사의 기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지상 인간에게 향한 최후의 메시지가 된다. 첫째 천사의 기별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것이고, 둘째 천사의 기별은 영적 바벨론에서 떠나라는 것이며, 셋째 천사의 기별은 짐승이나 그 우상을 경배하지 말 것과 그 표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짐승의 표는 교회와 국가의 연합을, 짐승의 유상은 그 연합으로서 오늘의 신앙 양심의 강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때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시금석과 인(표)이라는 안식일 이슈가 그리스도와 사단간의 대쟁투의 계쟁점이 된다.
III. 신약성경의 안식일에 관한 근본적 시각들
1. 폐지론
구약성경과 신약 성경의 연속성을 배격한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유대인들을 위한 일시적 효력을 지닌 모세법은 폐지되었다. 이는 초기 교부들에게서부터 나타난 주장이다.
(1) 종교개혁 시대의 Augsburg Confession(1530), Luther, 급진적 재침례파 등에 나온다. 특히 Luther는 율법과 복음을 날카롭게 대립시키고 있다. 급진적 종교개혁자들 중 폐기론자들은 근대 율법 폐기론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2) 근래 Willy Rordorf는 안식일은 가나안 점령 후에 도입된 사회 제도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안식일 이적 사건들을 근거로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을 폐지시켰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일요일(주일)은 창조 기념일인 넷째 계명과 아무 연관성이 없는 성찬 예식을 통한 그리스도의 부활 축제로 보고 있다.
D. Carson이 편집한 From Sabbath to Lord's Day(1982)는 Rordorf의 입장과 유사하나 더욱 급진적인 성향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메시야이시기 때문에 안식일 법을 초월하셨다 하고 추종자들에게 안식일을 재해석하고 예배일을 새로 선택하도록 유도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일요일을 부활 사건과도 관련시키지 않았다. 첫째 날 안식일이 사도 시대 끝에 등장하였다고 보면서 그 이전에는 일요일 준수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인하였다.
2. 안식일 대체론(교체론)
구약 성경상의 안식일 제도가 신약 성경에서 일요일로 대체되었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AD321년 Constantine의 일요일 법 이후 발전되었다.
(1) Thomas Aquinas
넷째 계명에서 도덕적 면과 의식적 면을 구분하여 전자는 예배와 안식을 위하여 정례적 시간을 떼어놓는 원칙으로 구성되고 후자는 일곱째 날이라는 시간과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폐기된 것이다.
(2) Calvin
Aquinas의 입론에 입각하여 도덕적 요인은 일요일로 대체되었고 일곱째 날이란 시간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폐기되었다.
(3) Roger T. Beckwith와 W. Stott, Paul K. Jewett [This Is the Day(1918), The Lord's Day(1917)]
Beckwith와 Stott는 전통적인 도덕적-의식적 구획 방법을 무시하고 예수께서 안식일의 의미와 실행을 배격치 않고 수용하였으며 명료화시켰다고 주장하고 제 7일에서 제 1일로 변경된 것은 의식적인 것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축제와 관련시키므로 더욱 풍요하여졌다고 한다. 그래서 일요일은 안식일의 연속일 뿐만 아니라 풍요해졌다는 것이다. Jewett은 안식일이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된 구약 성경의 구속의 약속과 그의 재림 시 최후 종말적 안식일의 약속이 포괄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성경의 안식일에서 해방되어T고 첫째 날을 다가올 안식일의 희망을 상장하는 새 안식일로 준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 제 칠일 안식일 영속론
신약 성경에서 안식일 준수 원칙이 폐기나 대체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그 영속성을 교훈과 구속적 봉사를 통하여 그것을 명료화, 풍요화 시켰고 원 창조 정신의 회복을 위한 안식일 개혁을 하셨다.
역사적으로사도 시대 이후 계속 안식일을 지키는 무리가 있어 왔다. 전에 가톨릭 사제였던 O. Glait와 Andreas Fisher는 모라비아, 보헤미아 등지에 있는 재침례파 중에서 안식일 성수자들의 역사를 탐색해 냈다. 종교 개혁 시대 유럽의 여러 지역(폴란드, 네덜란드, 독일, 불란서, 헝가리, 터키, 핀란드 등)에 제 칠일 안식일 성수자들이 있었다. 특히 제 칠일 침례교도들은 17세기 영국의 대표적 안식일 성수 교회였다.
IV.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연속성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통일성의 원리에는 이 연속성의 개념도 들어 있다. 반면에, 구약 성경은 율법서에 불과하고 신약 성경은 복음서라고 보아 양자를 단절시키는 주장이 있다. 이 입장은, 예수는 새 모세, 교회는 새 이스라엘로 옛 모세와 옛 이스라엘을 분리시킨다. 그러나,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모두에 복음과 율법이 다 나와 있다.
1. 누가의 연속사상
(1) 믿는 유대인들
누가는 계속적으로 수많은 유대인들의 그리스도 교로의 개종 사건을 다루고 있다(행 2:41; 4:4; 5:14; 9:42; 12:24; 13:43; 14:1; 17:12; 21:22). 그들은 예수께서 대망의 메시야 라고 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여타의 유대교적 관행도 부담 없이 지속하였다. 이에 반하여 순수 이방인들이 개종하는 경우에는 과거의 종교와 결별해야 했다.
(2) 유대인의 율법 존중
개종한 수만 명의 유대인이 율법에 열심히 있는 자들이었다(행 21:20). 바울도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었다(행 24:14; 25:8; 28:17). 누가는 모세법(눅 2:22; 24: 44; 행 13:39; 28:23)을 “생명의 도”라고 까지 하였다(행 7:38)
(3) 불연속성의 인정 경우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율법이 성취되어 새 시대로 진입된 경우에는(눈 24:27, 44; 4:21) 불연속성이 인정되었다. 예컨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눅 16:16)였다. 그러나 이 불연속성은 전 율법의 폐지는 아니라고 한 점을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는 말씀으로 알 수 있다(눅 16:17).
(4) 예루살렘 총회(행 15장)
혹자는 이 총회에서 결의 된 것 외에는 안식일을 포함하여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한다(From Sabbath to Lord's Day에 실린 M. B. Turner의 글). 그러나 총회에서 논란이 된 대상이 이방인들이었고 그들은 유대인 신앙 교육을 받은 신도들이었다(행 10:; 11:19,20; 13:43,44; 15:1). 더구나 그들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자들이었다. Philo는 “안식일 준수 관행이 전파되지 않아 듣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터툴리안도 안식일과 같은 유대인 관행을 이교도들이 받아들인 것을 책망한 바가 있다.
(5) 모세를 전하는 자들
Tuner는 예루살렘 총회가 모세의 법에 호소한 것이 아니고 성령께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의장인 야고보는 자기 권위의 근거를 모세에게 호소한다(행 5:21). 사실상 총회 결의 사항 4가지는 모세의 책에 나온다(레 17-18장)
(6) 이방인은 율법에의 순종에서 면제받았는가?
Tuner는 행 15:10-11에서 “조상과 무리가 능히 베지 못하던 멍에”를 율법으로 보고 있으나 그것은 할례인 것을(햏 15:1,5,,9) 간과한 소치다.
(7) 집회 장소
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성전 회당에서 기도하고 전도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행 18:24-26). 스데반 순교 후에도 그리스도인들을 잡고자 바울은 다메섹 회당으로 갔다(행 9:2; 22:19). 바울 자신도 회당에 규례대로 갔다(행 17:2).
2. 마태의 연속사상
(1)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 - 메시야 예언 성취, 황금률(7:12), 계명준수 요구(19:16-19)등
(2) 율법의 성취(마 5:17-20)
3. 히브리서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1) 불연속성 - 7:11; 9:9;8:5 등
(2) 연속성 - 1:1-2; 3:2-6; 11-12장 등
V. 창조 질서로의 안식일
신약성경은 안식일을 모세에 그 기원을 두지 않고 창조주일 시의 제도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1. 마가복음 2:27
“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made, ginomal)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에서 “있는 것(ginomal)"은 제정의 의미를 ka고 있어 최초의 창조를 시사하고 있다(Genesis 창세기란 말도 ginomai에 어원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본 절은 안식일의 창조 시 기원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의 ”사람“이라는 말은 창세기 인간 창조 사건 및 안식일 제도를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혹자가 말하듯이 인간 복지가 안식일에 비하여 우위에 있다고 보는 것보다 안식일 준수로 인간 복지가 제한 받지 않고 오히려 보장받는다고 보아야 한다.
2. 요한복음 5:17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제까지(until now)"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개시와 그 절정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명을 위하여 첫 안식일부터 최후 안식일 바로 이 시간까지 일하심을 함축하고 있다(요 4:34; 6:29; 10:37,38; 14:11; 15:24; 9:3).그렇다면 “이제까지”는 에덴의 첫 안식일에서 구속 사업이 완성되는 최후 안식일까지 인간 구원을 위하여 일하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3. 히브리서 4:4
히 4:3은 세상 창조시의 안식(창 2:2,3)과 관련시켜 안식의 기원을 진술하고 있다. 동시에 시 95:11을 인용하면서 이 거룩한 안식의 범위에 하나님의 안식에 개인적으로 들어감으로 얻는 구원의 축복을 포함시키고 있다(4:3,5,10)
VI.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
1. 구약성경상의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
구약 성경에서 안식일은 각 개인에게 고된 일과 사회적 불공평에서 안식과 자유를 줄 뿐만 아니라 미래의 메시야적 평화/번영/구속을 향한 희망을 북돋아 주었다.
(1) 안식일 평화와 조화
창조 안식일시 아담과 동물간에 있었던 평화와 조화는 메시야 시대에 회복될 것이다. 그 때에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뛰놀고(사 11:6)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케 될 것이다(사 11:9). 마지막 때의 이 충만한 평화와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 관한 환상은 처음 있었던 날들의 견지에서 잘 파악 고취될 수 있다. 그 처음 날들은 안식일로 요약되어 있다.
(2) 안식일 번영
예언자들은 창조 안식일시의 물질적 번영과 풍요를 메시야 시대의 번영과 풍요의 원형으로 보았다(사 4:2); 7:22; 30:23-25; 암 9:13; 욜 4:19; 습 3:13; 렘 30:19; 31:24; 겔 34:13,14; 47:12). 훗날 이 사상은 6000년 후에 오는 천년기를 우주적 안식일로 보아 창조 주이일 6이레 오는 안식일 패턴을 따른 것으로 나타난다(Barnabas, AD 135)
(3) 안식일 기쁨
이사야는 안식일을 마지막 때와 연계시켰다(사 56:1-7; 58:13,14; 66:20-24). 그리고 그 때에 기쁨이 벅찰 것을 지적하였다(사 66:11). 에덴의 안식일의 즐거움과 기쁨은 메시야 시대의 패러다임이 된다.
(4) 안식일 빛
일곱 날의 빛(사 30:26)은 창조주일의 7일을 상기하고 있다. “여호와의 아는 한 날”에 “빛이 있으리로다(슥 14:7)”는 창조 주일이 일곱째 날임을 암시하고 있다.
(5) 안식일 쉼(안식 Menuhah)
Abraham Joshua Heschel은 안식을 행복과 정적(고요)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메시야 시대의 평화와 조화에 상응한 것이다. 이 안식일 쉼은 민족적 쉼의 열망을 예표 하였다(신 12:9; 25:19; 14:3등). 히 4:4,6,7에는 안식일 안식과 민족적 안식 사이의 연계가 나와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창조시 안식일의 안식을 약속된 가나인 땅 진입의 상징으로 보았다. 광야 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일에 실패하였으나(6절) 여호수아 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의 땅에 들어가(8절) 그 안식이 부분적으로 구현되었다. 종국적인 안식일의 쉼은 메시야 시대(재림시)에 이루어질 것이다.
(6) 안식일 해방
신 5:15에는 안식일과 출애굽 사건이 연계되어 나타나 있다. 즉,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킬 이유는 애굽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었다는 것에 있다. 이 자유, 해방을 유월절 의식으로 지켰다. 안식일은 이런 자유, 해방의 의미에서 작은 유월절이 되는 셈이다.
(7) 안식년과 구속(레 25:8)
안식년에 억압받던 종이 해방된 것은 메시야적 구원을 예표하고 있다(사 61:1-3, 7; 40:2_. 안식년을 면제년이라고도 불렀다(신 15:2). 이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모순과 질곡에서 구하여 주는 것으로 죄의 속박에서의 메시야의 미래적 면제와 해방을 예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신약성경에서의 안식일의 구속적 의미
(1) 누가복음에 나오는 안식일
a. 나사렛 회당에서의 설교(4:16-30)
누가는 예수께서 안식일을 습관적으로 지키셨다고 소개하고 있다(4:16). 예수께서는 나사렛 회당 예배에 참여하셔서 안식일에 사61:1-3(58:6 포함)을 읽으셨다. 이사야는 안식년 제도에 나오는 것들을 가지고 메시야가 백성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셨다(눅 4:21). 이는 약속과 성취의 시각인 것이다.
b. 초기 안식일 치유 이적들
예수께서는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이 메시야 되심을 선포하신 후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안식일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4:31-37),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다(4:38-39_. 이로 인하여 자유, 기쁨, 섬김이 수반되었다(4:39).
c. 18년간 꼬부라진 여인 치유(13:10-17)
예수께서 “놓였다(luein)"는 동사를 사용하셨다. 예수께서는 안식일 이적을 힐난하는 당대 지도자들이 안식일 정신을 왜곡시킨 것을 정면으로 반박하시고 본래의 안식일 목적을 회복하셨다.
d. 안식일 구속
18년 동안 사단의 굴레에 배인 아브라함의 딸을 푸는 것이 (자유롭게 하는 것)은 (13:16)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겠다는(4:18) 선포에 상응한 것이다. 안식일에 영적, 육체적 속박에서 해방시킨 것은 메시야적 안식일의 자유가 성취된 것이다. 그 결과 온 무리는 기뻐하고 그 여인은 하나님께 찬양, 영광을 돌렸으며 안식일을 왜곡시킨 자에게는 부끄러움이 되었다.
(2)마태복음에 나오는 안식일
a. 구주께서 주시는 안식(11:28-30)
침례 요한의 의심(11:1-6), 불신 세대와 여러 도시들로부터 배척받으심(11:7, 24), 제사장의 음모(12:14), 예수의 치유 사건으로 인해 바리새인들이 살해 모의(12: 22-37), 불신 세대에 대한 책망(1:38-45), 가족들의 오해(12:46-50)등의 광의의 문맥을 배경으로 마태는 예수께서 아버지를 아는 일에 있어 독특성을 지니신 것을 제시한 후(11:27) 이 메시야적 주장을 뒷받침 하고자 안식일로 예표된 메시야의 안식(쉼)을 선포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b. 구주의 쉼과 안식일
예수께서 주시는 쉼과 안식일은 안식일에 이삭 자르는 사건과 한편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사건에서(1:1-14) 신학적으로 그리고 문법적으로도 연계되어 나온다. 특히 “그 때에(12:1)”라는 표현을 문법적 연계성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c. 그리스도의 멍에를 멤으로 오는 쉼(11:29,30)
멍에는 하나님께 순복하여 충성하는, 특히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에 관한 메타포 표현이다(렘 5:5; 2:20; 행 15:10; 갈 5:1).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멍에는 새로운 형태의 원칙(새 토라)에 기속하는 것이 아닌 성취가 되시는 한 인격에의 헌신을 나타내고 있다. 멍에를 짓는 것은 “내게로 와서”“배우는 것”과 동의어 적이다. 요컨대 예수를 메시야로 모시는 일이다. 그 멍에는 쉽고 가볍다.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를 약화시킨다거나 폐기한다는 것에서 오는 쉽고 가벼움이 아니라 율법, 특히 안식일이 지적하고 있는 메시야적 구속의 쉼을 제자들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d. 구속 - 쉼
예수께서는 제사장은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다(12:5)고 하셨다. 그리고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12:6)”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제사장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활동하듯 메시야가 안식일에 하신 봉사의 타당성을 시사하고 있다. 제사장이 하나님께 향하여 하는 성전 제사와 봉사 활동에서 표상적으로 진행한 구속이 이제 인자 되신 메시야의 구원하시는 사명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제사장이 안식일에 성전에서 일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듯이 성전보다 더 큰 이를 섬기는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 것도 종교적 행사에 속하여 죄가 되지 않는 것이다. 자비보다 제사를 원하신다는(12:7; 호 6:6)말씀에서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자비에 감동된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자비를 베푼다. 이런 문맥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 된다고 하셨다(12:8). 예수께서는 성전 봉사와 안식일로 표상된 구속과 안식일 정신인 자비를 메시야적으로 성취하셨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메시야적 쉼(11:28,29)과 안식일에 대한 주되심(12:8)을 구속 성취라는 모티프를 가지고 신학적으로 연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 회복과 쉼
예수께서는 두 번째 안식일 이적을 통하여 안식일의 주인 되심을 메시야적 치유(회복)로 나타내셨다. 그리하여 참된 쉼은 회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안식일의 이 기능이 안식일의 축제가 된다.
(3) 요한복음에 나오는 안식일 :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이는 38년이나 고통 당한 자를 안식일에 고치시고 핍박받는 중에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안식일 제도를 부정하는 것인가?
전통적으로 부사절 “이제까지(until now)"가 창조, 구속, 보존 등 어떤 것이든지 간에 계속적 활동으로 해석되어 왔으나 동사 앞에 오는 강조 형태로 보아 절정(culmination)으로 보아야 한다(혹자는 ”even until now"로 번역함). 이 부사절은 시작(개시)과 끝(완성)이 있다. 시작은 창조시의 안식일(창 2:2,3), 끝은 밤이 오면 일할 수 없는 때이다(요 9:4).
동사 “일하시니”is working)"는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선교 즉, 구속적 활동을 두고 한 말씀이다(창조와 그 보존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의 개념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6:29; 10:37,38; 4:34; 14:11; 15:24).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일은 구속적 성질을 지닌 것이다. 소경을 고친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보내신 이의 일(9:3):이었다. 사실상 안식일은 창조 사업의 완성을 기념하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가 침입했기 때문에 구속적 사업에 종사하셔야 했다. 그리하여 안식일은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구속을 위한 날이 되었다.
(4) 히브리서에 나오는 안식일(4장)
복음서에 나오는 구속적 안삭일 사상은 히브리서에도 투여되어 있다. 4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일을 창조시까지 소급시킴으로 안식일의 보편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창조시의 제칠일의 하나님의 쉼을 종말론적 안식일의 안식과 연계시키고 있다. 창 2:2과 시 95:7,11을 연계시킴으로 창조 시 약속된 거룩한 쉼이 여호수아 시대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 이루어지지 않아 하나님께서는 “오랜 후에”다윗을 통하여 다시 안식을 주시고자 하셨다(히 4:7; 시 95:7 비교).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안식은 그 완전한 구현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다시 오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4:11). 히브리서는 성전 예식은 낡아지고(8:13), 폐하여지고(7:18)라고 하면서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Sabbatismos/Sabbath-Keeping)은 하나님 백성에게 남아 있다고 한다(4:9).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창조시 안식일의 경험이 그분 안에서 신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안식일 지키는 일은 문자적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쉬신 것처럼 자기 일을 쉬는 것(4:10)이 문자적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본서가 이미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글이고 그들의 현재적 경험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4:3). 여기서 쉼은 세속적 일이나 죄악적 행위를 중단하는 것을 넘어서 깊은 차원의 의미가 있다. 복음을 받은 고대 백성(4:6, 11)이 “순종치 않음(apeitheias, unbelief), 곧 “불신,” “신실치 못함”때문이었다. 들어간 자들은 믿음(pistel)으로 순종한 자들이다(4:2,3). 이런 점에 비추어 히브리서 4장에 나오는 안식일에 쉬는 일은 단지 의식적인 것 이상인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반응이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일이었다(4:10). 요컨대 히브리서 4장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신앙과 직관되어 있다.
VII. 신약성경상의 안식일 준수의 계속성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은 안식일을 준수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랍비들의 방식을 탈피한 형태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안식일 준수는 원래의 창조와 구속의 안식일의 특성에로의 복귀 지향준수였다. 그의 안식일 이적 사건은 이 지향성을 주의 깊게 드러낸 것이다.
1. 안식일 준수의 사실
(1)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눅 4:16)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의 규례였다. 규례는 헬라어 ethos로 종교적 습관을 나타내고 있다. 요 19:40에서 ethos는 눅 2:42의 “절기의 전례”는 모세의 제의법 전부를 지칭한다.(행 6:14; 15:1; 16:21; 21:1; 26:3; 28:17). 이런 점에 비추어 보아 눅 4:16의 ethos는 유대인의 제의법적 E끗을 지니고 있다(Kittel, TDNT 2:373)
(2) 예수 그리스도의 경고(마 24:20)
이 기사는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아직도 안식일이 준수되고 있음을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부활 사건으로부터 40년이 지나 다가오는 예루살렘 파멸(AD 70)사건을 예고하면서 그 때도 안식일이 준수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보여 주고 있는 기사이다.
(3) 여인들의 모본(눅 23:54-56)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의 시신을 예비일에 무덤에 둔 것을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이 확인하고 향을 준비하였으나 일을 멈추고 계명에 따라 안식일에 쉬었다. 물론 그들은 그 다음 주 첫날 일찍이 무덤에 갔다. 그들은 안식일을 범하지 않았다.
(4) 바울의 모본
스데반이 분교 당한 후 바울은 다메섹 회당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할 목적으로 갔다(행 9:2; 22:19). 이것은 회당 예배에 참석한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하여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울은 자기 규례(ethos)에 따라 안식일에 규칙적으로 회당에 갔고 (행 17:2), 유대인들과 함께 예배 드리기도 했으며(행 13:14; 18:4) 이방인들과 함께 예배드리기도 하였다(행 13:44; 16:13; 18:4).
(5)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저주 선언
그리스도인들이 회당 예배에 참석한 기간은 분명치 않다. 그들 중 입부는 1세기 말경까지 회당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유대교 측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회당 예배 참석을 금하는 조취를 취한 일이 있었다. 매일 드리는 기도 Shemon도 Esreh에는 그리스도인을 저주하는 부분이 들어 있었다. 이 저주는 그리스도인들이 회당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6) 나사렛파( The Nazarenes)
원시 팔레스타인 그리스도 교들 간에 안식일을 준수하는 관행이 있었다고 하는 증언이 있었다. Salamis의 감독인 Epiphanius(315-403 AD)는 나사렛파가 예루살렘 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가 AD 70년 직전에 Pella로 이주한 유대 그리스도 교 단체라고 허였다. Epiphanius는 이 나사렛파가 계속 유대법의 관행과 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두고 그들을 이단으로 몰아 붙였다. 그는 나사렛파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기본적 차이를 나사렛파가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점에 두었다. 예루살렘 그리스도교회에 뿌리를 둔 이들 나사렛파가 최소한 4세기까지 존속하였다는 것을 예루살렘교회가 일요일 준수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격이 된다.
2. 일요일(부활일) 준수 주장의 허구성
그리스도께서 주일 중 첫째 날에 부활하여 그 날을 그리스도인 예배의 날로 삼게 되었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과 신약성경 이후의 여러 자료에 의하면 이 견해가 사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매주 일요일 또는 첫째 날을 준수하라고 명령을 한 바가 없다.
성경에 이러한 기사가 나오고 있지 않다. 심지어 매년 부활을 기념하는 적기들도 나오지 않는다. 이 침묵은 의미 심장하다. 침례에 대한 명령(마 28:19,20), 주의 만찬에 관한 명령(막 14:24,25; 고전 11:23-26), 세족 의식에 관한 명령(요 13:14)등은 있으나 그토록 중요한 부활일 준수의 명령이 없다는 것에는 유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2) “부활일(Day of Resurrection)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
신약 성경은 일요일을 부활 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단지 “주일 중 첫째 난” 이라고 부를 뿐이다. 일요일 명칭이 부활 일로 처음 나온 때는 4세기 초 유세비우스의 글에서부터이다.
(3) 휴식과 예배일이라는 암시가 나와 있지 않다.
일요일 부활 일은 휴식보다는 오히려 일하는 날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a. 일요일은 완성보다 시작의 날이다.
그 이유는 이 일요일이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완성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금요일에 “다 이루었다(요 19:0)”고 하시고 계명에 따라 안식일에 안식하시고 일요일 첫째 날에는 창조 사역을 시작하였듯이 새로운 봉사 활동을 하셨다.
b. 휴식하라고 하기보다 일하라고 초청하신 날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일하라는 초청을 하시고 있다. 그 날 와서 나를 경배하라고 하지 않고 “가서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명하고 있다(마 28:10).” “너희는 가서...제자를 삼아... 침례를 주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 19,20).” 이런 말씀은 휴식이 아닌 일로의 초청을 암시하고 있다.
(4) 주의 만찬 : 고난과 파루시아
일요일 준수자들이 일요일 예배의 핵심으로 말하고 있는 주의 만찬은 그의 부활 기념보다도 그의 고난을 기념하고 재림을 대망하도록 고안되었고 그 만찬을 거행할 시간은 확실하게 나오지 않았다. 예컨대 바울은 자기의 전한 바를 주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고전 11:23). 그는 여기에서 부활을 기념한다는 어휘를 사용치 않고 그리스도의 고난 희생과 그의 오심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라(고전 11:26).”
(5) 유월절 : 고난의 기념이지 부활절 일요일로 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유월절을 부활 기념하는 Easter로 동일시하고 있으나 Nisan월 14일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므로 부활절이 될 수가 없다. 유월절을 2세기에 그리스도의 고통과 희생의 기념으로 지켰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증언은 4세기의 교부 문서들에 나온다[Callistus' Passover Homily 9C. 222) Hippolytus 9C. 2360. Clement of Alexandria]
3. 안식일 준수 방식(태도)
그리스도인들은 회당 예배에 참석하였지만(행 13:14; 43,44; 17:2; 18:4) 점차적으로 그들 고유의 예배 장소를 마련해 갔다. 마태는 이 분리의 과정이 복음서 저술시 이미 시작된 것을 암시하는 말로 “저희 회당”에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셨다고 했다(마2:9). 여기가 대명사 “저희(their)"는 마태복음 기록 시에 마태의 신앙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더 이상 유대교 회당에 참여하지 않은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들 자신의 예배 집회를 위한 장소를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대교와 그리스도 교 사이에는 이 장소적 차이점뿐만 아니라 신학적 차이점이 있었다. 복음서들 자체가 양 집단 간의 신학 논쟁의 양상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신학적 논쟁의 핵심은 안식일 준수 방법에 관련되어 있었다. 한편에서는 제사 중심, 외적 준수로 다른 한편에서는 자비 중심으로 지키는 시각의 차이가 일어났다(마 12:7).
(1) 선을 행하는 날
그리스도인들은 곤궁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므로 메시야적 구속을 축제하는 날로 안식일을 준수 옹호하였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본에 호소하였다. 예컨대 누가는 18년간 꼬부라진 여인을 고친 사건에서 회당장의 안식일 준수 개념과 그리스도의 안식일 준수 개념을 대비시키고 있다. 회당장에게 안식일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규칙에 순응해야 하는 것이었으나(눅 13:14) 그리스도께는 곤궁한 자를 신체적, 영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눈 13:12, 16). 예수께서는 인간을 동물 이하로 취급급하는 유대교의 잘못된 안식일 준수관을 폭파하고 진정한 안식일관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2) 구원하는 날
안식일을 인도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 교회의 태도가 공관복음서의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사건에 나와 있다(막 3:1-6; 마 12:9-14; 눅 6:6-11).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좋으냐(눅 6:9)”는 원칙적 질문을 하시고는 병자를 고치시므로 안식일 치유의 적법성을 지적하셨다. 마가와 누가는 7절의 “병 고치는 것(therapeuein)"을 9절의 질문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agathopoeiu)"과 “구하는 것(sozein)"으로 대체 사용하셨다. 이러한 용어 변환은 안식일 법의 의도가 어느 한 가지에 국한된 것 이라기 보다 자비로운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특성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함에 있었다.
(3) 자애로운 봉사 활동을 하는 날
“양 한 마리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져 있으면 구하여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더 귀하냐(마 12:11,12).”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에서 안식의 본래의 가치성이 타인에 관심과 동정이 있음을 드러내 보이셨다. 안식일에 그리스도의 흠이나 찾고 잡아죽이고자 하는 당대 유대교의 安息日觀에는 인간의 신체적, 영적 복지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문제성이 들어 있었다.
VIII. 바울과 율법
바울은 자기의 편지서에서 “율법(nomos)"라는 단어를 최소한 110회나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모세법(갈 4:21; 롬 7:22,25, 고전 9:9), 전 구약성경(고전 14:21; 롬 3:19,21), 이방인의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롬 2:14,15), 행위를 지배하는 원칙(롬 3:27 ”믿음의 법“), 성령의 지도(롬 8:2)등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을 지칭하기도 한다(롬 3”19). 여기에는 이 모든 용례를 나열, 분석하는데 있지 않고 바울이 구약 성경의 법 일반에 대한 시각이 무엇인가? 즉, 구약 성경의 율법을 전부 폐기된 것으로 보고 있느냐 여부를 밝히고자 한다.
1. 율법에 관한 이중적 개념
(1) 긴장관계
바울은 어떤 경우에는 법이 좋은 것으로, 또 그리스도안에서 굳게 세우는 것으로(롬 3:1), 다는 경우에는 나쁜 것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폐기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엡 2:15).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하고(롬 7:6) ac 절 다음에서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도다’(롬 7:12)고 한다. 율법이 “죽게 하는 의문(gramma)(고후 3:7)”이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oracle)(롬 3:2)”이 된다.
(2) 긴장관계 해결책
폐지되었다는 것(엡 2:15)과 굳게 한다는 것(롬 3:31), 불필요(롬 3:28)와 필요(고전 7:19;dpq 6:2,3; 딤전 1:8-10)론의 이 긴장관계를 해결하는 전통적 방식으로는 바울이 모세-의문률에 대하여는 부정적으로, 십계명-도덕률에 대하여는 긍정적으로 보았다고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해석보다 더 바람직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바울이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용례에서 구원(칭의) 문맥에서는 구원의 방법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소용없음을(롬 3:20), 그리스도인 행위(성화)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의 가치와 그 타당성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롬 7:12; 13:8-10; 고전 7:19). 소위 Laster Kataloge(Hellenistic Vice List)에서 인간의 사악한 행위를 열거할 때 바울은 율법을 선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딤전 1:8-20).
(3)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의 율법 이해에 있어서 핵심이 된다. 그는 이 십자가 관점에서 율법을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다. 율법은 칭의의 기초가 될 수 없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랄 2:21).” 그러나 율법이 거울 기능을 하는 경우 즉, 정죄 기능을 하는 경우(신학적 기능)와 율법이 나침반으로서 하나님의 윤리적 표준을 나타내는 경우(규범적, 교육적 기능, 제 3용법)에는 율법은 “신령하고, 선하고 거룩하고 의롭다(롬 7:12,14,16; 딤전 1:8). 또 바울은 성령의 역동적 권능을 통하여 이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한다(롬 8:4). 바울을 할례 받는 여부는 아무 것도 아니라도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라“고 하였다(고전 7:19). 그는 또한 다른 곳에서 할례 유무에 무관하고 ”사랑으로서 역사 하는 믿음(갈 5:6)“,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갈 6:16)“를 진술하고 있어 세 구절을 평행적으로 보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과 그리스도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자“와 동일선상에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율법과 이방인들
바울이 율법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인 것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에 나타난다. 당시는 이방인들의 개종 시에 어떤 계율을 준수할 것인가가 유대인들의 근본적인 문제로 등장하여 있었다. 바울 시대에 이에 관한 명쾌한 답이 없어 어떤 유대인들은 제한된 범주 내에서의 계명(Noachic Laws)을 준수해야 한다고 하며 Shammai파와 같은 유대인들은 할례를 포함하여 전 율법을 지켜야 완벽한 언약 공동체 일원이 되어 새 세계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언약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자기의 어떤 행위(율법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고 의롭게 된다는 사상이 발전되어 율법주의적 이방인들이 생기게 되었다. 바울도 회심 전 까지는 할례를 전하였음을 고백하였다(갈 5:11). 그러나, 바울은 회심 후 이방인들에게 복은 전도의 사명을 받고 나가 일할 때 그들에게 할례를 통한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않아도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바울은 이 주장을 롬 4장과 갈 3장에서 논증하면서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에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롬 4:9, 10), ”무할례 시에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 4:11)“고 하였다. 이 일로 바울은 유대교인과 유대인 그리스도교인 양측으로부터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계속하여 바울은 할례를 받아 언약 공동체 일원이 된 것으로 구원을 얻고자 한 것이 얼마나 무익한지를 드러냈다(갈 5:2-4).
VIIII. 바울과 안식일
1. 골로새 이단 문제
바울이 골로새서 2:16에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한 성경절이 안식일 폐지론의 성경절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골로새 이단의 한 측면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이단성을 천사 숭배와 “육체의 마음을 쫒아 헛되이 과장하고”(2:18)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났다. 그들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사용하였고 ”사람의 유전과 초등 학문“을 쫒았다(2:8). 그들은 참 ”지혜“(2:2, 23) 와 ”지식“(2:2,3; 3:10)을 얻게 하고 신성의 ”충만“에 참여하는 길을 보증하였다(2:9,10; 1:19). 신성의 충만을 위하여 우주적 ”정사와 권세“에 충성케 하고(2:10,15), 또한 ”세상의 초등학문“에 집착케 하고(2:8,20), 천사를 숭배케 하며(2:15,18) 의식적 금욕 생활을 실천토록 하였다(2:11-14,16,17,21,22). 이들 이단은 엄격한 금욕주의와 의식주의를 강요하였다. 어떤 종류의 음식을 맛보거나 만지는 것을 금하고 절기, 월삭, 안식일 의식을 지키게 하였다(2:16,21).
바울은 이 거짓 가르침의 허구를 논증하고자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다. 그분이야말로 죄용서와 구속을 주시는 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충만해지는 경험이 종교적 경험의 최고선이 된다(2:10참고)
2. 십자가에 쓴 의문에 쓴 증서(The Wirtten Document, Cheirographon tois dgmasin)
바울은 그리스도의 죄용서의 확실성과 충만성을 강조하고자 세 가지 메타포인 할례/침례/의문에 쓴 증서를 매거(?)하고 있다(2:11-14). 세 번째 메타포인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 하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1)의문에 쓴 증서의 정체
a.모세법설
모세법에는 여러 법령(ordinances)이 들어 있다. 물론 안식일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안식일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골로새서에는 율법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덕법, 의식법까지 다 폐지되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용서의 확증을 어떻게 보증받을 수 있을 것인지 문제가 된다. 법을 파괴시키므로 죄책이 도말된다는 논리는 비성서적이다.
b. 죄 기록 책설
증서 즉 손으로 쓴 것(Cherirographon)이란 말은 오직 골 2: 14에만 나오는 말이다. 이는 채무자가 자신의 채무를 인정하고 직접 날인한 “빚 문서”이다. 묵시문학에서 동 단어는 “죄 기록 책” 또는 “죄의 채무 증서”로 나와 있다. 그 근거로는 “제하여 버리고”(2:14)를 들고 있다. “의문”은 헬라어로 “도그마(dogmasin)인데 고시된 일반 법규 또는 유대인들이 스스로 만든 여러 가지 의식적인 법규를 가르친다.(엡 2:15차고). 그래서 이 메타포는 법적인 요구를 가지고 우리를 고소한 법적인 죄의 채무증서를 끌어내서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폐기하셨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용서의 완벽성을 확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우리 죄가 기록된 것을 도말하시고 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파멸시킨 것은 안식일이 포함된 법적 지반(율법)이 아니라 우리 죄에 대한 기록이다. 이 죄의 증거를 도말하시므로 정사와 권세들이 용서받은 자들을 더 이상 고소할 수가 없게 되었다.
(2) “안식일”(2:16)의 폐기여하
a. 그림자론
안식일을 그림자로 보아 폐기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이 입장에서는 안식일이 17절의 장래일의 그림자가 된다는 것이다. 루터는 바울이 여기 이 성경절에서 안식일 폐지를 지나간 그림자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로는 몸 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금욕생활 여부를 평가(폄론)하는 자는 바울이 아니고 의문(법규)를 강요한 거짓 교사들이었다.(:0). 이들은 몸을 괴롭게 하는 자들이었다(2:23).
b. 절기 안식일론
제 칠일 안식일에는 그림자적 요소는 없다. 그 자체가 실체다. 바울이 “율법”을 언급하고 있는 직전의 문맥과 광의의 문맹을 말하고 이는 점에서 여기 안식일은 그림자가 되는 연례적 절기 안식일들에 해당된다(레 23장). Adam Clarke, Jausset, Brown, Albert Barnes등이 이런 시각에서 주석하고 있다. 만일 바울이 제 칠일을 뜻하였다면 큰 혼란과 문제가 야기되어 사도행전 15장에서와 같은 총회 소집 사항(안건)이 됨직 하였을 것이다. 이 입장은 본문에 “안식일들”이라고 한 복수 표현에 착안하여 절기 안식일을 지칭한다고 한다.
c. 안식일 제물론
신약성경의 60회의 안식일 기사 중 59회가 제 칠일 안식일을 뜻하고 있다. 그런데, 골 2:16에서만 절기 안식일로 보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앞의 절에서는 문맥상 절기 안식일로 본다. 제 칠일 안식일에도 통용되고 있다. 당대 의식주의적 금욕주의 관행에 영향을 받은 극단적 안식일 준수파는 안식일에, 구약 성경시대에 드린 대로 제물을 드렸다(민 28:8,9). 바울은 이것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d. 週日(week-day)론
본문에 나오는 “안식일”은 복수형인 “안식일들(Sabbaton)"이다. 복수 형태 Sabbaton은 제칠일 안식일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한 주일을 통째로 지칭하기도 한다(LXX 시 23:1; 47:1; 93:1; 막 16:2; 눈 24:1; 행 20:&). 이 해석은 본문의 ”절기, 월삭, 안식일“구조인 연, 월, 주(週)에 라는 행사 형태로 나열된 순서에 부합되는 이해이다. 이러한 순서와 유사한 구조가 갈 4:10에도 역순으로 나오고 있다. 갈 4:10에서는 ”안식일들“대신 ”날들(hemeras)이란 복수 형태가 나오고 있어 “제 칠일 안식일”이기보다는 일반적 의미에서 한 주일(week-day)을 통째로 보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e. 안식일에 대한 미신적 준수론
골로새서에서 안식일은 제 칠일 안식일을 지칭하나 거짓 교사들이 옹호하는 왜곡된 안식일 준수로 본다. 이에 관한 명쾌한 근거가 골로새서에 나오고 있지 않으나 골로새서에서 나오는 이단의 특성에서 유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음식물에 관한 극단적 규정들이 있었던 것과 유사한 안식일 준수에 관한 극단적 규정이 있었다. “세상의 초등 학문”이 안식일 성수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세상의 초등 학문은 달력과 인간 삶을 관장하는 천체 권세(별들)를 섬기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더구나 이교 세계에서 토요일이 농업 신 토성과 관련된 불길한 날로 알려져 있어 천체 미신이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에 의하여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안식일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규정을 강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안식일 그 지체보다는 안식일을 왜곡시켜 준수케 하는 사상을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2:14의 규정(의문)은 거짓 교사들의 규정이지 레위기에 나오는 법규가 아니다. 외형적으로는 성경상의 제 칠일 안식일 행사이긴 하나 그들의 규정으로 인하여 그 행사의 내용은 혼합주의적 성격을 띄어 미신화 된 안식일 준수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3. “이 날보다 다른 날을 낫게 여기고(롬 14:5,6)”
이 구절이 안식일 준수를 반대하고 있는가? 유대인 안식일이 십자가에 못 박혀 폐지되었는가? 바울은 로마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의도로 본문을 말하고 있는가?
(1) 로마 교회의 구성
로마 교회가 언제 시작했는지에 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인 AD58년까지는 큰 교회가 존재했었다. 이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혼합되어 있었다.(1:13-16; :9,10,17; 11:13,31). 네로의 박해가 일어났을 때(c. 64년) 로마의 그리스도인은 큰 무리였다고 한다(1 Clem. 6.1).
(2)본문 배경
1-11장에서는 믿음의 의, 인간의 죄성,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를 다루고 있으며, 12-16장에서는 윤리적, 실천적 부분은 다루고 있다. 이 후반부의 성질로 보아 새로운 교리를 발전시킨다는 것은 기대할 수가 어렵다. 본문의 직접 문맥 배경(14:1-4)에는 음식물 문제(채소)등이 대두되어 있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고 믿음이 강한 자는 고기와 포도주(21절)등을 먹는다.
(3)금욕주의자의 정체
당시 금욕주의자들은 유대주의와 이교주의에도 있었다. 그러나 본문의 음식 문제는 fp 11장에 기록된 음식 법칙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레위기 음식 법칙은 육식 자체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고 육식과 채소를 구분하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본문을 모세법과 관련지어서 해석할 것은 아니다.
로마 교회에 영향을 끼친 금욕주의 사상은 Essenism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물론 로마에 에세네파의 조직이 있었다는 증거난 개연성은 없다. 그러나, 그곳의 유대인들이 에세네파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에세네파는 유대인이었으며 또 어떤 날들을 지켰기 때문이다.
(4) 다른 날보다 어떤 날들을 낫게 여김
바울은 육식 대 채식 문제논쟁을 취급하는 중에 다른 이슈를 끼어 넣고 있다. 그 이슈는 어느 한 날을 다른 날보다 낫게 여긴다는 문제였다. 이 날을 안식일에 대한 묘사로 보는 입장이 있으나 이는 본문이 어떤 날들(복수)로 말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무리한 해석이다. 바울이 계명을 자기 원하는 대로 지키든지 지키지 안든지 상관이 없다고 말 할 수 있을는지가 의문시된다. 그는 7:12에서 계명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한 바가 있는데 여기서 그것을 번복하는 모순을 범하였겠는가? 또한, 바울 자신은 안식일 준수자이었다.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날들은 절기의 안삭일로 어떤 사람들은 그것들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은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절기의 안식일에 금식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문맥이 다루는 금식 문제와 맞아떨어진다. 특히 에세네파 유대인들이 절기에 금식하는 일을 한 것이 로마 교회의 영향을 주어서 날들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본문과 안식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출처: http://ockam.kr/66?category=419908 [순례자의 여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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